차별 - 여성:집중이슈 모아서 인쇄 준비: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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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자에게 폭력 없는 일터를!

이미진

‘3 · 8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3월 3일 정오 서울 보신각에서 민주노총이 <여성노동자에게 폭력 없는 일터를!> 캠페인을 개최했다.

캠페인 참가자들은 KT의 ‘학대 해고’, 르노삼성, 중소기업중앙회, 농협 등에서 벌어진 직장 내 성희롱, 직장 내 성희롱을 알렸을 때 뒤따른 부당 해고와 왕따 등의 괴롭힘, 새누리당 의원의 여성 비하 발언 등의 사례를 알렸다. 지나가던 많은 직장인들이 캠페인에 동참했다. 캠페인 참가자들은 직장 내 성희롱 사례 전시를 보며 성희롱 퇴출의 의미로 ‘레드 카드’를 부착했다.

‘3 · 8 세계 여성의 날’은 투쟁하는 여성 노동자의 날이다. 1백7년 전 3월 8일, 미국 여성 노동자들은 ‘빵과 장미’, 즉 임금 인상과 노동조합 결성권, 투표권을 요구하며 시위와 파업을 벌였다. 이것은 전 세계 투쟁하는 이들에게 큰 영감을 줬고,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직하는 날로 기념되기 시작했다.

올해는 박근혜 정부의 여성 노동자 착취 강화 프로젝트에 맞서 3월 7일 오후 2시 서울 시청광장에서 여성과 남성 노동자들이 모두 모이는 ‘차별과 폭력 없는 좋은 일자리를 위한 3 · 8 전국 여성 노동자대회’가 열릴 예정이다.

ⓒ이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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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 민주노총

입력 2015-03-03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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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에 뿌리박은 여성차별

새디 로빈슨

오늘날에도 여성차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은 여성차별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고 일부 남성들은 항상 여성을 학대하기 마련이라는 비관적인 결론을 내놓는다.

또 다른 사람은 소수의 남성들이 성차별적인 생각을 버리게 하는 것만이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여길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성차별적 태도와 행동에 맞서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문제를 뿌리 뽑지 못한다. 성차별적인 태도는 우리가 차별에 기반한 체제에 살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태도와 차별은 우리가 이 체제를 없애지 않는 이상 계속될 것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반영한다. 이것은 여성차별의 가장 흉측한 단면이다.

하지만 차별은 단지 개인의 행동이나 태도의 문제만은 아니다. 억압은 사회 내부에 구조화돼 있고 삶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2009년도에는 국가 지도자를 선출하는 1백50개국 중 고작 7곳만이, 1백92개국의 정부 지도자 중에는 고작 11명이 여성이었다. 각국의 입법부에서 여성은 평균적으로 17퍼센트를 차지했다.

여성은 남성보다 더 낮은 지위, 더 낮은 임금의 노동을 하게 될 확률이 높다. 남성보다 더 많은 육아와 가사노동도 한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가난에 처하고 교육받기 어려울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이런 구조적 차별이 개인의 생각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칼 마르크스는 한 사회의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 즉 부를 소유한 사람들의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계급

지배계급은 현 체제를 유지하는 데 물질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현 체제에서 자행되는 여성차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것이 당연한 현상이라고 보통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투여한다.

예를 들어 정치인들은 이성애자들 사이의 결혼과 같은, 특정한 삶의 방식을 장려하려고 세금우대 정책을 이용한다. 정치인들은 미혼모와 같이 자신들의 “규범”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이 사회의 모든 병폐의 책임을 덮어씌우기 위한 발언들을 한다.

부유층은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말을 쏟아 붓는 언론을 소유한다. 냉장고, 맥주, 자동차 그리고 샴푸 광고는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다르고 그 역할을 받아들일 때 행복해진다는 내용을 내보낸다.

심지어 오늘날의 여성 잡지는 마치 외모와 연애가 여성들의 최대 관심사가 돼야 하는 것 마냥 얘기한다.

지배계급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가족관, 남성과 여성의 “정상적인” 역할관은 종종 현실과 맞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적어도 특정 대목은 무시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거대한 압력이 존재한다.

또한 남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여성차별로 이익을 얻고 있으며 자신들의 지위가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도록 부추긴다.

노동자 계급 남성이 이 체제에 일정한 지분을 갖고 있다고 여기길 지배계급은 바란다. 그와 동시에 계급사회는 사람들이 서로, 그리고 자신에게서도 소외당하도록 관계를 왜곡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세계를 만들지만 보통 그들은 이 세계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믿는다. 한편 성과 여성의 신체는 상품처럼 취급된다.

압도 다수의 남성은 여성을 강간하지 않고 여성에게 폭력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 사회의 구조와 지배적인 사상은 남성들이 여성들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게끔 한다.

마르크스와 그의 협력자인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이 사회가 구성돼 있는 방식이 의식을 결정하고, 사회가 변하면서 그에 따라 의식도 변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세계는 부를 소유한 지배계급과 그 부를 생산하는 노동자 계급으로 주되게 나뉘어 있다. 이 사회는 위계서열과 경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계급이 등장하기 이전의 사회는 상당히 다르게 구성됐다. 남성과 여성은 다른 역할을 지니고 있었으나 여성이 남성보다 더 낮게 평가받지는 않았다. 엥겔스는 이런 사회들에서 "모두 자유롭고 평등했고 여성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서술했다.

사례들

가장 최근의 연구 사례들은 엥겔스의 말을 뒷받침해 준다. 엥겔스는 여성의 지위가 바뀌는 데 있어 계급 사회가 등장한 것이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 관찰했다.

계급사회는 사람들이 당장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산했을 때 등장했다. 장차 지배계급이 되는 집단이 잉여생산물을 관리하게 됐다. 그들은 잉여생산물을 상속할 “적법한” 후계자를 원했다. 그래서 여성과 성적 관계에 대한 통제를 키워야 했다.

잉여생산물을 가능케 한 생산 기술은 남성의 노동을 여성의 노동보다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잉여생산물 덕분에 사람들은 한 장소에 더 오래 머물고, 더 많은 아이를 기를 수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 이와 같은 가족 구조는 여성을 남성의 소유물로 보는 이데올로기와 함께 생겨났다.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에도 남아있다.

물론 최초의 계급사회가 등장한 이래로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오늘날 여성의 삶은 봉건시대 여성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자본주의하에서 투쟁으로 여성의 참정권, 결혼과 낙태에 대한 권리 등을 얻어 냈다. 세상이 변하면서 태도도 변한 것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이 차별을 통해 사상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이익을 얻기 때문에 여전히 차별은 남아 있다. 성차별적 사고방식은 여성이 각종 일을 무급으로 하도록 강요한다.

여성은 그 자신이 밖에서 노동하면서도 당연히 미래의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아이들을 기르고 현재의 노동력을 보살펴야 하는 것처럼 요구받는다. 그리고 가정을 유지하는 것도 당연히 여성 책임인 것처럼 얘기된다.

정치인들은 복지를 삭감하고 아프거나 나이든 친척들을 돌보는 일을 여성에게 떠넘기며 무임승차한다.

지배계급은 또한 성차별적 사고방식을 권장하는 것이 노동자 계급을 분열시키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우지 못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알고 있다. 판사부터 정치인에 이르는 지배계급 사람들이 강간 피해 여성을 비난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사회가 진보적으로 변하는 것을 일체 막으려고 힘쓰며 일부 쟁점, 예를 들어 낙태 같은 경우, 지배계급 중 일부는 양보했던 것도 되돌리고 싶어한다.

지배계급은 여성들이 체제가 아닌 남성들에게 차별의 책임을 묻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구조적인] 여성차별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를 원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혁명적 변화나, 지금과 다른 사회는 가능하지 않다고 우리가 믿길 바란다. 그러나 진실은 노동자 계급 남성과 여성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혁명만이 여성차별을 끝장낼 유일한 희망이다.

노동자 계급은 지배계급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만한 경제적인 힘과 규모를 가지고 있다.

단결은 노동자 계급을 강하게 만든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여성차별에 맞서는 동시에 노동자 계급의 일부분을 다른 부분의 적으로 돌리는 것에 저항해야 하는 것이다.

파업

우리는 노동자들의 파업과 그리고 대규모의 집회에서 하나된 노동자 계급의 잠재력을 본다.

지배계급의 여성들도 여성차별의 영향을 받지만 억압에 맞서서 싸우는 데에 있어서 그들에게 의지할 수 없다. 그들은 차별이 뒷받침해 주는 체제에서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떠한 노동자들도 자본주의에서 이익을 얻지 않는다. 이 체제는 그들을 억압할 따름이다. 노동계급의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데 공통의 관심사가 있다.

혁명은 여성의 지위를 변화시킨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성은 온전히 자신의 요구만으로 낙태를 할 권리를 얻었다. 거의 1세기가 지난 지금, 그런 권리를 보장하는 곳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낙태를 허용한다고 알려진 유럽의 많은 나라들도 임신 12주 이후에는 이런저런 제약(엄격히 적용하는 정도는 나라마다 다르다)을 두고 있다.]

마르크스는 계급 사회에 존재하는 미신과 분열을 초래하는 사상을 “낡은 사회의 오물”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혁명으로 이런 것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혁명은 성공적으로 새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과정으로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보듯이 지배계급은 구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쓰라린 반혁명을 시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혁명이 차별의 물질적 토대를 없애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혁명의 과정에서 사람들 자신이 바뀐다.

성 “역할”에 대한 사고방식은 그런 생각이 생겨난 체제가 무너질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 모든 혁명 운동에서 여성은 선두에 나서 투쟁을 이끈다.

마르크스는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이 노동자 계급이 “낡은 사회의 오물을 떨쳐 버리고 새 사회를 건설하는데 적합하도록 자신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단순히 몇 명을 성차별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보다 더 높은 목표를 잡아야 한다. 바로, 쟁취해야 할 세계가 있는 것이다.

추천 소책자

국제 여성의 날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지음

24쪽 | 500원

추천 소책자

여성차별과 자본주의

주디스 오어 지음 | 이나라 옮김

91쪽 3,000원

입력 2015-03-06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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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여성주의의 등장과 마르크스주의

조셉 추나라

여성 차별에 맞선 투쟁과 여성주의가 전 세계에서 크게 부흥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부흥은 반자본주의 운동이 떠오르면서 시작됐는데, 특히 최근 몇 년 새 더 강력해진 듯합니다. 인도에서 여성들이 강간당한 것에 사람들이 크게 분노해 대규모 운동을 벌인 것이 한 사례입니다. 성추행에 반대해 북미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퍼져 나간 ‘헤픈 여자 옷차림으로 걷기’(SlutWalk) 운동도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지배계급 인사들이 저지르는 성추행과 성폭행이 크게 문제가 됐습니다.

게다가 특히 대학 캠퍼스에서는 ‘야한 문화’(raunch culture)에 대한 반발이 크게 일고 있습니다. ‘야한 문화’는 여성에 대한 성적 비하가 다시 정상 취급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폴댄스(봉춤)를 추는 동아리가 보통의 동아리인 것처럼 여겨지며 대학교에 생겨나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런 현상에 저항하는 운동을 반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운동의 불리한 점도 알아야 합니다. 첫째, 이 운동은 노동계급 투쟁 수위가 높지 않은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둘째, 이 운동은 대학 캠퍼스에 집중돼 있으면서 주류 정치 담론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주의에 반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혐의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항상 여성주의자들과 함께 싸웠습니다.

물론 우리는 여성주의자들과 함께 투쟁하면서도 그들의 사상과 경합을 벌입니다. 이 점에서 린지 저먼과 크리스 하먼 등이 발전시킨 가부장제 이론 비판은 매우 소중한 자산입니다. 우리는 여성 차별이 계급 사회와 밀접히 관련돼 있고, 여성 차별을 근절시키려면 노동계급 혁명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여성 차별의 징후들에도 맞서 싸워야 한다고 항상 주장했습니다. 일부 여성주의자들이 우리를 적대한다고 해서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여성 차별의 징후에 대항하는 것으로부터 위축되면 안 됩니다.

현재 떠오르고 있는 새로운 여성주의는 1960~70년대에 유행한 제2물결 여성주의와 몇 가지 면에서 다릅니다.

제2물결 여성주의는 운동이 가라앉으면서 두세 진영으로 분열했습니다. 첫째, 철저한 여성주의입니다. 철저한 여성주의는 남성 개인의 가부장적 태도에 초점을 맞추며 분리주의적 태도를 강조합니다. 둘째, 자유주의적 여성주의입니다. 이 진영은 분리주의는 거부했지만 영국에서는 노동당으로 유입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셋째, 사회주의적 여성주의입니다. 영국의 사회주의적 여성주의는 운동이 가라앉으면서 점점 수세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새로운 여성주의도 이렇게 분열하고 말 것이라고 예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포르노나 성노동 같은 오래된 쟁점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질 때 제2물결 여성주의 때와 상당히 비슷한 구도로 입장이 갈립니다.

여성주의의 부흥 반자본주의 운동의 성장과 함께 여성주의도 크게 성장했다. 2013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헤픈 여자 옷차림으로 걷기’(SlutWalk) 운동 ⓒ사진 출처 Marianne Fenon (플리커)

다원주의적

새로운 여성주의의 둘째 특징은 스스로 포괄적이고 다원주의적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인종차별, 섹슈얼리티, 장애 같은 쟁점에 개방적이고 민감합니다.

새로운 여성주의의 셋째 특징은 급진적 버전의 포스트구조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 학계에서 새로운 여성주의는 퀴어 이론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발전했습니다. 미셸 푸코가 최초로 발전시킨 퀴어 이론은 ‘섹슈얼리티는 역사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핵심으로 합니다.

‘상호교차성’ 개념도 새로운 여성주의 운동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이론이 강조하는 바는 각각의 피차별 사회집단은 서로 다른 차별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흑인 여성은 백인 여성과 다른 차별을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이론은 상당히 허약합니다. 경험 차원에만 머물면서 차별의 양상을 묘사할 뿐 깊이 파고들어 차별이 왜 일어나는지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런 이론을 이해하고 그중 몇몇 쟁점에서는 논쟁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성주의의 부흥과 관련해 중요한 또 다른 사실은 마르크스주의적 여성주의의 재등장입니다.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리즈 보겔의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차별》이 재출판된 것입니다. 이 책이 처음 출판된 30년 전보다 이번에 훨씬 더 큰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번에 나온 개정판에는 데이비드 맥널리와 수 퍼거슨이 북미 지역 사회주의자들을 대상으로 쓴 흥미로운 서문이 실려 있습니다. 맥널리와 퍼거슨은 리즈 보겔의 연구 결과를 새로운 여성주의의 입장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상호교차성 개념을 더해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보겔의 저서를 읽어 보면, 보겔의 이론은 오히려 비슷한 때 크리스 하먼이 발전시키고 있던 이론[노동자연대가 펴낸 소책자 《여성 해방과 맑스주의》에서 설명되고 있다]과 훨씬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우리가 이 논쟁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 주므로 중요합니다.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은 리즈 보겔의 책에 대한 전반적으로 우호적인(비판도 가미하고 있지만) 긴 서평을 실었습니다.

결론짓겠습니다. 새로운 여성주의의 부상에 대응하는 과제의 첫 단계는 그들과 연관을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의 투쟁에서 그들과 협력해야 합니다. 동시에, 그들과 토론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이 운동 안에는 여성 차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관점에 조금이라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꽤 있을 것입니다.

질의 응답

Q 최근 몇 년 동안 새로운 여성주의가 부상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배경, 여성주의의 다른 조류들과 구분되는 특징, 발전 전망 등이 궁금합니다. 또, 새로운 여성주의가 학계의 퀴어 이론 같은 것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새로운 여성주의의 성장은 1990년대 이래 계속된 사회비평(social critique) 재활성화의 일부라고 봅니다. 포스트페미니즘에 대한 반발로서 성장한 면도 중요합니다. 포스트페미니즘은 이제는 여성 평등을 대체로 달성했다고 봅니다. 새로운 여성주의의 성장은 오늘날 젊은 여성들이, 특히 학생들이 겪는 실질적인 성적 희롱·폭력과 차별에 대한 반응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새로운 여성주의를 단일하고 일관된 운동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1960~70년대에는 여성주의의 다양한 조류들을 하나로 모아 내는 여성 운동 대회 같은 것이 있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새로운 여성주의는 그 안에 정치적으로 다종다양한 경향들이 있고, 어떤 경향이 우세한지 알기 힘듭니다. 또, 그 다양한 경향들이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모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공통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닌데, 예를 들어 1960~70년대의 옛 여성주의(old feminism)에는 모두들 반대합니다. 초점을 너무 서구 백인 여성들에게 맞췄다면서 말입니다.

새로운 여성주의가 어떻게 발전할지는 그보다 더 넓은 투쟁이 어떻게 발전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여성주의는 급진화가 일어나고 투쟁이 귀환하는 때[1990년대 말] 탄생한 것이므로 사회적 투쟁이 전반적으로 더 발전하면 새로운 여성주의도 더 발전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그 사회적 투쟁의 발전이 노동자 투쟁의 전반적 고양을 중심으로 일어난다면, 우리가 새로운 여성주의를 둘러싼 논쟁에 개입하기 훨씬 더 수월해질 것입니다.

새로운 여성주의와 퀴어 이론의 관계는 꽤 복잡합니다. 새로운 여성주의 안에서 논자들마다 의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섹슈얼리티가 단지 생물학적으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으로도 본다는 점입니다.

물론 마르크스주의 전통도 어느 정도까지는 이와 비슷하게 주장합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는 성역할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재생산할 필요에서 비롯했고, 여기서는 생물학적 속성이 어느 정도는 작용한다고 주장합니다.

새로운 여성주의는 주관적 ‘권력 관계’에 대한 퀴어 이론의 강조도 받아들입니다. 새로운 여성주의는 권력 관계를 더 넒은 사회관계 속에 자리매김 하려는 것에는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퀴어 이론에 대해서는 콜린 윌슨이 《인터내셔널 소셜리즘》[132호(2011년 가을)]에 쓴 훌륭한 논문[제목: ‘Queer theory and politics’]이 있습니다.

Q 분리주의적 여성주의는 여성 차별의 원인을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에서 찾고, 퀴어 이론과 접목된 새로운 여성주의는 성과 여성 차별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이 정치적으로 함의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이와 관련해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에서 콜린 윌슨과 존 몰리뉴가 논쟁을 벌였던데, 이에 대해서도 논평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콜린 윌슨과 존 몰리뉴의 논쟁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존 몰리뉴의 주장에 더 동의합니다. 존 몰리뉴의 글은 원래는 조너선 닐과 낸시 린디스판이 쓴 글을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조너선 닐과 낸시 린디스판의 글은 여성 차별을 관념론적으로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젠더뿐 아니라 생물학적 성도 연속성이 있는 스펙트럼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우리는 현대 과학을 통해 생물학적 성에도 여성과 남성 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여러 다른 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젠더가 구성되는 물질적 기초는 분명 있습니다. 가장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으로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 이뤄지는 재생산(번식)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이 계급 사회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성 차별의 물질적 기초를 이해하는 동시에, 그 기초 위에서 어떻게 성역할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지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트랜스젠더 문제 등에도 섬세하게 대처해야 합니다. 《인터내셔널 소셜리즘》도 트랜스젠더 문제를 다루는 논문을 실었습니다. 트랜스젠더들도 가족이 조직되는 보통의 형태를 위협하는 존재여서 차별받는다는 것을 봐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존 몰리뉴가 콜린 윌슨을 비판한 핵심 이유는 윌슨이 조너선 닐과 낸시 린디스판의 주장을 반쯤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Q 영국의 여성주의자들 사이에 성에 대해 더 개방적인 쪽과 더 보수적이고 여성을 피해자로만 보는 쪽이 서로 대립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대립의 구체적 양상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말씀하신 대로 성의 자유로운 표현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있습니다. 한편에는 ‘섹스에 긍정적인 여성주의’(sex positive feminism) 경향이 있습니다. 이 경향은 여성들이 섹슈얼리티를 실천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존중해야 한다고 열렬히 주장합니다.

성의 표현과 관련해 영국에서 가장 첨예하게 논쟁이 벌어지는 쟁점은 포르노와 성노동 문제입니다. 최근 포르노를 긍정하는 여성주의자들과 포르노를 반대하는 여성주의자들이 둘 다 책을 내기도 했습니다. 포르노를 반대하는 게일 다인스(Gail Dines)라는 여성주의자는 런던에서 여러 토론회도 개최하고 있습니다.

이런 논쟁에 개입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어느 한 편을 들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성의 표현을 찬성한다’며 포르노를 긍정하는 쪽을 편들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도덕주의적 대응의 함정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포르노에 대한 가장 강경한 반대론자인 게일 다인스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여러 나라 정부들에서 성매매 관련 정책 자문으로 일하면서 성 구매 행위를 범죄화하는 입법을 옹호합니다. 그러나 많은 여성주의자들은 이런 정책이 오히려 성매매 여성을 더욱 위험한 처지로 내몰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즉, 이 논쟁에서는 양쪽 모두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독립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내놓아야 합니다. 이런 논쟁에 개입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론적으로 매우 분명해야 하는 동시에, 매우 섬세한 전술을 구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주장을 어떤 타이밍에 어떤 식으로 제기할지 등을 고민해야 합니다.

통역 천경록 / 녹취 박충범

입력 2015-03-28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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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 등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 ― 마르크스주의의 분석과 대안

산드라 블러드워스

오늘날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이하 여성 폭력)은 거듭 정치적 쟁점이 된다. 주로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모든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차별을 겪고, 그중 소수는 폭력의 피해를 입거나 심지어 강간당하는 일까지 있기 때문이다. 둘째,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이 폭력 문제를 부각시켜 왔기 때문이다. 셋째, 20세기 자본주의에서 성과 여성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특히 셋째 요인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전보다 많은 여성이 20세기에 임금노동을 하면서 여성들은 주체적 권리와 필요, 욕구를 지닌 존재임을 자각했다. 그러나 사회는 여성이 결혼 생활에서 누릴 권리를 거의 보장하지 않으면서 여성에게 현모양처를 기대한다. 그래서 여성들이 느끼는 모순은 더 커졌다. 특히,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이 서구 여성의 정체성과 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 영향은 종전 후에도 결코 완전히 되돌려지지 않았다. 그전까지 남성 고유의 직종이던 일자리에 여성이 대거 진출하면서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경제적 자립을 누렸다. 1960년대의 “성 혁명”은 여성의 새로운 사회적 지위에 내포된 모순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노동시장으로의 진출, 피임 수단 확대, 여전히 제한적이지만 점차 쉬워진 낙태 덕분에 여성을 성적 주체로 보는 인식이 확산됐다. 이는 그전까지 여성을 수동적인 주부로만 보던 것에서 진일보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성이 성적 주체로 부각되면서, 전보다 더 노골적으로 여성의 몸을 섹스 수단으로 묘사하면서 악용할 수도 있게 됐다. 갈수록 대인관계에서 섹스를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됐다. 또한 포르노나 성의 상품화가 증대하면서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낡은 관념도 확산됐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여성은 광고나 포르노를 통해서든 성추행이나 강간을 통해서든 자신의 몸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에 불만이 있다. 이런 불만은 여성더러 가족이라는 짐을 기꺼이 떠안고 남편이나 애인에게 순종적인 아내나 연인, 어머니가 되라고 요구하는 사회와 모순된다.

이 글은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이 제기한 쟁점과 분석, 해결책을 평가하고 성폭력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가족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여성의 삶은 속속들이 변했다. 자본주의 생산과 산업혁명의 결과, 봉건적 가족 형태는 허물어졌다. 새로 산업이 생겨났고 사람들은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들었다. 남성·여성·아이들은 공장·탄광·제분소 등에서 착취당했고 그에 따라 노동과 가족 생활은 분리됐다. 산업지구 빈민가 노동자들에게 가족은 더는 경제적 단위가 아니었다. 가족의 사회적 기능은 일부 남아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배계급이 자신의 권력과 부를 지키는 데에 가족은 여전히 중요했다. 또한 지배계급은 노동자들의 사망률을 낮추고 착취할 새 노동력인구를 기르는 방법으로 각자 가족을 통해 서로 보살피고 다음 세대를 양육하도록 했다.

한편, 노동자들은 고되고 긴 노동시간, 끔찍한 생활조건에 처한 가운데 가족 안에서 안식과 애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이끌렸다. 그래서 봉건제와 달리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들은 결혼을 상대방에게 느끼는 애정을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계약으로 여긴다.

그러나 실제로는, 가족이 여성과 남성의 삶을 조직한다. 가족은 여성 차별을 유지하고 또 강화한다. 여성과 남성이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가족을 꾸리더라도 둘의 관계는 평등하지 않다. 여성은 가사와 육아를 대부분 떠맡는다. 심지어 집 밖에서 일을 해야 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여성은 다른 가족 구성원을 돌보고 보조하고 그들에게 애정을 줘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반면 남성은 여성보다 더 많이 생계비를 벌어들임으로써 ‘가장’이 된다. 남녀 임금 격차 때문에 개별 가족 수준에서 이런 불평등을 바로잡기란 쉽지 않다.

이런 가족 내 분업은 남성 지배의 산물이고 남성은 거기서 득을 본다는 여성주의적 설명들이 많다. 그러나 이런 분업으로 득을 보는 것은 지배계급(남녀 불문하고)이다. 왜냐하면 현재와 미래의 노동력인구를 돌보는 비용과 수고를 노동자 가족에 떠넘기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은 임금노동과 가사라는 이중의 굴레를 쓰게 된다. 여성은 가족 안에서 남편에게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직장에서는 노동자로서 착취와 여성 차별을 겪는다. 남성도 착취를 당하지만, 성차별을 겪지는 않는다.

자본주의 가족에 부합하는 성 역할은, 남성은 강하고 능동적이고 여성은 온화하고 수동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념은 교육기관, 대중매체, 오락 · 여가 활동 등을 통해 사회 곳곳에 스며든다. 누구도 이런 관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핵가족’에 속하든 아니든,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자녀가 있든 없든 말이다.

현실의 노동자 가족은 생계를 위해 장시간 노동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양질의 보육시설 부족으로 사회 생활에 제약을 받는다. 이런 현실은 가족이 장밋빛 행복을 제공한다는 이상과 들어맞지 않는다. 이처럼 남녀가 평등하지 않고 가족의 존재가 부추기는 환상과 현실이 모순을 빚으므로, 가족은 불만과 억압이 만연한 곳이 된다.

여성의 몸을 섹스 수단으로 여기는 분위기는 여성에게는 남성의 성욕을 채워 줄 의무가 있다는 낡은 관념을 부추긴다. 그런데 이런 관념은 단지 남성만이 가진 것은 아니다. 여성도 이런 관념을 내면화해, 남편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자책하고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 폭력의 만연

계급 사회의 역사 내내 여성은 남성에 의한 폭력에 시달렸다. 자본주의는 여성과 남성의 삶을 속속들이 바꿨지만, 여성 차별은 계급 차별과 마찬가지로 사라지지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은 생산과 분리됐지만, 생산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영향을 받는다. 20세기를 거치면서 오늘날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가족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전체 가족의 3분의 1만이 남편과 아내, 자녀들로 이뤄진다. 다른 한편, 더 많은 여성이 임금노동을 하게 되고 경제적 자립을 맛본다. 이 변화는 1960년대에 여성 해방 운동이 성장하는 배경이 됐다. 여성 해방 운동은 성에 대한 더 많은 통제권과 더 효과적인 피임법 · 낙태법과 이에 대한 권리를 요구했다. 그 덕분에 섹스가 결혼 · 출산과 별개로 여겨질 수 있었다.

모성에 대한 태도도 극적으로 변해 왔다. 20세기 후반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절반이 채 안 되는 여성만이 어머니가 되는 일을 제대로 된 직업에 종사하는 것이라고 인정했다. 결혼 관계 밖에서 태어난 아이가 1987년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우 18퍼센트까지 증가했다. 1인 가구에 속한 인구가 1986~87년 전체 인구의 20퍼센트를 차지했다.

이런 변화들은 여성을 해방시킬 잠재력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이를 현실화하지 못하고, 여성은 여전히 천대받는다. 현실의 이런 모순 때문에 여성 폭력을 둘러싸고 논의가 활발해졌다.

현대 여성주의 흐름에 영향을 끼친 초기 저작들은 여성 폭력 문제를 전혀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그러던 중 시몬느 드 보부아르(1908~1986)가 ≪제2의 성≫(1949)을 통해 남녀 간 성적 관계는 모두 폭력을 수반한다고 주장했다. 보부아르는 “(여성의 첫 경험은) 소녀를 성인으로 만드는 폭력 행위”라고 주장했고, 남성이 여성을 “취한다”거나 여성이 “침해당한다”거나 여성이 남성의 성적 요구에 “굴종한다”며 양성 불평등 관계를 강조했다. “이 세계는 언제나 남성들만의 세계”였고, “여성은 인류라는 종(種)의 먹이였다”는 것이다.

1975년 출판된 수전 브라운밀러의 ≪성폭력의 역사≫(일월서각, 1990)는 이런 종류의 분석을 확산시키는 데 크게 일조했다. 브라운밀러는 강간이 “모든 여성을 공포 상태로 묶어 두기 위한 모든 남성의 의식적인 위협 과정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들은 영향력을 얻었고, 때때로 모든 여성 차별 행동을 싸잡아 ‘폭력’이라고 했다. 여성을 희롱하려고 휘파람을 불거나, 여성 차별적 농담을 하는 따위의 행위도 여성 폭력(경미한 폭력부터 강간·구타에 이르는)이 일어날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위들을 모두 같은 것으로 뭉뚱그리는 것은 각 행위의 구체성을 무시할 뿐 아니라, 여성 폭력을 양산하는 사회적 관계들을 규명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브라운밀러의 책은 심각한 이론적 문제가 있다는 점을 제쳐두더라도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다. 바로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 폭력이 대부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벌어진다는 것은 오늘날 공인(共認)된 사실이다.

여성 폭력, 특히 가정 폭력이 몹시 강조되는 오늘날과 비교했을 때, 1970년대까지 여성주의자들조차 가정 폭력이나 부부 강간을 다루길 꺼렸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여성이 자기 방어를 하거나 외부의 도움을 구하지 못하도록 만든다고 오늘날 비판하는 바로 그 관념들을 당시에는 여성주의자들도 일부 받아들였던 것이다. 브라운밀러는 자신이 1970년 강간에 대한 어떤 논의 과정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강간은 여성주의 쟁점이 아니”라고 여겼었고, “여성 운동은 강간 피해자들과 함께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봤었다고 술회했다. 심지어 낙태제한법 폐지 운동을 이끈 여성운동가 비어트리스 파우스트도 1977년 이렇게 말했다. “많은 여성들이 강간당하길 원하는 것처럼 행동해서 [여성이 강간을 자초한다는] 생각을 부추긴다. 엉덩이만 겨우 가리도록 치마 길이를 줄이고, 유두가 비치는 옷을 입고 나간다. 남성과 술을 마시거나 둘이서 차를 타고 으슥한 곳으로 가서 심지어 옷을 벗는 등 섹스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으로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잠재적으로 섹스를 수반한다는 것을 인정하길 거부하다 결국 자연스럽게 빠져나오기 힘든 처지에 빠진다.”

여성 폭력을 은폐하는 가족 이데올로기

미국 여성주의자들은 심지어 1980년대에 들어서도 부부 강간 문제 다루길 꺼렸다. 오늘날 여성주의자들은 “우리가 무엇을 입든, 어디를 가든 예스(yes)는 예스이고 노(no)는 노이다” 하고 옳게 주장하는 데 반해, 초창기 여성주의자들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행되는 여성 폭력이 은폐됐던 것은 가족에 대한 공공연한 비판을 삼가야 한다는 가족의 가치 이데올로기 때문이었다. 가족은 사생활의 공간이고 사랑의 보루라는 것이었다. 가족은 “남성의 안식처”이고, 남편이 아내에게 섹스를 요구하면 아내는 언제든 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1970년대 후반까지도 오스트레일리아 주(州)들은 대부분 부부 강간을 인정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부부 사이에는 강간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다이애너 러셀은 1천 명이 조금 못 되는 미국 여성들을 인터뷰하면서, 여성이 자기 남편이 행한 강간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러셀은 강간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지 말고 그 대신 “당신은 남편과 원치 않는 섹스를 가진 적이 있습니까?” 하고 다시 물었다. 남편에게 강간당한 여성 87명 중 오직 6명만이 “살면서 한 번이라도 강간을 당했거나 당할 위험에 처한 적이 있습니까?” 하고 처음에 물었을 때 그렇다고 답했다. 그 여성들은 거의 다 자신이 성적으로 학대당했다고 생각했지만 강간을 당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학대”라는 것도 주관적인 평가다.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은 다른 남성이 자신에게 했다면 학대로 여길 행동도 남편이 하면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복지의 부족과 까다로운 이혼 법률도 학대당한 여성이 가족을 떠나기 어렵게 만들어, 가정 폭력이 은폐되는 데 일조한다. 다이애너 러셀이 조사한 여성의 21퍼센트는 남편에게 폭력을 당한 적이 있고, 26퍼센트는 원치 않는 섹스를 한 적이 있었다.

하층민일수록 그리고 가난할수록 폭력에 더 시달린다는 점으로 미뤄 볼 때, 1970~80년대 여성 운동을 주도한 중간계급 여성들은 그 같은 가정 내 학대를 몸소 겪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진정한 질문은 여성주의자들이 가정 폭력 문제를 끌어안기까지 왜 그토록 오래 걸렸느냐가 아니라 왜 오늘날 그 쟁점이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느냐는 것이다.

여성 폭력에 기울이는 사회적 관심

먼저, 여성주의에 관한 선입견 하나를 바로잡아야 한다. 바로 ‘성 인지 관점이 없는 구태의연한 구좌파들’에 맞서 여성주의자들이 여성의 권리를 옹호해 왔다는 선입견 말이다. 모든 여성주의자들과 대부분의 좌파는 여성주의만이 여성 차별을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과 트로츠키 등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 차별 문제를 중요한 사회 문제로 봤다. 그래서 볼셰비키는 여성 차별을 없애기 위해 러시아 혁명 직후 공공 보육시설, 공공 세탁소, 공공 식당 등을 도입하고 여성을 해방시키고자 전례 없는 사회적 실험을 실시했다. 오스트레일리아만 보더라도 1920년대 공산당을 창당한 카타린 수잔나 프리처드의 경우,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여성 폭력에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 줬는데, 이는 여성주의자들보다 수십 년 앞선 것이었다.

프리처드는 자신의 소설에서 젊은 여성에게 원치 않는 결혼을 강요하는 사회적 압력과 여성 폭력을 참고 살라는 가족의 압력을 묘사했다. 한 등장인물은 자신의 남편이 행한 폭력을 두고 시어머니가 보인 태도를 친구에게 이렇게 털어놓는다. “그녀는 내가 멍든 것을 보고서 결혼은 처음에는 역겨운 일이지만 차차 익숙해질 것이라고 말했어. 그리고는 내가 남편에게 더 잘해야 한다는 거야. 남편은 나한테 홀딱 빠져 있다고. 나를 모욕하는 게 나를 위한 것일까? 나는 그에게 좋은 아내가 되고 싶었어. 그러나 그이의 행동 때문에 이제 나는 그가 역겨워.”

이 대사는 여성의 목소리에 귀기울인 후대 연구들이 관심 갖는 쟁점도 말하고 있다. 바로 여성에게 결혼은 별로 기대할 게 없고 심지어는 역겹기까지 하지만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1960년대에 여성주의가 등장하기 전에는 좌파가 여성 차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여성 폭력을 둘러싸고 논의가 활발해진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먼저, 일하는 여성이 늘면서 여성들이 대인관계에서 기대하는 바가 높아진 것이다. 자립 능력이 상대적으로 많은 여성들은 자신감이 더 높고, 또 원치 않는 관계를 청산할 여지도 더 많다. 그래서 전과 달리 학대를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퀸즈랜드 가정폭력 대책위원회’가 만난 여성의 80퍼센트는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집을 떠날 수 있었다. 미국의 한 연구는 폭력을 당한 여성의 75퍼센트가 집을 떠났다고 보고했다. 1978년부터 1981년까지 비교적 자립 능력이 떨어지는 사춘기 여성의 성폭력 피해를 조사한 미국의 연구도 그들의 대다수가 자신을 향한 공격을 막고 강간을 피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남자친구가 성폭력을 자행했을 때 여성의 3분의 2는 그와의 관계를 바꿨고, 그중 87퍼센트는 남자와 헤어졌다.

이혼하기 쉽도록 법이 바뀌고, 이어 부부 강간이 범죄로 인정되자 여성이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하기가 더 쉬워졌다. 비록 여전히 쥐꼬리만 한 복지였지만 그래도 학대당할 때 집을 떠날 여지를 부분적으로 만들어 줬다. 여성이 학대당하면서도 가족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로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나 여성이 자신을 탓하는 등의 이데올로기를 드는 연구들이 많다. 그러나 개별 여성이 할 수 있는 선택은 경제적 제약을 받는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경제적 요인과 이데올로기적 요인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물질적 조건이 변하면 새로운 관념이 기반을 잡고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끼칠 수 있게 된다.

여성 운동의 후퇴

이런 요인들은 1970년대에 일어난 여성 운동의 변화와 맞물렸다. 여성 운동이 여성을 투사로 독려하던 계급 정치에서 멀어지고 그 대신 여성을 피해자로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헤더 맥그리거와 앤드류 홉킨스는 급진적 여성주의의 사회적 기반이, 점차 늘고 있는 중간계급 전문직 여성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이렇게 쓴다. “이 중간계급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은 계급이 아니라 젠더[사회적 성별]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여성 해방 운동은 초기 사상가들이 계급에 관심을 가졌던 것에서 빠르게 벗어나 사회주의 정치나 좌파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모든 남성에 의한 폭력’ 이론을 주창한 브라운밀러가 이런 흐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브라운밀러의 책이 원용하는 범죄 통계에서 주로 다루는 강간 형태인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은 전혀 보편적이지 않고 하층 계급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브라운밀러는 좋게 봐야 부조리하고 나쁘게는 엘리트주의적이고 노동자 계급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힌 결론을 내렸다. “강간은 멍청하고, 거칠고, 흉측한 행위이고 이를 저지르는 것은 불량 청소년과 그 사촌형들이지, 매력과 위트 그리고 바람기 있는 난봉꾼이나 ‘정상적’으로 성욕을 배출하지 못한 소심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 생각 없고, 폭력을 일삼고, 하는 짓이 뻔한 청소년들의 어깨 위에 수백 년 동안 전수된 역사적 임무가 얹어져 있다. 바로 폭력을 동원해 여성에게 남성 지배를 강요하는 것 말이다.”

강간이 보편적 인간관계의 일부라는 브라운밀러의 엄청난 주장에 비춰 볼 때, 그가 근거로 제시한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 통계가 특정 계층에 집중된 이유를 두고 그가 한 설명은 실로 빈약하기 짝이 없다! 범죄와 폭력이 발생하는 진정한 사회 부조리에 그가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범죄율에 관한 많은 연구들은 강간이 소외된 폭력적 행동의 여러 양상의 하나로, 특히 빈곤하고 불우한 지역 청년들이 많이 저지른다고 보고한다. 브라운밀러가 근거로 제시하는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이 만일 강간의 가장 흔한 형태라 하더라도(현실은 그렇지 않지만) 그로부터 내릴 결론은 모든 남성이 강간에 공모한다는 것이 아니라, 강간이 불우한 청년들의 폭력 성향의 한 표현일 뿐이라는 것이 돼야 한다. 브라운밀러의 분석이 이처럼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 데이타를 중심으로 했는데도, 여성주의가 계급에서 멀어질 때 그의 주장이 선도적인 구실을 했다는 것은 실로 역설적이다.

강간은 섹스와 무관하다?

브라운밀러는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강조하면서, 강간이 섹스와는 아무 관계 없는 단순한 폭력일 뿐이라고도 단언했다. 그런데 이 주장도 오늘날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러나 강간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강간은 세 종류로 구분된다. 즉, (지인에 의한) 데이트 강간, 부부 강간,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 이 상이한 형태 각각을 살펴봐야 한다.

① 데이트 강간

미국에서의 한 연구는 1978년~81년 3년간 청소년 여성의 7~9퍼센트가 강요된 성적 행위를 경험했다고 보고했다. 그 연구는 강요된 성적 행위를 강압이 동반된 모든 성적인 행위를 모두 포함시켰다. 성적인 신체 부위를 만지거나 강압 수단으로 언어를 동원하는 것부터 무기를 동원하는 것까지 포함했다. 이런 광범위한 정의를 기준으로 봤을 때 그 연구는 강요된 성적 행위가 벌어지는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이 사례들을 조사한 결과, 많은 경우는 남성이 여성에게 섹스를 하자고 압박하는 전형적인 데이트 시나리오를 따랐음을 시사한다. 대부분의 경우는 말을 통한 압력만이 수단으로 동원됐고, 높은 비율로 [섹스에] 실패했다.”

미국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미즈>지의 설문조사를 보면(1988년) 데이트 강간 또는 데이트 강간미수를 겪은 여성 네 명 중 한 명은 자신이 강간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사 여성의 절반가량은 다시 같은 남성과 섹스를 했다. 그리고 설문에 응한 남성 가운데 8퍼센트는 여성에게 섹스를 강요한 적이 있었는데도 그들의 75퍼센트는 자신이 여성에게 원치 않는 섹스를 강요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답했다. 이는 남성과 여성이 섹스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는 것과, 남녀 불평등이 가장 내밀한 관계에도 영향을 미침을 보여 준다. 그래서 여성은 자신이 좋아하는 남성이 자신을 강간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거나, 심지어 강간이 일어나도 이를 알지 못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만일 그와의 섹스를 거부하면 그가 더는 자신을 만나지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여성은 남성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는 관념(오늘날 혼전 섹스에 대한 금기가 허물어지면서 특히 청소년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크다) 등이 여성을 압박한다. 게다가 TV와 영화 때문에, 섹스를 갈망하지 않는 젊은 남성은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것이라는 인식도 광범하다. 이런 온갖 모순된 감정과 생각, 성에 대한 지식 부족, 경험 미숙이 뒤섞이면서 상호 신뢰가 무너지고 강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강간이 섹스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브라운밀러의 주장은 오늘날 청년들 사이의 성적 관계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모른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늘날 청년들은 섹시하지 않거나 섹스에 응하지 않는 여성은 무언가 결함이 있다는 관념에 거듭 노출된다. 젊은 남성들은 여성에게서 섹스를 쟁취해야 하고, 세심함과 배려는 겁많은 여성에게나 중요한 것이라는 이미지와 메시지를 영화·TV·책·신문을 통해 보고 듣는다. 분명히 연인이나 지인에 의한 강간이나 강요된 성행위는 우리가 원하는 섹스 상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의 현실은 그렇다.

②부부 강간

그저 폭력에 불과한 게 아닌 경우가 흔한 또 다른 형태의 강간은 부부 강간이다. 앞서 봤듯이, “성 혁명” 당시의 여성주의자들조차 공개적으로 다루기 어려워했던 이 주제를 공산주의자 프리처드가 다룬 바 있다. 다음은 프리처드가 쓴 소설의 한 부분이다.

그의 머리가 그녀의 목을 덮쳤다. 그는 굶주리고 화난 입술을 통해 그녀의 팔과 가슴을 애무했다.

“그렉!” 엘로디는 그에게서 떨어지려고 애썼다. 그는 육중하게 누르며 힘으로 그녀를 제압했다. “제발, 제발 하지 마요. 나는 당신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거에요.”

그는 거칠게 웃으며 거리낌없이 그녀의 저항을 물리쳤다. 그녀가 결국 저항을 포기하고 힘없이 쳐지자 그는 다시 부드럽게 변해서 그녀의 머릿결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엘로디, 엘로디 내 사랑.”

… 그녀가 반응하기보다는 고통 속에 헐떡이자 그는 괴로움을 느꼈다. 한눈에도 그녀는 안타까울 정도로 슬퍼 보였고 무언가에 압도돼 겁에 질린 듯 보였다. 그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엘로디? 왜 그래, 내 사랑? 내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거 알잖아.”

이 대목은 남편이 아내를 소유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 사이에서 겪는 혼란을 다룬 것이다. 두 등장인물은 서로 몹시 사랑했고 자녀들을 사랑으로 대했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점차 개인적 친밀감에서 멀어졌다. 엘로디는 그 시대 다른 아내들처럼 아이들뿐 아니라 남편에게도 책임감을 느꼈고, 이 끔찍한 일을 겪은 뒤에도 그와 계속 살았다.

1982년 다이애너 러셀이 여성들에게 남편·애인과의 성관계에 대해 조사하면서 얻은 답변들을 봐도, 섹스와 폭력, 동의와 거부를 구분하는 것이 때때로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편과 원치 않은 섹스를 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 여성은 이렇게 답했다. “결혼한 상황에서 그것은 참 답하기 애매한 질문이에요. 자기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을 칼같이 구분하기가 어렵거든요. 하기 싫다고 다 관두고 떠날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또 다른 여성은 이렇게 답했다. “한 경우는 그거[강요된 섹스]라고 부를 수 있을 거에요. 다른 경우는 반반이었어요. 처음과 같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남편이 자기 의사를 내게 강요한다고 느꼈거든요. 내 생각에 그 차이는 남편이 섹스를 원하는데 내가 원치 않으면 그가 밀어붙이는데 그가 화를 내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나한테 나쁘게 구는 건 아니라는 거예요. 그냥 그의 방식인 거죠.”

많은 경우 아내는 남편의 섹스 요구를 결혼한 사이여서 거부할 수 없다고 여기고, 그 때문에 남편은 자신이 한 번도 아내를 강간하지 않았다고 여긴다. 물론 자기 아내의 성적 의사를 신경쓰지 않는 그런 남편의 행동은 배려심 부족하고 조심스럽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원치 않는 성행위’(많은 경우 여성은 그것을 강간으로 여기지 않았고, 또 자신이 수용했으므로 강요된 것도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에 특별히 이런 표현을 썼다)가 섹스와는 아무 관계 없다고 말하는 것은 현실의 부부가 일상적으로 안고 사는 심대한 불만을 눙치고 넘어가는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오직 소수 여성만이 성폭력을 겪고 소수 남성만이 성폭력을 자행한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고 긍정적인 잠재력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섹스를 포함한 모든 것을 금전 관계로 전락시키려 하지만 남성과 여성 모두 그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계급 분석은 성폭력과 무관한가?

범죄 통계는 경찰에 신고되는 강간이 빈곤층에 집중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신고율이 낮은 가정 폭력을 포함한다면 실제 양상은 훨씬 더 복잡하다. 물론 모든 계급의 남성이 여성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고 결혼을 아내를 통제할 권리를 얻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양성간 불평등이 모든 계급에 퍼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적 학대가 정말로 사회집단에 따라 다른 빈도수로 나타나는지, 만일 그렇다면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1970년대 말 이후 계급 정치에서 후퇴하는 경향 때문에 (여성주의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학계와 심지어는 일부 좌파들까지 그랬다) 각종 연구는 계급과 무관하다는 것에 압도적으로 집중돼 있다. 이때 사용된 한 가지 방법은 엉터리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한 뒤 그것을 반박하는 것이다. 여성주의 운동가인 조슬린 스콧은 자신의 연구가 “아동 학대의 원인이 오로지 무력감과 좌절 때문이라는 이론을 반박했다”(강조는 나의 것) 하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반박이 아니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는 가족 내 학대를 그런 식으로 조야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제대로 된 설명이라면 무엇보다 어째서 주로 남성이 여성을(그 반대가 아니라), 또는 성인이 아동을 학대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는 젠더와 아동에 대한 태도, 가족의 구실 등을 모두 설명하려 한다.

또 다른 구절에서 스콧은 “실업은 필연적으로 아내 구타를 늘린다”(강조는 나의 것)는 마르크스주의적 주장을 반박했다고 쓴다. 그러나 그가 반박했다는 주장은 사실, 반박이 필요 없을 정도로 기계적이고 어처구니없어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와 전혀 관계 없다. 오히려 여성이 폭력적인 가정을 떠나는 것이 실업 때문에 좀 더 어려워지고, 그래서 살림살이가 나은 여성보다 폭력에 더 많이 노출된다는 스콧의 주장이 마르크스주의적 주장에 가깝다. 그러나 스콧은 경제적 압력이나 낮은 생활수준, 억압적 직장 생활에서 오는 불만과 무력감 등이 미치는 영향을 한사코 기각하려 한다. 그래서 그는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나아가는데, 더 높은 사회경제 계층 남성이 남성 지배 사회의 메시지를 하층계급보다 더 많이 내면화하므로 더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콧의 분석은 일관되지 못하다. “집안에서는 아버지가 지배자다. 그리고 지배자는 권력을 휘두른다”는 그의 주장은 다른 여성주의자들의 주장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스콧은 가족 내 여성에 의한 아동 학대 문제를 거론할 때는 여성이 집에 갇혀 있고 도저히 대처할 방법이 없다고 느끼는 압력, 경제적 스트레스 등을 요인으로 거론한다.

리즈 오어 등이 발표한 연구보고서 ≪가정 폭력≫(1991)은 서문에서 계급 개념을 기각하지만, 정작 내용에서는 역사적으로 차별받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공동체에서 여성 폭력이 훨씬 더 많이 자행된다고 쓰고 있다. 오어는 계급이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고 기각하면서도 이렇게 쓰고 있다. “원주민 공동체 내 폭력은 식민 지배라는 백인 남성의 역사가 낳은 문화적 종속과 정신적 박탈이 야기한 극단적으로 가혹한 환경 때문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같은 연구보고서에서 다이앤 커크비도 계급이나 사회경제적 요인은 중요하지 않다고 거듭 강조해 놓고서는 이렇게 쓴다. “일부 원주민 공동체에서는 가정 폭력이 너무도 심각해 90퍼센트의 가정이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은 백인 식민 지배의 결과임을 시사한다.”

즉, 이 연구자들은 그런 여성 폭력이 “식민 지배”, “문화적 종속”, “정신적 박탈”의 결과라고 주장하면서 사회경제적 요인은 그런 폭력과 전혀 관계없고 계급 이론은 틀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식민주의”를 제국주의나 계급 사회와 전혀 무관한 것인 양 다루지만, 그들의 발견, 즉 그런 요인들이 여성 폭력을 키운다는 것은 오히려 계급 분석만이 남녀 불평등 문제를 온전히 다룰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연구들이 갖는 문제는 마르크스주의 분석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비판한다는 것이다.

남성 권력이 핵심 문제인가?

커크비는 또, 가정 폭력이 다른 대인관계에서 일어나는 충돌과 달라, 남녀 간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라는 점에서 볼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대인관계에서 벌어지는 충돌이 모두 폭력을 부르는 것도 아니고, 가족 안에서는 충돌이 없는 경우에도 폭력이 자행된다는 것이다. 커크비가 이런 차이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학대당하는 여성에게 “권력을 부여하기”보다는 가족 자체를 지키는 것에 치중하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여성 폭력 문제의 출발점은 언제나 여성이 겪는 경험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편, 리즈 오어는 원인을 제공하는 인과 요인과 사건 발생에 영향을 끼치는 기여 요인을 구분하면서, 계급적 박탈감은 여성 폭력에 기여할 수는 있지만 원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둘을 억지로 구분하는 것은 순전히 오직 남녀 간의 불평등한 관계만이 원인이고 나머지는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해결책이 무엇인지 찾으려 할 때 이런 관점은 별로 생산적이지 못하다. 게다가 왜 다수 남성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지도 설명하지 못한다. 남녀간 불평등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이 연구자들이 다루는 원주민 공동체의 열악한 상황을 설명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내 이들은 젠더 말고도 다른 요인이 있다고 인정한다. “가정 폭력은 사회경제적 수준에 따라 불균등하게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가정 폭력에 대한 여성의 반응은 분명 사회경제적 수준에 따라 다르다. 높은 지위의 여성은 낮은 지위의 여성보다 폭력적 관계를 더 짧은 기간 감내하고, 그런 관계에 처하는 횟수도 적다. 반면에 실업에 처했거나 저임금 일자리에 종사하는 여성은 폭력적 관계를 더 오래 감내하고 더 자주 폭력에 시달린다.”

다시 말해, 커크비의 주장대로 여성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하더라도 경제적 요인 등이 피해자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커크비 자신도 “전업 주부인 여성이 학대를 더 많이 당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인정했다.

우리가 진짜로 다뤄야 할 것은 다양한 경제 · 계급 상황이 어떻게 여성 차별 일반과 맞물리느냐는 것이다. 커크비와 오어는 “남성 권력”이 핵심이라고 강조하지만 정작 여성의 경험은 전혀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가족 안에서 긴장과 갈등이 벌어진다고 주장하는 것은 가족이야말로 여성 차별의 발원지라는 논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남성 권력”을 말하는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지지하지 않고, 대신에 단지 남성에게 태도를 바꾸라고 요구하는 데에 치중한다. 뒤에서 보겠지만 그들은 그 목적을 위해서 심지어 무원칙한 동맹을 맺기도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아주 모호한 결론만 내릴 수 있을 뿐이다. “(여성 폭력은) 모두 나이·계급·인종을 초월해 벌어지고, 다만 사회적·문화적 영향에 따라 그 정도가 달라진다.”(리즈 오어)

얀 홀스퍼는 ≪현존하는 과거≫라는 책에서 가부장제 이론으로 성폭력을 이론화하려 했다. 몇몇 주요한 통찰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그는 폭력에 대한 단순한 기술(記述)을 넘어 왜 폭력이 발생하는지 규명하지는 못한다. 특히 여성 폭력의 구조적 원인을 다루겠다고 한 부분도 사실상 현실을 기술하는 것 이상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프로이트와 그 밖의 다른 이론들을 동원해 남성과 여성 젠더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설명하려 하지만, 그때조차 아이들이 보편적으로 두 부모 가정에서 자란다고 전제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그러나 이혼과 재혼 때문에 오늘날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전체 가족의 3분의 1만이 두 부모 가족이다. 게다가 개발도상국에서는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기숙하면서 그런 종류의 가족을 아예 경험하지 못하기도 한다.

이처럼 홀스퍼는 협소하고 심리학적인 접근을 하고 있으므로 근본적인 문제를 볼 수 없다. 바로 자본주의는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사회 공공시설을 갖추지 않고 그 부담을 모두 여성에게 떠넘기고, 가족 이데올로기가 이를 정당화한다는 것 말이다. 이에 따라 남성과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교육, 대중매체 등을 통해 사회적으로 생산되는 것으로, 그 저변에는 여성을 상대로 한 물질적 차별이 깔려 있는 것이다.

홀스퍼는 책 서문에서 “과연 우리가 말하는 일관된 체제, 즉 ‘가부장제’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라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고, 여성을 학대하는 남성은 여성 폭력으로 “명백히 득을 본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게다가 어째서 “여성을 학대하지 않는 남성도 같은 영역에서 폭력적인 수단 없이도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 대신 사회가 공적인 “남성” 영역과 사적인 “여성”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고 보는 온갖 설명들만 제시한다. 노동조합이나 직장을 노동자 계급 남성들이 “남성 간의” 연대를 경험하며 “공공영역에서 일부 권력을 행사하는” 곳으로 치부한다. “그 결과 여성은 가족에 관해서든 임금노동에 관해서든 공적 영역에서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노동인구의 40퍼센트가 여성인 오늘날의 현실에 비춰 봤을 때 터무니없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 남성들이 그렇듯이 직장이야말로 잠재적으로 여성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홀스퍼가 언급조차 하지 않는 노동조합 투쟁 속에서야말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연대가 이뤄질 잠재력이 가장 크고 그런 연대만이 여성 차별과 여성 폭력을 끝장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혼란은 더 대중적인 글들에서도 찾을 수 있다. 멜버른의 한 대학교 출판부가 내놓은 소책자는 여성 차별이 “지배계급 남성에 이익”이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여성 차별이 지배계급 여성에게는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함축돼 있다. 그러나 여성 차별에 만만찮게 도전하려면 차별을 낳는 계급 사회를 공격해야 하는데, 역사를 보면 그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지배계급 여성은 차별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같은 지배계급의 남성을 도와 그런 도전을 꺾으려 했다.

포르노가 강간을 부추기는가?

지금까지 이 글은 자본주의가 성과 계급에 따라 남성과 여성의 삶을 다르게 조직하는 것에서 여성 폭력이 비롯한다는 것을 보여 줬다. 그러면, 포르노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포르노는 성폭력의 원인인가? 수전 브라운밀러, 안드레아 드워킨, 캐서린 맥키넌 등 일부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은 그렇다고 주장한다. “포르노는 이론, 강간은 실천”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조슬린 스콧은 한 대학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포르노 때문에 더 많은 폭력이 양산되는가?” 하는 질문을 받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도 그에 대한 명료한 답은 영원히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어진 인터뷰에서 그는 포르노를 폭력과 동의어로 사용한다. 언론에서 강간 문제를 여성 차별적으로 다루는 것에 반대하는 오스트레일리아 운동단체인 ‘성폭력 선전에 반대하는 동맹’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리는 성폭력 선전과 성폭력 사이의 인과관계를 찾지 않는다. 성폭력 선전 자체를 성폭력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포르노가 유난히 폭력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문제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포르노의 90퍼센트는 강제성 없는 일상적인 성행위를 묘사할 뿐이다. <플레이보이>의 폭력 수준은 1977년 이래 계속 줄어 이제는 어린이 만화보다도 낮은 수준이 됐다. 연구자들이 보고하는 포르노의 최대 문제점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포르노는 자본주의 하에서 메말라 버린 성적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지, 그 원인은 아니다. 포르노 산업이 급성장한 것은 앞서 서술한 사회 변화의 결과였다. 즉, 젊은 세대는 성에 관한 이미지가 넘쳐나는 분위기에서 자라지만 정작 성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호기심이나 심지어 진정한 인간관계의 대용물로 포르노를 찾는다.

실험 결과 섹스 영화는 남성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남성이 폭력적 강간물을 보고 공격성이 커지는 경우는 영상 속에서 강간당하는 여성이 그것을 즐기거나 아니면 시청자가 그 여성에게 분노를 느끼도록 내용상으로 유도됐을 때였다. 이 연구를 수행한 연구자 자신은 이를 근거로 포르노를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성급한 결론을 내렸지만, 사실 이 연구 결과는 사뭇 다른 결론으로 우리를 이끈다. 현실의 많은 여성들은 성폭력 시도를 중간에 차단한다. 또, 성폭력을 즐기지도 않는다. 이처럼 포르노 속 허구의 여성과 현실의 여성을 구분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 차이가 수동적인 포르노 시청자와 능동적인 강간범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여성은 남성이 자신에게 하려는 행동을 제어하려 하고 대체로 남성들은 그에 반응한다. 포르노를 보여주고 남성의 반응을 살피는 연구는 방법상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는데, 바로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은 배제한 채 단순하고 행동주의적인 자극-반응 모델로 인간을 파악하려 든다는 것이다.

포르노를 폭력과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하다. 스콧은 포르노가 등장 여배우들을 부당하게 이용한다는 점을 말하려고 포르노를 폭력이라고 불렀다. 그 동기는 공감할 만한 것이지만, 포르노가 폭력이라는 주장은 틀렸다. 만일 포르노 산업에 고용되는 것 자체가 폭력이라면 그것과 구타·강간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만일 성매매와 강간 사이에 아무런 구분이 없다면 성매매 여성은 자신을 강간범에게서 지킬 수단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여성 폭력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마르크스주의는 어느 사회든 생산이 조직되는 방식에 따라 모든 사회관계들이 영향을 받는다고 본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은 생산을 실제로 수행하는데도 생산수단을 전혀 지배하지 못한다. 그 대신 노동자의 노동력은 상품으로 거래된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된다. 노동력뿐 아니라 여가와 섹스도 포르노, 광고업, 성매매 등의 형태로 상품이 된다.

본디 노동은 창조적이고 삶을 다채롭게 해 주는 것이지만 자본주의 하에서는 따분하고, 또한 우리를 지배하는 자들을 위한 부를 생산하고 그들이 우리를 지배할 힘을 키워 주는 것이 됐다. 마르크스는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사물의 세계에서 가치가 생기는 만큼 인간 세계의 가치는 떨어진다.” 그래서 노동자가 만든 생산물은 노동자가 지배할 수 없고 오히려 노동자를 위협하는 그 무엇, 즉 노동자가 낯설게 여기고 두려워하는 대상이 된다. 이런 상황을 소외라고 한다.

그 결과 노동자의 삶은 그가 지배하지 못하는 노동 생산물에 압도된다. 노동은 생활에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는 과정이 아니라 고되고 단조롭고, 자본이 사회를 지배하는 수단이 된다. 노동은 더는 자발적이지 않고 강요된 것이고, 그 자체로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노동이 소외됐다는 가장 뚜렷한 증거는 물리적 · 외부적 강압이 완전히 사라지면 노동자가 그 즉시 노동을 마치 전염병이라도 되는 양 피한다는 것이다.”(마르크스)

본래 노동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다르게 만들어 주는 의식적이고 창조적인 것이다. 이런 노동에서 소외됨으로써 인간은 다른 인간에게서도 소외된다. 포르노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섹스는 진정한 인간관계의 일부가 아니라, 수동적인 익명의 시청자를 위한 소외되고 대상화된 형태로 묘사된다. 마치 자본주의 하 여성과 남성 삶의 다른 측면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왜 폭력의 가해자가 남성이고 여성은 피해자인 경우가 많을까? 양성간 불평등한 관계가 주된 이유라는 것에는 마르크스주의자와 여성주의자가 모두 동의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폭력은 남성이 남성을 상대로 자행한다는 것도 지적해야 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못하고 낙담해서 때로는 화를 내고 때로는 수동적이고 냉소적이 된다. 노동자가 느끼는 무력감은 그들이 착취당하고 실제로도 권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객관적 현실에 기반을 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는 자본의 지배와 함께 자본주의의 지배적 관념도 함께 받아들이게 된다. 남성과 여성이 여성 차별 관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급진적 여성주의가 주장하듯 남성에게 여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무슨 사악한 욕망이 있어서가 아니다.

노동자들의 분노는 노동조합 결성과 파업 같은 계급적 행동을 낳기도 하지만, 개인적 차원에서 다른 노동자를 공격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여성 차별과 인종 차별은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고, 손쉬운 공격 대상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이주민이나 이주노동자가 실업의 책임을 엉뚱하게 뒤집어쓰거나, 열등해 보인다는 이유로 손쉬운 공격 대상이 된다. 이를 두고, 공격하는 노동자가 이주민이나 이주노동자에게 “권력”을 행사한다고 보는 것은 현실을 완전히 거꾸로 보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폭력은 권력을 갖지 못한 상태, 즉 소외가 낳은 것이기 때문이다.

남성이 여성을 공격하는 것과 지배계급(남녀 불문하고)의 행위를 대조하면 권력을 갖지 못해서 벌어지는 행위(=소외에서 비롯한 행위)와 진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사용자들은 더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여성 노동인력을 사용하려고 노골적으로 여성을 차별한다. 여성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수치심을 느낄 작업 과정을 도입하기도 한다. 유력 언론사들은 여성 차별 이미지를 퍼뜨린다. 잘나가는 중간계급과 지배계급에 속한 여성, 여성 해방에 적대적인 여성, 상업적 여성 잡지 편집자를 맡은 여성 등은 여성 차별을 적극적으로 조장한다.

직장에서 천대받고 사회적 권력은커녕 삶에 대한 선택권조차 거의 누리지 못하는 남성이 행사하는 폭력과 지배계급이 이윤을 목적으로 여성 차별 사상을 부추기는 행위를 동일시해서는 사회적 권력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게 된다. 이런 분석으로는 사회를 이렇게 만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도 잘못됐다.

모든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소외를 겪지만, 각자가 가진 사회적 권력에 따라 소외의 구체적 형태가 달라진다. 현실에서 소외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려면 인간 본성을 추상적으로 논하는 것에서 벗어나, 살아 있는 인간들의 활동과 물질적 조건을 구체적으로 따져야 한다. 그리고 사회관계들을 전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다시 말해, 사회의 한 부분을 떼어내서 그것만 봐서는 안 되고 전체의 한 부분으로 봐야 한다. 그래서 이 글은 서두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가족을 변모케 했고, 생산이 조직되는 방식의 변화가 어떻게 여성에게 변화와 모순을 가져다 줬는지를 다뤘다.

소외된 행동 때문에 여성은 가족 안에서 피해를 입고, 온갖 이데올로기가 이를 정당화한다. 여성은 섹스 상대라거나, 응당 남편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거나, 가사와 양육을 맡아야 한다거나 등등이 그런 이데올로기의 일부다. 여성 폭력이 남성이 권력을 갖지 못해서 생긴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은 양성 불평등 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한 개인이 다른 사람을 학대하거나 강간하게 되는 근본적 원인을 지목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성 차별과 남성우월주의적 편견 때문에 공격하는 쪽은 남성, 피해를 입는 쪽은 여성이 된다. 그러나 여성도 가족 안에서 자신보다 더 불평등한 위치에 있는 존재인 아이를 공격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성주의자들은 이를 두고 여성의 권력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만일 “남성 권력” 이론을 일관되게 적용한다면 그렇게 주장해야 할 텐데 말이다.

인종 차별을 보면 노동자의 행동과 진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행동의 차이가 무엇인지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지배자들은 신문과 언론에 영향력을 행사해, 이주노동자 때문에 일자리가 없다고 선동한다. 노동자들과 달리 사용자들과 정부는 자신들의 생각을 퍼뜨리고 이를 상식인 양 여겨지도록 할 능력이 있다. 이런 생각이 널리 받아들여질수록 지배계급은 득을 본다. 노동자들이 정부나 사용자가 아니라 다른 노동자들에게 분노를 퍼붓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노동자들은 인종차별로 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본다. 사용자와 정부에 맞서 단결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우리 주변의 모든 차별과 참상이 자본의 노동자 계급 착취와 그 방식에서 비롯한다고 본다. 여성 폭력을 인식하려 할 때 계급이 근본적이라는 말은 여성 차별을 계급으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 차별을 자본주의라는 맥락 속에서 보고 여성 차별이 계급 차별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본다는 것이다. 여성 차별과 계급 차별은 별도의 사회적 양상들로서 그저 서로 “교차”하는 게 아니다. 계급 착취가 갖가지 차별을 낳고, 여성 차별과 계급 차별은 긴밀히 연관돼 있다.

계급적 관점에서 여성 폭력을 다룬다는 것은 단지 폭력이 계급에 따라 달라진다고 본다는 것만이 아니다. 노동자 계급은 균등하지 않고, 이들을 갈라놓는 요인이 많다. 종교나 인종처럼 지배계급이 조장하거나 노동자 자신이 위안과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얻으려고 기대는 요인들도 있다. 또, 사무직 노동자와 광원 노동자들이 행동 방식이 다른 것처럼 노동조건에 의해 생겨난 것들도 있다. 이런 요인들은 결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다. 오늘날 사무직 노동자들은 수십 년 전보다 자신을 노동자로 여기는 경향이 훨씬 더 크다. 따라서 여성 폭력을 연구할 때 여러 요인들과 그 영향력뿐 아니라 그 요인들이 급속하게 변하기도 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높은 수준의 계급 투쟁에 참여하는 노동자들은 덜 폭력적인 성향일 가능성이 크다. 혁명적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을 보면 이 점이 두드러진다.

여성과 남성이 근본적으로 갈등 관계라고 보는(즉, 분리주의적) 견해들은 이런 점들을 전혀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는다. 1991년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파업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대체인력 투입을 막았다. 그러자 하청업체 사장들의 아내들이 와서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행동이 “여성적이지 못하다”고 비난했다. 이 사건은 지배계급이 “여성성”이라는 고정관념으로 어떻게 득을 보는지를 보여 준다. 만일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은 여성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에 굴복했더라면 노동자들의 투쟁력은 현저히 저하됐을 것이다. 또한 이 사례는 여성 차별 관념이 노동자 계급에 해롭다는 것도 보여 준다. 여성 차별을 했던 남성 노동자가 파업 참가 뒤 생각이 바뀌는 일이 흔히 벌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성과 남성이 근본적으로 대립 관계에 있다고 보는 여성 폭력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갖는 문제점은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의 계급을 잘못 이해한다는 것(예컨대, 사무직 노동자를 중간계급으로 본다거나 서로 다른 계급에 속한 사람들을 뭉뚱그리는 등)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연구는 계급 이론을 기각하려는 목적으로 수행되는데, 이는 연구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과정에도 영향을 끼친다. 어느 조사에서 피해 여성이 남편이 자신을 때린 이유가 ‘밥을 주지 않아서’, ‘섹스를 거부해서’라고 답했다고 해서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틀렸음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소외와 관련된 모든 행동에서, 예컨대 왜 알코올 중독이 됐느냐고 물었을 때 아무도 “소외 때문”이라고 답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소외라는 것이 그리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소외의 원인, 즉 자본주의를 없애기 위해 사람들을 조직하는 것은 훨씬 쉬웠을 것이다!

급진적 여성주의의 문제점은 여성 차별을 계급 관계에서 떼어내어 살펴보고, 여성 차별 문제를 설명할 때 어떤 형태로든 남녀의 개인적 관계 외의 요인을 도입하면 여성 차별의 중요성이 가려진다고 보는 것이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의 방법은 소외와 착취가 근본적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해 일관된 분석을 제공하려는 것이다. 그럴 때만 여성의 경제적 자립이나, 사회가 여성에게 기대하는 바가 변하는 것 등의 요인들이 가족 제도 속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여성 차별에 관한 근래의 저술들은 적어도 가장 중요한 여성 차별 제도인 가족에 주목한다는 장점이 있다. 브라운밀러가 강조했던 낯선 사람에 의한 강간에서 만연한 가정 폭력으로 강조점이 옮겨진 것은 환영할 일이다. 단지 현실을 더 잘 반영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럴 때만 가족을 하나의 제도로 다루고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어와 커크비 등이 참여한 ≪가정 폭력≫ 같은 연구서는 그 약점에도 불구하고 보부아르나 브라운밀러 등 초기 여성주의자들의 과도한 일반화, 즉 모든 여성을 남성 지배의 피해자로 그리려는 시도를 피하려 한다.

남성이 바뀌는 것이 해결책인가? ― 여성주의의 비관적인 대안

사회의 근저에 계급 문제가 있고 그로부터 여성 차별, 각종 가족관계, 성별 고정관념을 양산하는 교육 등등 여성 폭력을 낳는 여러 요인들이 생겨난다는 것을 이해하면 여성 폭력에 맞서 싸울 전략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타도할 운동 건설이라는 장기적 과제와 연결되는 즉각적인 개혁 요구도 도출할 수 있다. 여성의 경제적 자립도를 높이기 위해 고용 안정, 노동조건 개선, 복지, 주택 등을 요구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개혁만으로 여성 폭력을 끝장내지는 못하지만, 여성이 폭력적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이 좀 더 쉬워지는 데 일조한다. 또한 여성이 남편의 소유물이라거나 여성을 섹스 상대로만 여기는 관념들을 얼마간 약화시킬 수 있다. 여성 폭력에 반대하는 지금의 운동들이 등장한 것도 바로 이런 사회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이런 개혁을 쟁취하는 과정도 중요하다. 노동자 계급 여성과 남성을 단결시키고 강력한 노동자 계급 조직을 건설하는 것은 더 많은 여성들에게 자신감을 줘, 그들이 직장이나 가정에서 여성 차별에 맞서 싸우고 남성의 태도를 바꿀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러나 여성주의자들이 제안하는 해결책에는 이런 과정이 완전히 빠져 있다. 얀 홀스퍼는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족을 통해 형성되는 남성 젠더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런 젠더 형성 과정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무의식적 과정이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프로이트 등의 이론을 동원한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자신이 가족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발 물러선다. 그는 여성과 남성이 기존 가족 제도의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고 그저 개별 남성에게 책임이 있다는 도덕주의적 결론만을 제시한다. 이처럼, 남성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고 남성이 변해야 한다는 것은 급진적 여성주의의 상투적인 해결책이다. 오어도 비슷하게 말한다. “가정 폭력을 설명하고 그 대응을 논할 때 최우선적으로 남성성과 권력을 남용한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 오늘날 우리 문화가 직면한 시험대는 남성성을 일부 재정의해 남성들이 폭력과 여성 혐오로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계속 반복되지만 남성을 훈계한다는 것 외에는 변화를 어떻게 구현할지를 제시하지 않는다. 이런 입장은 아주 비관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기껏해야 남성들에게 그들의 권력(정확히 말하면, 남성들이 갖고 있다고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권력)을 남용하지 말라고 설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슬린 스콧은 가장 처지가 나쁜 남성도 가족 안에서는 지배자 노릇을 하므로 “모든 남성은 체제를 유지하도록 이끌린다”고 주장했다.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는 흔한 관점일 테지만, 이는 수많은 남성들이 지배자들의 공격에 저항하고자 파업과 시위를 벌이고 그중에는 여성의 권리를 위한 행동도 포함된다는 것을 무시한 것이다. 스콧의 다음 말은 이런 관점의 근본적 문제점을 보여 준다.

노예 사회를 바꿀 근본적 힘은 … 노예들에게 있지 않다. … 결정적인 힘은 바로 노예 사회를 통솔하는 꼭대기 층에 있다. … 가족 안에서 학대당하고 두들겨 맞는 여성과 아동들 문제도 그 해결책은 같다. 남성이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첫째, 그런 말은 피억압자들의 해방이 억압자들에게 달려 있다는 것인데 순전한 엘리트주의다. 스파르타쿠스부터, 지난 1백50년 동안 자본가들을 악몽으로 몰아넣은 노동자들의 반란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기도 하다. 억압당하는 당사자들은 결코 이런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이론가들이 뭐라고 떠들든 그들은 싸울 것이다.

둘째, 이런 견해는 남성들을 어떻게 바꿀지 여전히 제시하지 못한다.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모든 것을 경제로 “환원한다”고 비난하지만 그들의 이론이야말로 가족 내 복잡한 관계들을 “남성성”으로 환원하고 비관적인 전망 속에서 조야한 해결책만을 제시할 뿐이다. 물론 여성주의자들이 제출하는 요구들 가운데는 직장과 교육에서의 차별 폐지처럼 사회주의자라면 당연히 지지하는 것들이 포함돼 있다. 최저임금 인상도 좌파의 전통적인 요구였다. 그러나 경제 위기와 실업, 그리고 정부의 공공부문 공격 상황에서 그런 요구들을 성취하려면 여성과 남성이 단결하고 직장에서 노동자로서 갖는 힘을 발휘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많은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이 직장을 남성 영역이라고 치부하거나,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일과 무관하다고 여긴다. 가족이 직장과 분리돼 있지 않다는 것, 직장에서 벌어지는 일이 가족 내 관계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이해할 때만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이 빠진 함정, 즉 남성에게 변하라고 요구하는 것을 해결책으로 여기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때때로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의 개혁안 중 일부 요구들은 보수적 견해를 반영한다.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전쟁을 미화하거나 폭력적인 내용을 다루지 말라거나, 뉴스 진행자는 특정 소식을 전할 때는 슬픔과 고통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는 것 따위가 그렇다. 세계적으로 전쟁과 경제 위기, 기아 사태가 만연하고 그로 인한 폭력과 공포가 넘쳐나는데 그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이를 정화해서 전달함으로써 여성 폭력이 자행될 환경적 요인을 줄여 보자는 것이다. 다시 한번 그들의 견해가 비관적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여성 차별의 발원지는 가족이다. 따라서 여성 차별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려면 동등한 임금을 위해 싸울 뿐 아니라 육아와 가사의 부담을 여성이 아니라 국가에 지우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전략은 자본의 이익을 침해한다. 특히, 경제 위기 때문에 지배계급이 공공지출을 줄이고 노동자들이 위기의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려는 시기에 이런 전략은 자본과 더 강하게 충돌한다. 심지어 전후 장기 호황기에조차 육아와 가사를 완전히 사회화하지는 못했는데 자본의 입장에서 가족 제도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어마어마하게 떠넘기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남성 지배라는 신화≫의 저자이자 인류학자인 엘리너 리콕은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1990년에 재출판하면서 그 서문에 이렇게 썼다. “(노동자 계급 여성이) 교육과 주택, 복지라는 (외견상) 보수적인 쟁점을 놓고 싸울 때 그들은 (급진적 여성주의자들보다) 더 근본적인 것을 놓고 싸우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투쟁은 더 큰 계급투쟁으로 확대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물러설 것이냐 싸울 것이냐가 관건이 된다.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은 대부분 자본주의 타도를 주장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무작정 옹호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여성 폭력을 끝장내고 싶어 하지만 이를 위해 필요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는 것이다.

국가를 이용하려 애쓰는 종류의 급진적 여성주의

포르노가 강간 등 성폭력을 유발한다고 보는 입장은 국가에 포르노 검열을 요구하다가, 국가를 이용해 남성을 교정하려 애쓰는 더 폭넓은 여성주의 입장과 합류하게 된다. 국가를 파트너 삼는 이 입장은 마르크스주의가 주변화된 것과 앞서 언급된 사상적 혼란들 덕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헤더 맥그리거와 앤드류 홉킨스는 남녀의 개인 관계를 중심에 놓는 남성 권력 이론을 논리적으로 그 극단까지 밀어붙이면 어떤 형태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들은 브라운밀러 책이 여성 폭력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한다며 아주 중시한다. 반면에 좌파에 속한 여성들을 “여성 해방을 노동자 계급 해방이라는 더 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긴다”고 비판한다. 이런 비판은 완전히 엉터리이고 왜곡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 시절부터 여성해방과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하나의 투쟁으로 여겨 왔다. 둘 중 하나만 달성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맥그리거와 홉킨스는 동등한 일자리와 임금이라는 요구를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반동적 입장을 드러냈다. “이런 요구들의 공통점은 남성의 행동에 주목하지는 않고 국가에 무엇인가를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국가가 무상 보육을 실시하고, 국가와 민간 직장에서 성차별을 없애라고 요구한다. 그들은 이를 남성들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자 계급 남성이 동등한 일자리와 임금을 위해 국가와 사용자들에 맞서 싸우는 것 말고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맥그리거와 홉킨스가 “사회적 인식을 바꾸기 위해 체계적인 공권력 사용”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을 보면 그들이 국가에 전혀 적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물질적 조건을 변화시켜야만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마르크스주의자들더러 되레 “비관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사회적 인식을 바꾸려고 부부 강간을 범죄화하는 것을 지지하는 것과, 그것이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들은 ‘캔버라 가정 폭력 위기 대응반’이 “사회 변화의 진정한 주체”라고 치켜세우는데, 그 단체는 경찰·법원과 긴밀히 협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또, “가정 폭력 반대 운동의 주된 요구는 경찰과 법원이 피해자 입장에서 더 잘 개입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라는 것이다” 하고 주장한다. 그러나 먼저, 경찰의 위선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경찰은 자신이 필요하다고 여길 때는 집에 침입해서 심지어는 총도 쏘지만 매 맞는 여성이 신고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대응한다.

무엇보다도 국가 권력을 강화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주 신중해야 한다. 가정 폭력 피해여성을 돕기 위한 수많은 요구들 가운데 정부가 주택과 복지 관련 요구는 무시하면서 공권력 개입 강화 요구만 의욕적으로 수용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여성부에 교육 예산을 할당했는데 그 교육의 주된 내용은 가족 문제에 경찰이 개입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운동 방식에 대한 비판은 여성주의 안에서도 오래 전부터 있었다.

엘리트주의

외견상 ‘캔버라 가정 폭력 위기 대응반’의 활동은 진보적인 것처럼 보인다. 피해여성이 경찰에 도움을 호소하면 이 대응반도 함께 출동한다. 피해여성에게 그의 권리를 조언하겠다는 취지에서다. 그러나 맥그리거와 홉킨스도 이런 방식이 갖는 문제점을 알고 있다. “위기 상황에서 도움을 받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모든 도움이 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여성의 입장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은 무능하고 스스로 삶을 결정할 수 없다는 피해 당사자의 믿음을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응반 활동이 “피해자가 수년간 학대를 겪으며 약화된 자존감에 도전”하는 효과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들이 단정하는 것처럼 모든 피해여성들이 자신을 무능하다고 여길지도 의문이지만, 이 대응반 활동을 서술하는 그들의 논조를 보면 그 활동이 아주 엘리트주의적이고, 트라우마 상태에 빠진 여성에게 중간계급식 공상적 박애주의를 강요하려 든다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삶 전체가 전문가의 개입을 필요로 한다는 관점을 깔고 있다. “우리가 제안하는 것은 위기대응반이 위기 때 개입하는 것뿐 아니라 피해여성이나 그 커플이 장기적 치료를 받도록 적합한 기관을 선정하고 그리로 인도할 책임까지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뒤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피해를 부끄럽게 여기는데 이는 비이성적인 것”이라고 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여성에게 가해지는 압력을 고려하면 여성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은 비이성적이지 않고 그저 필자들이 엘리트주의에 눈이 멀었을 뿐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들처럼 “계몽되지” 못해서 “비이성적”이라고 느끼는 자들은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결코 이해할 수 없다. 바로 이 때문에 그들은 동등한 일자리와 동등한 임금과 같은 사회적 환경이 어떻게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더욱이 맥그리거와 홉킨스는 여성의 요청에 따라 개입한다고 말하면서도 경찰이 대응반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가해 남성을 체포하지 않은 한 경우를 부정적으로 다룬다. 그런데 경찰이 남성을 체포하지 않은 이유는 피해자가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필자들은 피해여성의 요청이 없다고 체포하지 않은 것을 비판한다.

그러나 그 어떤 “전문가”가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든 피해여성의 의사에 반해서 개입하려는 것은 전혀 지지받을 수 없다. 과거에 이 점은 사회주의자와 여성주의자들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아주 기초적인 것이었다. 많은 여성들은 즉각적인 폭력을 막는 것만을 원한다. 남성이 체포되길 원치 않는 이유는 다양한데, 그중 하나는 그 남성의 수입에 생계가 걸려 있다는 것이다. 여성에게는 그런 선택을 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공동체의 경우, 정부가 가한 오랜 억압 때문에 연행에 공포를 느끼고 정부 기구에 대해 정당한 불만을 갖고 있고 그 어떤 국가 개입도 의심쩍게 바라본다.

차별에 저항할 사람들의 능력을 키우고 국가를 뜯어고칠 정치 운동을 벌이기보다 국가를 강화하자는 제안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여성의 처지를 개선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이 호소력을 갖는 것은 개별 남녀관계를 핵심 문제로 보고, 구체적 맥락과 무관하게 언제나 남성은 여성에게 권력을 휘두른다고 보는 견해 때문이다. 위기 대응반 활동을 지지하는 여성주의자들은 국가를 동맹으로 여기지만 국가는 계급 사회를 지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적이다.

결론

세계를 변화시키려면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여성 폭력을 낳는 복잡한 과정을 모두 남성의 행동 방식 하나로 환원해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자본주의 역사 내내 여성은 평등한 성적 관계 형성, 성폭력 폐지, 남성과의 동등한 대우 등을 위해 싸워 왔다. 20세기 들어 생겨난 변화, 특히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 이후 생긴 변화를 통해 수많은 여성이 일자리를 갖게 됐고, 바로 여기서 많은 모순이 생겨났다. 이 문제들이 이전 시기보다 오늘날 더 공개적으로 논쟁을 촉발시킨 배경이다. 여성들은 대인관계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고, 낙태와 피임 기술 개발로 더 자유로운 성애가 가능해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여성은 여성을 섹스 상대로만 여기고 여성의 주된 임무는 새로운 노동력인구를 길러내고 지금의 노동력인구를 보살피는 것이라는 사회의 여성 차별에 부딪힌다.

오늘날 수많은 여성이 남성과의 관계를 불만족스럽게 여기고, 남성이 자신의 말을 존중하지 않고 자신을 하찮게 대한다는 불만을 갖는다. 이처럼 도처에서 불만이 쏟아지는 것은 남성이 여성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지만, 동시에 남성의 삶도 그리 순탄치 않다는 것의 반영이기도 하다. 함께 사는 여성과의 관계가 나빠질 때 남성은 결코 득을 보지 않는다. 많은 남성이 여성 차별적 행동을 하는 것은 그런 행동이 자신에게 권력을 부여해서가 아니라,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성이 폭력에 시달리는 것은 우파의 주장처럼 여성이 그것을 즐기거나 그런 행동을 유발했기 때문이 아니다. 셔 하이트의 보고서 <여성과 사랑>에 따르면, 61퍼센트의 여성은 한 번도 폭력을 당한 적이 없고 자신은 절대 그런 상황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또 다른 27퍼센트는 살면서 폭력을 단 한 번 경험했다고 했고, 그 경험을 아주 불쾌하게 여겼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여성은 폭력적인 관계에서 벗어나려 했다.

직장에서 여성들이 동등한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을 두고 남성 개개인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보다는 여성 차별에서 가족이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구실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우리가 여성의 삶을 바꾸고, 더는 남성이 여성을 깔보거나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우리는 여성과 남성이 단결해서 자본주의를 타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1980년대를 거치면서 서구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주변화됐고, 우경화하는 급진적 여성주의자들의 사상이 더 광범한 청중을 얻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위기로 계급투쟁이 다시 대두되면 급진적 여성주의 사상은 여성 운동을 막다른 길로 이끈다는 점이 드러날 것이다.

노동자 계급 여성은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거나, 임금을 올리거나, 직장에서 성추행을 막고자 싸우게 될 때 노동자 계급 남성이 적이 아니라 동맹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투쟁 속에서 여성과 남성 모두 사회에 대한 인식이 바뀔 것이다. 여성들은 투쟁에 참여함으로써 자신들이 강하고 독립적이고 존경과 존엄을 받을 대상임을 입증할 것이다. 이런 투쟁에서 국가는 결국 사용자와 정부의 편임을 숨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변할지는 미리 결정돼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자들이 의식적으로 개입하고 적절한 상황 속에서 여성 차별과 인종 차별에 맞선 주장을 펴고 그에 근거한 정치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

입력 2015-03-31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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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매매처벌법 21조 1항 위헌법률심판

성매매 처벌은 성매매 여성들을 더욱 고통에 빠뜨릴 뿐이다

정진희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이하 성매매처벌법) 21조 1항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법률심판 첫 공개변론이 4월 9일 열렸다. 성매매처벌법 21조 1항은 성매매를 한 사람을 1년 이하의 징역이나 3백만 원 이하의 벌금·구류 또는 과료에 처하는 조항이다.

이번 위헌심판은 2012년 9월 성매매 행위로 기소된 여성이 낸 위헌심판 신청을 오원찬 서울북부지법 판사가 받아들여 2013년 1월 헌법재판소에 제청해 열리는 것이다. 오 판사는 “착취나 강요가 없는 성인 간의 성행위”는 처벌해서는 안 된다며 성매매처벌법 21조 1항에 대해 위헌심판을 제청했다.

2004년부터 시행돼 온 성매매처벌법은 폭력이나 강요에 의해 성을 판매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판매한 여성(과 구매자)을 처벌한다. 21조 1항이 위헌 판결을 받으면 폭력이나 강요가 없는 성인 간 성매매를 형사처벌하지 못하게 되므로 향후 법률 개정과 함께 국가의 성매매 정책을 놓고 격론이 일어날 것이다. (성매매 알선업자와 포주는 다른 조항으로 처벌되므로 이번 위헌심판과는 관련 없다.)

위헌법률심판이 제청된 뒤 성매매 여성들이 헌재 앞에서 번갈아 1인 시위를 하며 위헌 판결을 촉구했다. 성매매 여성과 업주들의 모임인 ‘한터전국연합회’는 성매매처벌법 폐지를 요구하며 4월 9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이달 말 서울 도심에서 성매매 여성 수천 명이 모이는 집회를 개최하겠다고 예고했다.

투신자살

2004년 시행된 성매매방지법(‘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과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의 통칭)은 노무현 정부에서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된 법이다. 성매매방지법 제정을 촉구해 온 한국여성단체연합 소속 여성단체들이나 민주노동당 내 상당수 여성주의자들은 과거 윤락행위방지법에 견줘 큰 개선이라며 새 법을 환영했다.

과거보다 개선된 점은 있었지만, 성매매방지법은 ‘강요’가 아닌 ‘자발적’ 성매매를 처벌하면서 여전히 성매매 여성들을 억압했다. 성매매 여성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지원책은 미미했다. 성매매 알선업자나 포주에 대한 법적 처벌 규정은 강화됐지만 그 실효성은 미약했다.

성매매처벌법 시행 뒤 강화된 경찰 단속은 성매매 알선업자나 포주보다 성매매 여성들을 가장 큰 고통으로 내몰았다. 경찰과 관청, 주류 정치인들과 성매매 업주·포주의 뿌리 깊은 유착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포주들이 처벌받는 경우는 드물었고, 벌금형을 받아도 성판매자에게 전가해 피해를 떠넘겼다.

정부 기관들과 경찰은 성매매가 ‘여성 인권 침해’라며 단속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단속 과정에서 성매매 여성들의 인권이 무수히 짓밟히고 비극이 발생하기도 한다. 지난해 11월 25일 경남 통영의 경찰들이 실시한 티켓다방 성매매 합동단속 과정에서 붙잡힌 성매매 여성이 단속 현장에서 투신자살한 것이 단적인 사례다. 그 여성은 아버지와 딸의 생활비를 보내면서 힘겹게 살아 온 20대 미혼모였다.

당시 경찰이 단속 실적을 올리기 위해 함정단속을 벌인 것이 드러나 논란이 됐다. 그러나 단지 함정단속 같은 ‘무리한’ 방식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경찰 단속 과정에서 성매매 여성들은 증거 채증을 이유로 나체 사진을 찍히고 경찰의 각종 협박에 시달리기 일쑤다. 심지어 경찰에게 강간이나 성추행을 당하는 일도 있다.

성매매 여성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가족이나 친지 등에게 알려지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므로 경찰 단속은 그 자체로 성매매 여성들을 옥죄는 엄청난 압박이다.

지배자들은 성매매 여성을 더는 ‘윤락녀’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않지만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태도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 단속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정부 측은 성매매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성매매 단속을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사회 질서 유지에 이용해 왔다.

대규모 빈곤과 불평등, 소외 등 성매매를 낳는 사회적 요인들은 놔둔 채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성매매 여성들을 속죄양 삼는 처벌 조항은 즉시 폐지돼야 한다.

성구매자 처벌 강화가 해결책일까?

여성주의자들은 대체로 성매매 여성의 비범죄화에 찬성한다. 이는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성매매 당사자 중 성판매 여성은 처벌하지 말고 성구매 남성만 처벌하는 스웨덴 모델을 옹호한다.

2013년 새정치연합의 남인순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 개정안이 스웨덴 모델을 따라 성판매 여성을 비범죄화하고 성구매 남성(과 알선업자·포주)의 처벌을 강화하는 안이다. (성매매 알선업자나 포주 처벌은 다수 나라들도 시행하므로 스웨덴 모델의 특징은 아니다.) 최근 성매매경험당사자네트워크 ‘뭉치’도 성판매 여성을 처벌하지 말고 구매자와 알선업자 처벌을 강화하라는 의견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했다.

스웨덴 모델은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서구의 주류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이 모델에 대한 지지가 늘고 있다. 1999년 세계 최초로 스웨덴에서 성매매 당사자 중 성구매자만 처벌하는 법을 도입한 뒤 2009년 노르웨이, 2010년 아이슬란드에서 이 모델이 채택됐다. (그래서 이제 ‘노르딕 모델’로도 불린다.) 지난해 2월 성매매를 줄이기 위해 성매매 여성이 아닌 성구매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결의안이 유럽의회를 통과하면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스웨덴 모델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스웨덴 모델 지지자들은 성구매자 처벌이 성매매 수요를 줄여 성매매를 대폭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스웨덴 정부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일 뿐, 그 증거는 별로 없다.

스웨덴 정부는 2010년에 낸 보고서에서 거리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 수가 50퍼센트 감소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새 법으로 전체 성매매 여성 수가 감소했는지는 확실치 않다고 시인했다. 인터넷을 이용한 성매매가 늘었다는 것도 인정했다. 요컨대 거리에서 실내로 옮겨간 성매매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실토했다.

스웨덴 모델

스웨덴 모델이 성구매자 수를 줄였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근거가 없다. 성구매자 수를 파악하는 정부 통계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체포와 공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성구매가 억제됐을 수도 있지만, 처벌 위협이 성구매에 대한 남성들의 태도 변화에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미지수다.

게다가 많은 남성들이 해외에서 성을 구매하기 때문에 스웨덴 정부의 금지 조처에 개의치 않는다는 연구 결과들이 여럿 발표됐다. 스웨덴 정부도 2010년 보고서에서 성구매자들이 스웨덴 내에서보다 해외에서 성을 구매하는 것이 더 흔하다고 인정했다.

결국 스웨덴 모델의 뚜렷한 효과는 성매매를 주로 거리에서 몰아냈다는 것일 뿐이다. 전체 성매매 감소 효과는 불확실한 가운데, 성매매 음성화로 성매매 여성들이 더한층 위험에 노출됐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스웨덴의 성매매 여성들은 성구매자 처벌로 성구매자들이 경찰 단속을 피해 낯설고 더 외진 곳에서 만날 것을 요구하거나 콘돔 사용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아(단속시 콘돔이 성구매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들에게 위험도가 커졌다고 법안을 비판했다. 또, 경찰 단속 과정에서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괴롭힘이 증가했다는 조사도 나왔다. 그리고 성매매 여성들은 자신이 원치 않아도 법정에 출두해 ‘고객’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강요받는다고 비판한다.

성판매를 처벌하지 않는다 해도 성구매 처벌로 인해 성매매가 더욱 은밀해진 것이다.

스웨덴 모델도 성매매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구매자나 포주 등의 폭력이나 학대, 질병 등에 노출되기 쉬움)을 줄인다고 볼 수 없다.

물론 평등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성구매 행위를 옹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사회에 만연한 성구매 관행에 도전하는 유일한 방식이 형사처벌인 것은 아니다.

성구매 행위가 곧 남성의 강간이고 폭력이라는 ‘급진’ 여성주의의 주장은 성매매 여성들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 비교적 소수지만 여성들도 성구매를 한다는 사실, 동성애자나 트렌스젠더 등 성소수자들도 성매매를 하는 경우가 많은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성구매를 그저 남성의 지배욕 탓으로 환원하는 분석은 자본주의 가족제도가 여성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성적 자유를 옥죄면서 왜곡하는 핵심 제도라는 점, 성매매는 가족제도의 보완물이라는 점, 바로 그런 이유로 지배자들은 성매매를 처벌하거나 비난하면서도 용인하는 위선과 모순을 보인다는 점을 못 보게 만든다.

결국 성구매자 처벌 강화론은 또 다른 도덕주의를 부추기면서 자본주의 국가의 형벌권 강화에 이용돼, 지배자들이 아니라 노동계급과 천대받는 사회집단들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데 이용되기 십상이다.

대중의 왜곡된 성 의식을 바꾸는 것은 억압적인 국가의 힘을 빌려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자각, 평등의식 고양은 역사적으로 지배자들의 하사품이 아니라 모두 착취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이 스스로 투쟁하면서 사회를 바꾸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특히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는 투쟁을 거치면서 자본주의에서 찌든 온갖 정신적 오염을 떨쳐버리고 착취와 천대가 모두 사라지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서 결정적인 구실을 할 수 있다.

진정한 성 해방을 위하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성매매 비범죄화를 지지한다. 하지만 성매매가 ‘여느 직업과 다를 바 없다’거나 심지어 일종의 ‘성 해방’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성매매 등 성산업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여느 직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에 견줘 폭력이나 학대 등에 노출되기 더 쉽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의 소외와 불평등의 한 증상인 성매매는 사라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매매는 자본주의 사회 구조에서 비롯한 착취와 차별, 소외의 복합적 결과물이므로 자본주의 사회 질서를 지탱하는 국가 억압을 통해 성매매를 없애거나 줄일 수 있다는 생각은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위험하다. 그런 조처는 성판매자들을 더욱 힘든 조건으로 내몰 뿐 아니라 경찰 등 억압기구들을 정당화하고, 가족제도 옹호 등으로 사회 전반을 보수적으로 통제하는 데 이용되기 때문이다.

성매매 행위 처벌에 반대한다고 해서 아예 포주와 알선업자까지 합법화해 성산업을 국가가 관리하는 모델(독일, 네덜란드)이 대안인 것도 아니다.

물론 자본주의에서 거대한 성상품 시장이 형성돼 있고 빈곤과 실업, 복지 축소 등으로 성판매자들이 대규모로 계속 존재하는 한 성판매자들에게 더 나은 조건을 제공하는 법적 규정과 정책이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일축할 수는 없다. (특정 모델을 이상화하기보다 구체적 상황 속에서 따져봐야 할 문제다.)

그러나 성매매의 법적 형태나 국가의 관리 방식이 어떻든 성매매가 여성들을 위한 ‘안전하고 매력적인’ 일자리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성노동권’ 옹호자들도 성매매가 위험한 직업임을 인정한다.

성매매 합법화가 상당수 성매매 여성들에게 더 나은 처우를 가능하게 할지라도 성매매는 인간의 성이 스스로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인간관계와 성 의식을 왜곡한다는 점, 또한 사회적 불평등의 산물인 동시에 사회적 불평등을 강화하는 구실을 한다는 점을 봐야 한다. 그리고 성매매가 광범하게 이뤄지는 현상이 여성을 얕잡아 보고 성적 대상으로 취급하는 분위기를 강화해 노동계급을 분열시킨다는 점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성적 대상

그저 여성들이 안전하게 성매매에 종사하는 사회 건설이 노동계급과 여성들의 목표가 돼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생계나 다른 이유로 성매매로 내몰리는 일이 없어지는 사회,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 속에서 다양한 성적 만족이 충족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돼야 한다.

노동계급이 천대받는 사람들과 함께 착취와 천대 모두에 맞서 싸우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지배계급의 권력을 분쇄할 때 경쟁이 아니라 협력에 바탕을 두고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만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도덕적 낙인 찍기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성매매도 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입력 2015-04-11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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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매매처벌법 위헌심판 관련 기사를 읽고 궁금한 점

독자편지 | 박연오

<노동자 연대> 146호에 실린 성매매처벌법 21조 1항 위헌법률심판 관련 기사를 흥미롭게 읽었다. 그런데 기사를 읽고 풀리지 않는 몇 가지 궁금증이 있다.

성구매 남성을 처벌하는 것이 좋은 정책이 아닌 것과 별개로, 성구매를 도덕적 지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성구매도 단순한 도덕적 일탈이 아니라 소외가 낳은 사회적 문제로 보아야 하는가?

성매매의 비범죄화를 지지하는 데서 더 나아가 성노동권을 지지해야 하는가?

성매매방지법의 효과에 대해 현재 여성주의자들의 (다수) 견해는 무엇인가? 기사에서는 "여성주의자들은 대체로 성매매 여성의 비범죄화에 찬성한다"라고 썼던데, 그렇다면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기존 성매매처벌법령을 지지하던 데서 입장을 바꾼 것인가?

입력 2015-05-15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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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지금 여기 페미니즘》

여성 차별의 사회구조적 원인과 여성 노동자에 주목한 개론서

최미진

사회진보연대가 자신들의 여성주의를 쉽고 친절하게 설명하는 책을 출간했다. 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에서 활동하는 이유미 씨는 노동자와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의, 토론모임 등을 진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페미니즘을 친절하게 소개하려고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이 책은 노동시장에서의 여성 차별, 성폭력 · 성매매 · 낙태 등 섹슈얼리티 문제, 가족제도, 경제 위기와 여성 등 오늘날 여성들이 처한 중요한 문제들을 좌파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또, 여성해방 운동의 역사와 교훈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저자는 국공립보육시설의 대폭 확충과 보육노동자 조건 개선, 성매매 비범죄화, 여성의 낙태권 보장, 시간제 일자리 도입 반대 등을 주장한다. 이 글에서 각각의 쟁점들에 대한 사회진보연대의 견해를 세밀하게 다루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쟁점들에 대해서는 여성운동 내 좌파적 견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사회진보연대의 주장에 대체로 공감한다. 

가족제도와  여성 차별 

△《지금 여기 페미니즘》 (이유미 지음, 사회운동, 194쪽, 10,000원)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은 여성 차별의 “사회구조적 토대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저자는 여성 차별에서 자본주의 가족제도가 하는 구실을 비중 있게 다룬다. 자본주의에서 가족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구실을 하고, 특히 가족 내에서 여성이 무보수로 육아와 가사노동을 주로 담당하는 것은 자본가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재생산 노동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이런 사회진보연대의 분석은 노동자연대가 표방해 온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과 공통점이 많다. 마르크스주의는 여성 차별이 남성의 권력욕이나 지배욕 같은 인간 본성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토대를 두고 있다고 본다.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에는 여성에 대한 체계적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계급의 탄생과 더불어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가 시작됐다는 점을 밝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서 여성 차별이 지속되는 것 역시, 자본주의 체제가 운영되는 방식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본다. 자본가들은 여성들이 노동자로 대거 진출한 오늘날에도 자본주의 유지에 필수적인 노동력 재생산의 책임을 개별 가정의 여성들에게 전가함으로써 비용을 대폭 절감한다. 또, 이를 통해 노동시장에서도 여성에게 저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를 강요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그 물질적 토대인 자본주의에 근본적으로 도전해야 한다. 

이런 관점은 여성의 육아와 가사노동이 자본가의 이익이기만 한 게 아니라, 노동계급 남성에게도 이익이라는 상당수 페미니스트들의 주장과는 차이가 있다. 상당수 페미니스트들은 결국 노동계급 남성도 여성 차별로부터 이득을 얻으므로 여성 차별을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다고 여긴다.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노동계급의 단결보다는 노동계급 내 남성에게서 여성 억압의 원인을 찾는 태도로 이어진다. 

그러나 육아와 가사노동이 개별 가정에게 떠맡겨져 있는 현실은 남성 노동자들에게도 고통스럽다. 남성 노동자들은 “가장”으로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긴 노동시간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하며 일해야 하고, 가족과의 대화에서 단절되곤 한다. 집안일을 아내보다 덜 한다는 것은 여성에 비해 조금의 이익일 수는 있지만, 남성 노동자들이 지켜야 할 사활적 이익은 전혀 되지 못한다. 남성이건 여성이건 노동계급에게 진정한 이익은 자본가들의 이윤에 도전해 노동력 재생산을 사회가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 책은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가족제도를 수용하게 된 과정에 대해서도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에서 여성 노동이 차별받게 된 것은 가족임금(남성 가장의 임금만으로 노동자 가족이 생활할 수 있는 임금) 도입과 관련 있고, 이것은 여성을 작업장에서 차별하고 집안에 묶어두려는 “노동계급 남성과 자본가의 공모”였다고 본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핵가족 제도의 확립에 대해 일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아이와 어른을 가리지 않고 12시간이 넘는 중노동을 해도 입에 풀칠하기가 어렵고 실업이라도 당한다면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 비참한 생활 속에서, 노동자 가족은 남성의 소득으로 안락한 가정을 이루고 여성과 아이가 일하지 않아도 되는 부르주아 가족을 선망”했다는 것이다. 영국의 사회주의자 린지 저먼은 일찍이 가족임금제 도입이 자본가의 선택이자, 당시 가족의 해체가 낳은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동계급 여성과 남성의 소망이기도 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노동자연대는 이런 분석을 공유해 왔다.

여성운동의 역사에 대한 평가  

저자는 부르주아 페미니즘과 급진주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비판적 평가 속에서 “사회구조의 변화를 위한 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부르주아 페미니즘은 노동계급 여성 대중을 해방시키는 데는 무관심했고, 급진 페미니즘은 성적 자유를 허용하라는 의미 있는 요구를 내세웠지만 “경제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사회구조를 분석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비판 속에서 저자는 여성 사회주의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저작을 부각시키며 마르크스주의적 여성 해방 운동의 전통에 주목한다.  

특히, 저자는 한국에서 1990년대 대학가에서 확산된 반성폭력 운동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돌아본다. 이 운동에 동참했던 사회진보연대는 그동안의 활동에 대한 진지한 재평가를 해 온 듯하다. 저자는 당시의 반성폭력 운동은 여성이 처한 현실을 드러내고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문화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계기가 됐지만, “위험과 피해를 부각하는 운동방식은 여성이 성욕의 권리를 가진 주체라고 주장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또, 이 운동은 ‘일상의 정치’를 강조하며 문화적 실천을 벌였지만, 사회구조의 변화를 위한 운동으로 나아가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고 본다.

저자는 최근 사회진보연대의 기관지에서도 당시의 반성폭력 운동이 “여성들의 문제제기가 성폭력 사건화와 처벌화로 수렴”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다양한 반여성적 문화와 언행에 대한 문제제기를 다 “성폭력”이라고 규정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 구성원들 다수는 “금지 목록이 더 까다로워지고 넓어졌으며 그 기준조차 모호해졌다”고 받아들여, 여성 운동에 대한 사회적 반발심만 강화됐다는 것이다. 적극 공감한다. 

노동자연대는 한국어 사용자의 대다수가 “성폭력”을 강간이나 그에 준하는 행위로 인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을 불쾌하게 한 행위’를 모두 성폭력으로 규정한다면 대부분의 남성들은(심지어 여성들조차) 반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또, 이런 성폭력 개념이 거의 모든 남성을 “잠재적 성폭력범” 취급할 위험성이 있다는 점도 지적해 왔다. 그래서 성폭력, 성추행, 성희롱, 포르노, 성매매, 여성차별적 발언 등 각 행위의 특징과 수위에 걸맞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대중과 오해의 소지 없이 소통하고 각 수위에 걸맞는 대처를 하는 데서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해 왔다.

다만, 저자는 성폭력 개념 확장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이 책에서 여전히 성폭력을 “여성억압을 지속시키는 제도 및 관행, 실천들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폭넓게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성폭력 개념 확장이 여러 문제들을 낳았다고 평가한다면, 폭넓은 성폭력 개념 규정 자체를 재고해 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편, 저자가 여성 차별의 사회구조적 원인으로서 자본주의 가족제도에 주목하고 이런 제도가 “자본가의 이익”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여성 차별의 현실을 설명하면서 종종 “남녀 권력관계”, “[남성] 권력의 우위” 등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다소간 혼란스럽다. 이런 용어에는 여성 억압의 원인을 “남성 권력”에서 찾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고유한 문제의식이 반영돼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토론의 기회가 있길 바란다. 

여성 노동자에 대한 강조 

저자가 여러 사회집단 중에서도 여성 노동자를 중시한다는 점, 여성 노동자가 직면한 문제들을 비중 있게 다룬다는 점, 노동자 운동이 여성 차별에 적극 반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저자는 성의 권리를 온전히 보장받기 위해서도 여성들의 경제적 권리(자립)가 보장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다만, 저자는 여성이 주로 종사하는 일은 집안에서 하는 일의 연장으로 취급받아 임금이 낮다는 점을 주되게 강조한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은 여전히 차별받지만 자본주의에서 주변화된 존재가 아니라, 주요 산업과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에 사회변화의 중요한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도 함께 보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는 여성 노동자가 경제적 독립을 해야만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 여성 노동자의 요구와 투쟁을 중시한다. 다만 저자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자본주의 체제 변혁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는데, 나는 이 점을 덧붙이고 싶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노동에 의존해야만 이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 집단적인 투쟁을 통해 단지 개인적 해방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변혁을 이룰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체제를 폐지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노동계급을 사회변화의 중심적인 주체로 본 이유다. 

여성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의 중요한 부분으로 진출한 오늘날, 여성 노동자들은 여성 차별을 낳는 토양인 자본주의 체제를 폐지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 여성 노동자들은 지루하고 고립된 집안일에서 벗어나, 집단적인 노동의 일부로 참가하면서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고 토론하고 투쟁할 수 있다. 이 점이 오늘날의 여성해방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고, 마르크스주의가 여성 노동자에 주목하는 까닭이다. 

여성 해방과 사회 변혁

저자는 러시아의 여성 사회주의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여성해방을 사회변혁의 과정 속에 실현하고자 했다는 점을 소개하며 콜론타이의 전통을 지지한다. 나도 콜론타이의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은 우리가 계승해야 할 전통이라고 본다.  

저자는 콜론타이의 《공산주의와 가족》을 적극 인용한다. 콜론타이는 “부자의 아내들은 오래 전부터 이 짜증나고 피곤한 가사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웠다. 왜 여성 노동자들은 그 부담을 계속 짊어져야 하는가?” 하고 계급 차별적 현실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여성 노동자를 가사노동과 육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야 하고 노동자 국가가 이것을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자본주의 이윤체제에 대한 근본적 도전 속에서 가능한 일이다. 

다만, 저자가 러시아혁명 정부가 여성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추진한 급진적 조처들이 콜론타이의 독창적 기여인 것처럼 묘사한 것은 정확한 서술은 아니다. 콜론타이가 볼셰비키의 여성 정책에서 적극적 구실을 했다는 점은 사실이다. 하지만 레닌을 비롯한 남성 혁명가들의 구실도 주요했음을 공정하게 봐야 한다. 혁명 전부터 레닌의 제안으로 여성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신문 발행이 이뤄졌고, 혁명 후에도 레닌과 볼셰비키당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이혼의 완전한 자유·여성의 낙태권 등 여성 평등을 위한 법률 제정에 힘을 기울였고, 여성을 “가정의 노예”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조처들에도 적극적이었다. 

또한, 저자는 콜론타이의 주장이 실현되지 못한 이유가 당시 대다수 혁명가들이 기존 가족 제도의 유지를 옹호했기 때문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의 주요 혁명가들은 여성 차별의 물적 토대로서 자본주의 가족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러시아혁명에 대한 트로츠키의 다음과 같은 회고는 볼셰비키의 진정한 정신을 보여 준다. “혁명은 소위 단란한 가족, 즉 일하는 계급들의 여성이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고된 노동을 수행하는 곳인 이 오래되고 케케묵고 정체된 제도를 타파하는 데 영웅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 모든 세대가 단결하고 서로 도와 사회주의 사회의 제도들이 가족의 가사 수행 기능을 완벽하게 흡수했고, 그리하여 여성뿐 아니라 사랑하는 부부들이 수천 년 동안 인간을 얽매온 족쇄에서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게 됐다.” 

러시아혁명 초기의 여성에 대한 급진적 조처들이 왜 유지되지 못했는지는 러시아혁명의 성패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국제적 고립과 내전, 그리고 반혁명 때문에 혁명을 주도했던 선진 노동계급이 대부분이 죽고 산업이 파괴되는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여성 해방을 위한 조처를 유지할 물질적 조건이 모두 파괴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반혁명을 주도한 스탈린은 1917년 혁명이 남긴 모든 여성 법령들을 폐기했다. 이제 스탈린주의 정권은 가족의 신성함을 떠벌렸다. 여성의 종속은 러시아 혁명을 이끈 남성 볼셰비키들의 정책 때문이 아니라, 정반대로 볼셰비키의 핵심 인물들을 숙청하고 혁명을 파괴한 스탈린주의 반혁명의 결과였던 것이다. 

사회구조의 변화를 추구하는 여성운동 

저자는 “이 책이 일상의 정치를 넘어 사회구조의 변화를 추구하는 여성운동, 여성노동자를 대변하고 그 힘을 모아나가는 혁신된 노동자운동에 힘을 보태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 지향에 공감한다. 

다만, 이 책은 개론서라 저자가 지향하는 페미니즘의 이론적 쟁점들까지 깊이 있게 다루기는 어려웠던 듯하다. 가령 저자는 콜론타이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이를 두고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의 결합”이라고 해석했는데, 저자가 지향하는 “결합”은 어떤 의미인지 등은 여전히 궁금하다. 이에 대해서는 더 깊이 토론해 볼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비록 저자의 일부 견해에 대해 내가 의문을 제기하긴 했지만, 이 책은 많은 장점이 있고 특히 좌파적인 여성 운동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입력 2015-05-23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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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은이 서평]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 ─ 콜론타이·체트킨·레닌·트로츠키 저작선

근본적 사회변혁과 여성해방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필독서

정진희

페미니즘이 국제적 차원에서 새롭게 부흥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여성들이 처한 모순된 현실(상당한 법률상 평등을 성취했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광범한 여성 차별이 지속되는)과 더불어, 2000년대 들어 일어난 급진화의 산물이다.

페미니즘의 부흥은 북미와 유럽에서 두드러지는데, 이런 급진화 속에서 최근 몇 년 새 서구의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는 특히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과 마르크스주의적 여성해방론(가령 리즈 보겔)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치열하게 투쟁한 혁명가들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클라라 체트킨, 블라디미르 레닌, 레온 트로츠키가 여성해방에 관해 쓰거나 연설한 내용을 담았다.

마르크스주의가 모든 문제를 계급 문제로 환원하므로 여성 차별을 이해하거나 없애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을 보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해방 투쟁을 사회주의 건설에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옛 소련 붕괴(1991년) 이후 한국의 여성운동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스탈린주의와 동일시하면서 여성해방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흐름들이 득세했다. 페미니즘의 주류는 여성 억압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을 거부했다. 그리고 가족제도를 자본주의 착취 구조에서 분리해 남성의 지배욕에 따라 작동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 콜론타이, 체트킨, 레닌, 트로츠키

이런 분석은 약점이 있다. 우선, 여성의 삶이 역사적으로 크게 변해 온 이유를 제대로 밝히지 못한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에서 여성이 처한 모순된 현실(많은 평등 조처가 제도화되고 성과 결혼이나 가족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개방적으로 바뀌면서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는 반면, 여전히 다수 여성의 삶이 크게 나아지지 않거나 심지어 더욱 나빠졌다)을 종합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무엇보다 여성 차별의 물질적 토대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성해방의 전망과 전략도 제시하지 못한다.

평등을 강화하는 개혁 입법들이 있었지만, 자본주의의 구조는 그대로 남았다. 따라서 개혁은 상징적 조처에 머물거나 정치인들의 생색내기에 그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각국 정부가 내핍 정책들을 시행하면서, 노동계급 여성들이 처한 법적 지위와 현실 사이의 격차는 더욱 커졌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세계적으로 유행한 신자유주의 정책들로 기업주와 부유층이 더욱 부유해지자, 여성들 사이의 양극화도 심화됐다.

이러한 현실은 여성해방은 자본주의 체제에 맞선 투쟁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보여 준다. 여성해방 투쟁에 나서려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에 대한 총체적 비판과 근본적 변혁 전략을 제시하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다.

마르크스주의는 여성 억압의 근원을 계급사회의 등장과 그 속에서 가족이 하는 구실에서 찾는다. 이런 분석을 통해 계급사회인 자본주의를 전복하면서 여성해방을 위한 물질적 기초를 창출하고 낡은 관행에 맞섬으로써 여성해방을 성취할 수 있다는 전망을 제시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무엇보다 자본주의 체제를 파괴할 수 있는 세력인 노동계급의 잠재력에 주목하면서 여성해방을 성취할 수 있는 전략을 제공한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저작은 이에 관한 통찰을 보여 준다.

부르주아 여성운동과 사회주의 여성운동

여성해방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접근법은 독일 혁명가 체트킨과 러시아 혁명가 콜론타이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활동에서 명료히 드러난다. 이들은 당대의 부르주아 여성운동을 비판하며 사회주의 여성운동을 구축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독일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뛰어난 지도자는 클라라 체트킨이었다. 체트킨은 여성을 노동조합으로 조직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여성이 임금노동자가 되면서 일어난 변화, 특히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위시한 모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강조점이었다.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은 투표권이 여성이 직면한 문제를 다 해결해 줄 것처럼 여겼다. 그러나 체트킨과 콜론타이는 투표권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투표권 쟁취에 한정하지 말고 노동권, 동일임금, 유급 출산휴가, 무료 보육 시설, 여성 교육 등을 위해 싸워야 하고, 나아가 남성 노동자들과 함께 사회주의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과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재산과 소득 구분 없이 모든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보통선거권을 옹호했다.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했기에 파업과 혁명적 투쟁에 반대하며 계급 협조주의를 추구해, 노동운동을 분열시키고 온건화 압력을 가했다. 여성해방을 착취받고 억압받는 노동계급의 해방운동과 분리하지 않았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착취 질서를 옹호하는 부르주아 페미니즘에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체트킨과 콜론타이의 글과 연설문들을 보면, 체트킨과 콜론타이를 체제 변혁 투쟁으로부터 ‘자율적인’ 여성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한 페미니스트로 묘사하는 흔한 시각이 잘못임을 알 수 있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 체트킨은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등 소수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국제 사회주의의 원칙을 옹호하며 용기 있게 반전·반제국주의 주장을 펼쳤다. 이런 반제국주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하다. 2001년 9·11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서방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무슬림 여성에게 히잡 벗기를 강요한 프랑스 지배계급의 법률과 정책을 옹호했다.

러시아 혁명과 여성해방

역사상 노동계급과 여성해방 투쟁의 정점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계급투쟁이 여성 평등과 해방운동의 진전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줬다.

10월 혁명으로 세워진 소비에트는 모든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법으로 보장했다. 그리고 유급 출산휴가를 전면 도입하고 이혼 간소화와 낙태 합법화 등을 추진했다. 나아가 볼셰비키는 여성해방을 실질화하는 데 가사를 사회화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료 어린이집, 공공 식당, 공공 세탁소 등을 운영해 양육과 가사를 사회화하려고 애썼다.

볼셰비키는 새로운 법을 제대로 구현하려면 여성들 자신이 이 과정을 주도해야 한다고 봤다. 여성부인 제노텔은 이런 맥락에서 만들어졌다. 콜론타이는 제노텔의 두 번째 의장이었다.

남성 혁명가들도 여성해방 투쟁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레닌은 “여성의 적극적 참여가 없다면 혁명은 승리할 수 없다”고 강조하며 제노텔 창설과 그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내전에서 러시아 혁명을 지키는 적군(赤軍)을 이끈 트로츠키도 레닌과 함께 여성 노동자·농민 대회에 참가해 여성들의 활동을 격려했다. 이 책에 실린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콜론타이, 레닌, 트로츠키의 저작과 연설문은 볼셰비키가 혁명 뒤 여성해방을 위해 기울인 진지한 노력의 일부를 보여 준다.

1920년대에 많은 볼셰비키가 여성해방을 위해 헌신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다른 많은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여성해방의 운명도 혁명 자체의 운명과 직결돼 있었다. 러시아는 너무 가난하고 후진적인 사회였다. 그래서 서구에서 노동자 혁명이 성공하지 못하면서 러시아에서 혁명을 진척시키는 데 엄청난 어려움이 있었다. 결정적으로 1918~20년에 벌어진 내전으로 혁명은 탈진해 버렸다. 대규모 인명 피해와 기근이 러시아를 덮쳤다. 이런 상황에서는 여성해방이 계속 진척될 수 없었다.

1920년대 말이 되면 혁명 자체가 아예 역전됐다. 1920년대에 부상한 관료 집단은 1928~29년 일부 남아 있던 혁명의 성과를 모조리 파괴하는 반혁명을 추진했다. 여성의 지위도 역전됐다. 트로츠키가 쓴 “가족 관계의 테르미도르 반동”은 “소련 사회의 실제 성격과 그 지배층의 진화”와 함께 소련에서 가족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예리하게 지적한 글이다.

반혁명 이후 스탈린주의 체제는 서방 자본주의와 경쟁하면서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군사적 필요를 위해 강박적 축적을 해야 하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였다. 흔한 오해와 달리, 옛 소련에서 나타난 여성 억압은 사회주의가 돼도 여성 차별은 계속된다는 점을 입증한 게 아니라, 노동계급 혁명이 패배하면서 어떻게 여성들의 지위가 역전되고 차별이 지속되는지 보여 주는 비극적 사례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여성들의 삶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살던 시기와는 상당히 달라졌다. 긍정적인 변화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여성들은 차별에 시달리고 있고, 심각한 경제 위기로 대다수 여성들의 삶이 악화되고 있다. 지금처럼 불황이 장기화하고 국가 간 지정학적 갈등이 심화되는 때에 불황과 세계대전 그리고 혁명의 시대를 살아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여성해방을 위해 내놓은 통찰과 실천적 경험을 곱씹어 보는 게 유익하다. 이 책은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에 영감을 불어넣고 여성해방의 전망과 전략에 관한 토론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입력 2015-06-20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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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의 여성 노동·가족 정책

여성 노동자 희생 위에서 고용률과 출산율 늘리기

최미진

박근혜 정부는 ‘고용률 70% 로드맵’(2013.6)부터 ‘여성고용 후속·보완 대책’(2014.10)까지 여성 고용률을 끌어올리려 했다. 박근혜 정부가 여성 고용률 증가를 중시하는 것은 우선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생산가능인구 감소를 우려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남성 고용률은 OECD 평균보다 높은 반면, 30~50대 여성의 고용률은 다른 주요 산업국에 비해 떨어진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는 이 부분을 최대한 노동시장으로 끌어내야 전체 고용률을 높여 착취율을 강화할 수 있다고 본다.

게다가 정부는 한국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높아 고등교육 비용은 많이 드는 데 비해, 그만큼 고용률은 향상되지 않고 경력 단절로 인해 숙련도가 유지되지 못한다는 점이 낭비라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정작 박근혜는 여성 노동자의 조건 개선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박근혜는 시간제 일자리를 늘려 여성들더러 단시간 저임금 일자리에서 일하면서 육아도 병행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독일, 네덜란드, 영국의 사례를 집중 조명하는 보고서를 내며 ‘단기간 내에 고용률을 끌어올리려면 시간제 비중을 높여야만 한다’고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이 나라들의 경험은 우리가 따를 게 전혀 못 된다. 예컨대, 독일은 OECD 국가들 중 한국과 일본 다음으로 남녀 임금격차가 큰 나라다(2012년). 특히, 하르츠 개혁 이후 단시간 일자리인 미니잡이 증가하고 주로 여성들이 이런 질 낮은 일자리에 편입돼 남녀 임금격차가 고착화되고 여성 차별이 강화되고 있다.

한국에서 사회서비스 일자리 증가가 낳은 결과를 보면 고용의 양만이 아니라 질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사회서비스 일자리가 늘어나면서(2005년 이후 증가한 취업자의 약 42퍼센트가 사회서비스 산업에서 창출됐다), 이 부문에 여성들이 많이 진출했다. 그런데 국가가 노동자를 직접 고용해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이 아니라 민간 기업들이 시장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이용료를 국가가 지원하는 방식으로 이뤄지다 보니, 새롭게 창출된 사회서비스 여성 일자리의 대부분이 비정규직의 저임금 일자리로 채워졌다.

“일과 삶의 행복한 균형”? 착취 강화 위해 고용률 끌어올리려 하면서 노동조건 개선에는 관심없는 박근혜 ⓒ이미진

책임 떠넘기기

여성 고용률과 출산율을 모두 높이려면 보육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강화돼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중앙정부가 책임져야 할 비용을 지방자치단체와 교육청에 떠넘기고 있다. 그래서 ‘무상보육’이 언제 끊길지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다. 게다가 고용 정책과 마찬가지로, 보육 정책에서도 박근혜는 진정한 문제인 질 개선을 위해서는 전혀 투자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보육시설은 증가 추세이지만 이윤 추구가 우선인 민간 어린이집 위주로 늘어나고 있고 상대적으로 질 좋은 국공립 보육시설 비율은 15년 넘게 제자리걸음이다(5.3퍼센트).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국공립 어린이집 대폭 확충에 재원을 투자하지는 않고 ‘기부채납’에 의존하려 한다.

보육의 질은 보육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보육교사 대 아동 비율은 OECD 평균보다 높고, 보육교사들은 박봉에 시달리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1년 현재 어린이집 보육교사들은 하루 평균 9시간 28분 근무하고 월평균 1백55만 원을 받았다. 이런데도 박근혜는 보육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에는 관심 없다.

경력 단절로 인한 차별을 없애려면 육아휴직을 사용하고 그 후 원직복직할 수 있는 환경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현재 육아휴직 후 직장복귀율은 5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출산·육아를 이유로 불이익을 주고 퇴사를 압박하는 기업주 처벌을 강화하고 육아휴직비를 늘리는 대안이 필요하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기껏해야 쥐꼬리만한 육아휴직비(통상임금의 40퍼센트밖에 안 됨)를 쪼개서 4분의 1은 나중에 직장에 복귀한 후에야 주겠다는 꼼수만 내놓고 있다.

경제 위기 속에서 박근혜 정부는 여성의 희생을 전제로 한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다. 노동시장 구조 개악, 비정규직 종합대책 등 노동계급에 대한 고통전가 공격들도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하향평준화해 여성 노동자들의 조건에 악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이에 맞서 남성과 여성 노동자들이 단결해 투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통계로 본 한국 여성 노동자들의 조건

변화 속에서도 차별은 여전

최근 통계청이 ‘2015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을 발표했다. 이 자료와 더불어 여성과 관련한 여러 최신 통계와 자료들을 살펴보면, 한국 여성 노동자들의 삶이 크나큰 모순 속에 놓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성 노동자들의 삶은 여러 면에서 변모하고 있다. 하지만 여성 차별과 여성에 대한 희생 강요는 모습만 달리할 뿐 뚜렷이 유지되고 있다. 특히, 2000년 이래로 15년 동안 남녀 임금격차 등 여성 차별의 핵심 내용이 거의 변함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분노케 한다.

2015년 6월 현재, 한국의 여성 임금 노동자 수는 8백40만 명이다. 이것은 전체 임금 노동자 수의 44퍼센트에 해당한다. 여성 고용률이 여전히 50퍼센트에 못 미치지만, 여성 노동자 수는 꾸준히 증가해 왔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여성 노동자들이 한국 자본주의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노동력이라는 점이다.

가족의 생계에서 여성의 노동이 기여하는 비율도 점차 커져 왔다. 2015년 현재 우리 나라 가구 중 여성이 가구주인 비율은 30퍼센트에 육박한다. 배우자가 있는 가구 중 맞벌이 비율도 45퍼센트가량 된다.

필수적 노동력

여학생의 대학 진학률도 2009년 이래 계속 남학생을 앞지르고 있다. 전문대학과 4년제 대학 모두에서 여학생의 진학률이 더 높다. 학업 능력이나 교육 수준이 여성을 차별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모두 알다시피, 여성들은 점점 더 늦게 결혼하고 아이도 점점 더 늦게 그리고 더 적게 낳는다. 2000년에는 여성 고용률이 20대 초반부터 급감하기 시작했지만, 15년이 지난 지금 여성들은 더 오래 노동시장에 머무른다.

20대 후반 여성 노동 관련 지표를 보면 고용률, 비정규직 비율, 임금 등 주요 항목에서 남성과 별반 차이가 없다. 한국의 20대 여성 고용률은 OECD 평균보다 더 높다.

그러나 출산·육아라는 커다란 장애물이 여성의 삶에 굴레를 씌우기 시작하는 30대가 되면 여성 노동에 대한 체계적 차별이 두드러진다. 자신의 경력과 임금을 높여 가야 할 30대에 여성들은 육아의 책임을 떠맡느라 체계적인 희생과 차별을 강요 받는다. 30대 기혼 여성 중 경력 단절 경험이 있는 비율은 35퍼센트나 된다. 경력 단절 후 여성들의 임금 손실은 매우 크다. 경력 단절 경험이 있는 여성의 월평균 소득은 경력 단절 없는 여성보다 55만 원가량 적었다(2014년 여성정책연구원 조사).

경력 단절 후 여성에게 돌아오는 일자리는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20대 후반에 여성 비정규직 비율은 36퍼센트로 남성과 차이가 없지만, 40대 이후로는 절반 이상의 여성들이 비정규직으로 일한다. 여성 노동자 중 비정규직 비율은 2000년에 70퍼센트에 육박하다가 지금은 55퍼센트가량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고, 남성보다 여성이 비정규직에 더 많이 몰려 있다.

시간제 일자리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은 각별히 문제다. 정부의 고용률 수치 증대 작업의 일환으로 시간제 일자리의 비중이 증가해, 2014년 현재 여성 노동자의 17.8퍼센트가 시간제로 일한다. 여성 시간제 일자리의 월평균 임금은 정규직의 29.2퍼센트밖에 안 되고, 4대보험 가입률은 17.7퍼센트밖에 안 된다.

입력 2015-08-15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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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앰네스티의 성매매 비범죄화 결의안

성노동과 성매매 비범죄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정진희

지난 8월 11일 저명한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가 국제대의원총회에서 “성노동자 인권 보호”를 위해 성매매 비범죄화 정책을 각국 정부에 권고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국제적으로 논쟁이 일고 있다.

세계의 주요 성노동자 권리 단체와 활동가들이 앰네스티 결정을 환영한 반면, 보수주의자들이나 성매매 금지주의 입장의 페미니스트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주요 국내 여성단체들도 앰네스티 입장을 즉각 반박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성매매 비범죄화 요구는 차별과 천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면 지지해야 마땅하다. 앰네스티의 지적대로, “성노동자들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소외된 집단이다. 많은 나라에서 성노동자는 강간, 구타, 인신매매, 갈취, 각종 건강보험에서 배제되는 등의 차별, 강제퇴거 등 수많은 인권침해 위협을 받고 있다. …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성노동을 선택한 이들을 처벌하고 형법을 적용하거나 경찰을 동원해서 이들의 삶을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이 아니다.“

성매매와 성노동

앰네스티가 성노동자 권리 옹호 차원에서 ‘성노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성매매 전면 비범죄화(합의된 성매매일 경우, 판매·구매·알선까지 모두 비범죄화)를 요구한 것은 국제 성노동자 운동의 주요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이로써 현대 페미니즘과 사회운동의 뜨거운 쟁점인 ‘성노동’ 쟁점이 다시 제기됐다.

역사적으로나 오늘날이나 여성만 성을 파는 것은 아니다. 성을 판매하는 남성은 늘 있었고 1970년대 이후 새롭게 부흥한 성 상품화 속에서 남성 판매자들은 더 많아졌다. 그렇지만 성 판매자의 다수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 차별을 나타낸다.

△성매매의 현실은 이 사회의 빈곤, 차별, 배척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조승진

성매매의 원인과 그 해법을 놓고 여성운동 안에서 언제나 의견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현대 여성운동 안에서 의견 충돌은 그 어느 때보다 크다. ‘성노동’이라는 용어는 현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성 판매는 ‘여느 직업과 다를 바 없는 노동’이라는 뜻으로 그 용어가 사용되면서 성매매가 여성 차별을 나타낸다는 점을 부정하고 흔히 성매매와 성 산업을 긍정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데 자주 사용되기 때문이다.

1970년대 미국의 성매매 옹호 단체가 ‘성노동’을 이런 의미로 처음 사용한 이래, 세계적으로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이 용어가 상당 부분 수용됐다. 여기에는 1970년대 이후 성 상품화가 더욱 발전하면서 성 산업이 국제적으로 성장하는 가운데 성 판매자들이 겪는 지독한 천대와 무권리 상태를 개선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성노동’ 용어는 성매매에 담긴 부정적 의미를 제거함으로써 성 판매자들이 겪는 지독한 사회적 낙인을 제거해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방법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성 판매자에 대한 혐오와 낙인을 제거하려는 의도는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성매매 자체를 긍정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주장은 정치적으로 여러 문제를 야기한다. 지배자들이 위선적인 설교를 늘어놓으며 성매매를 개인들의 도덕적 타락으로 비난하는 것에는 물론 반대해야 하지만, 성매매를 긍정적이거나 무해한 현상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성매매는 자본주의에서 가난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의 비참한 처지와 인간의 소외, 그리고 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열등한 지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매매를 국가 형벌로 금지해야 한다고 보는 페미니스트들은 성매매를 강간, 폭력, 인신매매와 동의어로 사용하는데, 이런 용어법도 문제가 있다. 폭력이나 협박에 의해 성 판매를 강요당하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성 판매자들이 모두 인신매매나 물리적 강요를 받으며 성을 판다고 볼 수는 없다. ‘성노동자들’은 이런 용어법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부정하는 데 이용된다고 비판한다.

성 판매가 종종 ‘자발적’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개별 행위자가 자신의 선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무관하게, 개인의 선택은 진공 속에서가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조건에서 일어난다. ‘자발적’ 성 판매자들은 주로 빈곤과 차별, 배척 때문에 성을 팔도록 내몰리고, 이것은 ‘자유’나 ‘해방’과 거리가 멀다.

성 판매자들을 모두 성노동자로 뭉뚱그려 사용하는 일도 흔한데, 사실 성 판매자들의 조건은 결코 동질적이지 않고 매우 상이하다. 자영업자인 성 판매자들과 업주의 강력한 통제를 받는 판매자(‘성노동자’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릴 법한)의 처지는 상당히 다르다. ‘성노동’은 심지어 성매매를 알선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렇게 느슨한 용어 사용은 성매매를 포함한 성 산업을 긍정적인 것처럼 묘사하고 성 판매자들을 갈취하는 포주 행위 등을 미화하기 쉽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이 글은 ‘성노동(자)’보다 ‘성 판매(자)’라는 중립적 용어를 사용한다. 물론 성 판매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공감하지만, 성매매가 여느 직업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다. 성 판매자들의 조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여느 직업에 견줘 종사자들의 신체적 위험과 스트레스가 훨씬 높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성매매 여성들이 다른 여성들에 견줘 월등히 높은 비율로 살인, 강간, 폭력의 희생자가 된다. 물론 성매매에 이런 위험성이 내재한다고 해서 성매매를 국가가 금지하는 정책을 옹호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에 존재하는 거대한 빈곤과 사회적 혼란, 차별 등은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을 성매매로 내몰고, 성매매를 범죄로 취급하는 정책은 가장 열악한 처지의 사람들을 더욱 위험에 내몰 뿐이다.

성매매에 대한 자본주의 국가의 태도

성매매는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직업”이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는 인류 역사에서 성매매가 언제나 존재한 것은 아니다. 역사가 N J 링달에 따르면, 성매매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처음 생겨난 독특한 문화 현상으로, 이후 이집트·그리스·인도 등 주변 문명으로 확산됐다. 이것은 성매매와 여성 차별이 인류 사회 내내 존재한 ‘남성 권력’의 산물이 아니라, 엥겔스의 주장처럼 계급 사회의 산물임을 뜻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최초의 계급 사회였다.

성매매는 계급 사회에서 두루 발견되는 특징이지만 계급 사회 초기의 성매매와 자본주의 사회의 성매매는 그 규모나 양상이 상당히 다르다.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선구적으로 지적했듯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매춘 여성의 수는 극소수였고 매춘은 배타적 가족관계의 합법적 보조물로 여겨졌다. 장인 생산체제였던 중세 유럽에서 매춘은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것으로 수용됐다. 매춘 여성들은 그들만의 길드를 형성했고 마을 축제와 잔치에 다른 길드와 함께 참여할 수 있었다.

△국가는 성매매를 비난해 음지로 내모는 한편, 성매매를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적절히 규제하는 상반된 태도를 보인다. ⓒ조승진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19세기에 성매매는 이전 사회에서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행해졌고, 대량 빈곤과 불평등 때문에 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대거 성매매로 내몰렸다. 국가는 성매매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여성들을 가혹하게 박해했다.

역사적으로 자본주의 국가는 성매매 여성들을 처벌하는 것과, 성매매 근절은 불가능하므로 규제하는 것(암묵적 인정)을 결합해 성매매에 대응해 왔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들이 성매매에 대해 취하는 태도는 상반된 두 가지 정치적 관점이 뒤섞인 경우가 흔하다. 하나는 성매매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것이고 인격을 모욕하는 것이므로 완전히 근절돼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성을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보고 성 산업을 규제하려는 것이다.

성매매 비범죄화와 성매매 합법화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둘이 같지는 않다. 성매매 비범죄화는 성매매를 형사 처벌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을 뜻할 뿐 그 자체가 합법화는 아니다. 성매매 합법화는 성매매를 국가가 관리하는 모델(관리주의)로, 합법화의 수준과 형태는 아주 다양하다.

성매매 비범죄화를 찬성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합법화를 요구하지만 모두가 그러지는 않는다. 성매매가 합법화되면 성 판매자들의 권리가 획기적으로 향상된다는 견해가 있지만,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다양한 합법화 모델에서 성 판매자들의 법적 권리는 상이하며, 일정한 개선이 뒤따르더라도 성판매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여전히 깊게 남는다.(국가에 성노동자로 등록하는 것은 이런 낙인을 강화하기 때문에 이를 피하는 성 판매자들이 많다.)

국제앰네스티의 이번 결의안은 성매매 합법화 요구를 담지 않았는데, “성노동자들과 논의를 진행할 때 대다수 성노동자들이 비범죄화를 지지하지만 합법화가 초래할 결과를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히 사법당국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잘못된 합법화 모델이 도입될 경우 성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주장하지 못하고 인권침해에 노출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성매매 금지론자들은 성매매 비범죄화가 성 판매자의 인권을 보호하기보다 성 산업을 확대하고 인신매매를 증가시킨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별 증거가 없다. 19세기 이래 대부분의 국가들은 성매매를 범죄로 취급해 처벌하는 정책을 취했지만 인신매매, 강제 성매매는 성행했고 성매매를 포함한 성 산업은 거대하게 팽창했다.

물론, 성매매를 비범죄화하는 수준을 넘어 합법화하면 성 산업은 더욱 팽창할 수 있다. 세계적 불황으로 대량 실업과 빈곤이 늘어나는 시기이고, 세계적 불평등이 존재하고 많은 분쟁으로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는 상황 때문에 성 산업이 확대될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성매매 비범죄화나 합법화가 아니라, 성 판매자가 아닌 성 구매자를 처벌하는 노르딕 모델이 성 판매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성매매를 대폭 축소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매매특별법 제정은 성매매를 둘러싼 논쟁을 다시 불러왔다 2011년 성매매특별법 폐지를 요구하는 성매매 여성들. ⓒ사진 제공 정의철

노르딕 모델의 신화

그러나 노르딕 모델이 성공적이라는 주장은 스웨덴 정부가 부풀린 신화에 불과하다. 1999년 스웨덴 성구매자 처벌법 도입 뒤 스웨덴에서 성매매가 대폭 감소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강화된 단속으로 성매매가 더 은밀해졌을 뿐이다. 인터넷을 이용한 성매매가 크게 늘어났고, 마사지 업소 증가 등이 보도됐다.

스웨덴에서 성 판매자들의 처우가 더 악화됐다는 불만은 당사자들로부터 많이 제기되고 있다.

노르딕 모델에서 성 판매는 처벌 대상이 아니지만 성 구매나 성을 팔기 위한 장소 임대 운영은 여전히 처벌 대상이다. 그래서 “성노동자들은 여전히 형법을 적용하여 성노동을 없애려는 의도를 가진 경찰들에게 쫓길 수 있다.”(앰네스티)

성 판매자들은 경찰의 협박을 받을 뿐 아니라 구매자 보호를 위해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최근 몇 년 새 이뤄진 해외 연구를 보면, 경찰은 성 구매자를 체포하고 기소하기 위해 성 판매자들을 조사하고, 감시와 협박을 가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 때문에 성매매 여성들이 경찰에게서 자신의 활동을 보호하려고 포주에게 더욱 의존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제앰네스티는 성매매 여성을 직접 처벌하지 않더라도 성매매 자체를 범죄로 간주해 구매자를 처벌하고 성매매 장소 제공, 알선 등을 처벌해 성 판매자들의 조건을 악화시키는 방식이 많이 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성 판매자 두 사람이 안전을 위해 함께 일하는 것도 성매매업소 운영으로 규정하는 나라들이 있다.

성구매자 처벌을 통해 성매매의 수요를 억제한다는 발상은 성 상품화가 모든 것을 상품으로 만드는 자본주의 사회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무시한다. 또, 자본주의 국가를 계급 중립적 도구로 활용해 여성 해방의 지렛대로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도 담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는 경제적 착취와 사사화(私事化)된 가족제도 유지를 통해 여성 차별을 구조화하고 재생산하는 핵심 주체이다. 지배계급이 성매매를 대하는 태도와 무관하게, 국가와 지배계급은 착취와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지탱함으로써 성 산업 번성에서 평범한 남성 개인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구실을 한다.

따라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노르딕 모델을 진보적 모델로 치켜세우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많은 나라 지배자들이 노르딕 모델을 지지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제도가 결코 피지배자들에게 유리한 것이 아님을 방증한다. 오늘날 많은 국가는 빈곤과 불평등의 사회적 근원을 가리고 가난한 이주자를 추방하고 경찰력을 정당화는 수단으로 ‘성매매와의 범죄’를 벌이며 종종 페미니즘의 언사를 사용한다. 노르딕 모델은 가장 세련된 최신 모델일 뿐이다.

조직화 문제

이번 국제앰네스티 결의안에는 또한 성노동자가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를 옹호했다. 1970년대 이후 서구에서 성노동자 권리 운동이 벌어지면서 성노동자를 노조로 조직하려는 시도가 늘어났다. 이 때문에 성노동자 조직화 문제가 노동자 운동의 뜨거운 쟁점이 되기도 한다. 몇 년 전 영국에서는 성노동자 조직화 문제를 놓고 노동자 운동에서 격렬한 논쟁이 일었다. 한국에서는 2004년 성매매방지법 도입으로 단속이 강화되자 이에 항의하는 성매매 여성들의 시위가 벌어졌고, 그 영향으로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성노동자 조직화를 강조하기도 했다.

성 판매자들의 노조나 단체 결성 같은 조직화 시도가 단지 현대의 현상은 아니다. 19세기 중반 인도, 1920~30년대 과테말라, 식민지 시대 케냐 등지에서 성매매 여성들이 스스로 조직해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인 경우가 있었다.

1970년대와 1990년대 초반에는 에이즈 위협에 맞서 빈국에서 성매매 여성들의 조직화가 두드러졌다. 인도의 성매매 여성들은 성노동자 노동조합을 조직해 신노동조합계획(NTUI)에 가입했다. 아르헨티나의 성매매 여성들은 2001년 자신들의 노조(AMMAR)를 설립하고 아르헨티나 노동조합 총연맹(CTA)에 가입했다.

인도 같은 몇 나라를 제외한다면, 성매매 여성들의 조직화 규모는 매우 작다. 성매매에 대한 국가의 처벌과 판매자들에 대한 강한 낙인 때문에 성노동자 운동이 성장할 가능성은 매우 작다. 단지 법률적 억압이나 사회적 편견만이 성노동자 운동을 제약하는 요인은 아니다. 성 판매자들의 조건은 매우 상이하고, 모든 이들이 스스로를 ‘성노동자’로 인식하지 않고 그런 정체성으로 규정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많은 성 판매자들이 빈곤 때문에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성매매를 선택하고, 더 나은 기회가 있다면 성매매를 그만두려 한다.

따라서 좌파가 ‘성노동자’ 조직화를 강조하는 것은 성노동자 운동이 처한 근원적 한계를 간과하는 것이다. 게다가 성 산업에서 조직화 시도는 성 산업을 정치적으로 정당화하는 시도로 이어지기 쉽다는 문제점도 염두에 둬야 한다.

물론 성매매 여성들은 억압에 맞서고 자신의 조건 개선을 위해 스스로 싸우고 단체를 결성할 권리가 있다. 우리는 이들의 시위나 성매매처벌법 조항 위헌 소송 등의 투쟁을 지지한다. 그러나 좌파가 성노동자 운동의 요구나 주장 등에 무비판적일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맺으며

여성 해방을 바라는 사람들은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국가 탄압에 반대하고 그들의 삶을 개선하는 투쟁을 지지해야 한다. 비록 성 판매는 많은 위험이 뒤따르는 일이지만 성매매 금지 정책은 성 판매자들을 더 안전하게 만들지 않고 도리어 그들을 더욱 열악한 처지로 내몬다. 인신매매는 물론 계속 금지해야 하지만, 성매매 자체를 범죄화해 성 판매자를 처벌하고 강제 추방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매매 비범죄화와 함께, 인신매매된 여성들에게 난민 지위를 부여하고 이들이 정착하려는 곳으로 이주할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성매매와 그보다 더 넓은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위한 진정한 대안은 괜찮은 일자리를 얻을 기회를 보장하는 것과 주택, 양질의 저렴한 보육시설, 무상 고등교육 등 사회 복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성매매와 성 산업을 양산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노동계급 혁명을 통해 분쇄해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물질적·정신적 필요를 충족하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람들의 관계는 착취와 차별이 모두 사라지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만들 수 있고, 이것은 성매매와 성 산업을 역사의 유물로 만들며 진정한 여성 해방과 성 해방을 성취하는 과정이다.

입력 2015-08-29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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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째 변함없는 남녀 임금 격차 ― 왜 이다지도 불평등한가?

최미진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는 여성 차별을 표상하는 대표적인 분노의 숫자다. 무려 15년 동안 그 격차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 2014년 8월 현재, 여성 임금노동자의 월평균임금(1백62만 원)은 남성(2백70만 원)의 60퍼센트다(김유선, ‘여성 비정규직 실태와 정책 과제’). OECD 국가들 모두에서 여성의 상대임금은 남성보다 낮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이 가장 낮다.

지난 10여 년 동안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과 교육 수준이 높아졌고 그에 따라 평등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커진 것에 비춰 보면, 이런 굼벵이 같은 불평등 완화 속도는 여성들에게 큰 실망과 분노를 느끼게 한다. 일부 여성 혐오주의자들이 ‘역차별’ 운운하는 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망상인 이유다.

남녀 임금 격차는 여성 차별의 결과다. 우선, 여성은 같은 일을 해도 임금 차별을 받는다. 1989년에 여성운동의 성과로 남녀고용평등법에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 조항이 포함됐지만, 현실에서 이 조항은 무력화돼 왔다.

여성 노동자들은 동일노동 동일임금 조항이 실제 구현되려면 여행원제·여사원제와 같은 성별분리호봉제가 폐지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래서 결국 여행원제는 사라졌다. 그러나 그 후에도 기업주들이 여성 노동자 임금은 올리지 않고 남성 신입사원의 초봉만 삭감하는 꼼수를 쓴다든지, 인사제도의 이름만 바꿔 임금·승진 차별을 지속했다. 2000년대 들어서 금융권에 도입된 분리직군제는 여행원제의 부활이라 할 수 있다.

대기업인 효성의 울산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남성과 똑같은 공정에서 일하는데도 임금이 남성의 60퍼센트밖에 안 되는 현실을 폭로하며 소송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결국 기업주의 손을 들어줬다. KTX 여승무원의 사례처럼 외주화를 통한 간접 차별도 벌어지고 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성 중립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여성이 집중돼 있는 직무를 간접고용으로 돌려 동일노동 동일임금법을 회피하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에 견줘 비정규직에 더 많이 몰려 있는 것도 임금격차가 해소되지 않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 여성 비정규직의 월평균임금은 남성 정규직의 35.9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김유선, 같은 자료). 여성 노동자 중 비정규직의 비율은 2000년대 초반 70퍼센트 가량에서 현재 55퍼센트로 떨어지긴 했으나, 남성에 비하면 여전히 높은 편이다. 게다가 정부의 시간제 일자리 확대 방침 속에 임금이 극히 낮은 여성 시간제 노동자가 증가하고 있어 여성 임금은 더 악화할 가능성이 높다.

기업 규모에 따른 임금 격차가 큰 상황에서 여성 노동자가 소규모 사업체에 더 많이 몰려 있다는 점도 임금 격차의 원인 중 하나다. 2009년 경제활동인구조사를 보면, 여성 임금노동자의 65.3퍼센트가 30인 미만 소규모 사업체에서 일하고 있다(남성은 52.8퍼센트).

물론, 2015년 3월 현재 3백인 이상 대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 중 여성의 비율이 34퍼센트 가량(김유선, ‘대기업 비정규직 규모: 고용형태공시제 결과’) 된다. 따라서 여성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노조를 조직해 조건을 개선할 잠재력이 있다는 점도 함께 봐야 한다. 

이른바 ‘성별 직종 분리’도 여성 임금이 낮은 원인으로 꼽힌다. 여성이 주로 종사하는 직종과 남성이 주로 종사하는 직종이 다르고, 여성 비율이 높은 직종의 임금이 낮은 경향이 있다. 2005년 한국노동사회연구소의 분석을 보면, 직업 내 여성 비중이 70퍼센트 이상인 이른바 ‘여성 지배 직종’의 평균 임금은 ‘남성 지배 직종’에 견줘 절반이 조금 넘는다. 물론 여성 노동자들은 특정 성별에만 편중되지 않는 ‘혼합 직업’에도 30퍼센트가량 진출해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봤듯이, 남성과 같은 직업을 가질 때조차도 동일임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여성 노동자들의 근속 기간이 출산과 양육으로 인한 경력 단절 때문에 남성보다 상대적으로 짧은 것도 임금 격차의 주요 원인이다. 한국의 여성 고용률은 출산 연령대인 30대 초반에 떨어져서 40대 후반이 돼야 다시 높아지고, 재취업한 일자리의 대부분은 비정규직이다.

한국의 주된 임금 체계가 근속에 따라 임금이 상승하는 연공급제이므로 경력 단절을 겪는 여성에게 연공급제는 불리하다. 이 때문에 여성운동 일각에서는 직무급제를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할 수단으로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박근혜 정부와 기업주들이 직무급제를 도입하려는 데서도 보듯이, 이들은 “직무 가치의 공정한 평가”를 통한 여성 차별 해소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전체 임금 몫을 삭감하는 데만 관심 있을 뿐이다. 결국 직무급제는 기존의 여성 차별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장기근속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는 데만 이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임금에 대한 정부의 총체적 공격에 분명히 반대하고, 생활임금 보장과 여성 임금 인상을 통해 임금 격차를 좁히는 투쟁을 해야 한다. 

이중의 굴레

남녀 임금 격차는 자본주의에서 여성노동자에게 강요되는 이중의 굴레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은 사회적으로 이뤄지지만, 노동력 재생산의 주된 책임은 개별 가족에게 맡겨져 있다. 노동력 재생산은 자본 축적에 필수적이지만, 자본가들과 자본주의 국가는 그 부담을 최대한 개별 가족에게 떠넘겨 비용을 절감하려 한다.

물론, 자본가들은 여성을 전업주부로만 남겨두지 않고 노동자로 착취해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길 원한다. 자본주의 국가가 제한적이나마 양육 지원 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본가 계급에게 여성을 노동자로서 착취할 필요성은 심지어 경제 불황기에도 줄어들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가 경제 위기 속에서도 여성 고용률을 끌어올리려 애쓰는 것이 그 사례다.

그럼에도 자본가 계급은 가사와 양육에 대한 대대적인 사회적 투자를 지속적으로 하길 꺼린다. 더욱이 지금처럼 장기적이고 심각한 경제 위기 시기에는 과거에 이뤄진 부분적 사회화 조처도 공격받기 십상이다. 이런 자본가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여성 노동자들에게 이중의 굴레가 강요되고, 이것은 경력 단절 없고 안정적이며 임금이 높은 일자리에 취업할 기회를 제약한다. 또한, 자본가들은 여성이 가사노동의 주된 책임자라는 점을 강조하며 노동시장에서의 여성 차별을 정당화한다. 

노동시장의 가부장제?

페미니즘에서는 남녀 임금 격차의 원인이 ‘노동시장의 가부장제’ 때문이라고 보는 경향이 많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가부장적 구조”가 가정 바깥의 노동시장에서도 유지돼, 여성들이 가정에서의 역할이 연장되는 주변적인 직업군에 몰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구조에서 남성들은 임금노동과 가사노동 모두에서 이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남성을 주요 생계부양자로 취급하는 이데올로기가 가족임금 제도로 정착된 것도 여성의 저임금을 정당화한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분석에는 몇 가지 난점이 있다. 우선, 가부장제가 노동시장으로 확장된 결과로 직업 분리를 설명하는 것은 오늘날 여성 노동의 진정한 성격을 보여 주지 못한다. 여성이 모두 가사노동과 유사한 직업에서만 일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1970년대에 여성 노동자들이 수출 제조업에 많이 진출한 것이나 오늘날 여성 노동자들이 판매·서비스·사무직에 많이 진출한 것은 그 직업들과 가사노동의 유사성 때문이 아니었다. 각 시기에 새롭게 팽창한 산업에서 여성 노동력이 대거 필요했기 때문이다. 설사 가사노동과 유사한 성격의 일이라 할지라도 집안에서 개별적으로 무보수로 하는 것과 잉여가치 창출 과정의 일부로서 집단적으로 하는 것은 명백히 다른 특성이 있다.

둘째 문제는 남성 내의 계급 차이를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본가들은 여성을 이중의 굴레에 묶어둠으로써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절감하고, 성별에 따라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단결을 방해하고, 여성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착취하므로 큰 이득을 누린다.

그러나 남성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다. 남성 노동자가 여성에 견줘 상대적으로 더 나은 처지라 할지라도, 노동계급 남성이 여성의 저임금과 차별 대우를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여성 차별은 계급 분열의 효과 때문에 남성 노동자 전체에게 해롭게 작용한다. 가령, 여성의 저임금은 오히려 남성의 임금 인상을 제한하기 위한 압력으로 작용한다. 여성이 저임금 일자리에서 고통받으면 그와 함께 사는 남성 노동자는 생계 유지에 더 압박을 받을 것이다.

임금에 대한 남성과 여성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는 것은 두 집단의 임금 추이를 봐도 알 수 있다. 1998년~2008년 동안 여성과 남성 임금은 동반 등락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그래프). 또한, IMF 경제 위기 이래로 매출액 대비 인건비 비중과 노동소득분배율이 큰 폭으로 하락해, 성별을 막론하고 전체 노동자들이 가져가는 몫 자체가 줄어들었다.

자료: 한국노동연구원, '한국노동패널조사', 각년도.

출처: 금재호, 월간 노동리뷰, 2010년 9월호

노동자들 사이에 임금 격차가 존재하지만, 임금을 얼마나 많이 받든 자신이 생산한 가치의 일부만 임금으로 받고 나머지는 자본가에게 빼앗긴다는 점에서 모든 노동자는 착취당한다. 이것은 노동계급 내 여성과 남성이 자본가에 대해서는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한다는 것을 뜻한다. 노동계급 내의 남녀 임금 격차를 좁히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 격차를 전체 착취 관계 속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노동계급 전체의 몫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노동계급이 단결해 여성 차별을 완화하는 대안을 추구할 수 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위한 투쟁

자본가들이 여성 노동자 차별과 착취를 정당화하려고 ‘남성이 주요 생계부양자’라는 이데올로기를 퍼뜨리고 여성을 부차적 노동력으로 취급한다 해도, 이데올로기와 실재는 구분해야 한다. 남성 노동자들 대부분은 가족 전체를 부양할 만큼의 ‘가족 임금’을 받은 적이 없고, 여성들의 임금은 가족의 생계에서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여성 대학 청소 노동자들은 “내가 바로 가장”이라며 투쟁했다.

여성이 저임금에 비정규직 일자리에 많이 일하고 있다고 해서 여성 일자리가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데서 덜 중요한 주변적인 일자리라는 뜻은 아니다. 한국의 여성 임금노동자는 전체 임금노동자의 44퍼센트를 차지한다. 여성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수년 동안 계약을 갱신하며 지속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이 상당수 포함된다.

이것은 오늘날 여성 노동자들이 단지 가부장제의 희생자가 아니라,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스스로 투쟁할 수 있는 주체라는 뜻이다. 임금 차별은 고질적이지만,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차별 임금에 맞서 투쟁할 잠재력이 충분히 있다. 대학 청소 노동자들과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 마트 노동자들 등 곳곳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맞서 투쟁해 왔다. 이런 투쟁 속에서 임금 차별을 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자라날 것이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포기할 수 없는 여성 노동자들의 요구다.

입력 2015-09-19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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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축제의 성 상품화 중단하라

양효영 (대학생, 노동자연대 학생그룹 활동가)

얼마 전 한 대학 축제에서 성 범죄를 소재로 주점 메뉴 이름을 지어 논란이 됐다. 해당 학과는 ‘성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려’ 했다고 변명했지만 명백히 여성에 대한 강간과 살인을 희화화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대학 축제에서 여성에 대한 비하적 표현이나 여성의 성적 이미지를 이용해 상품을 판매하는 분위기는 결코 한두 대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한 대학 주점 천막에는 “술도 먹고 너도 먹고”라는 홍보 문구가 크게 적혀 있다. 주점 메뉴들의 이름은 일부러 ‘야동’ 제목을 연상케 만들어졌다. 주점에서 여학생들이 몸에 딱 붙는 치파오나 가터벨트, 망사스타킹을 신고 호객행위를 하는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축제 중 데이트할 여성을 경매하는 “노예팅”도 있다. 축제만이 아니라 대학 동아리 공연 포스터 등에서 심심치 않게 성적 이미지와 표현들이 등장한다.

 

대학의 ‘야한 문화’는 오늘날 사회 전반에 만연한 ‘야한 문화’의 일부다. 1990년대 여성 가수의 배꼽티를 두고 큰 논란이 벌어졌던 보수적인 분위기는 이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아이돌 가수들의 노출과 성행위를 연상케 하는 안무는 이제 더는 놀라운 일도 아니게 됐다. 한국에서도 텔레비전에서 봉춤이 여성에게 좋은 운동으로 소개되고 있고, 온갖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은 여성 연예인의 몸매를 카메라로 훑어 내리기 바쁘다.

이런 상황이 뭐가 새로운 걸까? 여성들은 오랫동안 성적 대상으로 여겨져 오지 않았나? 고깃집 벽에 붙어 있는 소주 광고부터 핸드폰 기기변경 광고까지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엔 여성의 성적 대상화가 “자신감 상승”이라는 이름으로 부추겨지고 있다.

얼마 전 여성단체들의 거센 항의로 폐지된 <렛미인>은 “뚱뚱하고 못생긴” 여성들의 인생을 성형수술로 “구제”해 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참가 여성을 때리고 폭언을 일삼고 이혼을 요구하던 남편이 성형수술 후 “완벽한 모습으로 거듭난” 참가 여성을 보고 180도 바뀐 태도를 보여 준다. 외모와 성적 매력이 여성의 자신감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비슷한 취지에서 최근 몇몇 총학생회는 취직 면접 자신감을 높여 준다며 성형수술 지원을 공약으로 내걸기도 했다.

지난 7월 국립국어원은 ‘몸매가 착하다’는 말을 표준어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여성의 신체는 이제 겉모습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그 사람의 심성까지 표현하게 됐다. 이제 여성의 몸은 부위마다 ‘애플 힙’, ‘물방울 가슴’ 등 등급이 매겨져 모든 사람들이 그 기준에 맞게 몸을 가꿔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됐다. 매년 여름철 날씬한 몸매를 위해 끼니를 걸러서 영양성 빈혈로 병원을 찾는 10~20대 여성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

또 성 상품화는 성을 인간의 본성에서 따로 떼어내 낯선 것으로 만든다. 성이 관계 속의 자연스러운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통제 바깥에서 사고팔리고 평가받는 것이 됐다. 성이 상품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서로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기 쉽다. 더 높은 토익 점수와 더 많은 자격증처럼 성적 능력도 하나의 ‘스펙’이 돼버려, 자신의 성적 능력을 보여 줘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린다. 남성들은 카사노바처럼 수많은 여성의 신체를 탐하고, 여성들은 섹시한 몸매를 통해 남성을 성적으로 유혹하고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이 ‘능력’이 됐다.

대학 내의 성 상품화는 사회 전반에 만연한 성 상품화의 일부다.  ⓒ사진 임수현

낯선 성

성이 더욱 상품화될수록 우리는 성을 진정으로 누릴 수 없게 됐고 성에 대한 왜곡된 관념만 부추겨졌다. 성적 표현들이 그 어느 때보다 노골적인 시대이지만 진정한 성과 인간관계에 대한 교육은 형편없이 부족하다. 올해 8월 교육부는 “(남성의) 성에 대한 욕망은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충동적으로 급격하게 나타난다”, “지하철에서 성추행 당하면 실수인 척 발등을 밟는다” 등 황당한 내용이 포함된 성교육 자료를 일선 학교에 내려 보냈다.

지난해 이맘때 숙명여대 총학생회는 축제 의상 규제를 발표했다. 이를 두고 한편에선 여학생들의 인권을 위해서 복장규제는 ‘필요악’이었다는 입장이 존재했다. 다른 한편 김어준은 이를 두고 “조신한 딸 콤플렉스”라고 했고 <한겨레> 정혁준 기자 역시 ‘차도르와 부르카라도 필요하냐’며 “꼰대스러운” 결정이라 비판했다.

후자 같은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은 성 상품화에 내재돼 있는 엄연한 여성 차별을 ‘쿨하게’ 없는 셈 취급하자는 것이다. 성 상품화 광풍으로 말미암아 여성 개개인이 느끼는 압력과 고통에도 무관심하기 짝이 없는 태도다. 그렇다고 의상을 강제로 규제하는 것 역시 성 상품화라는 엄연한 구조를 그대로 둔 채 여성 개개인을 ‘헤픈 여자’로 비난한다는 문제가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성을 더 자유롭게 즐기고 성에 대해 개방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를 지지한다. 그러나 성 상품화는 오히려 진정한 성 해방을 가로막는다. 대학 축제에서 온갖 성적 표현들이 난무하고 심지어 ‘남성 잡지’인 <맥심>은 강간 살해와 여성에게 약물을 먹여 성폭행하는 것도 소위 ‘섹시한’ 문화로 포장해 상품으로 팔지만, 게이나 레즈비언들의 조건 없는 사랑은 이상하고 역겨운 것으로 억압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대학 내에서 성 상품화나 여성 차별적 문화에 반대하는 것은 대학 내 좌파들의 중요한 과제고 임무다. 성 상품화는 여성을 인격체가 아니라 사물처럼 대상화함으로써 마치 여성을 ‘보기 좋은 것’, ‘소유할 것’으로 여기는 생각을 정당화하며 여성 차별을 ‘세련되게’ 재생산할 뿐이다. 대학 내에서 여성과 남성이 단결해서 성 상품화에 맞서고, 진정한 성 해방에 대해 토론하고 투쟁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국에선 대학생 대상의 ‘랩댄스 클럽’에 반대하는 운동이 조직되기도 했다.

물론 성 상품화는 자본주의 체제의 한 증상이므로 자본주의 체제를 폐지하는 것만이 성 상품화를 없애고 진정한 성 해방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 것이다.

입력 2015-10-07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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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벌거벗은 말들의 세계》

여성 혐오는 남성의 지배 전략이 아닌 차별적 체제의 단면

이현주

최근 여성운동 안팎에서는 이른바 여성 혐오가 지속적으로 화두가 되고 있다.

문제로 지적돼 온 여성 혐오 발언들은 주로 인터넷 상에서 게시글, 댓글 형태로 벌어지는 여성에 대한 모욕, 조롱, 멸시 발언들이다. 단순히 여성차별적 의식을 드러내는 수준이 아니라, 혐오와 적대감에 기초해 여성을 비하하고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공격을 찬양, 고무,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매우 역겨운 표현들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김치녀’(경제력이 없으면서 부모나 남자친구 등의 지갑에 의존하는 여성을 일컫는 말), ‘삼일한’(여자는 3일에 한 번씩 때려야 한다), ‘보슬아치’(여자인 것이 벼슬인 양 행동하는 것을 여성의 성기에 빗댄 말)와 같은 표현들이 있다.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벌거벗은 말들의 세계 
윤보라 , 임옥희, 정희진, 시우, 루인, 나라 지음 | 현실문화 | 256쪽 | 14,000원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벌거벗은 말들의 세계》는 최근의 이런 ‘여성 혐오 현상’을 다루고 있다. 《페미니즘의 도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정희진 씨(이하 모든 필자에 존칭 생략)를 비롯해 여성학 연구자들과 성소수자 연구자, 인권운동가 여섯 명이 필자로 참여했다. 일부는 여성 혐오를, 다른 일부는 성소수자 혐오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필자들은 각각 초점을 달리하며 여성 혐오와 성소수자 혐오의 문제점과 원인에 대한 나름의 분석을 내 놓고 있다.

먼저, 윤보라는 여성 혐오 발언들이 어떻게 여성들을 몇 가지 ‘나쁜 여성’ 유형에 끼워맞춰 놓고 매도하는지를 잘 폭로한다. 한국 여성은 “극단적 개념 상실, 이기주의, 공동체 의식 부재, 쾌락과 허영에 환장하고, 남자와 사회공동체를 이용해 개인적 이득만 챙기려는 몰염치”한 자로 그려진다. 윤보라는 이런 매도가 신자유주의하에서 여성들이 겪는 고통을 은폐하는 구실을 한다고도 지적한다.

익명성에 힘입어 인터넷 상에 우익적·반동적 말들이 오가는 것은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최근 여성 혐오 발언들은 ‘역차별’ 코드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특징적이다. “‘이기적’이라는 표상의 핵심은 여성들이 각종 ‘우대 정책’을 등에 업고 남성의 몫으로 배정된 지분을 앗아간다는 설정이다.” 이제 더는 차별이 없는데도 여성들이 권리와 특혜를 누리는 바람에 남성들이 손해를 본다는 피해의식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이다. 군 가산점 폐지가 이런 ‘피해의식’을 형성하는 계기로 작용했고, 이에 따라 ‘여성부’와 페미니스트들은 ‘악의축’이 됐다.

한국에서 1990년대와 2000년대 동안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의 문제제기와 노력에 힘입어 호주제 폐지 등 법적·제도적 차별이 많이 개선됐다. 오늘날 여성들은 남성보다 더 높은 비율로 대학에 진학하고, 노동시장에 대거 진출해 노동력의 중요한 일부가 됐다. 일부 여성들은 법관이나 국회의원, CEO가 되는가 하면, 대통령도 여성이다. 그래서 일부 여성들의 처지는 명백히 다수 남성 노동자들의 처지보다 낫다.

그러나 다수 여성들은 여전히 체계적인 차별에 시달린다.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는 특히 심각한 수준이다. 육아 부담으로 인한 여성의 경력단절 현상도 뚜렷하다. 경제 위기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더 한층의 저임금·불안정 일자리를 강요하고 있다. 일부 남성들의 ‘역차별’ 주장은 일부 여성들의 성공 이면에 여전히 존재하는 이런 여성차별의 현실을 보지 않는 것이다.

군 가산점 폐지를 근거로 여성을 공격하는 것도 가당치 않은 주장이다. 물론 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국가에 의해 부당하게 동원된 남성들은 적절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병역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지 여성의 책임이 아니다.

‘여성 혐오 현상’, 왜?

상황이 이런데도 최근 몇 년간 온라인 상의 여성 혐오 발언이 늘어난 이유는 뭘까.

여성차별을 아로새기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차별적 의식을 받아들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본주의는 자본축적에 필요한 노동력 재생산 임무를 노동계급 가족(여성)에 떠넘긴다.지배자들은 이런 임무를 강요하고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려고 온갖 차별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 자본주의의 소외 때문에 체제에 대한 노동계급의 불만과 분노는 종종 계급 내의 다른 이들을 향한 공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의 혐오 발언은 특히 깊어지는 경제 위기와 청년 실업, 그것이 낳은 좌절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경제 위기와 청년 실업의 영향은 여성들에게도 고스란히 미치고 있는데도, 일부 보수적 남성들이 ‘이제 여성 상위시대가 됐다’는 과장된 인식 속에서 여성에게 엉뚱한 분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여성 혐오를 다룬 저자들은 경제 위기와 실업이 낳은 효과를 한 번씩 언급은 하면서도 근본 원인은 다른 데서 찾는 듯하다.

가령 윤보라는 “최근의 여성 혐오 현상이 높은 청년 실업률이나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의한 남성의 좌절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은 섣부른 단정”이라고 본다. 오히려 여성 혐오를 “여성의 주체성을 삭제하려는 작업”, “주체의 위치에 서고자 한 여성들을 저지하는 [남성들의] 투쟁”과 연관시킨다. 2008년 촛불항쟁을 계기로 여성들이 정치적 주체로 등장한 상황에서 이런 작업이 필요해졌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임옥희는 정신분석학을 사용해, 여성은 남성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존재이므로 원초적으로 남성은 여성을 두려워하고 혐오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또 정희진은 “여성 혐오 발화는 가부장제의 일상”이라고 보고, ‘남성들의 언어’에 의해 여성들이 만들어져 왔음을 강조한다. 시우는 여성 혐오가 남성 간의 유대와 지배적 위치 유지·공유를 위해 필요해진다고 주장한다.

즉, 각각 내용은 다르지만 저자들은 대체로 여성 혐오 현상을 남성들의 공통된 이해관계에서 비롯한 필요·전략과 연관시킨다. 물론 여성 혐오 발언을 쏟아내는 자들이 거의 다 남성이고 여성에 대한 끔찍한 편견과 비하, 적대를 드러내는 걸 보면, 여성 혐오가 근본에서 성 적대에서 비롯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표면적인 현상 설명은 될 수 있어도 구체적인 현실에 기초한 분석은 못 된다.

이런 관점이 남성을 단일한 이해관계를 공유한 집단으로 가정하기 때문이다. 필자들은 여성을 단일한 집단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데, 모순적이게도 남성은 단일한 집단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남성 역시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남성들 사이의 계급적 차이 때문에 자본가·국가관료의 삶과 노동계급 남성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국가관료는 실질적 권력을 휘두르지만 노동계급 남성은 자신(과 여성)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여성을 체계적으로 차별함으로써 이득을 누리는 장본인도 소수의 남성(과 소수 여성)들이다.

여성차별이 체계적으로 유지되는 사회에서 남성 대부분이 여성차별적 의식을 어느 정도씩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더 적극적인 의미의 ‘혐오와 적대’를 드러내는 남성은 소수라는 점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나아가 혐오와 적대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자들은 더 적다.)

여성 혐오자들이 익명성이 보장된 온라인 세계를 넘어 오프라인으로까지 유의미하게 세를 확대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 보수적 성향의 언론들조차 혐오 발언을 부정적 늬앙스로 보도한다는 점, 혐오 발언을 한 연예인들이 여론의 뭇매를 맞고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다는 점 등은 결코 여성 혐오 발언이 대중한테서 큰 호응을 얻지 못했음을 방증한다.(<조선비즈>가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더라도 20대에서 ‘일베’에 공감한다고 답한 사람은 8.6퍼센트뿐이었다.)

변화

여성 혐오를 다룬 저자들이 대체로 한국사회 전반에 여성 혐오가 퍼져 있다고 전제·암시한다. 그러나 사실 온라인 상의 혐오 발언이 늘어난 시기인 2000년대 동안에도 남녀 대중의 의식은 전반적으로 발전하는 추세였다. 지난 30년 동안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꾸준히 확대돼 왔는데, 이런 물질적 현실의 변화는 여성과 남성 모두의 의식과 개별적 관계들에 영향을 미쳤다. 임금노동을 하면서 여성들은 주체적 권리와 필요, 욕구를 지닌 존재임을 자각했다. 그 결과 여자는 집에서 아이와 남편의 뒷바라지나 해야 한다는 전통적 여성관은 약화해 왔고, 개별적 관계도 평등지향적인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 가령 통계청의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한 가사분담실태조사에 따르면, ‘부인이 가사를 주도하는 경우’는 2008년 89.4퍼센트, 2010년 87.4퍼센트, 2012년 80.5퍼센트였고, ‘부인이 전적으로 가사를 책임지는 경우’는 각각 33.4퍼센트, 31.2퍼센트, 24.4퍼센트로 소폭 줄어드는 추세를 보였다. 여전히 가사의 많은 부분을 여성이 맡고 있지만, 여성의 사회 진출로 남성이 가사를 분담하는 비율이 늘어나는 추세인 것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면서 여성은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중요한 일부가 됐다.(윤보라는 2008년 촛불항쟁을 계기로 여성이 정치적 주체가 됐다고 분석하지만, 여성들은 노동계급에 편입되기 시작한 자본주의 초기부터 언제나 저항운동의 중요한 일부였다.) 이런 투쟁의 경험은 여성과 남성 노동자 모두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물론 사람들의 의식은 불균등하고 한 사람의 의식도 모순돼 있다. 의식이 단선적으로 또는 자동으로 발전하는 것도 아니다. 특히 여성차별을 체계적으로 지속함으로써 유지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의식 발전에 제약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물질적 조건의 변화와 함께 대중의 의식이 변화해 왔다는 사실은 사태를 종합적으로 봐야 할 필요성을 보여 준다. 몇몇 인터넷상에서의 악성 저질 발언들이 대중 의식의 표본이라고 가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균형 있게 종합적으로 보지 않으면, 오늘날 여성들이 수세에 몰려 있고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 사이의 단결은 요원하다는 인식을 강화시킬 수 있다. 여성 혐오를 다룬 이 책의 저자들은 남성집단이 단일하다는 가정으로 말미암아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균형있게 분석하고 있지 못하다.

여성 혐오적 발언과 표현들은 우리가 여전히 지독하게도 차별적인 체제에 살고 있다는 점을 보여 주는 한 단면이다. 또한 오늘날 여러 법제도적 개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해방은 쟁취해야 할 과제라는 점을 보여 준다. 여성차별과 천대는 (남성 일반의 지배욕이 아니라) 자본주의 가족제도와 착취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의 필요 때문에 여성차별 이데올로기는 체계적으로 부추겨진다. “벌거벗은 말들”에 맞서려면 그것을 재생산하는 원천인 차별적 체제에도 맞서야 하는 이유다.

요컨대, 이 책은 최근의 여성 혐오 현상이 어떤 방식으로 벌어지는지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이런 현상이 왜 벌어지는지, 여성에 대한 체계적인 천대와 차별은 어디서 비롯하는지에 대해서는 유용한 분석을 내놓고 있지는 못하다.

성소수자 혐오의 정치적 배경

이 책에는 성소수자 혐오와 관련해서도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다. 먼저,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운영위원이자 《무지개 속 적색: 성소수자 해방과 사회변혁》(책갈피)의 옮긴이인 나라는 최근 성소수자 혐오 세력이 성장한 과정과 그 배경, 그리고 이에 맞선 성소수자 운동의 대응에 대해 짧은 글이지만 꼼꼼하게 살펴보고 있다.

특히 나라는 한국의 성소수자 반대 운동의 성장을 “사회적 위기가 심화되고 복지와 노동조건,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상황”과 연결시키고 소수자 속죄양 삼기가 결국 사회 전체의 불평등과 부정의를 유지하기 위한 프로젝트임을 밝힌다. 뿐만 아니라 나라는 한국에서 성소수자 혐오 세력이 “박근혜 정부의 핵심 지지 기반이고, 정권 실세들 가운데 상당수가 직간접적으로 성소수자 반대 운동과 연결돼” 있음을 폭로한다.

박근혜 정부 들어 성소수자 반대 운동은 행동주의를 강화해 왔고, 국가기관은 공공연히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부추겨 왔다. 이 때문에 성소수자 운동은 최근의 성소수자 혐오를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나라는 한국의 성소수자 운동이 이런 혐오에 대응해 나가면서 성장했고, 진보진영 내 연대도 확대되는 등 성과도 있었다는 점을 균형있게 다루고 있다.

한편, ‘트렌스/젠더/퀴어연구소’의 루인의 글은 주로 페미니즘과 성소수자 운동 내의 트렌스젠더, 바이섹슈얼에 대한 편견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어, 루인은 여성운동 내에서 트렌스젠더여성이 “인공적인 존재”, “여성성을 강화”하는 부적절한 존재로 여겨져 왔음을 비판하고, ‘자연적 몸/젠더’와 ‘인공적 몸/젠더’라는 이분법과 여성을 “단일하고 동질적 범주로” 보는 관점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여성운동에 대한 루인의 비판에 공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적·후기구조주의적 페미니즘의 한계

 

한편, 루인의 주장은 포스트모더니즘·후기구조주의의 논의를 반영하고 있다. 이런 관점은 정희진의 글에서도 묻어난다.

포스트모더니즘적·후기구조주의적 페미니즘은 ‘여성범주 자체를 해체’하고 여성이 하나의 집단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은 여성을 생물학적, 경험적, 정치적으로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으로 간주하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정체성 정치)에 대한 반대에서 출발했다. 이 정치에 따르면, 같은 여성 내에서도 성·인종·계급·장애·성지향·민족·직업 등 다양한 정체성이 공존한다.

포스트모더니즘적·후기구조주의적 페미니즘이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정체성 정치는 루인이 든 사례와 같이 트렌스젠더처럼 ‘원래 여성의 몸이 아닌 여성’에 대한 부당한 편견을 낳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여성이 모두 다 다르다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가 억압에 맞서 싸우기에 효과적인 사상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제기하는 ‘차이의 정치’에서는 모든 억압이 개인마다 다르고 상대적이다. 물론 개인들이 겪는 차별의 구체적인 양상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억압을 없애려면 억압을 묘사하고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억압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는 억압을 착취적 사회구조와 분리시키고 개별적 차원에서 접근한다. 총체성을 거부하고 어떤 문제를 단일한 원인과 구조로 설명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 대신, 불확실성과 불확정성, 현실의 다양하고 파편적인 특징들을 강조한다.

이렇게 총체성을 거부하는 관점은 억압의 물질적 기초를 설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억압에 맞서 효과적인 투쟁 전략을 세울 수 없다. 여성차별과 성소수자 차별은 노동력 재생산 임무를 개별 가족에 떠넘기고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려는 자본주의 필요 때문에 유지된다. 따라서 차별을 없애려면 자본주의라는 계급사회를 공격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계급은 여러 다른 차별 중 하나가 아니다. 계급은 개인들이 억압의 경험이 다를지라도 계급을 토대로 단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다른 한편, 포스트모더니즘적·후기구조주의적 페미니즘은 ‘여성은 만들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애초에 ‘여성’을 ‘여성’이라고 구분할 만한 본질적 특징이란 없다고 보고, 남/여 구별과 범주화를 완전히 해체해 버린다. 이 관점에 따르면 성기와 같은 신체적 차이도 남/여를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이 관점은 구별과 범주화 자체가 차별을 낳는다고 보는 듯하다. 정희진은 “인간을 성sex을 기준으로 구분gender해야만 가부장제 사회가 작동[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가 고정된 여성성과 남성성이 있는 것처럼 선전하고 이를 강요하는 것은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여성과 남성 사이에 신체 자체가 다르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문제는 이런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자본주의 시스템이지 구별 자체가 아니다. 구별 자체가 차별을 낳는다고 보는 관점은 이데올로기와 담론의 구실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이고, 자본주의에서 여성차별의 물질적 기초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입력 2015-10-07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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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억압을 설명하기 위해 가부장제 이론이 필요한가?

최미진

여성 억압의 원인을 설명하기 위한 다양한 이론들이 있지만, 그 중 가장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가부장제 이론이다. 대부분의 페미니스트와 좌파들이 가부장제가 여성 억압의 원인이라는 주장을 많든 적든 받아들인다. 혁명적 좌파 일각에서도 가부장제 이론(또는 개념)의 수용 여부는 하나의 쟁점이다.

가부장제는 원래 남성 가장(아버지)이 나머지 가족 성원들의 노동력을 통제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가족 형태를 묘사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페미니즘에서는 이런 제한적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가부장제는 말하는 사람마다 각양각색의 뜻으로 사용되고, 심지어 그저 여성 억압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 가부장제는 자본주의와는 구분되는 여성 억압 구조로서 “여성에 대한 남성 지배”를 뜻한다. 따라서 가부장제 이론의 핵심 함의는 ‘남성 지배는 특정한 경제적 생산양식을 초월해 존재하고 혁명적 사회 변화가 일어나도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가부장제 개념은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마르크스주의 계급 이론과는 독자적인 여성 억압 이론을 개발하려는 시도에서 발전했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성별 권력 관계(“남성과 여성은 지배·피지배 관계”)가 여성 억압의 본질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여성 억압을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한 남성의 본성처럼 치부함으로써 여성 억압의 토대를 밝히지 못했다. 이 때문에 페미니즘 내에서도 ‘생물학적 환원론’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것은 실천적으로 남녀 분리주의, 계급 투쟁과 분리된 별도의 가부장제 반대 투쟁이라는 전략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여러 종류의 페미니스트들(특히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도 가부장제 이론을 수용·접목했다. 이들은 대개 착취를 설명할 때는 마르크스주의가 유효하지만, 억압을 설명할 때는 가부장제가 결합돼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급진 페미니즘의 논리에 열려 있었다.

그 중 가부장제를 ‘이데올로기 양식’이나 심리적 영역으로 본 이론가들은 그것의 토대가 무엇인가는 밝히지 못하는 약점이 있었다. 이와 달리, 나름으로 가부장제의 물질적 토대를 밝히려 한 시도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하이디 하트만은 여성의 노동력에 대한 남성의 통제가 여성억압의 물질적 토대라고 주장했고, 남성 노동자들이 자본가와 공모해 보호입법과 가족 임금을 확보함으로써 여성 노동력을 통제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현대 페미니즘의 여성 노동 이론에서 여전히 자주 인용된다.

자본주의 초기에 일부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이 특정 직업에 진입하는 것을 반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극히 일부에서 벌어진 일일 뿐이고, 그 핵심 성격도 ‘노동 희석’, 즉 여성 노동자의 진입으로 인해 임금이 떨어지는 것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탄광에서 여성의 지하 작업을 금지하거나 여성과 아동의 노동시간을 규제한 보호입법은 여성에게 해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가족 임금 요구 역시 남성 노동자의 음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남녀 노동계급 모두 가족 구성원 모두가 집 밖에서 혹사당하는 끔찍한 현실을 완화할 그나마 나은 대안으로 가족 임금을 요구했다. 하지만 가족 모두를 부양할 만한 충분한 임금을 실제로 보장받는 남성 노동자들은 거의 없었고, 가족 임금제가 자본주의에서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 경향을 막지도 못했다.

당시 두 가지 생산양식 이론이 생겨난 배경에는 이른바 ‘사회주의’로 불리는 옛 소련과 동유럽, 중국과 북한 같은 체제에서 여성 억압이 온존하는 현상을 보며 많은 좌파들이 느낀 혼란도 있었다. 자본주의가 사라진 사회에서도 여성 억압이 남아 있다면 여성 억압은 자본주의와 별도로 작동되는 원인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들에서 나타난 여성 억압은 사회주의에서도 여성 차별이 계속된다는 점을 입증한 게 아니라, 노동자 권력이 파괴됐거나 처음부터 없었던 나라들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여줄 뿐이다. 1920년대 말쯤 스탈린은 1917년 러시아혁명의 성과를 모조리 파괴하는 반혁명을 이끌었다. 그 후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인간의 필요가 아닌 서방 자본주의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강박적 축적에 매달리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를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여성은 종속적인 지위로 전락했다. 소련을 모델로 건설된 동유럽과 중국, 북한 등의 국가들에서는 아예 노동자 혁명이 벌어지지도 않았고, 그 사회 성격도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한 변형태일 뿐이었다.

오늘날에는 반세계화 운동의 성장 속에서 벌어진 급진화 때문에 페미니즘 내에서도 계급의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커졌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에 우호적인 페미니즘 중에서도 마르크스주의로는 여성 억압을 온전하게 설명할 순 없고, 별도의 분석이 보완돼야 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착취와 계급 문제를 중시하는 반면 억압을 부차적으로 여기고, 특히 재생산, 가족, 여성에 대한 폭력 등의 문제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와 가부장제 이론의 진정한 차이점은 억압을 중시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억압의 근원을 무엇으로 보고 억압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여성 억압의 물질적 토대

마르크스주의는 여성 차별이 수천 년 동안 지속됐지만 결코 보편적이거나 영원한 것이 아니라 계급사회가 발전하면서 시작했다고 본다. 19~20세기까지 살아남은 수렵 · 채집 사회들을 조사한 인류학자들(엘리너 리콕, 윌리엄 턴불, 리처드 리 등)의 연구를 보면 이 점을 알 수 있다.

수렵 · 채집 사회에서 농업 사회로 전환하면서, 생산 형태도 여성의 노동(주로 채집)이 남성의 노동과 동등하게 중요한 형태에서 남성이 사회의 부를 대부분 생산하는 형태(경작과 목축)으로 전환됐다. 이런 생산 형태에서는 여성들이 하루 종일 무거운 쟁기를 끌거나 소를 모는 일은 임신을 하거나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일과 양립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 사회적 잉여와 국가를 통제하는 일을 주로 남성이 맡게 됐다. 이와 함께, 종교적 · 법률적으로 통제되고 남성이 우위를 점하는 배타적인 가족이 발전했다.

오늘날의 여성 차별 역시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에서 비롯한다. 자본주의가 등장하면서 여성들의 삶을 포함해 사회 전반이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가족을 자본주의적 착취와는 무관한 영역으로 여기고 그 안에서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주목할 뿐, 자본주의에서 가족제도가 하는 구실을 주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족의 기능과 형태는 그 사회에서 생산이 이뤄지는 방식과 매우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자본주의 이전의 가족과 자본주의의 가족은 완전히 다르고, 자본주의 하에서도 가족은 변모해 왔다. 자본주의는 단지 생산 방식만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가족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은 사회적으로 이뤄지지만, 노동력 재생산의 주된 책임은 개별 가족에게 맡겨져 있다. 노동력 재생산은 자본 축적에 필수적이지만, 자본가들과 자본주의 국가는 그에 따른 부담을 최대한 개별 가족에게 떠넘겨 비용을 절감하려 한다. 만약 가족이 이 부담을 떠맡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국가들은 가족의 사회화에 대한 투자 수준을 엄청나게 늘려야 할 것이다.

가족은 이데올로기적 기능도 한다. 가족제도는 여성이 열등하다거나 집안일은 여성의 숙명이라는 보수적 관념을 강화해 노동계급의 단결을 방해하고, 노동자들이 가족을 위해 온갖 부당한 조건을 감내하고 체제에 순응하도록 만든다. 이처럼 사사화된 노동력 재생산 방식은 경제적·이데올로기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에 기여한다.

물론, 자본가들은 여성을 전업주부로만 남겨두지 않고 노동자로 착취해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길 원한다. 자본주의 국가가 제한적이나마 양육 지원 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본가 계급은 가사와 양육에 대한 대대적인 사회적 투자를 지속적으로 하진 않는다. 더욱이 지금처럼 장기적이고 심각한 경제 위기 시기에는 과거에 이뤄진 부분적 사회화 조처도 공격받기 십상이다. 그래서 가족은 노동력을 저렴하게 재생산하는 주요 제도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여성차별을 철폐하려면 여성차별을 구조적으로 영속시키는 자본주의 체제에 근본적으로 도전해야만 한다.

여성 차별은 남성의 이익인가

그런데 자본주의가 여성억압에 미치는 영향을 인정하는 사람들조차 남성이 가족 내에서 권력을 누리고 여성의 가사노동으로부터 이득을 얻는 것은 사실이라고 여긴다. 바로 이 때문에 남성들이 현상 유지를 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삶의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남성은 대체로 여성보다 집안일을 덜 하고, 어떤 남성들은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것은 ‘남성 권력’ 이론의 직접적 증거로 여겨진다.

그러나 지배계급 남성과 노동계급 남성은 똑같은 ‘권력’을 갖고 있지 않다. 노동계급 남성은 여성들의 삶은커녕 자신의 삶조차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다. 돈을 잘 못 버는 남성은 가족 안에서도 무시당하곤 한다. 노동계급 남성이 저지르는 폭력은 여성을 지배하는 실질적 힘의 원천이 아니라, 소외의 뒤틀린 표현이다.

물론, 가족 내에서 존재하는 성별 분업을 보면 남성이 여성의 희생에서 이득을 보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대다수 가정에서 가사와 육아는 주로 여성이 맡고 있다. 맞벌이일 때조차 그렇다. ‘집안일은 여자가 해야지’라는 남성들의 차별적 사고는 이런 불평등에 어느 정도 작용한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 남성 노동계급이 공유하는 객관적 이해관계는 구분해야 한다.

노동계급 남성은 여성보다 가사노동을 덜 함으로써 약간의 이득은 얻겠지만, 그것은 남성 노동자들이 사사화된 재생산 방식을 고수해야만 할 정도의 막대한 이득은 못 된다. 여성이 주로 육아와 가사의 책임을 맡는 현실의 이면에는 남성 노동자가 생계를 더 많이 부양해야 하는 현실이 존재한다. 남성 노동자의 평균 노동시간과 직장 이동시간은 여성보다 길다. 게다가 여성의 가사노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이를 양육하는 데 드는 시간이다. 여성이 가정 내에서 하는 육아는 남편 개인에게 제공하는 서비스가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 제공하는 것이다.

시야를 가족 내부로만 돌리지 않고 체제 전체적으로 보면, 자본주의 하의 사사화된 노동력 재생산이 노동계급의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미치는 파괴적 영향력이 더 크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사회가 대대적으로 가사 노동과 육아를 책임지고 개별 가정의 여성과 남성이 가족 부양의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이것은 남녀 노동계급 모두에게 이익이다. 즉, 남성과 여성 노동계급은 가사와 육아의 사회화에 공통의 객관적 이해관계가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 가부장제 이론은 여성해방을 위한 실천에서도 중요한 차이를 낳는다. 가부장제 이론을 일단 받아들이게 되면 여성해방에서 자본주의 폐지를 위한 노동계급 투쟁의 핵심적 중요성을 간과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남녀 노동계급이 여성 억압의 뿌리인 자본주의 폐지를 위해 함께 투쟁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존재 이유인 이윤에 타격을 입히는 힘을 발휘할 능력이 있는 세력은 노동계급뿐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노동계급의 핵심적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이것이 곧 노동계급의 현 상태를 용인하고 추수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계급 내에서 벌어지는 여성 차별적 언행이나 다른 피억압자들의 투쟁을 기각하는 경향에 도전해야만 한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억압받는 모든 집단이 스스로 조직하고 투쟁하는 것을 지지해 왔고, 노동계급의 중심성 개념은 노동계급이 자신의 작업장 쟁점뿐 아니라 차별과 억압에 맞서 싸우는 데서도 계급 고유의 힘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이런 잠재력을 현실화하려고 애써야 한다.

입력 2015-10-07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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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결과 연대로 승리한 레이테크코리아 여성 노동자들

독자편지 | 이창배

지난 9월 8일, 노숙농성 71만에 레이테크코리아 여성 노동자들이 승리했다.(레이테크코리아 노동자들의 그간의 투쟁 상황에 대해서는 “다시 투쟁에 나선 레이테크코리아 노동자들”(https://wspaper.org/article/16081)을 참조하시오.)

사측은 서울 공장의 안성이전 계획을 철회하고 11월 중에 현재 작업장을 노사가 공동답사해 서울의 더 넓은 곳으로 이전하기로 했다. 또한 지난 5월 부당하게 내려졌던 모든 징계도 철회됐다. 최저임금에 맞추느라 오래 근무할수록 근속수당만큼 기본급이 줄어드는 임금체계를 개선해 기본급을 법정최저임금으로 하고 근속수당, 직급수당 등을 추가해 지급하기로 했다. 정년 55세가 되어 일터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사실상 해고와 다름 없었던) 조합원 3명의 내년 1월 복직 약속도 받아냈다. 해고 당시 노동자들은 작업장 문 앞에 매일 나와 일할 수 있게 해달라며 사장에게 호소했지만 비조합원들에게는 정년을 넘겨도 계속 고용해 온 사장은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해고했었다.

자신감

노동자들은 이번 투쟁을 통해 더욱 단결력이 굳건해졌다. 두 번이나 사측의 공격을 막아내고 승리하면서 자신감도 더 커졌다.

“우리는 이번 싸움에서 한 명도 잃지 않았어요. 힘들었지만 하나로 똘똘 뭉쳤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어요. 우리는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고 생각해요.”

40~50대 중년의 여성 노동자들에게 71일간의 노숙 투쟁은 결코 만만찮은 것이었다.

“아이들 아침을 제대로 챙기기 어려웠고 노숙을 한다는 것에 집에서 반대가 심했죠. 그렇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어요. 지금껏 고생한 게 아까워서라도 포기할 수 없었어요.”

이번 투쟁의 가장 큰 성과에 대해 노동자들은, “정년이 됐다고 해고된 조합원 3분과 다시 함께 일할 수 있게 된 일”을 꼽았다. “그분들은 작년 6개월간 전면파업을 벌일 때 흔들림 없이 끝까지 함께 싸웠던 분들입니다.”

사측은 막판까지 조합원 3명의 복직 요구를 거부하려 했다. 노동자들이 물러서지 않자 사측은 임금동결을 조건으로 내걸었고, 노동자들은 동료들의 복직을 선택했다.

흔들림 없이 71일간 노숙농성을 이어가는 데 연대는 또 하나의 동력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의 힘겨운 투쟁에 사회단체와 다른 부문의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들의 연대가 이어졌다. 이주노조가 농성장을 차리면서 이웃 식구가 되어 함께 투쟁하기도 했다.

“젊었을 때 학생운동하고, 나이 들어서도 계속 이런 투쟁 현장에 함께하는 분들을 보면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요. 그런 분들이 함께해 주셨고 많은 힘이 됐어요. 자기와 상관없는 일일 수도 있는데 매일 또는 때마다 찾아와 노숙도 마다하지 않으며 함께 연대해 줬던 분들이 없었다면 [승리하기] 어려웠을 거에요.”

사측은 합의사항 이행해야

앞으로 쟁취해야 할 과제들도 있다. 연차를 써야 쉴 수 있는 주휴일도 보장받아야 하고 유급휴가도 더 늘려야 한다. 기본급이 최저임금 이하로 떨어지는 것은 막았지만 오래 근무해도 3만 원에 불과한 근속수당 인상을 포함해, 이번엔 아쉽게도 동결된 임금도 인상해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노동시장구조개악을 밀어붙이고 있어서 임태수 사장이 여기에 발맞춰 다시 뭔가를 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는 경계를 늦출 수 없어요”

특히, 현재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 공장이(매우 열악한 조건이다) 오는 11월에 계약이 만료되기 때문에 서둘러 새로운 공장을 알아봐야 하는데, 사측은 9월 8일 합의 이후 10월 6일 현재까지 이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다. 사측은 즉각 합의사항을 이행하기 위한 조처를 취해야 한다.

“우리는 노조를 만들고 늦은 나이에 처음 투쟁을 한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더 젊었을 때부터 투쟁을 했다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더 빨리 오게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해요. 힘들고 어려웠지만 우리 아이들이 미래에 이런 일을 다시 겪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싸움을 포기할 수 없었어요. 다시 싸워야 한다 해도 우리는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2번이나 사측의 공격을 물리친 레이테크코리아 노동자들의 투쟁은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들도 흔들림 없이 단결하고 연대를 구축해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음을 보여 줬다. 박근혜 정부가 노동시장 구조개악을 밀어붙이는 이때, 투쟁을 통해 단결하고 연대해 싸우는 것이 여전히 중요함을 보여 준다. 

입력 2015-10-12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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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청 조사로도 드러나다

시간제 일자리는 누구도 원치 않는 저질 일자리

이현주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를 보면, 2015년 8월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는 6백27만 1천 명으로 전년동월대비 19만 4천 명이 증가했다. 특히 시간제 일자리의 증가가 비정규직 증가를 이끈 것으로 나타났다.

시간제 일자리는 지난해보다 10.1퍼센트 증가해, 2백 만 명을 훌쩍 넘어 섰다(2백23만 6천 명). 10년 전과 비교하면 두 배가량 늘어난 수치다. 시간제 노동자가 전체 임금노동자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1.6퍼센트로 나타났다. 2005년에는 7퍼센트 정도였다.

시간제 일자리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 들어 크게 늘었다. 박근혜 정부는 ‘고용률 70퍼센트’를 달성하겠다며 시간제를 늘려 왔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만 시간제 노동자가 40만 명가량 늘었다. 심지어 최근 공공기관인 서울대병원은 영상의학과의 업무에도 시간제를 도입하려다 반발에 부딪혔다.

정부는 전체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촉진하고 동시에 낮은 여성의 고용률을 끌어 올리려 시간제 일자리 도입을 강행하고 있다. “질 좋은 시간제 일자리” 운운하며 마치 시간제 일자리가 여성을 위한 일자리인 양 포장했다.

그러나 이번 통계청 발표는 이런 정부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보여 준다. 통계청 발표를 보면, 시간제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70만 5천 원이다. 시간제 노동자의 70퍼센트는 여성인데, 여성의 평균임금은 더 낮다(66만 6천 원). 평균 근속시간은 1년 7개월로 매우 짧다.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20시간 정도로 나타났다. 그러나 실제 노동시간 평균은 이보다 훨씬 길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시간제 노동자들은 실제 계약한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한다. 가령, 초등학교에서 돌봄교실 전담사로 일하고 있는 강선자 씨는 “일을 준비하려면 더 일찍 나오든지 더 늦게까지 남아 일을 해야 한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는 시간에는 초과수당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시간제 노동자들은 짧은 시간 동안 강도 높은 노동을 하도록 내몰린다.

△실업의 고통과 불안에 짓눌리는 청년들이 단기 저질 일자리로 내몰리고 있다. 취업을 한 청년 4명 중 1명은 시간제이고, 15~24세 청년 중 저임금을 받는 비율은 50.5퍼센트에 이른다. 국가가 책임지고 양질의 공공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조승진

홈플러스의 ‘0.5시간 계약제’는 악명이 높았다. 사측은 실제 일한 시간이 8시간이 넘는데도 7시간 30분 계약(7.5)을 강요했다. 6.5시간, 5.5시간 계약도 있었다. 홈플러스노조는 투쟁을 통해 ‘0.5시간 계약제’를 폐지시켰다. 그런데 사측은 ‘0.5’만 떼어내고 신규채용자에게는 여전히 5시간, 6시간, 7시간짜리 일자리를 강요하고 있다.

시간제 노동자들의 사회보험 가입률은 10퍼센트대로, 비정규직 평균과 비교해도 절반 이상 낮다. 퇴직금, 상여금, 시간외 수당, 유급휴가를 받는 비율도 턱없이 낮다. 받더라도 일한 시간에 비례해 토막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런데 정부나 기업주들은 이조차 거추장스럽게 여겨 초단기 계약, 쪼개기 계약 등을 강요해 왔다. 주 15시간 미만으로 계약한 노동자는 아무런 법적 보호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초중등학교 현장에서 벌어지는 초단시간 계약 문제는 심각한 문제로 지적돼 왔다. 주당 15시간을 채우지 못하게 하려고 하루 출근시간을 10분 늦추거나 퇴근시간을 10분 당기는 방법으로 주당 노동시간을 14시간 50분으로 맞추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학교 현장의 초단시간 노동자 수는 박근혜 정부 들어 폭발적으로 늘었다.

최근 일부에서는 위탁 채용이 늘면서 시간제 노동자들의 처지가 더 열악해졌다.

시간제 초등돌봄전담사 강선자 씨는 8시간 전일제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경기가 어렵고 사교육비가 많이 들어서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여성이] 아이를 키우고 사회로 나왔을 때 갈 수 있는 자리가 비정규직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시간제 일자리 같은 불안정한 일자리밖에 없는데 선택의 여지가 어디 있겠나.”

시간제 일자리는 강요된 선택이다. 이번 통계청 조사는 정부가 양산한 시간제 일자리가 누구도 원치 않는 저질 일자리일 뿐임을 보여 준다.

그러나 시간제 일자리 문제는 일부 비정규직 부문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칼끝은 정규직을 겨냥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시간제 일자리가 대거 도입된 공무원·교사 부문을 보면, 시간제 일자리가 정규직 일자리를 쪼개는 효과를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간제와 파견제 일자리가 대폭 확대된 독일의 경험에서 보듯, 두터운 저임금층의 형성이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 하향을 압박하는 효과를 낸다는 점도 봐야 한다. 민주노총이 저임금 노동자들과 정규직 노동자 모두의 이익을 위해 시간제 일자리 확대를 저지하는 데 힘써야 하는 이유다.

입력 2015-11-14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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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아차 여성 노동자의 투쟁 경험기

여성 노동자 처우 개선을 요구해 성과를 내다

독자편지 | 김경숙 (기아차지부 화성 사내하청분회 조합원)

요즘 젊은 청년들이 제일 가고픈 직장 순위 3위가 기아자동차라고 한다. 그런데 3년간 이 곳에서 일하면서 느낀 점은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복지 수준이 아주 낮다는 것이다.

나는 기아차 화성공장의 한 청소업체에서 일한다. 먼지와 담배 연기가 자욱한 화장실에서 청소를 하다 보면, 대·소변으로 범벅이 된 각종 오물과 세제가 두 손과 눈·입 등으로 여기저기 튄다. 물 청소를 하다 보면 작업복이 젖어 온 몸에 땀과 물과 퀘퀘한 냄새가 뒤엉켜 흘러내리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다.

그런데 청소 노동자들은 마땅히 쉴 곳을 찾기가 어렵다. 변변한 샤워장이나 화장실도 마련되지 않은 공장·부서들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운이 좋아 냄새 나는 화장실 한 켠에 공간을 마련해 사용하는 동료들도 있다.

남자 화장실 안에 한 칸 있는 여자 화장실 지독하게도 여성차별적인 기아차 공장. ⓒ사진 제공 기아차 노동자

나는 씻고 싶었다. 피곤한 몸을 쉬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비단 나만이겠는가.

1년이 넘게 휴게실을 마련해 달라고 원청과 업체 관리자에게 호소를 해 봤지만, ‘여태껏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내줄 공간도 예산도 없다’며 서로 책임을 떠넘기기 일쑤였다. 지난해 매출액이 50조 원 가까이 되는 기아차에서 말이다!

나는 지난달 초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여성 노동자들에게 휴게실과 샤워장, 화장실을 마련해 달라고 호소하는 대자보를 기아차 화성공장 곳곳에 부착했다.

공장 곳곳에 부착한 대자보 많은 노동자들이 관심을 보여 줬다. ⓒ사진 제공 기아차 노동자

코웃음을 치던 원청 관리자들은 비정규직, 그것도 청소하는 아줌마가 시끄럽게 만드는 것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내가 속한 업체에 압박을 가했다. 사측에 영향을 받는 일부 노동자가 내가 쓴 대자보를 찢기도 했고, 반장은 ‘시끄럽게 해 회사를 망하게 하는 여자’라며 조합원 자격을 박탈하라는 악의적인 서명을 받기도 했다.

12월 초에는 원청 관리자가 나와 내 동료에게 와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던 일반직 여성직원 휴게실에서 나가라고 했다. 이 여성직원이 나 때문에 몸이 아플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문제를 여성직원과 나 사이의 갈등으로 몰아가려고 악의적인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도 했다.

아쉽게도 분회 간부는 적극 문제 해결에 나서기보다 요구를 자제하라는 식으로 대했고, 한 좌파 활동가는 ‘지지가 많지 않으니 적당히 끝내는 게 좋겠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노동자들은 내가 쓴 대자보에 관심을 보이고 지지를 보내 줬다. 일부 여성 노동자들은 잘 되었으면 좋겠다며 응원을 해 주고 대자보를 같이 붙여 주기도 했다.

현장의 주요 좌파들이 모인 ‘현장공동투쟁’이 리플릿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촉구했고, 몇몇 현장 모임들이 독자 리플릿과 대자보를 내기도 했다.

이런 속에서 최근 지회 집행부는 자신이 책임지고 전 공장 실사를 통해 여성 휴게실과 화장실, 샤워장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나와 내 동료의 휴게실도 3개월 내에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아직 이런 약속이 이행된 것은 아니지만, 소중한 성과를 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여러 비난과 압박 속에서 나는 때로 목이 메어오고 울분이 터져 나오고 다리에 힘이 풀렸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노동자연대 기아차모임에서 동지들과 함께 토론해 올바른 방향을 모색했다. 동지들은 내 마음을 굳건하게 세워주기도 했다.

우리는 이 문제를 개인의 휴게실 마련이 아니라, 또 일반직 여직원과 나 사이의 갈등 문제가 아니라, 기아차 전체 여성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 문제로 제기했다. 그래서 내가 일하는 사업부, 업체를 뛰어넘어 많은 노동자들의 지지를 모을 수 있었다.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앞으로도 여러 탄압과 두려움에 굴하지 않고 당당한 노동자로 투쟁을 함께해 나가리라 다짐해 본다.

입력 2015-12-23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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엥겔스와 여성 차별의 기원 다시 보기

정진희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책갈피, 2015 엮은이)

최근 몇 년 동안 여성 차별을 해명하고자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찾는 저술가들이 부활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마사 기메네즈와 리즈 보겔, 이탈리아 페미니스트 실비아 페데리치, 캐나다 페미니스트 헤더 브라운 같은 사람들은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을 여성과 가족 연구에 적용한다. 마르크스주의로는 여성 차별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견해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흔한데, 여성 차별을 유물론적으로 접근하는 시도가 늘어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기메네즈와 보겔, 페데리치는 마르크스의 방법은 유용하지만 마르크스 자신은 여성 차별 문제에 관심이 많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와 달리, 브라운은 마르크스가 비록 여성 차별 문제에 관해 체계적 분석을 발전시키지는 않았지만 초기부터 여성 차별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고 본다.

브라운은 2012년에 발간된 《마르크스의 젠더와 가족》에서 마르크스가 특별히 남성과 여성의 구실과 가족에 관해 쓴 것을 모두 살펴보면서 이를 입증한다. 여성 해방에 관한 마르크스의 관심은 그동안 별로 주목받지 못했는데, 이 책은 여성 차별에 관한 마르크스의 저술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며 여성 해방이 마르크스주의에서 갖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도록 돕는다.

그러나 브라운은 가족과 여성 차별에 대한 핵심적인 마르크스주의 고전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하 《기원》)의 중요성을 무시한다. 기메네즈, 보겔, 페데리치도 이 점에서 비슷하다.

잠재력 노동자들은 자본주의를 끝장냄으로써 착취와 여성 차별을 끌낼 잠재력을 갖고 있다. ⓒ이미진

경제결정론?

브라운은 마르크스에 비해 엥겔스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엥겔스가 억압을 단지 ‘경제적 요인’으로만 이해해 경제결정론과 환원론에 빠진 반면, 마르크스의 이론은 더 변증법적이어서 더 많은 갈등과 다양성을 허용하며 억압을 정교하게 설명한다고 본다.

이 주장의 원조는 미국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 라야 두나예프스카야다. 두나예프스카야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스탈린주의와 단절한 공산주의자 세대에 속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생산력 발전이 필연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사회 변혁을 낳는다는 기계적 결정론을 취하며 역사에서 인간들이 수행하는 능동적 구실을 기각했다. 두나예프스카야는 이에 반발해 마르크스의 저작들에 주목하며 다시 해방의 전망을 찾으려 했다.

두나예프스카야는 브라운처럼 마르크스의 “민속학 노트”를 연구하고 1979년에 쓴 글에서 “민속학 노트”를 엥겔스의 《기원》과 비교했다. 그는 마르크스가 인간 행위를 역사의 원동력으로 보는 데 반해 엥겔스는 단지 역사의 “단계들”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으로 봤다고 주장했다. 두나예프스카야는 마르크스가 갈등, 모순, 선택을 본 데서 엥겔스는 생산력 발전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브라운과 두나예프스카야는 마르크스의 “민속학 노트”가 엥겔스의 《기원》과 달리, 원시 공산주의 내에서 생겨난 전반적 억압과 여성 차별의 요소들을 보여 주었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는 엥겔스가 사용한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라는 구절을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며 엥겔스의 책은 마르크스의 노트와 많이 다르다고 주장한다.

두나예프스카야가 스탈린주의적 세계관에 반발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엥겔스를 기계적 유물론자로 평가한 것은 온당치 않다. 엥겔스는 생산력 발전과 사회적 관계 사이가 직선적이고 일방적인 관계라고 주장하지 않았고 거기에는 항상 투쟁이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모든 것에 똑같이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이해하지도 않았다.

정치·법률·철학·종교·문학·예술 등의 발전은 경제 발전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상호작용하고 경제적 토대에도 반작용합니다. 경제 상황만이 원인이고 유일하게 능동적인 반면 다른 모든 것은 수동적 결과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경제적 필연성이라는 토대 위에서 상호작용이 이뤄지는데, 이 경제적 필연성은 결국 드러나기 마련입니다.1

브라운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공산주의 선언》(1848)과 엥겔스가 쓴 “공산주의의 원리”(1847)를 대비해 엥겔스를 비판하는 것은 기이하다. “공산주의의 원리”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함께 《공산주의 선언》을 쓸 때 기초로 삼은 글이다.

역사유물론과 변증법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청년기 이후 평생에 걸친 긴밀한 협력 속에서 발전시킨 이론이다. 따라서 두나예프스카야와 브라운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분리해 변증법적 마르크스 대 ‘기계적’ 엥겔스로 서술하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브라운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대비하는 것은 단지 엥겔스에 대한 이해 문제뿐 아니라 그 자신의 이론적 견해를 강화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브라운은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소개할 때 종종 마르크스의 견해가 아닌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해석한다. 이것은 억압과 착취의 관계를 설명할 때 두드러진다. 브라운은 요즘 유행하는 ‘상호교차성’ 개념, 즉 계급을 여성, 인종, 성 같은 요소들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논리로 마르크스의 저작을 해석하곤 한다.

예를 들어, 브라운은 여성의 자살과 이혼 문제를 다룬 마르크스의 기사들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마르크스는 적어도 단정적이지 않았다. 그는 계급과 젠더 어느 하나를 특권화하지 않고 분석하면서 이 둘의 상호의존관계를 논했다.”

브라운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여성과 계급 억압에 관한 통합적 이론을 만드는 데” 엥겔스보다 마르크스의 이론이 더 유효하다고 본다(그런데 브라운은 계급 문제를 착취가 아닌 억압의 문제로 국한해 서술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계급을 단지 억압의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착취적 관계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

분명 마르크스는 일찍이 1842년부터 이혼, 가족 같은 문제들에 관한 관심을 보여 주면서 여성 차별을 노동계급이 겪는 착취나 억압의 문제로 환원하지 않았다(이 점은 엥겔스도 마찬가지다. 《기원》은 부르주아 가정에서 여성들의 열등한 지위, 사회에 만연한 성매매와 여성에 대한 이중잣대 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 차별을 논할 때 마르크스는 분명히 계급 사회에 대한 총체적 이해에 바탕을 두었다. 그는 여성 차별, 가족, 종교 분쟁 같은 다양한 쟁점을 계급 사회의 특유한 산물로 이해했다. 그리고 마르크스가 계급 사회에서 근본 대립을 성이 아니라 계급으로 여겼다는 것은 무수한 저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계급 사회에서 역사 발전의 원동력은 계급투쟁이라고 썼고, 노동자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를 폐지해야만 착취와 억압 모두를 끝장낼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활동에 헌신했다.

브라운은 마르크스의 방법을 이용해 여성 차별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면서도 마르크스의 핵심 사상인 노동계급의 혁명과 계급투쟁 사상을 여성 해방에 적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브라운이 옛 소련과 동유럽, 중국 같은 나라들을 모종의 사회주의 사회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스탈린주의 체제를 ‘사회주의’로 여긴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그 사회에서 지속되는 여성 차별을 보며 흔히 계급 사회 폐지와 여성 해방은 별개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많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급진 페미니즘에서 유래한 가부장제 개념을 수용해 이중체계 이론(착취와 억압을 분리해 별도의 동학을 갖는 것으로 설명했다)을 내놓았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체제는 결코 계급이 사라진 사회가 아니었고, 러시아를 제외하자면 다른 나라들은 노동자 혁명조차 일어난 적 없었던 사회였다.(중국에서는 1949년 민족 해방 혁명이 일어나 국가자본주의 체제가 수립됐다.) 스탈린주의 체제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한 국제사회주의 전통에서는 스탈린주의 체제에서 자행된 가혹한 착취와 억압(여성 차별뿐 아니라 제국주의적 억압 등 온갖 억압)을 분리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브라운은 가부장제의 정의를 결코 밝히지 않은 채 자본주의에서 가부장제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엥겔스와 달리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형태의 가부장제를 이해했을 것이라고 근거 없이 추측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봉건제의 농민 가족 등과 같이 전 자본주의 시대의 가족을 묘사할 때 가부장제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등장하면 자본 축적 동학 때문에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제도들과 기존 사회관계가 고스란히 유지될 수 없고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는 자본 축적에서 노동력 재생산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했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의 동학에 재생산이 종속된다고 여겼다.

물론 마르크스는 노동계급 남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여성 차별 의식을 알고 있었고 이에 도전해야 한다고 여겼지만, 노동계급 가족을 가부장적 가족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영국에서 산업혁명의 충격으로 노동계급 가족이 사실상 해체 상태에 놓인 것을 보았고, 장차 노동계급 가족이 사라질 것이라고 봤다(물론 잘못된 예측이었지만, 당시 현실을 반영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이 지속되는 데서 노동력 재생산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의미 있는 통찰들을 남겼지만 생산과 노동력 재생산 간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마르크스가 남긴 통찰들을 이용해 자본주의에서 여성 차별을 이론화하려는 브라운의 시도는 흥미 있는 시사점을 던져 준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착취와 억압을 동일한 비중으로 중시했다고 간주하며 엥겔스와 차별화하는 것은 여러 모로 불합리한 추론이고, 유물론적 여성 차별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서 장애물이 되기 쉽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기원》은 계급과 국가, 그리고 여성 차별의 기원을 밝힌 책으로 엥겔스가 마르크스 사망 1년 뒤인 1884년에 썼다. 엥겔스는 자신의 노트뿐 아니라 마르크스의 “민속학 노트”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북미 원주민 부족인 이로쿼이족을 연구한 미국 인류학자 루이스 헨리 모건의 선구적 연구 《고대 사회》를 높이 평가하며 모건의 통찰을 자신들의 역사 발전 이론에 통합하려 했다. 이로쿼이 족의 친족 체계를 다룬 모건의 연구는 초기 인간 사회의 발전을 유물론적으로 설명한 획기적 저술이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통찰력에 바탕을 두고 모건의 작업을 계급 사회의 등장이 어떻게 가족제도와 그에 따른 여성 차별을 낳았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남아프리카의 산(San)족 많은 인류학자들은 고고학적 증거들과 이런 소규모 부족사회를 연구해 초기 인류 사회에 체계적인 여성 차별은 없었음을 보여 줬다 ⓒ사진 출처 AinoTuominen

주류 학계는 오랫동안 모건의 저작을 무시했고, 마찬가지로 엥겔스의 저작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인류학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시대에 새로운 과학이었는데, 다윈의 《종의 기원》은 1859년에야 출판됐고 초기 인류에 대한 연구는 이제 막 시작됐다. 모건의 연구는 그 뒤 발전한 인류학 연구에서 여러 오류가 지적됐다.

그러나 주류 학계가 모건과 엥겔스를 완전히 무시한 것은 사실적 오류보다는 그들이 사용한 유물론적 방법에 담긴 혁명적 함축 때문이었다. 계급과 착취, 억압이 없는 ‘원시 공산주의’가 존재했다는 생각은 한낱 동화에 불과한 얘기로 취급됐다. 그런데 브라운 역시 엥겔스가 계급 이전 사회를 이상화했다며 ‘원시 공산주의’가 존재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러나 인류학과 고고학 분야에서 이뤄진 많은 연구들은 착취와 체계적 차별이 없는 사회들이 존재했음을 보여 준다. 초기 인류는 수십만 년 동안 채취나 수렵을 하며 살아갔는데, 이 수렵-채집 사회는 불과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지구 곳곳에 남아 있었고 지금도 소수가 존재한다. 이 사회들을 연구한 인류학자 리처드 리는 자신의 발견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국가가 출현해 사회적 불평등이 고착되기 전 수만 년 동안 인간은 혈족에 기반한 소규모 사회 집단을 이루고 살았다. 이 집단의 경제 생활 제도는 토지와 자원의 집단 또는 공동 소유, 식료품 분배에서 일반화된 호혜주의, 비교적 평등주의적인 정치 관계를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캐나다의 수렵-채집 사회를 연구한 인류학자 엘리너 리콕도 비슷한 발견을 했다.

토지의 사적 소유도 없었고, 성별 분업을 제외하면 노동 분업도 없었다. … 사람들은 자기들이 맡고 있는 활동에 관해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집단적 활동은 무엇이건 합의를 통해 결정됐다.

엥겔스는 《기원》에서 계급 발생 전에는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지 않았고 “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계급 대립은 단혼에서 남녀 대립이 발전하는 것과 동시에 일어나고, 최초의 계급 억압은 남성의 여성 차별과 동시에 일어난다”고 주장했다.

《기원》에서 엥겔스는 인간 사회의 폭넓은 발전을 묘사하기 위해 “야만”, “미개”, “문명” 같은 모건의 개념을 사용했다. ‘야만’은 수렵-채집 사회를 뜻하고, ‘미개’는 원예농업에 기반을 둔 초기 농업 사회를 뜻하고, ‘문명’은 계급 사회를 뜻한다. 엥겔스는 각각의 발전 단계에 해당하는 결혼 형태를 발견했다. 즉, 수렵-채집자들의 군혼, 원예 사회의 대우혼(두 사람이 짝을 이루지만 언제라도 한편에 의해 해소될 수 있는 관계), 계급 사회의 일부일처제(어머니가 중심인 오랜 친족 구조에서 아버지가 아내와 아이들을 지배하는 가족으로 바뀐 것이 특징인)이다.

계급 사회가 등장하면서 남성이 지배하는 새로운 가족이 구래의 친족 관계를 대체하고 여성에 대한 체계적인 억압이 나타났다고 본 것은 분명히 옳았다. 엘리너 리콕, 리처드 리 등 여러 인류학자들이 수집한 증거를 보면, 17~19세기에 유럽 이주민이 만난 수렵-채집 집단에서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일이 없었다.

수렵-채집 사회에서도 성별 노동 분업은 있었다. 남성은 주로 수렵을 맡았고 여성은 주로 채집을 맡았다. 그러나 이런 분업이 꼭 여성의 열등한 지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당시 사회의 생산력 발전 수준에서 채집은 수렵보다 훨씬 더 안정적으로 공급했다. 여성의 채집 활동으로 공동체 식량의 절반 이상이 공급됐기 때문에, 여성의 지위는 높았다. 여성은 공동체에 필요한 사항들을 남성과 공동으로 결정하고 실행했다.

한 예로, 칼라하리 사막의 쿵족은 상당수가 주로 여성들이 채집해 온 과일과 채소에 의존하는 반면에 남성들이 공급하는 육류는 단지 사치품에 불과했다. 많은 인류학자들은 이런 쿵족 사회가 아주 평등하다고 지적했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부모와 자식들은 가족 단위로 살지 않았고, 사람들은 친족 공동체 체계에서 살았고 양육은 공동체 모두가 책임졌다. 부부 단위도 느슨하게 조직됐다. 배우자가 떠나도 자신이나 자녀들의 생계가 위협받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회의 가치관은 자본주의에서 통용되는 가치관과 매우 달랐다.

자본주의 초기 유럽인들이 수렵-채집 집단을 처음 만났을 때 있었던 일이 한 예다. 1630년대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들은 캐나다 동부의 나스카피족을 방문하면서 거주지와 작업 일정을 결정하는 데서 여성들이 행사하는 커다란 영향력과 성적 자유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선교사는 한 나스카피족 남성에게 “프랑스에서는 여자가 자기 남편을 지배하지 않는다”며 누가 자기 아들인지 확실히 모르는 것은 “죄악”이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그 나스카피족 남성은 “당신 얘기는 잘못됐다. 당신네 프랑스인들은 자기 자식만을 사랑하지만 우리는 부족의 모든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대꾸했다.

몇 가지 오류와 한계

여성 차별을 인류 사회의 보편적 특징이 아니라 계급 분화와 국가의 등장과 함께 발전한 것으로 본 엥겔스의 주장은 옳았다. 그러나 부차적 문제에서 몇 가지 오류가 있다. 엥겔스 자신이 이 점을 중요하게 여겼기에 《기원》은 비판적으로 읽지 않으면 오해하기 쉬운 책이다.

우선, 엥겔스는 대다수 수렵-채취 사회에서 혈족이 하는 구실을 매우 과장했다. 모건은 혈통에 기반한 사회들에 있는 친척 분류를 그 이전의 상당히 다른 사회 조직 형태에 적용했는데, 엥겔스는 이 견해를 따랐다. 엥겔스는 이 친척 분류가 형제들이 자매들과 결혼하는 “군혼” 단계를 입증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군혼이 “야만의 특징”인 반면, 대우혼은 “미개의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군혼은 물론 강력한 혈족도 수렵-채집 사회(“야만”)의 특징이 아니다. 이 사회는 부부와 그 자녀들이 느슨하게 무리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또 엥겔스는 군혼 이전에 “무규율적 성교”의 시기가 있었다고 추정했는데, 별 근거 없는 추측이었다.

또 다른 쟁점은 엥겔스가 사용한 ‘모권제’라는 용어와 관련된 것으로, 엥겔스 자신이 실제로 범한 게 아니라 종종 엥겔스의 옹호자들과 반대자 모두가 엥겔스의 잘못으로 돌리는 문제다. ‘모권제’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람들은 계급 지배와 국가 비슷한 게 항상 존재했고 한때 사회는 남성이 아닌 여성의 지도 아래 있었다고 가정했다. 엥겔스는 이런 생각을 거부했고 ‘모권’을 이런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는 후손이 모계를 따르는 것을 가리켜 독일의 저술가 바호펜이 사용한 ‘모권’이라는 용어를 채택했다. 엥겔스는 이런 의미에서 ‘모권’이 어떤 단계에서는 보편적이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간결함 때문에 이 용어를 계속 사용하지만, 아직 이 사회 단계에서는 법적 의미의 권리에 대해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옳은 표현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착취와 체계적 차별이 없는 사회에 대한 증거는 상당히 많지만 브라운은 개별 가족과 여성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는 엥겔스의 명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브라운과 두나예프스카야처럼 마르크스가 특정 구절을 썼냐 마냐가 중요한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사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시대에는 수렵-채집 사회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마르크스도 엥겔스도 수렵-채집 사회들에 관한 자료를 이용할 수 없었다. 모건의 저작은 초기 농업 사회인 원예 사회들에 관한 자료들이었고, 그래서 엥겔스는 수렵-채집 사회에 관해 추측해야 했다. 그러나 인간 사회의 진화에서 평등주의적 국면을 설정한 것은 옳았다. 게다가 엥겔스는 변증법적 사상가로서 생산력의 작은 변화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원예 사회의 씨족 공동체의 평등한 관계를 허물어뜨려 계급들이 등장할 것임을 이해했다.

인류학과 고고학이 발전하면서 오늘날에는 계급 분화 이전 사회들에 대해 엥겔스의 시대보다 훨씬 더 많은 사실들이 알려져 있다. 계급 사회가 형성된 과정은 엥겔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불균등하고 복잡했다. 고고학 연구들을 보면, 농업이 시작된 이후 수천 년 동안 계급이나 국가와 비슷한 것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남성 우월주의가 있었다는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다).

엥겔스는 계급 발생과 사유재산이 동시에 발생했다고 설명했지만, 이것이 일반적 추세는 아니었다. 어떤 계급 사회에서는 계급 발생 한참 뒤에야 사유재산이 형성됐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중국, 인도, 메소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문명 초기 역사에서 지배계급은 사유재산 없이 피지배계급을 집단적으로 착취했다.

계급 사회의 등장은 생산력이 발전한 결과다.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전체 사회를 겨우 먹여 살릴 수 있는 양 이상의 잉여가 발생하자 평등한 공동체의 사회관계에 변화가 생겨났다. 이 잉여생산물을 통제하게 된 사람들이 장기간의 역사 발전 속에서 결국 최초의 지배계급이 됐다

그런데 엥겔스는 계급 사회의 등장과 여성의 지위 하락(“여성의 세계사적 패배”)을 옳게 관련짓지만, 이런 여성의 “패배”를 초래한 기제가 무엇인지는 충분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즉, 새로운 계급 사회에서 지배자들이 하필이면 왜 남성이 됐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여러 사람들이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한 시도를 했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크리스 하먼이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와 인류학자 어니스틴 프리들이 제시한 설명2을 받아들여 계급 사회에서 남성이 지배계급이 되고 남성이 지배하는 가족이 생겨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수렵-채취 사회에서 중요한 식량 조달 수단이었던 채취는 아이를 기르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괭이에 의존한 초기 농경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무거운 쟁기를 사용하고 소와 말을 기르는 사회에서는 더는 그럴 수 없었다. 여성이 그런 일을 했던 사회는 출산율이 낮았고 인구가 증가하지 않았다. 이 사회는 여성을 그런 업무에서 배제하는 다른 사회에 밀려났다. 농업에서 일어난 변화뿐 아니라 장거리 무역의 발전과 빈번해진 전쟁도 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런 일들은 남성이 주로 수행했기에 여성은 가장 많은 잉여를 창출하고 사회적 위신을 높이는 분야에서 제외됐다. 결국 최초의 지배계급은 남성들이 됐다(그러나 모든 남성이 지배계급이 된 것은 아니었고 오직 소수의 남성만이 지배계급이 됐다). 그리고 계급과 국가가 발전하면서 부계제(자손이 부계를 따르며 복잡한 친족 관계의 영향을 받는다)가 남성 연장자가 가구를 지배하는 가부장제로 변형되기 시작했다.

결론

브라운이 인류 역사의 초기 국면에 관한 엥겔스의 설명을 이상적 묘사라며 거부한다면, 기메네즈는 먼 과거에서 억압의 기원을 찾는 것은 비마르크스주의적이라며 역사가 아니라 구조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성 차별의 기원을 밝히는 것은 사변적 시도가 아니라 여성 해방을 위한 이론과 실천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여성 차별을 보수적 인간 본성론이나 관념론에 기대 남성의 심리나 욕망에서 비롯한 것으로 설명하지 않으려면 여성 차별이 인류 역사에서 늘 존재했는지, 그렇지 않다면 여성 차별은 어떻게 시작됐는지 밝히는 것은 핵심적인 문제 중 하나다. 엥겔스의 《기원》에 몇몇 약점이 있지만, 이 책은 여성 차별을 유물론적으로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단지 먼 과거에 일어난 여성 차별의 뿌리를 밝히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여성 해방을 위한 투쟁의 전망을 밝히며 전략을 제시하는 데서 매우 중요하다. 착취와 여성 차별이 모종의 인간 본성이 아니라 계급 사회의 등장에 물질적 뿌리가 있다는 유물론적 분석은 계급 사회가 철폐된다면, 착취와 함께 여성 차별도 끝장낼 수 있음을 나타낸다.

물론 엥겔스의 이 책은 자본주의에서 여성 차별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있지 않으므로, 자본주의에서 여성 차별이 일어나는 방식이나 자본주의적 착취와 억압이 맺는 관계를 이 책을 통해 파악할 수는 없다(이 책의 목적도 아니다). 엥겔스는 숨막히는 위선과 보수적 성 도덕이 지배하고 여성이 가정의 부속품으로 여겨지던 19세기 사회에 살면서 여성과 남성의 진정한 평등을 옹호하며 그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입증하려 했다.3

엥겔스는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일부일처제를 비판하며, 사회주의에서는 진정한 일부일처제가 실현될 것이라고 봤다. 엥겔스가 진정한 일부일처제가 이상적인 형태라고 본 것은 놀랍지만, 이것은 자신의 견해이자 순전한 추측이었을 뿐 자기 이론의 필연적 결론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엥겔스의 진정한 요점은 다음의 유명한 단락에 담겨 있다.

앞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을 지양한 뒤 자리 잡을 양성 관계의 형태에 대해 우리가 지금 예상할 수 있는 것은 주로 부정적인 측면들, 대부분 소멸하게 될 것들이다. 그러나 새로 나타나게 될 것은 어떤 것들인가? 그것은 남녀의 새로운 세대가 자라나서, 남자는 일생을 두고 금전이나 기타 사회적 권력 수단으로 여자를 사는 일이 없고, 여자는 진정한 사랑 이외에는 다른 어떠한 동기로도 결코 남자에게 몸을 맡기지 않으며, 경제적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몸을 거부하지 않을 때 확정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출현할 때면 지금 의무로 간주되고 있는 것들에 대해 그들은 조금도 애태우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스스로 알 것이며, 또 이에 따라서 각자의 행동에 관한 여론을 스스로 조성할 것이다. 오직 그것뿐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의 관계와 개인들의 성적 관계가 어떤 형태를 취할지 예측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 형태가 다양할 것은 분명하며(이미 지금도 다양하다),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따라 생산하고 경쟁이 아니라 협력에 기반을 둔 사회에서는 개인들이 서로 존중하며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회를 만들려면 자본주의 같은 계급 사회가 인간 본성의 산물이고 착취와 억압이 영원하다는 관념에 도전해야 한다. 《기원》은 이에 필수적인 무기 중 하나다.

참고문헌

  • 크리스 하먼, “토대와 상부구조”, 《자본주의 국가 — 마르크스주의의 관점》, 책갈피, 2015.
  • 크리스 하먼, 《민중의 세계사》, 책갈피, 2004.
  •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두레, 2012.
  • C. Harman, “Engels and the Origin of Human Society”, International Socialism 65. Winter 1994.
  • E. B. Leacock, Myths of Male Dominance: Collected Articles on Women Cross Culturally, Mnothly Review Press, 1981.
  • H. A. Brown, Marx on Gender and the Family: A Critical Study, Brill, 2012.
  • S. Campbell, “Engels revisited”, Socialist Review, March 2013.
  • S. McGregor, “Marx rediscovered”, International Socialism 145, April 2015.

후주

  • 1 1894년 1월 25일 슈타르켄부르크에게 보낸 편지. [본문으로]
  • 2 차일드와 프리들은 생산에서 여성이 수행한 구실과 역사 발전의 서로 다른 지점에서 생물학이 끼친 역할을 강조한다. [본문으로]
  • 3 동성애에 대한 이해는 확실히 낮았지만, 1880년대 초반은 동성애 탐구가 유아기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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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12-23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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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성희롱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최미진

얼마 전 르노삼성자동차의 한 여성 노동자가 제기한 성희롱1 소송 2심 판결 결과가 나왔다. 소송을 시작한 지2년 6개월 만의 일이다. 이 판결은 성희롱과 그 이후 사측의 불이익 조처에 대한 회사의 책임을 일부 인정했다는 점에서 1심보다 진일보한 판결이다. 하지만 피해자와 그를 도운 노동자를 직무정지·대기발령시킨 것에 대한 회사의 책임은 묻지 않아 한계가 있다. 게다가 사측은 이조차 불복해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 여성 노동자는 1년 넘게 상사한테서 상습적인 성희롱을 당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피해자는 회사를 그만두려고 했다. 사직하려는 이유를 알게 된 담당 임원은 가해자 징계절차를 밟기는커녕 오히려 피해자가 그만두도록 압력을 가했다. 피해자는 결국 법적 절차를 밟았다. 그러자 회사는 피해 여성을 핵심 업무에서 배제하고 나중에는 직무정지와 대기발령까지 내렸다. 이런 불이익 조처는 피해자를 도운 동료 노동자에게도 가해졌다.

이 사례는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직장 내 성희롱의 “집약판”이다. 2014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일하던 계약직 여성 노동자는 중앙회 소속 중소기업 사장들의 지속적인 성추행에 시달리다 이를 사측에 알렸으나, 사측은 적극적 조처를 취하지 않았고, 이후 정규직 전환 약속을 폐기했다. 그리고 이 여성은 목숨을 끊었다.

이밖에도 현대차 사내하청 공장, 서울대공원, 대교(학습지 회사) 등의 사업장에서 여성 노동자가 민주노총 여성위원회나 소속 노조와 함께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한 성희롱 사례만 여러 건이다.

“직장 내 성희롱 OUT” 직장 내 성희롱은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다. 2015년 3·8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민주노총이 주최한 직장 내 성희롱 추방 캠페인. ⓒ사진 이미진

현대차 사내하청 성희롱 사건을 계기로 민주노총이 의뢰한 직장 내 성희롱 실태조사2 결과(2011년 8월)를 보면, 최근 2년간 여성 노동자의 성희롱 경험률은 39.4퍼센트나 됐다. 경력 3~5년차의 경우에는 49.2퍼센트나 됐다. 성희롱은 남녀고용평등법과 관련해 고용노동부에 접수된 사건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직장 내 성희롱은 여성 노동자의 자존감을 해치고 근무 의욕을 현저히 떨어뜨리며, 심지어 직장을 그만두게 하는 등 고용상 불이익으로까지 이어진다. 직장 내 성희롱은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다.

한국에서 직장 내 성희롱이 처음 공론화된 계기는1993년 서울대 신교수 사건이다. 그 후 1999년에 이르러서야 직장 내 성희롱 규제 조항이 법적으로 명문화됐다. 이것은 여성운동이 이룬 성과였다. 하지만 사측의 가해자 두둔, 피해자에 대한 따돌림, 고용 상 불이익 조처 등 때문에 여전히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문제제기와 해결은 힘든 상황이다. 특히,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에게 성희롱 문제제기는 곧장 계약 해지 문제와 직결된다.

직장 내 성희롱은 노동조합의 쟁점이 돼야 한다

성희롱은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니지만, 오늘날 새로운 점은 여성 노동자가 직장 내 성희롱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잠재력이 더 커졌다는 것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오늘날 자본주의 생산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한국에서도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꾸준히 증가해, 현재 한국의 여성 임금노동자 수는 8백40만 명가량 된다. 이것은 전체 임금노동자 수의 44퍼센트에 해당한다. 이제 많은 여성들에게 직장은 더는 결혼 전에 잠깐 머물다 가는 임시 정류장이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여성들이 사회적 노동에 참가하고 있다는 물질적 조건의 변화는 여성 노동자들의 의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여성 노동자들은 직장 내 성희롱이 부당한 차별이라는 점을 전보다 더 분명히 자각하고 있다. 직장 내 성희롱에 맞서 싸우는 사례가 늘어나고 직장 내 성희롱 관련 책들이 많이 출판되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 있다.

그러나 평등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는데도 여전히 여성은 천대받고 있다. 가사와 육아의 주된 부담이 개별 가정의 여성에게 주로 전가되고 있는 현실 때문에 여성은 남성보다 저임금의 비정규직 일자리에서 일할 가능성이 더 크다. 여성에 대한 체계적 차별 속에서 여성은 직장에서도 성희롱을 당하기 쉽다.

이런 현실 속에서 많은 여성 노동자들은 성희롱에 맞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사례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여성 노동자들은 사내 절차의 공정성을 당연히 불신한다. 사장이나 임원, 상사가 성희롱을 저지른 장본인인 경우가 대부분이고(민주노총 실태조사를 보면 성희롱 가해자 중 사업주와 상급자가 65퍼센트), 이 때문에 회사는 가해자를 두둔하고 오히려 피해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고객에 의한 성희롱 피해도 늘고 있는데, 이 경우에도 기업주들은 이윤 추구에 혈안이 돼 성희롱을 방치하고 여성 노동자들더러 참으라고 강요한다.

사내 절차가 아닌 성희롱 관련 법에 호소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는 매우 오래 걸릴 뿐 아니라 설사 성공한다 해도 일자리를 되찾을 가능성은 낮다.

직장 내 성희롱의 결정적 해결책은 성희롱을 개인적인 문제로 취급하지 않고 집단적인 노동조합 쟁점으로 만드는 것이다. 민주노총 여성위원회가 직장 내 성희롱 근절 운동을 하고, 성희롱 당한 여성 노동자가 속한 노동조합이 함께 싸우는 사례가 늘어난 것은 훌륭한 일이다.

오늘날 여성 노동자의 수가 늘고 이에 따라 여성 조합원의 수도 늘어나 여성의 권리 획득을 위한 투쟁이 조합 전체의 역량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전에는 단지 ‘여성의 쟁점들’로만 여겨졌던 문제들이 이제는 노동조합의 쟁점들로 다뤄질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여성 조합원이 직장 상사나 사장에게 성희롱을 당한 것은 노동조합의 즉각적 대응을 요구하는 계급적 쟁점인 것이다.

계급적

노동조합 조직을 동원해 투쟁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동료 여성 노동자의 성희롱 피해에 항의해 다른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가 함께 싸운다면, 경영진으로 하여금 노동자들의 항의가 생산에 미칠 악영향이나 이미지 실추 등을 고려해 성희롱 문제 해결에 나서도록 하는 압력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민주노총 여성위원회는 “성희롱 발생시 노동조합의 초기 대응이 중요”하며 “조직적 해결과 연대”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직장 내 성희롱 규제 조항을 단협에 명문화하는 것도 과제로 삼고 있다.

실제로 민주노총의 직장 내 성희롱 실태조사를 보면, 노동조합 유무는 성희롱 발생과 그 이후 대처 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사내에 노동조합이 있을 때, 없는 경우에 비해 성희롱 피해 경험이 더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비정규직과 사무직의 경우 노동조합 유무에 따른 차이가 커서, 노동조합의 존재가 직장 내 성희롱 발생을 어느 정도 억제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노동조합이 있으면, 특히 고의성이 강한 대가형 성희롱이 훨씬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사업장 내에 노동조합이 있을 때 성희롱 대응 이후 노동자들이 고용과 업무에서 불이익을 덜 받고, 성희롱예방교육이 더 많이 실시되고, 사내 고충처리기구도 더 많이 마련되고 그 기구가 성희롱 발생 시 대응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2000년 롯데호텔 노조 파업과 사회보험 노조 파업 과정에서 여성 조합원들은 상사들한테 당한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남성 조합원 동료들과 함께 투쟁해 승리한 바 있다. 2011년에는 사장의 성희롱을 공개적으로 문제제기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민주노총 조직이 동참한 항의 운동을 통해 복직하기도 했다. 이 투쟁을 통해 성희롱 피해를 산재로 인정받는 성과도 있었다. 당시 전미자동차노조가 미국 전역의 현대자동차 공장·영업소 앞 팻말 시위를 벌인 국제적 연대도 현대자동차 측에 압박으로 작용했다.

이런 사례들은 직장 내 성희롱에 맞선 투쟁을 노동조합의 과제로 만들 수 있고, 이를 통해 직장 내 성희롱에 맞서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1 “성희롱”이라는 용어는 어감 상 가볍게 느껴지기 쉽지만, 당하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괴롭히기(harassment)다. 직장 내 “성희롱”은 여성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는 문제로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다만, 사회적으로나 법적으로 “성희롱”이라는 단어가 통용되고 있으므로 이 글에서도 이 용어를 사용한다. 한편, “성희롱”이라는 단어는 “싫어요”라고는 말하기 부담스럽지만 ‘이거 성희롱 아닌가요?’라고 농담처럼 주의를 환기시켜 그만두게 하는 편리성이 있기 때문에 여성들이 널리 사용했다는 설명도 있다(무타 카즈에, 《부장님, 그건 성희롱입니다》).

2 공익변호사그룹공감 김정혜 외, <여성노동자 직장 내 성희롱 실태조사 및 대안 연구>, 민주노총, 2011.

입력 2016-01-27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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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 대란의 책임은 진보 교육감이 아니라 박근혜에 있다

김문성

박근혜는 1월 25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경제 위기 고통전가를 강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중앙정부가 만 3~5세 무상보육 예산 지급을 거부해 일어난 파동에 대해서도 예의 그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박근혜는 “누리과정 지원금을 포함한 2016년도 교육교부금 41조 원을 시·도교육청에 전액 지원했다. 시·도교육청이 받을 돈은 다 받고 써야 할 돈은 안 쓰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근혜가 말한 지방교육교부금 41조 원은 교육교부금법이 정한 비율(내국세의 20.27퍼센트)에 따라 자동으로 설정된 액수다. 문제는 이 비율이 박근혜가 무상보육을 공약한 2012년 이전에 정해진 비율이라는 것이다.

만 5세까지 무상보육은 대통령 후보 시절 박근혜의 ‘공약’이었다. 보육에 대한 지원을 늘리는 것은 출산율을 제고하겠다며 이명박 때 (박근혜의 동의 하에)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따라서 새로운 사업을 추가하면서 그에 따라 더 지급해야 할 예산을 지급하지 않은 것은 바로 중앙정부, 즉 박근혜 정부다. ‘배신의 정치’로 심판 받아야 할 장본인은 정작 박근혜 자신인 것이다.(그래서 박근혜에게는 ‘유체이탈 화법’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마 최근의 정치적 갈등을 박근혜와 대화로 풀어 보려는 사람이 있다면 장담컨대 반년도 못 가 홧병으로 쓰러질 것이다.)

책임전가 박근혜의 몽니로 노동자 학부모와 보육 교사들이 보육 대란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무상보육 재정 책임을 떠넘기면서 출산율을 높이겠다는 것은 모순이다. ⓒ조승진

보육 대란과 임금 체불

사실 (지방재정법 시행령까지 고쳐 가며 무상보육 책임을 지방정부와 교육청에게 떠넘기려는) 박근혜의 요구대로 하려면, 각 시·도교육청이 다른 교육·복지 예산을 삭감해야 한다. ‘형 급식 뺏어서 동생 보육비 주라는 말이냐’라는 항변이 나온 이유다. 대부분의 진보 교육감들이 중앙정부의 책임 이행을 요구하며 무상보육 예산 편성을 거부해 온 이유다.

지난해에도 같은 사달이 났지만 당시 각 교육청들이 지자체의 협조를 얻어 예산을 편성했다. 당장 보육 대란을 두고 보기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올해마저 이런 식이면 중앙정부가 누리과정 예산을 지원하지 않는 것으로 완전히 굳어질 수 있어 노동계와 진보진영은 지자체(교육청)들이 예산을 배정하지 말고 정부 지원을 받아 낼 것을 요구해 왔다.

이러다 보니 일부 지역에서는 애초 교육청 소관인 유치원 무상보육 예산까지 막히고 있다. 지방의회들이 형평성을 이유로 유치원 예산도 승인을 (새누리당이 다수인 곳에서는 보복성으로, 야당이 다수인 곳에서는 압박용으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 죄 없는 보육교사들의 1월치 임금이 대량 체불될 상황이 됐다. 박근혜의 몽니 탓에 교사와 학부모(대다수는 노동계급인) 모두 고통을 겪는 것이다.(아마 일부 지역들은 편법으로 1, 2월치 예산을 지급할 듯하다.)

교육 개혁

사실 이날 박근혜의 관련 발언은 앞뒤도 맞지 않았다. “[누리과정을 시·도교육청 예산으로 편성한] 시·도교육청에 대해서는 3천억 원의 예비비를 우선 배정”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쓰라고 준 돈을 썼다고 상을 준다니 황당할 따름이다.

물론 ‘인센티브’를 빙자한 박근혜의 협박에는 “교육 개혁”의 의도가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박근혜의 “교육 개혁”은 수익성 논리와 기업들의 수요에 걸맞도록 교육 재편을 가속하는 것이다.

1월 20일 정부 합동 업무보고에서 교육부는 “지방교육재정 개혁”을 위해 “재정평가 인센티브 비율 상향 조정” 등으로 “지방교육 재정의 효율성과 책무성을 제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수익성 논리로 재정평가가 진행되면, 예산을 먼저 더 많이 확보하려는 교육청 간 경쟁은 교육 노동자들의 임금, 학생 정원, 교육 복지 등을 삭감하도록 압박할 것이다.

여기에는 진보 교육감들을 견제하면서 무상급식과 보편적 복지 확대 같은 진보적 의제가 2010~12년 때처럼 선거에서 부각되지 않도록 하려는 책략도 숨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진보 교육감들은 물러서지 말고 정부 예산 편성을 촉구하며 계속 싸워야 한다.

복지는 긴축, 기업은 부양

이런 공격은 박근혜 정부의 전반적인 신자유주의적 긴축이라는 경제 위기 대응 기조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기업주와 부자를 위해 노동자를 쥐어짜는 것이다.

박근혜는 긴축을 이유로 기초연금 20만 원 지급 공약을 파기했다. 필사의 전투를 벌여 공무원연금도 삭감했다. 돈이 없다면서 부자 증세는 한사코 거부해 왔다. 기업 지원도 활발했다. 최악의 전월세 대란 속에서도 공공임대주택 공급보다는 부동산 경기 부양에 더 열을 올렸다.

저항 긴축 강요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이미진

최근 자체 예산으로 감당할 수 있다는데도 ‘퍼주기 포퓰리즘’이라며 성남시의 청년배당 같은 작은 복지마저도 비난·방해하거나, 대상 규모도 액수도 초라한 서울시의 청년 지원을 정부가 소송까지 제기한 일들을 보면, 박근혜 정부는 이런 신자유주의 긴축을 지방정부에게까지 강요하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러나 지난해 무상보육 예산 지급 거부로 정작 지방교육청의 빚은 더 늘었다.)

배신을 그토록 싫어하는 박근혜가 자기가 약속한 무상보육을 자기 손으로 흔드는 것이 단지 개인의 ‘혼이 비정상’이라서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근혜의 무상보육 ‘먹튀’에 항의하는 것은 경제 위기 고통전가 공세에 반대하는 일과 연결된다. 노동운동과 좌파는 ‘노동개혁’ 저지 투쟁을 건설하면서 박근혜의 무상보육 예산 책임 외면에도 반대해야 한다.

긴축에 반대하고, 부자 증세를 통한 복지 확대를 요구하자

 

정부는 경제 위기 때문에 기업과 개인들의 소득이 줄어 정부의 세금 수입도 따라 줄기 때문에 국가 지출도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정부 재정적자를 줄이라는 압력은 그리스에서 보듯, 국제적인 자본의 요구이기도 하다.)

경제 위기에는 국가지출의 필요가 오히려 더 커지므로 여전히 소득과 자산이 많은 기업과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 복지 지출을 늘릴 수도 있는데, 박근혜는 일관되게 (부자) 증세를 거부해 왔다.

이는 박근혜가 이윤율이 낮아져서 투자 외 지출(세금, 임금 등)을 줄이려는 기업주들의 요구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노동개혁’의 목적도 기업들이 임금비용을 낮출 수 있게 해 주려는 데에 있다.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역대 한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법인세를 삭감해 온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따라서 박근혜가 지향하는 긴축 정책은 단순한 재정 아껴쓰기가 아니라 친기업적 이윤 보전 정책이다. 이 말은 국가의 지원과 지출이 모두 삭감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 정부는 전임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기업과 부자를 위한 경기 부양과 구조조정을 위한 지원에는 돈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도리어 노동자에게는 증세하면서 복지를 삭감해 왔다.

그러나 경제 위기일수록 책임 전가와 소득 하락 때문에 빈곤과 불평등은 심해진다. 이야말로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에게는 ‘안전’의 위기다.

이를 해결하려면 오히려 복지를 확대해야 하고, 그 재원은 당연히 위기를 유발한 책임이 있는 기업주들과 부자들이 져야 한다. 위기의 책임 소재를 묻는 것을 어렵게 하는 보편 증세가 아니라 부자 증세를 통해 복지를 늘려야 한다.

입력 2016-01-27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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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왜 사회는 여성을 ‘여성성’에 욱여넣으려 할까?

양효영 (대학생, 노동자연대 학생그룹 활동가)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김명남 옮김, 창비, 96쪽, 9,800원.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는 나이지리아 출신의 유명한 여성 소설가인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인터넷 강의(TED)에서 한 연설 내용을 다듬은 것이다. 그래서 1백 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분량에 쉽고 대중적이다. 젊은 여성들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공감 가는 구절도 많을 것이다. 작고 얇은 이 책은 최근 상당한 인기를 얻으며 팔리고 있다.

이 책의 인기는 오늘날 페미니즘의 부상을 보여 주는 한 사례다. 최근 한 온라인 서점은 여성학 분야 책 판매가 2010년도보다 2015년에 3배 가까이 증가했다는 통계를 내기도 했다.

오늘날 페미니즘이 인기를 얻는 배경엔 기본적으로 여성들이 처한 모순된 처지가 존재한다. 자본주의 국가와 다국적 기업들의 모임인 다보스 포럼에서도 ‘페미니즘’을 운운하는 언사들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국가나 기업 세계에서 여성의 법적 · 제도적 지위는 향상됐지만 현실은 여전히 냉혹하게 여성 차별적이다.

저자는 자신과 지인들이 겪었던 여러 경험을 통해 현실의 여성 차별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저자는 여성 차별은 고릿적 시절 얘기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나, 여성의 권리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권리가 중요하다며 결론적으론 여성 운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이런 주장은 오늘날 존재하는 엄연한 여성 차별 현실을 가리는 것이다. 저자가 예를 들듯이, 나이지리아에선 고급 호텔에 들어갈 때, 남성은 자연스럽게 들어가도 여성들은 제재를 받는다. 대체로 혼자 호텔로 들어가는 여성을 성매매 여성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클럽이나 바에도 여전히 여성 혼자서는 들어가지 못한다.(참고로 나이지리아는 2015년 성 격차 보고서에서 125위에 자리매김 됐다. 한국은 겨우 열 계단 위인 115위였다.)

저자는 여성 차별을 사회가 요구하는 성역할(젠더)과 연결해서 본다. 이 사회는 여자아이들에게 화를 내거나 자기 의사를 강하게 펴는 것이 옳지 않다고 가르치고, 남자의 마음을 끌거나 남자를 기쁘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르친다. 여성은 남성을 돕는(성적 · 감정적으로) 부차적 인간으로 자리매김하는 사회 분위기가 너무나 만연하다. 이 때문에 여성과 남성에 대한 사회의 이중 잣대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이 사회는 강간을 비난하지만 동시에 강간을 당한 여성을 비난하고, 젊은 여성의 처녀성은 칭찬하지만, 젊은 남성의 동정(童貞)을 칭찬하진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동시에 남자가 돈을 더 많이 내야 하고, 남자는 두려움, 나약함 따위를 몰라야 한다는 식의 ‘남성성’이 부추겨지는 것도 비판한다. 이런 규범은 남성에게 외양적 강인함을 강요하지만 반대로 그들의 내면을 매우 취약하게 만든다. 저자는 우리 모두를 옥죄는 잘못된 ‘남성성’, ‘여성성’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옳게 주장한다.

여성 차별과 계급

저자는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 때문에 이런 식의 ‘젠더(성별) 규범’이 요구되고 여성 차별이 벌어지는지 얘기하고 있진 않다. 짧은 강연을 정리한 책이라 그런 설명을 기대하는 건 무리인 듯 싶다.

다만 저자가 지나가면서 “젠더와 계급은 다른 문제입니다. 가난한 남자들은 부자의 특권은 누리지 못할지라도 남자의 특권은 여전히 누립니다” 하고 한 줄 정도 언급하는 부분은 여성 차별의 원인을 남성의 ‘특권’에서 찾는 특권이론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이런 관점은 저자가 2015년 미국 웰즐리 여대 졸업식 축사에서 한 말에서 더 분명히 드러나는 듯하다. “그리고 저는 남자들이 선천적으로 못됐거나 악하진 않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남자들은 그저 특권이 있을 뿐입니다 … 저는 교육받은 가족에서 자랐다는 계급적 특권이 있었는데, 그 때문에 이따금 저도 눈이 멀었습니다.”

그러나 여성 차별과 계급은 저자가 오해하고 있는 것과 달리 “다른 문제”가 아니다. 이 둘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많은 인류학자들이 뒷받침하듯 여성 차별 자체가 계급사회와 함께 등장했다. 또한 차별의 무게는 계급 별로 크게 다르고, 최신 계급사회인 자본주의 체제는 여성 차별을 조장하고 이로써 이득을 본다.

물론 모든 계급의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다. 저자의 이웃이었던 ‘친웨 아줌마’도 개인 병원을 소유한 의사에 부유하고 교육받은 여성이었지만, 남편을 완벽하게 ‘내조’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종속적 여성상을 충실히 해내는 아내로만 칭송받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여성 차별에는 자본주의의 필요라는 물질적 토대가 존재한다. 자본주의는 착취를 위해 매일매일 기력이 회복된 노동자들과 새 세대 노동자를 공급받아야 한다. 그러나 국가와 기업주들은 노동력 재생산을 개별화된 가족 내에서 여성의 헌신에 의존하는 방식을 강요하고 있다.

이런 필요 때문에 자본주의는 체계적으로 여성에 대한 천대를 조장했다. 여성은 본능적으로 가정적이고, 순종적이라는 규범들이 조장됐다. 반면 남성은 가장의 부담을 짊어져야 하고, 장시간 혹사에도 견딜 수 있는 무감각함과 책임감 등이 본성처럼 여겨진다. 여성은 바깥 세계에서 고통받은 남성을 달래고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존재이자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존재로 대상화된다. 자본주의가 여성 차별을 체계적으로 조장했다는 것은 이런 관념이 가장 내밀하고 친밀한 관계에까지 샅샅이 스며들어 작동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저자도 지적하듯 이런 규범은 평범한 여성과 남성을 고통스럽게 한다. 저자가 노동계급 여성들을 옥죄는 실질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고 있진 않지만, 오늘날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더 많이 진출하면서 이런 성역할에 대한 기대와 현실 사이의 갈등은 더 커지고 있다. ‘워킹맘’, ‘경단녀’(결혼과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 둬 경력이 단절된 여성) 처지 여성들의 절절한 얘기들은 이런 모순을 보여 준다.

오늘날 전 세계 17억 5천만 명가량의 여성이 노동자로 살고 있다. 한국에서도 여성이 ‘부엌데기’로만 여겨지던 과거와 달리, 노동자의 거의 절반 가까운 수(45퍼센트)가 여성이다. 그러나 출산과 양육에 대한 열악한 복지 때문에 여전히 여성은 가정에 묶여 있어야 하고, 가정에 매여 있는 족쇄 때문에 노동시장에서도 더 질 낮고 형편 없는 조건을 감내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은 노동계급 남성의 ‘특권’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남성들, 노동계급 남성들이 여성 차별로 누리는 이른바 ‘특권’이란 너무나 보잘것없어서 그들이 여성 차별 유지에 객관적 이해관계가 있다고 할 만한 물질적 근거가 되기가 어렵다. 대개 노동계급 남성은 가정 부양을 위해 여성보다 일터에서 더 장시간 일하고, 더 먼 거리로 출근하고, 더 일찍 죽는다.

오히려 이런 엄연한 계급 분단 때문에 오늘날 여성 일부는 대다수 남성보다 더 특권적이고 우월한 위치에 있다. 여성 기업주들은 남성 기업주들과 마찬가지로 가정 내 여성의 무보수 노동으로 엄청난 비용을 절감하고 더 많은 이윤을 취한다. 지배계급 여성들은 노동계급 여성들이 겪는 일과 가정의 ‘이중의 굴레’를 해결할 선택지가 훨씬 많고, 노동계급 여성을 고용함으로써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체제는 여성 차별을 체계적으로 조장하면서 남성들이 여성 차별로 득을 얻는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런데 남성이 ‘특권’을 누린다는 설명은 여성 차별의 원인을 흐리고 자칫 피억압자 일부를 억압자로 잘못 규정하는 오류를 낳기 쉽다. 이처럼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평등을 얘기할 때 계급을 성별에서 떼서 어느 한 구석에 치워두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여성 차별에 대해 분노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의 여성 차별적 현실 비판에 큰 공감을 할 것이다. 이 책을 읽고 여성 차별에 대해 고민하게 된 독자라면 현실에 대한 비판에서 더 나아가, 여성 차별을 조장하고 재생산하는 체제 자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분석 · 전략으로 고민을 발전시키기를 권유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를 옥죄는 여성 차별에 맞서 더 효과적으로 투쟁할 수 있을 것이다.

입력 2016-02-17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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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여성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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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500원|노동자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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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

콜론타이 · 체트킨 · 레닌 · 트로츠키 저작선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클라라 체트킨, 블라디미르 레닌, 레온 트로츠키 지음

272쪽|13,000원|책갈피

입력 2016-02-23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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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귀향>

제국주의 폭력을 고발하고 치유를 희망하다

김준효

△영화 <귀향> 포스터

‘위안부’를 다룬 최초의 극영화 <귀향>이 개봉 5일 만에 관객 수 1백만 명을 넘겼다. 영화를 완성하고도 극장을 잡지 못해 고생하다가 기만적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분노 여론에 힘입어 겨우 개봉할 수 있었다고 하니 이 같은 흥행이 더욱 뜻 깊다.

<귀향>은 ‘위안부’들이 끌려가 고초를 겪는 1943년과 돌아오지 못한 ‘위안부’를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게”(감독 조정래) 하고자 굿을 벌이는 1991년을 교차시키며 많은 메시지를 전한다. (1991년은 김학순 할머니가 용기 있게 ‘위안부’ 문제를 증언한 해이며, 그 증언의 일부가 영화 첫 장면에 나온다.)

<귀향>의 가장 힘 있는 대목은, 일본군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폭력이 사람들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실제 ‘위안부’였던 강일출 할머니의 증언에 기초해 담아낸 장면들이다. 영화 속에서 일본군은 여성들을 강제로 차출해 가정을 파탄 내고, 초경도 치르지 않은 어린 여성을 강간하고, 강제 징용된 오빠를 여동생이 보는 앞에서 때려 죽이고, 병에 걸린 여성들을 구덩이에 몰아 넣고 사살한 후 태워 버린다. 참혹한 폭력에 희생된 여성들은 자기 이름을 잊고, 제정신을 잃고, 목숨을 빼앗긴다.

영화가 ‘위안소’의 각 방을 부감[높은 위치에서 내려다 보며 촬영하는 영화 기법]으로 보여 줄 때만 화면 비율이 바뀌는데, 방 안에서 여성들에게 자행되는 끔찍한 폭력과 방문 앞에서 줄 서서 희희낙락하는 일본군의 모습이 한 화면에서 대비되며 강렬한 충격을 준다. 영화에서 묘사된 폭력 자체는 ‘15세 관람가’ 수준으로 걸러져 실제 역사에 비할 바가 아니지만, 화면 한 꺼풀 아래 흐르는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하지만 <귀향>이 폭력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기만 했다면 이토록 심금을 울리지는 않았을 수 있다. 영화는 ‘위안부’를 기억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영화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단지 ‘피해자’로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제 할머니가 된 그들이 스스로 나서는 모습을 섬세하게 담아 낸다. (그 자신도 성폭행 피해자였던 무당이 주재하는) 영화 후반부의 굿 장면에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그리고 이 영화를 응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이 진하게 반영돼 있다.

영화는 현실 그 자체를 지렛대 삼아 여러 논쟁적인 문제들에 대한 입장을 담기도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위안부’ 여성들 중에는 강제로 끌려온 사람도 있고, “신발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오게 된 사람도 있고, 평양 권번(직업적 ‘기생’들의 조합) 출신으로 ‘위안부’ 일의 성격을 알고 온 사람도 있고, 중국인 여성도 있다. <귀향>은 이렇게 저마다 다른 계기로 ‘위안소’에 끌려온 여성들 사이에 연대감과 우정이 싹트는 모습도 짧지만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리고 영화의 초점은 “순결한 소녀”든 아니든 ‘위안부’는 모두 체계적으로 조직된 폭력의 희생자라는 데에 맞춰져 있다.

ⓒ출처 영화 <귀향> 스틸 이미지

영화는 ‘일본군은 “관여”만 했을 뿐 군위안소의 주된 운영 주체는 민간업자들’이었다는 일각의 주장도 논파한다. 영화에서 ‘위안부’들의 관리자는 형식적으로는 조선인 업자이지만, 실제로 ‘위안소’를 운영하고 통제하는 권한은 분명히 일본군에 있었음을 몇몇 장면으로 지적한다(일례로 ‘위안부’들의 건강 상태를 검진하고, 병에 걸린 사람을 골라내 죽음으로 내모는 책임자는 일본군 군의관이다).

좀 더 치밀한 고민과 섬세한 연출이 필요했을 성싶은 데가 없지는 않다. 예컨대 ‘구원자’로 등장하는 항일 독립군은 전체 서사에서 벗어나 있어 어색하다. 그러나 그런 장면들도 분명한 의도 하에 배치된 것이다.

감독 조정래는 2002년 ‘나눔의 집’(생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 후원시설)에서 강일출 할머니의 증언을 접한 이래 14년에 걸쳐 이 영화를 만들었다. 7만 명이 넘는 이례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소액 후원으로 제작비를 모았지만, 극도로 열악한 제작 환경 때문에 촬영 중단과 재개를 거듭했다고 한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 개봉한 <귀향>은 충격을 남용하지 않으며 참상을 고발하고, 치유와 해결을 염원한다. “<귀향>이 한 번 상영되면 한 분의 영혼이 집으로 돌아온다고 믿어요. 앞으로 그 [희생자] 분들이 다 돌아오시도록 전 세계를 돌며 상영할 겁니다.”(감독 조정래)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들은 극장으로 달려 가시라. <귀향>이 그런 독자들에게 역사를 되새길 수 있는, 그리고 (배우 손숙이 열연한 영화 속 ‘위안부’ 할머니처럼)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입력 2016-03-02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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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주년 세계 여성의 날 전국여성노동자대회

폭우를 뚫고 울려퍼진 여성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 목소리

조승진

올해로 108주년이 되는 3.8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3월 5일 오후 서울시청 동편광장에서 전국여성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오늘 여성노동자대회는 ‘노동개악 양대지침 분쇄, 무상보육 국가책임 강화, 남녀 임금격차 해소와 최저임금 1만원 인상, 시간제 일자리 반대, 직장 내 성희롱 반대’ 등을 요구했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여러 연대단체 회원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지난 3년 동안 여성 노동자들의 처지가 나빠져 왔다. 당연히 이날 대회에서는 여성 노동자에게 저임금에 저질 일자리를 강요하고, 보육의 국가 책임을 회피하는 박근혜 정부가 규탄의 초점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악은 여성에게 더 질 낮은 일자리, 더 쉬운 해고, 더 적은 임금을 유도할 것”라며 노동자들이 함께 단결해 싸워야 한다고 투지를 다졌다.

또한 “사업장의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넘어 여성을 저임금 산업으로 내몬 현재의 임금체계는 개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08주년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열린 전국여성노동자대회에서 노동자들이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구호를 외치며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조승진

△전국여성노동자대회에 참가한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개악 양대지침 분쇄, 무상보육 국가책임 강화, 남녀임금격차 해소와 최저임금 1만원 인상, 시간제 일자리 반대, 직장 내 성희롱 반대’ 등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조승진

△전국여성노동자대회에 참가한 여성 노동자들이 어린이집의 교사당 보육 아동수를 1~3명 늘릴 수 있도록 하는 보건복지부의 '탄력보육' 허용을 반대하는 팻말을 들고 있다. ⓒ조승진

△여성 노동자들이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조승진

△여성 노동자들이 여성 노동자들에게 더 질 나쁜 일자리와 낮은 임금을 낳게 할 노동개악에 반대하는 배너를 들고 있다. ⓒ조승진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폭우에도 밝은 표정을 짓는 참가자들. ⓒ조승진

△낮은 시급을 비판하는 팻말을 든 참가자들. ⓒ조승진

△민주노조를 지키고 여성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하는 투쟁에 이바지한 여성 노동자들에게 상장을 수여하고 있다. ⓒ조승진

△전국여성노동자대회 상징의식으로 2016 여성노동자 투쟁 박 터트리기가 진행되고 있다. ⓒ조승진

입력 2016-03-05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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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 3년, 여성 노동자의 현실

경제 위기 하에서 이중의 굴레가 강화되다

최미진

박근혜 정부는 여성 고용률 상승을 주요 과제의 하나로 삼아 왔다. “저출산 고령화 등에 따른 생산가능인구 감소가 일본보다 빠르게 진행”돼 미래의 노동력이 부족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특히, 30~50대 여성 고용률이 주요 산업국에 비해 떨어진다는 점 때문에 이 계층을 최대한 노동시장으로 끌어내려 한다.

그러나 박근혜는 경제가 악화할 전망 속에서 국가와 기업주의 부담은 최대한 늘리지 않고서 이 목표를 달성하려 한다. 그러다 보니 여성 고용의 질은 오히려 악화됐다. 무상보육 부담도 교육청과 지방정부에 떠넘겨 파산 일보 직전이고, 애먼 학부모와 보육교사만 고통을 떠안게 생겼다.

제대로 된 대책은 보육의 질이 좋을 뿐 아니라 보육료도 저렴한 국공립 보육시설을 대폭 확충하는 것이다. 그러나 보육비 지원조차 오히려 후퇴할 지경이다. 이러니, 지난해에도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는 아이의 수)은 1.20명으로 ‘초저출산 국가’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처럼 출산율 증대 효과가 별로 나타나지 않자, 박근혜 정부는 ‘비취업맘’에게 전일 보육을 지원받을 권리를 빼앗았다. ‘3차 저출산 고령화 대책’에서는 뻔뻔하게도 “기혼가구의 양육부담 경감 중심”이 아니라 “만혼·비혼 추세 심화”를 해결하는 데 더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학교 비정규직, 대형 마트, 청소 등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 지난해 3월 7일 서울시청광장 107주년 세계 여성의 날 행사. ⓒ사진 조승진

경력 단절 현상도 지속되고 있다. 15~54세의 기혼여성 중 결혼·출산·육아 등으로 인해 경력 단절 상태인 사람의 비율은 22.4퍼센트였고, 취업중인 기혼여성 중 과거 경력 단절 경험이 있는 비율도 40퍼센트나 됐다(2014년).

경력 단절 기간이 짧아지는 추세이긴 하지만, 경력 단절은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결혼 전에는 비정규직 비율에서 남녀 차이가 없지만, 결혼 후에는 그 격차가 커진다(기혼 남성 33.3: 기혼 여성 60.2). 또한, 경력 단절 경험이 있는 여성의 월평균 소득은 경력 단절 없는 여성보다 55만 원가량 적었다(2014년).

박근혜는 경력 단절을 줄이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육아휴직 신청을 거부하거나 퇴사를 압박하는 기업주를 강력히 처벌하지도 않는다. 정부는 남성 노동자가 육아휴직 사용 시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해 최근 남성의 육아휴직 신청이 늘어났지만, 전체 육아휴직자 중 남성의 비율은 여전히 5.6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OECD 회원국 중 최장의 살인적 노동시간을 줄이지 않은 채 공평한 육아 분담은 몹시 어렵다.

값싼 여성 노동력 양산 정책

대신, 정부는 시간제 일자리 확대를 통해 저임금으로 일하면서 육아도 병행하라고 강요해 왔다. 정부의 집요한 시간제 확대 정책의 결과, 시간제 노동자는 2001년 87만 명에서 2015년 8월 2백23만 6천 명으로 늘어났다. 전체 시간제 노동자 중 70퍼센트가 여성이다.

박근혜는 전일 노동자가 육아기에 일시적으로 시간제 전환을 ‘선택’할 수 있다고 홍보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런 시간제 전환은 미미하고 신규 시간제 일자리만 증가하고 있다. 다양한 학교 비정규직 등 공공부문에서 생기는 사회서비스 일자리들이 이런 식으로 늘어나고 있다.

시간제 일자리는 불평등 심화에 기여했다. 또한 시간제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과 시간당 임금이 모두 전일제 노동자와 격차가 커져 왔다. 특히 시간당 임금의 격차가 더 커졌다. 박근혜 정부는 시간당 임금만큼은 차별받지 않는 시간제 일자리를 만들겠다(‘비례 원칙’ 보장)고 했지만, 공문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노동자 연대> 신문은 일찍이 이를 예상하면서, ‘차별 없는 시간제’를 요구하며 조건부로 수용하기보다 시간제 일자리 도입 자체를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김하영, ‘박근혜 정부의 시간제 일자리는 저질 일자리 확대책일 뿐이다’, 2013년 11월 9일 발행) 설사 ‘비례 원칙’이 제대로 지켜진다 할지라도 시간제 노동자는 줄어든 시간만큼 적은 임금을 받고, 근속에서도 곱절로 뒤쳐지기 때문에 저임금 신세를 피할 수 없다.

노동시장 내 성차별이 지속되면서 임금 격차는 16년 째 거의 변함이 없다. 여성의 월평균 임금(1백69만 원)은 남성(2백77만 원)의 61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 김유선).

박근혜 정부는 ‘노동개혁’이 대기업·정규직·고임금 노동자들의 ‘기득권’을 깎는 대신 청년·여성·미조직 노동자에게 이익을 주는 것인 양 두 집단을 이간질해 왔다. 그러나 ‘노동개혁’에 기간제 사용 기한 연장과 파견제 확대가 포함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박근혜는 좀 더 조건이 나쁜 노동자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다.

이런 비정규직 확대책은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특히 민감한 문제다. 얼마 전 발표된 ‘2차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정규직 전환이 아닌 무기계약직으로, 그것도 온갖 조건을 들어 소규모만 전환할 예정이다.

얼마 전 여성단체들이 노동개악 법안들과 저성과자 일반해고 지침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단지 비정규직 관련 법률만 여성 노동자에게 해로운 것은 아니다. 이미 여성 노동자들 중에는 생리휴가·육아휴직을 사용하거나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제기할 때 눈엣가시로 찍혀 승진 누락과 해고 위험에 놓인 사례가 여럿 있다. ‘쉬운 해고’가 도입되면 이런 사례가 더 확대될 수 있다.

노동개악 양대 지침 분쇄, 무상보육 국가 책임 강화, 임금 격차 해소와 최저임금 인상, 시간제 일자리 반대, 직장 내 성희롱 반대 등을 내걸고 여성 노동자 처지 개선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잠재력

경제 위기 속에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이중 부담이 커지고 있지만,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잠재력은 여전하다. 2015년 11월 현재, 한국의 여성 임금노동자는 8백62만 명이다. 전체 임금노동자의 44퍼센트가량을 차지하는 것이다.

여성 노동자 중 비정규직 비율은 여전히 높지만, 2000년대 초반에 비하면 감소 추세다. 여성 노동자 45퍼센트가량은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비정규직이라 할지라도 모두 잠시 동안 일하다 그만두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계약을 갱신하면서 여러 해 동안 일한다. 기간제·파견·용역 노동자의 60퍼센트 이상이 상용직이다. 기업주의 입장에서도 숙련도가 쌓이기도 전에 노동자들을 계속 교체하는 것은 손해다. 박근혜 정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에서 무기계약직을 늘리는 이유 하나도 규모가 커진 비정규직 인력을 더 안정적으로 유지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성 노동자들은 조건 개선을 위해 스스로 조직하고 투쟁할 잠재력이 있다. 교육·공공서비스·보건의료 등 중요한 공공부문 정규직 일자리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비정규직의 경우, 정부 통계로도 전체 비정규직의 30퍼센트 이상이 대기업과 공공부문에 존재한다. 이것은 정부와 대기업이 정규직 노동자뿐 아니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대규모로 결집시키고 있고, 이 때문에 비정규직의 대규모 조직화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뜻한다.

지난 몇 해 동안 학교비정규직, 대형 마트, 대학 청소 등의 여성 노동자들이 이런 조건을 활용해 투쟁을 벌이고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둬 왔다.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 10만여 명은 노동조합으로 조직돼 투쟁했고, 그중에서도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은 1년 이상 상시·지속 업무에서 일한 기간제 노동자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해, 정부 방침보다 더 높은 수준의 고용안정을 따냈다. 홈플러스 노동자들은 지난해 민주노총 하루 파업에 동참하는 투쟁을 벌였고 회사 인수·합병 과정에서 함부로 노동자들을 구조조정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여성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의식의 성장으로, 직장 내 성희롱에 맞서 노동조합과 함께 싸우는 사례도 늘고 있다. 2011년 현대차 사내하청 여성 노동자의 투쟁은 승리를 거뒀고, 최근에는 르노삼성자동차 여성 노동자가 민주노총 여성위원회·여성단체들이 지원하는 직장 내 성희롱 소송에서 일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누군가가 대신 해방시켜 줘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여성 노동자는 스스로 조건을 개선하고 더 나아가 남성 노동자와 함께 완전한 여성 해방을 이룰 열쇠를 쥐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강요하는 경제 위기 고통 전가에 맞서 투쟁하면서 여성 노동자의 의식과 조직이 성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입력 2016-03-02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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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재생산 이론과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

정진희

최근 몇 년 새 서구의 일부 좌파들 사이에서 사회재생산 이론이 주목받고 있다. 사회재생산 이론이 단일하지는 않다. 마르크스주의뿐 아니라 비마르크스주의 전통의 다양한 이론가들이 있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리즈 보겔의 책이 2013년 재출간된 뒤 그의 사회재생산 이론이 부흥하고 있다.

사회재생산 개념은 사회과학에서 여러 의미로 사용된다. 가장 단순한 의미는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과 관련된 기관들이 재생산되는 것, 즉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자신을 유지하는지를 가리킨다. 페미니즘 이론에서는 자본주의에서 여성들이 가족 내에서 수행하는 노동력 재생산 노동(가사노동)과 자본 축적 사이의 관계를 가리키는 데 주로 사용된다.

보겔의 사회재생산 이론은 1970년대 가사노동 논쟁에서 많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제안한 ‘이중체계’론의 대안으로 제시됐다. 1983년 처음 출판됐다가 2013년 재출판된 보겔의 책 제목이 이런 의도를 잘 나타낸다. 그 제목은 《마르크스주의와 여성 차별 — 단일 이론을 향해》이다.

많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급진 페미니즘의 ‘가부장제’ 개념[1]을 수용해 이중체계론을 제시했다. 여성 차별을 자본주의와 별개로 작동하는 ‘가부장제’의 산물로 설명하며, 상품 생산과 착취의 영역과 사사화(私事化)된 가족의 영역을 분리해 별도로 작동하는 것으로 취급했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생산과 재생산의 분리를 극복하고, 가족이 여성 차별에서 하는 구실을 자본주의 체제 전체 속에서 파악한다.

자본주의에서의 여성 차별을 유물론적이고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1970년대 이후 초역사적 가부장제 이론이 득세하고, 뒤이어 포스트모더니즘 ·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이 확산되면서 페미니즘에서는 한동안 유물론과 총체적 설명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문화주의적 서술과 파편적 경험을 나열하는 서술이 페미니즘을 지배했다.

그동안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차별과 관련된 제도로 가족에 주목해 왔지만, 주로 가족 내의 남성과 여성의 불평등한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지, 가족제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는 구실을 다루는 논의는 흔치 않았다.

사회재생산 이론이 다시금 사사화된 노동력 재생산과 자본주의 체제의 관계를 핵심 쟁점으로 부각시킨 것은 반가운 일이다. 여성 차별을 단지 남성들의 태도나 관념 문제로 취급하지 않고 유물론적으로 이해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보겔의 사회재생산 이론

마르크스는 노동력을 “인간이 지닌 정신적 · 육체적 능력이 결합된 것으로 사용가치(어떤 형태든)를 만들어 낼 때 사용하는 능력”이라면서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이 아주 독특한 상품이라고 규정했다. 마르크스는 자본 축적이 지속되려면 생산조건의 구성요소로서 노동력이 재생산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이해했지만, 노동계급 가족이 하는 구실을 적절히 이론화하지는 못했다.

보겔은 계급사회에서의 노동력 재생산 방식에 관한 통찰에 바탕을 두고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 가족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방식을 이론화한다. 보겔은 계급사회에서의 여성 차별이 “세대 재생산 과정”에서 남녀가 “다른 지위”를 차지하는 데서 생겨난다고 봤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대체로 일어나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형태”로서 가족을 지목한다.

보겔은 계급사회에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세 과정이 있다고 본다. 첫째, 직접 생산자들이 에너지를 충전해 다시금 일터로 갈 수 있게 하는 각종 일상 활동들이 있다. 둘째, ‘종속계급’에서 노동하지 않는 구성원들(너무 어리거나 늙었거나 병들었거나 다른 이유로 노동인구에 포함되지 않은)을 유지하는 활동이 있다. 셋째, 종속계급 중 사망했거나 더는 일할 수 없게 된 구성원들을 대체하는 과정이 있다.

보겔은 “사회에서 성별의 지위가 다른 데는 물질적 요인이 있고 생물학은 그 일부”이지만, 어느 사회든 성차를 사회관계에서 떼어놓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즉, 여성이 아이를 낳고 젖을 먹여야 한다고 해서 여성이 꼭 차별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성별] 분업과 개인의 차이가 지닌 사회적 중요성은 그런 차이들이 뿌리내린 실제 사회의 맥락에 따라 구성된다.”

그래서 여성은 계급사회에서 노동을 해도 가정에서 맡은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성은 “직접생산자”가 될 수 있지만 “노동력 재생산에서 다른 책임을 맡는다는 것이 바로 계급사회 여성 차별의 뿌리”라고 지적한다.

△“노동력 재생산에서 다른 책임을 맡는다는 것이 바로 계급사회 여성 차별의 뿌리” ⓒ사진 이미진

보겔은 “개별 가족 가정 안에서 끊임없이 긴장이 조성되는 상황에서 여성 차별이 오직 남성에 의한 차별이고, 여성 차별이 역사를 초월해 존재하는 적대적인 성별 분업에서 비롯했고 가족에 체화된 것”처럼 보기 쉽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여성의] 가사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의 재생산에 필요한 것이고, (성별 분업이나 가족 자체가 아니라)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 차별과 불평등이 지속되는 물질적 기초”라고 명료하게 말한다.

이처럼 보겔의 사회재생산 이론은 가족을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자 만들고 유지하는 제도로 보는 음모론적 설명과는 다른 유물론적 설명이다. 가사노동을 남성이 아니라 자본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본다.

가족은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동력인가?

사회재생산 이론가들이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서 가족이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지적한 것은 옳다. 그들뿐 아니라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자본주의에서 여성 차별을 구조화하는 제도로서 가족에 주목해 왔고, 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에서 가족의 경제적 · 이데올로기적 구실을 강조하며 여성 차별과 착취를 유기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크리스 하먼은 가족이 자본주의 사회관계를 재생산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경제적 구실을 한다고 말했다. 노동계급의 가족은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지배계급의 가족은 부를 물려준다는 것이다.

노동계급 가정에서 주로 여성이 수행하는 재생산노동(청소, 요리, 빨래, 양육, 간병 등)이 현재와 미래의 노동력을 재생산해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가족은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중요한 구실을 한다. 양육에는 단지 먹이고 입히는 것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규범을 새로운 세대에게 전수하는 사회화도 중요하게 포함된다. 가족이 험난한 세상의 안식처라는 이데올로기는 고용주들이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비용을 개인들에게 전가하는 구실을 하고, 구조적 불평등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해 보수적 가치관을 확산시키는 데도 유용하다.

그러나 가족이 이처럼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해서 자본주의 체제를 움직이는 핵심 동력인 것은 아니다. 사회재생산 이론은 가족이 자본 축적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임금노동 착취와 대등하거나 비슷한 수준으로 취급하는데, 이는 가족이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동학을 이루는 것처럼 오해하게 한다.

일부 사회재생산 이론가들은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창출한다면서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사노동이 임금노동만큼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탈리아 자율주의 페미니스트 실비아 페데리치는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적 노동’이고 자본 축적에 꼭 필요한 노동이라며 여성이 가정에서 재생산노동을 하는 노동자라고 주장한다.[2] 페데리치는 “마르크스주의는 상품 생산 이외의 가치 생산을 보지 못한다”며 “가사노동을 생산적 노동으로 보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적 노동관을 수용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렇게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의 차이를 흐리는 견해는 1970년대 가사노동 논쟁에서 흔했다. 이탈리아 자율주의 페미니스트인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는 여성은 “남성 임금노예의 노예”이고, 여성 노예가 남성 임금노예를 가능케 한다고 주장했다. 가정주부를 착취받는 ‘생산적 노동자’로 본 그의 저서는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는 소규모 운동을 촉진했다. 그들은 자본주의에서는 임금노동만이 가치를 갖고 ‘생산적’으로 여겨지므로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 운동에 동참했던 페데리치는 지금껏 이 운동의 의의를 강조하고 있다.

1970년대 가사노동 논쟁은 마르크스 역사유물론의 용어들을 차용해 진행됐지만, 대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을 오해한 채 이뤄졌다. 가사노동을 ‘비생산적 노동’이라고 본 마르크스가 여성의 가사노동을 하찮은 일로 경시했다고 오해하면서, 마르크스의 범주 자체가 성차별적이라고 비판한 페미니스트들이 많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은 해당 노동이 유용한지 또는 인간 생존에 얼마나 필요한지를 중심으로 가치가 있는지 또는 생산적인지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에게 ‘생산적 노동’은 잉여가치를 직접 창출하는 노동을 뜻했다. 이때 ‘생산적’이라는 의미는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어떤 노동이 그렇게 간주되는지 밝힌 것이었다. ‘생산적 노동’ 개념은 도덕론의 개념이 아니라 잉여가치의 원천을 밝혀 자본주의 체제의 동역학을 밝히려는 시도의 도구였다.

마르크스는 착취를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 동력으로 파악했다. 착취는 임금노동자들이 자신이 생산한 가치 중 임금을 제외한 나머지(잉여가치)를 자본가가 가져가는 것을 말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개별 노동자가 수행하는 구체적 노동이 아니라 추상적 노동이다. 착취는 사회적 관계, 즉 한편에는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다른 한편에서는 서로 경쟁하는 자본가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이다. 따라서 개별 노동자가 얼마나 많은 가치를 생산하느냐가 아니라, 해당 시기에 특정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드는 사회적 평균 시간(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 중요하다.

여성이 개별 가정에서 무보수로 하는 가사노동은 상품(재화든 서비스든)을 생산하는 노동처럼 고용주의 통제를 받으며 수행하는 노동이 아니고, 사회적으로 노동생산성이 비교되는 성격의 노동이 아니다. 따라서 임금노동과 (무급) 가사노동은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고, 둘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율주의자들은 생산의 개념을 확대해 가족을 생산의 장소로 취급한다(자본주의에서 모든 사회적 관계를 생산관계로 보는 이탈리아 노동자주의 측의 ‘사회적 공장’ 개념에서 유래).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가족은 자본주의 이전 계급사회의 피지배계급 가족과 달리 생산의 단위가 아니다. 봉건제에서 농민은 가족 단위로 일했고 가족은 생산과 재생산이 함께 이뤄지던 단위였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공장제 생산이 도입되면서 일터와 가정이 공간적으로 분리됐다. 영국에서 산업혁명 뒤 노동계급 가족은 초기에 해체 위기를 겪다 다시 재조직됐는데, 노동계급 가족은 생산이 아니라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구실을 하며 상품을 소비하는 단위가 됐다.

무급 가사노동을 자본주의 체제 지속에서 임금노동 착취만큼이나 핵심적이라고 본다면, 자본주의에서 갈수록 임금 노동자가 증가해 온 사실, 특히 여성들의 임금노동 참가가 증가해 온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20세기 들어 산업국가에서는 전업주부 수가 급격히 줄고, 갈수록 많은 여성이 집 밖의 임금노동에 참가해 왔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크리스 하먼이 지적했듯이, 자본주의 체제의 원동력은 국가가 여성 차별을 위해 사사화된 재생산 제도를 유지하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이윤을 향한 경쟁적 자본 축적 압력이다. 자본주의가 이전 계급사회와 구별되는 역동성을 지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가족은 별도의 동학을 지니는 게 아니라 이런 자본 축적 압력에 종속된다. 가족은 지배계급이 축적을 지속하기 위해 이용하는 메커니즘(기제)의 하나다.

사실, 여성이 전업주부로만 있는 것은 자본가들에게는 여성을 노동자로 착취해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을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력 재생산 부담을 개별 가족에 떠넘기는 것이 자본가 계급에 상당한 경제적 이득을 준다고 해서 자본가들이 여성을 전업주부로 가정에 묶어두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 이유이다. 자본가 계급에게 여성을 노동자로서 착취하는 것의 중요성은 심지어 경제 불황기에도 감소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가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여성의 고용률을 끌어올리려 애쓰는 것이 단적인 사례다.

자본주의 국가가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등 양육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출산휴가와 부모휴가 등 양육을 지원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것은 더 많은 여성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내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여성의 대량 노동시장 진출이 미래의 노동력 재생산 위기를 부르지(18~19세기 초반 영국 산업화 때 심각하게 나타났듯이) 않도록 하기 위한 조처이기도 하다.

물론 여성의 임금노동 참가가 확대되고 이를 위해 국가의 노동력 재생산 지원이 늘어난다 해도, 자본주의 하에서 가사와 양육에 대한 대대적인 사회적 투자가 지속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장기 호황기(1940~60년대)에 여성을 노동시장으로 끌어내기 위해 가사와 육아에 대한 투자가 선진국들에서 상당히 늘어났지만 그때조차 투자 규모는 제한적이었다.

더욱이 지금처럼 자본주의가 장기적이고 심각한 위기에 처한 시기에는 과거에 이뤄진 부분적 사회화 조처(노동력의 안정적 수급 필요성과 노동계급의 압력이 작용해 만들어진 복지제도)도 지배자들의 심각한 공격을 받는다.

그래서 가족은 오늘날에도 노동력을 저렴하게 재생산하는 주요 제도로 남아 있고, 경제 위기와 불황을 제거할 수 없는 자본주의 하에서 사사화된 재생산 제도는 결코 사라질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하의 여성차별은 그 양상이 바뀔지언정 결코 사라질 수는 없다. 자본주의에서는 사회적 생산과 사사화된 재생산 사이의 모순을 제거할 수 없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착취적 생산관계에 바탕을 둔 이윤 추구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직접 창출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해서 가사노동이 여성을 얼마나 짓누르는지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페데리치의 주장처럼 자신들이 1970년대에 처음으로 ‘숨겨진 여성 노동’을 발견한 것도 아니다. 콜론타이, 체트킨, 룩셈부르크, 레닌, 트로츠키 등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미 여성의 과중한 가사부담이 여성의 동등한 사회 활동 참가를 가로막는다고 여러 차례 지적하며 해결책을 모색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뒤 볼셰비키는 공공식당 · 공공세탁소 · 어린이집 등을 지어 가사와 양육을 사회화하고자 애썼다.

가사노동이 잉여가치를 직접 생산하지 않는다고 해서 잉여가치 생산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볼 수는 없다. 무급 가사노동은 현재 노동자들의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절감하고 미래의 노동자를 기르는 구실을 하므로, 잉여가치 창출에 간접적으로 기여한다.

그러나 가사노동과 잉여가치의 관계는 기껏해야 간접적인 것이고, 모순도 있다. 과중한 가사노동은 종종 여성의 사회적 노동 참여를 제한해 자본가들이 잉여가치를 얻을 기회를 줄이기도 한다. 여성이 전업주부로 남아 있거나 양육 책임 때문에 장시간 근무를 기피하는 것은 자본가들이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는 것을 방해한다.

가족관계를 생산관계처럼 설명하는 것은 자본주의 가족제도의 모순을 가리기도 한다. 자본주의에서 가족이 유지되는 이유가 단지 지배계급의 필요 때문만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꾸리고 헌신하는 이유가 자본가들을 위한 노동력을 재생산하려는 생각 때문은 아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기 위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자본주의에서 가족은 모순된 제도이다. 가족에서 사람들은 불평등과 천대를 경험하기도 하지만, 서로 기대고 위안을 찾기도 한다. 가족의 이상과 현실은 상당히 다르지만, 생산과 사회 전반을 통제할 수 없는 노동계급의 남성과 여성은 비혁명적 시기에 대개 가족을 통해 소외를 극복하려고 한다.

생산과 노동력 재생산

사회재생산 이론가들이 모두 가사노동을 임금노동과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다. 보겔 같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는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을 단순히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보겔은 가사노동에는 사용가치가 있지만 교환가치는 없으므로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이 아니고 따라서 가사노동과 임금노동을 직접 비교할 수 없다고 본다. 그는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 운동의 이론적 가정(모든 여성은 가사노동자로서 착취받는다)에 반대했고, 그 운동이 가사가 여성의 일로 여겨지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비판적이었다.

보겔은 가사노동이 자본 축적에서 모순된 구실을 한다고 옳게 지적했다. 가사노동은 노동력 재생산에 기여해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기여하지만, 여성의 가사노동 참여 시간이 길면 그만큼 사회적 노동 참여 기회가 줄어들어 잉여가치 창출을 저해한다고 설명한다. 보겔은 자본주의에서 임금노동이 발전하면서 가사노동이 상품화돼 가사노동 시간이 감소하고,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 증가로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국가 개입이 발전한 것을 지적한다. 보겔은 자본 축적 논리 때문에 자본주의에서는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의 모순이 사라질 수 없다고 본다.

그러나 보겔도 가사노동이 자본 축적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과장하는 약점이 있다. 가사노동이 가치를 창출하지는 않지만 잉여가치 전유 과정에서 핵심적 구실을 한다고 보며,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사회를 재생산하는 데서 임금노동과 유사한 수준으로 필수적이라고 본다.

보겔은 자본주의에서 노동력 재생산 과정 전체를 이론화하고자 마르크스의 필요노동 개념을 확대했는데, 이것은 마르크스의 개념에 혼란을 초래할 뿐, 별로 유용하지 않다. 보겔은 필요노동을 사회적 성분과 가내적 성분으로 나누고, 가사노동을 필요노동의 가내적 성분으로 규정했다. 이렇게 필요노동 개념을 확대한 이유는 노동력 재생산이 실제로 이뤄지려면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이 결합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필요노동 개념은 생산과정에서 노동자가 수행하는 노동시간을 두 부분으로 구별한 개념이다. 즉, 노동자의 하루 노동일 중 자신의 생계를 위해 노동한 시간(필요노동)과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는 시간(잉여노동)을 구별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필요노동 개념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적 노동이 아니라 교환을 통해 비교되는 추상적 노동을 뜻한다.

따라서 무급 가사노동은 마르크스가 말한 의미의 필요노동이 될 수 없다. 2013년 개정판에서 보겔은 (그 이유를 자세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가사노동을 필요노동의 일부로 이론화한 것이 설득력이 부족함을 인정했다.

가사노동을 필요노동의 한 요소(가내적 요소)로 이론화할 경우 상이한 사회적 관계에 놓인 노동을 한데 묶어 임금노동과 가사노동의 차이가 흐려지게 될 수 있다. 그러면 자본 축적에서 임금노동 착취가 핵심이라는 점이 흐려진다.

자본주의에서 생산과 사사화된 노동력 재생산 단위(가족)는 상호작용하지만, 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해서는 생산이 훨씬 더 중요하다. 자본주의의 역동성은 가족이 아니라 경쟁적 축적에서 비롯하고, 가족은 생산의 변화에 따라 계속 변화한다. 비록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족의 경제적 · 이데올로기적 구실은 바뀌지 않았지만 가족의 규모와 형태는 자본주의의 물질적 생산이 바뀌면서 크게 변화해 왔고, 특히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 증대는 결혼과 가족에 대한 대중의 태도 변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물론 보겔은 가족이 축적 논리에 종속돼 계속 변화한다고 보지만, 자본주의에서 여성의 구실을 대부분 재생산에 초점을 둬 설명한다. 선진 자본주의에서 여성의 임금노동 참가가 증대해 온 경향을 언급했지만, 오늘날 여성의 다수가 임금노동에 참가하고 생애주기에서도 갈수록 긴 시간 일한다는 사실, 즉 여성이 자본주의 생산에서 핵심적 구실을 한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는다. 그보다 생산과 재생산 사이의 모순에 집중한다. 보겔도 가사노동 논쟁의 약점(무급 가사노동에만 초점을 둬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를 경시)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여성해방의 전략

가족과 자본 축적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착취와 여성 차별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며, 이것은 여성해방의 전략에 큰 함의가 있다. 페데리치처럼 가정주부가 잉여가치를 생산한다고 보면 가정주부가 자본주의 변혁의 핵심 주체가 된다. 페데리치는 몇 년 전 국역 출판된 저서의 서문에서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 운동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과장되게 서술했다.

“자본주의는 노동력 비용을 억제하기 위해 부불재생산노동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했다는 점에서, 또한 이 부불노동의 근원을 소진시키기 위한 성공적인 캠페인은 자본축적 과정에 파열구를 내고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공통적인 지형 위에서 자본과 국가에 맞선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안겨 주었다는 점에서,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운동은 우리에게 혁명적이었다.”[3]

물론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력 재생산이 사사화되는 것은 대부분의 여성에게 큰 부담을 안겨 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불만은 여성들이 특정 시기에 차별 반대 운동에 참가하는 동기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재생산 사사화에 따른 부담과 차별에 자극받아, 가정주부들이 자본가나 국가에 맞서 집단적인 투쟁을 지속적으로 벌이지는 못한다. 부유한 여성들은 노동계급 여성을 보모나 가정부로 고용해 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또 계급적 이해관계 때문에 재생산 부담을 사회가 책임지는 조처에 흔히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 특히, 노동력 재생산이 개별 가족 내에서 이뤄지는 방식은 가정주부의 고립을 낳아 무기력감에 빠지게 한다. 이는 착취가 노동자들을 한데 결집시켜 집단으로 고용주에 맞설 잠재력을 부여하는 것과 대조된다.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는 운동의 이론적 가정 하나는 여성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곳이 가정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생산은 대부분 가정 밖에서 이뤄지므로, 가정은 여성들이 가장 강력한 곳이 아니라 가장 약한 곳이다. 여성이 가사노동을 거부한다고 자본가들이 타격을 입는 것은 아니고, 고립된 가정에만 머무는 여성은 무기력감을 느끼기 쉽다.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는 운동은 당시 여성운동에서도 호응이 적었다. 그 운동의 가정이 비현실적이었고 가사노동을 ‘여성의 일’로 여기는 고정관념을 강화할 위험도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운동은 자본주의 하에서 주로 여성이 개별 가정에서 맡아 온 고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전혀 제공하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착취 개념을 단순히 도덕적 의미로 이해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핵심적 사회관계를 이해하는 개념으로 사용했기에 착취의 이중성을 이해했다. 즉 착취는 단지 비참함만 뜻하는 게 아니라 그런 고통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페데리치는 착취를 단지 고통으로만 여긴다. 그는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가 “해방이 아니다”라며 동등한 노동 참여를 요구하는 여성운동을 비판했다.

한편, 보겔은 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의 약점을 인식했지만, 효과적인 여성해방의 전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보겔은 여성 차별의 기원을 설명하지 않고(엥겔스를 이중체계론의 원조로 오해해 엥겔스를 크게 깎아내린다)[4] 계급투쟁이 여성해방에서 어떤 구실을 하는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보겔이 옛 소련과 동유럽 같은 스탈린주의 체제를 ‘사회주의’로 본다는 점과 관련 있다. 스탈린주의 체제를 무계급 사회로 가정하니 이들 사회에서 여성 차별은 착취와 무관한 게 된다. 착취와 차별을 분리하는 이중체계론의 유산이 남아 있는 것이다.

보겔은 자본주의에서 여성이 처한 이중적 상황을 가사노동과 평등 침해로 보고, 여성이 계급을 뛰어넘어 단결할 수 있다고 여긴다. 노동계급 여성만이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가사노동에 종사하지만, 민주적 권리 문제에서는 모든 여성이 차별을 겪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착취와 차별의 구실을 대등하게 여기며 계급투쟁의 결정적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는 경향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특징이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 사이에 계급적 차이가 있음을 인식하지만, 착취가 여성해방 투쟁에서 어떤 잠재력을 제공하는지 간과한다. 보겔은 클라라 체트킨이 여성을 노동자로서만 강조해서 임금노동에 참여하지 않는 노동계급의 아내와 딸들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고 비판한다.

체트킨뿐 아니라 마르크스, 엥겔스, 룩셈부르크, 콜론타이, 레닌, 트로츠키 등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두 여성 노동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를 두고 마르크스주의 여성 해방론을 계급 환원론으로 비판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많다.

그러나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저작을 찬찬히 읽어 보면 그들이 여성 차별을 여성 노동자들이 겪는 경제적 착취로 환원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5]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여성 노동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은 첫째, 자본주의에서 근본적 분단선은 성이 아니라 계급이고, 둘째, 여성이 노동자가 되면 단지 자본주의 체제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는 핵심 주체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보겔은 자본주의 내 법적 평등은 한계가 있으므로 사회주의가 필요하다고 보지만, 범계급적 여성운동을 창출하는 전략을 제시한다. 그는 광범한 여성운동이 사회주의 운동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모든 계급의 여성이 불평등과 천대를 겪는다고 해서 여성들의 이해관계가 단일하지는 않다. 여성운동의 역사를 보면, 특정 쟁점(선거권, 낙태권)에서 여성들이 일시적으로 단결할 수는 있었지만 그런 투쟁에서도 계급적 차이 때문에 번번이 분열했다.

여성들이 차별받는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사회주의 운동에 동참할 수 있다는 가정은 비현실적이다. 지배계급 여성은 물론, 중간계급 여성들조차 노동계급 여성들과 동일한 이해관계를 지니지는 않는다.

물론 중간계급 여성들이 노동계급 여성들의 적은 아니고, 중간계급 여성들이 제기하는 요구들은 흔히 노동계급에게도 중요한 요구다. 동일임금, 공공보육시설 확충, 낙태권 등 중간계급 여성들과 노동계급 여성들 모두가 공감하는 요구들이 있고 이런 쟁점에서 이들이 함께 운동을 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중간계급 여성들이 자본주의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노동계급과 같지 않고, 이 때문에 그들의 이해관계는 흔히 노동계급과 충돌한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중간계급 여성들이 단일한 집단은 아니다. 하층 중간계급 여성들의 삶은 노동계급 여성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상층 중간계급 여성들의 삶은 그렇지 않다. 상층 중간계급 여성들도 차별을 겪지만 그들은 체제 내에서 특권을 누리기도 하므로 (예외적 개인들을 제외하면) 자본주의 체제를 분쇄하기보다 체제 내에서 평등을 얻기 바란다. 중간계급에 기반을 둔 페미니즘 조류들은 여성이 기업과 국가기구 요직으로 진출하는 전략을 추구해 왔고, 이 과정에서 종종 지배계급 일부와 동맹한다.

따라서 특정 쟁점을 놓고 노동계급 여성들이 중간계급 여성들과 단결하는 것은 때로 필요해도(이때 노동계급 여성들이 독자적 계급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 정치적 독립성이 중요하다), 사회주의적 좌파가 초계급적 여성 동맹 전략을 옹호할 수는 없다. 그런 전략은 실천에서 몇 가지 문제를 낳는다.

첫째, 여성운동의 단결을 강조하면서 여성운동 내에 존재하는 전략적 차이를 흐릴 수 있다. 여성운동 내에 친자본주의적 계급협력 사상이 커다란 영향력이 있기에 전략적 차이를 흐리는 것은 위험하다. 보겔이 있는 미국의 여성운동에서 주류 세력은 민주당 같은 지배계급 정치인들과 연계해 왔다. 이 때문에 주류 페미니즘은 매우 온건한 방식으로 활동했고, 민주당 집권기에는 낙태권 제한을 포함해 많은 후퇴를 수용했다. 1990년대 이후 한국의 여성운동에서도 주류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체제 내 평등을 추구하면서 민주당 같은 자유주의 부르주아 세력과 연계해 왔다. 그래서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몇몇 개혁 입법 성취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지만, 김대중 · 노무현 정부에서 정부의 반노동계급적 정책을 상당 부분 수용하는 등 매우 모순된 구실을 했다.

둘째, 여성 차별에 맞선 투쟁이 더 광범한 노동계급 투쟁과 연결될 필요성을 간과하게 된다. 물론 여성들은 차별에 맞서 스스로 싸워야 하지만, 여성들만의 투쟁으로는 효과적인 투쟁이 되기 어렵다. 나아가 여성 차별의 근원인 자본주의 계급사회를 전복하는 것은 여성들만의 투쟁으로는 아예 불가능하다.

여성 해방과 계급투쟁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여성들의 차별 반대 운동뿐 아니라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이 중요하다. 여성차별을 구조화하고 지속시키는 자본주의 체제를 끝장낼 잠재력이 있는 사회세력은 노동계급뿐이기 때문이다. 노동계급만이 자본주의 이윤에 타격을 가해 체제를 뒤흔들 수 있는 대규모 투쟁을 벌일 수 있는 사회 세력이다. 노동계급 투쟁은 자본주의에서 계급세력 균형을 바꾸고 대중의 자신감을 높이는 결정적 방법이다.

노동계급이 자신감 높을 때는 자신의 힘을 착취뿐 아니라 차별에 맞서는 데도 사용할 수 있다. 노동계급 투쟁 고양기에는 여성 노동자들이 착취뿐 아니라 차별에도 반대해 대규모 투쟁을 벌이는 일이 흔히 일어났다.

노동계급 투쟁의 결정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노동계급 아닌 여성들의 투쟁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노동계급 중심성이라는 개념은 노동계급 투쟁만이 중요하다며 노동계급이 아닌 다른 피억압자들의 투쟁을 기각하는 노동자주의와 전혀 다르다. 레닌은 모든 차별받고 천대받는 집단이 스스로 투쟁하고 조직할 권리를 옹호했고, 혁명가들의 임무는 “인민의 호민관”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노동계급을 중시하는 전략은 여성의 권리 쟁취 투쟁에서도 중요하다. 1975년 영국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부와 우파의 낙태권 공격에 맞서 낙태권이 단지 여성만의 쟁점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문제라며 낙태권 투쟁에 노동조합이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사업장과 노동조합 지부들에서 노조원들의 지지를 끌어내려고 애썼다. 이런 노동자 조직화 덕분에 영국 노총(TUC)은 최대 7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거리 동원을 이끌었고, 이렇게 노동조합 운동에 기반을 둔 낙태권 투쟁은 합법 낙태를 제한하려던 우파의 시도를 좌절시킬 수 있었다. 반면, 노동운동이 훨씬 약했던 미국에서 낙태권 투쟁은 의회 로비에 치중했고, 이 때문에 우파의 낙태권 공격에 제대로 맞서지 못했다. 오늘날 미국에서 합법 낙태의 범위는 엄청나게 축소됐다.

여성 차별에 맞선 투쟁의 성패는 그 투쟁이 노동계급 운동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느냐에 달려 있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 차별에 맞선 투쟁이 성공하느냐는 노동계급이 전진하느냐 후퇴하느냐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19세기 중후반~제1차세계대전 전에 일어난 대규모 여성 선거권 투쟁은 단지 페미니스트들만의 운동이 아니었다. 노동운동이 발달한 나라들에서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서 노조와 사회주의 단체 등에 속한 노동계급 활동가들의 구실이 매우 컸다.

러시아에서 여성의 완전한 참정권이 보장된 것은 볼셰비키가 이끈 노동계급 혁명이 성공한 뒤 에 이뤄졌다.(당시 여성의 완전한 참정권이 보장된 나라는 몇 안 됐고, 프랑스에서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야 여성 투표권이 온전하게 보장됐다.) 러시아 혁명은 이혼 간소화, 동일임금 법제화 등 많은 개혁 입법을 이뤄냈고, 세계 최초로 낙태를 합법화하고 동성애 합법화도 이뤄냈다.

이런 성과는 러시아 혁명이 쇠락하면서 후퇴했고 마침내 스탈린의 반혁명으로 노동계급 전체가 패배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스탈린 치하에서 착취가 엄청나게 강화되면서 여성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조치들이 죄다 사라졌고, 낙태가 불법화됐고 어머니로서 여성상 강조 등 전통적 가족 이데올로기가 강화됐다.

따라서 차별과 천대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투쟁이 승리하려면 노동계급 투쟁과 연대해야 하며, 나아가 사사화된 재생산 부담을 전면 사회화하고 인간의 필요에 바탕을 둔 사회를 건설하려면 자본주의 시스템이 제거되고 노동자들이 의사결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은 본질적으로 여성해방과 별개 투쟁이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여성 대다수는 노동계급의 일원이고 여성 노동자 수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페미니즘 이론에서는 여성이 노동계급의 중요하고 핵심적인 일부라는 점을 종종 간과하지만, 여성 노동자들은 오늘날 자본주의 생산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전 세계 노동인구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어도 40퍼센트이고, 성인 여성의 적어도 55퍼센트가 임금노동에 종사한다(세계은행 조사). 한국에서도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여성 임금노동자 수는 8백40만 명가량 돼, 전체 임금노동자 수의 44퍼센트를 차지한다.

여성이 노동자가 되면 고된 노동과 차별이라는 이중의 굴레에 시달리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착취와 차별 모두에 맞설 수 있는 집단적 힘을 지닌 존재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들과 함께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여성 노동자들은 러시아 혁명부터 21세기 아랍 혁명까지 노동계급 투쟁과 사회 변혁운동의 중요한 일부였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벌어진 긴축 반대 투쟁에서도 공공부문 노동자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들의 참가가 중요했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 들어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스스로 조직하고 싸워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물론 노동계급의 잠재력이 늘 현실화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노동계급 투쟁은 여러 약점을 안고 있고, 노동계급 내에 존재하는 여성 차별은 노동계급을 종종 분열시켜 노동자 운동을 약화시키곤 한다.

오늘날 여성 노동자 수와 비중이 늘어나면서 노동운동에서 차별 문제는 더욱 중요해졌다. 여성 차별은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과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할 수 있는 힘을 약화시킨다.

따라서 노동계급이 해방되려면 착취와 차별 모두에 맞선 단결된 투쟁이 필요하다. 노동계급이 분열된 상태에서는 착취에서도 해방될 수 없다. 노동계급 의식은 불균등하기에 노동계급 투쟁은 고용주나 정부 관료에 대한 도전뿐 아니라 흔히 노동계급 내부의 사상 투쟁을 수반한다. 노동계급은 집단적 투쟁을 통해 자신감을 얻고 의식을 발전시키며 사회를 변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노동계급 투쟁의 역사를 보면, 노동계급은 자신의 조건 개선뿐 아니라 차별받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서도 싸울 수 있고, 나아가 사회 전체를 변혁하는 투쟁을 벌일 수 있는 혁명적 잠재력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실제 투쟁에서 배우면서 이런 잠재력을 현실화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1] 급진 페미니즘은 여성 차별을 초역사적인 ‘가부장제’로 설명하며 대체로 유물론적인 설명을 거부했다. 유물론의 형태를 취할 때는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처럼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나타났다.

[2] 페데리치(2011),《혁명의 영점》, 황성원 역, 갈무리.

[3] 페데리치, 앞의 책, 27쪽.

[4] 이중체계론자들이 엥겔스의 문구를 사용해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했지만, 엥겔스 자신은 계급 사회에서 인간 종의 재생산은 생산에 종속된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5]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 — 콜론타이 · 체트킨 · 레닌 · 트로츠키 저작선》(책갈피)를 보라.

참고 문헌

실비아 페데리치(2011), 《혁명의 영점》, 황성원 역, 갈무리.

정진희 엮음(2015),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 — 콜론타이 · 체트킨 · 레닌 · 트로츠키 저작선》, 책갈피.

크리스 하먼(2007), 《여성해방과 맑스주의》, 최일붕 역, 다함께.

Dalla Costa, Mariarosa(1971), “Women and the Subversion of the Community”, http://www.generation-online.org/p/fpdallacosta2.htm

Ginsburgh, Nicola(2014), “Lise Vogel and the politics of women’s liberation”, International Socialism 144.

Orr, Judith(2015), Marxism and Women’s Liberation, Bookmarks.

Vogel, Lise(2013), Marxism and the Oppression of Women – Toward a Unitary Theory, Haymarket Books.

입력 2016-03-16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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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여성 정책 평가

이현주

새누리당, 노동 개악 + 시간제 일자리 확대

시간제 일자리 등 박근혜 정부 정책 뒷받침하는 공약 내놓은 새누리당 ⓒ조승진

박근혜 정부 들어 평범한 여성들의 삶은 더 나빠졌다. 박근혜 정부는 경제 위기 고통전가 기조 속에서 “노동개혁”을 밀어붙였다. 정부는 여성들에게 일도 하고 아이도 보라며 시간제 일자리를 대폭 늘렸다. ‘무상보육’을 약속한 박근혜는 재정 부담을 교육청에 떠넘겼다. 해마다 반복된 보육 대란의 피해는 고스란히 학부모와 보육 교사들에게 돌아갔다. 노동자와 서민을 대변하는 정당이라면 여성노동자들의 이중의 굴레를 더 강화해 온 정부 정책에 반대하고, 질 좋은 정규직 일자리 확대와 여성노동자 차별 개선, 보육에 대한 국가 책임 강화 등을 분명히 요구해야 한다.

새누리당의 공약들은 이와는 정 반대다. “노동개혁”을 적극 홍보할 뿐 아니라, 시간제 일자리도 더 확대하는 정책을 내놨다. 보육 공약도 실질적인 보육의 국가 책임은 빠져 있거나 생색내기 수준이다. 누리과정 예산을 교육청에 떠넘기는 데 혈안이 돼 있기도 하다. 새누리당이 ‘5대 핵심 개혁 과제’ 중 하나로 제시한 ‘마더센터’ 설립 공약도 육아에 대한 실질적인 도움은 미미하고, 시간제 일자리만 늘릴 가능성이 커 보인다.

얼마 전 한국여성단체연합(이하 여연)은 각 정당에 성평등 정책에 대한 공개 질의서를 보냈는데, 여연이 요구한 과제들에는 노동시장 구조개혁안 철회, 평균임금의 50퍼센트로 최저임금 인상, 상시지속 업무에서 비정규직 정규직화, 국공립어린이집 30퍼센트로 확충, 이주여성의 취업 이동의 자유와 체류권 보장, 성적지향·성별정체성을 차별금지 사유로 예시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등 여성의 삶을 개선할 좋은 요구들이 많았다. 그런데 새누리당은 이에 대한 답변 자체를 거부해, 차별받는 여성들의 처지 개선에는 아예 관심이 없음을 보여 줬다.

새누리당 여성 비례대표들의 면면을 봐도, 이런 점이 드러난다. 이들은 대부분 성공한 여성 기업인들, 정부의 친기업 정책을 옹호해 온 이들이다. 코레일 사장 최연혜처럼 철도 민영화를 밀어붙인 자나 세월호 유가족들을 모욕한 김순례도 포함돼 있다. 이런 이들이 평범한 여성들의 삶을 이해할 리 없다.

더민주당, 새누리당보다는 낫지만 한계 명백

△우클릭 중인 더민주당 ⓒ<노동자 연대>

더민주당의 여성 노동, 보육 문제 관련 공약들은 새누리당과는 구별된다. 상시적 업무의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고용, 최저임금 1만 원, 생활임금제, 공공 돌봄 서비스 일자리 확대와 처우 개선, 국공립어린이집 30퍼센트까지 단계적 확충, 육아휴직 급여 인상 등. 더민주당은 NGO 여성 단체들과 긴밀하게 소통해 왔는데, 여성 단체들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인 듯하다. 그럼에도 여연이 요구한 핵심 과제 중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과 사회경제적 사유로 인한 임신중절(낙태) 허용은 제외됐다.

더민주당이 자신의 공약들을 얼마나 우선순위에 두고 진지하게 실현해 나갈지도 의문이다. 지난해 더민주당은 ‘노동개혁’ 문제에서도 당론으로 ‘노동개혁’ 5법에 반대한다고 했지만 결국 비정규법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쟁점 법안을 놓고 협상이 가능하다는 입장으로 후퇴했다. 이보다 더 후퇴할 가능성도 열려 있다. 이는 더민주당이 주되게 자본가 계급에 기반을 둔 친자본주의 정당이기 때문이다.

국공립어린이집을 전체의 30퍼센트까지 확대하겠다고 했지만, 이를 위한 비용으로는 한 해 2천5백억 원만을 계획했다. 국공립어린이집을 전체의 30퍼센트까지 확대하려면 1만여 곳을 짓거나 전환해야 하는 것을 감안하면, 더민주당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추진하는 ‘비용절감형’ 국공립어린이집 모델을 추진하려는 듯하다. 물론 이 모델이 민간어린이집보다야 나은 측면이 있지만, 위탁 운영에서 오는 문제점(여전히 보육의 질과 고용 조건이 낮은 문제, 위탁체 선정시 비리 문제) 등 한계도 명백하다.

게다가 최근 김종인을 영입해 전권을 쥐어 준 데서 보듯, 더민주당은 경제·안보 위기 속에서 우클릭 해 왔다. 이런 정당이 일관되게 여성 노동자·서민의 처지 개선을 위해 노력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진보·좌파 정당들, 새누리당·더민주당보다 월등히 낫다

여성 노동자들의 조건 개선에 중요한 공약들을 제시한 진보·좌파 정당들 ⓒ이미진

반면, 진보·좌파 정당들은 여성 노동자·서민의 삶의 질 향상에 중요한 공약을 제시했다. 가령, 정의당과 노동당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좋은 일자리 만들기, 최저임금 1만 원,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 노동운동의 요구들을 폭넓게 반영했다. 사회서비스 노동자나 돌봄노동자 처우 개선도 주요 공약으로 포함돼 있다. 국공립보육시설 확대, 보육교사 처우 개선, 누리과정 예산 국가 부담 등 보육에 대한 국가 책임도 강조하고 있다. ‘여성과 남성의 평등한 돌봄’을 강조하며 유급 육아휴직 확대, 육아휴직급여 인상, 아빠 육아휴직제 의무화도 제시했다. 녹색당의 여성 정책에도 핵심적이고 중요한 공약들이 많이 포함돼 있다. 민중연합당도 여성노동자 차별을 없애기 위한 여러 공약들을 제시했다.

노동당은 국공립보육시설을 2020년까지 전체 어린이집의 50퍼센트까지 확대하겠다고 했다. 정의당은 국공립어린이집 이용 아동수를 기준으로 약 30퍼센트까지 늘리겠다고 공약했는데, 노동당의 여성 관련 정책은 대체로 정의당의 것보다 더 폭넓고 급진적으로 보인다. 기본소득과 함께 아동돌봄수당을 도입하겠다고 한 것도 노동당 공약의 특징이다.

정의당 공약에서는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강화와 피해자 유급 휴가·휴직 도입’ 공약이 눈에 띈다. 직장 내 성희롱 문제는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문제다.

정의당과 노동당은 몰래카메라 촬영물 유포 사이트나 스토킹 범죄와 같은 신종 범죄 관련 조항을 법에 명시하고, 과도한 미용·성형 산업에 대한 규제 방안도 마련하겠다고 했다. 이주 여성과 북한 이탈주민 여성 등에 대한 지원을 약속한 것도 눈에 띈다.

정의당·노동당·녹색당이 모두 성적 지향·성별정체성을 차별금지 사유로 명시한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약속한 것도 훌륭한 일이다. 앞서 말했듯, (새누리당은 물론) 더민주당은 이것을 지지하지 않는다.

물론 아쉬움이 남거나 한두 개 정도는 선뜻 지지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가령, 낙태 허용을 “사회경제적 사유”로 제한한다거나 ‘비양육자의 양육비 이행 강제조항’을 강화한다거나 성매매 비범죄화와 함께 성구매 남성 처벌도 요구한다거나 데이트 폭력에 대한 대응으로 ‘클레어법’(데이트 상대방의 전과를 조회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도입한다거나 하는 공약은 다소 지지하기 어렵다.(아래 박스 기사 참조)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정의당과 노동당 등 진보·좌파 정당들의 여성 공약은 새누리·더민주당보다 월등히 낫다.

아쉬움이 남거나 선뜻 지지하기 어려운 몇 가지

정의당은 “사회경제적 사유로 인한 임신중절 허용”을 공약했다. 이는 여연이 제시한 핵심 과제 중 하나이기도 했다. 낙태를 불법화하고 있는 현행 한국의 법률에 비춰보면 이는 분명히 진보한 것이다. 새누리당 · 더민주당은 이를 지지하지 않는다. 다만, 사회경제적 이유가 아니더라도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여성들이 있고, 그럴 때에도 여성에게 자신의 몸과 삶을 통제할 권리, 낙태권을 보장해야 한다. 몇 년 전 프로라이프의사회의 낙태 단속 캠페인에 반대해 여성 · 진보 · 좌파들이 모여 결성한 ‘임신출산결정권을위한네트워크’는 “여성의 요청에 의한 낙태 시술을 전면 허용”하라는 요구안을 발표한 바 있다. 노동당이 “사회적, 경제적 이유”뿐 아니라 “개인적” 이유로 인한 낙태 보장도 공약한 것은 그런 점에서 좋은 일이다. 녹색당도 “사회경제적” 사유로만 한정하지 않았다.

한편, 정의당 · 노동당 · 여연이 한부모 가족 지원의 일환으로 제시한 ‘비양육자의 양육비 이행 강제조항 강화’ 요구는 지지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이혼한 가정에서 남성들이 양육비를 보내지 않아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여성들의 처지를 고려한 요구인 듯하지만, 개별 가족 구성원에게 양육부담을 강제하는 방안보다는 한부모 가정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대폭 강화하라고 요구하는 게 옳을 것이다. 자칫 의도치 않게 국가가 가족제도를 강화하려는 시도를 돕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매매 비범죄화 요구는 꼭 필요한 정책이지만, 성구매 남성 처벌 요구는 지지하기 어렵다. 이른바 노르딕 모델의 경험에 비춰 보면, 성구매 남성 처벌은 성매매 감소 효과는 불확실하고, 성매매 음성화로 성매매 여성들을 더한층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았다는 지적이 있다. 국가권력 강화가 노동계급과 천대받는 사회집단들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성매매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본지 146호에 실린 정진희의 기사 '성매매 처벌은 성매매 여성들을 더욱 고통에 빠뜨릴 뿐이다'를 참고하시오.)

정의당이 데이트 폭력에 대한 대응을 강화하겠다면서 영국의 ‘클레어법(데이트 상대방의 전과를 조회할 수 있도록 하는 법) 도입’을 내건 것은 데이트 폭력에 대한 편견에 타협한 결과로 보인다. 경찰도 총선을 앞두고 데이트 폭력에 대한 대응을 강화하겠다면서 이 법을 추진하겠다고 했는데, 이는 전과자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찍을 뿐, 실효성은 없다는 점에서 여성단체들 사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정의당 심상정 대표가 한국여성단체협의회(여협) 기념행사에 참가한 것은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국회의원 중 여성 비율이 매우 적은 현실은 여성차별적 현실을 보여 주는 것이므로,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을 강화하라는 요구는 지지할 만하다. 그러나 여성 노동자들의 처지를 악화하는 정책을 지지하는 보수 단체인 여협 행사에 심 대표가 참가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지난해 여협은 이화여대에서 자신들의 행사에 박근혜를 초청했다가 학생들의 큰 반발에 부딪힌 바 있다.)

입력 2016-03-30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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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성매매처벌법 21조 1항 합헌 결정 비판

성매매 여성들을 더 옥죄지 말라

이현주

지난 3월 31일 헌법재판소(이하 헌재)가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이하 성매매처벌법) 제21조 1항이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21조 1항은 '성매매를 한 사람은 1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만 원 이하의 벌금, 구류 또는 과료에 처한다'는 것으로 강요나 폭력에 의해 성을 판매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판 사람(과 산 사람) 모두를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성매매방지법(성매매처벌법과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의 통칭)은 제정된 이래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돼 왔다. 2004년 성매매방지법 시행이후 성 구매 남성이나 성매매 업자가 7차례 헌법소원을 내 전부 각하 또는 합헌 결정이 내려졌지만, 성매매 여성이 처벌의 위헌성을 주장한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헌재는 성매매가 "사회 전반의 건전한 성풍속과 성도덕을 해"치는 행위이며 성매매처법법이 성매매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점을 합헌의 핵심 이유로 들었다. 성매매의 "수요 억제"를 위해 성구매자를 처벌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는 한편, 성 판매 여성에 대한 처벌도 여전히 필요하다고도 했다. 결국 성매매를 국가 형벌로 금지해야 한다는 기존 법의 내용을 재확인한 것이다.

헌재가 성매매 처벌이 합법임을 발표하자마자, 정부는 다시금 성매매 단속을 강화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성매매방지법 시행 10여 년의 경험은 성매매 단속 · 처벌이 결코 성매매 문제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헌재의 주장과 달리 성매매가 줄어들었다고 할 만한 근거는 없다. 전통적인 성매매 집결지가 소폭 감소했지만, 단속과 법망을 피해 신·변종 성매매 업소들이 크게 늘며 음성화했다. 룸살롱·노래방·다방 등에서 이뤄지는 성매매는 여전히 성행하고 있고, 마사지 업소와 키스방·대딸방·화상방 등 변종 성매매 업소도 크게 증가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이용한 성매매 규모도 상당해졌다.

경찰 단속은 이처럼 성매매를 줄이지도 못하면서,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고통받는 성매매 여성들을 더 위험에 빠뜨렸다. 지난해 아버지와 어린 딸을 부양하며 살아가던 20대 여성이 단속 과정에서 투신자살한 사건은 잘 알려져 있다. 성매매 여성들이 처벌받을까 봐 두려워 강간, 폭력, 괴롭힘 등 부당한 일을 당해도 신고하지 못하는 일도 벌어진다. 성 구매자들이 "신고를 빌미로 환불을 요청"하거나 성매매 여성과의 "(거래 사항에 포함) 안 되는 행위를 억지로 한다거나", "콘돔을 중간에 뺀다거나", “처음부터 '신고'로 위협하면서 콘돔 사용을 거절하기도 한다.”

“성매매 여성이 임신과 성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취하는 조치인 '콘돔사용'이 손님으로부터 거절당하는 것은 여성들에겐 매우 위험한 일[이다.]"(박순주, '성매매 여성의 '노동' 경험 인식과 그 맥락에 관한 연구')

이런 상황은 성매매 여성들이 계속해서 업주에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법이 성매매 여성들을 보호해 주지 않기 때문에, 여성들이 '보호자'로서 업주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업주들이 여성들의 돈을 갈취하고, 통제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있다.

성매매 단속은 이주 여성들을 특히 더 힘들게 한다. 추방 위협 때문이다. 성매매 사실이 알려지면, 해당 여성은 관련 기간에 입소한 뒤 3개월 후에 본국으로 송환된다.

헌재와 정부는 "성판매 여성의 인권 향상"을 말하지만, 이렇듯 성매매처벌법은 성판매 여성들을 가장 큰 고통에 빠뜨렸다. 반면, 경찰과 포주·업주 사이의 더러운 유착 관계는 별로 변한 것이 없다.

성매매처벌법은 성매매 '피해자'와 그렇지 않은 이(이른바 '자발적' 성판매자)를 구분하고, ‘피해’가 인정되면 처벌하지 않고 있다. '피해자'로 인정받으려면 여성 스스로 성매매를 강요당했음을 입증해야 한다. 헌재는 이것이 “성판매자에 대한 형사처벌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보완장치”라고 했다. 그러나 '강요'를 입증하는 일은 상당히 어렵다.

‘자발적’ 성판매자라 해도 처벌은 부당하다. 성매매를 하는 여성 다수는 생계가 막막한 절망스러운 처지에서 성매매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낳은 끔찍한 가난과 불평등, 그리고 여성 차별의 희생자인 이들을 국가가 지원하기는커녕 범죄자 취급하는 것은 그 자체로 정의롭지 못한 일이다. 헌재에서 유일하게 조항 전체 위헌 의견을 낸 조용호 재판관은 “국민에 대한 최소보호의무조차 다 하지 못한 국가가 오히려 생계형 자발적 성매매 여성들을 형사처벌하는 것은 또 다른 사회적 폭력”이라고 지적했다.(물론 조용호 재판관이 ‘성매매자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를 처벌 조항의 문제점으로 지적한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애초에 자본주의 국가는 독재 정권 시절에 ‘기생 관광’을 유치하는 등 스스로 ‘포주’ 노릇을 했었고, 일상적으로 포주 · 업주들과 은밀히 유착해 성매매가 온존하는 데 한몫해 왔다. 일선의 경찰들만이 아니라 이 사회 지배층 상당수는 앞에서는 ‘성도덕’을 말하면서도 뒤에서는 성매매에 연루돼 있거나 성매매를 비호해 왔다. 고위 공직자들의 추악한 성접대 사실이 폭로되는 일이 어디 하루이틀 일인가.

또한 박근혜 정부는 여성들에게 저임금 · 불안정 일자리를 강요하고, ‘쉬운 해고’를 추진하고, 복지를 삭감하는 등 빈곤과 양극화를 키우는 정책을 추진해 왔다. 이런 정책들은 빈곤층 여성들을 더 벼랑 끝으로 내몰아 성매매로 이끌리도록 만든다.

대규모 빈곤과 불평등, 소외 등 성매매를 낳는 사회적 요인들은 놔둔 채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성매매 여성들을 속죄양 삼는 처벌 조항은 즉시 폐지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의당 여성위원회가 성매매 처벌 합헌 결정에 환영 논평을 낸 것은 진보 · 좌파 정당 중 하나로서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새누리당이나 국민의당이 보수적 성도덕에 기초해 합헌 결정을 환영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물론, 정의당 여성위원회는 논평 내용에서 성판매 여성들에 대한 비범죄화를 주장했다. 그렇다면 성판매 여성 처벌을 명시한 조항 합헌 결정을 “환영”할 게 아니라 조항을 폐기하라고 요구하는 게 일관될 것이다.

성구매자 처벌 강화, 어떻게 봐야 할까?

 

헌재는 “성매매에 대한 수요는 성매매 시장을 유지 · 확대하는 주요한 원인”이라면서 “성구매자의 수요 억제” 위한 성구매자 형사 처벌은 정당하다고도 밝혔다.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 소속 여성 단체들도 이런 입장을 공유한다. 여연 소속의 여성 단체들은 성판매 여성은 비범죄화하고 성구매 남성은 처벌하는 이른바 ‘스웨덴 모델(또는 노르딕 모델)’을 주장해 왔다.

노르딕 모델이 성매매 여성들을 더 안전하게 만들고 성 산업을 축소시켰다는 주장은 스웨덴 정부가 부풀린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 연대> 155호 ‘성노동과 성매매 비범죄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정진희가 지적했듯이, 1999년 스웨덴 성구매자 처벌법 도입 뒤 스웨덴에서 성매매가 대폭 감소했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강화된 단속은 성매매를 더 은밀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스웨덴에서 성 판매자들의 처우가 더 악화됐다는 불만은 당사자들로부터 많이 제기되고 있다. 성 판매자들은 경찰의 협박을 받을 뿐 아니라 구매자 보호를 위해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경찰에게서 스스로 보호하려고 포주에게 더 의존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국가를 지렛대로 삼아 여성 해방을 이루려는 발상도 위험하다. 자본주의 국가는 여성의 빈곤과 저임금화를 낳고 개별 가정(특히 여성)에게 육아 부담을 떠넘기며 구조적 차별을 유지하고, 성을 상품화해 이윤을 얻으며, 왜곡된 성 의식을 확산시키는 핵심 주체다. 국가와 지배계급은 성 산업 번성에서 평범한 남성 개인들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구실을 한다.

물론 성구매자 개인의 의식은 왜곡돼 있을 가능성이 크고, 바뀌어야 한다. 성구매 처벌 주장은 처벌로 성매매가 ‘폭력’이자 ‘범죄’임을 인지시킴으로써 ‘수요’를 차단하려는 듯하다. 그러나 사람들의 왜곡된 생각을 변화시키는 데서 처벌이 능사인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모순된 의식은 스스로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체제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변할 수 있다.

성매매는 반드시 사라져야 할 폐단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여성의 성과 몸을 돈으로 사는 행위에 비판적이다. 여성의 성을 사고파는 사회에서 여성의 존엄성이 존재할 수 없다. 성매매가 지속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여성차별적인지를 보여 주는 증거다. 따라서 성매매가 다른 직업과 다를 바 없는 일이라거나, 자유로운 개인들의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일 뿐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성매매 문제는 간통죄 문제와 다르다.

한편, 종종 성매매 비범죄화가 합법화와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곤 하는데, 둘은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 성매매 비범죄화는 성매매 당사자들(구매자와 판매자)을 형사 처벌하지 말라는 소극적 의미인데 반해, 합법화는 성 산업을 허용하라는 더 적극적인 의미를 띤다. 성매매 합법화는 성매매 여성의 처지 개선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남녀 노동계급을 분열시킨다. 여성의 성이 합법적으로 팔리는 사회에서 여성 동료가 동등한 인격체라는 주장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성매매 단속 · 처벌 강화는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성매매 여성들이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으려면 처벌이 아니라 이들에 대한 지원이 대폭 확대돼야 한다. 여성들을 가난으로 내모는 정책들을 중단하고 안정된 양질의 일자리와 사회복지를 확대해야 한다. 나아가 성을 왜곡시키고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논리와 사회 곳곳에서 여성이 이등시민 취급받는 뿌리 깊은 여성차별이 사라져야 한다. 따라서 성매매의 뿌리가 사라지기를 바란다면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운동을 촉진시키는 데 앞장서야 한다.

입력 2016-04-09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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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학숙 직장 내 성희롱 사건

공공 기관 내 성희롱과 불이익 조치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 있는 조처가 필요하다

최미진

지난해 12월 르노삼성자동차 여성 노동자가 제기한 성희롱 소송 2심 결과는 성희롱을 문제제기한 피해자에게 인사상 불이익 조처를 한 회사 측의 책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사측은 그 후에도 피해자의 인사고과를 최하위 등급으로 매기는 등 불이익은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들은 성희롱을 공공연히 문제제기하면 사측의 괴롭힘과 해고 위협에 직면하곤 한다. 이것은 성희롱과 더불어 여성 노동자들을 크나큰 고통에 빠뜨린다. 성희롱 문제제기에 따른 불이익 조치는 법적으로 금지돼 있지만[1], 이는 현실에서 종종 무시된다. 가해자와 그 동조자가 회사의 관리자이거나 기업주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광주시와 전라남도가 공동 운영하는 장학시설인 남도학숙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남도학숙은 광주 · 전남 출신의 서울 소재대학 재학생 8백50여 명이 생활하는 기숙사이고, 공공 기관의 성격이 있는 공직유관단체[2]다. 남도학숙 김완기 원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인사수석비서관과 공무원연금관리공단 이사장 등을 지냈다.

2014년 4월, 장학부에 정규직으로 입사한 여성 노동자 A씨는 직속 상사인 장학부장의 성희롱을 견디다 못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했다. 국가인권위의 결정문에 담긴 A씨의 주장을 재구성하면, 장학부장은 일을 가르쳐 준다는 이유로 몸을 밀착시켜 팔을 A씨의 가슴에 닿게 했다. 참다 못한 A씨가 “좀 떨어져서 알려주시면 안 되겠냐”고 했으나, “네가 그러니까 사회생활 하기 힘들다”는 반응만 돌아왔다. 장학부장은 핫팩을 들고 있는 A씨의 가슴 부위를 쳐다보며 “가슴에 꼭 품고 다녀라. 그래야 더 따뜻하다”는 성희롱 발언도 했다.

회식 자리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던 A씨를 원장 옆자리에 앉도록 강요했고, 원장이나 사무처장의 술 시중을 여러 차례 강요했다. 술 시중 강요를 참다 못한 A씨가 장학부장과 면담하는 과정에서 “제가 술집 여자입니까?”라고 항의하자, 장학부장은 “그렇게 행실을 하면 술집 여자지”라며 도리어 A씨의 행실에 문제가 있다는 투로 A씨를 모욕했다.

A씨는 국가인권위 진정 이전에 먼저 남도학숙 핵심 관리자들에게 문제 해결을 호소했다. 하지만 국가인권위 결정문에 담긴 사측의 주장을 보더라도, 사측은 징계 절차 등을 밟지는 않은 채 장학부장과 화해하라고 요구했다.

국가인권위 진정 뒤 사측의 불이익 조치와 괴롭힘은 심해진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A씨는 성희롱 피해에 관해 원장과 면담한 자리에서 “보기 싫으니까 그냥 나가라. XX하고 자빠졌네, 이런 형편없을 것을 봤나”라는 말을 들었다(<중앙일보> 2016년 4월 15일치).

광주시 감사 결과에 담긴 내용을 재구성해 보면, 사측은 성희롱 가해 혐의자를 격리하기는커녕 되레 피해를 호소한 A씨를 독방에 격리시켰다. 이 격리된 별실에는 외부전화가 차단돼 있었다. 유리창으로 둘러싸인 이 독방은 지나가는 학생들과 직원들이 훤히 들여다볼 수 있어 마치 “유리감옥” 같았다.

피해자가 이런 괴롭힘을 당하는 가운데 올해 3월 국가인권위는 세 가지 성희롱 피해 호소 중 신체 접촉 건을 제외한 나머지 두 건에 대해 성희롱이 맞다고 결정했다(신체 접촉 건은 물적 증거가 부족해, A씨의 주장을 인정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국가인권위는 결정했다).

국가인권위 결정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신체 접촉 관련 성희롱 혐의는 여전히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성희롱 문제제기 후 지속된 사측의 불이익 조치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진상 규명과 책임 있는 조처가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사측은 불이익 조치를 부인하고 있다. 그런데 김완기 원장이 지난해 11월 전남도의회 안전행정환경위원회에서 열린 행정사무감사에서 한 막말을 보면 사측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김 원장은 “성희롱이 아닌 하극상이다 … [가해자가] 순화되지 않은 표현을 한 경우도 있었던 것 같지만, 진정을 해 학숙 명예를 훼손하는 건 있을 수 없다 … 인성이 불량한 여자가 잘못 들어온 케이스”라고 말했다(<중앙일보> 2016년 4월 15일치). 성희롱 진정을 “하극상”과 “인성 불량”으로 보는 사측이 제대로 된 진상조사를 했을 리 없어 보이고, “순화되지 않은” 폭언을 사소하게 치부하는 인식도 그동안 피해자가 어떤 취급을 당했을지 엿볼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국가인권위 결정문에는 사측의 불이익 조치에 대한 내용은 전혀 나와 있지 않았다. 얼마 전 나온 광주시 감사 결과도 불이익 조치를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다.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외부전화도 차단된 별실에 격리됐는데, 피해자가 이런 조치에 “만족감을 표현”했다는 감사 결과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광주시가 과연 양측의 주장을 공정하게 검토한 것인지, 이 감사가 누구를 위한 감사인지 의문을 자아낸다.

남도학숙 원장이 전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권력자라는 점, 남도학숙이 광주시가 운영하는 기관이라는 점, 광주시와 전라남도가 내년 서울 제2남도학숙 건립(총 공사비가 4백98억 원으로 잠정 확정)을 앞두고 성희롱 문제가 드러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할 수 있다는 점 등이 성희롱 문제 해결에 어려운 조건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사측은 국가인권위가 ‘성희롱이 맞다’고 결정한 뒤에야 올해 3월 말 가해자를 직위해제하고 1개월 감봉했다. 피해자가 "좀 떨어져서 알려주시면 안 되겠냐"고 문제제기한 지 무려 1년 6개월 만이다. 그러나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이 감사 촉구 성명서에서 비판했듯이, 사측의 징계 수준은 너무 경미하고, 무엇보다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된 사측의 불이익 조치 혐의에 대해서는 철저한 진상조사와 책임 있는 조처가 뒤따르지 않고 있다.

한편, 남도학숙 학생들의 SNS 익명게시판을 보면, 언론 보도를 보고 불의를 참지 못한 남도학숙 학생들이 학숙 정문에서 성희롱 사실과 학숙 측의 부당한 대처를 알리는 리플릿을 나눠 줬다는 이유로 최근 퇴사 경고를 받아 논란이 되고 있다. 

직장 내 성희롱은 여성 차별의 한 형태이며, 노동조건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문제다. 여성들이 점점 더 많이 노동자로 진출하면서 직장 내 성희롱에 맞서 문제제기하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이번 사건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

특히, 이 사건을 통해 공공기관 내 성희롱과 불이익 조치가 제대로 인정받는 선례가 생긴다면 직장 내 성희롱 반대 운동에 중요한 성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 제14조제2항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과 관련하여 피해를 입은 근로자 또는 성희롱 피해 발생을 주장하는 근로자에게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조치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2] 행안부가 정부 또는 지자체의 재정지원규모, 임원선임 방법 등을 고려해 지정하는 기관.

입력 2016-05-18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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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연대 성명

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는 비민주적 결정을 철회해야 한다

6월 11일 열리는 ‘퀴어퍼레이드’의 주최 단체 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는 노동자연대의 ‘퀴어퍼레이드’ 부스 선정을 취소했다고 5월 24일 오후에 일방 공지했다.

이유는 <노동자 연대>의 ‘강남역 살인 사건’ 기사가 “페미니즘을 폄하하고 여성, 장애인 등 소수자 인권에 대해 매우 낮은 감수성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이었다.

미국 대사관에는 부스 설치를 허용하면서도, 성소수자 운동에 오래도록 성심껏 연대해 온 단체는 주최 측이 지지하는 특정 견해와 다르다는 이유로 참가 배제라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 과정의 경위에 대한 노동자연대의 질의에 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는 답변을 보냈다. 그에 따르면, 이 조처를 결정한 조직위원회 임원단과 퍼레이드기획단의 회의는 “5월 24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 회의가 열리고 있던 24일 오전 11시 노동자연대는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과 ‘이주노동자 차별철폐와 인권 노동권 실현을 위한 공동행동’이 공동 주최한 “차별과 혐오를 확산하는 기독자유당 국가인권위원회 집단 진정 기자회견”에 참가하고 있었다.(☞관련 기사: 성소수자 · 무슬림 차별 선동하는 기독자유당을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다)

△"기독자유당은 차별 선동 즉각 중단하라" 아침부터 많은 비가 내렸지만 30여명이 모여 인권위 진정에 뜻을 모았다. 진정에는 62개 단체, 3천1백95명이 동참했다. ⓒ이미진

성소수자 혐오 반대 기자회견 시간에 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는 그 기자회견에 참가한 단체의 성소수자 축제 행사 배제를 논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래의 글은 노동자연대의 부스 선정 취소 유감문 전문이다.

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의 노동자연대 부스 선정 취소 유감

노동자연대는 5월 24일 오후, “퀴어문화축제” 명의의 SNS 계정으로 노동자연대 부스 선정 취소 공지가 올라온 것을 발견했습니다. 노동자연대는 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이하 조직위원회)로부터 어떠한 공식 연락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우연히 이런 공지를 발견했습니다. SNS로 이미 불특정 다수에게 알려진 이후에야 메일로 같은 내용의 통보를 일방적으로 받았습니다.

노동자연대 부스가 상업적 성격을 띤 것도 아니고 성소수자 차별 반대 단체들의 연대의 장이라는 행사의 취지 상 당사자 단체의 입장을 사전 청취하고 결정에 대한 충분한 해명을 하는 과정이 마땅히 있었어야 했지만, 이런 과정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 일방적 통보에서 거론된 유일한 명분은 오로지 강남역 살인에 대한 <노동자 연대> 이현주 기자의 기사뿐이었습니다. 게다가 통보는 기사가 게재된 지 불과 하루 만에 이뤄졌습니다.

노동자연대는 우선 적어도 어떤 절차에 의한 결정인지는 당사자 단체로서 투명하게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5월 24일 조직위원회 측에 문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 결정은 언제, 어떤 기구에서 결정된 것인지, 그 기구는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논의 과정에서 의견 분포와 찬반 숫자는 어떠했는지 등을 문의했습니다. 조직위원회는 노동자연대가 그 동안 해 온 주장과 실천, 부스 기획이 축제의 취지와 부합하는지를 판단해 공식 부스 참여 단체로 선정했을 텐데, 이런 결정을 뒤집으려면 충분한 토론과 민주적 절차가 있었어야 할 것입니다.

조직위원회는 자신들이 단체들의 연합체가 아니며, 이 결정이 24일 오전 10시부터 열린 ‘퍼레이드기획단’과 ‘임원단’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결정됐다고 답변했습니다. ‘임원단’이 어떤 선출(또는 선임) 과정으로 구성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구성원들이 무슨 논거로 토론했는지 이 답변을 통해서는 알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노동자연대의 의견을 청취하는 과정과 ‘임원단’ 측의 해명이 부재한 것에 대한 사과도 없었습니다.

배제 절차뿐 아니라 내용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조직위원회는 강남역 사건에 대한 노동자연대의 기사가 ‘페미니즘을 폄하하고 여성, 장애인 등 소수자 인권에 대해 매우 낮은 감수성을 그대로 드러냈다’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연대의 기사 어디에도 소수자를 비하하는 내용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 동안의 주장과 실천에서도 노동자연대는 언제나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장애인 차별에 반대해 왔습니다. 최근까지도 부산대, 외대 등에서 노동자연대 회원들은 학내 성소수자 혐오 세력과 맞서 싸우는 데서 적극적 일부였고, 기독자유당 규탄 국가인권위 진정서 조직과 제출도 함께했습니다.

강남역 사건이 ‘여성 혐오 살인’이냐에 대한 이견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연대의 주장이 옳은지 아닌지는 어디까지나 토론과 논쟁으로 입증돼야 할 문제이지, 배제의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여성 혐오 살해’ 프레임에 동의하지 않으면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지 않는 것이라고 치부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비약이고, 이견에 대한 비민주적 배제일 뿐입니다.

이것은 연대와 차이의 존중이라는 퀴어퍼레이드의 취지를 주최측이 스스로 부정한 격입니다. 몇몇 쟁점들과 해방의 전략에 관한 진보 · 좌파단체들 내의 견해 차이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 때문에 당면한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에 맞선 투쟁에서 연대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성소수자 차별에 맞서 함께 투쟁하면서도 정치적 이견에 대해서는 토론하고 논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폄하”를 이유로 든 것도 부당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다종다양한 페미니즘들과 여성해방론이 존재하고, 노동자연대는 다양한 페미니즘들에 대해 공통점과 차이점 모두를 밝혀 왔습니다. 조직위원회는 어떤 페미니즘을 지지하는지 밝힌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내부의 견해가 통일돼 있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특정 페미니즘을 지지해야만 부스에 참가할 수 있다는 제한도 없었습니다(또한 이런 일이 가능치도 않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단체가 자신의 페미니즘을 당연히 다른 단체도 받아들일 거라고 전제하는 것은 그 사상을 모종의 도그마로 만드는 일일 것입니다. 만약 조직위원회를 주도하는 특정 단체나 구성원이 자신들의 이론을 공동행동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려 한다면, 성소수자 해방 운동을 위한 연대를 약화시키는 문제점을 낳을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조직위원회는 노동자연대처럼 성소수자 해방운동의 일부인 마르크스주의 단체의 부스는 배제하면서도, 성소수자를 억압하는 미국, 영국, 독일 등 제국주의 국가의 대사관 부스는 선정하는 이중잣대에 대해서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또한, 전 CEO의 숱한 성희롱과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성차별적 광고로 유명한 ‘아메리칸 어패럴’ 같은 기업이 이미지 변신을 위한 마케팅 수단으로 퀴어문화축제를 활용하는 것이 용인돼야 하는가 하는 문제제기에도 조직위원회가 귀를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조직위원회의 부당한 결정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연대는 언제나 그랬듯이 성소수자 차별 반대 운동을 해 나갈 것이고 마르크스주의적 성소수자 해방의 전망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2016년 5월 25일

노동자연대

입력 2016-05-26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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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무슬림 차별 선동하는 기독자유당을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하다

양효영

국가인권위 진정

△"기독자유당은 차별 선동 즉각 중단하라" 아침부터 많은 비가 내렸지만 30여명이 모여 인권위 진정에 뜻을 모았다. 진정에는 62개 단체, 3천1백95명이 동참했다. ⓒ이미진

성소수자와 무슬림에 대한 차별을 선동하는 기독자유당에 대한 국가인권위원회의 진정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이 5월 24일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열렸다. 아침부터 비가 많이 내렸음에도 서른 명 가량의 사람들이 모였다.

지난 20대 총선에서 기독자유당은 동성애 · 이슬람 반대를 내세우며 동성애와 무슬림에 대한 편견와 증오를 부추겼다. 이 때문에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과 ‘이주노동자 차별철폐와 인권 노동권 실현을 위한 공동행동’은 기독자유당의 증오 선동을 제재하기 위한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인 동참을 호소했다. 국가인권위원회 진정에는 62개 단체와 3천1백95명이 동참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집행위원이자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사무국장인 이종걸 씨의 사회로 진행됐다. 한가람 변호사가 인권위 진정의 요지에 대해 설명하고 청소년성 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의 에디 활동가, 서울경기인천 이주노동자조합 섹 알 마문 수석부위원장의 발언이 이어졌다. 참가자들은 기자회견이 끝나고 국가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차별 조장 진정서 제출

△차별과 혐오에 맞서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국가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있다. ⓒ이미진

선거 이후에도 기독자유당은 동성애 반대, 할랄단지 조성반대 등을 요구하는 1천만 명 서명 운동과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성소수자 자긍심 행진(‘퀴어퍼레이드’)을 취소하라며 서울시 조례 개정 운동을 벌이고 있다. 성소수자와 무슬림에 대한 체계적인 왜곡과 비방을 통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증오를 공공연하게 퍼뜨리는 행태는 즉각 중단돼야 한다.

국가인권위 기독자유당 진정

△“우리도 똑같은 사람. 단지 다른 건 성소수자일 뿐" 성소수자 대표 진정인으로 발언한 활동가 에디 씨는 헌법을 인용해 국가가 개인의 불가침의 인권을 확인하고 보장할 의무가 있음을 지적했다. ⓒ이미진

국가인권위 기독자유당 진정

△"기독자유당이라면서 남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왜 반대하는지 물어보고 싶다" 무슬림 · 이슬람대표 진정인으로 발언한 서울경기인천 이주노조 섹 알 마문 수석부위원장. 그는 "기독자유당이 ‘이슬람 아웃시켜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한국사회를 그런[무슬림 혐오] 분위기로 만드는 것"이라며 "기독자유당은 당장 해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미진

 
국가인권위 진정

△혐오 조장은 표현의 자유일 수 없다. 기자회견 참가자가 든 팻말.ⓒ이미진

국가인권위 앞 기자회견

△기독자유당은 총선 이후에도 역겨운 차별 선동과 혐오 조장을 벌이고 있다. 이런 행태를 용납해선 안 된다. 기자회견 참가자가 손팻말을 들고 있다. ⓒ이미진

[기자회견문]

국가인권위원회 기독자유당 집단 진정에 부쳐

소수자를 향한 차별선동과 증오조장에 침묵하지 않겠다

 

지난 20대 총선은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가 난무한 선거였다. 특히 기독자유당은 '동성애 반대', '이슬람 반대'를 대표 공약으로 내걸고, 공보물, 후보자 티비 연설 등에서 ‘동성애는 에이즈를 유발한다’, ‘할랄단지를 조성하면 무슬림 30만 명이 거주하게 되어 대한민국이 테러 위험국이 된다’, ‘차별금지법이 입법되면 전도가 금지된다’ 등의 공포를 자극하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며 성소수자와 무슬림에 대한 편견과 공포를 퍼트렸다. 선거 공간에서 소수자 집단을 향한 적의와 폭력을 부추기는 목소리가 아무런 제약 없이 울려 퍼진 것이다.

성소수자와 무슬림 등 기독자유당의 차별 선동의 표적이 된 사람들은 선거 과정에서 존엄과 인권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누군가가 어떤 집단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위험하다고 낙인찍히고, 차별이 정당화되는 상황이 폭력과 비극을 낳는다. 한국에서도 성소수자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거나 무슬림과 이주민을 향해 공공장소에서 거리낌 없이 폭언을 내뱉는 일들이 만연해 있다. 그럼에도 이런 차별과 폭력을 없애기 위한 국가적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과 '이주노동자 차별철폐와 인권 노동권 실현을 위한 공동행동'은 소수자 차별 선동에 제동을 걸고, 참담한 인권 현실을 바꾸기 위해 기독자유당을 국가인권위원회에 집단 진정할 것을 시민사회에 호소했다. 성소수자, 무슬림, 이주민 당사자와 그 가족들을 비롯해 3195명의 시민들과 62개 단체가 진정에 동참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정부와 기성 정치권이 소수자들의 인권을 외면하는 현실에서 인권 보호와 증진을 위한 독립적 국가기구로서의 소임을 다하길 바란다.

우리는 성소수자, 무슬림, 이주민이며, 성소수자, 무슬림, 이주민의 가족이고 친구이다. 우리는 소수자를 향한 차별선동과 증오조장에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며, 인권에는 예외도 유예도 있을 수 없다.

2016년 5월 24일

차별과 혐오를 확산하는 기독자유당 국가인권위원회 집단 진정 기자회견 참가자 일동

입력 2016-05-24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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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살인사건

여성차별, 흉악범죄, 자본주의

이현주 기자

한 여성의 어처구니없는 피살로 많은 여성들이 충격에 빠졌다. 이 여성은 이 나라에서 유동인구가 가장 많다는 강남역 상가 근처 공중 화장실에서 일면식도 없는 한 남성에게 살해됐다. 친구들과의 만남 중간에 잠시 화장실에 갔을 뿐, 이 여성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아침에 허망하게 딸을 먼저 보낸 그의 부모와 연인을 잃은 그의 남자친구에게 위로의 말을 전한다.

많은 여성들이 이 살인으로 충격받아, ‘나도 저런 일을 당할 수 있다’며 불안해 하는 듯하다. 게다가 여성들이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이 노동시장으로 진출하면서 자의식이 성장한 반면 여성차별은 여전한 현실에 대해 여성들은 분노하고 있다. 여성들은 여전히 구직시장과 노동세계에서 체계적으로 차별받을 뿐 아니라, 여성의 몸에 대한 비하도 광범하게 벌어진다. 이런 현실에 대한 여성들의 반감이 이번 사건을 ‘나도 제물이 될 수도 있는 사건’으로 여기게 되는 배경인 듯하다.

그럼에도 심정과 인상에만 맡겨둘 수는 없다. 이 사건을 둘러싼 논의에는 중요한 정치적 함의가 있기 때문이다.

양성 분리적 여성주의자는 사회를 계급 지배가 아니라 남성 지배 사회로 본다. 계급 분단보다는 성의 분단이 더 근본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지배계급 여성도 지배계급 내에서 차별받는다. CEO나 국가 관료, 국회의원과 같은 사회 고위층에서 여성의 비율이 매우 적은 것이 이 점을 보여 준다.

그러나 지배계급 여성이 받는 차별은 노동자 계급 여성이 받는 차별과는 비할 바가 못 된다. 지배계급 여성은 자신의 차별을 완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물질적 수단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지배계급 여성은 집안일을 노동자 계급 여성을 고용해 대신 하도록 만들 수 있다.

게다가 계급투쟁에서 어느 쪽에 서느냐는 문제가 있다. 지배계급 여성은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서 득을 보기 때문에 계급투쟁에서 노동자 계급의 편에 서기 어렵다. 새누리당 김을동은 같은 여성이지만 보통의 여성들을 깔보고 노동자 운동을 혐오하는 보수 우익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본질적으로 성이 아니라 계급으로 분열돼 있다. 자본주의는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다. 마르크스는 자본을 단순한 ‘돈’이나 ‘화폐’가 아니라 ‘사회관계’로 이해했다. 이 관계의 진수는 첫째, 임금노동과 자본의 관계다. 이 관계에서 노동자에게서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착취가 일어난다. 둘째, 자본가들 사이의 관계다. 자본은 언제나 복수로 존재한다. 자본들의 관계는 경쟁이라는 형태를 띤다. 마르크스는 이 두 가지 관계와, 이 두 가지 관계의 상호 연관을 자본주의의 본질로 규정했다.

1. 남성 개개인은 남성 지배 사회의 여성혐오 이데올로기를 현실화하는 존재일 뿐인가?

양성 분리적 여성주의자들은 사회를 남성 지배 사회로 보고 남성 지배가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여성혐오’를 드러낸다고 보는 듯하다. 그리고 범죄와 일탈을 포함한 남성 개인의 행동은 단지 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표현된 것일 뿐이라고 보는 듯하다. 그러면 범죄나 비행을 저지른 개인이 특별히 어떤 상태나 처지, 배경에서 나왔는지를 주목할 이유는 없게 된다.

이런 관점은 인간을 해체시켜 버리고, 오로지 구조만 남기는 환원론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이런 사회에 사는 남성은 모두 ‘여성혐오자’여야 할 것이다. 게다가 흉악한 살인 범죄도 남성이라면 누구든 저지를 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살인 범죄는 누구나 저지르는 게 아니다. 살인은 “대표적인 격정범죄(crime of passion)다. 분을 못 이겨 저지르는 범죄라는 말이다.”(범죄 전문가 이창무) 개인적 특성(배경, 경험, 관계, 심리적 상태 등)이 미치는 영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살인 피의자 김모 씨가 조현병에 따른 피해망상에 시달렸는지는, 대한신경정신의학회에 따르면 지금으로선 확실치 않다. 신경정신의학회는 “아직 피의자의 충분한 정신감정이 이뤄지지 않[아,] 여성혐오나 조현병을 성급하게 원인으로 지목해서는 안 된다"며 공식적 확인이 지금으로선 불가능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김모 씨가 조현병이든 아니든, 그 점이 핵심적인 쟁점은 못 된다. 무차별적 살인은 아무나 저지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범죄의 근저에는 사회적 원인이 있다. 즉, 소외다. 소외는 외톨이라는 뜻이 아니라, 일반적인 대중이 자기 주변 세계를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객관적)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인 대중은 대부분 노동자 계급 구성원들로, 이들은 이 사회의 부를 만드는 주체이지만 사회를 통제할 권한은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 집단적으로 저항하지 않는다면 다수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사라져도 모를 한낱 부속품 취급을 받으며 살아간다. 이 자본주의적 소외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은 정도는 다를지라도 하루하루 무기력과 열패감, 불안감을 내면화하며 살아간다.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특히 심각한 심리적 · 정신적 장애를 겪고 심성이 크게 뒤틀리게 될 수 있다. 때로는, 더 약한 상대라고 여겨지는 여성과 아동 등이 이들의 분풀이 대상이 되곤 한다.

그러나 좌절감을 느끼거나 심리적 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모두 이런 끔찍한 범행을 저지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본주의적 소외라는 사회적 원인 위에 개인의 특수한 문제들이 매개가 돼야 비로소 범죄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때로 흉악범죄로까지 말이다.

2. 여성혐오? ‘차별’과 ‘혐오’는 다르다

모든 살인은 혐오와 증오에서 비롯하므로, 피의자 김모 씨가 여성을 혐오 또는 증오했을 수 있다. 아마 그랬을 것 같다. 그러나 ‘혐오 범죄’는 전혀 다른 얘기다. 혐오 범죄란 특정 사회집단이 열등하고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라는 편견에 따라 해당 집단을 배제하려는 동기로 저지르는 범죄다. 따라서 어떤 집단에 대한 개인의 증오심만으로 혐오 범죄를 규정할 수는 없다.

백번 양보해 이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라 할지라도 사회 전반에 “여성혐오”가 퍼져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여성 · 좌파운동 내에서 ‘여성혐오’를 ‘여성차별’의 동의어로 사용하는 경우가 늘었다. 그러나 두 용어는 구분해야 한다. 많은 여성들이 분노하는 체계적인 차별이 사회에 존재한다. 가령 노동시장에서 차별받는 것, 가사와 육아 담당자로 여겨지는 것, 성희롱 · 성폭력에 시달리는 것, 여성비하와 성적 대상화, 차별적 발언 등은 여성이 여전히 차별받는 현실을 보여 준다.

이처럼 ‘차별’이라는 말은 여성에 대한 편견, 고정관념, 비하부터 제도와 구조, 공격적 행동까지를 모두 포괄한다. 그러나 ‘혐오’라는 말은 이런 것들과는 구분된다. 언어가 사회적 현실을 개념화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엄밀한 의미에서 ‘여성혐오’는 ‘싫어하는 감정’이라기보다는 ‘배제’, ‘배척’을 위한 말과 행동이다. 즉, 특정 집단이 모든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없어져야 할 존재로 취급해 배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유럽에서 무슬림들은 ‘테러’와 경제 위기, 일자리 부족 등의 원인으로 지목되며 배척당한다. 한국에서 근본주의자들은 사회를 위기에 빠뜨리고 ‘나라를 망친다’(근래 동원되는 논리는 ‘성소수자들이 세금 폭탄을 안긴다’는 헛소리다)는 감정적 거짓 선동으로 성소수자들을 사회에서 찍어내려 한다.

이렇게 보면, ‘혐오’는 단지 ‘차별’ 또는 ‘정도가 심한 차별’이 아니다. 혐오와 차별은 가리키는 방향이 다르다. 가령 자본가들은 노동자 전체를 혐오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체제가 굴러가려면 노동자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값싸게 부려먹고 노동자들을 서로 이간질하려고 ‘차별’은 해도, ‘혐오’는 할 수 없다. 반면, 좌파 혐오는 가능하다. 지배자들이 보기에 자신들의 사회 운영에 도전하는 좌파들은 사회에서 추방되는 게 이득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여성도 지배자들이 차별은 할 수 있을지언정 혐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류의 절반을 어떻게 사회에서 배제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자본주의는 착취와 축적을 위해 여성들이 집 안팎에서 수행하는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박근혜 정부는 여성을 사회로부터 배제시키려는 게 아니라 더 많은 여성을 헐값에 집 밖으로 끌어내려 한다.) 그래서 여성을 차별할 수는 있어도 혐오할 수는 없다. ‘일베’ 같은 일부 우익적 개인들이 여성혐오자들일 수는 있어도, 여성혐오가 일반적인 사회적 현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혐오 범죄는 특정 집단이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믿음에서 비롯해, 특정 집단을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하고자 벌이는 목적의식적 범죄다. 이 점에서 차별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나치의 유대인 혐오는 이것의 가장 극단적 사례였다. 성소수자 혐오에 맞선 투쟁이 강력해져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흔히 층위가 다른 행위를 하나의 개념으로 뭉뚱그렸을 때 나타나는 효과가 있다. 특별히 위험한 행위가 가진 특수한 의미를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가령 성폭력 개념을 강간, 성추행뿐 아니라 성희롱, 차별적 발언, 심지어 여성을 불쾌하게 하는 언동까지 지나친 광의로 확대했을 때 성폭력이 사소화되는 등의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여성운동 내에서도 많이 지적되는 바다. 이처럼 혐오와 차별은 구분해서 써야 한다. 이는 여성들이 위축되지 않고 여성차별에 맞서 싸우는 데서도 더 효과적이다.

3. 도덕적 공황 조장에 반대해야 한다

많은 여성들이 이 사건을 보며 ‘나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며 불안해 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공중화장실에 가는 것이 괜히 겁나고, 매일 다니던 밤거리도 무섭게 느껴지고, 낯선 남자를 괜히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되는 것은 거의 자연스러운 반응일 수 있다.

그러나 언론이 사건을 선정적으로 보도하며 이런 일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다거나 갈수록 늘고 있다며 도덕적 공황을 조장하는 것에는 저항해야 한다. 대검찰청의 ‘2015범죄분석’을 보면, 피해자 다수가 여성이라고 보고된 ‘강력(흉악) 범죄’[1] 발생율(인구 10만 명당 범죄 발생 건수)은 66.5건이고, 그중에서 살인은 2.7퍼센트밖에 차지하지 않는다. 이는 10년 전에 견줘 소폭 감소한 수치다.

‘강력 범죄’에서 성폭력의 비중(87.5퍼센트)이 높다 보니, 피해자 다수(88.7퍼센트)가 여성이라고 보고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살인의 경우에는 남성 피해자(511명)가 여성(404명)보다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2] 다른 강력범죄의 경우, 강도 피해자는 여성이 남성보다 소폭 많고, 방화의 경우에는 남성 피해자가 더 많다.

범죄의 피해 정도를 놓고 보면, 강력범죄로 피해자가 사망한 경우는 남녀 간 차이가 크지 않고, 상해에 이른 경우는 여성이 남성보다 두배가량 많다. 그러나 강력범죄로 사망하거나 다치는 여성의 절대 수와 남성 대비 비율은 각각 줄어드는 추세이거나 큰 변화는 없다.

폭행 범죄의 피해자의 경우에는 남성이 여성보다 두 배가량 더 많고 실제 피해상황(상해, 사망)도 두배가량 많다.

공식 통계상 강력 범죄와 강력 범죄의 피해자 중 여성 비율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보도되는 것은 성폭력 통계 수치가 늘었기 때문이다. 다른 강력범죄(살인, 강도, 방화)의 경우는 건수 자체가 10년 전에 견줘 꾸준히 감소 추세이거나 변함이 없지만, 성폭력 수치는 크게 늘었다. 그러나 성폭력은 신고율이 너무 낮아서 공식 통계 증가가 실제 범죄 발생 증가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이런 통계들을 제시하는 이유는, 현실에서 별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니 흉악범죄의 피해를 무시해도 되고 별로 끔찍하지 않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함이 아니다. 흉악범죄는 항상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에게 끔찍한 비극이다. 특히, 잘 신고되지 않는 성폭력과 데이트 폭력의 경우에는 명백한 여성차별 현실을 반영한다.

그러나 모든 여성들이 흉악범죄에 노출돼 있다거나 흉악범죄가 최근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도덕적 공황을 일으키길 좋아하는 언론의 선정주의일 뿐이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이런 범죄의 가해자가 될 수 있고, 이번 범죄에 책임도 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로 커다란 과장이다. 이런 주장은 대부분의 남성은 여성을 살해하는 등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점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많거나 적게 여성차별적 관념을 받아들이긴 해도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남자는 극소수다.

물론 흉악범죄자의 대부분은 남성이다. 그러나 가장 심각하고 끔찍한 범죄인 살인은 다소 이야기가 다르다. 한 범죄 전문가는 이렇게 말한다.

살인범 가운데 남성은 77.4%에 불과(?)하다. 여성 살인범이 22.6%나 된다. 전체 범죄의 80% 이상을 남자들이 저지르는 것을 감안하면, 살인은 대단히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살인 피해자의 성별을 살펴보면 더 놀랍다. 살인 피해자의 46.8퍼센트가 남성이고 여성 피해자는 53.2%로, 거의 비슷하다. 흉악범죄 피해자의 대부분이 여성일 것이라는 추측을 빗나가게 하는 통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사실 흉악범의 다수가 남성이고, 여성 피해자가 많은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흉악범은 곧 남자들이고 피해 대상은 여자들이란 단순 도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여성은 나약하다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언론 등이 만들어낸 흉악범에 대한 이미지가 이런 잘못된 인식을 낳고 있는 셈이다.(이창무 · 박미랑,[3] 《왜 그들은 우리를 파괴하는가》, 메디치, 2016)

충격적 사건을 접하면 즉자적으로 격렬한 감정에 휩싸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범죄를 없애려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흉악범죄 피해를 과장하면 공포심을 불러일으켜 사람들을 위축시키고 자본주의 국가의 경찰력 개입을 요구하는 보수적인 목소리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동안 진보 · 좌파 여성운동가들은 끔찍한 성폭력(아동 대상 성폭력 포함)이 벌어졌을 때 그 비극에 대해 누구보다 비애를 느끼면서도 대부분은 자본주의 국가의 범죄 실태 과장과 그를 빌미로 한 처벌 강화책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 왔던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도 이런 태도가 유지돼야 한다.

4. 사회운동의 과제

앞서 살펴봤듯이 ‘잠재적 범죄자 남성 vs. 잠재적 피해자 여성’의 구도는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모두 틀렸다. 이번 사건을 이런 구도로 바라보며 남성 일반이 많거나 적게 범죄에 책임이 있는 양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관점은 여성 차별의 원인을 남성 일반의 본성으로 치부함으로써, 사회에 만연한 여성차별의 제도적 · 구조적 요인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관점은 차별이 자본주의 체제의 착취와 축적의 필요 때문에 유지된다는 점을 비껴가게 만든다. 또, 진정한 원인과 예방책을 우회하는 바람에, 흉악범죄의 진정한 사회적 요인들에 맞서 싸우기도 어려워진다.

많은 여성들이 분노하는 맥락을 이해하면서도, 끔찍한 범죄와 여성 차별의 근원이 어디에 있고 어떻게 맞서 싸워야 하는지 참된 대안을 찾아야 한다. 즉, 노동자 계급과 평범한 여성들이 단결해 자본주의에 맞서고 투쟁 속에서 남성과 여성 모두의 의식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1980년대 말 여전히 계급투쟁이 대안으로 여겨지던 때 여성단체들은 남녀 노동자 모두가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근본적 사회변혁운동을 통한 여성해방을 주장했었다. 지금, 남성 일반을 잠재적 가해자로 몰면 안 된다는 주장을 마치 우익의 주장으로 또는 우익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역사적 무지의 소치다. 심지어 이런 주장을 한 것이 징계나 배제의 근거가 되는 것은 민주적 토론을 가로막는 비민주적 처사다.

한편, 경찰의 치안 강화 대책은 범죄를 없애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 흉악범죄를 경찰력 강화의 명분으로 이용하려는 정부 정책에 반대해야 한다. CCTV 설치 확대 같은 일들이 범죄를 없애거나 줄이는 데 별반 실효성이 없음도 인식해야 한다. 범행을 저지른 범인을 잡는 데는 조금 도움이 되겠지만 말이다.

정부가 마치 조현병을 앓는 사람들이 모두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인 양 편견을 부추기는 것에도 반대해야 한다. 오히려 이들에 대한 의료 복지 지원을 강화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또한 이번 사건과 비슷한 문제의 발생을 막을 해결책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약간이나마 감소시킬 수 있는 조처와 관련된 사항이 있다. 사건 발생 장소는 여성 전용 화장실이 아니었다. 관계법률은 2004년 이전에 지은 건물에 대해선 남녀 화장실 분리에 관한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다. 2004년 이후 지은 건물에도 일정 규모 이상이 되는 건물에만 규제를 적용한다. 이는 건물 소유주들의 이해관계와 관련 있다.

여성 차별을 없애기 전에라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고자 한다면 표적을 남성이 아니라 사회 체제와 국가 쪽으로 돌려야 한다.


[1] 살인, 강도, 방화, 성폭력을 포함한다.

[2] 다만, OECD 평균에 비해 한국의 남성 대비 여성 피해자 비율은 높은 편인데, 이는 한국이 다른 ‘선진국’들보다 여성 차별이 더 심각한 현실을 반영하는 듯하다. 남성과 여성 사이의 격차를 비교한 국제 보고서들을 보면, 한국의 성평등 지수 순위는 매우 낮다.

[3] 필자 이창무는 “뉴욕시립대학교 형사사법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범죄 · 보안 전문가”다. 공저자 박미랑은 “데이트 폭력에 관한 범죄학 논문을 국내 최초로 발표했고, 청소년 · 여성범죄자와 피해자,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바라보는 형사사법기관과 사회구조를 범죄학적 관점으로 연구하고 있다.”  

입력 2016-05-26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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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상품화 ― 성의 자유인가 여성 차별인가?

이현주

지난 4월 대전 중구청(구청장 박용갑)이 ‘대전충남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위한 업무협약을 했다가 대전 지역 여성·시민단체들의 반발에 부딪혀 결국 업무협약을 취소한 통쾌한 일이 있었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여성단체들이 주도한 반대 운동의 압력에 밀려 2002년부터 공중파 방송에서 추방됐지만 대회 개최는 계속돼 올해로 개최 60주년을 앞두고 있다.

오늘날 성 상품화는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 미스코리아 대회 중계가 공중파에서 추방된 게 무색하게도, 반쯤 벗은 여성들의 몸이 미디어에서 전시되는 일은 매우 흔하다.

최근 몇 년간 대학의 성 상품화도 논란이 됐다. 대학 주점에서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이나 여성의 성적 이미지를 이용해 술을 판매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성을 숨겨야 하거나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성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의 일부다. 성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소통하는 중요한 수단의 하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남성뿐 아니라 여성, 성소수자들이 모두 성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고, 성에 대해 개방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한다.

이 점에서, 성 상품화와 그와 연관된 ‘야한 문화’가 단지 성을 표현했기 때문에 문제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왜곡된 관점을 부추기는 성 표현 방식이다. 그리고 성을 인간의 본성에서 떼어내어 사고파는 물건처럼 만드는 상품화다. 성의 만족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무관하게 추구할 수 있는 물건처럼 간주되고 있다.

지난 20년 동안 성에 대한 사회의 태도는 한층 개방적으로 바뀌었다. 여성들도 성에 관심을 나타내고, 관계를 맺는 데서 더 많은 자유를 누린다. 젊은이들의 혼전 성관계는 요즘 뉴스거리도 못 된다. 그러나 성 개방과 자유화가 성 해방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난 20년 동안 형태를 달리했을 뿐, 여성에 대한 성적 비하는 지속돼 왔다.

성 상품화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전통적 형태의 성 상품화인 성매매는 서구에서 자본주의 초창기부터 아주 광범했고, 포르노는 1950~60년대부터 과거보다 훨씬 큰 규모로 확산됐다.

그러나 성 상품화는 최근 수십 년 동안 더욱 확산돼 왔다. 특히, 성적 이미지의 상품화가 매우 광범하게 벌어지고 있다. 신문, 방송, 잡지, 인터넷 등에 실리는 광고나 콘텐츠에서는 여성의 몸을 상품화한 성적 이미지가 넘쳐난다. 방송에서 ‘걸그룹’ 가수들이 은근하게 성행위를 묘사하는 춤을 추면서 ‘성적 어필’을 하는 것은 전혀 낯선 일이 아니게 됐다. 성과 직접 관련이 없는 상품에 여성의 성적 이미지가 결부되기 일쑤다. 최근 한 남성 헤어왁스 광고는 타이트한 노출 의상을 입은 한 여가수가 ‘섹시 댄스’를 추는 모습을 한참 보여 준 후, “남자들이여, 단단하게 세워라. 머리를”이라는 카피를 내보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여성 연예인들의 특정 신체 부위(가슴, 다리, 엉덩이 등)를 클로즈업해 기사거리로 다루는 언론들의 행태도 매우 익숙하다.

만연한 성 상품화 어떤 상품이든 여성의 성적 이미지가 결부되기 일쑤다. ⓒ사진 조승진

최근에는 남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일도 일어나지만 성 상품화는 주로 여성의 몸을 상품화하는 식으로 벌어진다. 그래서 성 상품화가 발전할수록 여성을 눈요깃거리로 취급하며 비하하는 문화도 확산된다.

성매매는 여전히 번성 중이다.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후 단속이 강화되면서 성매매 집결지는 전반적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유흥주점, 단란주점, 안마시술소, 키스방, 인터넷 성매매 등 다른 형태의 성매매가 증가해 왔다.

포르노의 확산도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포르노를 과거보다 아주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 근래의 변화다. 전에 포르노는 뒷골목 유흥가에서나 암암리에 볼 수 있었던 거라면, 이제는 주류 문화의 일부가 됐다. 포르노는 이제 거대한 산업으로 발전했다.

성적 대상이 되다

오늘날 성 상품화가 더욱 발전하면서 새로운 왜곡이 일어난다. 성 상품화가 여성의 자신감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많아졌다.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성 상품화 비판을 보수적 태도로 치부하면서, 성 상품화를 긍정하는 것이 ‘쿨하고’ 자유분방한 ‘요즘 세대’임을 인증하는 것인 양 말한다.

그러나 여성의 몸을 상품화하는 것은 여성을 누군가의 성적 흥미를 이끌어내고 만족시키기 위한 성적 대상·도구로 전락시킨다는 뜻이다. 이는 명백한 여성 비하다. 성 상품화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 여겨지지 않고 성적 대상으로 격하돼 있는 현실을 반영한다. 동시에, 이런 인식을 재생산해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사회 통념을 강화한다.

성 상품화는 외모나 성적 매력이 여성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도록 만든다. 동시에 여성의 외모에 대한 획일적이고 왜곡된 이미지, 즉 날씬하고 마른 몸에 대한 이미지를 퍼뜨림으로써 다수 여성들이 자기 몸을 부끄러워하도록 만든다. 이 때문에 다수 여성들은 일상적 스트레스를 받으며 외모를 가꾸고, 무리한 다이어트를 하고, 성형수술을 하도록 내몰린다. <겟잇뷰티>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외모를 가꾸는 게 마치 여성의 본분인 것만 같다.

지난해 여성단체들의 항의로 결국 폐지된 프로그램인 <렛미인>은 성형수술이 마치 여성에게 인생 역전을 이룰 수단인 양 편견을 부추겼다. 성형수술을 하다 사망하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는 사실은 쉽게 은폐된다.

다이어트는 일부 여성들에게 영양결핍이나 빈혈, 골다공증, 심하면 거식증 등을 유발해 건강에 해로울 뿐 아니라 많은 여성들에게 일상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다.

이 모든 일들은 젊은 여성뿐 아니라 나이든 여성도 압박하고, 동시에 나이든 여성에 대한 비하로도 이어진다.

성 상품화는 지독한 여성차별의 문제이지만,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성 상품화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소수자이든 사람들이 진정으로 성을 즐기고 누리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다. 성 상품화는 성을 자연스러운 관계의 일부에서 분리시켜, 사람들의 통제 바깥에서 사고 팔리고 평가받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성적 능력을 보여 줘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리게 한다. 가령 성이 마치 테크닉이나 성기의 크기 문제로 환원되면서 남성들도 비교당한다. 성의 모습은 매우 다양한데 이렇듯 성 상품화는 성을 매우 조야하고 획일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성적 이미지가 넘쳐나면서도 정작 성에 대한 개방적 논의는 매우 부족하다. 지난해 교육부가 일선 학교에 내려보낸 성교육 표준안이 큰 비판을 받았다. 결혼하기와 부모 되기를 강조하며 금욕주의를 부추길 뿐, 청소년들의 성욕과 동성애 등 다양한 관계들을 부정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간통죄는 지난해에야 폐지됐다. 사람들 사이의 자유로운 만남과 결합이 처벌까지 무릅써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동성간 결혼은 인정되지 않고, 성소수자 혐오가 부추겨진다. 여성이 성을 즐기기 위한 핵심 요소의 하나인 낙태는 여전히 불법이다.

성 상품화와 자본주의

성 상품화가 자본주의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성 상품화가 이토록 광범하게 벌어지는 것은 분명 자본주의적 현상이다. 자본주의는 이윤이 생기면 무엇이든 상품으로 만드는 본성을 갖고 있다. 먹고살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노동력을 고용주에게 팔아야만 하고, 인간의 친밀한 감정이나 생각도 상품으로 바뀐다.

1960년대 서구에서 성 해방 요구는 여성해방 운동의 핵심적 일부였다. 여성들은 성을 금기시하거나 여성의 성적 주체성을 부정하는 것에 맞서고, 여성이 성을 즐기고 표현할 권리를 위해 싸웠다. 이 시기에 피임 기술이 발전하고, 합법적으로 낙태도 할 수 있게 되면서 실제로 여성이 임신 걱정을 하지 않고 성을 즐길 가능성이 열렸다. 여성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고 노동시장 진출도 늘어나면서 자의식이 성장한 것도 주요 요인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여성과 남성 모두의 성 경험은 훨씬 더 다양해졌다. 섹스는 더는 결혼 생활에 국한되지 않았다. 동거 커플이 늘고, 동성애에 대한 태도도 변했다. 성 해방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은 크게 증가해 왔다.

그러나 이런 열망은 진정한 해방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이윤 추구를 위해 이런 열망조차 상품화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는 여성 노동인구를 착취하는 동시에, 노동력인구를 길러내고 교육하고 돌보는 데 국가와 기업의 대대적 투자를 꺼리고 사사화된 가족제도에 의존한다. 이 때문에 노동시장과 가족 안에서 여성에 대한 체계적 차별이 유지돼 왔다. 이처럼 뿌리깊은 여성 차별이 성이 상품화되는 과정에 반영돼, 여성의 몸에 대한 이미지를 팔거나 여성을 동원하는 성적 서비스가 생겨났다.

그런데 이런 과정은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이 겪는 팍팍한 삶과 맞물렸다. 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쉴라 맥그리거는 대중의 팍팍한 처지가 성 상품화 확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인간의 욕구가 모두 상품으로 제공돼” 마치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사듯 쉽게 욕구를 충족할 수 있으리라는 환상이 팽배하다. 주말은 견디기 힘들었던 노동을 술과 다른 약물로 잊는 시간이다.

“그러나 우리의 성적 욕구는 그런 식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인간 관계 중에서도 가장 친밀한 관계인 성적 관계는 상대를 하나의 동등하고 같은 욕구를 가진 인간으로서 인정할 때 가능하다. 인간의 성에는 인간적인 환경과 인간적인 관계가 필요하고, 시간과 인내, 그리고 인간적인 끌림도 필요하다. 우리가 사는 바로 그 삶의 방식 때문에 만족스러운 성적 관계를 갖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성 산업이 그 틈새를 포르노 영상, 섹스 토이, 랩 댄싱 클럽, 성매매 알선 업소와 전통적 방식인 거리의 성매매로 메우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쉴라 맥그리거, ‘섹슈얼리티 소외, 자본주의’)

욕구

성 산업은 성에 대한 대중의 다양한 욕구가 갈수록 커지는 한편,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조건은 마련되지 않은 모순된 상황을 파고들었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들한테서 진정으로 성을 즐길 수 있는 조건을 빼앗은 후에 그걸 이용해 상품을 팔아 이윤을 남기는 흉칙한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주로 여성의 몸은 성욕 충족의 대상으로 취급되고, 이 과정에서 여성 차별적 인식은 재생산된다.

성 상품화를 남성 전체의 심리나 욕망(‘남성 지배’에서 비롯한) 문제로 설명하는 것은 오늘날 어떻게, 그리고 왜 성 상품화가 이토록 광범해졌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이런 점들은 성상품화에 맞서려면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에 도전해야 함을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오로지 이윤 추구와 여성 차별로 득을 보는 자본주의 국가 기구에 기대어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에도 반대해야 함을 보여 준다. 체제에 대한 도전을 회피한 채 성 상품화의 국가 규제를 요구하게 되면 성 상품화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국가 권력을 강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가령, 성매매 금지 요구는 성판매 여성들을 더 음지로 내몰고 낙인을 강화시키며 경찰력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1970년대 후반 일단의 양성 분리적 페미니스트들이 주도한 포르노 규제 운동은 자본주의 국가의 검열 강화에 힘을 실어 줘, 성적 보수주의가 강화되고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었다.

자본주의에서 여성 차별은 형태를 달리할 뿐 끊임없이 부추겨진다. 앞서 살펴봤듯이, 이는 자본주의에서 가족제도가 하는 중요한 구실과 연관돼 있다. 여성들이 가정 내에서 하는 무보수 가사노동은 자본가들에게 커다란 이득을 안겨 준다. 많은 여성들이 이미 가정 밖에서도 일하고 있는데도, ‘부양자 남성 vs.가사·육아의 책임자 여성’이라는 관념이 계속 부추겨진다. 성 문제에서도 여성이 적극적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 대상으로서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규정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노동계급을 분열시킬 수 있다는 점도 자본주의에서 차별이 유지되는 중요한 이유다.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 노동계급을 지배하려면 노동자들이 성, 인종, 성적 지향, 국적 등으로 분열돼 있는 것이 유리하다. 만일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의 몸을 성적 도구로 여기고 돈을 주고 살 수 있고 자신이 희롱해도 되는 존재라고 여긴다면 노동계급의 단결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성 상품화가 별 문제가 아니라거나 나아가 여성의 자신감을 증진시키는 방안이라는 식의 주장에 이의 제기를 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68반란과 더불어 서구에서 탄생한 여성 해방 운동은 여성의 성적 자유를 여성해방의 주요 의제로 올려놓았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 ’68반란의 패배와 우경화로 여성 운동의 활력을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실질적 도전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돌리는 일이 벌어졌다. 그 결과, 여성을 차별하는 사회질서를 전복하기 위해서 노동자 계급 남성과 여성이 단결하라는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의 관심을 그의 사생활 속에서 남성과 싸우는 데로 돌리는 데 치중했다. 양성 분리적 급진 페미니즘이 이렇게 ‘개인의 정치학’으로 후퇴한 것은 집단적 투쟁을 개인의 라이프스타일 변화 문제로 대체해 버렸고, 그중 일부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주류 단체가 됐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가 왜곡한 성의 자유와 체제가 가하는 전반적인 여성 차별에 도전하는 운동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진정한 성 해방은 차별과 소외, 착취에 기초한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때 가능하다. 사회구조에 이의를 제기하고 도전하는 운동이 대중적으로 등장하면, 개인들 사이의 관계와 성과 관련된 문제들을 반드시 제기하기 마련이다. 착취적이고 억압적 사회를 바꾸려고 투쟁에 나서면 그 과정에서 자신을 불만족스러운 개인 관계에 가두는 속박을 깨고 그 관계를 바꾸려 한다는 점은 자연스럽다. 우리는 남녀 노동자들이 함께 사회의 생산방식에 맞서 싸우면서 생활방식과 개인 간의 관계까지 바꾸는 인간해방의 가능성에 주목하며 투쟁을 건설해 나가야 한다.

입력 2016-06-01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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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온전히 개인의 선택이 돼야 한다

성지현

최근 <중앙일보>와 <닛케이> 신문이 20~40대 남녀 1천여 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서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아니’라고 답했다.

통계청에서 시행하는 <사회조사>에서도 결혼에 대한 태도 변화를 뚜렷이 볼 수 있다. 1998년에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답한 사람은 33.6퍼센트인 반면, 2014년에는 14.9퍼센트로 낮아졌다. 반면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다’고 답한 사람은 1998년 23.8퍼센트에서 2014년 38.9퍼센트로 늘었다. 특히, 남성에 비해 여성이 결혼을 의무라기보다 선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그 배경에는 여성들의 지위 변화가 있다. 여성의 교육 수준이 꾸준히 높아져 2009년부터는 여성의 대학진학률이 남성을 앞질렀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얻는 것도 당연하게 여긴다.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2000년 이후 50퍼센트가량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30~50대 여성 고용률이 아직 다른 주요 산업국보다 떨어지긴 하지만, 그럼에도 한국에서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는 보편적 현상이 됐다. 여성 노동자들이 한국 자본주의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 노동력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부분적이고 모순적이다. 노동시장과 가족 등 사회 곳곳에서 여성에 대한 체계적 차별은 유지되고 있다. 오늘날 여성의 몸을 비하하는 성 상품화가 만연해 있다.

그럼에도 수십 년간의 이런 변화가 여성들의 결혼(가족)과 성 규범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켰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 하고 말한다. 이제 여성들은 자신의 구실을 가정의 영역으로 제한하거나 가족을 위한 희생과 헌신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다. 성에 대해서도 훨씬 개방적으로 변했다. 동거, 이혼, 비(미)혼모 등에 대한 태도가 우호적으로 바뀌었고, 실제로 1인가구나 동거가족의 비율도 늘어나고 있다. 동성 결혼에 대한 태도도 빠르게 수용적으로 바뀌고 있다.

이처럼 여성의 경제적·정서적 자립성이 높아진 건 좋은 일이다. 여성들이 가정 안에서 가사와 양육에만 얽매여 사는 것은 개인적 성취와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여성들이 더 많이 사회운동에 참가하고 나아가 여성 해방을 위해 싸우는 데서도 좋지 않다.

결혼을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여기는 태도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여성들 사이에서의 변화가 뚜렷하다.  ⓒ표: 통계청 ‘결혼에 대한 태도 변화’

<슈퍼맨이 돌아 왔다>

그러나 국가와 보수주의자들은 여전히 가족에 대한 환상을 부추기고 전통적 가족 가치를 강조한다. 특히 가족의 ‘위기’가 심화될수록 더욱 보수적 가족 가치를 강화하려고 애쓴다.

조혼인율(인구 1천 명당 혼인건수)이 1970년 통계 작성 이후 역대 최저였던 지난해에 보건복지부는 결혼정보회사와 함께 결혼 장려 공익캠페인을 벌였다. ‘2030세대’들에게 “결혼=행복”이라는 인식을 부여하겠다면서 말이다. 복지부 고위 관계자가 “싱글세” 운운해서 빈축을 산 일도 있었다.

전 교육부총리 황우여는 집무실에 직원들의 ‘처녀 총각 현황판’을 붙여 놓기까지 했다. ‘좋은 가정을 꾸려야 일도 잘할 수 있다’느니, ‘미혼자가 많은 과장은 국장이 되지 못하게 하겠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대중매체도 온갖 짝짓기 프로그램, 가상 결혼, 육아 리얼리티 등을 통해 행복한 결혼과 출산을 부추긴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는 아이들의 천진함과 사랑스러움이 한껏 강조된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위해 연월차를 팍팍 내고 아이들과 캠핑여행, 놀이시설 체험, 먹거리 나들이에 나선다. 부부는 화목하다. 그러나 이것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돈에 쪼들리는 평범한 노동계급 가정에서 가능할까?

위에서 언급한 <중앙일보>와 <닛케이> 신문의 설문조사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만한 것이 있다. 결혼의 장애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한국의 응답자 75퍼센트가 ‘경제적 어려움’을 꼽았다.(일본의 응답자는 ‘행동의 자유 제약’을 가장 많이 꼽았다.)

즉, 청년들의 경제적 어려움이 결혼 감소의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청년들은 높은 청년 실업, 불안정한 일자리, 불투명한 미래 속에 내몰려 있다. 연애,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한 ‘N포세대’라고도 불린다.

웨딩컨설팅 업체 듀오웨드가 발표한 ‘2016 결혼 비용 실태 보고서’를 보면, 서울·수도권의 신혼부부가 결혼할 때 쓰는 돈이 평균 2억 7천만 원이다. 주택에 드는 비용이 그중 70퍼센트가량을 차지하고, 예식장, 예물, 예단, 혼수용품에도 1천만~2천만 원이 예사로 들어간다. 여유 있는 부모의 지원 없이 청년들이 스스로 너무 ‘후지지’ 않은 예식장에서 아름답게 결혼하고 서울에 전셋집을 마련해 ‘정상적’으로 신혼을 시작하는 건 불가능하다.

지난해 말 박근혜 정부는 ‘3차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2016~2020)’을 세우며 저출산의 주된 원인으로 “만혼”과 “비혼”을 지목했다. 그리고 신혼 부부에게 전세자금 지원, 임신출산 비용 면제 등 몇 가지 지원책을 내놨다. 그러나 이런 알량한 지원으로 결혼에 대한 사람들의 부담을 덜기 만무하다. 게다가 정부는 ‘3차 기본계획’에서도 청년 일자리를 만든다며 ‘노동개혁’을 빼놓지 않았다. 기승전’노동개혁’이라 할 만하다.

안식처

저들이 이처럼 결혼과 가족에 대한 실질적 지원은 충분히 하지 않으면서도 (정상)가족의 소중함을 찬양하고 결혼·출산을 부추기는 이유는 자본주의에서 가족제도가 하는 구실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가족은 자녀 양육, 음식 준비 등 현재와 미래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늙거나 병들어서 더는 노동을 판매할 수 없는 가족 구성원을 부양하는 유일한 기관이다. 체제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재생산과 개인에 대한 복지를 개별 가정(특히 여성)이 떠안는 것은 지배자들에게 상당한 이득이 된다. 가족이 ‘위기’에 처할수록 저들이 더 가족 가치를 강조하는 이유다.

물론 노동자들도 가족을 필요로 한다. 가족은 냉혹한 세상의 안식처처럼 여겨진다. 세상이 냉혹해질수록 가족이 구성원들의 정서적·물질적 필요를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없게 되지만, 기댈 곳 없는 사람들에게 가족에 대한 욕구와 기대는 더 커진다. <사회조사>에서 2백만 원 미만의 가구소득자들이 그 이상의 소득을 얻는 사람들보다 ‘결혼의 필요성’에 더 강하게 동의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결혼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언제 누구와 결혼을 할 것인지, 어떻게 가족을 구성할 것인지는 온전하게 개인의 선택이 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람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결혼에 얽매일 수밖에 없거나 반대로 결혼을 하지 못하는 현실이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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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회주의자 섀런 스미스는 단결된 혁명 운동을 거부하고 각각의 피억압 집단이 ’자율적’ 운동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정체성 정치)이 효과적인 투쟁 전략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구입문의 : 02-2271-2395 / 이메일 : mail@workerssolidarity.org

입력 2016-06-15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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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 사회’ 담론은 여성 차별에 맞선 운동에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는가?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서평

최미진

근래 몇 년간 페미니즘 진영에서 유행한 ‘여성 혐오 사회’ 담론이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사회적 이슈가 됐다. 성 상품화와 강간을 미화하거나 가십거리로 취급하는 문화, 10년 넘게 변함없는 남녀 임금 격차 등 여성 차별이 만연한 현실에 대한 반발의 맥락에서 ‘여성 혐오’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고 있다. 특히 ‘일베’ 같은 일부 온라인 우익이 주도한 ‘역차별’론은 여성 차별 현실을 호도해 여성들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치즈코, 은행나무, 2012. 5. 2, 14,000원

하지만 ‘여성 혐오’ 개념이 널리 쓰이는 만큼,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불분명한 경우가 많고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 때문에 서구의 여성운동 내에서도 차별과 혐오 개념에 대한 논란이 있어 왔다. 그럼에도 ‘여성 혐오’를 매우 느슨하게 사용하면 우리가 ‘여성 혐오가 일상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는 생각으로 쉽게 발전할 수 있다.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우에노 치즈코, 은행나무, 2012)는 이러한 ‘여성 혐오 사회’ 담론을 잘 보여 주는 책이다. 이 책은 2012년 한국에서 출간돼 꾸준히 인기를 얻었고,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 ‘여성 혐오 사회’ 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이 책의 핵심 주장을 공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에노 치즈코 교수(이하 존칭 생략)는 최근 방한해 ‘여성 혐오’에 대한 여러 강연과 인터뷰를 했다.

이 책이 인기를 끈 이유는 일상의 다양한 여성 차별 현상과 문화, 그리고 여성 차별에 가담하는 남성들을 비교적 쉽고 간결한 문체로 가차없이 비판할 뿐 아니라, 여성들에게는 혐오에 당당히 맞서라는 메시지를 주기 때문인 듯하다. 이것이 만연한 여성 차별에 불만을 가진 여성들의 정서적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듯하다.[1]

이 책은 차별 현상에 대한 다양한 묘사를 담고 있지만, 더 나아가 현 사회를 ‘여성 혐오 사회’로 규정하고 그것이 유지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나름의 설명도 담고 있으므로 여성 차별 현실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특히 이 부분을 살펴봐야 한다.

여성 혐오란 무엇인가

이 책의 첫번째 특징은 매우 광범한 ‘여성 혐오’ 개념이다.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 혐오’를 하나로 명확히 규정하기보다는 여러가지 의미로 정의한다. 가령,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여성의 객관화, 타자화’, ‘여성 멸시’, ‘남자가 여자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여자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저주하는 것’ 등. 이밖에도 그는 일상의 다양한 여성 차별 현상을 모두 ‘여성 혐오’에 포함시킨다.

그런데 여성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여자로 태어나 손해”라는 생각을 안 해 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혐오 개념을 이렇게 느슨하게 사용하다 보니, 그가 볼 때 “여성 혐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마치 중력처럼 시스템 전체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자기 혐오”에 빠질 수밖에 없고, 상당수 여성들도 여성 혐오의 “대리인”이 된다. “여성 혐오라는 것은 남녀를 불문하고 결국 내 안에 이미 깊이 탑재된 것”이다.

강남역 사건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이처럼 확장된 여성 혐오 개념이 쓰였다. 가령, 한국여성단체연합 인권위원회가 주최한 토론회에서는 성차별적 인식, 야한 만화 보기, 여성에 대한 폭력, 여성 살해 등 수위가 다른 여러 행위들이 모두 ‘여성 혐오’이고, ‘여성들은 우연히 살아남았을 뿐 일상적으로 강남역 사건과 같은 일을 겪는다’, ‘여성 혐오는 공기처럼 흐르고 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한 급진좌파 기관지에조차 “이 사회의 여성에 대한 인식 그 모든 것이 여성 혐오이다. 아주 쉽게 내뱉는 농담과 호칭에서부터 견고한 믿음에까지”라는 주장이 실렸다.

그런데 여성 혐오가 “중력”이나 “공기”처럼 헤어날 수 없는 거라면 우리는 어떻게 여성 혐오에 맞서 싸울 수 있나 하는 문제는 제쳐두더라도(이 문제는 뒤에서 다루겠다), 혐오 개념을 차별과 아무런 구분 없이 사용하는 이런 용법이 과연 현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여성 차별 반대 운동에 효과적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혐오 개념의 확장은 다양한 여성 차별의 심각성을 환기시키자는 좋은 취지로 시작했을지 몰라도 현실을 제대로 진단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꼭 좋은 효과를 내는 것도 아니다.

성소수자나 이주민 혐오는 단지 차별적 말과 행동을 뜻하는 게 아니라, 성소수자나 이주민을 사회악의 근원으로 여기고 사회에서 배척하려는 것을 뜻한다. 가령, 성소수자 혐오는 성소수자를 ‘전환 치료’의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이주민 혐오는 단속 추방 운동으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혐오 표현과 범죄를 연구해 온 진보적 법학자도 “범죄학적, 형사법적으로 봤을 때 강남역 사건이 증오범죄가 아닐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숙명여대 법학과 홍성수 교수).

‘여성 혐오’는 차별과는 구분돼야 한다. 우리 사회가 여성차별적 사회라 할지라도, 모든 남성이 여성을 사회악의 근원으로 여기거나 더 나아가 여성들을 이 사회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여기진 않는다. 또한, 그 생각을 단지 온라인 익명 게시판에 끄적거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 세계에서 여성을 살해하는 사람은 더 극소수다. 따라서 여성 살해는 “일상의 연결이자 수순”(정희진)이 아니라, 여성차별적 사회라는 토대 위에 각 개인 주체들의 특수한 경험과 인식 등이 매개돼야만 나타나는 극단적 현상이다.

이런 매개들을 무시한 채 여성 혐오만으로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것이야말로 환원론이다.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강남역 사건을 두고 ‘모든 정신질환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몰아선 안 된다’고 옳게 주장했지만, 정작 모든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치부한 것에서는 모순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은 의아하다.

혐오 개념 확장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우선, 혐오를 혐오이게 하는 특징들을 흐려버리고 진정한 혐오의 심각성을 오히려 희석시킨다(반대로, 상대적으로 경미한 일은 실제보다 더 부풀려 인식하게 만들 수 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나 살해가 ‘가벼운 농담’과 같은 수준으로 취급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 점에서 혐오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은 혐오라는 말의 의미를 가볍게 만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개념의 확장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여러 현상을 ‘센’ 개념 하나로 환원하는 방법을 통해 여성차별적 인식에 “경종”을 울려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언어의 느슨한 사용은 자신들끼리 토론하는 데 익숙한 소집단 안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대중과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혐오 개념의 확장을 고집하면 그 언어세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낙인 찍어 괜시리 도덕주의적인 분위기를 강화할 수 있다.

특히, 혐오 개념의 확장은 모든 남성들을 모두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는 태도로 연결되기 십상이다. 여성 차별적 인식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만으로 곧 혐오이기 때문이다. 실제 강남역 사건을 둘러싼 논란에서 상당수의 페미니스트들(과 좌파들)은 공공연히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 또는 “공범”이라고 주장했고, 심지어 정희진 씨는 “잠재적”이라는 수식어조차 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점에서 “용어의 과잉은 불필요한 갈등과 대립을 만들어낼 수 있”다(정정훈 변호사, <한겨레> 6월 7일자 칼럼). 이는 여성 차별과 혐오에 반대하는 남성들과 ‘일베’같은 자들을 모두 같은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한다는 점에서 매우 불공정하고, 여성 차별 반대 운동에 동참할 수 있는 수많은 남성들을 소원하게 만들어 차별 반대 운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차별을 체계적으로 양산하는 사회 체제가 아니라, 남성 개개인에게 화살을 돌리게 만든다.

여성 혐오는 ‘남성 간 연대’를 유지하는 수단?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남성이 여성 차별의 원인이라는 남 대 여 분리주의적 주장을 체계적으로 발전시켰다(남성 대신 남성권력, 가부장제 등으로 바꿔 불러도 같은 의미다). 이런 주장은 ‘여성 혐오 사회’ 담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에노 치즈코 역시 ‘여성 혐오’를 ‘남성 간 연대’(우에노 치즈코의 표현으로는 ‘호모소셜’)를 뒷받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본다. ‘여성 혐오’를 남성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지배전략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여성 혐오를 기반으로 조직된 사회를 가부장제라고 부른다”. 그는 퀴어 이론가 이브 세지윅이 1985년에 쓴 《Between Men》의 주장을 따라, 성적 주체로서 남성 집단은 ‘남성됨’이라는 동질성을 유지하기 위해 남성답지 못한 이들(남성 동성애자들)과 여성을 배제하고 차별화한다고 본다. 가령 우에노 치즈코는 최근 내한 토크콘서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남자가 ‘남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여성이 아님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여성혐오’는 여기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부산물이다. ‘호모포비아’ 역시 남성들 간의 집단적인 사회 안에서 ‘여성스러운’ 혹은 ‘계집애스럽다’고 이야기되는 남성을 배제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배제되지 않기 위해, 남자는 항상 자신이 남성스럽다는 것/여성스럽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주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결국 여성혐오의 뿌리는 남자임을 증명하는 ‘남성됨’이라는 관념이라는 것인데, 이 남성됨을 증명하는 이유가 여성을 혐오/배제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에노 치즈코의 논리는 여성 혐오는 여성 혐오에서 비롯한다는 순환논리에 불과하다.

우에노 치즈코는 ‘성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푸코의 지지자답게 여성 차별이 남성의 생물학적 본성이라는 식의 설명에는 반대한다. 성애가 젠더 권력 관계와 연결된 것은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고 근대의 산물이라고도 주장한다. 하지만 그 변화가 어떤 조건에서 생겨났는지는 다루지 않기 때문에 역시나 관념론과 순환논리에 머물게 된다(결국 그가 찾은 답은 “신체화된 생활습관”이다). 결국 여성 차별과 동성애 차별의 물질적 뿌리가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성 차별의 원인이 남성의 지배욕이나 권력욕 때문이라는 설명과 별반 다를 게 없게 된다.

또한, 이런 비유물론적 역사 서술은 근대 이후 자본주의의 역동적 변화 속에서 나타난 성에 대한 여성과 남성의 인식 변화도 설명하지 못한다. 가령, 우에노 치즈코가 분석의 기초로 삼은 이브 세지윅의 책은 19세기 영국 문학에서 나타난 여성 혐오를 다룬 것이다. 그런데 19세기와 21세기의 여성 차별은 양상이 매우 다르다. 19세기에는 여성의 참정권조차 보장되지 않았고, 기혼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에도 부정적인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이제 여성이 노동 인구의 절반 가량을 차지한다는 것은 주요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오늘날 자본가들과 자본주의 국가들은 여성 차별을 체계적으로 유지할지언정, 여성들을 노동시장에서 배제하는 데 관심이 있지는 않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두드러지는 오늘날 이런 물질적 변화는 여성에 대한 남성 대중의 인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령, 올해 4월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인의 생활시간 변화상’을 보면 여전히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남성보다 훨씬 더 길지만, 그 가운데서도 변화는 있었다. 여성의 임금노동 참여로 가사노동 시간은 평일과 주말 모두 줄어들고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은 늘어났다. 특히, 남성이 직장에 가지 않는 주말에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눈에 띄게 늘어났고 그만큼 여성의 주말 가사노동 시간이 줄어들었다. 여성 안에서도 취업 여부와 미취학 자녀 유무에 따라 가사노동 시간은 큰 차이가 있었다. 전통적 역할(‘남자는 일, 여자는 가정’)에 대한 반대는 남녀 모두에서 늘었다. 이것은 ‘일베’ 따위가 남성 전체의 의식과 삶의 태도를 대변하는 게 전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우에노 치즈코가 동성애 혐오를 자본주의와 떼어 내어, 남성집단의 유대감 형성을 위한 산물로 설명한 것도 동의하기 어렵다. 동성애자들을 특수한 하나의 집단으로 분류하고 체계적으로 차별하기 시작한 것은 자본주의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재생산하는 데 이성애적 가족 제도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과 관련 있다.

남성은 동질적인가?

우에노 치즈코를 비롯한 ‘여성 혐오 사회’ 담론의 지지자들이 남성을 같은 이해관계나 유대감을 공유하는 동질한 집단이라고 가정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여성은 하나가 아니고 계급, 인종, 성지향 등에 따라 다르다는 주장은 오늘날 페미니즘 진영에서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들조차도 남성만큼은 동질하다고 전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다수 남성들이 여성차별 관념을 가지고 있을지언정(상당수 여성들도 이런 관념을 공유한다) 폭력·살인을 저지르진 않을 뿐 아니라, 여성차별 관념을 수용할 때조차 전폭적이고 일관된 방식으로 수용하는 남성은 비교적 소수이다. 다수는 모순된 방식으로 수용한다.

무엇보다 남성들 사이에는 계급에 따라 엄청난 격차가 존재한다. 자본가·국가관료와 노동계급 남성의 삶은 천양지차이고, 그들이 모두 동일한 권력(‘남성 권력’)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자본가 계급 남성은 남녀 노동자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실질적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노동계급 남성은 사회의 모든 중요한 결정권과 통제력에서 소외돼 있다. 이처럼 소외는 사회의 계급 분열에서 비롯하고, 소외의 효과도 계급에 따라 다르다. 노동계급 내 남녀 간 격차는 지배계급과 노동계급 간의 격차에 비하면 훨씬 적고, 오히려 노동계급 남녀는 대부분의 시기에 소외를 겪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때문에 성별, 인종, 민족, 성지향 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은 단결을 이룰 수 있다.

우에노 치즈코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출신이지만[2], 이 책에서는 자본주의의 ‘ㅈ’자도 등장하지 않고 계급 분석이 없다. 이것은 그가 가족을 자본주의와는 완전히 분리된 남성 지배의 장으로 본 강경한 이원론의 지지자였다는 점과 무관치 않은 듯하다. 우에노 치즈코는 프랑스 급진 페미니스트 크리스틴 델피의 ‘가내제 생산양식’ 이론을 수용해, 남성은 (계급과 무관하게) 여성의 가사노동과 성을 전유한다고 봤다. 즉, 노동계급 남성도 집안에서는 여성의 착취자로 군림한다는 것이다.

우에노 치즈코는 현재는 푸코와 같은 후기 구조주의에 친화적이다. 푸코의 권력 개념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권력은 통일체가 아니라 사회 전체에 스며든 다양한 관계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처럼 경제적 토대가 원인이고 나머지는 결과라고 보는 것은 틀렸다 … 권력은 반드시 저항을 부르기 마련이다. 비록 그 저항도 권력 관계와 마찬가지로 파편적이고 분산된 것이지만 말이다.”[3]

이런 관점은 자본가 계급의 남성이든 노동자 계급의 남성이든 남성은 여성을 억압하는 “권력”자이고 억압을 유지하는 데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다는 급진 페미니즘 사상과 잘 융합된다. 이것은 결국 노동계급 남성과 여성이 함께 자본주의 체제와 자본주의 국가기구에 맞서 투쟁하기보다는, 모두 각자 개인의 삶 속에서 남성에 맞서 저항하라는 개인주의적 해결책밖에 제시할 수 없다.

대안의 문제

우에노 치즈코는 전반적으로 남성(과 여성)을 지배적 담론에 사로잡혀 있고 그것을 수동적으로 반영할 뿐인 존재로 보는 듯하다. 이는 그가 지지하는 푸코의 후기 구조주의 철학의 출발점, 즉 인간 주체가 사회를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또한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 대한 근본적 회의와 관련 있는 듯하다. (한편, 개인은 사회 구조를 수동적으로 반영할 뿐이라고 보면, 개인의 행동으로 곧 그 사회 전체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강남역 사건의 살해 피의자가 ‘여성이 나를 무시했다’고 말했다는 점과 여성이 살인 피해자라는 사실에서 곧바로 우리 사회 전체가 여성 혐오 사회라고 결론 내리는 것도 비슷한 접근법이다.)

이것은 ‘도대체 중력과도 같이 헤어날 수 없는 여성 혐오를 끝장낼 수는 있는 것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 한다. 우에노 치즈코는 이에 대해 “비폭력의 학습”이라는 대안을 제시했다. 방한 강연에서 그는 남성들이 늙어서 힘이 없어지는 약자가 되거나, 약자를 돌보며(“케어 노동”) ‘비폭력 학습’을 하면 여성 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우에노 치즈코는 남자들이 인생의 많은 시간을 약자로 지내야 하는 초고령사회에 기대감을 나타냈다.

하지만 여성 억압은 남성 개개인이 젊고 힘 좋을 때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노년에 힘 빠지면 사라지는 그런 개인적인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 차별은 계급 사회의 등장과 더불어 시작됐고, 오늘날의 여성 차별은 자본주의 체제가 작동하는 방식과 맞물려 있다. 자본주의는 여성 노동력을 값싸게 착취하면서도 안정적인 노동력 재생산의 주된 책임을 개별 가족의 여성에게 전가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하려 한다. 또한, 노동계급을 성별로 분열시켜 이간함으로써 단결을 가로막고 노동계급 남성과 여성이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헌신하길 바란다. 특정 집단이 그토록 체계적으로 차별 받아 온 데는 물질적 근원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여성 해방이 우에노 치즈코 스스로 ‘여성의 억압자’라고 지목한 남성들 스스로의 개별적 계몽과 각성에 달려 있다니, 이만큼 허망한 결론도 없을 듯하다. 무엇보다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을 약자와 피해자로 자리매김하고, 약자라는 특성에서 변화의 근거를 찾는다는 점에서 중요한 약점이 있다(남성이 여성 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근거도 남성이 약자의 처지가 돼 보는 것이다). 여성을 약자와 피해자로만 여기는 관점은 오늘날 여성들이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성의 주체가 될 수 있고, 무엇보다 투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못하게 만든다.

두려움과 공포심, 약자와 피해자로서의 정체성만으로는 투쟁에 나서기 어렵다. 정반대로 자신감을 갖고 잠재력을 자각하는 것이 투쟁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과 힘이 오늘날 여성 노동자들에겐 있다. 그 힘은 오늘날 자본주의가 여성의 노동 없이는 굴러갈 수 없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여성 혐오 사회’라는 담론과 달리,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는 여성들을 배척해서 운영되는 게 아니라 여성들의 노동에 의존해서, 그들을 사회의 중요한 일부로 끌어들임으로써 굴러가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여성과 남성 노동계급은 같은 이해관계와 같은 잠재력을 공유하면서 연대의식을 느낄 수 있다. (물론 사회의 상층부로 갈수록 여전히 여성의 진입이 제한적이지만, 이조차 여성이 점점 더 다양한 영역으로 진출하면서 변화가 생기고 있다. 무엇보다 이조차 여성을 사회 운영에서 배제하려는 남성들 전체의 지배전략에서 비롯했다고 보긴 어렵다.)

우에노 치즈코 식의 ‘여성 혐오 사회’ 담론보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유물론이 차별을 더 잘 설명할 뿐 아니라, 어떻게 그것에 맞서 싸울 것인지도 제시할 수 있다. 역사유물론은 여성 차별이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고, 계급의 탄생과 더불어 역사 발전의 특정 시기에 나타난 것이라고 본다. 자본주의에서의 여성 차별도 자본주의에서 벌어지는 착취의 양상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여성 억압, 특히 자본주의에서 가족의 구실과 가족 안에서 여성이 수행하는 재생산이 여성 억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분석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역사유물론은 스탈린주의의 기계적 유물론과는 달리, 결코 인간 주체의 구실을 무시하지 않는다. 즉,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자동적으로 사회주의가 도래하고 여성이 해방되므로 자본주의를 심화·발전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기계적 유물론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전통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후기 구조주의 철학은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의 산물로 오해하고 스탈린주의에 대한 반발 때문에 사회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에 거리를 뒀지만, 파편화된 권력에 맞선 파편화된 저항이라는 대안은 차별 반대 운동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차별에 맞선 투쟁의 힘을 약화시켰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의 물질적 토대와 인간 주체의 상호 작용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자본주의 하의 소외 때문에 노동계급이 자신의 잠재력을 갉아먹고 온갖 차별적 사상을 수용하는 것에 의식적으로 도전해야 한다고 본다. 이 때문에 차별과 착취에 맞서 노동계급의 의식적인 단결을 추구하는 혁명적 조직의 구실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노동계급의 투쟁이 그 잠재력을 충분히 보여 주지 못하는 현재의 조건에서 여성 차별에 분개한 많은 여성들이 노동계급의 단결을 통한 체제 변혁 사상보다는 남 대 여의 분리주의적 정치에 심정적으로 이끌리기 쉬운 듯하지만 여성 차별을 끝장내고자 한다면 차별을 묘사하는 것에서 만족할 수 없고, 차별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로 나아가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은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다.


[1]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역자가 후기에 ‘보슬아치’(‘보지 달린 게 벼슬’이라는 뜻의 인터넷 은어)라는 단어에 대해 “진심으로 공감과 동정을 표한다”고 한 것은 부적절했다. 비록 그것이 “한국의 여성 혐오를 상징하는 단어”라며 비판적 코멘트를 했을지라도 말이다. 여러 여성 독자들이 이 역자 후기에 대해 출판사 측에 항의했다.

[2]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페미니즘에서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모두 여성 억압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이 책의 역자는 우에노 치즈코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1994년 한국에서 출간된 우에노 치즈코의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서 그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 소개됐다. 오늘날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가 칼같이 구분되지는 않는 듯하다.

[3] 알렉스 캘리니코스,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주의의 비판》, 책갈피, 2014, 151~152쪽

입력 2016-06-15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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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학숙 직장 내 성희롱 사건

사측을 감싼다는 의혹만 남긴 광주시 감사 결과

최미진

광주시와 전라남도가 공동 운영하는 장학시설인 남도학숙에서 벌어진 직장 내 성희롱과 사측의 불이익 조치에 대한 피해 호소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사건의 자세한 내용은 <노동자 연대> 174호에 실린 ‘공공 기관 내 성희롱과 불이익 조치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 있는 조처가 필요하다’를 보시오).

성희롱 가해자와 남도학숙의 김완기 원장 등은 처음에 성희롱 사실을 부인하며 되레 피해자를 비난했지만, 피해 당사자인 여성 노동자 A씨의 용기 있는 문제제기 덕분에 올해 3월 ‘성희롱이 맞다’는 국가인권위의 결정이 나올 수 있었다. 진정 후 11개월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사측은 성희롱 문제제기 이후 불이익 조치와 괴롭힘이 있었다는 A씨의 문제제기를 여전히 부인하고 있다. 국가인권위 결정 후에도 피해 여성 노동자에 대한 ‘은밀한 따돌림’이 지속되고 있다는 호소도 나오고 있다(<경향신문> 6월 25일치).

여성 노동자가 어렵사리 성희롱을 인정받았다 할지라도 성희롱 피해자에게 오히려 불이익을 주는 적대적인 노동 조건에서는 일자리를 유지하거나 안정적으로 근무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성희롱 문제제기 이후 사측의 불이익 조치에 따른 피해를 원상회복하고 추가 피해를 막는 것이 성희롱 사건 해결에서 중요한 까닭이다.

하지만 사측은 최근 오히려 두 차례에 걸쳐 A씨에게 경고성 공문을 보냈다. 성희롱과 관련한 A씨의 주장을 외부에 알리거나 직원들과의 대화 내용을 녹취하는 행위를 중단하라는 내용이다. 남도학숙 성희롱 사건이 시민단체와 언론 등에 알려지고, A씨가 성희롱과 사측의 괴롭힘의 증거로 녹취한 내용이 국가인권위 결정의 근거로 채택되고 언론에도 일부 알려지자 이를 문제 삼은 듯하다.

남도학숙 측은 성희롱 문제제기에 따른 불이익이 있었다는 A씨의 주장을 부인하며, A씨가 외부에 이런 주장을 알린 것이 “품위유지” 의무 위반이자 “학숙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녹취 행위가 “직원들 간의 상호화합”을 해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피해자가 외부에 호소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책임은 사측에 있어 보인다. 성희롱 피해를 호소한 여성을 외부전화가 차단된 별실에 보내고, 성희롱 문제제기를 “하극상”, “인성 불량”으로 취급하며 폭언을 한 사실은 인정되기 때문이다. 결국 A씨에 대한 경고성 공문은 피해자에게 외부에 호소하기를 중단하라고 압박하고 사내 갈등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며 사실상 피해 호소를 또다시 입막음하려는 추가적인 불이익으로 작용할 수 있다.

광주시의 눈먼 감사

그런데 지난 4월 25일 남도학숙의 관리감독기관인 광주시는 ‘사측의 불이익 조치(“2차 피해”)가 없었다’는 감사 결과를 내놓아 사측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나 기자가 최근 당시 감사 책임자인 황치열 감사관을 인터뷰한 결과, “2차 피해”가 없었다는 감사 결과의 근거는 매우 부실했다. 그래서 이 감사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합리적 의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는 부분에서 모두 사측의 주장만 받아들이고 피해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채택하지 않아, 피해자 구제보다는 사측의 방어 논리를 대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 보였다.

황 감사관은 남도학숙 측의 주장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피해자의 별실 근무가 “피해자를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피해자가 별실 근무를 스스로 “동의”했다고 감사관에게 진술했으며 “A씨는 혼자 있으니까 좋아라 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감사관의 주장만 놓고 보더라도, 피해자가 따돌림과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며 어렵사리 광주시에 피해 호소를 해 놓고는 정작 감사관에게 그런 조치를 ‘스스로 원했다’고 진술했다는 셈이 돼, 상식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기자는 황 감사관에게 A씨가 ‘별실 근무를 원했다’고 진술한 증거자료가 남아 있는지를 물어봤으나 “그런 건 없다”고 답했다. A씨는 인권위 진정 이후 직원들과의 관계가 나빠진 상황에서 반어적으로 한 말이 ‘동의’로 인정됐다고 주장했다(<경향신문> 6월 25일치).

광주시 감사 결과는 A씨가 사무분장 조정에 서명했다는 점을 “동의”의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이것을 곧 불이익을 당하는 것까지 “동의”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피해호소를 공정히 조사하고자 하는 감사관이라면 이런 의문을 떠올렸어야 마땅할 텐데도, 황 감사관은 그저 ‘A씨가 동의했다’는 얘기만 반복했다.

광주시 감사 결과를 보면, 성희롱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외부 전화가 차단된 별실에 근무했고, 피해자가 하던 업무가 변경된 것 자체는 사실로 인정됐다. 또한 CCTV가 피해자의 책상 방향을 향해 있었다. 이에 대해 황 감사관은 “(A씨 때문에 일부러 전화를 차단한 게 아니라) 원래 그런 방”이었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애초에 “원래 그런 방”에 피해자를 보낸 것 자체가 불이익 조치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외부전화 불통과 CCTV 방향 문제는 피해자가 국가인권위 조사관에게 호소하고 사측에 시정을 요구한 뒤에야 해결됐다. 또한 5개월가량 지속된 별실 근무는 국가인권위의 성희롱 인정 결정이 나고 광주시 감사가 실시되기 직전에 해제됐다. 그런데 애초에 별실 근무가 ‘피해자를 위한 것’이었다면 왜 감사를 앞두고 원래 자리로 복귀시켰는지도 의문이다.

또한, 광주시 감사 결과는 A씨에 대해 직원들의 욕설, 협박, 따돌림 등이 있었다는 사실도 부정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이것이 A씨의 “무차별적인 녹취 행위” 탓이라면서 모든 책임을 성희롱 피해자 탓으로 돌리고 있다. 이런 감사 결과는 A씨가 왜 녹취를 하게 됐는지는 전혀 묻지 않고 있다.

국가인권위 결정문을 보면, 성희롱 가해자는 성희롱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사측은 징계 절차는 밟지 않은 채 피해를 호소한 A씨에게 가해자와 화해하라고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 사실을 인정받는 데 피해자의 녹취는 결정적 구실을 했다.

직장 내 성희롱이 벌어지면 직원들 대부분이 관리자 눈치를 보느라 관리자 편에 서기 십상이다. 남도학숙처럼 노동조합이 없으면 더더욱 그럴 수 있다. 이처럼 피해를 뒷받침할 증인을 구하기 어려운 적대적인 환경에서 녹음은 피해자의 최소한의 자기방어 수단일 수 있다.

광주시는 사측의 해명 논리를 수용하는 데는 적극적이었지만, 정작 김완기 원장이 그동안 피해자에게 한 비난과 폭언의 명백한 증거는 외면했다. 김완기 원장은 피해자와의 면담 자리에서 “보기 싫으니까 그냥 나가라. XX하고 자빠졌네, 이런 형편없을 것을 봤나”라는 욕설을 했고, 그 녹취 증거가 남아 있다. 또한, 김완기 원장은 지난해 11월 전남도의회 안전행정환경위원회에서 열린 행정사무감사에서 “성희롱이 아닌 하극상이다 … [가해자가] 순화되지 않은 표현을 한 경우도 있었던 것 같지만, 진정을 해 학숙 명예를 훼손하는 건 있을 수 없다 … 인성이 불량한 여자가 잘못 들어온 케이스”라고 말했다(<중앙일보> 2016년 4월 15일치). 이것이야말로 성희롱 문제제기에 따른 “2차 피해”의 확실한 증거에 해당하는 내용이지만, 황 감사관은 조사 대상이 아니라며 끝내 모르쇠했다.

광주시 감사 결과는 광주시가 남도학숙 사측을 감싼다는 의혹만 남겼다. 남도학숙이 광주시가 운영하는 기관이고, 광주시와 전라남도가 내년 서울 제2남도학숙 건립(총 공사비가 4백98억 원으로 잠정 확정)을 앞두고 성희롱 문제가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꺼릴 수 있다는 점 등이 광주 시의 ‘눈먼 감사’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남도학숙 원장이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인사수석비서관과 공무원연금관리공단 이사장 등을 지낸 권력자라는 점도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인 듯하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광주지역의 한 시민단체 관계자조차 “남도학숙 원장은 지역에서 워낙 명사고 영향력이 강한 사람이라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싸울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성희롱 문제제기에 따른 불이익 조치와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A씨의 문제제기는 계속되고 있다. 성희롱 가해자와 남도학숙 사측을 상대로 한 재판도 준비되고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이 공공 기관에서 벌어진 직장 내 성희롱과 사측의 불이익 조치를 인정받는 선례가 돼, 직장 내 성희롱에 맞서고자 하는 다른 여성 노동자들에게도 용기를 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성희롱과 사측의 불이익 조치에 당당히 맞서는 여성 노동자에게 지지와 응원을 보내자.

입력 2016-07-05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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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은 여성차별로 득을 보는가?

이현주

얼마 전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한국의 성평등지수는 145개 조사 대상국 중 115위로 나타났다. 한국 여성이 남성과 같거나 비슷한 일을 할 때 받는 임금은 남성의 55퍼센트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소수의 여성들은 명백히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노동계급 여성을 비롯한 대다수 여성의 처지는 여전히 열악하다.

여성차별에 맞서 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흔한 오해와 달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제나 차별에 맞선 투쟁에 능동적으로 동참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차별에 맞서 싸우려면 여성차별로 누가 득을 보는지, 누가 차별에 도전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는지를 양성분리적 여성주의자들과 다르게 이해한다.

후자는 여성차별에서 모든 남성들이 이득(또는 특권)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특히 정희진 씨는 모든 남성이 “가해자”라고까지 주장한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다른 급진여성주의자는 남성이라면 차별에서 이득을 얻고 있으므로 어느 정도 문제의 일부이고 여성차별을 유지하는 데 책임이 있다고 본다.

중앙대 사회학과 이나영 교수는 남성들이 “공기처럼 누려왔던 특권”에 대해 말한다. 최근 한 좌파 기관지도 남성들에게 “불평등한 사회구조 속에서 어떤 이득을 얻고 있는지” “성찰”하고 “책임의식”을 가지라고 촉구했다.

이런 주장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는 수십 년 동안 여성운동 내 다수가 받아들여 온 가부장제론의 핵심 아이디어다.

많은 사람들이 가부장제 개념을 인정하는 것은 여성차별이 존재하고 차별이 사라져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을 표현하는 한 방식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차별에 맞선 투쟁에서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협력하고자 한다.

남성이 여성차별로 득을 본다는 생각은 여성차별이 삶의 곳곳에 뿌리깊게 스며들어 있음을 포착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차별의 현상을 묘사하는 것일 수는 있지만, 여성차별이 어디서 비롯했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이런 생각은 여성차별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체계적으로 구조화되고, 여성차별에서 득을 보는 것은 지배계급이라는 점을 놓치고 있다는 점이 큰 약점이다.

겉보기로, ‘남성 이득’ 주장은 이치에 맞는 듯이 보인다. 가사와 육아를 대부분 여성이 책임진다. 여성에게 성폭력·성희롱을 가하는 자는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 남성들이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노동계급 소속이다.

그러나 여성들이 더 천대받는 처지에 있다는 말이 곧 모든 남성이 그런 상황에서 이득을 얻는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구가 해 주위를 도는 것을 경험으로 인지하기가 어렵듯이, 차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현상 이면에서 작동하는 힘을 봐야 한다. 마르크스가 말했듯 “만약 사물의 현상과 본질이 같다면 과학이 더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차별의 진정한 수혜자는 누구인가?

마르크스는 19세기 영국 노동자들의 아일랜드계 인종차별에 대해 묘사하면서 이렇게 썼다. “[영국과 아일랜드 노동자 사이의] 이러한 적대 관계야말로 영국 노동계급이 자신의 조직을 가지고 있음에도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비결이다. 그것은 자본가 계급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자본주의는 극소수의 자본가가 대다수인 노동자를 착취하는 체제다. 자본가들은 다수인 노동계급을 성공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분열을 부추긴다. 노동계급의 분열은 지배계급에게 이득이고 이들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구실을 한다. 반대로 차별은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노동계급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한 부분이 더 나은 처지에 있다고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차별을 유지하는 데에 노동계급이 이해관계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자본의 지배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여성혐오가 인류 역사의 기반”이라는 정희진 씨의 말과 달리, 여성차별은 인류 역사 내내 존재하지 않았다. 여성차별은 잉여 생산물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 계급이 생겨나면서 함께 등장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의 주된 구실은 노동력 재생산이다. 이를 위해 자본주의는 집안에서의 여성의 무보수 노동에 의존한다. 게다가 노동계급이 가족 단위로 원자화되는 것은 사사화(私事化)와 개인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구실을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이 하는 이러한 경제적·이데올로기적 구실이 여성 차별이 오늘날에도 지속되는 이유다.

자본주의는 노동력 재생산 임무를 개별 가정에 떠넘김으로써 막대한 비용을 절감한다. ‘무상보육’을 둘러싼 박근혜 정부의 몽니를 보면, 지배자들에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지금과 같은 경제 위기 시기에는 더욱 그렇다. 아이가 있는 여성들은 육아 후 노동시장 진입 시 불리한 조건에서 일을 시작한다(가령 시간제 일자리나 초단시간 일자리 등). 여기에 여성이 주부양자가 아니라는 이데올로기가 더해져 여성들은 열악한 조건도 감수하도록 강요받는다.

△기업주들은 노동력 재생산 임무를 노동계급 가정에 떠넘김으로서 막대한 비용을 절감한다. ⓒ사진 이미진

반대로 남성들은 가족을 부양할 책임자로 여겨지는데,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가족 유지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그리고 남성이 직장에서 잘리면 그의 가족 전체가 나락에 빠질 거라는 두려움을 안고 살게 만들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전형적인 가족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는데도 가족제도가 자연스럽고 이상적인 동거 방식이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일자리와 임금, 승진 등에서 여성 노동자는 심각한 차별을 당한다. 여성의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은 남녀 자본가에게는 확실한 이득을 안겨 준다. 하지만 남성 노동자들이 그로부터 이득을 얻는지는 의심스럽다.

만약 여성의 저임금으로 남성노동자가 이득을 본다면 여성노동자의 임금이 떨어질 때 남성노동자 임금이 올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1998년~2008년 동안 한국의 여성과 남성 임금은 동반 등락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임금에서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 준다.(이와 관련한 더 자세한 논의는 <노동자 연대> 157호에 최미진이 쓴 ‘15년째 변함없는 남녀 임금 격차 ― 왜 이다지도 불평등한가?’를 보시오.)

하향화 압력

또, 독일에서 미니잡 등 주로 여성들이 종사한 저임금층의 확산은 전체 노동계급의 임금과 생활수준을 떨어뜨리는 구실을 했다. 이는 한 부문의 저임금이 전체 노동자 계급의 노동조건 하향화 압력으로 작용함을 보여 준다. 자본가라면, 실제로 그럴 계획이 있든 없든, 더 적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로 싹 바꿔 버리겠다고 협박하며 임금 인상률을 조금이라도 낮추고 싶지 않겠는가?

여성이 저임금 일자리에서 일하거나 임금 삭감을 당하면, 그와 함께 사는 남성 노동자는 생계유지에 더 압박을 받고 가족 부양을 위해 더 긴 시간 일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일부 개인이나 일부 집단이 일시적으로 얼마간 이득을 볼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혜택조차 언제까지 지속 가능한지 의심스럽다. 무엇보다, 계급 전체로는 분열의 대가를 치러 노동자 전체에 해롭게 작용한다. 자본주의 노동시장의 경쟁과 지배계급의 이간질 때문에 부분과 전체는 상충될 수 있다. 가령 공공부문의 공동 투쟁에서 어느 한 부문이 성과급을 받고 투쟁을 배신했다고 하자. 이는 당장에 해당 부문에게는 이득일 수 있겠지만, 공공부문 전체로 보면 투쟁을 약화시키는 해로운 일이다. 이는 향후 해당 부문의 이익을 지키는 데서도 불리한 조건이 된다.

가사와 육아의 불평등을 보면, 여기서는 틀림없이 모든 남성이 이득을 얻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성은 남성보다 하루 가사노동에 4배가량의 시간을 더 쓴다(208분 : 47분). 남성의 가사·육아 시간은 매우 더디게 늘고 있다. 물론 부부가 모두 전일제로 일하는 경우, 가사와 육아는 더 동등하게 분담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불평등 때문에 남성 노동자가 약간의 이득을 얻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정 내에서 여성과 남성 개인들이 하는 구실을 자본주의 체제 전체의 구조와 작동 방식과 연결지어서 보면, 진정한 수혜자가 누구인지가 비로소 드러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이 하는 주된 구실이 노동력 재상산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노동계급 가정 내에서 여성이 하는 무보수 노동은 개별 남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본가 계급을 위한 것이다.

가사노동의 불평등에는 ‘집안일은 여자가 해야 한다’는 남성들의 차별적 관념(상당수 여성도 이런 편견을 공유한다)이 반영됐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남성 노동자들이 자신의 연인이나 아내가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상황에서 대단히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흔히 남성 노동자들은 부양자로서의 책임 때문에 여성 노동자보다 더 장시간 일하고 더 멀리 직장을 다닌다. 분명, 집안에서 ‘왕따’가 되길 원치 않을 많은 아버지들은 자기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할 것이다.

가정 내에 불평등이 없다거나, 남성과 여성이 가사와 육아를 평등하게 분담하지 않아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집안에서 누가 무엇을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면 자본주의 체제가 두 성 모두에 미치는 영향(흔히 파괴적인)을 놓치기 쉽다. 또한 가정 내 불평등 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을 놓치기 마련이다. 바로 가사와 육아의 사회화 말이다.

여성차별은 계급사회와 함께 등장했고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착취와 자본축적의 필요 때문에 유지된다. 따라서 남성 노동자들이 이 사회에서 얼마나 더 나은 처지에 있고 어떤 이점을 누리든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차별을 반대하는 게 자신의 계급이익에 부합한다. 스스로 ‘노동자’라고 여기든 여기지 않든 객관적 실재(현실)가 노동자 여부를 규정하듯, 개별 남성 노동자가 그렇게 생각하는지 안 하는지와는 상관없이 그렇다. 

계급적 차이

모든 남성이 여성차별에서 득을 보고 차별의 지속에 단일한 이해관계가 있다는 주장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런 남성 동질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들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는 일부 여성주의자들도, 남성들을 동질적 집단으로 가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남성 역시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일부 남성들(자본가와 국가관료 등 지배계급 남성들)은 분명 사회 전반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 남성은 이런 권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반면 소수의 지배계급 여성들은 노동계급 남성들보다 비할 데 없이 큰 영향력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 매일같이 위험을 감수하며 일해야만 하는 삼성전자서비스 비정규직 남성 노동자가 박근혜나 나경원, 최연혜, 김을동 같은 여성들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졌다고 할 수는 없다.

노동계급 내 남성과 여성의 (성별)격차는 지배계급과 노동계급의 (계급)격차에 비하면 훨씬 적다. 오히려 노동계급 남녀는 대부분의 시기에 자신의 삶이든 사회 전체든 스스로 통제하기보다 자본가와 권력자들의 통제를 받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차별은 계급으로 환원되지 않지만, 차별에 맞서 싸우는 문제에서 계급은 매우 중요하다. 여성노동자 처지를 악화시켜 온 박근혜에 항의하는 여성노동자들. ⓒ사진 이미진

물론 계급적으로 높은 배경과 위치에 있는 여성이라고 해서 성차별을 겪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노동계급 남성의 일부가 여성에게 폭행이나 폭력을 가하거나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본다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많은 남성들이 여성 차별적 편견을 받아들이고 일부가 억압적 행동을 한다는 사실은 여성 차별이 체계적으로 구조화돼 개인 관계에까지 스며들어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지, 노동계급 남성이 여성차별을 유지하는 것이 득이 됨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성차별적 편견은 상당수 여성들도 받아들인다. 일부 여성주의자들은 “남성 권력”을 입증하려는 듯 모든 남성이 강간, 살해와 같은 흉악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양 말하지만, 이는 큰 과장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마치 어떤 노동자가 새누리당을 지지하거나, 자신이 속한 노조의 파업에 참가하지 않는 것이 자신에게 득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할지라도, 객관적으로는 이런 행위들이 그의 계급이익에 부합하는 행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성차별 관념을 받아들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관념들의 집합을 ‘허위의식’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허위의식은 변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아무리 오랫동안 지니고 있었을지라도 이런 후진적 의식이 물질적 조건이 변화하거나 정치적 경험을 하면 바뀔 수 있고 무엇보다 집단적 투쟁 경험 속에서 바뀔 수 있다고 본다. 이는 ‘남성 권력’이 문제라고 보는 관점과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차이점의 하나다.

모든 남성이 여성차별에서 이득을 얻느냐는 문제는 여성차별이 존재하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여성차별이 무엇에서 비롯했고, 왜 유지되며, 누구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이냐는 전략문제다. 이런 점에서 계급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권력과 특권: 여성차별의 근원에 대한 오해

여성차별에서 남성이 이득을 얻고 그 때문에 성차별이 유지된다는 견해는 차별이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비롯하는지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 차별이 개인들의 관계에서 비롯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는 증상을 원인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사회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며 개인간 관계 또는 한 부문과 다른 한 부문의 관계만 보게 만든다. 그러나 차별을 완전히 없애고자 한다면 이런 파편적·경험주의적 인식 방법을 넘어서야 한다.

최근 여성주의 일각에서 유행하는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은 이런 인식 방법을 더욱 부추긴다. 포스트구조주의는 사회를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게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사회는 단지 주체간(개인) 관계들의 총합이다. 차별은 착취 체제와는 무관하게 작동한다. “권력은 어디에나 있다”는 푸코의 말로 대표되는 이런 관점은 차별에 맞서는 투쟁을 파편화할 위험이 있다. 자본주의 체제와 국가에 맞서 노동계급의 여성과 남성이 단결해야 한다는 주장은 간단히 기각되기 쉽다. 파편화된 저항을 고무하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 곧 정치적인 것”이라는 근원적 여성주의의 구호와 쉽게 어울린다.

물론 포스트구조주의적 여성주의자들도 성차별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것이라고 강조한다. 차별이 구조적이고 체계적이라는 말은 옳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구조”는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구조와 물질적 조건과는 관련이 없다. 그들에게 “구조”는 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위계적 관계들’과 여기서 비롯한 차별 이데올로기(이른바 ‘여성혐오’)를 의미한다. 이런 “구조”는 “가부장제”나 “성별(젠더)권력 관계”, “비대칭적 위계 관계”, “성차별적 젠더 질서” 등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런 “구조”가 어디에서 비롯하는지를 묻지 않기에 그들은 흔히 현실의 불평등을 묘사하는 데 그친다. 설명하는 게 아니고 말이다.

한편, 구조적 성별 권력 관계가 일상을 지배한다는 주장은 인간이 그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존재라고 가정하는 것과 연결된다. 인간은 구조에 근거한 역할을 하는 존재일 뿐이다. 인간이 사회 전체를 이해하고 나아가 변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는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이 사회를 개인들의 총합으로 여기는 (개인주의적) 관점과 결합하면, 개인들의 행위는 흔히 ‘구조’로 환원되고, 또 개인들의 저항 행위는 ‘구조’에 저항하는 행위가 된다. 개인적 경험 말하기와 담론(일종의 성토 커뮤니티)이 넘쳐나는 이유다.

물론 차별적 경험 말하기는 차별 반대를 위한 좋은 출발점일 수 있다. 그러나 ‘경험’은 차별이 어디서 비롯하는지 이해하고 과제를 설정하는 과정 속에 자리매김할 때 효과적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다.

해방의 전략: 누구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모든 남성들이 누리는 ‘특권’이 본질적 문제라면, 그것의 논리적 결론은 남성들이 특권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일 것이다.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임금과 일자리 지키기를 단념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에게 득이 될까?

여성 차별이 착취 관계와는 관계없이 남성 특권에 의해 작동한다는 주장은 우리의 시선을 계급 사회라는 진정한 적으로부터 전혀 다른 곳으로 돌리게 만든다. 계급투쟁은 여성해방과는 상관이 없게 된다. 오히려 여성해방이 남성 야단치기에 달려 있다고 여기게 만들어, 진정으로 여성 천대를 끝내기 위한 실천에서는 계급투쟁에 반대하거나 거리를 두게 된다.

“국가와 자본가 권력”과 “남성 권력” 모두 문제라는 주장도 상충하는 견해를 절충함으로써 누구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라는 중요한 문제를 흐려 버리는 효과를 낸다.

한국의 여성주의자들은 1990년대 초에 사회 전체의 변혁을 통한 여성해방이라는 전망을 잃어버렸고 그중 다수는 법·제도 개선에 주력하여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성평등을 이룬다는 전략을 추구해 왔다. 물론 여성운동의 노력으로 여러 차별적 법과 제도가 개선됐고 이것은 사회 전체에 성평등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이런 성과는 종종 무력화되기도 했다. 여성차별의 물질적 조건이 유지됐기 때문이다. 1997년 경제 공황 뒤에는 다수 여성들의 삶이 더욱 악화됐다. 여성운동은 이에 맞서려 했지만, 주류 여성주의자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지지했기에 효과적인 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2000년대 들어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 사이의 괴리가 커졌고, 그런 괴리는 특히 노동계급 여성들의 삶에서 현격했다. “주류화된 페미니즘이 실제 여성들의 삶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회진보연대의 지적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는 평가이다.

차별적 말과 태도, 행동에 도전하는 일도 정당할 뿐 아니라 필요한 일이다. 자신을 성찰하는 일도 의미가 있다. 이제 막 급진화된 젊은 여성주의자들은 법·제도 개선을 지지하면서도 일상에서의 실천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거대한 체계적 차별에 맞서는 투쟁이 주로 개인들의 언행이나 태도, 자기 성찰에 의존할 수는 없는 일이다.

흔히 생각이 크게 바뀌어야만 착취와 차별에 맞선 투쟁에 나설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인 경우가 흔하다. 노동조건을 위한 투쟁이든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한 투쟁이든 차별 반대 투쟁이든, 투쟁에 참여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약간의 생각 변화와 여전히 크게 모순된 의식을 가지고 참여한다. 새로운 통찰을 얻고 낡은 관념과 편견이 깨지는 것은 바로 이런 투쟁 속에서다. 변화를 위한 투쟁 속에서는 자본주의에 의해 고무돼 온 견해들과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성노동자들은 자본주의를 멈춰세울 잠재력이 있는 노동계급의 주요한 일부가 됐다. ⓒ사진 조승진

마르크스주의가 차별에 맞선 투쟁에서 계급을 강조하는 것은 노동계급이 착취 문제나 경제적 쟁점에만 관심을 가져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차별에 맞서는 일이 노동계급 남녀 모두의 과제가 돼야 하고 노동계급의 집단적 힘을 동원해 싸워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이런 일은 자동적인 게 아니다. 노동계급 다수는 지배계급이 퍼뜨리는 분열과 거짓말에 노출돼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배계급과 싸울 뿐 아니라 계급 내부를 향해서도 정치적 논쟁을 지속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편의 일부도 근본적으로 차별 유지로 득을 본다는 이론과 사상이 더 많은 사람들을 차별 반대 투쟁에 참여시키는 데 도움이 될까? 오히려 이런 이론과 사상은 차별 반대에 동맹세력이 될 수 있는 노동계급 남성들을 움츠러들게 만들어, 성차별 반대를 여성들만의 과제로 만드는 효과를 내기 쉽다.

또한 남성을 여성혐오주의자라고 매도하는 것이 대중 운동 건설에 효과적일까? 성별 “정체성”에 따라 말할 자격을 주는 것은 차별 반대 운동의 전략·전술 토론을 차단하는 효과를 내고 있지는 않은가? 차별에 맞서 강력하고 효과적인 운동을 건설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런 물음들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트로츠키는 여성차별이란 너무나 뿌리 깊어서 “그 무거운 흙덩이를 갈아엎으려면 아주 무거운 쟁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개혁을 성취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여성차별을 끝장내려면 여성차별에서 이익을 얻는 계급사회를 폐지해야 한다. 더구나 경제 위기 하에서는 개혁을 성취하기가 쉽지만은 않고, 성취해도 도로 빼앗기기가 쉽다.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할 힘을 가진 남녀 노동계급을 단결이 아니라 분열로 이끌 위험이 있는 사상이 아니라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사상이 필요한 이유다. 

 

추천 논문 

정진희,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 사이의 최근 쟁점들’, 《진보평론》 65호

정진희, ‘사회재생산 이론과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 <노동자 연대> 169호

크리스 하먼, 《여성 해방과 맑스주의》, 최일붕 옮김, 다함께

섀런 스미스, 《정체성 정치는 해방의 수단인가?》, 최일붕 옮김, 다함께 

 
 
 
 
 

입력 2016-06-29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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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춤형 보육”? 긴축 위한 ‘무상보육’ 후퇴일 뿐

이현주

박근혜 정부가 기어이 '무상보육'을 후퇴시켰다.

정부는 소득이나 맞벌이 여부와 상관 없이 0~2세의 모든 아이들이 하루 12시간 보육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 왔다.

그러더니 이제 홑벌이 가정의 아이들은 기본으로 하루 6시간 이상 이용할 수 없도록 제한하고 나섰다. 허울좋게 "맞춤형 보육"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당장 구직 중이거나 재직을 증명하기 어려운 열악한 일자리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그동안 한국 정부는 여성고용률을 늘리고 출산율을 높이고자 보육 지원을 확대해 왔다. 그런데 이것이 투자한 재정만큼 큰 효과를 내지 못하자, 이제 재정을 더 ‘효율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여기는 듯하다.

이런 '무상보육' 후퇴는 신자유주의적 긴축이라는 정부의 경제 위기 대응 기조에서 비롯한다. 전일반이 아닌 아이들(이른바 '맞춤반')에 대한 보육료를 20퍼센트 삭감하겠다는 게 애초 정부의 계획이었다. ‘무상보육’ 예산 절감을 노렸을 것이다.

정부는 거대 기업에는 분식회계 사실을 알고서도 아낌없이 수조 원을 지원하면서, 노동계급 여성들을 위한 보육 지원은 어떻게든 줄이려 한다. 이처럼 긴축은 단순한 정부 재정 줄이기가 아니다. 노동계급 호주머니 털어서 기업 살리기이다.

여성들(다수가 노동계급인)을 희생시켜 정부와 기업의 필요에 ‘맞추는’ 것이 “맞춤형 보육”의 본질인 것이다. 정부는 긴축 맥락에서 누리과정 예산도 지방교육청에 떠넘긴 바 있다.

이번에 어린이집 운영자들의 반발 때문에 보육료 삭감은 하지 않기로 했지만, 홑벌이 가정의 아이들은 기본으로 하루 6시간 이상 이용할 수 없도록 하는 제한은 그대로 추진했다.

고약하게도 정부는 전업 주부들이 아이를 ‘과도하게’ 맡김으로써 직장 다니는 여성들이 피해를 본다는 식으로 이간질했다.

육아 부담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직장을 그만둔 여성들에게, ‘직장 안 다니니까 피해 주지 말고 집에서 아이 돌보라’는 것이다. 보육 지원을 통해 여성고용률을 늘리겠다더니 다시금 집에 있는 여성들에게 육아에 충실하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꼴이다.

그러나 문제는 전업주부들의 이기심이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정부의 보육 지원이 전혀 충분하지 않고, 근본에서 보육을 민간 시장에 맡겨뒀다는 점이다.

정부가 추진해 온 보육 지원은 민간 어린이집에 등록된 아동 수에 따라 보육료를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운영을 민간에 맡겨두다 보니, 보육 교사의 처지가 여전히 열악하고 보육의 질이 나아지지 않았다. 어린이집 측이 각종 특별활동비를 부모들에게 청구해, 진정한 의미의 ‘무상보육’도 아니었다.

민간 어린이집과 가정 어린이집의 초임교사 평균급여는 각각 144만 원, 139만 원에 지나지 않는다(보건복지부, ‘2015년 보육 실태 조사’). 보육 교사들의 처지가 너무 열악하고 보육의 질이 낮다 보니, 늦게까지 어린이집에 아동을 맡기는 맞벌이 부모들이 죄책감을 가지게 되고, 온전히 12시간 보육을 누리지 못해 왔다. 부모와 교사의 갈등도 생기기 쉽다. 이런 이유로 보육 교사들의 노조는 그동안 8시간 노동(5시간 보육 + 3시간 수업 준비)을 가능하게 하는 2교대제 도입을 요구해 왔다.

박근혜 정부는 이런 조건은 개선하려 하지는 않은 채, 오히려 한계가 많았던 지원책조차 축소했다. 이를 위해 맞벌이 가정과 홑벌이 가정 이용자들끼리 다투도록 부추기고 있다.

정부가 기업주들을 지원하고 사드(THAAD) 따위를 구입하는 데 돈을 쓰는 대신, 국공립 보육시설 대폭 확충, 정부의 시설 직접 운영·보육교사 직고용과 임금인상 등 국가가 책임지고 질 좋은 보육서비스를 제공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을 확립하는 데 돈을 쓰도록 요구해야 한다. 

입력 2016-07-07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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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오어 방한 특집

섹슈얼리티와 투쟁

주디스 오어

△주디스 오어 

어떤 사람들은 진정한 성 해방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데, 이는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뒤틀린 성 관념은 허공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런 관념은 계급사회의 일부인 차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섹스는 인간에 고유한 본성의 일부이다. 섹스는 누구와 어떻게 하든 즐길 수 있어야 하고, 우리 삶의 긍정적 요소가 돼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섹스는 뒤틀리고 소외된 것이 됐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가 여성에게 떠맡기는 역할 때문에 섹슈얼리티는 중요한 전장이 된다.

여성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사람으로서 가족 안에서 핵심 구실을 한다. 지배계급은 가족을 이용해 현 상태를 존속시키려 한다. 그래서 가족에 대한 문제제기는 위협으로 여겨진다. 바로 이 때문에 성소수자들이 차별을 당한다. 또, 바로 그 때문에 특히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매우 엄격한 감시를 받는다.

이에 맞선 투쟁들이 있었고, 그 투쟁들은 성적 개방과 자유를 확대해 왔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그 성과들도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뒤틀린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그 어느 때보다 노골적인 방식으로 대상화되고 있다. 여자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여성이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성취는 성적 매력이라고 배운다. 여성은 자기 몸을 째고 깎아서라도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몸매를 가져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받는다.

△자본주의에서의 성 상품화는 여성 몸의 이미지를 왜곡시켜 평범한 여성들이 도달하기 어려운 외모를 이상화하고 여성들에게 강요한다. ⓒ출처 grubby mittz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과 급진적 운동들은 성 해방을 이루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 줬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많은 여성들은 여성해방 운동에 참가했다. 그 여성들은 앞 세대 여성과 남성들이 쟁취하기 위해 싸웠던 사상 ─ 스탈린주의의 악영향 하에 짓눌려 있던 ─ 을 재발견했다.

역사학자 쉴러 로보섬은 19세기 영국과 미국에서 성 해방을 위해 분투한 여성들의 가슴 떨리는 투쟁에 대해 썼다.

그 여성들은 여성을 수동적인 남성 성욕 배출 대상으로 보는 인식에 맞섰다. 그 여성들은 남편이 아닌 상대들과도 성관계를 맺고, “합리적 의상”[꼭 끼는 코르셋을 배제하고 자전거 타기 등에 적합한 활동적 옷]을 입었다. 어떤 여성들은 다른 여성과의 사랑 속에서 행복을 발견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혁명가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운동의 일부로 조직했다.

그런 혁명가들 중에는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독일의 클라라 체트킨이 있다. 콜론타이와 체트킨은 여성 대중이 해방되려면 여성 차별이 뿌리 내리고 있는 물질적 토대를 분쇄해야 한다고 봤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뒤의 급선무는 반혁명을 물리치고 궁핍한 대중에게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은 짧았을지언정 새 생활방식을 실험하는 무대이기도 했다. 여성들의 삶이 빠르게 달라졌다.

혁명 전에는 농민 가정에서 남편이 부인에게 채찍질하는 것이 합법이었다. 그러나 혁명 뒤에는 결혼과 이혼이 마음만 먹으면 곧바로 할 수 있는 일이 됐다. 낙태가 합법화됐다.

콜론타이는 이렇게 말했다. “섹스는 부끄럽거나 죄스러운 일이어서는 안 된다. 섹스는 건강한 유기체의 다른 필요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일이어야 한다.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고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이 말이다.” 보육시설과 공공식당이 문을 열어 개별 가족이 짊어지던 부담을 일부 가져갔다.

혁명이 패배하자 여성은 다시 사사화(私事化)된 가정으로 떠밀렸다. 섹스는 즐거움이 아니라 다시 출산을 위한 행위가 됐다.

여성들이 오래된 낡은 성관념에 문제를 제기한 것은 혁명 때만이 아니다. 역사의 모든 시기에 그랬다.

양차대전이라는 사회적 격변은 여성의 삶을 크게 바꿨다. 그전에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일자리를 여성도 가질 수 있게 됐다. 일자리를 갖게 된 여성들은 금전적으로 독립하게 됐고 또 다른 변화의 가능성도 느끼게 됐다.

양차대전 사이 동안, 혼인 관계에 있지 않은 상대와 섹스하는 사람이 급증했는데, 종전 후에도 그 비율은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1945년 태어난 아이의 3분의 1이 비혼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었다. 섹스와 피임에 관한 책자와 정보를 공공연히 이용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많은 기혼 여성에게 섹스는 해마다 임신하고 출산하는 일이었다. 구술사 서적에는 자녀를 많이 둔 노동계급 여성이 “이제 남편이 너무 자주 괴롭히지 않아서 안심”이라고 말하는 대목들이 기록돼 있다.

비혼모는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았다. 그 여성들은 자녀를 “아비 없는” 자식 만들지 말고 입양 보내서 자신의 “망측한” 성행위를 숨기라는 압박을 받았다.

1960년대 말 여성 대중은 믿을 만한 피임 도구를 이용하고 안전한 낙태 시술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는 획기적 진보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들은 원치 않는 임신 걱정 없이 섹스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여성운동과 동성애자 운동의 부상은 사람들이 또 다른 기대를 품었음을 보여 줬다. 성 해방을 위한 투쟁은 제국주의, 빈곤, 인종차별에 맞선 투쟁의 일부가 됐다.

이 투쟁들이 힘겹게 권리를 성취한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그 권리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성 해방을 이루려면 차별에 의존하는 시스템을 제거해야 한다.

대중적 항쟁이 벌어지면 제 아무리 뿌리 깊은 편견이어도 도전을 받는다. 혁명가 칼 마르크스는 체제를 타도하려면 혁명적 투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노동계급 자신이 “오래된 오물을 털어 내고 새 사회를 건설하기에 적합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도 혁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즉, 진정한 해방을 이루려면 보통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투쟁은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자신감과 창의성을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만들 잠재력이 있다.

이런 변화는 사람들이 무슨 옷을 입고 무슨 글을 읽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생활방식 문제도 아니다. 차별은 사람들의 머릿속이 아니라 사회의 물질적 조건에 뿌리 내리고 있다. 마르크스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해방은 역사적 행위이지 정신적 행위가 아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회주의자는 지령을 내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사회주의자는 인생을 살고 사람을 사랑하는 데서 단 하나의 이상적 방식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사람들이 정말로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게 되면, 여러 가지 많은 관계가 생겨나 발전할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모두 복합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차별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입력 2016-07-16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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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살인 피의자 검찰 기소

빈곤과 소외를 낳는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야 한다

이현주

검찰이 ‘강남역 살인 사건’ 피의자를 살인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이 범죄를 조현병에 의한 범행으로 결론내렸다.

이 사건이 ‘여성혐오 범죄’인지를 두고 논란이 많았다. ‘여성혐오 범죄’라고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성이 차별받는 현실을 알리고자 하는 마음이 컸을 것이다. 여성이 무고하게 희생돼서는 안 된다는 마음도 정당하다.

살인 피의자가 범행 당시 여성에 대한 큰 반감이나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이런 반감은 피해망상의 영향을 크게 받아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라고 보는 주장은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가 피의자의 행동에 핵심적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그러나 이렇게 보면, ‘무시당해서, 담배꽁초가 신발에 맞아서 기분 나쁘다고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죽인 일’이 일반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여성을 멸시하는 남자들이 많아도,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일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주장이 경찰·검찰의 범죄 분석·진단에 동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경찰·검찰은 무차별 살인 범죄를 순전히 가해자 개인의 문제로만 본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무차별 범죄에는 개인의 책임이 분명히 있지만 그 근저에는 자본주의 하의 소외가 있다고 본다.

피의자가 처했던 조건과 상태를 살펴보면, 가난한 배경에 변변한 직업도 가진 적이 없고 가족·친구 관계도 단절돼 있었으므로, 깊은 패배감과 두려움에 차 있었으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무차별 범죄를 저지른 자들한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성이다. 이런 두려움은 피해망상과 같은 심리적 불안정으로 발전할 수 있고, 특정한 계기나 요인이 결합되면 통제할 수 없는 분노로 폭발할 수 있다.(소외와 관련해서는 본지 177호 김승주, ‘마르크스주의와 소외’를 보시오.)

즉, 피의자는 자본주의 소외의 영향으로 느낀 무력감을 자신보다 만만해 보이는 이에게 분노를 폭발시킴으로써 만회하려는 흔한 유형이었을 것이다.

이런 분석은 이 사건을 ‘여성혐오’ 심리로 분석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인 점을 건드린다. 자본주의가 낳는 빈곤과 소외가 인간성을 파괴하고 이따금 끔찍한 살인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점 말이다. 따라서 빈곤과 소외를 낳는 체제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혐오 범죄는 더 심각하게 다뤄져야

혐오 범죄는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이나 적대감이 주된 동기로 작용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범행 당시 여성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해서 곧 ‘여성혐오’ 범죄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증오 범죄를 연구해 온 연구자들도 ‘여성혐오’에 대한 심각성을 공감한다면서도 “범죄학적, 형사법적으로 봤을 때 강남역 사건이 증오범죄가 아닐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숙명여대 법학과 홍성수 교수).

강남역 살인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번 사건이 이런 혐오범죄 규정을 충족시킨다고 주장하기보다는 ‘여성혐오’를 매우 느슨하게 규정하고서 ‘여성혐오’ 범죄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혐오’를 느슨하게 규정하면 혐오 범죄의 뚜렷한 특성은 사라진다. 여성 차별 의식에 근거한 잘못된 행위는 무엇이든 혐오 범죄가 될 수 있다. 혐오 개념을 느슨하게 사용하면서 혐오 범죄에 대한 가중처벌을 주장하면, 국가가 형벌권을 강화하는 데 악용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진정한 혐오 범죄는 훨씬 심각하게 다뤄져야 한다. 성소수자들이나 무슬림들에 대한 공격에 비춰 보면, 혐오 범죄는 특정 집단을 사회악이라고 보며 공동체에서 추방하고자 하는 매우 목적의식적인 공격 행위다.

범죄를 집단의 속성으로 돌리는 접근법의 위험성

여성 차별에 맞서기 위해 반드시 이번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라고 규정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로 보는 견해는 자본주의 체제라는 물질적 구조가 아니라 ‘여성을 혐오·억압하는 남성 집단’의 문제가 드러난 것으로 본다.

그런데 개인이 저지른 범죄를 집단의 속성에서 비롯한 것으로 치환하는 것은 위험하다. 자본주의 지배자들의 거짓 선동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 올랜도 대학살 직후 오바마는 무슬림이 모두 동성애 혐오 집단인 양 편견을 부추겼다. 올해 초 독일 쾰른에서 끔찍한 성범죄 사건이 벌어졌을 때 독일 우익들은 이주민들을 싸잡아 비난했다. 범죄자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해서 정신질환자 전체가 범죄자로 취급받아선 안 된다는 논리는 남성 집단에 대해서도 일관되게 적용돼야 한다.

선정주의적 언론들이 주목하지 않는 사회의 다른 측면도 봐야 한다. 남성의 다수는 흉악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의 성차별 관념을 가지고 있을지언정 살인과 폭력으로 희생된 여성들에게 연민을 보낸다는 것이다.

여성의 죽음을 조롱하는 ‘일베’ 따위가 다수 남성의 의식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강남역 살인은 너무 당연한 일이어서 뉴스거리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분노의 배경: 모순된 현실

최근 몇 년간 차별에 대한 여성들의 분노가 커진 것은 여성에 대한 전에 없는 차별과 혐오가 생겨났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오늘날 여성들은 전의 어느 때보다 많이 대학에 진학하고 노동자가 된다. 오늘날 젊은 여성들은 남자 형제를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라지 않는다.

바로 이를 배경으로 전의 어느 때보다 젊은 여성들의 자의식과 기대감이 커졌다. 결혼 연령이 갈수록 상승하고 있는 점은 이를 보여 주는 한 지표다. 여성들이 아이를 적게 낳는 것은 경제적 요인이 크지만 자의식의 성장과도 관련 있다. 여성도 성적 주체(대상이 아니라)라는 인식도 갈수록 커져 왔다.

그러나 사회에 나온 여성들은 대부분 이내 큰 벽에 부딪힌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자본주의 노동인구의 일부가 됐음에도 여전히 차별받는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주된 책임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라고 여겨진다. 지속되는 경제 위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더욱 여성들의 부담을 덜려 하지 않고, 오히려 더한층의 희생을 강요하려 한다.

즉, 사회 진출로 여성의 상대적 지위가 상승하고 자의식이 전의 어느 때보다 높아졌지만, 차별 구조와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존재하는 모순된 현실이 젊은 여성들의 분노를 키운 배경이다. 기존에 없던 차별과 혐오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다. 여성 차별은 여전히 뿌리깊지만,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심각하게 후퇴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 여성 노동자들의 힘은 전에 없이 커졌다.

해방의 전략: 남성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겨냥해야 한다

차별받는 현실에 대한 여성들의 분노는 매우 커졌지만, 노동계급의 투쟁 수준은 충분히 높지 않다. 이로 말미암아, 노동계급의 단결을 통한 체제 변혁 사상보다는 피착취자의 일부도 문제의 원인으로 보는 단편적 관점이 더 쉽게 호응을 얻는 듯하다. 남성을 여성의 적으로 간주하고, 여성차별을 경험하지 않은 이들(즉 남성들)에게 도덕주의적 잣대를 들이대는 정서가 적지 않다.

이는 차별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의 한 표현이겠지만, 잘못된 표현이고, 여성 차별에 맞선 투쟁의 동맹을 설득할 가능성을 기각해 버리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남성들은 여성 차별에 맞선 투쟁의 중요한 일부였다. 가령 2000년대 이후 벌어진 대단했던 여성 노동자 투쟁들 ─ 이랜드 노동자, 대학 청소노동자, 학교비정규직 노동자 등 ─ 은 다수 남성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여성이 다수인 전교조나 보건·의료 관련 노조 소속 노동자들의 투쟁도 여성과 남성 모두의 지지를 얻었다. 노동운동 속에서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들은 계급적 정체성을 키워 왔다.

△노동운동 속에서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들은 계급적 정체성을 키워 왔다. 5월 28일 열린 전교조 주최 전국교사대회. ⓒ이미진

이런 투쟁들은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사회적 힘을 가진 존재임을 자각하게 도와 준다. 그리고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들에 대한 기존의 상식을 돌아보게 하는 효과를 낸다. 이런 효과는 전반적 계급투쟁 수준이 낮을 때에도 어느 정도 존재하고, 투쟁이 승리하거나 계급투쟁 수준이 높아졌을 때는 더욱 두드러진다. 오랫동안 받아들여 온 차별 관념은 투쟁 속에서 바뀔 수 있다.

여성 차별을 없애려면 여성 차별을 유지함으로써 득을 보는 자본주의에 맞서야 한다. 여기에 가장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무기는 계급투쟁이다.

계급과 계급투쟁을 무시하면 개혁을 성취하는 데서도 뚜렷한 한계가 있다. 당장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개혁’이나 민영화, 시간제 일자리 확대와 같은 시장 지향 정책들을 막으려면 남녀 노동계급의 힘을 동원해야 한다. ‘노동개혁’과 민영화, 시간제 일자리 확대는 평범한 여성 다수의 삶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성 적대가 사회의 근본 분열이라고 보는 ‘양성 분리적 여성주의’는 남성과 여성의 단결이 필요하고 가능한 영역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대립’하는 영역에 주목해 왔다. 그러나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무시하면, 이런 문제도 해결하기 어렵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낳는 여러 요인들 ─ 여성 차별, 가족제도, 성별 고정관념, 소외 ─ 도 체제의 문제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여성 차별의 증상을 완화하고 나아가 완전한 해방을 이루려면 여성 차별 반대 운동은 자본주의에 맞선 남녀 노동계급의 투쟁을 중심에 둬야 한다.

입력 2016-07-16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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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오어 방한 특집

여성 차별에 어떻게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까?

주디스 오어

△주디스 오어

여성들은 성 상품화나 남녀 임금 격차처럼 삶의 온갖 측면에서 차별을 겪는다. 2013년에 발간된 <성과 권력>이라는 보고서는 영국 정치권에서 여성 대표자의 비율이 되레 줄고 있다고 밝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여성들의 지위가 낮은 것에 정당하게 분노하며 이런 현실을 바꾸고 싶어 한다. 그리고 정치 행동에 참여하면서 흔히 페미니즘 사상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사회주의자는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한다. 우리는 낙태권을 지키고, 평등한 임금을 요구하고, 제도적 차별을 없애기 위한 운동을 함께 건설한다. 그러는 동시에 사회주의자들은 차별을 계급으로 환원해서는 안 되지만 여성 차별은 계급사회의 출현과 가족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래 전부터 페미니즘에는 아주 다양한 정치 경향이 섞여 있었다. 그럼에도 페미니즘은 사회의 근본 분단선이 계급으로 나뉜다는 견해에 반대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남성과 여성으로 나눠 사회를 이해하는 것을 가장 중시한다.

여성 차별과 관련해 새롭게 제기되는 쟁점도 있지만 과거에 제기된 주장이 반복되는 경우도 많다. 예컨대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차별이 남성과 맺는 개인적 관계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한다. 또, 남성이 여성 차별로 득을 본다고도 주장한다.

또 다른 페미니스트들은 남성과 여성의 단결이 장기적으로는 바람직하다고 보지만, 남성이 여성 차별로 득을 보므로(여성이 집안일을 더 많이 맡는 등) 단기적으로는 차별을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여성 차별 등 성차별은 노동자들을 서로 대립하게 만들어 노동계급을 약화시킨다. 그러면 지배자들이 평범한 사람들(남녀 불문) 전체를 공격하는 것이 수월해진다. 그 공격의 효과가 단기적인 것일지라도 말이다.

상이한 계급사회에서 가족제도가 한 구실을 보는 것도 중요하다. [자본주의에서] 가족제도는 개별 남성들이 아니라 자본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가족제도 덕분에 지배계급은 다음 세대 노동자를 재생산하는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다. 지배자들이 가족제도를 유지하는 데 공을 들이는 이유다.

가족의 형태는 변하지만 가족을 둘러싼 이데올로기나 가족이 수행하는 경제적 구실은 변치 않는다. 전 영국 총리 캐머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장 좋은 복지제도의 이름이 뭔지 아십니까? 바로 가족입니다.”

지배자들은 노동계급이 성별과 무관하게 모두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한다. 오히려 노동자들이 현 체제의 유지가 자신들에게도 이롭다고 생각하길 바란다.

지배자들은 남성이 체제 덕택에 득을 본다는 생각을 부추기고, 그 결과 일부 노동계급 남성은 여성 차별이 자신에게 득이 된다고 여긴다.

의식

그러나 일부 남성 노동자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과 실제 현실이 그렇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썼듯이 “만약 사물의 현상과 본질이 일치한다면 과학은 불필요할 것이다.”

노동계급 남성의 객관적인 이익은 노동계급 여성과 단결해서 지배자들의 공격을 물리치고 더 나은 세계를 위해 투쟁하는 데 있다.

체제가 아니라 개별 남성의 태도 문제에 치중하는 것은 여성 차별의 근원이 남성 권력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모든 남성이 여성에게 권력을 행사한다.

통칭 ‘가부장제’ 이론으로 불리는 이 관점은 사회의 겉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나 여성 차별이 어디에서 비롯했고, 그 본질은 무엇이고, 자본이 여성 차별로 어떻게 득을 보는지를 이해하는 데서는 도움이 못 된다.

가부장제 이론의 관점은 노동계급 내 파편화를 더욱 부추기고, 여성 차별을 인류 역사의 변치 않는 특징으로 본다. 그러면 변화의 가능성도 없어지게 된다.

여성 차별을 ‘특권 이론’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빠지는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특권 이론은 새로운 것이 아님에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차별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여겨진다. 특권 이론의 기본 출발점은 누군가가 예컨대 백인이거나 남성이라면 사회의 “지배적” 부문에 속함으로써 특권을 누린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노동계급 백인 남성은 백인이고 남성이므로 특권을 누린다. 이런 식으로 보면 체계적 불평등과 차별을 개인 관계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환원시키고 사회 구조의 문제를 놓치게 된다.

또, 차별로 특권을 누린다는 그 사람들을 문제의 일부로만 여길 뿐, 그 사람들과 함께 문제 해결에 나설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백인이나 남성이나 이성애자는 차별에 맞서는 투쟁에 동참하기 어렵다고 보며 중시하지 않는다.

특권 이론의 논리에 따르면, 백인 남성은 모두 이해관계가 같으므로 여성은 그들과 따로 조직돼야 하고, 마찬가지로 흑인 여성도 따로 조직돼야 한다. 그러나 노동계급을 각종 차별 형태에 따라 끝없이 잘게 쪼개는 것은 노동계급의 집단적 힘을 약화시킬 뿐이다.

최대한 강하게

우리의 힘을 최대한 키운 상태에서 지배자들과 싸워야 한다. 그리고 차별에 반대하는 것은 우리 편을 더 강하게 만든다. 사회주의자는 어디서든 성차별에 반대한다. 어떤 차별이든 지배자들이 우리를 분열시키는 데 이용되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회주의자들은) 민중의 호민관이 돼 각종 전횡과 차별이 민중의 어느 계급이나 계층을 겨냥하든, 또 그런 전횡과 차별이 어디서 벌어지든 그에 맞서 싸워야 한다.”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그러나 사회를 나누는 결정적 기준은 계급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소득이나 직업에 따라 계급이 나뉜다고 보지 않는다. 노동력을 파는 사람과 노동이 만든 잉여가치로 이윤을 취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로 계급을 나눈다.

이처럼 이윤을 위해 착취당한다는 점 때문에 노동자들은 체제의 핵심이 된다. 여성과 남성이 함께할 때, 노동자들의 집단적 힘은 체제를 개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체제 자체에도 도전할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 투쟁은 사라지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계급의식 수준이 높든 낮든 행동에 나서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린다.

투쟁에 나설 때 노동자들은 자신의 힘을 느낄 수 있고, 사장들에 맞서 모두 같은 이해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보게 된다. 노동자들이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 잠재력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노동계급이 여성을 대신해서 투쟁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여성 대중이 노동계급으로서 자신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바로 그 힘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

 
 

입력 2016-07-16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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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노조 주최의 정희진 씨 강연에 다녀와서

계급, 국가, 제국주의에 대한 종합적 이해가 많이 아쉬웠던 강연

독자편지 | 송조은 (노동자연대 학생 회원)

7월 12일, 알바노조가 ‘언어가 성별을 만든다’는 주제로 여성학자 정희진 씨 초청 강연을 열었다. 나는 정희진 씨가 《페미니즘의 도전》 등 스테디셀러의 저자이자 지금도 기고와 강연을 활발히 하고 있는 저명한 여성학자라서 어떤 내용으로 강의할지 기대하며 참가했다. 연사인 정희진 씨와 페미니즘에 대한 청년 학생들의 높은 관심 때문인지 참가자가 많았다.

정희진 씨는 식민지 국가와 피식민지 국가의 말이 다른 것처럼 남성과 여성이 쓰는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여성의 언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강남역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사실상 여성혐오 살인인데 경찰이 ‘묻지마 범죄’라고 결론 내렸다며 비판했다.

비록 나는 이런 쟁점들에 대해 정희진 씨의 주장에 이견이 있고 <노동자 연대>의 주장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여성주의 언어와 여성주의 인식론, 강남역 살인 사건의 진정한 성격과 원인 등은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서로 진지하게 토론해 볼 만한 쟁점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날 강연에서는 이런 쟁점들이 충분한 근거를 통해 다뤄지기보다는, 여성차별과 자본주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사람으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연사의 우려스러운 주장들이 있었다.

사드와 국정 교과서 문제

이날 연사의 주장 중 사드에 대한 발언은 다소 충격적이어서 내 귀를 의심케 할 정도였다. 정희진 씨는 “사드가 우리 땅에 있으면 그것의 문제는 그 자체가 아니라 이것을 누가 운영할 수 있는 가에 달린 것”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은 “사드가 우리나라에 배치됐으니까 우리 거다. 우리는 군 작전권만 갖고 오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심지어 “[사드로] 제가 싫어하는 모든 사람 싹 모아놓고 … ”라며 쏘고 싶다는 식으로도 얘기했는데, 농담식으로라도 이런 식의 얘기는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적어도 “반군사주의자”, “평화학 연구자”라고 주장하는 분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사드 배치 반대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 할 말은 더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드가 한반도에 배치되면 동아시아는 지금보다 훨씬 더 지정학적 불안정의 소용돌이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사드는 누구의 통제 하에 있든 노동자와 피억압 대중(당연히 여기에는 인구의 절반인 여성도 포함된다)에게 해롭다. 사드 배치는 미국의 세계 패권 전략과 떼놓고 설명할 수 없고, 박근혜 정부가 남한 민중운동과 중국 지배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결국 사드 배치에 합의한 것은 미 제국주의에 편승해 성장하려는 남한 자본주의 국가 지배자들의 의식적 전략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박근혜가 미국에 맞서 ‘자주적으로’ 사드 통제권을 빼앗아 오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환상에 기초한 바람일 뿐이다.

정희진 씨는 ‘국정화 교과서에도 찬성한다. 대신 그 교과서는 내가 만들어야 된다’고도 했다. 물론, 정희진 씨가 교과서를 쓴다면 우익 역사학자들이 만드는 교과서보다야 나을 것이다. 하지만 남한의 지배자들이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부친 건 노동자 민중의 투쟁의 기억을 지우고, 경제 위기 시기에 노동계급을 공격할 이데올로기를 공고화하기 위한 것이지 정희진 씨 같은 여성학자나 진보진영에게 교과서 쓸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지배계급이 의식적으로 밀어붙이는 공격의 맥락을 보지 않고, 우리 편에 유리하게 그 내용에 개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공상적인 까닭이다.

사드와 국정 교과서에 대한 정희진 씨의 주장을 들으면서, 나는 정희진 씨가 자본주의 국가의 계급적 본질을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았다. 자본주의 국가는 페미니스트들이 그 일부로 편입돼 평등하고 평화롭게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근혜 정부 같은 우파 정권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여성주의자들은 대체로 계급보다 성별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계급과 자본주의 국가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해야만 여성 대중의 처지를 개선하는 운동의 전략도 더 잘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정희진 씨는 강연 중에 “정규직[이] 더 이상 없”고, 또한 “제가 바라는 세상은 모든 사람이 정규직이 되는 세상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모두가 전일제 노동자로 살 필요 없이 네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는 여가를 즐기거나 자기계발에 투자하는 ‘네 시간 체제’가 바람직하다고도 주장했다. 전반적으로 노동자들의 정규직화 요구가 정규직만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게 해 시대에 걸맞지 않는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우선, 정규직이 사라지고 있다는 주장은 과장이다. 21세기 자본주의에서도 여전히 안정적인 숙련 노동자에 의존해 이윤을 창출하려는 자본가들의 필요는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 노동자들의 절반 이상이 여전히 정규직이고, 비정규직이라 할지라도 오랜 기간 계약을 갱신하며 상용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이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무엇보다, 극도의 비관론에 기초한 것이었을지라도 나 자신이 저임금 알바로 생활비를 벌충하는 학생으로서 정규직화 요구가 굳이 필요 없다는 주장은 요즘 청년들의 염원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됐다.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정규직화 요구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염원에도 공명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물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폐지된 미래 사회의 비전을 얘기하면서, 현재의 생산력 발달 수준으로도 모든 사람들이 굳이 지금처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릴 필요 없이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대신 모든 사람이 문화, 예술, 과학 등을 누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나도 그런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자가 됐다. 하지만 이런 사회는 자본주의와 공존할 수 없고, 자본주의가 폐지된 이후에야 가능한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노동자들이 더 안정적인 일자리와 더 충분한 임금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정당함을 주장하고, 이런 투쟁들을 고무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남성에 대한 근거 없는 과도 일반화

정희진 씨는 강연에서 “남성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고, [가해자-피해자 위치는 고착된 것이 아니므로] “남자라고 해도 남성 페미니스트로 이동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이 주장에 공감한다. 그런데 정희진 씨가 평상시에 남성을 가해자로 지목하고, 심지어 “잠재적”이라는 수식어조차 떼야 한다고 최근까지도 주장(<한겨레 신문> 칼럼 ‘잠재적 가해자?’, 5월 27일)했던 걸 보면 심각한 모순이 느껴져 의아하긴 했다.

정희진 씨는 이날 강연에서도 “강간 안 하는 남성은 없다”, “한국 남성들은 성 차별적인 사회를 인정하지 않고, 말이 안 통하니까 한국 남성들과는 말을 섞지 말아야 한다”, “한국 남성들은 (가정폭력으로) 공포의 상징이니까 해외 나가지 말아라” 등의 주장을 함으로써 사실상 남성 집단을 동질적인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이것은 앞의 말과는 모순으로 느껴졌다. 

물론 남성들 중엔 차별적인 사상을 크든 작든 받아들이거나 여성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전체 남성의 태도라고 비약해선 안 되고, 이런 의식이 영원불변할 거라고 전제해서도 안 된다. 남성이 여성 차별에 책임이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논쟁할 수 있지만, 적어도 너무 명백한 현실을 왜곡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남성 중에 강간을 하는 남성은 극소수일뿐 모든 남성이 강간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모든 한국 남성들이 성차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당장 이날 여성차별에 관심을 갖고 정희진 씨의 강연을 들으러 온 남성들이 적어도 참가자의 3분의 1은 됐다. 

또한 이렇게 모든 남성들을 여성 차별의 억압의 근원으로 보면 개별 남성들을 적으로 돌리게 돼, 가사와 육아를 평범한 여성들에게 떠넘기고 여성들을 저임금으로 착취함으로써 여성 차별을 체계적으로 조장하고 그로부터 진정한 이득을 얻는 자본가들과 자본주의 국가에 제대로 과녁을 겨누기 어렵게 된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곡해

한편, 정희진 씨는 마르크스주의를 언급하면서 “역사와 지식은 백인 남성의 것이고, 백인 남성들만이 마르크스주의자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젠더 경험도, 인종 개념도 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터무니없는 왜곡이다.

우선, 마르크스주의는 백인 남성의 전유물이 결코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여성이면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로자 룩셈부르크, 클라라 체트킨,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같은 사람들만 보더라도 그렇다. 로자와 클라라는 독일 혁명의 파도 속에서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고, 콜론타이는 혁명 러시아의 여성부인 제노텔에서 활약했다. 그 후로도 여러 여성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변화된 자본주의의 현실 위에서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분석을 발전시켜 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여성 마르크스주의자이고, 마르크스주의 단체인 노동자연대에서는 여성들이 단체 활동의 각 분야에서 주도적 구실을 하고 있다.

또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언제나 국제주의적이었고 노동계급의 국제적 단결을 도모했기에 백인만의 전유물도 아니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가 백인의 전유물이었다는 주장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에서 국가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유색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젠더와 인종을 무시한다는 것도 심각한 곡해다. 오히려 엥겔스는 현대 여성해방운동이 탄생하기도 전인 19세기 말에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여성 억압의 기원을 밝히고자 했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여성 억압이 영원불변한 게 아니라고 주장하며 여성 해방의 전망을 발전시켰다. 러시아 혁명을 이끈 레닌과 트로츠키를 비롯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도 여성 해방은 사회주의 혁명이 추구하는 해방된 사회에 필수적으로 포함되는 요소였다. 그들에게 혁명은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이었으므로, 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불참하거나 여성이 해방되지 않는 혁명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하다고 봤다.

또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제나 그 시대의 민족과 인종 억압 문제를 중시하며 분석했고, 그 억압에 반대하는 활동을 해 왔다. 마르크스와 레닌 등이 그랬을 뿐 아니라, 오늘날 서구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단체들은 무슬림 혐오와 이주자 억압에 맞선 투쟁에서 주도적인 구실을 하고 있다. 

정희진 씨는 마르크스주의를 백인 남성의 것으로 치부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인도의 농사짓는 여성은 해방되려면 농사 이전에 공장부터 지어야 된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 역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희화화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서 산업화로 형성된 대규모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의 무덤을 팔 핵심 주체라고 보고, 여성 노동자들도 바로 이 주체에 포함된다고 본다. 하지만 노동계급이 착취 상태에 놓이는 것 자체가 해방을 가져다 준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착취에 맞서 싸울 때만이 계급 의식이 발전하고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객관적 잠재력이 노동계급에게 존재한다는 것이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이다.

역사 자체가 백인 남성의 것이라는 주장에도 이견이 있다. 정희진 씨는 유색인과 여성의 역사가 종종 무시된다는 점을 비판하고자 이렇게 주장한 듯하다. 물론, 지배자들은 피억압자와 피착취자들의 투쟁의 역사는 삭제하거나 왜곡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우리가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역사는 매우 제한적이거나 지배계급 편향적이다. 하지만 정희진 씨는 역사 서술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말하지 않은 채 지배계급이건 마르크스주의자들이건 남성들이 쓴 역사는 다 문제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듯하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유물론에 기초한 역사 서술에서 흑인과 제3세계 민중, 그리고 여성 (특히, 노동계급 여성)은 역사 발전의 원동력에서 중요한 일부로 다뤄져 왔다(대표적으로 작고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혁명가 토니 클리프가 쓴 《여성 해방과 혁명》, 크리스 하먼이 쓴 《민중의 세계사》가 있다). 이 책들을 통해 파리코뮌 때 바리케이트에서 마지막까지 싸웠던 수많은 여성들, 파업으로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선두에 섰던 페트로그라드 여성 노동자들 등 여성도 역사 속에서 투쟁에 나서고 혁명의 주체로서 활약한 경험이 수없이 많다는 걸 생생히 알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현대 여성해방 운동의 주요 역사와 1960년대 후반 흑인 공민권 투쟁, 제3세계 민족해방 투쟁 등이 했던 진보적 구실에 대해서도 다뤄왔다. 역사와 지식이 단순히 남성들의 것이었다고 치부하는 건 이러한 점들을 의도치 않게 무시하게 될 수 있다.

맺으며

정희진 씨의 강연이 여러 주장들을 다소 정리되지 않은 채로 펼쳐 놓는 식이어서 내가 오해한 게 있을지도 모르지만 몇몇 메시지들은 그래도 분명하게 전달됐고, 위와 같은 이유에서 정희진 씨의 강연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강연이었다. 이 강연을 주최한 알바노조는 정희진 씨의 강연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보아 넘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드 배치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알바노조 박정훈 위원장과 알바노조를 건설한 청년좌파 경향의 활동가 여러 명이 평화주의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택해 온 역사가 있지 않은가?

또한 알바노조 동지들이 좌파 운동의 일부로서 과도한 양성 분리주의적 인식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곡해에 대해서도 비판적 문제의식을 갖길 바란다. 남성들을 근거 없이 과도하게 싸잡아 비난하고 야단치는 것은 일부 사람들에겐 통쾌함을 줄지 모르지만, 여성 차별을 없애는 운동을 건설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입력 2016-07-16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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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과 여성차별을 더 악화시킨 시간제 일자리

양효영 (노동자연대 학생그룹 회원)

6월 27일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유일호는 박근혜 정부의 연내 목표였던 고용률 70퍼센트 달성이 물 건너갔다는 비판에 대해 “고용률 70퍼센트 달성 목표 포기한 것 아니다”고 강조했다. 같은 자리에서 고용노동부 장관 이기권은 노동시장 유연화를 시급히 추진해 고용률 70퍼센트를 달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날(28일) 박근혜는 ‘시간선택제 일자리’ 우수기업으로 선정된 기업에 방문해 ‘여성들이 경력단절 때문에 직장에 복귀하기 어려운 현실이 없게 하겠다’고 밝혔다. 시간제 일자리를 더 많이 늘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통계들은 정부의 시간제 일자리 확대 정책이 저질 일자리만 양산했다는 걸 보여 준다.

저질 일자리

통계청이 2016년 3월 발표한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를 보면 비정규직 노동자는 6백15만 6천 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14만 4천 명이 늘었는데, 시간제와 한시적 노동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시간제 노동자는 전년 동월 대비 13만 1천 명 증가했다.

시간제 노동자 중 대부분이 여성이다. 여성가족부가 6월 28일 발표한 ‘2016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을 보면, 전체 시간제 노동자 중 72퍼센트가 여성이다.

경력 단절된 여성들을 싼 임금 주고 착취하려는 박근혜 정부. ⓒ조승진

그동안 정부는 ‘시간선택제’ 일자리가 근무시간만 짧을 뿐, 정규직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최저임금 이상의 임금 · 국민연금 · 고용보험을 보장받고, 무기계약직인 ‘시간선택제’ 일자리는 전체의 5.9퍼센트밖에 안 되는 것으로 드러났다(신경아 한림대 교수).

그 외 대다수 시간제 일자리는 매우 열악한 저질 일자리다. 고용형태별로 봤을 때 최저임금 미달자 비율은 가정 내 근로를 제외하면 시간제 일자리에서 가장 높다. 전체 노동자 중 최저임금 미만을 받는 노동자는 13.7퍼센트인데, 시간제 노동자 중 최저임금 미달율은 42.4퍼센트에 이른다(2016년 3월 기준). 이는 93만 8천 명에 이르는 규모다. 또한 시간제 노동자 중 55만 9천 명가량은 최저임금의 90~110퍼센트를 받는 것으로 추정된다(김유선, <비정규직 규모와 실태>).

즉, 절반이 넘는 시간제 노동자(67.4퍼센트)가 최저임금 수준 혹은 그 이하를 받는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다.

게다가 시간을 선택할 수 있다는 미사여구와 달리 시간제 노동자들은 계약 시간보다 장시간 일하고, 초과 근무수당도 거의 받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시간제 노동자 중 시간 외 수당을 적용 받는 비율은 9.9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초과 근무수당이 규정에 있지만 지급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상여금·유급휴가 적용 비율도 각각 19퍼센트와 10퍼센트로 매우 낮았다(2016년 3월 기준).

정부는 시간제 일자리가 ‘경력 단절 여성’를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시간제 노동자의 평균 근속기간은 1.6년으로 매우 짧았고 1년 미만이 62.8퍼센트였다. 2015년 8월에 견주면 근속기간은 한 달가량 줄었다.

시간제 노동자는 학력이 고졸 이하에 몰려 있고, 그중 중졸 이하의 비율도 크다. 이는 50~60대 여성이 시간제 일자리로 많이 유입된 것과 관련 있는 듯하다. 즉 여성, 저학력, 노인층 등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어서 열악한 조건을 감수하고 일해야 하는 층이 시간제 일자리로 몰리고, 이 부문의 처지를 더 악화시키고 있음을 보여 준다.

정부는 시간제 일자리가 노후 대책인 양 말하는데, 황당한 일이다. 노인이 돼서도 복지 혜택은 언감생심이고, 골방에서 쓸쓸히 죽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은 한국 사회에서 정부는 노인 복지를 대폭 늘리긴커녕 공적 연금을 깎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제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우리에게 죽을 때까지 저질 일자리에서 일하라는 것이다.

자발적 선택?

이런 열악한 조건 때문에 시간제 일자리는 강요된 선택인 경우가 태반이다. 정부는 자발적 선택이 60퍼센트 이상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진정한 자발성으로 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설문 응답자들이 “본인이 의지적으로 이 일자리에까지 왔다는 의미에서 자발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여성친화형 일자리로서 시간선택제 일자리 정책의 효과와 개선과제>). 오히려 2015년 통계청 조사를 보면 비취업자 1천6백94만 5천 명 중 전일제 일자리가 있어도 시간제 일자리를 택하겠다는 사람은 5퍼센트밖에 안 됐다.

고용노동부는 2015년부터 신규채용만이 아니라 전환형 시간제 일자리를 추진해 왔다. 전환형 시간제 일자리는 출산 · 양육 때문에 잠시 시간제로 전환했다가 일정 기간 후 정규직으로 복귀하는 제도다. 경력 단절과 그로 인한 여성 차별을 개선하겠다는 취지로 도입됐지만 실상은 정규직 일자리를 시간제로 쪼개는 것이다.

또한 현실에서 임신 출산 때문에 전환형 시간제 근무를 하는 여성 노동자들은 자신 때문에 동료의 업무 부담이 과중해지는 것에 눈치를 보게 되고, 마치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미안함을 느껴야 했다. 이 때문에 눈치를 보지 않으려면 남아서 초과 업무를 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게 된다. 또한 실적 경쟁이 중요시되는 직장에서 승진에서 뒤쳐지는 등 인사상 불이익도 여전하다(<여성친화형 일자리로서 시간선택제 일자리 정책의 효과와 개선과제>). 여성 차별을 개선하는 효과는커녕 오히려 여성에게 보육도 전담하면서 고된 노동도 눈칫밥 먹으며 하라는 뜻이다.

또한 시간제로 전환한 후 다시 정규직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보장은 분명치 않다. 정부가 모델로 삼는 독일과 네덜란드의 사례를 보면, 시간제와 파견제 일자리가 정규직 일자리를 대체해 저임금층이 대규모로 늘었다. 독일은 경제 위기 시기에 단기 일자리인 미니잡을 크게 늘렸는데, 경제가 일정 회복된 이후에도 새로 생겨난 일자리 중 80퍼센트 이상이 비정규직이었다. 시간제로 바뀐 일자리가 정규직으로 회복되지 않은 것이다.

또한 네덜란드는 시간제 일자리 증가로 여성들의 조건이 악화돼 차별이 심각해졌다. 여성의 경제적 독립성이 남성보다 상당히 낮고, 이 때문에 여성은 다시 남성의 경제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렸다.

당연히 한국의 노동자들도 이 점을 우려한다. 고용노동부는 6월 말 공공부문을 대상으로 전환형 시간제 수요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 30대 여성의 선호가 높았다고 광고했다. 그러나 총 30만 1천 명가량이 참가한 이 설문조사는 오히려 남녀 막론하고 절반이 넘는 노동자들이 시간제 일자리로 전환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 줬다(15만9천명. 52.8퍼센트). 3년 이내에 임금이 20퍼센트 이상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고 시간제 일자리로 전환하고 싶다는 노동자는 전체 설문자의 4.1퍼센트에 그쳤다.

경제 위기, 노동유연화, 시간제 일자리

그런데도 고용노동부는 이런 저질 일자리를 확산하는 데 예산을 쏟고 있다. 시간선택제 신규창출 지원사업 예산은 2013년 91억 원에서 올해 4백2억 원으로 급증했다. 정부는 민간부문에는 무기계약직 및 최저임금 1백30퍼센트 이상을 지급하는 시간제 일자리 창출 기업에는 인건비의 50퍼센트를 1년간 지원하고 있다.

이렇게 노동부가 돈을 퍼부어서 지원하는 시간제 일자리 상황은 어떨까. 정부는 공공부문부터 시간제 일자리를 빠르게 늘려 왔다. 전국공무원노조 정책연구원의 심층면접 조사에 따르면 시간제 공무원은 8시간짜리 노동을 4시간 안에 “구겨 넣기” 할 정도로 고강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복지와 임금에서 차별은 여전하다.

민간부문 시간제 일자리도 열악하긴 마찬가지다. 정부의 시간제 일자리 정책에 호응했던 10대 대기업에서 비정규직 일자리는 무기계약직조차 드물고 대부분 단기간 계약직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이 때문에 무기계약직 전환을 회피하고자 시간제 노동자 해고 문제도 벌어지고 있다.

이마트의 경우 정부의 시간제 일자리 정책에 호응하면서 2012년 15명이었던 시간제 노동자를 3천60명으로 대폭 늘려 왔다. 이마트는 시간제 노동자를 모집하면서 정규직과 동일한 처우를 받는다고 홍보했지만 풀타임 정규직에 비해 급여, 병가, 복지에서 모두 차별을 받고 있다. 최근 이마트가 2년 동안 근무한 시간제 노동자들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지 않으려 해고 통보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

기재부 장관 유일호와 고용노동부 장관 이기권은 브렉시트 등 예상치 못한 세계경제의 하방 압력으로 고용률 달성이 어려워졌다고 했다. 저들이 대외적 불확실성에 대비해 더욱 빠르게 노동유연화와 시간제 일자리 확대에 매달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시간제 일자리는 여성, 청년, 노인의 삶을 나아지게 할 수 없다. 시간제 일자리 확대에 들어갈 돈으로 제대로 된 국공립보육시설의 확충과 유급 · 육아 출산 휴가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또한 국가는 책임지고 공공부문의 질 좋은 일자리를 확충해야 한다. 그러려면 시간제 일자리를 확대하며 기존 일자리를 공격하는 정부의 시도에 반대하고 투쟁해야 한다.

입력 2016-07-16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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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평생교육 단과대학 신설 문제

이화여대 재단은 ‘학위 장사’ 계획 철회하고 제대로 된 교육 기회 제공하라

김승주 (이화여대 학생, 노동자연대 학생그룹 회원)

이화여대 당국의 평생교육 단과대학(‘미래라이프 대학’) 신설 계획이 학생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무려 학생 3백여 명의 학생들이 학교 당국의 일방적 결정에 분노해 7월 28일부터 학교 본관을 점거했다.

평생교육 단과대학 지원사업은 박근혜 정부의 ‘교육개혁’ 가운데 ‘선취업 후진학’ 활성화 정책과 연결된 사업이다. 정부는 해당 사업에 선정된 학교들에게 수십억 원을 지급하고 ‘후진학’의 모범 사례를 만들려 한다. 그럼으로써 실업계 고졸 출신 노동력 인구를 노동시장으로 더 빨리, 더 많이 끌어들이려(‘선취업’) 한다. 고등교육 이수 기간이 늘어나면 결혼 연령이 높아지고 출산율이 낮아진다며 내놓은 ‘저출산 대책’이기도 하다. 정부는 이렇게 끌어들인 여성 노동자들을 시간제 일자리 등 저질 일자리로 몰아넣으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대학 구조조정의 일환이다

정부와 대학 측은 평생교육 단과대학 신설이 고등학교 졸업 후 경제적 사정이 어려워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여성들, 육아 등으로 인해 직장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진정한 해결책은 애초에 지나치게 높은 고등교육 비용을 대폭 낮추고, 여성 노동자들의 경력 단절 현상을 없애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오히려 대학 문을 좁히고 여성들의 육아 부담을 키우고 있다. 이런 정책이 보통의 여성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정부의 위선과는 별개로, 고졸이거나 경력이 단절된 많은 여성들에게는 이화여대 평생교육 단과대학과 같은 기회가 반가울 수 있다. 그런 기대에 학벌주의적 ‘상식’이 스며들어 있을지라도 이들의 바람은 정당한 것이다. 고등교육 기회를 박탈당한 것은 이들의 책임이 아니다. 실업계 출신이든, 고졸 노동자 출신이든, 경력 단절 노동자든, 누구나 고등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누구나 고등교육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대학의 장벽을 낮추는 것이 학벌주의를 약화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고졸 또는 경력 단절 여성들에게 질 좋은 교육을 제공하겠다는 정부와 학교 당국의 말이 진정성이 있다면, 그런 특별한 단과대학을 신설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대신에 그들도 차별 없이 학점과 학위를 이수할 수 있도록 하고, 차별 없는 성적증명서와 졸업증명서가 발부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책에 관한 언급은 없다.

오히려 학교 당국의 진정한 의도는 다른 곳에 있음이 틀림없다. 학교 당국은 평생교육 단과대학을 통해 정원 외 인원을 받으면 등록금 수입을 늘릴 수 있다. '학위 장사 아니냐'는 일부 학생들의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또한 대기업의 필요를 충족시킬 웰니스·뷰티학과, 뉴미디어산업학과 등 학생들로부터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산업수요 연계형' 학과들이 평생교육 단과대학 산하에 개설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런 학과들은 대학 교육을 자본주의 이윤 시스템에 더욱 종속시킬 것이다.

한편 많은 학생들은 이 단과대학이 설립되면 이미 열악한 교육 환경(교수 부족, 강의실 부족, 대형강의 등)이 더 악화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신설될 학과들이 기존 학과들과 전임 교원이나 강의실 등을 함께 써야 하므로, 그러한 걱정은 근거가 있다.

△이화여대 곳곳에 학교 당국의 ‘학위 장사’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대자보가 붙어있다. ⓒ이미진

학생들의 행동은 정당하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분개하여 본관을 점거하자 학교 당국은 학생들을 범죄자 취급하며 위선적인 설교와 비난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 점거 농성은 이화여대 최경희 총장이 이제껏 보여 준 일방적 학교 행정과 신자유주의 대학 구조조정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그동안 학교 당국은 프라임 사업 등 박근혜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대학 구조조정 정책에 발을 맞춰 왔다. 프라임 사업은 인력 수급의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해 교육의 내용을 대기업의 수요에 맞춰 개조하는 사업이다.

따라서 학교가 이제껏 저질러온 짓을 은근슬쩍 감춘 채 이번에 벌어진 학생들의 본관 점거 행위를 “범죄”로 모는 것은 제자들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스승인] 자기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위선이다.

이 운동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오래 지속되려면 투쟁의 요구와 주장을 가다듬고, 이를 사회 전체로 널리 알려 폭넓은 지지와 연대를 얻어야만 한다.

학교 당국이 위선적인 말들로 포장해 고졸 또는 경력 단절 여성들을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킬 수 없도록 이화여대 학생들이 앞장서서 교육 시장화와 비민주적 학사행정을 반대하고, 실질적인 교육 기회 균등을 구현하려 해야 한다.

입력 2016-07-30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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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 채용에서도 여성차별

“양성 평등” 말하는 박근혜 정부의 위선

이지원

2015년 30대 공기업 신규채용 인원을 분석한 결과 새로 채용한 직원 10명 중 8명이 남성이었다. 남성의 비율은 78.1퍼센트(3천3백82명)로 여성보다 3.6배가량 많았다. 공기업 신규채용 중 여성 비율은 박근혜 정부 집권 이래로 2012년 25퍼센트에서 2015년 19.6퍼센트로 떨어졌다. 심지어 2014년에 한국동서발전을 비롯한 11곳은 전원 남성만 신규 채용했다.

박근혜 정부 초기에 공기업 여성임원을 30퍼센트로 늘리겠다는 법률 개정안까지 나왔지만 채용과 승진에서 여성 비율은 오히려 낮아졌다. 공기업에서 부장급 여성 임원 비율은 0.1퍼센트로 조사됐다. 이것은 10대 대기업의 10분의 1 수준밖에 안 되는 수치이다. 공기업에서 사기업보다 더 두터운 ‘유리천장’이 존재하는 것이다.

1987년 제정된 남녀고용평등법은 고용과 채용에서 여성과 남성의 평등한 기회를 보장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공기업에서조차 이런 ‘여성 홀대’ 고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청년 여성 구직자들은 결혼, 임신 · 출산, 육아 등을 이유로 회사를 그만두기를 강요하는 일반 사기업과 달리 공기업은 고용을 보장해 주리라는 기대를 품는다. 이런 이유로 요즈음 대학가에서는 ‘공기업 취업 특별반’이 만들어질 정도로 공기업의 인기가 높다. 그러나 현실은 이런 기대와 정반대인 것이다.

여성 홀대 고용은 곳곳에 존재한다. 사기업 면접 때 “결혼은 언제 할거냐?”, “임신 계획이 있느냐?” 등 전혀 상관 없는 질문을 들었다는 여성 구직자들의 하소연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준비된 여성 대통령” 박근혜 정부 하의 여성 고용의 실체다. 국가가 여성 차별적 관행들을 용인하는 분위기에서 대기업, 중소기업 가릴 것 없이 여성차별적 고용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얼마 전 프랑스 방문 당시 중소기업청과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한 한 행사의 진행요원 채용 광고에 ‘용모단정’, ‘예쁜 분’을 기준으로 내걸었다가 빈축을 샀다.

박근혜 정부는 “일과 가정의 양립”을 운운하며 여성들에게 저질 시간제 일자리를 강요하고는, 스스로 약속한 ‘무상보육’ 정책도 후퇴시켰다.

공기업 채용의 여성 차별 관행은 사라져야 한다. 또한 국가가 나서서 공공부문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대폭 확충해야 한다. 국가로 하여금 차별적 정책과 관행을 해결하도록 강제할 힘은 여성 노동자들과 남성 노동자들의 투쟁에 있다. 이런 노동자들의 투쟁이 강화돼야 한다.

입력 2016-07-16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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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시즘2016 주디스 오어 연설①

마르크스주의는 차별을 설명할 수 있는가?

우리는 매우 분열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회 최상부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과 사회 대다수 사람들의 삶은 너무나 괴리돼 있어서 마치 서로 다른 우주에서 사는 것 같습니다. 사회는 부와 가난으로 분열돼 있기도 하고 또 착취하는 쪽과 착취당하는 쪽으로 분열돼 있기도 합니다. 또한 온갖 종류의 차별과 억압으로 또 갈라져 있습니다. 억압이라고 함은 젠더나 인종, 섹슈얼리티 등을 이유로 체계적인 차별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과 뭔가 달라 보인다’는 인식만으로도 차별이나 억압을 당할 수 있습니다.

△맑시즘2016에서 연설하는 주디스 오어 ⓒ조승진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은 미국에서 흑인들이 단지 피부 색깔 때문에 경찰들에게 살해당할 위험이 더 높다는 것을 보여 줬습니다. 영국의 경우에는 흑인이나 중동계, 인도·파키스탄계 사람들은 경찰에게 불심검문을 당할 확률이 백인 남성보다 7배 이상 높습니다. 또 영국에서는 여성 노동자들이 남성보다 임금을 평균 18퍼센트 적게 받습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이렇듯 억압이라는 것은 단순히 머릿속에 있는 관념이 아닙니다. 억압당하는 사람들은 물질적인 불이익을 받고 편견에 시달리고 심지어 폭력과 죽음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오늘 아침에 TV를 보니까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딸이 자기 아버지를 소개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 딸이 자기 아버지는 여성의 권익에 신경 쓴다고 얘기했습니다. 또 트럼프가 젠더나 피부색을 전혀 구별하지 않는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피부색이나 젠더에 무감각하다는 것은 사실상 억압에 무감각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억압의 근원

억압은 개개인들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그것이 때로는 단지 개인의 문제, 개인의 정신상태나 심리상태의 문제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억압이 너무나 내면화된 나머지 그것이 마치 전체 사회구조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거죠.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가 이런 억압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든 현상을 다 계급으로 환원한다’며 마르크스주의가 단지 경제에만 골몰한다고 얘기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억압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심대한 영향을 거의 무시하다시피 하고 기계론적 설명만 한다고도 합니다.

물론 피상적으로만 보면 억압이 계급 분단과 무관해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억압이라는 것이 단지 가난한 사람들이나 노동계급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언론에서 영국의 신임 여성 총리 테레사 메이가 입고 나온 옷이나 신발이 어떻네 이러쿵저러쿵 하는데, 남성 정치인이라면 절대 그런 굴욕을 당하지 않죠. 또 런던에서 흑인이 BMW를 운전했다면, 경찰한테 불심검문을 당할 수 있습니다. 백인이라면 안 그랬을 텐데 말이죠. 이런 표면적 인상 때문에 억압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 많은 이론들, 즉 억압을 계급이나 착취와는 별개의 체계로 설명하는 이론들이 개발됐습니다. 착취나 계급과는 별개인 억압에 맞서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내놓은 해답이 이를테면 정체성 정치라든가 특권이론, 흑인 민족주의, 페미니즘 등입니다.

그러나 계급을 논하지 않고서는 억압을 설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억압의 해악을 제대로 가늠하기조차 어렵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억압이라는 것은 분명 착취와는 다른 것입니다. 착취는 수량화가 가능한 범주입니다. 그러니까 노동자들에게 얼마를 지급하고 공장에 얼마를 투자해서 거기서 나오는 수익이 얼마냐를 보면서 잉여가치가 얼마나 추출됐는지,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서 얼마나 착취해 갔는지를 정량화할 수 있는데, 억압은 이런 식으로 측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모호한 범주도 아닙니다. 억압에는 분명한 물질적 기반이 있습니다. 억압과 관계되는 온갖 편견과 사상들이 바로 이런 물질적 기초에서 나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를 하나의 총체로서 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모든 형태의 억압과 차별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다 설명하진 않겠습니다. 그러나 특정한 사회 구조가 생겨나면서 각종 억압적 사상을 양산하고 그런 억압적 사상이 다시금 사회 구조를 정당화하고 또 강화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흑인 노예제가 생겨나자 흑인들의 끔찍한 상태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종차별 이데올로기가 발명됐습니다. 여성의 경우, 계급사회가 등장하면서 사사화된 가족이 생겨나고 그 안에서 여성의 구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여성이 집안에서 애를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이데올로기도 생겨나게 된 것이죠.

△노동자연대가 주최한 맑시즘2016에서 연설하는 주디스 오어. ⓒ조승진

△오늘날 차별과 억압이 지속되는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조승진

이런 마르크스주의의 설명과 달리, 여타의 이론들은 개인들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이렇게 개인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면, 개인마다 주관적으로 다를 수 있는 경험들이 객관적인 설명을 대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개인적 관계의 양상이나 개인적 정체성은 억압의 산물이지 원인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지식인 마사 지메네스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개인적 경험 그 자체는 신빙성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변증법적으로 봤을 때 대립물들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대립물들의 총합이냐면, 개인적 경험이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독특하고 통찰력을 보여 주고 숨겨진 것을 드러내 보이는 힘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철저하게 사회적인 것이면서도 사회의 파편만을 보여 주며 사회 전체를 가리는 효과가 있다”고 했습니다. 즉 개인적 경험은 그 자체로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과정의 산물이지만 그 과정에 대해서 그것을 경험하는 개인은 잘 알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경험 그 자체만으로는 억압이 일어나는 원인은 물론 억압을 어떻게 종식시킬지에 대해서 딱히 답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특권이론

개인간의 관계에 주목하는 이론 중 하나가 특권이론입니다. 이 이론대로라면, 만약 누군가가 백인이거나 남성이고, 또 어떤 이유로든 다른 사람보다 차별을 덜 받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 사람은 그 자체로 특권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남성이거나 백인인 사람들은 지배적인 집단의 일원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도 이득을 본다는 것이 그 이론의 기본적 사상입니다. 이런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떤 특정한 젠더, 즉 남성이라는 집단이 계급에 상관 없이 다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실제로는 그런 공통의 이해관계가 없는데도 말이죠. 그러다 보면 특권이 존재하는 책임을 개인들에게 떠넘기게 되고 억압과 차별이 체제의 논리 자체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특권 이론가들이 예컨대 “당신의 특권을 억누르시오” 하고 말할 때, 거기에 깔려 있는 전제는 인종차별적인 사회에서 백인 일반이 다 이득을 본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반대해야 합니다. 즉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보면 흑인이 차별당할 때 백인 노동자들도 불이익을 봅니다. 억압이라는 것은 그 형태가 무엇이든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우리의 힘을 약화시킵니다.

특권이론은 억압을 인류 불변의 현상이라고 보기 때문에 빠져나올 수 없는 것으로 만듭니다. 특권 이론의 논리를 결론으로까지 밀고 나가면 결국에는 모든 남성은, 그리고 모든 백인은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과 별개로 조직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또 여성들 사이에서도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은 다르기 때문에 흑인여성들만 또 따로 조직화해야 한다는 식으로 나가게 되는데, 이런 식으로 무수한 분열을 낳게 됩니다.

물론 억압을 받는 집단은 그들이 어떻게 조직화할지 스스로 방식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또 사람들마다 억압받은 경험은 천차만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흑인 여성이 여성으로서, 흑인으로서 당하는 각각의 억압은 단순히 산술적으로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억압이 상호작용하는 것이고, 단순히 백인 여성이 겪는 억압과도 다르고 또 흑인이 겪는 억압과도 다릅니다. 예컨대 서구에서는 흑인 여성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매우 억압적이고 인종차별적인 관념이 있는데요. 여자 세계 테니스 챔피언 세레나 윌리엄스를 아실 겁니다. 흑인 여성인 세레나 윌리엄스에 대해서 ‘너무 섹시하다’는 말과 동시에 ‘너무 남성적이다’라는 비난이 동시에 쏟아집니다. 이런 식으로 상이한 억압들이 서로 갈마들 수 있는 것이죠.

상호교차성 이론

어떤 사람들은 억압이 이렇게 갈마든다는 것을 상호교차성 이론으로 설명하는데요. 이 상호교차성 이론에 따르면 서로 다른 방향에서 오는 억압들이 교차하면서 사람들은 모두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억압을 경험하는 게 됩니다.

저는 이 이론이 억압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억압이 가해지는 출처가 사실은 한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계급사회, 자본주의입니다. 억압을 설명할 때 정체성 정치라든가 개인이나 개인의 정체성에 집중하는 것, 이런 것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하고 그래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남성이 여성억압으로 이득을 본다거나 백인이 흑인 억압으로 이득을 본다는 류의 생각도 거부해야 합니다.

오늘날 어떤 논자들은 ‘여성이 임금을 적게 받는다’고 얘기하기보다는 ‘남자들이 임금을 더 많이 받는다’는 식으로 얘기합니다. 그런데 여성이 임금을 적게 받는 데서 이득을 보는 것은 남성 노동자들이 아니라 그 여성들을 고용한 남녀 기업주들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 제도가 유지되는 데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가족 제도도 남성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제도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유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가족에서 여성에게 특정 구실이 강요되는 것을 타파할 해결책은 개인적인 관계를 바꾸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사회구조를 바꾸는 데 있습니다.

일부 이론가들은 가족이 단지 남성권력, 가부장제 권력의 표현이라고 얘기합니다. 물론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여성 억압의 구체적인 행위들, 예컨대 포르노를 구매한다거나 가정 폭력을 자행하는 것은 추상적인 체제가 아니라 구체적 남성들이고 또 억압이라는 것은 단지 불쾌한 분위기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데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는다는 주장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 억압의 복잡한 특징을 설명하는 데 턱없이 부족합니다. 가족은 남성이 여성한테서 이익을 취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자본주의 지배계급이 다음 세대 노동자들을 저렴한 가격에 재생산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정부든 그 정부가 예컨대 보육 예산을 삭감하려 한다거나 기타 복지 서비스를 삭감하려고 할 때 그것을 관철시킬 수 있는 정도는 그 사회 남성들의 개인적인 의식 같은 것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계급 간의 세력 관계에 결정적으로 달려 있다는 점입니다.

노동계급의 장기적 이익이 노동계급의 단결에 달린 만큼, 그 사회의 억압적인 구조들, 그것이 성 차별적이든, 동성애 차별적이든 온갖 차별적 구조들을 유지하는 데 노동계급은 전혀 이해관계가 없습니다. 남성이든 누구든 간에 노동계급의 어떤 부문도 계급의 장기적인 이해관계, 즉 노동계급 단결이라는 이해관계에 반해서 어떤 단기적 이해관계를 갖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개별 백인 노동자나 남성 노동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와 관계없이, 그들이 주관적으로 ‘나에게 이것이 이익이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적 이해관계가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노동계급의 단결이라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우리는 각자의 정체성에 따라서 엇갈리는 이해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억압의 구실이지만, 외피를 걷어 내고 실제 우리의 이해관계가 어디 있는지를 보려면 계급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재반박을 하자면 “우리는 억압을 계급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억압을 설명할 때 계급을 무시한다면 그건 억압에 대한 이해 자체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합니다.

억압과 착취

억압과 착취는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억압이 착취를 더 강화시키는 효과를 내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서 영국에 흑인 의원이 있는데, 그 흑인 의원이 만약 비싼 차를 몰고 다니다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찰관에게 걸리면 불심검문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과, 제가 사는 동네인 이스트런던의 가난한 흑인 청소년의 삶은 그러나 결코 비슷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억압과 착취는 서로 함께 가고 서로 강화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사회는 우리를 서로 분열시키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결집시키기도 합니다. 오늘날 영국의 노동계급은 절반이 여성이고, 소수 인종들도 많고, LGBT 사람들도 많고 한 마디로 굉장히 다양합니다. 노동계급은 딱 봐도 지배계급하고는 다릅니다. 지배계급은 그 구성에서 백인이 훨씬 더 많고 남성이 많습니다. 이것은 억압과 착취가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게 서로 별개였다면 노동계급이나 지배계급이나 인종 구성이나 성별 구성이 비슷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노동계급에게 단결해야 한다고 말할 때, 하나 주의할 것은 억압의 경험 그 자체가 단결을 추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성 차별과 인종 차별을 경험한다고 해서 반드시 성 소수자에게 연대감을 느끼거나 이민자들에게 연대감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억압은 그에 맞서는 저항 운동을 촉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운동의 참가 자격을 억압을 직접 당하는 당사자들만으로 한정한다면 결국에는 기존 사회의 벽에 마주치게 됩니다.

노동계급이 억압에 맞설 수 있는 잠재력

각 개인의 정체성이 아니라 계급으로 눈을 돌린다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을 단지 피해자가 아니라 체제를 변혁할 수 있는 주체로 본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제 역사를 봤을 때 차별과 억압에 맞서는 가장 진보적인 운동을 일으킨 것은 노동계급의 투쟁이었습니다. 영국에서 임신중절권(낙태권)을 위한 역사상 가장 큰 시위가 일어났던 것은 바로 영국의 노동조합총연맹(TUC)이 조직한 집회였습니다.

저 자신도 여성들만 참가하는 임신중절권 지지 집회에 많이 나가 봤지만 오직 노동계급이, 조직된 노동자 운동이 움직였을 때만 실제로 임신중절권 합법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노동계급이 임신중절권의 문제가 바로 노동계급의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라는 것을 인식했고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투쟁에 나섰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그리고 이처럼 노동계급이 고유의 힘을 발휘해서 억압에 도전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사례는 영국에서 스티븐 로렌스라는 흑인 청년이 인종차별적 갱단에게 살해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도 역시 인종차별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유가족들은 몇 년이 지나도록 살인범들에게 죗값을 물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살인범들이 몇 년 동안 자유롭게 활보하고 다닐 수 있었죠. 그래서 스티븐 로렌스의 아버지는 노동운동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노동조합총연맹 집회에 가서 내 아들을 위한 정의를 실현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결국 살인범들은 처벌됐다.] 어제 맑시즘 개막식에서 세월호 유가족 운동 지도자와 노동조합 지도자가 같이 연단에 섰던 것이 그런 점에서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노동조합 운동이 억압에서 완벽하게 자유롭냐 하면 그건 아니죠. 영국에서도 ‘노조 지도자들은 흔히 얼굴이 희멀건 백인 남성들이다’ 하고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급투쟁이 답”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만약 우리가 억압이 계급사회에서 기인한다는 것과 그걸 끝낼 수 있는 세력이 노동계급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인종차별, 성 차별 등 일체의 억압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지금 노동계급이 억압을 끝장낼 투쟁을 지도할 잠재력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 현재 노동계급의 상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 상태의 노동자들은 많은 수가 인종차별적이고 성 차별적이고 동성애 혐오적인 사상들을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영국에서 오늘날 제일 많이 팔리는 신문은 〈더 선〉인데 구역질 나는 쓰레기 신문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노동계급에게 억압을 끝장낼 잠재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노동계급에게만 존재하는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계급한테는 분열을 극복하고자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노동계급의 객관적 이해관계와도 연결이 됩니다. 예컨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피켓라인을 형성할 때, 스크럼을 짜야 할 때, 승리하려면 옆에 있는 사람이 여성이건 성소수자건 폴란드 출신이건 흑인이건 상관 없이 다 같이 어깨를 걸고 스크럼을 짜야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노동자 한 명 한 명을 모두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설득해야만 그런 행동이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자체가 노동자들을 단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물론 평상시에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기도 하지만 또한 노동자들이 함께 싸우도록 만들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단결하게 됩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여기서 해야 할 구실은 이 모든 투쟁에 함께하면서 왜 우리가 함께일 때 차별을 극복할 수 있고, 그런 차별적인 사상들을 버리고 단결할 때 더 강해질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그 방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만이 이렇게 투쟁을 통해서 단결하도록 내몰리는 동역학 속에 위치해 있고 다른 모든 사회 집단은 그런 동역학 밖에 있습니다. 노동계급에 주목하지 않는 모든 정치 이론이나 학술적 이론들은 결국에는 다 서로 찢어지고 분열하는 방향을 가리킵니다.

제가 볼 때 이런 학술적 논의나 정치 사상들이 분열을 가리키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이런 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이 보통 노동자들에 대해서 어딘지 좀 경멸하는 태도가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즉, 보통의 노동계급은 너무나 의식이 후진적이어서 결코 노동계급의 대의를 위해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주디스 오어의 연설에 집중하고 있는 맑시즘2016 참가자들. ⓒ조승진

투쟁과 의식 변화

우리는 노동계급에게 세계를 변화시킬 잠재력이 있다고 보고, 또 세계를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그들 자신도 변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자본주의가 평상시에는 사람들을 원자화시키고 스스로 초라하다고 느끼도록 억누르지만, 사람들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 속에서 의식이 성장합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직접 경험을 통해서, 또는 주변 사람이 투쟁에 참여하는 것을 보면서 비슷한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체제가 사람들을 서로 소외시키고 또 사람을 자기 노동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온갖 가림막들은 투쟁을 통해 밝히 드러나고, 그래서 투쟁에는 파편화돼 있던 진실을 볼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최근에 인턴과 레지던트들이 파업을 벌이는 일이 있었는데요, 이것은 굉장히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처음에 파업을 벌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맞다, 인턴 등의 처우가 좀 나아져야 하지’ 하면서 그걸 지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언론과 정치인들은 “의사들이 파업하는 바람에 환자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이 의사들이 살인마들이다” 하고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인턴과 레지던트들은 점차 정치적으로 각성했습니다. 더는 자신을 특권층이라 여기지 않고 평범한 노동자로 보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 의사들은 다른 간호사들의 파업에도 동참하게 되고 등록금 인상에 맞서는 투쟁에도 연대하게 됐습니다. 즉 다른 모든 부문들과 자기가 하나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체제가 노동자들에게 하는 일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을 프롤레타리아화시켜서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렇게 생각하든 안 하든 간에 노동자로서 조직하고, 노동자로서 투쟁하도록 떠미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련의사들도 자신들이 ‘나는 특권층 의사야’ 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이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여 주는 바는 계급투쟁은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된 현상이라는 것이고, 그걸 통해서 사람들이 단결로 내몰린다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계급투쟁은 체제가 부과하는 온갖 억압에 도전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동계급은 단지 이 체제를 바꿀 잠재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 과정에서 자신도 변혁시킬 잠재력이 있습니다. 즉 우리 자신이 새로운 세상을 운영하기에 더 적합한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우리는 사회가 늘 오늘날 이 상태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국경이 존재하고 사람들이 핵가족 단위를 이뤄서 살아야 하고 피부색을 이유로 사람들이 차별받는 이런 세상이 태곳적부터 이어져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인간 본성의 일부분이라는 얘기들도 많지만, 인류 역사 대부분 동안 우리는 위계 서열이 없고 성 차별이나 그 밖의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았습니다. 핵가족 틀 내에서 살지도 않았고 또 젠더나 섹슈얼리티도 오늘날처럼 ‘남 아니면 여’, 이렇게 이분법적인 구도가 아니었고 훨씬 더 다양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인간 해방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의 아주 근본적인 통찰은 결국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 의식주를 해결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굉장히 뿌리 깊이 고착화돼 있는 듯 보이는 온갖 억압들이 사실은 계급사회가 등장하고, 그것이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넘어오는 과정 속에서 생겨난, 역사적 발전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겪는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런 억압들을 만들어 내는 체제 자체를 어떻게 끝장낼지를 항상 고민해야 합니다. 단지 개인들 간의 평등만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나아가 인간 해방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는 피억압자들에게 연대하는 것이 단지 어떤 도덕적 의무라거나 동정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피업악자에 연대할 때 우리 모두가 더 강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억압에 맞선 투쟁에 연대할 때, 지금 당장은 억압적인 사상들을 일부 받아들이는 대다수의 사람들도 언젠가는 인종·피부색·종교 등을 넘어 단결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지 노동계급의 특정 부문이 다른 부문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문이 함께 단결해서 더 큰 힘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억압의 피해를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개개인일지라도 그것을 끝장내는 데, 그에 맞서 싸우는 데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서입니다.

단지 먼 과거만이 아니라 근래에도 노동자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이 단지 피해자가 아니라 사회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은 혁명기에 가장 극적으로 일어납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진정으로 살아 숨쉬는 대중 혁명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면 다른 사례를 봐도 되는데, 바로 [2011년의] 이집트 혁명입니다. 저는, 무바라크를 쫓아낸 이집트 혁명이 벌어진 초기 18일 동안 타흐리르 광장에 있었습니다. [당시 주디스 오어는 이집트 특파원이었다.]

그 18일 동안 거기에 혁명에 참가한 여성들은 광장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었고 거기서 노숙을 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면서 전혀 성폭력이나 추행의 위협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집트 사회에서 꽤 규모 있는 소수 종파인 콥트교 기독교인들은 광장에 동그랗게 모여서 기도를 드렸는데, 그들을 경찰로부터 보호하려고 인간띠처럼 빙 둘러선 사람들은 바로 무슬림들이었습니다. 이집트 혁명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심지어 가장 가난한 집단에 속하는 어린아이들도 자기 목소리를 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 해방을 위해서, 사회주의를 위해 혁명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혁명은 바로 억압 받는 사람들의 축제이기 때문이죠.

감사합니다.

정리 발언

매우 활발하고 흥미로운 토론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특권 이론에 대해서 몇 분이 말씀해 주셨는데 저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저는 우리가 조야한 분석을 피해야 한다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성폭력 피해자의 편에 서서 그 고통에 공감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남성이 다 잠재적인 가해자이고 또 여성은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는 관점에는 반대해야 합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분명 엄연한 현실이지만, 예컨대 영국에서는 거리에서 폭력을 당하는 비율이 남성들,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훨씬 높습니다. 즉, 우리는 결코 억압의 경험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지만 그 억압을 종식시키는 방법론에서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동자연대 운영위원] 최일붕 동지가 발언한 내용[‘남성 사회주의자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얘기할 때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하고, 페미니즘과의 공통점을 먼저 밝혀야지, 너무 치우치거나 싸가지 없이 얘기하면 설득하는 데서 되레 반발을 부른다’는 요지]에 동의합니다. 여성 차별에 분노하고 그 현실을 바꿔 보려고 하는 수많은 젊은 사람들이 처음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수용하게 되는 사상이 페미니즘인 경우가 많습니다.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결코 단일한 사상 조류가 아니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한테는 단지 ‘나는 성 차별이 싫다’, ‘나는 그것에 저항할 것이다’라는 태도 자체가 페미니즘이기도 합니다.

일단 공동의 적에 맞서서 우리가 같은 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가 같은 편이라는 것을 표시한 뒤에 ‘그렇다면 우리 적에 맞서서 어떻게 싸울까’를 토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특권이론 같은 것들은 우리 투쟁을 전진시키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이론인 것이죠. 예를 들어서 ‘남자들이 급여를 너무 많이 받는다’ 하는 생각은 지배계급도 좋아할 만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동계급 남성의 임금을 깎아내려서 더 하향평준화시키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남성의 임금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여성 임금을 상승시키기 위해서 함께 싸울 때, 그것은 노동계급 전체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 됩니다.

△이 워크숍에서는 많은 참가자들이 청중발언에 나서 주장과 질문을 던졌다. ⓒ노동자연대

미국 남부의 흑백 임금 격차에 대해 한 발언자가 사례를 든 것[흑인 차별이 더 심한 미국 남부에서 백인 노동자 임금이 오히려 북부보다 더 낮다는 사례]은 아주 적절합니다. 저는 제 고향인 북아일랜드의 사례를 더 추가하겠습니다. 북아일랜드는 가톨릭과 개신교로 깊이 분단돼 있는 사회입니다. 북아일랜드에서 개신교 분파는 아일랜드가 영국에 종속되는 것을 지지하면 영국 제국으로부터 떡고물을 더 많이 받을 거라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1950~60년대만 해도 개신교 사람들이 북아일랜드에서 상대적으로 더 나은 일자리와 주거 지역과 교육 혜택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혜택을 입는 것도 사실은 허상이었던 게, 따지고 보면 북아일랜드 개신교도들이 결국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웨일스 등 영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훨씬 더 낮은 생활 수준을 누렸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북아일랜드의 개신교와 가톨릭 간에 존재했던 그런 종파 간 갈등이 다른 지역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북아일랜드의 종파 간 분열은 모든 노동자들의 수준을 더 끌어내렸던 셈이었습니다.

러시아에 대해 얘기하자면, 러시아에서 혁명이 패배한 뒤 스탈린주의가 등장하고 옛 소련 체제가 등장한 것이 억압에 관한 논의들에 아주 심대한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억압을 설명할 때 마르크스주의 대신 다른 설명에 눈을 돌린 이유가 바로, 말로는 사회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여성들이 억압받는 소련과 같은 체제의 사회들을 보면서 실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사회를 보면서 ‘아, 사회주의가 저런 거라면 사회주의가 저절로 여성 해방을 보장하지는 못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거죠.

그러나 스탈린주의 하에서 여성 차별이 존속했을 뿐 아니라 더 악화했다는 것은 오히려 러시아 혁명이 패배한 증거로 봐야 합니다. 트로츠키는 가족 제도에 관한 글을 쓰면서 러시아에서 여성을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변화와 그것이 혁명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아주 강력하고도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습니다. 적군 총사령관이자 소비에트 지도부의 일원이었던 트로츠키는 러시아에서 여성들이 더는 혁명 직후처럼 마을 공영 세탁실을 이용하지 않고 세탁물을 자기 집에 가져가서 다시 빨게 됐던 것이 혁명 자체가 퇴보하고 패배하는 징후라고 썼습니다.

트로츠키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여성 해방은 사회주의의 본성 중 하나이고 만약에 혁명이 일어났는데도 여성 해방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회주의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는 증거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분이 ‘왜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적 억압 분석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그런 사람들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으로 설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하고 질문하셨는데요. 제가 말씀드렸듯이, 억압의 문제는 얼핏 개인적인 문제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것을 삼가는 게 여성들이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라든가, 아니면 인종차별이 개인이 갖고 있는 인종차별적 사상 때문이라든가 하는 분석이 그럴듯해 보이죠. 억압의 배후에 있는 구조적 기제는 사실 잘 안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대체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되게 개인간의 관계를 바꾸는 식으로 억압에 맞서 싸우려고 하는 사상들은 계급투쟁이 잠잠할 때 더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 시기에는 노동계급 투쟁이라는 대안이 사람들에게 피부로 잘 와 닿지 않는 것이죠. 그러므로 개인간의 관계부터 바꾸자는 이런 생각은 사회 변화에 대한 모종의 비관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일단은 신문이나 간행물, 책을 통해서 또는 일 대 일 토론을 통해서 바꿀 수도 있죠. 이런 맑시즘 행사도 결국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또 지역 단위에서 벌어지는 투쟁 속에서 사람들을 설득하려 할 수 있고요. 얼핏 보면 이런 수공업적인 작업도 굉장히 중요한데, 왜냐하면 나중에 투쟁이 폭발했을 때 그걸 이끌 수 있는 준비된 사람들이 일정량 이상은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걸 축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개인들을 설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설득하는 것만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될 수는 있어도 여전히 거리에는 성 차별적인 포스터들이 나붙고 경찰들의 인종차별적 행태는 일상적으로 자행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중적인 노동계급 투쟁의 중요성 문제로 다시금 되돌아와야 합니다. 투쟁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동시에 억압을 양산하는 구조 자체를 변혁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건대,  ‘노동계급의 혁명이 답이다’ 하고 말한다 해서 혁명이 일어나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일상 속에서 억압적인 온갖 행태와 발언, 법 제도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억압받는 민중의 호민관’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혁명이 모든 걸 해결해 주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있다면, 그래서 일상 속에서 이런 억압들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기계적이고 환원론적인 것일 겁니다.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기계적이고 환원론적이라고 비판하지만,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이 억압을 이해하는 데 뼈와 살을 더하고 깊이를 제공하는 만큼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일상에서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항상 ‘이 억압의 뿌리가 무엇인가’를 묻고, 억압이 대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를 가리켜야 합니다. 제가 말씀 드렸듯이, 투쟁은 거기에 참가하는 사람들도 변화시킵니다. 투쟁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더는 단순히 피해자가 아니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주체라고 느끼기 시작합니다.

저는 파업에 참가한 여성 노동자가 사람들이 많이 모인 데서 연설할 때,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해 보는 건 처음입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발언하면 안 될까요’, ‘다른 사람이 더 발언 잘할 것 같은데’라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듣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투쟁에 참가하면서 자신감을 얻게 되면서 생전 처음 해 보는 것들도 자신 있게 할 수 있게 됩니다. 투쟁을 거치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성 차별과 성소수자 차별, 인종차별 이런 것들에 반대한다고 선언만 해서는 안 되고 매일매일 일상에서 그런 억압에 맞선 투쟁에 개입해야 합니다.

저는 아일랜드의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혁명가였던 제임스 코널리를 인용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코널리는 영국 제국으로부터 아일랜드 독립과 사회주의를 위해 싸운 혁명가로 올해로 정확히 1백 년 전에 영국 제국에 의해 총살당한 인물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고의 예언자들은 바로 자신이 예언하는 미래를 이룩하기 위해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오늘 수행하는 투쟁은 마치 사소해 보일 수도 있고 아무런 파급력도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내일의 투쟁을 준비시키는 구실을 합니다. 그리고 그 작은 투쟁 속에서 훨씬 더 큰 투쟁의 씨앗들이 자라납니다. 작은 투쟁 속에서도 우리는 억압이 역사의 유물로 남겨지게 될 미래의 모습들을 힐끗힐끗 볼 수 있습니다.

통역 천경록

녹취 전문기·박충범

입력 2016-08-01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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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이 여성차별로 “막대한 득”을 본다는 박노자 교수의 의견에 대해

양효영 (노동자연대 학생 회원)

며칠 전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한국학 교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노동자 연대> 이현주 기자의 기사 ‘남성은 여성차별로 득을 보는가?’(이하 ‘득을 보는가’)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의 짤막한 논평을 올렸다.

박노자 교수는 남성들이 여성차별로 “막대한 득을 본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마트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임금과 남성 관리자들의 임금 격차 등의 사례를 든다. 둘 다 착취 받지만 남성은 여성에 대한 "과도착취"로 얻어지는 "잉여 덕에" 덜 착취받을 수 있다는 게 박노자 교수의 핵심 주장이다. 또한 이것이 자본의 분열통치 전략일 수 있지만 남성들에게 아주 잘 먹히는 전략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박노자 교수는 여성차별은 자본주의보다 오래됐다고 주장한다. 또한 여성 차별의 혐의로부터 진보·혁명 조직들도 자유롭지 못하고, 공산주의가 돼도 남성들은 여성 활동가의 투쟁 대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성이 여성차별로 득을 보지 않는다'는 주장을 여성 차별을 "부차적 문제"로 보려는 "상식 이하의 시각"이라고 치부한다.

우선 오해부터 바로잡자면, 박노자 교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여성차별은 자본주의보다 좀 오래됐습니다”라며 마치 ‘득을 보는가’에서 이현주 기자가 여성차별의 기원을 자본주의라고 주장한 것처럼 말했지만, 그 기사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여성차별은 잉여 생산물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 계급이 생겨나면서 함께 등장했다.”

노동자연대는 박노자 교수가 말한 것처럼 여성차별이 “계급사회 초기”부터 시작됐다고 본다. 바로 그게 엥겔스가 일찍이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주장했던 바다. 계급사회 이래로 존속해 온 여성차별이 오늘날에도 유지되는 이유는 오늘날의 계급사회인 자본주의의 필요 – 착취와 축적 – 때문이라는 게 ‘득을 보는가’ 기사의 핵심적 주장이었다.

박노자 교수가 <노동자 연대>의 주장을 엉뚱하게 오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가령 <노동자 연대> 168호의 ‘박노자 교수의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함’ 기사를 보라.) 박노자 교수가 <노동자 연대>의 주장을 왜 곡해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또 다른 오해도 바로잡아야 할 것 같다. 박노자 교수는 마치 이현주 기자가 여성이 차별받는 현실을 부정한 듯이 말하지만, 이는 심각한 오해이다. 모든 남성이 여성차별에서 이득을 얻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해서 그것이 곧 여성차별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성차별이 심하면 심할수록 노동계급은 분열돼 계급해방에서 멀어진다. 여성 노동자들이 임금과 노동조건에서 차별받을 때, 처지가 상대적으로 더 나은 남성 노동자들은 조건의 하향 압력을 받는다. 차별로 일부 개인과 부문의 남성 노동자들이 약간의 이득을 볼 수는 있어도 이것은 차별을 지속시켜 계급 전체로는 오히려 손해다. 따라서 차별에 맞서 싸우는 게 여성뿐 아니라 남성 노동자의 계급이익에 부합한다는 게 ‘득을 보는가’ 기사의 핵심 요지였다. 그런데 차별에 맞서 남녀 노동계급이 함께 싸우자는 주장이 어떻게 여성차별을 “부차적 문제”로 보는 “상식 이하의 시각”이 되는 것인가?

계급 격차

박노자 교수는 자신을 포함해서 남성들은 여성차별로 “막대한 득”을 본다며, “대부분이 여성인 마트 비정규직 임금이 1백만 원을 넘지 못하는데, 대부분이 남성인 관리자들의 임금이 그것보다 2~3배가 된다”는 것을 한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먼저, 중간계급이라고 볼 수 있는 관리자와 노동계급 여성의 처지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맞지 않다. 박노자 교수가 의미하는 관리자가 ‘상층 관리자’라면 여기엔 계급 격차가 더 크게 작동한다. 그리고 이때에는 다수 노동계급 남성들도 ‘상급 관리자’와 비교해 처지가 더 나쁘고, 이들과 빈번하게 충돌한다.

만약 박노자 교수가 말한 ‘관리자’가 남성 정규직 노동자를 지칭했다 쳐도, 남성 노동자가 여성 노동자의 저임금으로 득을 본다고 할 수는 없다. 박노자 교수는 더 낮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의 “과도착취”로부터 더 높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가 “초착취를 면할 수 있다” 하고 주장한다. 박노자 교수는 마치 임금을 더 많이 받으면 덜 착취당하고 임금을 적게 받으면 더 착취당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착취율은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 중에 기업주가 가져가는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로 결정된다. 따라서 임금 수준이 높아도 착취율이 그만큼 높을 수 있다.

게다가 자본가가 여성은 초과착취하고 남성은 덜 착취하려 한다는 박노자 교수의 가정도 별 근거가 없다. 자본가들은 되도록 두 집단 모두를 더 착취해서 이윤 전체를 더 늘리고 싶어하지 않을까? 자본가라면 여성의 낮은 임금을 유지시킴으로써 남성의 임금도 더 떨어뜨리고 싶어할 것이다. 그래서 일반으로 말해 여성과 남성 노동자들의 관계는 어느 한쪽이 열악해진다고 다른 한 쪽이 나아지는 관계가 아니다. 한쪽의 조건이 나아지면 함께 나아지고, 나빠지면 함께 나빠진다. 만약 차별을 해도 결국 자본가가 지출해야 할 임금 몫도 같다면 굳이 차별을 유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좀더 나은 처지에 있는 노동자가 차별로 득을 본다는 이런 관점은 이 사회에서 누가 진정한 득을 보는지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남성 노동자가 여성 노동자보다 임금을 약간 더 받을 수 있을지 몰라도, 기업주들은 그보다 수백 배의 이윤을 챙겨간다. 이렇게 남녀 노동자 모두를 착취해 이윤을 얻는 자들 중에는 여성도 포함돼 있다. 박근혜, 최연혜, 김을동, 조현아, 이부진 등 지배계급 여성들보다 처지가 나은 남성 노동계급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 다른 조건, 부문에 있는 노동자들이 정부와 기업주에 맞서 함께 저들의 몫을 빼앗아 오자고 주장해야 한다. 이를 통한 상향평준화를 요구해야 한다. 가정 내에서 벌어지는 가사와 육아를 사회화하는 데 이윤의 일부를 사용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그런데 노동계급 내에 더 나은 처지에 있는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차별로 득을 본다면서 우리 내부로 시선을 돌리는 것은 진정한 해결책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사실 정부와 기업주들은 우리의 주의를 계급 관계라는 핵심적 문제에서 딴 곳으로 돌리게끔 하려고 이런 관점을 퍼뜨리고 싶어한다. 박노자 교수도 “자본의 분리 통치 전략”을 우려하는 듯한데, 남성 노동자들도 체제의 ‘종범’으로 여기는 관점이 이런 분리 통치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일부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을 차별하고, 그것이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계급이익을 반영한 행동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성 노동자들의 이런 행동은 여성 차별을 방치해 결국 자신들도 더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만든다. 이현주 기자도 지적했듯이,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객관적 계급이익 대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만약 노동자들이 모두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 어떤 정치 단체도, 마르크스주의자들도(박노자 교수 같은 좌파 지식인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계급적 단결을 위한 의식적 개입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남성 이득론’은 여성차별로 자신이 득을 본다고 착각하는 남성들에게 도전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보수적 생각에 확신을 줄 수 있다. 그것이 당신들의 이득에 부합하는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이런 주장은 차별에 맞서 계급 전체의 힘 전체를 사용하도록 하는 과제 달성을 오히려 방해한다.

단결의 잠재력

박노자 교수는 현실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이런저런 상황을 묘사하고는 여기에서 곧장 남성이 여성차별로 득을 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상만이 아니라 그 이면의 동역학을 함께 봐야 한다. 개별 사람들 간의 관계만 볼 게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그것과 개별 · 부문의 관계들을 살펴봐야 한다.

자본가들은 개별 가족에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떠넘긴다. 이 과정에서 여성은 가족에 매이게 되고 여성은 노동시장에서 차별받게 된다. 남성은 집안에서 ‘가장’ 대우를 받을진 몰라도 생계부양자로서 혹사를 감내해야 하고, 여성은 가사 · 양육과 노동시장에서의 착취와 차별이라는 이중의 굴레에 고통받는다. 이렇게 보면, 노동계급의 두 성 모두가 겪는 고통에서 막대한 이익을 얻는 것은 노동계급 그 누구도 아니고 남녀 지배계급이다.

현상론과 달리 마르크스주의는 현상 이면의 진실을 보며, 현실의 변화 가능성을 포착한다. 이게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과 남성 노동계급의 이익이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이 단결할 때만 임금 인상, 무상보육, 유급 출산 · 육아 휴직 등 유의미한 개혁을 쟁취할 수 있다고 본다. 비록 지금 그 단결이 충분치 않을지라도, 마르크스주의자와 좌파 등 단결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의식적 개입으로 잠재력을 현실화시키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본다.

반대로 박노자 교수는 이런 변화와 해방의 가능성에 아주 회의적인 것 같다. 가령 ‘남성이득론’을 주장하면서 혁명조직들도 여성 차별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 조선공산당의 여성 활동가들의 '지위'의 "주된 원천"이 남성 지도자들과의 애정 관계에 있었음을 제시했다. 조선공산당 사례가 진실인지는 논외로 두더라도, 예나 지금이나 선진적 남성들조차 여성해방에 진지하지 않고, 선진적 여성도 종속적 처지를 감내한다면, 여성해방은 대체 누가 수행할 수 있으며 어떻게 가능한 걸까?

‘남성 이득론’은 여성과 남성 노동자의 진정한 이해관계를 잘 설명할 수 없고, 여성과 남성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하고 함께 차별에 맞서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성차별을 진정으로 끝장내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여성과 남성 노동자들의 단결의 잠재력을 더 고무하고 현실화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입력 2016-07-20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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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시즘2016 주디스 오어 연설②

여성 차별과 해방

안녕하십니까, 동지들. 이 자리에 있게 돼서 정말 기쁘고 또 제 책이 한국어로 번역돼 나온 것을 굉장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성 차별은 이 사회에서 가장 오래됐고 뿌리 깊은 차별입니다.

제가 이 책을 쓴 이유 중 하나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여성 차별에 맞서 오랫동안 분석해 왔고 저항에 함께 해 왔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신성가족》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쓴 바가 있습니다. “한 사회 전체의 해방 수준을 보여 주는 가장 자연스러운 척도는 그 사회의 여성이 얼마나 해방돼 있느냐다.”

△맑시즘2016에서 연설하는 주디스 오어. ⓒ노동자연대

저도 이 말에 동의합니다. 이런 잣대에 따라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여성이 얼마나 천대받는지를 보면 이 체제가 얼마나 해방과 거리가 먼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지난 몇 세대 동안 여성의 삶에 수많은 변화가 있었고 또 이룩한 성과도 많았습니다. 많은 나라에서 법적인 평등을 쟁취하기도 했고 또 남성의 영역이던 여러 일자리와 교육 기회가 여성에게 열리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제 어머니는 은행에서 일 하다가 결혼하는 바로 다음날 회사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 어머니 세대와 비교하기만 해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개인 삶의 영역에서 사람들이 지닌 태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서구에서는 ‘이제 여성들이 다 얻지 않았냐’ 하는 말을 자주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영국을 비롯한 서구에서도 전혀 사실이 아닐 뿐더러 세계적 수준에서는 더 사실이 아닙니다. 여성은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데 전 세계 부의 1퍼센트밖에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사회 상층부로 갈수록 여성들이 차지하는 지위나 재산 등의 비율이 훨씬 더 낮아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사회 계층에서나 당연히 여성들이 절반씩을 가져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사회주의자로서 저는 지배계급의 절반이 여성이고 노동계급의 절반이 여성인 것 이상을 원합니다. 저는 사회주의자로서 이 사회의 가장 뿌리 깊은 불평등을 제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계급 불평등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여성들이 어느 수준 이상의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을 막는 ‘유리 천장’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끈적거리는 바닥’에도 주목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끈적거리는 바닥’이 의미하는 바는, 대다수 여성들은 유리 천장에 올라가기도 전에 이 바닥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것이죠. 접착력 강한 바닥에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대다수 여성들에게 자본주의 하의 삶은 바로 이런 바닥입니다.

여성들이 직면하는 또 한 가지 현실은 미디어에서 여성을 대상화하는 온갖 성차별적인 광고들과 이미지들이 거의 미친듯이 범람한다는 것입니다.

△주디스 오어는 노골적인 성 성품화 같은 여성 차별이 왜 사라지지 않는지를 이해하기 쉽게 마르크스주의로 설명했다. ⓒ노동자연대

△여성 차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설명과 해방 전략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인 청중들. 청중 토론 중인 모습.ⓒ노동자연대

한국의 경우에도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고 상품화하는 이미지가 넘쳐나지 않습니까? 〈맥심〉 잡지 한국판은 납치·살해된 여성을 연상시키는, 트렁크 밖으로 결박 당한 다리가 보이는 사진을 버젓이 표지에 내걸기도 했습니다. 또 버스를 타면 성형수술 광고도 넘쳐나는데, 광고에는 하나같이 만화 캐릭터처럼 눈이 크고 몸매는 앙상한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유니레버라는 다국적 기업이 있는데 이 기업은 [바디 스프레이] 엑스나 [비누] 도브 같은 브랜드도 소유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몇 주 전 유니레버는 앞으로 성차별적인 광고를 일절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유니레버가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계기는 이렇습니다. 유니레버 광고의 오직 2퍼센트에만 지성적 여성이 등장한다는 연구 결과가 화제가 된 것입니다. 사실 2퍼센트나 된다는 게 더 놀랍지만 말입니다.

상품 판매라는 것이 자본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과정인 만큼, 체제 하에서 벌어지는 성차별의 가장 추악한 면모를 응축해서 보여 주기도 합니다.

여성들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어린애 취급을 많이 받습니다. 우리 여성은 팍팍한 삶을 견디려면 아이스크림 등 달달한 걸 먹으면서 위로를 받아야 한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달콤한 것을 먹으며 위안을 얻는 것은 대가가 따릅니다. 여성들은 뼈다귀 밖에 없는 슈퍼모델 몸매의 이미지에 부합해야 한다는 압력도 동시에 받기 때문이죠. 그런 몸에 부합하기 위한 다이어트 잡지들도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상으로 여겨야 하는 그런 슈퍼모델 몸매, 살이 거의 없어 삐쩍 말랐는데도 가슴은 큰 그런 몸매는 자연에서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려고 성형수술을 하고, 따라서 성형수술하는 사람들의 90퍼센트가 여성인 것도 놀라울 일이 아닌 것이죠.

영국에서는 가슴 확대 수술이 전체 성형 수술 중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부문입니다. 그리고 10대 여성들도 그 수술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체제는 여성들의 자기 몸에 대한 인식, 자신감, 이런 것들이 단지 개인 심리의 문제이지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이 광고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여성의 몸이 그야말로 전쟁터가 되고 있는 현실 세계 말입니다.

한편에서는 ‘여성들이 옷을 너무 야하게 입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듯 그렇게 입으면 성폭력을 당해도 싸다’는 식의 얘기도 나오고요.

다른 한편에서는 너무 많이 입는 것도 비난의 근거가 됩니다. 무슬림 여성들이 히잡을 두르면 그것도 비난의 대상이 되죠.

어느 정도의 노출이 적절한 것인지 고민될 수밖에 없습니다. 손목을 이 정도만 내리면 되나? 머리는 어느 정도까지 보여야 되나? 그러나 이런 걸 고민하다 보면 답이 안 나옵니다. 그런 식으로는 이길 수가 없는 싸움입니다.

여성의 현실이 제가 10대였을 때보다도 더 퇴보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은, 오늘날에는 이런 성차별이 여성해방이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에게 강요된다는 것입니다. 여성들은 성차별적 이미지나 얘기를 접해도 그냥 ‘쿨’하게 받아들이라고 강요받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성차별적 현실에 대한 분노, 그것을 바꿔 보려는 의지, 이런 것들이 오늘날 ‘여성 억압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는 논의에서 페미니즘이 부흥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아주 반겨야 할 일입니다. 저는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이, 여성을 어린애 취급하고 여성의 몸을 대상화 하는 것에 맞서서 단호하게 투쟁하길 원합니다.

왜냐하면 여성의 몸을 이용해서 게임을 광고하거나 또는 다른 제품들을 홍보하는 것이 전혀 재치있고 쿨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포르노는 어마어마하게 큰 다국적 산업으로 발전했습니다. 오늘날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성 산업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많은데요. 이 성 산업의 범주에는 랩댄싱 클럽, 성매매, 포르노 등 아주 많은 것을 포함합니다.

영국에서도 이게 큰 논란거리입니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성 구매자 남성들만 처벌하길 원합니다. 이른바 노르딕 모델입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성매매 여성들은 다른 수많은 업종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직업을 선택한 거다. 그저 다른 일자리랑 똑같은 일자리일 뿐이다”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먼저, 저는 성 구매 남성을 처벌하는 것이 여성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단 경찰은 여성의 친구가 아닙니다. 성매매 여성들이 폭력을 당하고 피해를 당했을 때 경찰한테 가면 경찰은 전혀 그 여성들을 도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성매매 업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스스로 조직할 권리가 있고, 그들도 안전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성들이 그런 더러운 일을 해서 쓰겠느냐’ 따위의 설교하려 드는 태도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성매매 여성들과 한편에 서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매매가 다른 직업과 똑같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여성들이 성매매를 택하는 이유는 대체로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매매에 종사하는 사람들 압도 다수가 여성이라는 점은, 이 사회가 남성이 아닌 여성의 몸을,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대상화하고 상품화한다는 뿌리 깊은 억압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요소들, 섹슈얼리티든 노동력이든 이런 것들이 온전히 내 것이 못 되고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이 되는 그런 사회를 원치 않습니다.

또한 저는 성의 자유라는 것이, 새로운 세상이 도래해야만 쟁취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그냥 포기해야 하는 사치라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성을 왜곡하는 것이 실제로는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해악을 끼칩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LGBT든 이성애자든 간에 자기의 섹슈얼리티를 자유롭게, 탄압의 두려움 없이 표현할 수 있는 정도는 체제의 작동 방식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 이 체제가 얼마나 숨막히는 제약을 부과하는지를 보십시오.

오늘날 여성들은 자기 짝을 찾을 때 뭔가 번듯하고 안정적인 일자리가 있고, 그래서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는 그런 짝을 찾으라는 얘기를 듣습니다.

이런 사회적 규범에 부합하지 않고, 결혼을 안 한다든가 애를 갖지 않는다든가, 혼자 사는 사람들은 가엾게 여겨지거나 경멸의 대상이 되거나 더 심한 대우를 받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회의 꽉 막힌 제약에서 자유로워질 사회는 어떤 모습일지 때로는 상상조차 어렵습니다.

유물론적 사상으로서 마르스크스주의는 이런 성차별이 남성들의 잘못된 관념 또는 여성들의 관념에서 생겨난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성차별이 사회에 워낙 견고하게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어쩌면 인간 본성이 아닐까, 생물학적 차이에서 직접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일부 활동가들은 이런 본성론의 영향을 받는 주장을 펼치는데, 본성론은 사실 젠더에 관한 사회 주류의 견해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컨대 일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는 전쟁이라는 것이 남성 본연의 결함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남성의 공격성을 자극하는 테스토스테론 같은 호르몬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고 경제 위기라는 것도 위험을 추구하는 남성의 본성에서 비롯하는 것이라는 논의가 있습니다.

저는 이런 본성론적인 설명에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며칠 전에 영국 신임 총리 테레사 메이는 인터뷰에서 “만약 해야 한다면, 당신은 핵 미사일 스위치를 눌러 15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남녀, 어린이 할 것 없이 죽이는 선택을 감수하실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그녀는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IMF의 총재인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여성인데 이런 말도 했습니다. 만약 여성들이 경제를 움직이는, 주되게 재계 요직에 있었더라면 경제 위기는 다르게 전개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리먼 ‘브라더스’가 아니라 리먼 ‘시스터스’였다면 사태가 다르지 않았을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IMF에서 실제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바로 크리스틴 라가르드이고, [EU를 쥐락펴락하는] 독일의 실권자는 [여성인] 앙겔라 메르켈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도한 긴축 정책 탓에 그리스에서는 가난 때문에 아이 엄마들이 자식을 고아원에 보내야 하는 상황으로까지 내몰렸습니다.

이처럼 성 역할(gender role)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경제 위기나 전쟁이나 결국에는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경쟁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있습니다. 호르몬 상의 차이도 있죠. 제가 그런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차이 때문에 세계 절반이 2등 시민 취급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제도 언급한 바 있는데[관련 기사: ‘[맑시즘2016 주디스 오어 연설] 마르크스주의는 차별을 설명할 수 있는가?’] 때때로 마르크스주의는 환원론이라고 공격받기도 합니다. 우리가 오직 계급만 강조하고 또 경제만을 얘기하기 때문에 억압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얘기들이 있는데요.

이런 식입니다. ‘마르크스주의가 매우 유용한 도구라는 것은 인정한다. 착취와 가난과 계급 문제에 맞서 싸우는 데는 유용한 도구인데, 억압 문제에서는 뭔가 다른 도구들이 필요하지 않냐.’

이중체계론이라는 것이 이런 관점에서 발전했는데요. 한편에는 착취의 체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여성 차별 등의 억압을 만들어 내는 체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후자의 체계는 보통 가부장제 이론 등으로 설명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가부장제 이론에 공감할 만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가부장제라는 말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도 정확히 기술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대부분의 남성들은 ‘가부장’이라고 할 만한 권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남성이 본성적으로 억압적이라는 주장을 거부하는데, 동전의 반대면으로 ‘여성들이 본성적으로 수동적이고 얌전해서 남성의 억압에 쉽게 당한다’는 논리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로 보면 계급과 억압이라는 것이 서로 따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느 계급인지 상관 없이 모든 여성들이 억압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죠.

레닌도 어느 계급에 속하는 여성이든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으면 우리는 묵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에서 우리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총리 테레사 메이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비하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고 심지어 마거릿 대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계급을 막론하고 여성이 차별받는다고 해서 계급과 차별이 서로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입니다.

올해 제 고향인 북아일랜드에서는 한 여성이 임신중절을 하려고 인터넷으로 낙태 약을 주문했다는 이유로 기소가 됐습니다.

이 여성이 처벌을 받게 된 이유가 낙태가 불법인 아일랜드에 사는 여성이라는 것이기도 했지만, 가난 때문에 처벌을 받은 셈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 돈이 있는 아일랜드 여성들은 낙태 시술을 받기 위해서 [같은 영국에 속하면서 낙태가 합법인] 잉글랜드로 갈 수가 있는데, 이 여성은 너무나 가난해서 그것조차 못 했던 것입니다.

지배계급 여성들도 물론 억압을 받기는 하지만 억압의 경험이 대다수 피지배계급 여성들의 경험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배계급 여성들이 자기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이 사회의 불평등이 유지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또 한 가지 현실은 지배계급 여성은 피지배계급 여성을 고용해서 자기 집의 가사나 육아를 맡긴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나라의 여성들 수백만 명이 가족과 이역만리 떨어진 서구로 가서 지배계급 여성들의 집안일을 하면서 돈을 벌기도 합니다.

즉, 서로 작동 방식도 다르고 분석도 다르게 해야 하고 그것을 철폐하기 위해 투쟁도 따로따로 해야 하는 이중의 체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체제가 있는 것이고 그에 맞서는 투쟁도 하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성 차별이 인간 본성이라는 것은 인류 역사의 대부분 시기를 보더라도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제 책에서는 초기 인류 사회에 대한 많은 연구 사례들이 소개돼 있는데요. 이 고고학적 연구들은 엥겔스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라는 아주 선구적인 책에서 보여 준 대부분의 통찰을 오늘날의 현대적인 기법과 새로운 발견들을 통해서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현생 인류의 역사 전체를 이렇게 [팔 길이만큼] 잡는다면 그 중에서 계급사회의 역사는 [손가락 길이도 안 되는] 아주 짧은 시기만을 차지하고 그 중에서도 자본주의 사회는 정말 손톱만큼 짧은 시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대부분의 시기 동안 인류는 체계적 차별도 없었고, 계급도 없었고, 가난과 부의 불평등, 위계 서열, 이런 것들이 전혀 없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협력자이자 동료인 엥겔스는 여성에 대한 체계적인 차별이 등장하게 된 물질적 토대가 바로 계급사회의 등장이라고 정확하게 지목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여성에 대한 체계적 차별을 낳은 것은 가족 제도가 출현한 것입니다. 이 가족 제도 출현 이후 여성은 집안에 종속되고, 가족 제도는 여성에 대한 온갖 억압적인 사상들이 생겨나는 보루가 됐습니다.

여자 아이들은 분홍색에만 열광하고 공주처럼 차려 입고 싶어하고, 남자애들은 군복을 입고 탱크를 가지고 노는 등의 행동은 전혀 선천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이 세상의 사상들을 흡수하고, 또 거기에 저항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시대와 사회가 남자로서, 여자로서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걸 받아들이면서 사회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변화를 겪기는 했지만 가족 제도는 여전히 여성 차별과 억압을 존속시키는 핵심적인 물질적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족 제도라는 것이 좀 모순적이라는 것을 먼저 짚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족은 이 험난한 세상에서 뭔가 위안을 찾고, 구성원들끼리 유대와 사랑 등을 이어가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 사회에서 가족은 우리가 온전히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장소로 굉장히 미화되지만 자본주의 하에서는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많죠. 오히려 가족은 가장 끔찍한 폭력의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회는 가사를 맡고, 요리를 하고, 애들을 돌보는 일에 여성이 가장 적합하다고 여기도록 구조화됩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가정에서 이런 일에 일차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관념도 유지됩니다.

이처럼 여성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구실이 가정을 돌보는 것이라고들 여기기 때문에, 여성이 가족 돌보미 구실과 병행할 수 있도록 집 밖에서 일할 때에도 더 낮은 임금을 감수하고 더 유연한 노동으로 내몰립니다.

그런데 성 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은 단지 여성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도 구속합니다. 남성들은 ‘밥벌이를 제대로 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눈물 흘리지 말아야 한다’ 는 등의 강요를 받습니다.

물론 현실은 이런 고정관념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단적으로 오늘날에는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여성이 집 밖에서 일을 합니다. 물론, 과거에도 가난한 여성들은 늘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핵가족이라는 이상과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현실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지배계급한테 더 필요한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의 수많은 여성들이 이상에 부합하지 않게 집 밖에서 일한다며 ’원래는 내가 가사를 돌봐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을 갖고, 그만큼 집안일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기 때문이죠.

핵가족이라는 제도와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을 파편화시키고 원자화시킵니다. 체제 때문에 생기는 온갖 어려움과 고통, 예를 들면 자기가 해고 당했거나 가난해서 자식을 대학에 못 보낸다거나, 제대로 가족을 먹이지 못하는 등의 일이 닥치면 사람들이 “그게 다 내 탓이고 내 책임” 이라고 여기게 만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런 현실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입니다.

저는 먼저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족에 반대한다, 가족을 철폐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외치는 것을 해선 안 됩니다.

러시아 혁명 때에도 여성 혁명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볼셰비키들이 당신들 자식을 빼앗아 가려고 오는 게 아니다”라고 사람들을 안심시켜야 했습니다.

자본주의적 핵가족이 아니라면 대안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혁명을 일으킨 세계 노동계급이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창의적 방법으로 사람들끼리 같이 사는 방법을 재구성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회를 변혁하려 할 때, 젠더의 프리즘만으로 세상을 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 보면 함정에 빠질 수가 있거든요.

왜냐하면 우파들이 여성의 권리라는 용어를 가로채서 지배자들의 어젠다를 추구하기 위해서 엉뚱하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방 국가들이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어떻게 정당화했습니까? 바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해방시키겠다는 명목으로 거기에 폭격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올해 초에 독일 쾰른에서 여성들에 대한 끔찍한 공격이 벌어졌을 때 독일 정치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여성을 혐오하는 이주민들이 저지른 짓이므로 이주민 유입을 막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독일의 활동가들과 페미니스트들이 아주 훌륭하게 대응했는데, “우리는 무슬림이 없는 독일의 옥토버페스트 같은 맥주 축제 같은 데서도 늘 성추행을 당하는데 그때는 아무 말도 않더니 이제 와서 이주민 탓이라고 하냐”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국가에서 우파들은 또 “무슬림 여성들의 히잡이나 니캅 착용을 금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여성 억압의 표현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마치 여성에게 ‘무엇을 입어라, 입지 말라’ 하고 간섭하는 것이 여성해방이라도 되는 양 펼치는 어이없는 논리입니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 적이라도 되는 양 이간질하는 이런 거짓 담론에 반대해야 합니다.

인종차별주의의 등에 올라타서 여성해방을 이뤄낼 수 없습니다. 한 집단에 대한 억압을 이용해서 다른 집단의 억압을 해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미국] 올랜도에서 게이바 총격 사건이 있은 뒤에 영국에서의 대응이 아주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에서는 ‘이슬람 혐오에도 반대하고 성소수자 혐오에도 반대한다’라고 적힌 배너를 들고 수많은 사람들이 행진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과 질문으로 청중 토론에 기여했다. ⓒ노동자연대

△워크숍이 끝난 뒤에도 연사는 질문과 토론을 더 하고 싶은 청중과 대화를 나눴다. ⓒ노동자연대

우리는 이런 단결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데, 때로는 운동 내에서도 이런 분열이 일어납니다. 한 측면에서 억압을 받는다고 해서 다른 종류의 억압이나 차별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자동으로 연대감이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근 사례는 트랜스젠더 억압을 둘러싼 논쟁이었는데요. 미국과 영국에서 트랜스젠더 여성들은 일부 페미니즘 집회에 입장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정한 여성’이 아니라고 여겨지기 때문이죠.

트랜스젠더들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성의 반대쪽 성을 선택함으로써 이 사회가 부과하는 이분법적 성별 구도를 더 고착화시킨다’고 비난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트랜스젠더야말로 이분법적 성별 구도에서 벗어나려 하는 사람들이고 오히려 그런 이분법의 피해자라고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에게 강요된 것을 벗어나서 다르게 살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매도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차별에 반대하면서 다른 모든 형태의 차별에도 반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차별들에 맞서 싸우는 데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사람들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데서 싸우는 거죠.

사회주의자들은 여성을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계급 투사로서도 바라봅니다.

실제로 서구의 경우에는 여성들이 어마어마한 수로 노동계급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영국 같은 서구의 경우에는 여성들이 잠시 일자리를 가지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주변적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아주 항구적이고 핵심적인 일부입니다.

이는 여성들에게 집단적 힘을 부여합니다. 즉, 고립된 가정에서 벗어나서 노동계급이라는 아주 강력한 힘을 지닌 집단의 일부가 되도록 해 줍니다.

마르크스가 계급을 어떻게 정의했는지를 상기해 봐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이 사회에서 가장 고통받는 계급이라고 정의하지는 않았습니다.

노동계급에 속한다는 것은 부담, 불이익을 단지 하나 더 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여성이 가정과 일터 양쪽에서 모두 잘하기를 기대 받는 것은 이중의 부담이고 분명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하지만 긍정적 측면도 있는데 일터야말로 여성이 세상을 바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노동계급이 그토록 강력한 것은 사실 이 사회 모든 것들을 돌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노동자들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죠. 교통수단을 운용하는 것이든, 학교나 병원이나 작업장을 돌아가게 하는 것이든 노동자 없이는 이 사회가 한 순간도 돌아갈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노동계급을 이상화하지는 않습니다. 현재 상태의 노동계급이 모든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사상을 거부하는 아주 고결한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 후진적인 사상을 받아들이는 후진적 남성들이 당연히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계급만의 특징과 강점은 서로 단결하도록 내몰리고, 노동과정뿐 아니라 투쟁에서도 서로 협력하도록 하는 동역학이 자본주의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그런 동역학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즉 노동계급의 현 상태가 어떠냐가 아니라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어제도 말씀 드렸듯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함께 싸울 때 더 강력해질 수 있고 또 함께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배자들도 바로 이 점을 잘 알기 때문에 그토록 투쟁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공격하고, 지금 한국 정부가 하듯 노조 지도자를 가두고, 노조법 개악을 시도하는 것이죠. 사람들이 투쟁을 하면서 하나가 되는 것을 결단코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성 차별이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뿌리 깊은 차별을 없애 버리려면 단지 파업과 집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체제 자체를 변혁해야 합니다.

우리는 2011년 아랍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혁명들이 일어나 철옹성 같은 독재 정권들이 무너지고 그 중심에 여성들이 있는 것을 봤습니다.

반혁명 세력들이 여성을 표적 삼아 공격하는 것도 여성들의 참여가 혁명을 더한층 강화시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집트의 마히누르 엘마스리라는 여성 동지가 지금 감옥에 있는 것도 그녀가 워낙 훌륭한 혁명 지도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제 책을 엘마스리 동지에게 헌정하고 또 이집트에 투옥돼 있는 수많은 동지들에게 헌정했습니다.

그런데 혁명이 내일 당장 벌어질 상황이 아니라고 해서 우리가 오늘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임신중절권을 둘러싼 것이든, 성차별적 이미지들에 맞선 싸움이든, 여성 차별에 맞선 모든 투쟁은 다 중요합니다.

저는 성별 임금 격차가 사라지길 바랍니다. 그런데 저는 단지 거기서 멈추고 싶지 않습니다. 특히 노동자들과 사장들의 임금 격차가 점점 더 커지는 상황에서 단지 남녀 동일임금에만 만족하고 싶지 않습니다.

역사를 전진시키는 힘은 언제나 투쟁이었습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어떤 노동자들의 권익도 투쟁 없이 쟁취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얻은 모든 권리는 우리가 지배계급의 손에서 억지로 빼앗아 와야 했던 것입니다. 지배자들이 “아, 여성들이 좀 불평등한 처우를 받는 것 같네. 처우를 좀 개선해 주자”,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지난해 영국에서는 1백 년 전에 여성 참정권을 요구했던 운동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가 나왔습니다. 그에 대해서 많은 비평가들과 논자들이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1백 년 전, 거리에서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정부 건물에다가 돌 던지며 유리창을 깨뜨린 영국 여성들은 얼마나 훌륭했는가!”

그들의 관점에서 1백년 전의 투쟁은 이제 과거지사가 돼서 안전한 것이 된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투쟁에 나서면 태도가 확 바뀝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역사상 모든 위대한 대중 투쟁, 위대한 항쟁이나 혁명 운동이 터져 나올 때마다 여성해방의 문제가 전면에 제기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성해방은 항상 노동계급과 한 배를 탄 운명이었습니다. 그런 투쟁이 벌어질 때마다 ‘세상이 바뀌면 모든 사람의 삶이 어떻게 바뀔까’ 하는 질문이 던져집니다.

그래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은 훨씬 큰 함의가 있습니다. 그런 투쟁은 모든 인류의 해방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정리 연설

청중 토론에서 많은 기여를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먼저, 여성은 언제든 어느 거리에서든 자기가 원하는 옷을 입고 걸어다닐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기본권입니다.

그런데 이 권리는 제 생각에 대부분의 남성들도 지지할 것입니다. 오로지 소수만이 때로 여성에게 끔찍한 폭력을 자행합니다.

저는 모든 남성이 잠재적 강간범, 잠재적 가해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문제를 함께 해결할 동맹이자 동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가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의 해악을 축소하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우리 삶을 왜곡하고, 사람들 간의 관계를 왜곡하고, 성차별을 조장하는 이 썩어빠진 사회의 한 표현입니다.

이 자본주의 체제가 얼마나 사람들끼리 서로 반목하고 분열하도록 만드는가를 생각하면,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이 정도에 그친다는 것은 오히려 인간성이 우리에게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가족 제도가 자본주의에서 하는 이데올로기적 구실을 제가 말씀 드렸는데, 또 한 분께서는 가족의 경제적 기능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분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2008년 이후 계속되는 경제 위기 때문에 가족이 자본주의에서 수행하는 경제적 기능은 지배계급에게 더욱더 중요해졌습니다.

영국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자기 집을 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면서 부모와 함께 사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지 예산이 계속 삭감되니까 나이 들거나 병들거나 장애가 있는 친척들을 예전보다 집안에서 더 많이 돌보고 있는 형편입니다.

물론 집에서 남녀가 가사를 공평하게 분담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여성 동지들도 다 그런 것을 강력하게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개별 가정 안에서 가사 분담을 어떻게 할 것인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재생산과 돌봄, 양육을 사회가 부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한번 살펴봅시다. 우리는 항상 자본주의의 해악을 강조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쟁취하려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스탈린주의 체제인 옛 소련이 사회주의를 자처한 것 때문에 사회주의에 대한 사람들 인식이 아주 나빠졌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다 수용소 같은 데서 공동으로 생활하고, 다 같이 형편없는 음식을 다 같이 먹고, 똑같은 옷을 입고 살 거라는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이미지에 더 부합하는 것은 자본주의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살지, 무엇을 먹을지, 또 어떤 옷을 입을지에 대해서 선택권이 사실 별로 없습니다.

반대로 사회주의에서는 어떤 모범 답안, ‘사회주의적 삶의 방식’이라는 게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선택권을 누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생물학적 자녀를 직접 돌보고 양육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동시에 생물학적 자녀를 직접 돌보는 대신 다음 세대를 돌보는 일에 집단적으로 기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문제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각자 원하는 방식대로 살고 또 서로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회를 만드는 투쟁은 혁명적 투쟁일 것이고, 그런 투쟁 속에서 새로운 상상력이 피어나, 자본주의에 사는 우리는 꿈꿔보지 못한 수준으로까지 인식의 지평을 넓힐 것입니다.

관건은 지금의 상태에서 어떻게 그런 이상적인 상태로 나아가느냐 하는 것인데, 이에 대한 저의 답은 투쟁입니다. 투쟁을 통해서만 사람들이 바뀌고, 또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책도 그 과정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물론 제 책이 그런 과정에 도움이 되길 바라지만 말입니다.

제 책이 그런 투쟁의 안내서로 여러분에게 유용하길 바라고, 더 좋기로는 이 책을 읽으신 후 노동자연대에 가입하셔서 변혁 과정에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역사가 보여 주듯이, 또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지금까지의 모든 쓰여진 역사는 계급사회의 역사이고 또 계급투쟁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극소수 사람들이 사회의 압도 다수를 지배하는 사회에서 투쟁은 필연적입니다. 그런데 투쟁은 필연이지만 그 투쟁이 승리를 거두는 것은 필연이 아닙니다.

과거의 노동계급 투쟁이 실패한 것은 노동자들의 용기나 끈기가 충분치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승리냐, 패배냐는 그 투쟁의 정치적 지도력이 어떤 것이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에게 권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투쟁에 함께하고 또 우리 단체에 함께하자고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연사가 쓴 책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주디스 오어 지음 | 이장원 옮김 | 2016-07-28 출간 | 440쪽 | 16,000원 | 책갈피

녹취 연은정·박충범

입력 2016-08-03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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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지도부의 넥슨 항의 논평 철회를 둘러싼 논쟁

정진희

지난 7월 19일 김자연 성우가 게임 제작사 넥슨과 맺은 계약이 해지된 일이 있었다. 우리는 이 해고가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메갈리아 4’를 후원하는 티셔츠를 입은 인증사진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는 게 해고의 이유였다.

그런데 그 뒤 이 사태의 성격과 온라인 여성 커뮤니티 ‘메갈리아’에 대한 태도를 놓고 논쟁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특히 정의당은 이 문제로 많은 당원들이 탈당하는 등 갈등이 크게 불거졌다. 20일 당 문화예술위원회(이하 문예위)가 내놓은 넥슨 해고에 대한 항의성 논평에 상당수 당원들이 메갈리아 옹호라며 반발했고 논평 철회와 문예위원 징계를 요구했다. 닷새 뒤 당 지도부(중앙당 상무집행위원회)가 당내 반발을 수용해 문예위 논평을 철회하면서 탈당이 일어나고 논쟁이 격화되고 있다.

넥슨의 해고 사태와 정의당 지도부의 문예위 논평 철회 사건은 이제 <오마이뉴스>, <미디어오늘> 등지에서 정의당 안팎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논쟁으로 확대되고 있다. 7월 30일 <한겨레> 토요판에는 정의당 지도부의 논평 철회를 비판하며 이 방침을 “자본과 진보의 강고한 남성연대”로 규정하며 비약하는 정희진 씨의 글까지 나와 논쟁이 더 복잡해지고 있다.

현재 논쟁은 넥슨의 성우 계약 해지 사태와 메갈리아의 성격 논쟁이 뒤섞여 복잡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사실 메갈리아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문제는 전적으로 부차적인 문제이다. 핵심 문제는 메갈리아를 옹호하든 아니든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계약 해지를 당하는 게 정당한가 하는 것이다.

문예위 논평의 골자는 “정치적 의견이 직업 활동을 가로막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넥슨의 해고를 비판한 완전히 정당한 견해였다. 그런데도 정의당 지도부는 이 논평을 합당한 근거 없이 철회했다.

△"여자에게 왕자는 필요 없다" ⓒ사진 출처 김자연 씨 트위터

정의당 지도부는 논평 철회의 주된 이유로서 당사자가 해당 회사와 원만하게 합의했고 당사자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는 근거를 들었다. 그러나 넥슨은 온라인과 SNS 상에서 일어난 반발을 내세워 김자연 씨와의 성우 계약을 해지했다.

물론 넥슨은 김자연 씨에게 금전적 보상을 했고, 김자연 씨 자신이 부당 해고가 아니라고 밝혔다. 하지만 외주 고용된 노동자들이 해고 뒤 사측에 맞서 싸우지 못하고 금전적 보상을 받는 데 머무르도록 내몰리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정의당 지도부가 문예위 논평을 철회한 핵심 이유는 해고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려 애쓴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넥슨의 해고를 묵인한다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특히, 김자연 씨가 페미니즘 커뮤니티 후원이 문제돼 해고된 만큼 정의당 지도부의 논평 철회는 지도부가 견해와 사상을 이유로 한 차별에 심각하게 반대하고 진지하게 민주주의를 옹호하는가 하는 합리적 의혹을 불러 일으킨다.

이는 정의당 지도부가 당의 노선을 계속 온건해 보이게 만들려는 노력의 일환인 듯하다. 정의당 심상정 상임대표는 7월 29일 발표한 성명에서 문예위 논평이 “부적절”했다며(근거는 밝히지 않았다), “정당은 사회운동 조직들과 달리 문제제기 집단이 아니라 문제해결 집단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당을 사회운동과 분리하고, 문제제기와 문제해결이 별개인 양하는 것은 엘리트주의의 일종일 뿐이다. 정의로운 정당이라면 부당함과 억울함에 항의하는 사회운동과 분리돼서는 안 된다. 그리고 대중의 편견에 영합하며 논쟁을 회피할 게 아니라 진보적 가치를 추구하며 올바른 견해를 내놓으려 애써야 한다. 또한 더 나아가, 사회 정의를 위한 대중운동을 건설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본질적인 문제를 식별해야 한다

넥슨이 소비자 반발을 내세워 계약을 해지한 김자연 성우가 입은 티셔츠에는 ‘Girls Do Not Need A Prince’(여자에게 왕자는 필요 없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 문구는 여성을 수동적 존재로 간주하는 성별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것이다. 왜 이 문구가 사회적 해악을 끼친다는 말인가?

넥슨의 해고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주로 문제 삼는 것은 해당 문구 자체가 아닌 듯하다. 그 티셔츠가 메갈리아를 후원하는 것이고, 메갈리아가 ‘남성 혐오’ 커뮤니티이므로 메갈리아를 후원하는 것은 곧 남성 혐오를 옹호하는 것이라는 비약이다.[1]

메갈리아가 남성 혐오 집단이므로 넥슨의 계약 해지가 부당해고가 아니라는 주장은 성차별적 우파들만이 아니라 심지어 자신을 진보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일부에게서도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르포 작가 이선옥 씨는 <미디어 오늘>에 기고한 글에서 메갈리아가 사용한 “남성 일반과 장애인, 성소수자, 노인 같은 사회적 약자를 혐오하는 표현”을 들어, 넥슨의 계약 해지가 부당해고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이 씨는 정의당, 녹색당, 노동당이 각각 문화예술위원회, 청년녹색당, 여성위원회 차원의 논평을 내어 넥슨의 계약해지가 부당하다고 한 것을 비판했다.

그러나 메갈리아를 옹호하는 사람은 해고돼도 괜찮다는 식의 주장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 어느 누구도 새누리당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해고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메갈리아를 지지한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되는 것이 정당한가?

메갈리아가 아니라 넥슨이야말로 심대한 사회적 해악을 끼쳐 온 장본인이다. 넥슨 대표 김정주가 검사장 진경준에게 거액의 주식을 공짜로 주는 등 온갖 비리를 저질렀음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또, 넥슨은 여느 기업처럼 성차별을 이윤 추구에 이용하며 사회 전반에 성차별 관념을 확산시켜 왔다. 넥슨 자회사인 넥슨지티가 출시한 게임 ‘서든어택 2’의 여성 캐릭터 묘사는 악명 높다. 선정적 옷차림의 여성 캐릭터가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자세로 사망하고, 여성 캐릭터가 죽는 장소로 강남역 11번 출구도 등장하는 등 여성 비하와 멸시가 게임 곳곳에 스며들어 있어 ‘여혐’ 논란을 낳았다.

메갈리아 성격 논쟁

한편, 메갈리아가 페미니즘이냐 아니냐라는 논쟁이 있다. 지난해 등장한 메갈리아가 성차별에 반대해 주로 온라인 상에서 활동해 온 페미니즘 조류임을 부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메갈리아는 페미니즘의 일부이고, 주류 언론에 기고하는 페미니스트들과의 공통점도 여럿 있다. 페미니즘에는 다양한 조류가 있고 그들 사이에는 또 차이도 많다.

메갈리아에 대한 평가는 종종 극단적으로 엇갈리는데, 반대 일색이거나 찬양 일색인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메갈리아를 평가할 때 다른 페미니즘 조류나 사회운동 단체와 마찬가지로 공정하게 보려 애써야 한다.

넥슨의 계약 해지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메갈리아를 무슨 극우 집단 취급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파시스트는 단지 험악한 말만 하는 집단이 아니다. 그들은 언론?출판 등 가장 기본적인 민주적 자유조차 깡그리 말살해 버리길 원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실제로 죽이고 폭력을 일상으로 휘두르는 반동적 집단이다.

따라서 메갈리아(나 그 분파들)를 극우 단체와 비슷한 성격으로 규정하는 것은 완전히 혼란된 발상이다.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말처럼 파시즘을 이데올로기 중심적으로, 또 도덕주의적으로 부정확하게 규정하는 개념 사용이 진보 진영에 적잖이 퍼져 있는데, 이런 용어법은 메갈리아 같은 온라인 상의 느슨한 페미니스트 커뮤니티를 이해하는 데 완전히 부적절하다.(실제의 파시스트 단체와 활동을 이해하는 데에도 전혀 적합하지 않다.) 메갈리아의 정치적 약점을 불균형적으로 과장해서는 안 된다.(동시에, 경제 위기를 배경으로 곳곳에서 파시즘이 부상하는 상황에서 파시즘의 위험성을 그렇게 얕잡아봐서도 안 된다.)

비슷하게, 메갈리아를 파시스트 집단과 같다고 보진 않아도 일베 같은 우익과 동격으로 취급하는 견해도 옳지 않다. 일베는 성차별뿐 아니라 세월호 항의 운동, 노동자 투쟁 등 거의 모든 쟁점에서 어처구니없는 배설적인 우익적 태도를 취했다. 국정원 같은 국가기관이 뒤를 봐준다는 세간의 의혹도 있다. 반면 메갈리아는 성차별 쟁점이 아닌 다른 정치적 쟁점에 대해서는 상당히 이질적이고(풍자 위주의 주장이 많아서 성차별 쟁점에서도 단일한 견해를 취한다고 보기도 어려울 듯하다), 세월호 참사 책임 규명 운동을 지지하는 진보적 여성들도 메갈리아 운영진에 포함돼 있고, 메갈리아 지지자 중 진보 성향도 적지 않다.

메갈리아가 성범죄를 미화한 남성잡지 《맥심》의 표지와 몰카 범죄 등에 항의한 것도 정당했다. 사회에 퍼져 있는 여성 비하와 멸시, 여성 신체의 대상화, 여성 대상 범죄 등에 반발한다는 진정한 취지를 무시한 채 메갈리아를 ‘남성 혐오’ 집단으로 취급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사회에 퍼져 있는 성차별에 분노하는 젊은 여성들이 메갈리아에 많은 관심과 호응을 나타내며 때로 자신을 ‘메갈리안’이라 칭한 것은 대체로 이런 문제의식 때문이지 ‘남성 혐오’ 때문이 아니다.

물론 메갈리아의 유명한 ‘미러링’(성차별적 표현을 고스란히 되돌려 준다는 뜻으로, 여성 차별적 욕설에 남성 비하적 욕설 등으로 대응하는 것)은 성차별에 도전하는 데 효과적이라기보다 역효과를 내기 십상이다. 특히 미러링이라며 남성 비하 또는 소수자 비하적 표현을 서슴지 않은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남성을 성기 사이즈에 비유하며 조롱하거나 동성애자 남성이나 장애인을 비하하는 표현 등은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면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는 표현이다.

이 점에서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메갈리아를 찬양하기만 할 뿐 무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성차별 반대 운동을 만만찮게 건설하는 데 전혀 이롭지 않다. 정희진 씨는 옳게도 정의당 지도부의 넥슨 항의 논평 철회를 비판했지만, 메갈리아가 일베에 조직적으로 대항한 유일한 집단이라고 과장한다. 자본주의 국가의 영향력을 무시한 채 일베가 핵심 성차별 세력인 양 과장하는 것도 그런 사례다. 또,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정의당 지도부의 논평 철회라는 잘못을 두고 곧장 국가와 진보의 “남성연대”로 비약한다는 문제점도 있다.

메갈리아가 결국 자체 온라인 사이트에 오르는 성소수자 비하 내용의 게시물 삭제 문제를 놓고 분열한 데서 보듯, 성차별 반대가 곧 모든 차별에 반대하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메갈리아의 양성 분리주의적 페미니즘은 ‘게이 혐오’에 취약했고(물론 메갈리안 모두가 게이 혐오에 동조한 건 아니다), 또 모든 남성을 적대시하며 거침 없이 욕설을 하는 방식은 후진적 남성을 설득하기보다는 소모적 논쟁을 부르기 일쑤였다. 정의당 바깥에도 메갈리아에 반감을 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보수적 견해에서 비롯한 반감도 있지만 메갈리아의 극단적 분리주의가 낳은 효과도 있음을 무시할 수는 없다.

성차별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며 저항을 하지만 성차별의 원인을 모든 남성(‘남성 권력’)으로 돌리다 보니, 근본적으로 메갈리아를 특징짓는 극단적 분리주의 페미니즘에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구조와 작동 방식, 국가와 기업들이 성차별 형성과 유지에서 하는 핵심적 구실에 대한 이해가 없다. 사회의 개혁과 근본적 변혁을 위한 투쟁에서 노동계급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이해가 없으므로, 성차별을 끝장낼 수 있는 효과적인 전략도 없다. 미러링이라는 역효과를 낳는 수단에 의존하는 것도 이런 약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성차별을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관계와 분리시켜 모든 남성을 표적으로 삼는 약점이 메갈리아 이용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 천대의 물질적 토대에 대한 분석 결여와 모든 남성을 적처럼 여기는 경향은 기존 여성운동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메갈리아가 새로운 여성운동의 전망을 보여 주고 있다는 상당수 페미니스트들의 찬양?고무와 기대가 과장인 이유다.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 지지자로서는 메갈리아 식의 주장과 실천에 이러한 이견이 있다. 사회주의적 페미니스트도 메갈리아의 페미니즘에 무비판적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메갈리아가 페미니즘 일반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메갈리아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느니만큼 메갈리아의 활동 방식과 그에 담긴 정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 성차별 반대 운동과 사회운동 전체의 발전에도 유용할 것이다.

그럼에도 성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메갈리아를 부당하게 비난하는 것에 반대해야 하고 성차별 관념에 타협하려는 시도에도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특히, 메갈리아의 약점이 어떻든, 넥슨이 자행한 해고 사태가 메갈리아의 정치적 약점에서 비롯했다고 볼 수는 없다. 넥슨은 자신들의 이윤을 보호하기 위해 그런 짓을 했을 뿐이다.

 

[1] 김자연 씨가 티셔츠 구매로 후원한 곳은 메갈리아 4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는 곳이다(지난해8월에 만들어져 그해 12월에 분열이 일어난 웹사이트 메갈리아와는 운영진이 다르다고 한다). 메갈리아 4의 티셔츠 판매는 소송을 위한 것이다. 페이스북이 ‘김치녀’ 등 성차별적 단어를 사용하는 페이지는 놔두고 ‘메갈리아’를 사용하는 페이지만 계속 삭제하는 데 반발한 소송이다. 이 모금은 큰 성공을 거뒀다. 티셔츠는 당초 목표 1천만 원을 훌쩍 뛰어 넘어 1억 5천만 원어치가 판매됐다고 한다. 메갈리아 4는 메갈리아의 과거 활동 방식(일명 ‘미러링’)과 거리를 두며 정제된 표현으로 페미니즘을 논한다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메갈리아 4와 메갈리아가 과연 얼마나 다르냐 하는 회의론도 있다. 하지만 이번 계약 해지와 관련해서 그 차이는 중요치 않다. 김자연 씨는 메갈리아의 기존 활동 방식에 문제 의식이 있지만 메갈리아의 페이스북 페이지만 삭제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해 모금에 동참했다고 밝혔다.   

입력 2016-08-01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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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여성해방을 이룰 수 있는 분석과 전략을 제시하다

정진희

오늘날 페미니즘이 국제적으로 부흥하고 있다. 지난 10년 동안 서구에서는 성차별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성장해 왔고, 페미니즘 출판물이 쏟아지고 있다. 한국은 지난해부터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눈에 띄게 늘었는데 올해 그 열기가 더해지고 있다.

△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주디스 오어 지음, 이장원 옮김, 책갈피, 440쪽, 16,000원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영국에서 출판된 주디스 오어의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이 한국에 비교적 빠르게 번역된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의 저자인 주디스 오어는 영국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정당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중앙위원으로, 여성 차별의 현실을 분석하며 차별에 맞선 투쟁을 건설하는 데 앞장서 왔다. 올해 한국의 맑시즘에 연사로 초청된 오어는 맑시즘에서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며 한국의 청중과 토론할 것이다.

오어는 1980년대 이후 서구에서 유행한 ‘포스트페미니즘’ 담론, 즉 여성은 이미 평등을 성취했고 성차별은 과거지사가 됐다는 주장을 거부하며 시작한다. 오어는 여전히 만연한 여성 차별의 현실을 들어 ‘포스트페미니즘’ 주장이 대다수 여성들의 삶과 얼마나 동떨어진 것인지 드러낸다.

오어는 생동감 있고 이해하기 쉬운 문체로 ─ 역자도 오어의 글을 한국어 독자가 읽기 쉽게 번역을 잘 했다 ─ 여성들이 겪는 실질적인 차별과 억압의 문제를 드러내지만, 단지 이런 고통을 묘사하는 데 머물지는 않는다. 이 책은 왜 여성이 여전히 불평등과 억압에 직면하고 있는지 그 원인을 밝히고, 차별에 맞서 어떻게 싸울 수 있는지 투쟁의 전략과 전망을 제시하는 데 주력한다.

이 책은 오늘날 페미니즘이 새롭게 부흥하는 배경을 살펴보면서 최근의 논쟁에서 제기되는 이론적 쟁점들도 다룬다. 오어는 여성해방운동이 쇠퇴한 1970년대 이후 페미니즘의 이론적 발전을 살펴보면서 ‘제3물결 페미니즘’에서 많이 논의되는 교차성 이론과 특권 이론을 비판적으로 다룬다.

여성 억압의 원인

오늘날 페미니즘에서는 여성 억압을 단지 억압받는 개인이나 사람들의 주관적 경험으로 묘사하는 일이 흔하다. 그러나 오어는 억압의 원인과 기능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사회를 전체적으로 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인들 간의 억압적 관계는 억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지 그 자체가 억압의 원인은 아니다.

오어는 페미니즘에서 많이 제기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도전을 다루며 마르크스주의를 경제 또는 계급 환원론으로 보는 것이 왜 잘못인지 설명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억압을 경제로 환원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마르크스주의는 억압이 작동하는 경제체제를 이해하지 못하면 억압의 전반적 영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억압은 노동계급뿐 아니라 다른 계급의 여성들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억압이 사회의 계급관계와 무관하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여성 억압은 인간 본성의 산물이 아니라 계급사회의 산물이다. 오어는 엥겔스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펼친 이 주장을 최신 인류학과 고고학의 연구 성과를 풍부하게 이용해 다시 입증한다.

오어는 또한 자본주의에서 여성 억압이 지속되는 이유도 설명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적 토대는 착취이고, 억압은 자본주의적 축적을 추동하는 핵심 과정의 일부는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억압은 자본주의적 착취 과정에 의해 만들어지고 억압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착취를 용이하게 만드는 구실을 한다.

계급사회에서 여성 억압을 형성하는 핵심 제도는 가족이고, 가족은 역사적으로 변화해 왔다. 그리고 가족 안에서 여성의 역할은 언제나 그들의 계급적 위치에 따라 형성됐다. 오어는 자본주의에서 가족제도가 경제적·이데올로기적 구실을 통해서 자본축적이라는 목표에 기여한다는 점을 여러 사례를 들어 보여 준다.

성적 자유를 둘러싼 논쟁

1970년대에 성 해방을 위한 투쟁은 여성해방운동의 핵심적 일부였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을 상품화한다. 1970년대 이후 성 상품화가 더욱 발전하면서 성 해방의 의미가 협소해지고 왜곡됐다. 성적 자유와 해방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페미니즘 내에서 커다란 이견이 있고 때때로 격렬한 논쟁이 일어난다.

오어는 오늘날 페미니즘에서 가장 많은 논쟁이 일어나고 있는 섹슈얼리티 쟁점을 한 장을 할애해 다룬다. 포르노를 둘러싼 논쟁의 지형은 1970년대와는 상당히 달라졌는데, 오어는 포르노를 성 해방으로 간주하는 페미니즘 조류를 비판하는 한편, 국가의 힘을 빌어 포르노에 맞서려는 시도도 위험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성매매를 둘러싼 논쟁도 다룬다.

여성들은 이집트 혁명에서도 중요한 일부였다. 여성과 남성이 투쟁 속에서 단결할 때 의식의 변화가 광범하게 벌어질 수 있다. ⓒ사진 출처 Moud Barthez(플리커)

1970년대 이후 성 상품화가 더욱 발전하면서 여성 신체의 대상화가 더 많이 일어나자 성적 자유가 단지 남성의 자유만 증대시켰고 여성들에게는 해만 끼쳤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도 나왔다. 여성을 단지 남성의 희생자로만 간주하는 이런 견해는 여성의 성적 욕망을 부정하는 시각을 강화하기 쉬운데, 오어는 성적 자유가 여성에게도 중요함을 밝히며 자본주의가 변혁될 때 성 해방의 가능성이 활짝 열릴 수 있음을 지적한다.

여성해방의 전략

여성 억압의 원인에 관한 이론적 분석은 여성해방을 위해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는 실천적 문제와 연결된다. 오어는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벌어진 ‘제1물결 여성운동’과 1960년대 말 부흥한 ‘제2물결 여성운동’ 시기에 벌어진 치열한 논쟁과 최근의 쟁점을 소개하며 여성해방을 위해 어떤 전략이 필요한지 제시한다.

오늘날 여성 차별 이론들은 대개 노동계급 투쟁의 중요성을 간과하는데, 오어는 여성해방에서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계급을 그저 여러 차별 중 하나로 여기는 시각이 많지만, 계급은 단지 또 하나의 차별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계급을 단순히 경제적 불평등의 척도로만 보는 게 아니라 무엇보다 집단적 힘의 원천으로 이해한다.

페미니즘 이론에서는 여성이 노동계급의 핵심적 일부라는 점이 종종 간과되지만, 여성 노동자들은 오늘날 자본주의 생산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전 세계 노동인구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어도 40퍼센트이고, 성인 여성의 적어도 55퍼센트가 임금노동에 종사한다(세계은행 조사). 한국에서도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여성에게 이중의 부담을 안겨 주지만, 오어는 여성이 노동계급의 일부가 됨으로써 자본주의 체제의 무덤을 팔 수 있는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오어는 계급이 어떻게 집단적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는지, 자본주의 착취 과정에서 생겨나는 노동계급의 객관적 이해관계와 힘을 설명하고, 투쟁 과정에서 남성과 여성이 단결하고 의식이 바뀔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차별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 노동계급의 단결을 성취하는 데서 매우 중요하다는 점도 강조한다.

혁명적 변화가 해방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오어는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36년 스페인 혁명을 통해 설명한다. 또한 자신이 일부 목격하기도 한 2011년 이집트 혁명의 경험을 예로 들어 혁명 과정에서 대중의 자신감 상승과 의식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여 준다.

오어는 혁명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이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여성들이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책은 여성들이 쟁취한 모든 성과가 지배계급이 결코 기꺼이 내 준 것이 아니라 투쟁의 산물임을 강조하며, “우리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모든 개선책을 위해 날마다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어는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 내에서 쟁취할 수 있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개혁주의 전략의 한계와 위험성도 경고한다. 1980년대에 많은 페미니스트가 노동당에 들어가서 노동당이 여성의 권리를 다루게 하려고 투쟁했지만, 노동당 지도부는 정치적 한계를 거듭 드러냈다. 노동당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하며 노동계급의 삶을 공격했다.

국가나 지배계급의 권력에 근본적으로 도전하지 않고 여성의 평등을 달성하려는 전략은 결국 평범한 남성들을 상대로 싸워서 이득을 얻으려는 방식으로 빠질 수 있다. 1980년대에 영국의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탄광, 항만, 인쇄업 등 여러 분야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은 것을 페미니즘의 성과로 묘사했다. 그 이유는 이런 직종에 주로 남성이 종사했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은 오늘날 광범한 여성 차별에 맞서 싸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분석과 역사적 교훈을 제공한다. 현대 여성들의 조건을 분석하고 여성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돌아보며, 운동 내에서 제기된 논쟁점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다룬 오어의 책은 한국의 여성운동과 페미니즘 사상을 분석하는 데도 유용하다. 이 책은 새롭게 급진화하는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의 여성 억압 이론과 투쟁 전략을 이해하고 차별에 맞선 투쟁을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입력 2016-07-16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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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과 계급 문제

실라 맥그리거

‘새로운 페미니즘’이 부상하면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과 여성차별에 대한 유물론적 접근법도 다시 관심 받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셰헤르자드 모잡 편집) 같은 책들이 출간되고, 리즈 보겔과 미셀 바렛 같은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예전 책이 재출간되는 것을 봐도 그런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 몇 년간 학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에 대해 논의해 왔다. 가령 《히스토리컬 머티리얼리즘》 대회에서 그랬다. 2015년 3월 3일간 열린 학술대회 ‘마르크스주의-페미니즘의 궤적’은 관련 논의를 발전시키기 위한 행사였다. 대부분 여성이고 남성도 일부 포함된 약 5백 명의 참가자들이 베를린 로자 룩셈부르크 재단의 대강당에 모여 ‘마르크스주의의 페미니즘화’ 또는 페미니즘에 마르크스주의를 접목시킬 방안을 두고 토론했다. 3백 명 이상은 자리가 없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베를린비판이론 연구소(InkriT)의] 프리가 하우크의 주도로 독일, 미국, 캐나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학자들이 학술대회를 조직했다.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학자들이 많이 참가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마사 히메네스, 리즈 보겔, 헤스터 에이젠슈타인, 영국의 신시아 코번, 헬렌 콜리, [독일 좌파당 공동대표로 최근 방한한 바 있는 30대 활동가] 독일의 카티야 키핑, [캐나다] 토론토의 셰헤르자드 모잡이 주요 연사로 참석했고 이론가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이 기조 강의를 했다.

이 원로급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뚜렷한 목적은 여성차별 논의에서 계급 문제를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신자유주의 공격으로 제국주의·전쟁·인종차별·긴축·민영화 문제를 놓고 여성들의 견해가 갈리면서, 정체성 정치의 시기가 저물기 시작했다. 이를 포착한 원로급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의 힘을 새 세대에게 주장할 수 있겠다고 봤다.

그 판단은 적중했다. 참가자의 다수가 유럽과 북아메리카 전역에서 온 젊은 여성이었고, 인도, 터키, 이란, 라틴아메리카에서 온 여성들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학술대회는 주로 이론적이었지만 방대한 주제를 다뤘다. 그러나 일부 워크숍은 의료와 교육 문제를 둘러싼 최근의 투쟁, 보육 서비스 관련 노동자와 이용자들의 투쟁을 건설하는 문제 등을 다뤘다.

세계 여성의 날 기념을 주제로 한 워크숍에서는 최근 독일에서 일어난 인상적인 시위들이 어떻게 조직됐는지가 토론됐다. 독일 베를린에서는 2014년에는 5천 명, 2015년에는 8천 명이 여성차별 반대, 국제주의, 임금, 일자리, 교육 문제를 내걸고 시위를 벌였다. 프리드리히 벤다[독일 좌파당 당원]는 시위가 잘 조직된 이유를 설명했다. 인내심을 갖고 토론을 통해 공통의 과제를 찾는 데서 시작해, 최종으로는 쿠르드족 여성들과 노동조합 활동가를 포함한 80개의 다양한 단체를 ‘투쟁하는 여성들의 연합’이라는 광범한 연대체로 모아 낸 것이 주효했다고 한다.

벤다는 페미니스트 운동이 좌파 정치 프로젝트, 진정한 사회적 항의 운동과 연결돼야 하고, 개혁적이든 혁명적이든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비판을 내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나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경향이 진정한 사회주의 전통과 다시 연계를 맺을 가능성을 봤다.

독일의 클라라 체트킨과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여성 노동자를 사회주의적 변혁을 위한 투쟁의 일부로서 조직하고, 이를 통해 여성 문제를 전체 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투쟁의 핵심 요소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행사에서는 이러한 사회주의 전통에 대한 언급이 너무 적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클라라 체트킨

이 때문에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도 됐다. 이를테면, 과거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러시아 혁명의 패배 이후 가족 제도가 지속된 것을 근거로, 마르크스주의가 여성차별에 맞서 싸우는 도구로 적절치 않다고 결론 내렸었다.

활동가의 한 세대가 중국, 쿠바, 스탈린 이후 러시아 같은 국가를 사회주의로 여기며 여성차별은 자본주의 사회와는 별개로 가부장제에 기초를 두는 것이므로 여성은 남성과 별도로 싸워야 한다고 봤다.

한편, 몇몇 참가자들은 이 행사에서 전쟁과 제국주의를 핵심 주제로 다루지 않은 것을 제대로 비판했다.

그리스 시리자의 집권을 주제로 한 워크숍은 공공서비스 노동자이자 이용자인 노동계급 여성이 긴축 공격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 맞서 싸울 방법을 논의할 좋은 기회였지만, 안타깝게도 이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전체 행사는 단결을 호소하고 2016년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끝났다. 마사 히메네스는 2016년 행사 때까지 하나의 과제를 수행하자고 호소했다. 간략히 말해 그 과제는 상호교차성*처럼 차별을 묘사하는 데서 멈추지 말고, 차별 일체와 노동계급 남녀 모두의 삶을 형성하는 데서 계급이 결정적 영향을 끼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로 나아가자는 것이었다. 이 작업이 잘 진척되기를 바란다.

상호교차성

인종차별, 계급, 여성차별 등 여러 차별들이 서로 교차해 나타난다고 보는 접근법.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대체로 이 접근법이 차별의 구체적 경험을 묘사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계급’을 단지 여러 차별 중 하나로 취급함으로써 차별의 근원을 이해하는 데는 약점이 있다고 본다.

나아가 여성을 위한 변화는 모두 필연적으로 남성을 위한, 남성에 의한 변화를 수반한다. 따라서 “페미니스트 투쟁”은 계급 투쟁의 문제와 연결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 여성이 노동계급 남성과 마찬가지로 해방을 가져올 잠재력이 있다고 봤다. 성장하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이 의미가 있으려면, 변화를 위한 현실의 투쟁과 사회운동에 뿌리내려야 할 것이다.

 
 

입력 2016-07-16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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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스 오어 강의

성 상품화에 맞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주디스 오어

오늘날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고 상품화하는 것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여기 오는 길에도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성의 몸을 상품화하는 것은 지난 몇 세대 동안 여성의 지위가 현격히 신장된 것과 동시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 상품화는 단지 포르노 문제가 아닙니다.(포르노 자체로도 굉장히 큰 산업이지만요.) 성 상품화는 훨씬 더 광범한 현상을 가리킵니다. 영국에서는 ‘사회의 포르노화’라고까지 부릅니다.

△주디스 오어 ⓒ조승진

한편, 포르노를 어떻게 볼 것이냐를 두고 영국에서는 페미니스트들 사이, 활동가들 사이에서 의견 차이가 큽니다. 어떤 사람들은 1960년대 페미니스트들처럼 ‘포르노는 이론이고 강간은 실천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로빈 모건이 그중 한 명입니다. 영 페미니스트(young feminist)들은 ‘포르노는 별거 아니다. 우리는 페미니스트적 포르노와 착한 포르노(free range porns)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대표적으로 케이틀린 모란이 이렇게 주장을 합니다. 이처럼 젊은 세대는 포르노를 정상적 문화의 하나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의 상품화와 대상화는 더 노골적이고, 더 고약해졌습니다. 이는 자본주의 하에서는 단선적이고 꾸준한 진보가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즉, 우리가 이룬 많은 성과가 자본주의 하에서는 끊임없이 도루묵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10~15년 동안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는 ‘야한 문화’(raunch culture)의 성장입니다. ‘야한 문화’는 여성의 성이 상품화되고 여성의 몸이 대상화되는 것을 마치 멋지고 ‘쿨한’ 것인 양 찬양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SWP는 일찍부터 이 현상을 주목하고, 제가 2004년에 ‘신체의 상품화’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습니다.

아리엘 레비라는 저술가도 ‘야한 문화’ 현상에 주목했습니다. 아리엘 레비는 ‘야한 문화’를 다룬 《여성인 남성 우월주의자 녀석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습니다. 그다지 바람직한 제목은 아니죠. 제가 《소셜리스트 리뷰》에 실으려고 아리엘 레비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는 책 제목을 그렇게 지은 것을 후회한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여성인 남성 우월주의자 녀석들’은 포르노 제작사나 성산업 기업을 운영하면서 돈을 버는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책이 출간된 지 좀 오래됐지만, 그래도 한번 읽어 보시기를 권유합니다. 설명은 하지는 못하더라도, 여성의 성의 대상화·상품화를 찬양하는 현상을 굉장히 잘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리엘 레비가 제2물결 페미니스트 활동가의 딸이기도 했고, 그 자신이 레즈비언이어서인지 성소수자들이 이런 식의 상품화에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도 기술합니다. 이런 점 때문에 이 책은 여러 페미니즘 도서 중에서도 상당히 두드러집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더 자유로워진 것이 결국에는 여성의 성의 상품화가 어마어마하게 폭발하는 것으로 귀결됐습니다. 영국에서는 굉장히 호화스러운 랩댄스 클럽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심지어 대학 동아리의 여학생들이 운동을 목적으로 한다며 폴댄스를 추는 일도 흔합니다. 제가 영국 각지에 강연하러 다닐 때, 젊은 여성들이 이런 반론을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폴댄스가 뭐 대수냐’, ‘내 친구도 나도 랩댄스 클럽에서 폴댄스 추면서 등록금을 번다’, ‘우리가 남자들로부터 돈을 뜯어내는 수단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느냐.’

‘사회의 포르노화’ 여성의 몸의 상품화와 대상화가 만연해 있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이런 관점을 공유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 상품화 문제를 다룰 때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영국에서 줄리 빈델 같은 근본적(radical) 페미니스트들은 랩댄스 클럽을 폐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우리도 랩댄스 클럽 반대 운동을 지지합니다. 그런데 그 주장 방식이 세심해야 합니다. 즉, 그런 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공격하는 것처럼 비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줄리 빈델은 경찰력을 동원해서라도 랩댄스 클럽을 폐쇄하자고 하는데, 우리는 이를 찬성하면 안 됩니다. 

성 상품화가 어떻게 광범해졌나?

그러면 성 상품화는 오늘날 어떻게 광범해졌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1960~70년대 운동 덕분에 여성이 성적 자유를 더 많이 누리게 되고 성적으로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 주체가 될 수 있게 한 변화가 그 배경에 있습니다. 1960~70년대 전 세계에서 벌어진 여성 해방 운동에서는 성해방의 관점에서 자유로운 섹슈얼리티 표현 등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 요소는 성소수자 해방 운동으로도 번져 나갔습니다. 성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은 인종차별 반대 운동과 반전 운동의 일부가 되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 중후반과 1970년대 서구의 여러 나라에서 피임약이 보급되고 낙태권이 보장되면서, 처음으로 여성들이 원치 않는 임신 걱정 없이 성을 즐길 수 있게 됐습니다.

성의 자유 확대

흥미롭게도 최근 들어서 이에 대한 일부 페미니스트들의 반발이 있었습니다. 성의 자유 확대가 결국에는 남성들에게만 득이 됐지 여성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성들이 임신 걱정을 이유로 성관계를 거부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됐고, 그 결과 남성들은 더 많은 섹스를 즐길 수 있게 됐지만, 여성들은 즐길 수 없으면서 그냥 따라야 하는 상황이 됐다고 보는 것입니다.

예컨대, 저멘 그리어 같은 유명한 사람도 있지만, 줄리 얼롱이라는 좀 덜 알려진 사람도 그런 주장을 편 책을 몇 권 썼어요. 실비아 페데리치라는 페미니스트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여성에게 섹스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들은 여성에 대한 부르주아 사회의 편견, 즉 여성들은 단지 안정적으로 자신을 부양해 줄 남편감을 원할 뿐 성을 능동적으로 즐길 수는 없는 존재라는 관념을 되풀이하는 것일 뿐입니다.

1960~70년대 페미니스트 출신인 바버라 에렌라이히는 이렇게 말합니다. “1960~70년대 ‘사랑의 여름’(summer of love)이라고 표현된 성의 자유 확대는 단지 영화 같은 곳에서나 묘사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정말로 해방감을 느꼈고, 성이 이렇게 자유로워진 것은 정말 큰 진전이었다.” 마찬가지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보수적 페미니스트들의 견해에 반대합니다.

그리고 성의 자유 확대는 허공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성 지위의 실질적 변화, 즉 고등교육에 더 많이 진학하고, 제2차세계대전 이후 호황기를 거치면서 노동시장에 대거 진출하고, 때마침 피임약이 보급되고 낙태권이 인정되는 변화들이 결합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습니다.

1960년대 여성 해방 운동이 떠오르기 전의 현실이 어땠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는 여성이고 남성이고 자기 몸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해서 심지어 결혼한 여성이 아기가 어디로 나오는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의사들은 ‘자궁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아래 쪽 어디에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얘기했습니다. 여성이 혼외 임신을 하면,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당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래서 1960년대 초 페미니스트 저서들은 여성의 신체를 그림으로 보여 주면서, ‘이게 뭐고, 이게 뭐다’는 식으로 가르쳤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그만큼 당시 현실이 매우 심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흔적은 오늘날에까지도 남아 있어요. 1960년대 이전에는 혼외 임신이 워낙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지다 보니 혼외 임신을 한 여성들은 아이를 입양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입양을 보내고 나서는 찾을 길이 없었죠. 그래서 영국에서는 지금도 그 시절에 입양 보낸 자녀를 찾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1960년대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저항은 베트남에서 미국을 쫓아내는 통쾌한 승리를 거뒀고, 다른 운동들도 큰 성과를 냈지만, 자본주의를 종식시키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살아남은 상황에서 우리가 일군 성과는 여러 방식으로 뒤틀려 체제 안으로 흡수됐습니다. 사회는 여전히 억압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성에 대해 더 개방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이 역설이게도 성 상품화가 더 노골적인 형태로 확산되는 상황으로 이어졌습니다. 즉, 성해방이 자본주의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며 굴절돼, 전혀 성해방이 아닌 것으로 변하는 것이죠.

자본주의라는 프리즘

그래서 여성들에게는 [성적] 매력이 재산처럼 됐어요. 자본주의 하에서는 섹스가 화폐처럼 되기도 합니다. 영국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이런 문구가 새겨진 바지를 입기도 합니다. “신용카드 따위가 왜 필요하냐?” 자기한테 이것저것 사 줄 수 있는 스폰서를 잡으면 되니 신용카드는 필요 없다는 말인데, 끔찍하죠.

그런데 문제는 젊은 사람들이 자라나면서 이런 것밖에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통해서 굴절된, 굉장히 정형화되고 메마르고 상업화된 버전의 성만 접하지, 성이 개인들이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을 접하지 못합니다. 결국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이 늘기는커녕, 섹슈얼리티에 대한 매우 협소한 관점만 남은 상황입니다.

젊은 세대 사람들뿐 아니라 더 나이든 여성들도 이런 상황에 영향을 받습니다. 한국에서도 들어 보셨을지 모르지만, 영국에서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사회적으로 뜨거운 화두가 됐습니다. 이 책 내용은 부유한 나이 든 남자가 어린 여자랑 관계 맺는다는 ‘연애 얘기’인데, 그 연애 관계의 실상은 남자가 여자를 학대하는 관계입니다. 사실 진짜 추한 관계인데,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게 ‘뭔가 색다르다’, ‘자극적이다’ 하면서 엄청 재미있게 본 듯하고, 그래서 국제적으로 ‘히트’를 쳤습니다. 이 현상은 사람들이 그보다 더 건강하고 다양하게 관계 맺는 방식을 전혀 접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 줍니다.

물론 여성의 몸과 성이 상품화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오래된 일입니다. 그런데 최근의 현상이 새로운 이유는 그것이 마치 성해방의 표현인 것처럼 사람들에게 강요되기 때문입니다. 포르노를 싫어하고 성적 농담을 즐기지 못하면, ‘굉장히 딱딱한 여자다’, ‘쿨하지 못하다’는 식으로 낙인 찍힙니다.

제가 오늘 여기에 오면서도 지하철에 성형수술 광고가 도배돼 있는 것을 봤어요. 그런데 성형수술이 마치 여성의 권력을 신장시켜 주는 것인 양 광고됩니다. ‘당신 몸매에 불만이 있는가? 슈퍼모델처럼 보이지 못해서 부끄러운가? 그렇다면 성형수술을 받아라, 그래서 더 자신감이 넘치는 여성이 돼라’고 말한다는 것이죠.

어느 미국 페미니스트는 가슴 확대 수술을 받고서, 그것이 “페미니즘적인 선택이었다”라고 자랑했습니다. 이는 ‘여성이 뭘 하든 그것은 여성의 선택이다’라는 제3물결 페미니즘의 정신을 확인시켜 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비자의 선택을 물신화하는 소비 지상주의의 한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몸매를 갖기 위해 여성들이 자기 몸을 깎고 째야 하는 사회가 도대체 어떤 종류의 사회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이런 온갖 여성 차별적 언행과 관념이 어떤 물질적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도 알아야 합니다.(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맑시즘2016 주디스 오어 연설②: 여성 차별과 해방’을 보시오.)

한편으로 여성은 가정을 책임지는 현모양처로서의 이상에 부합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섹스의 신이 돼야 한다는 압력도 받습니다. 이 두 가지 관념은 서로 모순되는데, 이것은 자본주의 하에서 비롯하는 모순입니다.

신체 노출도 상품으로 다뤄질 때는 훨씬 더 노골적으로 표현될 수 있어서, 공공 장소에서 보여지는 것이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더 쉽습니다. 가령 쇼핑몰에는 여성의 가슴을 드러낸 사진을 표지에 실은 잡지가 버젓이 전시돼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성이 자기 아이에게 모유 수유를 하려고 가슴을 드러내면, 직원들이 와서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며 제지할 겁니다. 영국 의회 건물도 모유 수유 금지입니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

그렇다면 성 상품화에 맞서 어떻게 싸워야 할까요? 우선 우리는 줄리 빈델처럼 국가 권력이나 경찰에 기대려 해서는 안 됩니다. 포르노를 국가권력을 통해 금지하려고 하면, 정작 폭력적인 포르노가 아니라 LGBT 영화가 금지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페미니스트들이 큰 기대를 걸었던 포르노 금지법이 통과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로 유명한 게이 도서 판매 서점이 경찰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지배자들은 동성애나 자유로운 섹슈얼리티 표현을 모두 변태물로 보기 때문에, 그들에게 의존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자유로운 섹슈얼리티 표현

반면, 학생회가 대학 내 상점에서 남성 잡지를 팔지 말라고 요구하며 벌이는 캠페인은 지지해야 합니다. 이런 캠페인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일반으로 말해 우리의 기본 접근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왜곡되고 형해화된 섹슈얼리티 관념의 강요와 범람에 맞서 사람들이 더 자유롭게 섹슈얼리티를 표현하는 것을 권장하고, 진정한 섹슈얼리티가 무엇인지 더 개방적으로 얘기할 수 있게 한다.

예컨대 앞서 말씀드렸듯이, 자본주의 하에서는 비정상으로 여겨지는 섹슈얼리티도 상품 형태라면 노골적으로 표현돼도 괜찮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포르노에서 배우가 레즈비언을 연기하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의 레즈비언이 거리에서 손잡고 다니며 애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고무해야 합니다.

사회주의 운동 등 급진적 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성의 자유는 중심적 요구 중 하나였습니다. 1960~70년대 성해방을 요구하며 싸운 많은 활동가들은 자신들이 완전히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전에 러시아 혁명이 쟁취한 성해방의 기억이 스탈린주의 탓에 완전히 지워져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리고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의 영향으로 미국 공산당 전통이 단절돼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실라 로보섬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영국과 미국의 수많은 노동운동 투사들이 여성 권익을 위한 훌륭한 투사이기도 했다는 점을 잘 보여 줬습니다[《아름다운 외출 – 페미니즘, 그 상상과 실천의 역사》(삼천리)를 보시오]. 또한, 1917년 러시아 혁명 때 볼셰비키는 여성 차별의 물질적 기반인 가족을 변혁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맑시즘2016 주디스 오어 연설②: 여성 차별과 해방’을 보시오.)

물론, 러시아 혁명 직후 최우선 과제는 반혁명에 맞서고 물질적 궁핍을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짧은 기간이었을지라도,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실험이 있었어요. 예컨대 동성애가 더는 불법이 아니었고, 낙태가 전면 합법화되고, 누구나 원하면 이혼할 수 있게 됐습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섹스는 부끄럽거나 죄스러운 일이어서는 안 된다. 섹스는 건강한 유기체의 다른 필요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일이어야 한다.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고 목마를 사람이 물을 마시듯이 말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성교육을 하고 학생들이 성에 대해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도록 크게 장려됐습니다.

물론 혁명의 성과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스탈린 반혁명 이후 여성들은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야 했고, 아이를 많이 낳으면 훈장을 받는 세상이 됐습니다. 여성들에게 섹스는 즐거움이 아니라, 다시 임신·출산을 위한 것이 돼 버렸습니다.

사회 변혁과 섹슈얼리티

저는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책갈피)에서 이런 혁명적 시기에 사람들이 성에 대해 더 개방적으로 변하며 새로운 실험을 하는 사례를 많이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혁명적 시기뿐 아니라 양차대전 사이에 일어난 변화도 사람들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당시에 노동계급·중간계급 여성들이 쓴 수기를 읽어 보면, 마치 그들이 전쟁을 정말 좋아하기라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인생이 확 바뀌는 경험을 반기며 기록했기 때문이죠. 남성들이 다 전쟁터에 나가자, 갑자기 여성들이 대거 일자리를 갖게 되고, 여자들끼리 술집에서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기도 하고, 재정적으로도 독립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 수기들에서는 정말 마치 전쟁이 여성을 해방시키기라도 한 듯 여기는 정서를 느낄 수 있습니다.

1930년대에는 피임 정보가 실린 책자가 출판됐습니다. 또, 양차대전 중에 혼외 성관계를 맺는 여성의 비율이 급증했는데, 이 비율은 종전 뒤로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1945년 영국에서 태어난 아이의 3분의 1이 싱글맘이 낳은 아이였습니다. 제가 앞서 혼외 임신을 한 여성들이 아이를 입양 보내거나, 외할머니가 아이의 엄마인 것처럼 행세하는 일이 많았다고 말했죠. 그렇게 혼외 임신이 많았던 것도 여성들이 전쟁 기간 동안 해방감을 느껴서 집밖에서 더 많은 관계를 맺었던 것의 결과입니다.

모든 위대한 사회 변혁기에는 여성 문제가 전면에 대두됩니다. 성의 자유 문제도 전면에 대두됩니다. 앵겔스도 자유 연애가 모든 위대한 혁명의 중심 요소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진정한 성해방을 이루려면, 실제 혁명이 필요합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해방은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회주의 하에서 사람들이 정말 자유롭게 자신의 다양한 섹슈얼리티를 표현할 수 있을 때의 성해방은 자본주의 하의 ‘성해방’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질의 응답

Q 성 상품화에 반대하는 아래로부터의 운동들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런 운동의 사례를 더 듣고 싶습니다. 또, SWP는 그런 운동들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도 궁금합니다.

‘헤픈 여자처럼 입고 걷기’(slutwalk) 운동이 있습니다. 이 운동은 캐나다에서 시작됐습니다. 어느 경찰관이 대학에서 여성 안전에 대해 강연할 때 “헤프게 입지 마라. 그러면 성폭력 피해로부터 스스로 지킬 수 있다”고 말한 것이 불씨였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은 세계로 번져 나갔습니다. 영국에서 일부 페미니스트들은 ‘헤픈 여자’(slut)라는 낱말을 운동이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문제제기했습니다. 그런 성차별적인 말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SWP는 이 운동에 흠뻑 뛰어들었습니다. 우리도 ‘헤픈 여자’ 같은 성차별적 낱말을 운동의 언어로 쓰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봤어요.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배너를 내걸고 적극 참여했어요. 이 운동은 진정으로 아래로부터의 운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성폭력이 여성 책임이라는 관념에 맞서 여성들의 분노가 분출한 운동이었고,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인 운동이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운동 내에서의 표현조차도 왜곡되기 일쑤입니다. 예를 들어, 일부 여성들이 ‘우리가 무엇을 입든지 우리 자유다’라는 의견을 표현하려고 거의 실오라기만 걸치고 시위에 참가했는데, 주류 신문들을 장식한 시위 사진은 바로 그 여성들의 사진이었죠.

어쨌든 이 운동의 활력과 기운이 워낙 건강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운동과 관계를 맺는 것은 매우 쉬웠습니다. 그와 대조적으로 ‘밤길 되찾기 운동’은 관계 맺기가 까다로웠어요. 이 운동은 원래 여성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초에 탄생한 운동인데, 최근 페미니즘이 재부상하며 다시 등장했습니다. ‘밤길 되찾기 운동’은 여성들이 성폭력 걱정 없이 밤길을 다닐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이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런던 소호의 성인용품 상점 밀집 구역을 행진하면서 그 상점들의 문에 본드칠을 해서 사람들이 출입하지 못하게 하곤 했습니다. 이 운동이 오늘날 다시 부상했는데, 남성의 참가를 불허하고 ‘모든 남자들이 문제다’ 하는 생각이 큽니다.

또 다른 사례로는 ‘이의를 제기하라’(object) 운동이 있습니다. 성차별적 표현에 맞서 목소리를 내자는 취지의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몇 년 전 영국에서 열린 미스월드 미인 선발대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물론 이때도 우리는 대회 참가 여성들을 공격하는 것처럼 비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이 시위는 굉장히 성공적이었고 페미니스트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는 기회가 됐습니다. 또, 언론에 보도도 많이 됐어요.

‘헤픈 여자처럼 입고 걷기’ 운동에 대해 한 가지 덧붙이면, 좌파 중 SWP만이 이 운동에 처음부터 적극 참여했습니다. 이전 세대 페미니스트들은 많은 경우 ‘헤픈 여자’라는 낱말에 거부감을 느껴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우리도 ‘헤픈 여자’라는 낱말 사용은 진짜 문제라고 봤지만, 이 운동에 적극 뛰어든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좌파들도 결국 이 운동에 참가했는데, 2주년 때였습니다. 이 운동이 확 떠오른 것을 보고 나서야 뒤늦게 움직인 것이죠.

Q 오늘날 한국에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섹슈얼리티 쟁점에는 관심을 많이 두지만,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겪는 차별에 맞서 싸우는 투쟁에는 큰 힘을 기울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향이 영국에도 있는지, 그렇다면 이런 경향을 극복하게 하는 데서 SWP가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최근에 벌어진 중요한 투쟁은 무엇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영국에서는 페미니즘이 처음부터 좌파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급진좌파의 세가 컸고, 노동조합 조직도 많아서 영국 페미니스트들은 초기부터 계급 문제를 중요하게 봤습니다. 근본적 페미니스트들조차 여성 노동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봤습니다. 예컨대 1970년대 초 사무실 청소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는데, 페미니스트들이 파업 피켓 대열에 결합해 리플릿을 뿌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미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여성운동의 기반이 중간계급 특권층 여성들이었어요. 그들은 대학을 다닌 여성들이었습니다. 여성 대졸자는 비록 그 비율이 커지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사회에서는 소수였고, 전문직으로 나아갈 기대가 높았던 층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신좌파가 성차별적 태도를 공유했다는 것도 [미국 여성운동의 성격 형성에 작용한] 한 요인이었습니다. 스탈린주의의 사회주의 왜곡 때문에 사람들이 소련을 사회주의로 봤고, 미국의 신좌파는 여성 차별에 맞선 예전 좌파의 전통을 이어받지 못했어요. 그래서 기존 사회의 성차별적 관념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1930년대에만 하더라도 미국에는 대중적 공산당이 있었고 흑인들도 포함돼 있었어요. 공산당은 굉장히 활기 넘치는 조직이었는데, 스탈린주의에 타협하고 매카시즘 탄압으로 파괴돼 그 전통이 완전히 단절됐습니다. 이렇게 전통과 완전히 단절되거나 스탈린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죠.

이처럼 미국에서는 좌파의 전통이 끊겼지만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초기 미국 여성운동을 주도한 많은 활동가들이 이른바 ‘붉은 기저귀’ 세대였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공산당 운동에 함께한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죠. 여성들도 남성들과 평등하게 목소리를 내도록 장려받는 분위기의 집안에서 자란 사람들이었어요. 이 사실은 초기 미국 여성운동 활동가들의 집안 배경을 조사한 사회학자들에 의해 의도치 않게 발견됐습니다. 이처럼 20세기 초 사회주의의 여성해방 지향 전통이 면면이 살아남아서 여성해방 활동가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정말 영감을 주는 사실입니다.

다시 영국의 여성운동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영국 여성운동은 비록 미국 여성운동을 모델로 삼았지만 완전히 달랐습니다. 영국 여성운동에서 계급 문제는 매우 핵심적인 쟁점이었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 이래 영국 노동조합 내에서는 ‘양성 평등’ 관념이 일종의 상식처럼 됐습니다. 많은 노동조합에 여성위원회가 있고 여성 쟁점을 다루는 토론회도 엽니다. 특히 조합원의 다수가 여성인 공공서비스노조(UNISON)나 교사노조 같은 노조에서는 ‘양성 평등’이 완전히 상식처럼 통합니다. 공공서비스노조는 여성 차별에 관한 연설대회도 개최합니다. SWP 당원이 그 대회에 나가 ‘최고의 여성해방 연설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2011년 공공부문 노동자 2백60만 명이 하루 파업을 벌였습니다. 그중 대다수가 여성이었고, 그래서 이 파업은 영국 역사상 최대의 여성 노동자 파업으로 기록됐습니다.

Q 성 상품화가 만연해지는 것과 성범죄가 증가하는 것 사이에 유의미한 인과관계가 있나요?

까다로운 문제입니다. 성범죄가 실제로 얼마나 일어나는지 잘 알 수 없어요. [통계상] 성범죄 발생 건수가 높아지는 것은 실제 범죄의 증가를 반영한 것일 수도 있고, 신고가 접수되는 가능성이 높아지거나 여성들이 더 자신 있게 범죄를 신고할 수 있게 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성의 상품화와 소외가 심해지면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를 검증하기는 힘듭니다. 이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이 별로 없어요. 과학적 분석이라고 할 순 없지만 사람들의 진술에 근거한 연구가 있기는 합니다. 그에 따르면, 젊은 세대 사람들이 전보다 포르노를 더 많이 접하게 되면서, 포르노가 묘사하는 성행위 방식이 젊은 사람들의 성 인식에 전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성 상품화의 확산으로 성범죄가 증가한다고 단순히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또 있습니다. 과거에 드러나지 않은 성범죄가 생각보다 훨씬 많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최근 영국에서는 지미 새빌이라는 저명 인사가 1970~80년대에 여성 아동과 청소년 수백 명을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 이 범죄를 은폐하거나 같이 성폭력에 가담한 사람들이 사회의 권력층이었어요. 온갖 권력기관에 있는 자들이 끈끈하게 얽혀서 이런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보면서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습니다. 지미 새빌의 범죄가 드러난 뒤, 당시에 새빌에게 피해를 당했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나왔습니다.

여성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성추행이 이 사건의 실체인데, 파면 팔수록 어마어마한 은폐 시도가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지난 2년 동안 영국 사회를 계속 떠들썩하게 했는데, 아직까지도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새로 생겨나고 있어요. 하여간 지미 새빌의 성추행을 가리는 데 보수당 정치인과 교회 등 온갖 권력자들이 체계적으로 얽혀 있었어요. 이 사건의 전말은 아무리 파도 다 드러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일부 우익 평론가들은 1970년대에 이런 아동 성추행이 벌어진 것이 당시 사회가 [성적으로] 개방적이게 됐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성적 개방 증대가 이런 문제를 일으킨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우리는 그와 반대로 주장합니다. 오히려 당시 사회는 너무나 폐쇄적이어서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고도 말하지 못한 것이고, 이제야 그나마 더 개방돼서 사람들이 당당히 피해를 밝힐 수 있게 된 거라고요.

여성이 대상화되면 남성들이 자동으로 쉽게 성범죄자로 돌변한다는 식의 단순한 설명을 경계해야 합니다. 물론 그것도 한 가지 요소로 작용할 수 있겠지만 더 복잡한 과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Q 10대의 성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영국에서는 법정 성인 연령이 16세입니다. 그래서 16세가 되기 하루 전인 여성과 16세가 된 남성이 성관계를 맺으면 강간죄가 성립합니다. 16세에서 하루라도 모자라면 법적으로 동의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물론 우리는 ‘10대들이 현실에서는 섹스를 많이 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동의 하에 안전하게 섹스할 수 있도록 공공연히 제대로 된 논의를 해야 한다’ 하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까다로운 경우도 있습니다. 나이 많은 남성이 취약한 지위에 있는 10대 여성을 성적으로 이용하려는 경우입니다. 지미 새빌 스캔들의 핵심은 지배계급에 속한 남성이 교회의 주일학교나 보육원이나 학교에서 여성 아동과 청소년을 성추행한 것입니다. 취약한 아동이 성인 남성에게 노출될 수 있는 위험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파들은 나이 많은 성인 남성이 어린 남성을 이용한다면서 게이 남성을 표적 삼아 공격합니다. 그 때문인지 맑시즘2016에서도 미성년자에 대한 성행위를 어떻게 봐야 하느냐는 물음이 성소수자 관련 워크숍에서 제기됐죠. 그런데 이 문제는 짧은 시간에 답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영국에서는 게이 남성 간 섹스는 1967년에 합법화됐어요. 그러나 상호 합의로 섹스할 수 있는 법정 연령은 이성애자들의 기준보다 엄청 높았습니다. 게이 남성 간 합법적인 섹스는 21세 이후에나 가능했다가, 나중에 18세로 낮춰지고, 최근 들어 16세로 같아졌어요. 성소수자 운동이 크게 벌어지고 게이 남성들이 ‘왜 성소수자는 의사 능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느냐’며 [법정 연령 하향을] 요구하며 싸운 결과입니다. 아마 지배계급 눈에는 성소수자들이 섹스하는 것은 사악한 나이든 사람의 꼬임에 넘어간 결과로 보이겠죠. 우리는 10대 성소수자들도 자유롭게 합의해 섹스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성인의 아동 성추행은 이성애자 남성이 여자 아이들을 겨냥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게이 성인 남성이 위험하다는 관념은 근거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Q ‘헤픈 여자처럼 입고 걷기’ 운동을 두고 영 페미니스트들과 올드 페미니스트들 사이에 미묘한 차이가 있고, 올드 페미니스트들은 이 운동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차이가 ‘야한 문화’ 전체를 둘러싸고도 나타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한국에서도 몇 년 전에만 해도 폴댄스는 스트립 댄스의 일종으로 인식됐지만, 최근에는 텔레비전에서 폴댄스 추는 게 장려될 정도로 ‘야한 문화’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어요. 올드 페미니스트들의 관점에서는 이런 현상이 여성의 존엄을 떨어뜨리는 거라고 생각할 거 같아요.

[‘야한 문화’를 둘러싸고]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인 것 같습니다. 매 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은 이전 세대 페미니스트와 구별 짓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규정합니다. 영 페미니스들은 올드 페미니스트들이 중간계급 백인 여성들의 이해만 대변하는 것 같다고 여기며, 제2물결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좋지 않은 편견도 가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생각이 꽉 막혀 있다는 것입니다. 겨드랑이 제모도 안 하고, 헤어스타일도 ‘구리다’는 것이죠. 그에 대한 반발로 제3물결 페미니스트들은 ‘우리는 섹시하고 쿨하고, 멋들어질 수 있어’라면서 ‘섹시함’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는데, 실제로는 매우 왜곡된 형태의 ‘섹시함’을 받아들인 것이죠.

2000년대 초 ‘야한 문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많은 올드 페미니스트들은 이 현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속된 말로 ‘멘붕’이었죠. 올드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이런 현상을 다루는 책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다들 현상을 기술만 하고 설명하지는 못했어요. 우리가 여성해방을 이루려고 그렇게 싸웠는데, 요즘 애들은 폴댄스나 추고, 이게 뭐냐는 것이죠.

더 최근 들어서는 ‘야한 문화’에 비판적인 새 세대 페미니스트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상호교차성 개념을 받아들이며, 제3물결 페미니즘의 ‘쿨함’과 ‘섹시함’에 대한 수용이 사실은 전혀 ‘쿨’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질문자가 말씀하셨듯이 폴댄스가 주류화된 것은 커다란 변화입니다. 예전에 랩댄스 클럽들은 뒷골목에나 있었고, 남자들만 가고, 남자들도 드러내고 가기는 민망한 곳이었는데, 요즘에는 대로변에 버젓이 자리잡고, 호화스러운 간판을 달고, 남녀가 같이 가기도 하는 장소가 됐습니다.

제가 한 도시에서 출판 기념 저자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강연 끝나고 젊은 여성이 저한테 와서 ‘폴댄스 추는 여성들을 공격해선 안 되는 거 아니냐’ 하고 질문했습니다. 저는 폴댄스 추는 여성들을 문제 삼지 않는다고 답변했어요. 그런데 그 여성은 대학 동아리 같은 곳에서 여성들끼리 배우면서 여가를 즐기는 것과 클럽에서 남성들의 음란한 시선에 노출된 채로 하는 것이 다르다고 여기고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여성들끼리 개인적으로 즐기더라도 폴댄스의 기원이 성 상품화에 있는 것이므로, 둘 사이의 연관성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여성도 제 취지를 이해했습니다.

개인적 취미로 하는 것일지라도 폴댄스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남성들은 하지 않아요. 폴댄스의 핵심은 여성들이 몸을 굽히고 비틀면서 남성들을 성적으로 흥분시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폴댄스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Q 비욘세나 엠마 왓슨 같은 유명 연예인들이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것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나요?

여성 주제를 토론할 때마다 비욘세뿐 아니라 킴 카다시안 얘기도 많이 나와요. 이런 사람들이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엠마 왓슨이 유엔에서 연설한 것을 보면, 내용상 주류적 페미니스즘의 관점이고 영향력이 그렇게 크다고 할 수도 없어요. 그럼에도 그들이 단지 ‘섹스 심볼’로 대표되는 게 아니라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봅니다.

비욘세의 사례는 흥미로워요. 한편으로 비욘세가 미국 슈퍼볼 경기 개막 공연에 나와서 흑표범당을 모티브로 하는 공연을 해 화제를 모으거나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을 지지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비욘세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모순적입니다. 비욘세 자신은 부유하고 뭐든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여성이고, 그러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표현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표현 방식은 ‘섹스 심볼’로서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모순된 부분도 있습니다.

정리 발언

10여 년 전 ‘야한 문화’가 처음 떠오를 때 섹슈얼리티, 성적 해방, ‘야한 문화’에 대해서 강연을 하면 많은 젊은 사람들이 참가해서 자기 삶에서 경험하는 것을 얘기하며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굉장히 풍부한 토론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개인적 경험, 그에 대한 분노, 불편한 심정을 수없이 토로했어요. 우리는 이런 개인 경험들을 사회?체제와 연결시켜 분석하고 설명을 해야 합니다. 이는 사실 주요 페미니스트 사상가들이 거의 하지 않고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젊은 사람들과 대화할 때, ‘어떻게 그럴 수 있니?’ 하는 반응을 보이거나 우리 관점에서 문제적인 것들을 금지하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됩니다. 새로운 현상을 분석해 설명을 제공하려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개방성을 요구해야 합니다. 가령 학교에서 성교육을 확대하고 성에 대한 얘기를 더 공공연하게 할 수 있게 하라고 주장해야 합니다.

개인 경험을 더 큰 사회에 대한 분석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경험’에서 ‘마르크스’로 건너가도록 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통역 천경록 / 녹취 소은화·연은정

입력 2016-08-17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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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여성의 불평등한 현실

이정구(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소속 연구원)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듬해인 1950년 5월 1일 중국에서는 농민들의 염원인 토지개혁과 더불어 ‘하늘의 절반인 여성들의 해방’을 가져다준 새 혼인법이 공표됐다. 혼인법은 부권으로부터 여성의 해방을 천명하면서, 일부다처제나 매매혼 같은 봉건적 혼인제도를 폐지하고, 혼인의 자유, 일부일처, 남녀평등의 원칙을 확립했다.

ⓒ사진 출처 Robert Scoble (플리커)

당시 중국 공산당의 2인자인 저우언라이의 부인이자 전국부녀연합회*의 부위원장이었던 덩잉차오는 “여성해방은 여성에게 최우선의 과제”라고 강조하며 공산당 간부들에게 혼인법을 학습시키고 남녀 교제의 자유와 미혼 남녀의 연애의 자유를 강조했다.

전국부녀연합회

1949년 3월 제1차 중국부녀 대표자대회가 열렸고, 그 결과 중화전국민주부녀연합이 결성됐다. 1957년 중화인민공화국 전국부녀연합회(부녀련으로 약칭)로 이름을 바꾼 이 조직은 중국에서 여성을 대표하는 유일한 공적 여성조직이다. 그 목적은 덩잉차오가 대표자대회에서 한 보고에 잘 나타나 있다. “임무는 주로 여성을 동원하고 조직하여 도시의 경제 건설에 적합한 각종 생산 사업에 참가시키는 것이다.”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 시기에 사회적으로는 남녀평등의 목소리가 커졌지만 오히려 이 조직은 붕괴 상태에 있었다. 여성을 생산의 도구로 여기는 태도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1978년 부녀련은 여성 권리의 옹호자처럼 비치며 재건됐고, 1995년에는 제4회 국제연합 세계여성회의의 NGO 포럼을 주관했다. 부녀련은 <중국 부녀>를 발간한다.

신중국은 등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강력한 국민국가를 서둘러 건설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다. 더욱이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보며 마오쩌둥은 소련의 간섭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 결과가 1955년부터 시작된 인민공사 추진과 1958~60년의 대약진운동이었다.

1955년 마오쩌둥은 ‘”여성의 노동전선 진출”에 부쳐’라는 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위대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많은 여성 대중을 생산 활동에 참가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큰 의의가 있다. 생산에서는 반드시 남녀의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해야 한다. 참된 남녀평등은 사회주의 개조를 위한 전체 과정에서 제일 먼저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진정한 관심사는 남녀평등이나 여성 해방이 아니었다. 여성 노동력을 생산성 향상 과정에 활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1958년 대약진운동을 시작할 당시 “사람의 입은 한 개지만 손은 두 개다” 하며, “생산 향상에서 6억의 인구는 결정적 요소”라고 생각했다. 인구 증가를 위해 여성들의 출산이 장려됐다.

1959년 인민공사가 본격화되면서 전국 여성의 95퍼센트가 인민공사에 소속돼 농업, 어업, 목축업, 임업 등에서 남성 노동자들과 큰 구별 없이 노동을 했다. 당시 가사노동을 줄여 여성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공동 식당, 공동 세탁소, 공동 탁아소 등이 설치됐다. 또, 여성을 끌어내기 위해 “시대는 변했다. 남녀는 평등하게 됐다. 남성 동지가 할 수 있는 것은 여성 동지도 할 수 있다”는 주장이 널리 확산됐다. 이런 배경에서 ‘철의 처녀’나 ‘맨발의 의사’ 등 영웅적·헌신적 여성이 많이 배출됐다.

그러나 이런 겉모습과 달리 인민공사 내에는 여성차별이 구조화돼 있었다. 인민공사에는 ‘노동점수체계’가 시행됐는데, 여성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하더라도 하루 7~8점밖에 벌 수 없지만 남성들은 9~10점을 벌 수 있었다. 마오쩌둥이 말한 세 가지 격차(정신노동과 육체노동, 도시와 농촌, 노동자와 농민) 외에도 또 다른 격차가 있었음을 뜻한다.

이렇게 여성 차별적 노동점수체계는 여성이 육체적으로 남성보다 약하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이유로 정당화됐지만, 남녀평등의 구호 하에 중공업 육체노동 일자리에 여성 노동자들을 활용하는 것과는 모순됐다. 많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렇듯이, 중국에서도 저임금 일자리는 대부분 여성이 차지했고, 국유기업에서 해고할 때도 여성이 우선 대상이었다.

개혁 개방과 여성 처지의 변화

1978년 인민공사가 해체되고 시장경제가 발전하면서 전통적 성별분업과 함께 매매혼, 축첩, 성매매 등 악습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또한 사회 전반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이 강화됐다. 여성은 계절에 관계없이 늘 치마를 입어야 한다거나 여성은 복장을 단정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횡행했다. 이 주장은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이라는 논리로, 또 회사 이미지 향상이라는 논리로 정당화됐다. 여성은 부드럽고 우아하게, 남성은 낮고 힘찬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는 주장, 여성은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몸과 목소리를 꾸며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최근 후난성에 속한 한 현의 책임자는 이런 현실을 지적했다. “우리 현에 있는 젊은 여성 7만 명이 광둥에 가서 일합니다. 그들 중에서 최소한 1만 명은 매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경제학자 양판(揚帆)은 전국에 ‘유흥업소 접대부’ 여성이 5백만 명 정도 있으며, 이것이 하나의 성 산업이 됐다고 주장한다. 절대 수치로 보면, 중국이 성매매 여성 수에서 세계 최고라는 주장도 있다.

1978년 개혁·개방 정책을 채택할 당시 중국 지배자들이 직면한 문제 중 하나는 경제성장으로 먹여살릴 수 있는 규모보다 더 많은 인구 증가였다. 대약진운동 때와 달리 이제는 많은 인구가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한 가지 방편이 한 자녀 정책이었다. 1980년 개정된 새 혼인법은 제2조에 “계획출산을 실행한다”는 문구를 삽입했고, 제12조에 “부부 쌍방은 … 계획출산을 실행하는 의무를 진다”고 명시했다. 새 혼인법은 “남성이 여성 가정의 일원이 될 수 있” 고(데릴사위제), 아이가 부모 중 어느 쪽의 성을 붙여도 무방하다고 규정했다. 중국의 전통적인 부계제와 남아선호 관습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여성과 여성 노동자의 처지가 중국 지배자들의 말과 달리, 남녀평등이 아니라 경제 상황에 종속돼 있음을 1980년대 중반에 벌어진 ‘부녀회가’(婦女回家) 논쟁이 여실히 보여 줬다. 부녀회가의 핵심은 노동력은 많아졌지만 일자리는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여성들이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1988년 전국부녀연합회가 발간한 <중국부녀>는 시장개혁으로 부유해진 농촌에서 여성이 전업주부로 전향한다는 르포를 자주 실으며 부녀회가를 강조했다.

이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어떤 여성들은 “자식을 가진 여성을 집으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남성 중심으로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재편성하여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의도”라고 비판했고, 또 다른 여성들은 “경제적 자립이 여성의 인간으로서 자립과 발전의 기반이 된다”고 주장했다.

현재 부녀회가 논쟁은 수그러들었지만, 파트타임, 계절성 취로, M자형 취업 등의 일자리에서는 여성 노동자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오늘날 중국 여성의 현실

2000년대 들어 중국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다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해졌다. 농촌의 잠재적 실업자들(농민공)이 이 필요를 충족시켰다. 농민공의 절반은 여성이다. 그리고 중국 경제 발전의 이면에 저임금 여성 노동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폭스콘 공장이 잘 보여 준다. 폭스콘은 애플의 부품업체로 중국에 네 개의 공장을 보유하고 있는데,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 80만 명의 대다수가 여성 노동자이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증대하고 여성의 경제적 자립이 늘어나도 남녀 간 격차는 여전하다. 농민공 내에서도 여성의 임금은 남성의 77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 중국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증대하면서 여성의 권리가 확대되고 여성에 대한 편견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양성평등은 여전히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아래의 사례는 여성 차별이 만연해 있는 중국의 현실을 일부만 보여 줄 뿐이다.

첫째, 여성의 비정규직 비율과 실업률이 남성보다 높다. 전국 도시 여성 실업률이 2005년 50퍼센트, 2006년 48퍼센트로 상당히 높다. 2000년 15~60세 여성의 실업률은 9.64퍼센트로 남성 실업률의 1.91배에 이른다.

둘째, 남녀 간 소득 격차도 여전하다. 도시 여성 노동자의 평균 소득은 1988년에는 남성의 84퍼센트였지만, 1995년에는 82퍼센트, 2003년에는 81.9퍼센트로 계속 줄었다. 전국으로 보면, 여성 노동자의 월평균 소득은 2005년 남성의 67.75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농촌 여성은 도시 여성보다 소득도 낮고 남성과의 임금 격차도 더 크다. 2005년 도시 여성의 소득은 남성의 72퍼센트였지만 농촌 여성은 65퍼센트였다.

셋째, 노동시장에도 남녀 불평등이 존재한다. 국유기업이 사영기업보다 남녀 임금 격차가 작긴 하지만, 국유기업이나 집체기업의 구조조정 일차 대상자가 여성이라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는 광석과 함께 강철처럼 단련된다" 1959년에 만들어진 포스터.

넷째, 사회보장에서 여성은 불이익을 받는다. 여성은 규정이나 관례에 따라 남성보다 5~10년 일찍 퇴직한다. 여성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제공받는 의료비, 의료보험, 퇴직금, 노후연금, 실업수당, 상해보험, 유급휴가, 주거비수당, 유급병가 등을 남성 노동자들보다 적게 받는다.

여성의 농업 의존도가 크다는 점도 소득과 사회보장 등 사회경제의 자원분배에서 여성이 불리함을 의미한다. 2005년 수정된 부녀권익보장법과 2003년 농촌토지청부법은 여성도 남성과 같은 토지사용권을 가진다고 규정해 놓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소득이 호구 단위와 호주 명의로 분배되고 있다.

다섯째, 여성의 빈곤 인구 비율도 남성보다 좀더 높다. 여성 절대빈곤 인구 비율은 2005년 8.48퍼센트, 2006년 7.3퍼센트로 남성에 비해 각각 0.28퍼센트포인트와 0.34퍼센트포인트 더 높다. 또 여성 저소득층 비율도 남성에 비해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렇듯 여성에 대한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차별과 억압이 존재하는 현실은 중국이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이며 착취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체제라는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입력 2016-08-31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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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내 ‘메갈리아 논란’

핵심 문제는 부당해고 항의 논평을 철회한 것

정진희

일지

- 7월 19일, 게임사 넥슨, ‘메갈리아 4’ 후원 티셔츠 인증사진을 이유로 한 성우를 해고함.

- 7월 20일, 정의당 문화예술위, 해고에 대한 항의성 논평 발표.

- 7월 25일, 정의당 상무위, 문예위 논평 철회 시킴 & 젠더TF 구성하겠다고 발표.

- 8월 16일, 정의당 젠더TF, 사업계획안 발표.

- 8월 25일, 정의당 상무위, ‘최근 당내 현안과 관련한 상무위원회 논의결과’ 발표.

- 8월 26~29일, 정의당 젠더TF 위원들, 7명 가운데 5명이 연이어 사퇴.

넥슨의 성우 해고에 항의해 정의당 문화예술위원회(이하 문예위)가 7월 20일 발표한 논평을 당 지도부(상무위원회)가 7월 25일 철회한 뒤로 정의당은 심각한 내홍을 겪고 있다. 최근 정의당 지도부는 “문화예술위원회 논평 및 메갈리아 사태를 사유로” 탈당한 당원이 8월 25일 현재 5백48명이라고 밝혔다.(탈당은 문예위 논평에 반발한 측과 지도부의 논평 철회에 반발한 측 양쪽 모두에서 일어났다.)

정의당 지도부는 젠더TF를 구성해 당내 갈등을 수습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급기야 8월 26~29일에는 젠더TF 위원 대다수(7명 중 5명)가 지도부에 항의하며 사퇴했다.

젠더TF는 정의당 지도부가 젠더 문제와 관련된 당내 이견을 좁히고 통일된 의견을 수립하겠다며 만든 기구이다. 원래는 8월 말에 젠더TF가 주관하는 공개 토론회를 열 예정이었다.

사임한 위원들은 상무위가 8월 25일에 젠더TF와 상의 없이 관련 성명(‘최근 당내 현안과 관련한 상무위원회 논의결과’, 이하 상무위 성명)을 발표한 것에 크게 반발했다. 당내 이견을 좁히기 위한 토론을 젠더TF 주도로 하자고 해 놓고 상무위가 입장을 발표해 젠더TF를 사실상 무시했다는 것이다.

몇몇 위원들은 상무위 성명 내용에도 반발했다. 가장 선명하게 반대한 위원들은 류은숙 여성위원장과 박지아 성평등강사단장이었다. 그들은 상무위 성명이 “극단적 미러링을 운운하며 여성운동을 갈라치고, 여성운동을 부정”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상무위 성명은 메갈리아의 “극단적 방식의 미러링과 무분별한 혐오에 대해서는 지지할 수 없고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을 먼저 밝힌 뒤, “메갈리아 현상이 출현하게 된 사회적 맥락과 배경에 주목”하며 “혐오와 차별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이라고 썼다.

진정한 쟁점

문예위 논평 발표와 철회 이후 정의당 안에서는 메갈리아에 대한 태도 문제가 핵심 쟁점인 것처럼 돼, 논쟁이 그것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 정의당이 메갈리아 친화적 정당으로 비치면 안 된다는 당 일각의 반발을 사실상 수용해 정의당 지도부가 문예위 논평을 철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메갈리아에 대한 태도 문제는 토론할 만한 쟁점이다. 그러나 정의당 지도부의 문예위 논평 철회의 본질적 문제는 부당해고에 항의하는 논평을 철회했다는 것이다.

넥슨에서 해고된 성우는 페미니즘을 표방한 티셔츠를 사 입고 ‘메갈리아 4’를 후원했다는 이유로 계약을 해지당했다. 즉, 넥슨이 자행한 해고는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한 완전히 부당한 해고였다. 메갈리아에 아무리 비판적이더라도, 메갈리아(나 그 분파들)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부당한 처우를 옹호하거나 묵과해서는 결코 안 된다.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정당이라면 견해와 사상에 따른 차별에 단호하게 반대해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넥슨의 부당해고에 항의한 문예위 논평을 철회한 정의당 지도부의 결정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일이다.

정의당 지도부는, “정의당은 여성주의 정당”(8월 29일 심상정 상임대표 상무위 모두 발언)이라며 진정한 문제를 회피하기보다는, 문예위의 부당해고 항의 논평을 철회한 것이 온당치 않은 결정이었음을 인정하고 그에 걸맞은 조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종합

메갈리아에 대한 주장들은 흔히 편향된 경향이 있다. 즉, 메갈리아 주장의 형식만을 보며 메갈리아를 ‘일베’ 같은 반동적 집단으로만 취급하거나, 메갈리아가 성차별에 반발한다는 점에만 주목하며 그 약점을 간과하는 것이다.

메갈리아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비판적 지지다. 메갈리아는 분명 성차별에 반대하는 페미니즘의 일부이다. 메갈리아는 남성잡지 《맥심》의 성범죄 미화 표지 전량 회수와 몰카 범죄 항의 같은 몇몇 쟁점에서 긍정적 구실을 했다. 사회에 퍼져 있는 여성 비하와 멸시, 여성 신체의 대상화, 여성 대상 범죄 등에 반발한다는 진정한 취지를 무시한 채 메갈리아를 ‘남성 혐오’ 집단으로 취급하는 것은 메갈리아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관점이 아니다. 거의 모든 쟁점에서 반동적인 일베와 달리, 메갈리아는 성차별 쟁점이 아닌 다른 정치적 쟁점에서는 상당히 이질적일 뿐 아니라 진보 성향의 지지자들도 적지 않다. 온라인 상의 느슨한 페미니스트 커뮤니티인 메갈리아를 파시스트 집단에 비유하는 것도 파시즘에 대한 몰이해를 보여 주는 것일 뿐이다.

물론 메갈리아는 남성을 모두 적으로 여기는 분리주의 성향이 매우 강해, 심지어는 성차별에 진지하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메갈리아의 ‘미러링’ 방식은 성차별에 맞서는 데 효과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 쉽다. 모든 남성을 적대시하며 욕설하고 조롱하는 방식은 후진적 남성을 설득하기보다는 소모적 논쟁을 부르기 일쑤다. 메갈리아 사이트에서 상당수가 성소수자를 비하하는 글을 올려 메갈리아가 결국 분열했음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메갈리아의 극단적으로 분리주의적인 페미니즘은 성차별이 어디서 비롯했고, 왜 유지되는지를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관계와 분리시켜 이해하다 보니 성차별을 끝장낼 수 있는 전략을 제시하기 어렵다.

메갈리아에 대해 지나치게 불비례적인 비판과 무비판적 지지가 아니라 이런 점들을 종합적으로 봐야 건설적인 토론과 논쟁이 가능할 것이다.

입력 2016-08-31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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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노삼성 직장 내 성희롱 사건 판결의 의의와 과제’ 토론회에 다녀와서

직장 내 성희롱은 여성 노동자의 중요한 노동조건 문제

이현주

8월 26일 ‘법원, 성희롱에 대한 사용자 책임과 사측의 ‘불리한 조치’를 인정하다 – 르노삼성 성희롱 사건 항소심 판결의 의의와 과제’ 토론회가 열렸다. 이 토론회는 ‘르노삼성자동차 직장 내 성희롱 사건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주최했다.

2015년 12월 18일 르노삼성자동차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가 가해자와 사측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2심 재판에서, 성희롱과 성희롱 신고 이후 각종 불이익 조처에 대해 법원은 가해자뿐 아니라 사측의 책임도 인정하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이후 사측의 상고로 사건은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이날 토론회는 사측의 책임을 인정한 2심 판결의 의의를 짚어보면서 동시에 한계와 보완책에 대해서도 논의하는 자리였다.

르노삼성자동차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은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에게 사측이 불이익 조처를 행한 대표적 사례다. 피해자는 2012년부터 1년 넘게 직속 상사인 팀장한테서 성희롱에 시달렸다. 고심 끝에 피해자는 사측에 성희롱을 신고했다. 그러나 돌아온 건 사직 종용, 따돌림, 허위사실 유포 등 감당하기 힘든 불이익 조처들이었다. 피해자가 법적 절차를 밟기 시작하자 부당 조처는 더 심해졌다. 징계, 핵심 업무 배제, 직무정지와 대기발령, 하위 등급의 인사고과 등등. 피해자를 도와 진술서를 쓴 후배 동료 역시 사측의 눈엣가시가 돼 징계, 대기발령, 직무정지, 형사고소 등의 대상이 됐다.

2심 판결 이후에도 불이익 조처는 지속되고 있다. 사측은 피해자에게 2015년 인사고과로 최하위 등급을 매겼다. 성희롱 피해를 신고하기 전인 2012년 피해자의 인사고과는 최상위 등급이었다. ‘저성과자 해고’를 가능하게 한 노동개악 지침 때문에 최하위 고과는 피해자의 실제 해고로 이어질 수 있다.

2심 판결은 가해자의 성희롱 행위에 대한 회사의 ‘사용자 책임’을 인정하고, 성희롱 피해에 대해 문제제기한 후의 업무 변경이 성희롱 피해자에 대한 ‘불리한 조치’임을 인정했다는 의의가 있다. 1심에서 법원은 단지 성희롱 가해자에게만 책임을 물었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김엘림 법학과 교수는 “우리 나라의 경우 [2002년 전까지] 사용자 책임이 논란된 모든 성희롱 사건에서 사용자 책임이 인정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면서 이는 “성희롱 사건에 있어 ‘사무집행과 관련한 해석(업무관련성)’을 매우 좁게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2002년에 와서야 사용자 책임을 인정한 판례가 등장하기 시작해, 8건의 사건에서 점차적으로 사용자 책임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이러한 경향들에 비춰 봤을 때 르노삼성 성희롱 사건의 경우 1심에서, 사용자 책임을 전혀 인정하지 않은 점은 1990년대 등장한 판례와 같은 수준으로, 시대를 역주행한 판결이다.”

업무관련성

법적으로 가해자의 성희롱 행위에 대한 회사의 ‘사용자 책임’이 인정되려면, 성희롱 행위와 사무집행(직무) 사이의 관련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동안 법원은 성희롱 행위가 가해자의 공식적인 직무범위와 직무권한 내에서 있었는지를 중심으로 ‘업무관련성’을 판단해 왔다.

가령 “과장이 식당 준비 작업을 하는 중인 계약직 직원의 손목을 잡고 안아보자며 실랑이를 벌이는 행위나 사무실에서 갑자기 여직원을 끌어안고 풀어주지 않는 행위, 비좁은 사무실에서 포르노그라피를 보거나 외모에 대해 비유를 하는 행위”는 “직무권한 내의 행위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용자 책임성을 인정받지 못했다.(한국여성정책연구원 구미영 부연구위원)

그러나 이번 사건에서 2심 재판부는 상급자가 부하직원에게 행한 성희롱은 그 자체로 “업무관련성”이 있고, 따라서 회사의 책임이 인정된다고 판결했다(“부하직원의 업무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급자가 그 부하직원에 대하여 직장 내 성희롱을 한 경우에는 그 자체로 직무위반행위”). 이 점에서 발표자들은 2심 판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2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원래 하던 핵심 업무에서 제외된 것이 남녀고용평등법을 위반한 ‘불리한 조치’에 해당한다며 불법행위에 대한 회사측의 책임을 물었다. 남녀고용평등법 제14조 제2항은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과 관련하여 피해를 입은 근로자 또는 성추행 피해 발생을 주장하는 근로자에게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조치를 해서는 아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사측이 성희롱과 관련되지 않은 다른 이유를 들어 징계를 하는 일들이 벌어졌을 때, 이를 ‘불리한 조치’임을 입증하기는 쉽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재판부는 성희롱 사건을 접수한 인사팀의 한 직원이 피해자에 대해 부정적인 해석을 덧붙여 사내에 유포했던 것도 불법행위라며 이것도 사측의 책임이라고 인정했다.

물론 2심 판결에는 한계도 있다. 재판부는 업무 변경을 제외한 그밖의 조처들 – 피해자에 대한 징계와 직무 정지, 대기발령 등 – 에 대해서는 성희롱 사건과는 별개라며 ‘불리한 조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발표자들은 이 행위들이 피해자의 문제제기 이후 보복성 조처들이었음에도, 재판부가 여전히 “불리한 조치”를 협소하게 해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피해자를 도우려다 부당한 처우를 당한 동료 노동자에 대해서도 남녀고용평등법 제14조 제2항의 보호 대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회사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불리한 조치”

이처럼 성희롱 피해자에 대한 불리한 조처들이 다양하고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피해자가 이를 증명하기는 어려운 경우가 많다. 직장 내 성희롱이 주로 사장이나 상사에 의해 벌어진다는 점 때문에 많은 피해 여성들의 문제제기는 묵살되기 일쑤다. 피해자가 도리어 인사상 불이익을 당하거나 피해자를 모욕하는 소문이 퍼지는 일이 아주 흔하게 벌어진다.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15년 성희롱 실태조사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78.4퍼센트가 성희롱 발생시 ‘참고 넘어간다’고 답했다. 또한 성희롱 발생으로 인해 직장을 그만두거나, 재직상태가 변화된 비율이 36.5퍼센트로 높게 나타났다.

이 때문에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젠더법학연구소 장명선 교수는 “불리한 조처에 대한 구체적 명시 및 규정, 조력자에 대한 불이익 조처를 막을 방안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직장 내 성희롱 문제는 여성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직결된 매우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다. 최근 김포공항 청소노동자들은 용역업체 관리자들의 성희롱을 폭로하기도 했다(관련 기사: 본지 179호 ‘임금 인상·인격적 대우 요구하는 김포공항 청소 노동자들 “우리는 소모품이 아니라 인간이다”’). 광주시와 전라남도가 공동 운영하는 장학시설인 남도학숙의 여성 노동자도 성희롱 문제제기 이후 계속되는 불이익에 맞서 싸우고 있다(관련 기사: 본지 174호 ‘남도학숙 직장 내 성희롱 사건 – 공공 기관 내 성희롱과 불이익 조처에 대한 철저한 진상 규명과 책임 있는 조처가 필요하다’).

르노삼성자동차 사례는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직장 내 성희롱과 그 이후 대처에서 드러나는 사측의 부당함을 집약적으로 보여 준다. 이 사건에서 직장 내 성희롱과 불이익 조처에 대한 사측의 책임을 철저히 묻는 판결이 난다면, 현재 직장 내 성희롱에 맞서 싸우고 있거나 싸우려 하는 여성노동자들에게 큰 용기를 줄 것이다.

법원에서 피해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적극 반영될 수 있도록 법·제도적 개선 방안을 지지하는 한편, 노동조합이 있는 경우에는 직장 내 성희롱이 노동조합의 쟁점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노동조합 조직을 동원해 투쟁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동료 여성 노동자의 성희롱 피해에 항의해 다른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가 함께 싸운다면, 경영진으로 하여금 노동자들의 항의가 생산에 미칠 악영향이나 이미지 실추 등을 고려해 성희롱 문제 해결에 나서도록 하는 압력을 만들어 낼 수 있다.”(관련 기사: 본지 166호 ‘직장 내 성희롱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입력 2016-08-31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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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차

여성 화장실·휴게실·샤워장 설치하라

독자편지 | 김경숙 (기아차 화성 사내하청분회 조합원)

최근 김포공항 청소 여성 노동자들이 임금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노동조합을 만들고 파업과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열악한 처우를 주저 없이 폭로하고 성추행 등의 만행에 울분을 토해내는 모습을 보면서, 이 투쟁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글로벌 기업 기아차에도 나처럼 화장실 청소를 하고, 식당, 차량검사, 도장, 플라스틱, 사무실 등 곳곳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있다. 화성공장에만 9백여 명이나 된다.

이 노동자들의 처지는 매우 열악하다. 특히 화장실을 청소하는 여성 노동자들은 휴게실도, 샤워장도, 여성 화장실도 없이 매일 곤욕을 치른다.

지난해 말 나는 용기를 내 이런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을 개선해 달라고 대자보를 부착하고 유인물을 뿌리는 등 항의 행동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교묘한 탄압을 받으며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현장의 많은 노동자들이 지지를 보내 줘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됐다.

이를 발판 삼아 올해 초 기아차지부 대의원대회는 여성 노동자 처우개선 사업을 벌이기로 확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사측은 내가 일하는 부서(소재공장)의 신축 건물이 완공되면 그 곳에 여성들이 사용할 수 있는 샤워장, 화장실, 휴게실을 설치하겠다고 약속했다. 노조(화성지회) 간부가 신축 건물 도면까지 보여 주며 이를 확인시켜 줬다.

그런데 반년이 넘게 시간이 흘러 소재공장 건물이 완공됐는데, 황당하게도 여성 휴게실과 샤워장은 아예 만들어지지 않았다. 화장실만 설치된 것이다. 화성공장 전체로 보면, 개선된 곳은 거의 없는 상태다.

지난 여름, 살인적인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그러는 동안 기아차 화성공장의 청소 노동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화장실 청소를 하고 나서 샤워는 고사하고, 에어컨도 없는 쪽방 같은 간이 휴게실에서 참고 또 참으며 지냈다.

△화성공장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용 화장실 내 한 칸을 여성 화장실로 사용하고 있다. ⓒ사진 제공 기아차 노동자

기초적 요구에 모두 나서야

그런데 막상 신축 건물에조차 편의시설을 마련하지 않은 것을 보면서, 사측에 심한 배신감이 들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지부·지회 집행부가 대의원대회 결정에 따라 여성 편의시설 마련을 위한 노력을 진지하게 기울이지 않은 것도 실망스러웠다. 사측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면 노조 차원의 공식적인 항의 행동을 조직해야 할 텐데, 아직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다.

기아차는 세계 5위의 자동차 기업이다. 사내유보금이 1백12조 원이나 되고, 본사 이전을 위해 한전 부지를 매입하는 데만 10조 원을 썼다. 정몽구 회장은 지난해 주식 배당금으로만 8백23억 원을 챙겼다고 한다. 이런 회사가 지금 몸을 씻을 곳도, 살인적인 더위를 피할 곳도 없는 여성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에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더는 이런 현실을 묵과해서는 안 된다. 노조가 항의 운동을 건설해 사측에 본때를 보여 줘야 한다. 여성 화장실, 샤워장, 휴게실 설치는 최소한의 근무환경을 갖추고 여성으로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한 기초적 요구다. 여성과 남성 노동자들이, 비정규직과 정규직 노동자들이 함께 사측에 맞서야 한다.

여러 괴롭힘과 약속 번복이 있었지만, 나는 이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내하청 분회와 정규직 지회·지부, 더 많은 동료 조합원들의 지지를 모아 함께 싸울 수 있도록 애쓸 것이다.

입력 2016-09-21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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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새 세대 페미니즘의 강점과 약점을 보여 주는 책

최미진

△이민경 지음, 봄알람, 2016

지난해부터 시작된 페미니즘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지지가 페미니즘 서적 출판과 판매의 급증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가 정식 출판사와 유명 서점 없이 개인들의 후원만으로 초판 5천 부를 찍고 그것이 5일 만에 동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이 책은 발간 한 달 만에 1만여 부가 판매됐다고 한다.

“성차별 토픽 일상회화 매뉴얼”을 표방하는 이 책이 유명 작가의 책이 아님에도 젊은 여성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은 이유는 그 세대 여성들 사이에서 그만큼 일상의 성차별에 대한 분노가 깊고 이런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20~30대 여성들은 이전 세대 여성들보다 비교적 평등하게 자라났고 평등에 대한 욕구가 크지만 사회에 나가면 여전히 여성에 대한 폄하와 무시, 광범한 성적 비하가 난무한 현실을 맞닥뜨리며 분개하고 있다. 특히, 일부 젊은 여성들은 자신들이 자주 접하는 온라인 환경에서 여성을 싸잡아 비하하는 얘기를 접하며 모욕감을 느끼고 있다. 게다가 ‘요즘도 성차별이 있냐?’, ‘오히려 역차별이 문제’라면서 페미니즘을 부당하게 공격하는 일부 남성들의 주장은 많은 여성들의 부아를 더 치밀게 만든다.

사실, 이 책은 본격 대화에 들어간 후의 매뉴얼보다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여성도 자신이 원치 않는 대화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누차 강조하는 앞부분에 훨씬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이것은 여성을 동등한 대화 상대로 존중하지 않거나 ‘토론’의 탈을 쓰고서 성차별적 주장을 하는 상대에게 필자가 얼마나 답답함을 느꼈는지를 짐작케 한다. 이것은 여성의 ‘NO’는 ‘NO’가 실현되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많은 여성들의 경험을 반영한다.

사실, 20대인 이 책의 필자와 여성 동료들이 겪은 경험(카페에서 회의 중 한 아저씨가 다짜고짜 끼어들어 회의를 방해해 여성들이 좋은 말로 대화를 거절하자, 그 남성이 반말과 욕설로 비난하며 훼방 놓은 사례)과 비슷한 일을 나도 겪었다. 이밖에도 이 사회에서 여성이라고 무시당한 경험이 한둘이겠는가. 이 과정에서 여성들이 위축될 수 있다. 나도 여성의 능동성을 고무하는 사회변혁 단체에서 여러 해 동안 활동하고 나서야 비로소 다양한 성차별적 상황에 굴하지 않고 비교적 잘 대처할 수 있게 됐다. 따라서 여성의 'NO'는 'NO'이며, 성차별주의자들에게까지 친절할 필요는 없고 맞서 싸워도 된다는 용기를 북돋는 것이 여성들에게 꼭 필요한 조언이라는 점에 공감한다. 많은 독자들이 공감과 통쾌함을 느끼는 부분도 바로 이 지점일 듯하다.

그런데  “한국 영 페미니스트의 정치적 감성”을 잘 보여 주는 책이라는 김현미 교수의 추천사가 말해주듯이 이 책에는 실전 지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여성혐오 사회’ 담론이나 메갈리아, 미러링 등 최근 페미니즘의 뜨거운 쟁점들을 다루고 있고, 책 전반에 걸쳐 여성 차별의 메커니즘과 그것에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에 대한 필자 나름의 방법론과 문제의식이 녹아 있으므로 이 점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차별과 혐오

필자는 한국의 상당수 페미니스트들이 그렇듯이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의 핵심 주장을 공유하는 듯하다. 즉, 광범한 여성 차별 현상을 모두 “여성 혐오”로 규정하면서, 여성 혐오는 공기처럼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고,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다양한 성차별 현상을 모두 ‘여성 혐오’라고 호명하는 것 자체가 차별에 맞서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고 본다. 여기에는 “아주 작은 여성혐오도 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작은 성차별조차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의도는 좋았다 할지라도, 혐오와 차별을 구분하지 않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가 “여성혐오 사회”라고 규정하는 것은 현실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가령, 필자는 여성의 말을 무시하는 것과 여성을 살해하는 것은 같은 “비탈”, 즉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여성차별적 사회라 할지라도, 모든 남성이 여성에 대해 사회악의 근원이라는 공포심을 가지거나 그래서 여성들이 이 사회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여기진 않는다. 또한, 심한 여성비하적 표현을 단지 온라인 익명 게시판에 끄적거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현실 세계에서 여성을 살해하는 사람은 더 극소수이다. 그럼에도 이 모두를 본질적으로 같은 선상에 있는 ‘혐오’로 보고, 남성 모두가 잠재적 가해자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이런 주장은 여성 차별에 반대할 수도 있는 남성들을 차별 반대 운동 쪽으로 이끌기보다는 오히려 밀어내는 효과를 내기 쉽다. 뒤에서도 더 다루겠지만, 이것은 여성차별의 근원이 어디에 있고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누구와 맞서 싸워야 하는지 하는 문제와도 연결돼 있다. (‘여성 혐오 사회’ 담론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내가 <노동자 연대> 176호에 쓴 ‘‘여성 혐오 사회’ 담론은 여성 차별에 맞선 운동에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는가? :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서평’을 참고하시오.)

그런데 필자는 ‘여성 혐오 사회’ 담론이나 ‘모든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견해가 어떤 진영에서 나왔는지를 구분하지 않은 채, 이런 주장이 결국 ‘여성 혐오’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손쉽게 일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성해방에는 아무 관심 없는 경찰이나 ‘일베’ 따위가 강남역 살인 사건을 뭐라고 규정했는지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여성 차별 반대 운동의 올바른 전략을 위해 우리 운동 안에서 진지하게 토론돼야 할 문제다. 사실, 이전에는 다수 페미니스트들도 “성차별”로 부르던 것들을 왜 얼마 전부터 갑자기 “여성 혐오”로 바꿔 부르게 됐는지는 그 용어의 사용자들이 제대로 설명해야 할 정치적 의무가 있다. “성차별”을 모두 “여성 혐오”로 바꿔 부르지 않았어도 이전의 여성운동이 차별에 덜 진지했던 것은 결코 아니지 않은가?

메갈리아와 미러링

한편, 필자는 여성 비하·혐오 표현을 남성에게 고스란히 돌려주는 메갈리아의 미러링 방식을 두고, 이런 ‘남성 혐오’ 때문에 ‘여성 혐오’가 더 심해졌다거나 ‘여성 혐오’와 ‘남성 혐오’의 무게가 똑같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그리고 지금껏 페미니스트들이 ‘점잖은’ 방식으로 주장할 때는 귀기울이지 않다가 미러링처럼 “저급하고 의미 없는 수”(필자 자신의 표현)에만 반응하는 것도 문제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 책은 미러링 방식이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고, 필자가 이 책을 처음 낼 때 속했던 페미디아(여성주의 정보생산자조합) 성원들의 인터뷰를 봐도 메갈리아보다는 “좀 더 정제된 언어”로 페미니즘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을 지향하는 듯하다.)

나 또한 여성 차별은 실제 현실에 물질적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여성 비하·혐오 발언과 그것을 흉내낸 남성 비하·혐오 표현의 무게가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남성들도 한 번 당해 봐라’ 하는 심정이 생겼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성차별주의자들이 메갈리아를 비판할 자격은 없다’고 항변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과연 메갈리아의 미러링 방식이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운동에서 효과적인 전술인지, 효과적이지 않다면 왜 그런지, 대안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토론해야 한다. 특히 일부 메갈리안들이 우리 사회에서 명백히 차별받는 집단인 성소수자와 장애인 남성까지 무차별적으로 비하하는 것은 결코 옹호할 수 없는 문제다. 이미 이 점을 둘러싸고 메갈리아는 분열을 겪은 바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성운동 내에서 미러링 방식의 유효성을 두고 이견이 있다. 미러링이 비효과적임은 “남성 혐오의 실질적인 힘은 아주 작아서 여성혐오의 뿌리에 스크래치도 내지 못하고 있다”는 필자 자신의 언급에서도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덧붙여야 할 것은, 미러링이 여성 차별을 완화하지도 못하면서 여성 차별에 반대하는 운동 내에서는 불필요한 갈등과 역효과를 낳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메갈리아 논쟁은 성 적대적인 분리주의 페미니즘이 과연 여성해방의 올바른 이론과 전략인가라는 문제와도 떼려야 뗄 수 없다.

개인의 정치학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개인의 정치학’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이것은 단지 이 책만의 특징은 아니고 오늘날 새 세대 페미니즘 지지자들이 정서적으로 강력히 이끌리는 경향인 듯하다.) 즉, 여성 차별 문제를 다룰 때 그 출발점과 종착점을 모두 개인들에게서 찾는다.

필자는 자기 주장의 근거로 여성 개개인의 경험과 직관이면 충분하다고 보는 듯하다. 차별이 유지되는 메커니즘에서도 (사회구조를 잠시 언급하긴 하지만) 결국 개개인들의 태도에 초점을 맞춘다. 가령, 차별에 의식적으로 도전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차별적인 기존 사회구조에 한 명분의 힘을 싣는다”고 본다거나 “개개인의 여성혐오는 사회 전반의 여성혐오를 공고히 하는 양분”이라는 주장은 사회를 개인의 행위의 합으로 보는 관점을 시사한다. 그래서 결국 모든 개인들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의 토대를 키웠거나, 자신과는 상관없는 문제인 양 가해에 일조한 채로 살아왔거나, 적극적으로 가해했거나, 셋 중 하나”로 분류된다. 차별의 근원이나 그것이 유지되는 메커니즘에서 자본주의 체제나 자본주의 국가 기구 등 사회구조가 하는 구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문제의 해결책도 개인들에게 맞춰져 있다. 개인의 삶 속에서 남성과 맞서 싸우는 것을 중시하며, 개인이 받은 차별의 경험을 말하는 것 자체를 주된 실천이자 변화의 동력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 책이 개인들과의 논쟁 기술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도 이와 관련 있어 보인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여성 차별을 개개인의 미시적 관계로 축소(환원)하지 않고, 사회를 전체적으로 분석하고 그 안에서 개인들이 어떤 구실을 하고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주목한다. 그래야만 개인 간의 관계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관점은 개인의 경험이나 구실을 인정하지 않고 사회 구조가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결정한다는 기계적 유물론과는 다르다. 우리는 개인들의 차별 경험이나 그로 인해 생기는 직관을 무시해선 안 된다. 특히, 차별을 직접 겪어 보지 않은 남성들이 여성 차별의 경험을 무시하면서 일방적으로 가르치려고만 드는 태도는 사절이다.

그러나 개인의 경험이 곧 온전한 진실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사회의 본질과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경험 상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진실은 반대이듯이 말이다. 또한, 개인들의 경험과 의식은 매우 불균등할 뿐 아니라 삶과 투쟁의 경험을 통해 변화하기 때문에 각자가 특정 시기에 가진 경험이 곧 사회 전체의 구조와 형상을 고스란히 축소한 것이 될 수 없다.

한편, 차별에 동참하거나 차별에 동조·침묵하거나 또는 차별에 무지한 개인들이 차별의 유지에 어느 정도 일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차별은 구체적 개인을 매개로 구현되고, 상당수 노동자들도 차별에 동참 · 방관한다는 점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차별을 유지하는 데서 엄청난 이득을 얻고, 그래서 차별을 체계적으로 유지해야 할 이해관계가 있고, 실제로 남녀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조건을 좌지우지하는 경제력과 강제력을 행사해 체계적으로 차별을 부추기고 있는 진정한 권력자들(세계 자본가들과 자본주의 국가)과 그런 이해관계와 권력이 전혀 없는 남성 노동자 개개인들을 똑같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

남성 노동자들이 차별을 직접 경험하지 않거나 차별에 적극 맞서 싸우지 않는다 해서 곧 그 차별을 유지하는 데에 이해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차별에 반대하는 것이 그들의 객관적 이해관계에 걸맞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대규모 사회적 분업 과정 속에서 집단적으로 일한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조건을 지키려면 동료들과 함께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투쟁해야만 한다. 노동자들의 이런 존재 방식은 계급이 왜 서로 다른 차별을 받는 사람들의 단결의 토대가 되는지를 설명해 준다. 노동자 계급은 그들이 그 내부의 차별을 용인하면 할수록 전체의 조건을 지키는 힘을 갉아먹기 때문에 차별에 반대하는 것이 유리한 독특한 피착취 집단이다. 노동자 개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상관 없이 말이다.

이것은 개인들의 차별적 태도가 차별적인 사회 구조의 토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반대라는 점을 보여 준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개개인의 의식을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사회변혁 활동가들은 이런 일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자연대가 신문을 발행하고 다양한 규모의 토론 모임을 꾸준히 개최하는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결국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인간들의 의식적인 노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전히 개개인들이 각자 의식을 깨우치려는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명백하다. 우리는 무중력 상태에 있는 게 아니고, 여성 차별이 자연스럽다고 부추겨지고 체계적으로 차별이 유지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강력한 자장 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간이 사회 변화의 주체이지만, 사회 변화는 개인주의적 방식으로 존재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개인들이 뭉쳐 조직을 만들고, 특히 자본주의의 심장인 이윤을 생산하는 노동자 계급이 집단적 투쟁을 해야만 그 속에서 변화의 핵심 동력이 나온다고 본다.

여성의 ‘NO’가 ‘NO’임을 분명히 자각하고, 차별을 용납하지 않고자 하는 여성들이 개인의 정치학에서 더 나아가 사회구조를 바꾸는 계급 정치학의 대열에 함께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이 체제에 깊이 뿌리 박힌 여성 차별에 맞서 더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투쟁할 전망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입력 2016-09-20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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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연한 기업 성차별

성차별은 체제의 문제다

이지원

사회 곳곳에서 여성들이 부당하게 차별받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한국은 2015년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세계 성평등 지수’에서 145개국 중 115위를 차지했다.

한국에서 여성들의 고등기관 진학률은 꾸준히 상승해 왔다. 2009년에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82.4퍼센트로 남성(81.6퍼센트)을 추월했다. 또한 여성들의 노동시장 진입은 지속적으로 늘어 왔다. 2015년 통계청의 조사를 보면, ‘여성도 직업을 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13세 이상 인구의 85.4퍼센트에 이른다. 이렇게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남녀 모두의) 의식이 변화하는 추세이지만,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겪는 차별은 여전하다. 역겹게도 기업들은 노동시장에서 온갖 성차별을 유지·조장하고 사회 전체에서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데 앞장서 왔다.

ⓒ인포그래픽 김준효 (크게 보기)

1987년에 만들어진 <남녀고용평등법>에는 “성별, 혼인 또는 가족 안에서의 지위, 임신 또는 출산 등의 사유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채용 또는 근로의 조건을 다르게 하거나 그 밖의 불리한 조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법이 제정된 지 30년이나 됐지만, 법과 현실 사이의 간극은 상당하다.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2002년 이래 부동의 1위다. 2013년 기준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는 36.1퍼센트로 OECD 28개국 평균(15.8퍼센트)의 갑절을 훌쩍 넘는다. 1989년에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이 법에 명문화됐지만, 기업들은 이런저런 꼼수를 부리며 차별을 유지해 왔다.

대표적으로,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반에 여성 노동자들과 여성·노동 단체들의 저항으로 금융권의 ‘여행원제도’는 폐지됐다. 금융 기업들은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남성 노동자들과 다른 임금 체계를 적용해 차별했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에 기업들은 분리직군제를 핵심으로 하는 ‘신인사제도’를 도입해 여성 노동자들을 차별했다. 분리직군제는 임금·승진 차별을 고착화시켰다.

더불어민주당 민병두 의원이 2015년에 공개한 자료를 보면, 국내 11개 은행 여성들의 평균 연봉은 남성들의 63퍼센트에 불과하고 여성 임원 비중은 6.6퍼센트에 머물고 있다. 특히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에서 성별 임금격차가 가장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 직원의 평균 연봉(5천6백만 원)은 남성 직원의 평균 연봉(1억 원)의 절반 가량에 지나지 않았다. 산업은행에는 여성 임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성별 임금격차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들보다 비정규직이 될 가능성도 더 크다. 2013년 기준 여성 노동자 7백62만명 중 57.5퍼센트가 비정규직이다(통계청).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임금은 정규직 남성 노동자 임금의 35.4퍼센트밖에 안 된다. 임신과 육아 등으로 인한 경력단절현상이 여성들이 양질의 일자리를 구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주요한 요인이다.

임신, 출산, 육아 등을 이유로 한 차별도 여전하다. 악명 높던 ‘결혼퇴직제’는 1970~80년대에 여성 노동자들과 여성·노동단체들의 저항으로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얼마 전 주류업체 금복주가 결혼을 앞둔 여성 직원에게 퇴사를 종용했다는 사실이 폭로돼 사회적으로 큰 빈축을 산 바 있다. 취업 준비를 위한 온라인 카페를 조금만 둘러봐도, 면접 때 유독 여성에게만 “결혼은 할 거냐”라고 물어보는 사례가 꽤 많았다.

육아휴직 사용률은 41.4퍼센트로, 꾸준히 느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한국보건사회연구원). 특히 불안정한 고용형태에 있는 여성 노동자들이 육아휴직을 사용하기는 매우 어렵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직장맘센터의 1년치 상담 결과를 보면, 육아휴직을 사용하며 해고를 포함한 불이익을 받은 적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52퍼센트나 됐다.

‘사원 복지’ 운운하는 대기업에도 여성 차별은 만연하다. 지난 6월 삼성물산에서 육아휴직을 사용한 여성노동자들에게 ‘각종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각서를 쓰게 한 것이 폭로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이런 삼성 물산은 취업 준비생들이 가고 싶어하는 건설 회사 1위다. 국립대병원인 서울대병원에서는 가임기 간호사들이 관리자들의 지시 하에 임신 순번을 정하는 일도 있었다.

정부는 저출산을 해소해야 한다면서도 정작 이런 기업들의 행태에는 강력히 제동을 걸지 않는다.

<남녀고용평등법>에는 ‘사업주는 여성 근로자를 모집·채용할 때 그 직무의 수행에 필요하지 아니한 용모·키·체중 등의 신체적 조건, 미혼조건 … 을 제시하거나 요구하여서는 아니된다’는 ‘외모차별 금지 조항’이 있다.

여성들에게 “단정한” 외모를 요구하는 채용 광고들은 여전히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장 얼마 전 박근혜가 방문하는 정부 주관 행사였음에도 행사 업체가 통역사 채용 광고에 ‘용모 중요·예쁜 분’을 조건으로 제시해 지탄의 대상이 됐다.

대형 영화관들이 아르바이트하는 여성들에게 화장과 구두 착용 등을 강요하고 립스틱 색깔까지 지정해 준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알바노조가 공개한 ‘CGV 미소지기 용모 복장 기준’을 보면, 여성 노동자들은 생기 있는 피부화장을 반드시 하고, 눈썹 형태가 또렷이 드러나도록 해야 하며, 옅은 눈 화장과 붉은 립스틱은 필수라는 규정이 있다. 심지어 본사가 정한 외모 규정을 지키지 않으면 ‘이달의 꼬질이’로 선정해 벌점을 주고 있다.

채용 시 외모를 보는 관행 때문에 많은 여성들은 각종 스펙을 쌓는 것에 더해 외모까지 신경써야 하는 처지다. 그래서 흔히 여대생들이 취업 준비에 뛰어 들면 가장 먼저 접하는 정보는 “면접 화장 배워 보기”, “이력서 사진 잘 찍어주는 사진관” 따위의 것들이다. 심지어 ‘면접 성형’이라는 것도 생겼다!

성 상품화

기업들은 노골적으로 여성의 몸을 상품화해 이윤을 벌어들이고 여성에 대한 차별적 관념을 퍼뜨린다. 호프집 벽에 붙은 흔한 주류광고는 물론이고, 음료, 택배, 면도기, 이동통신사까지 여성의 성적 이미지를 부각한 광고들 천지다. 대형 연예인 기획사들은 젊은 여성들을 거의 벌거벗겨 놓고 섹시 춤을 추게 해서 돈을 벌고, 언론과 TV프로그램들은 그런 몸매와 섹시미를 갖는 것이 여성의 본분이라도 되는 양 치켜세운다. ‘못생기고’ 뚱뚱한 여성들을 비하하는 것은 당연할 뿐 아니라 재미있는 것으로 치부된다.

메갈리아 티셔츠를 입었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여성 성우와의 계약을 해지한 넥슨은 게임에 옷은 반만 걸치고 가슴과 엉덩이를 부각시킨 여성 캐릭터를 출현시켰다가 항의에 직면했다. 결국 <서든어택2>는 23일 만에 서비스를 종료했다.

이렇듯 기업들의 성차별적 행태는 너무 많아 지면이 모자랄 지경이다. 기업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차별적 구조를 유지하고 차별 관념을 퍼뜨릴 수 있는 진정한 권력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여기에 이해관계가 있다.

정부와 사용자들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적은 임금을 주고, 안 좋은 노동조건을 강요함으로써 이득을 얻는다. 이것은 결국 여성 노동자들뿐 아니라 남성을 비롯한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 조건을 하락시킬 수 있으므로 기업주들에게 더욱 이득이다. 이렇듯 자본주의 체제의 차별과 억압은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더욱 효과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것이다.

여성 노동자들은 투쟁을 통해 전진할 수 있다 2015년 홈플러스 파업 집회 ⓒ사진 이미진

여성 노동자 10명 중 4명이 저임금
시간제 일자리 확대 정책 폐기해야

한국의 여성 노동자 10명 중 4명이 저임금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9월 18일 OECD의 발표를 보면, 2016년 기준 여성 임금 노동자 중 저임금 노동자(임금 중위값의 3분의 2 미만) 비중은 37.8퍼센트로 OECD 비교가능한 22개국 중 가장 높았다.

여성 저임금 노동자 비중은 2000년의 45.77퍼센트에 견주면 떨어진 수치이지만, 다른 OECD 나라들과 비교해 보면 높은 수준이었다. 한국의 뒤를 잇는 나라는 아일랜드, 미국, 영국, 독일 순이었는데, 이 나라들도 한국보다 7~12퍼센트포인트가량 낮았다.

박근혜 정부는 여성의 경력 단절과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시간제 일자리 확대 정책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이런 저질 일자리 양산 정책은 여성들을 더욱 저임금층으로 내몰게 할 것이다. 정부는 시간제 일자리 확대를 중단하고, 양질의 정규직 일자리와 국공립 보육시설과 같은 질 좋은 보육시설을 대폭 확충해야 한다.

착취와 차별에 맞선 투쟁

여성 노동자들이 차별받는다고 해서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이 주변적이라거나 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여성 임금노동자는 전체 임금노동자의 44퍼센트를 차지한다. 여성 노동자들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노동계급의 주요한 일부가 됐다. 여성 노동자들 역시 파업 등 노동자로서의 고유한 힘을 발휘한다면 이윤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집단이다.

최근에도 여성 노동자들이 투쟁해 전진을 이룬 사례는 많다. 각종 수당 문제 해결, 정기 상여금 쟁취 등 전반적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는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단호한 파업 등으로 일정 부분 성과를 이뤄내고 있다.

몇 년 전 인기를 얻은 영화 <카트>는 2007년 실제 있었던 이랜드 노동자들의 파업을 다뤘다. 여성 노동자들은 투쟁 속에서 그들의 잠재력을 한껏 보여 줬다. 이랜드일반노조는 매장 점거파업을 통해 꿈쩍도 않던 사측을 교섭테이블로 끌어내고 비정규직 쟁점을 전국적으로 떠오르게 했다. 최근에도 홈플러스 등 마트 노동자들이 투쟁을 벌여 사측의 양보를 얻어낸 바 있다. 2000년대 이래 조직된 대학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은 최저임금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특히 박근혜 정부 정책에 도전하는 투쟁에서는 여성 조합원 비율이 높은 전교조, 보건·의료 관련 노조 등 여성 노동자들도 남성 노동자와 함께 나섰다.

착취와 차별에 맞선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에 남성 노동자들이 함께 투쟁했고, 지지를 보냈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지난 7월 전국철도노동조합 호남지방본부의 사례는 매우 고무적이다. 익산역 역무원인 한 여성 노동자가 생리휴가를 사용하려 하자 여성인 관리자가 “산부인과에서 확인서를 떼다 내라”, “직접 확인해보겠다”는 말까지 일삼으며 연차로 대체할 것을 강요했다. 그 과정에서 다수 남성 조합원들은 이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노동조합의 일로 삼아 함께 문제제기를 했고, 현재까지도 재발 방지 등을 요구하며 함께 싸우고 있다.

이런 고무적인 사례들은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들이 단결해 싸울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기업들의 성차별적 행태에 맞서 남녀 노동자가 함께 단결해 싸우자.

△임신한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해고에 항의하는 보라매병원 노동자들 ⓒ사진 이윤선

입력 2016-09-20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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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사회주의자가 전한다

“낙태권 요구 운동이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고 있습니다”

안드레이 제브로프스키 (폴란드 '노동자민주주의' 활동가)

폴란드인들이 낙태 권리를 제약하려는 정부에 맞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10월 1일, [수도] 바르샤바의 의회 앞에 2만 명이 모였다. 낙태권을 한층 더 제약하려는 법안에 반대하는 시위 규모로는 최대였다.

오늘 열릴 “여성 파업”에는 수만 명이 참가할 예정이다. 폴란드 전역의 도시와 마을에서 사람들은 출근을 거르고 거리에 나왔고 수많은 학생들도 시위에 참가했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여성이고, 이들은 항의 운동의 상징인 검은색에 맞춰 옷을 입었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구호를 외쳤다. “광신도는 우리가 저지한다”, “국회의원들은 이 나라를 여성들의 지옥으로 만들려 한다, 부끄럽지도 않느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의사지 선교사가 아니다”. “혁명은 여성이다”는 구호도 있었다.

사람들이 들고 나온 팻말과 현수막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내 몸은 내가 선택한다”, “광신도 꺼져라”, “여성들이 정부를 끌어내릴 것이다.”

△10월 1일 의회 앞에 모여 든 낙태권 요구 시위대. ⓒPracownicza Demokracja

전국노동조합동맹 OPZZ는 이전까지 관망하는 자세에서 벗어나 오늘 시위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보다 앞서 교사노조인 ZNP(폴란드 최대 단일노조다)가 시위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이 노조들은 공식적으로 파업을 선포하지는 않았지만, 조합원들에게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이처럼 노조가 공식적으로 참여를 독려한 것은 이번 운동에서 몹시 중요했다. 이런 활동이 더 많아지도록 해야 한다.

새로운 좌파정당 라잼(“함께”)도 이번 낙태권 운동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라잼은 9월에 많은 도시와 마을들에서 “검은 시위”를 개최했다.

지난해 라잼은 창당 불과 몇 달 만에 치러진 10월 선거에서 55만 표를 득표했다(3.62퍼센트).

라잼의 당원들은 주로 청년들이고, 이들은 다음 선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고 거리에서 많은 활동을 벌이는 데 더 주력한다. 국제사회주의경향(IST)의 폴란드 자매조직인 ‘노동자민주주의’는 여러 캠페인에서 라잼 활동가들과 함께한다.

이번 시위는 지난 몇 달간 폴란드에서 벌어진 시위의 연장선 상에 있다.

운동

이번 운동은 지난 20년간 폴란드에서 낙태권을 놓고 벌어진 운동 중에 단연 가장 크다.

왜 하필 지금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낙태를 일절 금지하는 새 법안이 반년 전 공표됐을 때 많은 사람들이 격분했다.

이번 법이 추진되기 전부터 폴란드는 유럽에서 몰타, 아일랜드와 더불어 낙태가 가장 엄격히 금지되는 나라였다.

그런데 새 법안은 이미 태아에게 장애가 있거나, 강간으로 인한 임신이거나, 산모의 생명이 위태로워도 낙태를 금지하려 한다. 산모와 의사 모두 징역에 처하도록 만들려 한다.

10월 1일과 3일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이 그토록 분노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형식상으로 이 법안은 국회의원이 아니라 “시민들이 발의한 것”으로 돼 있지만, 집권당인 ‘법과 정의당’(PiS)은 즉각 이 법안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이 당은 1989년 이래 처음으로 단독 과반을 얻으며 정부를 구성했다.

PiS는 가톨릭계 보수 정당으로 지독하게 우익적이다. 이 당은 폴란드 파시스트들을 진정한 애국자로 치켜세우고, 최근 벌어지는 인종차별적 공격들을 못 본 척함으로써 파시스트 우익에 힘을 실어 준다.

또한 9월에는 임신 12주까지 낙태를 허용하도록 하는 법안 상정을 소위원회 단계에서 가로 막았다. 이런 조처도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당초 집권당은 “시민들이 발의한” 모든 법안을 대등하게 놓고 토론하겠다고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10월 1일 시위 직전에 벌어진 설문조사를 보면, 15퍼센트는 낙태권 시위에 직접 참가하겠다고 답했고 또 다른 35퍼센트는 시위를 지지한다고 응답했다. 시위에 반대한다는 응답자는 14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이 기사를 쓰는 현재 낙태권 요구 운동은 빠르게 커지고 있다. 그와 함께 더 많은 사람들의 의식도 바뀌고 있다.

출처 영국의 반자본주의 주간지 <소셜리스트 워커>

번역 김종환

입력 2016-10-06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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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처벌 강화하는 의료법 개정안 철회와 '낙태죄' 폐지 요구하는 여성·사회 단체 공동 기자회견

"진짜 문제는 '낙태죄'다" 10월 17일 의료법 개정안 철회와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 ⓒ이미진

10월 17일 오전 광화문 광장에서 보건복지부의 의료법 개정안 철회와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날 기자회견은 성과재생산포럼이 주관하고,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을 비롯해 기자회견문에 연서명한 73개 여성·사회 단체와 3천7백여 명의 개인들이 공동 주최했다.
참가자들은 여성의 "삶의 권리를 무시하고,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통제의 대상으로 삼아온 법과 정책을 거부한다"며 낙태 처벌 강화하는 의료법 시행령 개정 입법예고안을 철회할 뿐 아니라, '낙태죄'를 폐지하라고 요구했다. 
다음은 기자회견문 전문이다.

[공동 성명] 

진짜 문제는 ‘낙태죄’다!
인공임신중절 처벌 강화하는 의료법 개정 입법예고안 철회하고, 
형법 상의 ‘낙태죄’를 폐지하라!

 

  9월 22일, 보건복지부는 현행 의료법 시행령*시행규칙에 ‘비도덕적 진료 행위'의 항목으로 모자보건법 14조 1항을 위반하는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포함시키고, 이를 시술한 의사는 최대 12개월까지 자격을 정지할 수 있는 개정안을 입법예고 했다. 그리고 지난 10월 9일 산부인과 의사들은 기자간담회를 열어 “개정안이 철회되지 않으면 입법예고 기간이 끝나는 11월 2일부터 전면적인 시술 중단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정작 근본적인 문제는 인공임신중절 시술이 ‘비도덕적 진료 행위'의 항목으로 포함될 것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임신중지'가 ‘죄'로서 존재하고 있는 현실에 있다. 의료법 개정안에서 해당 항목이 삭제된다 하더라도 이미 형법상의 ‘낙태죄'가 존재하고 있으며, ‘낙태죄'가 존재하는 이상 법과 현실의 모순은 계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비도덕적 진료 행위'에 포함시켜 처벌을 강화하겠다는 정부의 태도나, 법안이 통과될 경우 시술을 전면 거부하겠다는 의사들의 태도 모두 ‘낙태죄'의 존재로 인해 발생해 온 실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채, 여성들만을 볼모로 잡고 있다는 사실에 개탄하며, 의료법 개정 입법예고안을 철회하고 형법상 ‘낙태죄’ 또한 폐지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낙태죄’의 본질은 생명보호가 아닌 책임전가에 있다!

  그 동안 한국 정부는 법으로는 인공임신중절을 엄격하게 금지해 놓고도, 실제로는 필요에 따라 적극적으로 강제 불임, 강제 낙태와 출산 억제 정책을 시행해왔다. 국가는 가족계획 정책의 성공을 위해 여성이 안전하지 못한 피임 장치와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받도록 조장하였다. 정부 시책이 경제 개발과 인구증가 억제를 목표로 할때는 법적 근거와 상관없이 임신중절을 사실상 조장하였다가 저출산 해결이 목표가 되자 처벌을 강화하겠다는 갈피없는 역사 속에서 여성의 몸은 통제의 대상이 되어 왔으며, 건강과 삶 또한 자주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과거 정부는 한센병 환자들에게 강제로 단종 및 낙태 시술을 행한 바 있다. 국가에 의해 낙태를 강요받는 현실은 비단 특정한 질병을 가진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한국사회에서도 개인의 사회적 위치에 따라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국가주도의 출산통제와 사회의 이중적 잣대로 인해 오히려 생명은 국가에 의해, 때로는 가족의 요구에 의해 선별되고 걸러져 왔다. 부모나 태아에게 장애가 있을 경우, 10대 임신의 경우에는 출산 여부에 대한 여성의 의사가 더욱 쉽게 무시되고 있으며, 장애, 질병, 연령, 소득과 노동조건 등 사회경제적 상황에 따른 보장책은 여전히 매우 협소하고 취약한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조건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은 제대로 기울이지 않은 채, 사실상 생명과 삶을 가장 많이 무시해 온 국가가 도덕과 법을 내세워 여성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해 온 것이 바로 ‘낙태죄'의 본질이다. 이제 그 책임을 국가와 사회로 되돌리기 위해, ‘낙태죄'는 반드시 폐지되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통제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국가와 사회가 감당해야 할 생명에 대한 책임을 떠넘긴 채, 우리 삶의 권리를 무시하고,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통제의 대상으로 삼아온 법과 정책을 거부한다. 우리는 더 이상 통제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여성들에게는 처벌 대신 더 많은 자율성과 권한이 주어져야 하며, 국가와 사회는 이를 보장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임신중지를 범죄로 규정하고, 처벌을 강화하는 행위는 인공임신중절을 근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위험한 시술을 더욱 부추기는 방법일 뿐이다. 우리는 더 이상 국가의 인구관리를 위해 만들어진 우생학적 모자보건법 안에서 인공임신중절 사유를 허락받고,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머무르지 않겠다. 임신중절에 대한 비범죄화를 기초로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 나갈것이다.
  차별과 낙인, 폭력을 조장하는 성별권력관계와 성별규범을 해소하고, 불평등한 성적 관계를 맺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라. 그리고 피임/임신/임신중지/출산에 관한 정확하고 체계적인 지식을 습득할 권리, 자신에게 필요한 피임기술과 의료시설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 사회적 낙인 없이 비혼모가 될 수 있는 권리, 결혼유무, 성적지향, 장애와 질병, 경제적 차이와 상관없이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모성을 실천할 수 있는 권리를 적극적으로 보장하라. 이러한 권리들이 실질적으로 보장될 때, 원치않는 임신으로 인한 인공임신중절 시술은 저절로 줄어들게 될 것이다.  

‘낙태죄 폐지’는 오직 여성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해 온 시대를 끝내고, 
진정한 생명존중이 이루어지는 사회로의 변화를 만들어낼 출발점이다. 

 
  태아는 임신한 여성의 삶과 분리하여 고려될 수 없으며 임신과 출산, 태어날 아이의 삶의 조건은 현실의 삶의 조건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장애를 지닌 이들이 자신의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는 결국 장애를 지닌 태아를 포기하게 만드는 사회이다. 여성들이 임신중지를 강요받거나 혹은 스스로 그 선택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들은 언제나 사회적 조건 속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이와 같은 현실적인 조건들을 무시한 채, 국가의 필요에 따라, 또는 가부장적 (정상)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낙태죄'를 내세워 오직 여성들에게만 그 모든 책임을 전가해 왔다. ‘태아의 생명권'을 아무리 주장한들, 삶이 보장되지 않는 생명권이란 결국 공허하고 무책임한 주장일 수밖에 없다. 
 임신중지는 처벌하거나, 그 사유를 국가에 증명하고 허가받아야 하는 일이 아니다. 임신도, 임신중지도, 출산도 삶의 과정에서 누구에게나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자 충분한 사회경제적 지원 아래 당사자가 직접 결정해야 할 일이다. 
  이제 여성들에게 전가해 온 생명에 대한 책임을 국가와 사회로 돌려야 한다. 진정 생명을 그토록 소중히 여긴다면 ‘낙태죄'를 폐지하고, 여성과 태어날 아이, 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들이 제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실질적인 변화를 만드는 일에 국가와 사회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여성들을 처벌하는 대신, 권리를 보장하고 사회적 조건들을 변화시키는 방향이 옳다는 것은 임신중지 결정에 허용사유를 두지 않고 합법적으로 진료와 시술을 보장하고 있는 74개국의 사례들이 이미 충분히 증명해주고 있다. 
이제 우리는 변화를 위한 행동을 시작할 것이다!

<우리의 요구>

-인공임신중절 처벌 강화하는 의료법 시행령 개정 입법예고안을 철회하라!
-여성의 몸을 불법화하는 ‘낙태죄’ 폐지하라!
-장애와 질병에 대한 차별을 조장하는 우생학적 모자보건법 조항 전면 개정하라! 
-국가는 성평등 정책과 성교육을 체계적으로 강화하고, 모든 여성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피임기술과 의료시설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라!
-결혼유무, 성적지향 및 성별정체성, 장애와 질병, 경제적 차이와 상관없이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모성을 실천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리를 보장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라! 
-안전하고 건강하게 임신을 중지할 수 있도록 최선의 의료적 선택지를 제공하라!

주) ‘낙태'는 ‘태아를 떨어뜨려 죽인다'는 의미를 지닌 용어로, 이미 그 자체로 임신중지에 대한 낙인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에 이 성명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당 용어를 구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형법 제27장 ‘낙태의 죄’를 지칭하는 경우 ‘낙태죄' 사용
   -국가 또는 타의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 ‘낙태' 사용
   -임신중지에 대한 의료적 개입, 시술 자체를 의미하는 경우 ‘인공임신중절' 또는 ‘임신중절' 사용  
   -여성 당사자의 자기 의사가 포함된 의미의 경우 ‘임신중지' 사용 

2016년 10월 17일

[성과재생산포럼]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 장애여성공감 |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성소수자차별반대무지개행동]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 노동당 성정치위원회 | 녹색당 소수자인권특별위원회 | 대구퀴어문화축제 |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 | 레주파 | 망할세상을횡단하는LGBTAIQ 완전변태 | 대구무지개인권연대 | 30대이상레즈비언친목모임 그루터기 |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 | SOGI법정책연구회 | (사)신나는센터 | 언니네트워크 | 이화성소수자인권운동모임 변태소녀하늘을날다 | 정의당 성소수자위원회 |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 차별없는세상을위한기독인연대 | 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 |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 한국레즈비언상담소 |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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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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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10-17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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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의 낙태 처벌 강화 시도 반대한다

낙태는 여성이 선택할 권리

이현주

박근혜 정부가 낙태 처벌을 강화하려 한다. 말끝마다 "저출산 해소"를 외쳐온 박근혜 정부가 결국 낙태 단속을 꺼내 들었다. 

지난 9월 22일 보건복지부는 '비도덕적 진료 행위'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의료관계 행정처분 규칙 개정령안’을 입법예고했다. 개정령안이 명시한 ‘비도덕적 진료 행위’들은 ‘허가받지 않은 주사제 사용’, ‘진료 목적 외 마약 처방’, ‘성폭력 범죄’ 등인데, 그 중에 '모자보건법 제 14조 제1항을 위반해 임신중절수술을 한 경우'가 포함돼 있다. 개정령안에 따르면, 적발된 의사들은 최대 1년 의사 자격이 정지될 수 있다(현행 1개월).

산부인과 의사 단체들은 이에 반발하고 있다.

낙태 시술을 한 의사들에 대한 처벌 강화는 낙태를 원하는 여성들을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 것이다. 2010년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낙태 단속을 강화하자 낙태 시술을 거절하는 병원이 늘고 낙태 비용이 솟구쳤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저출산 현상’에 대응해, 오랫동안 묵인돼 온 낙태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그 전까지도 낙태는 불법이었지만, 여성들이 낙태 시술을 받는 게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불법이다 보니, 낙태 시술을 받아도 쉬쉬하고, 의료보험 혜택도 받지 못했다. 특히 청소년 여성들은 단속 전에도 비용을 마련하기 어려웠고, 임신 · 낙태 사실이 알려질까 봐 두려움에 떨었다.

낙태 단속 강화는 상황을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여성들은 기존에 낙태 시술을 하던 병원도 하지 않겠다고 해 발을 동동 굴러야 했다. 한때 낙태 비용이 열 곱절 이상 치솟기도 했다. 낙태를 원하는 여성들이 비싼 수술비와 처벌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고통받았다.

비싼 비용은 부유한 여성들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가난한 여성들과 경제적 능력이 없는 청소년 여성들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이웃 나라에 가서 원정 낙태를 하는 일도 긴 휴가를 내기 힘든 노동계급 여성들에게는 부담이 되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낙태권은 특히 노동계급에게 중요한 문제다.

낙태권, 왜 중요한가

낙태를 선택할 권리는 국가도 남편도 의사도 아닌 오롯이 여성에게 있어야 한다. 임신과 낙태는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출산은 여성의 삶 전체에 심대한 변화를 준다.

여성에게 낙태를 선택할 권리가 없다면, 여성은 자신의 출산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신의 인생도 계획할 수 없다. 낙태권이 없다면 여성이 성을 마음껏 즐기기도 어렵다.

완전한 피임법은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피임을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여성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경우는 언제든지 있을 수 있다. 여성은 아이를 낳아 키우기에는 사회적 · 경제적 조건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할 수 있고, 이혼이나 이별 등 남편이나 애인과의 관계가 변해서 출산하기 싫어질 수도 있다. 말 그대로 단지 아이를 원치 않을 수도 있다. 어떤 경우이든 여성의 낙태 선택권은 온전히 보장돼야 한다.

게다가 정부가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조건도 마련해 주지 않으면서(최근 ‘무상보육’마저 후퇴시켰다) 낙태를 단속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그저 희생을 감내하라는 말밖에 안 된다.

흔히 낙태 반대론자들은 낙태가 “살인”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낙태 불법화와 단속이야말로 여성들을 안전하지 않은 낙태로 내몰아 생명을 위협한다. 세계적으로 비위생적이고 안전하지 못한 낙태 관련 합병증으로 매년 8백만 명이 고통받고, 그중 6만 7천 명이 사망한다.

얼마 전 낙태 금지 반대 시위에 나선 폴란드 여성들은 철제 옷걸이를 들고 나왔다. 낙태 불법화 상황에서 여성들이 철제 옷걸이나 뾰족한 막대기 같은 도구로 자가 낙태를 해서 위험에 빠진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어떤 여성들은 표백제나 독극물을 먹기도 한다. 주로 아프리카나 아시아 나라들에서 이런 극단적 일들이 벌어지지만, 그밖의 나라들에서도 위생적이지 않은 곳에서 무면허 시술자에게 시술받는 등 안전하지 않은 낙태를 경험할 수 있다. 낙태 금지가 이런 끔찍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점 때문에 폴란드 여성들은 대중적 시위와 ‘파업’에 나섰고, 결국 우익 정부의 낙태 전면 금지 정책을 좌절시켰다.(관련 기사: 폴란드 사회주의자가 전하는 낙태권 운동 승리- 대중 투쟁이 사회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 주다)

낙태 반대론자들은 ‘태아’의 생명권이 여성의 낙태권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정체와 인간은 구분해야 한다. 수정체는 인간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지, 그 자체로 인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태아’는 여성에 완전히 의존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여성 신체의 일부일 뿐이다. ‘태아의 생명권’ 논리는 의도했든 아니든 여성을 출산의 수단으로 전락시키기 십상이다. 성립하기 어려운 ‘태아의 권리’가 살아 숨쉬는 인간 여성의 권리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처벌은 낙태를 줄이는 효과도 없다. 여성들은 낙태가 불법인 상황에서도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낙태가 합법화된 나라들보다 불법인 나라들에서 낙태율이 오히려 더 높다.

결국 핵심은 여성들이 안전하고 합법적으로 낙태할 수 있게 할 것이냐, 낙태를 범죄화해 음성적이고 불안전한 시술을 받게 내버려 둘 것이냐다.

정부는 낙태 처벌 강화 시도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낙태를 완전히 합법화해 여성의 요청만으로도(남편이나 연인, 의사, 정부 관료의 동의를 요구하거나 개월 수를 따지지 말고) 안전하고 경제적 부담 없이 낙태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관련 기사:  낙태 허용 요구 기자회견 “낙태는 범죄가 아니다. 낙태를 허용하라”)

입력 2016-10-11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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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사회주의자가 전하는 낙태권 운동 승리

대중 투쟁이 사회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 주다

안드레이 제브로프스키 (폴란드 '노동자 민주주의' 활동가)

낙태를 일절 금지하려는 정부의 새 법안에 맞서 대중 시위 물결이 일어나 우파 정부를 무릎 꿇렸다. [관련 기사: ‘폴란드 사회주의자가 전한다: “낙태권 요구 운동이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고 있습니다”’]

법안에 반대해서 사상 최대 규모의 전국적 시위와 “여성들의 파업”이 벌어진 후, [집권당이자] 가톨릭계 우파 정당인 법과정의당(PiS)의 당수 야로스와프 카진스키가 태도를 바꿨다.

10월 6일 폴란드 의회는 3백52대 58이라는 압도적 표결로 법안을 부결시켰다. 법과정의당 소속 의원 2백16명 중 1백86명이 법안에 반대표를 던졌는데, 이들은 [대중 시위 전까지는] 우파적 가톨릭계 법조인들이 초안을 작성한 “시민들이 발의한 법안”을 강력히 지지했던 자들이다.

보수적 가톨릭계의 지지를 얻어 당의 기반을 구축하고자 몇 년 동안 노력했던 카진스키에게 이번 표결은 곤혹스런 일이다.

그러나 카진스키는 낙태권 금지에 대한 반대 운동이 이토록 거대하게 일어날 것이라 예측하지 못했다. 사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10월 3일, 폴란드 브로츠와프 시에서 벌어진 "여성들의 파업" 시위. ⓒ사진 출처 szczym bzzz(플리커)

10월 3일 폴란드 전국 각지에서 “여성들의 파업” 시위가 벌어졌다. 경찰 추산으로 9만 8천 명이 전국 각지 1백43곳에서 열린 시위에 참가했다.

운동을 상징하는 색상[인 검은색]을 따서, 이번 10월 3일에는 ‘검은 월요일’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이번 대중 운동은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 준다. 20년이 넘는 지난 세월 동안, 낙태권 요구 시위는 우파들의 공격에 맞서 수백 명이 의사당 앞에서 팻말 시위를 벌이는 정도이기 일쑤였다.

다수

그러나 10월 3일에는 거리, 버스, 전차, 기차 등 곳곳에서 검은 옷을 입은 여성들을 볼 수 있었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 다수는 젊은 여성들이었고, 그 중에는 학생들이 많았다.

지난 20년 동안 학교가 청년들에게 “낙태는 살인”이라는 생각을 주입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런 대응은 의미가 크다. 이전까지는 여론조사에서 낙태에 반대한다는 응답이 더 컸다.

이제 정부는 [낙태권을 요구하는] 운동과 가톨릭계 우파들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다. 정부는 전면적 낙태 금지안은 물 건너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법과정의당 주요 정치인은, 정부가 낙태에 대한 별도의 규제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익명으로 밝혔다.

법과정의당이 여론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다가 새로운 법안을 들고 돌아올 가능성도 있다. 낙태권 요구 운동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유주의 우파인 두 야당은 현상 유지를 원하고 운동을 통제하려 들고 있다. 그러나 이미 운동 참가자의 다수가 낙태권을 심각하게 제약하는 현행 낙태법도 완화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운동은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사람들의 생각이 크게 바뀌고 있고 그에 따라 폴란드 정치도 크게 영향을 받고 있다. 자신들의 힘으로 대규모 시위를 벌여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수만, 수십만 명이 확인한 것이다.

입력 2016-10-10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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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노동자들이 나서 보육 공공성 강화를 요구하다

독자편지 | 장미순

△10월 22일 열린 ‘보육공공성과 보육안전 확보를 위한 전국보육노동자 한마당’ ⓒ장미순

10월 22일 열린 ‘보육공공성과 보육안전 확보를 위한 전국보육노동자 한마당’ ⓒ장미순

지난 10월 22일 오후 보육노동자 3백여 명이 세종문화회관 앞에 모여 ‘보육공공성과 보육안전 확보를 위한 전국보육노동자 한마당’을 개최했다. 무상보육을 후퇴시키고, 보육의 공공성을 훼손하는 박근혜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보육교사들은 국공립 보육시설 확충, 교사 대 아동 정원 비율 축소, ‘맞춤형 보육’ 폐지, 초과 보육인정 지침 폐기, 누리재정 확보, 복수교사제 ‘8253’시행(8시간 근무 2교대 5시간 보육 3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