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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자주적 민주주의”는 계급 협력주의로 향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김인식

5월 30일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당 지도부는 대의원대회(6월 20~21일)에 제출할 당의 이념을 “자주적 민주주의”(또는 “진보적 민주주의”)로 하는 안을 내놓았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의 사회주의 강령(“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 계승 발전”)을 사실상 폐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민주노동당의 최대 다수파인 자주파는 일찍부터 사회주의 강령을 반대해 왔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정당으로 비춰질 경우 유권자로부터 표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선거주의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차베스가 사회주의라는 최대 강령을 갖고 시작했다면 선거를 통해 집권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민주노동당 2009 제2차 중앙위원회 자료집 98쪽) 

△5월 30일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 ⓒ사진 출처 민주노동당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자주파가 추구하는 전략과 관계 있다. 스탈린주의의 단계혁명론에 따르면 사회주의 변혁은 일정에 올라와 있지 않다. “전반적인 사회적 소유는 현실의 한계로 인해 당분간 구현하기에는 과도한 목표”이기 때문이다(98쪽). 그래서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민족 자주’를 수호하는 것을 핵심 목표로 내세우는”(22쪽) “자주적 민주주의”를 먼저 실현해야 한다.

애초 단계론은 후진국에서 자본주의 발전이 미약해 전자본주의적 잔재가 많고(중앙위원회에서 최규엽 민주노동당 부설 새세상연구소장은 한국 사회가 “반(半)봉건적”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로 말미암아 노동계급의 규모도 아주 작기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건너뛸 수 없다는 인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래서 사회주의 변혁 전략은 비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매우 크지만 여전히 자본주의 관계의 지배라는 한계 내에 머무르는 것”이고, “<span>모든</span>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발전 수준이나 사회 구조나 전통 등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즉 모든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가 지배하고 있다.”(트로츠키)

더구나 한국 자본주의는 후진국이나 제3세계가 아니다. 한국 자본주의가 미국 자본주의의 하위 동맹자로 성장해 왔고 지금도 그렇지만, 이것이 한국이 미국 제국주의에 “종속”돼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한 예로, 오늘날 한국 자본주의의 최대 수출 대상국은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 됐으며,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최대 투자국도 미국이 아니라 유럽연합이다.

또, 한국 국가는 이미 10여 개 이상의 나라에 한국군을 파병해 놓고 있다. 이것은 단지 미국 제국주의의 압력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한 한국 국가의 능동적 전략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한국 자본주의는 1960년대 후반 이래 변화하기 시작한 세계 자본주의의 패턴, 즉 경제의 상호침투 과정(자본의 국제화)에 적극 뛰어듦으로써 성장할 수 있었고(오늘날 한국 국내총생산 규모는 세계 12위다), 이 과정에서 노동계급이 형성됐다. 계급 분단이 근본적인 사회적 분할선이 된 것이다.

계급 협력주의

그러나 자주파는 한국 자본주의의 “예속성”과 “천민성”을 강조하며 “민족 자주”를 “핵심 목표”로 삼는다. 자주파에게 “민족 자주”는 곧 민족통일을 뜻한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근원적으로 극복하는 과정에서 통일이 전략적 과제”(107쪽)가 된다.

이를 위해 범계급적 단결이 필요하다. 그래서 “자주적 민주정부의 집권 주체”는 “노동자, 농민을 중심으로 하고 소생산자, 양심적인 민주 세력, 청년학생”과 함께 “제국주의 자본과 국내 독점자본에 저항하는 영세상공인뿐 아니라 미일 제국주의에 저항하며 분단을 극복하려는 통일운동세력”까지 포함한다.(107쪽)

이런 국민전선(민중전선) 전략에 따르면 ‘민족화합적’ 자본가들과 냉전적 자본가들이 구별된다. 2001년에 정주영이 죽었을 때 범청학련이 조문을 한 것도 이 전략에서 비롯한 것이다.

지난 2월 15일 중앙위원회의 결정, 즉 “‘민주당과 연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시하는 것은 정당의 정치 행위를 스스로 봉쇄하는 그릇된 결정”(177쪽)이라며 평가를 요구하는 것도 이런 계급 연합 전략을 되살리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통일이 전략적 과제”라면 민족통일이 계급투쟁에 선행해야 한다. 물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는 민족자결권을 옹호한다. 그래서 한반도에서 평화적 민족통일을 지지한다. 더구나 한반도는 민족구성원 대다수의 의사를 거슬러 강대국들에 의해 분단이 이뤄졌다.

그러나 통일은 노동계급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는 아니다. 계급투쟁보다 부차적이다. 분단 60년 동안 남과 북 모두에서 자본 축적의 중심이 형성됐고 그 과정에서 계급 분단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는 남북화해나 통일을 위해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감수하라고 요구하는 것에 반대한다. 반면, “통일이 전략적 과제”라고 여기는 자주파는 노동자들이 계급 이해 관계에만 얽매이지 말고 통일운동을 가장 중요한 임무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베네수엘라의 교훈

그렇다면 어떤 조건이 돼야 사회주의 변혁이 현실 가능한 “목표”가 될 수 있을까? 자주파에게 사회주의는 자주적 민주정부가 “추구하는 국가상과 사회상”이다.(98쪽) 그러나 그들의 구상에서는 사회주의로 가는 길에서 노동계급의 결정적 구실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를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라고 본다.

요즘 상당수 자주파는 차베스의 볼리바르식 혁명이 자주적 민주정부에서 사회주의로 이행 모델이라고 여기고 있는 듯하다.

우고 차베스는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운동의 상징처럼 돼 있다. 그리고 최근에 경제 위기 때문에 난관에 봉착해 있긴 하지만, 실질적인 개혁도 제공했다.

그러나 차베스 정부는 선거를 통해 집권한 진보적인 정부의 모순과 한계를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차베스 정부가 우파의 반동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 사회(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좌경화 물결 덕분이다. 이 좌경화 물결에는 두 가지 상이한 구성 요소가 존재한다. 차베스 정부는 이 사이에서 딜레마를 겪고 있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적 정책 결과에 반대하는 노동자, 도시 빈민, 농민, 원주민의 대중 반란이다. 다른 하나의 중심에는 국민 자본주의 또는 국가 자본주의 개발이라는 포퓰리스트 프로그램을 지지하는 지식인과 (일부 장교들을 포함한) 중간계급이 있다. 물론, 후자도 미국 제국주의 이해 관계에 도전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대중 운동을 자신들이 지배하는 것쯤으로 여긴다.

두 구성 요소는 상호 영향을 미친다. 중간계급 정치인이나 장교들의 반제국주의 도전은 대중으로부터 열렬하게 지지받는다. 이것이 대중 저항을 고무한다. 차베스 정부 전복 시도에 맞서 차베스 방어에 나선 대중적 동원이 그것이다. 그리고 일부 중간계급 활동가들과 장교들은 대중 운동에 열광하고 그 요구들 중 일부(가령, 국유화)를 채택한다.

그럼에도 사태전개의 논리는 두 구성 요소를 상이한 방향으로 이끈다. 국민경제 발전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토착 부르주아지가 제국주의와 단절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 대다수는,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잉여 축적이라는 문제에 직면한다. 이들에게 대중의 경제적 요구는 제국주의 압력만큼이나 커다란 장애물이 된다.

한국에서 자주적 민주정부가 집권한다면 이런 상황에 직면해 어떻게 할 것인가? 대중의 요구를 우선할 것인가 아니면 국민경제 발전을 우선할 것인가?

게다가 차베스가 수장으로 있는 국가 기구는 자본주의의 이해 관계를 위해 고안된 것이다. 이 국가 기구는 잘해야 건성으로 개혁을 수행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개혁을 사보타주한다.

자주적 민주정부가 등장할지라도 국내외 지배계급으로부터 개혁에 대한 심각한 저항이 있을 것이다. 반동에 맞서 후퇴 없이 반독점 민주개혁을 지키려면 노동계급의 힘이 필요하다. 노동계급이 자신의 힘을 진정으로 발휘하려면 자기해방 투쟁이 돼야 한다. 그러나 자주적 민주정부의 계급 협력주의는 노동계급의 발목을 잡게 될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해 국내외 지배계급은 분명한 위기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혼란, 분열, 충격을 겪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의 경제 지배력에 도전하고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노동계급적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자주적 민주주의에 담겨 있는 계급 협력주의는 이런 과제 수행을 방해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내놓으려는 자주적 민주주의 이념은 전략적 오류를 범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입력 2009-06-04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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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혁명 60주년

민족해방 혁명이 어떻게 시장경제로 향하게 됐는가

김용욱

2009년 10월 1일 중국 혁명 60주년 기념식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빛이 바랬다. 그날 TV에서 중국 건국 60주년 행사를 소개할 때 내 머리에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메아리치고 있을 것이다.  

‘2008년 경제 위기 발생 후 전 세계 해고 노동자 중 절반(약 4천만 명)이 중국 노동자이고, 행여나 이들이 기념식장 앞에서 시위를 벌일까 봐 공산당 정부가 탱크까지 배치한 마당에,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의 무능과 부패에서 인민을 구했다는 주장이 얼마나 감동을 줄까? 티베트와 신장이 사실상 계엄 상황인데, 중국의 해방이 전 세계 피억압자들의 반제국주의 투쟁의 등불이었다는 주장은 또 어떤 의미일까? 더구나, 마오쩌둥 시대에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등 대중의 큰 희생을 낳은 정치 · 사회적 재앙들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많은 사람이 이런 의문의 일부, 혹은 전부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답하는 과정에서 1949년 중국 혁명의 의의 자체를 폄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혁명?

우익뿐 아니라 일부 좌파는 모든 혁명을 폄하하고 싶어 하는데, 중국 혁명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이 쓴 ‘새로운’ 중국사를 보면, 19~20세기 중반 중국은 서구 ‘선진국’의 ‘진출’로 역동적 세계시장에 편입되고, ‘중도’를 지향하는 자유주의 정당들의 탄생으로 점점 상황이 좋아지고 있었는데, “지저분한 폭력 문화에 사로잡힌” ─ 몇 년 전 출판된 영향력 있는 중국혁명사 책의 표현 ─ 공산당이 농민과 함께 혁명이라는 ‘깽판’을 쳐서 애초의 올바른 길에서 이탈했고, 1979년 시장개방을 통해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주의 경제학에 바탕을 둔 이들의 상상 속 역사와 달리, 당대를 살아간 중국인들에게 세계시장 편입과 서구 국가의 진출은 점진적 진보와는 거리가 먼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당시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강들이 청나라에 IMF식 부채 상환 압력을 가해 청나라가 자연재해에 대응을 못 하면서 농민 1천5백만 명이 수해로 떼죽음을 당했고 ─ 마이크 데이비스는 이 사건을 제국주의 체제가 낳은 ‘후기 빅토리아 시대 홀로코스트’ 중 하나로 꼽았다 ─ 민중은 지주와 고리대금업자들의 초착취로 “한 끼 먹고 한 끼 굶는” 고통을 받았고,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 일본의 군사 침략은 2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1937년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에서만 약 30만 명이 살해당했다). 중국 자본가 정당인 국민당은 구체제 세력과 제국주의를 몰아낼 수 있는 힘을 가진 민중과 손을 잡기는커녕, 그들을 두려워해 탄압했다. 

따라서 중국 민중이 중국 공산당을 지지하고, 공산당과 함께 구체제 세력과 제국주의 군대를 몰아내기 위한 투쟁을 벌여 승리한 것은 대단히 환영할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중국 혁명은 1950년대 폭발한 베트남 민족해방 운동을 비롯해서 미국과 다른 제국주의 열강들에 큰 타격을 입힌 많은 반식민지 투쟁을 고무한 세계사적인 의의가 있다. 

민족주의 혁명의 한계

그럼 왜 이 위대한 혁명이 60년이 지난 오늘 그토록 퇴색하게 됐는가? 그것은 혁명이 애초부터 가진 근본적 한계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 공산당 앞에는 두 가지 다른 길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국제적 착취 · 경쟁 체제인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극복하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다. 당연히 이것은 국제적 혁명 과정의 일부가 돼야 성공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구세력을 척결한 후 중국 스스로 근대 자본주의 산업을 건설하고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1930년대 이후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중국 혁명은 급진적 민족주의 혁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1920년대 중국 노동자 혁명이 패배한 결과였다. 1920년대 중국에는 비록 아직 소수였지만 연안 공업 단지에 집중되고(상하이에는 노동자 1천 명 이상이 고용된 공장이 50여 개가 있었다) 정치적으로 각성한 노동계급이 있었다. 보통 당시 노동자들의 다수가 농촌 출신이었던 점을 근거로 삼아 노동자들의 정치적 의식 수준이 별로 높지 않았다고 폄하한다. 그러나 노동자 탄압에 앞장선 국민당 장교조차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높은 정치의식을 인정했다. 

그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한 초기 중국 공산당은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트로츠키와 레닌의 ‘연속혁명’의 영향을 받아 중국 혁명을 러시아 혁명을 포함하는 세계 혁명의 일부로 생각하는 국제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투쟁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공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스탈린이 장악한 코민테른의 잘못된 정책 때문이었다. 1925년 5월 30일 상하이 조계에서 영국군이 중국인 파업 노동자들에게 발포하는 참사(이른바 ‘5 · 30사건’)가 발생한 뒤 노동자 운동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급진화했고 노동자 권력 탄생은 시간문제인 듯이 보였다. 당시 공산당의 국공합작 파트너였던 국민당은 제국주의 열강보다 노동자들을 더 두려워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공산당에게 국공합작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당에 모든 것을 양보하라고 명령했다. 스탈린은 국민당이 자본가 정당이 아니라 4계급 연합당이라는 거짓말을 했다. 스탈린의 명령을 따라 공산당이 국민당에 발목이 잡힌 결과 1927년 국민당은 상하이 · 광둥에서 노동자를 대량학살하고 독립적 노동자 조직을 철저히 파괴할 수 있었다. 중국 공산당이 농촌으로 근거지를 옮겨 게릴라전을 벌이게 된 것은 이런 패배의 결과였지 농민의 힘을 새삼스레 발견해서가 아니었다.

도시 노동계급과 유리되고 국제적 노동자 혁명을 포기하면서 중국 공산당은 전 민족적 반제 항쟁을 부르짖는 좌파민족주의 정당으로 변모했다. 1939년 당원용 ‘교과서’의 첫 문장은 “황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중화민족 5천 년의 역사”를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국가의 ‘통일성’을 해칠 소수민족 자결권 지지 정책은 사문화했고, 1949년 이후 공산당 정부는 변경 소수민족 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했다. 이것은 1921년에 중국 공산당 당원들이 ‘중국의 국부(國父)’인 쑨원과 대립해 몽고족의 독립을 지지하는 용감한 활동을 벌인 것에 대비되는 엄청난 변화다.

동시에, 게릴라전이 주된 활동이 되면서 당의 결정에서 정치적 고려보다 군사적 고려가 더 중요해졌고, 지도자와 다른 정치적 의견을 가진 당원에게 ‘반혁명 분자’임을 자백하도록 강요하는 각종 ‘정풍 운동’과 지도자 숭배 캠페인이 주기적으로 벌어졌다. 

이런 변화는 공산당과 대중 간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공산당은 여전히 때로는 자발적으로, 때로는 기층의 압력에 밀려 ─ 1946년 이후 토지 개혁의 급진화가 대표적 사례 ─ 중국 민중의 요구를 대변했다. 그래서 국민당과 제국주의에 맞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산당에게는 도시 노동자뿐 아니라 주요 동원 기반이었던 농민조차 상명하달식 지도의 대상이었지 스스로 행동하고 판단하는 주체가 아니었다. 1949년 이후 수립된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막상 인민이 민주적 권리가 없는 단순한 통치의 대상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마오부터 시장 개혁까지 

흔한 평가와는 달리 1949~76년의 이른바 마오 시대 중국은 정체된 사회가 아니었다. 당시 중국은 연평균 6퍼센트 성장했는데 ─ 당시 세계평균 성장률은 4.5퍼센트였다 ─ 이것은 대부분의 제3세계 국가들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진정한 문제는 정체가 아니라 사회의 부가 군사적 능력을 키우기 위해 중공업으로 편중되고 보통 사람들의 필요가 무시됐다는 것이다. 한때 전체 공업생산에서 중공업 대 소비재 산업의 비율이 75 대 25에 이르기도 했다. 또, 중국 혁명이 ‘농민 혁명’이었다는 흔한 평가가 무색할 정도로 농업 투자가 철저히 무시돼 농업 성장률은 매년 겨우 1.4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 정권 초기에는 상황이 이 정도는 아니었다. 공산당 정부는 혁명을 성공시킨 대중의 지지와 열망에 일정 정도 부응했다. 1950년대 중반까지 임금 · 노동조건 · 보건 · 교육 · 농업 지원 모두 상당히 진보했다. 그러나 냉전 시대 제국주의 열강과의 경쟁이 격해지자 중국 공산당은 제국주의 열강의 압력에 민족주의적 방식, 즉, 부국강병으로 맞서기로 결정하면서 체제의 우선순위를 명백히 중공업 축적으로 돌렸다. 마오는 이 전략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렇다. 우리도 그것[최신 무기]을 가져야 한다. … 미사일이든, 핵폭탄이든, 수소폭탄이든 저들이 그것을 가지면 우리는 더 많이 가져야 한다.”

결국 중국 사회는 다른 자본주의와 다를 바 없이 인간의 필요가 아니라 경쟁적 축적 압력에 종속된 사회가 됐다. 다시 말해 당시 중국은 자본주의였다. 다만, 주된 경쟁 형태는 세계시장에서 상품가격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열강의 군사적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 중공업 축적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을 포함해 공산당 관료들은 사회의 필요를 축적에 종속시키는 구실을 하는 존재, 즉 관료적 자본가 계급이었다. 

그들은 선진 제국주의 열강과 군사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 보통 사람들에 대한 착취율을 높이고 희생을 강요했다. 예컨대, 노동자들을 정규직 · 반(半)정규직 · 비정규직 ─ 정식 용어는 이와는 달랐다 ─ 으로 나누고 복지와 임금을 차등 지급해, 시장자본주의에서 보통 노동시장과 기업 간 경쟁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경쟁 압력을 넣었다. 이런 일상적 고통뿐 아니라 때로는 희생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예컨대, 3천만 명 이상이 굶어 죽은 대약진 운동이나 수백만 명이 정치적 핍박을 받은 ‘문화대혁명’이 그랬다. 

그러나 이런 마오주의적 경쟁 전략은 부분적 성공을 거뒀을 뿐이다. 중국은 1960년대 이후로는 미국뿐 아니라 소련과도 대결해야만 했는데, 아무리 노동자와 농민을 쥐어짜도 냉전의 양대 초강대국과 겨룰 수 있는 군사력을 확보할 방법은 없었다. 심지어, 중국의 경쟁력은 이 초강대국들의 ‘위성국’들과 비교해도 별로 낫지가 않았다. 예컨대, 당시 일본 · 한국 · 대만의 연평균 성장률은 7~8퍼센트로 중국보다 높았고, 1979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베트남군과 캄보디아에서 짧은 전쟁을 벌였을 때도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1971년 한때 민족해방 운동의 상징이던 마오가 베트남 전쟁의 학살자인 미국 대통령 닉슨과 손을 잡고, 덩샤오핑이 세계시장 개방 정책을 편 것은 갑작스런 일탈이 아니라 이 한계를 극복하려는 나름의 필연적 선택이었다. 

덩샤오핑 개혁의 본래 목표는 중국 보통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보다는 시장의 힘을 이용해 중국 국가의 국제적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었고, 이 점에서는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대기업과 다를 바 없었다. 결국 1980년대 초의 ‘허니문’ 기간 이후 계급적 불평등이 깊어지고 정치적 갈등이 격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부는 헌법에서 파업권을 조용히 삭제했고 노동자 복지를 줄이기 시작했다. 1989년 톈안먼 항쟁은 그 갈등이 거리에서 폭발한 것이었다. 중국 공산당은 톈안먼 광장을 피로 물들인 후 국영기업 노동자 4천만 명을 해고하고 농촌 복지를 삭감하면서 중국을 세계시장에 밀접히 통합된 수출 주도형 경제로 바꿔 나갔다.  

새로운 혁명을 향하여

개방 이후 지니계수로 표현된 중국의 불평등 정도는 1980년 0.3에서 2007년 0.5로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속도로 심각해졌다. 시장형 경제 성장으로 모든 사람의 생활수준이 ‘먹고살 만하게’ 될 것이란 공산당 관료의 약속과는 달리 약 2억 1천만 명이 여전히 국제 빈곤선(하루 1달러) 이하의 소득을 벌고 있다. 반면에 공산당 고위 관료 ─ 민간 자본가인 경우가 많다 ─ 와 민간 자본가들 ─ 공산당 당원인 경우가 많다 ─ 은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누리며 살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당보다는 상공회의소에 가깝다”든가, “세계 최대의 지주회사”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톈안먼 항쟁이 패배한 기억을 뒤로 하고 1990년대 말부터 이런 모순에 항의하는 행동이 사방에서 고조되기 시작했다. 어떤 중국 사회 연구자는 1997년부터 2006년까지 보고된 ‘집단행동’ 사례를 수집한 후, 주요 집단과 원인을 이렇게 분류했다.

1.민영화 과정에서 해고되거나 적절한 퇴직금을 받지 못하거나 임금이 깎이고 노동조건이 불안정해진 국영기업과 집체소유 기업 노동자들.

2.고위 관료와 결탁한 개발업자들에 의해 도시 재개발 과정에서 적절한 보상금을 받지 못하고 자기 집에서 쫓겨난 도시 거주민들.

3.등록금 폭등과 정부와 대학 당국의 약속과는 달리 빚을 내고 대학을 졸업해도 좋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것에 분노한 대학생들.

4.부동산업자의 약속과 달리 입주 주택이 부실 공사이거나 공공서비스가 적절히 공급되지 않는 것에 항의하는 주택 소유자들. 

5.특정 업종의 종사자들, 특히 택시 운전사 · 교사 · 세발자전거 운전사 · 상인 등 자신의 특정한 노동권을 보장해 달라고 투쟁하거나, 자신의 권리나 이익을 침해하는 특정한 법규들에 항의하는 사람들. 

6.임금 체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의하는 ‘농민공’[농촌 이주 노동자].      

7.중국 공산당의 권력 독점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도전하는 파룬궁 회원과 기타 정치적 반대파들.

8.관료들과 기업가들이 토지를 강탈하고 환경을 파괴하는 것에 항의하는 농민들. 

여기에 티베트와 신장 등 소수민족 밀집 지역에서 일어나는 반정부 투쟁들을 포함하면, 이것이 2000년대를 묘사한 것인지 국민당 정부 말기를 묘사한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거의 모든 피억압 · 피착취 집단이 분노를 행동으로 표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공산당 정부는 옛 국민당 정부와 다르다. 제국주의에서 중국을 해방시켰다는 민족주의적 정당성을 여전히 갖고 있다. 또, 모순은 있지만 고도성장으로 일자리 확대와 최소한의 생활수준 향상이 지속해 왔고, 경제 성장으로 많은 혜택을 입은 집단(민간 자본가, 중간 계급의 일부 등)을 정치적으로 포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한계도 명백하다. 민족주의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겠지만 ― 최근 한족들의 위구르족 공격은 이 점을 명백히 보여 줬다 ― , 1990년대 이후 공산당 정부가 민족주의 카드를 툭하면 꺼냈음에도 집단시위의 폭발적 증가를 막을 수는 없었다(1993년 8천7백 건에서 2008년 18만 건으로). 체제의 안전성에 기여하는 듯이 보였던 상층 계급 포섭은 잇단 부패 스캔들로 짐이 되고 있다. 또, 아마도 통치 정당성의 가장 강력한 근거인 고도성장 신화가 끝날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다. 홍콩에서 발행되는 영자신문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의 칼럼니스트는 얼마 전에 중국 정부가 엄청난 규모로 경기 부양 정책을 폈음에도 “더블딥이 발생하면 진원지는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예측이 정말로 실현될지, 혹은 언제 실현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부양책의 일차적 혜택이 자본집약적 산업과 건설업으로 가기 때문에 설사 중국 정부가 목표로 한 7~8퍼센트의 성장률을 당분간 유지하더라도 ─ 이조차도 지난 20년간 평균성장률에 비해 1~2퍼센트, 2007년에 비해 2~3퍼센트 낮은 수준이다 ─ 충분한 수의 일자리가 창출되지 않을 것이고 중국 정부는 경제 위기의 정치적 파장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최근 중국의 주요 공업 단지에서 일손이 부족하다는 보도가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일손 부족은 (정부의 압력을 받은) 중국 언론의 호들갑, 계절적 수요와 아직 상당수의 실업 농민공이 공업 지역으로 돌아가지 않은 상황이 결합된 것이다. 

누구의 말이 옳든, 노동자들이 경제 위기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이미 중국 정부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다. 이것은 당연하다. 오늘날 중국 노동계급은 농민공을 포함할 경우 노동인구의 거의 절반에 육박할 뿐 아니라 중국 지배자들을 세계적으로 막강한 지배자 집단으로 만들어 준 부의 거의 대부분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2005년 농업의 GDP 부가가치 구성비는 12.5퍼센트밖에 안된다). 그 중에서도 최근 몇 년 동안 전투성이 상승해 왔고 경제 위기의 타격을 가장 크게 받은 1억 5천만~2억 2천만 명에 달하는 농민공들은 연안의 수출 공업 단지에 밀집해 있다. 그들의 노동조건과 임금 수준은 1920년대 노동운동을 주도한 상하이와 광둥의 노동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가 지속하고 중국 지배자들이 국내 모순의 폭발을 막는 데 성공하지 못하면, 이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1920년대 수준으로 폭발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아직 희망 섞인 전망일 수 있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오늘날 중국 사회에는 새로운 혁명을 향한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입력 2009-09-24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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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 20년

옛 소련 블록은 사회주의 사회였는가?

김인식

옛 소련 블록의 붕괴는 자본주의의 승리를 뜻하는가

1989~91년 동유럽 스탈린주의 국가들의 붕괴는 제2차세계대전 뒤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생애 최대의 정치적 사건들 중 하나일 것이다.

마르크스와 레닌을 인용해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를 자처하던 스탈린주의 정권들이 붕괴하자 국제 좌파는 완전히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공산당들은 붕괴하거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로 방향을 선회했다.

한국에서도 그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다. 스탈린주의 좌파들은 커다란 사기저하와 방향감각 상실을 겪었다. 일부는 개혁주의(예컨대, 진보신당의 주요 리더들)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또는 자율주의(예컨대, ‘다중지성의 정원’ 상임강사 조정환)로 변신했다. 일부는 아예 우익(한나라당 의원 신지호 등)으로 변신했다. 더 많은 사람들은 사회 변화에 회의를 느끼며 단순히 운동을 포기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서방’은 승리를 선언했다. 미국의 정치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거대한 도전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대안은 패배했고, 거대 대안들의 투쟁 서사로서 역사는 끝났다. 미래는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이익을 따르는 세계 시장과 다국적 기업이다.”

그러나 후쿠야마의 선언은 단명했다. 1990년대 후반에 세계 도처에서 저항 운동이 일어났다. 기업 세계화 반대 운동과 반자본주의 운동이 융합하기 시작했다. 그 뒤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적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지금 체제의 심장부에서 발생한 경제 위기 때문에 세계 주요 지배계급은 1989~91년 옛 소련 블록의 붕괴 이래 가장 커다란 혼란에 빠져 있다.

그럼에도 자본주의가 아닌 더 나은 세계가 가능한지를 토론할 때면 어김없이 “소련 문제”가 쟁점이 된다. “소련 문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치적으로 중요한 까닭이다.

옛 소련이 모종의 사회주의 사회, 또는 적어도 “노동자 국가”나 “탈자본주의 사회”였다면, 옛 소련을 지지하는 것이 인류 전체의 사회주의적 미래를 위한 투쟁을 지지하는 것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과 스탈린의 반혁명, 옛 소련 블록 사회의 성격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최일붕의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을 추천합니다.

반대로, 옛 소련이 모종의 사회주의 사회이기는커녕 자본주의보다 더 퇴보한 사회였다면, 그 논리적 결론은 퇴보를 저지하기 위해 서방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옛 소련 블록이 서방 자본주의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사회라면, 옛 소련 블록의 몰락은 오히려 진정한 사회주의 운동을 건설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질 수 있음을 뜻한다.

지금도 이 문제는 중요하다. 북한 · 중국 · 쿠바 등 잔존하는 스탈린주의 국가들은 소련을 본떠 건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련 문제”는 이론 그 자체를 위한 이론적 주장이 아니다. 거대한 실천적 함의들을 담고 있다.

옛 소련 블록은 전체주의 사회였는가

보수주의자들은 옛 소련을 흔히 전체주의 사회로 그린다. 즉, 지도부 · 이데올로기 · 탄압에 의한 상명하달 등으로 모든 상황을 설명한다.

전체주의 이론은 냉전 때 서방의 보수주의자들이 처음 만들었다. 전향한 옛 공산주의자들도 이 주장을 수용했다.

그 핵심은 사회의 급진적 변화 가능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즉, 볼셰비즘의 원죄는 무력을 통해 세계에 평등과 정의라는 새로운 이상을 부과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탈린주의의 본질과 1917년 혁명 당시의 사상 사이에 근본적 차이가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스탈린주의는 급진적 이상을 전혀 고무하지 않았다. 오히려 매우 보수적이고 계급 지배적인 교리였다.

옛 소련을 전체주의 사회로 묘사하는 것은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의 거울 이미지일 뿐이다.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는 레닌에서 스탈린으로, 그리고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지도부와 비밀 경찰(옛 소련의 게페우나 옛 동독의 슈타지 등)의 절대적 구실을 강조한다. 전체주의 이론도 동일한 특징들을 지적한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와는 달리 그 특징들을 비난한다. 사회주의가 억압적인 전체주의 사회라는 믿음을 유포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함으로써 권력과 특권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도전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전체주의 이론은 사회 내부의 자체 변화 가능성을 부정한다. 탄압을 특별히 부각한다. 그 때문에 인구 대중은 원자화한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그 사회 구성원들이 체제에 맞서 조직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북한 체제에 대해서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옛 소련 블록을 전체주의 사회라고 비난하는 것은 언뜻 급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정치적 함의는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매우 보수적이다.

전체주의 이론은 또한 연속성을 주장한다. 레닌의 러시아와 스탈린 · 후르시초프 · 브레즈네프 · 고르바초프 등의 러시아를 동일시한다. 1917년 이래 옛 소련 사회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 소련을 탐구한 최상의 역사가 중 한 명인 모셰 레윈은 전체주의가 “소련의 변화 메커니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역사 과정을 어렴풋하게 나타내지도 못한다”고 지적했다.

스탈린주의는 레닌주의에서 비롯했는가

소비에트의 역사는 단순하지 않다. 가장 흔한 오류는 선후관계를 인과관계로 이해하는 것이다. 시간상 선행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나중에 일어난 일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비논리적 접근이다.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았다는 주장도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1917년 2월 1차 혁명은 차르(러시아 황제)를 타도했다. 1917년 10월 2차 혁명을 통해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했다. 볼셰비키는 러시아를 바꾸고자 했다. 또, 국제 혁명을 고무해 불평등과 전쟁과 계급 갈등이 없는 세계 건설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10년 만에 혁명 세대 대부분이 사회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그리고 스탈린 치하에서 옛 소련은 열강으로 부상했다. 스탈린 정권은 ‘사회주의’를 자처했지만, 대내적으로는 비민주적이고 억압적이었으며, 대외적으로는 광범한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봉쇄하거나 방해했다.

요컨대, 러시아의 역사는 연속성이 아니라 불연속성(단절)과 관계 있다. 1917년에 진정한 노동자 혁명이 있었다. 그 뒤 혁명은 다른 무엇으로 변질했다. 1917년 혁명이 필연적으로 스탈린주의로 귀결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레닌에서 스탈린으로”는 논리적 진행이 아니었다.

피터 세즈윅은 스탈린주의의 기원을 레닌의 이데올로기적 논리에서 찾는 것을 비판했다. “러시아 혁명과 내전이라는 ‘객관적인’ 사회 조건들이 대중적 혁명 물결의 쇠퇴를 위한 충분조건을 내포하고 있다. 그 원인을 레닌의 초기 공식에서 나타나는 ‘주관적’ 결함에서 찾지 않아도 된다.”

1917년의 염원과 희망이 타락하게 된 것은 러시아 혁명이 고립되고 내전으로 경제가 파탄났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에 했던 것과 나중에 일어난 것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스탈린 정권은 혁명의 타락 한복판에서 등장했다. 그 요인들은 명백히 관련돼 있다. 그러나 예정된 결말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혁명에 내재된 논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나키스트 출신의 볼셰비크였던 빅토르 세르쥬는 이렇게 말했다. “스탈린주의의 모든 세균이 애초 볼셰비즘에 있었다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글쎄, 이견은 없다. 단지 볼셰비즘은 다른 많은 씨앗도 갖고 있었고, 승리한 혁명 5년 동안 열정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하나의 씨앗은 잘 자랐는데, 나머지 씨앗들은 왜 그렇지를 못했는가? 이를 이해하려면 그 씨앗들이 재배된 토양을 조사해야 하고, 어떻게 재배됐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옛 소련 블록은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였다

혁명이 타락했다는 것은 그 혁명이 무엇으로 변질됐는지를 묻는 것이다. 스탈린주의 정권이 발전시킨 것은, 타락했든 타락하지 않았든 간에, 모종의 사회주의와 전혀 상관없었다. 정확히 말해, 20세기 자본주의의 변형인 관료적 국가 자본주의였다.

2000년에 작고한 영국의 사회주의자 토니 클리프가 제2차세계대전 직후 이런 관점에서 옛 소련에 관해 가장 조리 있는 이론을 제시했다.

옛 소련이 자본주의였다는 것은 그 사회에 자본주의의 기본 특징들 ― 경쟁, 착취, 계급, 소외 등 ― 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임금 노동이 존재했다. 노동자들은 정치적 자유는 제약돼 있었지만, 법률적으로는 자유로왔다. 생산수단을 통제하거나 소유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관료가 지배하는 국유 기업에 고용돼야만 했다.

이런 자본주의적 특징들은 더 많이 들 수 있다. 1인 경영제, 노조 무력화, 단체협약 폐지, 스타하노프식 노동강도 높이기, 국내통행허가증제 도입, 여성의 예속, 농업의 강제 집산화, 강제노동수용소, 소수민족 억압 등등.

특히, 소련과 나머지 자본주의 열강들 사이의 경쟁이 중요했다.

스탈린은 “우리는 선진국들에 50년 뒤졌다. 우리는 10년 안에 이 격차를 메워야 한다. 우리가 이 일을 해내지 못하면 그들[서방]이 우리를 분쇄해 버릴 것이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부분적으로 경제적 경쟁이 있었지만, 결정적인 것은 군사적 경쟁이었다. 이것이 소련의 발전 패턴을 설명하는 데서 핵심이다.

옛 소련은 단지 자본주의가 아니었다. 자본주의의 기본 특징이 협소한 법률적 관점에서 사적 소유가 아니라 국가 소유로 표현됐다는 점에서 국가 자본주의였다. 체제 내 메커니즘의 핵심 성격이 매우 융통성 없고 경직돼 있으며 관료적이라는 의미에서 관료적 국가 자본주의였다.

흔히 옛 소련에만 있다고 여겨진 것들 대부분이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 있는 요소들의 확장이었다. 좀더 격렬한 형태로 있었지만 말이다.

예컨대, 국가라는 핵심 문제를 살펴보자. 옛 소련에만 특수하게 있고 ‘자본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다고 잘못 믿었던 것들 대부분을 현대 자본주의의 군사 부문들에서 볼 수 있다. 1970년대 초 미국의 급진 경제학자 하워드 셔먼은 이렇게 지적했다.

“소련을 제외하면 … 미국 국방부는 세계 최대의 계획 경제다. 미국 국방부는 전체 미국 기업의 순수입보다 더 많이 지출한다. 1969년에 4백70개의 주요 시설들과 6천 개의 부수 시설들을 보유했고, 3천9백만 에이커의 땅[여의도 면적 2백54만 평의 1만 8천7백95배]을 소유했으며, 연간 8백억 달러를 지출했으며, 미국 노동력의 10퍼센트에 이르는 군인들과 군수품을 사용했다.”

사실, 자본주의 역사 내내 자본주의는 국가에 의지해 필요한 구조들을 창출했다. 그와 동시에, 국가는 직접 생산자, 공장 소유주 구실을 하기도 했다. 자본주의는 기업과 국가가 경쟁하는 세계다. 기업과 국가는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체제가 발전함에 따라 국가는 훨씬 더 중요해졌다.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국가 주도 전쟁 경제들의 경쟁 체제가 된다.

따라서 정도는 다를지라도, 국가자본주의는 언제나 체제의 일부였다. 20세기 동안 국가의 구실은 지속적으로 증대해 왔다. ‘사적 자본’은 이런 국가의 부상에 맞서 투쟁하기는커녕 종종 그것을 지지했다. 세계화의 충격 때문에 국가가 “후퇴”했다는 지난 20년 동안에도, 국가의 경제적 구실은 현대 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여전히 중요하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국가 통제’와 관계있다는 주장은 완전히 당찮은 말이다. 국가 통제가 자본주의와 모순된다는 주장도 터무니없다.

이런 주장들은 일찍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그리고 1917년에 볼셰비키가 분명하게 반대한 것들이다.

국가 자본주의에서 시장 자본주의로

1991년 옛 소련 체제의 붕괴와 뒤이은 이행은 급진적 변화를 수반하지 않았다. 1989~91년은 정치 혁명과 자본주의 형태의 변화 ― 국가에서 좀더 시장 형태로 이동 ― 가 결합된 것이다.

정치 혁명이 있었다는 것은 민주주의와 따라서 자주적 대중 조직이 등장할 가능성이 생겨났음을 뜻한다. 그 의미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커다란 성과다.

한편, 자본주의 형태의 변화라는 생각은 이행의 거대한 수수께끼를 푸는 데서 핵심이다.

옛 소련 블록 상층부에서는 매우 놀라울 정도로 지배의 연속성이 있었다. 옛 소련의 비자본주의적 성격을 강조한다면, 자본주의가 그때 어떻게 등장할 수 있었는지, 옛 체제를 운영한 바로 그 집단들이 어떻게 새로운 체제를 운영할 수 있게 됐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인민위원회 부서는 폐지될 것이고, 그 해체 위에서 (똑같은 건물, 똑같은 가구, 똑같은 사람이 있는)주식회사 형태의 기업체들이 생겨날 것이다. 인민위원은 사임할 것이다. … 대개 폐지된 인민위원회 부서의 제2, 제3의 인물이 기업체의 수장이 될 것이다.”(러시아과학아카데미 사회학연구소의 올가 크리쉬타노프스카이야)

1989~91년 옛 소련 블록에서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가령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또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가령 1917년 러시아 혁명)에 해당하는 사회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1928~29년 스탈린의 반혁명에 필적할 만한 변화도 아니었다.

이행의 결과, 러시아에서는 광범한 경제적 · 사회적 붕괴가 나타났다. 옛 체제의 희생자였던 평범한 러시아인들이 이행의 희생자가 됐다. 그러나 옛 질서의 지배자들은 새로운 질서에서도 지배력을 강화했을 뿐 아니라 막대한 개인적 부를 쌓았다.

이것은 옛 체제와 사회주의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회 변화의 비전이 협소해졌고 두 가지 대안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 옛 질서로 복귀하거나 서방 자본주의와 좀더 비슷하게 체제를 개조하거나. 옛 소련 블록의 인구 대중에게 그 결과는 거의 비극이었다.

옛 소련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과거를 이해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미래의 정치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사태의 진실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전진만이 아니라 어떻게 전진해야 할지도 알 수 있다. 특히, 국가 권력에 의지해 위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대안 세계로 보는 것은 위험하다.

기억 상실과 기억은 다르다. 기억 상실은 잊는 것이다. 일부 좌파는 옛 소련을 잊으려 한다. 기억은 과거를 잊지 않고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알 수 있다.

입력 2009-10-08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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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우의 NL 노선 재구성 시도

의미 있는 물음, 빗나간 답변들

김하영

지난 7월 민경우 새세대네트워크 기획위원(이하 호칭 생략)이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책을 냈다. 책 제목은 “진보의 재구성”이지만, 사실은 NL 노선의 재구성을 의미한다. 민경우는 1년 반 넘게 NL 진영에 여러 근본적 물음을 던져 왔는데, 그것을 정리해 책으로 묶어낸 것이다.

그의 이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작정하고 NL 진영에 문제 제기하는 것을 별것 아닌 일로 치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NL의 중요한 리더 가운데 한 명이었다. 특히 그는 통일운동이 분열의 위기와 탄압으로 얼룩졌던 1990년대 중후반 결연하게 범민련을 지킨 인물이었다(1995년부터 2005년까지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 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그는 통일연대 사무처장을 하다가 국가보안법으로 옥고를 치렀고, 출소 후에도 NL 운동의 중심으로 돌아와 얼마 전까지 한국진보연대 정책기획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그런 그가, “NL노선은 20년의 시간을 거치며 현실과 많은 괴리와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진보의 재구성》, 시대의 창, 2009, 5쪽. 이하 쪽수만 표기)고 폭탄 선언을 한 것이다. “시급히 NL노선을 시대에 맞게 재구성해야 한다.”(6쪽) 또, 그는 “마치 성경의 문구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근본주의자’” 같은 풍토가 NL 진영에 만연해 있다는 신랄한 비판도 했다. “토론하고 학습하는 풍토 자체가 사라져 있었다.” “경제공부를 하자고 제안했더니 엉뚱하게 북한공부를 해야 한다는 반론이 돌아오는가 하면 사회과학 이론의 초보적인 개념조차 동의하려 하지 않았다.”(29쪽)

NL 운동 안에서 잔뼈가 굵어 NL 사상의 핵심과 그 실천적 함의, 그리고 ‘사업 작풍’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답게, 민경우는 NL 노선의 뿌리를 겨냥한 의미심장한 물음들을 던지고 있다. ‘한국은 미국의 정치 군사적 식민지인가?’, ‘농촌 인구가 급감한 현실에서 노농동맹에 기초한 통일전선이 여전히 의미 있는가?’, ‘현대와 삼성은 매판자본인가?’, ‘지사적 풍모와 금욕적 생활 태도가 요즘 청년들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는가?’, ‘일국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가?’ 등등.

민경우의 NL 노선 재구성 시도는 현실의 변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즉, 남한 자본주의 성장과 민주주의 발전, 소련과 동유럽의 몰락, 미국 지위의 상대적 하락, 신자유주의, 두 개혁 정부 경험, 촛불 같은 새로운 운동의 등장 등. 그래서 NL 진영에 포진한 젊은 활동가 상당수는 언젠가 한 번쯤 자신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던 의문의 편린을 민경우의 책에서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비NL 진영 누군가의 비판이라면 인상을 찌푸리며 제쳐버렸을 수 있지만, NL 운동에 헌신적으로 매진해 온 중견 활동가의 진지한 성찰을 보며 미뤄뒀던 고민을 꺼내들 의의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민경우는 의미 있는 물음에 걸맞는 훌륭한 답변을 내놓지는 못하는 듯하다. 그의 문제 제기가 선구적인 게 아닌 만큼 답변이 더욱 중요한 것일 텐데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의 답변은 개혁주의 방향을 가리키는 경우가 흔한데, 때로는 NL 노선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절충하는 데서 멈추고, 때로는 온건 PD의 변형판과 비슷하다. 이것이 내가 이 책에 대해 왈가왈부하기로 결심한 이유다. 비록 민경우는 이 책이 “NL노선을 견지하며 운동을 했거나 하고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함”이라면서(6쪽) 비NL 진영의 개입에 선을 긋는 듯하지만, 그가 다루는 논의는 NL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가 이 책에서 NL을 대개 “주류”라고 표현하는 데서도 드러나듯이, 운동 내 다수파인 NL의 노선은 전체 운동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에서 민경우가 던진 의미 있는 물음에 더 나은 마르크스주의적 답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한다.

정치에서 경제로?

민경우는 NL 진영의 무능으로 경제 문제(특히 금융과 환율)에 대한 무지를 가장 중요하게 꼽는다. “대부분의 활동가들이 지나칠 정도로 경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31쪽) 그래서 IMF에 대한 대응, 론스타 등 외국계 금융자본의 몰염치한 사기 행각에 대한 대응, 2008년 9월 미국발 금융위기에 대한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민경우의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해 NL 일각에서는 ‘그러니 당신처럼 정책이론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연구소를 만들어 기여하면 되지 않느냐’고 다독이듯이 또는 논쟁 끝 퇴로라도 열어주듯이 말한다. 그러나 민경우가 경제 문제를 강조하고 나선 데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는 NL 노선에 외환 · 금융 지식을 보태 한국 경제를 분석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경제 현실을 보여 줌으로써 NL 노선이 더는 현실에 부합하지 않음을 입증하려고 한다.

“필자가 경제공부를 주장하는 것은 그저 단순히 서민생계를 잘 알아야 한다는 데 있지 않다. 경제공부를 통해 현재 상황을 자연스럽게 소개하고 이를 통해 운동이론을 재구성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노동자 1000만, 농민 800만일 때의 노농동맹과 노동자 1600만, 농민 180만, 도시 소상인 600만일 때의 노농동맹은 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다. 기본 통계조차 경시하는 현실을 우회적으로 돌파하기 위한 수단이 경제공부였고 그런 면에서 보면 필자의 시도는 분명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긴 하다.”(31~32쪽)

경제에 대한 그의 문제 제기가 전략 변화를 의도하고 있다는 건 그가 경제의 중요성을 통일과 맞바꾸고 있는 데서도 선명히 드러난다. 그의 말마따나 “30대의 10년을 통일운동을 하고 보낸” 사람이, 그것도 “통일의 가능성이 훨씬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고 전망하면서도 “통일 대신 경제를 삶의 중심 화두로 올려놓”기로 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꽤 오래 전부터 신자유주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최근까지도 통일을 한국 사회 변화의 고리라고 여겨 왔다. 그가 “통일운동에 전념했던 것은 통일정세의 격변이 한국 정치지형의 변화를 가져오고 이것이 한국사회의 진보적 발전에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21쪽)

이런 그의 믿음에 결정적 균열을 낸 것은 2007년 대선이었다. 2005~07년에 그는 소위 “통일정세”의 성숙에 한껏 고무돼 있었다. 중국-러시아의 “반미연대” 강화, 이란과 베네수엘라의 대미 공세 강화,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 핵실험 강행 등을 보면서 말이다. “이런 정도라면 2007년 대선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18쪽) 그러나 그의 예측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경제를 살리겠다는 간명한 메시지를 앞세운 이명박 후보가 대선 정국을 시종일관 압도했다. 다른 말이 필요없었다.” 그가 보기에, “현실경제의 악화가 통일정세를 압박하여 10년간의 남북관계의 진전을 무위로 돌리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했다.(21쪽) 이로부터 그가 내린 결론이 바로 경제였다.

그런데 민경우의 경제 중시론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그가 NL 이론을 어떻게 재구성하려 하는지 살펴보기 전에 이 점을 간단히 짚고 넘어가려 한다. 첫째, 그는 운동 주류는 경제가 약점인 반면 이명박은 경제가 강점이라는 가정을 깔고 있다. 현재의 경제 상황이 이명박에게는 득이 되고 진보진영에게는 어려움을 초래한다고도 보는 듯하다. 이것은 대선 평가와 운동 진영의 과제에 대한 그의 분석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이명박이 당선된 이유도, 민주노동당이 빈약한 성과만을 얻은 이유도 모두 경제로 설명했다. 물론 경제가 중요하다. 더구나 경제 악화를 배경으로 치러지는 대선에서 경제가 주요 이슈로 떠오르지 않을 리 없다. 그리고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이런 조건에서 그 수혜자는 야당이기 쉽다. 김대중 · 노무현 정권 동안 대중의 삶이 더욱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류 진보진영은 이 정권들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지 못했다. 그런데 문제는 민경우가 이명박의 “경제” 또는 “중도 실용”에 대한 지지도를 과대평가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명박을 당선시킨 경제가 머지않아 이명박의 아킬레스건이 될 것이라는 점과 경제 위기가 진보운동에도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는 듯하다.

민경우는 서민들이 이명박식 경제 논리에 동의해서, 또는 신자유주의 경제 거품의 떡고물을 기대하고 그를 지지한 것처럼 암시한다. 그러나 이명박을 당선시킨 일등공신은 노무현 정권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말을 하지만, 그것이 뜻하는 바까지 정확히 지적하는 경우는 드물다. 많은 사람들이 아예 투표장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명박에게 투표한 사람들은 이명박이 좋아서 그를 찍은 게 아니라 노무현 개혁에 실망한 쓰디쓴 심정으로 ‘차라리’ 이명박에게 표를 줬다. 이명박의 등장은 사람들의 보수화와 우파 정당에 대한 지지 확대를 뜻하는 게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점을 보지 못한 적잖은 사람들처럼 민경우도 대선 결과를 암울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대선 한 달 뒤쯤 쓴 글에서 “[임기를] 전 · 후반기로 구분한다면 전기는 이명박 차기 정권에 대한 지지도가 강하게 유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1 이명박의 “중도 실용”이 사람들에게 먹힌다고 본 것이다. 이런 전망을 바탕으로 그는 “이명박 정권 전반기에는 최대한 정면 승부를 피하”자고 제안한다. “강한 돌에 무리하게 다가서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경제가 악화되는 2005년부터 이미 서민 대중은 도심의 대규모 거리시위에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전망은 겨우 석달 만에 현실에서 정면 반박됐다. “거리시위에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던 그 서민 대중이 촛불을 들고 “강한 돌”에 다가서 “중도 실용”의 실체를 밝혀내고 이명박을 추락시켰다. 민경우는 그의 책에서 지난해 촛불 운동을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이런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뒤떨어진 운동권”을 비판하는 만큼 자신의 판단 오류에 대해서도 얘기하는 게 공정했을 텐데 말이다. 내가 모종의 품성론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그가 “뒤떨어진 운동권”의 핵심 문제를 상당히 공유하고 있었다고 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첫째, 대중이 우경화했다고 판단해 그런 투쟁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 둘째, 자발성주의를 추수하고, 이를 변명 삼아 정작 필요할 때 행동을 회피한 것. 셋째, 이명박 퇴진 방침 천명을 회피한 것. 이것은 NL과 민경우의 공통점이지, 차이점이 아니었다.

사실, 한국진보연대는 2007년 대선 이후 정세 전망을 민경우보다 덜 암울하게 절충해서 내놓았지만, 행동은 민경우의 정세 전망에 기초한 듯이 했다. 나중에 정대연 한국진보연대 정책위원장도 인정했듯이, “우리가 가장 먼저 반성할 일은 대중들은 이명박 정권에 맞서서 투쟁하려고 계획을 준비하고 있을 때, 진보진영은 이명박 정권이 밀어붙일 테니까 수세적으로 정세를 바라본 오류가 있었다[는 것이다.] … 진보진영이 효과적인 자기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바로 이것에서 출발했을 것이다.”2 또, 그는 “‘퇴진 투쟁이 맞네 안 맞네’ 우왕좌왕할 때 진보연대가 중심을 잡고 나[갔다]면 우리가 뒷받침하면서 나갈 수 있었는데 왜 그렇게 조심스러워했냐는 [네티즌들의] 의견이 광범위하게 있다”고도 했다.3

그런데 민경우는 지난 1년간 경제 악화와 민주주의 악화, 노동자 투쟁 등을 겪고도 “강한 돌에 무리하게 다가서지 말라”는 ‘전술’을 여전히 되풀이하는 듯하다. 그가 2008년 미디어법 저지 국회 앞 농성을 반대한 것이나 2009년 6월 민주노동당 당대회의 이명박 퇴진 입장에 반대하고 나선 것도 모두 이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 즉 한국 자본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가 평범한 대중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고 있다는 그의 판단이 깔려 있다. 그는 “현재 상당수의 국민대중은 삼성전자 · 현대자동차가 보여주는 세계적 수준의 경쟁력에 깊이 포섭되어 있[다]”며4 어느 글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거대한 철벽”이라고 표현했다.5 이런 분석의 문제점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둘째, 그는 NL이 정치 · 군사에 절대적 중요성을 둬 왔다고 비판하며, ‘정치 · 군사’에서 ‘경제’로 180도 돌아섰다. 정치와 경제의 결합이 아니라 정치 대신 경제라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논쟁의 맥락상 강조점 이동 정도라면 다행이지만 사실 그의 글 곳곳에서 그 이상의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그는 이렇게 말한다. “2004년 4 · 15총선의 여세를 몰아 국가보안법을 비롯해 4대 악법을 폐지하라는 단식농성이 국회 앞을 수놓던 바로 그 시각, 생계를 위협받게 된 전국의 음식점 업주들의 솥단지 시위가 여의도에서 벌어졌다. 국민들은 열린우리당이 주도한 4대 악법 개폐 투쟁에 대체로 냉담했다. 여전히 냉전의 잔재에 묶여 있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경제상황의 악화가 발목을 잡았다.”

사실, 이런 얘기는 PD 진영으로부터 신물나게 들어 왔다. ‘NL은 민생을 도외시하고 민주주의나 통일에만 관심을 갖는다’는 식의 주장 말이다. 그러나 대개 NL이 노동자 · 민중의 생활 조건을 둘러싼 투쟁에 적극 참가한다는 점만 봐도 이것은 온당한 비판이 아니다. 오히려 NL의 문제는 민주주의나 통일 문제에서 자유주의자들과 동맹하고, 통일에 과도한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데 있다. 2004년 하반기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 사례만 보더라도 NL의 문제는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후퇴를 거듭하는 열린우리당을 추수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PD 진영은 진정한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국가보안법이 아니라 민생’이라는 식으로 둘을 대립시켰다. 반전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질 때는 ‘반전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라고 대립시키는 세력도 있었다. 이런 입장은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데, 왜냐하면 민주주의나 분단 문제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이 문제들에 대처하는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그저 회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민경우가 이런 전철을 밟고 있다는 것은 그가 PD류의 “87년 체제의 종말”을 되뇌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 “1980년대 중후반을 계기로 민주화 국면이 마무리되고 신자유주의가 전면화하는 양상[이다.]”(55쪽)

민경우는 마치 경제 위기 때는 노동자 · 민중이 정치 쟁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듯이 암시한다. 그러나 다수가 비정규직 노동자인 20~30대 젊은 여성들이 지난해 촛불 운동에 대거 참가한 것만 봐도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또, 노무현 정부가 2004년 하반기와 2005년에 지지자들을 대거 잃은 것도 경제 문제를 도외시하고 정치 개혁에 매달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의 의사를 거슬러 이라크에 전투부대를 파병한 것, 국회 다수석을 줬는데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비롯한 여러 진정한 개혁들을 추진하지 못한 것, 그리고 빈부격차가 확대된 것, 반노동자 정책을 추진한 것 등이 결합한 결과였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는 정치와 경제의 연관을 이해하는 것이 더더욱 중요하다. 경제 위기는 정치 체제의 불안정과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고, 국가 간 갈등도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보지 못하는, 정치 없는 경제 중시론은 경제 없는 정치 · 군사 중시론만큼이나 취약할 수밖에 없다.

셋째, 민경우는 생산보다는 금융과 외환에 분석상의 중요성을 두며 경제 위기의 원인도 여기서 찾는다. 그의 책 전체를 통틀어 이윤율 저하에 관한 얘기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그는 자본주의 자체를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이 점도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현실 부정과 혁명 부정 사이에서

민경우는 “식민지반半자본주의론”이 더는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NL 노선의 근간을 겨냥한 것이다.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은 “한국사회를 분석하는” NL의 “기본틀”로, 1988년에 등장했다. 1986년까지 NL은 “식민지반半봉건사회론”을 주장했는데, 이 이론은 “미국의 정치군사적 강점에 의한 한국사회의 식민지성”이 한국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결정적 요인이라고 보았다.6 따라서 운동의 주요 목표는 제국주의로부터의 민족해방이 된다.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은 “한국사회에 대한 구체적으로 실증적인 분석의 결과라기보다는 반제 문제에서 보다 원칙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고 평가된 북한의 이론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었다.”7 1988년에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이 식민지반자본주의론으로 ‘수정’된 것도 북한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식민지반자본주의론도 “식민지성”을 한국사회 성격의 핵심으로 봤다는 점에서 식민지반봉건사회론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민경우의 지적대로 “봉건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 발전했지만 여전히 식민지이므로 자본주의 발전도 정상적일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민족모순 때문에 기형성, 파행성을 가진 불구화된 자본주의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95쪽) 그래서 남한 사회는 “지주-소작 관계가 온존하고”, “매판성과 전근대성”을 띤다.

요컨대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은 “한국 내부의 독자적인 발전은 불가능”하며(58쪽), 발전을 이루려면 “정치적 자주권”을 쟁취하는 식민지 민족해방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분석으로부터 “학생운동을 중시한 점, 노농동맹에 기초한 통일전선, 정치군사적인 차원의 자주통일운동 중시, 학습과 대중운동 중시, 지사적인 풍모와 금욕적인 생활 태도의 강조” 등이 나왔다. 민경우는 NL 진영이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식민지반자본주의론에 집착한 결과 이처럼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억지스러운 실천[을] 거듭”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96쪽)

“식민지”, “매판”, “기형성”, “지주-소작 관계”라니 이 저널의 독자들은 무슨 신소설을 읽는 기분이겠지만, 놀랍게도 NL은 1980년대 중반 이래 지금껏 이 분석의 골간을 그대로 유지해 왔다. 놀라운 현실 부정이다.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은 1980년대 중반 당시에도 맞지 않는 얘기였지만, 도심 고층빌딩이 즐비하고 세계 다섯 번째로 이지스 구축함을 자체 제작 보유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 현실과는 더더욱 동떨어진 얘기가 아닐 수 없다.

민경우의 문제 제기도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1970년대나 1980년대 중반이라면 모르겠는데 1990년대가 되면 한국사회의 자본주의화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야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했다고 얘기하다니 만시지탄이 아닐 수 없다. 그는 1980년대 중반 “한국경제 파국론”이 유행했지만 파국은커녕 3저호황을 누렸고, 제국주의적 간섭 때문에 한국에서 독자기술 개발이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한국 대자본은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고 지적한다. “한국의 대자본은 2009년 현재 세계 굴지의 대자본으로 성장했고 반도체, LCD, 조선, 핸드폰 등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삼성, LG, 현대자동차 등의 브랜드는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다.”(59쪽)

그런데 민경우의 뒤늦은 자본주의 발전 인정은 자본주의 발전 지지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삼성에 대해 그가 보이는 태도는 경탄 자체인 듯하다. 1990년대 초 이건희의 신경영전략 이후 삼성은 “초고속 질주를 거듭”했고, 그것은 “기술”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2007년 《포천》이 선정한 글로벌 5백대 기업에서 삼성이 46위를 차지한 것, 삼성전자의 연구 인력이 2006년 현재 전체 직원의 38퍼센트에 이르는 것,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기술과 브랜드에서 발생하는 것 등을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는 눈치다.(100~103쪽)(물론 다른 곳에서는 글로벌 대기업이 잘 나가는 동안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구조적으로 몰락했다며 후자를 편들며 서술한다.) 또, 그는 최근 “미증유의 경제위기가 터진 조건에서 한국의 유력 대자본이 흔들리는 조짐은 없다”고 과대평가한다.(104쪽)

민경우는 이런 기업들을 “매판자본”[1]이라고 부르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옳게 지적한다. 국가관료도 마찬가지다. “이전 시기 매판세력은 제국주의 본국에 의해 육성되고 양성된 세력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독자적인 메커니즘과 정치적 역량을 구비한 정치세력으로 발전했다.”(163쪽) “미국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허수아비 세력이 아니”다.(105쪽) 그는 자신을 포함한 NL이 “한국은 미국의 절대적인 영항력 아래에 있고 미국의 손아귀를 좀처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봤고, 그러다 보니 “시쳇말로 한국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고 털어놓는다.(44쪽) 그는 다른 글에서도 “한국의 관료집단과 글로벌 대기업을 ‘우습게 보는’ 자민통 진영 일부의 시각은 시급히 극복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8

‘우습게 보지 말아야 한다’니, 참 묘한 여운을 남기는 말이다. 그동안 한국 대기업과 국가관료를 미국의 꼭두각시로 보고 미국 제국주의와의 투쟁을 결정적인 것으로 여긴 오류를 돌아보며 이제는 한국 대기업과 국가를 당면한 주요 투쟁 상대로 인식해야 한다는 말이라면 이것은 전적으로 옳다. 그런데 민경우는 경제 파국론의 오류를 신랄하게 비판하려다 이제 어느 때보다 심각한 세계적 경제 위기 한복판에서 한국 경제의 성장 능력과 포섭력, 위기 관리 능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튄다. 또, 민경우의 주장에는 한국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상황에서는 강제력을 사용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엿보인다. 여기에는 민주주의 발전(이른바 “헌정질서에 대한 국민들의 존중감”)에 대한 고려가 맞물려 있다.

그래서 그는 “전민항쟁” 방식이 아니라 “선거”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민항쟁”은 그저 대중운동을 뜻하는 게 아니라 민족해방 또는 기존 통치 제도 전복을 위해 전체 인민이 들고일어나서 벌이는 전쟁이라는 뜻이다. 요컨대 민경우는 강제력 없이 선거를 통해(물론 그는 선거와 대중운동의 결합도 말한다) 사회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직선제[는] … 민중의 새로운 무기로 발전하고 있다.”(164쪽) 민경우와 함께 새세대네트워크를 운영하는 이승환은 “선거는 이제 불가역적인 권력 획득의 방식”이라고 좀더 분명하게 말한다. “폭력적이지만 약한 국가라는 상황에서는 민족해방전선 혹은 민족민주전선이 무장투쟁 등 전민중적 항쟁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게 가능”했지만, 남한 국가는 그렇게 “취약하지 않다.” “능력있는 관료 엘리트[가] … 한국 자본주의 축적을 선도했고 … 노동계급에 대한 … 일정한 ‘포섭’ 또한 존재했[고,] … 미약하나마 복지제도 등 ‘동의의 장치’들도 설치되었다.”9 민경우와 이승환이 올해 민주노동당 정책당대회의 이명박 정권 퇴진 입장을 반대하고 나선 것은 단지 전술 문제가 아니라 이와 같은 전략과 원칙 문제를 함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NL 진영에서 1980~90년대 유행했던 생각, 즉 제3세계에서나 혁명이 가능하지 선진 자본주의에서는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고스란히 뒤집어놓은 격이다. 한국을 제3세계 국가 목록에서 빼내 선진 산업국 목록으로 이동시켰을 뿐이다. 20세기 초 독일의 상당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러시아 혁명에 대해 취한 태도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들은 러시아 혁명이 전제정 치하에서나 가능한 예외적 사건이고, 헌법이 확고하게 유지되는 서유럽의 사회 질서 속에서는 그와 같은 혁명적 투쟁이 무의미하다고 봤다. 1970년대 후반 이후 서유럽 공산당들도 서유럽 국가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치체제이므로 폭력 사용은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로 가는 의회적 길’을 정당화했다.

그런데 문제는 민경우가 “청산 대상”으로 규정한 “민간 대자본과 보수 엘리트”를 선거로 청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선거는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둘러싼 계급 간의 투쟁에서 일정한 구실을 한다. 그러나 지배계급은 자신의 전장을 결코 선거 공간에 한정하지 않는다. 언론도 활용하고, 선출된 정부가 자신의 이익을 침해할 때 투자 기피나 자본 해외 유출로 대응하고, 종국에는 1973년 칠레에서처럼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수도 있다. 따라서 선거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민간 대자본과 보수 엘리트”를 진정으로 청산하려면 더 효과적으로 그들의 권력에 도전하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필요하다. 선진 자본주의의 경험이 거듭 보여 준 것은 혁명의 불필요함이 아니라 오히려 의회를 통해서는 사회를 진정으로 개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흥공업국 발전의 모순

식민지나 옛 식민지 나라들의 산업 발전을 인정한다고 해서 당연히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고전 마르크스주의는 그런 발전의 모순된 성격을 인식했다. 식민지 지배의 첫 번째 효과는 경제적 진보가 아니라 유수의 문명 파괴 같은 약탈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서구 열강들은 옛 사회관계를 해체하고 자본주의적 착취의 여지도 만들었다. 물론 자신의 이해관계와 대립할 때 자본주의화 과정을 방해할 수는 있었지만 그 과정을 아예 멈출 수는 없었다. 마르크스는 영국 식민주의가 인도에 가한 충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영국은 인도에서 이중의 사명을 갖고 있다. 하나는 파괴의 사명이고, 다른 하나는 재생의 사명이다.”10 레닌도 혁명 전 러시아의 경험을 토대로 외국 자본이 산업 건설을 시작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식민 통치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자본주의 발전을 환영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목했던 것은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무덤을 팔 노동계급이 성장한다는 사실이었다.

반면 스탈린주의와 종속이론은 식민지나 옛 식민지 나라들에서 산업 발전이 절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런 나라들에서 자본주의 질서는 산업 발전은커녕 정체와 기술 낙후, 후진성 등을 강요하므로, 경제 발전을 이루려면 소련이 걸었던 길(자립적 민족 경제)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은 자본주의를 받아들였어도 여전히 가난한 현실을 지적한 덕분에 사람들에게 매력을 줬지만, 자본주의가 지구상의 어떤 새로운 지역도 결코 발전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틀렸다. “제3세계”로 불리는 지역에서 신흥공업국들NICs이 등장한 것은 이런 주장에 대한 정면 반박이었다. 물론 발전은 일부 나라들에 국한됐고, 매우 모순되고 억압적 방식으로 이뤄졌지만 말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남한이었다.

남한은 1960년대 초부터 국가가 강력히 개입해 자본주의를 육성하다시피 했다. 국가자본주의는 신흥공업국 발전의 일반적 특징이었다. 국가는 규모도 작고 취약한 민간 자본가 계급을 대신해 축적 과정을 지도했고(세계 시장으로 수출하기 위한 생산에 비교적 초기부터 집중했다), 가혹한 탄압으로 국민 대중의 생활수준을 낮춰 축적을 위한 물자와 재원을 일부 확보했다. 물론 해외 차입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 결과 남한은 자본 축적의 독자적 기반을 구축했고, 지배계급은 “단지 서방 제국주의의 ‘매판’이나 ‘종속국’에 머무는 게 아니라 자기 나름의 이해관계를 지니며, 세계 열강에 맞서, 또 같은 처지의 다른 나라에 맞서 자신의 이익을 지킬 능력도 갖추”게 됐다.11 산업 발전이 가져온 또 하나의 중요한 변화는 바로 노동계급의 놀라운 성장이었다. 노동계급은 그 규모가 빠르게 성장했을 뿐 아니라 선택과 집중을 핵심으로 하는 국가 경제정책에 따라 수천 심지어 수만 명 규모의 대공장에 집중됐다.

물론 이 발전 과정은 모순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남한은 뒤늦게 산업화에 뛰어든 덕분에 선진국의 최신 기술과 경제 편제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후진성의 특권”(이는 발전경제 학자 거셴크론의 용어이고, 트로츠키는 이를 “불균등 결합 발전”이라고 불렀다)을 누릴 수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민족적 · 민주적 문제들이 엄존하고 있었다. 경제 성장과 함께 민간 자본의 힘이 커지면서 국가와 자본 사이의 모순은 정치 불안 요인을 제공했고, 세계 시장으로의 통합 증대에 따라 빚어지는 문제들도 있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발전의 성과는 국민에게 고루 돌아가지 못했다.

이런 모순들, 특히 민중의 끔찍한 생활수준과 독재의 가혹한 탄압 같은 문제 때문에 종종 사람들은 산업 발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형식상 독립은 했지만 식민지 치하와 다를 바 없다고, 여전히 (신)식민지라고 하는 생각이 학생들 사이에서 확산됐다. 말하자면, 이와 같은 민중의 고통은 지배자들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외세에 의한 강제 분단과 서울 한복판에 주둔하는 미군의 존재는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웅변해 주는 것으로 보였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자본주의가 이미 상당히 발전해 있던 1980년대에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이 운동 내 주류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이런 정서를 이해해 줄 수는 있지만(일부 사람들은 NL을 광신도쯤으로 여기기도 하는데 NL이 발전의 이런 모순을 일면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산업 발전이라는 현실 변화를 부정한 대가는 적지 않았다. 마치 ‘운동권’은 현실을 설명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인식됐고(뉴라이트는 이 무능의 틈을 파고 들었다), 변혁 전략도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문제점을 드러냈다.

자본주의 발전의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변혁의 성격과 전략에 중요한 함의가 있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끌어올려 계급 폐지를 이룰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며, 그것을 가능케 할 사회 세력인 노동계급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족 모순 때문에 발전이 가로막혀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NL 진영은 남한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의 조건이 무르익지 않았고 노동계급도 그런 과제를 제기할 만큼 규모와 의식이 성장하지 않았다고 봤다. 식민지반자본주의론은 변혁 운동의 성격을 민족해방 인민(민중)민주주의혁명NLPDR으로 규정했는데, 그 행위주체는 “지주, 예속자본가, 민족반역자, 반동관료배를 제외한 모든 계급 계층”이었다. “모든 계급 계층”에는 “노동자, 농민, 청년학생, 지식인, 도시소자산계급, 민족자본가” 등이 포함되는데, 지주-소작 관계 온존 등과 같은 분석에 따라 농민이 매우 중요하게 취급됐고 노동계급 중심성은 받아들이지 않았다.12

이 점에서 민경우가 농민에게 과도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NL의 “노농동맹” 전략을 비판한 것은 전적으로 옳다. NL의 분석에 따르면, “자본주의화가 진행되지만 민족적 모순으로 인해 봉건적 모순이 온존하여 농민이 도시 노동자로 흡수되지 않고 이들이 필연적으로 농촌에 광범위한 농민 집단으로 남게 된다.”(120~121쪽) NL이 농민을 중시하는 근거다. 그런데 민경우가 날카롭게 지적하듯이, 농촌에 농민 집단이 광범하게 남기는커녕 해마다 농민 인구는 급격히 줄어 왔다. 1961년 1천4백만 명이던 농가 인구는 1990년대 7백만 명으로, 2008년 현재 320만 명으로 줄었다. 농업 종사 인구(농민 인구)는 더 적어 현재 180만 명에 불과하다. 전체 인구에서 농가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1961년에 56.1퍼센트에서13 2008년에는 6.8퍼센트로 줄었다. 1953년 농어업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7.3퍼센트였는데, 지금은 2.5퍼센트에 불과하다. 사정이 이런데도 NL 진영은 요 몇 년 새 노동자 운동의 활력이 일시 떨어지자 농민 투쟁에 더 의존한 면마저 있었다.

그러나 “농민을 주력군으로 생각하는” NL 경향에 날카로운 의문을 던진 민경우는 정작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가장 중요해진 세력인 노동계급으로 눈을 돌리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농민들이 도시의 노동자로 이동하여 한국의 계급 관계가 노자 관계로 되었다고 보는 것은 한국사회를 너무 단순하게 본 것”이라고 “전통 좌파”[비NL 좌파를 가리킨다 — 김하영]를 비판한다.(153쪽) 그가 새롭게 주목하는 대상은 “도시의 영세 자영업자”다. “한국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고유의 작동원리라고 할 수 있는 종속성과 파행성에 따라 농촌을 떠난 대규모 탈농 인구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도시의 영세 자영업자로 남았다.”(153쪽) 그의 생각 변화는 “어제의 농민이 오늘의 자영업[자]”라는 말로 잘 요약된다.(121쪽)

이는 노농동맹에 대한 민경우의 문제의식이 규모 문제에 머물러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나 농민은 단지 수가 줄었기 때문이 아니라 계급적 성격상 주력군이 될 수 없다. 농민은 내부적으로 분화해 있어서, 역사가 보여 줬듯이 결코 독자적인 정치적 구실을 할 수 없다. 농민이 사회 변혁에서 중요한 구실을 할 때는 다른 계급에 의해 정치적으로 지도될 때다. 농민뿐 아니라 다른 피억압 대중을 지도해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 수 있는 세력은 바로 노동계급이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착취 체제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 덕분에 자본주의 경제를 마비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노동계급은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 소수일 때조차 집중돼 있다면 그 사회의 결정적 생산력을 손아귀에 쥔다. 노동계급 비중이 큰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이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민중의 거리시위도 위력적이지만, 이것은 자본주의의 심장인 이윤에 타격을 가하는 노동자 파업에 비할 바가 못 된다. 2008년 촛불항쟁에서 진정한 노동자 파업의 불발이 아쉬웠던 이유다.

노동계급이냐 새로운 파워냐

그런데 민경우가 노동계급 중심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하는 주장들을 보면, 그는 산업화를 깨닫자마자 탈산업화론에 빠져든 것처럼 보인다. 그는 현재 노동자들이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분절화”에 따라 “포섭”되거나 “배제”된다고 한다. 지식정보화와 서비스산업의 팽창으로 노동자들의 구성이 다양해진 점도 강조한다. 노동자들이 더는 하나의 계급으로서 동질성이 없고 따라서 하나의 계급으로서 싸울 수 있는 의미 있는 세력이 아니라고 시사하는 듯하다.

그는 NL 이론의 식민지적 착취 개념에 따르면 “한국의 노동자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과 병영적 통제에 시달리는 균질화된 제조업 노동자”이지만, 실제로는 대자본이 경제적 여력을 가지고 노동자들을 “포섭”(상대편을 자기편으로 감싸 끌어들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대학 시절 귀가 닳도록 들었던 노동자의 이미지는 바로 이것[저임금, 장시간 병영적 통제에 시달리는 노동자]”이었는데, “최근 대기업 노동자들을 만나 보면 상당히 다른 이미지라서 놀라곤 한다”며(62쪽) 1990년대 초중반에 유행한 철 지난 고백을 털어놓는다.[2] 그는 노동귀족 운운하는 것은 “대자본의 모략 공세”일 뿐이라면서도, 대기업 · 정규직 노동자들이 특권화했고 그것을 지키는 데 급급해 사회 변화를 위해 싸울 능력을 잃은 것처럼 회의론에 빠진다. 결국 그는 자신이 “새로운 파워의 진원지”라고 부르는 집단에서 조직 노동계급을 빼버린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중요한 이유는 다른 계급보다 더 가난하거나 더 천대받기 때문이 아니다. 오직 노동계급만이 이윤 체제를 공격하고 자신이 생산한 부를 자기 통제 아래로 되찾을 집단적 능력이 있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또, 대기업 · 정규직 노동자들이 다른 노동자들에 비해 조건이 나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것은 자본에 “포섭”돼 그들과 한편이 됐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고공행진을 지속한 대기업들의 엄청난 이윤을 감안하면 대기업 노동자들이 다른 노동자들보다 임금은 높지만 사실은 더 착취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나마 대기업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투쟁으로 좀 더 나은 조건을 쟁취해 온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심화된 양극화는 노동자들 사이보다 자본가와 노동자들 사이가 훨씬 더 근본적이고 중요하다. 심각한 경제 위기 상황은 이런 양극화를 더 심화시킬 것이다.

또, 민경우는 지식정보화와 서비스산업이 팽창하면서 “전통적인 제조업 노동자와는 다른 이미지(?)의 노동자들이 늘어났으며 노동자들의 처지 또한 다양해졌다”고 한다.(130쪽) 서비스 노동자들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이미지이기는커녕 여기에는 전통적 육체 노동자들(청소 노동자, 항만 노동자, 철도 노동자, 운수 노동자 등)이 다수 포함되고, 간호사나 교사의 일도 육체 노동자들과 점점 다를 바 없어지고 있다. 그런데 민경우는 마치 서비스 노동자들은 제조업 노동자들과 달리 노동조합으로 조직돼 싸울 수 있는 세력이 아닌 것처럼 말한다. 그는 “노동조합이 봉건적 잔재가 남아 있는 산업자본주의 시대에 부합하는 조직노선”이라며(182~183쪽), 지식정보화 시대에 맞는 “온라인”이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 동안 언론 · 보건 · 교사 · 연구직 · 공무원 부문에서 노조들이 생겨나고 투쟁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런 피상적인 주장을 간단하게 반박할 수 있다. “현실을 바로 보자”는 그의 호소는 여기에도 적용돼야 한다.

그는 “전체 노동자 1600만 명 중 제조업 노동자는 400만 명 수준”밖에 안 되는데도 노동운동은 여전히 전통적인 제조업 중심이라고 불평한다. 교육 · 언론 · 보건 · 공무원 · 공공부문 노동조합이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지만, 그럼에도 제조업의 여전한 중요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물론 제조업 고용의 비중은 1995년에 23.5퍼센트에서 2005년에 19.3퍼센트로 떨어졌다.14 그러나 이것이 제조업의 중요성이 줄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IMF와 세계은행 통계를 보면 한국의 GDP 대비 제조업 비중은 2000~2005년 평균 27.5퍼센트로 매우 높은 편이다(독일 22.8퍼센트, 일본 21.0퍼센트, 미국 15.8퍼센트).15 산업연구원 조사를 보면, 이 비중은 1985년 24.8퍼센트에서 2002년 33.4퍼센트로 더 높아졌다. 비중뿐 아니라 성장 기여도도 중요한데, 실질GDP 성장에 대한 제조업 기여율은 2000년 이후 서비스업을 앞질렀다. 서비스 산업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1980~1999년에 서비스업의 기여율은 48.8퍼센트, 제조업의 기여율은 27.1퍼센트였는데, 2000~2006년에는 각각 39.3퍼센트, 42.9퍼센트로 역전됐다.16 제조업 분야 대기업 노동자들이 제대로 파업을 한다면 그것이 한국 경제 전체에 미치는 파괴력이 얼마나 클지 예상할 수 있다.

제조업 고용의 비중이 떨어진 것은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제조업의 사양화 효과가 아니라 오히려 제조업의 생산성이 높아진 데 따른 것이다. 기업들은 자동화와 기계화 등 기술 혁신을 추구하는데, 이는 대개 노동력을 줄이는 효과를 낸다. 유시민은 제조업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며 “오늘날 제조업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이 10억 원어치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종업원은 네 명도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17 생산성이 높아진 제조업이 신규 노동자들을 많이 고용하지 않게 되자, 학업을 마치고 새로 노동시장에 들어온 사람들이나 직장을 잃은 사람들은 점점 더 비정규직이나 자영업자가 되기 쉬워졌다. 이처럼 제조업 고용의 상대적 감소 현상은 산업 생산성이 증대한 결과이지, 기존 노동조합이 자신의 고용을 지키려고 자본의 “배제 전략”을 수용했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물론 일부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 지도부가 비정규직, 청년실업 등의 문제에 적극 나서지 않는 것은 문제이고, 우리는 조직 노동자들이 이런 천대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방법은 조직 노동자의 강점(생산 지점에서 발휘할 수 있는 집단적 힘)을 사용하는 것이어야지, 그것을 “시대착오”적이라며 버리고 “온라인 공간”으로 흩어지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또, 자영업자나 중소기업을 노동계급만큼 또는 그보다 더 중시하는 관점도 문제다. 물론 민경우가 영세 자영업자에 주목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영세 자영업자의 상당수는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에 가까운” ‘비임금 근로자’, 즉 반半프롤레타리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첫째, “농촌을 떠난 대규모 탈농 인구[가] 우여곡절 끝에 도시의 영세 자영업자로 남았다”고(153쪽) 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다. 통계청의 각 연도별 ‘인구주택총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직접 계산을 해 보니 1965년부터 2000년까지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한 인구는 1천3백50만 명이 넘는다.18 이 가운데 압도 다수는 도시의 임금노동자가 됐다. 탈농은 했으되 임금노동자로 통합되지 못한 경우는 영세 자영업자 등이 돼 도시의 빈민층을 이루게 되는데, 한국은 다른 신흥공업국보다 이 계층의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자영업자나 무급가족종사자를 포함하는 비임금근로자는 1965년에 전체 취업자의 67.8퍼센트나 됐지만 2003년에 32.2퍼센트로 줄었다.19 비록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영세 자영업자가 늘어나는 추세라지만, 현재 노동계급(1천6백만 명) 규모가 도시 자영업자(6백만 명)보다 훨씬 더 크고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더더욱 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둘째, 자영업자 같은 계층은 다양한 정치적 방향으로 이끌릴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들은 노동자 운동이 강력하고 진정한 대안을 제시할 때 노동계급을 지지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반동적 정치를 추구하는 운동의 대중적 기반이 될 수도 있다. 노동계급의 고유한 중요성을 망각한 채 노동계급을 자영업자 등과 함께 민중의 일부일 뿐인 것으로 취급(이는 NL 민중주의의 유산을 민경우가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한편, 중소기업 자본가는 비록 대기업과의 관계에서 횡포를 당할지라도 하위 착취자로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처지이므로 비임금 노동자인 영세 자영업자와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다. ‘중소기업기본법 시행령’이 정한 중소기업 상한기준은 상시근로자 수 1천 명 미만과 자산 총액 5천억 원 미만이다. 민경우는 “중소기업까지 포괄해야 비로소 한국의 경제 현실이 제대로 설명되고, 그에 근거해야만 연쇄적으로 민족, 국민경제, 다양한 계급계층의 존재와 연대연합의 중요성이 도출[된다]”고 강조한다.(157쪽) 그러나 계급 협조주의로는 이들을 견인하기는커녕 오히려 노동계급이 그쪽으로 견인되는 사태만을 초래할 것이다. 1930년대 중엽에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착취는 위계적으로 조직돼 있다. 착취자-하위 착취자-하위 착취자의 하위 착취자 등등의 식으로. 이런 위계 체계를 통해 착취자들이 국민의 대다수를 예속시킬 수 있다. 국민이 하나의 계급적 핵심을 중심으로 재구성될 수 있으려면 이념적으로 재구성돼야 하는데 이것은 프롤레타리아가 ‘민중’ 또는 ‘국민’ 또는 ‘민족’으로 용해되지 않을 때만 이뤄질 수 있는 일이다.”

민경우는 “새로운 파워의 진원지”로 수도권 청년들, 고학력 386세대, 자영업자, 빈민층 등을 강조한다. 사실, 그가 이들을 “새로운 파워”로 올려놓은 근거는 희박하다. 청년들은 “정규직으로 채워진 사회 질서에서 최말단에 위치”한다거나, “시대와 정면으로 맞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말고는 달리 길이 없다”거나, 역사의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식이다.(175쪽) 그들이 어떻게 자본주의 체제에 균열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분석은 없다. 또, 그는 고학력 386세대가 “결정적인 시기에 균형을 무너뜨릴 중요한 세력”이라고 주장한다.(176쪽) 그러나 한나라당에도, 민주당에도, 민주노동당에도 있는 386세대가 어떻게 단일한 세력으로서 특정 방향으로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렵다.

민경우는 2002년 촛불, 2004년 탄핵반대, 2008년 촛불항쟁 등 새롭게 떠오른 운동들의 특징들로부터 모종의 일반화를 시도하는 듯하다. 그가 이 경험들에서 특히 청년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데는 나도 공감한다. 다함께도 이런 운동에서 청년들의 구실이 (그리고 민경우와는 달리 학생도) 중요하다고 본다. 문제는 그가 신자유주의 시대에 분절화된 노동계급 대신에 청년과 386세대를 사회 변혁의 주체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 하먼이 날카롭게 지적하듯이 그들은 주체가 될 수 없다. “이질적인 사회 집단들의 운동을 사회 변혁을 일으킬 수 있는 ‘사회적 주체’로 여기는 것은 오류다. 그런 운동의 기반이 생산에 뿌리내린 집단적 조직에 집중돼 있기 않기 때문에 그 운동은 지배계급 권력의 핵심인 생산 통제에 도전할 수 없다. 그 운동이 특정 정부를 곤경에 빠뜨릴 수는 있다. 그러나 사회를 아래로부터 다시 만드는 과정을 시작하지는 못한다.”20

민경우의 지적대로 노동운동이 이런 투쟁 속에서 주도적 구실을 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바로 이 점이 이런 운동들의 결함이기도 했다. 이것이 바로 2008년 촛불항쟁이 더 전진하지 못한 이유였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에 차지 않는 노동운동을 걷어차 버리는 게 아니라 이런 운동들과 노동자 운동이 서로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도록 애쓰는 것이다.

외환 · 금융 중시론의 문제점

민경우는 NL의 종속 개념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국주의-식민지’라는 구도는 더는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종속의 기본 구조가 정치 · 군사적 종속에서 경제적 종속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선진 부국과 개발도상국 · 후진국의 관계는 군사적 강점과 정치적 내정간섭에 의한 강압적인 수탈에서 외환, 금융의 개방화에 기초한 금융적 · 경제적 수탈의 형태로 이동한다.”(161쪽) 둘째, 한미관계라는 프리즘으로는 세상을 바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은 NL의 제국주의 개념이 안고 있는 문제의 한 단면을 포착한 것이긴 하다. NL은 제국주의를 서방 열강의 제3세계 착취 · 억압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즉, 제국주의를 식민주의로 환원한다.) 그 결과 그들은 미국과 한반도의 관계에만 거의 배타적인 관심을 기울여 왔다. 이런 협소한 개념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식민지 독립에 뒤따른 일정한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었고, 특히 제국주의 열강들 간의 갈등을 완전히 무시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것은 다함께가 누누이 지적해 왔듯이 제국주의에 대한 매우 협소한 이해다. 레닌과 부하린의 제국주의 개념은 이와 달랐는데, 그것은 자본주의가 최고 단계로 발전한 탓에 개별 기업들 간의 경제적 경쟁이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군사적 경쟁도 수반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NL의 기존 종속 개념을 비판하며 민경우가 가장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금융과 외환의 중요성이다. 그는 NL의 종속성 개념이 “주로 군사적인 부분에 착목”한다는(71쪽) 문제점이 있을 뿐 아니라 경제 부분에서도 “직접투자를 종속성의 최후 징표처럼 간주”한다는(70쪽) 문제점이 있다고 말한다. “‘제국주의 원청-종속국 하청’과 같은 분업구조가 IMF 이후 ‘금융 종속-제조업 성장’ 사이의 관계”로 변했는데도 NL은 “노선 그 자체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 이후 절대적으로 중요해진 금융 부문을 간과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투기성 단기자본이 문제가 된 판국에 그에 비해 우호적 평가마저 받고 있는 직접투자 문제에만 집착하니 금융 위기 문제를 이해할 턱이 없었고 론스타 같은 먹튀 문제에 대한 대응도 미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NL 진영의 다수는 IMF 이후 경제 ‘종속’ 문제에 결코 무관심하지 않았다. 한미FTA에 거의 다걸기를 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다만, NL 다수파와 민경우의 차이는 그런 문제를 보는 관점과 대안에서 오히려 잘 드러난다. NL은 이런 문제를 “외국 독점자본의 침탈과 민족자립경제 수립이라는 전통적 방식”으로 본다.(70쪽) 이에 대해, 민경우는 NL이 한미FTA도 “미국의 경제 침략의 최종 귀결점”으로 봤으므로 “‘그러면 당신들의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간명한 반론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고 비판한다. “주류[NL을 뜻함 — 김하영] 버전에 따르면 민족자립경제일 텐데 이는 대도시 생활인을 설득하기에는 동문서답에 가까운 주장이었다.”(84쪽) 실제로, 멀리 갈 것도 없이 북한만 봐도 세계 경제로부터 고립된 경제가 대안이 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반면, 경제 ‘종속’에 대한 민경우의 대안은 금융시장 통제를 통해 “외환과 금융의 자율성”을 확보하고(169쪽), “동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이다.(84쪽) 다시 말해, 미국 달러 체제에서 벗어나 범지역적 협력을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민경우의 대안에는 몇 가지 중요한 문제점이 있다. 첫째, 그는 금융과 외환의 안정화 정책을 통해 한국 경제를 위기로부터 지킬 수 있다고 가정한다. 금융을 통제하고 경제를 내수 위주로 전환해 국민경제를 강화함으로써 말이다.

물론 한국 경제의 등락이 세계 경제에 연동돼 있(었)다는 그의 통찰은 맞다. 이런 특징은 수출 시장을 찾아 세계 경제에 편입된 한국 자본주의의 성장 방식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세계 자본주의에 통합되다 보니 한국 경제는 호황과 불황을 오가는 세계 경제의 불안정과 동요의 영향을 강력히 받게 됐다. 이런 ‘종속성’은 한국 자본주의의 성공에 내포된 모순이다.

그러나 민경우는 이런 문제를 환율 체제와 금융 정책에서 비롯한 것으로 지나치게 협소하게 보고, 따라서 환율과 금융만 통제하면 세계 경제의 부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처럼 본다. 예를 들어, 그는 만약 동아시아 “각국 통화가 달러에 페그되어” 있지 않았다면[3] 1997년 위기는 오지 않았거나 다른 양상을 띠었을 것이라고 한다. 물론 역플라자 합의에 따른 고달러/엔저가 수출 의존적 한국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 수출은 환율 문제뿐 아니라 세계적 반도체 과잉생산 같은 문제에 의해서도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 당시 한국 수출품의 20퍼센트를 차지하던 반도체 가격이 무려 80퍼센트가 폭락하면서 삼성전자 같은 기업의 수익성은 크게 떨어졌고 남한 경제는 이윤율 위기에 빠졌다. 외국 자본 대량 유출도 단지 금융 자유화 문제로만 볼 수는 없다. 그 근저에는 한국 실물경제의 악화로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외국 투자자들의 우려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또, 그는 2008년 세계 경제 위기로부터 특히 한국이 큰 영향을 받았다며 그 이유를 외환거래 자유화에 따른 해외 금융자본 유입에서 찾는다. 사실, 2008년 미국 경제 위기에 대한 가장 흔한 해석도 금융이 문제라는 것이다. 물론 금융시장 규제완화와, 국경을 넘나들며 대규모 투기에 가담한 금융시장의 영향력 증대가 이번 위기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왜 금융이 전례 없는 규모로 성장하게 됐는가를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1970년대 초 이래 장기적 이윤율 위기 상황에서 자본주의가 생산에 투자하기보다 대출을 늘려 거품을 키웠기 때문이다. 2008년 미국발 경제 위기가 한국에 영향을 주기 전에 이미 한국 경제도 비슷한 문제, 즉 부동산 거품과 가계 대출 급증으로 위협받고 있었다. 물론 경제의 불안정을 증폭시키는 요인, 예컨대 투기성 단기자본 등을 규제해야 한다. 그러나 금융과 외환의 안정화 정책이 오늘날 세계와 한국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더 근원적인 문제, 즉 이윤율 위기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한국 경제가 ‘외부’로부터 보호받는다고 해서 위기를 피할 수 없는 이유다.

둘째, 민경우는 “동아시아 공동체”가 “미국식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의 이런 생각은 “미국의 지위 하락”이라는 현실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는 한국이 “미국 주도의 경제 질서 아래 산업화”됐지만 이제는 일본 변수와 중국 변수 등도 중요해졌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한미 양국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보는 NL의 시각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국주의=유일 강대국 미국’이라고 협소하게 현상론적으로 보는 NL 사상의 약점을 지적한 것이긴 하다. 그러나 민경우에게는 미국의 상대적 지위 하락과 다른 강대국들의 상대적 부상이 가져올 세계적 불안정을 보지 않는다는 약점이 있다.(그는 신자유주의를 미국 중심 경제로 인상론적으로 본다.) 그래서 그는 가라앉는 미국호에서 내려, 장차 떠오를 동아시아호로 갈아탄다면 만사 오케이일 것처럼 말한다. 사실, 그는 ‘미국만이 호령한다’는 NL의 가정으로부터 그리 멀리 벗어나지는 못한 것이다.

그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통해 미국 주도 세계 경제에 한국 경제가 편입됨에 따라 겪었던 여러 문제를 피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예를 들어, 그는 “1990년대 초반 유럽과 같은 탈달러 지역협력 구상을 현실화할 수 있었다면” 1997년 동아시아 경제 위기를 피할 수 있었을 것처럼 암시한다.(78쪽) 그러나 이 주장은 현실의 검증을 견디지 못했다. “탈달러 지역협력구상”인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2008년 미국발 경제 위기를 전혀 피할 수 없었다. 또, 민경우는 “경제적 주도권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넘어오고 있”으므로(84쪽) 중국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국은 미국 시장에 제품을 팔아 성장해 왔고(한국의 대중국 수출이 엄청나게 증대했지만 그 부품들이 조립돼 수출되는 종착점은 미국이다), 미국은 그 제품을 살 돈을 중국에서 빌려오는 관계를 유지해 왔다. 중국은 경우에 따라 독자 노선을 추구할 수 있겠지만 미국과의 이런 관계를 끊을 수는 없다. 이런 사실만 봐도 아시아 공동체는 미국 경제의 동요에서 벗어날 안전지대일 수 없다. 게다가 중국 경제도 시장화에 따라 주기적 위기를 겪을 가능성이 크고, 노동자 착취라는 면에서도 결코 미국에 뒤지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동아시아 공동체” 얘기는 그렇게 신선할 것도, 진보적일 것도 없다. 노무현도 집권 초기에 엇비슷한 구상을 내놓았고, 최근에는 일본 총리 하토야마가 “미국 일극체제는 끝났다”며 “아시아 공동체”를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진보진영이 미국 주도 체제에 맞서는 일본과 중국 주도 동아시아 체제를 지지하고 나서야 하는 것일까? 물론 동아시아에서 일본과 중국이 한편이 된다면 그것은 미국에게 최악의 악몽이다. 그러나 미국의 악몽이 늘 우리 운동의 길몽인 것은 아니다.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 · 중국 국가에 의존하는 것은 대미 의존 못지않게 위험천만한 일일 수 있다. 세계의 군사력이 집중돼 있고 발화 요인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동아시아에서 강대국 간의 갈등은 군사적 참화를 부를 수도 있다. 우리는 지난 세기 전반기에 미국과 일본 제국주의가 동아시아 패권을 놓고 어떤 일을 벌였는지 기억해야 한다.

제국주의 시대는 끝났는가?

민경우의 주장은 아직 체계화되지 않아서인지 중간에 논리가 툭툭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종종 드는데, 그가 “다극 시대”라고 부르는 오늘의 세계 질서를 설명하는 부분이 바로 그렇다. 그는 1960년대를 끝으로 “군사적 강점에 기초한 난폭한 제국주의의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한다.(160쪽) 그 뒤 “간접적인 방식”의 “정치 간섭”이 있었으나 1990년대 신자유주의가 석권하면서 “금융적 · 경제적 수탈의 형태로 이동”했다고 한다.(161쪽) 그는 마치 이제 정치 · 군사적 제국주의는 사라졌다는 듯이 말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경우는 무엇일까? 그는 그것이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무시”한 것이어서 실패가 예정된 침략이라고 단언한다.(138쪽) 또 다른 곳에서는 그것이 주권 국가가 아니라 테러 집단에 대한 대응이었다고도 주장한다. 주권 국가라면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겠지만, 알카에다나 탈레반에 대해서는 “미국의 입장에서도 이들을 분쇄하는 것말고는 별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테러와의 전쟁”에 대해서는 뒤에서 언급하겠다.) 어쨌든 그가 하려는 말은 인류 역사가 주권 국가에 대한 군사 침략을 용인하지 않는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이다. “[20세기 중반 이후] 국민주의, 애국주의, 민족주의와 같은 근대적 이념이 보편화하면서 군사적 강점에 의한 직접 지배가 불가능해졌[다.]”(161쪽) 참으로 결정론적인 진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시각으로는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가 겪고 있는 변화를 이해하기 어렵다. 먼저,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유럽 열강들이 식민지에서 퇴각한 이유를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은 식민지 민중의 영웅적인 해방 투쟁과 함께 전후戰後 세계 자본주의 자체의 구조 변화가 작용한 결과였다. 전에는 아프리카가 제국주의 열강끼리 영토 분할 전쟁을 일으킬 만큼 중요한 지역이었지만, 더는 그렇지 않게 된 것이다. 자본 투자가 주로 선진국들 내부에서 이뤄지는 경향이 나타난 것이다. 저항을 감수하고라도 식민지를 유지할 사활적 이유는 사라졌다.

1970년대부터는 국경을 가로지르는 자본의 흐름이 크게 확장됐다. 자본이 해외 투자를 많이 하면 자연히 자기 국가의 권력을 무기 삼아 다른 국가와 협상하려 하게 된다. 세계화의 결과로 자본주의 국가들은 국경 밖 더 멀리까지 영향력을 미쳐야 하게 됐다. 이것은 순전한 경제 논리가 아니고 정치 · 군사적 논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미국은 국가의 힘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상황에서 경제력의 상대적 하락을 겪자 나머지 국가보다 훨씬 우세한 군사력을 사용해 경제력 쇠퇴를 만회하려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미국은 세계 어느 지역이든 군사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다른 국가와 유착한 자본가들에게 미국의 의지를 관철하고 IMF · WTO · 세계은행 같은 경제 기구들도 지배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탈냉전기인 최근 20년 동안 우리가 수많은 전쟁을 목격한 이유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점령은 테러 집단이 아니라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경쟁 국가들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테러’는 빌미일 뿐이다.

민경우가 ‘제국주의-식민지’라는 구도가 맞지 않는다며 남한이 식민지라는 것을 부정한 것까지는 옳았는데, 더 나아가 제국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혼란에 빠진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식민지는 특정 시기 제국주의의 특징일 뿐 식민지가 사라졌다 해서 제국주의도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오늘날 신자유주의와 전쟁 사이의 연관을 보기보다 불비례하게 금융만 강조한다. 어떻게 보면, 그는 냉전 시기 “공포의 균형”이 깨져 1991~2007년에 미국 중심의 일극 시대가 펼쳐지다가 2007년경 국제적으로 대미 억지력이 다시 부활했다고 낙관하는 듯하다. 아마도 이것이 북한이 미국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이라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미국이 2~3년 전보다 수세에 몰린 처지이긴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미국은 흔들리는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군사적 모험을 멈추지 않을 것이고, 이것이 경제 위기와 여러 우연적 요소들과 맞물리면서 군사적 긴장을 증폭할 수 있다. 민경우가 “대미 억제력”이라고 부르는 러시아와 중국은 이러한 불안정과 긴장의 한 축이지 그것을 해소하거나 다소 억제하는 세력은 아니다.

일국적 관점 비판의 빗나간 결론

민경우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 중 하나는 “일국적 관점으로는 세상이 바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NL 동지들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원래 NL은 남북관계를 무시한 채 남한의 변혁을 생각하는 “반국半國”적 관점을 비판하며 한반도 차원에서 생각하는 “일국一國적” 관점을 취해 왔다. 하지만 일국적 관점으로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동안 국제주의자들인 다함께가 NL에게 줄곧 해 왔던 얘기다.

그러나 민경우의 일국적 관점 비판은 다함께와 달리 국제주의가 아니라 부르주아 국제관계론 수준에 그치고 결국 민족과 국가 중시론으로 귀결된다. 이것은 북미대결을 보는 그의 관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NL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중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 간 정치 역관계, 중동과 같은 제3세계의 동향에 대해 둔감하다”고 비판한다. “북미협상에서 중러[중국과 러시아]나 중동의 변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는 걸까?”(85쪽) 그는 이런 인식의 결여로 NL이 두 가지 오류를 저질렀다고 꼬집는다. 첫째, “북미 공방에서 북이 상당한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을 북의 협상력으로만 여겨 “정세 해설에 대한 대중적 설득력이 떨어지고 정세를 터무니없이 낙관하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21 둘째, “미국이 중동에서 헤매고 있”는 상황에서 한반도 전쟁 위협을 과장했다(87쪽).

이것은 전적으로 옳은 지적이다. 다함께도 2000년대 초중반 내내 비슷한 지적을 하며, 한국 반전 운동이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적 운동의 일부가 돼 미국의 프로젝트를 좌절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이 장차 한반도로 전쟁이 확산되지 않도록 하는 길이기도 하다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그런데 민경우의 결론은 정반대로 나아갔다. 그는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을 강조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몽상적”이라고 비판한다. “1999년 시애틀 WTO 3차 각료회의 등에서 벌어진 반신자유주의 운동, 2003년 2월 유럽에서 진행된 반전운동 따위를 중심으로 현실을 판단하고 구성하려는 발상은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정세를 규정하고 결정짓는 실체를 무시하고 시민사회, 개인, 사회운동을 과대평가하는 몽상적인 견해이다. 특히 식자연하는 인텔리 중에 이런 무책임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22

민경우에게 “정세를 규정하고 결정짓는 실체”는 바로 국가다. 그는 2003년 봄 위력적인 반전 운동을 통해 오히려 입증된 것은 “그러한 노력이 국가와 국가로 구획된 세계질서 속에서 얼마나 허망한가”였다고 주장한다.(138~139쪽) 그리고 “미국이 궁지에 몰리기 시작한 것은 반전운동이 정점에 달했던 [때가] 아니라 … 이라크 민중의 끊임없는 저항이 지속되면서부터”였다고 한다.

물론 이라크 민중의 저항은 중요했지만, 미국의 이라크 전략을 좌절시킨 데서 국제 반전 운동의 구실도 못지않게 중요했다. 미국 등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의 국내, 즉 제국의 심장부에서 일어난 것이기에 오히려 더 결정적이었다. 국제 반전 운동은 전쟁의 부당성을 폭로했고, 세계 곳곳에서 각국 지배자들의 전쟁 지원을 좌절시켰고, 아랍 민중에게 자신감을 줬으며, 결국 부시가 이라크 전략을 수정하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이라크 민중의 저항과 국제 반전 운동의 관계는 모루와 망치 같은 관계였다. 그러나 민경우는 국가가 중요하다고 말할 뿐,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그 국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일절 고려하지 않는다(엘리트주의적 관점). 또, 그는 오늘날 세계가 국민국가로 나뉘어 있다는 점만 보지, 단위 국가경제들이 긴밀히 연결돼 있고 상호의존적이라는 사실은 보지 못한다. 이런 상호의존성은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국경 너머까지 파장을 일으키는 조건이다.

그가 이라크 전쟁과 반전 운동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할 때 그의 진정한 관심사는 그 교훈을 북미관계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가 이끌어낸 교훈은 “민족과 국가라는 거대한 집단의 실체와 그것이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의 중요성이다. 요컨대 “한국의 민간운동”이 아니라 북한 핵무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소련 핵무기 개발의 정치적 파장 중 하나가 소련의 국경수비대 구실을 하던 각국 공산당 운동의 중요성을 크게 줄인 것이었다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이 점에 관한 한 그는 기존 NL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물론 그는 여기에 러시아 · 중국의 “대미 억제력”과 중동 변수를 보태겠지만, 그의 관점에서는 우리 운동이 이런 변수들에 어떤 영향도 미칠 수 없다. 그저 “실체”들의 게임을 지켜보고 그 가운데 어느 한 쪽을 편들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그의 일국적 관점 비판은 국제 노동계급의 연대가 아니라 국가 간 관계에 주목하는 위로부터의 관점에 철저히 서 있다.

민경우가 일국적 관점을 비판하면서도 결국 일국적 대안으로 귀결된다는 것은 그가 애국주의를 강조하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전에 ‘남과 북은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는 온전한 민족주의를 지지했지만 이제는 반쪽의 민족주의인 남한 애국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그는 분단이 장기화하면서 남북 사이의 이질감이 심화했고, 남한에서 보수 엘리트의 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이 있었던 점을 그 배경으로 설명한다. “남은 월드컵, 촛불시위 등을 거치며 북과는 다른 차원의 집단적 일체성을 획득하고 있다.”23 그리고 NL도 이런 시대 변화에 맞게, 즉 남측에 맞춰 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제 그는 “통일은 제한적 의미”만 있다며(169쪽) 남한 자체의 변화를 우선시한다. 사실, 북한이 일국사회주의를 발전시켜 왔다고 여겨온 그가 남한이 독자적으로 모종의 변혁을 이루지 못한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소련의 일국사회주의가 다른 나라 공산당들에 사회애국주의 경향을 야기하게 되는 원리를 트로츠키는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도대체 사회주의가 한 나라에서 실현될 수 있다면 권력 장악 이후뿐 아니라 그 전에도 그 이론이 옳다고 믿을 수 있게 된다. 후진적인 러시아의 국경 안에서도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면 선진국인 독일에서 일국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아주 당연할 것이다. 내일은 독일 공산당의 지도자들이 이 이론을 제안할 것이다. … 모레는 프랑스 공산당 차례일 것이다. 그리하여 코민테른은 사회애국주의 노선을 따라 해체되기 시작할 것이다.24

그런데 민경우가 2002년과 2008년의 촛불운동을 애국주의의 근거로 드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는 2008년 촛불시위에서 사람들이 “헌정의 진정한 수호를 참가자 모두를 하나로 엮는 정체성으로 확인”했다고 하지만, 이는 제 논에 물대기식 해석처럼 비친다. 그는 바로 이 “헌정질서에 대한 존중감”을 들먹이며 이명박 퇴진 운동에 반대했지만, 2008년 촛불시위의 참가자들은 이명박을 퇴진시키고 싶어했다. 그들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하고 노래한 것은 민주주의가 법전 안에만 있는 현 주소를 꼬집은 것이다. “촛불시위 이후 애국심이 커졌다”는 10대들의 설문조사 결과를 인용한 것도 억지스럽다.25 아마도 그런 답변은 ‘이명박 정권이 나라를 망치고 있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거나 ‘나라 일에 관심이 늘어났다’는 것의 다른 표현일 듯하다. 또, 그는 “미국에 대해 전보다 비판적이 됐다”는 설문 조사 결과도 인용하고 있는데,26 미국에 비판적이면 다 민족주의이고 애국주의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다함께가 민족주의 · 애국주의와 아무 관계도 없다는 사실 말고도, 미국의 이라크 전쟁 반대가 국제적이고 국제주의적인 운동이었다는 예를 들 수 있다. 2002년 촛불은 2003년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으로 이어졌는데 여기에 참가한 청년들은 두드러지게 국제 연대의 감수성을 드러냈다. 바로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NL이 2000년대 떠오른 새로운 운동들에 적응하기 어려웠던 이유다.

애국주의는 민경우가 자연스런 세태 변화를 수용한 것이라기보다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다. “보통 진보와 중도, 보수 등으로 정치세력을 삼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식으로 정치세력을 구분하게 되면 진보는 결코 보수를 압도할 수 없다. 그러나 촛불시위가 집단적 일체성을 확보하며 대한민국 수준의 민족, 민족주의로 발전하게 되면 양상은 달라진다. 민족, 민족주의의 위력은 민족적 일체성을 구분하는 자를 보수라는 이름으로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매국노로 단죄하기 때문이다.”27

그러나 민경우의 가정과 달리, 우리가 애국주의를 무기로 집어든다 해서 보수 우파들을 주변으로 몰아내 버리고 우리가 일약 다수파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민족주의라는 똑같은 논리로 노동계급의 투쟁도 이기적인 것으로 “단죄”될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파병, 이주노동자, 고통분담 문제 등에서 우파들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그들을 정치 담론의 중심에 앉히게 될 위험이 있다. 또, 민경우의 주장을 보면, 중도와의 연합 같은 구상이 애국주의 논리에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유시민도 “헌법 애국주의”를 주장하는데, 유시민의 애국주의는 이미 이라크 전쟁 당시 시험대에 오른 바 있다. 당시에 유시민은 국익 논리를 앞세워 이라크 전쟁을 지지했고, 친노세력은 집권 내내 노동자 투쟁을 “계급 이기주의”로 몰아붙였다.

운동에 처음 발을 딛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애국주의 논리를 차용하는 것은 거의 자연스런 일일 수도 있다.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대의를 위해 싸운다는 명분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운동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운동 참가자들이 노동자의 연대, 국제적 연대에 더 관심을 기울이도록 돕는 구실을 해야 한다.

민경우가 이주노동자를 포함한 소수자 문제에 거의 반감을 보이는 것은 민족주의와 애국주의가 얼마나 협소하고 때로 배타적인가를 잘 드러내 준다. 그는 운동 진영 일부가 “의도적으로 이주민 노동자, 성소수자, 장애인을 부각시켜 궁극적으로 근대국민국가를 해체하려 한다”며 피해망상증 환자 같은 얘기를 쏟아낸다. 그러나 운동 진영이 천대받는 자들을 방어해야 하는 것은 인종차별, 성차별, 성소수자차별 등이 노동계급을 이간질해 연대를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동안 NL은 이런 문제에 무딜 뿐 아니라 때로 인종차별적이고 성소수자차별적인 북한 관료의 입장[4]을 되풀이하며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그가 NL 노선을 제대로 재구성하려면 이 점을 진지하게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북한 문제

민경우는 이 책을 통틀어 북한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 NL 노선을 재구성하겠다면서 북한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NL 노선의 알파요 오메가는 바로 북한이기 때문이다. NL이 친일 · 친미로 얼룩진 남한 통치자들에 반대해 북한 관료에게서 민족 정통성을 발견한 이래 북한은 늘 그들의 준거점이었다. NL 운동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북한을 적대하는 군사 개입이나 압박을 반대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남한 정권과 때로는 적대적 관계를, 때로는 화해협력적 관계를 맺어 왔다.

민경우가 NL의 문제점으로 지적한 것들도 대개 그 기원은 북한에 있다.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주창한 것도, 그것을 별 설명 없이 식민지반자본주의론으로 바꾼 것도 북한 당국이었다. 그는 NL에 “토론하는 풍토”가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사회주의가 노동계급 자신의 활동이 아니라 위로부터 소수의 무오류의 지도부에 의해 이뤄졌다고 보는 스탈린주의를 받아들인 당연한 결과다. 토론과 논쟁보다는 지도부의 방침이 중요하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조직 방침에 도전하는 것은 “신심”이 없는 일로 치부된다. 이론은 한낱 북한 관료의 행동을 사후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다 보면 현실을 부정하고 도그마를 내세우는 데 급급해질 수밖에 없다. NL 진영에는 여전히 “지도자가 결정하면 우리는 한다”는 식의 풍토가 있다. 민경우는 “민주집중제”가 문제인 것처럼 말하지만(183쪽), 사실 NL 노선에는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았다. 민주집중제가 아닌 관료집중제였을 뿐인 것이다.

그럼에도 민경우는 (다른 글에서) 북한이 “사회주의”이고 “반미 국가”라며, 북한을 비판하는 진보 세력에 일침을 놓으려 한다. 또, 한술 더 떠, 송두율 교수 등이 주창한 “내재적 접근법”이 지나치게 “수세적”이라며 “진취적 접근법”을 개척해야 한다고 한다. 내재적 접근법의 문제점은 “북의 존재는 보편적인 원리상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북 자체의 고유의 논리와 원리상 쉽게 붕괴되지는 않는다는 소극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미 공방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지금은 유해로운 관점”이라고 한다.28

그런데 민경우의 북한 두둔은 NL이 “시대에 부합하지 않는 억지스러운 실천[을] 거듭[해] 대중의 공감과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다”는(96쪽) 그의 비판과 모순된다. 왜냐하면 북한에 대한 NL의 태도보다 이런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NL은 민족을 그토록 강조하면서도 북한 당국을 등졌다는 이유만으로 탈북자들에게 한없이 냉혹하고, 우리가 그토록 애타게 추구해온 민주적 권리가 북한 인민에게는 필요 없다는 듯이 말한다. 북한 관료를 옹호하기 위해 되풀이하는 이런 군색한 논리가 “대중의 공감과 참여”를 얻기 힘들게 만들었다. 민주주의에 민감한 젊은 세대들에게 북한의 공개처형, 정치적 · 시민적 무권리, 그리고 3대째 권력 세습은 어떤 궤변으로도 이해시키기 어렵다.

물론 PD 우파 식의 북한 비판, 즉 사실상 북한을 남한보다 못한 사회로 보는 시각은 다른 여러 문제를 낳는다. 남한은 북한보다 낫기는커녕 북한과 끔찍한 군사경쟁을 벌이는 거울 이미지 같은 존재다. 그리고 남한 진보진영의 주된 적은 남한 국가와 그 동맹인 미국 · 일본 제국주의다. 이런 진정한 좌파적 태도가 전제가 됐을 때만 북한 비판은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민경우는 곳곳에서 심경 변화의 조짐을 드러낸다. 북한을 옹호하지만, 그와 동시에, 전에 부정했던 남한 국가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쪽으로도 움직인다. 남한의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이 그를 후자 쪽으로 끌어당기는 견인차 구실을 한다. 분단이라는 조건 때문에 그의 심경 변화는 북한 옹호와 상당 기간 공존하겠지만, 이미 시작한 변화는 자체 동력을 가지고 발전해 나아갈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의 모순은 더 심화될 것이다.

맺으며: 대차대조표

이제, 민경우의 NL 노선 재구성 시도가 과연 실천에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다루면서 글을 맺을까 한다. 사실, 그의 작업은 완료됐다고 말하기 어렵다. 문제 제기의 골자는 명확히 서 있지만, 대안적 전략은 아직 수미일관하거나 구체적이지는 못한 면이 있다. 또, 어떤 쟁점에 대해서는 생각이 계속 변하고 있고, 어떤 쟁점은 논쟁의 구도상 아직 본격적으로 꺼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의 대안이 우여곡절로 점철된 험난한 현실에 부딪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더 두고 봐야 하는 점도 있다.

그럼에도 우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재구성 방향이 대체로 개혁주의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남한 자본주의의 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변화를 더는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는 그로부터 혁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대중이 개혁의 여지를 갖게 된 체제에 포섭됐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공인된 가치로 자리잡았으므로 오직 선거를 통해서만 정권을 잡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실천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그의 이런 주장이 그리 새삼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NL 노선을 고수하고 있는 “주류”는 그가 말하기 전에 이미 그렇게 실천하고 있었다. 1891년에 베른슈타인이 독일 사회민주당 내에서 수정주의 견해를 내놓았을 때 같은 당원이던 이그나츠 아우어가 그에게 했던 말이 민경우에게도 들어맞는 듯하다. “친애하는 에드[베른슈타인의 애칭 — 김하영], 사람들은 당신이 요구하는 것을 행하자고 공식적으로 결정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걸 말하지 않고 실천합니다. 고약한 사회주의자단속법 아래서조차 우리의 활동 전체는 사회민주주의적 개혁 정당의 활동이었습니다.”29

NL의 다수는 옛 이론을 그대로 유지한 채 개혁주의적 실천을 해 왔다. NL의 개혁주의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아래서 본격화했다. 그들은 두 정부가 북한과 화해협력 정책을 추구한다 해서 그 정부들에 협조했다. NL은 민경우보다 7~8년 전에 김대중 정부를 살려주려고 ‘정권 퇴진 운동 불가론’을 폈다. 때로 NL의 주류 이론가들은 NL의 실천 지침을 옛 이론 체계로 설명하는데, 혁명적 미사여구에 속지 않고 그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결코 혁명적 결론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민경우가 비판하는 박경순 새세상연구소 부소장의 “자주적 민주주의”는 계급연합인 “반MB 범국민 단일전선”을 통해 수립되며 그 정권에 “자본가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보장”한다.30

NL이 옛 이론을 수정하지 않고도 개혁주의적 실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론을 다락방에 처넣어두는 그들의 오랜 실용주의적 습관 때문만은 아니다. 핵심적 비결은 그들의 인민민주주의혁명론 안에 이미 개혁주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인민민주주의(체제)는 요즘 말로 “자주적 민주주의”(=진보적 민주주의)라 할 수 있고, 이것은 인민전선(국민연합, NL 용어로는 계급연합 또는 통일전선 또는 단일전선)적 정권을 통해 수립된다. 그런데 인민민주주의혁명론은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고 그것을 강화함으로써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31 그들이 보기에 북한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계급연합을 추구하는 개혁주의 노선으로도 얼마든지 사회주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민경우의 NL 노선 재구성 시도가 결국 실천에서는 기존 NL 노선과 똑같게 나타난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민경우가 지적하듯이, NL은 전통적 전략과 전술을 상당히 유지하고 있고 민경우는 이를 좀 더 현대적 또는 탈현대적으로 혁신하기를 바란다. 예를 들면 그는 조직 노동자 운동, 노농동맹, 학생운동의 중요성에 대해서 회의가 크다. 대신에 영세 자영업자와 청년, 386세대, 학습, 온라인 공간, 사회공공성 등이 그의 키워드다. 그는 2007~2008년을 겪으면서 NL이 ‘복고’ 색채를 강화한다고 우려하는 듯하다. 이런 요소들은 민경우가 NL보다 더 온건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듯하다. 특히 그가 민주노동당의 정권 퇴진 입장을 비판하고 나선 것은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모든 쟁점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민경우는 통일 문제의 중요성을 전보다 훨씬 낮췄고, 그 대신 생활상의 문제들을 강조한다. 이는 그가 신자유주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관계 있다. 예를 들어, 그는 2005년 한 토론회에서 “열린우리당의 주도권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통일운동이 진행되면 통일운동은 관념에 빠져 불행한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며 자유주의 세력과의 협력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세력이 통일을 주도하면 근로대중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모호한 통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32 반면, 박경순은 “화해협력 세력[자유주의자들]과 자주통일 세력은 적대적 모순관계를 지니지 않는다며”며 “오히려 반통일 수구세력의 격렬한 저항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는, 지금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민주당 문제에서 민경우가 NL보다 왼쪽에 설 수도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그의 이런 입장은 전혀 일관되지 않다. 이 쟁점에서 그가 NL를 비판하는 최근 강조점은 진보연대강화론 우려에 있지, 민주당과의 연합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신자유주의 문제를 중요하게 보면서도 2010~2012년 범민주진보진영의 공조를 강조한다.(185쪽) 이 점은 그와 함께 ‘세새대네트워크’를 운영하는 조성주가 신자유주의 문제가 누락된 결과 “지방선거와 대선이 진보진영과는 상관없는, 자유주의 세력(민주당 또는 친노세력)과 한나라당의 양자대결 국면으로 끝날” 것을 우려하는 것33과는 눈에 띄는 차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민경우의 NL 노선 재구성 시도는 현실의 변화에 대한 (뒤늦은) 인정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NL이 이런 변화를 제대로 설명하기는커녕 기존 분석과 노선 유지에 급급한 반면 민경우가 현실에 발딛고 서서 이런 문제들을 해명하려고 하는 것은 훌륭한 자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답변은 번번이 빗나가고 흔히 비관론으로 흐르기도 한다. 오늘날 한국과 세계의 경제적 · 지정학적 변화와 그것이 진보세력에게 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고전 마르크스주의 분석에서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출처 : 《마르크스21》 3호(2009년 가을호)

1 민경우, ‘소통과 논쟁2: 강한 돌에 무리하게 다가서지 말라!!’, 2008. 1. 22. [↑본문]

2 ‘대담: 정대연-민경우, ‘12월 대국회투쟁’을 논하다’, <통일뉴스>, 2008. 11. 30. [↑본문]

3 같은 글. [↑본문]

4 민경우, ‘민주노동당 정책당대회에서 제기된 몇 가지 쟁점②: 글로벌 대기업의 현황과 실천적 함의’, 2009. 7. 23. [↑본문]

5 민경우, ‘이명박 정부 퇴진론은 역효과를 낼 가능성이 크다’, 2009. 6. 27. [↑본문]

6 방인혁, 《한국의 변혁운동과 사상논쟁》, 소나무(2009), 433쪽. [↑본문]

7 같은 책, 432쪽. [↑본문]

8 민경우, ‘민주노동당 정책당대회에서 제기된 몇 가지 쟁점②: 글로벌 대기업의 현황과 실천적 함의’, 2009. 7. 23. [↑본문]

9 이승환(새세대네트워크 기획위원), ‘민주노동당 정책당대회에서 제기된 몇 가지 쟁점①: 집권에 대한 진보진영의 사고, 바뀌어야 한다’, 2009. 7. 21. [↑본문]

10 K. Marx, “The Future of British rule in India”, New York Tribune, 1853. 7. 22. [↑본문]

11 알렉스 캘리니코스, ‘마르크스와 민족문제’, 《민족문제의 재등장》, 책갈피, 140쪽. [↑본문]

12 방인혁, 《한국의 변혁운동과 사상논쟁》, 453~454쪽. [↑본문]

13 《통계로 본 한국의 변천》, 통계청(2004), 56쪽. [↑본문]

14 통계청(2005) [↑본문]

15 <매일경제>, 2008년 11월 10일치. [↑본문]

16 <연합뉴스>, 2008년 2월 9일치. [↑본문]

17 유시민, 《대한민국 개조론》, 돌베개(2007), 101쪽. [↑본문]

18 《통계로 본 한국의 변천》, 통계청(2004), 25쪽. 표 1-16 ‘도시와 농촌간 인구이동’에 기초해 계산함. [↑본문]

19 같은 책, 73쪽. [↑본문]

20 크리스 하먼, ‘세계의 노동계급’, 《마르크스21》 2호(2009년 여름), 156~157쪽. [↑본문]

21 민경우, ‘소통과 논쟁1 — 다극 시대의 도래와 국제정세를 보는 관점’, 통일뉴스, 2008. 1. 17. [↑본문]

22 같은 글. [↑본문]

23 민경우, ‘새로운 형태의 민족주의가 부상하고 있다’, 2008. 7. 7. [↑본문]

24 Trotsky, The Third International, pp. 55-56. [↑본문]

25 민경우, ‘새로운 형태의 민족주의가 부상하고 있다’, 2008. 7. 7. [↑본문]

26 같은 글. [↑본문]

27 같은 글. [↑본문]

28 민경우, ‘소통과 논쟁5 — 북 연구 방법론’, 통일뉴스, 2008. 2. 10. [↑본문]

29 존 몰리뉴, 《마르크스주의와 당》, 북막스(2003), 51쪽. [↑본문]

30 박경순, ‘87년 체제의 종언과 그 대안 — 21세기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2009) [↑본문]

31 이에 대한 설명은 김하영, 《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 책벌레(2002), 305~310쪽을 참고하시오. [↑본문]

32 6 · 15 공동선언 5주년 기념 <민중의 소리> 토론회, ‘남북관계의 진단 그리고 통일의 경로를 찾아서’ [↑본문]

33 조성주(새세대네트워크 기획위원), ‘민주노동당 정책당대회에서 제기된 몇 가지 쟁점③: 반MB전선의 반신자유주의전선으로의 확대가 필요하다’, 2009. 7. 28. [↑본문]

[1] 매판은 사리사욕을 위해 외국 자본과 결탁해 제 나라의 이익을 해치는 일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뜻한다. [↑본문]

[2] ‘이상화’된 노동자에 대한 이런 종류의 실망감은 이미 1990년대 초반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아파트에 살고 자동차를 굴리는 게 알려지면서 학생들 사이에서 퍼진 바 있다.[↑본문]

[3] 달러 페그는 자국 화폐의 교환 비율을 달러에 고정시키는 환율 제도다.[↑본문]

[4] 북한 당국은 노무현 정부의 다문화주의 주장에 대해 “남조선을 이민족화, 잡탕화, 미국화하려는 용납 못할 민족말살론”이라고 주장했다.(<노동신문>, 2006년 4월 27일치) 또, <노동신문>은 동성애에 대해서도 “비정상적인 욕망인 세기말적 동성애가 없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본문]

입력 2009-10-29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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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를 의심하는 이들을 위한 마르크스주의 ⑦

국가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마이크 헤인즈

세계 자본주의가 휘청거리자 각국 정부는 국가 개입으로 체제를 구출하는 데 혈안이다. 지난 20년 동안 시장이 최선이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들었는데, 이제 국가가 돌아온 것이다.

이런 상황 변화는 무슨 대단한 이론 때문이 아니라, 실용적 이유 때문이다. 오늘날의 위기는 국가가 자본주의의 작동에 필요한 규칙들을 정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중요한 경제 주체로 직접 나서야 함을 보여 준다. 이런 상황 변화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딜레마에 부딪힌다. 만약 기업 파산과 국가 지원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분명히 사회주의자들은 국가 지원과 국유화를 선택할 것이다. 정신 나간 체제 탓에 기업이 파산하고 일자리가 사라지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국가가 사회주의의 동력이라는 환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

국가는 언제나 자본주의의 능동적 요소였다. 19세기 말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사회주의자들이 국가의 이런 구실을 사회주의적 대안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국가 통제와 국가 생산이 사회주의라면, 엥겔스가 말했듯이 나폴레옹, 메테르니히, 비스마르크도 사회주의 운동에 포함시켜야 한다.

거기에다 오늘날에는 조지 부시를 포함해 더 황당한 자들도 추가해야 할 것이다. 2008년 가을에 미국 정부는 은행들을 서둘러 지원했다. 당시 미국 경제학자 누리엘 루비니는 부시, 헨리 폴슨[미 재무부 장관], 벤 버냉키[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가 “미국을 미국사회주의연방공화국으로 바꿔 놓은 볼셰비키 삼인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구제 금융과 국유화를 추진한 정부는 미국 역사상 자유시장 방임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장 맹신하는 정부였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경고했음에도 일부 사회주의자들은 계속해서 자본주의와 사적 소유를 동일시하고 사회주의와 국가 소유 · 통제를 동일시했다. 이런 논리에 따라 그들은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 같은 사회를 사회주의로 여겼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사적 소유가 거의 허용되지 않았지만, 평범한 노동자들에게 러시아는 거대한 수용소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주의 전통”의 [전체가 아니라] 한 조류였을 뿐이다. 다른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권력으로 보았다. 이 전통에서는 민간 자본과 국가자본주의가 모두 적이다. 이 전통의 사회주의자들은, 국가가 자본주의 체제의 악영향을 통제해 체제를 구출하고 체제를 더 원활하게 작동시키는 방식을 두고 국가자본주의라고 불렀다.

따라서 이 전통의 사회주의자들이 러시아 혁명을 일으켰다는 것은 아이러니해 보일 수 있다. 사실, 1917년 러시아 노동자들은 민간 자본뿐 아니라 국가 자본에 맞서 싸웠고, 레닌은 유명한 팸플릿 《국가와 혁명》에서 사회주의자의 통제 아래 국가 권력이 강화되는 것이 곧 사회주의라는 견해를 비판했다. 오히려 레닌은 사회주의에서는 기층이 주도하는 민주주의를 통해 국가가 결국 사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20년대에 러시아 혁명이 퇴보하고 노동자들이 권력을 잃어버리자 사회주의와 ‘국가자본주의’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났다. 러시아의 새로운 특권층은 노동자들의 이름으로 국가를 장악했지만, 다른 국가들과 경쟁을 벌이는데 자신의 권력을 사용했다.

그래서 엄청난 논리적 모순이 나타났다. 만약 사회주의가 국가 통제와 국가 소유라면, 사회주의는 세계 자본주의의 많은 지역에서 이미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흔히들 러시아를 그렇게 봤다. 또, 어떤 이는 중국과 쿠바를 사회주의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본다. 제3세계 독재 국가들을 사회주의로 본 사람들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본주의 핵심부에서도 국가의 구실이 증대했다. 군산복합체는 국가가 준통제하고 ‘계획’하거나 때로는 완전히 통제하고 ‘계획’하는 것을 잘 보여 주는 사례다. 더욱이 전시에는 대다수 자본주의 국가들이 민간 부문을 축소시키거나 긴밀하게 통제했다.

흔히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민영화 때문에 “국가”가 후퇴하고 “국가자본주의”가 약화했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것은 해괴한 방식의 ‘국가 후퇴’였다. 일부 이론가들은 “능력 개발 국가(enabling state)”를 주장했다. 이제 국가는 민간 부문이 더 잘 작동할 수 있게 해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최상층 집단이 ‘민간기업’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국가를 강탈할 수 있는 능력만 커졌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부메랑 돼 돌아왔다. 국가가 민간 부문을 구출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국가자본주의가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체제 구출”을 위해 국가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이것이 사회주의라는 말에는 코웃음을 친다. 사회주의는 대다수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체제다.

다시 루비니의 말을 들어보자. “사회주의는 정말이지 미국에서 잘 실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자와 빽있는 자와 월스트리트를 위한 사회주의다. 이 사회주의는 이윤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한다. 그래서 미국 납세자들은 3천억 달러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러시아 사회주의자 니콜라이 부하린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잘 설명했다. 자본가 계급은 양쪽에 호주머니가 달린 코트를 입고 있는데, 한쪽 호주머니는 민간기업이라 부르고 다른 쪽 호주머니는 국가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필요에 따라 둘 사이를 이동한다. 오늘날 자본가들이 어디까지 이동할지는 불확실하다. ‘국가 대 민간’을 둘러싼 논쟁에서 진정한 핵심은 효율성이 아니다. 효율성의 모범이라는 은행들이 과연 효율적인가. 오히려 진정한 쟁점은 지배계급 정책과 그들간 갈등이다. 기업주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체제를 구출하려면 그들이 얼마나 멀리까지 나아가야 하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 자신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를 것인가다. 은행들에서 그칠 것인가 아니면 울워스[호주의 대형 슈퍼마켓 체인]나 자동차 산업까지 손 봐야 할까?

사회주의자들이 논쟁을 벌이는 목적은 다르다. 부하린이라면 정말 중요한 것은 코트의 어떤 호주머니를 선택하느냐가 아니라 자본가들의 코트 자체를 벗기는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번역 이종길

입력 2009-11-05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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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 20년 특집 ④-2

국가자본주의론 ─ 실천을 뒷받침하는 이론

크리스 하먼 (2009년 11월 7일 작고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지도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많은 좌파들이 사회주의는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옛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국가자본주의이고 세계 체제의 핵심적 일부라고 봤다. 국가자본주의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2차대전 승전 63주년 기념 군사 퍼레이드 - 옛 소련은 서방과의 군사적 경쟁의 논리에 종속됐다.

△2차대전 승전 63주년 기념 군사 퍼레이드 - 옛 소련은 서방과의 군사적 경쟁의 논리에 종속됐다.

내가 1961년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전신인 소셜리스트리뷰그룹(Socialist Review Group)에 가입했을 때 다른 좌파 동지들은 우리를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우리가 국가자본주의를 좋아했기 때문이 아니라(우리 회원 중에는 이런 이유로 가입한 사람이 있다는 풍문이 있기는 했지만) 옛 소련과 중국, 동유럽 국가들이 모종의 사회주의 국가나 노동자 국가라는 생각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주장했다. 정부 정책을 놓고 토론할 때조차 투옥을 걱정해야 하는 곳에서, 노동자들이 국가를 통제하고 자유롭게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있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 최일붕 지음, 책갈피, 223쪽, 9천5백 원

이런 주장은 당시 영국에서든 국제적으로든 극좌파 사이에서 극소수 견해였다. 심지어 옛 소련과 중국의 여러 측면에 비판적이던 사람들도 이 나라들을 서방 자본주의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국가자본주의론은 옛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비판 이상의 것을 담고 있었다.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덕분에 우리는 소수 중 소수가 됐다. 옛 소련이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주장에 동의한 사람들 대다수는 옛 소련이 서방 자본주의와 매우 다른 종류의 사회라는 결론, 즉 옛 소련은 계급 사회이기는 하지만 지배계급과 경제 작동 방식이 자본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사회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1930년대부터 트로츠키를 후원한 미국의 사회주의자 막스 샤흐트만은 이런 견해를 이론적 형태로 제시했다. 이런 견해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도 녹아 있다.

이런 견해는 매우 위험한 실천적 함의를 담고 있었다. 이런 견해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옛 소련이 서방 자본주의보다 질적으로 더 나쁘다고 생각했다. 이 논리를 그대로 따르면 서방 자본주의를 지지하고 따라서 옛 소련에 반대하게 되며, 그 결과 소련을 지지하는 좌파들에 반대하게 된다. 조지 오웰은 국가에 공산당 지지자 명단을 넘겨 줬고, 샤흐트만은 1961년 미국의 쿠바 침공을 지지했다.

체제의 경제적 동학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이끌어 낸 결론은 매우 달랐다. 국가자본주의론은 동유럽 국가 지배자들이 경쟁 논리에 따라 국가를 운영한다는 인식에 근거한 이론이다. 동유럽 국가들은 비록 국내에선 경쟁이 없었지만 국제적으로는 서유럽 국가들과 경쟁했다. 시간이 갈수록 시장을 둘러싼 경쟁이 늘어나긴 했지만, 압도적으로는 군사적 경쟁이었다. 이런 상황은 서방 경제에서 기업들이 경쟁하는 것과는 달라 보이기도 했지만, 체제의 경제적 동학이라는 면에서는 같은 효과를 냈다.

동유럽 지배자들은 노동자들을 최대한 쥐어 짜내 만든 잉여를 산업 발전에 투입해야 이런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는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묘사한 상황과 정확히 일치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서로 상품 판매 경쟁을 하다 보면, 서로 “축적을 위한 축적”을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스탈린 시절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일하는 어린 소년

△스탈린 시절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일하는 어린 소년

축적 경쟁은 두 가지 결과를 낳는다. 한편으로 축적 경쟁은 대규모 경제 위기를 낳고 다른 한편으로 지배계급을 무너뜨릴 잠재력을 지닌 노동계급을 만들어 낸다. 제 아무리 억압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국가도 노동계급을 무한정 통제하지는 못하는 법이다.

국가자본주의론의 창시자 토니 클리프는 1947년에 쓴 책에서 이 이론을 대략적으로 제시했다. 우리는 1970년에 다음 10년을 전망하며 이 이론을 더 명확하게 다듬었다. 우리는 옛 소련이 결국 서방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지는 것과 같은 이유로 경제 위기가 발생해 무너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때까지도 전 세계의 3분의 1을 통치하고 있던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을 포기한다는 것은 대다수 좌파들에게는 최악의 비관론에 빠지는 것과 다름없어 보였다. 그러나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더는 진실을 회피할 수 없었고, 그들은 대개 사회주의도 실패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반대로 우리에게 1989년에 벌어진 사건은 어떤 종류의 자본주의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대중적 저항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 사례였다.

국가자본주의론에서 나오는 논점 하나를 더 얘기하겠다. 동유럽 국가들의 위기가 세계 체제 안에서 벌이는 축적 경쟁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그들이 서방식 자본주의로 전환한다고 해서 이런 위기를 피할 수는 없다. 브레즈네프와 고르바초프 치하에서 시작된 소련 경제의 위기가 [이른바 ‘서방식 자본주의’로 전환한 뒤인] 1990년대에 심화했고 더 나아가 오늘날 세계경제 위기로까지 이어진 것을 보면 우리가 옳았음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 그런 이론이 뭐가 중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오늘날 국가자본주의론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는 이것이 동유럽 국가들에만 적용되는 이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자본주의론은 서방에도 적용된다. 오늘날 서방 경제의 최소 3분의 1이 국가 부문이다. 데이비드 하비 같은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조차 여전히 국가 부문을 자본주의에서 일탈한 것이라고 보지만, 우리는 체제의 핵심적 일부라고 본다.

여기엔 매우 실천적인 함의가 있다. 내가 소셜리스트리뷰그룹에 가입했을 때, 이 단체의 강령은 이렇게 시작했다. “사회가 계급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전쟁은 피할 수 없다.” 국가는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고 무장력의 증강은 국가 간 경쟁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 레닌이 썼듯이, 혁명적 이론 없이 혁명적 실천이 있을 수 없다. 레닌이 조금 과장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국가자본주의론을 받아들였다면 [옛 소련과 동유럽이 붕괴했을 때] 좌파 전체가 더 강력했으리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번역 차승일

입력 2009-11-19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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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의 대변동

토니 클리프

우리는 동유럽에서 사회와 정치 질서의 가장 엄청난 격변을 목격하고 있다. 그것은 1848년과 1917년을 연상시키는 정도의 규모다.

1848년에는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헝가리에서 혁명이 일어나서 다른 곳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헝가리 혁명으로 이어졌으며, 훨씬 큰 규모로 국제적 영향을 끼쳤다.

대변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체제 내부의 압력을 관찰해야만 한다. 그것은 사회체제가 생산력의 발전에 질곡이 될 때에 사회혁명의 시대가 시작된다고 하는 마르크스의 진술로 요약된다.

마르크스는 “시대”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것은 하루이틀, 혹은 일이 년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체제가 생산력에 질곡이 되는 동안인 수십 년이 걸리는 장기적 과정이다.

왜 국가자본주의 체제들이 질곡으로 작용하는가? 소련의 경우에는 1950년부터 1959년 사이의 연평균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은 5.8퍼센트였다. 1970~78년에는 3.7퍼센트에 머물렀으며, 1980~82년에는 1.5퍼센트로 떨어졌다. 내 짐작으로는 지난 3~4년 동안에도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했다.

소련의 제조업 노동자 계급은 미국보다 3분의 1가량 더 많다. 소련의 제조산업 기술자의 숫자는 미국의 두 배지만, 생산량은 미국의 절반이다.

전체 인구 중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비율은 미국이 4퍼센트인데 소련은 30퍼센트다. 그러나 그 4퍼센트가 미국 내에서 필요한 식량을 넉넉히 생산함은 물론 수출까지 하고 있다. 그에 비해서 소련은 소비 수준이 훨씬 낮은데도 식량을 수입하고 있다. 

최근 20년 동안의 경기 하락과 침체는 성장률이 대단히 높았던 스탈린 치하의 러시아 경제의 경험과는 완전히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스탈린은 중공업과 자본재에 치중함으로써 그렇게 높은 성장률을 이룩했다. 자본축적이 체제의 중심이었다 ─ 기계를 만드는 기계를 생산하는 기계.

문제는 그러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강조점이 생산의 양에 있었기 때문에 체제가 아주 경직됐다는 것이다.

영국의 철강산업을 보라. 기업들은 아주 무거운 원료인 석탄과 철광석의 수송비를 절약하기 위해 해안에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에 반해서 다이아몬드 생산의 중심지는 남아프리카이지만 그 유통의 중심지는 암스테르담이다. 이 두 곳이 수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작은 양이 높은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철강산업의 경우는 다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철강 기업은 우랄 지방의 마그니토고르스크에 있다. 그곳에는 석탄이 없기 때문에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육로로 석탄을 운반해 온다.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철강 기업은 우크라이나의 돈바스에 있다. 그곳에는 석탄이 풍부하지만 철광이 없기 때문에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철광석을 운반해 온다.

수송비가 틀림없이 최종 생산물의 가격보다 30~40배 또는 50배 정도 더 높을 것이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낭비다. 철강 제품의 가격은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되고 있다. 이들 산업에 대한 엄청난 보조금은 전체 경제에 만만찮은 부담이 돼 왔다.

비합리성의 또 다른 예는 러시아의 두 공장에서 12mm 60mm 크기의 볼트를 생산할 때, 한 공장에서는 10코페이카(소련의 화폐 단위로 100코페이카는 1루블 ─ 옮긴이)의 가격을 매기는데 반해서 다른 공장에서는 똑같은 볼트에 14배나 더 비싼 1.40루블을 매긴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다즈사와 퍼실사의 가격 차이는 아마 5퍼센트 정도일 것이다. 만약 가격 차이가 1천3백 퍼센트나 된다고 하면 둘 가운데 한쪽은 파산할 것이다.

소련의 문제는 자원의 사용을 늘려가는 동안에는 좀더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고, 좀더 많은 원료를 사용하며, 좀더 많은 공장을 지음으로써 성장이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생산의 강도, 혹은 생산성 ─ 노동자 1인당 생산량 혹은 자본 1단위당 생산량 ─ 을 증대시킬 필요가 생기면 다시 말해서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전환할 필요가 생기게 되면 양상은 완전히 달라진다. 양적 방법은 전혀 먹혀들지 않는다.

농업에서 일어났던 일을 보라. 스탈린 치하에서 농업의 총생산량은 전혀 늘지 않았다. 1953년에 그가 죽었을 때 러시아의 농업총생산은 집산화(集産化) 이전인 1928년보다 좀 적었다. 그러나 집산화는 수많은 사람들과 식량을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시켰기 때문에 스탈린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다.

농촌으로부터 식량을 짜내기 위해서 그는 농민들을 집단농장으로 조직해야만 했다. 농민들이 곡물을 숨기려고만 할 것이므로 2천6백만 가구의 농민을 통제하고 그들에게 곡물을 공급하도록 강제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20만 개의 집단농장을 통제하는 것이 훨씬 쉬웠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 20만 개조차도 통제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각 농장의 5백 가구 농민들이 1천 톤을 생산하고는 6백 톤밖에 생산하지 못한 것처럼 가장하려고 곡물을 숨기기로 합의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농기계국’을 설치해 집단농장을 통제하려고 했다. 이 국가기관 각각이 20~30개의 집단농장을 관리하면서 파종과 수확을 담당했다.

20만 개의 집단농장보다는 1만 개의 ‘농기계국’을 통제하는 것이 훨씬 쉬웠다.

문제는 트랙터 운전수가 고랑을 깊게 갈 것인가 얕게 갈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얕게 간다면 일을 더 빨리 할 수 있고, 따라서 더 많은 상여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운전수가 한 일을 측정하러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5개월 후에 수확이 나빴다 할지라도, 그 누구도 그것이 운전수의 잘못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없다. 날씨 탓으로 돌려질 수도 있는 것이니까.

이런 경직된 체제의 최종 결과는 농업을 통제하려는 스탈린의 시도가 생산량을 늘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1959년 집단농장원들의 개인 경작지는 전체 경작지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런 개인 경작지에는 기계가 사용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쟁기조차도 쓰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젊은 노동자들이 없기 때문에 영농법은 아주 원시적이었다. 그런데도 1959년에 이 개인 경작지에서 러시아 전체 육류 생산의 46.6퍼센트, 우유의 49.2퍼센트, 달걀의 82.1퍼센트가 생산됐다.

만약 고르바초프가 농업 노동력을 전체 인구의 30퍼센트에서 예를 들어 10퍼센트로 줄일 수 있다면 공업생산을 늘릴 수 있는 큰 기회가 생길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공업 생산성의 향상을 강조할 수밖에 없으며,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경제를 합리화해 군살을 빼고 튼튼하게 하려는 것이다. 대처는 1979~1981년에 영국에서 페레스트로이카를 실시했다. 그는 제조업의 노동력을 5분의 1 이상이나 줄였다. 모든 자본주의 나라에서 페레스트로이카를 실시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자본가들이 공장문을 닫고 새 공장을 열었으며 기계를 바꿨다. 그러나 일본 경제는 영국 경제보다 훨씬 현대적이기 때문에 경제 개혁의 상처가 훨씬 덜할 수 있다. 러시아 경제는 대처가 실시했던 것보다 더 근본적인 페레스트로이카를 요구한다.

카갈리츠키가 런던을 방문했을 때 그는 관료집단 내의 주요한 세 그룹에 관해 말한 바 있다. 

그들 가운데 한 그룹은 “우리는 합리화와 시장이 필요하며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모형’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그룹은 훨씬 더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며, ‘대처류의 시장경제론자들’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카갈리츠키에 따르면, 가장 큰 그룹은 ‘피노체트류의 시장경제론자들’로 불리는 그룹으로서 이들은 대처가 너무 온건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칠레의 피노체트 장군이 실시했던 것과 같은 급진적인 조처들을 도입하려 한다.

채널4 방송은 폴란드 경제를 다룬 최근 프로그램에서 카토비체에 있는 한 철강공장의 경영자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그는 “우리는 맥그리거로부터 배워야만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노동력의 철저한 감축을 주장하고 자신은 한 일자리를 놓고 두 명의 노동자가 취직하려고 할 경우에만 만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고르바초프가 따라야만 하는 논리다. 영국에서는 제조업 생산설비의 20~25퍼센트를 폐쇄했다. 러시아에서는 그 이상을 해야 할 것이다. 페레스트로이카의 결과로 1천6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는 계산은 어떻게 보면 좀 적게 산정한 것이다.

최초의 저항은 공장의 관료들에게서 나올 것이다. 둘째로, 그런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르바초프는 더 많은 개방, 글라스노스트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글라스노스트의 문제는 그것이 통제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지배자들은 폭력과 설득, 채찍과 당근을 가지고 지배한다. 그들은 채찍이 충분히 강하지 못하거나 당근이 충분히 크지 않을 때 어려움에 부딪히게 된다. 

스탈린이 죽었을 당시만 해도 러시아는 정치적 변동의 기준에서 볼 때 여전히 무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던 중 1956년 2월에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비난하고 약간의 민주화 조처를 취하기 시작했다. 8개월 후 헝가리 봉기가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노동자평의회를 설치했으며 헝가리의 경찰과 군대를 분쇄했다. 흐루시초프는 그들에게 손가락을 내밀었는데, 그들은 손을 덥썩 잡았다. 물론 그 뒤 흐루시초프는 탱크를 보냈다. 

이런 결과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알렉산더 2세는 1855년에 러시아 황제에 등극하여 농노들과 지방정부에 자유를, 그리고 여성들에게는 대학에 갈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당시의 지도적인 혁명적 민주주의자였던 헤르쩬은 알렉산더 2세를 ‘해방자 차르’라고 불렀다. 단 한가지 문제는 차르가 농노들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토지는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지방정부들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폴란드의 민족자치를 허용하지 않았고 대신에 군대를 파견했다.

그 결과 나로드니키는 거대하고 역동적인 운동을 형성했고 알렉산더 2세는 1881년에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혁명가에 의해 암살당한 황제가 됐다.

오늘날 러시아의 지배자들에게 글라스노스트의 문제는 그것이 온갖 요구들이 쏟아지는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불법 파업을 감행한 보르쿠타의 노동자들을 보라.

글라스노스트는 러시아와 동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 저항과 분노의 봇물을 터뜨렸다.

위기의 확산은 무척 빠르다. 그러나 위기의 해결은 장기적인 문제이다. 이것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말하건대, 과거가 우리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엄청난 노동자 계급을 창출함으로써 역사를 거대한 규모로 진전시켰다. 오늘날 러시아의 노동자 계급은 규모나 집중도, 그리고 힘의 측면에서 1917년의 노동자 계급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다. 이와 동시에 노동자들은 사상, 조직, 생활관습의 측면에서 엄청나게 퇴보했다.

바로 이런 까닭에 노동자들은 지극히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오래 전인 1848년에 제기됐던 지극히 초보적인 것들 ─ 민주적 권리, 집회의 자유,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권 ─ 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후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상의 인적 연속성이 없다는 것이다. 트로츠키가 ‘혁명정당은 계급의 기억’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기억’이 단지 허공에 매달린 그 무엇이 아니고 인간에 의해 수행되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전달하고, 자신들이 읽은 책 등에 관하여 서로 얘기하기 마련이다.

퇴보의 한 예는 모스크바와 야로슬라브에서 있었던 11월 7일의 시위에서 사람들이 차르의 현수막을 들고 있던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이보다 더욱 나빴던 것은 지난 여름 서부 우크라이나의 르보프에서 사람들이 1919년에 15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했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페틀루라의 청백(靑白)기를 들고 있었던 사실이다.

문제는 진정한 공산주의, 계획, 그리고 적기(赤旗)가 모두 억압적 체제와 동일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카갈리츠키나 그와 비슷한 수많은 동유럽 혁명가들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그들은 사상의 측면에서 자신들의 길을 찾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사실상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무런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명확해질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정치적 분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카갈리츠키의 그룹에는 무정부주의자들도 있고 갖가지 종류의 정치 사상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마르크스는 무정부주의자 바쿠닌과 결별하는 데 여러 해가 걸렸다. 나는 오늘날 서방에서 마르크스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가 함께 있는 조직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러시아에서는 분화의 과정이 아직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함께 모여 있다.

노동자들의 운동은 한편으로는 발전이 아주 빠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굉장히 느리다. 왜냐하면 극복해야 할 60년 간의 단절기가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은 1917년에 노동자 대중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던 사상을 획득해야만 한다.

또한 노동자들이 투쟁의 어떤 측면들은 지극히 빨리 배울 수 있지만 그것을 일반화하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두 과정 사이의 불균형도 있다. 대중의 머릿 속에 있는 모순은 그들의 경험 속에서의 모순의 결과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공장 안에서 많은 연대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기본적인 민주적 요구들은 이런 상황으로부터 성장해 나올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민주적 권리와 노동조합의 권리를 원한다.

문제는 쟁점이 직접적인 공장의 문제를 넘어서서 좀더 일반적인 것으로 될 때에는 모든 것이 온데간데없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장의 매력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그들의 생활수준을 외국과 비교할 때면 언제나 서독의 생활수준과 비교한다.

만약 그들이 모스크바의 주택 사정을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잠을 자는 캘커타와 비교한다면 그들은 캘커타에는 시장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서독과 비교할 경우에 시장은 아주 매력적으로 보인다.

레닌이 혁명 사상은 노동자들 외부로부터 와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그들의 일상적인 경험의 바깥이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로서 좀더 높은 임금을 위해 싸우는 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다. 인종차별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은 그렇지 않다. 자동으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직접적인 경험을 넘어서는 계기가 있어야 한다.

1905년 1월 9일 러시아에서는 사제이면서 경찰 첩자였던 가퐁 신부가 이끌었던 동궁으로의 행진이 있었다. 대중은 그가 경찰 첩자였다는 것은 물론 몰랐지만, 그가 신부고, 그것도 교도소 순회 신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시위 군중은 적기가 아니라 성상을 들고 있었으며 “차르 타도”를 외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황제를 사랑합니다”라고 외쳤다. 

혁명가들은 극소수여서 기껏해야 2백 명 정도에 불과했다. 군대가 5백 명의 사람을 사살하자 대중은 변하기 시작했다.

1월 9일에 시작해서 그해 말 소비에트 구호 ─ “8시간 노동”과 “무장” ─ 로까지 변화한 것은, 매우 신속한 도약이었다. 대중이 과도기를 거쳐야만 한다는 것은 그 과도기가 5백 년쯤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레닌이 말했듯이 혁명적 시기에는 노동자들이 하루만에(일상적 시기의 ─ 옮긴이) 한 세기 동안보다도 더 많이 변한다.

동유럽의 사회주의자들에게는 극복해야 할 엄청난 문제들이 있다. 우리가 혁명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조차 왼쪽으로 움직이는 중도파와 섞일 것이며, 뚜렷한 구분선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중도파가 좌향하면서 분화되는 것을 기대할 수는 있다.

폴란드의 경험은 무력이 사용될 때마다 그 무력이 약화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1980~1981년에 지배계급은 1956년만큼 자신이 없었다. 러시아 군대는 개입하지 않았다. 현재의 상황에서 그들이 동독에 있는 38만의 러시아 군대를 사용하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지배계급은 개량과 억압을 동시에 사용해야 한다. 광부들이 파업에 돌입하자 지배계급은 부랴부랴 광산, 철도, 동력 산업의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한 법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광부들은 그 법을 깨뜨렸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완전히 깨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보르쿠타에서는 단지 18개 갱의 광부들만이 파업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투쟁에는 기복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단순한 일방통행 과정이 아니다. 시베리아 쿠즈바스의 광부 파업위원회는 파업에 반대했다. 파업을 계속하기로 결정한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그곳에서는 이미 투사들 사이에 분화가 일어나고 있다.

동유럽 사태는 서방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흔히 시장을 지지하는 대처와 키노크가 옳으며 계획은 불가능하고 사회주의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폴란드의 한 경제학자는 공산주의를 자본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에서 중간 단계라고 비꼬았다. 서방에서 볼 때(동유럽의 ─ 옮긴이) 정권들이 산산조각났듯이 사회주의도 미래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우익에게 엄청난 응원이 되고 있다.

많은 좌익이 동유럽 체제에 환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점은 특히 중요하다.

그러나 동유럽 노동자들의 파업이 활성화되면 이런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상황에서 계급투쟁이 여전히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것이 분명해질 것이다.

이론으로서 국가자본주의는 절대 중요하다. 러시아에 어떤 형태로든 사회주의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곤경에 빠져 있다. 에르네스트 만델조차도 1956년에 이렇게 주장했다.

소련은 수십년 동안의 [경제 개발] 계획을 거치면서 과거의 진보가 미래의 발전에 걸림돌이 되지 않은 채 안정적인 경제성장 속도를 유지하고 있다. … 경제성장 속도를 저하시키는 모든 자본주의 경제발전 법칙들은 사라졌다.

같은 해 아이작 도이처는 10년 이내에 소련의 생활수준이 서유럽을 능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들을 믿었던 사람들은 이제 완전히 풀이 죽어 있다. 러시아가 보통 자본주의로 지칭되는 나라들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가정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왜 동유럽 경제가 지금 같은 상황에 처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자본축적을 강조함으로써 엄청난 성장률과 미래의 성장에 대한 장애를 모두 설명한다. 나는 1963년에 이렇게 쓴 바 있다.

만약 우리가 계획경제라는 말을 단일한 리듬으로 모든 구성 요소들이 조정되고 규제되기 때문에 [구성 요소 간] 알력이 최소화되고 무엇보다도 경제적 결정에서 예측이 주된 요인인 경제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러시아의 경제는 결코 계획경제가 아니다. 진정한 계획 대신 정부의 지령이라는 경직된 방법이 그 정부의 결정과 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경제 내부의 결함을 해결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소비에트 계획경제가 아니라 관료주의적 지령 경제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것은 체제의 동력, 자본축적, 노동자 계급의 창출을 설명해 준다. 이것이 국가자본주의의 강점이다. 그와 동시에 이것은 생산력 ─ 가장 중요한 생산력은 노동자들 자신이다 ─ 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 

다음으로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지나친 인상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해 준다. 

스탈린이 초래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이 전통은 아직 살아 있다. 보르쿠타에는 그곳의 가장 큰 강제 수용소에 보내졌던 옛 트로츠키주의자들과 광부인 그들의 손자 · 손녀들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카갈리츠키의 이야기는 참으로 흥미롭다. 

사상은 탱크, 곧 폭력만으로는 분쇄될 수 없다. 트로츠키의 사상은 마치 시냇물과 같은 것일 수 있다. 물의 흐름이 눈앞에서 사라졌다가도 수 마일 지난 곳에서 다시 나타난다. 시냇물은 마르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땅 밑으로 스며들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사상도 마찬가지이다. 트로츠키는 1939년에 이렇게 말했다. “가장 막강한 서기장의 복수보다 역사의 복수가 훨씬 더 무섭다.” 그가 옳다는 것이 증명됐다. 스탈린은 죽었고 트로츠키는 미소 짓고 있다.

번역 최일붕

입력 2009-12-31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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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3대 세습

이것이 과연 사회주의 사회란 말인가

김영익

 북한 정권이 제3차 조선노동당 대표자회를 통해 김정은으로의 후계 구도를 대내외적으로 공식화했다. 3대에 걸친 국가 권력 세습은 독재정권들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다.

남한 우파도 북한의 권력 세습을 비난한다. <조선일보>는 “세계적 정치스캔들”이라고 비아냥댔다.

그러나 이들의 북한 권력 세습 비난은 위선이다. 권력자의 친인척들이 권력을 공유하는 게 문제라면, 이명박의 형님 이상득의 ‘만사형통’도 만만치 않다.

 ⓒ사진 출처 smee007

부와 권력의 대물림이 북한만의 특징도 아니다. 얼마 전 유명환의 딸 특채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삼성 ‘이병철-이건희-이재용’ 세습처럼 남한 재벌들은 2~3대에 걸쳐 기업을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있다. 한국의 100대 주식 부자 중 78퍼센트가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았다.

비록 선거를 치르기는 했지만, 일본에서도 1991년 이래 역대 총리 12명 중 11명이 세습 정치인들이었다. 미국도 연방 상원의원 상당수가 정치 명문가 출신들이다.

봉건 왕조 국가?

우파들은 북한의 3대 세습을 두고 ‘봉건’, ‘왕조’라고 비난한다. <조선일보>는 “나라의 대물림을 당연시하는 왕조일 뿐”이라고 했고, <경향신문>도 북한이 “[봉건]왕조국가임을 대외적으로 공표한” 상황이라고 했다.

진보진영에서도 북한 체제를 봉건 왕조에 비유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령, 2007년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 때 장석준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기획실장은 북한 사회가 “스탈린주의를 봉건적 잔재와 결합시킨 가장 퇴행적인 형태”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 체제에 대한 올바른 분석이 아니다. 두 차례의 핵실험에 성공하고 장거리 미사일도 자체 개발했으며, 노동계급이 대규모로 존재하는 북한이 봉건 왕조라고?

북한 체제를 왕조라고 보는 견해는 첫째, 북한 체제의 동력을 설명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경제의 내적 모순과 계급투쟁의 동인도 해명하지 못한다. 예컨대 봉건 사회처럼 지배계급의 소비가 착취의 목적이라면 북한이 중공업과 군비 부문에 높은 비율로 투자하는 이유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둘째, 북한을 봉건 사회처럼 정체된 사회로 본다면 북한 경제가 1950~60년대에 남한보다 역동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셋째, 북한 체제를 봉건 왕조라고 보는 관점의 정치적 문제점은 남한 체제가 북한 체제보다 우월하다는 입장으로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과거 냉전 시절 많은 좌파들이 바로 이 논리에 따라 서방 자본주의에 정치적으로 투항했다.

한편 진보진영의 일부는 북한 3대 세습을 두둔하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민주노동당 우위영 대변인은 북한 세습이 “우리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하더라도 북한의 문제는 북한이 결정할 문제”라고 했다. 이 논리대로라면, 박정희가 유신헌법 제정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강변한 것도 비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눈높이

박경순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 부소장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 동북지방 방문이 “미국에게는 그 어떤 타협도 굴종도 있을 수 없다는 정치적 메시지”이자 “북한의 후계 체제 구축의 기본 정신과 원칙을 명확히 천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권력 세습을 반제국주의로 포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게다가 북한 정권이 일관되게 제국주의에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북한은 냉전 초기 소련 제국주의에 기대어 형성된 국가다.

게다가 오늘날 북한은 한편에서는 미국에 맞서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과 끊임없이 타협하려 애쓰고 있다. 북한은 WTO에도 가입하고 싶어 하고, 김정일은 북한에게 적대적이지만 않다면 주한미군의 주둔을 용인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북한을 사회주의 사회로 규정하는 것은 더더욱 잘못됐다. 사실,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는 있을 수 없다.

노동당 규약에 따르더라도 5년마다 열리도록 돼 있는 당대표자회가 44년 만에 열릴 정도로 북한 체제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노동당 당대회도 1980년 김정일로 세습을 공식화한 이래 한번도 열리지 않고 있다. 북한 인민들이 시민적 · 정치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반면, 북한 관료들은 권력을 독점하고 온갖 특권을 향유해 왔다. 미국의 진보 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비날론”(합성섬유) 옷을 입고 거친 운동화를 신은 채 일터로 가는 노동자 옆으로 맞춤양복에 외제 시계를 찬 관료가 벤츠 승용차를 타고 쏜살같이 지나가는 북한의 현실을 꼬집은 바 있다.

소수 지배계급이 다수 민중을 착취 · 억압한다는 점에서 북한은 남한과 다를 바 없다. 김정일이 ‘박정희를 존경한다’고 말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처럼 북한은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가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이라고 봤는데, 북한 국가 건설 과정에서는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 혁명적 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련군 탱크

소련군 탱크가 밀고 들어와 소련식 체제를 이식한 게 북한 국가의 성립 과정이었다. 북한 노동계급은 단 한번도 권력을 잡아 보지 못했고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조합을 만들 권리도, 파업할 권리도 없다.

국가 권력을 독점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북한 지배 관료들은 생산수단도 지배해 왔다. 그리고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압력에 대응해 강박적으로 축적을 하려고 노동계급을 쥐어 짜 왔다.

따라서 소수 지배자들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북한 체제는 관료적 국가 자본주의 체제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남한이 주기적으로 축적 체제의 위기를 경험해 온 것처럼, 북한도 축적의 모순에 빠져 거듭 위기를 겪어 왔다.

입력 2010-09-30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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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3대 권력 세습

민주노동당의 혼란스럽고 군색한 침묵

김하영 (다함께 운영위원,《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저자, 계간 《마르크스21》 편집자)

북한의 3대 권력 세습이 진보진영 내에 뜨거운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정희 대표와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북한 3대 세습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 그러나 침묵의 근거는 혼동으로 가득하고 군색하다. 

첫째, 이정희 대표와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북한 3대 세습을 비판하는 것이 우파와 그 논리에 힘을 보태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큰 착각이다. 오히려 진보진영의 다수가 이런 문제에 침묵해 왔기 때문에 우파가 인권과 민주주의를 자신의 전유물인 양 행세하며 기세등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두 다 찬성투표하자!” 북한에서 평범한 노동자들은 국가 운영 근처에도 갈 수가 없다. ⓒ사진 출처 Kernbeisser

진보진영이 북한 3대 세습을 선명하게 비판해야, 유명환 사건으로나 삼성 이재용 사례로나 북한 세습을 비난할 처지가 못 되는 우파의 위선을 날카롭게 들춰낼 수 있고, 우파가 사회주의를 소름끼치는 독재와 같은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계속 진보진영의 신뢰를 실추시키는 것을 좌절시킬 수 있다. 

북한을 비판하면 우파에게 득이 될 뿐이라거나 심지어 국정원 또는 CIA 첩자 취급하는 정통 자주파의 논법은 남한 정권과 체제를 비판하려면 ‘북한 가서 살라’고 말하는 우파의 논법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다. 

둘째, 진보진영의 북한 세습 비판을 제국주의적 개입 정책과 뒤섞는 것도 심각한 혼동이다.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는 북한 3대 세습 비판이 또 하나의 “오리엔탈리즘”이라며, 그것이 “19세기와 20세기 유럽 열강의 아시아 침략에 정당성을 부여했다”는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을 빌었다. 박경순 새세상연구소 부소장은 더 노골적으로, “자신의 이념과 가치관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적 패권주의 사고 발상과 하등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북한 체제를 비판하더라도 얼마든지 미국의 대북 제재와 군사적 위협에 일관되게 반대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다함께와 <레프트21>이 지금까지 한결같이 취해온 입장이다. 

만약 미국이 3대 세습을 들먹이며 북한을 압박한다면 그것은 북한의 민주주의를 염려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제국주의적 개입의 핑계일 뿐이다. 미국은 중동 전략을 위해 사우디아바리아의 세습 왕가와 돈독한 협력을 하고 있지 않은가. 

진보진영은 제국주의적 개입을 일관되게 반대하면서 북한의 민주주의가 제국주의의 개입이 아니라 북한 민중 자신에 의해서만 쟁취될 수 있다고 주장해야지, 대북 압박을 반대하기 위해 비민주적인 북한 정권마저 두둔하는 데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

셋째,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남북관계를 위해 북한 세습(뿐 아니라 북한 문제 일체)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 6 · 15공동선언과 10 · 4선언을 잣대로 삼아 내정 불간섭, 체제 인정과 존중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진영의 북한 세습 비판이 급작스럽게 남북관계를 악화시키고 평화를 해칠 것처럼 몰아세우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주류 정치 내 진보파의 영향력이 크지도 않은데 말이다. 

게다가 남북관계는 남북 당국 상호 관계의 누적적 결과에 의해서가 아니라 더 복잡한 동북아 정세와 관련국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결정되곤 했다. 순진한 관점에서만 보면, 이명박 정부와 북한 당국이 서로 거칠게 비난하다가 몇 달 전 느닷없이 비밀접촉설이 흘러나온 것에 당황할 수 있다. 

사실, 북한 당국은 상호 비방을 일삼아 온 남한 독재정권들과도 숱하게 비밀외교를 했다. 임수경 씨가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 개막식에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로 입장할 때 비밀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 중이던 당시 청와대 정책보좌관 박철언이 김일성 · 김정일과 함께 능라도 경기장 주석단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남북관계사의 가장 극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물론 남북한이 대립과 충돌이 아니라 관계개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특히 통일을 중시하는 민주노동당은 통일 한반도의 사회상이 어떤 것인지, 진보의 비전이 무엇인지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불간섭과 상호 체제 존중이라는 미명 아래 북의 세습을 은근히 두둔한다면, 남북 민중 모두에게서 결코 매력적인 대안으로 지지받지 못하고 진보에 대한 환멸감만 안겨줄 것이다. 남한의 진보진영은 당국간 외교관계가 아니라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의 처지와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북한 피억압 대중과의 연대를 우선에 놓아야 한다. 

이렇게 말하면 정통 자주파는 북한은 남한과 달리 당 관료와 피억압 대중으로 나눌 수 없는 사회라고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남한과 꼭 마찬가지로 억압 기관들의 존재가 사회적 분단을 방증한다. 억누를 다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그토록 육중한 억압 기관들과 끔찍한 처벌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넷째,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는 북한의 3대 세습을 두고 “판단할 수 있는 자료가 없”기 때문에 옳고 그름의 평가는 물론이고 후계 구도 자체도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새세상연구소 긴급토론회에서 박경순 부소장은 김정은이 김정일의 아들인지도 알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김정은이 노동당 창건 65주년 열병식에 김정일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고 북한 당국이 이를 세계 만방에 알리면서 금세 근거 없음이 드러났다. 북한 최고인민회의 양형섭 부위원장도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세대를 잇는 위대한 지도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며 후계 구도를 공식화했다.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북한 3대 권력 세습 비판을 완화하기 위해 애처롭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는 셈이다. 

사실, ‘알 수 없다’는 대응법은 문제를 회피하거나 북한 관료 비판의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해 자주파가 단골 메뉴로 애용해 온 방법이다. 식량난, 북한 인권, 탈북자 문제 등을 놓고도 늘 그랬다. 

그러다가 빼도 박도 못할 사실이 알려지면, 이번에는 북한 문제를 ‘우리의 가치관과 잣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요컨대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것이다. 

정당화 

그런데 북한 문제는 북한식 가치관과 잣대로 봐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북한 당국의 정당화 논리를 수용하는 것일 뿐이다. 박경순 부소장은 “단순히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후계자로서의 자질과 능력, 그리고 업적 때문에 북한의 인민과 당원들이 아래로부터 추대”하는 것이라는 북한의 후계자론을 소개하며, 그것이 “현실적으로 검증받은 이론”이라고 옹호한다. 

그러나 ‘혈통 본위’가 아니라 ‘인물 본위’라든가, 합법적 절차와 방식을 통한 인민들의 선출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북한 당국의 뻔뻔스런 세습 정당화 논리일 뿐이다. 30년 동안 최고지도기관 선거가 없었던 북한에서 “합법적 절차와 방식을 통한 인민들의 선출 과정” 운운하는 것은 완전 코미디다. 이번 당 대표자회의 선출도 김정일과 그 핵심 측근들이 내정한 것을 사후 승인한 것에 불과했다.

후계자론이 “대다수의 북한 주민들의 동의를 획득한 것으로 보인다”는 박 부소장의 주장도 황당하다. 김정은이 김정일의 아들인지도 알 수 없다더니 어떻게 북한 주민들의 의사는 알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후계자로서 자질과 능력을 갖췄는데 수령과 혈연관계라고 해서 주저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북한 당국의 주장도, 민주노동당 지도자가 그것을 그대로 옮기는 것도 낯뜨겁다. 김정은이 김정일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스위스 유학이라는 특권을 누리고, 바닥에서 경력을 쌓지 않고도 일약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 될 수 있었겠는가? 

다섯째, 이정희 대표는 진보(언론) 안에도 스며든 “국가보안법 법정 안의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비장하게 침묵을 선언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한 비판을, 지배계급에게 “사상이 불온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받아 국가보안법 처벌을 피하려는 비겁한 행위에 은근히 빗댔다. 불쾌한 일반화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을 비판함으로써 지배계급에게 합리적 진보임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일부 진보세력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민주노동당 자주파의 상당수도 국가보안법으로 수감된 당원을 제명함으로써 이른바 “공당”으로 거듭나고자 타협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남한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북한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며 남한 사회의 변혁 전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진보진영 안에는 다함께와 <레프트21>처럼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북한을 비판하는 단체도 있다. 다함께와 <레프트21>은 북한을 남한과 꼭 마찬가지로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사회라고 보며 남북한 모두에서 근본적 사회 변혁이 필요하다고 본다. 

지배계급은 이런 종류의 북한 비판을 환영하지도, 사상이 불온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으로 여기지도 않는다. 실제로 이런 입장이었던 국제사회주의자들(IS) 그룹은 2000년대 초반까지도 2백 명이 넘는 회원들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았다. 

추천 도서

《국제주의 시각에서 본 한반도》

 

김하영 저, 책벌레, 1만 3천 원

 

기회주의적 ‘진보’파가 아닌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북한 비판은 지배계급에게 합리적 진보로 인정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회 변혁 대안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3대째 권력을 세습하는 북한이 사회주의라면, 빈곤과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자본주의에 반감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에 환멸감을 느낄 것이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는 북한이 사회주의와는 아무 관계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냄으로써 이런 사람들과 함께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진정한 사회 변혁 대안을 추구해야 한다.

입력 2010-10-14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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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전선의 역사적 경험에서 배운다 ①

인민전선의 역사는 계급 협력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김인식

인민전선 정책은 1935년 7∼8월 코민테른(국제공산당) 7차 대회에서 처음 채택됐다.

그 직전까지 스탈린의 코민테른1은 ‘사회파시즘’론을 채택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사회민주주의와 파시즘은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쌍둥이”라고 말했다. 

스탈린은 둘의 계급적 토대가 다르다는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사회민주주의의 계급적 토대가 노동계급 조직이라면 파시즘은 중간계급, 미조직 노동계급 부문, 룸펜이 그 기반이었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와 파시즘은 칼의 양날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상호배타적 버팀목들이었다.

‘사회파시즘’론은 독일에서 재앙을 낳았다. 독일공산당과 독일사회민주당은 변변한 투쟁 한번 못해 보고 1933년에 히틀러에게 권력을 내 줬다.  

1971년 9월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에 저항하는 칠레 대통령 아옌데 칠레 인민전선은 비극적 결말로 끝났다.

이 점에서 인민전선은 ‘사회파시즘’론이라는 백치병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모험주의적 좌익주의가 우익 중도주의 유형의 노골적 기회주의”로 변신한 것이었다. “뜨거운 우유에 덴 고양이는 찬물도 피하는 법이다.”

인민전선은 계급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이 함께하면 파시즘의 악몽을 끝낼 수 있다는 정책이다. 실천에서 이것은 노동계급과 자유주의 자본가의 체계적인 계급 협력을 뜻했다.

과거에 사회민주당들의 민족주의적 · 계급협력주의적 정책에 반대해 그들과 결별했던 코민테른이 이제 사회민주주의 세력보다 더 노골적인 계급 협력 정책으로 전환했다.

이것은 코민테른의 기본 테제를 근본에서 부정한 것이었다. 레닌 등이 작성한 코민테른 가입 조건(‘21개 조항’)에는 공산당과 자본가 정당의 연합 반대가 포함돼 있었다.

일국 사회주의

인민전선은 1935년에 채택됐지만, 그 기원은 1924년에 발표된 일국 사회주의론이었다.

일국 사회주의는 혁명 방위의 성패를 국제 계급투쟁이 아니라 소련 한 나라의 힘에 건다는 뜻이었다. 한 나라 안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면 국제 혁명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덤 같은 것이 된다.

일국 사회주의론은 각국 공산당이 민족주의로 향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그 결과 “각국의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노선에 따른 코민테른 붕괴의 시발점”(트로츠키)이 됐다.

이 정책에 따라 각국 공산당들은 소련의 ‘국경수비대’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소련에 군사적 개입을 못 하도록 막는 방패 구실이 공산당의 주요 임무가 됐다.

그러자면 공산당들이 잠재적 친구들과 사이가 나빠지는 일이 없도록 혁명 활동의 수위를 낮추고 자국 자본가들에게 개혁주의적 압력이나 행사해야 했다. 이 정책은 중국 혁명 등에 치명타를 가했다. 1920년대 중엽 중국공산당은 이른바 ‘진보적’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에 굴종했고, 1925∼27년 중국 혁명은 분쇄됐다.

인민전선도 소련의 대외 목표와 관계 있었다. 히틀러에 반대해 소련과 군사 동맹을 맺을 가능성이 있는 다른 나라 정부들에 압력을 넣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히틀러의 군비 증강 시도가 겨눈 목표물 중 하나가 소련이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영국 · 프랑스와 군사 동맹을 맺고자 안달했다. 마침내 1935년에 스탈린은 프랑스의 중도 우파 라발 정부와 상호방위조약을 맺었다.

스탈린은 이 관계를 공고히 하려면 공산당이 ‘자유주의적’ 자본가 정부를 지원해야 한다고 봤다. 그것만이 파시즘의 진격을 막을 유일한 ‘현실적’ 방도라고 봤다(그 핵심 논지는 40년 전에 베른슈타인 등이 설파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물론 레닌 시대의 소비에트 정부도 자본가 정부들과 조약들을 맺었다 —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1920년 에스토니아와의 조약, 1920년 10월 폴란드와 체결한 리가 조약, 1922년 독일과 체결한 라팔로 조약 등.

그러나 당시 볼셰비키 지도자들 중 누구도 이 자본가 정부들을 “평화의 친구들”이라고 선전하지 않았다. 또, 독일 · 폴란드 · 에스토니아 공산당들에게 이 조약들을 조인한 자본가 정부들을 선거에서 지지할 것을 촉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대중을 혁명적 의식으로 각성시키는 데 이용했다.

그러나 인민전선 시기 스탈린의 코민테른은 정확히 그 반대의 주장과 실천을 했다.

“현재 국면에서 많은 자본가 국가들도 평화 유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제국주의 전쟁의 위험에 맞서 노동자 계급과 모든 근로 민중 그리고 모든 국가들을 아우르는 광범한 전선을 창출할 가능성이 존재한다.”(1936년 5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이 ‘전선’은 제국주의의 현 상태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산당은 자본가 정당들과 동맹을 맺으려고, 세계 체제를 강타한 공황에 대한 혁명적 대안들을 모두 포기했다. 혁명적 변화에 관한 논의를 먼 훗날로 미루고 자본주의 수호 임무를 지닌 정부들을 “관용”으로 대했다. 이 관용은 노동자 운동을 억누르는 것을 뜻했다.

(반半)식민지 나라들에서는 반제국주의 투쟁을 위해 노동계급을 이른바 ‘진보적 민족 부르주아지’에 예속시켰을 뿐 아니라 노동계급과 민족해방운동을 지구상 최대 식민제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종속시켰다(7차 대회는 6차대회에서 두드러졌던 반제국주의 미사여구들을 조심스럽게 거둬들였다).

스탈린은 1943년에 동맹국들에 보내는 우호의 표시로 코민테른을 해체했다.

산수와 역학

△트로츠키

트로츠키는 인민전선이 고전적 멘셰비즘의 확장이라고 봤다. 그가 보기에, 1917년 2월 혁명이 인민전선의 역사적 사례였다. 

1917년 2월에서 10월까지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자본가 정당인 카데츠와 연립정부를 구성해 긴밀하고 항구적인 동맹 관계를 유지했다.

당시 볼셰비키는 인민전선에 조금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들의 요구는 좌파 정당들이 카데츠와 맺은 동맹을 파기하고 진정한 노동자 정부를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러시아의 인민전선을 제압했던 10월 혁명의 이름으로 각국의 인민전선들을 지원했다. 

인민전선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정확히 산수의 법칙이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이렇게 말했다.

“단결한 노동자 세력(‘통일전선’)이 민주주의자들 및 자유주의자들과의 보다 넓은 선거적, 정치적 연합(‘인민전선’)의 토대가 될 것이었다. 

“독일의 세가 계속 확대됨에 따라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연합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의 연합체, 즉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신념과는 상관없이 파시즘(또는 추축국들)을 첫째 위험으로 간주하는 모든 세력의 ‘국민전선’으로 단결의 범위를 확대할 것을 고려했다.”

노동자들의 단결에다 자유주의 자본가와의 단결까지 더해졌기 때문에 인민전선은 공동전선의 진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정치의 영역에서는 “산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적어도 역학 하나는 더 필요하다. 

“힘의 평행사변형의 법칙은 정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평행사변형에서 합력(合力)은 분력(分力)이 서로 다를수록 더 작아진다. 정치적 동맹자들이 반대 방향으로 끌어당기는 경향이 있다면, 합력은 0과 같아질지도 모른다.”

인민전선은 이해관계가 180도 다른 적대 계급 간의 동맹이다. 그래서 동맹의 성립은 노동계급의 양보를 전제로 한다. 

그래 갖고는 중간계급을 획득하지 못한다. 노동계급의 단호한 지도력 제공만이 중간계급을 획득할 유일한 방법이다. 

노동계급의 힘을 극대화하는 방법으로 레닌과 트로츠키가 지도하던 초기 코민테른은 공동전선을 제안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제안한 공동전선은 (1) 노동계급 정당들의 협력을 뜻했다. 반대로 인민전선은 자본가 정당들을 포함시키는 계급 협력 전략이었다. (2) 공동전선은 특정한 목표를 성취하려는 투쟁에 필요한 실천적 협정이었다. 그러나 인민전선은 공통의 선거 강령과 자본가 정부 지지를 포함했다. (3) 공동전선에서는 완전한 이데올로기적 독립성과 비판의 자유가 보장되지만, 인민전선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4) 공동전선은 혁명정당 활동의 한 부분이어서 다른 독립적 활동을 계속 수행할 수 있지만, 인민전선은 코민테른의 전체 전략이었다.

계급 연합 기구로서 인민전선은 파시즘을 저지하는 효과적 무기가 못 됐다.

예컨대, 1934년 프랑스에서 히틀러의 집권에 고무받은 파시스트들이 의회를 공격했다. 중도 좌파 정권이 몰락하고 강경 우파 정권이 들어섰다. 이때 노동자들의 단결된 투쟁이 극우파를 수세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1936년에 주류 친자본가 정당인 급진당과 단결하려는 시도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관용’ 정책과 똑같은 결과를 낳았다. 짧은 소강기를 거쳐 우파가 다시 주도권을 쥐었다.

물론, 노동 대중에게 인민전선이 ‘제3기’(사회파시즘) 백치병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히틀러의 승리는 정치적으로 각성한 노동자들 사이에서 단결해야 한다는 열망을 고무했다.

코민테른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과 트로츠키가

주도해 1919년에 창립됐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지도하던 시절 코민테른(1∼4차 대회)은 혁명적 전통의 보고였지만, 1924년 이후 스탈린이 지도한 코민테른은 스탈린 정권의 외교 수단으로 전락했다. 7차 대회가 마지막 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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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단결 염원 정서 덕분에 인민전선의 첫 번째 국면에서 공산당들은 큰 이득을 봤다. 프랑스공산당의 당원 수는 1934년 3만 명, 1936년 2월 9만 명, 1936년 12월 28만 8천 명으로 증가했다. 스페인공산당의 당원 수도 1934년에 1천 명을 밑돌았으나 1936년 2월 3만 5천 명, 1937년 7월 11만 7천 명으로 증가했다. 당시 공산당들은 처음으로 중간계급 당원과 동조자를 대거 획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8년에 인민전선의 실적에 대한 환상이 깨지자 상황이 반전했다. 공산당들의 당원과 지지자가 감소했다.

최종적으로 인민전선은 파시즘을 저지하지 못했다. 프랑스와 스페인에서는 파시즘에 권력을 내 주는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미국에서는 공산당이 민주당의 루스벨트를 지지해 최종 독립적인 정당 건설 전망을 포기하면서 우울한 결말을 맞이했다.

인민전선의 운명은 그래서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였던 생 쥐스트의 예언, 곧 “혁명을 절반만 성공시키는 사람은 자기 무덤을 파는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 주는 사례가 됐다.

입력 2010-11-25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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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전선의 역사적 경험에서 배운다 ②

재앙으로 끝난 1936년 프랑스의 계급연합

박건희

1930년대는 위기의 시대였다. 경제는 대공황에 허우적댔고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파시스트가 권력을 잡았다. 독일의 히틀러가 군비를 늘리며 세계대전 위험이 높아져 갔다.

프랑스도 혼란에 빠졌다. 정부 정책으로 말미암아 노동자 · 농민과 중간계급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다. 이 상황에서 극우파들도 세를 늘려갔다. 극우단체 회원이 1백만 명에 이를 정도로 프랑스에서 파시즘의 위협은 실질적이었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잡은 것에 한껏 고무된 이들은 1934년 2월 6일 의사당에서 무력 시위를 벌였다. 이 때문에 급진당(이름과 다르게 전혀 급진적이지 않은 중간계급 기반의 친자본가 정당이었다) 달라디에 정부는 사실상 강제로 퇴진당하고 우파 정부가 들어섰다. 

노동자들은 저항에 나서기 시작했다. 프랑스노동총동맹(CGT)은 2월 12일 하루 총파업을 호소하고 사회당도 시위를 조직하기로 했다. 굼떴지만 공산당도 따로 시위를 준비했다. 당일 노동자 1백만 명이 파리 시내를 뒤덮으며 파시즘에 맞섰다. 

따로 행진을 시작한 사회당과 공산당 대열이 행진 과정에서 합쳐지자 노동자들은 한목소리로 반파시스트 구호를 외치며 하나가 됐다. “이런 조우가 기뻐 날뛸 것 같은 열광을 촉발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단결! 단결!’의 박수갈채와 구호들과 함성들.”

노동자들은 단결을 원했고, 정말이지 단결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미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의 재앙적인 정책(3기 ‘초좌익주의’)으로 독일 공산당은 사회당을 파시스트와 다르지 않은 ‘사회파시스트’라 규정하고는 공동투쟁을 거부한 바 있다. 이 때문에 히틀러는 손쉽게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 이런 재앙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공동전선 즉, 노동자 계급의 단결된 투쟁이 절실했다. 

파시즘의 위협 앞에서 프랑스 좌파는 단결했다. 그런데 문제는 단결의 범위가 노동자 정당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공산당과 사회당뿐 아니라 중간계급 정당인 급진당도 연합을 한 인민전선이 결성됐다. 파시즘에 맞서려면 계급을 뛰어넘는 광범한 연합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한편 히틀러의 권력 장악에 위협을 느낀 소련 지배자들은 영국 · 프랑스와 군사적 동맹을 맺어 독일을 견제하려 했다. 그래서 1935년에 코민테른은 “평화를 지키고 전쟁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통일된 인민전선”을 채택했다. 코민테른이 애초 표방한 세계 혁명은 온데간데없고 소련 방위만 남은 것이다. 

코민테른 총서기 디미트로프는 자본가 계급을 파시즘에 가까운 분파와 ‘민주’적인 분파로 나누고 ‘민주적’ 자본가들과 동맹을 주장하고 나섰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1936년 5월 선거에 공산당은 “강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프랑스를 위해”라는 두루뭉술하고 민족주의적인 구호로 참가했다. 

이 선거에서 인민전선은 큰 승리를 거둔다. 사회당은 97석에서 1백47석으로, 공산당은 10석에서 72석으로 의석을 크게 늘렸다. 급진당만 1백59석에서 1백6석으로 줄었다.

인민전선의 승리로 사회당 당수 레옹 블룸이 새 총리가 됐지만, 공산당은 장관을 배정받지 못했다. 블룸과 스탈린은 ‘빨갱이’를 장관에 앉혀 프랑스 지배계급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1936년 6월 프랑스 총파업  이 거대한 투쟁에서 계급연합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를 타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잠재웠다. 

선거에서 좌파가 선전하고 제한적으로 경제가 회복하자 노동자들은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블룸이 총리에 취임하기도 전인 5월부터 파업 물결이 일었다.

파업은 기계공업 부문에서 모든 산업 분야로,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초콜릿 공장, 인쇄소, 호텔, 식당, 극장, 자물쇠 공장, 백화점 등 노동조합이 취약한 곳까지 파업이 확산됐다. 6월에는 프랑스 전체 노동자의 4분의 1인 2백만 명이 파업에 참가했다. 1871년 파리 코뮌 이후 최대 규모의 노동자 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파업 가운데 4분의 3은 점거파업이었다. 요구안을 정하기도 전에 점거부터 들어갈 정도로 전투적인 투쟁에 사장들은 경악했다. 노동자들은 사장을 감금하기도 하고, 공장에 붉은 깃발을 내걸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게임을 즐기고 노래를 부르며 파업을 즐겼다. 

당시 사회당 좌파 마르소 피베르는 이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실제 노동자들은 사회 전체를 바꾸고 싶어 했다. 

노동조합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던 사장들은 결국 6월 7일 마티뇽 협정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주 40시간 노동제(당시로는 획기적이었다), 2주 유급휴가제, 상당한 수준의 임금 인상, CGT 인정 등 대대적인 양보를 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인민전선 지도부는 이런 투쟁을 고무하기는커녕 파업을 끝내고 투쟁을 정리하려 했다. 인민전선 정부의 내무장관 로제 살랑그로는 이렇게 말했다. “나로서는 질서와 무정부 상태 사이에서 이미 선택을 했다. 나는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질서를 유지할 것이다.”

인민전선 정부 총리 레옹 블룸  기업주들은 그를 구세주처럼 여겼다.

 총리였던 블룸은 나중에 당시 사장들이 자신을 ‘구세주’처럼 여겼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사장들의 진짜 ‘구세주’는 공산당 지도부였다. 

노동자들이 이미 따낸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파업을 계속하자 공산당 지도부는 본격적으로 투쟁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파업과 투쟁이 계속돼 소련의 동맹인 프랑스 지배자들을 더욱 곤경으로 몰아넣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공산당 서기장 모리스 토레즈는 “파업을 시작했으면 끝낼 줄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공산당 일간지 <뤼마니떼>는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며 “공산당은 질서를 의미한다”고 선언했다.

엉뚱한 데

새롭게 투쟁에 참가한 노동자들은 공산당을 자신들의 정당으로 생각했다. 1936년 초 9만 명이던 공산당 당원 수는 거대한 파업을 거치면서 폭발적으로 늘어나 연말에 29만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산당 지도부는 자신들이 얻은 권위와 노동자들의 신뢰를 엉뚱한 데다 썼다. 노동자 계급의 잠재력을 한껏 끌어올려 투쟁을 전진시키는 게 아니라 투쟁을 통제하고 결국 잠재우는 데 이용한 것이다. 

공산당 지도부는 한발 더 나아가 민족주의 관점에서 독일에 반대하는 일부 우파까지 포괄하는 ‘프랑스인 전선’을 구성하자고 했다. 

인민전선이라는 계급연합 정책에 매인 공산당은 공공연하게 자본가 편을 든 카미유 쇼탕이 총리가 됐을 때도 지지했다. 쇼탕 이후 더 보수적인 달라디에가 총리가 됐을 때도 지지했다. 

공산당이 계급연합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이, 지배자들은 반격을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개혁 가운데 하나였던 주 40시간 노동제를 되돌리려 했다.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이에 저항했지만 처참하게 패배했다. 경찰은 체포한 노동자들에게 파시스트 식 경례를 한 채 “경찰 만세”를 외치라고 강요하기까지 했다. 

이 패배 후 자행된 대규모 해고와 탄압으로 노동자 운동은 완전히 후퇴했다. 1936년 파업 시작 전 78만 명이던 CGT 조합원 수가 파업 후 4백만 명으로 늘었다가 이런 탄압을 거치며 다시 1백만 명으로 줄었다. 

나아가 1939년 9월 말 의회는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1940년 6월에 의회는 앙리 페탱에게 독재권을 주기로 했고, 페탱은 파시스트들이 포함된 정부를 구성해 독일이 프랑스 북쪽 절반을 점령하는 데 협력했다.

혁명세력의 마비

프랑스에서 이 같은 재앙을 낳은 인민전선은 우리에게 뼈아픈 교훈을 준다.

첫째, 계급연합으로 우파나 파시즘의 준동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히틀러와의 협잡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급진당 소속 총리 달라디에였다. 페탱에 권력을 줘 나치가 득세할 수 있게 한 것도 인민전선으로 선출된 의회였다. 

1936년 여름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공화국을 지키려고 스페인 정부는 바로 프랑스에 무기 지원을 요청했다. 

프랑스 사회당 소속 총리 블룸은 무기를 지원하고 싶었지만, 급진당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결국 블룸은 ‘비개입’ 정책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은 이에 강력히 반발했지만, 인민전선을 깨지 않으려다 보니 별다른 것을 할 수 없었다.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가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군대가 일으킨 반란을 못 본 체한 덕분에 파시스트들은 독일과 이탈리아 무기로 무장 할 수 있었다.(스페인 내부의 인민전선이 내전 패배에 끼친 영향은 다음 호에서 다룰 것이다.)

둘째, 인민전선은 노동자 투쟁을 억누르며 그 잠재력과 가능성을 갉아먹었다. 

실제 프랑스 공산당의 활동과 주장은 인민전선이 설정한 한계 즉, 급진당이 용인할 수 있는 한계에만 머물렀다. 이는 노동자 계급의 패배와 사기저하로 이어졌다.  

프랑스 노동자들의 거대한 총파업은 분명히 자본주의를 타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줬다. 그러나 인민전선에 매인 공산당은 혁명이 아닌 ‘질서’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 혁명을 지도했던 트로츠키는 인민전선을 이렇게 비판했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정치연합은 그 기본 이해관계가 1백80도 반대인 두 계급 사이의 동맹인지라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세력을 마비시키는 데에만 이바지할 뿐이다.”

재앙으로 끝난 인민전선 전략을 민주노동당 지도부를 비롯해 한국의 진보진영 일부가 여전히 추구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민주노동당은 1930년대 프랑스 공산당에 견주면 영향력이 현저히 떨어지므로 민주당 바짓가랑이를 잡다 뒤통수만 맞고 비웃음거리로 전락할 수 있다). 

노동자 정당이 취해야 할 태도는 계급 동맹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공동전선 즉, 노동자 계급 내의 동맹을 통한 공동 투쟁이다. 

프랑스 인민전선을 두고 한 트로츠키의 말은 70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 여전히 유효하다. 

“노동계급 정당은 파산한 정치꾼 정당을 구하려는 가망 없는 노력에 정신을 쏟아서는 안 된다. 이와 반대로 모든 힘을 다해 대중이 급진당의 영향력에서 해방되는 과정을 가속화시켜야 한다.”

입력 2010-12-23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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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전선의 역사적 경험에서 배운다 ③

스페인에서 노동자 혁명의 목을 졸라 버린 인민전선

김문성

1936년, 프랑스에서 노동계급의 전진을 가로막았던 계급동맹 전략이 스페인에서는 노동자 혁명의 목을 직접 졸랐다.

20세기 초 스페인은 낡은 봉건적 잔재가 있었고 산업 발전이 미약했다. 봉건 영주와 귀족들은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고 매달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신흥 산업 자본가들이 봉건 지배계급과 단절할 의지나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저항에 나서는 것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봉건 영주와 귀족들과 기꺼이 손을 잡았다.  

그래서 스페인에서는 낡은 왕정 체제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스페인 노동계급은 20세기 초부터 혁명적 잠재력을 드러냈다. 

1909년에는 모로코전쟁에 반대하는 파업이 일어났다. 1917년에는 러시아 혁명이 스페인에 저항의 불바람을 몰고 왔다. 총파업이 스페인 사회를 흔들었다. 

이 운동은 3년 만에 진압되고 1923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군사독재가 시작됐다. 취약한 경제 때문에 독재는 오래 가지 못하고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만다. 

스페인 민중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화정을 요구하며 저항에 나섰다. 알폰소 13세가 도망가고 1931년 공화국이 선포됐다. 신흥 자본가들이 권력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집권한 ‘공화주의자’들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 주지도,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을 높이지도 못했다. 여전히 봉건적 지배자 노릇을 하는 교회를 억압하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스페인은 1932년부터 경제 위기로 빠져들었다. 

이 위기를 틈타 우익들은 더 우경화한 우익연합을 결성해 1933년에 집권했다. 우익 세력들은 3년간 시늉만 낸 개혁조차 뒤엎으려 했다.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에서 광부들이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하고 봉기를 일으키며 저항했다. 

저항은 갈수록 격렬해졌고 그러자 우익들 사이에선 더 극단적인 파시스트들이 성장했다. 결국 1936년 2월 선거에서 우익연합을 이기고자 인민전선이 결성됐다. 

우익연합의 반동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공화주의 자본가들과 스페인 좌파들이 동맹을 맺은 것이다. 

인민전선에는 중도우파 자본가당인 공화연합부터 개혁주의 정당인 사회당(PSOE)과 이 당과 연계된 노동총동맹(UGT), 그리고 극좌파인 공산당과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이 모두 참여했다. 

그러나 우익을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계급을 뛰어 넘어 구성된 연합체가 진정으로 우익을 저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곧 드러나기 시작했다. 

반파시즘 투쟁의 동학

인민전선 내각의 자본가 장관들은 온건한 개혁 조처조차 우익과 기업주들이 반발하면 뒤로 물러섰다. 

연합의 유지를 위해 좌파 정당들과 장관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감을 얻은 우익 군부와 봉건적 교회, 왕정 복고파와 파시스트들은 마침내 7월 17일에 프랑코가 이끄는 군사쿠데타를 시작했다. 

인민전선 정부는 불법 쿠데타를 두고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정부의 확신 없는 태도는 쿠데타 모의에 참가하지 않았던 군부와 지방정부들을 동요시켰다. 

자본가들도 갈수록 프랑코 독재를 통해 스페인 자본주의가 처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게 낫다는 방향으로 이끌리기 시작했다. 

공장과 토지의 옛 주인들은 도망가거나, 소유권은 보장해 줄 거라는 기대감으로 파시스트 편에 섰다.  

결국 단숨에 수도 마드리드를 점령하려던 프랑코의 파시스트 군대를 막아선 것은 인민전선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와 무토지 농민들이었다. 

카탈루냐, 발렌시아 등 지역에서 노동자들은  스스로 저항을 조직했다. 

저항에 나선 노동자와 농민 들은 도시와 공장, 토지를 자주적으로 통제 · 관리하기 시작했다. 

기층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반파시즘 투쟁은 스페인에서 새로운 권력 수립, 즉 노동자 혁명을 일정에 올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공산당의 계급동맹 정책이 문제가 됐다. 

POUM

이 당의 지도자 안드레스 닌은 트로츠키가 이끄는 국제 좌익반대파 소속이었으나 결별하면서 지지자들과 POUM을 결성했다. 이 당은 스탈린의 반혁명 정책에는 반대했으나 혁명적 경향과 개혁주의 경향 사이에서 동요하다가 투쟁의 기회를 놓쳤다.

FAI

무정부주의자들의 정치단체로 1백만 명이 넘는 전국노동연합(CNT)을 지도했다. 충심으로 혁명을 지지했으며 가장 전투적인 반파시즘 투사들이었다. 그러나 전국적인 대안 권력을 세우는 일에 기권해 인민전선 정부를 대체할 정치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공산당은 자본가계급과 동맹해서 인민전선 정부를 유지한다는 목적에 매달리며 오히려 노동자 혁명의 가능성을 가라앉히는 구실을 했다. 

공산당은 ‘혁명은 나중이다’ 하며 노동자 · 농민에게 공장 · 토지 점거와 자주 관리를 그만두라고 요구했다. 

자본가들과 동맹을 유지하려, 적당한 수준에서 투쟁을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재앙적 정책은 혁명적 열기로 달아오르던 스페인 노동자 · 농민의 투쟁에 찬물을 끼얹고 김을 빼는 구실을 했다. 

결국 기층의 활력이 꺾이자 인민전선 정부는 더 노골적으로 혁명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좌파 정당들은 불법화되고 그 지도자들은 처형당하거나 살해됐다. 

스페인 혁명의 패배는 세계사의 줄기를 바꾸는 패배였다. 

1939년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군사 반란이 성공하자마자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제2차세계대전의 도화선을 당겼다. 스페인에서는 인민전선 정부 지지자를 포함해 수십만 명이 학살됐고, 노동계급 투사 한 세대가 절멸했다. 

혁명이냐, 파시즘이냐

 

노동자들이 너무 급진적으로 행동해서 반파시즘 진영이 분열하고 자본가들이 도망간 것이 패인은 아닐까?

반파시즘 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한 과정을 살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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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과 인민전선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노선에서 핵심은 혁명의 국제적 확산을 포기하고 ‘사회주의 모국’인 소련을 군사적으로 보호하는 것이었다.

코민테른은 이를 위해 각국 공산당을 동원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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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1-06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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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트로츠키의 혁명적 유산 ②

트로츠키의 반스탈린 투쟁

존 몰리뉴 (영국 포츠머스대학 교수,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와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의 저자)

레온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반혁명에 맞서 싸웠다. 이 싸움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지 6년 후인 1923년부터 시작됐다.

1927년 스탈린은 승리를 거뒀고 트로츠키는 공산당에서 쫓겨났다. 그는 1928년 중국 국경 근처의 알마 아타로 유배됐고, 1929년 러시아에서 추방됐다.

트로츠키의 반스탈린 투쟁에는 세 가지 주요 쟁점이 있었다. 첫째는 노동자 민주주의였다. 트로츠키와 그의 지지자들인 좌익반대파는 공산당과 소비에트 국가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옹호했다.

반대로, 스탈린은 자신이 우두머리인 성장하는 관료들의 권력을 강화하려 애썼다.

둘째 쟁점은 경제 정책이었다. 트로츠키는 노동계급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산업화 계획을 주장했다. 노동계급은 혁명을 방어하기 위한 처절한 내전에서 커다란 희생을 치르며 약화된 상태였다.

애초에 스탈린은 공업화의 길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1928년 스탈린은 좌익반대파를 패배시킨 후 노동자들을 엄청나게 착취하는 방식으로 급격한 공업화를 시작했다.

셋째 쟁점은 일국사회주의였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사회주의를 쟁취하려는 투쟁은 국제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볼셰비키당은 러시아 혁명을 주도했다. 볼셰비키 당원들은 러시아 혁명이 생존하려면 다른 나라, 특히 독일로 혁명이 확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4년 스탈린은 이것에 반대해 일국(러시아)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는 일국사회주의가 마르크스주의와 국제주의를 배신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보통 역사책들은 트로츠키와 스탈린 사이의 투쟁을 개인적 권력 투쟁으로 그리거나, 성격과 사상이 다른 개인들 사이의 갈등으로 본다.

그러나 사실 이 투쟁은 서로 다른 사회세력들 사이의 투쟁이었다.

트로츠키는 1917년 혁명으로 탄생한 노동자권력의 잔존물을 대변했다. 스탈린은 새로운 지배계급이 되고 있던 관료층의 화신이었다.

이 싸움에서 스탈린이 승리한 것은 개인적 권위나 속임수 때문이 아니었다. 러시아 노동계급의 힘이 소진한 상태에서 스탈린이 더 강력한 사회세력을 대변했기 때문이었다.

트로츠키의 저항은 패배했다. 그러나 그의 투쟁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명예를 지켰다.

트로츠키의 투쟁은 사회주의를 관료적 전제와 전체주의적 독재로 왜곡하는 데 맞서 민주주의, 자유, 평등 사회로서의 사회주의의 이상을 지키는 데 일조했다.

1930년대 스탈린의 독재는 괴물같이 행동했다. 평범한 노동자와 농민 수백만 명이 시베리아로 보내져 그곳에서 죽었다. 스탈린 체제의 눈밖에 난 옛 볼셰비키들은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 - 파시스트 첩자, 혹은 공장에서 사보타주 활동 - 를 ‘고백’해야 했다. 1917년 혁명을 주도했던 거의 모든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제거됐다.

1936년 트로츠키는 《배반당한 혁명》에서 스탈린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사적 소유가 아니라 국유에 기초를 두지만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스탈린주의 정권은 새로운 현상이었고, 내 생각에 트로츠키는 그것을 철저히 분석하는 데 실패했다.

트로츠키는 당시 러시아가 타락했지만 여전히 노동자 국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러시아는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인 국가자본주의로 변신했다.

그럼에도 트로츠키는 당시 러시아를 사회주의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는 스탈린주의가 레닌주의나 볼셰비즘의 계승자가 아니라 반혁명 세력임을 입증했다.

그는 볼셰비즘과 스탈린주의 사이에는 “피의 강물”이 흐른다고 말했다.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주의나 혁명의 논리적, 혹은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러시아 혁명의 고립, 다른 나라로 혁명 확산의 실패, 러시아 노동계급 취약성이 낳은 것이었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트로츠키의 분석은 혁명 운동의 미래에 대단히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의 분석은 오늘날에도 중요하다. 우리 지배자들은 여전히 러시아 혁명의 좌절을 근거로 사회주의가 성공할 수 없거나 사회주의는 독재를 낳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망명 중에도 트로츠키는 국제 노동자 혁명이 인류의 미래를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

입력 2011-01-20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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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트로츠키의 혁명적 유산

미래를 위해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지켜내다

존 몰리뉴 (영국 포츠머스대학 교수,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저자)

스탈린주의에 맞선 투쟁은 러시아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에서 스탈린주의가 반혁명적 구실을 한다는 점을 간파했기 때문에 국제적으로도 동일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주의자들이 통제하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정책들을 비판했고, 나중에 제4인터내셔널이라고 불리는 혁명적 대안을 건설하려 노력했다. 

러시아 지도자들은 ‘일국사회주의’란 관념 때문에 해외 공산당들을 그 나라의 혁명적 주체로 보지 않는다고 트로츠키는 지적했다. 

오히려, 러시아 지도자들은 해외 공산당들을 소련의 “국경 수비대”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 공산당들은 주로 러시아에 외부 세력이 개입하는 것을 막아 줄 ‘친구’ ― 특히 자본가와 노조 관료 들 ― 를 확보하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이 때문에 스탈린은 1920년대 터져 나온 두 거대한 노동계급 투쟁 ― 영국과 중국 투쟁 ― 을 배신했다.  

1926년 영국에서 총파업이 벌어졌을 때 노동조합회의(TUC) 지도자들은 이 투쟁을 배신했다. 그들은 파업 시작 9일 뒤 파업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고 아직 아무런 양보를 얻지 못했음에도 파업 중단을 선언했다.  

영국 공산당은 이런 배신을 사전에 경고하거나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조직하지 못했다. 영국 공산당이 당시 러시아 정부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 노조 지도자들을 비판하길 꺼렸기 때문이었다. 

1925~27년 중국에서 혁명적 노동계급 운동이 폭발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이 이 운동을 지도했다. 

스탈린은 중국 공산당에게 노동자 운동을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에 종속시키라고 명령했다. 스탈린은 중국에서는 자본가 권력이 가능하지 노동자 권력 탄생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엄청난 재앙을 초래했다. 1927년 4월 국민당은 자기 동맹에게 총부리를 돌리고 대학살극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 활동가들뿐 아니라 최고의 노동계급 투사들도 목숨을 잃었다.  

트로츠키는 이 두 사례를 상세하게 비판했다. 

“사회파시스트”

그러나 파시즘에 대한 스탈린주의 정책은 앞선 사례들보다 더 큰 재앙을 낳았다. 

1920년대 말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을 때, 스탈린은 러시아에서 강제 공업화와 농업 집산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노동자 · 농민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재앙적 정책의 진면모를 감추려고 스탈린은 사회주의로의 즉각 이행 같은 극‘좌파’적 미사여구를 남발했다. 

또한, 스탈린은 공산주의자들이 사민당 공격에 집중해야 한다며, 말로만 좌파적인 전략을 채택했다.

스탈린의 명령으로 독일 공산당은 독일 사민당을 “사회파시스트들”이라고 불렀다. 독일 공산당은 나치 위협에 맞서 사민당과 손잡기를 거부했다. 

그 결과, 독일 노동계급은 분열해, 효과적인 저항을 벌일 수 없었다. 히틀러는 1933년 큰 저항 없이 권력을 잡았다. 

독일 노동자 조직들이 분쇄됐고, 전 인류가 그 대가를 치렀다. 

트로츠키는 터키 망명 중에 작성한 몇 편의 탁월한 글에서 당면한 위험을 경고하고 파시즘에 맞선 노동자 공동전선을 꾸려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 위기의 산물인 파시즘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발전시켰다. 그의 파시즘 분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스탈린은 1933년부터 나치가 위협임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태도를 1백80도 바꿔 영국과 프랑스 정부와 동맹을 결성하려 했다.

스탈린은 각국 공산당들이 ‘인민전선’을 결성하고, 노동자 운동이 자본가들이 수용할 수 있는 방법과 전술을 채택하라고 종용했다. 

이것은 스페인에서 또 다른 재앙을 낳았다. 1936년 장군 프랑코가 파시스트 쿠데타를 일으키자 노동계급은 봉기로 맞섰다. 

스페인 공산주의자들은 혁명가들을 살해하는 것을 포함해 온갖 방법으로 이 혁명을 억누르려고 노력했다. 

노동자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농민들이 결집해 토지 몰수에 나서지 못하면서 결국 파시스트들이 승리했다.    

이 기간에 트로츠키와 그의 가족들은 스탈린주의자들의 잔인한 중상모략에 시달렸고, 서방 엘리트들은 그를 고립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지키려는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고 진정한 혁명 운동을 건설하려 애썼다. 

트로츠키는 자신이 1930년대에 쓴 것이 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저작들이라고 적었다. 왜냐하면 이 저작들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이 작업을 해냈다. 오늘날 우리가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고 진정한 사회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벌일 때, 우리는 트로츠키의 어깨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입력 2011-02-24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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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전선의 역사적 경험에서 배운다 ④

해방 직후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전선론의 비극

한규한

해방 이후 한국은 온갖 모순이 중첩돼 왔다. 그중 하나는 제국주의 세력이 한반도를 분단시켰다는 것이다. 당시 좌익과 우익은 각각 소련과 미국의 힘에 편승하려 했고, 결국 이것이 통일된 독립국가를 건설하지 못하게 했다는 인식이 광범하다.

이런 인식은 통일 독립국가를 건설하려면 좌익과 우익이 협력을 해야 하고, 모든 계급이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지 말고 민족적 대의 앞에 서로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여전히 한국이 분단 국가라는 사실이 해방 당시 좌우합작과 계급협력을 할 필요성이 있었다는 주장을 꽤 설득력 있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생각은 아마 상식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오늘날 당시 여운형의 좌우합작 운동을 지지하는 정치적 스펙트럼은, 대다수 자주파, 좌파 민족주의자(대표적으로 서중석 교수), 진보신당의 일부 PD 이론가(장석준)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다.

1946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 미국 대표와 함께 있는 여운형  

해방 정국에서 좌파들은 제국주의 세력에 기대 독립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전선론으로 표현된 계급협력 노선은 결과적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격렬한 좌우 대립, 특히 공산당의 ‘비타협성’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그러나 분단을 저지하고, 친일 · 반동 세력을 청산하고, 사회 · 경제적 모순을 과감하게 개혁하는 데 좌우합작과 계급협력이 효과적이었을까? 사실, 당시 역사는 오히려 계급협력과 민족단결 논리가 이런 과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효과적이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이를 간단히 살펴보겠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조선은 식민지에서 해방됐다. 식민지 시절 억눌렸던 조선 민중은 새로운 독립국가에서는 마땅히 과거 일제에 부역했던 자들을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민중은 새로운 독립국가가 정치적으로 자주적이어야 할 뿐 아니라, 오랜 사회 경제적 모순을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군산 종연조선 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해방은 누구를 위한 해방 … 이냐? 노동자에게서 직장을 빼앗고 빵을 주지 못하는 독립이라면 무슨 기쁨이 있고 무슨 의의가 있으랴. … 노동자 대중에게 완전한 해방을 가져오는 그날을 위하여 끝까지 싸우기를 여기에 맹서한다.” 

스탈린의 국제 노선

그들은 이런 과제를 누가 대신해 줄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공장과 작업장을 접수해 스스로 운영하려 했다. 일본인 소유 작업장은 물론 친일 조선인 자본가 소유의 작업장도 접수 대상이었다. 가혹한 식민지 소작제에 시달렸던 소작농민들도 대지주에 맞서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일본을 대신해 조선을 점령한 미국과 소련 양대 제국주의는 조선 민중이 스스로 민족 독립 국가를 건설할 권리를 부정했고, 노동자와 빈농이 급진화하는 것을 내버려 두지도 않았다. 

안타깝게도 당시 좌파들은 제국주의적 점령에 맞서 저항하지 않았다. 여운형 등의 중도좌파든 공산당이든, 거의 모든 좌파들이 제국주의 세력을 활용해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조선공산당은 당시 스탈린의 국제노선에 충실했다. 제2차세계대전 직후 미국과 소련의 대립은 아직 본격화하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의 전후 세력권 조정 협상은 끝나지 않았고, 이를 위해 소련과 미국의 ‘협력’ 관계는 일정 기간 유지됐다. 따라서 각국의 공산당들은 이 협력 관계를 해칠 급진적 주장과 실천을 회피해야 했다.

스탈린의 국제노선을 따라 조선공산당은 당면 혁명의 과제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제한했다. “조선의 객관적 정세는 우리로 하여금 무조건하고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의 제 과업의 수행을 강경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요 조선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단계는 아직 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힘있게 주장한다.”

조선공산당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실현하기 위해 아래로부터의 힘에 의존한 것도 아니었다. 조선공산당은 당시 미국과 소련의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고, 이 국가가 수행할 각종 개혁 조처들을 미국과 소련이 지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스탈린-루즈벨트의 국제혁명 노선’ 덕분에 “조선과 같은 데에 있어서는 평화적으로 혁명의 성공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공산당은 소련군만 아니라 미군도 “해방자”로 환영했다. 미국을 “우리 민족의 직접 원조자로서 해방자로서 … 우리의 역사에 빛날” 것으로 칭송했다.

조선공산당은 새로 건설될 국가는 좌우합작, 민족통일전선, 즉 계급연합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언제든가 민족적 범죄자인 친일 분자만을 제하고는 누구든지 환영한다.”

그래서 조선공산당은 이승만을 그들이 선포한 인민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삼으려 했다. 심지어 공산당은 자신이 ‘반동적 민족자본가’로 규정했던 김성수를 내각에 영입하려고까지 했다. 

이승만은 공산당의 제안을 단칼에 거부했다. 오히려 공산당에게 민족단결을 해칠 행위는 하지 말라고 훈계했다. “급격한 분자가 선두에 나서서 농민이 추수를 못하게 하고 공장에서 동맹파업을 일으키는 일도 있다.… 국체를 회복하여 국토를 찾자는 일점에 대동단결치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공산당은 합작의 파트너를 김구로 바꿨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조선공산당이 민족 단결을 내세우며 우파와 ‘상층 통일 전선’을 추구하는 것에 노동자 · 농민 운동 지도부도 보조를 맞췄다. 당시 노동조합 전국조직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와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 지도부는 공산당이 통제했다. 전평은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는 데서 계급대립이 장애물이라고 말했다. “1)도시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이요, 2)농촌에서 농민과 지주의 대립이다. 이 두 모순을 잘 조정하는 것이 통일전선의 기초를 쌓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전평은 투쟁을 자제하고 “양심적 민족자본가”와 협력해 생산에 힘쓰라고 강조했다. 노동자들의 공장관리운동 역시 급진적 방향으로 발전시키기보다는 자본가와 공동관리를 강조했다. 

해방 직후 분출했던 농민들의 토지 접수 시도는 제지됐다. 또, 공산당은 “일제 및 비친일적 대지주에 대한 소작료 불납 투쟁을 극좌적 오류”라고 규정해, 농민 운동을 소작료 인하 운동으로 억제했다.

투쟁 자제

민족통일전선을 위해 계급 대립을 조정해야 한다는 생각은 일종의 자기기만이었다. 자본가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조선인 자본가들은 일본 제국주의 질서에 편승하거나 통합돼야만 자본을 모을 수 있었다. 

조선인 자본가들은 해방 뒤 친일잔재 청산이라는 대중의 요구가 필연적으로 자신의 사회 · 경제적 기반을 위협할 것임을 거의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고, 이를 막아 줄 미군정과 우익 폭력집단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트로츠키는 스페인 혁명의 경험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는데, 이는 조선공산당의 계급연합 추구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매우 놀라운 것은 스페인 인민전선은 실제로 힘의 사변형조차 없었다는 사실이다. 자본가계급의 자리에는 그 그림자뿐이었다. 스페인 자본가계급은 스탈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를 매개로 인민전선에 참여하라고 귀찮게 조르지 않고도 노동자계급을 자신에게 종속시켰다. 온갖 정치적 색조를 띤 착취자들의 압도 다수는 공공연하게 프랑코 진영으로 넘어갔다.”

따라서 공산당과 전평이 추진한 민족통일전선은 사실상 공산당 지지 세력의 결집체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이 민족자본가의 그림자와 연합을 하려는 동안, 미군정과 우익들은 노동자와 빈농의 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해방 직후 궁지에 몰려 있던 친일 · 반동 세력들은 미군의 점령과 이에 편승한 우익 폭력, 그리고 좌파의 계급타협 정책 덕분에 숨을 돌릴 여유를 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 등장할 분단 국가에서 좌익과 민중운동을 절멸시키리라 결심했다.

조선공산당의 태도는 1946년 7월 들어 변한다. 이른바 ‘신전술’ 채택이다. 즉 그동안 미군정과 우익의 폭력에 대한 최소 저항 노선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방어투쟁을 전개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산당이 신전술을 채택했다고 해서 미국과 전면적으로 대립하거나, 좌우합작을 원천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공산당은 여전히 소련과 미국 간 협의(미소공동위원회)에 매달렸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국 최종 결렬됐을 때, 공산당의 운명은 거의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국과 우익은 자신들의 분단 국가를 위협할 모든 잠재 세력을 문자 그대로 척결하려 했다. 공산당은 뒤늦게 모든 힘을 다해 투쟁해 보지만, 세력균형은 이미 매우 불리했다. 공산당의 협조 노선 와중에 노동자, 농민 운동은 탄압으로 상당히 약화됐고, 분단이 기정사실이 되자 상당수 대중은 낙담하고 사기가 떨어졌다. 1948년 제주도에서 벌어진 항쟁은 고립됐고, 미국과 이승만은 주민들을 대량 학살했다.

당시 좌우합작론과 민족통일전선론의 근본적 모순 중 하나는 양대 제국주의에 대한 의존이었다. 여운형과 같은 온건 좌파든, 공산당이든 그들의 프로젝트는 결국 미국과 소련의 협상에 근거한 것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갈라섰을 때, 그들의 노선은 파산할 수밖에 없었다.

좌우합작론과 민족통일전선론에서 더 중요한 모순은 그것이 계급투쟁을 억제하는 구실을 한다는 점이다. 당시 좌파들은 민족 독립국가 건설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면서 계급투쟁을 부차화했다. 이는 민족국가 건설과 계급투쟁을 분리시킨 것이다. 국가 건설은 좌우 합작을 통해,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협상에 따라 건설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계급투쟁을 억제하는 논리는 결국 미군정과 우익을 강화했을 뿐이었다. 좌파가 계급투쟁을 억제하는 틈을 타 우익은 세력을 결집시켰고, 친일 반동 세력은 전열을 재정비했고, 미군정은 각종 노동자 민중 조직을 파괴할 수 있었다.

결국 당시 민중이 요구한 과제들을 해결하는 데서 좌우합작과 계급협조는 전혀 적절하지 않았다. 먼저, 통일 국가 건설이라는 과제를 해결하려면 미국과 소련 점령군에 맞선 투쟁이 필요했다. 둘째, 친일 잔재 청산과 사회 경제적 개혁을 위해서는 조선인 자본가와 대지주, 그리고 우익에 맞선 투쟁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았다. 특히 남한에서 친일 반동 우익 세력은 미국 제국주의에 밀착했고, 미국은 이들을 비호했기 때문이었다.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전선론은 이런 과제를 아래로부터 해결할 수 있는 대안(즉, 연속혁명)을 봉쇄하는 데 일조했을 뿐이다.

입력 2011-06-02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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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민주주의’의 역사 ― 계승할 것이 못 된다

한규한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지난 당대회에서 기존의 급진적 강령을 폐기하고, 이를 ‘진보적 민주주의’로 대체했다. 이를 계기로 민주노동당 안에서는 ‘진보적 민주주의’의 ‘실체(?)’에 대한 논의가 인 바 있다. 

예를 들어 새세상연구소는 《21세기 진보적 민주주의》를 펴냈고, 박경순 부소장은 <진보정치>에 연재 기사를 썼다. 당 게시판에서도 오한강 당원 등이 ‘진보적 민주주의’의 역사적 연원을 따지며, 그 계승을 주장하는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러나 ‘진보적 민주주의’의 역사적 교훈은 오히려 이를 계승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가르쳐 준다. 해방 당시 조선의 ‘진보적 민주주의’론과 오늘날 당권파가 주창하는 ‘진보적 민주주의’론의 세세한 내용은 분명 차이가 있다. 사실, 오늘날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이 과거 공산당의 단계혁명론에 대당하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럽기는 하다. 즉, 과거처럼 다음 단계로나마 사회주의로 이행한다는 전망이 있기는 한 것인지 말이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진보적 민주주의’론의 핵심적인 정신은 여전히 같은데, 그것은 바로 계급 협력과 우경 기회주의라는 점이다. 

‘인민전선 노선의 기원이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레닌은 1917년 ‘4월테제’ 전까지 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구분하는 단계론을 유지했음에도, 부르주아 계급을 동맹 대상으로 삼고자 한 멘셰비키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 후 레닌은 이런 단계론조차 파기하고, 트로츠키가 주장한 연속혁명론과 다르지 않은 실천을 통해 혁명에 성공했다.

‘진보적 민주주의’의 기원은 코민테른 7차대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른바 ‘인민전선’ 전략이다. 당시 스탈린이 인민전선 전략을 제기한 것은 나치의 집권으로 자국의 안보가 위험해 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탈린은 서방 제국주의 국가와 동맹을 해서 나치를 견제하고자 했다. 어떤 면에서 이는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는데, 나치 집권 전에  공산당은 사민당이 ‘사회파시스트’라며 노동자 공동전선을 거부해 히틀러 집권에 일조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인민전선’은 소련의 외교적 이익에 각국 노동계급 운동을 종속, 또는 희생시키는 것이었다. 인민전선 전략 하에서 서방 진영에 속한 노동자 계급은 서방 지배자들을 위협할 언동을 해서는 안 됐다. 그러면 스탈린이 바라는 서방 지배자들과의 동맹은 깨질 것이기 때문이다. 

2차대전 후에도 인민전선 전략은 유지됐다. 미국과의 전후 세력권 조정 협상이 끝나지 않은 이상 서방과 유화 국면은 한동안 유지돼야 했다. 이 때문에 각국 공산당은 종전 후 봇물처럼 터져 나온 각국의 노동계급 투쟁을 억제했다. 당시 준혁명적 상황은 자본주의적 질서로 대체됐고, 공산당의 인민민주주의 노선 · 진보적 민주주의 노선은 이를 돕는 구실을 했다.

계급투쟁을 억제한 ‘진보적 민주주의’론

‘해방’ 직후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김일성과 박헌영을 포함한 거의 모든 좌파들은 ‘진보적 민주주의론’을 내세웠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미국도 동의할 수 있는 수준에서 현단계 조선혁명의 국가건설 이념을 찾아야 한다는 현실노선을 추구하였다.”  

문제는 이 “현실노선”이 정작 현실에서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가다. 당시 ‘진보적 민주주의’는 계급연합을 수반했다. 이에 따라 조선공산당은 향후 건설될 국가 권력을 “민족통일전선”으로 규정했다. 실제 공산당이 선포한 인민공화국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추대했고, ‘반동적 민족자본가’ 김성수조차 교육부장(교육부 장관)에 추대한 바 있다.

이런 계급 타협 정책은 당시 노동자 · 농민의 급진적 진출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은 일본인 자본가 소유의 작업장은 물론 조선인 자본가 소유의 작업장까지 직접 통제하려 했다. 하지만 박헌영과 김일성 모두 이런 흐름을 스탈린의 지침에 따라 ‘좌경’이라며 억제했다. 심지어 공산당이 지도하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는 쟁의부를 폐지하고 산업건설부를 신설해 ‘민족자본가’와 협력을 강조하고 쟁의를 억제했다. 마찬가지로 공산당은 빈농들의 토지 접수 시도도 좌절시켰다. 

문제는 이런 아래로부터 투쟁을 억누른 채 ‘진보적 민주주의’의 핵심 과제라는 반식민, 반봉건이라도 가능했겠냐는 것이다. 친일 · 친미 반동 세력의 사회 경제적 기반의 해체와 노동자 · 빈농의 급진적 투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나중에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물리력 덕분에 토지개혁이 실시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농민들의 자발적 투쟁이 해방 직후보다 갑자기 고양해서 그런 것도, 농민들을 위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핵심은 소련 점령지에서 자신의 체제와 유사한 친소 정권을 복제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스탈린의 ‘진보적 민주주의’는 서방의 지배자와 노동자들을 핵심으로 겨냥한 메시지이기 때문에, 소련이 점령한 점령지 자체에서는 큰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예컨대 ‘진보적 민주주의’의 ‘폭넓은 연대연합’에 따라 북한에서 조만식을 구색맞추기 식으로 연립정권에 참가시켰지만, 이 형식적 연립마저 붕괴되는 데는 채 몇 달도 걸리지 않았다.

소련 점령지에서 벌어진 스탈린주의적 국가자본주의화를 ‘진보적 민주주의→인민민주주의→사회주의’ 발전 단계로 나누어 단계별 의의를 부여하려 시도하는 것은, 아래로부터 노동자 권력이라는 점에서 볼 때는 무의미한 공론일 뿐이다. 그 ‘발전 단계’는 계급투쟁의 양상에 따른 게 아니라, 소련과 미국의 관계가 험악해지는 정도, 그에 따라 소련 점령지가 소련식 체제에 얼마나 근접했는지를 알려 주는 사후 합리화에 불과하다.

어쨌든 공산당이 계급투쟁을 자제시키고 ‘민족 자본가’와 협력을 강조하는 동안, 해방 직후 수세에 몰려 있던 친일 · 친미 반동 세력은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고, 좌익이 민족 단결을 설파하는 동안 노동자 · 농민 운동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돌입할 수 있었다. 해방 직후 좌익에 유리했던 세력 균형추는 급격히 바뀌었다. 1948년 제주 4 · 3항쟁의 비극적 결말은 이때부터 씨가 뿌려졌다고 할 수 있다.

‘진보적 민주주의’론은 과연 자주적 노선인가?

‘진보적 민주주의’는 미제국주의에 대한 타협과 협력 관계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애초부터 ‘자주’와 거리가 멀었다. 당시 모든 좌파들이 미국을 ‘진보적 민주주의’라며 칭송했지만, 미국은 인민위원회, 노동운동, 농민 운동, 좌익 정치 운동을 야만적으로 탄압했다. 조선공산당의 ‘진보적 민주주의’론은 이런 탄압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당의 태도는 이른바 ‘신전술’을 채택하며 바뀌지만, 이것이 전면적인 반미 · 반제국주의 항쟁에 돌입했음을 뜻하지는 않았다. ‘신전술’은 스탈린 · 김일성 · 박헌영 회담의 결과였고 스탈린의 대미 정책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 미소공동위원회는 아직 최종 파탄나지 않은 상태였다. 신전술과 그에 따른 9월 총파업, 10월 인민항쟁은 본질적으로 결렬된 1차 공위를 재개하라는 압력 수단이었다. 

바꿔 말해 미국은 여전히 공위의 주체였고, 공위 결과에 따라 임시정부가 수립될 것이기 때문에 당시 신전술의 ‘반미’는 반쪽짜리 ‘반미’였다. 실제로 항쟁 과정에서 공산당은 미군과 충돌을 극력 회피했다. 그 격렬함에도 불구하고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은 정치적으로 출구가 없는 투쟁이었던 셈이다. 실질적 지배자와 충돌을 회피하는 투쟁이 성공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1946년 1월 ‘진보적 민주주의’를 채택한 좌파는 식민지 민중의 자존심을 짓밟은 신탁통치에 찬성하고 말았다.

당시 조선의 모든 좌파들이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에 맞서 투쟁한 게 아니라, 그들을 해방자로 환영했다. 그리고 이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들의 협상으로 통일 독립 국가를 건설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다. 이 때문에 좌익은 식민지 민중의 자존심을 짓밟은 신탁통치에 찬성하고 말았다.

박헌영, 김일성은 소련의 지령에 따라 신탁통치를 찬성했다. 여운형도 마찬가지로 찬성했다. 신탁 찬성, 즉 제국주의 열강 간 협상으로 통일 자주 국가를 건설하려는 전략 자체에 모두 동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탁 통치를 전제하면서, 즉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적 정책에 맞서지 않으면서 ‘자주’를 말한다는 것은 공허한 것이다. 당시 조선 민중의 역량상 신탁통치를 받아들여야 했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제국주의자들의 논리를 공유하는 것이다. 루스벨트가 신탁통치를 합리화한 논리가 바로 ‘자치능력 없는 국민’이었다.

신탁통치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힘을 기르자는 ‘현실론’은 결국 분단과 한국전쟁의 비극을 막는 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베트남도 ‘진보적 민주주의’를 통한 반제 자주의 사례로 여기기 어렵다. 7차 코민테른의 인민전선 노선은 서방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식민지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에 인민전선 노선이 적용된 결과,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민족해방투쟁은 억제됐다. 베트남 공산당은 ‘프랑스 제국주의 타도’ 같은 슬로건을 내걸지 못했고, 식민 당국에 ‘유화적 태도’를 취해야 했다. (물론 스탈린 · 히틀러 협약 이후 사태는 또 달라진다.)

2차대전 종전 직후 일본의 패망으로 베트남에서 권력은 공산당에게 넘어갈 듯 보였다. 그러나 베트남 공산당은 소련의 지침에 따라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 영국의 주둔을 환영했다. 이를 위해 호치민은 트로츠키주의자와 각종 민족주의 그룹이 이끈 반영국 봉기를 진압했다. 이는 남부 베트남에 제국주의의 교두보를 허용한 꼴이었다. 결국 베트남 민중은 30년간 프랑스와 미국을 상대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뤄야만 했다.

진보당, 민중당,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은 조봉암의 진보당과 1990년대 민중당과 커다란 질적 차이가 있다. 결정적으로 진보당과 민중당에게는 진정한 노동계급적 기반이 없었다. 이 정당들이 실패한 프로젝트로 끝난 데는 이런 계급적 기반의 부재가 큰 몫을 했다. 

이 점에서 민주노동당은 진보당과 민중당에 비해 비할 바 없는 질적 발전이다. 그런데 왜 당권파는 이런 발전을 다시, 심지어 1950년대 진보당 수준으로 되돌리려는가? 백번 양보해 진보당의 다계급적 ‘민중주의 강령’은 지극히 후진적이던 남한 자본주의와 노동계급 운동이 궤멸해 존재감이 없던 당시 상황의 한계에서 나왔다고 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이 그런 상황인가?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과 사회주의 강령을 병기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현재 논쟁의 맥락에서 두 강령의 정신은 절충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한쪽은 계급연합을 추구하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계급 독립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쪽은 사회의 지배적 편견에 굴복하자는 것이고 다른 한쪽은 그 편견을 극복하며 전진하자는 것이다.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은 앞으로 통합 진보정당 건설 과정에서 삭제돼야 한다.

입력 2011-08-04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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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정당과 국민참여당

김하영

본지가 인쇄로 넘어가기 직전인 9월 초까지도 새로운 통합진보정당 추진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 여부가 최종 판가름나게 돼 있던 양당의 임시당대회를 거치고도 마찬가지다. 9 · 4 진보신당 임시당대회에서 통합 합의안[1]이 부결됨으로써 두 당 중심(당 대 당)의 통합이 물 건너간 것은 분명하다. 진보신당 독자파는 끝내 선진 대중의 진보 통합 염원을 외면했다. 실제로 진보 통합이 이뤄진다면 논의 단계보다 훨씬 더 큰 대중적 관심과 기대를 모을 수 있을 텐데, 진보진영은 무상급식 주민 투표 무산 이후 우파의 공세에 반격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서 이런 기회를 일단 잃었다.

진보신당 독자파가 국민참여당(이하 참여당), 패권주의 등 여러 문제를 우려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것은 통합진보정당 내에서 싸워볼 문제였다. 실제로 참여당과의 통합 반대 운동은 민주노동당 안팎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었고,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그 결과 민주노총은 참여당 문제와 관련해 진보신당에게 ‘비토권’을 줬고, 민주노동당 8 · 29 임시대의원대회는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진보신당과 합의 없이 참여당과의 통합을 추진할 수 없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이런 점은 보지 않고 모든 결과가 뻔히 예정돼 있다며 통합을 거부하고 “등대 정당”이 되기로 한 독자파의 선택은 역설이게도 참여당과의 통합을 추진하는 세력에게 탄력을 주게 됐다. 진보정치세력 연대를 위한 교수-연구자 모임(이하 진보교연)이 잘 꼬집었듯이, “그런 등대 정당은 자신의 선명성을 부각시키고 대중을 획득하기 위해 통합진보정당이 그렇게[우경화와 자유주의세력의 이중대화] 발전해 가기를 원할지도 모[른다.]”[2]

한편, 그동안 참여당과의 통합 반대 운동과 진보 선통합파에 밀렸던 민주노동당 당권파 지도자들은 진보신당의 합의안 부결을 명분으로 참여당과의 통합 추진에 속도를 내려 한다. 더는 참여당과의 통합을 말릴 명분이 없을 것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앞서 지적했듯이 당 대 당 통합이 물 건너간 것은 분명하지만, 진보신당의 통합파가 통합진보정당에 합류할 의사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노회찬-심상정-조승수는 “새통추[새로운 통합진보정당 추진위원회]의 합의가 실현[되는] 새로운 통합진보정당 건설”이 “여전히 유효한 우리들의 정치적 목표”라고 밝혔다. 이들은 진보신당에 준하는 협상력을 갖는 세력을 형성해 새로운 통합진보정당 추진에 합류할 태세다.

그러나 만약 민주노동당이 임시당대회에서든 당원 총투표를 통해서든 서둘러 참여당과의 통합 당론을 확정한다면, 진보신당 통합파가 통합진보정당에 합류할 수 있는 길을 차단하는 것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상당히 좁혀놓는 셈이다. 적어도 현재까지 진보신당 통합파는 참여당과의 통합 반대를 표명해 왔는데, 독자파에 명분을 주는 일이 벌어지면 진보신당에서 진보통합 쪽으로의 이탈에 제동이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민주노동당이 당 밖 진보세력과의 통합 없이(새통추의 나머지 단체들은 대개 현재 민주노동당에 속한 단체들이다) 참여당과 통합하게 되면 연합의 시너지 효과는커녕 도리어 전통적인 진보가 사분오열하는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요컨대 참여당 문제는 제대로 된 진보대통합을 하는 데 여전히 가장 큰 걸림돌이다. 엎치락뒤치락 끝에 다행히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통합파 사이의 통합이 먼저 이뤄진다 해도 참여당 문제는 새로운 통합진보정당 창당 이후에도 다시 중요한 쟁점이 될 것이다. 도대체 참여당과의 통합은 왜 그토록 집요하게 시도되고 있고, 왜 문제인가?

NL 경향의 전략

지난 몇 년 동안 진보진영에서 ‘연합정치’라는 말이 대유행했다. ‘야권연대’는 기본이고 연립정부 구상마저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다. 이것이 대전제로 여겨지다 보니 진보대통합도 야권 선거연합과 그에 따른 권력 분점에 유리한 조건을 위한 판짜기로 여겨지는 경항이 강하다. 말하자면, 제1 야당인 민주당과 협상하려면 진보 쪽도 몸집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통합진보정당에 참여당을 포함시키자는 사람들의 셈법도 사실상 이것이다.

민주노동당 당원게시판에 7월 말경 오른 한 글은 이런 셈법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이 글은 “대선 구도에서 진보진영의 독자적 영향력을 확대 · 강화”하려면 “원내교섭단체를 돌파”해야 하는데,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간의 통합 시너지 효과만으로는” 이것이 어려우므로 국민참여당을 진보대통합에 합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3] 이정희-유시민 토크쇼를 기획하고, 《미래의 진보》를 엮어내기도 한 <민중의 소리> 이정무 편집장도 몸집 불리기 셈법을 비교적 솔직히 드러냈다. “이러한 [유시민의] 매력이나 [이정희의] 실리주의가 정치질서 자체의 변화, 즉 양당 체제에서 다당 체제로의 이행을 낳을 수 있느냐[가 남은 과제다.]”[4]

진보진영이 세력을 키울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조급한 마음에 진보진영의 일부로 보기 어려운 세력까지 끌어들인다면 그것이 제대로 된 진보대통합이 될 수 있으며 진정으로 진보진영에 도움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애초 진보대연합은 집권 시절 진보 염원 대중에게 큰 실망을 안겨준 자유주의 세력의 왼쪽에서 진보진영이 진정한 대안을 제시해 강력한 구심점을 제공하자는 취지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노무현 정부 후반에 시작된 이 논의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더욱 탄력을 받았는데, 이 역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불평등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진보진영이 분열해 있어서는 이에 잘 대응할 수 없으므로 단결하자는 것이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뿐 아니라 그 왼쪽의 좌파들까지 단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요컨대 진보대연합은 노동계급(그리고 피억압 민중) 내의 연합을 뜻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부 세력들이 노동계급의 단결을 위한 연대 · 연합 추진을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자들과의 단결과 뒤섞었다. “반MB”를 위해 모두 뭉치자는 것이 카드를 뒤섞은 논리였다. 2009년 한국사회포럼에서 박경순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 부소장은 “이명박 정권은 민간 파시즘 정권이며, 민주주의의 회복이 절대절명의 과제”라며 “각계각층, 대중단체와 정당들의 단결”을 강조했다. 그리고 “단결된 투쟁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5]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반MB연대”는 사안에 따른 전술적 제휴 정도가 아니라 전략적 동맹을 의미한다는 데 진정한 문제가 있다. 최규엽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 소장은 반MB연대의 전략적 위상을 정립하는 데 코민테른의 인민전선이 참고가 된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코민테른에서는 ‘반파쇼인민전선’을 전술단위가 아닌 중간 단계의 전략적 위치로 자리매김한다. 당시 유럽에 창궐하고 있는 파쇼세력들과 싸우기 위해서 자유주의, 사민주의 세력과 단합하는 문제를 투쟁 경험을 통해서 단순히 일시적인 전술 문제로 파악하지 않고 중간 단계의 전략 과제로 설정한 것이다. 분단된 나라에서 ‘반북반평화’와 ‘파쇼성향’을 내포하고 있는 한나라당과의 반대 전선 소위 ‘반MB연대’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참고가 되는 대목이다.[6]

요컨대 ‘반MB연대’를 정권교체/집권과 연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정대연 전 한국진보연대 집행위원장도 ‘중간 단계의 전략 과제’를 “2012년 ‘진보적 민주연립정부’ 수립”이라고[7] 선명하게 제시한 바 있다.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도 2010년 취임과 동시에 “진보적 정권교체”를 강조했다. 지지율이 5퍼센트 안팎인 제도권 정당이[8] 조만간 정권교체를 말한다면 그것이 단독 집권이 아님은 분명하다.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에 따르면, “진보적 집권이란 진보정당이 앞장서 광범한 진보적 연대 전선과 대중단체들과 함께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말한다. … 진보정당은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는 것을 기본 방도로 내세운다. … 연합정부, 공동정부, 단독정부 등 다양한 방식의 집권 형태가 존재할 수 있[다.]”[9]

사실, 인민전선은 민주노동당의 핵심 지도부를 이루고 있는 NL 경향이 오래 전부터 실행하길 원했던 전략이고, 그들의 변혁 단계론과 맞물려 있다. 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가 발행한 《21세기 진보적 민주주의》을 보면 이런 전략이 잘 드러난다. 즉, “탈자본주의적 변혁은 아직 시기상조”이므로 “종속적이며 기형적이며 전근대적인 특성으로부터 오는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당면 주요 과제”라고 한다.[10] 그래서 현 단계는 “진보적 민주주의” 단계다. 이 단계는 “자본주의 틀을 뛰어넘지 않”고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인정하고 보장하고 자본가의 고유한 권리를 인정”한다.[11] 진보적 민주주의를 이루려면 “소수의 사대 매국 세력을 제외”한 모든 계급계층이 동맹해야 하며, “자주적 민주정부는 정권의 형태에서 볼 때 계급적 연대 연합 정권”이다.[12] 이 책은 인민전선 전략의 골동품 냄새를 완화하려고 포스트구조주의의 개념들을 차용해 설명하지만,[13] 여전히 핵심은 계급을 가로지르는 동맹이다.

이미 2001년에 NL 경향은 10년 안에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한다는 전략 목표를 정한 바 있다.[14] 이 전략 목표 수립은 상당한 정책 변화를 수반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전민항쟁’이 아니라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라고 할 수 있다. 공공연하게 개혁주의 노선을 선언한 셈이었다. NL 경향은 6 · 15 선언으로 “통일전선운동의 새로운 지평”, 곧 “합법 공간으로의 진출”이 열렸다며 그 특유의 의기양양한 해설을 내놓았다. 그러나 사실 이 노선 전환은 1990년대 내내 계속된 NL 경향 내의 혼란과 분열의 종착점이었다.[15] 김대중 정부 등장과 남북 당국간 협상은 10년간의 혼란이 개혁주의 방향으로 정리되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정책 변화의 가장 두드러진 양상은 NL 경향의 다수가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것이었다.[16] NL 경향은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전략을 추진할 “광범한 민족민주전선”의 하나로 “민족민주 정당”을 건설하기로 했는데, 이미 민주노동당이 있었으므로 그 안에 들어가 그것을 변화시키는 노선을 택했던 것이다.[17] “민족민주 정당”이란 자주 · 민주 · 통일을 강령으로 표방하는 “통일전선적” 정당을 뜻한다.[18] 즉, 사회주의적 정당이거나 노동계급 정당이어서는 안 되고, “노동자 · 농민 · 중간세력에서 정당 건설 주체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민주노동당 당권파 지도부가 좀더 좌파적이었던 예전 강령을 폐기하고 참여당과의 통합을 적극 추진하는 데는 “중간세력”을 끌어들여 외연을 확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기본에 깔려 있다.

물론 이렇게 얘기한다고 해서 민주노동당이 NL의 프로젝트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의미는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1980~90년대 분출한 민주노조운동에 힘입어 등장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의 정치적 표현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민주노동당이 그 전에 등장했던 ‘독자 정당’들과 달리 한두 번의 선거 실패로 사라지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민주노총에 기반한 당이었기 때문이다. 2001년 NL 경향이 민주노동당으로 대거 입당했을 때는 물론 2008년 분당 이후에도 이 기반 자체가 흔들리지 않았다.

따라서 민주노동당 핵심 지도부가 NL 경향이라 해서 민주노동당을 단일한 NL 당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의 이해관계가 있고(정치 분야에서는 이것도 단일하지 않다), 다함께 같은 혁명적 좌파도 있는데다, NL 경향이라고 다 같은 것도 아니다. 또, 노동조합에 기반이 있는 NL 경향 활동가들은 노동조합 상근간부라는 사회적 지위에서 나오는 (모순된) 압력도 반영하게 돼 있다.

그래서 민주노동당 당권파 지도부는 민주노동당 옛 강령 폐기와 참여당과의 통합 문제에서 모두 민주노동당 대의원들의 만만치 않은 반대에 부딪혔던 것이다. 진보신당 독자파가 모든 결과가 뻔히 예정돼 있다며 싸워볼 생각도 하지 않고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에 반대한 것은 (분당 때도 그랬듯이) 주로 민주노동당의 이런 성격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참여당의 전략

앞서 언급했듯이 민주노동당 핵심 지도부의 전략은 2012년 정권교체를 이루는 데서 주요 세력이 될 수 있도록 참여당과의 통합을 추진하는 것이다. 참여당은 그 지도부가 노무현 정부의 고위 참모 출신이고 당원들은 주로 중간계급(그리고 상층 노동계급 소속 사람들도 적지 않다)인 명백한 친자본주의 정당으로, 다만 이데올로기는 진보적 자유주의(서구식 용어로 ‘사회적 자유주의’)나 ‘신중도’라고 할 수 있다. 참여당은 “노무현 정신”과 “민주정부 10년의 계승”을 표방하는데,[19] 그 시기에 추진된 신자유주의 정책과 제국주의 전쟁 참전으로 고통받은 노동자 · 민중의 선진 부분은 이 당에 대한 정당한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참여당과의 통합을 추진하는 민주노동당 지도자들은 참여당이 “좌클릭”했다거나 “자기 비판”하고 있다고 포장해 주기 바쁘다. 심지어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는 “우리들[민주노동당과 참여당] 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하고 묻고는 “노무현 대통령이 다 털고 가셨다”고까지 말했다.

우리들 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큰 틀에서 생각해보면 ‘노무현 대통령이 다 털고 가셨다.’ 이게 제 판단입니다. 지금 상황의 엄중함을 몸을 던져서 말씀하셨고, 진보의 미래를 어떻게 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하셨지요. 당신이 실제로 국정을 운영하면서 부족했다고 생각한 부분을 이미 평가하신 바 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큰 틀에서 공감한다면, 정책적인 부분에서 의견을 모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해요.[20]

그러나 노무현 사후에 창당한 참여당의 강령을 보더라도 민주노동당과의 정책 차이가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참여당은 “대외개방형 통상국가”를 지향하고, “한미FTA 원안[을] 찬성”하고, “한미 FTA 전체를 부정하는 방향으로 귀결되는 [민주노동당의] 결론은 현실에 대한 고려가 없는 것으로 판단”한다.[21] 참여당은 “친기업”을 표방하고, “국가는 사기업을 국유화할 수 없게 되어 있다”며 민주노동당의 재벌 해체 주장에 반대한다.[22] 또, 민주노동당의 “비정규직 철폐 주장”과 “35시간 노동제”를 비현실적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민주노동당이 “참여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한 감정적 폄훼”를 한다고 비판한다.[23] 국방예산 감축도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한다. 참여당 대표 유시민은 전 독일 녹색당 당수 요슈카 피셔가 인도주의를 내세워 나토 전쟁을 지지했던 예를 들며 제국주의 전쟁 참전의 길을 열어 둔다.[24] 이런 예들을 얼마든지 더 들 수 있다.

참여당이 변한 것이 있다면, “그동안 국가권력의 사용에 있어 리버럴[자유주의자]들이 너무 소극적이었다”고 평가한 것일 듯하다.[25] 유시민은 “정치 권력을 통해 경제 권력을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한가? 통제하게 만들어야 된다”고 말한다.[26] 2005년에 노무현이 “이미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고 한 것에 비춰 보면 호기롭게까지 들린다. 그러나 유시민은 왜 노무현 정부가 기업 권력과 사법부 같은 국가기관에 부딪혀 사소한 개혁도 이루지 못했는지 핵심을 짚지 못한다. 노무현의 실패는 실질적 경제력이 기업주들에게 있고, 기존 국가기구가 중립적이기는커녕 꼭대기부터 말단까지 기존 체제의 유지에 이바지해 합헌적 수단으로는 온건한 개혁도 추진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줬다. 급진적 개혁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2004년 노무현을 탄핵에서 구한 것은 국가기관이 아니라 우파에 맞선 대규모 대중 저항이었다. 변화의 동력도 이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유시민은 마르크스의 국가론이 틀렸다며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회피한다. 그는 “참여 정부가 직면했던 가장 큰 문제는 ‘역량의 부족’”이었는데 당시 진보는 이를 돕기는커녕 이념 공세를 펴 자유주의 정부를 더욱 허약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한다.[27] “혁명이라는 도취에 빠져 있는 사람들” 때문에 보수주의 정당으로 권력이 넘어갔다는 식이다.[28] 그러면서 진보진영이 당락과 관계없이 후보를 세운다면 보수 정당의 승리가 확실하므로 막스 베버의 ‘책임윤리’에 기초해 ‘연합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9] “자유주의와 진보주의 세력이 연합”하면 참여정부가 부딪혔던 역량의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능력 있는 집권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한다.[30] 요컨대 유시민의 국가론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이나 ‘좌클릭’이라기보다 참여정부의 실패를 거듭하지 않으려면 진보가 자유주의와 연합해야 한다는 대진보 협조 요청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박경순 새세상연구소 부소장이 참여당의 통합진보정당 참여 문제를 두고 “원래 개혁정치세력이었던 정치집단이 자신들의 지금까지의 정책과 노선 정체성에 문제가 있었다고 스스로 자기 비판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계급적 정체성과 노선을 진보정당으로 선회하겠다고 할 경우 진보정당은 이를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고[31] 규정하는 것은 단순한 아전인수식 해석일 뿐이다.

이와 정반대로, 지금 유시민이 고개 숙이고 들어오는 것은 그만큼 명확한 목적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이런 목적의식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오히려 진보가 변했다는 점이다. 첫째, 참여당은 “2012년 정권교체”를 바라는데 “작은 진보정당으로는 민주당과 연합하기도 어렵겠다고 생각”해 지방선거 직후 “진보대통합을 검토하기 시작”했다.[32] 여기서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집권 문제에서 민주노동당이 보인 변화다. 유시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진보대통합을 하려는 또 다른 이유는 그런 점(연립정부론을 비롯한 집권정당 노선)에서 진보정당이 변화의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지난 당대회 구호는 ‘진보통합, 야권연대’였다. 나는 이를 진보통합과 연립정부 구성을 공식당론으로 결정했다고 본다.”[33]

둘째, 유시민은 민주노동당 핵심 지도부가 기존 국가를 통해 체제 내적 개혁을 추구한다는 점에 안도한다. 6개월간 이정희 대표와 대담을 마친 뒤 유시민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서로 통했던 것 같다.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둘 모두 헌법을 중요하게 여겼다.”[34] 실제로 이정희 대표는 헌법 37조 덕분에 “상식과 논리에 기초해 진보를 일궈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진보세력이 현실정치에 참여함으로써 국가권력을 국민의 통제 아래 놓는 선순환의 길이 이미 정립돼 있다.”[35] 이런 생각은 ‘국가로 하여금 정의를 행하게 하라’는 유시민의 국가론과 잘 들어맞는다.(자본주의 국가에 정의를 기대하는 것이 연목구어緣木求魚라는 점은 제쳐두기로 하자.) 또, 유시민은 “민주노동당도 진보신당도 이제는 자본주의 극복을 꿈꾸지 않”고 “기껏해야 복지국가를 주장할 따름”이라는 점에 주목한다.[36]

셋째, 참여정부의 실패에 대한 이정희 대표의 평가와 교훈이 유시민의 것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6개월간 유시민과 대담을 마친 뒤 이정희 대표는 이렇게 썼다. “참여정부가 시도한 개혁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진보진영이 참여와 비판의 방법을 고루 활용하며 정부가 개혁과 진보의 길을 강력하게 밀고 가도록 해야 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것과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전체에서 잇닿아 있다. … 책임을 다하는 정치는 우리 편을 모으는 것부터 시작된다.”[37] 이는 유시민이 “노무현 정부 내내 자유주의 정파인 집권당과 진보정파 야당 사이를 지배한 것은 연합과 제휴가 아니라 대립과 대결”이었다고 진보를 비난하며 “책임의식”을 촉구하는 것과 비슷한 문제의식이다.

유시민에게 자유주의와 진보세력 연합의 핵심적 유용성은 참여정부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진보운동의 발을 묶어두는 것이다. 특히, 유시민은 노동자 투쟁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집권 초기 화물연대 파업인가요, 거기서부터 분위기가 엉켰고, 전교조의 네이스 반대투쟁을 거쳐서 싸움이 끝이 없었지요. 돌이켜보면 악몽 같습니다.”[38] 유시민은 진보와 연합함으로써 진보정당의 노동조합 기반을 통해 노동자 투쟁의 발목을 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 NL 경향 출신으로 인민전선 전략을 모르지 않는 그는, 역사에서 거듭 노동자 투쟁의 발목을 잡고 노동계급을 자본가 계급의 이해관계에 종속시키는 문제점을 드러낸 민주노동당 핵심 지도부의 인민전선 전략을 역이용하려는 것이다.

전망

앞에서 살펴봤듯이, 참여당이 통합진보정당에 참여하려는 것은 진보로의 전향轉向을 의미하지 않는다. 참여당은 참여정부 시절, 정권과 진보진영 사이 갈등의 핵이었던 쟁점들에 대해서조차 똑 부러진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가령 이런 식으로 회피한다. “한미자유무역협정이나 해외파병에 반대하면 진보, 찬성하면 보수라는 식으로 구분할 수 없다.”[39]

참여당이 통합진보정당에 참여하려는 것은 실용주의적 선택이다. 야권연대를 통해 한나라당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고 보지만, 야권에서 가장 작은 정당이다 보니 협상에서 밀릴 게 뻔하다. 민주당에 들어가자니, 25년 경험을 돌아보건대 남는 게 없을 것 같다.[40] 진보세력과 통합하면 야권연대 테이블에서 협상력이 커질 것이다. 참여당이 갖지 못한 진보정당의 지역 기반과 활동력을 갖게 된다면 참여당의 청와대 참모 출신 인물들은 유리한 입지를 갖게 될 것이다. 참여당은 연합을 통해 정권교체를 이룬 해외 사례를 봐도 “대통합정당을 이루는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일부가 합당하여 나머지와 연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이 경로를 택한 것이다.[41]

이런 목적을 가진 참여당이 통합진보정당에 합류한다면 자신의 왼쪽을 향해 우경화 압력을 가할 것이 분명하다. 우선, 참여당 지도자들은 당면한 선거적 성과를 위해 이른바 ‘수권 정당’다운 태도를 취하라고 촉구할 것이다. 그동안에도 유시민은 진보진영에게 “‘운동’을 강조하고 ‘[제도]정치’를 멀리하는 분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거나,[42] 이념만 내세우지 말고 “유능해야 한다”거나,[43] 민주노동당 후보가 대선 때마다 독자 출마해 완주했지만 번번이 “득표는 미약”했는데[44] 이렇게 “너무 진도가 느리고 천천히 커서” 언제 집권하겠느냐거나,[45] 그러니 “승리하는 것을 기피”하지 말고 “경계를 넘어서”[46] 연합하자고 얘기해 왔다. 그 다음에, 실제로 정권교체를 이룬다면 참여당 지도자들은 통합진보정당과 노동운동의 이해관계를 새 정부의 성공에 종속시켜 투쟁의 발목을 잡으려 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다뤘다.

물론 참여당이 통합진보정당에 들어온다고 해서 통합진보정당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진보정당의 노동조합 상근간부층 기반이 유지되는 한 그것은 여전히 사회민주주의 정당이다. 당의 지도 이데올로기가 사회적 자유주의까지 오른쪽으로 더 넓어지겠지만 말이다. 또, 당의 우경화가 필연인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객관적 요인들과 주관적 요인들이 두루 작용할 것이다. 통합진보정당에 진보세력들이 얼마나 참가할지, 당내 좌파들이 당의 우경화 시도에 맞서 잘 싸울지, 경제 위기 상황과 계급세력 균형이 당내 투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등등.

통합진보정당이 일단 우경화로 접어든다 해도 그 길로 무한정 나아가기보다 우경화가 낳은 실패에 힘입어 당내 좌파가 부상할 수도 있다.(중도좌파 연정에 참가해 아프가니스탄 점령과 신자유주의 정책에 협력했다가 그것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좌파 지도부가 들어선 이탈리아 재건공산당의 사례는 가장 최근의 것일 뿐이다.) 또, 이런 일을 거듭한 끝에 당내 좌파와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의 의미 있는 일부가 당을 나와 새로운 좌파 개혁주의 정당을 만들 수도 있다.(제3의 길 노선을 채택한 독일 사민당에서 오스카 라폰텐과 일군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분열해 만든 독일 좌파당의 사례로, 여기에 혁명적 좌파 일부와 동독 공산당 출신자들도 참가했다.)

물론 당의 성격이 달라지거나 우경화가 예정돼 있는 게 아니라고 해서 참여당의 통합진보정당 참여가 아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민주노동당의 일부 지도자들처럼 ‘함께하자는 사람들을 속 좁게 내쳐서야 되겠느냐’거나 ‘그렇게 자신감이 없느냐’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참여당 문제에 대한 완전한 희화화다. 왜냐하면 참여당이 통합진보정당에 들어오는 순간, 야권선거연합에서 비롯한 압력(부르주아적 정당의 강령과 계획에 진보정당의 활동을 국한시키는 것)이 당 내에서도 일상적이고 체계적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주노동당 핵심 지도자들의 계획은 이에 맞서 싸우는 게 아니라 인민전선 전략(과 “통일전선적 정당”론)에 따라 스스로 손발을 묶고 그들에게 보조를 맞추려는 것이다.(그런데 이런 방법으로는 결코 중간계급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

제대로 된 진보통합을 바라는 사람들은 참여당과의 통합에 반대해 계속 투쟁해야 한다. 그래서 민주노동당 핵심 지도부가 참여당과의 통합을 밀어붙여 진보가 사분오열하는 상황이 전개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불행히도 진보 통합 지지자들 내의 좌파가 벌이고 있는 참여당과의 합당 반대 운동이 일시 좌절을 겪어 설사 참여당과의 통합이 결정되더라도, 진보진영의 사분오열을 택하기보다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일부가 좌측으로 이탈하지 않는 한 통합진보정당 안에서 참을성 있게 우파 지도부에 맞서 투쟁하면서 지지를 확대하는 게 나을 것이다. 물론 주요 노조 지도자들의 일부가 참여당이 동참하는 진보 통합 과정에는 불참하기로 한다면, 상황이 매우 역동적으로 변할 수 있다.

정권이 교체된다면, 통합진보정당의 우파 지도부는 기업주의 눈치를 보며 노동자들의 자제를 호소하겠지만, 좌파는 개혁 정권 초기의 기대감을 활용해 노동자들이 스스로 투쟁에 나설 수 있도록 조직해야 한다. 이런 투쟁은 경제 위기 상황과 맞물려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 통합진보정당이 어떤 모양새가 될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앞날을 예측하기는 어렵다. 중요한 것은 상당 부분 행위 주체들의 투쟁에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이다.

참고 문헌

국민참여당 강령.

‘국민참여당 관련 8문 8답’, 민주노동당 당원게시판.

국민참여당 정책위원회 2011, ‘국민참여당:민주노동당, 가치 · 강령 · 기본정책 비교’(2011.6).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2001, ‘9월테제: 조국통일의 대사변기를 맞는 전국연합의 정치 · 조직방침’.

《민》 편집실 2001,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10기 대의원대회 출범식 지상중계’, 《민》 28호(2001년 3월).

박경순 2011a, 《21세기 진보적 민주주의》, 새세상연구소.

박경순 2011b, ‘진보정치 대통합 운동의 진단과 과제’.

유시민 2011, 《국가란 무엇인가》, 돌베개.

이정무 2011, 《이정희 유시민 대담집 – 미래의 진보》, 민중의소리.

정대연 2001, ‘‘9월테제’를 둘러싸고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민》 36호(2001년 11월).

정대연 2010, ‘2012년 진보운동의 대도약을 위한 다섯 가지 과제’, 한국진보연대진보포럼(2010.1.23~24) 자료집.

진보교연 2011, ‘진보신당 당원 및 대의원들께 드리는 호소문’(2011.9.3).

참여정책연구원 2011, ‘정당 이론과 해외 사례’(참여당 당원교육 자료).

최규엽 2011,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넘어 ‘21세기 진보 민주주의 사회’로!’, 《21세기 진보적 민주주의》, 새세상연구소.

한국사회포럼 2009 자료집 《진보의 또 다른 상상》

<레디앙>

<조선일보>

각주

[1] 5 · 31합의문, 패권주의 극복과 민주적 당운영에 관한 부속합의서2, 당명 · 강령 · 당헌 등 2차 협상결과를 포함한 최종합의문.

[2] 진보교연 2011.

[3] ‘국민참여당 관련 8문 8답’.

[4] 이정무 2011, p247.

[5] 2009 한국사회포럼(2009.8.27~28) 제3세션 ‘민주주의와 정치’에서.

[6] 최규엽 2011, p17.

[7] 정대연 2010.

[8]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8월 27일 실시한 정당 지지율 조사에서 민주노동당은 4.5퍼센트를 얻었다. <조선일보>(2011.9.2).

[9] 박경순 2011a, pp275-276.

[10] 박경순 2011a, p113.

[11] 박경순 2011a, pp162-163.

[12] 박경순 2011a, p159.

[13] 박경순은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시급히 해결을 요구하는 수없이 많은 사회적 모순들이 폭발하고 있으며 … 이러한 새로운 운동들 중 많은 부분은 기존의 마르크스주의 계급적 분석틀로 해명하기 어려운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고 한다. “전통적 계급주의적 함정”에서 벗어나 “위계적 연대에서 수평적 연대”로 나아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사회주의라는 단일 목표에서 벗어나 민주주의라는 … 공동의 목표를 운동의 전략적 목표로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경순 2011a, pp95-104.

[14]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2001.

[15] NL 경향은 1990년대 중후반 북한의 위기와 이른바 남한의 민주화 이행이라는 배경 속에서 통일운동, 독자적 정치세력화 등 여러 쟁점을 둘러싸고 분열을 거듭했다. 전국연합이 2001년 발표한 ‘9월 테제: 조국통일의 대사변기를 맞는 전국연합의 정치 · 조직 방침’의 부제는 “시련과 혼란을 마감하고 승리의 새시대를 선언한다”였다.

[16] 당시까지만 해도 “전국연합에서 진보정당 건설에 대한 논의는 상당 정도 금기사항”이었으므로 이것은 큰 변화였다. 《민》 편집실 2001. p66.

[17] 정대연 2001, p53.

[18] “[민족민주 정당은] 자주 · 민주 · 통일을 강령으로 하여야 한다. … 일부에서는 사회주의적 이념 정당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민주노동당의 강령에도 일부 그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한국사회의 성격으로 보나 당면 변혁의 임무로 볼 때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2001.

[19] 국민참여당 강령.

[20] 이정무 2011, pp205-206.

[21] 국민참여당 정책위원회 2011.

[22] 이정무 2011, p112.

[23] 국민참여당 정책위원회 2011.

[24] 이정무 2011, pp154-155.

[25] 이정무 2011, p105.

[26] 이정무 2011, p100.

[27] 유시민 2011, p278.

[28] 유시민 2011, pp257-258, p278.

[29] 유시민 2011, pp273-274.

[30] 유시민 2011, p279.

[31] 박경순 2011b.

[32] <레디앙>(2011.8.16).

[33] <레디앙>(2011.8.16).

[34] 이정무 2011, p35. 유시민은 “진보자유주의자는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 개량의 길을 선호한다”고 설명한다. 또, 독일 사민당의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은 “졌지만 이긴 정치인”이라며 한국의 진보정당 정치인들이 따라야 할 모델로 은근히 내세운다. 유시민은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는 자유주의를 내포한다”는 점, 베른슈타인이 국가를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도구”로 봤다는 점을 매우 높이 산다. 유시민 2011, pp242-243, pp263-272.

[35] 이정무 2011, p49.

[36] 유시민 2011, p195.

[37] 이정무 2011, p18, p24.

[38] 이정무 2011, p144.

[39] 유시민 2011, pp198-199.

[40] 이정무 2011, p205.

[41] 참여정책연구원 2011.

[42] 유시민 2011, p273.

[43] 유시민 2011, pp278-279.

[44] 유시민 2011, pp275-276.

[45] 이정무 2011, p188.

[46] 이정무 2011, p190.

입력 2011-09-17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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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익히는 마르크스주의 기초 개념

인민전선이란 무엇인가?

강철구

민주노동당 지도자들이 반자본주의적 요소가 포함된 기존 강령을 폐기하고 더 온건한 강령으로 대체한 것은 참여당과의 정당 통합이나 민주당과의 연립정부 등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인민전선’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의회 · 선거 등에서 자유주의적 자본가당과 불가피한 전술적 공조와는 다른 것이다. 

인민전선은 노동자 정당이 자본가 정당과 연립 정부를 수립하려고 전략적으로 동맹을 맺는 것이다. 따라서 연립 정부 수립을 위한 공통된 선거 강령에 바탕을 둔다.

1936년 프랑스 공산당처럼, 직접 연립정부에는 참여하지 않더라도 정부 바깥에서 계급동맹을 위해 노동자 투쟁을 자제시키면서 인민전선을 수행할 수도 있다. 

인민전선은 노동자 운동의 요구 수준을 자본가 정당이 받아들일 정도로 낮춘다. 그리고 자본가 정당이 그들의 계급적 본질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 노동자들의 투쟁도 자제시킨다. 반대로, 연합 대상인 자본가 정당의 전력과 잘못된 노선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자본가 계급을 폭로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진보적 색깔을 입혀 준다. 그래야 전략적 동맹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원래 이런 계급연합은 사회민주당의 주특기였다. 사회민주당들은 20세기 초반부터 배신적으로 계급연합을 추구하며 노동운동을 막다른 길로 끌고 갔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주도한 초기 코민테른은 사회민주당의 계급연합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스탈린이 지도한 코민테른은 1935년 7차 대회에서 사회민주당보다 더 노골적으로 계급협력을 추진하는 인민전선 노선을 채택했다. 

스탈린주의에 용감하게 맞선 트로츠키는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인민전선의 재앙적 결과를 경고했다.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정치 연합은 그 기본 이해관계가 180도 반대인 두 계급 사이의 동맹인지라 프롤레타리아의 혁명 세력을 마비시키는 데만 이바지할 뿐이다” 하고 지적했다. 따라서 인민전선은 “부르주아와의 동맹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배신하는 것”이다.   

재앙으로 가는 길 

트로츠키의 경고는 현실이 됐다. 1936년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집권한 인민전선 정부는 혁명을 성공시킬 수도 있었던 노동계급 투쟁을 재앙적 패배로 이끌었다.      

파시즘에 맞서려면 노동계급의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힘을 최대한 동원했어야 했다. 

그런데 인민전선 정부는 노동자들을 수동화시키고 노동계급의 자주적 활동과 계급의식 발전을 저해해, 노동계급이 반동에 저항하지 못하게 마비시켜 버렸다. 결국 파시즘이 승리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최규엽 새세상연구소 소장은 민주노동당의 새 강령인 ‘진보적 민주주의’가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채택된 인민전선 노선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주장한다. 

최규엽 소장은 ‘진보적 민주주의’ 전략이 2차 세계대전 후 많은 제3세계 나라들에서도 시도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참혹한 결과는 말하지 않는다. “민족 · 민주 혁명”이라는 망상을 좇아 자본가 정당과의 계급연합을 추구하다 1958~1962년의 이라크, 1965~1966년의 인도네시아, 1978~1979년의 이란 등에서 노동운동은 일련의 재앙적 패배를 겪었다.  

한국의 인민전선론자들은 미 제국주의와 한나라당, 그리고 재벌에 맞서 중소자본가들과도 폭넓게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하청 · 계열화돼 있어 재벌과 재벌 정당인 한나라당에 일관되게 반대할 수 없다. 

중소자본가들은 미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에도 동맹 세력이 될 수 없다. 미국을 꼭대기로 하는 위계적 제국주의 체제 속에 깊이 편입되는 것이 한국 자본가 계급에도 이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소자본가들의 연합체인 중소기업협동중앙회는 비정규직 확대에 동의하고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고 한미FTA와 한국군의 해외 파병 등에 동의하는 등 반노동자적이고 친제국주의적 성향을 보여 왔다. 

물론, 사회 변화를 위해서는 노동계급뿐 아니라 광범한 피억압 민중과 중간계급의 일부도 끌어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 계급이 전체 민중을 위한 실질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세력임을 강력한 투쟁을 통해서 보여 줘야 한다. 

그러나 인민전선은 노동계급의 힘을 마비시켜 결과적으로 우파들의 힘만 강화해 주므로 피억압 민중과 중간계급을 우리 편으로 넘어오게 하기 힘들다.

입력 2011-09-22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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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권력 세습의 정치·경제적 배경과 전망 ─ 3대 세습 북한은 어디로?

김하영 (다함께 운영위원, 《마르크스21》 공동 편집자)

“북한 권력 세습의 정치 · 경제적 배경과 전망 ─ 3대 세습 북한은 어디로?” 바로 가기

입력 2011-12-20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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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대물림하는 북한은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다

최일붕 (다함께 운영위원, 《마르크스21》 공동 편집자)

북한의 권력 대물림이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돼 있다. 물론 자식에게 권력을 세습해 줬거나 세습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다양한 독재자들에게는 웃음거리가 아닐 게다. 3대 세습은 확실히 유별나다. 하지만 3대냐 2대냐는 진정한 이슈가 아니다. 진정한 이슈는 ― 적어도 좌파에게는 ― 사회주의 하에서 세습이 있을 수 있느냐는 점이다. 

△북한 관료들이 말하는 ‘우리식 사회주의’는 노동자 · 민중을 억압 · 착취하는 국가자본주의 체제일 뿐이다. ⓒ사진 출처 EL Generalissimo

김정은이 능력 면에서 지도자가 될 자격이 충분하기에 지도자 자리를 물려받는 것 아니겠느냐며 대물림을 정당화하는 정통 자주파의 주장은 진정한 사회주의와 아무 관계 없다. 1871년 파리 코뮌의 공무원들은 자유 선거로 선출됐고, 노동자 평균 임금 수준의 봉급을 받았고, 무능이나 부패가 드러나면 즉각 소환될 수 있었다. 반면 김정은은 자기 부친과 그 핵심 측근 외에는 아무에 의해 선출되지도 않았고, 해외 여행이 불허된 보통의 노동자들과 대조적으로 스위스 학교를 다닌 일 등 큰 특권을 누리고 있고, 아래로부터의 대중 혁명에 의하지 않는 한 누군가에게 소환될 일도 없을 것이다.

제국주의 이론의 결여와 엘리트주의

일부 자유주의자들과, 이정희 대표를 비롯한 민주노동당 지도부와 진보신당 다수 지도자들 같은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마르크스주의적 제국주의론의 관점이 결여돼 있기도 하지만 피억압 대중의 삶과 그들 자신의 저항이라는 관점도 결여돼 있다. 그 대신 그들은 남북관계 문제를 북한 정권 달래기라는 국가 간 외교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그러나 남북관계를 위해 북한의 권력 세습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순진하다. 북한 정권 비판 여부는 남북관계와 별로 큰 관계가 없다. 남북의 지배자들은 서로 비난을 주고받다가 돌연 유화 국면으로 돌아서기를 수도 없이 거듭했다. 박정희와 김일성의 7 · 4공동성명, 전두환 재임시 박철언이 전두환 특사이자 밀사로 북한에 간 일, 노태우 정권이 대체로 북한에 유화적인 자세를 취한 일,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 김일성 사망이 아니었더라면 1994년 김영삼과 김일성 사이에 열릴 뻔했던 사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기 전해인 1998~99년은 북한 잠수함 사건과 제1차 서해교전 등으로 남북관계가 극도로 경색돼 있었다는 사실, 대북 화해 · 협력을 추구하던 김대중 정권이 2002년에는 북한과 사이가 극도로 나빠졌던 일 등을 들 수 있다. 오히려 남북관계는 훨씬 더 폭넓은 제국주의 간 동아시아 패권 경쟁 문제와 관계가 있다.

백보 양보해 설사 북한 권력 구조 비판을 삼가는 것이 남북관계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남북 지배자들의 일일 뿐이다. 남북 지배자들이 대체로 화해 · 협력 관계에 있던 2000년 이후 7년간 남한은 물론 북한의 노동계급과 그 밖의 피억압 집단들에게 착취와 억압이 완화됐던가? 김대중과 노무현 재임시 비정규직화 등 신자유주의 노동 유연화가 가속됐고, 구속 노동자 수는 그전 어느 정권 하에서보다 많았다. 뿐만 아니라 평택 미군기지 문제나 한미FTA 문제로 항의하던 사람들을 혹독하게 탄압하고 특히 후자에 대한 항의 운동이 일어나고부터는 대중 집회가 거의 불허됐다.

적대적 공생 관계

정통 자주파는 민주대연합의 이름으로 자유주의자들 및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연대 · 연합’을 추구하고 있다. 2000년대 한국판 인민전선 정책인 셈이다. 고전적 인민전선 시기에 페이비언 협회의 조지 버너드 쇼 등을 비롯한 많은 서구 자유주의 지식인들이 소련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한 한편 스탈린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외교론적 관점에 편승해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중의 자기 해방이라는 진정한 사회주의 원칙을 저버렸다.

정통 자주파의 생각과 달리 ‘적의 적은 친구’가 아닌 경우도 흔하다. 이명박과 한나라당 때문에 손학규 등 민주당 지도자들을 친구로 보는 것에 반대하는 노동자들과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괜히 많은 게 아니다. 바로 몇 년 전에만 해도 민주당 · 열린우리당(참여당)이 노동자들을 좀더 착취하려는 자본가들의 친구가 기꺼이 돼 줬던 기억 때문이다. 적의 적이 친구가 아닌 좀더 극단적인 사례는 조갑제다. 조갑제는 이명박이 “더는 우리 편이 아니다”(4월 9일치 오마이뉴스), “탄핵돼 하야해야 한다”(9월 8일치 인터넷 경향신문)고 했다. 그렇다고 조갑제가 우리 진보진영 편인가?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을 ‘서로 싸우는 형제들’로 묘사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 착취와 억압에 함께하는 동시에, 이윤을 좀더 많이 차지하려고 서로 싸운다. 그러다 보니 자본가 계급의 대표자들도 서로 아옹다옹하는 것이다. 피억압자들과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에 헌신하는 진정으로 민주적인 사회주의자라면 지배자들의 일부를 편들 수 없을 것이다.

적의 적이 친구가 아닌 경우는 북한에도 해당한다. 북한이 남한과 꼭 마찬가지로 억압적이고 착취적임은 굳이 예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북한이 남한과 때로 싸우고 때로 협력했음도 예증이 필요 없다. 북한과 남한이 ‘서로 싸우는 형제’ 같다는 점은 일찍이 ‘북풍’, ‘총풍’ 사건으로 떠들썩하던 1995~97년경에 지각 있는 일부 남한 진보 지식인들이 ‘적대적 공생관계’ 등의 말로써 지적한 바다.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어떻게 북한은 남한과 이런 관계일 수 있는가? 바로 북한 체제의 진정한 성격이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주의와 아무 관계 없고 오히려 남한처럼 노동 착취 · 억압 체제이기 때문이다. 전면적으로 국유화된 경제 체제를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관과 아무 관계 없다. 몸소 초안을 쓴 제1인터내셔널 규약(1864년 10월) 첫 문장에서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북한 국가 수립 과정에서 노동계급은 아무런 구실도 하지 못했다. 1989년에 와해된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체제들처럼 소련 군대가 북한 국가를 세웠다. 산업을 국가가 소유 · 통제하지만, 국가를 통제하는 건 북한 노동계급이 아니다. 북한 노동계급은 권력은커녕 권리도 없다. 민주적 권리도 없고, 노동기본권도 없다. 그들은 생산수단과 생산물과 생산 방식으로부터 소외돼 있다. 전형적으로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의 소외’인 것이다.

북한 노동계급의 일부는 굶주림과 궁핍을 겪고 있다. 반면 북한 국가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위협을 이유로 핵무기와 군비를, 또 이를 위해 중공업 생산수단을 축적하고 있다. 이는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언급한 상황, 즉 ‘한편에 자본의 축적, 다른 한편에 빈곤의 축적’이라는 상황이다. 세계 자본주의 · 제국주의 체제의 압력을 받아 북한 체제도 그와 쏙 빼닮게 된 것이다. 세간의 경박한 규정처럼 북한이 봉건제라면 핵무기와 중공업은 있을 수 없다.

자본주의에는 시장경제와 사유재산, 상품이 지배하는 유형만 있는 게 아니다. 만일 삼성이나 현대, LG, 포스코 등 남한 노동자들이 일하는 기업이 거의 다 한국전력이나 토지주택공사 같은 공기업이 되고, 심지어 편의점들도 국유화되고, 우리는 여전히 회사 경영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국가는 여전히 우리와 완전히 동떨어진 특권적 집단이 좌지우지하면서 다른 국가와 경제적 · 군사적 경쟁을 하면서 우리를 계속 착취하고 억압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것을 <파이낸셜 타임스>나 <뉴욕 타임스>는 사회주의라고 부르겠지만,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주의와 별 관계 없음은 명백하다. 우리는 여전히 마르크스가 말한 ‘임금 노예’이고 국가 관리들은 여전히 지배계급이다. 비록 사기업 소유주는 사라졌지만 말이다. 이것은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특히 제2차세계대전 중에 다양한 나라에서 풍미했던 경제 구조와 많이 닮았다. 심지어 다타-초두리라는 경제학자는 “사회주의 블록 바깥의 어느 국가도 투자 가능한 경제적 자원에 대한 이런[남한의] 통제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고 했을 만큼 박정희 치하의 한국도 ‘사회주의적’이었다. 이런 체제에 대한 가장 적합한 명칭은 국가자본주의다.

다함께와 우익은 어떻게 다른가?

북한은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한 변형태인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다. 남한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비민주적 체제이기에 세습 같은 일도 비슷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세습 문제에 가려 북한 사회의 성격 문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설사 이건희가 이재용에게 삼성을 물려주지 않고 전문경영인에게 물려준다 한들 삼성 노동자들의 ‘임금 노예’ 처지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노동계급의 해방과 이를 통한 다른 모든 피억압 민중의 해방이다. 

조갑제나 엊그제 죽은 황장엽 같은 우익도 북한 민중의 해방에 대해 얘기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점에서 우리의 고전 마르크스주의적 입장과 다르다.

(1) 남한 사회 체제와 그 지배계급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않는다. 미국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2) 북한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 즉 지배 관료를 혁명으로 타도하고 노동계급 자신의 국가 기구들을 (노동자 평의회 형태로) 세울 필요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익은 미국 군대나 남한 군대 같은 외부 세력이 북한 주민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3) 우익의 강령은 남한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북한에 대해서도 시장 자본주의다. 반면 고전 마르크스주의적 북한 변혁 강령은 사회주의다. 물론 마르크스가 말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다.

진정으로 ‘북한 바로 알기’가 필요하다

1988년 자주파는 ‘북한 바로 알기’가 필요하다고 소리 높여 외쳤다. 지금이야말로 북한을 바로 알아야 한다. 진정한 사회주의가 무엇인지와 직결된 문제이기에 그렇거니와, 세계적으로 자본주의가 1930년대 이래로 가장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그 어느 때보다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사회주의가 주창돼야 하는 상황에서 북한이라는 가짜 사회주의는 남한의 좌파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고 있다. 만약 북한이 사회주의 사회라면 도대체 누가 사회주의를 거들떠나 볼 것인가? ‘사회주의’라는 말 앞에 ‘왜곡된’, ‘기형적’, ‘변질된’, ‘국가’, ‘봉건적’, ‘전제군주적’ 따위의 수식어를 붙여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진짜 사회주의는 북한과 아무 관계가 없다. 진짜 사회주의 사회는 노동계급이 정치적 · 경제적 의사결정을 하는 사회다. 그럼으로써 이윤이나 자본 축적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의 필요가 지배적인 척도가 되는 사회다. 그런 사회는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 투쟁으로만 이룰 수 있다. 그 길에 함께하자.

입력 2011-12-20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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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사회의 성격

북한은 자본주의의 한 변형태인 국가자본주의 사회다

김영익

우익 언론들은 장성택 처형을 두고 북한이 얼마나 “이상한 나라”인지 떠드는 데 여념이 없다. 

이들이 이렇게 열심히 떠드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남한 지배자들이 미국과 손잡고 북한을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다. 또한 이른바 “우리식 사회주의”인 북한이 얼마나 끔찍한 사회인지를 보여 줘서,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은 없다는 생각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북한이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라는 생각은 진보운동 내에서도 상식처럼 광범하게 퍼져 있다. 다만 진보운동 내에서는 북한 사회가 남한 사회보다 본질적으로 진보적이냐 반동적이냐에 대한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 

북한이 남한보다 근본적으로 후진적인 사회라는 주장은 이석기 의원과 통합진보당 탄압 등의 문제나 북핵을 이유로 한 미국의 북한 압박에 단호하게 반대하지 않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

반대로 자민통 진영의 지도적 활동가들은 북한이 남한보다 근본적으로 더 나은 대안이라고 여기고 있다. 바로 이런 생각 때문인지 장성택 사태가 터진 지 한참이 지났지만 자민통 진영의 지도적 활동가들은 대부분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자민통 진영의 일각에서는 심지어 장성택 처형이 ‘[사회주의] 체제 수호를 위한 [불가피한] 조처’였다고 보기도 한다. 

경쟁적 축적

그러나 북한은 진정한 사회주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핵무기, 기아, 권력 세습, 강제수용소, 공개 처형 따위는 “노동계급의 자기해방” 사상인 사회주의와는 완전히 무관한 것들이다. 

사람들은 국유화한 경제를 두고 북한이 사회주의 사회라고 보지만, 자본주의 체제가 역사에 등장한 이후 국가는 언제나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적 일부였다. 그동안 북한이 채택해 온 국가 주도 경제는 20세기 중엽 세계 자본주의의 주요 흐름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 일본과 나치 독일, 영국과 미국 등 많은 나라들도 국유화와 국가 개입을 통해 경제를 운영했다. 

특히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독립한 후발 국가에서는 선진 경제를 단기간에 따라잡으려고 국가가 빈약한 사적 자본을 대신해 자본 축적 과정을 주도했다. 이때 북한 관료도 국가기구를 이용해 노동자와 농민을 쥐어짜면서 한정된 자원을 중공업에 집중 투자해 자본 축적을 이뤘다. 

북한 관료를 자본 축적에 열을 올리게 한 진정한 동력은 미국과 남한을 상대로 한 군사적 · 경제적 경쟁 논리였다. 그 논리는 바로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징인 ‘축적을 위한 축적, 경쟁을 위한 경쟁’이었다. 이 점에서 북한은 1960~70년대 남한과 본질이 다르지 않은 국가자본주의 사회다. 

북한 지배 관료들은 노동자 대중을 경쟁적 축적 시스템에 종속시키고 착취율을 높여 왔다. 북한 노동계급 대중의 삶은 고단했고, 불만에 찬 대중을 통제하고 억압하려고 북한 국가는 거대한 억압기구(강제수용소, 공안 기구 따위)를 만들었다. 

국가자본주의적 축적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1950~60년대 북한은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뤘다. 그래서 1960년대 초에 일부 서구 경제학자들은 북한을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 가는 공업국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원이 부족하고 바깥에 손 벌릴 곳도 마땅치 않은 작은 국가가 급속한 공업화를 추구하다 보니, 여러 문제들에 봉착하게 됐다. 게다가 1970년대에 들어서 세계 자본주의의 세계화 추세가 발전하면서, 이제 폐쇄적인 국가자본주의적 방식은 점차 낡고 사태에 뒤처지는 것이 되기 시작했다. 

북한 관료들도 경제의 성장 방식을 바꿔야 할 필요를 느끼면서 여러 차례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런 조심스런 경제 개혁 시도들은 모두 실패로 끝났고, 이때마다 북한은 다시 기존의 낡은 방식으로 거듭 후퇴해야 했다. 

그래서 이미 1980년대에 북한 경제는 자체의 모순을 이겨 내지 못하고 심각한 위기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후 동구권이 붕괴하고 미국의 북한 ‘악마화’가 진행되면서, 1990년대 북한은 최악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심각한 대내외적 문제들에 부딪힐 때마다 북한 관료들은 자꾸만 ‘비정상적인’ 해법(주체 사상, 수령 숭배, 권력 세습 등)에 이끌렸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북한이 “이상한 나라”가 된 것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와 제국주의가 가한 압력과 북한 관료의 선택이 결합된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진정한 대안

북한 사회가 겪는 위기에서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북한 노동계급의 저항에 있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북한 노동자들은 수십 년 동안 국가 억압에 의해 원자화돼 있다. 20년이 넘은 식량난과 혹독한 경제 위기는 노동자들의 자신감에도 상당한 악영향을 줬을 것이다. 미국과 남한의 압박도 이데올로기적으로 큰 부정적 구실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북한 노동자들이 온갖 제약들을 뚫고 혁명적 저항에 나서리라 기대하는 건 얼핏 공상적으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아래로부터 도전을 받지 않고 지배 체제를 유지해 온 북한 사회도 근본적 모순을 피할 수는 없다. 그것은 바로 지속적인 자본 축적을 위해 생산수단을 끊임없이 혁신해야 할 필요성이다. 이것이 바로 경직되고 획일적인 관료 지배 체제를 내부로부터 위기에 빠뜨리는 근본 동력이다. 그리고 이런 위기가 일어날 때 아래로부터 반란이 터져 나올 빈틈이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또한 북한 사회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일부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2011년 아랍 혁명은 전 세계가 얼마나 긴밀하게 상호 연결돼 있는지를 실감하게 해 줬다. 튀니지에서 시작한 혁명은 순식간에 이집트 · 리비아 · 시리아 등지로 퍼져 나갔다. 

이와 같은 아랍 혁명의 확산 과정은 언제든 동아시아에서도 펼쳐질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온갖 모순으로 펄펄 끓고 있는 중국 사회에서 거대한 저항이 분출되고 이것이 북한의 특정 상황과 맞물린다면, 북한에서 진정한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을 바라는 사람들은 북한의 노동계급이 앞으로 펼쳐질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투쟁에 나서기를 바라야 한다. 그리고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지지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사회주의는 누군가가 위에서 선사하는 선물이 아니라, 오로지 노동계급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다. 북한 노동계급이 스스로 일어서서 계급 착취 구조를 무너뜨릴 때만, 노동자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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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3-12-21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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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

1989년 혁명 ― 동유럽 정권들은 어떻게 무너졌는가

토마스 텡글리-에반스

“견고했던 모든 것이 대기 속으로 녹아 버린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 쓴 말이다. 결코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사회들도 무너진다는 것을 설명한 이 대목은 1989년에 특히 잘 들어맞았다.

1989년 유럽에서 세계 질서를 무너뜨린 혁명 과정이 시작됐다. 동구권 나라들에서 정권이 먼저 무너졌고,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래 그 나라들을 지배했던 소련이 곧이어 무너졌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고, “사회주의”를 자처하던 정권들이 사실은 잔인한 독재국가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1989년 10월만 해도 동독 지배자들은 건국 40주년을 축하하고 있었다. 집권당인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은 매우 강경한 스탈린주의 정당이었다. 독일사회주의통일당은 자신들의 폭압적 국가 기구가 자신들을 영원히 지켜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불만이 자라고 있었다. 처음에는 교회 안에 고립돼 있던 급진적 활동가들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호소에 응할 태세가 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비슷한 정서가 여러 나라로 퍼져 나갔다.

폴란드 정권은 이미 수년에 걸친 위기 끝에 자유 선거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헝가리는 서쪽 국경을 개방했었는데, 이는 동구권을 서방에게서 차단시킨 ‘철의 장막’에 첫 균열을 낸 것이었다.

동독 지배자들이 건국 40주년을 자축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1백만 명이 반정부 시위에 나섰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11월 9일, 동독 정권이 주민들의 이탈을 막고자 1961년에 만든 베를린 장벽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동독과 서독의 청년들이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무너뜨리고 함께 춤추는 장면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11월 16일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브라티슬라바 시로 몰려 갔다. 다음날 수도 프라하에서는 훨씬 더 많은 학생들이 행진에 나섰다. 프라하에서 경찰이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하자 그 대응으로 “벨벳 혁명”이 시작됐다.(큰 폭력을 쓰지 않고 정권을 몰아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사흘 뒤 50만 명이 프라하 시의 바츨라프 광장을 가득 매웠고, 수만 명이 지역사회, 대학, 작업장에서 시위에 나섰다.

공산당 지도부와 정부는 사퇴했고, 덜 강경한 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하는 바는 따로 있었다. 프라하에는 다음과 같은 낙서가 등장했다. “[공산당] 사무총장은 총파업을 받아라.” 12월 말, 공산당의 지배는 종말을 고했다.

루마니아 공산당은 11월에 지도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임기를 5년 연장했다. 동유럽에서 가장 악명 높은 독재자였을 차우셰스쿠는 수락 연설을 통해 동유럽에서 일어난 반란의 물결을 비난했다. 그는 [서부 도시] 티미쇼아라와 [수도] 부쿠레슈티의 시위대를 진압할 목적으로 즉시 탱크를 보냈다.

극악한 탄압은 역풍을 불렀다. 12월 21일 노동자들은 투쟁으로 그를 권력에서 끌어내렸고 크리스마스에 처형했다.

붕괴

강고한 듯 보인 동구권 지배자들은 일년 만에 하나씩 무너졌다. 공식적으로 “노동자 국가”를 자처한 이 세력들에 맞서 노동자들이 떨쳐 일어나자, 오랜 독재의 비결이었던 국가의 위협은 순식간에 그 효력을 잃었다.

1989년 혁명은 자유시장이 승리했고 자본주의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서방 지배자들은 주장한다. 많은 좌파가 이 주장에 수긍했는데, 동구권에 비판적이었던 좌파들조차 그랬다.

어떤 사람들은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이 흠은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진보적인 사회라고 여겼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소련만이 미국의 패권을 억제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우리 <소셜리스트 워커>는 이 혁명들을 환영했다. 우리는 수십 년 전부터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국제 사회주의”라는 구호 아래 이 정권들에 맞서 노동자들이 투쟁하는 것을 지지해 왔다.

우리는 잔혹한 스탈린주의 체제들이 사회주의라면 미래가 없다고 봤다. 진정한 노동자 국가만이 제국주의에 진정으로 도전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가 보기에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가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핵심으로 하는 사회였다. 그 체제들은 “국가자본주의”였다.

지배계급인 국가 관료는 다른 곳 자본가들과 비슷하게 움직였다. 다시 말해, 소수가 다수를 착취했고, 그들은 훔친 부의 일부분은 자기 몫으로 챙겼지만 나머지는 미래의 착취를 위해 투자했다.

그리고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관료들은 서방과의 군사적 · 경제적 경쟁에 매어 있었다. 관료들은 자신들의 세력권과 자국 노동자들(그들이 의존하는)의 삶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원했다. 이를 위해 동구권에서 엄격한 검열과 대규모 비밀 경찰로 대표되는 엄청난 탄압이 필요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노동자들이 자유와 사회주의(그 체제들의 지배자들이 대변한다고 떠든 바로 그 사상)를 진정으로 요구할 위험이 언제나 있었기 때문이다.

정권에 반대한 인물들은 중형을 선고 받거나 심지어 사형을 당하기도 했다.

동시에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해야 한다는 압박을 끊임없이 받는다는 점에서 국가자본주의 체제들은 불안정했고 노동자들의 저항에 거듭 부닥쳤다.

1953년 동독에서 건설 노동자들은 일손을 놓고 ‘1953년 노동자 반란’을 일으켰다.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모든 주요 산업 도시에서 총파업이 일어났다. 시위대는 공산당 깃발을 불태우고 경찰서에 불을 질렀다. 소련 탱크가 와서 시위를 진압했다.

1956년 헝가리 혁명 중 [수도] 부다페스트 노동자들은 노동자 위원회를 건설했다. 이 역시 소련 탱크에 진압됐다.

1980년대 초 폴란드 북부에서는 대중파업 동안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사회를 운영함에 따라 “이중권력”[기존 정부와 새로운 노동자 권력이 공존하는 상황]과 유사한 상황이 펼쳐졌다.

이 밖에도 수많은 일련의 투쟁들은 스탈린주의나 서방 자본주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것이 아닌 대안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노동자 권력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1989년 혁명은 국가자본주의에서 자유시장 자본주의로의 게걸음을 나타냈다. 그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 일부는 머지 않아 서독과 비슷한 생활수준을 누릴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 기대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러나 거리에 나왔던 사람들은 더 좋은 생활수준뿐 아니라 위선이 없고 지배자와 나머지 사람 사이에 격차가 사라진 사회를 꿈꿨다.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빼앗기고 가난으로 내몰리는 오늘날, 1989년에 다 이루지 못한 일을 해내기 위한 반란의 기운이 필요하다.

추천 소책자

1989년 동유럽 혁명과 국가자본주의 체제 붕괴

크리스 하먼 지음, 조정환 옮김, 책갈피, 6,500원

입력 2014-11-10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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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교수와의 논쟁②

옛 동구권과 현 중국 사회의 성격, 그리고 제국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김영익

<노동자 연대> 149호에 실린 기사 ‘박노자 교수는 진영 논리로 빠져드는가? — 옛 소련과 현 북한 사회는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다’(링크)에 대해 박노자 교수가 반박하는 글(링크)을 <레디앙>에 실었다.

옛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동구권 사회의 성격과 오늘날의 제국주의에 대한 박노자의 생각은 ‘진영 논리’에 빠진 일부 국제 좌파들의 잘못된 주장과 비슷한 면이 많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논쟁은 오늘날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 진정한 대안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박노자는 옛 동구권 사회를 “적색 개발주의”라고 규정했지만, 이번 글에서는 왜 그렇게 규정하는지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왜 옛 동구권 사회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로 봐야 하는지, 그리고 오늘날의 제국주의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떻게 봐야 하는지가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으므로, 다시 한 번 다뤄 보도록 하겠다.

옛 동구권은 자본주의의 변형태                                          

옛 소련과 (개혁 · 개방 이전의) 중국 등을 서방 자본주의와 질적으로 다른 사회, 즉 ‘사회주의’ 또는 ‘탈(Post-)자본주의’로 보는 좌파들은 주로 그 사회의 형태적 특징(사기업이 거의 없고 시장 경쟁이 없음, 중앙 계획경제, 낮은 대외무역 수준 등)이 서방 자본주의와 많이 다르다는 점에 주목해 왔다. 이 점에서 박노자도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옛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이 세계경제와 어떻게 연관을 맺고 있었는지를 보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사실, 세계 자본주의와 떼어놓고 그 사회의 성격을 제대로 분석할 수 없다. 옛 소련과 중국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고립된 ‘섬’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경쟁의 압박을 받고 이에 대응해야 했다. 이것이 소련과 중국 경제의 동역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소련 지배 관료들은 서방과의 군사적 경쟁에 직면해 있었다. 외부의 강제적인 (군사적) 경쟁 압력이 지배 관료의 ‘계획’을 결정짓는 주요 요인이 됐다. (경제가 세계 자본주의의 상태에 ‘종속’됐으므로 경제 계획도 그에 따라 거듭 수정돼야 했기 때문에, 계획이라는 말에 아이러니를 나타내고자 작은따옴표(‘ ’)를 붙였다.) 군사적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지배 관료들은 군사력 강화에 필수적인 중공업에 우선순위를 부여해야 했다. 1927년 소련공산당 제15차 당대회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히고 있다.

“군사적 공격의 가능성을 명심하고 … 5개년계획을 세울 때는, 일반적으로는 경제 전반의 급속한 발전에 최대한 집중하는 것, 특히 전시에 우리 나라를 방어하고 경제 안정을 확보하는 데 핵심적인 산업들의 급속한 발전에 집중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스탈린은 외부와의 경쟁을 위해 축적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공업화 속도를 늦추면 뒤처진다. 뒤처지면 패배한다.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이나 뒤져 있다. 10년 안에 이 격차를 메워야 한다.”

축적이 외부의 압력으로 강제되면서, 노동자들의 필요는 공업화 압력에 종속됐다. 소비가 축적에 종속됐고, 노동자들은 축적 과정의 희생자가 됐다.

외부의 강제적이고 경쟁적인 축적 압력 때문에 노동생산성을 끊임없이 향상해야 한다는 압력에 직면하는 건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핵심적 특징이다. 옛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에서도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 소련 지배 관료들은 소련 내의 생산 비용을 다른 나라(특히, 미국)와 수시로 비교해야 했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견줘 소련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동이 필요한지 항상 자문해야 했다. 소련 지배 관료들의 경제 ‘계획’은 바로 이 압력에 좌우됐다.

그래서 고르바초프의 최고 경제자문이었던 아벨 아간베기얀은 자신의 저서에서 소련과 미국의 경제 실적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세계의 선진국과 비교할 때 우리의 후진성은 너무 커서 금세기 말까지는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생산성 면에서 우리는 미국보다 두 배 반이나 세 배 정도 뒤떨어져 있으며 서방 선진국보다는 두 배나 두 배 반 정도 뒤떨어져 있다.”

옛 소련의 한 경제학자도 이렇게 주장했다. “지난 25년 동안 미국과의 경제적 경쟁의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다. 산업의 노동생산성은 1960년에는 미국의 44퍼센트, 1986년에는 55퍼센트 수준이었으며 농업에서는 오랫동안 20~25퍼센트 수준이었다.”(데렉 하울이 쓴 ‘가치법칙과 소련’에서 재인용, 강조는 나의 것)

서방의 중공업 생산자들이 노동비용을 줄이면 소련도 따라 해야 했고, 서방의 경제적 리듬이 변할 때마다 소련의 경제적 리듬도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역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옛 소련에서의 구체적 노동은 세계적 규모의 추상적 노동과 연관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노동자들을 최대한 쥐어짜 축적한 잉여의 대부분을 산업 발전에 투입해 군사적 경쟁에서 살아남으려 한 사회를 ‘사회주의’ 또는 ‘탈(Post-)자본주의’라고 보는 건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과 정치경제(학) 비판과 관계 없다. 오히려 부르주아 경제학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개념과 닮았다. 옛 소련에서 벌어진 “축적을 위한 축적”, 그리고 이 과정에서 노동계급이 겪은 소외는 바로 마르크스가 《자본론》 등에서 묘사한 자본주의의 모습과 같다.

많은 좌파들이 거의 모든 산업체가 국유화된 경제를 옛 소련 등이 서방 자본주의보다 낫다는 근거로 삼는다. 박노자도 이런 소박한 인식을 가진 듯하다. 그는 《비굴의 시대》(한겨레출판)에서 옛 소련이 여러 문제에도 불구하고 개별 자본가들의 사적 소유와 사적 이윤 추구가 없던 사회였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 대해 특징지운 바와 다르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본은 단지 관계이기만 한 게 아니라 과정이다. 다양한 계기들을 지닌 과정 속에서 자본은 언제나 자본이다.” 마르크스는 경쟁이 자본 축적을 추동하지만, 반대로 자본 축적 과정이 경쟁의 형태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미 마르크스는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 발전하면서 자본의 규모가 커지고, 이것이 국가의 개입을 요구한다고 지적했다.

20세기 들어 자본주의의 이러한 (국가와 자본의 융합) 변화는 훨씬 더 두드러졌다. 이것을 두고 레닌은 국가자본주의 또는 국가독점자본주의라고 불렀다. 국가 간의 군사적 경쟁도 더한층 치열해졌다.

이러한 국가자본주의 경향은 1930년대 대불황에 의해 가속됐고, 1970년대 중반까지 세계 자본주의의 유력한 경향이었다. 그래서 1960년대 이탈리아에서는 국가가 고정자본 형성을 대부분 떠맡았다. 1970년대 중반 브라질 국가는 모든 투자의 60퍼센트 이상을 담당했으며, 영국 국가는 고정자본 형성의 45퍼센트를 떠맡았다. 그럼에도 이 나라들이 모두 자본주의 사회였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옛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자본주의는 1930~1970년대에 세계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유별난 게 아니었다. 그저 서방의 국가자본주의에 견줘 극단화(전면화)된 형태였을 뿐이다.

마오쩌둥 시대의(1949~78)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1949년의 혁명이 낳은 중국 사회는 옛 소련 사회와 본질적으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방과의 군사적 경쟁(냉전) 때문에 중국 투자의 80퍼센트 이상이 중공업에 집중됐다. 중국 지배 관료들도 투자에 필요한 재원을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소비를 억제해서 마련했다. 중국의 국민총생산이 늘어나는 속도에 비해 임금 상승률은 매우 낮게 유지됐다.

중국에서 토지는 국가 소유였지만, 그 토지에서 일하는 농민들은 공업화를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수탈당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52년 농민들에 대한 세금과 도시 · 농촌 간의 교역조건을 조작해 얻은 수익이 중국의 총투자에서 무려 34.7퍼센트를 차지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농촌은 빈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소련 등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로 보는 것은 오늘날에도 중요하다. 북한이 여전히 옛 모습대로 존재하고 있기도 하거니와, 국가자본주의론이 옛 동구권 국가들에만 적용되는 이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국가자본주의론은 서방에도 적용된다. 오늘날 가장 시장화됐다는 미국과 영국 경제의 적어도 3분의 1이 국가 부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많은 좌파들이 자본주의를 경제 체제로만 인식하고 있지, 국가를 핵심부로 하는 정치 체제로도 인식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여러 혼란에 빠져 든다. 국가는 자본주의의 외부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본질적 일부이다. ‘경제’와 ‘정치’의 통일체라는 통전적(holistic) 관점의 결여 때문에 예컨대, 1978년 이후 시장 개혁을 단행한 오늘날의 중국 사회에 대해서 좌파들의 관점은 혼란스러운 경우가 많다.

또한 제국주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 옛 소련 몰락 이전에 좌파들은 소련과 그 동맹국들을 사회주의나 탈자본주의 사회로 보고, 미국에 맞서 그 국가들을 지지하는 진영 논리(campism)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특정한 형태를 서방에 비해 진보적이라고 봤던 습관은 소련의 붕괴 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진영 논리’의 문제가 국제 좌파들에게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오늘날의 중국

 

박노자는 요즈음 중국을 비롯한 옛 동구권 사회를 “적색 개발주의”라고 규정한다. (몇 년 전에는 그런 사회를 ‘국가자본주의’라고 불렀다는 사실은 내가 지난번 글에서 지적했다.) 그리고 그 국가들이 지금은 “서방 위주의 신자유주의적 세계체제에 편입[됐다]”면서도 이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구 ‘적색 개발주의’ 사회에서의 자본주의는 여전히 고전적 자본주의 국가들과 상당한 질적 차이를 보입니다. 중국만 해도 아직도 토지 공공소유 (국유)부터 신자유주의적 환경임에도 복지를 계속 늘리려는 경향(무상 의료를 목표로 해서 의료복지를 계획적으로 늘리는 등의 움직임), 주요 은행과 대기업에 대한 여전한 국유 등까지 ‘국가 주도 자본주의’의 전형을 보여 줍니다. 그게 이상적이다는 말을 제가 한 적은 없지만, 대다수 민중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형태는 분명히 극단적 신자유주의에 비해 차악으로는 보일 수 있겠죠.” (강조는 나의 것)

박노자는 “중국형 자본주의의 야수성”을 부정하지는 않겠다면서도, “중국형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보다는 낫다고(혹은 덜 나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른바 ‘중국 모델’이 서방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국제 좌파들은 일부 있다. 이런 견해가 부상한 데는 2008년 세계경제 위기와 미국 제국주의의 위기에 힘입은 바가 크다. 특히, 그 와중에 중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중국이 미국 제국주의의 위기가 낳은 힘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유력한 대안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처지에서 볼 때, ‘중국 모델’은 차선은커녕 차악으로 보기도 힘들다. 1970년대 말 중국 지배자들은 기존 방식으로는 경제 성장(즉, 축적)을 더는 지속할 수 없고 이 때문에 군사적 경쟁에서도 뒤처질 듯하자, 세계 시장에 편입돼 최신 기술을 도입하고 노동생산성(따라서 착취율)을 높이는 길을 선택했다. 이것은 생산양식의 변화라기보다는 동일한 생산양식 내의 변화(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부터 민영화하는 다국적 자본주의로)였을 뿐, 그 속에서 자본주의 경쟁적 축적 압력에 종속된 노동계급의 처지는 질적으로 변한 게 없다.

‘중국 모델’에 관한 좌파들의 논쟁에서 쟁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국유기업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오랫동안 치열하게 논쟁이 되는 것 중의 하나다. 시장 개혁 이후 민간 부문이 성장하면서 중국 경제에서 국유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많이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중국의 주요 산업과 금융은 국유기업이 주름잡고 있다. 물론 ‘중국 모델’에 호의적인 사람들은 중국의 국유기업들을 ‘사회주의적’이라고 본다. (박노자도 “국유”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아, 국유기업들이 ‘사회주의적’이라고 보지는 않더라도 사기업보다 좀 더 나은 기업이라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마오쩌둥 시대나 지금이나 중국의 국유기업은 ‘사회주의적’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국유기업 노동자들은 기업의 운영을 전혀 통제하지 못한다. 마오쩌둥 시대 중국 국유기업 노동자들의 처지는 동시대 일본 대기업 노동자들의 처지와 비슷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중국의 국유기업은 서방의 많은 공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이윤 획득을 목적으로 운영된다. 중국 정부는 핵심 국유기업들이 다국적기업들에 견줘 경쟁력을 갖추도록 해 중국 경제를 성장시키는 데 초점을 둬 왔다. 그래서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중국 정부는 기업들의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많은 국유기업에서 가차없는 구조조정과 대량 해고를 단행했다. 이때 무려 노동자 6천만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운 좋게 일자리를 지킨 국유기업 노동자들도 그동안 국유기업이 제공하던 복지 혜택이 시장으로 넘어가면서 삶이 불안정해졌다. 또한 국유기업 경영자와 노동자 간의 평균 봉급 차이는 무려 1백 배나 됐다.

중국 국유기업들의 이윤 추구 행위도 사기업이나 서방 다국적기업과 다를 바가 없다. 예컨대 최근 제주도가 영리병원을 들여오려고 했는데, 제주도에 영리병원을 설립하겠다고 사업계획서를 제출한 곳이 바로 중국 국유기업인 녹지그룹이었다. 중국 국유기업이 이윤을 위해 한국의 의료 공공성을 파괴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의료 민영화 반대 운동 진영은 중국 정부에 강력히 항의하는 입장을 밝혔다.(항의가 있고 국내 자본가들이 녹지그룹을 앞세워 영리병원을 추진한 것도 폭로되자, 결국 보건복지부는 영리병원 승인 요청을 잠정 반려했다.)

따라서 오늘날 ‘중국 모델’의 장점으로 “주요 은행과 대기업에 대한 여전한 국[가 소]유”를 드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토지의 공공 소유” 문제도 마찬가지다. 토지가 ‘사유화’되지 않았다는 중국에서도 정부와 기업이 토지를 이용하는 농민과 지역 주민을 수탈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이 문제는 중국에서 아주 심각한 사회 문제가 돼 있다. 중국의 지방정부들은 투자 자금을 확보하려고 농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물리거나 토지를 적절한 보상 없이 몰수해 왔다. “토지 몰수” 문제는 중국 농민들이 갖고 있는 최대 불만 사항이며, 이 때문에 농민 저항이 커져 왔다. 많은 농민들이 과도한 세금이나 토지 몰수를 견디지 못하고 도시로 이주해 “농민공”이 돼 저임금 일자리에 종사하고 있다. 이 과정은 과거 박정희 정권 때 한국의 농민들이 도시로 대거 이주해 노동계급의 일원이 된 과정과 유사하다. (그리고 자본의 시초 축적의 일환이기도 하다.)

박노자도 중국의 토지 몰수 문제를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의 토지 소유 관계가 중국 민중에게 ‘차악’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말하고 있지 않아,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다.

문제는 이뿐이 아니다. 아래에서 묘사되는 중국의 현실은 용산 참사가 일어나는 한국의 현실과 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세수 확대를 바라는 지방정부는 토지를 개발업체에 양도하고, 토지를 양도받은 개발업체는 지방정부의 묵인하에 가옥을 강제 철거하고 그 위에 아파트나 상가, 고층 빌딩을 새로 지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 2009년 중국 정부가 거둬들인 토지 양도 수익은 총 1조 4천2백39억 위안. 이 가운데 다시 철거와 토지 보상으로 나가는 비용이 5천1백80억 위안, 도시화 건설에 3천3백41억 위안, 그리고 토지개발에 1천4백30억 위안이 쓰였다. 토지 양도로 벌어들인 수익은 또다시 토지를 사들이고 건설하는 데 쓰고 있으니 결국 중국 각 지방정부가 토지 개발을 위한 강제 철거를 부추기는 꼴이 된 셈이다.”(《다큐멘터리 차이나》(고희영, 나남), 131쪽)

오늘날 중국은 국유기업, 사기업 그리고 서방 다국적기업들이 국제 생산 사슬 속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혹심하게 중국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사회다. 그래서 중국 정부와 국유기업 · 사기업 · 다국적기업 모두 중국 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착취하고 지배하는 데 같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이런 관계를 도외시한 채, ‘중국 모델’이 서방 자본주의(신자유주의)보다 조금 낫다고(혹은 덜 나쁘다고) 보는 것은 중국과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아니다.

제국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 진영 논리

 

일부 좌파들은 ‘중국 모델’에 대한 호의적 태도와 함께, 흔히 중국의 대외정책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경향은 많은 좌파들이 ‘진영 논리’를 따르는 것과 관련이 있다. 오늘날 진영 논리는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 · 중국에 기대거나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을 옹호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앞서 언급했듯이, 과거에 좌파들은 옛 소련을 “사회주의” 국가나 “변질된 노동자 국가”나 모종의 “탈자본주의” 국가로 보고 미국에 맞서 옛 소련을 지지했다. 그래서 냉전이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양대 초강대국(미국과 소련) 사이의 경쟁임을 보지 못했다. 냉전 종식 이후에는 이른바 ‘단극 체제(미국만이 제국주의)’가 자리잡았다는 생각이 대다수 좌파들 사이에서 유행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좌파들이 제국주의를 단순히 미국의 세계 지배로 환원한 채, 미국에 맞서는 국가들의 편을 들게 경향이 있는 듯하다.

물론 미국의 군사력은 여전히 압도적이고, 세계적 패권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지금 위험한 도박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제국주의는 다수의 강대국들이 지정학적 경쟁을 벌이는 체제이다. 이런 경쟁은 자본주의 발전의 논리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경쟁을 위해 이윤이 재투자되면서 자본의 규모가 커지고, 파산한 다른 자본을 인수·합병하면서 자본주의에서는 점차 소수에게 자본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자본은 일국적 규모를 넘어 세계적 규모로 경쟁하게 된다. 이때 자본은 해외에서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고 자국 국가에 의존한다. 마찬가지로, 국가도 다른 국가와의 지정학적 경쟁에서 이기려면 경쟁국보다 우월한 무기와 군수물자를 생산해야 한다. 그래서 자국 자본에 의존한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보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시장 경쟁이 국가 간 지정학적 경쟁과 결합되는 것을 뜻한다.

이 점에서 중국도 명백히 제국주의 체제의 일부다. 이는 비단 티베트와 신장 등지에서 벌어지는 식민주의적 소수민족 억압만을 두고 얘기하는 게 아니다. 물론 중국은 미국보다 상대적으로 약하고, 이 때문에 동아시아를 벗어난 지역에서는 여전히 조심스런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지금 중국은 세계 자본주의의 새로운 심장부로 떠오른 동아시아에서 미국 · 일본 등과 치열하게 지정학적 경쟁을 벌이고 있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미국과 중국의 경제력 · 군사력 격차는 계속 줄어 왔고, 이에 따라 중국 지배자들은 장기적으로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를 뒤흔든다는 구상을 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 왔다. 1948년에 국민당의 한 장군이 작성한 지도를 근거로 동남아 국가들에게 남중국해 전체가 중국 것임을 받아들이라고 압박을 가하고 있는 중국을 두고 제국주의가 아니라고 한다면, 대체 어느 국가를 제국주의적 국가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제국주의를 식민주의로 환원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최신 단계로 이해할 때 제국주의에 맞설 진정한 동력을 국제 노동계급의 투쟁에서 찾을 수 있게 된다.

이런 맥락 속에서 봐야 제1차세계대전 당시 “주적은 국내에 있다”는 독일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칼 리프크네히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박노자는 이 말을 인용하면서 자국 부르주아지부터 먼저 비판해야 한다고 옳게 지적한다. 제국주의 국가 밑에서 사는 사회주의자들이 자국 정부를 반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원칙이다. ‘노동자연대’는 항상 미국 제국주의와 남한 지배자들의 친미 정책을 폭로하고 반대해 왔다.

그러나 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등 당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각한 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해 자국 지배자들에 맞서 끝내 그들을 전복하는 것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끝장 내기 위해 국제 노동계급과 피억압 민족들이 단결해서 벌이는 투쟁의 일부다.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은 서로 다투지만, 노동계급에 대한 착취를 놓고는 이해관계를 공유한다. 제국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제1차세계대전 때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랬듯이 자본들(그리고 그 국가들)에 맞서 국제 노동계급을 단결시키는 게 중요함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므로 레닌이 《사회주의와 전쟁》에서 한 지적을 주목해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는 더 오래됐고 [식민지를] 많이 잡아 먹은 강도[영국, 프랑스]에 맞서 더 강하고 더 젊은 강도[독일]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자들은 그들 전부를 전복하기 위해 강도들의 싸움을 이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사회주의자들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 즉, 이 전쟁은 노예제를 공고히 하려고 벌이는 노예 소유주들 사이의 전쟁이라는 진실 말이다.” (강조는 나의 것)

이와 반대로, 진영 논리를 받아들이면 상대편 제국주의 국가에서 벌어지는 저항에 대한 태도에 혼란이 생긴다. 당연히 노동자들의 국제적 단결과 연대에도 약점을 드러낸다. 예컨대 지난해 홍콩에서 벌어진 우산 운동(민주화 요구 운동)을 두고 일부 좌파들은 중국에 서구식 자유민주주의를 이식하고 신자유주의를 강화하려고 미국이 지원한 “색깔 혁명”이라고 취급하거나, 아예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해 버린 일이 있었다.

레닌 등 제정 러시아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독일 편을 들지 않고도 얼마든지 러시아 제국주의와 러시아 국가를 반대할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과 일본과 남한이 적대시하는 국가들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지 않고도 우리는 얼마든지 남한 · 미국 · 일본의 국가들을 반대할 수 있다.

박노자는 자신이 ‘중국 편’을 드는 게 아니라고 밝혔다. 그러므로 그가 완전히 진영 논리에 기울었다고 단정짓지는 않겠다. 그러나 중국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와 질적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거나, 중국을 제국주의라 하지 않고 애써 준제국주의(sub-imperialist)라고 하는 것을 보건대,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제국주의 갈등 문제에 대해 박노자가 적어도 진영 논리에 뒷문을 열어 주고 있다는 우려가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입력 2015-05-29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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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교수와의 논쟁①

옛 소련과 현 북한 사회는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다

김영익

북한 문제는 남한 좌파들이 결코 회피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문제다. 북한 내부의 중요 사건이나 북·미 또는 남북 관계가 남한 노동계급의 투쟁과 의식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남한 우파들도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장성택 처형 사실이나 현영철 처형설 등이 불거지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북한이라는 ‘사회주의’ 사회가 얼마나 비합리적인 사회인지, 서방 자본주의에 견줘 얼마나 후진적인 사회인지 선전하려 애쓴다.

이를 통해 또한 그들은 북한을 상대로 벌이는 군사적 압박을 정당화한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일본과 중국 간의 제국주의적 경쟁이 날로 심화하는 상황에서 이런 감정적 거짓 선동과 대북 압박 강화는 한반도 긴장을 증폭시킨다.

우파들의 ‘사회주의’ 북한 폭로는 다른 노림수도 있다. 바로 자본주의 체제가 아닌 대안은 없다는 체념을 퍼뜨리려는 것이다. 우파와 지배자들은 북한의 비참한 현실을 들먹이며 경제 위기 고통 전가에 맞선 급진적 요구와 운동이 무망한 일이라고 시사한다.

이렇게 북한을 둘러싼 문제는 대안 문제로 이어지고, 이는 옛 소련과 북한 사회의 진정한 성격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따라서 남한 좌파들이 옛 소련과 북한 사회의 성격을 제대로 규명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현실 사회주의”

그런 점에서 박노자 교수(이하 존칭 생략)가 최근에 옛 소련과 북한 사회의 성격에 관해 내놓는 주장은 주의 깊게 살펴볼 가치가 있다. 노동당 당원이자 불교 아나키스트이기도 한 박노자는 한국의 많은 좌파적 개인들과 서클들에 여전히 많은 영향을 끼치는 지식인이기 때문이다.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부다페스트 시민들이 쓰러뜨린 스탈린 동상 옛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은 노동자들의 거듭된 저항 끝에 붕괴했다.

지난해 12월 출간된 최근작 《비굴의 시대》(한겨레출판)에서 박노자는 “스탈린주의의 잔혹한 면을 부정할 수 없다”면서도 옛 소련 같은 “현실 사회주의”의 긍정적 측면도 함께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관된 주장을 더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현실 사회주의에서는 노동자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그런 만큼 그들은 노동에서 소외되는 것도 훨씬 덜 느꼈다. … [노동자들이] 적어도 자본가의 사적 소유에서는 해방된 것이었다.” (341쪽)

“[관료 집단은] 경제적 특권이나 정치적 권력은 세습되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래도 기본적 사회 정의는 관철시켰다. … 또한 다수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는 국가 운영도 어느 정도 가능했다.”(345~346쪽)

북한에 대한 태도도 비슷하다. 박노자는 오늘날 북한이 “아주 경직되고 훨씬 유교적이며 군사화된 사회”로 변질됐다고 비판하는 동시에 1960년대 초반 주체사상이 선포되기 전의 북한은 “동유럽형 현실 사회주의의 한 갈래에 속했다”고 옹호한다.

그래서 박노자는 옛 소련과 북한을 사회주의가 아니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로 보는 ‘노동자연대’의 관점에 부정적이다. (사실 박노자는 몇 년 전만 해도 사뭇 다른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겠다.) 심지어 어처구니없게도, ‘노동자연대’의 관점이 미국의 막스 샤흐트만(‘샥트먼’이 올바른 발음이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이렇게 표기하기로 한다)처럼 미국 제국주의에 투항하는 논리를 내포하는 듯 암시한다. 막스 샤흐트만은 1940년대 초 당시 소련을 ‘관료 집산제’라고 규정하고 서방 자본주의보다 후진적이라고 암암리에 여겨, 베트남전에서 미국 제국주의를 암암리에 지지하는 데까지 나아갔던 사람이다.

박노자의 이런 주장들을 보면, 그는 옛 소련이 비록 스탈린주의로 왜곡됐어도 본질적으로 서방보다 진보적인 탈(Post-)자본주의 사회였다고 보는 듯하다.

우선, 현재 박노자의 주장을 역사를 통해 검증해 보겠다.

먼저, 옛 소련 노동계급의 지위가 서방 노동계급보다 비교적 높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옛 소련의 노동자들도 소외와 위로부터의 통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생산수단과 생산과정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먹고살기 위해 그들은 관료가 지배하는 국유 기업에 고용돼야만 했다. 1인 경영제, 노조 무력화, 파업권 부정, 단체협약 폐지, 스타하노프식 노동강도 높이기 등도 서방 자본주의 사회의 기업들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들이다.

알렉세이 스타하노프 스탈린은 높은 성과를 낸 광원 노동자 스타하노프를 앞세워 대대적인 생산 성 향상 운동을 벌였다. 이 때문에 소련 노동자들의 부담과 고통이 가중됐다.

소비재

노동자들을 위한 복지와 소비재 생산은 철저히 억제됐다. 예컨대 소련의 1988년 국민총생산에서 공중보건이 차지한 몫은 126개국 가운데 겨우 70위권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서방 노동자와 소련 노동자는 (구매력 수준이 높지 않아) 원하는 소비재를 충분히 구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처지가 같았다. 서방 노동자들은 질 좋은 소비재 가격이 너무 비싸서 구입하지 못했다면, 소련 노동자들은 소비재 공급이 너무 부족해서 구입하지 못했다는 (현상적)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박노자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가 없었다는 점을 소련이 ‘현실 사회주의’임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로 보는 듯하다. 그러나 소유관계와 생산관계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마르크스의 지적처럼, 소유관계는 생산관계의 “법률적 형식에 불과하다.” 그래서, 최초의 계급사회 형태인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든, 중세 서유럽 가톨릭 교회든, 근대 이전 아랍 국가봉건제든 그 지배자들은 사적 소유가 아니라 집단적·관료적 소유 형식으로 생산수단을 지배했다.

사실, 자본주의 체제가 등장한 이후 국가는 언제나 자본주의 체제의 핵심적 일부였는데다, 국가 주도 경제가 20세기 중엽 세계 자본주의의 주요 흐름이어서 서방의 많은 주요 산업체들도 국가 소유로 운영됐다. 이런 자본주의적 공기업들은 오늘날에도 미국과 영국 등을 포함한 시장 지향 경제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일부로서, 적대국들과 군사적 경쟁을 벌이며 생존해야 한다는 압력이 소련의 경제 ‘계획’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급속한 중공업 건설이 필요했고, 서방의 무기·중공업 생산자들이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줄인 만큼 소련도 이를 가차없이 따라잡아야 했다.

일찍이 1920년대 말에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이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러시아 혁명의 잔재들을 모두 없애는 반혁명을 자행했다. 국가를 통해 축적 과정을 통제함으로써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서방의 자본가 계급이 하는 구실을 수행했다. 이처럼 옛 소련은 자본주의의 한 변형태인 관료적(전면적) 국가자본주의 사회였고, 본질적으로는 서방 자본주의와 다를 게 없는 사회였다.

만약 옛 소련이 조금이라도 ‘사회주의적’이었고 노동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사회였다면, 1990년 9~12월과 1991년 8~9월 각각 동유럽과 소련의 노동자들은 어떻게든 체제의 붕괴를 막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또한, 소련 붕괴가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반동적 회귀였다면, 그 과정에서 사회 지도 세력이 급격히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옛 소련의 관료들은 대부분 소련 붕괴 후에도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보전했다. 획일적인 고급 공무원 복장이 아르마니 양복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물론 특권 집단의 명칭도 ‘노멘클라투라’에서 ‘올리가르히’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이것만 봐도, 옛 소련은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무늬(외형)조차 서방 사회와 흡사한 면이 훨씬 많다는 점이 아나똘리 리바꼬프나 보리스 삘냐끄 등등의 작품을 통해 1990년대에 폭넓게 들춰내졌다.

북한

북한도 옛 소련과 마찬가지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다. 동유럽처럼 북한은 아래로부터의 노동계급 투쟁이 아니라 소련의 군대에 의해 건설된 사회다.

북한처럼 제2차세계대전 후 독립한 후발 국가들은 선진 경제를 따라잡으려고 국가가 자본 축적 과정을 주도하곤 했다.

북한 관료를 자본 축적에 열을 올리게 한 동력은 남한과의 군사적·경제적 경쟁 논리였다. 그 논리는 바로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징인 경쟁으로 말미암은 ‘축적을 위한 축적’이었다. 북한 지배 관료들은 노동계급을 경쟁적 축적 시스템에 종속시키고 착취율을 높이려 애써 왔다.

그러나 자원이 부족하고 해외로부터의 자금 유입도 마땅치 않은 중간 규모 국가가 급속한 공업화를 추구하다 보니, 여러 문제들에 봉착하게 됐다. 세계 자본주의와 서방 제국주의의 압력 때문에 북한 관료들은 처음부터 무리한 목표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심각한 대내외적 문제들에 부딪힐 때마다 북한 관료들은 ‘비정상적’ 해법(주체사상, 수령 개인 숭배, 권력 세습 등)에 이끌렸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북한이 “아주 경직되고 훨씬 유교적이며 군사화된 사회”가 된 이유는 북한 사회의 자본주의적 성격과 세계 자본주의와 서방 제국주의의 압력에서 찾아야 한다.

옛 소련과 북한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하는 데는 그 사회들을 비판하는 것 이상의 중요한 정치적 함의도 있다. 국가자본주의론은 박노자의 오해와 달리 옛 소련과 서방 체제의 경제적 동학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점을 포착해, 냉전의 틈바구니에서 양대 제국주의 모두에 반대하며 노동계급 자력해방(이하 아래로부터 사회주의)의 정신을 옹호하는 중요한 구실을 했다.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앞서 삽입구로서 언급했듯이, 과거에 박노자는 다른 주장을 했다. 예컨대 2009년 출판된 책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소련의] 국유화한 공장과 은행들을 스탈린의 ‘노멘클라투라(특권적 관료)’가 그 집단의 사유재산인 양 관리하게 됐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임금 노예’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했다.”(《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한겨레출판, 78쪽)

그보다 앞선 2006년 박노자는 소련과 북한을 “국가자본주의”라고 불렀다. “[김일성 일파가] 지배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던 데에는 소련, 즉 새로운 형태의 국가자본주의인 제국주의 세력의 도움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이 북한이라는 국민국가, 국가자본주의적인 국민국가를 만드는 데서 ‘주체’에 대한 모든 데마고기와 무관하게 소련과 중국의 지원이 거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 등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격주간 <다함께> 71호, 강조는 나의 것)

그러다가 2012년에는 “‘사회주의’는 아니더라도 비자본주의 사회”라고 했다가(<레디앙> 칼럼), 이제는 “현실 사회주의”라고 주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회 성격에 대한 규정 문제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보여 준 정치경제(학) 비판의 엄밀한 방법론과 개념에 근거할 일이지, 그저 그때그때의 인상을 따를 일은 아니다.

일부 국제 좌파들처럼, 박노자도 심각한 경제 위기에 대처하는 국제 노동계급의 투쟁 수준이 낮은 것에 실망하며 조급함을 느끼는 듯하다. 여기에 제국주의 간 갈등이 커지는 데 대한 우려도 있는 듯하다. 2013년 북한에서 장성택 처형 사건이 일어났을 때, 박노자는 “[수령 체제를 두둔하지는 않겠지만] 김정은이 망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에서 민중 반란이 일어나면 시리아나 리비아처럼 미국 등 외세의 개입으로 “군웅할거와 지속적 살육의 지옥”이 펼쳐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른 가능성(즉, 노동계급의 혁명과 권력 장악)은 염두에 두지 않는 듯했다.

이런 생각들이, 과거부터 존재했고 얼핏 현실적으로 가능한 듯해 보이는 스탈린주의 프로젝트에 그가 좀 더 호감을 갖도록 영향을 줬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 제국주의와 대립하는 제3세계 좌파 민중주의 정권이나 그리스 공산당에 좀 더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게 됐을 것이다. 박노자는 과거 베트남·중국 같은 주변부의 반제국주의 투쟁에 스탈린주의가 안성맞춤이었다면서, “지금도 스탈린주의를 지향하는 세계의 수많은 주변부 세력과 평등하고 상호 존중하는 소통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비굴의 시대》, 324쪽)

그러나 그 ‘안성맞춤’이라던 스탈린주의가 왜 그 스스로 스탈린주의(일국사회주의론이 핵심이다)를 버리고 시장지향적 체제로 나아갔는지에 대한 박노자의 설명은 없다. 게다가 이런 논리를 일관되게 밀어붙이면, 일단의 ‘진보적인’ 국가들이 있고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평형추’로서 그 국가들을 지지해야 한다는 진영 논리로 연결된다. 그러면 시리아 아사드 정권처럼 전혀 반제국주의적이지도 좌파적이지도 않은 세력도 옹호하게 된다. 박노자는 시리아 아사드 정권을 “마지막으로 남은 중동의 좌파민족주의 계통의 정권”으로 본다. ‘이슬람국가’(IS) 분쇄를 위해 아사드 정권이 미국의 시리아 내 IS 공습을 묵인하는 게 민족주의적인가? 그 정권의 대량학살 만행이 좌파적이지 않은 건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스탈린주의 관료가 조금이라도 진보적인 구실을 했다고 믿는다면,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일관되게 견지하기도 어려워진다. 당연히 노동계급 투쟁에 꾸준히 인내심 있게 관여해 진정한 사회주의 정치로 노동자들과 청년·학생들을 조직하는 데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스탈린주의 관료가 지배했던 옛 소련을 ‘사회주의’로 보면, 여전히 공산당이 지배하고 (얼토당토 않지만)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의 사회 성격에 대해서도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 간의 제국주의 갈등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관점은 꽤 큰 약점을 드러낼 것이다.

박노자가 10대 후반까지 옛 소련에서 살았다는 것이 그가 그 사회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와 비슷한 때 한국에서 태어나 군사독재의 종식을 목도한 사람이 다 한국 사회를 정확히 아는 건 아니다. 마르크스는 러시아어를 몰랐고 러시아에 가본 적이 없었어도 제1인터내셔널 러시아 지부를 맡았고, 동시대의 기라성 같은 러시아 포퓰리스트(나로드니키)보다 러시아 사회의 본질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움베르또 멜로띠Umberto Melotti의 Marx and The Third World[Macmillan, 1977]를 보라.)

박노자는 고대 한반도 남단의 가야 국가를 연구하는 등 거의 모든 한국인보다 한국 역사를 잘 알고, 다른 많은 문제들에도 해박하기 이를 데 없다. 우리는 그에게서 무수히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이론과 개념은 역사유물론의 그것이 아니고, 그의 정치 전략과 전술은 아나키즘의 도덕주의이지 혁명적 사회주의의 전략·전술이 아니다. 박노자가 이런 문제들에선 조금 겸손했으면 좋겠다.

입력 2015-05-23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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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나요?

1925~27년 중국에서 노동자 혁명이 일어난 사실을

세이디 로빈슨

90년 전 중국에서 제국주의 지배에 항의하는 시위가 도화선이 돼 총파업이 일어났다. 총파업은 혁명으로 발전해, 민중이 스스로 바뀔 수 있고 사회를 운영할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 줬다. 그러나 비극이게도, 1925~27년 중국 혁명은 혁명적 조직과 지도가 없다면 지배계급이 혁명을 유혈 낭자하게 진압하리라는 것도 보여 줬다.

조계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에 대해 불평등 조약을 강제한 결과 중국 각지에 확보한 반(半)식민 구역. 이 안에서 제국주의 국가들은 징세권, 행정권,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었고, 곳에 따라 자체의 통화를 발행하기도 했다.

20세기 초, 수익성이 높은 중국 지역들은 제국주의 열강이 장악했다. 열강은 중국의 시장을 개방하고, 중국 내 산업 대부분을 결딴냈다. 이런 급격한 변화 과정에서 1911년 중국 정부가 무너졌다. 조계 이외의 지역은 서로 경쟁하는 군벌들이 지배했다.

혁명은 민족주의 저항으로 시작됐다. 1919년 학생들이 일본의 식민 침탈에 항의해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차츰 학생 시위 이상으로 발전했다. 경찰이 학생 수백 명을 체포하자, 상하이에서 노동자 수만 명이 파업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보여 주다  1925년 홍콩 총파업 집회.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이 운동의 커다란 자극제였다. 1921년 중국공산당이 창당됐다. 천두슈(진독수)가 당의 지도자로 선출됐다.

1920년대 초 파업이 중국인 소유 기업으로 확대되자 군벌들은 반격을 가했다. 1923년 말쯤에는 노동조합과 공산당이 사실상 불법화됐다.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 때문에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이 성장했다. 국민당은 중국 남부의 도시 광저우를 장악했다. 국민당은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겠다고 했는데, 이 당의 지도부에는 군벌, 지식인, 중간계급들이 뒤섞여 있었다.

공산당은 (자신보다 더 큰) 이 국민당과 손을 잡았다. 1923년에 이르러 공산당은 독립성을 거의 포기하고 국민당 좌파처럼 행동하게 됐다.

파업

1925년 상하이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잔혹한 관리자들을 규탄하는 파업을 벌였다. 5월 30일 파업 노동자 12명이 경찰의 손에 죽었고, 노동자 투쟁은 총파업으로 성장했다. 파업은 상하이를 넘어 다른 도시로 번졌다. 한 연구자는 5월 30일의 학살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파업만 1백35건에 달했다고 기록했다. 40만 명 가까이 되는 노동자들이 이 파업에 참가했다. 공산당은 급성장했다. 6월 23일 광둥성의 성도(省都) 광저우 시에서 행진하던 학생, 노동자, 사관학교 생도들에게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발포해, 52명이 죽었다.

대영제국이 홍콩을 차지했을 때 홍콩은 광둥성에 속해 있었다. 홍콩 노동자들은 영국의 식민 지배에 항의해 총파업과 영국 상품 불매운동을 벌였다. 노동자 25만여 명이 파업에 참가해 도시가 멈춰 버렸다. 10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홍콩을 떠나 다른 광둥성 도시들로 이주했다.

해럴드 아이적스는 《중국 혁명의 비극》에서 노동자들이 어떻게 조직했는지 설명했다.

“파업 노동자 50명당 한 명의 대표를 선출해 파업위원회를 설립했고, 이 위원회가 13인의 실행위원을 지명했다. 사실상 중국 노동자 권력의 맹아였던 파업위원회의 후원으로 노동자와 그들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하는 병원 하나와 학교 열일곱 곳이 설립·운영됐다.”

노동자들이 광둥성을 통치했다. 파업 노동자들이 도로를 순찰하며 영국 상품이 반입되지 않도록 수화물을 검사했다. 해안과 항구는 농민들이 순찰했다. 파업 노동자들은 자체적으로 재판을 열어 불매운동을 방해한 사람들을 처벌했다.

한 외국인 관찰자는 이들이 영국 상품 불매운동을 “홍콩과 대영제국에 맞선 전쟁이라고 봤다”고 썼다. ‘홍콩’이라는 지명은 “향기 나는 항구”라는 뜻인데, 사용하지 않은 영국 상품이 쌓이면서 파업 노동자들은 홍콩을 “냄새 고약한 항구”라는 뜻인 ‘초콩’이라고 불렀다.

국민당은 노동자 투쟁을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국민당 세력은 중국 남부에서 세를 넓혀 1925년 6월 말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그러나 공산당이 점차 세력을 키우고 독립적으로 행동하자 국민당은 두려움을 느꼈다.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중국 공산당이 민족주의자들과 타협해야 한다고 압력을 가했다. 당시 러시아 혁명은 고립된 상태였고 스탈린은 반反혁명을 주도하고 있었다.

스탈린 지지자들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적 투쟁을 이끌 능력이 없으니 계급을 뛰어넘는 단결에 의존해야 한다고 믿었다. 중국에서는 ‘진보적’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을 추수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노동자 투쟁의 규모가 컸기 때문에, 국민당은 혁명적 언사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민당은 결코 사회주의 정당이 아니었다. 그들의 목표는 혁명을 이용해 제국주의 열강과 협상을 맺는 것이었다.

계급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는 유복한 상인 집안 소속이었다. 애초부터 국민당 일부는 공공연하게 반공주의 세력을 규합했다. 1925년 내내 투쟁이 계속되면서, 노동자들은 외국인 소유 기업들뿐 아니라 중국인 소유 기업들에서도 파업을 벌였다. 그 전까지만 해도 노동자 투쟁을 찬양했던 중국 자유주의자들은 이제 “도를 넘은 멍청한 행동” 운운하며 노동자들을 비난했다. 중국인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에 맞서 외국인 기업주들과 손을 잡았다.

노동자 투쟁은 사회의 핵심 분단선이 민족이 아니라 계급임을 드러냈다.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의 말처럼, “천대받고 착취당하던 임금 노동자 대중을 투쟁에 나서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필연적으로 민족 부르주아지가 제국주의자들의 품으로 달려가게끔 한다.”

천두슈를 비롯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국민당에서 탈당하게 해 달라고 거듭 호소했지만[당시에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은 단일 국제 정당이었으므로 중국 공산당은 일종의 지부에 해당했다], 결국 경험이 더 풍부한 러시아 공산당에 굴복했다. 스탈린의 입장이 관철됐던 것이다. 중국 혁명에 재앙이 닥쳤다.

1926년 3월 장제스는 노동자 운동을 통제하려 행동에 나섰다. 정치 활동가들을 체포하고 ‘광둥-홍콩파업위원회’를 침탈했다. 무기도 모두 압수했다. 스탈린은 이것이 영국이 퍼뜨린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해 5월 공산당원이 국민당 당직을 맡을 수 없게 하는 새 당규가 통과돼 국민당 내 공산당의 영향력에 제약이 가해졌다. 이에 따르면 공산당은 공산당원들에게 지시를 내릴 때도 국민당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7월 국민당군이 북벌을 시작해 중국 북부 점령에 나섰다. 지방 군벌에 신물이 난 농민들이 각지에서 들고 일어났다. 농민 수백만 명이 조직됐다. 1927년 1월이 되자, 후난성에서 농민회에 가입한 농민의 숫자가 2백만 명이 넘었다. 농민들은 세금을 철폐하고,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며 토지를 점거했다. 농민들은 전족·도박·아편을 금지하고 학교와 도로를 세웠다.

농민

농민들은 세상을 아주 달리 보게 됐다. 어떤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흙과 나무로 빚은 신들은 신성을 완전히 잃었다.”

국민당 지도부는 노동자들을 이용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농민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입지를 다졌다. 아이적스는 이렇게 썼다. “대부분의 경우 국민당 군대는 민중이 자발적으로 봉기를 일으켜 이미 확보한 지역에 진주하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민족주의자들은 농민 봉기도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들은 농업 문제를 담당하는 공산당원에게 농민 봉기를 통제하라고 명령했다. 농민들은 ‘반혁명적’ 지주만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한편 장제스는 광둥성 노동자들을 탄압했다. 8월 장제스는 “노동자들의 소요 행위”를 전부 불법화했다.

1927년 초 국민당은 상하이로 향하고 있었다. 노동조합들은 국민당을 맞이하려고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국민당은 진군을 미뤘고, 그동안 군벌들이 노동자들을 공격해 수백 명을 학살했다. 마침내 국민당이 상하이에 도착했을 때 노동자 시민군이 도시를 통제하고 있었다. 국민당은 노동자 시민군에 무기를 넘기고 일터로 복귀하라고 요구했다. 공산당은 이를 지지했다.

공산당에 대한 국민당의 공격이 점차 심해졌다. 노동조합 투사 수천 명이 구속돼 수감됐다.

일단 노동자·농민 투쟁을 이용해 주도권을 장악하고 나자 국민당은 운동에 등을 돌렸다. 사용자들과 지주들은 이것을 공세로 전환하라는 청신호로 받아들였다. 사용자들과 지주들은 공장과 사업장을 폐쇄하고, 농민들에게 대출을 거부하고, 예금 인출 소동을 일으켜 현금을 마구잡이로 쓸어담았다.

반혁명이 노동자·농민 조직을 짓밟았다. 아이적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혁명으로 죽은 사람들에 대한 대가로 반혁명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지주들은 농민들을 참수하고, 생매장하고, 사살하고, 목을 매달고, 불태우고, 토막 내 죽였다. 한 기자는 일부 지주들이 “농민들을 나무에 매달고 천 번을 그어 상처 낸 뒤 상처에 모래와 소금을 뿌렸다”고 썼다.

트로츠키는 공산당이 노동자 평의회를 건설해 혁명을 전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가능케 할 잠재력은 있었다. 그러나 혁명가들은 [국민당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조직하지 못했다. 당에 새로 가입한 수많은 투사들과 지도부의 다수가 살해당했다. 이 경험 때문에 천두슈는 트로츠키를 지지하게 됐다. [중국 공산당의] 스탈린주의 지도부는 스탈린의 조언을 따랐기 때문에 당한 패배를 천두슈의 탓으로 몰아 그를 비난했다. 이 패배 때문에 공산당은 조직 노동자들에게서 물러나 농민 계층과 게릴라 투쟁에 몰두하게 됐다.

입력 2015-07-18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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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연합당 창당에 부쳐

김인식

2월 27일 창당한 민중연합당은 ‘비정규직 철폐당’, ‘농민당’, ‘흙수저당’으로 이뤄진 “계급 연합 정치”를 표방했다. “계급 연합 정치”는 민중연합당을 창당한 주축 세력이 오래전부터 추진해 온 전략이다. 강승규 민중연합당 공동대표는 “독점적이고 제왕적인 권력을 누리는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심판하기 위해 우선 진보세력이 나아가 야권까지 연대연합 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계급만으로는 신자유주의와 냉전 수구 반통일 세력에 맞설 수 없으므로 중간계급과 (심지어 부르주아지의 일부와도)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 이 전략의 뼈대다. 이 전략은 2010년 지방선거와 2012년 총선 등 선거에서는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기본 이해관계가 정반대인 계급 간의 정치 동맹은 계급투쟁에서 노동운동의 힘을 약화시킨다. 정치 동맹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2016년 2월 27일 민중연합당 창당대회 ⓒ민중연합당

물론 이번 총선에서 민중연합당이 부르주아 야당과 “계급 연합 정치”를 할 수 있는 처지는 못 된다. 더민주당 등 부르주아 야당이 우파의 ‘종북’ 공격이나 받고 선거적 실익은 없다는 계산에서 민중연합당과 확실히 선을 긋기 때문이다.(그러나 일부 선거구들에서는 후보 단일화가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현재 민중연합당은 주로 노동계급과 농촌 중간계급인 농민의 연합을 부각한다. <민중의 소리>는 “이전 진보정당과 비교해 보면 농민들의 참여도가 높다는 점도 눈에 띈다”고 보도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사회가 양대 계급 —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 으로 분열하고 이에 따라 노동계급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나라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대등한 동맹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한편, 민중연합당의 “기본 정책”(강령의 대용)은 민중총궐기 12대 요구들로 이뤄졌다.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를 정치적으로 계승하는 정당임을 보여 주려는 것인 듯하다. “민중총궐기에 참여했던 진보 진영의 힘이 온전히 민중연합당에 실리지 못했지만 진보정당 없이 치러지는 20대 총선을 방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민중의 소리> 사설, 2016년 2월 29일자) (이 글은 민중연합당을 제외한 나머지 정치 세력들 — 정의당, 노동당 등 — 을 진보정당이 아니거나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무시한다. <민중의 소리>에서 정의당은 우경화했다는 이유로 진보정당이 아니라거나, 원내 정당이 아닌 노동당은 존재하지 않는 세력으로 취급하는 기사를 종종 볼 수 있다.)

사실 그전에 민주노총이 민중총궐기의 정치적 표현체로서 선거연합정당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자 진보당 계승 세력 중 일부가 민중연합당을 창당한 것이다. 그동안 진보당 계승 세력은 ‘단일한 이념에 기초한 단일한 세력’으로 이뤄진 정당이 아니라 진보대통합 정당이 필요하다는 노선을 견지했었다. 그런지라 독자 정당 창당은 진보당 계승 세력 내부에서 상당한 논쟁을 불렀다. 이런 논쟁을 의식해서인지 민중연합당은 출범선언문에서 시리자와 포데모스를 언급하며 다른 정치 세력과의 연합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그러나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시리자는 진정한 연합당이 아니다. 시리자의 중추인 시나스피스모스[좌파연합]의 당내 비중이 워낙 압도적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민중연합당은 좌파 민중주의(포퓰리즘)의 성격을 띠고 있다.

총선

민중연합당을 서둘러 창당한 것은 이번 총선에서 진보 정치 내 주된 경쟁자인 정의당에 대응하려는 목적도 있는 듯하다. 특히 정당 투표에서 진보 유권자의 일부분을 민중연합당에 붙잡아 둬, 정의당이 잠식해 들어가는 옛 진보당의 제도권 정치 영토를 수복하고자 하려는 것이다. “민중연합당은 2014년 통합진보당의 해산 이후 생겨난 진보정치의 공백에 뿌리를 내리려는 것으로 보인다.”(<민중의 소리> 2016년 2월 27일자)

실제로 2014년 12월 진보당이 국가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 뒤 제도권 정치 내 진보 정치 영역에서 부분적 공백이 생겼다. 그런데 지난 1년 새 정의당이 이 공백을 메우기 시작했다. 지난해, 약점도 있었지만 파업과 대규모 거리 시위 등 노동자 투쟁이 일어나며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조금씩 회복되자, 정의당이 ‘유일 원내 진보 정당’의 지위를 이용해 이로부터 정치적 혜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 정치 세력이 국가 탄압에 의해 제도권 정치에서 추방된 뒤 생겨난 공백을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메우기 시작한 것이다.

민중연합당은 선거를 통해 사회민주주의적 영향력에 대처하려는 진보당 계승 세력 일부의 시도로 보인다. 국제 정치 경험을 살펴보면 스탈린주의는 사회민주주의 경쟁자에 비해 선거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약점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때 두 세력이 같은 선거구에서 경쟁하지 않도록 후보를 단일화하는 게 좋을 것이다. 또 정당 투표와 관련해 말하자면, 민주노총은 총선공투본에 참여하는 법적 등록 정당들을 지지 대상으로 결정했다. 진보/좌파 다원주의에 입각한 것으로, 노동조합의 단결을 위한 불가피한 지침이다. 

입력 2016-03-02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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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중국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었나?

이정구 (경상대 사회과학연구원 소속 연구원)

많은 사람들은 중국이 서방세계 나라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회라고 생각한다. 1949년 혁명으로 사회주의 국가가 됐고, 비록 1980년 이후 개혁·개방을 통해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마오쩌둥주의를 지도 이념으로 하는 공산당의 지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중국 사회의 토대는 1949년 혁명을 통해 형성됐고, 그 이후로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었지만 중국 사회가 질적으로 탈바꿈한 적은 없다. 이런 이유로 1949년 혁명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오늘날 중국 사회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실마리가 된다.

혁명의 전사(前史)

중국 현대사의 권위자 중 한 명인 모리스 마이스너는 이렇게 썼다. “근대 중국의 혁명사는, 19세기 중반 실패로 끝났던 그리스도교 농민반란으로 시작되어 20세기 중반 마르크스주의자가 이끈 농민혁명의 성공으로 그 정점을 장식한다.” 중국 근현대사의 두 분수령이었던 ‘태평천국의 난’과 1949년 혁명의 공통점을 지적한 이 문장은 날카로운 통찰을 품고 있긴 하지만, 자칫 1925~27년 중국 노동자 혁명을 과소평가할 수 있다.

1925년 5·30 사건[상하이 조차지에서 경찰이 발포해 시위대 십여 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중국에서도 노동자 투쟁이 분출했다. 1927년 3월에는 노동자들이 상하이를 실질적으로 통제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공합작을 유지하라는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지침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장제스의 쿠데타에 대비하지 못했다. 결국 혁명은 유산됐다.

스탈린은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고 광저우, 하이펑, 루펑 등지에서 준비되지 않은 봉기를 일으키라고 지시해 수많은 노동자들을 죽게 만들었다.

그 여파인 1927~30년의 백색공포로 도시 노동조합과 학생조직은 궤멸되다시피 했고, 농촌에서는 무자비한 살육으로 농민협회는 형체도 없이 사라졌고 토지개혁도 되돌려졌다. 당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국민당 장제스는 권력 장악에 가장 큰 걸림돌은 당시 전쟁 중이었던 일본이 아니라, 공산당이라고 봤다. 그래서 그는 중국의 하북 지역을 넘겨주는 당고협정(塘沽協定)을 일본 제국주의와 체결하고는, 국민당 전력(戰力)을 남쪽으로 집중시켜 공산당을 섬멸하려 했다.

공산당은 ‘대장정’을 거쳐 산시-간쑤-닝샤 자치구의 변방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도 시인했듯이, 중국공산당이 이 지역을 ‘선택’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1927~30년의 노동자 투쟁 패배와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로 말미암아, 도시 노동자들에 기반을 둔 조직과 노동자 계급의 혁명 가능성은 현실에서 사라졌다.

결국 1940년대에는 국민당과 공산당 두 세력이 중원의 패권을 두고 경쟁했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고위관료와 군장성, 대자본을 기반으로 하는 부르주아 정당이었고, 공산당은 변방의 옌안을 중심으로 그 지역 농민에 기반을 둔 정당이 돼 있었다.

1940년대에 중국의 이곳저곳을 둘러본 다음 미국 전쟁정보국(OWI)에 정보를 제공했던 그레이엄 펙은 “중국과 같은 사회에서 혁명은 기본적이며 매우 자연스러운 삶의 요소”라고 지적했다. 오랜 내전과 일본 제국주의 지배로 대중의 삶은 파탄났다. 1945년 일본 패망 후에도 사태는 오히려 더 악화됐다.

국민당 정부는 항일전쟁 기간에 국가 경제를 독점하기 위해 화폐 발행을 늘렸고, 이것은 살인적인 인플레를 유발했다. 1948년 옥수수 1소두(小斗)의 가격이 2월에는 12만 위안이었지만 10월에는 1천2백만 위안으로 올랐다. 1937년 물가지수를 100으로 했을 때 1947년 말에는 1천30만으로, 1948년 말에는 2억 8천7백만(!)으로 급등했다.

상하이에는 실업자가 30만 명이나 있었으며, 매일 6천 명의 피난민이 유입됐다. 장제스의 아들인 장징궈는 투기꾼을 단속하는 조처를 취했지만 국민당 정부를 지지하던 큰손들은 건드리지 못했다.

1949년 혁명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중국에서는 국민당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것처럼 보였다. 당시 국민당 정부군은 4백30만 명이었고, 일본군 1백만 명이 남긴 무기를 전부 차지했으며, 인구 3억 명 이상의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은 1945년 이래로 3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했다.

반면 인민해방군은 병력이 1백20만 명이었고, 군사력도 훨씬 뒤쳐져 있었으며, 외부의 원조도 없었다. 인민해방군이 장악한 지역의 인구는 1억 3천만 명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장제스는 3개월 내에 중국공산당을 섬멸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정반대로 3년 뒤에 국민당 세력이 철저히 붕괴됐다.

인민해방군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신념에 의해 움직였지만, 국민당 군대는 강제 징집병으로 이뤄져 있어서 위협으로만 대열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국민당 장교들은 목숨을 유지하는 것에만 매달렸으며, 지휘관들은 부대원들의 급료와 식량을 착복하여 사리사욕을 채웠다.

1949년 혁명의 과정은 본질적으로 국민당 군대와 인민해방군이라는 두 정규군 사이의 전쟁이었다. 도시 노동자와 농민은 구경꾼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국가 경제의 파탄과 빈부격차의 확대, 국민당의 무능으로 인해 이들 대다수 중국인들은 끔찍한 혼란에서 벗어나는 길은 공산당이 승리하는 것밖에 없다고 여겼다.

1949년 혁명은 도시 출신 지식인들이 지휘한 농민 군대가 옛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일본과 서방 제국주의 권력을 축출하고, 새로운 사회 질서의 토대를 놓은 진정한 혁명이었다. 그렇지만 이 혁명은 노동자 대중의 자력 해방을 의미하는 사회주의 혁명은 아니었다. 찰리 호어는 이렇게 지적했다.

“1949년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의 마지막 결정적인 국면에서 미미한 구실을 했다. 상하이에서 20년 전에 장제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떤 주요한 파업이나 도시 봉기도 홍군[인민해방군]에게 길을 닦아 준 바가 없었다.”

공산당은 도시 가까이에 진격하자 이런 명령을 내렸다. “생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과 종업원들은 일을 계속하고 영업은 평상시처럼 돌아가게 하라. … 국민당 관리들과 경찰관들은 자기 직무에 그대로 남아, 인민해방군과 인민 정부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1949년 중국 혁명은 위대한 민족주의 혁명이었지만 동시에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탄생의 계기가 됐다. 당시 베이징으로 입성하는 인민해방군.

마오쩌둥 체제의 등장

1949년 혁명으로 중국 농촌에서는 지주 계급이 사라졌다. 그러나 혁명의 진정한 수혜자는 농민이 아니라 공산당 관료였다. 공산당은 토지개혁을 추진하면서 전통적인 착취 구조를 일소하는 대신 농민들을 당과 국가에 직접 예속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1949년 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유교적 가족 제도에 억눌려 있던 수천만 여성의 해방을 목표로 한 혼인법이 공표됐다. 혼인법은 수세기 동안 자행돼 온 아동 혼인을 금지하고, 최소 결혼 연령을 남자 20세, 여자 18세로 정했고, 축첩과 유아 살해도 금지했다. 이혼은 간단한 쌍방간 동의로 가능했고, 이혼에서 여성의 이익이 우선적으로 보호받았다.

하지만 1950~53년의 질풍노도 같은 분위기가 지나가자 가정 생활은 다시 전통적인 질서를 회복했고, 남녀 평등은 실현되지 못했다. 봉건적 가부장제와 온갖 악폐들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당의 권위가 차지했다. 당은 사생활과 가정사에 깊숙이 개입했고, 배우자 선택에 정치적 기준과 출신 계급을 제시했으며, 부부간 불화의 조정에도 나섰다.

마오쩌둥과 그 후예들은 1949년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이었다고 주장한다. 혁명에서 노동자 대중의 자력 해방이 없었어도, 공산당이 노동자 계급에 기반을 둔 정당이 아니었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 사상을 가진 것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의 존재가 바로 혁명계급의 존재를 증명하는 충분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고 했지, 중국공산당처럼 의식이 존재를 결정한다고 보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낙후한 국가를 물려받은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미국과 대만의 장제스 세력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가하는 압력과 경쟁하기 위해 경제 발전을 빨리 이뤄야 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 관료와 공장 경영자 그리고 군부 지도자들은 빈약한 자원으로 공업 기반을 건설하기 위해 생산과 소비 그리고 인간의 기본 욕구조차 자본축적이라는 목표에 종속되도록 했다. 또한 이들은 불가피하게 노동자·농민과 적대적 관계에 놓이게 됐고, 그 결과 하나의 집단적 계급을 이루게 됐다.

1949년 혁명 이후 벌어진 소련과의 갈등, 인민공사 건설, 대약진운동 등 급변하던 정책들은 바로 신중국 건설 과정에서 마오쩌둥이 직면한 모순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대중의 자력 해방은 조금치도 존재하지 않았다.

입력 2016-03-02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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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로동당 7차대회는 북한 체제 안정의 증거가 못 된다

김영익

지난 5월 초에 열린 조선로동당 7차대회에서 나온 공식 문서들을 다 합치면 1백 쪽이 훌쩍 넘는다. 36년 만의 당대회이니만큼, 당대회 공식 문서에 어떤 내용이 담길지 이목이 쏠렸다.

이 문서들을 읽는 것은 엄청난 고역이다. 거의 모든 문장에 “위대한 수령”이나 “친애하는 김정은 동지” 등의 독재자 찬양이 들어가 있고, 북한이 “사회주의의 보루”라면서도 진정한 사회주의 전통에 완전히 반하는 주장이 곳곳에 있다.

김정은이 집권한 뒤로 정치국 회의와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열리고 이번에 당대회까지 열린 것을 두고 한 인터넷 매체는 조선로동당의 “집단적 협의·결정 구조가 복원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당대회 진행 과정과 결과 등을 보면,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

당대회가 36년 만에 열렸지만, 김정은의 주요 직책은 선거가 아니라 “추대”로 결정됐다. 김정은은 당대회 전에 북한의 모든 시·도에서 당대회 대표자로 “추대”됐고, 당대회 대표자들에 의해서도 노동당 위원장으로 “추대”됐다. 그리고 당대회에서 “우리 당과 국가, 군대의 최고 영도자”로 떠받들어졌다. 선출되지 않고 “추대”된 권력자 김정은은 자신을 “추대”한 당대회에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 5년마다 당대회를 개최한다는 규약이 사라졌기 때문에, 5년 후 차기 당대회를 열지 말지는 오로지 김정은의 의지에 달려 있다.

획일적 체제

김정은이 노동당 위원장이 된 것이 설사 당대표자들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라 하더라도, 이를 인민이 추대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김정은 자신이 이번 당대회에서 공개한 것을 보면, 당대회 대표자 3천6백여 명 중 당·정치일꾼*은 1천5백여 명, 군인은 7백여 명, 국가행정경제일꾼은 4백여 명에 이른다. 대표자의 압도 다수가 당과 국가의 관료나 군부 인사들인 것이다. “현장에서 일하는 핵심당원대표”가 7백18명이라고 하지만, 이들 가운데 노동자가 얼마인지 알 수 없을뿐더러 노동자라 하더라도 “노력영웅”*일 개연성이 크다. ‘당대회 중앙위 사업총화 결정서’(이하 ‘결정서’)에는 “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척도로 하여 사람들을 평가”해야 한다고 돼 있다. 이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들이 누구일지는 뻔하다.

일꾼

북한에서 당직자, 공무원, 기업소 간부 등을 일꾼이라고도 부른다. 예컨대 외교관들을 보통 외교 일꾼으로 통칭한다.

그러므로 조선로동당은 이름과 달리 노동자들이 아니라 지배 관료들의 당인 것이다. 북한 노동자들은 집권 정당의 중요한 결정에서 완전히 배제돼 있다.

조선로동당은 추정컨대 전체 당원 수가 3백만 명이 넘는 거대 정당이다. 그만큼 북한 사회 곳곳에 당 조직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당의 조직들은 해당 지역에서 노동자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기구가 아니다. 결정서는 김정은의 “유일적 영도 밑에 전당이 하나와 같이 움직이는 혁명적 규율과 질서를 엄격히 세워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당조직들은 자기 부문, 자기 단위 앞에 제시된 당정책, 기본혁명과업을 집행하는 데 모든 것을 지향시키고 복종시[켜야 한다.]” 즉, ‘수령’의 의지가 국가기관과 대중단체들에도 관철되는 “유일적 영도 체계”의 중심이 돼야 한다.

노력영웅

노력영웅 칭호는 북한에서 사회 각 분야에서 특출한 공헌을 한 사람에게 수여돼 왔다. 노동자들 중에 노력영웅을 뽑는 것은 북한 당국이 노동자들을 더 쥐어짜내려고 시행한 각종 속도전과 관련이 있다. 생산성 제고를 위한 속도전을 잘 수행한 사례가 ‘모범’으로 강조되면서, 전체 작업장과 다른 모든 노동자들에게 그 ‘모범’이 적용돼 왔다. ‘모범’을 보이면서 계급 상향의 사다리를 잡은 노력영웅들은 극소수였지만, 대다수 노동자들은 그 ‘모범’이 올려 놓은 생산 목표 때문에 고통받았다. 옛 소련의 ‘스타하노프 노동자’와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어떤 이견도 허용될 수 없다. 결정서는 이렇게 강조한다. “당의 사상과 어긋나는 그 어떤 자그마한 요소도, 그 어떤 ‘특수’도 허용돼서는 안 된다.” 오로지 당 기층은 수령을 향한 충성만을 보여야 한다.

한 친북 좌파 매체는 조선로동당이 “민주집중제” 원리에 따라 운영된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토론과 비판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조선로동당의 획일적 체제는 “민주집중제”가 아니라 “관료 집중제”일 뿐이다. 이번 당대회는 조선로동당이 매우 비민주적이고 당과 국가의 중요한 정책이 소수의 결정에 따라 이뤄진다는 점을 새삼 확인시켜 줬다.

그러나 조선로동당의 비민주성은 마르크스주의 전통이나 레닌의 당 개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레닌은 이렇게 강조한 바 있다. “행동의 통일, 토론과 비판의 자유. 오직 이 원칙만이 선진 계급의 민주적 당에 걸맞은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토론과 비판의 자유 없는 행동의 통일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레닌이 이끈 볼셰비키는 전혀 획일적이지 않았고 볼셰비키 당원들은 레닌에게 이견을 제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개인 숭배가 없었던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사회주의 정당의 당내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 원칙과 맞닿아 있다. 반대로 조선로동당은 (무오류의) 수령이 영도하지 않는 인민의 해방은 가능하지 않다고 전제한다. 이것은 관료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일 뿐이다.

따라서 조선로동당의 비민주성은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아니라 스탈린주의와 북한 사회의 성격(즉, 시장 자본주의와 본질이 다르지 않은 국가자본주의 체제)에서 비롯한 것으로 봐야 한다.(북한 사회의 진정한 성격에 관해서는 《북한 국가자본주의의 형성과 위기: 마르크스주의적 분석》(김하영, 노동자연대)을 참고하시오.)

안정?

일부 자민통계 필자는 이번 당대회를 두고 “김정은 체제가 안정에 들어갔음을 보여 줬다”고 평가한다. 북한 당국이 이번 당대회를 열어 “어려운 시기를 지나 새로운 경제 도약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 줬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김정은은 북한 국가가 지난 20~30년 동안 취약해진 상태에서 권력을 물려받은 처지에 있다. 김정일은 아들에게 단지 권력만 준 게 아니라 안보와 경제 등 하루아침에 풀 수 없는 난제들도 함께 안겨 줬다. 그리고 그동안 김정은이 이 난제들을 제대로 풀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김정은은 경제에서 가시적 성과를 얻어야 했다. ‘고난의 행군’ 시기를 포함한 1990년대 동안 북한 경제는 크게 후퇴했다. 1945년 이후, 발달한 공업국에서 수십만 명이 아사하는 사태를 겪은 건 북한이 유일하다. 심각한 경제 위기와 고통 전가 때문에 대중의 불만이 증대해 왔다.

2000년대 대외 무역이 늘면서 북한 경제는 잠시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특히 북·중 무역이 북한의 전체 무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커졌다.

이런 배경에서 김정은은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을 당대회에서 제시했고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 같은 부분적 시장 개혁 조처들을 공식화했다.

그러나 낙후한 북한 경제가 충분히 회복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번 당대회에서 김정은 스스로 여전히 경제의 회복이 더디다는 점을 인정했다.

“경제 전반을 놓고 볼 때 첨단 수준에 올라선 부문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부문은 한심하게 뒤떨어져 있으며 인민경제 부문들 사이 균형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선행 부문이 앞서나가지 못하여 나라의 경제 발전에 지장을 주고 있습니다.”

김정은은 그동안 “경제건설과 핵무력건설의 병진노선”을 표방해 왔다. 이번 당대회에서도 이를 재확인했다. 핵무기를 강화해 방위력을 확보하면, 상당한 자원을 경제건설로 돌려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당대회에서 김정은은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병진노선을 틀어쥐고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면서 인민경제 선행 부문, 기초공업 부문을 정상궤도에 올려세우고 농업과 경공업생산을 늘려 인민생활을 결정적으로 향상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북한 역사에서 이런 병진노선은 처음 제시된 게 아니다. 1960년대 김일성이 ‘경제-국방 병진노선’을 채택한 바 있다. 그러나 그때 미일 안보조약 개정, 베트남전쟁 본격화 등 북한 주변 정세가 악화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병진노선 표방에도 불구하고 북한 당국은 국가 예산에서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대폭 늘렸고 경공업 투자는 삭감해야 했다.

김정은의 병진노선도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북한이 미국 같은 초강대국에 맞서 자체의 군사력을 증대해 자위한다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 따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간 경쟁이 점증함에 따라 북한이 받는 압박도 커지고 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강화한다 해도, 상황은 나아지는 게 아니라 더 악화할 것이다. 그러면 더더욱 북한 당국은 국내 가용 자원의 막대한 몫을 경제 재건에 필요한 산업 부문이 아니라 군비 증강을 위한 산업 부문에 쏟아야 한다. “인민경제 부문들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게 매우 어려워지고, 북한 노동계급은 착취와 빈곤 증대 등 희생을 강요받게 된다.

중국과의 경제 관계가 긴밀해진 것은 김정은에게 또 다른 딜레마다. 북·중 교역이 증대한 것은 당장은 경제를 지탱하는 데 도움이 됐겠지만, 북한 경제가 중국 경제의 리듬(과 세계경제의 변동)의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됐다. 중국 경제의 경착륙 조짐이 점차 커지고 그에 따라 북한의 주요 지하자원 수출도 점차 부진해지자 북한 관료는 그 파장을 우려할 법하다. 2013년 장성택 처형의 명분 하나가 ‘지하자원과 토지를 외국[중국!]에 헐값으로 팔아먹은 매국 행위’였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중국발 경제 위기는 북한 관료 내부에 또 다른 긴장을 자아낼 수도 있다.

미국의 대북 제재에서 벗어나 대미 관계를 개선하는 것도 김정은 앞에 놓인 또 다른 난제다. 김정은은 북한이 핵보유국임을 강조하면서 “핵강국의 지위에 당당히 올라선 것만큼 그에 맞게 대외관계를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망은 밝지 않다.

따라서 ‘북한 체제가 안정됐다’는 주장은 희망 섞인 관측일 뿐이다. 불과 3년 전에 최고 권력자의 고모부(장성택)가 중심이 된 “현대판 종파” 사건이 일어났었다. 그만큼 관료 집단 내부의 동요와 분열이 컸던 것이다. 김정은의 이번 연설과 당대회 결정서에도 “세도”, “관료주의”, “양봉음위”처럼 장성택을 겨냥했던 용어들이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앞으로도 김정은이 북한의 난제들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면 그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지지 말라는 보장은 없다.

입력 2016-05-18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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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대통합당 안(案)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최일붕

4년 전 총선과 그 8개월 뒤 치러진 대선에서 적잖은 노동자들이 박근혜에게 투표했을 것이다. 물론 다수는 아마도 문재인에게 투표했을 것이다. 박근혜에게 투표한 노동자들은 경제 회복을 바라고 그랬을 것이다.

박근혜의 대선 승리는 노동자들의 사기를 다소 떨어뜨렸던 듯하다. 그리고 당시에 진보당이 민주통합당과의 연립정부를 염두에 두고 우경화했던 것도 거기에 다소 일조했을 것이다.

그람시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헤게모니’를 잡는 데서 정당이나 노동조합 등의 ‘시민사회’가 하는 구실을 지적했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이던 시절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도 “노동운동이 개혁주의 사상과 더 중요하게는 그 사상이 표현하는 체제 논리를 수용하면, 자본주의가 가하는 사회적 압력에 취약해진다”고 강조했다.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가 자꾸 양보하면 “좌파 전체를 약화시킨다”고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경고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지난해 11월 코빈은 파리 참사를 명분으로 한 서방의 시리아 공세나 개입을 유엔의 합법성 부여를 전제로 양해할 수 있다고 암시했다.

지속가능  단결해서 얻은 진보·좌파의 총선 성과는 의미있고 중요하다. 이 성과를 이어가려면, 지속가능한 방식이 필요하다. ⓒ사진 이미진

박근혜 정부 등장 후 노동자 운동 내 이데올로기 투쟁의 세력균형은 좌파에 현저하게 불리했다. 분절화와 부문주의로 노동자들은 단결할 수 없으므로 싸울 수 없다던가, 특히 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렇다던가, 진보정당이 재건되는 게 노동운동 재기의 선결 조건이라든가 하는 등의 주장이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떨어뜨려 전진을 가로막고 있었다.

노동자연대는 소규모였어도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우리 몫을 하려 애썼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통해,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사상과 투쟁했다.

또, 노동자연대는 민주노총 안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좌파적인 집행부가 등장케 하는 데 일조했다.

이 사상 투쟁과 정치 운동은 서로 결합돼 다소 효과가 있었던 듯하다. 적어도 민주노총 좌파가 대세에 영합하는 것을 어느 정도 견제했던 듯하다.

물론 대규모 노동자 투쟁이 일어났더라면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반동적 사상을 크게 밀어 내는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두세 차례의 민주노총 하루 파업과 여러 차례의 소규모 노동자 투쟁이 일어났고, 여기에 노동자연대의 기여도 일부 있었다.

한편 세월호 참사는 광범한 대중에게 큰 심리적 충격을 줬지만, 그에 대한 항의 운동이 노동운동 내에 미친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반동적 사상을 밀어 낼 만큼 강력하고 급진적이지는 못했다. 박근혜 정부에 대한 반감은 증대시켰겠지만 말이다.

지속 가능성을 위한 조건들

그러므로 이번 총선에서 박근혜가 참패한 원인은 주로 경제를 못 살린 것에 대한 심판을 받은 것과, 부차적으로 노동자 저항들과 세월호 항의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박근혜 참패보다 정말 더 중요한 점은 적잖은 노동자들이 박근혜 심판에서 더 나아가, 진보 측에 투표해 여덟 명을 당선케 한 것이다.

이는 주로 자본주의 야당들이 박근혜 정부에 너무 타협적이었던 것에 대한 불신을 표명한 것일 뿐 아니라, 진보·좌파 정치의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노동자들은 매우 중요하다.

이 진보 투표는 정의당과 부울경연합의 의회 진입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정의당과 부울경연합이 모두 포함되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연합하는 정당을 설립한다는 생각은, 일단은 괜찮은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정당은 지속 가능해야 한다. 정의당계와 자민통계는 과거에 두 차례나 분열한 경험이 있다(2008년 초와 2012년 여름). 노동자연대는 그 원인이 매우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제국주의 체제의 동아시아 내 갈등 문제와 북한 사회 성격 문제라는 근본적인 문제 말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지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어졌으면 깊어졌지 말이다.

그러므로 지속 가능하려면 다음과 같은 강력한 조건이 붙어야 한다.

첫째, 정규적인 일상 활동을 공유하는 통상적인 정당이 아니라 선거연합 성격의 정당이어야 한다. 그런 정당이 어떤 모습일지는 이번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총 주도로 형성된 총선공투본을 정당 형태로 발전시킨 모습을 상상하면 이럭저럭 비슷할 것 같다. 명칭은 예컨대 ○○당(정의당), ○○당(진보연대), ○○당(**당) 하는 식이면 될 것이다.

둘째, 정의당과 자민통계 그리고 둘의 완충지대 격인 제3세력을 다 당 중앙에 포함해야 하지, 이 가운데 하나만 포함하는 연합이라면 불안정할 것이다.

(노동자연대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스스로 그 제3세력에 포함되려 애쓰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정의당과 자민통계의 합법 전술용 정당은 집권해 개혁 입법으로 사회를 개혁할 목적으로 선거에서의 승리에 맞춰진 정치 조직이다. 유권자 영합주의의 압력이 있을 수밖에 없고, 이는 의원단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다. 게다가 의원단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당내 사회주의자들의 처지는 녹록하지 않다. 이때 의회 밖에서 벌어지는 운동만이 사회주의자들이 당내 우파의 압력을 버텨 내고 원칙을 고수할 힘을 줄 텐데, 이 점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의 정견을 내놓으면서 독자적 조직으로서 활동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 당직선거나 공직선거 등을 둘러싼 갈등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선거연합당은 대선을 앞두고 더민주당(물론 국민의당도) 같은 자본주의 정당과 연립 협약을 맺어서는 안 된다. 정의당 못지않게 자민통계도 부르주아 정당과 연립하기를 갈망한다. 선거연합당의 목적은 선거에 대처하는 것이다. 진보·좌파 측의 단일 후보를 선출 또는 선정해 그 후보가 선거 운동을 이용해 기존 체제를 비판하고 노동자 투쟁을 찬양·고무하게끔 해야 한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당과 협약을 맺는다면 그 정당은 기존 체제를 좌파적 견지에서 비판하지도 못하고, 또 노동자 투쟁을 확실하게 지지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 정치 조직이라면 도대체 뭐에 쓸 것인가?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지금부터 독자 후보의 사퇴 불가를 분명히 못박자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 주장이 두 가지 점에서 부적당하다고 본다. 첫째, 이 문제를 지금부터 확실히 하자고 강조하는 건 선거 전술에서 후보 거취 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효과를 낸다. 좌파의 선거 참여는 후보 개인 중심의 활동이기보다는, 후보 주위에 결집한 선거 운동과 그 선거 운동을 지지하는 훨씬 더 폭넓은 대중 운동이 돼야 한다.

둘째, 아무리 대선이 1년반밖에 안 남았다고 해도 후보 거취 문제를 지금부터 확정해 두겠다는 건 새 연합체에 참여할 세력의 폭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효과를 낸다. 계급 투쟁의 수위와 부르주아 야당 후보가 누구냐에 따라 나중에 투표 방침을 정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참여를 주저하도록 만들 수 있다.)

투 트랙 전략 자민통계의 ‘상설연대체+진보대통합당’ 구상은 인민전선 전략의 양대 축이다. ⓒ사진 출처 참세상

더 중요한 게 있다

자민통계와 정의당, 그리고 다른 진보·좌파 단체들이 연합할 수 있는 더 중요한 틀은 제한된 구체적 이슈를 둘러싸고 형성되는 공동전선들이다. 이것이 선거연합당보다 더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뒤따른다. 자민통계는 진정한 공동전선을 우회해 언제나 민중전선으로 몰고 가려는 경향을 보였다. 우리는 이를 민중총궐기 준비 단계에서 보았다. 물론 민중총궐기는 실제로는 압도적으로 민주노총 조합원 총궐기였고(전체 참가자 9만 명 가운데 7~8만 명), 노동자들의 거리 항의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민중총궐기를 제안하고 계획한 노조 지도자들과 노조 안팎의 민중주의자들은 노동자 운동을 중간계급들이나 심지어 자본주의 정당과 친화적인 방향으로 이끌려는 경향이 있다. 즉, 인민전선으로 연결시키려 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민중주의자들, 특히 자민통계가 말하는 ‘상설연대체’는 그들이 추진하는 진보통합정당과 한 짝을 이루어 인민전선 전략에 이바지하도록 구상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보통합정당 대신에 사안별 공동전선을 대안으로 강조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자들의 경제적·정치적 투쟁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민주노총 지도자들에게는 민주노총에 기반을 둔 정당이라는 아이디어가 솔깃할 것이다. 그러나 비효과적이고 지속 가능하지 않은 정당 설립을 추구하기보다는, 지금으로선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이 걸린 당면 투쟁을 더 신경써야 한다. 그래야 적절한 때 효과적이고 지속 가능한 결집체를 구축할 수 있다.

입력 2016-06-01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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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의 정치 방침과 진보대통합당 안에 대해

김인식

총선이 끝나자마자 민주노총의 정치 방침 문제가 민주노총 상층 간부들의 제일가는 관심사가 됐다. 내년이 대선이기 때문에 이 논의는 곧 일선 활동가들로까지 확대될 것이다.

민주노총의 정치 방침에서 주요 쟁점은 새 노동자 정당 건설 문제다. 부울경연합을 필두로 해 자민통계가 일제히 ‘노동 중심 진보대통합당’ 안(案)을 주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울산에서 두 명의 노동자 국회의원이 탄생한 것에 크게 고무돼 ‘민주노총당’을 만들자고 촉구하고 있다.

우선순위 선거연합이나 진보대통합당 등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은 대중투쟁 건설에 도움이 되냐가 기준이 돼야 한다. ⓒ사진 이미진

그러므로 많은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에게 진보대통합당 안은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진보대통합당이 정계 진출의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2년 여름 통합진보당이 분열한 뒤로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에게는 마땅한 정치적 표현체가 없었다. 일부 노동조합 간부들이 정의당으로 가긴 하지만, 이 당은 과거 민주노동당만큼 민주노총과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신승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롯해 전현직 민주노총 간부들 일부가 진보대통합당 건설 활동에 나서고 있다. 박유기 현대차 지부장도 최근 울산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 비슷한 생각을 말했다. “노동자가 후보 단일화의 여세를 몰아 진보정당 단일화도 밀고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민통계의 프로젝트

개혁주의적인 노동조합 상근간부층 일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겠지만, 진보대통합당 안은 본질적으로 자민통계의 프로젝트다.

진보대통합당과 상설연대체는 자민통계의 핵심 전략을 이룬다. 자민통계는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정당을 건설하지 않고 진보대통합당이나 전선체 안에서 움직이는 것(또는 전선체로서 움직이는 것)을 선호하는 오랜 스탈린주의 전통이 있다. 이때 합법적 진보대통합당이 제도권 정치를 맡고, 상설연대체가 대중 투쟁을 담당한다. 이 프로젝트가 가리키는 전략적 방향은 인민전선이다.

인민전선 전략의 뼈대는 노동계급만으로는 신자유주의와 냉전 수구 반통일 세력에 맞설 수 없으므로 중간계급과 (심지어 부르주아지 일부와도)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에서는 자본주의 야당과 “전략적 야권연대”를 체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전략은 2010년 지방선거와 2012년 총선에서 각각 민주노동당과 진보당에게 상당한 선거적 실리를 안겨 줬다. 그러나 기본 이해관계가 정반대인 계급 간 동맹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의 힘을 약화시킨다. 정치 동맹자들이 곧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에서 민중연합당은 자본주의 야당과 체계적으로 “전략적 야권연대”를 추진할 수 없었다. 더민주당 등 자본주의 야당이 선거적 실익이 없다는 계산에서 거부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일부 선거구들에서 민중연합당 후보가 자진 사퇴하는 방식으로 후보 단일화가 있었다.)

그렇다고 자민통계가 인민전선 전략을 폐기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인민전선은 자민통계의 역사적 전통이다. 전통은 물질적 토대가 변하지 않는 한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여기에 울산의 선거적 성공이 자민통계로 하여금 내년 대선에서 인민전선(연립 정부)을 재추진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 것 같다.

진보대통합당은 인민전선을 실현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자민통계가 총선 직후 신속하게 ‘어게인 민주노동당’ 슬로건을 내건 이유다.(권오길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은 ‘민주노총당’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과거 민주노동당 창당 때와는 달라진 형편이 있다. 민주노동당은 노동계급이 직면한 정치적·사회적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민주노총이 주도해 만들었다. 반면, 현재 민주노총은 진보대통합당 건설을 주도할 힘이 1990년대 후반 같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다. 그래서 민주노총과 여타의 정치 세력들이 연합해 상시적인 정당을 만들자는 것이 진보대통합당의 발상이다.

진보대통합당 안의 강력한 근거는 울산의 경험이다. ‘울산에서 처음으로 모든 정파가 총단결하고 노동조합이 앞장서서 선거 운동을 해 계급 투표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울산 동구와 북구에서 노동자 후보들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은 분명 통쾌한 일이었다. 또, 계급과 정치 성향은 상관관계가 없다는 일부 좌파의 주장이 틀렸음도 보여 줬다.

그러나 울산의 경험을 곧장 전국화하는 것은 과잉 일반화의 오류에 해당한다. 울산의 경험을 이치에 맞지 않게 억지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울산의 승리를 “진보당의 정치적 복권”으로 해석하는 것이 그런 경우다. 물론 당선한 두 후보는 진보당 출신이다. 그러나 결정적 승인(勝因)은 그들이 노동자 후보이자 진보·좌파의 단일 후보로서 선거에 출마했다는 사실이다. 반면, 진보당의 계승 세력으로 여겨진 민중연합당의 전국 득표는 극히 저조했다. 진보대통합당 안 — 진보당도 진보대통합당을 표방했다 — 에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무리하게 갖다 붙이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과잉 일반화 울산의 승리를 "진보당의 복권"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다. ⓒ사진 출처 민중연합당

정의당의 기본 성장 전략

정의당은 지난해 말 민주노총의 선거연합당 제안조차 내키지 않아 한 바 있어, 진보대통합당을 건설하려고 하지 않을 것 같다.

정의당 지도부가 진보대통합당 안에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이번에 당선한 진보 국회의원 8명 중 6명이 정의당 소속이다. 원내에서 정의당이 다수인 것이다. 크게 아쉬울 것 없다고 생각할 법하다.

둘째, 정의당의 주요 지도자들은 진보대통합당보다는 더민주당과의 야권연대에 더 관심이 있는 듯하다.(물론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 둘이 길항관계인 것은 전혀 아니다.) 이번 총선에서도 정의당 지도부는 야권연대를 적극 제안했지만, 더민주당이 우클릭 하면서 이 제안을 거부해 성사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정의당의] 지역구 의석은 최소화됐다.”(정의당 중앙당 20대 총선 평가기획팀이 제출한 ‘정의당 20대 총선 평가’에서)

여기서 정의당 지도부가 내린 결론은 “힘에 기초하지 않고서는 야권연대 전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민주당 등으로부터 선거구 양보를 이끌어 내려면 지역 조직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정의당의 수도권 지지율은 10퍼센트를 상회한다. 따라서 전략적 야권연대는 여전히 정의당의 핵심 성장 전략이다. 정의당의 주요 지도자들은 내년 대선에서도 더민주당 등과 연립 정부를 수립하고 싶어 한다.

셋째, 정의당 안에는 스탈린주의 세력과의 합당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게 존재한다. 동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 간 갈등과 북한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두 정치 세력의 날카로운 차이점이 드러났다. 북한의 핵실험, 단거리 미사일 발사, 서해 NLL 인근 해상사격훈련, DMZ 목함지뢰 폭발 등에 대해 정의당은 북한을 강경하게 비판하는 입장을 발표해 왔다.

마지막으로, 정의당 내 노동·좌파 계열도 진보대통합당 안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보다 내심으로는 부울경연합이 정의당에 입당해 그 당 안에서 노동·좌파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선호하는 듯하다.

정의당은 노동자 정당이 아닌가?

자민통계가 ‘노동 중심 진보대통합당’을 주장하는 것은 그들이 정의당을 노동자 정당으로 보지 않고 있음을 함축한다.(일부 급진좌파도 이렇게 주장한다.)

자본주의적 노동자당 정의당은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바라는 것이지, 노동 기반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 조승진

정의당이 노동계급과 맺고 있는 조직적·전통적·이데올로기적 연계가 과거 민주노동당만큼 밀접하지 못하다. 그러나 그 당의 당원과 투표 기반은 주로 노동계급이다. 정의당 당원 3만 명 중 2만 명이 노동자다.(그중 민주노총 조합원이 1만 명이다.)

물론 지난해 11월 정의당에 합류한 노동계 리더 출신자 하나가 당의 비례 후보 경선에서 후순위에 배정돼 당선권 밖으로 밀려났다. 이를 두고 정의당이 ‘노동을 홀대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정작 비례 후보 경선 때는 노동계 후보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반면, <노동자 연대>는 당시 노동계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노총 소속 정의당 당원이 1만 명이라 해도 전체 민주노총 조합원의 1.25퍼센트밖에 안 된다. 즉, 정의당의 조직 노동자 기반은 아직 미약하다. 정의당이 성장하려면 조직 노동자 운동을 훨씬 더 중시해야 한다. 그 점에서 정의당의 비례 후보 결정은 문제가 많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의당이 노동자 정당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심상정·노회찬·이정미 의원 등은 모두 노동운동 출신이다. 그러나 정의당의 지도부와 정책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개혁해서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에(“헌법 안의 진보”), 그 당은 레닌이 말한 “자본주의적 노동자당”이다.

정의당은 사회민주주의적 정경 분업 원칙 — 파업이나 임금 인상 등 경제적 쟁점들은 주로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다루고, 주로 선거 문제로 여겨지는 정치적 쟁점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 소속 의원들이 다루자는 것 — 에 따라 민주노총과 역할 분담을 하고자 하는 것이지, 민주노총과의 단절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심상정 의원이 오래 전부터 주장해 온 ‘민주노총당, 운동권 정당 극복’론이다. 그러나 이런 정경 분리는 정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자들의 경제적 힘을 사용하는 것을 삼감으로써, 노동조합의 경제주의적·부문주의적 약점을 강화시킨다는 문제점이 있다.

반면, 자민통계는 민주노총을 지배하고 싶어 한다. 이것은 현실에서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 방침을 부활시켜 진보대통합당을 만들려는 것으로 나타난다. 당이 계급을 대표하고, 따라서 대중 운동은 정당의 전달 벨트일 뿐이라는 스탈린주의적 당 개념을 보여 준다.

이런 당 개념 때문에 자민통계는 자신들 밖에 있는 노동계급 조직과 운동에 흔히 종파적 태도를 취한다. 실제로 자민통계 활동가들은 ‘정의당에 민중성과 투쟁성이 부재하다’고 비판한다. 이 말을 선거 결과와 결부시키면 정의당의 득표는 정치적 의미가 없음을 함축한다. 뒤집어 말하면 울산의 결과만이 ‘민중적’이고 ‘투쟁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정의당의 전진을 부정하는 것이자 무엇보다, 정의당에 투표한 노동자 대중을 무시하는 종파주의다. 이런 태도로는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노동자들과 진지하게 공동 행동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진보대통합당 안에는 분열 요인들이 많다

물론 많은 노동자들이 진보·좌파의 단결을 바랄 것이다. 선거에서 노동자 정당들이 분열하는 바람에 자본주의 정당들이 표를 가져가는 것을 막고 노동자들의 정치 진출을 이루고자 하는 정서는 정당하다. 2012년 총선 때 경남 창원을에서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 후보가 각각 따로 출마하는 바람에 새누리당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해 노동자들이 크게 실망한 바 있다. 이런 이유로 <노동자 연대>는 지난해 말 민주노총이 선거연합당을 제안하기 전부터 이미 그런 대응의 필요성을 주장했다.(이번 호에 실린 최일붕의 ‘진보대통합당 안에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기사를 보시오.)

선거연합당처럼 선거에서의 공동 대응 수준을 넘어 진보대통합당 안은 상시적인 정당을 지향한다. 그러나 이는 단결 촉진이 아니라 많은 분열 요인들을 안고 있다. 노동자 운동 안에 중요한 정치적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진보대통합당 안은 이런 차이를 애써 간과하고 강령적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자민통계의 역사적 전통을 봐도 그들은 서로 동의하는 구체적 요구 중심으로 투쟁을 건설하는 게 아니라 주로 자신들의 강령을 채택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의 문제점은 과거 민주노동당과 그 후신인 진보당의 분열이 보여 줬다. 갈등을 촉발시킨 날카로운 쟁점들 — 각각 일심회 당원 제명 기도와 경선 부정 문제 — 이면에는 원칙과 이데올로기의 차이가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 차이가 좁혀졌다는 증거는 없다. 따라서 북한 문제, 계급투쟁 문제, 대선에서의 야권연대와 연립 정부 문제 등이 불거지면 진보대통합당은 또다시 쓰라린 분열을 겪을 수 있다.

자민통계는 주로 패권주의를 중심으로 지난 시기의 분열을 평가하는 듯하다.(2012년 진보당 경선부정과 중앙위 폭력 사태가 성찰 항목에서 빠져 있다!) 자민통계는 패권주의를 자신들이 운동의 다수파라는 ‘숙명’에서 비롯하는 문제로 사고하는 듯하다. 그래서 조직 운영 방식 문제에 골몰한다.(《진보정치, 미안하다고 해야 할 때》에서도 이런 기술적 사고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기층 노동자 운동에서 자민통계는 다수파가 아니다. 노동조합 상근간부층 수준에서는 근소하게 다수일지 몰라도, 일선 활동가와 현장조합원 수준에서는 결코 다수파가 아니다. 2014년 12월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좌파인 한상균 후보가 이긴 일이 이를 입증한다. 총선에서도 자민통이 노동계급 다수의 지지를 얻은 게 아니다. 정의당이 훨씬 더 많은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따라서 자민통계의 다수성은 사실도 아니거니와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좌파가 다수성 자체를 문제 삼는 것도 아니다. 패권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세력이 동의하지 않고 반대하는 것을 자민통계가 자주 무리하게 추진하기 때문이다.

당장의 사례를 봐도, 민주노총에 특정 정당 지지 방침을 채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필요한 분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이 ‘정치적 중립성’을 내세워 정치적 쟁점을 회피하는 것이 좋다고 보지 않는다. 노동조합이 세월호 참사, 여성·성소수자 차별, 이주민 속죄양 삼기 등에 반대하고 행동을 조직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단결과 계급의식 향상에 크게 기여한다.

그러나 노동조합 안에는 정치적 차이들이 존재한다. 계급의식이 불균등하게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노총 안에 복수의 진보·좌파 정당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노동조합 쟁점으로 행동 통일을 이루되, 정치적으로는 먼저 다원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특정 정치 쟁점을 둘러싸고 코드가 맞을 때 비로소 공동 행동을 하는 방식이어야지, 그러지 않고 ‘진보 정당 단일화’를 요구하는 것은 커다란 분열을 낳고 원한만 깊어지게 할 것이다. 그리 되면 조직 노동자 운동이 약화될 것이다.

그래서 민주노총이 진보대통합당에 참여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보다는 선거연합정당이 선거 시기에 노동계급의 단결을 최대화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는 진보·좌파 다원주의에 입각하면서도, 사안별로 괜찮은 입장을 취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신축성을 발휘하는 것이 좋겠다. 어느 한 정당이나 개인, 운동이 언제나 올바른 입장을 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설연대체와 공동전선

사회주의자들은 자민통계의 또 다른 프로젝트인 상설연대체를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는 않는다. 대중 운동이 활성화돼 계급의식이 고양되는 특정 시기에는 포괄적 쟁점들을 아우르는 상설연대체가 그 기능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시기가 아니다.

게다가 자민통계의 상설연대체는 자본주의 정당과의 동맹을 지향한다. 이 때문에 2005∼06년에 격론이 벌어졌고, 민주노총이 최종 불참을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한국진보연대다.

자본주의 야당들과의 동맹 정책 때문이 아니어도 상설연대체에 좌파와 민주노총이 참여할 이유는 없다. 무엇보다 각 단체의 당면 전망과 중장기 전략, 강조점, 정치 문화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민통계가 아니라 민주노총이 주도한다고 해도 이 점은 별로 바뀌지 않을 것 같다. 2013년 민주노총이 발의한 ‘민중의힘’은 그 뒤 일어난 운동들에서 실질적 도움이 되지 못해 해산될 운명에 처해 있다.

따라서 실효성도 없는 상설연대체가 아니라 제한된 특정 쟁점들을 중심으로 공동 행동을 할 수 있는 사안별 연대체가 단결에 이롭다. 실제 투쟁 경험들을 봐도 어지간한 대중 행동은 — 2008년 촛불, 용산 참사, 세월호 등 — 사안별 연대체가 주도했다.

도시 노동계급 한국 사회 변혁의 운명은 도시에 달려 있다. ⓒ사진 이미진

노농빈 동맹이냐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냐

자민통계가 말로라도 노동계급을 강조하는 것은(‘노동 중심 진보대통합’) 한국에서 계급투쟁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자민통계는 노동계급을 중시한다고 하면서도 “각계각층”을 아우를 것을 강조한다. 중간계층들이 포함된 노농빈(노동자·농민·빈민) 동맹이다.

노농빈 동맹은 자민통계가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성격과 변혁 목표와 관련 있다. 자민통계가 보기에 사회주의는 먼 미래의 문제이고, 당면 과제는 각계각층을 결집해 박근혜 정권과 냉전 우파를 물리치고 부르주아 포퓰리스트 정당과 연합정부를 구성해 “진보적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것이다. 즉, 민족주의·민주주의 변혁이 당면 과제인 것이고 그 주체는 노농빈 동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노농빈 동맹은 한국 사회의 계급 구조에 들어맞지 않는 전략이다. 한국은 대규모 도시화와 프롤레타리아화를 겪었다. 경제활동인구 중 노동계급의 비율이 압도적이다. 경제활동인구 2천6백95만 5천 명 중 임금 노동자는 71.4퍼센트인 1천9백23만 3천 명이다.(2016년 3월 통계청 자료)

반면, 한국 자본주의의 발달로 농민 계층은 극도로 수축됐다. 2015년 12월 농민 인구는 2백60만 명으로, 경제활동인구의 10퍼센트도 안 된다.(2015 농림어업총조사) 특히 고령화가 심화됐다. 70대 이상이 17퍼센트로 가장 많고, 고령 인구(65세 이상)가 38.4퍼센트다.

빈민은 대부분 도시 노동계급의 일부이며 조직된 빈민은 정치적으로 좌파적이거나 정의당 친화적이다.

요컨대, 한국 사회 변혁의 운명은 농촌이 아니라 도시에 달려 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민주노총이 비할 데 없이 감수성 있게 대처해야 하는 차별 문제는 여성·성소수자·이주민 차별 문제다. 이들에 대한 차별이 지배계급의 분열 지배 전략에서도 핵심 기제로 작동한다.

입력 2016-06-01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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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마오주의의 광기인가 노동자 반란인가?

이정구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소속 연구원)

경제는 둔화하고 사회양극화가 심화되자,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의 기억을 떠올리는 중국 노동자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1981년 덩샤오핑이 이끈 개혁파가 문혁이 “어떠한 의미로도 혁명 혹은 사회적 진보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는 ‘중국공산당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발표했지만, 중국 사회의 불안정이 증대할수록 문혁이 대안으로 자주 거론된다.

어떤 사람들은 문혁에 현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대안이 존재했다고 여긴다. 그들에게 문혁은 ‘마오주의 광기가 빚어낸 비극’이 아니다. 오히려 공장 관리자의 특권과 권위에 대한 노동자들의 비판과 도전,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괴리 극복, 생산의 민주적 관리를 뜻한다. 과연 문혁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오늘날 문혁의 의미는 무엇인가?

1966년 5월 16일 마오쩌둥이 초안을 작성해 당 중앙위원회 명의로 선포한 5 · 16 통지를 계기로 문혁이 시작됐다. 그러나 근본적 원인(遠因)은 대약진운동의 실패와 마오쩌둥의 실각 그리고 사회주의 교육 운동 추진 과정에서 표출된 마오쩌둥과 그 정적들 사이의 갈등이라 할 수 있다. ‘해서파관’(중국 명대사 전문가인 우한이 마오의 요청으로 쓴 역사극) 논쟁들은 그 표면일 뿐이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했지만 농업사회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었다. 1958년 마오쩌둥이 공상적 의지주의에 기대어 대약진운동을 펼쳤지만 5천만 명의 아사라는 끔찍한 결말을 맞이했다. 대약진운동은 중국의 물질적 조건이 자본축적을 지속할 준비가 돼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를 강제로 밀어붙일 경우 사회적 갈등이 생겨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마오쩌둥은 물질적 토대를 바꾸고 이 목적에 부합하는 상부구조를 주조할 필요성을 느꼈는데, 그 수단이 바로 교육과 문화였다.

마오주의의 광기?

 

1966년 5 · 16 통지의 결정에 따라 1964년 펑전을 조장으로 만들어진 ‘문혁 5인소조’가 해체됐으며, 당의 각급 조직에서 수정주의와 주자파(走資派, 문혁 때 공산당 내에서 자본주의 노선을 주장하는 정파라는 의미)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문혁은 급속하게 정치 운동으로 변해 갔고, 첫 희생자는 중앙정치국원이었던 펑전이었다. 중앙 선전부와 문화부에 대한 전면 숙청 작업이 이어졌고, 장칭(江靑)과 천보다(陳伯達)의 지휘 아래 급진적 지식인들 중심으로 문혁 소조를 구성했다. 그리고 문혁 소조의 지시에 따라 마오주의자들이 베이징과 전국의 주요 보도기관을 장악했다.

대학에서도 문혁이 시작됐다. 베이징대학의 젊은 철학강사 네위안쯔가 학교 당국을 비판하고 혁명 지식인들에게 전투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는 대자보를 썼다. 학교 당국이 대자보를 제거했지만, 1주일 뒤에 마오쩌둥은 “네위안쯔의 대자보는 1960년대의 파리코뮌 선언이며, 그 중요성은 오히려 파리코뮌을 능가한다”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의 이런 평가는 1958년 농촌 대중을 인민공사로 통합했을 때와 같은 공상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문혁으로 계급이 궁극적으로 분쇄되고 세 가지 격차(공업과 농업,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격차)가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은 지독한 관념론이었다.

네위안쯔의 대자보를 계기로 홍위병 학생들이 권위적인 학교 당국에 반란을 일으켰다. 이 젊은 홍위병들이 마오쩌둥의 문혁에서 행동대 구실을 했다.

1966년 8월 중국 공산당 제8기 11중전회에서 16조가 통과됐다. 그 내용은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당내 실권파를 타도하고 네 가지 구습(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을 파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16조는 문혁의 대상을 도시의 문화·교육기관, 공산당, 그리고 정부 기구로 제한해 기본적인 생산 단위로 확대되는 것을 용의주도하게 억제했다. 저우언라이는 홍위병들이 공장과 농촌에 들어가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마오는 이제 문혁의 퇴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문혁의 목적을 어느 정도 달성했을 뿐 아니라 홍위병 운동 내부 또는 홍위병과 공산당 간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당내에 주자파의 전복 음모는 없었고, 류사오치(당시 국가 주석이자 마오쩌둥의 정적)도 스스로 개조하기만 한다면 그를 배제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1966년 11월부터 당 중앙은 홍위병 운동을 중단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기울였다. 하지만 문혁이 노동자들에게 전파됐다. 노동자들이 생산을 중단하고 베이징으로 몰려가 낮은 임금과 열악한 작업조건을 성토하며 류사오치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상하이에서는 부두 노동자, 철도 노동자, 운송 및 발전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당 중앙은 노동자들이 처한 객관적 조건, 즉 1949년 이후 국가가 주도한 자본 축적이 낳은 결과에 맞서 파업을 벌였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했다. 그러면서 주자파들의 선동이 배후라고 몰아갔다. 당 중앙은 노동자에게로 번진 문혁을 재빨리 종결하고 사태를 평정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민해방군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런데 북쪽으로는 러시아 군대와, 남쪽으로는 베트남 군대와 대치하고 있고, 미국의 군사훈련에 대비하고 있는 인민해방군을 빼내는 일은 모험이었다. 심지어 일부 반란군은 인민해방군을 공격하기도 했고, 또 일부 인민해방군은 급진적 요구에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1967년 1월 마침내 반란 세력들을 통제하고 시설물을 방어하며 모든 국가 기구들을 장악하라는 지시가 인민해방군에게 내려졌다. 대중 혁명조직 대표, 당 간부, 군대로 구성된 혁명위원회(삼결합)에서 인민해방군의 비중이 높아졌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모든 것을 타도하라’는 슬로건은 반동적인 것으로 치부됐다. 계약 노동자나 견습공, 제대 군인, 농촌에서 돌아온 학생들이 결성한 각종 조직들은 ‘반혁명적인’ 단체로 간주돼 금지됐다. 학생들은 학교로 복귀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성무련

 

1966년 하반기에 노동자 반란들이 등장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조직들이 자생적으로 등장했다. 그중 성무련(후난성 무산계급 혁명파 대연합위원회)이 가장 흥미롭다. 성무련은 역사의 진보를 방해하는 관료적 부르주아지와 쇠퇴하는 붉은 자본가들이 중국을 지배하고 있다고 봤다. 성무련은 혁명을 한 국가를 다스리는 계급들의 교체로 봤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특정 개인들의 교체가 아니라 국가 그 자체를 바꾸는 것이 혁명의 과제였다. “혁명의 열매들은 최종적으로 자본가 계급이 차지한다. … 관료들의 거부로 혁명은 부르주아 개혁주의가 됐고, 문화대혁명 전의 관료적 지배가 지그재그 과정을 거치면서 또 다른 종류의 부르주아 관료 지배로 바뀌었다.”

성무련은 혁명위원회의 삼결합이 이미 패배한 관료들의 복권에 지나지 않는다고 봤다. 따라서 1949년 혁명 이후 17년을 뒤집어엎을 실질적인 혁명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부르주아 계급을 패퇴시키고 관료로부터 자유롭고 새로운 사회, 즉 중국의 인민 코민을 창조하는 것이 목표다.” 십수 년 동안 문화적 통제를 가하고 사회적 규율을 부과했음에도 레닌주의적 맹아들이 등장한 것에 당 지도부는 경각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반란들은 더욱 폭력적이고 격렬해졌다. 우한군구 사령관 천자이다오 장군이 ‘삼결합’을 후원하는 백만웅사 집단을 후원하고, 그에게 항의한 공안부장 셰푸즈와 선전부장 왕리가 감금됐다는 말이 돌았다. 홍위병은 베이징에 머물면서 외국인을 공격했고, 8월에는 영국 대사를 감금하는 일도 벌어졌다. 1967년 여름 마오쩌둥은 “중국에 내전이 없다고 말하지만 나는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무장 투쟁이다” 하고 말했다.

1968년 소련 군대가 체코의 ‘프라하의 봄’을 진압했다. 이 소련 군대가 중국도 침략할 수 있었다. 더욱이 1969년 우수리 강과 아무르 강에서 중국과 소련 군대가 무장 충돌을 벌이기도 했다. 당 지도부는 분열을 수습하고 국내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 화급하다고 생각했다. 1969년 4월 제9차 당대회에서는 문혁의 잔재를 깨끗이 정리하고 소련의 위협에 맞서 전국 지도부의 일부를 복권시켜 단결을 도모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문혁은 그 당시 중국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냈다. 권력의 두 기둥인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은 타격을 받지 않았다. 경제는 대약진운동 동안에 겪었던 것과 같은 혼란을 겪지 않았다. 기껏해야 1967년에 수출이 12퍼센트 줄었을 뿐이었다. 다른 주요한 기구들도 타격을 받지 않았고, 과학연구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1967년 6월에 여섯 번째 수소폭탄 실험을 했고, 12월에는 일곱 번째 폭탄을 만들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마오쩌둥이 지배하는 중국의 기성 체제가 타격을 입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화대혁명은 진정한 의미의 혁명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중 운동이 당과 인민해방군의 통제에서 벗어나 정말 혁명으로 나아갈 뻔했다.

문혁 당시 반란을 일으킨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든 정당이든 간에 자신들의 요구를 제기할 어떤 조직도 갖고 있지 않았다. 문혁의 경험은 무장력을 독점하고 훈련된 관료 집단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에 대항할 조직들을 노동자들이 준비해 두지 않으면 승리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오늘날 저항에 나서는 노동자들은 공산당과 국가 체계와는 독립적인 노동자 정치 조직을 건설해야 한다.

※ 참고문헌

찰리 호어. 《천안문으로 가는 길》, 2006. 책갈피.

모리스 마이스너.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2004. 이산.

입력 2016-06-15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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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정치방침 논쟁

‘민주노총 중심의 진보대통합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에 대한 반론

독자편지 | 김인식

〈민중의 소리〉 고희철 기자의 기사에 대한 나의 비판에 박정환 님이 독자편지를 보냈습니다. 요지는 진보대통합 노선을 놓고 자민통 내부에 “분명한 이견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즉, ‘민주노총 중심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진보대통합연대회의’)과 ‘민중연합당’에 친화적인 〈민중의 소리〉는 입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민중의 소리〉는 중집 회의 전날인 9월 1일에 한상균 집행부의 사퇴가 불가피하다는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중집 결정도 전에 한 위원장의 사퇴를 기정사실화한 것입니다. “섣부르게 판단”한 것에 따른 단순 오보가 아니라 <민중의 소리>의 정치적 본심에 가까운 기사였습니다.

이런 〈민중의 소리〉와는 달리, “민주노총 중심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의 부재’라는 리스크를 반길 이유가 없”다는 게 박정환 님의 주장입니다.

나는 박정환 님이 진보대통합연대회의의 입장을 어느 정도 책임 있게 대변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박정환 님의 말이 사실이라면 만시지탄입니다. 중집이 만장일치로 위원장 사퇴 재고 요청을 결정한 날에서 사흘이 지난 9월 5일에 위원장 사퇴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하니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상균 위원장의 부재 리스크’를 걱정하는 “민주노총 중심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왜 9월 2일 중집 전에 〈민중의 소리〉를 비판하고 한 위원장의 사의 표명 철회를 요구하는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는지 의문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사태가 확연해진 뒤에 진보대통합연대회의의 ‘내심’(內心)을 말하는 것은 사후적 뒷수습처럼 들립니다.

물론 지난해 말에 민중연합당 창당을 놓고 자민통 내부가 갈린 것은 압니다. 지금 이 순간 민중연합당이 민주노총 주도 정당 건설을 앞장서 강조하지 않는 것도 모르지 않습니다. 미뤄 짐작하건대, 민중연합당을 창당한 지 얼마 안 돼 자체 정비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지난 총선 성적이 저조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이 때문에 지난 총선 때 울산에서 두 석을 얻은 진보대통합연대회의 측이 민주노총 주도 정당 건설의 선봉대(또는 1중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고 민중연합당이 민주노총 주도 정치세력화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극히 피상적입니다. 내 생각에, 이 순간 민중연합당은 진보대통합연대회의의 2중대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컨대, 김창한 민중연합당 상임대표는 “민주노총이 진보대통합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그래서 민주노총 ‘정치전략’이 통과되지 못한 것에 비판적입니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야심차게 준비한 정치전략을 정책대대에서 힘 있게 통과시키지 못한 점은 실망스럽고 혼란스러운 점도 있습니다.”(〈민플러스〉, 2016. 8. 29)

민중연합당과 진보대통합연대회의가 자민통 내에서 주도권 경쟁을 하고 있지만, 둘의 정당 건설 전망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이견”이 원칙과 전략의 차이라기보다는 전술 차이 정도로 보이는 까닭입니다. 박정환 님이 애써 둘의 차이를 과장하는 것이, 진보·좌파 진영 내에 존재하는 민중연합당에 대한 불신감과 우려가 자신들의 진보대통합당 건설 착수에 지장을 줄까 봐 연막을 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진보대통합 문제에서 민중연합당 참여 여부가 결정적인 정치적 암초라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죠.

그러나 기본적으로 두 경향 모두 노동계급 단결의 기초를 정당으로 봅니다. 그래서 ‘정치전략’을 민주노총의 가장 중요한 의제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박근혜 정부와 사용자들의 공세에 맞선 노동자 투쟁보다 진보대통합당(‘합법 정당’) 건설을 통한 선거 대응을 훨씬 크고 중요하게 여깁니다.

문제는 진보대통합당이 결코 광범한 진보·좌파의 결집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의당계, 노동당계, 급진좌파 계열 모두 민주노총 주도 정당 건설을 반대합니다. 자민통 활동가들의 헌신성을 부정해서가 아닙니다. 박정환 님이 자민통 활동가들의 헌신성을 읍소해 진보대통합당 안의 진정성을 호소하는 것은 논점 이탈입니다.

진정한 쟁점은 서로 다른 원칙, 전략, 전망, 전술, 당면한 정치적·실천적 강조점, 조직 문화 등을 가진 조직들이 어떻게 단결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자민통계는 “하나의 진보정당” 안에서 “공존과 다원주의”가 존재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진보·좌파 세력들은 정당만이 유일한 단결 방식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노동자연대는 투쟁 속의 단결을 강조합니다. 특정한 단일 쟁점을 중심으로 행동을 건설하는 사안별 연대체(“공동전선”)가 더 중요한 단결 방식이라고 봅니다. 선거에서도 상시적인 정당이 아니라 기존 진보·좌파 정치 세력들의 선거연합정당을 통해 공동 대응을 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단결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요컨대, 진보대통합당 안에 대한 “오해” — ‘그릇되게 해석하거나 잘못 앎’ — 가 아니라 정치적 차이가 쟁점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민통계, 특히 진보대통합연대회의 측은 이 정치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민주노총에 단일 정당을 건설하라고 압박합니다. 그 내부에 다양한 정견들이 존재하는 대중 조직인 민주노총더러 단일 정당을 건설하라고 압박하는 것 자체가 노동자 운동의 분열을 낳는 것입니다. 이런 ‘대동단결’론은 진정한 단결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자민통계가 자신들의 “노선만 옳다고 믿는 패권주의자”라고 비판받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이 시도는 다행히 정책대대에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자민통이 “허투루 준비”해서가 아니라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민통의 진보대통합당 안이 종파주의적이라고 비판한 것도 이 맥락입니다. 나는 종파주의를 비판했지 종파 자체를 문제 삼은 적이 없습니다. 박정환 님은 이 둘을 구별하지 않는데, 이 둘을 개념적으로 엄밀하게 구별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킵니다.

종파주의는 “자기 존재의 정당성과 명예를 계급 운동과의 공통점이 아니라 운동과 자신을 구별짓는 특별한 표지에서 찾는”(마르크스) 태도입니다. 정의당을 진보 정당이나 노동자 정당으로 보지 않는 태도가 그렇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정의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들과 공동으로 투쟁을 건설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박정환 님은 정의당이 “논의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다고 했는데, 자민통계 활동가들의 글에서 처음 발견하는 입장입니다. 이 대목에서 박정환 님이 자민통계를 어느 정도 책임 있게 대표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다시 할 수밖에 없군요.

반면, 종파는 정파나 파벌이라는 뜻입니다. 계급 의식의 불균등성으로 말미암아 노동자 운동 안에는 정치적으로 상이한 정파나 파벌들이 공존합니다. 정의당은 종파라고 부르기에는 큰 정당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박정환 님은 종파 자체를 “진보운동의 악성 종양”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자민통계의 당 개념과 연결돼 있습니다. 자신들이 주도한 단일 정당 밖에 있는 세력은 다 “종파”이자 “척결” 대상으로 보는 당 개념 말입니다.

그러나 종파가 반드시 종파주의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진정한 단결을 원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자신들만이 단결을 원하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은 세력들인 것처럼 하는 것은 강변(?辯)에 지나지 않습니다. 정말 피하고 싶은 걱정은 자민통계가 단결과 진보대통합이라는 미명 하에 민주노총에 특정 정치 경향의 단일 정당을 만들라고 강요하면서 노동자 운동과 진보·좌파 정치 운동 전체가 분열과 원한의 진구렁에 빠져 투쟁을 전진시킬 기회를 놓치는 것입니다. 

입력 2016-09-08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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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판]〈민중의 소리〉 고희철 기자의 기사 비판

제 논에 물 대기 식 평가

김인식

언론을 통해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의 사의 표명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한다. 고심 끝에 나온 것이겠지만, 한 위원장의 사의 표명이 자신을 뽑아 준 기층 조합원들의 요구에서 비롯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일각에서는 민주노총 정책 대의원대회(정책대대)에서 ‘정치전략’이 통과되지 못한 것이 사의 표명의 원인이라고 본다. <민중의 소리> 고희철 기자가 쓴 기사가 그런 경우다.(‘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 사의 표명, 집행부 전면교체 불가피할 듯’, 2016년 9월 1일치.) <민중의 소리>는 친(親) 민중연합당 언론이다. 고 기자는 9월 2일로 예정돼 있는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중집)가 결정하기도 전에 한상균 집행부 사퇴를 기정사실화했다.

고 기자는 “민주노총 정치세력화 관련 집행부 내 이견”을 사의 표명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리고 정책대의원대회(정책대대)가 “소수의 반대와 무책임한 회의 운영”으로 “정치전략과 관련해 아무런 결론을 맺지 못하고 유회”됐다고 썼다.

정책대대 파행론은 노동조합 민주주의 부정

정책대대가 파행으로 끝났다는 얘기가 많다. 고 기자도 정책대대가 “장시간 회의와 성원 부족에 따른 유회라는 민주노총의 악습을 반복했다”고 평했다.

이것은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평가다. 정책대대에서 가장 중요한 의결 주문안이었던 조직혁신전략 중 ‘정치전략’을 제외하고 세 가지가 통과됐다(‘전략투쟁과 의제’, ‘조직 강화: 산별운동과 지역본부 강화’, ‘조직 확대: 전략조직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정치전략’은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통과되지 못했다. 정책대대에 상정된 두 개의 ‘정치전략’은 주도 세력, 속도, 방식 등에서 차이가 있는 듯하지만, 두 안 모두 본질적으로 민주노총이 주도해 새 정당을 건설하는 방향이었다. 2안이 ‘민주노총은 정당 건설을 향해 돌격 앞으로!’라면, 1안은 ‘신중하게 정당 건설하자’는 것으로 2안으로 가는 문을 열어 주는 안이었다. 그래서 많은 대의원들이 1안과 2안 둘 다 반대했던 것이다.

결국 중집이 두 안을 폐기하고 새로운 절충안을 마련해 왔다. 절충안의 요지는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진”하기 위해 충분한 토론과 함께 “추진기구”를 구성하고 내년 1월 대의원대회에서 정치세력화 방안을 의결한다는 것이었다. 본질적으로 1안과 다르지 않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1안과 2안 모두 반대한 대의원들이 절충안을 지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개혁주의적 전망과 종파주의적 태도

이 ‘정치전략’이 정책대대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점이었다. ‘정치전략’이 본질적으로 민주노총에 자민통계 정당을 만들라고 요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격렬한 논쟁이 불가피했다.

사실 ‘재벌 체제’ 문제나 노동시간 단축, 노동개악과 민영화 저지 등도 매우 중요한 정치 쟁점인데, 정책대대에서 ‘정치전략’은 순전히 합법 정당과 선거 대응 문제로 협소화돼 있었다.

자민통계는 이 ‘정치전략’을 민주노총의 “가장 중요한 의제”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들은 박근혜 정부와 기업주들의 공격에 맞선 노동자 투쟁보다 제도권 개혁 정당 건설을 통한 선거 대응을 훨씬 중시했다. 결국 ‘정치전략’ 안은 자민통 정치전략을 민주노총에 관철시키려는 시도였다.

특히, ‘정치전략’의 핵심인 “진보대통합당” 안은 심각한 분열의 위험을 안고 있다. “진보대통합당” 안은 실제로는 광범한 진보·좌파가 결집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현재 민주노총 안에는 복수의 진보·좌파 세력이 존재한다. 정의당계, 노동당계, 급진좌파 계열, 자민통계, 녹색당계 등등. 이들의 당 건설 전망은 상이하고 그래서 각각 별도로 조직을 건설하고 있다. 이런 구체적 조건을 무시하고 자민통계는 (노동조합 내 일부 개혁주의적 지도자들의 지원을 받아) 민주노총에 단일 정당을 건설하라고 압박한 것이다. 정책대대 현장에서도 ‘정치전략’ 안의 통과를 거세게 요구한 쪽은 압도적으로 자민통계 대의원들이었다.

그러나 정의당계, 노동당계, 급진좌파 계열 등 대부분의 진보·좌파 세력들은 이 안을 반대했다. 고희철 기자가 “소수”만이 반대했다고 쓴 것은 진실이 아니다. 이 중 정의당만 하더라도 지난 총선에서 민주노총 조합원의 41.7퍼센트가 투표한 정당이다.(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이 실시한 ‘20대 총선 관련 조합원 투표성향 및 인식 조사 결과’)

자민통계는 이 점을 인정하지 않고 민주노총 주도 진보 단일 정당 건설이 “조합원의 요구”라고 강변했다. 주된 근거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정치전략 수립을 위한 조합원 설문조사 보고서’(2016년 8월 16일)였다. 이 설문조사에서 35.5퍼센트가 ‘민주노총 주도 노농빈 정당 건설’을 찬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2013년 4월 4일 발표한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민주노총 가맹·산하조직 대의원 의식조사 결과’에서도 39.7퍼센트가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노동 중심의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찬성했다. 따지고 보면 2016년 결과는 2013년보다 오히려 소폭 감소한 것이다.

사실 정치세력화 방안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합원들의 지지 정당 순위가 극적으로 뒤바뀐 것이다. 2013년 보고서에서 통합진보당 지지율은 24.9퍼센트인 데 반해 정의당은 8.8퍼센트밖에 안 됐다. 이 관계가 완전히 역전돼 올해 총선에서 조합원의 41.7퍼센트가 정의당에 투표한 반면, 민중연합당에 투표한 조합원은 15.3퍼센트였다.(‘20대 총선 관련 조합원 투표성향 및 인식 조사 결과’)

진보 단일 정당 건설론은 바로 진보·좌파 정치 내에서 정의당의 지지와 위상이 크게 올라간 것에 대한 자민통계의 경쟁심과 조바심의 발로인 것이다. 총선 전에 민중연합당을 서둘러 창당한 것도 진보적 유권자의 표가 정의당에 쏠리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지만, 그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자민통계가 정의당(과 급진좌파)을 배제하고 자신들의 정당 건설 프로젝트를 민주노총에 계속 강요하면 커다란 분열을 낳을 것이다.(〈민중의 소리〉에서는 정의당을 진보 정당으로 보지 않거나 노동당을 존재하지 않는 정당으로 여기는 기사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노동조합의 분열만이 아니라 전체 진보 정치 운동에도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자민통계가 민주노총을 지배하려 들면서 다른 세력들로부터 커다란 반발과 원한을 살 것이고, 사회민주주의 계열은 마음 편하게 노동조합 투쟁과 거리를 두며 개혁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미 2008년 민주노동당과 2012년 진보당 분열 이후 진보 정치 세력들이 온건화 경쟁을 한 바 있다.

그런데도 민주노총 안에서 자신들의 정당 건설 프로젝트를 밀어붙이는 것을 보면, 자민통계가 “패권주의”를 반성하고 있다는 말은 빈말인 것 같다. 꼭 2011년 민주노동당의 경기동부 계열 당권파가 선거주의에 눈이 멀어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막가파’처럼 밀어붙였던 것이 떠오른다.

지금 민주노총 안에는 “진보대통합당” 신중론이 많다. 민주노총 내에 존재하는 매우 다양한 의견을 무시하고 섣부르게 추진하다 실패하면 그 부작용이 치명적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그래서 정책대대에서는 특정 정치세력화 방안을 표결하지 말고 토론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자민통계와 일부 산별 지도자들이 정책대대 며칠 전에 “진보대통합당” 안을 성안(成案)해 상정했다.

고희철 기자가 최종진 직무대행의 “무책임한 회의 운영” 탓에 “몇 개월간 준비된 논의”가 “무산”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책임 소재를 흐리는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시간을 갖고 폭넓은 동의 속에서 최대 단결을 이룰 연합 정당을 논의하기보다, 어떻게든 자신들의 정치 프로젝트를 정책대대에서 관철시키려 한 자민통계의 억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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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정책대대에서 ‘정치전략’이 통과되지 못한 것을 “파행”으로 보는 것은 관료주의적 접근일 뿐이다. 한상균 집행부의 지도력의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특정 정치 세력의 자기 중심적 평가일 뿐이다.

‘정치전략’이 통과되지 않은 것의 진정한 정치적 의미는 자민통계가 민주노총에 자신들의 고유한 어젠다를 강요하는 것을 저지했다는 점이다. 만약 그 안이 통과됐다면 민주노총은 커다란 내홍과 갈등을 겪었을 것이고, 그리 되면 박근혜 정부의 위기를 이용해 운동을 전진시키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따라서 대의원대회에서 나타난 의견을 반영해 새로운 정치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무엇보다, 하반기 일전을 앞둔 지금, 한상균-최종진-이영주 지도부가 사퇴를 철회하고 “투쟁 지도부”로서 그 소임을 다하는 것이 책임 있는 자세일 것이다. 

입력 2016-09-02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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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전선이란 무엇인가

최일붕

1934년 중엽 이후 스탈린이 추진한 인민전선(국민 연합) 정책은 파시즘에 반대해 부르주아 정치세력까지 포함한 모든 ‘민주’ 세력의 대연합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당과 동맹하는 정책은 노동자 계급이 반동에 저항하지 못하도록 마비시킨다.

코민테른 제3차와 제4차 대회(각각 1921년과 1922년)에서 레닌과 트로츠키의 제의로 채택된 바 있고 1920년대 말 트로츠키가 반파시즘 투쟁의 기본 원리로서 다시금 강조한 공동전선이 코민테른 제7차 대회(1935년)에서 정식으로 채택된 인민전선과 어떻게 다른가를 알 필요가 있다.

공동전선이 노동계급 정당들 사이의 (부분적인) 행동 통일인 반면에, 인민전선은 부르주아 정당까지 포함하는 계급 협력 방침이다.

공동전선이 특정한 구체적 목표를 위해 싸운다는 실용적 합의에 바탕을 두는 반면, 인민전선은 부르주아 정부 수립을 지지하기 위한 공통의 선거 강령에 바탕을 두고 가동된다.

공동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완전한 정치적 독립성과 비판의 자유인 반면, 인민전선 속에서는 공산당이 동맹 관계에 있는 다른 정당들을 비판해선 안 된다.

마지막으로, 공동전선은 혁명정당이 다른 활동을 계속해 나아가면서 수행하는, 당 활동의 단지 한 갈래일 뿐인 반면, 인민전선은 스탈린주의 정당의 총체적인 전략이다.

고전적 인민전선

프랑스에서는 1934년 봄부터 공산당과 사회당과 중간계급 자유주의 정당인 급진당 사이에 인민전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1935∼36년의 노동자 운동 고양에 힘입어 프랑스 인민전선은 1936년 5월 총선에서 승리해 정부를 구성했다.

1936년 6월, 총파업과 광범한 공장 점거 운동이 일어났다. 프랑스에서는 파리 꼬뮌 이래 최대 규모의 노동자 운동이었다. 이 대규모 노동 쟁의는 인민전선 정부의 한계를 넘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인민전선 정부의 총리인 사회당 대표 레옹 블룸과 공산당은 어떻게든 이 투쟁을 제어해 ‘질서’를 회복하려 했다. 공산당 지도자 모리스 또레스는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민전선은 혁명이 아닙니다. 파업을 시작했으면 끝낼 줄도 알아야 합니다.” 공산당과 사회당의 계급 협력 정책 때문에 갈피를 못 잡게 된 노동자들은 사기가 저하돼 작업 복귀했다. 환멸과 냉소에 빠진 프랑스 노동계급은 결국 1940년 나찌의 점령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게 된다. 스페인에서는 1931년에 왕정을 타도한 혁명이 계속 전진하고 있었다. 이 파고 위에 올라탄 인민전선―공산당과 사회당과 마르크스주의적 통일 노동자당(이하 POUM)이라는 노동자 정당들과 두 개의 부르주아 정당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이 1936년 2월 선거에서 이겨 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1936년 7월, 파시스트인 프랑코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내전이 시작됐다. 이에 즉각 대응해 노동자들은 주요 도시, 특히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 권력을 창출했다. 파시스트들은 곳곳에서 패퇴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선진 자본주의 나라가 아닌 스페인은 지금 전진하고 있는 노동자 혁명을 철회하고 뒤로 후진해 부르주아 혁명부터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페인의 최대 노동자 정당인 아나키스트 노동조합주의자들의 전국노동자연맹(이하 CNT)은 지역별로 인민전선 정부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인민전선 정부가 노동자 혁명을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돌려놔 스페인을 ‘정상화’시키는 데 아나키스트들이 협조했음을 뜻한다.

코민테른의 논리는 아주 단순했다. 프랑코부터 먼저 패퇴시키고 그 다음에야 비로소 사회주의 혁명에 착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코를 타도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지금 눈 앞에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노동자 투쟁이었다. 그런데 이것을 인민전선 정부가 억압했으니 도대체 어떻게 프랑코를 타도한다는 말인가.

게다가 스탈린주의자들은 소련에서의 유혈 숙청을 스페인에서도 재연했다. 스페인 스탈린주의자들의 물리적 마녀사냥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범위를 넘어 POUM과 CNT의 당원들에게까지 미쳤다.

프랑코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 권력이 노동자들의 혁명적 투쟁을 고무하고 농민에게 땅을 주고 모로코에 민족 독립을 허용해야 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당과 동맹한 인민전선 속에서 공산당이 수족이 묶여 버렸으니, 노동자 권력은 확대될 수도, 계속 존속할 수도 없었다. 프랑코의 승리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비판

트로츠키는 인민전선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그 방침이 “부르주아지와의 동맹을 위해 프롤레타리아를 배신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그는 아나키스트 CNT와 반스탈린주의 극좌파 POUM도 인민전선에 참여했음에 주목했다. 그리하여 트로츠키는 인민전선이 노동자 계급 전략 문제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단순한 정체 폭로 차원이 아니라 이론적 논박이 필요한 문제라고 보았다.

트로츠키가 다룬 첫번째 이론적 논점은 인민전선이 러시아 멘셰비즘의 변형이라는 것이다. 그는 공산당과 사회당을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 사이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에 비유했다. 1917년에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카데츠(입헌민주당)를 포함한 상시적 동맹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임시정부라는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반면에, 볼셰비키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오히려 소비에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볼셰비키는 임시정부에 양보하지 않았다. 볼셰비키의 요구는 임시정부라는 인민전선을 분쇄하는 것, 카데츠와의 동맹을 파괴하는 것, 그리고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인민전선은 노동자 혁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 아니라, 반파시즘 투쟁의 효과적인 무기도 전혀 되지 못하는 도구이다. “인민전선 이론가들은 산수의 가장 기초인 덧셈을 넘어서지 못한다. ‘공산당+사회당+아나키스트+자유주의자=그 각각을 단순히 합한 것’이라는 부등식이 그들 지혜의 전부이다. 그러나 산수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역학 또한 필요한 것이다. 힘의 합성을 뜻하는 평행사변형에서 합성되는 힘들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한다면 합성력은 그만큼 짧아진다. 정치적 동맹들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면 합성력은 제로(零)가 될 수 있다.”“때때로 공통의 정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다른 노동계급 정치조직들의 동맹이 꼭 필요할 때가 있다.

특정 상황에서 그러한 블록은 프롤레타리아의 이해관계와 엇비슷한 이해관계를 갖는 피억압 쁘띠부르주아 대중을 끌어당길 수 있다. 그러한 블록의 연합된 힘은 각 성분의 힘들의 단순한 합계보다 훨씬 더 강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정치 연합은 그 기본 이해관계가 180도 반대인 두 계급 사이의 동맹인지라 프롤레타리아의 혁명 세력을 마비시키는 데에만 이바지할 뿐이다.”“내전에서는 적나라한 강압이 효과를 거의 못 거두기 때문에 내전의 양 당사자들에게 최고의 자기 절제심이 필요하다. 그런데 노동자와 농민은 자기 자신의 해방을 위해 싸울 때만 승리를 확신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를 부르주아 지도부에 예속시키는 것은 미리부터 내전에서의 패배를 확신시키는 것이 된다.”

중간계급과의 동맹

트로츠키가 다룬 두번째 이론적 논점은 후진국에서 농민이나 도시 중간계급과의 동맹 문제였다. 트로츠키는 자본주의 정당과의 협정에 의해서는 쁘띠부르주아지를 자기 편으로 끌어당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정당은 선거에서 주로 쁘띠부르주아지로부터 표를 끌어모으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와 도시 및 농촌 중간계급 사이의 동맹은 의회에서의 그들의 전통적인 대의체―즉, 자본주의 정당―와 비타협적으로 싸울 때만 실현될 수 있다. 농민을 노동자 편으로 견인하려면 농민을 급진당 정치가들로부터 떼어낼 필요가 있다.”중간계급은 극단주의에 놀라 뒤로 나가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가장 강력하고 가장 결연한 지도를 제공하는 사회 세력에 끌린다. 그러므로 중간계급을 견인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이 파시스트들보다 강력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노동계급이 자기 역량에 대해 자신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약화시키는 것은 중간계급을 반동 편에 넘겨 주는 것이다.

지배 계급의 구조

트로츠키가 다룬 세번째 이론적 논점은 지배계급의 구조와 관련돼 있다.

코민테른은 파시즘을 “금융자본의 테러 독재”라고 규정했다. 파시즘은 자본가 계급의 단지 일부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의 다른 분파들은 프롤레타리아의 반파시스트 동맹 세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민주대연합” 또는 “반독점 동맹” 따위의 이론적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프랑스의 인민전선은 “2백대 가문에 맞서는 국민의 투쟁”을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비판했다. “물론, 인구의 98%는 아닐지라도 95%가 금융자본의 착취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착취는 위계적으로 편제돼 있다. 착취자-하위 착취자-하위 착취자의 하위 착취자 등등의 식으로. 이런 위계 체계를 통해 초착취자들이 국민의 대다수를 예속시킬 수 있다. 국민이 하나의 계급적 핵심을 중심으로 재편될 수 있으려면 이념적으로 재편돼야 하는데 이것은 프롤레타리아가 ‘국민’ 또는 ‘민족’ 또는 ‘민중’으로 용해되지 않을 때만 이뤄질 수 있는 일이다. … ““급진당 정치인들이 프랑스를 지배하는 2백대 가문에 선전포고를 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인민 대중을 파렴치하게 기만하는 행위이다. 그 2백대 가문은 공중에 붕 떠 있는 게 아니라 금융자본 체제의 최고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2백대 가문을 타도하려면 경제 · 정치 체제를 전복해야 한다. 그런데 급진당 정치인들인 에리오와 달라디에는 플랑댕이나 들라록끄 못지 않게 그 체제의 유지에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프랑스공산당이 주장하듯이 한줌밖에 안 되는 재벌에 맞서는 국민적 투쟁이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이 있어야 한다. 즉, 계급투쟁이 문제이며 이것은 오직 혁명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하나의 계급 전략으로서 인민전선이 전제로 삼고 있는 이론적 근거를 분쇄하기 위해 트로츠키가 살펴본 위의 세가지 이론적 논점들을 종합해 한 마디로 요약하면, 자본가 계급 정당과 동맹하는 정책은 노동계급이 반동에 저항하지 못하게 마비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입력 2002-10-01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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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공간에서의 좌파의 전략

한규한

경제학자 슘페터가 제2차세계대전 종전 즈음에 대해 “자본주의 사회의 몰락이 매우 많이 진행되었다는 것을 의심하기 어렵게 한다”고 표현한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1946년은, 파업으로 인한 노동 손실일이 1억 1천6백만 노동일로 역사상 파업 물결이 가장 집중적이었던 해로 기록됐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봉기와 공장점거로 파시스트를 패배시켰다. 1944년 1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일으켰고, 15만 명 이상의 레지스탕스 전사가 14개의 추축국 사단을 저지했다. <이코노미스트>가 인정했듯이 “노동자들이 실질적인 전쟁의 최전선에 있었다.”

프랑스 파리 시민들은 독일 7군단을 저지하기 위해 봉기했고, 마르세이유 노동자 위원회는 공장을 접수해 운영했다.

‘해방’을 맞은 조선의 상황은 이런 국제적 분위기의 일부였다. 일본의 잔혹한 지배기구는 패전과 함께 급속히 붕괴했다. 조선총독부가 여전히 있었지만, 관리들의 출근율이 10퍼센트 정도에 지나지 않아 그 기능은 거의 마비됐다.

공업부문 재산의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던 일본인 자본가들이 사라지자 노동자들이 폭발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민중은 어떠한 정치세력의 개입 없이 자생적으로 진출했다. 부르스 커밍스가 지적하듯이 “서울의 지도층이 11월과 12월이 돼서야 중앙기구들을 설치했을 때, 모든 절차는 추인의 형식이었다. 마르크스주의적 용어를 인용한다면 지도자들이 대중보다 뒤떨어졌던 것이다.”

해방은 단순히 일본인의 지배를 벗어나는 것 이상이어야 했다. 예를 들어 군산 종연조선 노동자들의 성명서에서 이러한 의식을 볼 수 있다.

“해방은 누구를 위한 해방 … 이냐? 노동자에게서 직장을 빼앗고 빵을 주지 못하는 독립이라면 무슨 기쁨이 있고 무슨 의의가 있으랴. … 노동자 대중에게 완전한 해방을 가져오는 그 날을 위하여 끝까지 싸우기를 여기에 맹서한다.”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집단화 · 조직화한 공장에서는 자주관리운동이 강력하게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운수업, 상업, 어장, 극장, 학교 등에서도 그랬다. 한 기록을 보면, 1945년 11월 4일 16개의 산별노조에 7백28개의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돼 있었다.

자주관리운동은 일본인 사업장뿐 아니라 화신백화점 등 조선인 자본가의 사업장으로도 확대됐다. 이는 자주관리운동이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성격을 띄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옛 질서를 복구하려는 미군정만이 아니라 당시 스탈린주의 좌파도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진출을 차단했다.

조선공산당은 1945년 9월 20일 발표한 <현정세와 우리의 임무>(8월 테제)에서 “조선과 같은 데에 있어서는 평화적으로 혁명의 성공이 가능”하며 “조선은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의 계단을 걸어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급진적 요구를 전면에 내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영등포지구 사회주의자들과 같은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조선공산당과 전평 지도부 주류가 가지고 있는 미군정에 대한 기회주의적 태도와 ‘평화적 혁명론’에 대해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도 근본에서 스탈린주의 단계혁명론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급진적 운동에 대한 혁명적 전략을 제출할 수 없었다.

공산당은 노동자들이 “민족통일전선 결성사업에 참여하여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고 인민공화국을 내세우는 사업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놓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민족통일전선에서의 노동자 중심성’은 말뿐 현실에서는 실현되지 못했다. 예를 들어 1945년 11월 24일 열린 제1회 인민공화국 확대집행위원회의 위원 50명 가운데 노동자 대표는 없었다.

E. H. 카가 “인민전선 강령은 통증을 가라앉히는 진통제”라고 말했듯이, 스탈린의 인민전선전략은 아래로부터의 급진화를 차단했다. 왜냐하면 서방 승전국들과 함께 전후 식민지 재분할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서방 지배계급과의 신뢰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독일에서 생산과 분배를 통제하던 노동자들의 반파시스트위원회는 해체됐고, 심지어 공산당의 강령은 기독교민주당의 강령보다 온건했다.

그리스 레지스탕스가 거의 권력을 잡았다가 스탈린의 압력으로 영국 지배자들과 나찌 잔당에 권력을 넘겨 준 것은 최악의 비극이었다. 그 후 좌파는 가혹한 탄압을 받았고, 장기간에 걸친 독재 정권이 들어설 길을 열어 줬다.

물론 당시 남한 스탈린주의자들의 노선이 언제나 ‘타협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1947년 후반을 지나면서 극적으로 좌선회했다. 특히 1948년 단독선거 보이콧을 위한 일련의 무장행동들에서 그랬다.

이 좌선회는 사람들이 해방 초기보다 급진화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민중은 해방 초기보다 수동적이었다. 이런 수동화는 대체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우선 1946년 9월 총파업과 10월 봉기의 패배 때문이었을 것이다.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군정은 대대적으로 좌익을 탄압했다. 9월 총파업은 공산당의 “정당방위 역공세”로 출발했다. 3백만 명이 참가한 10월 봉기는 9월 총파업 과정에서 벌어진 경찰과 김두한 같은 우익 정치깡패의 노동자 학살에 대한 자생적 항의로 불붙었다.

여기에는 심각한 식량위기와 같은 경제적 조건들이 배경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영남일보>는 이런 상황을 빗대 “해방의 선물은 기근”이라는 사설을 싣기도 했고, 청송에서 2백여 명이 굶어 죽은 ‘대량 아사사건’을 보도하기도 했다.

조선공산당은 9월과 10월의 ‘공세’ 속에서도 미군정과 전면적인 충돌은 회피했다. 공산당의 목적은 결렬된 미소공동위원회를 재개하기 위해 미군정에 압력을 넣는 것이었다. 미군은 탱크까지 동원해 봉기를 진압했다. 그리고 1천 명의 시위대와 2백여 명의 경찰이 사망했지만, 미군은 단 한 명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수동화의 두 번째 이유는, 이 때쯤이면 어느 누구 눈에도 분단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이미 남과 북에는 사실상 정부가 들어서 있었다. 박세길 씨는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에서 “2.7 구국투쟁[1948년의 단독선거 저지투쟁 ─ 필자]은 남한 민중의 단결의식과 투쟁의지가 … 간단없이 성장해 왔음을 보여주는 일대 쾌거”라고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물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1948년 5월의 선거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1948년 한국여론협회의 조사를 보면 조사자의 91퍼센트가 유권자 등록이 강제적이었다고 응답했다. 투표장에는 무장 경찰과 우익 테러단이 진을 치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러나 과장이 섞여 있다고 하더라도 전국 투표율은 90퍼센트가 넘었다. 그리고 이승만도 한민당도 아닌, 무소속 후보들에 대한 지지율이 40퍼센트로 가장 높았다.

이를 종합해 보면 박명림 씨가 지적하듯이, 사람들은 “1945년이었다면 이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는 더 나은 가능성이 열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48년엔 일부는 체념 … 일부는 더 장기적인 모색을 위해 참여”했다. 좌파의 ‘좌선회’는 때를 놓친 것이었다.

단독선거 반대운동에 대한 스탈린주의자들의 전술도 사람들을 수동화시키는 데 한몫 했다. 그들은 ‘남한 단독정부수립 반대 = 북한 정권 지지’라는 등식으로 접근했다.

예를 들어 UN한위 반대 남조선총파업위원회가 미군정의 하지 중장에게 보낸 요구는 “북조선 인민위원회 식으로 정권을 인민에게 이양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통일을 바라지만, 미 · 소 양국으로부터 모두 독립적이고자 하는 광범한 사람들에게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슬로건이었다.

당시 남한 좌파의 ‘좌선회’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최종 결렬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련과 북한은 단독선거 저지 투쟁의 ‘격렬함’이 남한의 정통성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대외적으로 선전하는 데 이용했지만, 정작 자신들 역시 통일정부에 대한 진지한 협상을 진행하지는 않았다.

사태의 전개는 패배가 필연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물론 조선 민중의 힘만으로는 제국주의 질서를 극복하는 게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제적인 맥락에서 보면 다른 대안이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홉스봄은 “세계혁명의 시대에 서반구 밖 세계에서 혁명, 내전, 외국의 점령에 대한 저항과 그러한 점령으로부터의 해방 … 을 겪어 보지 않은 국가는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고 했다.

크리스 하먼이 지적하듯이, “1944∼45년에 영국과 미국의 국내 분위기는 지배계급이 대대적인 탄압을 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영국이 그리스에서 벌인 군사행동은 영국과 미국에 모두 심각한 정치적 폭풍을 몰고 왔다”.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이집트 주둔 영국군 부대들에서 일어난 항명 사건들에서 드러난다. 무엇보다 혁명운동이 일어났을 경우 그것이 한 나라에서만 국한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처칠은 그리스 혁명에 영향을 받아 이탈리아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일어날까 봐 무척 우려했다.”

다음에는 미 · 소도 아닌 제3의 대안으로 ‘중간파-중도파적 길’은 정말로 가능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다.

입력 2005-03-02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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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전선체'의 계급연합 정치

김하영

오늘 우리가 사회 변화를 위한 운동의 전략에 대해 논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1999년 시애틀에서 반자본주의 시위가 벌어진 지 6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 동안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은 세계적 규모로 성장해 왔다. 가장 앞서 나가는 곳이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이고, 이라크는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전선을 형성하고 있으며, 150만 시위를 벌인 프랑스의 학생 · 노동자들은 1968년 반란의 재등장을 선언하고 있다.
   이 운동은 성장의 고비마다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핵심적인 전략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세계적 반전 반자본주의 운동의 일부로서 남한 운동도 이 운동의 방향을 표현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이 무엇인지를 논의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런 문제는 지난 20여 년 동안의 국내 정치 상황의 전개와도 맞물려 있다. 1987년 이래 남한 사회는 정치 체제의 자유화가 이뤄지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 이 동력은 노동운동이 제공했다. 그런데 김대중과 노무현이라는 “개혁 정권”은 노동계급과 피억압 대중에게 개혁을, 진정한 개혁을 선사하기는커녕 신자유주의 추진으로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그 결과 대중적 환멸을 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운동을 한층 발전시키고 결국에는 궁극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어떤 전략이 필요할까? 운동 세력은 여기에 답할 필요가 있다.

이런 물음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바로 단일전선체 건설 논의로 표현되는 계급연합 전략이다. 계급연합 전략을 통한 자주적 또는 진보적 민주주의 정권 수립이 전쟁과 신자유주의 시대 우리의 대안이라는 것이다. 단일전선체는 “사안별 공동투쟁체와는 달리 전략적 지위”1)를 갖는 조직이고, 진보적 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위해 투쟁하는 정치 조직이다. 정확히 말해, 단일전선체는 계급연합을 추구하는 추진체라고 할 수 있다.2)
   친미 보수우파의 준동에 대항해 중간계급과 (부르주아 일부까지도)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 이 주장의 뼈대라고 할 수 있다. 노동계급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계급 운동 내의 고전적인 논쟁 주제 가운데 하나다. 1930년대 프랑스에서 이런 논리는 노동계급만으로는 파시즘의 위협을 막을 수 없다는 이유로 정당화됐고(1934년 10월에 사실상 시작된 프랑스 인민전선), 그 뒤 여러 나라에서 단결을 통해 ‘우리’ 편의 힘을 강화하는 방편으로 제시되곤 했다.
   지금 단일전선체 건설을 주장하는 동지들은 대강 세 가지 차원에서 노동계급만으로는 안 되고 계급연합 전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첫째,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노동계급만이 아니라 민중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노동계급만이 아니라 농민 · 중소상인 · 중소기업 · 민족자본가도 단결해야 한다는 것이다.3) 이것은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 공세를 식민지 또는 신식민지 문제로 여기는 것과도 관련 있다.4) 미제와 한줌밖에 안 되는 그 주구에 맞서 모든 계급 · 계층이 단결해야 한다는 “민족통일전선”의 최신 버전인 셈이다.5)
   둘째, 한반도가 냉전적 남북대결구조에서 평화 구조로 진전되는 것을 가로막으려는 냉전 수구 반통일 세력에 맞서 개혁 · 진보세력이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6) 이 전선은 대체로 6.15 공동선언을 지지하느냐 여부로 나뉘게 된다.7) 이렇게 되면 노동계급이 연대해야 할 대상은 민주당, 열우당, 한나라당 일부와 현대, 삼성, 롯데 등처럼 북한과 경제 협력하는 대자본까지 포괄된다.8) 요컨대 북한과 우호적인 정치 · 경제적 관계를 맺고 있는 세력들은 다 연대 대상이 될 수 있다. 반신자유주의 전선에서 적진에 있던 인물도 여기에 대거 포함된다.(예. 철도공사 이철)
   셋째, 2006년부터 2008년에 이르는 기간에 지방선거, 대선, 총선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다. 지금이 한국사회가 계속 민주개혁 흐름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한나라당 재집권으로 후퇴할 것인가를 가르는 중요한 시기라는 것이다.9) 이런 판단에 따라 재편될 전선은 반한나라당 전선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10) (반한나라당 전선은 2002년 지방선거에서 ‘서총련 투표전술’, 2002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 사퇴 압박 등으로 드러난 바 있다.)

많은 사람들은 ‘단결하면 좋은 거 아니냐’는 소박한 심정에서 단일전선체를 지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내가 얘기했듯이, 단일전선체 건설 논의로 표현되는 “대동단결” 요구는 실제로는 계급연합 전략, 곧 인민전선(민중전선)이다.
   민중전선은 ‘단결해서 더 큰 힘을 내면 좋은 것 아니냐’는 기본 취지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매우 파괴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 노동계급과 자본가 정치세력의 정치연합은 기본 이해관계가 정반대인 두 계급 사이의 동맹이기 때문에 노동운동 세력을 마비시키는 데 이바지한다. 정치 동맹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려 한다면 두 힘은 합쳐져 더 커지기는커녕 기껏해야 제로가 되거나 아니면 노동계급에게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역사적 사례를 보면 민중전선은 그 지지자들의 활동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강령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1930년대 프랑스 민중전선 정부 등장 이후 노동자 파업 물결이 거세지자 급진당[중간계급에 기반을 둔 자유주의 정당]은 갈수록 겁을 먹었다. 그러자 공산당은 급진당을 민중전선에 묶어두기 위해 모든 것이 급진당과 합의한 민중전선 강령의 범위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노동계급에게 요구했다.
   6.15 공동선언 이후 자민통 계열 동지들과 민족화합적 자유주의 세력 사이에 (비록 공식적으로 민중전선을 형성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계급협력적 관계가 형성됐는데, 이 때도 이런 논리가 작용했다. 2001년 대우차 노조가 해외 매각 반대 시위를 벌였을 때 김대중 정부는 무자비하게 노동자들을 탄압했다. 테러 진압 특수 부대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자민통 계열 동지들은 민주노총 지도부가 김대중 퇴진이라는 “무모한” 발상을 조장했다고 비난했다. 그 덕분에 정부는 더욱 자신만만해져 공세를 지속했다.
   계급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족적’ 또는 자유주의적 자본가들과 적대적이 되지 않도록 노동자 투쟁을 어느 수준에서 억눌러야 했다. 조덕원 21세기코리아연구소 소장의 표현을 빌면, “이북정권과 친미보수정권 간에 상층 민족통일전선이 형성된 조건에서 반미진보세력은 친미보수정권을 퇴진시키는 전략적 타격투쟁(정권 반대) 대신 그 예속성과 반민중성을 공격하는 전술적 타격투쟁(정책 반대) 선에서 투쟁 수위를 조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조덕원, ‘민주노동당의 집권과 높은단계 연방제 통일의 변증법’, ≪이론과 실천≫ 2005년 7월호).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민중전선은 대중 운동의 ‘브레이크’이다.    
   노동자 투쟁이 효과적으로 억제되면 계급세력 관계는 자본가 계급에게, 특히 우파에게 유리하게 된다. 그런데 노동자들이 억제당하는 이와 같은 조건에서는 우파가 여세를 몰아 반동 공세에 나선다 해도 대처하기가 어려워진다. 이처럼 부르주아 정당과 동맹하는 정책의 문제점은 노동계급이 반동에 저항하지 못하게 마비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일이 1973년 칠레에서 벌어졌다.
   아옌데가 이끄는 칠레 민중전선 정부가 개혁을 추진하고 이에 우익이 저항하자, 노동계급이 매우 전투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시위와 파업이 벌어졌다. 기업주들은 아옌데에 반대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공장 가동을 멈췄다. 그러자 노동자들은 공장을 장악했고, 노동자 평의회 비슷한 조직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잠재적으로 혁명적 상황으로 발전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민중전선 정부는 노동자들이 너무 멀리 나아가지 못하도록 뜯어말렸다. 노동계급은 동원을 그만뒀다. 그러자 피노체트 장군의 군대가 1973년 9월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노동자 조직들을 파괴했다.

계급연합 전략을 반대한다고 해서 노동계급 혼자 싸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무릇 모든 변혁운동이 그렇듯이, 노동계급은 승리하기 위해 농촌과 도시의 중간계급들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야 한다. 농민과 도시 중간계급이 노동계급과 척을 지고 대자본가 계급 쪽으로 간다면 노동계급은 분열해 성공을 거둘 수 없다. 많은 노동자들이 농민의 자식이고, 도시 중간계급의 자식이나 형제자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떻게 농민과 도시 중간계급의 지지를 얻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중간계급에 대해 잘 이해해야 한다. 계급연합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중간계급을 하나의 단일한 계급으로 여긴다. 하지만 중간계급은 온갖 잡다한 계층들로 구성돼 있고, 서로 단일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상층 중간계급은 대자본과 연결돼 있는 반면 하층 중간계급은 노동계급과 가깝다. 파산에 직면한 하층 중간계급은 결코 자기 계급의 상층에 대해 동질감을 갖지 않는다. 동질적이지 않기는 농민도 마찬가지다. 부농과 빈농의 이해관계는 다르다.
   노동운동이 부르주아지와 이해관계의 최소공배수를 도출해 그것에 복무하려고 한다면, 중간계급은 자신을 위기에 빠뜨린 정책의 재탕을 하려 한다는 것을 깨닫고 노동계급을 대안세력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노동계급이 독립적인 투쟁으로 전쟁과 빈곤으로 얼룩진 세계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자신의 힘을 내보여야만 농민과 도시 중간계급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하층 중간계급은 여러 어려움에 처해 있고, 자신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는 열린우리당에게 환멸을 가지고 있다. 열린우리당에 대한 분노는 가벼이 볼 수준이 아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반한나라당 친열우당개혁파 전선은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만약 열린우리당의 일부 세력(김근태의 개혁파)과 동맹하려 한다면, 열린우리당에 진저리가 난 중간계급의 지지를 획득하지 못할 것이다.

민중전선 전략의 또 다른 폐해는 독립적인 노동계급 투쟁을 억제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독립적인 투쟁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것은 “돈키호테식 모험”11)으로 냉소받는다. 단일전선체 옹호론자들은 노동계급이 자기 계급의 이익을 앞세워서는 안 되며 전체 민중의 이익을 앞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12)세상을 바꾸는 투쟁’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한다.
   노동자들 자신의 고유한 요구를 제출하는 투쟁을 마치 이기주의적인 것처럼 백안시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사기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노무현 집권 내내 ‘대기업 노동자 이기주의’ 같은 이데올로기 공격 때문에 가장 잘 조직된 부위의 노동자들이 기를 펴지 못하는 상황에서 운동 내부에서마저 이런 목소리가 나온다면 노동자들은 더욱 위축될 것이다.
   그러나 한국 노동운동을 돌아보더라도, 자기 계급의 이익을 주저없이 내놓았던 노동자 투쟁이 사회 전체의 진일보를 가져오거나 민중의 삶을 방어한 경우가 적지 않다. 1998년 현대차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 투쟁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투쟁은 비록 노조 지도자의 양보로 비기는 데 그쳤지만,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어느 정도 방어하고, 동시에 김대중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대폭 수정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1998년 당시 세계은행 부총재였던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한국이 IMF의 정책을 충실히 따르지 않은 덕분에 경제 공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나중에 지적했다(≪세계화와 그 불만≫, 세종연구원 펴냄, 220쪽). 이것은 노동자 투쟁이 경제 위기의 해결책일 수 있음을 증명한다. 37년 만의 정권교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1997년 총파업도, 한국 사회의 전환점을 이룬 1987년 노동자 대투쟁도 모두 노동계급의 이익을 앞세웠던 투쟁이다.
   물론 노동자 운동은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투쟁할 수 있어야 하지만, 거꾸로 노동자들 자신의 요구가 억눌려서는 안 된다. 노동자는 자기 자신의 해방을 위해 싸울 때만 승리를 확신할 수 있다.

민중전선이 광범한 단결을 이루고 우리 운동의 힘을 강화시키는 방법이 아니라면, 과연 어떻게 연대와 단결을 이루고 운동을 한층 전진시킬 수 있을까?
   코민테른 3~4차 대회에서 제안된 공동전선(United Front) 전략 · 전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중전선이 부르주아 정당까지 포함하는 계급 협조 노선인 반면, 공동전선은 노동계급 정당들 사이의 행동통일이다. 민중전선이 정부 수립을 위한 공통의 정치강령을 가지고 움직이는 반면, 공동전선은 특정한 구체적 목표를 위해 싸운다는 합의에 바탕을 둔다.
   단일전선체가 갖는 공통의 정치강령은 노동계급의 행동을 제약할 뿐 아니라 더 큰 연대의 가능성도 제약할 것이다. 서로 강령에 동의하지 않는 세력들도 특정 쟁점을 둘러싸고는 함께 큰 운동을 건설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세계적 운동은 서로 다른 강령과 전략을 갖는 다양한 세력들의 연대 속에서 성장해 왔다. 이 속에서 각 정치 세력들은 자기 주장의 올바름을 입증받으려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연대를 위해서 독자적 강령을 유보하라고 상대방에게 요구한다면 단결을 이룰 수 없다. 예컨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반대 운동에는 여러 세력이 모일 수 있지만, 이 운동이 민족 자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훨씬 더 적은 세력만이 모일 수 있을 것이다. 분석과 대안을 둘러싼 차이들은 공동전선 안에서 자유롭게 토론돼야 한다. 공동전선 안에는 비판할 자유, 간행물을 만들고 선전할 자유, 필요하다면 독자적으로 행동할 자유가 있어야 한다. 공동전선이 특정한 쟁점을 둘러싸고 결성돼야 하는 이유는 조직의 독립성과 정치적 명확성을 유지할 필요에서 나온다.
   만약 지금 계획대로 단일전선체가 추진된다면 그것은 사실상 하나의 정치 조직 성격을 띄게 될 수 있다. 제2의 전국연합처럼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 조직의 이름이 어떻게 됐든 조직의 성격으로 무엇을 표방하든 관계없이, 그 조직 밖에서 진정한 연대전선의 필요성은 다시 제기될 것이다.

운동의 지향과 방법들을 표현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이 무엇인지는 중요한 문제다. 유럽과 브라질 등에서는 “사회적 자유주의”와 단절하고 대안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는 새로운 급진좌파 정치조직이 등장하고 있다. 현재 남한 상황에서 정치적 대안으로 여겨질 수 있는 세력은 민주노동당이다. 좌파들은 선거에서 자본가 정당들에 반대해 민주노동당을 지지할 필요가 있다. 민주노동당이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세계적 운동의 흐름을 더 잘 반영할 수 있도록 요구하면서 말이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이 더는 자유주의 자본가 정당에 정치적 의탁을 하지 않고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추구한 결과 등장한 당이다. 민주노동당이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정치적 표현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자본가 계급으로부터의 독립은 진일보다. 따라서 민주노동당을 계급연합 정당으로 바꾸자거나13)(“국민정당화”), 민주노동당 밖에서 민중전선을 만들어 민주노동당이 그 통제에 따르도록 만들려는 것14)은 명백한 후퇴다.
   단일전선체론자들은 단일전선체와 민주노동당의 관계를 대중 투쟁과 원내 활동의 관계로 그럴 듯하게 설명하려 들지만, 그들에게 핵심은 민주노동당만으로는 집권할 수 없다는 것이다.15) 현재의 민주노동당 강화론은 오히려 계급연합 성사를 위해 민중운동 진영의 힘을 모으자는 논리에 불과하다(우리 진영의 단결 없이는 계급연합도 이룰 수 없다는 식). 하지만, 2008년(또는 2012년) 대선에서 모종의 자유주의적 개혁 세력과 연합하는 게 2012년(또는 그 뒤) 민주노동당 집권을 위한 징검다리가 될까? 열우당과 민주노동당은 공동운명체다, 노무현 정부가 마무리를 잘 해야 민주노동당에 이롭다는 식의 얘기들은 오히려 민주노동당과 열우당의 경계를 흐림으로써 민주노동당이 선명한 대안으로 호소력을 갖는 것을 방해해 왔다. 오히려 지금은 대중이 모종의 부르주아 개혁 세력(열우당 개혁파든 386이든)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을 가속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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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일연대연합체는 사안별 연대체와는 달리 전략적 차원에서 공동의 정치 강령과 목표를 갖고, 진보운동진영의 모든 정치활동과 정치투쟁을 통일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유일한 정치 투쟁 구심체이며, 곧 정치투쟁전선체이다. … 진보진영의 단일연대연합체는 사안별 공동투쟁체와는 달리 전략적 지위를 갖는다. 단일연대연합체의 공동의 정치적 강령은 민중주체의 진보적 민주주의 정권이 수립되어야 실현될 수 있는 전략적 과업인 것이다. … 진보적 민주주의 정권수립을 목표로 한 진보진영의 단일연대연합체는 당연히 전략적 목표 실현을 위한 연대연합체이니만큼 전략적 지위를 갖고 그 지위에 맞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박경순, ‘단일연대연합체’를 건설하자(2005. 12. 12))

2) “진보운동진영의 단일한 정치적 · 조직적 구심을 확고히 세우고 그것을 중심으로[강조는 인용자] 전체민중들이 대동단결할 수 있는 조직적 틀을 세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난립된 연대연합질서를 재편하여 진보운동진영의 단일연대연합체를 구축해야 한다.”(박경순, ‘단일연대연합체’를 건설하자(2005. 12. 12))

3)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횡포로 피해를 입고 있는 계급 계층은 소수 매판 대기업들을 제외한 전체 민중들[강조는 인용자]이다. … 노동자 계급의 이익과 전체 민중들의 이익은 하나로 통일되고 있[다]. … 노동자 계급만의 고립적 투쟁은 어리석은 실패의 지름길이다. [승리의 길]은 노동자와 민중들의 총단결이다. 단결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단결의 무기가 있어야 하며, 그 단결의 무기가 바로 단일연대연합체이다.” (박경순, 노동운동의 혁신과 단일연대연합체(2006. 1. 2))

4) “사회양극화는 종속경제의 산물이며,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증폭되고 있다.”(박경순, 2006년 정세전망과 진보운동진영의 과제(2006. 2. 7))
“사회양극화의 본질과 원인을 정확히 폭로함으로써 … 반미투쟁의 방향으로 이끌어야 나가야 한다.”(박경순, 2006년 정세전망과 진보운동진영의 과제(2006. 2. 7))

5) 단일전선체의 계급연합 전략은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또는 반제반봉건(반자본주의)민주주의혁명을 위한 “인민전선” 또는 “민족통일전선”의 현대화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의 대상은 제국주의자들과 지주, 예속자본가, 반동관료배로 되며 이 혁명의 동력은 노동계급을 비롯한 광범한 근로인민대중으로 된다. … 여기에는 양심적인 민족자본가와 종교인도 혁명의 동력으로 참가할 수 있다. 
“자본주의 발전의 정상적 길을 거치지 못한 것으로 하여 계급구성이 복잡한 식민지 · 반식민지 나라에서는 노동자, 농민 외에도 혁명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모든 계급과 계층을 혁명의 편에 인입하지 않는다면 반혁명세력에 대한 혁명역량의 압도적 우세를 보장할 수 없다.”(주체사상총서(4) 중에서. (사회과학출판사, 1985년, 평양))

6) “‘9.19 베이징공동성명’은 한반도 냉전 체제의 종식 선언이다. … 미국은 한반도 냉전체제를 유지 온존하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9.19베이징공동성명 … 실현을 가로막으려 혈안이 되어 있다. … 이러한 정세에서 미국을 완전히 몰아내고 자주와 평등에 기초한 새로운 한반도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진보적 민중들이 하나의 정치전선으로 총결집[해야 한다.] … 이를 위해서는 진보운동진영의 단일한 정치적 · 조직적 구심을 확고히 세우고 그것을 중심으로 전체민중들이 대동단결할 수 있는 조직적 틀을 세워야 한다.”(박경순, ‘단일연대연합체’를 건설하자(2005. 12. 12))
“최근 반통일 보수세력들은 집요하고 치밀하게 남북 화해협력 흐름, 개혁 진보흐름을 뒤집고, 반북대결구조를 되살리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고 있다. … 이들의 움직임을 차단하지 않는 한 6.15 공동선언 이행은 물거품으로 될 것이다. 현 정세는 반통일 · 보수세력과 개혁 · 진보세력의 대결전의 시기[강조는 인용자]가 점차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해 주고 있다.”(박경순, 단일연대연합체는 통일운동발전의 디딤돌(2005. 12. 19))

7) “통일운동에서는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지지하는가 아닌가(현 시기에서는 6.15공동선언을 지지하는가 아닌가)가 유일한 기준”(박경순, 단일연대연합체는 통일운동발전의 디딤돌(2005. 12. 19))

8) “통일운동에서는 집권세력이나 일부 보수세력도 참여[강조는 인용자]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을 연대연합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진보진영의 단일연대연합체 건설은 통일운동을 밀고나가는 추동력을 갖추는 사업이다. … 진보진영의 단일연대연합체가 건설되어 이 조직이 6.15민족공동위에 조직적으로 참여[강조는 인용자] … 6.15민족공동위 강화를 위해서도 진보진영의 단일연대연합체 건설은 매우 절실하고 시급하다.”(박경순, 단일연대연합체는 통일운동발전의 디딤돌(2005. 12. 19))

9) “2006년에서 2008년까지의 시기적 특성입니다. 물론 우리는 불만족스럽지만,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에 들어오면서 어느 정도 민주주의와 개혁을 이룩했다 … 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올해 지자체 선거, 내년 대선 그 이후의 총선이라는 기간 동안 과연 이런 한국사회의 민주개혁 흐름을 발전시키 나갈 것인가 아니면 한나라당이 재집권에 성공해서 역흐름이 형성되진 않겠는가, 이런 중요한 전진 도상에 있어서 한국사회가 어느 길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갈릴 수 있는 중요한 시기라고 봅니다. 이러한 시기에 있어서 우리가 단결해 투쟁하지 않는다면 이런 어려운 정세를 돌파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바로 진보운동진영의 대동단결요구가 흘러나왔다고 봅니다.”(민중의 소리 기획좌담(2006. 1. 26) ‘진보운동의 전선재편, 왜 필요한가’ 중에서 박경순의 말)

10) “향후 제반 정치일정(선거)에서 대중적 지지 기반을 확보하여 친미수구세력들과의 정치적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친미 보수세력들의 신보수대연합에 맞서 반보수대연합을 구축[강조는 인용자]해야 할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기도 하다. … 신보수대연합을 통한 정권 탈환 음모를 저지 분쇄하는 것을 현 정세의 핵심 과제로 내세워야 한다.”(박경순, 2006년 정세전망과 진보운동진영의 과제(2006. 2. 7))

11) “‘세상을 바꾸는 투쟁’은 노동자들만의 투쟁으로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노동자들만의 고립적인 투쟁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것은 돈키호테식 모험에 불과하다.”(박경순, 노동운동의 혁신과 단일연대연합체(2006. 1. 2))[그러나 노동자들의 독자적 투쟁이 꼭 고립적인 투쟁인 것은 아니다 ― 인용자]

12) “노동자들은 전체민중들의 이익을 맨 앞자리에 내세우고 그것의 실현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야 한다.”(박경순, 노동운동의 혁신과 단일연대연합체(2006. 1. 2))

13) “근본적으로 집권을 실현하는 것이 정치세력화의 근본취지라면 … 노동운동은 진보적 대중정당을 노동자 계급만을 위한 정당,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맨 앞에 놓고 투쟁하는 정당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강조는 인용자]. 집권을 위해서는 전체 민중들의 통일단결을 이룩해야 하며 … 노동자 계급의 이익보다 전체 민중의 이익을 맨 앞자리에 놓고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노동자가 맨 앞장서서 투쟁하는 그러한 대중정당으로 만들어야 한다.” (박경순, 노동운동의 혁신과 단일연대연합체(2006. 1. 2))

14) “[단일연대연합체는] 협의적 성격의 조직이 아니라 연합적 성격의 조직이다. 연합적 성격의 조직이란 정치적 행동의 통일성과 규율성을 보장함으로써 대중적 단결을 실현하기 위해 단일한 지도집행체계를 갖추고, 지도집행체계의 의사결정사항들을 모든 소속단체와 개인들이 의무적으로 집행하는 규율[강조는 인용자]을 갖는 조직 활동 체계이다.
“단일연대연합체 중심으로 결집하여 통일적인 전략과 노선을 갖고 통일적인 정치투쟁방침 아래에서 일사분란한 정치활동과 정치투쟁을 펼쳐나가야 한다.”(박경순, ‘단일연대연합체’를 건설하자(20055. 12. 12))

15) “민주노동당은 합법정당인만큼 그 형식과 틀에 맞는 활동을 많이 해야 합니다. 매일 거리에 나가서 가투나 하는 운동권 정당으로 낙인찍히면 민주노동당은 성장, 발전하지 못한다고 봅니다. 결국 의회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 정당을 지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민주노동당이 과연 집권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에는 많이 생각을 해야겠죠. 민주노동당의 집권이라는 것은 한국사회의 정치 구조적 변혁과 밀접하게 결합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그렇게 추진해 나가야 합니다. … 그런 측면에서는 의회활동만이 아니라 흔히 말하는 거리에서의 대중정치활동과 투쟁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통일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은 당 밖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강조는 인용자] 하는 생각입니다. … 민주노동당이 당 밖에 우호적인 대중단체연합을 건설하는 것은 당 발전 뿐만 아니라 집권에도 매우 유익하다 … 봅니다.”(민중의 소리 기획좌담(2006. 1. 26) ‘진보운동의 전선재편, 왜 필요한가’ 중에서 박경순의 말)
“단순히 의회활동, 진보정당의 독자적 활동만으로 불가능하다. 사회적 개혁과 진보를 지향하는 모든 대중단체와 정치세력, 개별인사들이 하나의 정치전선에 총 단결하여 대중정치투쟁전선을 형성[해야 한다.]”(박경순, 진보적 대중정당을 혁신 · 강화하자(2005.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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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비지론”(비판적 지지론)

입력 2006-04-05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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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소련과 사회주의

애비 바칸 (정치학 교수)

[편집자] 최근 대안 사회 모델을 둘러싼 논쟁이 달아오르고 있다. 캐나다 사회주의자인 애비 바칸은 옛 소련이 사회주의와 전혀 관계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자본주의를 대체할 혁명적 대안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주의하면 야만적인 스탈린주의 체제를 떠올린다. 20세기 대부분 동안 옛 소련과 동유럽을 지배한 스탈린주의 체제는 서방 자본주의보다 결코 더 나은 것이 아니었다.

전쟁과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새 세대가 거리에서 투쟁을 벌이지만, 스탈린주의의 유산은 여전히 현재의 논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요시프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마르크스주의의 화신을 자처했다. 그러나 온갖 미사여구에도 그것은 사회주의와 아무 관계도 없는 체제였다.

우리는 조지 부시 정부가 민주주의에 대해 뭐라고 떠들어 대든 그들의 말이 아니라 행동을 보고 그들을 평가한다. 스탈린주의도 마찬가지다. 스탈린주의는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같은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염원한 사회주의와 아무 관계도 없었다.

스탈린은 노동자 민주주의라는 원칙을 바탕으로 한 체제를 잔혹하고 체계적인 착취 · 억압 체제로 바꿔놓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전 세계 노동자 · 빈민에게 영감을 줬다. 러시아 혁명은 주요 나라 가운데 최초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에서 영감을 얻어 일어난 혁명이었다.

차르 국가는 혁명 과정에서 분쇄됐고, 뒤따른 내전 과정에서 소수 특권층은 마침내 패배했다.

노동자 · 농민 · 병사 평의회가 주도하는 대중 정부는 지주와 민간 산업 자본가 계급을 철저히 타도했다.

러시아어로 “소비에트”라고 부른 이 평의회는 새롭고 진정으로 민주적인 노동자 국가의 진수였다. 노동자들은 소비에트를 통해 사회를 자신들에게 이롭게 운영하며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

생산은 이윤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이뤄졌다. 소비에트 대의원들은 그들을 선출한 사람들의 다수가 원하면 언제든 소환될 수 있었다.

또, 러시아 혁명은 제1차세계대전의 동부전선에서 전쟁을 끝낸, 세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반전 운동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야만을 대체할 진정한 대안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보여 줬다.

스탈린의 반혁명은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이 죽은 후인 192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혁명 운동이 다른 나라[특히 독일]에서 실패하자 러시아는 정치 경제적으로 고립됐다.

서방 열강의 개입과 우익 세력들의 저항 때문에 야만적인 내전이 벌어졌고,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노동계급은 내전 중에 상당수가 살해됐다.

이 때문에 신흥 관료 계층이 스탈린 주위로 집결해 국가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국사회주의' 건설이 필요하며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 완전히 낯선 이론이었다.

뻔뻔한 거짓말

소련의 국가자본주의 체제는 스스로 사회주의라고 우겼다. 이는 나중에 국제적 모델이 돼서, 동유럽 · 중국 등지에서 모방됐다.

국가자본주의에서는 민간 자본가들이 아니라 국가가 자본을 축적하고 세계시장에서 이윤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한다.

새로운 자본가 계급 구실을 하는 국가 관료들이 반혁명을 주도했다.

혁명 이후 소련이 철저하게 고립되고 쇠약해진 상황에서 시간이 흐르자 이 신생 계급이 노동자들에 맞서 힘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윤 추구와 자본축적을 향한 결정적 변화는 ‘제1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28년에 일어났다.

1920년대 말과 1930년대에 소련 관료는 의식적으로 국가자본주의적 지배계급으로 행동했다.

차르 정권에 대한 혁명적 도전을 이끈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박해받고 수감되고 살해되거나 망명했다.

농민은 자기 땅에서 쫓겨나 노동수용소에 강제 수용됐고, 반항하면 고문당하고 살해됐다.

도시 노동자들은 파업권을 박탈당하고, 노동조합은 국가에 대한 독립성을 잃고 국가의 자본축적 확장에 필요한 생산 할당량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1920년대 초에도 소련은 경제 제재 때문에 세계 자본주의에서 고립됐지만 볼셰비키는 국가와 작업장 관리자에 대한 노동조합의 독립성을 옹호했다.

당시에는 당 지역 기구, 노동자 공장위원회, 노동자 관리 하의 기술 전문가로 구성된 3자 위원회가 서로 협력하며 작업장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5개년 계획과 함께 노동자의 주도적 구실은 사라졌다. 오히려 관리자들 개인이 중앙 관료들이 지정한 생산 할당량에 따라 독단적으로 작업장을 운영했다.

소련에서 스탈린주의는 60년 간 지속됐다. 1953년 스탈린이 죽은 후에도 살아남았다. 그것은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종식됐다. 자본주의는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다른 형태로 유지되고 있지만, 이제 그 곳의 지배계급은 그 체제를 더는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르지 않는다.

소련 국가자본주의는 미국이나 다른 서방 국가들의 자본주의와 똑같지 않았다. 소련 경제는 특정한 방식으로 ‘계획'됐다.

그러나 5개년 계획이 거듭될 때마다 생산 목표는 서방과의 군비 경쟁에 대응해 매번 사후 조정됐다.

모든 재산은 국유화됐다. 민간 자본가 계급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자본주의였다.

스탈린주의적 계획에서는 군비 확대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소련은 영국과 독일 등 세계 열강의 위협을 받았다. 군비 확대는 노동자 착취 강화를 수반했다.

착취율을 결정한 것은 당시 세계 최대의 자본주의 열강인 미국과의 경쟁 ― ‘총에는 총으로, 총알에는 총알로, 폭탄에는 폭탄으로' 식의 ― 이었다.

이 세계적 군비 경쟁이 냉전의 기초가 됐다. 러시아 혁명이 파괴되자, 사회주의가 수많은 사람에게 보여 준 희망은 절망과 혼란으로 바뀌었다.

각국 공산당은 러시아 혁명에 연대한다는 대의로 가장 헌신적인 활동가들과 급진적 작가들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1920년대 말에 이르면 각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외교 정책 도구 노릇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혹독한 비판을 당하고 축출됐다.

중국 · 독일 · 스페인 · 쿠바 등지의 공산당은 노동자 권력을 향한 혁명적 전망을 비극적으로 배신했다.

러시아 혁명, 그 성공과 패배를 명확히 인식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실천에서 매우 중요하다.

국제사회주의(IS) 경향과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창시자인 토니 클리프는 1947년에 쓴 ≪소련 국가자본주의≫에서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분석했다.

해방

소련 내부의 계급 모순을 이해하는 것은 캄캄한 터널에서 한 줄기 빛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덕분에 서방의 극소수 사회주의자들은 아주 어려운 시기에도 마르크스주의의 진정한 정신 ― 노동계급 자기해방에 근거한 인간 해방을 위한 현실적 과학 ― 을 보존할 수 있었다.

오늘날 스탈린주의의 영향력은 냉전 때보다 훨씬 미약하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의 유산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힌다.

좌파들은 러시아 혁명 초기에 영감을 불러일으킨 인간 해방의 이상을 많이 잃었다.

오늘날 사회주의에 관한 논쟁을 하면 사람들은 인류가 자본주의의 독재에서 해방될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흔히 ‘실재했던 사회주의'의 사례를 지적하기 바쁘다.

자본주의의 모순, 세계를 바꾸고 새롭고 다른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노동자와 빈민 들의 잠재력에 주목하는 경우는 드물다.

사회주의적 대안에 대해 얘기할 때 많은 사람은 흔히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나 우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를 모델로 든다. 이들 국가는 미국 제국주의에 용감하게 맞서고 있다. 그들은 반전 운동과 반자본주의 운동에 심대한 영감을 줬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의 가장 급진적 정부의 정책조차 조지 부시 정부의 끝없는 군사 위협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주의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사회주의는 그런 위협이 사라진 세계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미국 · 쿠바 · 베네수엘라와 전 세계의 노동계급이 인간의 필요에 따라 사회를 집단적으로 조직할 것이다.

칼 마르크스가 원래 제시한 사회주의 개념은 사회 전체의 혁명적 변혁에 기초한 자유와 해방의 사상이다.

평생 협력자인 엥겔스와 함께 마르크스는 인류 해방을 위해 착취의 종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삶의 물질적 조건을 변화시키는 것을 뜻했다.

이는 단순한 부의 재분배와는 다르다.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또한 인간의 잠재력을 해방하는 것도 목표로 삼는 것이다.

이는 의식적 · 창조적 · 생산적 노동 능력을 개발하고 천대와 소외가 없는 인간 관계를 발전시킬 가능성을 포함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도전은 아래로부터 와야 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혁명의 결과와 혁명의 과정 ― 자본주의의 착취에 도전하는 의식적 · 집단적 저항 ― 을 분리하지 않았다.

초기 볼셰비키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는 스탈린주의가 혁명을 패배시키기 전 혁명적 시기의 역사에 기록돼 있다.

사회주의 운동은 스탈린주의 때문에 이런 이상 중 많은 부분을 포기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것을 다시 불러올 수 있는 힘과 그래야 할 책임이 있다.

우리는 새롭고 더 나은 세계를 지향하는, 현실적이면서도 스탈린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사회주의적 이상을 부활시킬 수 있다.

입력 2007-03-20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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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몰리뉴의 실천가들을 위한 마르크스주의 입문 20

러시아 혁명은 왜 실패했는가?

존 몰리뉴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세계 최초로 성공한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러시아 혁명은 노동계급이 비록 사회에서 소수파일지라도 권력을 장악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러시아 혁명은 또, 정치 조직 형태인 노동자 평의회, 즉 소비에트를 전 세계에 선보이기도 했다. 이 소비에트를 통해 노동계급이 실제로 사회를 운영할 수 있음도 입증한 것이다.

그러나 20년 뒤인 1937년의 러시아는 사유재산이 아니라 국가가 지배한다는 점말고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개념이나 1917년 혁명의 목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회가 돼 있었다.

1937년의 러시아는 무소불위의 독재자 스탈린이 보안경찰 등 막강한 국가 기구를 이용해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 사회에서는 자유 · 논쟁 ·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았고, 아무리 하찮은 이견이라도 징역이나 사형으로 처벌받을 수 있었다. 노동계급은 혹독한 빈곤 속에 살면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됐고, 노동자들을 방어할 진정한 노동조합도 존재하지 않았다. 많은 농민들은 최근에야 기근과 기아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러시아 혁명으로 크게 감소했던 불평등이 이제 급증하고 있었다. 새로운 지배자들 · 관리자들 · 관료들은 축재에 여념이 없었고,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반(反)국가 범죄로 처벌받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됐을까? 분명히, 이 질문의 대답에 아주 많은 것이 걸려 있다. 특히, 지금 21세기에 사회주의 혁명을 설득력 있게 주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이 대답에 달려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우리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 전에, 지금까지 나온 다른 대답들을 먼저 살펴보자.

스탈린

두 주요 집단 ― 서방 지배계급들(과 그 이데올로그들)과 스탈린주의자들 ― 은 [러시아 혁명이]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서방 부르주아의 견해는 노동 대중이 본래 사회를 운영할 수 없기 때문에 노동자 권력, 자유, 평등에 대한 얘기는 모두 백일몽일 뿐이고, 독재와 폭정은 사회주의 사회 건설 노력의 의식적 목표이거나 아니면 기껏해야 그 불가피한 결과라는 것이다. 스탈린주의의 견해는 1930년대의 소련이 진정한 사회주의의 구현체이자 마르크스 · 레닌 사상의 구현체이고, 폭정이나 경찰국가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부르주아지의 선전일 뿐이라는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견해는 첫째, 노동계급에 대한 편견과 둘째,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대한 무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문제를 여기서 길게 다루지는 않겠다. 이 연재 칼럼이 모두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의 견해는 사실에 대한 무지나 부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스탈린주의의 견해는 진정한 혁명가들의 증언(예컨대 빅토르 세르주의 ≪어느 혁명가의 회고≫를 보시오)을 비롯해 산더미 같은 증언과 목격자 진술에 의해, 무엇보다 역사에 의해 논박당했다. 소련이나 동유럽의 이른바 사회주의 나라들이 정말로 노동 대중을 위한 약속의 땅이었다면, 1989~91년에 이들 나라의 노동계급이 자국 정권을 지키기 위해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아 그 정권들이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옛 소련에 뭔가 문제가 있었다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주로 러시아 정치 지도자들 ― 스탈린 · 레닌 · 볼셰비키당 ― 의 성격과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맞춘다. 1956년에 흐루시초프는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의 ‘비밀 연설'에서 스탈린 시대의 범죄들을 비난했다. 그는 스탈린 주위에서 발전한 ‘우상 숭배'와 스탈린의 가학적 성격을 비난했다. 우상 숭배와 가학성은 분명히 사실이지만, 이렇게 설명하는 것에도 분명히 약점이 있다. 왜 우상 숭배가 발전했고, 왜 공산당은 가학적 괴물을 지도자로 세우고 계속 떠받들었는가?

서구 학자들이 선호하는 주된 설명은 레닌주의와 볼셰비즘의 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인즉 전체주의적인 볼셰비키당으로 구현된 레닌 개인과 레닌주의 이데올로기의 전체주의적 성격이 스탈린주의의 만행을 낳은 것은 어느 정도 필연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러시아 혁명 전과 혁명 기간, 혁명 직후 볼셰비키당이 매우 민주적이었다는 사실과 스탈린이 자신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고참 볼셰비크들을 거의 모두 물리적으로 제거해야 했다는 사실 같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을 모르거나 애써 무시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설명들은 모두 더 심각한 결함이 있다. 이런 설명들은 모두 이른바 부르주아적 ‘위인' 사관의 변형들이다. 이런 ‘위인' 사관은 무엇보다 극소수 위인들(흔히 왕이나 장군 들이지만, 옛 소련의 경우에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들과 활동가들)의 사상과 행동이 역사를 좌우한다고 본다.

그러나 역사를 좌우하는 것은 무엇보다 계급들 간의 투쟁이고 이 계급투쟁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발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여느 세계사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혁명의 운명에도 이런 역사유물론적 관점을 적용해야 한다.

따라서 진정한 문제는 1917년 10월에 권력을 장악한 노동계급이 어떻게 그 권력을 잃게 됐는가 하는 것이다. 일단 이것을 핵심 문제로 제기하고 나면 그 해답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첫째, 러시아의 경제 발전이 유럽이나 북아메리카보다 후진적이었고, 따라서 러시아의 도시 노동계급도 상대적으로 소규모였다. 이 자체가 결정적 요인은 아니었지만(그랬다면 1917년 10월 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노동계급의 위치가 처음에 취약했던 것은 사실이다.

역사유물론

둘째, 혁명 뒤 서방 제국주의 열강이 러시아에 개입해서 벌어진 1918~21년의 내전 기간에 러시아 경제가 철저하게 파괴됐다. 이 파괴의 규모를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대규모 공업 생산은 1913년 수준의 21퍼센트로 하락했고, 공장들이 문을 닫았고, 교통이 마비됐고, 콜레라와 결핵 같은 전염병이 창궐했고, 기근이 만연했다. 이 때문에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경제적 토대가 파괴됐다. 게다가 내전 기간에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이 대부분 학살당했다. 1917년에 권력을 장악한 계급이 1921년쯤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고 더는 자신의 집단적 의지를 사회에 관철할 수 없었다.

노동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또 다른 사회 세력이 지배권을 장악해야 했다. 보통은 귀족이나 부르주아지가 그렇게 했을 테지만, 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쫓겨난 뒤였다. 따라서 점점 더 대중의 통제를 벗어나 운신의 폭을 넓히던 국가 · 당 관료 집단이 권력을 장악했다.

셋째이자 마지막으로, 러시아 혁명은 국제적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고립됐다. 국제 혁명은 특히 독일에서 거의 성공할 뻔했지만 실패했고, 그 결과 혁명 이후 경제 재건과 노동계급의 부흥과 재충전에 필요한 원조를 받을 수 없게 됐고, 그래서 러시아는 서방 자본주의의 엄청난 경제적 · 군사적 압력을 받게 됐다.

인간 본성 또는 이른바 마르크스 · 레닌주의 이데올로기의 결함이 아니라 이 실제의 물질적 요인들의 상호작용이 러시아 혁명의 운명을 결정하고 스탈린주의를 낳은 것이다. 스탈린주의의 정확한 성격은 다음 칼럼에서 다룰 것이다.

존 몰리뉴는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책갈피),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의 저자다.

입력 2007-06-12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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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몰리뉴의 실천가들을 위한 마르크스주의 입문 21

스탈린주의의 성격

존 몰리뉴

스탈린주의는 1930~40년대 옛 소련의 정치 체제를 가리키는 적절한 명칭이다. 왜냐하면 첫째, 이오시프 스탈린이 그 시절의 절대 지배자였기 때문이고 둘째, 그 용어[스탈린주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일반과 옛 소련 체제를, 그리고 레닌 생전의 소비에트 권력과 소련 체제를 적절하게 구분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탈린주의라는 용어만으로는 스탈린과 스탈린주의가 득세한 사회의 경제적 · 사회적 · 계급적 성격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경제적 동역학은 무엇이었는가? 서방 자본주의의 동역학과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었나, 다른 것이었나? 스탈린주의 러시아는 근본적으로 계급 분열 사회였나, 계급 없는 사회였나, 아니면 계급 없는 사회로 전환중인 과도기 사회였나? 스탈린주의 러시아에 계급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과연 어떤 계급들이었나? 또, 지배계급은 누구였나?

이런 물음들은 모두 서로 연결돼 있고 사실은 하나의 물음, 즉 옛 소련 사회의 계급적 성격이라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사회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60년 넘게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 문제는 러시아 자체, 그 비슷한 “공산권” 나라들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옛 소련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부를 자처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상당한 지도력도 행사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옛 소련과 동유럽의 공산주의가 무너진 지 한참 뒤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는 역사적인 이유로 일부 스탈린주의 · 반(半)스탈린주의 체제들, 특히 북한이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론적으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핵심 문제와 이 문제가 연결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북한

옛 소련 사회의 계급적 성격을 둘러싼 논쟁에서 크게 네 가지 입장이 나왔다. 첫째, 옛 소련은 사회주의였다. 둘째, 퇴보한 노동자 국가였다. 셋째,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관료적 집산주의였다. 넷째, 국가자본주의였다.

첫째 입장이 단연 가장 흔했다. 주류 “공산주의자들”, 많은 사회민주주의자들, 우파가 모두 이런 견해를 공유했다. 그래서 이 견해가 “상식”이 됐다. 그러나 이 견해는 또, 가장 해악적인 것이기도 했다. 이 견해를 가진 좌파들은 흔히 확고한 역사적 사실을 부인했고, 근본적으로 이 견해는 사회주의의 핵심이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이나 노동자 권력이 아니라 단지 재산의 국가 소유일 뿐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파가 이 견해에 동의한 이유는 그들이 노동자 국가를 어쨌든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고, 사회주의와 스탈린주의가 똑같은 것이라고 떠들어대면 대중이 사회주의를 불신하게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퇴보한 노동자 국가론은 트로츠키나 정설파 트로츠키주의와 관계 있다. 이 입장은 스탈린주의 관료들이 러시아 혁명의 목표를 배신했고 옛 소련의 사회주의적 발전과 국제 노동자 혁명에 대해 적대적인 반혁명 세력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정치 혁명으로 스탈린주의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입장은 국유화된 소유관계를 근거로 소련 경제가 탈(脫)자본주의 경제이고, 따라서 스탈린주의 러시아는 세계 자본주의보다 더 진보적인 노동자 국가이므로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을 방어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트로츠키의 입장은 혁명적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스탈린주의 반대와 서방 자본주의 반대를 결합시킨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과 사회주의를 분리시킬 여지를 남겼다는 약점도 있었다.

관료 집산주의론은 트로츠키주의 운동 안에서 노동자 국가론에 반대한 사람들(특히, 미국의 막스 샤트만)이 처음으로 발전시켰지만, 그 뒤 다양한 학자들이 이를 받아들였다. 이 입장은 국가 소유가 사회주의나 노동자 국가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하지만, 국가 소유는 자본주의의 폐지라는 생각을 받아들인다. 그래서 소련이 새로운 지배계급이 군림하는 새로운 형태의 계급 사회라고 주장한다. 불행하게도 이 이론의 주창자들은 이 새로운 생산양식의 경제적 동역학이나 역사 발전 과정에서 관료 집산주의의 위치를 분명히 밝히지 못했다. 이 때문에 “관료 집산주의” 사회들이 자본주의보다 더 진보적인지 아닌지에 대해 혼란이 생겼고, 그래서 이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자들이 우파로 변모했다. 이들은 스탈린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더 나쁘다는 이유로 미국 제국주의를 지지하기까지 했다.

스탈린주의 러시아를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는 입장은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비롯한 좌익 반대파들 사이에서 처음부터 존재했지만, 가장 일관된 국가자본주의론은 ‘국제사회주의 경향'(IST)의 창시자인 토니 클리프가 1940년대 말에 발전시킨 것이다. 클리프의 출발점은 스탈린주의가 동유럽(과 북한)에서 노동자 혁명 없이도 적군(소련 군대)을 동원해 사회주의나 노동자 국가를 수립해 주었다면 노동계급의 혁명적 구실을 주장한 마르크스의 근본 사상을 폐기해야 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국가 소유라는 기준과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 가운데 선택해야 했을 때, 위로부터의 사회주의와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가운데 선택해야 했을 때 클리프는 과감하게 후자를 선택했다.

이 때문에 클리프는 소유관계를 넘어서, 소유형태의 근저에 있는 실제의 생산관계를 주목할 수 있었다. 국가 소유 문제에 대해서, 클리프는 다양한 사회에서 국가 소유가 존재했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해결해야 할 진정한 문제는 어느 계급이 국가를 소유하거나 통제했는가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상세한 분석을 통해 옛 소련 경제의 실제 생산관계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였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극소수가 생산수단을 지배했고, 대다수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착취당해야 했다.

소유관계와 생산관계

클리프는 또, 스탈린주의 러시아를 따로 떼어놓고 보지 않고 세계 경제의 맥락 속에서 보면 소련이 계획경제였다는 생각이 근본적으로 틀렸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탈린주의 관료들이 “일국사회주의”를 선택했을 때 그들은 사실상 자본주의의 조건, 즉 자본 축적이라는 조건에서 서방 자본주의와의 경쟁에 뛰어든 것이었고, 따라서 산 노동(노동자들)을 죽은 노동(자본)에 무자비하게 종속시킨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에서 분석한 자본주의의 근본 특징이다.

국가자본주의론은 마르크스의 마르크스주의에 가장 잘 부합하는 이론일 뿐 아니라, 시간과 사건의 시험을 가장 잘 견뎌낸 입장이기도 하다. 1989~91년 공산주의의 몰락은 더 우월하고 더 진보적인 생산양식이 아니라 이른바 사회주의 나라들이 서방과의 경제적 경쟁에서 패배했음을 입증했다. 그것은 이들 나라의 노동계급이 자국 국가를 통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국가에 전혀 충성하지 않았음도 보여 주었다. 마지막으로, 옛 스탈린주의 관료들이 대부분 권력을 잃지 않고 국가 소유에서 사적 소유로 단지 “옆걸음질”친 것은 두 체제 사이에 근본적 차이, 즉 계급적 차이가 없었음을 보여 주었다.

따라서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발전이고, 20세기와 21세기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세계를 변혁하는 투쟁을 지속하는 데서 필수적이다.

존 몰리뉴는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무엇인가?≫(책갈피),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책갈피)의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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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가들을 위한 마르크스주의 입문 23

국제 공산주의 운동 II

존 몰리뉴

지난 호 칼럼에서 말했듯이,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의 초기(1919∼23년)는 노동계급 정치 조직의 역사에서 정점이었다. 그러나 유럽 혁명의 패배와 러시아 혁명의 고립, 그에 따른 스탈린주의의 발흥은 코민테른의 기본적 구실과 정책에 파괴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과 러시아 지도자들이 ‘일국사회주의’ 정책을 채택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레닌 · 트로츠키를 비롯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모두 마르크스 ·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혁명을 근본적으로 국제적 과정으로 보았고 러시아 혁명을 국제 혁명의 첫 걸음으로 여겼다. 국제 혁명이 없다면 혁명 러시아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도, 생존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독일 혁명이 패배한 뒤 1924년에 이 국제주의 전통을 포기하고, 서 자본주의에 의해 군사적으로 전복되지만 않는다면 러시아 일국에서도 사회주의 건설을 완수할 수 있다는 견해를 채택했다.

이것은 코민테른과 코민테른 소속 정당들의 정책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원래 이 정당들의 첫번째 과제는 자국에서 혁명을 추구함으로써, 자국 노동계급과 러시아 혁명의 이익에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일국사회주의

이제 그들의 주된 과제는 옛 소련에 대한 군사 공격을 예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각국 공산당은 다양한 개량주의 · 민족주의 세력들과 동맹했다. 그들은 노동자 혁명의 관점에서는 결코 믿지 못할 세력이지만, 적어도 대(對) 러시아 전쟁에는 반대하도록 설득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우경화의 맨 처음 성과는 1926년 영국 총파업에서 나타났다. 1925년에 스탈린의 명령을 받은 러시아 노동조합 연합은 영국 노동조합의 “좌파” 지도자들과 동맹을 맺고 ‘영-러 노동조합위원회’(Anglo-Russian Trade Union Committee)를 결성해서 영국의 러시아 개입에 반대했다.

이 동맹은 영국공산당이 개량주의 노조 지도자들을 대하는 태도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그들을 비판하지 않았고, 공산당 소속 노동조합원들의 독자적 행동 능력은 크게 위축됐다. 바로 그 때 광부들이 이끄는 영국 노동계급과 노동조합이 정부 · 지배계급과 대대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했고, 그 충돌은 1926년 5월 전국적 총파업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공산당과 동맹한 바로 그 좌파 노조 지도자들의 비열한 배신으로 이 총파업은 겨우 9일 만에 철회됐다. 더욱이 그 동맹을 중개한 코민테른의 방해 때문에 영국공산당은 노동계급에게 개량주의 지도자들을 믿지 말라고 경고하거나 그들이 배신할 경우 공산당원 투사들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도록 준비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영국 노동계급은 패배했고 한 세대쯤 퇴보했다. 코민테른은 이 과정의 공모자였다.

근본적으로 이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재앙적인 사건이 1927년 중국에서 일어났다. 1925∼27년에 중국 노동계급, 특히 상하이와 광저우의 노동자들은 제국주의와 봉건 군벌의 중국 지배에 맞서 대규모 반란 물결을 일으켰고, 신생 공산당도 급성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지배한 코민테른의 노선은 중국공산당이 장제스가 이끄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과 동맹해야 할 뿐 아니라 국민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제스를 잠재적 러시아 옹호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7년 장제스는 자신의 동맹 세력인 공산당을 공격해서 말 그대로 대학살을 자행했다. 이 재앙의 즉각적 결과로 마오쩌둥은 농촌과 농민에 의존하는 정책으로 전환했고, 그 뒤 중국의 노동계급 사회주의는 아직까지 실제로 복원되지 않았다.

재앙적 정책들을 추진하는 동안 코민테른의 성격에 다른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스탈린은 대 중국 전술을 정당화하기 위해 낡은 멘셰비키 ·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 되돌아가, 식민지 나라들에서는 사회주의를 위한 조건이 무르익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진보적’ 민족 부르주아지를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와 동시에, 각국 공산당 안에서는 일체의 비판과 민주적 논쟁이 사라졌고, 당 지도부는 훨씬 더 고분고분한 러시아 하수인들이 됐다.

민중전선

1928∼29년 스탈린이 강제 공업화와 농업 집산화 ― 러시아 노동자 · 농민을 쥐어짜는 국가자본주의 노선 ― 를 시작했을 때, 그는 자신의 행적을 좌파적 미사여구와 구호로 은폐해야 했다. 이 가짜 좌파 구호들을 국제 문제에 적용한 자연스런 결과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사회(주의) 파시스트”라고 비난하고 심지어 나찌에 맞선 일체의 동맹, 심지어 다른 노동계급 정당들과의 동맹조차 거부하는 종파주의 정책이 나타났다.

이 가짜 좌파 노선은 1929∼33년의 결정적 시기에 독일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혼란에 빠뜨려서 히틀러의 집권을 크게 도와주었다는 점에서 그 전의 우경화 전략보다 훨씬 더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파시즘 문제는 다음 칼럼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다.)

나찌 독일의 노골적인 군사적 위협에 직면하자 스탈린의 코민테른은 또 한 번 방향을 전환했다. 노동자들의 공동전선조차 반대하던 정책에서 이제는 ‘민주적’ 부르주아지와 동맹하는 이른바 민중[인민]전선으로 전환한 것이다.

스페인 내전(1936∼39년)이라는 시험대에서 이 민중전선 정책은 공산당이 프랑코에 맞서 부르주아지의 일부와 단결한다는 명목으로, 자발적으로 발전하던 스페인 혁명을 억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이것은 혁명을 저지했을 뿐 아니라 스페인 노동계급의 사기를 떨어뜨려 프랑코의 승리를 도와주었다.

한편, 국제 공산주의에서 또 다른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일국사회주의가 소련에서 가능하다면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 나라마다 다르다는 생각이 점차 각국 공산당을 사로잡았다. 이런 생각은 소련에 대한 충성에 오랫동안 눌려 있었지만, 1950∼60년대에 소련의 힘이 약해지자 스탈린주의 정당들에서 민족 개량주의 경향이 전면에 등장했고 결국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거의 구분할 수 없게 돼버렸다.

따라서 스탈린주의는 국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역사적 영향을 미쳤다.

첫째, 일련의 재앙적 패배를 초래해서 자본주의가 살아남고 파시즘이 승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둘째,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운동을 국제적 반혁명과 부르주아 개량주의를 위한 운동으로 변질시켰다. 다행히도 오늘날 스탈린주의가 노동자들의 투쟁을 억누르고 진정한 사회주의를 가로막을 수 있는 능력은 엄청나게 약화했다.

입력 2007-07-09 ⓒ노동자 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