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정책 대대의 쟁점들 - 민주노총 정치 방침

통합 정의당 성장의 역설

김인식

지난해 노동자들은 박근혜 정권의 공세에 어느 정도는 저항했다. 민주노총 지도부 선거에서 좌파인 한상균 후보가 당선한 것은 노동자들이 저항할 의사가 있음을 보여 준 것이었다. 또, 4월과 9월에 하루 행동 수준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어도 파업을 했다. 11월 민중총궐기에는 대부분이 노동자와 좌파인 10만 명이 참가했다. 지난해 노동자 저항의 절정이었다.

물론 노동계급의 투쟁 수위는 박근혜 정권과 사용자들의 맹공격에 필적할 만한 수준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공무원연금 문제 같은 일부 전투들에서는 패배하기도 했다. 핵심 문제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거듭 소심하게 뒤로 물러섰다는 점이다. 그들은 행동 수위를 제약한 뒤, 패배하면 투쟁 동력이 없었다거나 행동은 별 효과를 못 낸다고 말했다. 단연 공무원노조 이충재 전 위원장이 대표적이었다.

그럼에도 2013년 박근혜 정권 취임 초기 노동자들이 보인 낙담·사기저하·우울·무력감·두려움 등을 떠올려 보면, 노동자들의 투쟁 자신감이 조금씩, 불균등하게나마 되살아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다 경제 상황의 악화와 친일 외교 행각 등이 겹치면서 (처음에는) 철옹성처럼 보였던 박근혜 정권에 틈이 보이기 시작했다.

노동자 저항 덕분에 개혁주의 정당이 소생하다

조금씩 회복되는 노동자들의 자신감 덕분에 통합 정의당 같은 정치적 개혁주의가 소생했다. 이 말이 당장 이번 총선에서 통합 정의당의 의석 증가로 나타날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다. 선거법과 선거 정치 지형에 따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으므로 지나치게 단순한 전망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확실히 지난해는 2012년과는 다른 정치적 공기가 감돌았다. 2012년 통합진보당 분열 이후 진보 정당들은 ‘각개 기어가기’를 했다. 진보 정치가 실패했다는 말이 유행어였다. 그러나 지금 민주노총 안에서는 ‘노동개혁’ 저지 같은 노동자 운동의 핵심 의제를 부각시키는 데 총선을 이용해야(기다려야) 한다는 (잘못된) 기류가 형성돼 있다. 노동자들의 염원을 개혁주의 정당으로 표현하는 정당의 시즌이 시작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 힘입어 공식 정치 영역에서 통합 정의당이 성장했다. <노동자 연대>는 이미 일찌감치 이런 상황 전개의 가능성을 예측하는 기사를 실은 바 있다.(최일붕, ‘[2014년]상반기 투쟁을 돌아보며 주의할 것들’, <노동자 연대> 137호와 김인식,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에 대해’, <노동자 연대> 150호를 보시오.)

△통합 정의당은 노동자 투쟁의 수혜를 입고 있다. 2015년 2차 민중총궐기. ⓒ이미진

현재 통합 정의당의 당원은 3만 명이 넘는다. 2012년 12월 창당 때(7천여 명)의 네 배로 늘었다. 노골적인 자본주의 정당들만이 공식 정치를 반세기 이상 지배해 온 나라에서 이는 적은 숫자가 아니다. 현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20세기 전반에 독일·영국 등에서 고전적 사회민주주의가 누린 광범한 노동계급의 정치적 충성을 — 독일 사회민주당은 “국가 안의 국가”로 널리 인식됐다 — 더는 받지 못한다. 장기간에 걸쳐 노동계급 기반이 상당히 침식돼 온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고전적 사회민주주의가 완전히 무의미해졌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당원 수를 분석할 때는 이런 국제적·역사적 추세를 고려해야 한다.

특히, 공공노조·화섬노조·사무금융노조 지도자들 상당수가 통합 정의당을 지지한다. 이들이 정의당의 의회 지도부와 조직 노동계급을 연결시키는 구실을 할 것이다.

이런 현실을 봤을 때, 일부 좌파가 의회주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종국적 파산”을 선언한 것은 개혁주의의 생명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소치이자, 실천적 함의로는 개혁주의 세력과의 공동전선을 기각할 위험이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그저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노동자 대중 외부에서 주입하는 사상이 아니다. 이런저런 개혁주의는 피착취·피억압 집단이 고통에 맞서 행동에 나설 때 보이는 자연스러운 첫 반응이다. 피착취·피억압 집단의 성원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나고 자란 기존 사회 말고는 알지 못한다. 당연하게, 기존 방식으로 조직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빨간 안경을 쓰고 자란 사람이 분홍빛 이미지 말고는 상상할 수 없듯이 말이다.

자연스러운 첫 반응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썼듯이,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다.” 또, 그람시가 지적했듯이 어떤 사회의 “상식”은 지배적인 사상을 당연시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거의 언제나 그 사회의 주요 특징이 지속될 것이라고 가정하고서 자신들의 최초 요구를 제기한다. 그래서 봉건 사회에서 농민 반란은 흔히 나쁜 영주나 왕을 착한 영주나 왕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은 정교회 사제가 이끈 행렬이 경찰 간부와 공장주의 ‘학정’을 해결해 달라고 차르에 청원하면서 시작됐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조합의 협상이나 국회에 압력을 가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사람들이 협상을 조직하거나 압력을 가하는 방식에 기대를 걸 때 정치 운동으로서의 개혁주의가 떠오른다. 이렇듯 개혁주의 정당의 성장은 노동계급의 의식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 있다.

2000년에 작고한 팔레스타인 출신 마르크스주의자 토니 클리프가 지적했듯이, “노동자들이 더 나은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한, 그러나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한 자신감이 없을 때, 노동당은 결정적인 영향력을 계속 유지할 것이다.”

이 말을 지금 우리 현실에 맞게 번안하면 이럴 것이다. 노동자들이 박근혜 정권의 공세에 저항할 만큼 자신감이 자라기 시작했지만, 진정하고 실질적인 총파업을 통해 박근혜 정권의 공세를 좌절시킬 만큼 자신감이 충만하지는 않는 상황에서 통합 정의당 같은 개혁주의 정당이 떠오르고 있다.

이것이 통합 정의당의 패러독스(역설)이다. 통합 정의당의 주요 지도자들은 운동과 정치를 예리하게 분리시키고자 한다. 노회찬 전 대표는 이를 “진보의 세속화”이자 “진보 정치의 혁신”이라고 했다. 그런 통합 정의당이 노동자 투쟁의 수혜를 입을 수 있고 실제 입고 있다.

물론 지난해 하반기 민주노총 하루 파업과 민중총궐기 등 노동자 투쟁이 부상하자 통합 정의당은 전보다 좀 더 적극성을 발휘해 그 운동들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때조차 노동자 파업을 통해 ‘노동개혁’을 저지하자고는 주장하지 않았다. 과연 노동자 투쟁보다 의회 활동에 무게중심을 두는 개혁주의 정당인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공식 정치 영역에서 통합 정의당의 부상 조짐은 단지 의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한 것이 아니다. 공식 정치가 다시 한 번 변화의 문턱에 들어서기 시작했음을 시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 2012년 말 박근혜가 이긴 뒤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사기가 저하됐는지를 떠올려 보라.

민주노총의 총선 방침에 대해

진보 정치 세력이 통합 정의당과 진보당 계승 세력으로 분리돼 있기 때문에, 진보 유권자의 표가 온전히 통합 정의당으로 몰리지는 않을 수 있다.(두 세력은 같은 선거구에서 경쟁하지 않도록 후보를 단일화하는 게 좋을 것이다.)

지난해 말 민주노총은 표 결집을 최대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선거연합정당 안을 제시했다. 이것은 ‘노동자연대’가 오래 전에 제안한 전선체적 연합정당 방안과 매우 흡사하다. 현재의 구체적 한국 상황에서는 지지할 만한 방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연대’의 강조점이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에서 범좌파 정당 건설 쪽으로 이동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자본가 양당 체제 왼쪽에서 개혁주의 정당이 성장할 수 있는 것도 선거주의적 접근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논리였다.

그런데 통합 정의당은 방금 전에 4자 통합을 마친 터라 민주노총의 제안을 거절했다. 반면, 진보당 계승 세력은 매우 적극적이었다. 특히, 정치적·시민적 권리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또한 단일한 이념에 기초한 단일한 세력이 집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가정도 깔려 있다.(특히, 신석진·김정엽 등이 쓴 《진보정치, 미안하다고 해야 할 때 — 반성과 성찰의 기록》(생각비행)에서 이런 생각을 발견할 수 있다.)

민주노총 중집 성원의 다수는 통합 정의당이 빠진 채 진보당 계승 세력이 주도하는 선거연합정당을 추진하면 노동조합이 분열될 수 있음을 우려해 결국 선거연합정당 안을 폐기했다. 정당 지지 문제로 노동조합이 분열해 단결력과 투쟁력이 약화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못하다.

현재 민주노총 중집은 선거연합정당의 대안으로 ‘총선공동투쟁본부’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민주노총 요구, 민중총궐기 11대 요구에 동의하고 박근혜 정권의 반민중적 공세에 대한 공동 투쟁 조직화에 동의하는 정당, 정치조직, 사회운동조직”과 함께 ‘총선공동투쟁본부’를 구성하겠다는 것이다.

총선공동투쟁본부를 통해 지역 선거구에서 후보를 조정해 ‘민중단일후보’로 출마하고, 총선공동투쟁본부 참여 진보 정당들을 정당 투표 지지 대상으로 한다는 구상이다. 진보/좌파 다원주의에 입각하되, 진보 세력들이 최대한 후보를 단일화하자는 안이다. 민주노총이 그 내부에 다양한 정치 세력들이 공존하는 현실을 고려한 고육책으로 보인다.

물론 박근혜 정권이 노동 개악 2대 지침을 강행한 지금, 총선을 기다리기보다 투쟁을 확대하는 것이 이후 선거 돌파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박근혜에 맞설 수 있는 조직 노동계급의 힘을 제대로 보여 줄 때 다른 노동자들과 차별받는 사람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총선 때까지 기다려 ‘노동개혁’을 저지하자는 선거주의적 접근은 오히려 선거 승리 가망성을 적게 만들 것이다.

국제적으로 전개되는 좌파적 개혁주의의 부상

2008년 경제 공황 이후 지속된 경제 침체 시기에 국제적으로 좌파 개혁주의에 대한 광범한 지지 추세를 목격할 수 있었다. 그전에도 독일의 좌파당(디링케), 프랑스의 반자본주의신당(과 그 뒤 좌파전선), 포르투갈의 좌파블록, 덴마크의 적록동맹, 한국의 민주노동당이 급진좌파 정당을 형성한 바 있다.

경제 위기 이후 유럽의 우파 정부는 열정적으로, 그리고 개혁주의 정부는 악어의 눈물을 흘리며 긴축을 추진했다. 이 때문에 기성 정치에 대한 환멸이 커졌다. 환멸은 하나의 방향을 향하지는 않았다. 정치적으로 무관심해지거나, 우익 포퓰리스트 정당이나 파시스트 정당을 지지하기도 하지만 일부는 더 급진적인 방향을 향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급진좌파가 재림했다. 보수당과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수용하면서 당원 수와 유권자 기반이 감소했다. 좌파적 개혁주의 정당들은 정치의 이런 점진적인 공동화(空洞化)를 메우고자 했다.

△영국에서 변화 염원의 구심이 된 노동당 대표 제러미 코빈(가운데 노란 셔츠) ⓒ출처 lewishamdremer (플리커)

그리스에서는 2015년 초 시리자가 총선에서 급진적인 반긴축 강령을 내세워 집권했다. 시리자는 그리스의 커다란 공산주의 운동이 분열하면서 등장했다. 스페인의 새로운 급진좌파 정당인 포데모스는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21퍼센트(약 5백 20만 표)를 획득해 69석을 차지했다. 포데모스는 ‘분노한 사람들’ 운동 같은 사회 운동 속에서 등장해 기성 정치 체제에 대한 거부감을 표현하고 공산당이 주도하는 좌파연합과 경합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제러미 코빈이 노동당 대표 선거에서 승리했는데, 1년 전에만 해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남아공에서는 경제자유투사당이 2014년 총선에서 1백만 표를 넘게 득표해 (4백 석 중) 25석을 차지했다.

계급투쟁

이런 사태 전개의 핵심 추동력은 새로운 투쟁과 운동의 발전이었다. 그런 투쟁과 운동 덕분에 더 많은 노동자들과 청년들이 대안을 위해 저항하고 투쟁할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렇듯 계급투쟁 수준이 높으면 좌파의 공간이 확대되고 우파의 공간이 압착된다.

물론 국제적 정당 스펙트럼을 따르자면 통합 정의당은 결코 좌파적 개혁주의 정당이 아니다. 통합 정의당 지도부 자신도 서구식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지향한다고 밝혔다. 그 당의 강령도 “한국 자본주의의 민주적 개혁”을 표방한다. 그래서 통합 정의당은 과거 민주노동당보다는 정책과 실천 모두에서 주류 사회민주의 정당에 더 가깝다.

예컨대, 정의당 지도부는 안보 문제에서 냉전 시기 서구의 반공주의적 사회민주주의를 연상시키는 행보를 해 왔다. 지난해 1월 정의당 지도부는 천안함 위령탑을 참배했다. <동아일보>는 이를 두고 “종북과 선 긋기”라고 보도했다. 심상정 대표는 지난해 8월 비무장지대 지뢰 폭발 사고를 두고 북한의 반인도적 전쟁범죄라고 규탄하고, 박근혜 정부의 안보 무능을 질타했다. 올해 1월 북 핵실험에 대해서도 정부의 “안보 무능”을 비판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물론 그 당은 평화주의도 설파한다. 둘 사이에 모순이 있다. 그러나 정의당 지도부는 자신들이 집권하면 국가를 강화하겠다고 시사하고 있다.

노자 대립에서도, 정의당 지도부는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가령, 정의당 지도부는 공무원연금 “개혁”을 지지하면서도 일방적 추진은 반대했다. 확실하게 자본가 계급의 편을 든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확실하게 노동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모순의 실천적 결론은 사회적 타협 — 계급 평화 — 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의당은 공무원연금 개악을 여야 야합과 공무원노동조합 집행부의 배신이라고 비판하지 않고 “사회적 합의”라고 두둔했다.

그러나 보수 정당과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주류 양당 정치를 지배해 온 유럽과 달리, 한국의 양당 정치는 두 자본가 정당이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통합 정의당이 새누리당이나 더민주당 등 부르주아 정당과 맞붙는다면 사회주의자들은 환상을 갖지 말고 통합 정의당에 투표하라고 대중에 말해야 할 것이다. 물론 통합 정의당의 온건함 때문에 선진적인 노동자들이 투표를 넘어 그 당에 입당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노동자 연대> 166호 | 발행 2016-01-27 | 입력 2016-01-27

전략적 야권연대의 바탕에 깔린 이데올로기 민중주의란 무엇인가?

최일붕

총선이 다가오자 전략적 야권연대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전략적 야권연대는 ‘민중주의’를 바탕으로 한 점진적 집권 전략이다. 민중주의는 국민 가운데 한줌밖에 안 되는 반민주적·비애국적 무리를 제외한 나머지가 계급을 초월하여 단결해, 그 반동적 극소수를 권좌에서 몰아내자는 사상이자 운동이다. ‘반동적 극소수’로 지목되는 집단은 독재 잔당과 ‘공안세력’, 냉전주의자, 재벌 등이다. 민중주의자가 즐겨 내놓는 구호는 “각계각층이 단결”, “국민과 함께하는” 등이다.

민중주의는 ‘포퓰리즘’이라는 외래어의 순화어 중 하나다. 다른 순화어는 ‘대중영합주의’이다. 대중영합주의는 최상위 엘리트 계층의 정치인이 마치 자신은 엘리트층의 정치인이 아닌 양, 심지어 엘리트층에 반대하는 체하면서 대중에게 영합하는 꼼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글에서는 뉘앙스를 고려해 민중주의와 대중영합주의를 구별하기로 한다. 즉, 민중주의는 진보 성향이고, 대중영합주의는 보수 성향인 것이다.

유럽에서는 경제 위기와 긴축 재정을 틈타 우익 대중영합주의 정당이 등장해 활동하고 있다. 영국의 영국독립당(UKIP), 네덜란드의 자유당, 덴마크의 국민당 등이 그것이다. 이 당들의 핵심 정책은 이민자에 대한 인종차별로, 이 점에선 파시스트 정당과 유사하다. 그러나 우익 대중영합주의는 파시즘과 차이점이 있다. 그 차이점은 파시즘이 의회 민주주의와 모든 노동자 단체를 분쇄할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민중주의는 제3세계의 역사적 경험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 글의 관심사는 우익 포퓰리즘이 아니다. ‘진보’와 민족 자주를 표방하며 활동하는 종류의 포퓰리즘이 우리의 관심사다.(‘진보적’이라는 말 자체가 이제는 민중주의를 의미하는 말이 돼 버린 듯하다.)

민중주의는 외세의 지배와, 그와 결탁한 한줌의 부패한 기득권층의 지배를 경험한 신흥국의 노동운동에서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일제 식민지, 외세(미국과 소련)에 의한 민족 분단과 전쟁, 외세(미국)가 후원한 독재 정권과 재벌의 지배 등 한국 현대사의 특성들 때문에 한국 민중과 노동계급 대중의 정서 속에는 민중주의적 경향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민중주의는 흔히 진보적 민족주의 경향을 띤다. 진보적 민족주의의 핵심 강령은 남북한 화해 협력과 궁극적 통일이다.

2월 27일 민중총궐기 집회에 참가한 노동자들 파업 투쟁으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회복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미진

민중주의의 순차적 물결

민중주의 운동의 성격과 형태, 생존 능력은 시기와 조건에 따라 매우 달랐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러시아와 미국에서 민중주의 운동은 아예 농민에 기반을 뒀다. 제정 러시아의 민중주의 농민 운동은 나로드니키로 불렸고, 테러리즘 전략과 선거 전략을 결합해 추구했다.

미국의 민중주의 농민 운동은 경제 정책 ― 특히 곡물 가격 문제와 재벌(conglomerate, 거대복합기업) 개혁 문제, 은행 규제 문제를 놓고 수립되는 ― 에 영향을 미치려 애썼고, 민중당(이하 서양사학계에서 통용되는 인민당으로 표기)을 창립해 지역에 따라 민주당이나 공화당과 제휴했다. 1894년 철도 파업 이후, 인민당의 일부는 파업 투쟁으로 등장한 노동운동가들과 연계하고 나중엔 다른 사회주의자들과도 연계해 미국 사회당을 창당한다.

러시아와 미국의 민중주의는 제1차세계대전을 앞뒤로 해서 일어난 거대한 노동계급 투쟁, 특히 러시아 혁명과 서구 혁명에 밀려 완전히 주변화됐다.

1930년대 대불황기와 제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 시기

민중주의의 두 번째 물결은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었다. 유럽의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민중주의는 민중전선(인민전선)이라는 가장 완성된 형태로 등장했다.

민중전선은 스탈린주의자들의 전략이다. 이 전략은 드러내놓고 친자본주의적인 정당과 선거로 연립정부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이다.

민중전선은 선거라는 면에서 보면 흔히 성공적인 방침일 수 있다. 그리고 부르주아 정당과의 협력을 위협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않는 한은 노동자 운동을 고무하는 효과도 낸다.

하지만 노동자 투쟁의 수위가 자본가들의 우려를 자아낼 수준으로 상승할 것 같으면 민중전선은 노동자 운동을 억압하는 효과를 낸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국면에서 일어난 사회보험노조와 롯데호텔 노조 파업이 NL계열의 싸늘한 냉대를 받은 것이라든지, 이듬해 단병호 위원장이 7월로 예정된 민주노총 파업을 취소한 것, 그리고 최근에 다수 민주노총 지도자들이 총선을 의식해 새정치연합-더민주당 (일부) 의원들과 공조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바람에 현장조합원들은 동원 해제 상태에 있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 민중주의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직후 아르헨티나 후안 페론의 집권 초기처럼 꽤 성공을 거둔 경우도 있다. 페론은 주요 기업을 국유화하고, 노동자에게 복지 혜택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는 강압적으로 노동조합을 국가에 통합시켰고,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찬양하면서, 파시스트 전범들의 아르헨티나 이주를 환영하는 등 모순투성이 정책들을 펼쳤다.

한편, 멕시코의 라사로 카르데나스는 집권 중이던 1938년 멕시코혁명당을 설립해, 멕시코 혁명(1910~1920)의 유산을 이어받는 정당임을 표방했고, 집권당으로서 트로츠키의 망명을 허용하는 등 매우 좌파적인 자세를 취했다. 트로츠키의 망명은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같은 국가들도 거부하고 있었다.

라사로 카르데나스의 아들 콰우테목 카르데나스는 1988년 당(멕시코혁명당의 후신인 제도혁명당)을 탈당해 야당인 새로운 민중주의 정당 민주혁명당 PRD를 설립했는데, 이 당은 이후 멕시코판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됐다.

1949년부터 1979년까지

민중주의가 가장 성공적이던 시기는 민족 해방 혁명이 성공을 거두던 시기였다. 중국 혁명부터 쿠바 혁명과 베트남 혁명을 거쳐 니카라과 혁명과 이란 혁명에 이르는 1949년부터 1979년까지가 그랬다. (중국 혁명에 대해서는 이번 호에 실린 이정구의 ‘1949년 중국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었나?’를 보라.)

이 혁명들에서 노동계급이 어느 정도의 역할을 했던 건 이란 혁명밖에 없었다. 이란 혁명에서도 민중주의는 초기에 노동자 운동을 자극했지만, 노동자 운동이 ‘쇼라’라는 민주적 노동자 권력 기관을 창출하며 이슬람 성직자(물라)들의 주도권을 침해하는 듯하자, 물라들은 노동운동을 억제하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아예 분쇄하는 지경으로까지 나아갔다.

1994년부터 지금까지

1994년 치아파스 주에서 봉기한 사파티스타는 최근의 민중주의 물결의 효시를 나타낸다. 사파티스타는 혁명적인 민중주의 세력이었다. 같은 해 남아공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이하 ANC)가 선거로 집권한 것도 민중주의의 쇄도를 알리는 사건이었다. 동시에, 지난 20여 년간의 ANC 집권은 혁명적인 종류의 민중주의조차 그 계급 협력주의로 인해 결국에는 개혁주의의 성격을 띠게 됨을 잘 보여 준다.

3년 전 작고한 베네수엘라 전 대통령 우고 차베스와 현 볼리비아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도 최근 민중주의 물결의 일부라 할 수 있고, 스페인 포데모스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좌파적 개혁주의 정당 포데모스의 주요 간부들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등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이론에 근거한 민중주의를 지지한다.

오큐파이(점거하라) 운동도 민중주의의 최근 사례다. 오클랜드의 오큐파이는 달랐지만 말이다. 거기서는 부두 노동자 등 조직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오큐파이 운동이 벌어졌다.

우고 차베스에 환호하는 베네수엘라 노동자와 청년들 ’21세기 사회주의’라는 말을 유행시켰지만 차베스 사후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 출처 Bernardo Londoy (플리커)


노동자 운동 안의 민중주의

한국 민중주의의 대표적 사례는 ‘자민통’ 계열(이하 자민통계), 참여연대 등 진보적 NGO들 그리고 정의당 등이다. 물론 정의당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이기도 하다. 스탈린주의 운동인 자민통계는 좌파적 민족주의 경향의 일부 ― 핵심적 일부 ― 이지만, 좌파적 민족주의자가 모두 자민통계인 것은 아니다.(자민통계의 민중주의적 성격은 김인식의 글 ‘민중연합당 창당에 부쳐’를, 정의당의 민중주의적 성격은 장호종의 글 ‘정의당 총선 공약 분석: 노동자와 중소기업, 두 마리 토끼 좇기’를 보라.)

민주노총 내 국민파·전국회의·중앙파 등도 민중주의적 경향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운동가들이 민중주의적 경향을 띤다.

노동운동 내의 민중주의는 남아공이나 브라질, 멕시코 등의 다른 신흥공업국에서처럼 중간계급과 ― 때로는 지배계급 일부와도 ― 계급 연합을 추구하는 경향을 말한다. 물론 노동계급은 중간계급의 일부를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중간계급 가운데 특히 영세 소농이나 영세 노점상, 철거민, 빈민 등은 노동계급의 적이 아니다. 그들은 흔히 노동자의 가족일 뿐 아니라, 그들의 일부는 얼마 전까지 노동자였다가 실직한 사람이거나 경기가 좋아지면 다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족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작은 사업을 운영하는 처지이기가 쉽다.

그러나 중간계급은 노동계급이 아니다. 전통적 중간계급의 전형은 소자영업자인데, 이들은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자본가 구실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게서 임금을 받는 노동자 구실을 하는 이중적 처지에 있다. 스스로 자산을 소유하므로 자본가들에게 동질성을 느낄 수도 있지만 스스로 일하므로 노동계급에게 동질성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런 모순 때문에 구 중간계급은 양대 계급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유동적이다. 오락가락과 유동성이 중간계급의 핵심 특징이다.

중간계급에는 이른바 ‘신중간계급’이 포함된다. 이 집단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등장했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자본가가 직접 사업장을 운영하고 노동자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기업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자본가는 자기 대신 사업장을 운영할 특별한 임금노동자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사업장 내에 경영직·관리직 등 관료층이 형성됐다.

이 관료층의 최상층은 자본가 계급과 뒤섞이게 된다. 반면 관료층의 최하층은 겉보기로는 노동계급과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이 계층에는 매우 모순된 처지에 있는 각양각색의 인자들이 있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창출하고 체제를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산적 구실을 하기도 하고, 노동자들을 더 심하게 쥐어짜고 단속하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

계급투쟁이 일어나면 이 집단도 양대 계급 중 어느 한쪽으로 이끌린다. 노동자 투쟁이 강력할수록 이 계층 하층의 일부 사람들은 노동자 편으로 이끌릴 가능성이 커진다. 엥겔스는 1848년 혁명 중에 프랑스 “중간계급이 견해가 엄청나게 자주 바뀐다”면서 이렇게 썼다:

“프티부르주아지는 중재자 구실을 하며 비참한 역할을 했다. … 그들과 임시정부는 몹시 갈팡질팡했다. 만사가 조용하면 할수록 정부와 프티부르주아지는 대 부르주아지 쪽으로 더욱 기울었다. 반면 상황이 격동하면 격동할수록 그들은 노동자 편을 들었다.”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의 관계 문제가 진정한 쟁점이다

지배계급이 자본주의 경제 위기의 대가를 노동계급에 떠넘기는 과정에서 중간계급의 일자리도 불안정해지고 복지 혜택도 감축된다. 게다가 노동자의 이웃 주민으로서 그들의 환경도 파괴를 당한다. 그래서 중간계급의 일부도 자본주의의 일부 효과들에 적개심을 품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중간계급 사람들은 개인주의적 해결책을 찾는 경향이 강하다: 승진, 창업, 귀농, 생존을 위한 무한 경쟁에서 그냥 뿔뿔이 낙오하기 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간계급은 반자본주의적 운동이 미칠 일부 영향에 대해서는 두려워하거나 우려한다. 왜냐하면 경제 위기 상황 속에서는 노동계급의 이익과 중간계급의 이익이 일부 상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임금이 상승한다거나, 노동조건 악화 없는 노동시간 단축이 이뤄진다거나 하는 개혁이 자영업 계층에는 불리한 조건이 된다. 그래서 중간계급은 보수적이기가 쉽다.

그러므로 노동계급이 중간계급의 더 많은 부분을 끌어당길 방안은 계급투쟁 역량과 능력을 십분 발휘하는 것밖에 없다. 그러려면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포기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급 이해관계를 확고하게 추구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민중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태도가 확연하게 준별되며 심지어 충돌한다. 민중주의자는 노동계급의 고유한 이해관계를 고집하지 말고 중간계급의 이해관계와 조율하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노동운동 안팎의 민중주의자들은 지난해 봄 전면에 불거진 공무원연금 방어 문제를 회피하고 대신에 그 문제를 공적연금 강화 문제로 치환하려 했다.

결국 민중주의자는 계급투쟁과 노동계급 투쟁의 결정적 중요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민중주의자는 계급투쟁과 노동계급 투쟁이 부각되고 노동계급이 운동을 주도하면 민중이 내적으로 분열될 것이고, 운동 쪽으로 포섭될 잠재력이 있는 다른 사회세력을 내치는 효과를 낼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러나 이런 우려는 기우일 뿐이다. 오히려 노동계급이 민중 운동에서 주도권을 발휘할수록 민중도 더 강력해질 수 있다. 중간계급으로서는 사회적 권력과 집단적 힘과 규율을 갖춘 동맹을 갖게 된 셈이니까 말이다.

오히려 민중주의적 방식이야말로 민중을 이루는 계급들의 상이한 이해관계 때문에 결국엔 민중을 단결시키지 못할 것이다. 민중주의자가 그리는 단결한 민중이라는 이미지는 이상화된 것일 뿐이다.

10면에 실린 김하영의 글 ‘2015년 노동자 투쟁에서 민중주의 vs 계급정치’는 노조운동가들 민중주의의 이러한 약점을 잘 보여 준다.

민중주의냐, 노동자주의냐?

민중주의는 경제 위기에 직면해서도 민중 운동이 계급투쟁으로 분화되지 못한 낮은 단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노동계급 측에서 말한다면, 노동계급 의식 발전의 초보적 국면을 나타낸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지난 몇 달 새 벌어진 민중총궐기는 박근혜 하에서 노동계급과 민중이 자신감 수준을 회복하기 시작했다는 좋은 징조로 볼 수 있다. 아직은 그 수준이 파업 투쟁으로 자본주의 이윤 자체를 공격할 의지 수준으로는 상승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동시에,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소심함 때문에 파업 투쟁의 대용품으로 가두 항의가 활용됐다는 한계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이 모순을 봐야 한다. 전자를 보지 못하고 후자만 본다면 노동운동이 침체하고 있다는 그릇된 인상을 얻을 것이다. 후자를 보지 못하고 전자만 본다면 민중주의(그리고 그 계급 협력주의의 논리적 귀결인 개혁주의)에 대해 무방비 상태에 놓일 것이다.

사실, 한국의 노동운동가들은 노동조합 쟁점들을 다룰 땐 흔히 ‘노동자주의적으로’(즉,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의 전통에 따라) 사고하고, 사회적·국가적 쟁점들을 다룰 땐 민중주의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민중을 이루는 다른 사회계급들과 최소공배수적으로 계급 이해관계를 융합한다는 발상에 해당한다. 가령 공무원연금과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듯한 부문에서 활동하는 노동운동가들 가운데는 공적연금 강화라는 민중주의자들의 대안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이 많았다.

민중주의적 노동운동가들은 또한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에 민주노총 총파업을 직결시키는 방안을 원천적으로 배제했다. 총파업은 노동자들에 의한 계급 고유의 투쟁 방법이다.

사실, 자민통계는 지난해 초부터 민중총궐기를 추진했지만, 상반기 내내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4월 말 선제 파업과 이후의 공무원연금 투쟁 때문에 그 안(案)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무원연금 투쟁이 패배하고 7월 15일 민주노총 2차 파업이 존재감 없이 끝나자 민중총궐기안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자민통계뿐 아니라 국민파, 중앙파 간부들도 이제 “사회적 고립 자초할 총파업 얘기 그만하고 국민적 지지를 받을” 싸움을 하자며 민중총궐기를 강력히 제안했다. 이들의 생각을 잘 대변한 한 민중주의적 논평은 이렇게 주장한다:

“공무원연금 개악 등을 거치면서 민주노총의 줄어든 동력, 사회적 고립, 정파적 사분오열, 산업과 기업에 따른 부문주의는 거듭 드러났다. ‘노조 지도부가 국회 일정에 매달리며 계속 파업을 미루면서 동력이 사라졌다’는 좌파의 전통적 비판도 한상균 지도부의 1, 2차 선제파업을 거치면서 근거가 희미해졌다. … 파업의 동력이 충분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노조 지도자들이] 계속 회피하며 그것을 사그라들게 만들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 민주노총의 부족한 동력과 사회적 고립을 볼 때 이 투쟁[민주노총 총파업]은 처음부터 승산이 높지 않았다.”

오히려 민중총궐기로 “저들[지배자들]이 결코 ‘진보당’으로 상징되는 저항운동의 뿌리를 제거하지 못했고, 여전히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2차 민중총궐기를 위한 토론에서도 민중주의자들은 ‘살인 진압 규탄과 민주주의 문제를 부각해 민주세력을 모아 내는 외연 확대를 기조로 범국민대회로 열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특히 ‘노동개혁’ 반대를 부각시키면 시민단체와 종교계 등의 참가가 어렵다며 민주노총에 기조 변경을 강력히(그러나 헛되이) 요구했다.

 

혁명적 오솔길

 

그런데 대다수 노동운동가들이 노조 쟁점들은 노동조합주의적으로 사고하고(때로 전투적일지라도), 더 폭넓은 정치 문제는 민중주의적으로 사고하는 식의 의식을 갖는 경향은 정치 투쟁과 경제투쟁의 역할 분담과 비슷하다.

그래서 이 과정에서 개혁주의 정당이 성장하기 쉽다. 개혁주의 정당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형식적 원리에 순응해, 노조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직접적 생활조건의 문제들을 다루고 개혁주의 정치인들은 개혁 입법 활동을 하는 식의 분업을 당연시한다.

이는 극히 이례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정치 운동에 노동자들의 경제적 힘(특히 파업 투쟁으로부터 나오는)을 사용하는 것을 선택 사항에서 배제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에 민주노총 파업이 동원되는 게 어불성설로 취급되는 분위기를 설명해 준다.

이런 정서가 보편화되면 범좌파 개혁정당이 대세가 된다. 그러나 경제 위기와 지정학적 위기라는 이중의 위기로 가느다랗게나마 급진적 조류가 노동계급과 청년·학생 속에 형성될 수 있다.

특히, 노동자들이 민중주의를 학습한 효과로서 계급 의식이 향상될 수 있음도 알아야 한다. 이 점은 엥겔스가 미국 인민당의 일부 투사들이 철도 파업 투사들과 만나며 사회주의 운동을 구축하기 시작하는 것을 흐뭇하게 보며 지적한 점이기도 하다.

민중주의의 진화 속에서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적 조류에게도 기회가 있는 것이다. <노동자 연대> 신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민중주의의 일정한 진보성을 인정하면서도, 위에서 인용한 논평가처럼 기회주의적으로 그에 끌리지 말고 그보다 더 급진적이고 좌파적인 전망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추천 소책자

북한 국가자본주의의 형성과 위기

한국 노동운동의 문제들

2015년 민주노총 투쟁을 둘러싼 논쟁을 중심으로

김하영, 최일붕 지음 | 노동자연대

100페이지, 3000원

ⓒ<노동자 연대> 168호 | 발행 2016-03-02 | 입력 2016-03-02

박노자의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함

최일붕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한국학교수(이하 호칭과 존칭 생략)가 내가 며칠 전에 쓴 글(최일붕, ‘민중주의란 무엇인가?’, <노동자 연대> 168호, 2016.03.02)을 크게 오해한 논평을 그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에 그의 SNS 친구들이 노동자연대의 입장을 심각하게 오해할까 봐, 해명을 해야겠다고 느껴 몇 쪽 적고자 한다.

박노자는 내가 자영업자 서민을 “부르주아”로 보고, 그들을 배제한 채 “‘완벽한 리론’으로 무장된 ‘완벽한 로동자’만이 ‘완벽한 혁명’을 일으키”는 것을 지지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사료를 신중하게 다뤄야 하는 역사가라면 당대의 텍스트도 이렇게 터무니없이 해석하고 판단해선 안 될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물론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 노동자연대 회원들이 단체 밖 다른 활동가들이나 저술가들의 주장을 언제나 정확하게 이해하고 판단해서 설명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면, 그러지 못한 경우도 많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박노자도 A4용지 7쪽밖에 안 되는 글을 오독해 놓고는 버젓이 SNS 상에 그릇된 논평을 공개하는 일은 자제해야 할 것이다. 아래에서 오해를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나는 소자영업자들을 단 한 차례도 “부르주아”로 부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들을 적대해선 안 된다고도 했다:

“물론 노동계급은 중간계급의 일부를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중간계급 가운데 특히 영세 소농이나 영세 노점상, 철거민, 빈민 등은 노동계급의 적이 아니다. 그들은 흔히 노동자의 가족일 뿐 아니라, 그들의 일부는 얼마 전까지 노동자였다가 실직한 사람이거나 경기가 좋아지면 다시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족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작은 사업을 운영하는 처지이기가 쉽다.”

그리고 나도 소자영업자 등 서민층 중간계급 사람들이 노동계급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경제 위기로 고통을 받는다고 강조했다:

“지배계급이 자본주의 경제 위기의 대가를 노동계급에 떠넘기는 과정에서 중간계급의 일자리도 불안정해지고 복지 혜택도 감축된다. 게다가 노동자의 이웃 주민으로서 그들의 환경도 파괴를 당한다. 그래서 중간계급의 일부도 자본주의의 일부 효과들에 적개심을 품게 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내 글은 천대받는 계급들과 집단들(이하 민중)이 ‘연대·연합’ 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나도 박노자처럼 “아주 광범위한 여러 피착취 계층들의 ‘련합’”과 “‘범민중적 행동’”이 “당연히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아가 나는 그 연합의 내부 역학관계, 특히 노동계급과 중간계급 사이의 동역학에 관심을 나타냈다. 레닌과 그람시가 말한 헤게모니 개념을 바탕으로 한 관심사인 것이다.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의 관계 문제가 진정한 쟁점이다”라는 소제목 하에 이 문제를 논의한 단락도 있지만, 한 구절만 인용하면 이렇다:

“계급투쟁이 일어나면 이 집단도[전통적 중간계급과 신중간계급 모두를 가리킴] 양대 계급 중 어느 한쪽으로 이끌린다. 노동자 투쟁이 강력할수록 이 계층 하층의 일부 사람들은 노동자 편으로 이끌릴 가능성이 커진다.”

미국의 오큐파이 운동의 이데올로기가 민중주의적이었음을 언급할 때도 나는 오클랜드의 오큐파이 운동은 “부두 노동자 등 조직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오큐파이 운동”이었다고 특별히 덧붙였다.

이 자리에서 한마디 더 덧붙이자면 이렇다. 모든 진정한 혁명은 민중 혁명이다. 그러나 그 혁명을 이끈 게 17세기 중엽 네덜란드와 영국 혁명이나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처럼 부르주아지인 경우에는 ‘부르주아 혁명’이었던 것이고, 1917년 러시아 혁명처럼 노동계급인 경우에는 ‘사회주의(지향) 혁명’인 것이다. 설마 21세기에도 부르주아지가 민중 혁명을 이끌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겠지만, 중간계급이 이끌리라고 믿는 사람은 다소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대다수는 (개인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시하고 아나키스트를 자처하는) 박노자처럼 어떤 계급이 행사하는 것이든 헤게모니 개념 자체를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 발전의 동역학이 이윤 시스템이고, 이윤의 원천이 잉여가치이고, 21세기 자본주의가 취하는 잉여가치의 압도적인 부분이 노동계급에서 나온다는 이론적·경험적 연구 결과를 보면, 헤게모니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노자가 노동계급의 현재 의식이라는 주관적 문제들을 제기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박노자는 노동계급의 현재 주관적 조건에 대해 우리가 낙관적 평가를 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실증적·이론적 반론을 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그 대신에 노동자연대의 “도그마주의”(교리주의, 교조주의)라는 엉뚱한 비난을 제기했다.

도그마주의?

박노자는 나와 노동자연대를 “도그마주의”로 매도한다. 방법론 분야에서 도그마주의는 경험을 무시하고 교리(도그마)를 물신화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다. 그러나 내 글은 우리 나라 노동운동가들이 적어도 한두 번쯤은 겪어 봤음직한 일이나 국제 노동계급/좌파/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적 사례를 들어 가며 내 논지를 경험적으로 뒷받침하려 애썼다. 다루는 주제인 민중주의가 제3세계와 우리 나라의 역사적 경험을 반영한다고 처음부터 전제하며 논의를 시작했다.

또한, 같은 호에 실린 김하영의 글은 지난해 민주노총 노조운동 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었던 민중주의적 경향의 사고·행동의 사례들을 예리하게 들고 있다. 박노자가 우리를 “도그마주의”라고 비판하려면 이런 경험들에 반대되는 반증과 함께, 더 나아가 자신이 지지하는 종류의 전술들이 효과적임을 적극적으로 입증해야 할 것이다. 저 멀리 노르웨이에서 그저 언론과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한국 노동운동의 실상에 대해 정확하고 자세하게 아는 양 착각하면서, 국내 노동운동의 내부에서, 그것도 그 기층에서 분투하며 고민하는 투사들의 실제 경험을 무시하고 도리어 그런 사람들을 도그마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이야말로 도그마주의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도그마주의 비판에 합리적 핵심이 있으려면, 인식의 절대성과 불변성을 부정하고 의심의 타당성을 긍정해야 한다. 운동하는 투사들이 전술 문제에서 이런 방법론적 회의를 구현할 수 있는 주된 수단은 (집단적으로) 실천해 보고 그 실천을 (집단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음식 만들기, 자전거 타기, 자동차 운전 배우기, 바이올린 연주 등을 관련 도서 읽는 것만으로 배울 수 있나? 나폴레옹 말대로 “길고 짧은 것은 대어 보아야 안다.” 또한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말한다: “친구여, 이론이란 무릇 회색일세. 하지만 소중한 생명나무는 늘 푸른색일세.”

그렇다고 해서 이 같은 인식론적 실용주의가 회의주의나 인식의 상대성을 지지하고 정치적 실용주의(기회주의)로까지 나아가지 않으려면, 어떤 한계를 스스로 설정해야 한다. 우리에게 그 ‘한계’는 국제 노동계급 운동의 역사적 경험이고(교리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그 경험으로부터 ‘엑기스’(진액)를 추출한 것이다. 당연히 이 마르크스주의는 복수형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원성’은 ‘다원주의’(상대주의를 함축하기 쉽다)와 구별돼야 한다. 박노자의 마르크스주의나 우리의 마르크스주의나 박노자가 자랐던 옛 소련의 국가 공식 이데올로기인 마르크스주의가 설사 다 똑같이 타당할지라도(내적 일관성이라는 면에서) 결코 다 똑같이 건전한 것은 아니다. 그 건전성이 입증되려면 여기서도 역사의 시험대 위에 놓여야 한다. 박노자가 오해하는 것과 달리 우리는 과거의 러시아 혁명이 그 최종 시험대였다고 믿지 않는다. 심지어 미래의 실험조차 최종적이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나 목적론을 거부한다 해서 목적이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니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도 있어야 한다. 그 수단의 하나가 국제 노동계급의 역사적 경험을 집약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이지만, 현재의 경험도 수단에 포함된다.

사실, 방법 면에서 우리 단체 활동가들에게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교리(교조)나 신조이기는커녕 인상에 불과한 것에 근거하기, 즉 경험주의다. ‘이론’이라는 낱말도 부담스럽게 느껴지거늘 “완벽한 리론” 따위를 말하는 회원은 없다. 그런 스콜라주의적 문구는 너무 냉랭하고 무미건조해, 활기찬 젊은 회원들에게는 아예 체질에 맞지 않는 듯하다. 박노자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를 도그마주의로 재단하는 것은 역사가가 취해야 할 신중한 태도가 아니다.

특수성에 대한 오해

위에서 보았듯이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은 역사적 경험을 초월할 수 없는 데다 사회 관계들도 계속 변하는 것이므로, “완벽한 리론” 따위는 있을 수 없다. 분석과 실천에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는 이론이냐 아니냐가 있을 뿐이다. 이하에서는 교리와 구별되는 그런 이론을 그냥 이론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박노자는 이론이 나라별로 달라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모든 이론은 상황화(맥락화)돼야 한다. 각국의 특수성 때문이다. 하지만 박노자는 특수성을 예외성으로 혼동하고 있다. 그는,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한 말(독일어 판에 붙이는《연속 혁명》 서문)을 빌리자면 특수성을 “마치 얼굴에 난 사마귀처럼, ‘보편적 특징’들에 단순히 부수적으로 붙어 다니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일국의 특수성들은 세계 경제의 운동 과정의 기본 특징들이 일국 내에서 독특하게 결합된 것을 의미한다. … 일국 자본주의는 오직 세계 경제의 일부로서 이해해야 한다.” 박노자가 “한반도의 남반부”라고 부른 곳을 포함한 신흥국의 자본주의는 이언 록스버러가 지적했듯이, 독자적으로 발전한 게 아니라 제국주의 체제의 확립과 선진 자본주의 산업국들의 세계적 자본축적의 맥락 속에서 발전한 것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Ian Roxborough, Theories of Underdevelopment, Palgrave, 1980.) 가령 한국의 경제성장(즉, 자본축적)은 미국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과 함께) 자본과 시장을 한국에 제공한 덕분이었다. 소위 ‘삼각무역’은 이 관계를 요약한 말이다. 재벌 문제나 영남 지역주의 문제도 이런 식의 경제 발전 양상에 뒤따르는 지역간 불균등 발전의 한 효과였던 것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일국의 사회 형태의 특수성은 사회의 형성 과정이 지닌 불균등성의 구체적 표현인 것이다.

일국적 특수성이 세계적 보편성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을 더 예시하면 이렇다. 분단 문제는 미·소 두 초강대국이 세계를 양분한 당시 제국주의 체제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국전쟁도 두 초강대국 간의 제국주의간 충돌이 한반도에 국한돼 벌어진 사건(“국제전”)으로 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통일 문제가 제대로 해결될 수 있는 방식도 단지 반미가 아닌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라는 맥락 속에서 수행되는 것이다.

“베네수엘라에 맞는 혁명리론”, “로서아의 력사적 경험에 맞는 혁명리론”, “한반도 남반부[의] 고유한 상황에 맞는 리론”이 각각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통일된 이론이 베네수엘라와 러시아와 한국 등지의 특수 상황들을 설득력 있고 유용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원시공산제 → 노예제 → 봉건제 → 자본주의’라는 계기적 사회 발전이 서구에 한정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며 도그마적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반대했지만, 서구 바깥의 사회들이나 자본주의 이전 사회들을 자신의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Marx and Engels, The Russian Menace to Europe, George Allen and Unwin, 1953, pp.277-280.) 1877~82년에 마르크스가 러시아에 관해 쓴 글들은 당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형이상학적 역사철학과 나로드니키(러시아 민중주의자들)의 친슬라브적인 특수론 사이에서 변증법적 종합을 나타내는 논저들이었다. 트로츠키의 《러시아 혁명사》(풀무질, 2003~2004)의 제1장(‘러시아 사회 발전의 특이성’)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비서구 세계에 적용한 훌륭한 사례이고, 크리스 하먼의 《민중의 세계사》(책갈피, 2004)는 시간적·공간적으로 역사유물론의 적용 범위를 넓혀 고대부터 현대까지 전 세계의 역사를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설명했다.

박노자는 과거의 제3세계주의자들과 현재의 포스트식민주의자들처럼 일국의 특수성을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의 ‘보편적 특징들’ 위로 끌어올렸을 뿐 아니라 하나의 전체(totality)인 세계 경제를 초월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더구나 자본주의가 전의 어느 때보다 세계화된 시대에 말이다.

박노자가 이렇게 세계를 국민국가들의 단순한 총합으로 이해하는 바람에, 세계 자본주의와 분리된 실체로서 일국 자본주의가 박노자 머리 속에서 상정될 수 있게 됐다. 세계 자본주의와 분리된 일국 자본주의가 개념적으로 성립되니 일국 사회주의라는 퇴행적 공상도 개념적으로 성립할 수 있게 됐다. 그가 왜 각종 “우리식 사회주의”들을 실제의 사회주의 사회의 한 형태로 보는가가 설명된다.

1970~80년대 민중론의 발전적 계승?

일국적 특수성을 예외주의적으로 이해함에 따라 박노자는 우리에게 1970~80년대 민중론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라고 주문한다. 물론 아무리 패러다임의 혁명을 이루며 등장한 이론이라 해도 이전 이론의 모든 측면을 전면 기각할 수는 없다. 레닌이 그의 저작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태백, 1988)에서 러시아 민중주의자들(나로드니키)의 러시아 농업 분석을 전면 기각한 것에 대해 후대의 경제학자들은 레닌이 러시아 농업의 자본주의화를 과대평가했다고 지적했다. 이는 나로드니키의 농업 분석에서도 일부 취할 바가 있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요즘의 한국 마르크스주의자들도 민족경제론의 실증적 조사 결과나 민중사학의 역사 서술(historiography)로부터는 일부 배울 바가 있다.

하지만 계급투쟁 문제로 말하자면 소련 붕괴 전 각종 민중론들은 스탈린주의와 그 민중주의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 건질 것보다는 버릴 것이 훨씬 더 많다. 레닌은 나로드니키의 영웅적 투쟁정신과 극도로 세밀하고 효과적인 조직 기술은 계승하면서도 그들의 테러리즘 전략이나 그 밖의 많은 것들은 이어받지 않았다. 나는 요즘의 한국 마르크스주의자들도 과거 한국 민중주의자들의 영웅적 투쟁정신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생존한 옛 민중주의자의 대다수가 개혁주의자(좌파적 유형일지라도)가 돼 있는 건 우연이 아니고, 또 단지 나이 탓만도 아니다. 민중주의에 내포된 계급 협력주의의 논리가 세월이 가면서 그 진면목을 점점 더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그런데 박노자는 갑오농민전쟁(그가 거부할 용어)의 성격이나 조선 후기 상인 자본의 성격 등 매우 다양한 이슈를 놓고 “민중사학의 도식적인 끼워 맞추기 식 해석”에 이의를 제기해 왔다(격주간 <다함께> 75호, 2006.03.08). 그런 그가 왜 우리더러는 민중론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라는 것인지 친절하게 설명해 줄 수는 없는 걸까? 페이스북에서 일축하듯이 단번에 내치지 말고 말이다.

2016년 3월 6일 최일붕

ⓒ<노동자 연대> 168호 | 입력 2016-03-06

총선 결과가 보여 준 것 박근혜 정부의 참패, 노동계급(그리고 정의당)의 전진

김인식 (노동자연대 운영위원)

새누리당이 완패했다. 그동안 박근혜는 노동개혁 법안, 서비스산업 활성화 법안, 사이버 안보 법안들을 통과시키지 못하는 국회를 비난하며 국회 심판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개표 결과가 명명백백하게 보여 주듯이, 정작 심판 당한 것은 박근혜 정부 자신이다.

새누리당은 노무현 탄핵 반대 운동이 일어났던 2004년 총선 이후 처음으로 제1당의 지위를 잃었다. 또, 2000년 총선 이후 16년 만에 여소야대 국회가 됐다. 지금 패닉 상태에 빠져 있는 새누리당을 보며 수많은 노동자들과 청년·학생·서민들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을 것이다.

당초 새누리당은 야권 분열 상황을 감안해 최대치 목표를 1백80석 달성으로 잡았다. 각종 여론조사 기관들도 새누리당이 분열한 야당들을 꺾고 2017년 대선에서 정권 재창출 가능성을 높일 거라고 예측했다. 이 기대와 예측들은 모두 보기 좋게 빗나갔다.

새누리당의 정당 득표는 2012년 총선에 비해 무려 2백만 표 가까이 줄었다. 2012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9백82만 표를 얻은 데 반해, 이번 총선에서는 7백96만 표를 얻었다.

△고개숙인 새누리당 ⓒ제공 <민중의 소리>

새누리당의 절대 아성으로 불리던 서울 강남, 성남 분당, 영남이 흔들린 것도 의미심장하다. 서울 강남 3구 선거구 8곳 중 3곳에서 새누리당이 패배했다. 성남 분당구의 선거구 2곳에서도 새누리당이 패배했다. 대구에서는 야당과 야당 성향 무소속이 당선했고, 부산·울산·경남에서도 11명의 야권 후보가 당선했다.

새누리당의 주요 지지층 사이에서 이반이 일어난 것이다. 총선·대선에서 지배계급과 우파가 모두 일치 단결해 박근혜를 밀어줬던 2012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철옹성 같던 박근혜의 우파적 기반에도 틈이 벌어졌다.

새누리당의 참패는 주로 박근혜 정부의 우파적 경제 정책에 대한 불만 때문인 듯하다. 가계 부채는 계속 기록을 경신하고, 청년 실업률은 2000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며, 소득 불평등도 OECD 최고 수준에 이르는 등 서민 경제에 대한 불만이 광범하게 존재한다.

새누리당의 패배는 경제에 대한 불만이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 안보 우려를 뒷전으로 밀어 냈음을 보여 준다. “새누리당의 형편없는 성적은 유권자들이 이전만큼 국가 안보 쟁점에 흔들리지 않음을 보여 준다.”(<뉴욕타임스>)

과거 선거 때 남북 대치 국면이 형성되면 우파는 대북 강경책을 펼쳐 흔히 선거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북 제재와 개성공단 폐쇄 등 박근혜 정부의 대북 강경책은 — 여론조사에서는 높은 지지를 받았지만 — 실제 선거에서는 대중의 표심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보다는 먹고사는 문제에 관한 불만과 불안감이 선거를 지배했다. 북한이나 ‘북풍’, ‘종북’ 이데올로기 등은 주요 선거 의제가 되지 못했다.

더민주당과 국민의당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은 박근혜 정부의 경제 정책에 따른 대중의 불만으로부터 반사이익을 거뒀다. 더민주당은 1백23석을 얻어 제1당이 됐다. 국민의당은 38석을 얻었다.

더민주당을 이끈 김종인은 보수적인 인물이다. 1980년 전두환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참여한 전력이 있다. 노태우 정부에서도 중용됐다. 그리고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승리의 공신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경제 민주화’를 내세우며 박근혜 정부의 재벌 위주 경제 정책을 비판했다. 이런 포퓰리즘이 땅콩 회항, 롯데가(家) 경영권 분쟁 사태, 재벌 3세들의 슈퍼 갑질, 천문학적 사내유보금 등 재벌에 대한 국민적 반감과 맞물려 다소 이득을 본 듯하다.

그러나 더민주당은 제1당이 되기는 했지만 정당 득표 수(6백만여 표)2012년 총선(771만 표)보다 오히려 170만 표가량 줄었다. 3당이 된 국민의당의 득표 수(635만여 표)보다도 적다. 그럼에도 정부·여당에 대한 지지가 크게 줄어든 덕분에 제1당이 됐다.

소프트웨어 사업가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억만장자 안철수는 새누리당과 더민주당 사이의 ‘보수적 중도층’을 공략했다. 이를 통해 제3당으로 오를 수 있었다. 국민의당은 호남 지역에서 더민주당의 지위를 대체했지만, 수도권에서는 달랑 2석만 얻었다.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의 계급적 성격을 봤을 때, 16년 만에 여소야대가 됐다고 해서 국회에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된다. 2004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이 노무현 탄핵 반대 운동의 역풍을 맞으며 열린우리당이 단독으로 과반을 확보했지만, 그들은 개혁을 제공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에 파병했고 한미FTA 협상을 강행했다. 진정한 변화는 이들 자본주의 야당들로부터 독립적인, 아래로부터의 대중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진보·좌파 정당들의 성적

진보·좌파로 말하면, 사표 논리·압박에도 불구하고 꽤 좋은 성적을 거뒀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분열’로 새누리당이 대승할지 모른다는 커다란 위기감 때문에 야권 성향의 유권자들은 진보·좌파 후보들보다는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에 투표했다. 그 바람에 진보·좌파 정당들이 크게 압착을 당했다. 우리 진영은 모두 8석을 확보했다. 정의당이 6석을, 울산연합 계열(무소속)이 2석을 얻었다.

이를 두고 중도진보계 언론 <한겨레>는 ‘진보 정당의 위축이 두드러진다’거나 ‘기대 이하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고 평가한다. 진보·좌파의 주장이 비현실적이라고 보고 선거 때마다 주로 민주당 내 ‘개혁파’를 지지해 온 <한겨레>답다. 또 다른 중도진보계 언론 <경항신문>도 그 비슷하게 평가한다. 그러나 진보·좌파 진영 일각에서도 진보·좌파 4당(정의당, 녹색당, 민중연합당, 노동당)의 의석 수와 정당 지지율이 2012년에 비해 적거나 낮다며 “저조한 성적”이라는 자학적 평가가 나온다.(상자 기사를 참조하시오.)

 울산·창원에서 노동자들에 의한 선거 돌파 지난 3년간 노동자들이 저항한 덕분이자 이후 또 다른 저항을 고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울산 동구 김종훈 당선인(왼쪽 두번째)과 울산 북구 윤종오 당선인(왼쪽 세번째). ⓒ제공 민주노총 울산본부

그러나 한국의 선거제도는 승자 독식 제도여서 의석 수의 변화만으로 평가하면 진보·좌파 정당의 지지 증감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그보다는 정당 득표 절대 수를 보는 것이 좀 더 정확하게 지지 추세를 확인할 수 있다.

진보·좌파 4당이 얻은 정당 득표 수는 2백13만 표가량이다. 지난 2014년 지방선거 때 네 정당이 얻은 광역 비례 정당 득표 합계(2백23만여 표)와 대략 비슷하다. 당시 지방선거에 이번 총선과 비슷하게 정의당, 진보당, 녹색당, 노동당이 출마했기 때문에 2012년 총선보다 비교하기가 더 적절하다. 이번 총선에서 더민주당이 우클릭 하고, 국민의당이 새누리당과 더민주당 사이에서 보수적 중도층에 구애하는 등 주류 정당들이 우경화하는 속에서도 2백만 명이 넘는 보통 사람들이 자본주의 야당이 아닌 진보·좌파 정당들을 지지했다는 게 의미심장하다. 진보·좌파 정당들은 두 자본주의 야당보다 훨씬 더 진보적이거나 좌파적인 개혁 공약들을 제시했다.

진보·좌파 4당 중 정의당의 성장이 특히 눈에 띈다. 1백72만 표(득표율 7.23퍼센트)를 획득했다. 2014년 지방선거(82만 표)와 비교해 2년 만에 곱절로 정당 득표가 늘었다. 게다가 새누리당과 더민주당이 야합해 비례대표 의석을 줄인 상황에서 정의당은 비례대표 4석과 지역구 2석을 합해 6석을 얻었다. 정의당의 지지 증대는 이미 지난해부터 정의당의 성장 가능성을 내다본 <노동자 연대> 신문의 분석이 옳았음을 보여 준다.

정의당에 투표한 층의 성격은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새롭게 급진화하는 청년·대학생들이 정의당에 꽤 투표했을 수 있다. 투쟁성이 약화된 조직 노동자들은 투쟁이 버거우니 선거를 통해서 박근혜의 공격을 막아 보자는 생각에서 정의당에 투표했을 수 있다. 다른 한편, 새로 조직된 노동자 부문들(케이블·통신, 택배, 학교비정규직 등등)은 정의당에 투표하는 게 그 나름의 급진화와 투쟁성의 발로일 수 있다.

정의당의 성장 정의당은 2년 만에 곱절로 정당 득표가 늘었다. 정의당 노회찬 당선인. ⓒ출처 노회찬 페이스북

정의당의 강령은 서구의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비슷하다. 그래서 정의당은 “한국 자본주의의 민주적 개혁”을 표방한다.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정당들에 맞서 정의당 같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지지해야 한다. 하지만 사회민주주의가 지닌 부족함을 모르는 척하는 기회주의적 처신을 할 수는 없으므로 혁명적 비판을 유보해서도 안 된다.

가령 지난해 봄 정의당 지도부는 공무원연금 개악과 국민연금 개선을 맞바꾸려는 — 그러나 실상 국민연금 개선은 공무원연금 개악을 위한 미끼였을 뿐이다 —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의 야합을 공공연히 찬성하다가 국회 표결 때는 공무원·교사 노동자들의 반발을 의식해 기권했다. ‘계급보다 국민(민중)을’ 의식하는 정의당의 개혁주의 노선에서 비롯한 사건이었다.

또, 북한 핵실험 직후인 지난 1월 8일 박근혜 정부의 대북 강경책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한 북한 핵실험 규탄 국회 결의안에 정의당 의원들은 찬성했다. 정의당 지도자들은 자본주의 국가의 외교·안보 정책에서 유능함을 입증하고 싶어 한다. 이런 태도는 지정학적 위기 상황에서 자국 안보(즉, 자국 지배계급)를 지지하는 쪽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 이번 총선에서 정의당 일부 지도자의 ‘태극기 마케팅’은 그런 경향이 발전할 조짐을 얼핏 보여 줬다.

또, 인천에서는 제주 강정 마을 진압을 현장 지휘한 경찰 간부 윤종기와 단일화를 했다.

정의당은 국회 내에서 유일하게 ‘노동개혁’을 반대하는 정당이지만, 그 당 지도자들은 민주노총에 사회적 합의(즉, 조합원들의 이익을 일부 배신하는 타협)를 주문한다. 이것은 특히, 노동자 투쟁보다 국회 내 협상, 자본주의 야당 의원들과의 공조를 중시하며 노동자들을 수동적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노동자 연대>는 정의당이 순전한 자본주의 정당보다 어느 경우에든 더 낫다고 보지만, 정의당의 이런 문제점들에 대한 비판을 유보하지 않는다.

녹색당은 18만 2천여 표(0.76퍼센트)를 얻어 지난 지방선거(17만 표) 때보다 약간 더 얻었다. 그런데 변홍철 후보는 대구 달서갑 지역구에서 30퍼센트를 득표했으므로 이 당의 미래도 무시할 수만은 없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진보당이 97만 표를 얻었는데, 그 당권파의 정당인 민중연합당은 14만 5천여 표(0.61퍼센트)를 획득했다. ‘민주노동당보다 더 커서 돌아왔다’는 선전이 허언(虛言)으로 드러난 득표다.

노동당은 지난 지방선거(26만 표)보다 적게 얻었다(9만 1천여 표, 0.38퍼센트). 아마도 지난해 연말의 분당 후유증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울산 중구에 출마한 이향희 후보가 20.5퍼센트를 얻어, 가능성이 아예 없지 않음을 보여 준다.

진보·좌파 정당들의 절대 득표 수를 봤을 때, <민중의 소리>가 진보·좌파 정당들이 분열해 지난 총선에 비해 의석 수가 줄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극히 피상적이다. <민중의 소리>는 특히, 진보당에 대한 종북 공세에 대처하지 못해 진보·좌파 정당들의 지지가 과거에 비해 감소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아전인수일 뿐이다. 울산 북구와 동구에서 새누리당 후보들은 김종훈·윤종오 후보가 통합진보당 출신이라는 점을 물고 늘어지며 집요하게 ‘종북 좌파’라고 비난했으나, 노동자들에게 거의 먹히지 않았다. ‘종북 마녀사냥’의 효과를 부풀리는 것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

한편, 이런 피상적 평가는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총의 구실을 거의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노총은 이번 선거에서 6곳의 전략 지역을 선정했다(창원 성산, 울산 북구, 울산 동구, 경주, 부산 진을). 이 중 3곳에서 민주노총 후보가 당선했다. 창원 성산, 울산 북구, 울산 동구. 민주노총이 총선공투본을 구성해 울산과 창원 같은 중요한 선거구에서 노동자 후보를 단일화할 수 있는 모멘텀을 만들었다.(이 총선공투본의 추진력은 박근혜 정권의 공세에 파업과 민중총궐기 등으로 맞선 지난해 민주노총 노동자 저항이었다.) 그 덕분에 이 지역들에서 노동자 후보 대 자본가 후보의 대결 구도를 형성하고 노동자들의 계급 투표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2012년 총선에 비해 울산 북구에서는 1만 9천 표를, 동구에서는 1만 7천 표를 더 얻었다. 울산 중구의 이향희 후보도 2012년 4천2백 표에서 2만 2천 표로 지지가 늘었다.

이 기세에 눌려 이 지역의 새누리당 자본가 후보들조차 ‘노동개혁’을 반대한다고 말을 할 지경이었다. ‘조직 노동자들이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다’거나 ‘조직 노동자들의 단결력이 신자유주의로 분절됐다’는 일부 민중주의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민주노총 전략 선거구의 등뼈는 모두 민주노총 금속노조였다. 울산 북구와 동구는 각각 현대차와 현대중공업 노조가 주축이었고, 창원과 경주도 각각 금속노조 경남과 금속노조 경주지회가 뒷받침을 해 주었다. 경주에 단기필마로 출마한 권영국 후보는 15.9퍼센트를 얻었다. 이것도 조직 노동자들(특히 금속노조)의 지지 덕분이었다. 투쟁에서뿐 아니라 ‘정치’ 영역에서도 금속노조가 가장 선진 부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금속노조 지도부는 금속노조 정치실천단을 조직해 버스 투어를 했다.)

진보·좌파의 전망

노동자 운동과 진보·좌파 운동 안에서 내년 대선을 염두에 둔 전망 논의가 곧 있을 것 같다. 민주노총은 지난해 12월 선거연합정당 안을 제안한 바 있다(최종 좌절됐지만). 모든 진보·좌파 정치 세력을 아우르는 선거 연합 정당을 구성하자는 안이었다. 이번에 당선한 전략 후보들을 중심으로 민주노총이 연합 정당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정의당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비효과적인 재구성으로 끝나기 쉬울 것이다.

지난해 <노동자 연대>는 계급투쟁과 그 속에서 근본적 사회변혁 조직 건설하기에 우선순위를 두면서도, 민주노총의 선거연합당 제안을 지지한 바 있다. 이후 민주노총 논의에서도 우리는 앞서 언급한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면서 범진보·좌파 연합당 제안을 지지할 것이다.

이때 범진보·좌파 연합당 문제가 자민통계의 계급연합주의적 상설연대체 구축 시도로 변질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를 위해 범진보·좌파 연합당은 자본주의 야당 세력을 제외한 진보·좌파 진영으로만 한정해야 한다는 점, 자본주의 야당과 공동 집권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 참여 단체들의 독자성을 보장하는 느슨한 공동 운영 방식으로 할 것 등을 주장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선거 패배로 박근혜의 노동개악 등 각종 개악 계획이 물 건너가고 집권당의 내년 대선 경쟁도 난망해질 거라는 관측이 많다. 그러나 이는 섣부른 낙관이다. 오히려 세계 자본가들의 유력 신문 <파이낸셜 타임스>의 전망이 더 정확하다:

“선거 패배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커다란 타격이다. 그는 자신의 경제 의제를 더 강하게 추진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선거 결과는 박근혜의 권위주의적 정치 스타일에 대중이 피로감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 주지만, 그의 스타일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경제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본가들이 ‘강한’ 정부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근혜는 조기 레임덕을 방지하고 선거 참패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며칠 안에 다른 쟁점으로 대중의 시선을 돌리려 할 것이다. 오래지 않아 ‘노동개혁’ 법안 통과도 추진할 것이다. 그러므로 새누리당의 패배로 각종 개악이, 특히 노동개악이 물 건너갔다고 생각하는 것은 크게 섣부르다. 특히, 새누리당은 무소속과 국민의당과 더민주당의 일부를 끌어들여 ‘노동개혁’ 법안을 추진할 수 있다.

물론 노동자 계급과 청년·학생들은 박근혜의 패배에 고무돼 투쟁에 나설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투쟁과 근본적 사회변혁 조직의 건설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진보·좌파의 성적이 저조하다고?

중도진보계 언론들인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진보·좌파 정당들의 성적표를 박하게 평하는 기사들을 실었다.

“진보 정당은 이번 선거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한겨레>, 이재훈 기자)

“정의당 6석 초라한 성적표”(<경향신문>, 조미덥 기자)

안타깝게도, 진보·좌파 진영 내에서도 우리 진영의 성적이 저조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민중의 소리>와 <레디앙>에서 이런 평가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이 완전히 잘못된 평가임을 앞에서 지적했다. 덧붙이자면, 이런 보도는 지난 몇 년 동안 급변해 온 정치적 맥락 속에서 이번 선거 결과를 분석하지 않고 그저 최종 결과만을 떼어내어 보는 실용주의적 견해이다.

2012년 진보당 경선 부정 사건과 뒤이은 당권파 지지자들의 중앙위원회 폭력 사태로 진보당이 분당하자 ‘진보 정치가 실패했다’는 말이 유행했다. ‘바닥을 긁다 못해 지하를 뚫고 내려가고 있다’는 자조 섞인 농담의 대상이 되던 진보·좌파 진영이 지난 3년간 노동자 투쟁의 제한적 회복과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 덕분에 소생하기 시작했다. 모두 2백만 표가 넘는 정당 득표에 국회 의석도 8석이 됐다. 이 선거 결과를 지난 4년 동안 진보·좌파 진영이 겪은 정치적 굴곡을 고려하지 않고 2012년 통합진보당의 13석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추상적 관점일 뿐이다.

근거 없는 낙관론을 펴자는 말이 아니다. 진보·좌파의 화살표가 성장 방향을 가리키는지 퇴보 방향을 가리키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올바른 전망과 전술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진보·좌파 8명이 당선한 것은 진보·좌파가 전진하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는 징표다. 이 중 3명이 민주노총 전략 후보다. 울산과 창원에서 이룩한 노동자들의 선거 돌파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함의가 있다. <한겨레>는 이 점을 단신 보도만 했을 뿐, 그 정치적 의미를 진지하게 분석하지 않았다. 그 정치적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중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울산과 창원에서 노동자들에 의한 선거 돌파는 지난 3년간 노동자들이 저항한 덕분이자 이후 또 다른 노동자 저항을 고무할 수 있다.

또, 진보·좌파 안에는 대공장 조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협소한 경제적 이익’에만 매달리는 부문주의에 빠져 있다는 비난이 꽤 있었다. 울산과 창원의 선거 돌파는 조직 노동자들이 (공식)정치 문제에도 나서는 의식이 있음을 보여 줬다.

한편, 진보·좌파의 성장을 정의당이 주도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현재까지 정의당의 좌파에게까지 그 기회가 온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정의당의 좌파들이 상실감을 느끼고 조바심을 내며 정의당의 선거 성적에 인색한 평가를 내리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정의당이 잘 되면 그 다음에는 정의당의 좌파에게도 차례가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좀 더 길게 내다보며 정의당의 부상을 가능케 한 노동계급의 투쟁에 기여하는 게 바람직한 자세다. 

ⓒ<노동자 연대> 171호 | 입력 2016-04-15

정의당을 아는 기초 이론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최일붕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유의미한 물음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가 정상이라고 믿으며 자랐다. 우리가 자란 사회는 근본적 사회변혁을 지지하는 사회주의자들을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이거나 아니면 ‘극단적인’ 사람들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특히, 노동계급이 자본주의 시스템을 붕괴시키거나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의회를 통한 개혁만을 바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본주의 종식과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위해 싸우는 노동자는 소수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관념들을 다 받아들이는 노동자도 소수다. 대다수 노동자는 자본주의의 관념들 중 일부는 받아들이고 일부는 받아들이지 않는다.(이에 관해서는 <노동자 연대> 지난호에 실린 ‘언론은 사람들의 생각을 좌지우지하는가?’라는 기사를 보라.)

심각한 위기의 시기에는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논쟁이 훨씬 더 중요해진다. 물론 많은 좌파들이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논쟁은 케케묵은 것이라고 일축한다. 새 시대의 좌파는 그런 따분한 토론을 ‘넘어서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해 그리스 시리자 정부가 등장한 지 반년도 채 안 돼 EU에 굴복한 사실을 보면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물음이 케케묵기는커녕 여전히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왜 의미가 있는가? 먼저, 진정한 쟁점은 개혁 ― ‘노동개혁’ 같은 사이비 개혁이 아니라 착취와 차별을 경감케 하는 진정한 개혁 ― 을 위해 투쟁해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 역사상 마르크스와 레닌, 트로츠키 등 모든 훌륭한 혁명가는 개혁을 위해 투쟁했다. 그러므로 진짜 이슈는 과연 개혁 운동만으로 충분한가, 그리고 어떻게, 어떤 전망 속에서 개혁 운동을 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사회민주주의자는 개혁 운동에 한정하는 반면, 혁명가는 개혁 운동을 혁명 운동 건설의 일부로, 또 혁명 운동으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로 본다.

△노회찬 후보 선거 사무소 개소식에 참석한 노회찬(맨 왼쪽), 심상정(가운데), 이정미(맨 오른쪽) 국회의원 당선자들. ⓒ사진 출처 노회찬 블로그

사회민주주의의 좌파와 우파

사회민주주의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주류 사회민주주의고 다른 하나는 좌파적 사회민주주의다. 주류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원리·원칙을 지지하고 그에 근거하지만 다양한 법률과 정책을 통해 시스템의 운영을 개선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노동계급의 권익을 보호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만들려 한다.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대표적 사례이지만, 정의당도 이 범주에 속한다.(정의당의 개혁주의는 또한 민중주의적이기도 하다.)

좌파적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를 점진적으로 개혁해 사회주의로 변환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좌파적 사회민주주의는 대중운동과 노동조합을 동원해 자신들의 계획을 뒷받침하도록 보완한다. 좌파적 사회민주주의의 사례는 제1차세계대전 전의 독일 사회민주당, 1970~73년 칠레 아옌데의 민중연합 정부, 영국 노동당 좌파의 토니 벤(1925~2014)과 제러미 코빈(1949~, 현 당대표), 그리스의 시리자, 스페인의 포데모스, 그리고 우리 나라의 옛 민주노동당과 현 노동당 등이다.

좌파적 사회민주주의는 주류 사회민주주의보다 훨씬 급진적으로 보인다. 그래서 부르주아 정치인들과 미디어는 좌파적 사회민주주의를 터무니없고 웃긴다며 평소에 개무시하다가 특정 시기에 좌파적 사회민주주의가 떠오르면 “빨갱이”라며 극단주의 세력 취급을 한다.

그러나 좌파적 사회민주주의와 주류 사회민주주의는 둘 다 사회민주주의로서 공통점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원칙 문제인데, 둘 다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과 활동이 아니라 자신들이 민중을 대리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둘째, 전략 문제인데, 둘 다 기존 국가 기구(의회, 행정부, 공무원 조직, 지방자치단체 등)를 활용해 개혁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특히 의회의 구실을 강조한다.(정의당이 왜 의원내각제를 지지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좌파적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변화를 위해 대중 시위 등을 압박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점이 주류 측과 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은 오늘날과 무관한 과거사가 아니다

△러시아 혁명으로 폭넓은 개혁이 이뤄지다.

혁명기에는 사람들의 사상이 급변한다. 그런 때는 노동자들이 시스템의 본질적 모순들을 깨닫기가 훨씬 쉬워진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시스템은 온전히 제거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훨씬 쉬워진다. 이윤으로 돌아가고 점점 더 많은 부를 축적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은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1917년 10월 혁명에 뒤이어 러시아 여성들은 선거권, 이혼권, 낙태권 등을 얻었다. 성소수자들도 자유로운 성애의 권리가 확립됐고, 서자나 사생아도 적자와 동등한 권리를 얻었다. 이러한 평등은 당시 세계 어느 나라보다 훨씬 더 나아간 것이었고, 훨씬 더 폭넓은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서유럽에서조차 이런 권리들은 다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의 한계와 사회주의적 대안

근본적 사회변혁 지지자들은 사회민주주의 전략에 대해 비판적이다. 이것이 우리가 개혁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는 각각의 개혁과 개혁 운동을 지지하지만, 개혁 운동 전반을 아우르는 사회민주주의 전략은 지지할 수 없다. 그 전략이 성공할 수 없음을 역사적 경험과 분석을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의 진정한 권력이 의회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권력은 대기업과 은행의 임원회의 그리고 정부 각료회의, 경찰 간부회의 등에 있다. 이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부(좌파적 사회민주주의 정부인 경우에는 특히 더)를 길들이기 위해 경제의 목을 조르는 수법을 쓴다. 언론과 사법부가 이를 거들 것이다.

최선의 기대치는 자본주의 호황기에 약간의 개선을 얻어 내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호황을 누릴 때는 ― 가령 선진 산업경제의 경우 제2차세계대전 이후 1970년대 초까지, 한국 경제의 경우 1980년대와 90년대 전반부 ― 노동자들이 조금 싸우면 사용자들과 정부로부터 어느 정도 양보를 얻어 낼 수가 있었다. 북유럽의 복지국가는 바로 이렇게(경제 성장 + 노동자 투쟁) 성취된 것이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위기에 시달리는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세계경제 차원에서는 1970년대 초부터, 그리고 한국경제 차원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위기가 풍토병처럼 빈번히 급습해 시스템에 기능장애를 초래했다. 경제 위기 시기에 기업주들은 노동자를 공격해 이윤을 되찾으려 애쓴다. 지금 같은 시기가 그런 시기인데, 이런 때는 가장 좌파적인 사회민주주의자들도 얼마 안 되는 개혁조차 성취하기가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렵다.

위기 시기의 사회민주주의 실험은 1973년 칠레의 경우처럼 분쇄당하는 비극을 경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 흔한 경험은 시리자의 경우처럼 시스템과 협력하라는 압력을 받고 이 압력에 굴복하는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흔히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신을 지지해 준 운동에 제동을 거는 구실을 한다.

이런 우울한 상황이 전개되지 않도록 할 방도는 사회의 진정한 권력이 있는 곳, 진정한 권력의 소재지를 공략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 위기 시대에는, 지대한 영향을 미칠 개혁은 혁명적 투쟁으로만 가능했다.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 사회변혁 지지자들이 개혁을 위한 투쟁에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는 개혁을 쟁취하기 위한 진정으로 현실적인 전망이 있다. 가령 박근혜의 ‘노동개혁’에 맞서 의회주의자들은 차기 국회에 기대를 거는 게 ‘현실적인’ 것이라고 보지만,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저항이야말로 현실적이라고 본다. 내놓고 자본주의를 지키면서도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한다고 모순되게 행동하는 중도계 정치인들에게 기대를 거는 게 현실적인가? 아니면, 지배자들이 ‘노동개혁’을 추진하는 바로 그 목적 자체 ― 즉, 이윤 ― 를 공격하는 게 더 현실적인가?

물론 근본적 사회변혁 지지자라고 해서 선거나 의회를 기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치 “까마귀 가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하는 식이어선 안 된다. 또는 이솝 우화의 여우처럼 따먹지 못한 포도를 신 포도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근본적 사회변혁 지지자가 선거에 참여할 때는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을 돕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노동자들의 정치적·경제적 투쟁이 지상군이라면, 사회주의자 의원들의 역할은 공습을 하는 공군인 것이다.

요컨대 근본적 사회변혁 지지자들은 세 가지 영역에서 활동해야 한다. 첫째, 노동조합 영역에서 현장조합원들의 능동성과 투쟁성이 최대한 발현되도록 하는 방향으로 분투한다. 둘째, 정치적 항의 운동이나 방어 운동을 구축하기 위해 다른 좌파 단체들과 협약을 맺고 공동 활동을 해야 한다. 셋째, 만일 선거와 의회 참여가 역량상 가능하다면 그것을 이용해 반자본주의적 폭로 활동을 수행하고 노동자 투쟁을 선동해야 한다.

ⓒ<노동자 연대> 173호 | 발행 2016-04-30 | 입력 2016-04-30

이해심을 갖고 정의당 지지자들과 관계 맺을 줄 알아야 한다

최일붕

노동자연대는 진보·좌파 후보면 누구든, 진보·좌파 정당이면 어느 당이든 좋다고 일찍부터 공언했었다. 우리는 내놓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부르주아’(자본주의적) 정당보다는 자본주의를 전면 거부하거나 적어도 자본주의에 결함이 있다고 말하는 정당이 낫다고 언제나 주장했다. 그렇다면, 정의당은 더민주당과 다를 바 없는 “부르주아 정당”, 즉 단순한 자본주의 정당인가?

핵심 당 지도자들이 포함된 정의당 소속 당선인들의 정치적 배경과 공약(아래에서 <노동자 연대> 신문 김문성·김영익·이정원·장호종·정선영 기자들의 기사를 요약함) 그리고 당원의 사회적 구성을 보면, 왜 일반적인 유권자들은 정의당을 자유주의가 아니라 진보파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지를 쉽사리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좌파가 보기에 정의당이 아무리 온건해도(국제적 라벨을 붙이자면 중도좌파), 정치적 경험이 있는 유권자나 숱한 전투를 치러 본 민주노총 조합원이라면 더민주당 지지자와 정의당 지지자를 구별할 것이다. 도로의 중앙선은 자의적으로 긋는 게 아니다. 좌와 우의 한가운데에 긋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2016년 한국의 정치 지형 속에 정의당을 자리매김해야 하는 것이다.

아래에 요약한 정의당 소속 당선인들의 정치적 배경과 당의 공약 그리고 당원의 사회적 구성을 보면, 정의당이 단순한 자본주의 정당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는 “자본주의적 노동자당”(사회민주주의 정당에 대한 레닌의 정식화)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의당 소속 총선 당선인들의 정치적 배경

심상정 상임대표이자 당선인(이하 직함과 존칭 모두 생략)은 1980년대 노동운동에 뛰어든 이래 2004년 민주노동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하기까지 전노협, 금속연맹 등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아 왔다. 국회의원이 되기 직전까지 금속노조 사무처장을 지냈다.

심상정은 노동자 정당이 자본주의 국가를 운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또한 현재 진보·좌파 정당의 지도자들 중 남한 국가에 대한 존중과 충성 입장(“헌법 내 진보”)을 가장 선명하게 밝히고 있다. 박근혜 정부를 ‘안보 무능’ 정부라고 비판하는 것이나 이번 총선 홍보물에 실린 그의 군복 입은 사진도 그 연장선이다. 그의 저서《실패로부터 배운다는 것》(웅진지식하우스, 2013)에는 북한 비판은 있어도 미국·일본·남한 국가의 대북 압박 문제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다.

노회찬은 민주노동당의 사무총장과 대변인 등을 지냈고, 진보신당 당대표를 지냈다. 민주노동당 의원 시절 그는 이라크 파병 반대, 한미FTA 반대 운동 등을 적극 지지했다. 2005년에는 삼성그룹과 검찰의 유착 사실이 담긴 ‘X파일’을 폭로했다. 이에 대한 정치 보복성 판결로 결국 2012년 재선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의원직을 빼앗겼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노동자들의 지지에 힘입어 창원 성산에서 당선돼, 정치적 ‘복권’을 이뤄 냈다.

그러나 근래 노회찬은 아래로부터의 운동과 제도권 정치 활동을 예리하게 분리시키고 후자를 강조하는 “진보정치의 세속화”를 주장해 왔다.

이정미는 대학을 중퇴하고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노동운동, 통일운동 등을 하다 민주노동당에 입당해 민주노동당 최고위원과 대변인 등을 역임했다. 그는 인천연합 계열 신주류(新主流)로, 계파가 전혀 다른 심상정을 지지하고 있다.

정의당 일각에서는 정의당이 노동운동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정미는 자신도 “사회운동을 노동운동으로 시작했다”며 노동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찾아갈 수 있는 정당”이 되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20대 국회에서 제1호 법안으로 생활동반자법안을 발의하겠다고 공약했는데, 이 법안은 성소수자 커플이나 동거인 등도 가족으로 인정하게 하는 법안이다.

김종대는 오랫동안 안보 전문지 편집장을 맡아 온 국방·안보 전문가다. 1992년부터 군 출신 민주당 국회의원들의 비서관·보좌관으로 일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 하에서 청와대 국방보좌관실 행정관, 국방부 장관 정책보좌관 등을 역임했다.

이런 배경 덕분에 정의당 비례대표 경선 과정에서 임동원·이종석 등 남북화해협력 정책의 주요 입안자들이자 전직 정부 고위 관리 출신자들이 그를 지지했다. 또, 군 장성 35명을 만나고 취재해 《서해전쟁》 같은 책을 낼 정도로 군부 안에 발이 넓다. 무기 도입 비리 등 군부 내 부정부패 문제도 분석하고 폭로할 수 있었다.

그는 여러 시민단체들과도 연을 맺는 한편, 사드 배치, 북한 ‘위협’ 과장, 한미동맹 일변도 외교 등 박근혜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계속 비판해 왔다. 특히, 사드 배치를 비롯한 한국의 미국 MD(미사일 방어 체계) 협력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가장 분명하게 더민주당 정치인들과 구분된다.

이런 점들이 그가 비례 상위 순번이 되는 데 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불길하게도 그는 박근혜 정부의 “가짜 안보”와는 다른 “진짜 안보”를 강조하고 ‘노무현의 자주국방론에 자신의 손때가 묻어 있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노무현의 자주국방론이 현실에서는 친미로 기울고 대대적 군비 확충으로 나아갔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 정치인이 ‘자국 안보 지지’를 강조하고 이 방면에서 유능함을 입증하려 하는 것은 여러 문제를 낳을 수 있음을 역사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동북아시아 불안정과 갈등이 커지는 상황에서 자국 국가를 지지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은 우려 사항이다.

추혜선은 KBS노조와 SBS노조 간사를 거쳐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20년간 언론계 노조들과 시민사회단체 내에서 기반을 닦았다. 방송·통신·ICT 분야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집중되는 도급과 재하도급 등 고용불안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그래서 케이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기대가 크다. 정의당 내 비례후보 경선 과정에서 희망연대노조 케이블 비정규직 노동자 수백 명이 그를 지지하는 뜻으로 정의당에 집단 입당하기도 했다. 그런 기대와 요구를 희망연대노조 케이블비정규직지회의 한 간부는 이렇게 표현했다. “방송통신 쪽에 비정규직들이 많은데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계약이 1년마다 바뀌기 때문에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습니다. 원청의 갑질에 반대하고 고용을 보장할 수 있게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추혜선은 또한 정보기관이 테러방지법을 이용해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는 것을 견제하고자 20대 국회에서 1호 법안으로 정보통신인권법안을 발의하겠다고 밝혔다.

윤소하는 광주·전남 진보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했는데, 2010년 목포 주민 1만 4백80명의 서명을 받아 전국 최초로 주민발의 학교 무상급식조례를 제정했다. 이번 총선에서 청년, 비정규직, 농민, 중소상인을 위한 법률 제정을 공약했다. 원하청연대보증법을 도입해 원청 기업도 하청 노동자의 임금 체불에 책임을 지게 하겠다고도 공약했다. ‘단가 후려치기 방지법’ 제정 등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와 중소기업의 상생을 도모하겠다고도 밝혔다.

정의당의 공약은 더민주당보다 왼쪽에 있다

단순 자본주의 정당 더민주당은 청년실업 해소를 위해 정부와 기업뿐 아니라 노동자도 “양보·희생”하라고 주문하며 물타기를 하고 있다. 그 당은 ‘노동개혁’의 필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통상임금·노동시간 관련 법 개악에 대해서도 여당과 “큰 틀의 합의”를 한 상태다. 파견법 개정도 논의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

반면, “자본주의적 노동자당” 정의당은 기본적으로 민주노총이 제시한 총선요구안을 지지하며 더민주당과 분명한 차이를 보여 준다. 정의당은 “박근혜 정부와 반대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노동개악 저지를 핵심 공약으로 제시했고, 2대 지침 폐기를 주장한다. 특히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최저임금 1만 원, 공기업·대기업 임원 연봉 상한제, 성별 임금 격차 해소, 비정규직 사회보험료 지원 확대 등의 공약을 내놨다. 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과 처우 개선, ‘5시 칼퇴근 법’, 연간 1천8백 시간으로의 노동시간 상한제 등 노동시간 단축도 제시했다.

노동기본권 확대를 위한 공약들로, 가사노동자를 포함해 모든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 적용, 공무원·교원의 노동기본권과 정치적 자유, 이주노동자 고용허가제 폐지, 단체협약의 효력 확장, 공격적 직장폐쇄와 파업에 대한 손배·가압류 금지 등을 내놓고 있다.

반면, 정부와 사용자들의 임금 공격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정의당은 임금체계 개악 저지를 분명히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주로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의 임금을 적극 방어하고 나서길 꺼리기 때문인 듯하다. 노동시간 단축 공약에 임금 삭감이 없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제시하지 않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또, 정의당은 ‘초과이익공유제’를 제안하고 있는데, 이는 대기업의 이윤 일부를 중소기업과 공유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정의당의 민중주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공약이다. 그러나 기업 간 이윤 배분을 조정한다 해도 자동으로 하청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대기업 정규직의 임금 인상을 반대하는 효과를 낼 위험이 있다. 대기업 정규직의 임금 인상이 하청기업에 나눠 줄 ‘초과 이익’을 줄인다면서 말이다.

지난해 심상정은 정부의 노동개악 추진에 들러리 구실을 한 노사정위를 비판하면서도, “비정규직과 청년들, 시민사회계까지 두루 포함한” 국회 내 사회적 논의기구를 제안한 바 있다. 1980~90년대 내내 유럽, 특히 독일에서 ‘사회적 대타협’ 요구는 거듭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 요구를 억눌렀다.

정의당 당원의 사회적 구성

정의당의 당원은 현재 약 3만 5천 명이고, 그 가운데 민주노총 조합원이 1만 명, 다른 노동자들이 1만 몇천 명가량 된다. 노동자가 다수다. 이 규모는 창당한 지 3년반밖에 안 된 당치고는 적지 않은 규모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 정당에 진성 당원은 큰 의미가 없다. 이번 총선에서 정의당에 정당투표를 한 유권자들은 약 1백72만 명이나 된다.

역사적으로도, 진성 당원 면에서는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진배없는 경우가 적잖이 있었어도 투표로 말할 것 같으면 얘기가 크게 달랐다. 트로츠키는 1930년경 나치당 지지 증대가 경고음을 울리는데도 공산당 KPD가 활동적 당원 수를 기준으로 자신이 사회민주당 SPD와 엇비슷한 세력이라며 자기 만족에 빠져 있음을 비판하면서, 선거에서는 SPD가 당원의 열 곱절쯤 되는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실제로 거의 그렇게 됐다.) 현재 그리스에서도 공산당이 시리자보다 작업장과 캠퍼스에서 더 많이, 더 잘 조직하고 있지만, 우리가 지난해 보았듯이 선거 득표에서는 시리자가 공산당을 압도한다.

사회민주주의는, 특히 그 주류는 일상적으로 ‘공중전’(공식 정치권)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나머지, 노동자들과 평당원들을 수동적인 채로 놔 둔다. 평소에 정치는 사회민주주의 의원과 당료가 한다. 평당원은 투표장에 나가는 것만이 독려되고, 그가 선거 운동까지 한다면 그는 대단한 열성 당원인 것이다. 물론 간혹 대중 집회에 참가할 것이 독려되고, 훨씬 드물게는 시한부 파업에 참가할 것이 요구되지만, 그뿐이다. 그걸 넘어 아래로부터의 자력 해방을 지향한 노동계급의 자력 활동은 금기에 해당한다.

정의당 등장의 구체적 맥락

이렇듯 정의당은 일부 노동운동가들을 포함해 급진적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열망을 반영하면서도,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일관되게 추구하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 앞서 언급된 “자본주의적 노동자당”이라는 정식이 잘 들어맞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진정한 쟁점은 오늘날 한국의 정치 지형 속에서 이런 정당의 등장을 어떻게 볼 것이냐는 것이다.

서유럽과 달리, 단순 자본주의 정당들만이 설치던 한국의 정치 지형 속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전진하는 것은 노동자들을 고무하는 효과를 낸다. 그래서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일어나는 데에 긍정적인 효과를 낸다. 노동자들의 의식은 살아 본 경험, 조직해 본 경험, 특히 투쟁해 본 경험에 의해 변한다. 비록 환상에 의해 촉진돼 싸우는 것일지라도 그 환상을 깨뜨리는 것은 (유일한 수단은 아니어도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아래로부터의 투쟁이다. 그리고 투쟁이 클수록, 또 승리로 끝날수록 노동자들의 의식, 특히 자신감에 미치는 효과는 크다.

계급투쟁에서 자신감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사람들이 자신감이 없으면 지배자들이 ‘종북’ 속죄양을 만들어 만악의 근원인 양 책임 전가하고 상이한 노동자 집단들과 부문들을 서로 이간시켜 각개격파하는 것에 직면해서도 귀가 얇아진다.

자신감

우리가 노동자들과 차별받는 다른 사람들의 투표 대상에 정의당도 포함시킨 것은 그 당의 온건함과 개혁주의를 몰라서가 아니다. 심지어 그 당 안에는 참여계 같은 사회자유주의자들도 있다. 하지만 좌파들도 있다. 일부 노동자 당원은 자신의 노동조합을 통해 정의당과 연계돼 있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정의당에 투표한 노동자·청년·대학생들과 ‘노동개혁’과 구조조정에 맞서, 또 세월호 참사 책임 규명을 위해 함께 싸워야 한다는 점이다. 정의당을 더민주당 2중대쯤으로 매도하는 것은 이 사람들에게 ‘당신과 관계 맺을 필요가 없다’고 오만하게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한 사회주의(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권력)가 정치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만으로 구축되지 않는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미래에 밑에서부터 솟아나올 사회주의의 시초는 레닌 말대로(《좌파 공산주의 ― 유치증》), “가상적인 인간 재료로 구축되지 않는다. 또는 우리가 특별히 준비한 인간 재료로 구축되지도 않는다.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물려준 인간 재료로 구축하는 것이다.” 정의당에 투표한 노동자·청년·대학생의 상당 부분은 그 나름으로 새롭게 급진화돼, 그 정치적 표현으로서 투표 행위를 한 것이다. 사회주의자는 이들과 소통할 줄 알아야 한다.

맺으며

의회와 선거, 투표 문제는 원칙 문제가 아니라 전술 문제다. 물론 전술은 속임수가 아니기에 원칙과 단절되지 않고 접점이 있다. 그 접점은 바로 노동계급의 자체 활동(궁극적으로 자력 해방)이다. 특정 전술을 통해 노동자들 스스로 행동에 나서도록 하는 것이 사회주의적 전술들 일반을 꿰뚫는 공통의 가닥인 것이다. 이런 가닥을 잡고 있는 한에서 전술은 융통성 있어야 한다.

신축적인 전술 운용에 가장 해로운 것은 레닌이 지적했듯이, “[혁명가들이] 객관적 현실을 자신의 희망과, 자신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태도와 혼동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들의 가장 위험한 실수다.”

노동자연대는 자신의 주장과 실천, 독자적 조직을 숨기지 않고 정의당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 하므로, 전술의 신축성을 발휘하면서도 그럴 수 있다. 정의당이 성장할수록 사회주의자들의 조직을 만만찮게 구축할 과제는 더욱 막중해질 것이다. 하지만 둘의 성장이 상충하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만만찮은 사회주의적 조직이 건설되기 위해서라도 정의당 성장의 동력이 되는 소수 대중의 급진화 흐름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 연대> 173호 | 발행 2016-04-30 | 입력 2016-04-30

진보대통합당 안(案)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최일붕

4년 전 총선과 그 8개월 뒤 치러진 대선에서 적잖은 노동자들이 박근혜에게 투표했을 것이다. 물론 다수는 아마도 문재인에게 투표했을 것이다. 박근혜에게 투표한 노동자들은 경제 회복을 바라고 그랬을 것이다.

박근혜의 대선 승리는 노동자들의 사기를 다소 떨어뜨렸던 듯하다. 그리고 당시에 진보당이 민주통합당과의 연립정부를 염두에 두고 우경화했던 것도 거기에 다소 일조했을 것이다.

그람시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헤게모니’를 잡는 데서 정당이나 노동조합 등의 ‘시민사회’가 하는 구실을 지적했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이던 시절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도 “노동운동이 개혁주의 사상과 더 중요하게는 그 사상이 표현하는 체제 논리를 수용하면, 자본주의가 가하는 사회적 압력에 취약해진다”고 강조했다.

제러미 코빈 노동당 대표가 자꾸 양보하면 “좌파 전체를 약화시킨다”고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경고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지난해 11월 코빈은 파리 참사를 명분으로 한 서방의 시리아 공세나 개입을 유엔의 합법성 부여를 전제로 양해할 수 있다고 암시했다.

지속가능  단결해서 얻은 진보·좌파의 총선 성과는 의미있고 중요하다. 이 성과를 이어가려면, 지속가능한 방식이 필요하다. ⓒ사진 이미진

박근혜 정부 등장 후 노동자 운동 내 이데올로기 투쟁의 세력균형은 좌파에 현저하게 불리했다. 분절화와 부문주의로 노동자들은 단결할 수 없으므로 싸울 수 없다던가, 특히 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렇다던가, 진보정당이 재건되는 게 노동운동 재기의 선결 조건이라든가 하는 등의 주장이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떨어뜨려 전진을 가로막고 있었다.

노동자연대는 소규모였어도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우리 몫을 하려 애썼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통해,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사상과 투쟁했다.

또, 노동자연대는 민주노총 안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좌파적인 집행부가 등장케 하는 데 일조했다.

이 사상 투쟁과 정치 운동은 서로 결합돼 다소 효과가 있었던 듯하다. 적어도 민주노총 좌파가 대세에 영합하는 것을 어느 정도 견제했던 듯하다.

물론 대규모 노동자 투쟁이 일어났더라면 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반동적 사상을 크게 밀어 내는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두세 차례의 민주노총 하루 파업과 여러 차례의 소규모 노동자 투쟁이 일어났고, 여기에 노동자연대의 기여도 일부 있었다.

한편 세월호 참사는 광범한 대중에게 큰 심리적 충격을 줬지만, 그에 대한 항의 운동이 노동운동 내에 미친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반동적 사상을 밀어 낼 만큼 강력하고 급진적이지는 못했다. 박근혜 정부에 대한 반감은 증대시켰겠지만 말이다.

지속 가능성을 위한 조건들

그러므로 이번 총선에서 박근혜가 참패한 원인은 주로 경제를 못 살린 것에 대한 심판을 받은 것과, 부차적으로 노동자 저항들과 세월호 항의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박근혜 참패보다 정말 더 중요한 점은 적잖은 노동자들이 박근혜 심판에서 더 나아가, 진보 측에 투표해 여덟 명을 당선케 한 것이다.

이는 주로 자본주의 야당들이 박근혜 정부에 너무 타협적이었던 것에 대한 불신을 표명한 것일 뿐 아니라, 진보·좌파 정치의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노동자들은 매우 중요하다.

이 진보 투표는 정의당과 부울경연합의 의회 진입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정의당과 부울경연합이 모두 포함되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연합하는 정당을 설립한다는 생각은, 일단은 괜찮은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정당은 지속 가능해야 한다. 정의당계와 자민통계는 과거에 두 차례나 분열한 경험이 있다(2008년 초와 2012년 여름). 노동자연대는 그 원인이 매우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제국주의 체제의 동아시아 내 갈등 문제와 북한 사회 성격 문제라는 근본적인 문제 말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지금도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어졌으면 깊어졌지 말이다.

그러므로 지속 가능하려면 다음과 같은 강력한 조건이 붙어야 한다.

첫째, 정규적인 일상 활동을 공유하는 통상적인 정당이 아니라 선거연합 성격의 정당이어야 한다. 그런 정당이 어떤 모습일지는 이번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총 주도로 형성된 총선공투본을 정당 형태로 발전시킨 모습을 상상하면 이럭저럭 비슷할 것 같다. 명칭은 예컨대 ○○당(정의당), ○○당(진보연대), ○○당(**당) 하는 식이면 될 것이다.

둘째, 정의당과 자민통계 그리고 둘의 완충지대 격인 제3세력을 다 당 중앙에 포함해야 하지, 이 가운데 하나만 포함하는 연합이라면 불안정할 것이다.

(노동자연대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스스로 그 제3세력에 포함되려 애쓰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정의당과 자민통계의 합법 전술용 정당은 집권해 개혁 입법으로 사회를 개혁할 목적으로 선거에서의 승리에 맞춰진 정치 조직이다. 유권자 영합주의의 압력이 있을 수밖에 없고, 이는 의원단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다. 게다가 의원단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당내 사회주의자들의 처지는 녹록하지 않다. 이때 의회 밖에서 벌어지는 운동만이 사회주의자들이 당내 우파의 압력을 버텨 내고 원칙을 고수할 힘을 줄 텐데, 이 점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의 정견을 내놓으면서 독자적 조직으로서 활동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 당직선거나 공직선거 등을 둘러싼 갈등에서 벗어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선거연합당은 대선을 앞두고 더민주당(물론 국민의당도) 같은 자본주의 정당과 연립 협약을 맺어서는 안 된다. 정의당 못지않게 자민통계도 부르주아 정당과 연립하기를 갈망한다. 선거연합당의 목적은 선거에 대처하는 것이다. 진보·좌파 측의 단일 후보를 선출 또는 선정해 그 후보가 선거 운동을 이용해 기존 체제를 비판하고 노동자 투쟁을 찬양·고무하게끔 해야 한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당과 협약을 맺는다면 그 정당은 기존 체제를 좌파적 견지에서 비판하지도 못하고, 또 노동자 투쟁을 확실하게 지지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 정치 조직이라면 도대체 뭐에 쓸 것인가?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지금부터 독자 후보의 사퇴 불가를 분명히 못박자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 주장이 두 가지 점에서 부적당하다고 본다. 첫째, 이 문제를 지금부터 확실히 하자고 강조하는 건 선거 전술에서 후보 거취 문제가 차지하는 비중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효과를 낸다. 좌파의 선거 참여는 후보 개인 중심의 활동이기보다는, 후보 주위에 결집한 선거 운동과 그 선거 운동을 지지하는 훨씬 더 폭넓은 대중 운동이 돼야 한다.

둘째, 아무리 대선이 1년반밖에 안 남았다고 해도 후보 거취 문제를 지금부터 확정해 두겠다는 건 새 연합체에 참여할 세력의 폭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효과를 낸다. 계급 투쟁의 수위와 부르주아 야당 후보가 누구냐에 따라 나중에 투표 방침을 정하고자 하는 세력들이 참여를 주저하도록 만들 수 있다.)

투 트랙 전략 자민통계의 ‘상설연대체+진보대통합당’ 구상은 인민전선 전략의 양대 축이다. ⓒ사진 출처 참세상

더 중요한 게 있다

자민통계와 정의당, 그리고 다른 진보·좌파 단체들이 연합할 수 있는 더 중요한 틀은 제한된 구체적 이슈를 둘러싸고 형성되는 공동전선들이다. 이것이 선거연합당보다 더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뒤따른다. 자민통계는 진정한 공동전선을 우회해 언제나 민중전선으로 몰고 가려는 경향을 보였다. 우리는 이를 민중총궐기 준비 단계에서 보았다. 물론 민중총궐기는 실제로는 압도적으로 민주노총 조합원 총궐기였고(전체 참가자 9만 명 가운데 7~8만 명), 노동자들의 거리 항의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민중총궐기를 제안하고 계획한 노조 지도자들과 노조 안팎의 민중주의자들은 노동자 운동을 중간계급들이나 심지어 자본주의 정당과 친화적인 방향으로 이끌려는 경향이 있다. 즉, 인민전선으로 연결시키려 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민중주의자들, 특히 자민통계가 말하는 ‘상설연대체’는 그들이 추진하는 진보통합정당과 한 짝을 이루어 인민전선 전략에 이바지하도록 구상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보통합정당 대신에 사안별 공동전선을 대안으로 강조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자들의 경제적·정치적 투쟁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민주노총 지도자들에게는 민주노총에 기반을 둔 정당이라는 아이디어가 솔깃할 것이다. 그러나 비효과적이고 지속 가능하지 않은 정당 설립을 추구하기보다는, 지금으로선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이 걸린 당면 투쟁을 더 신경써야 한다. 그래야 적절한 때 효과적이고 지속 가능한 결집체를 구축할 수 있다.

ⓒ<노동자 연대> 175호 | 발행 2016-06-01 | 입력 2016-06-01

진보정당도 쓸모 있겠지만 사회주의당은 훨씬 쓸모 있다

최일붕

20세기 노동운동을 지배한 조류는 노동자 정당이 선거로 국가 공직들을 장악해 그 집행권을 지렛대로 삼아 개혁들을 추진하고자 했던 조류였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이하 사회당)과 공산당이 이런 조류를 대표했다. 특히, 사회당들은 1980년대 이후 국가 개입을 더 줄이고 시장경제를 더 늘리는 정책을 시행해 왔고, 더는 사회주의라는 말도 입에 올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회당과 공산당에게 사회주의는 의원들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협력해서 개혁입법을 추진하는 것을 뜻할 뿐이다. 때때로 대규모 거리 시위가 호소되기도 하고, 심지어 시한부의 상징적 파업이 선거를 위해 이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노동계급 스스로 권력을 행사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건 끔찍이도 두려워한다. 미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핼 드레이퍼는 이런 사회주의를 “위로부터의 사회주의”라고 부르면서, 마르크스와 레닌·트로츠키 등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와 대조했다.

위로부터의 사회주의에 따르면, 노동자들은 평소에 수동적인 채로 남아 있다가 몇 년마다 한 번씩 사회당이나 공산당에 투표하고 이따금 거리 집회에 나오는 것 정도가 요구된다. 파업은 한 사업장이나 부문에 국한되고, 사실 어느 수위를 넘지 않는 한 신경쓰지도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는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혁명을 지지한다. 그래서 혁명기에 직장과 노동자 거주지역에서 선출된 대표자들로 이뤄진 노동자 지방정부들이 창설되는 것을 지지한다. 그 노동자 지방정부들은 기존의 자본주의 중앙정부와 실세를 놓고 겨루게 될 것이다.

그런 전면적인 상황은 마치 무에서 유가 창조되고 메시아가 도래하듯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부분적인 투쟁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일반적인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 ‘연결’과 ‘보편화’ 과정은 결코 자동적이지 않다. 인간 주체의 행위가 개입돼야 한다. 즉,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상황의 도래를 위한 지난한 정치 운동과 조직을 평상시에 건설해야 한다.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지지하므로 혁명적 정당(이하 사회주의당)과 그 당원들은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이다. 사회주의당은 지지자들에게 노동계급 투쟁의 범위를 확대하고 투쟁 수위를 높이기 위해 능동적으로 노력하라고 요구한다. 당원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헌신성과 적극성을 요구한다. 당원들이 최소한의 당비나 내고 정치 활동은 거의 안 하는 채로 살아가지 말라고 말이다.

노동계급 의식의 불균등함

사회주의당과 달리 개혁주의 정당은 국가를 중립적 기구로 여긴다. 그래서 자기가 그걸 인수해 운영하면 노동자 등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유리하도록 운영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촉망받으며 등장한 그리스 시리자 정부가 자기 지지자들을 배신하고 긴축 정책을 시행하고 있음이 반증하지만 이런 착각은 일찍이 1871년 마르크스가 파리 코뮌을 찬양하면서 논박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국가(행정부, 사법부, 입법부, 경찰, 군대, 지방자치단체, 공기업 등)는 자본가 계급이 자기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기다. 또한 자본가 계급의 정치조직들 가운데 가장 효과적인 정치조직이다.

이 지배계급 정치조직과 투쟁해야 한다는 점이 바로 사회주의당을 건설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물론 ‘자율적 사회운동’론자들의 멋진 상상처럼 차별받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두 단결해, 국가를 있으나 마나 한 걸로 만드는 상황이 가능하다면, 굳이 사회주의당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발적 단결은 기껏해야 일시적일 뿐, 결코 지속 가능하지 않다. 차별받는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만 노동자들의 의식도 불균등하기 때문이다.

대중적 노동운동이 전개되면 노동자들 가운데도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품고 이윤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따라 운영되는 사회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특히, 기업주들과 정부가 경제 위기의 대가를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는 것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면 이런 노동자들은 좀 더 늘어날 수 있다.

하지만 소수 노동자들은 여전히 주류 언론이 하는 주장들을 대부분 받아들인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그래도 가장 효율적인 자원 분배 체제이고, 평등은 불가능하고,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노동운동과 관련된 지배자들의 거짓말을 대부분 받아들인다. 가령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단결할 수 없다는 등의 거짓말들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이 두 상반된 세계관 가운데 어느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은 지배계급의 일부 견해들은 거부하고 다른 견해들은 받아들인다. 그들은 기존 사회의 근간은 받아들이면서도 그 최악의 결과들은 완화하고 싶어 한다.

사회주의당은 바로 이러한 불균등한 노동자 의식 때문에 필요하다. 사회주의당이 혁명적 정당이라 해서 혁명적 시기가 도래했을 때야 비로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노동계급 투쟁이 훨씬 낮은 수위에 머물러 있을 때도 사회주의자들이 일정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려면 그들 자신의 조직이 반드시 필요하다. 노동자들 가운데 선진적인 소수가 평소에 조직돼 있지 않으면 노동자들 사이에서 만연한 뒤범벅된 생각들과 대결할 수 없다. 사회주의당은 노동조합 안에서, 정치운동 속에서, 작업장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적으로 특정 의견이나 전술을 주장할 수 있게 해 주어, 우리가 더 효과적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해 준다.

노동계급 속의 사회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의 조직된 개입은 계급투쟁 결과에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 ⓒ사진 이미진

파리 코뮌의 경험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 가능성을 보여 준다 1871년 파리코뮌 참가자들이 놓은 바리케이드. 

노동자 계급 의식의 불균등함 때문에 당은 계급을 대표할 수 없다

선진 노동자의 정당인 사회주의당과 달리 진보정당은 노동운동을 고스란히 정당으로 표현하려 한다. 그럼으로써 평균적인 대다수 노동자들을 대변하려 한다. 진보정당은 노동계급을 대표하려 한다.

그러한 방식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가는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정당(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 독일 사회민주당 등)이나 공산당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정당들은 노동계급의 평균적인 의식을 준거로 삼아 노동계급을 대표하려 하고, 결국 지배자들의 견해들을 대부분 거부해 온 노동자들뿐 아니라 그 견해들을 대부분 받아들이는 노동자들도 대표한다. 그래서 언제나 사회당과 공산당은, 인종차별을 단호하게 반대하고 난민을 옹호하는 노동자들뿐 아니라 인종차별을 용인하고 난민을 배격하는 노동자들도 포용했다. 서구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인종(특히 무슬림 이민자) 차별과 난민 문제인데도 말이다.

노동계급을 대표해 그 불균등한 의식을 구현하므로 진보정당은 노동자들의 투쟁성과 능동성을 대표하지 않고 오히려 노동자들의 수동성을 대표하게 된다. 덕분에 진보정당은 대규모 조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바로 그런 수동성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추수주의’, 즉 노동운동 내의 통념에 영합하고 그 꽁무니를 좇게 될 것이다.

반면 사회주의당과 그 당원은 능동적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사회주의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기 때문이다.

개혁주의와 단절함

사회주의당은 진보정당과 달리 노동조합 지도자들로부터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한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서 착취 조건을 놓고 협상하는 노동운동 내 특수층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노조 운동의 지도층이라는 동류의식에 철저한 데다 투쟁보다 협상을 우선시하므로 노동운동 내 보수층을 이룬다. 진보정당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주요 기반으로 하는 정당이다. 그래서 진보정당은 본질적으로 개혁주의 성향을 보일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개혁주의는 정치 투쟁과 경제 투쟁의 분리로 나타난다. 노동계 지도자들은 정/경 역할분담을 한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이 먹고사는 문제들에 집중하고 개혁주의 정치인들은 개혁입법을 위한 제도정치권 내 투쟁에 집중하는 식으로 말이다. 지배계급 자신은 둘을 분리시키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두 투쟁이 별개라는 생각은 노동계급의 경제적 능력(특히 파업을 통해 발휘되는)을 정치 문제 해결에 사용할 기회를 놓치게 만든다.

우리 나라의 경우, 노동계 지도자들의 개혁주의는 민중주의적 전통과 융합된다. 민중주의는 반동적인 극소수 엘리트층에 대항해 나머지 국민(“민중”)이 계급을 초월해 단결하자는 사상이다. 재벌개혁과 사회연대전략을 추구하는 게 대표적 사례다. 하지만 자본주의 야당과 연립정부를 세울 목적으로 전략적 연대를 하는 것도 또 하나의 사례다.

진보정당 추진자들은 민중주의를 받아들인다. 이와 달리 사회주의당은 결코 어떤 시기에도 계급 분단을 흐리는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친중간계급적 사상에 맞서 의식적인 투쟁을 한다.

이를 위해 사회주의당은 노동자들에게 노동계급 투쟁의 역사를 알리고 그 교훈을 습득하도록 한다. 혁명적 전통과 교훈,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중요하게 여긴다. 트로츠키는 이를 두고 “계급의 기억”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노동운동사는 거의 다 숨겨져 있다. 학교와 미디어에서는 이런 것을 배울 수 없다. 특히 노동자들의 승리에 대해서는 그렇다. 배울 때조차도 왜곡되게 배운다.

사회주의당의 활동 방법은 민주집중제다

위에서 우리는 사회주의당의 노동자 당원들은 최소 당비나 내고 활동은 거의 안 하는 진보정당 노동자 당원들과 다르다고 했다. 그저 정치 토론을 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정치 활동을 하는, 말 그대로 활동가들은 자기들의 집단적 결정이 실천에서 효과를 내도록 해야 한다. 그러려면 민주집중제라는 방법에 따라 활동해야 한다.

△노동자를 조직하는 신문 노동자 신문은 운동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적으로 특정 의견이나 전술을 주장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다. ⓒ이미진

민주집중이라는 말은 모순된 용어처럼 들린다. 그리고 민주집중제를 채택하면 반드시 서열과 엘리트주의를 수반한다는 주장도 자주 들을 수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오해에서 비롯한 것이다. 집중은 리더십, 즉 ‘지도’를 뜻하는 말인데, 진정한 사회주의적 지도는 자본주의에서 통용되는 엘리트적 지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회주의당이 말하는 지도는 당원들이 당 안팎에서 자신의 견해와 전술을 위해 분투하는 것을 말한다. 즉,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평소에 받아들이는 지배계급의 견해들을 논박하고, 크고 작은 투쟁들이 어떻게 전진할 수 있는가에 관한 의견을 내놓고 능동적으로 조직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리더십은 민주적 토론의 논리적 결과다. 당 내에서 쟁점들이 토의되고 때로는 그것을 둘러싼 논쟁이 이뤄진다. 그러나 일단 결정이 나면 누구나, 또 논쟁 과정에서 어떤 입장을 취했든, 그 결정에 승복하고 그에 따라 활동해야 한다.

반면 진보정당은 민주와 집중이 완전히 따로 논다. 진보정당에서도 토론과 논쟁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토론과 논쟁의 결과는 당원 개인들에게 아무런 구속력도 없다. 말과 행동이 일치할 수 없고 각자가 제멋대로 행동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당의 의원들과 관료들이 진정한 권한을 갖게 된다.

짧은 맺음말

노동계급 투쟁은 여전히 사회의 진보에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노동계급 투쟁은 사회주의당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일어난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의 조직된 개입은 결과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 노동계급 속에 뿌리내린 사회주의당은 그러한 개입과 궁극적 성공의 핵심 요인이 될 수 있다. 철저한 사회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사회주의당의 일부여야 하는 이유다.

사회주의 정당의 통상적인 이미지는 스탈린주의에 의해 왜곡돼 왔다. 오늘날 우리는 사회주의당이 여전히 가장 민주적이고, 노동자들에게 가장 활짝 열려 있고,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노동계급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수단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

ⓒ<노동자 연대> 175호 | 발행 2016-06-01 | 입력 2016-06-01

민주노총의 정치 방침과 진보대통합당 안에 대해

김인식

총선이 끝나자마자 민주노총의 정치 방침 문제가 민주노총 상층 간부들의 제일가는 관심사가 됐다. 내년이 대선이기 때문에 이 논의는 곧 일선 활동가들로까지 확대될 것이다.

민주노총의 정치 방침에서 주요 쟁점은 새 노동자 정당 건설 문제다. 부울경연합을 필두로 해 자민통계가 일제히 ‘노동 중심 진보대통합당’ 안(案)을 주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울산에서 두 명의 노동자 국회의원이 탄생한 것에 크게 고무돼 ‘민주노총당’을 만들자고 촉구하고 있다.

우선순위 선거연합이나 진보대통합당 등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은 대중투쟁 건설에 도움이 되냐가 기준이 돼야 한다. ⓒ사진 이미진

그러므로 많은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에게 진보대통합당 안은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진보대통합당이 정계 진출의 통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2년 여름 통합진보당이 분열한 뒤로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에게는 마땅한 정치적 표현체가 없었다. 일부 노동조합 간부들이 정의당으로 가긴 하지만, 이 당은 과거 민주노동당만큼 민주노총과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신승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롯해 전현직 민주노총 간부들 일부가 진보대통합당 건설 활동에 나서고 있다. 박유기 현대차 지부장도 최근 울산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 비슷한 생각을 말했다. “노동자가 후보 단일화의 여세를 몰아 진보정당 단일화도 밀고 나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민통계의 프로젝트

개혁주의적인 노동조합 상근간부층 일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겠지만, 진보대통합당 안은 본질적으로 자민통계의 프로젝트다.

진보대통합당과 상설연대체는 자민통계의 핵심 전략을 이룬다. 자민통계는 독자적으로 자신들의 정당을 건설하지 않고 진보대통합당이나 전선체 안에서 움직이는 것(또는 전선체로서 움직이는 것)을 선호하는 오랜 스탈린주의 전통이 있다. 이때 합법적 진보대통합당이 제도권 정치를 맡고, 상설연대체가 대중 투쟁을 담당한다. 이 프로젝트가 가리키는 전략적 방향은 인민전선이다.

인민전선 전략의 뼈대는 노동계급만으로는 신자유주의와 냉전 수구 반통일 세력에 맞설 수 없으므로 중간계급과 (심지어 부르주아지 일부와도)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에서는 자본주의 야당과 “전략적 야권연대”를 체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전략은 2010년 지방선거와 2012년 총선에서 각각 민주노동당과 진보당에게 상당한 선거적 실리를 안겨 줬다. 그러나 기본 이해관계가 정반대인 계급 간 동맹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의 힘을 약화시킨다. 정치 동맹자들이 곧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에서 민중연합당은 자본주의 야당과 체계적으로 “전략적 야권연대”를 추진할 수 없었다. 더민주당 등 자본주의 야당이 선거적 실익이 없다는 계산에서 거부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일부 선거구들에서 민중연합당 후보가 자진 사퇴하는 방식으로 후보 단일화가 있었다.)

그렇다고 자민통계가 인민전선 전략을 폐기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인민전선은 자민통계의 역사적 전통이다. 전통은 물질적 토대가 변하지 않는 한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다. 여기에 울산의 선거적 성공이 자민통계로 하여금 내년 대선에서 인민전선(연립 정부)을 재추진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 것 같다.

진보대통합당은 인민전선을 실현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수단이다. 자민통계가 총선 직후 신속하게 ‘어게인 민주노동당’ 슬로건을 내건 이유다.(권오길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은 ‘민주노총당’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과거 민주노동당 창당 때와는 달라진 형편이 있다. 민주노동당은 노동계급이 직면한 정치적·사회적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민주노총이 주도해 만들었다. 반면, 현재 민주노총은 진보대통합당 건설을 주도할 힘이 1990년대 후반 같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다. 그래서 민주노총과 여타의 정치 세력들이 연합해 상시적인 정당을 만들자는 것이 진보대통합당의 발상이다.

진보대통합당 안의 강력한 근거는 울산의 경험이다. ‘울산에서 처음으로 모든 정파가 총단결하고 노동조합이 앞장서서 선거 운동을 해 계급 투표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울산 동구와 북구에서 노동자 후보들이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은 분명 통쾌한 일이었다. 또, 계급과 정치 성향은 상관관계가 없다는 일부 좌파의 주장이 틀렸음도 보여 줬다.

그러나 울산의 경험을 곧장 전국화하는 것은 과잉 일반화의 오류에 해당한다. 울산의 경험을 이치에 맞지 않게 억지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울산의 승리를 “진보당의 정치적 복권”으로 해석하는 것이 그런 경우다. 물론 당선한 두 후보는 진보당 출신이다. 그러나 결정적 승인(勝因)은 그들이 노동자 후보이자 진보·좌파의 단일 후보로서 선거에 출마했다는 사실이다. 반면, 진보당의 계승 세력으로 여겨진 민중연합당의 전국 득표는 극히 저조했다. 진보대통합당 안 — 진보당도 진보대통합당을 표방했다 — 에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무리하게 갖다 붙이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과잉 일반화 울산의 승리를 "진보당의 복권"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류다. ⓒ사진 출처 민중연합당

정의당의 기본 성장 전략

정의당은 지난해 말 민주노총의 선거연합당 제안조차 내키지 않아 한 바 있어, 진보대통합당을 건설하려고 하지 않을 것 같다.

정의당 지도부가 진보대통합당 안에 관심을 나타내지 않는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이번에 당선한 진보 국회의원 8명 중 6명이 정의당 소속이다. 원내에서 정의당이 다수인 것이다. 크게 아쉬울 것 없다고 생각할 법하다.

둘째, 정의당의 주요 지도자들은 진보대통합당보다는 더민주당과의 야권연대에 더 관심이 있는 듯하다.(물론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 둘이 길항관계인 것은 전혀 아니다.) 이번 총선에서도 정의당 지도부는 야권연대를 적극 제안했지만, 더민주당이 우클릭 하면서 이 제안을 거부해 성사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정의당의] 지역구 의석은 최소화됐다.”(정의당 중앙당 20대 총선 평가기획팀이 제출한 ‘정의당 20대 총선 평가’에서)

여기서 정의당 지도부가 내린 결론은 “힘에 기초하지 않고서는 야권연대 전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민주당 등으로부터 선거구 양보를 이끌어 내려면 지역 조직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정의당의 수도권 지지율은 10퍼센트를 상회한다. 따라서 전략적 야권연대는 여전히 정의당의 핵심 성장 전략이다. 정의당의 주요 지도자들은 내년 대선에서도 더민주당 등과 연립 정부를 수립하고 싶어 한다.

셋째, 정의당 안에는 스탈린주의 세력과의 합당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게 존재한다. 동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 간 갈등과 북한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두 정치 세력의 날카로운 차이점이 드러났다. 북한의 핵실험, 단거리 미사일 발사, 서해 NLL 인근 해상사격훈련, DMZ 목함지뢰 폭발 등에 대해 정의당은 북한을 강경하게 비판하는 입장을 발표해 왔다.

마지막으로, 정의당 내 노동·좌파 계열도 진보대통합당 안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보다 내심으로는 부울경연합이 정의당에 입당해 그 당 안에서 노동·좌파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선호하는 듯하다.

정의당은 노동자 정당이 아닌가?

자민통계가 ‘노동 중심 진보대통합당’을 주장하는 것은 그들이 정의당을 노동자 정당으로 보지 않고 있음을 함축한다.(일부 급진좌파도 이렇게 주장한다.)

자본주의적 노동자당 정의당은 정치와 경제의 분리를 바라는 것이지, 노동 기반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 조승진

정의당이 노동계급과 맺고 있는 조직적·전통적·이데올로기적 연계가 과거 민주노동당만큼 밀접하지 못하다. 그러나 그 당의 당원과 투표 기반은 주로 노동계급이다. 정의당 당원 3만 명 중 2만 명이 노동자다.(그중 민주노총 조합원이 1만 명이다.)

물론 지난해 11월 정의당에 합류한 노동계 리더 출신자 하나가 당의 비례 후보 경선에서 후순위에 배정돼 당선권 밖으로 밀려났다. 이를 두고 정의당이 ‘노동을 홀대한다’는 비판이 제기됐다.(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정작 비례 후보 경선 때는 노동계 후보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반면, <노동자 연대>는 당시 노동계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노총 소속 정의당 당원이 1만 명이라 해도 전체 민주노총 조합원의 1.25퍼센트밖에 안 된다. 즉, 정의당의 조직 노동자 기반은 아직 미약하다. 정의당이 성장하려면 조직 노동자 운동을 훨씬 더 중시해야 한다. 그 점에서 정의당의 비례 후보 결정은 문제가 많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정의당이 노동자 정당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심상정·노회찬·이정미 의원 등은 모두 노동운동 출신이다. 그러나 정의당의 지도부와 정책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개혁해서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에(“헌법 안의 진보”), 그 당은 레닌이 말한 “자본주의적 노동자당”이다.

정의당은 사회민주주의적 정경 분업 원칙 — 파업이나 임금 인상 등 경제적 쟁점들은 주로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다루고, 주로 선거 문제로 여겨지는 정치적 쟁점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 소속 의원들이 다루자는 것 — 에 따라 민주노총과 역할 분담을 하고자 하는 것이지, 민주노총과의 단절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심상정 의원이 오래 전부터 주장해 온 ‘민주노총당, 운동권 정당 극복’론이다. 그러나 이런 정경 분리는 정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자들의 경제적 힘을 사용하는 것을 삼감으로써, 노동조합의 경제주의적·부문주의적 약점을 강화시킨다는 문제점이 있다.

반면, 자민통계는 민주노총을 지배하고 싶어 한다. 이것은 현실에서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 방침을 부활시켜 진보대통합당을 만들려는 것으로 나타난다. 당이 계급을 대표하고, 따라서 대중 운동은 정당의 전달 벨트일 뿐이라는 스탈린주의적 당 개념을 보여 준다.

이런 당 개념 때문에 자민통계는 자신들 밖에 있는 노동계급 조직과 운동에 흔히 종파적 태도를 취한다. 실제로 자민통계 활동가들은 ‘정의당에 민중성과 투쟁성이 부재하다’고 비판한다. 이 말을 선거 결과와 결부시키면 정의당의 득표는 정치적 의미가 없음을 함축한다. 뒤집어 말하면 울산의 결과만이 ‘민중적’이고 ‘투쟁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정의당의 전진을 부정하는 것이자 무엇보다, 정의당에 투표한 노동자 대중을 무시하는 종파주의다. 이런 태도로는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노동자들과 진지하게 공동 행동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진보대통합당 안에는 분열 요인들이 많다

물론 많은 노동자들이 진보·좌파의 단결을 바랄 것이다. 선거에서 노동자 정당들이 분열하는 바람에 자본주의 정당들이 표를 가져가는 것을 막고 노동자들의 정치 진출을 이루고자 하는 정서는 정당하다. 2012년 총선 때 경남 창원을에서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 후보가 각각 따로 출마하는 바람에 새누리당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해 노동자들이 크게 실망한 바 있다. 이런 이유로 <노동자 연대>는 지난해 말 민주노총이 선거연합당을 제안하기 전부터 이미 그런 대응의 필요성을 주장했다.(이번 호에 실린 최일붕의 ‘진보대통합당 안에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기사를 보시오.)

선거연합당처럼 선거에서의 공동 대응 수준을 넘어 진보대통합당 안은 상시적인 정당을 지향한다. 그러나 이는 단결 촉진이 아니라 많은 분열 요인들을 안고 있다. 노동자 운동 안에 중요한 정치적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진보대통합당 안은 이런 차이를 애써 간과하고 강령적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자민통계의 역사적 전통을 봐도 그들은 서로 동의하는 구체적 요구 중심으로 투쟁을 건설하는 게 아니라 주로 자신들의 강령을 채택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의 문제점은 과거 민주노동당과 그 후신인 진보당의 분열이 보여 줬다. 갈등을 촉발시킨 날카로운 쟁점들 — 각각 일심회 당원 제명 기도와 경선 부정 문제 — 이면에는 원칙과 이데올로기의 차이가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동안 이 차이가 좁혀졌다는 증거는 없다. 따라서 북한 문제, 계급투쟁 문제, 대선에서의 야권연대와 연립 정부 문제 등이 불거지면 진보대통합당은 또다시 쓰라린 분열을 겪을 수 있다.

자민통계는 주로 패권주의를 중심으로 지난 시기의 분열을 평가하는 듯하다.(2012년 진보당 경선부정과 중앙위 폭력 사태가 성찰 항목에서 빠져 있다!) 자민통계는 패권주의를 자신들이 운동의 다수파라는 ‘숙명’에서 비롯하는 문제로 사고하는 듯하다. 그래서 조직 운영 방식 문제에 골몰한다.(《진보정치, 미안하다고 해야 할 때》에서도 이런 기술적 사고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기층 노동자 운동에서 자민통계는 다수파가 아니다. 노동조합 상근간부층 수준에서는 근소하게 다수일지 몰라도, 일선 활동가와 현장조합원 수준에서는 결코 다수파가 아니다. 2014년 12월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좌파인 한상균 후보가 이긴 일이 이를 입증한다. 총선에서도 자민통이 노동계급 다수의 지지를 얻은 게 아니다. 정의당이 훨씬 더 많은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따라서 자민통계의 다수성은 사실도 아니거니와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좌파가 다수성 자체를 문제 삼는 것도 아니다. 패권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세력이 동의하지 않고 반대하는 것을 자민통계가 자주 무리하게 추진하기 때문이다.

당장의 사례를 봐도, 민주노총에 특정 정당 지지 방침을 채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필요한 분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이 ‘정치적 중립성’을 내세워 정치적 쟁점을 회피하는 것이 좋다고 보지 않는다. 노동조합이 세월호 참사, 여성·성소수자 차별, 이주민 속죄양 삼기 등에 반대하고 행동을 조직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단결과 계급의식 향상에 크게 기여한다.

그러나 노동조합 안에는 정치적 차이들이 존재한다. 계급의식이 불균등하게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노총 안에 복수의 진보·좌파 정당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노동조합 쟁점으로 행동 통일을 이루되, 정치적으로는 먼저 다원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특정 정치 쟁점을 둘러싸고 코드가 맞을 때 비로소 공동 행동을 하는 방식이어야지, 그러지 않고 ‘진보 정당 단일화’를 요구하는 것은 커다란 분열을 낳고 원한만 깊어지게 할 것이다. 그리 되면 조직 노동자 운동이 약화될 것이다.

그래서 민주노총이 진보대통합당에 참여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그보다는 선거연합정당이 선거 시기에 노동계급의 단결을 최대화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는 진보·좌파 다원주의에 입각하면서도, 사안별로 괜찮은 입장을 취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신축성을 발휘하는 것이 좋겠다. 어느 한 정당이나 개인, 운동이 언제나 올바른 입장을 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상설연대체와 공동전선

사회주의자들은 자민통계의 또 다른 프로젝트인 상설연대체를 원칙적으로 반대하지는 않는다. 대중 운동이 활성화돼 계급의식이 고양되는 특정 시기에는 포괄적 쟁점들을 아우르는 상설연대체가 그 기능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시기가 아니다.

게다가 자민통계의 상설연대체는 자본주의 정당과의 동맹을 지향한다. 이 때문에 2005∼06년에 격론이 벌어졌고, 민주노총이 최종 불참을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한국진보연대다.

자본주의 야당들과의 동맹 정책 때문이 아니어도 상설연대체에 좌파와 민주노총이 참여할 이유는 없다. 무엇보다 각 단체의 당면 전망과 중장기 전략, 강조점, 정치 문화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민통계가 아니라 민주노총이 주도한다고 해도 이 점은 별로 바뀌지 않을 것 같다. 2013년 민주노총이 발의한 ‘민중의힘’은 그 뒤 일어난 운동들에서 실질적 도움이 되지 못해 해산될 운명에 처해 있다.

따라서 실효성도 없는 상설연대체가 아니라 제한된 특정 쟁점들을 중심으로 공동 행동을 할 수 있는 사안별 연대체가 단결에 이롭다. 실제 투쟁 경험들을 봐도 어지간한 대중 행동은 — 2008년 촛불, 용산 참사, 세월호 등 — 사안별 연대체가 주도했다.

도시 노동계급 한국 사회 변혁의 운명은 도시에 달려 있다. ⓒ사진 이미진

노농빈 동맹이냐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냐

자민통계가 말로라도 노동계급을 강조하는 것은(‘노동 중심 진보대통합’) 한국에서 계급투쟁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자민통계는 노동계급을 중시한다고 하면서도 “각계각층”을 아우를 것을 강조한다. 중간계층들이 포함된 노농빈(노동자·농민·빈민) 동맹이다.

노농빈 동맹은 자민통계가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성격과 변혁 목표와 관련 있다. 자민통계가 보기에 사회주의는 먼 미래의 문제이고, 당면 과제는 각계각층을 결집해 박근혜 정권과 냉전 우파를 물리치고 부르주아 포퓰리스트 정당과 연합정부를 구성해 “진보적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것이다. 즉, 민족주의·민주주의 변혁이 당면 과제인 것이고 그 주체는 노농빈 동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노농빈 동맹은 한국 사회의 계급 구조에 들어맞지 않는 전략이다. 한국은 대규모 도시화와 프롤레타리아화를 겪었다. 경제활동인구 중 노동계급의 비율이 압도적이다. 경제활동인구 2천6백95만 5천 명 중 임금 노동자는 71.4퍼센트인 1천9백23만 3천 명이다.(2016년 3월 통계청 자료)

반면, 한국 자본주의의 발달로 농민 계층은 극도로 수축됐다. 2015년 12월 농민 인구는 2백60만 명으로, 경제활동인구의 10퍼센트도 안 된다.(2015 농림어업총조사) 특히 고령화가 심화됐다. 70대 이상이 17퍼센트로 가장 많고, 고령 인구(65세 이상)가 38.4퍼센트다.

빈민은 대부분 도시 노동계급의 일부이며 조직된 빈민은 정치적으로 좌파적이거나 정의당 친화적이다.

요컨대, 한국 사회 변혁의 운명은 농촌이 아니라 도시에 달려 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민주노총이 비할 데 없이 감수성 있게 대처해야 하는 차별 문제는 여성·성소수자·이주민 차별 문제다. 이들에 대한 차별이 지배계급의 분열 지배 전략에서도 핵심 기제로 작동한다.

ⓒ<노동자 연대> 175호 | 발행 2016-06-01 | 입력 2016-06-01

단결이 아니라 분열을 낳을 ‘진보대통합당’ 안(案) 반대한다 1안과 2안 모두 폐기돼야 한다

민주노총의 ‘정치전략’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사실, 전략 투쟁 의제에 포함돼 있는 ‘재벌 체제’ 문제나 노동시간 단축도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다. 그런데 논란의 한복판에 있는 민주노총의 ‘정치전략’은 순전히 정당과 선거 대응 문제로 협소하게 한정돼 있다. 

민주노총 중집이 복수의 ‘정치전략’ 안을 대의원대회에 상정했다. 

  • 1안) “민주노총이 주도하고 대중조직이 함께하는 새로운 진보정당의 건설 및 기존 진보정당의 통합 추진 여부 등을 포함한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위한 정치 방침을 2017년 정기대의원대회에 제출한다.”
  • 2안)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해 노.농.빈 대중조직이 함께하는, 기존 진보정당의 통합 및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포함한 진보대통합정당 건설을 추진한다.”

2안은 애써 행간의 뜻을 파악하려고 수고할 필요도 없이 “진보대통합정당 건설 추진”을 분명하게 표방한다. 반면, 1안은 해석의 노력을 요하는 모호한 문장으로 돼 있지만, 결국 “민주노총이 주도하고 민주노총이 중심이 되는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을 시작”(1안 해설)하자는 것이다.

△ 진보대통합당 안은 지속 가능한 연합을 보장하지 못한다

2안이 ‘민주노총은 정당 건설을 향해 돌격 앞으로!’라면, 1안은 ‘신중하게 정당 건설하자’는 것으로 2안으로 가는 문을 열어 주는 안이다.

요컨대, 주도 세력, 속도, 방식 등에서 차이가 있는 듯하지만, 두 안 모두 공통되게 민주노총이 주도해 새 정당을 건설하는 방향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1안과 2안 둘 다 민주노총의 ‘정치전략’이 돼서는 안 된다.

‘진보대통합당’ 안은 본질적으로 자민통계의 프로젝트

역사적으로 노동조합이 주도해 정당을 건설한 사례는 적잖다. 영국 노동당, 브라질 노동자당(PT), 한국 민주노동당 등. 이 정당들은 처음에는 급진적인 모습을 보여 줬지만, 근본에서 개혁주의의 틀 안에 있었다.

또, 현장조합원 중심의 정당 — 즉, 현장조합원이 통제하는 정당 — 이 아니라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의 정당이었다. 그래서 이 정당들이 급진적이고 좌파적일 때조차 혁명적인 당은 되지 못했다. 민주노동당도 초기에는 급진적 모습을 띠다 2005∼06년 운동이 소강 상태로 접어들기 시작하자 급속히 개혁주의적 성격을 두드러지게 드러냈다.

그래서 민주노총 주도 새 정당 추진론자들이 아무리 “조합원들의 참여”를 내세울지라도, 본질적으로 현장조합원이 아니라 노동조합 상층 간부가 중심이 되는 개혁주의 정당의 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정당들이 개혁주의일 뿐이라며 초좌파적으로 일축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행동일 것이다. 진지한 사회주의자라면, 수많은 사람들이 잘되기를 바라고 지지하는 그 정당을 지지하는 데서 출발해 대중적으로 그 정당의 개혁주의적 한계가 입증될 때까지 참을성 있게 공동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얘기를 넘어 지금 이곳의 구체적 현실에서 민주노총 주도 새 정당 건설은 심각한 문제점을 낳을 것이다.

현재 진보대통합당 안은 기존의 진보 정당들을 통합하거나 새로운 진보 정당을 건설하는 방식을 제안한다.

2012년 통합진보당 분열 이후 진보·좌파 정치 운동은 크게 정의당계와 자민통계로 분화했다.(노동당과 변혁당 등 급진좌파 정치 세력이 또 다른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통합진보당 경선 부정과 뒤이은 당권파 지지자들의 중앙위원회 폭력 행사가 분열의 직접적 계기였지만, 심층에서는 두 세력의 상이한 원칙·전략·조직문화 등이 있었다. 특히, 경제 위기와 계급투쟁, 동아시아에서의 미중 간 제국주의적 긴장 고조와 북한 문제 등 아주 중요한 한국 정치 쟁점들에서 중대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 차이들은 여전히 해결되거나 완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래서 지난 총선 때처럼 선거 공동 대응은 하지만(선거에서 자본주의 정당 후보들이 어부지리를 얻지 못하도록 진보·좌파 정치 세력이 후보 단일화 등 공동 대응을 하는 것은 필요하다), 이전처럼 한 지붕(‘진보대통합당’) 아래에서 상시적 공동 당 운영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실제로 정의당은 아직은 진보대통합당 안에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기존 진보 정당들의 통합’은 명분에 그칠 공산이 크고, 민주노총의 새 진보 정당 건설이 실질적 목표가 될 수 있다. 그리 되면 민주노총에게 특정 정치 세력(자민통계)이 주도하는 정당을 만들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진보대통합당인가.

물론 자민통계만이 아니라 노동조합의 일부 개혁주의적 지도자들도 진보대통합당 안을 지지한다.(그런데 민중연합당 포함 문제가 둘 사이에 껄끄러운 쟁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도자들은 진보대통합당을 만들어 정계 진출 통로를 확보하고 싶어 한다.

그럼에도 진보대통합당은 본질적으로 자민통계의 프로젝트다. 자민통계는 ‘민주노총 주도 새 정당’을 통해 민주노총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고 합법성을 보장받고 싶어 한다. 또한 진보대통합당은 자민통계의 인민전선 전략을 실현하는 데서 중요한 수단이다. 인민전선은 노동계급만으로는 신자유주의와 냉전 수구 반통일 세력에 맞설 수 없으므로 중간계급과 (심지어 부르주아지 일부와도)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다. 선거에서는 자본주의 야당과 “전략적 야권연대”를 체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전략은 선거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2010년 지방선거와 2012년 총선에서 각각 민주노동당과 진보당은 야권연대를 통해 선거적 실리를 거뒀다), 기본 이해관계가 정반대인 계급 간 동맹은 노동자 투쟁의 힘을 약화시킨다. 

진보대통합당 안(案)의 문제점① 
정의당은 노동자 진보 정당 아니다?

자민통계가 ‘노동 중심 진보대통합당’ 안을 주장하는 것은 현재 “노동 중심”의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정의당을 진보 정당(또는 노동자 정당)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관련 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인데, 정의당을 지지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무시하거나 그들과의 공동 행동을 고려하지 않는 종파주의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정의당이 노동조합과 맺는 관계가 과거 민주노동당만큼 밀접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또, 정의당의 비례 후보 경선에서 노동계 리더 출신자가 후순위에 배정돼 ‘노동을 홀대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고 정의당이 노동자 정당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그 당의 당원과 투표 기반은 주로 노동계급이다. 또, 이정미 의원이 갑을오토텍 점거 파업 지원에 적극 나서 노동자들한테서 환대를 받고 있다. 얼마 전에는 사드 배치 결정을 반대해 정의당 지도부가 성주로 총출동했다.(총선 이후 높아진 정의당의 위상에 자민통계 등이 두려움과 초조감을 느끼며 무리하게 진보대통합당 안을 추진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 갑을오토텍 공장 사수 투쟁 지지 연설을 하는 정의당 이정미 의원

물론 정의당 지도부와 정책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개혁해서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에(“헌법 안의 진보”), 그 당은 “자본주의적 노동자당”(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이 한 말)이다.

정의당은 사회민주주의적 정경 분업 원칙 — 파업이나 임금 인상 등 경제적 쟁점들은 주로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다루고, 주로 선거 문제로 여겨지는 정치적 쟁점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 소속 의원들이 다루자는 것 — 에 따라 민주노총과 역할 분담을 하고자 하는 것이지, 민주노총과의 단절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정경 분리는 정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동자들의 경제적 힘을 사용하는 것을 삼감으로써, 노동조합의 경제주의적·부문주의적 약점을 강화시킨다는 문제점이 있다.

진보대통합당 안(案)의 문제점② 
노동조합의 분열 위험성

민주노총에 특정 정당 지지 방침을 채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필요한 분란을 일으킬 것이다. 물론 노동조합이 ‘정치적 중립성’을 내세워 정치적 쟁점을 회피하는 것은 좋지 않다. 노동조합이 세월호 참사, 여성·성소수자 차별, 이주민 속죄양 삼기 등에 반대하고 행동을 조직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단결과 계급의식 향상에 크게 기여한다.

그러나 노동조합 안에는 정치적 차이들이 존재한다. 계급의식이 불균등하게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노총 안에 복수의 진보·좌파 정당들이 존재한다. 즉, 원칙, 강령, 전략, 당면 전망, 전술, 정치·조직 문화, 정치적 강조점 등이 다른 세력들이 실재한다. 다시 말해, 주요한 정치 문제들에 대해 정치 조직들이 대처하는 방식이 첨예하게 다르다는 뜻이다.

이때 정치적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고 민주노총이 주도해 단일한 정당을 건설하자고 밀어붙인다면 내부에서 엄청난 분란을 낳을 것이다.

원한만 깊어지게 할 것이다. 노동조합이 조직상의 분열까지 나아가지 않을지라도 노동조합 쟁점에서 상호 협력하거나 행동 통일 하는 것이 어렵게 될 수도 있다. 과연 정당 지지 문제로 노동조합이 분열해 단결력과 투쟁력이 약화되는 것이 바람직한가.

진보대통합당이 아니라 선거연합정당

4월 총선 참패 여파에서 회복하기는커녕, 박근혜 정부의 정치 위기가 확연하다. 새누리당의 분열이 그렇게 공공연하고 격렬한 까닭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년 대선에서 정권을 잃겠다 싶은 범여권의 위기의식이 큰 탓이다.

반면, 더민주당과 국민의당의 좀스러움과 졸렬함은 눈뜨고 봐줄 수가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진보 정당이 주요 야당으로 성장해 의회에서 노동자들을 대변해 개혁을 해 주기를 바란다.

물론 자본주의 정당들에 도전하는 실로 중요한 방식은 노동현장과 거리 그리고 대학교에서 노동자들과 평범한 사람들이 벌이는 집단적 저항이다. 갑을오토텍, 성주, 이화여대에서 전개되는 투쟁들이 참으로 값지다.

그러나 언제나 모든 사람들이 투쟁하지는 않으므로, 비혁명적 시기에 변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은 대개 진보 정당을 자본주의 정당의 대안으로 여기기 쉽다.

그런데 진보대통합당 안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지속 가능한 연합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노동자들이 연합을 요구하는 기본적인 이유는, 선거에서 진보·좌파 정치 세력들이 분열해 노골적인 자본주의 정당들이 득을 보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끝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선거 시기에 노동계급의 단결을 최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느슨한 선거연합정당이다. 이 정당의 모습을 대략 그려 보면 민주노총이 주도해 만든 총선공투본을 정당 형태로 발전시킨 모습 정도일 수 있겠다. 그리고 소속된 단체들은 각각 예컨대 ○○당(정의당), ○○당(진보연대), ○○당(**당) 하는 식으로 자신들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박근혜 정부와 사용자들이 가하는 공격에 맞서 단결해 공동 행동을 조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노동계 정당들과 차별 받은 사회 집단들의 조직들이 제한된 특정 쟁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안별 연대체(공동전선)를 통해 공동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 연대> 179호 | 입력 2016-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