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단축 운동의 쟁점들

김하영

민주노총 지도부는 장기적인 “전략투쟁 의제”의 하나로 노동시간 단축(주35시간 법정 노동시간 단축)을 내놓고, 이를 정책대의원대회(8월 22~23일)에서 토론할 예정이다. 여전히 세계 최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한국 노동자들에게 노동시간 단축은 무엇보다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노동운동 안에는 노동시간 단축을 둘러싼 여러 혼란이 있어 왔다. 이 글에서는 그런 쟁점들을 살펴보고,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조합 투사들이 이 문제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지를 다룰 것이다.

더 늘어난 노동시간

한국의 노동시간이 지나치게 길다는 것은 말할 나위 없다. 언제나 한국의 노동시간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실노동시간이 너무 느리게 줄어드는 게 문제였다면, 2012년경부터 노동시간 감소가 멈추고 심지어 증가 조짐마저 보이고 있는 것이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를 보면, 한국 노동자들의 연간 노동시간은 2013년 2천2백1시간에서 2014년 2천2백40시간으로 39시간 늘어났다. OECD통계를 봐도, 2013년 2천79시간에서 2014년 2천1백24시간으로 45시간 증가했다.

2014년 우리 나라 노동자 5명당 1명이 법정 초과근로 한도인 주52시간보다 더 오래 일했다(19퍼센트, 357만 명). 이는 2013년보다 35만 명이나 늘어난 수치다(17.9퍼센트, 325만 명).

한국 노동자들의 연간 노동시간은 OECD회원국 중 멕시코 다음으로 긴 2위이고, OECD 평균인 1천7백70시간에 비해 3백50여 시간이나 더 길다. OECD 회원국 가운데 노동시간이 2천 시간이 넘는 나라는 2015년 통계로 멕시코, 한국, 그리스뿐이다.

그러나 사무직 노동자들을 비롯해 많은 노동자들의 연장 노동시간이 통계에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엄청난 노동시간조차 과소평가된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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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지만 감소 추세이던 노동시간은 왜 지금 제자리걸음이거나 심지어 늘어나기 시작한 것일까?

1987년 이후 연간 3천 시간에 육박하는 노동시간을 줄이려는 노동자들의 열망에 직면한 정부와 기업주들은 생산성 증대를 대가로 노동시간 단축을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나치게 긴 노동시간을 지속하다간 생산성을 높일 수 없고 노동력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그들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약속한 만큼 노동시간을 줄인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경제 위기가 장기화하고 국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노동생산성 증대만으로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를 알기에 자본가들은 장시간 노동체제를 연장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노동시간을 늘려 착취율을 증가시킴으로써 이윤을 늘리는 방식은 흔히 산업화 초기에나 어울리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미국의 노동시간은 1970년대 중반 경제 위기 이후 증가했다. 1990년대 주35시간 노동제를 도입한 독일도 2000년대 중반 주40시간에 육박하는 수준으로 노동시간이 늘어났다. 유럽연합은 2000년대 중반에 회원국들의 반대로 평균 노동시간을 주48시간으로 제한하는 것조차 결정하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 - 노동일” 부분에서 공장주들이 법정노동시간을 넘어선 초과노동을 강요하고 식사시간과 휴게시간조차 훔쳐 노동시간을 늘리려는 것을 비난하면서, “1분 1초가 수익의 요소인 것”이라고 썼다. 격언대로 “시간이 돈”인 것이다.

지금 한국의 기업주들과 정부가 노동개악을 통해 하려는 일 하나가 바로 이런 것이다. 즉, 입으로는 “노동시간 단축”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연장 근로시간 한도를 늘리고 그 수당을 깎으려 한다.

노동시간에 관한 새누리당 개정안은 주12시간으로 제한된 현행 연장근로 한도를 20시간으로 늘려, 법정 근로시간 한도를 주52시간에서 주60시간(주40시간 + 연장근로 20시간)으로 연장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꼬박 10시간씩 노동자들을 일 시킬 수 있다. 또, 휴일 노동에 대한 가산수당도 삭제했다.

고용노동부는 법정 근로시간 한도를 주 52시간으로 하되 추가로 근로시간을 8시간 연장할 수 있는 ‘특별연장근로’를 허용하는 안을 내놨다(2015년). 결국 노동시간을 새누리당 안과 똑같이 주60시간까지 연장시키는 것이다. 조삼모사다.

유연 근무 ─ 시간은 누구의 것인가?

그러면, 박근혜 정부는 도대체 어떻게 노동시간 단축을 하겠다는 것인가? 기상천외하게도, 단시간 노동자(시간제 일자리)를 늘려 노동시간을 단축하겠다고 한다. 단시간 노동자가 늘면 전일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단축되지 않아도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 줄어들게 된다.

모든 노동자들이 일을 덜 하고 좀 더 나은 삶을 누리게 되길 바라는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저들의 셈법을 이해하기 힘들다. 하기야 주52시간 법정 노동시간 한도 외에도 휴일근로(최장 16시간)를 더 시키기 위해 “1주는 5일”이라고 해석하는 자들 아닌가.

이는 《자본론》의 노동일 부분에서 마르크스가 비난하는 자본가들의 파렴치함과 흡사하다. 당시 자본가들은 10시간 노동제에 반대해 12~15시간 노동이 노동자의 열망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노동자들을 점심식사 시간 없이 10시간(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연속 일 시키기 위해 아침 9시 이전과 저녁 7시 이후에 식사 시간을 줬다. 그러면서 이렇게 반문했다. “노동자들이 아침 9시 이전에 점심을 먹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시간선택제 같은 유연 근무 제도는 ‘유연한 인력 활용’을 위한 기업의 ‘선택’권만 강화한다. ⓒ사진 조승진

박근혜 정부가 시간제는 양질의 일자리이고, 유연 근무는 노동자의 ‘일과 가정의 양립’ 또는 ‘일과 삶의 조화’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에 못지 않은 궤변이다.

주로 여성인 단시간 노동자들은 적은 임금으로 생계(현재와 노후 모두)를 유지해야 해 빈곤층으로 내몰리기 십상이다. 게다가 유연한 근무 배치를 결정하는 것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기업 측이어서, 단시간 노동자들은 자기 시간을 관리하기가 더 어렵다.

노동운동 내에서조차 유연 근무가 노동자의 “시간주권”을 확보하는 방안이라거나 “대중의 다양성에 대한 욕구”를 반영한 것이라는 착각이 있다. 기업의 “시간 욕구”와 노동자의 “시간 욕구”를 조화시킬 수 있다고 기대하면서 말이다.

착각

그러나 노동시간 ‘유연성’이라는 말은 사용자와 노동자에게 서로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노동자들은 직장 일을 하면서 자녀를 돌보고 괜찮은 가정 생활을 꾸릴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러나 기업주들에게 ‘유연성’은 기업 효율에 따른 노동 배치, 장시간 노동과 야간 노동 도입, 복잡한 교대제, 더 적은 휴가 등을 뜻한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자녀를 돌보고 가정을 꾸리기 더 어렵게 만든다.

최근 시카고대학교 연구에 따르면, 26~32세 시간제 노동자의 40퍼센트 이상이 근무시간 변동을 일주일 전이나 심지어 그보다 더 임박해서 통보받았다. 근무 스케줄 통보를 최대한 늦추면 기업은 인력의 필요에 따라 고용을 조정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육아나 다른 일을 계획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유연근무제를 연구하는 수잔 램버트는 예측할 수 없는 업무 배치가 “노동자의 삶에 커다란 불안 요소가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부 연구기관인 한국여성정책연구원조차 기업들은 업무변동량에 따른 인력운용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단시간 노동을 활용하므로 “근로자 친화적 유연근무제도 확산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기업의 유연근무제도 확산 방안’).

유연 근로제 가운데 많이 활용되는 것이 탄력적 근로시간제인데, 일이 많을 때는 노동시간을 늘리고 일이 없을 때는 노동시간을 줄이면서 평균 노동시간을 법정 노동시간 내로 맞추는 것이다. 정부와 기업주들은 그 운영 단위기간을 수개월 심지어 1년으로 늘려 유연성을 극대화하려 한다. 그러면, 기업주들은 필요할 때는 언제든 노동자들을 오래 일 시키면서 추가적 수당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유연 근로제는 그 이름에 “탄력”, “선택”, “재량” 같은 낱말이 포함돼 있을지라도 결코 노동자의 처지에서 “탄력”적인 것도 아니고, 노동자에게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노동자의 “재량”에 맡겨지는 것도 아니다.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시간 단축 운동은 무의미한가?

지금 정부와 기업주들은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틀린) 이름으로 노동시간 연장과 유연화를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철저하게 자본의 필요에 따라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늘렸다 줄였다 하고, 근무형태와 노동시간 배치를 바꿀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다양한 교대제로 노동자들을 돌리고, 짜투리 시간을 메우기 위해 단시간 노동을 도입하고, 야간노동과 주말노동을 강요하려 한다.

엥겔스가 말했듯이, 기업주들은 “아직 한 조각의 근육, 한 가닥의 힘줄, 한 방울의 피라도 남아 있는 한” 결코 노동자를 자유롭게 놓아주지 않는다.

혹사당하는 장시간 노동과 원치 않는 단시간 고용이 공존하는 상황을 바꾸려면 노동시간 단축이 필요하다. ⓒ사진 이미진

여기서 분명하게 알아야 할 점은, 노동시간 유연화가 ‘노동시간 단축’과 한 쌍이기는커녕 장시간 노동체제의 유지 속에서 추진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놓치면 여러 혼란을 겪을 수 있다.

가령 노동운동의 어떤 활동가들은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시간 단축이 노동시간 유연화의 보완물일 뿐이라며 노동시간 단축 운동을 반대한다. 노동시간 단축 운동은 소용없을 뿐 아니라 노동권을 공격하려는 자본에게 이용당하게 될 뿐이라고 한다.

그러나 시간제 일자리 증가를 통해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 줄어든 것을 두고 ‘노동시간 단축’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거기에 수식어를 붙여 “신자유주의적 노동시간 단축”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신자유주의는 유연화를 위해 노동시간 단축을 (미끼로) 내주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한편에서는 전일제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원치 않는 단시간 고용과 실업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게 신자유주의 하의 양상이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노동시간 단축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그 어느 때보다 선명히 드러낸다. 왜 누구는 장시간 노동으로 고통받고 누구는 실업으로 고통받아야 하는가?

비관론

2천 시간이 넘는 세계 최장 노동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점이 신자유주의 하에서라고 달라질 이유는 없다. 노동시간 단축은 한국 노동자들의 진정한 염원이다.

한국 노동자들은 장시간 노동으로 심혈관계 질환, 근골격계 질환, 각종 정신질환에 노출돼 있고, 산재 사망에 이르는 숫자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가족이나 친구와 일치하지 않는 근무 스케줄로 사회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 정치 활동을 하기는 극도로 어렵다. 질병에 걸리기 전이라도 너무 피곤해 말도 하기 싫은 상태에 흔히 빠지고, 주변을 돌볼 여유가 없고, 가족과도 멀어지고, 삶이 망가지고 있다는 걸 누구나 느낀다.

‘노동시간 단축’이 정부의 기만적 정책이라거나 개혁주의자들의 수세적 전술이라는 점을 먼저 보기보다 그것이 노동자들의 염원이라는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기만적 정책이라는 이유로, 수세적 전술이라는 이유로 노동시간 단축 운동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다.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노동시간 단축이 유연화와 교환된다고 보는 것도 여러 점에서 부정확한 지적이다.

어떤 점에서 보면 기업주들은 노동시간이 단축될 때마다 갖은 방법으로 늘 그 효과를 물타기 하려 했다. 그 결과 탈법이 자행되거나 노동강도가 강화되거나 근무배치를 유연화하는 일 등이 벌어졌다.

다시 《자본론》을 인용하자면, 공장주들은 1840년대 공장법 작동을 훼손하기 위해 공장시계를 조작해 노동시간을 추가로 만들어 냈다(당시에 노동자들에게 시계가 없는 것을 이용해). 또, 작업 시간을 자투리로 조각냄으로써 노동자들을 자투리 시간대에 맞춰 이리저리 몰고 다녔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마치 무대 위에서 여러 장면에 잠깐씩 등장하는 배우들처럼 실제로 작업하는 시간은 10시간인데도 15시간 동안 꼬박 묶여 있어야 했다. 이보다 더한 유연 근무가 어디 있는가?

예나 지금이나 노동시간 단축의 대가를 누가 치를 것인가는 자본과 노동의 힘 겨루기를 통해 정해질 수밖에 없다. 힘 겨루기 결과 노동강도나 유연화가 강화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예정돼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그 투쟁이 왜 그렇게 됐는지 구체적으로 평가하고 교훈을 얻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그것이 불가피하다는 식으로 여기면, 비관론의 나락으로 떨어질 뿐 아니라 투쟁이 그렇게 미끌어지는 데 책임이 있는 사람들(가장 온건한 개혁주의자들)에게 의도치 않게 면죄부를 주게 된다.

임금 손실과 노동강도 강화가 없어야 하는 이유

일자리 면에서 봤을 때도 노동시간 단축은 어느 때보다 호소력이 있다. 인력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청년 실업률이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으니 말이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줄이면 많은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 주52시간 상한제만 적용해도 62만4천 개~1백8만 2천 개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계산도 있다(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상임연구원).

임금과 노동조건 악화가 없어야 실노동시간 단축 효과를 낼 수 있다. ⓒ사진 이윤선

그러나 한국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의 고통을 덜고 그 효과로 일자리도 창출되려면, 임금 수준이 보존되고 노동강도가 강화되지 않아야 한다.

줄어든 노동시간만큼 임금이 삭감되면 노동자들은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보완 수단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연장근로에 의존하거나 ‘투잡’을 뛰어 노동시간이 되레 늘 수 있다. 이럴 경우 노동자들의 건강과 삶의 질은 개선되기 어렵고, 일자리도 창출될 수 없다.

노동강도도 마찬가지 효과를 낸다. 노동시간이 줄어든 대신 노동강도가 강화돼 기존 물량을 보존한다면, 노동자들의 피로도는 급격히 증가할 수 있다. 강도 높은 노동을 하면 몸이 회복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려 휴식 시간도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기 어렵다. 녹초가 될수록 TV 틀고 리모콘과 씨름할 뿐 운동이나 야외활동 같은 질 좋은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 기존 노동자들의 노동강도를 강화해 물량을 소화하므로 일자리 창출 효과도 없다.

이처럼 임금과 노동강도 문제는 매우 명백하지만,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비용을 누가 치를 것인가를 둘러싸고 자본과 노동 사이에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는 쟁점이니만큼 운동 속 논란도 많다.

담합?

가령 임금 보존 문제는 여러 측면에서 공격을 받고 있는데, 초과근로 할증 문제가 대표적 사례다. 정부기관이나 기업 연구소 연구자들과 학자들은 장시간 근로체제가 유지되는 것에 노동자들도 큰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노사 간 ‘담합’이 장시간 노동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노동운동 안에도 이런 주장을 그대로 따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런 사람들은 주40시간으로 법정 노동시간이 단축된 뒤에도 실노동시간이 줄지 않은 것은 노동자들이 수당을 노리고 연장근로를 해 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임금 ‘욕심’을 부리며 초과근로를 택해 온 결과 법정 노동시간 단축은 임금 인상의 수단이 됐고, 남의 일자리를 빼앗는 효과만을 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담합’ 해소의 방안 하나로 초과근로 할증률 인하가 제안되기도 한다. 사실, 초과근로 할증률 인하는 기업주들의 오랜 바람이다. 그들은 휴일근로 가산 수당을 폐지하고 싶어 할 뿐 아니라 연장근로 할증을 현행 50퍼센트에서 25퍼센트 수준으로 낮추고 싶어 한다. 이것이 (노동자들의 초과근로를 자제시키기 위한 조치가 아니라) 기업주들이 초과근로를 더 많이 더 싸게 활용하려는 조치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더 나아가, ‘담합’론은 “임금에 연연하지 말고 노동시간 단축을 해야 한다”는 임금 양보 논리로 이어지기 쉽다. 실제로 ‘담합’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기초해 “노동자, 사용자, 정부가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비용을 1/3씩 부담하는 방안”이 노동운동 내에서 제안된 바 있다(민주노총, ‘실노동시간단축의 올바른 방향과노동조합의 과제’).

폭스바겐 모델은 노동연대가 아니라 노사협력 모델일 뿐이다

임금 양보론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연대 방안’을 통해 훨씬 체계적으로 제안돼 왔다. 금속노조와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등이 폭스바겐 모델을 따른 방안을 노동운동 안에서 꾸준히 제안해 왔다.

폭스바겐 모델(1993년 ‘고용안정과 경쟁력 강화를 위한 노사협약’)은 경영 위기 상황에서 인력을 감축하지 않고 근무시간을 단축하면서 고용을 유지한 모델로 잘 알려져 있다. 고용 유지를 위해 주36시간 근무를 주28.8시간으로 20퍼센트 단축하고, 인건비를 단계별로 총 20퍼센트 삭감했다. 초과근로 시에는 수당 대신 휴가로 대체했고, 경영상 필요 시 전환 배치, 직무이동, 작업조직 개편도 할 수 있게 됐다. 이때 무려 68개의 교대제가 시행됐고, 야간노동과 3교대제도 정착됐다.

당시에 추진된 근무시간 단축은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향상이 아니라, 조업 단축(또는 단축 근로)을 통한 허리띠 졸라매기(임금 삭감)였다. 둘을 뒤섞어서는 안 된다.

요컨대 폭스바겐 ‘모델’은 위기에 처한 회사가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노동조합이 임금삭감과 유연화를 수용한 노사협력 ‘모델’이었다. 이것은 폭스바겐이 경영 위기를 극복하게 해줬지만, 노동자들의 처지는 전혀 나아지지 못했다.

첫째, 독일 전체 차원에서 벌어진 일로, ‘하르츠 개혁’의 결과가 노동자들에게 미친 영향을 보면 폭스바겐 모델의 실체를 잘 알 수 있다. 하르츠는 폭스바겐 모델 협약 당시 이 회사의 노동이사로, 나중에 폭스바겐 모델의 확대판인 독일 노동개혁을 이끈 인물이다. ‘하르츠 개혁’이 시행되면서 독일은 저임금 시간제 일자리와 하도급 일자리가 대폭 늘었다. 그렇다고 장기 실업이 낮아지지도 않았다.

하르츠 개혁은 박근혜가 한국 경제가 좇아야 할 모델로 추켜 세운 덕분에 한국 노동운동 내에 그 문제점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그 기초가 된 폭스바겐 모델이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는 주장이 여전히 나오고 있다니 의아할 뿐이다.

하르츠

둘째, 유럽과 국제 자동차 기업 전체에 미친 영향을 보아도 폭스바겐 모델의 실체를 알 수 있다. 폭스바겐이 도입한 임금 삭감과 “내적 유연화”(경기에 따라 기업이 노동시간을 늘리고 줄이도록 하는 것)와 3교대제 등은 유럽의 다른 자동차 공장에 노동조건 하락 압박을 가했다.

이제 공장이 폐쇄돼 해고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누구나 임금삭감과 노동시간 유연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듯했다. 기업들은 이를 교활하게 이용했다.

예를 들어, GM 같은 세계적 자동차 회사는 유럽의 생산을 감축할 예정이라고 발표하고는, 정확히 어느 나라 공장이 그 대상이 될지 밝히지 않은 채 어떤 노조가 노동조건 저하 제안을 해 올지 지켜보는 식이었다. 2012년 GM이 이런 자세를 취하자 영국의 복스홀(엘스미어 포트) 노조가 ‘폭스바겐 모델’과 흡사한 내용을 제안하면서 GM의 투자를 끌어냈다. 그러자 세계의 주요 기업주 언론들은 입을 모아, 완고하던 영국의 노조가 유연한 자세로 일자리를 만들어 냈다고 칭찬을 쏟아냈다.

이처럼 노동자들 사이에서 ‘바닥을 향한 경쟁’을 부추기는 모델을 ‘노동 연대’, ‘일자리 연대’ 방안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폭스바겐에서 시작된 “내적 유연화”를 호의적으로 소개한 박명준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이것이 “자본과 노동 간의 연대라고 하는 함의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더 정확한 규정일 것이다.

“내적 유연성의 강화는 … 위기 돌파 기법 … 사회적 연대를 증진하는 방안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적 연대에 대한 정의는 다양할 수 있겠지만, 필자는 여기에서 내적 유연성의 강화는 자본과 노동 간의 연대라고 하는 함의가 있다고 본다.”(박명준, ‘일자리 나누기와 노동 연대’, 《우리는 한배를 타고 있다》)

기업과 자본주의를 위기에서 구출해 내기 위해 노동자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폭스바겐 모델은 결코 노동자들의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사회협약을 통한 이와 같은 양보는 경제 위기 시기에 노동자들의 조건을 지켜야 할 노동조합 운동을 무장해제시킬 뿐이다.

노동시간 단축 운동이 분명히 해야 할 것들

민주노총 지도부는 전략투쟁 의제로 노동시간 단축을 제시하면서 그 세부 내용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봤듯이 노동시간 단축을 둘러싼 노동운동 내 논란들을 보면, 효과적인 운동 건설을 위해서 분명히 해야 할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다.(위의 주장들을 반복하지는 않겠다.)

가령 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분명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최근에는 임금 보존을 대체로 지지하면서도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의 관계 설정을 주로 최저임금 현실화에만 맞추는 주장도 있다. 이것은 임금 수준이 괜찮은 노동자들의 임금 보존 문제는 의도치 않게 회피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임금 손실이 없어야 한다는 점을 일관되고 단호하게 옹호해야 한다.

또, 일자리 대안과 연동된 양보론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문제를 연결시키지 않는 게 낫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 노동자들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다른 한편에서 고용불안과 실업이 증대하는 지금은 어느 때보다 노동시간 단축 요구가 설득력 있고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궈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심각한 모순을 폭로하면서, 임금 양보가 아니라 조건 악화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이뤄야 그 효과로서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대담하게 주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시간 단축이 노동자 분할과 격차 증대만을 가져왔다거나 대기업 정규직의 이익에만 부합한다는 주장을 절반쯤 받아들여서는 노동시간 단축 운동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어렵다. 이런 주장이 온건한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이 임금과 노동강도와 유연성 강화에 타협하는 것에 대한 반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결과의 반복을 바라지 않는다면, 운동에 뒷짐 지지 말고 뛰어들어 운동이 노동자에게 득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애쓰는 것이 올바른 접근법일 것이다.

ⓒ<노동자 연대> 179호 | 발행 2016-08-17 | 입력 2016-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