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정책 대대의 쟁점들 - 노동운동 ‘대표성 위기’론

2015년 노동자 투쟁에서 민중주의 vs 계급정치

김하영

우리 나라 운동에서 전통적으로 강력한 민중주의는 “각계·각층”의 동맹을 중시하고, 노동자들이 계급 고유의 이해관계를 내세우는 것을 그런 동맹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자연히 노동계급 투쟁의 결정적 중요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런 사상은 노동계급이 약화됐고 따라서 예전 같은 방식으로 싸울 수 없다고 여기는, 매우 다양한 경향들과 잘 맞물린다. ‘민주노총은 조직률이 매우 낮아 계급 대표성이 없는 데다 대공장·공공부문 조합원이 다수이므로, 조합원들의 요구를 앞세웠다가는 지배자들의 귀족노조 고립 프레임에 말려든다’는 주장도 그중 하나다. 박근혜 정부를 “독재 회귀” 심지어 “파시즘”이라고 보는 것도 계급을 가로지르는 동맹을 정당화하는 근거다.

이런 민중주의가 2015년 투쟁에 미친 좋지 않은 영향을 잘 보여 준 대표적 사례가 공무원연금 개악에 대한 태도였다. 노동운동 안에는 공무원연금 방어를 꺼리는 견해가 광범하게 퍼져 있었다. ‘민주노총이 그런 걸 방어해서 지지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노동자연대를 비롯한 일부 좌파들의 주장으로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가 4·24 총파업의 주요 요구로 포함됐지만, 많은 단체와 활동가들은 그것을 ‘공적연금 강화’로 대체하거나, ‘최저임금 1만 원’ 같은 요구를 제기하는 데 강조점을 뒀다. 이것은 자기 조합원들의 조건보다 미조직 노동자들과 전국민의 조건을 더 배려함으로써 국민적(또는 민중의) 지지를 얻겠다는 민중주의적 발상이었다.

△ 2015년 9월 23일 민주노총 총파업 집회 실질적인 파업 투쟁으로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사진 조승진

물론 ‘공적연금 강화’나 ‘최저임금 1만 원’은 중요한 요구다. 노동자연대는 이 요구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공무원연금 개악을 ‘노동자들에게 고통 전가하기’ 공격의 최전선으로 삼고 있었고, 이를 지렛대로 노동시장 구조 개악 같은 더 광범한 공격을 추진하려는 상황에서, 공무원연금 개악 문제를 사실상 회피하는 태도는 2015년 노동자 투쟁에서 심각한 약점으로 작용했다. 결국 공무원노조 이충재 집행부와 연금행동 정용건 집행위원장 등의 ‘공적연금 강화’론은 공무원연금 개악을 사실상 용인하는 배신으로 나타났고, 이는 상반기 노동자 투쟁이 하락세로 돌아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에 그들은 공무원연금 삭감분을 국민연금 강화에 사용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합의라며 정당화했는데, 국민연금 강화는 공수표에 불과하다는 우리의 경고가 결국 옳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매일노동뉴스>는 “공무원연금 삭감분을 공적연금 강화에 사용하겠다는 전제로 ‘더 내고 덜 받는’ 공무원연금법 개정안을 얻어 낸 정부는 이후 모르쇠로 일관했다”며 정부의 태도를 “먹튀”라고 요약하고 2015년 노동뉴스 16위로 뽑았다.

민중주의의 논리는 공공부문 정상화나 노동시장 구조 개악 반대 운동에도 적용됐다. 공공부문 노동조합 운동 안에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를 내세워서는 안 되고 ‘공공적’, 즉 국민적 요구에 헌신해야 한다는 주장이 널리 퍼져 있다. 이런 노선의 대표 주자 중 한 명인 철도노조 김영훈 위원장은 청년 일자리 창출이라는 명분으로 사실상 임금피크제를 수용했다. 5월 말 공무원연금 개악 이후 상반기 노동자 투쟁의 상승세가 꺾였다면, 주요 공공기관들의 임금피크제 협상과 수용은 9~10월 공공부문 투쟁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노동시장 구조 개악 문제에서는 사실상 비정규직 관련 쟁점만 부각하고자 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노동운동의 다수 지도자들이 이 쟁점으로는 국민적 공감을 얻을 수 있고 그래서 더민주당 등 주류 야당과도 협력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규직·조직 노동자들에게 해당하는 쟁점은 지키고자 아등바등할수록 노동시장 이중구조화 또는 노동계급의 분절화를 악화시켜 노동운동에 부메랑으로 돌아올 뿐’이라는 생각도 널리 퍼져 있다. 가령, ‘쉬운 해고? 비정규직은 이미 손쉽게 해고되고 있다. 통상임금 정상화? 비정규직에겐 그림의 떡일 뿐이다’는 식의 주장들을 흔히 듣다 보면, 조건 악화에 맞선 싸움이 정당한지 헛갈릴 지경이다. “조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쌓아 온 임금과 고용조건 지키기에 연연하는 ‘반대 투쟁, 저지 투쟁’을 할수록 고립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은 노동운동 우파부터 좌파까지 공유하고 있다.

민중의 호민관

어떤 사람들은 이런 주장에 ‘민중의 호민관’, ‘조직 노동자만이 아닌 계급 전체를 위한 투쟁’이라는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정서는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선의에도 불구하고) 정작 나타나는 효과는 투쟁에 나설 잠재력이 있는 조직 노동자들의 동원을 회피하는 것임을 날카롭게 직시해야 한다. 조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투쟁을 전투적으로 벌이면서 다른 노동자 부문의 투쟁을 고무해야 ‘민중의 호민관’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중주의자들은 조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조건 방어를 위해 나서는 것 자체를 해롭다고 보기 때문에, 사실상 민주노총의 총파업 성사에 큰 열의가 없었다. 그들은 그 대신에 ‘민주노총이 제대로 되지도 않는 총파업을 하기보다 전략 변화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들 자신의 투쟁과 이를 통한 의식과 조직의 성장 대신 ‘위로부터의’ 개혁을 제안하는 셈이다.

계급 정치를 일관되게 추구하지 않은 다른 대표적 사례는 총파업을 민중총궐기로 대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민중총궐기가 중요한 전진이긴 했지만 그보다 더 나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민통 계열은 2015년 초부터 11월 민중대회를 적극 추진했고, 이를 세력 회복과 총선으로 가는 디딤돌로 자리매김하려 했다. 한상균 집행부도 7월 이후 민주노총 내에서 총파업 회의론이 강화되면서 점점 더 민중총궐기에 의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2015년 초 민주노총 임원 선거 직후에는 한상균 위원장을 비롯한 신임 임원진이 ‘총파업 투쟁’을 가장 주되게 표방했기 때문에 조합원들의 지지를 얻고 당선했다는 점을 자타가 인정했다. 그래서 선거에서 ‘준비된 투쟁’을 주장했던 상대편(국민파-중앙파-전국회의 연합선본)도 초기 몇 달 동안은 총파업을 공공연히 반대하지 못했다. 그러다 공무원연금 개악 이후, 4·24 총파업을 전후해 상승하던 기세가 꺾이고 7·15 파업이 급조돼 미미한 수준에 그치자, 총파업이 효과 없고 소모적이라는 종래의 주장이 확산됐다.

총파업 할 역량이 안 된다거나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주장의 근저에는 총파업 같은 전통적 투쟁 방법이 이제 낡았다는 생각도 깔려 있었다. 가령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김태현 연구위원은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외쳤지만 위력적이지는 않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민주노총의 투쟁 형태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전투적 투쟁이 비정규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끌어올리는 선도차 역할을 담당했던 … 그 시절의 향수에 기반하고 있다. …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자본이 초국적화되고 고용이 분절되며 파편화된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전투적 투쟁이 쉽게 전면화되기는 어렵다.” 민주노총이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총파업 투쟁을 외치기보다 비정규직 조직화와 비정규직 투쟁의 근거지 구실을 전략적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직력 약화, 법제도적 제약, 비정규직 노조의 취약성 등으로 파업이 가능한 조직들이 제한돼 있다는 것도 총파업이 불가능한 이유로 언급되는 요인들이다.

사회적 연대

그러면서 흔히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 하나는 범국민적 또는 ‘사회적 연대’ 투쟁이다. 1~2년 전부터 사용되는 “국민파업”이라는 용어도 비슷한 맥락에서 등장했다. 이런 투쟁은 ‘파업이 가능한 노동자+파업이 불가능한 비정규·미조직 노동자+농민+빈민+자영업자+학생+여성 등등’이 모두 광범하게 연대한다는 점에 의미를 두지만, 계급의 경계와 파업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든다는 문제점도 동시에 안고 있다. 노동계급의 결정적 중요성은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인 공장, 병원, 학교, 교통·통신 체계 등을 멈출 수 있는 집단적 힘을 가졌다는 데 있다. 자영업자나 학생 몇만 명이 일을 안 하거나 수업에 안 들어간다고 해서 이런 효과를 내지는 못하며, 또한 노동자들 역시 집단적으로 행동하지 않고는 이런 효과를 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투쟁이 “정치” 투쟁(반박근혜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경제” 투쟁보다 우월하고, 노동자 일부가 아니라 전체, 더 나아가 민중까지 포괄하는 투쟁이므로 민주노총만의 총파업보다 우월하다고 여긴다. 지난해 있었던 세 차례의 총파업보다 11월 14일 총궐기가 훨씬 더 위력적이지 않았느냐면서 말이다. 그러나 지난해 초부터 노동시장 구조 개악에 맞선 투쟁의 시동을 걸고, 노사정 야합에 항의한 9·23 총파업 같은 투쟁들이 있었기에 11월 14일까지 분위기가 뜨면서 총궐기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조직됐던 것이다. 오히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총궐기에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총파업으로 나아가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 뒤에도 가두 시위에만 힘을 실은 결과 노동자 투쟁은 더 이룰 수도 있었던 전진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전진해야 박근혜의 ‘노동개혁’을 막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민중총궐기와 직결시켜 총파업을 조직했다면 어땠을까? 노동계급이 경제적·집단적인 힘을 사용해 실질적인 파업에 돌입했다면, 이윤을 위협하는 위력을 발휘하면서 박근혜의 노동시장 구조 개악 추진에 확실한 제동을 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박근혜를 한 방 먹이고 싶은 더 광범한 대중의 지지를 얻었을 수 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노동자들 자신이 계급투쟁의 역량을 십분 발휘했을 때 연대도 확대되고 중간계급들의 지지도 확보할 수 있다. 국민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수준으로 노동자들이 투쟁 수위를 낮춰야 연대가 확대되는 게 아니다. 일부 사람들은 “2013년 철도 파업 당시 ‘필공’ 파업을 해 국민에게 불편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철도파업이 지지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당시 철도 노동자들이 굳건히 장기간의 파업을 이어갔기 때문에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물론 필공이 아닌 전면 파업을 했더라면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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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민주노총 투쟁을 둘러싼 논쟁을 중심으로

김하영, 최일붕 지음 | 노동자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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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연대> 168호 | 발행 2016-03-02 | 입력 2016-03-02

노동운동 ‘대표성 위기’론, 어떻게 볼 것인가

김문성

민주노총은 8월 정책 대의원대회 준비 과정을 포함해 정책대대를 “조직 강화를 위한 토론 투쟁”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여러 대안들을 치열하게 검토하고 토론해 보자는 취지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노동운동의 ‘대표성 위기’ 문제도 다뤄진다. 경제 불황과 신자유주의로 조직 ‘노동계급 대표성 위기’가 심화됐고, 이 때문에 ‘사회적으로 고립된 노조 운동’이 됐다는 주장이 일각에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조직)노동운동이 고립됐다는 것을 진실로 보기 힘들다. 가령 박근혜와 지배계급 단체들이 ‘노동개혁’을 해야 일자리가 생긴다고 열띠게 홍보해 왔지만, 다수가 이 거짓말을 믿지 않는다. 우익 언론 <동아일보> 신년 여론조사에서조차 ‘박근혜의 노동개악이 일자리에 도움이 안 된다’는 답이 과반인 55퍼센트를 넘었다. 총선에선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직접 선출한 후보가 노동개악과 구조조정 저지를 공약으로 내세워 울산과 경남 창원에서 집권당 현역 의원들에게 압승을 거둔 것도 마찬가지 방증이다.

ⓒ사진 이미진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한데, 최근의 위기 담론은 노동운동의 ‘고립’을 ‘대표성의 위기’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인으로 지목되는 ‘대표성의 위기’를 살펴봐야 한다.

대표성의 위기 담론에는 이론적·실증적으로 두 가지 쟁점이 깔려 있는 듯하다. 하나는 더는 노동계급이 ‘다른 피억압 민중보다 더 힘이 있으며 사회변혁에서 중심 구실을 하는 집단’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노동계급 중심성에 대한 반대·기각’으로도 표현된다.

또 하나는 노동계급 안에서 노동조합 또는 조직 노동계급의 기여가 대단하지 않고 하찮아졌다는 것이다. 낮은 조직률이나 계급 내 격차가 커졌다는 주장이 근거로 제시된다.

두 주장은 종종 서로 결합된다. 그릇된 가정으로서, 노동조합이나 정당으로 조직된 노동계급이 노동계급 전체를 대표하는 주체로 형상화된다. 따라서 조직 노동운동이 충분하게 경제적·정치적 힘을 보여 주지 못하면 노동계급 그 자체의 힘과 주도성도 의심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나 더 고려해야 할 요소가 있는데, 노조나 정당을 매개로 조직 노동계급을 소위 대표한다는 상근 지도자들(고위 간부층)의 존재다. 이들은 개혁주의의 행위주체다.

지난 20여 년 동안 민주노조 운동 내부에서 현장 조합원과 상근간부층의 분화가 점점 더 예리하게 일어났다. 1987년 대투쟁 이후 대중적이고 전투적인 노동운동이 한국 자본주의의 주요 산업에 등장해 조직되면서 국가형태의 변화(권위주의 →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시작됐다. 그 과정에서 노동조합 활동의 보장, 저변 확대와 정치의식의 성장, 개혁주의 정당 건설 등의 정치적 전진이 있었다.

노사간 교섭 구조의 정착 등에 기초해 노동조합 안에서도 목적의식적으로, 아래로부터의 투쟁보다 협상을 전문으로 추구하는 고위 상근간부층이 형성돼 안착했다. 조직 보존주의, 협상력을 높이는 수준으로만 투쟁을 통제하는 자기제한적 보수성, 정치와 경제의 목적의식적 분리를 추구하는 경제주의·부문주의, 투쟁 대신 선거와 의회를 통한 대화와 타협을 더 중시하는 사회적 합의주의(와 이를 돕는 담론들) 등이 오늘날 노동운동 개혁주의의 주된 형태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 노조 운동의 계급 대표성 문제는 이 고위간부층이 주도하는 개혁주의 노동운동의 실천과 전략이 대표성을 제대로 구현하느냐는 문제로 볼 수 있다. (노동계급의 객관적 변화 문제와 정치적 함의들에 관해서는 <노동자 연대>에 실린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계급은 분절되고 파편화됐는가? ― 임금 격차, 노동조합, 그리고 연대”(173호) “21세기에 노동자 계급은 약화됐는가”(175호) 등이 매우 잘 다루고 있다.)

조직률

민주노총은 ’2016년 정책대의원대회 현장 토론자료’에서 “전체 노동자 대비 조직률은 한국노총 4.3%, 민주노총 3.5%, 기타 미가맹 노조 2.2% 수준임. 즉 민주노총의 3.5% 조직률로 전체 노동자를 대표한다고 주장하기 힘든 상황”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더 많은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노동조합으로 조직해 행동에 나서는 것은 좋고 필요한 일이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조직하고 행동하는 것을 통해 계급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고,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의 자력 투쟁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직률이 낮다고 해서 노동운동이 계급 대표성을 갖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노동시간 단축이나 노동개악 저지 등 노동계급 전체의 노동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법 개정(또는 개악 저지)을 위해 조직력(그리고 투쟁력)을 진지하게 동원하는 것도 계급을 대표하는 행위다.

반대로 노조 조직률이 높아도 제때 투쟁을 하지 않거나, 지도부가 배신적 타협을 하고 실망을 준다면, 노조는 계급 대표성은커녕 노조 내 대표성도 훼손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조직률이 한때 50퍼센트가 넘던 영국노총(TUC)은 1970년대 후반 노동당 정부와의 협력에 집착하다가 노동당 정부의 공격에 제대로 맞서지 못해 운동 자체가 약화됐고, 결국 대처주의 공세에 큰 타격을 입었다. 2000년대 이후 독일과 스페인에서도 노조들이 노동개악에 합의해 주고 약화됐다. 사용자의 공세와 노조의 신뢰(대표성) 추락이 조직률 하락을 낳았다.

△급진적 투쟁과 커다란 성과로 계급 대표성을 쟁취한 1987년 대투쟁. 

따라서 계급 대표성은 조직률 같은 형식적 지표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계급 전체의 이익을 위해 투쟁을 잘해서 성과를 냄으로써 쟁취해 나가는 지도력과 비슷한 개념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한국노총이 민주노총보다 조직률이 조금 더 높지만, 우파 정권에 너무 타협적인 한국노총에게 계급 대표성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이 많지 않은 이유다. 최근 곳곳에서 노조 가입 자체가 탄압받는 경우들을 봐도 조직률 향상을 위해서라도 투쟁과 성과의 문제가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직률은 간접적이고 사후적인 지표로 봐야 한다. 대표성 쟁취에서도 투쟁성이 더 중요한 것이다. 1997년 정리해고 등 노동법 날치기 철회 파업은 노조를 강화하고 대표성을 높였다. 민주노총 상근간부층의 정치세력화 프로젝트였던 민주노동당이 노동자들의 대표 정당처럼 인식된 것도 그런 경험들이 누적된 것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반면 한국노총은 2002년 민주사회당을 창당했으나 별 성과없이 2년 만에 해산했다.)

그러나 정리해고 등을 철회시킨 지 딱 1년 만에 당시 민주노총 배석범 비대위는 ‘IMF 위기 극복을 위해 고통 분담을 한다’며 제1기 노사정위원회에 들어가 정리해고 등의 도입에 합의했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즉시 이 합의를 부결시키고 당시 좌파인 단병호 비대위를 선출했으나 이 비대위 역시 굴복해, 총파업을 철회했다. 그해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다시 좌파인 이갑용 씨가 선출됐으나 관료 기구의 무사안일로 제대로 투쟁이 조직되지 않았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면서, “현장에선 좌파, 당선하면 우파”라는 냉소가 나오게 된 것이다. 2002년 발전노조 파업, 2006년 비정규직 악법 반대 파업, 2007년 이랜드 점거파업, 2009년 쌍용차 점거파업 등에서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연대 투쟁(파업)을 약속했지만 실행되지는 않았다. 이 투쟁들은 여론의 지지를 받았고, 조합원들도 그만큼 관심과 지지가 컸는데도 말이다.

이런 자기제한적 회피와 보수주의, 배신적 타협의 경험이 누적되면서 민주노총의 대표성은 미조직 노동자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자기 조합원들에게서도 조금씩 약화됐다. 계급 대표성과 제대로 된 투쟁 건설의 문제는 노조원 대 비노조원이 아니라 노조의 고위 상근간부층 대 기층 노동자라는 구도에 비춰 볼 때 더 선명하고 잘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노조 운동의 대표성 위기는 날로 강경해지는 정부와 기업주들의 공세에 맞불을 놓을 만큼 강력한 투쟁을 하는 것을 그 지도부가 꺼리는 데에 있다. 민주노총은 특히 수출 대기업들과 핵심적인 공공부문에 집중적으로 포진해 있어 잠재적 힘 자체는 강력하다고 할 수 있다. 힘이 없어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경제 위기는 기존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기 때문에 현장 노동자들의 투지를 자극하기도 하지만, 실업의 위협은 개별 노동자들의 교섭력을 약화시킨다. 따라서 이럴 때일수록 운동의 지도부가 명료한 이데올로기와 집단적 투쟁의 정치를 강조해야 한다. 그런데 지도부들의 보수주의가 그런 확신을 충분히 못 주는 상황인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장 노동자들은 반감은 있지만, 지도자들이 파업을 취소할 때 아래로부터 투쟁을 직접 건설할 자신감에까지는 아직 이르지 못한 듯하다. 그러나 지배자들의 고통전가에 대한 반감도 크기 때문에 지도부가 진지하게 투쟁을 조직할 것이라고 판단되면 투쟁 호소에 응할 태세는 돼 있다. 조선산업을 중심으로 표출되는 최근의 노동자 투쟁 분위기는 적어도 현장의 투지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님을 보여 준다.

결국 대표성이 의심받는 것은, 제대로 싸워서 정부와 기업주들의 공세를 좌절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정한 조직률이 대표돼야 노조가 명분과 힘을 가지고 정권과 자본에 무엇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은 상황을 거꾸로 보는 것이다.

아무리 여론의 지지와 사회적 명분이 노동운동에 있어도 정부와 기업주들은 대놓고 무시하기도 한다.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 악법, 미국산 쇠고기 수입, 진주의료원 폐쇄,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드 배치 등은 명분과 여론의 지지가 있어서 정부들이 강행했던 게 아니다. 총선에서 참패하고도 박근혜가 성과연봉제 도입이나 노동개악 강행을 추진하겠다고 설치는 걸 보라. 경제 위기 때문에 기업주들이 노동자를 공격해 이윤을 만회하려 애쓰고, 제국주의 간 갈등이 고조돼 대외적 압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국가가 이렇게 나올수록 그에 맞선 실질적인 압력이 아래로부터 가해져야 한다. 조직률 높이기보다 얼마나 실질적으로 투쟁에 힘쓰냐가 훨씬 더 먼저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계급 내 격차와 투쟁

대표성 위기와 관련해 노동계급 분절을 강조하는 주장도 있다. 그런 주장의 요지는 이렇다. ‘노동계급 내부 격차가 커져서 이제는 하나의 계급으로 부르기도 힘들 정도다. 애초에 가입하기 쉽거나 상대적으로 지불 능력이 있어 노조를 허용할 수 있는 기업에 주로 노조가 있다. 그 노조는 자기 조합원 이익만 챙긴다. 따라서 기존 노조는 대표성이 없고, 굳이 미조직 노동자들이 민주노총에 가입할 이유도 없다.’

이런 분절론을 받아들이면 개별 노동조합의 경제투쟁 자체를 문제 삼는 길로 가기 십상이다.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따내는 것은 계급 내부 격차만 더 벌릴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논리적 결론은 노동자들이 투쟁을 자제하고 자기 임금 늘리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이는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보수성과 투쟁 회피주의가 낳은 문제점을 더한층의 개혁주의로 해결하자는 퇴행적 해법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경험에 의해 반증된다. 노동조합 운동의 존재가 미조직 노동자를 포함한 전반적 임금 인상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는 많다. “한국에서 최소한 제조업 부문에서는 노동조합의 존재가 같은 사업체에서 일하는 근로자들 사이의 임금불평등과 노조 사업체 간에 임금불평등을 줄이는 효과가 있으며 산업 전체적으로도 임금불평등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다.” (강승복·박철성 2014, <임금분산에 대한 노동조합의 효과: 제조업을 중심으로>)

따라서 사회적 고립을 피한답시고 조직 노동계급이 고유의 투쟁 방식을 자제하고 자기 이익을 희생해야 한다고 보는 것은 계급 전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경제 위기 시대에 비용(특히 임금비용) 절감에 혈안이 된 기업주들은 양보하지 않으면 더 큰 손해를 본다는 생각이 들기 전까지 쉽게 양보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투쟁을 수줍어하고 회피해 자기 이익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투지와 사기는 떨어질 것이다. 다른 노동자들을 자극·고무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이익도 제대로 못 지키는 노조나 자기 이익만 겨우 지키는 노조, 그 어떤 경우도 계급 대표성을 높이기가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지배계급이나 중간계급 친화적 사상들이 사기가 떨어진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조직 노동운동을 고립시키기가 쉬워진다.

지난해 공무원연금 개악 반대 투쟁 때 이충재 당시 공무원노조 집행부가 공무원연금 개악 반대를 회피하고 급기야 포기하면서 노동개악 저지 전선(노동계급) 전체에 불리한 환경을 조성하고 운동 내 분열만 커진 일이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이익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투쟁으로는 계급 대표성도 높일 수 없다. ⓒ사진 이미진

한편, 이런 분절론과 양보론에는 노동자 상당수가 스스로는 임금 인상, 고용 안정 등을 쟁취하기 어렵다는 가정도 깔려 있다. 이처럼 노동자들 스스로 자기 처지를 개선하기 어렵다고 보는 비관주의는 편협한 부문주의를 강화한다.

이런 위험들을 피하려면, 노동자들이 자기 이익을 지키는 투쟁을 하는 것과 협소한 부문주의를 구분해야 한다. 자기 이익을 지킬 줄 아는 노동자들의 자신감이야말로 계급 전체가 수행해야 할 정치투쟁의 중요한 자산이다.

문제는 노동조합 자체가 부문에 기초한 조직인데다가, 일상적 시기에 노조 운동을 지배하는 것이 개혁주의이므로 노동자들이 경제투쟁을 잘 수행하면서 그것이 더한층의 정치의식과 계급적 연대 투쟁으로 나아가도록 하려면 모종의 의식적 개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좌파의 책임이 있다.

안타깝게도 최근 많은 좌파들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경원시하거나 임금체계나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같은 투쟁에 별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재벌개혁이나 최저임금 문제를 강조해 왔다. 이는 노동계급의 이익이라는 관점에 기초하지 않고, 노동계급을 민중(다양한 피억압 계급들)의 한 부분으로만 여기는 민중주의 전략과 타협하는 것으로, 좌파로서는 일종의 후퇴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중요성은 노동계급만이 자신의 이익과 사회의 보편적 이익을 일치시킬 수 있는 계급이라는 데에 있다.

정리하면, 조직 노동운동은 지금 고립돼 있지 않다. 노동계급의 잠재적·객관적 힘은 여전히 강력하다. 그러나 개혁주의 지도부의 자기제한적 정치가 효과적 투쟁을 제약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약점을 극복하려면 노동운동에는 혁명적 정치와 효과적인 전략·전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운동 안에서 구현하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는 사회주의 조직이 필요하다.

 
 
 
ⓒ<노동자 연대> 178호 | 발행 2016-07-16 | 입력 2016-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