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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의 일본은 어디로 ―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①:
평화헌법 형성과 함께 뿌려진 재앙의 씨앗

최근 동중국해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에서 중국 전투기가 접근하고, 이에 대해 일본 자위대가 “경고 사격”을 공언하는 등 동아시아의 긴장과 갈등이 갈수록 격화하면서 심각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총리 아베 신조는 재무장과 우경화에 가속도를 내고 있다. 두 차례의 연재를 통해 1) 평화헌법이 형성된 배경과 모순 2)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된 일본의 군국주의화에 대해 살펴본다.

아베와 일본 우익들이 개정하려는 헌법은 1946년, 제2차세계대전 직후 미군에 의해 제정된 이른바 ‘평화’헌법이다. 이 헌법 9조에 따르면 일본은 전쟁을 벌일 수도, 이를 위해 전력을 가질 수도 없다.

그런데 모순이게도 “현행 헌법의 ‘무장금지’ 조항에도 불구하고, [일본에는] 자위대와 주일미군이라는 실질적 전력과 무장이 존재한다. 자위대와 현행 헌법이 기묘하게 ‘동거’하고 있는 것”이다.(성공회대 권혁태 교수)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이를 설명하려면 이 헌법이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형성됐고, 그 모순은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한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일본을 점령하게 된 미국은 일본을 자신의 똘마니로 삼고자 했다. 연합군 총사령관으로 일본에 온 맥아더는 이를 위해 천황제를 그대로 두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주일미군 헌법 9조는 주일미군이라는 거대한 군사력이 일본을 지켜줬기 때문에 유지될 수 있었다. ⓒ사진 출처 Daniel Ewer (플리커)

이런 방식은 미국에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비슷한 시기 미국은 해방된 조선에서도 친일 세력을, 독일에서는 나치를 적극 활용했다.

그래서 “맥아더는 천황의 측근까지도 진지하게 제기한 퇴위 문제를 비밀리에 기각하면서 새로운 민주주의의 지도자는 다름 아닌 천황이라는 공공연한 찬사를 늘어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것은 “맥아더 장군과 측근들이 천황의 전쟁 책임, 나아가 그의 이름으로 잔혹한 전쟁이 치러지는 것을 수수방관한 도덕적 책임까지도 면제해 주기로 결단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존 다우어, 《패배를 껴안고》)

전범으로 기소될 처지였던 일왕은 기꺼이 미국의 점령 정책을 도울 태세가 돼 있었다.

그런데, “천황제 중심의 국가체제를 회복하려면 불과 얼마 전까지 천황의 이름으로 움직인 군대 때문에 고통받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 일본이 다시는 아시아에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 보장해 주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그리하여 [새 헌법의] 천황과 관련된 1조부터 8조까지의 조항에는 국가적 평화주의 선언인 9조가 필요했다.”(개번 매코맥, 《종속국가 일본》)

즉, 헌법 9조는 주변국을 안심시켜 천황제를 유지하기 위한 꼼수였다.

이렇듯 ‘평화’헌법은 전범인 일왕을 “일본의 상징”으로 규정해 놓음과 동시에 ‘평화주의’를 선언하고 있었다. 개번 매코맥 교수의 지적처럼, 이 헌법은 “매끈한 일체가 아니라 서로 연관된 한묶음의 모순들을 한데 합쳐 놓은 것”이었다.

미국과 일본 지배자들 모두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9조의 ‘평화’ 조항을 고치고 싶어 했다. 이것은 전후 냉전체제의 형성과 관련이 있다.

1945~46년 초까지만 해도 미국은 일본을 단지 미국에 순종하는 작은 나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중국에서 국민당 장제스가 패색이 짙어지자 아시아에서 일본의 전략적 중요성은 매우 커졌다. 1949년 소련의 핵실험 성공은 미국을 더 다급하게 만들었다. 일본은 중국을 대신해 미국의 아시아 진출을 위한 핵심 동맹이자 병참기지로서의 구실을 담당해야 했다.

미국은 점령 정책의 방향을 “강력한 일본 정부를 육성”하는 것으로 전환했다(이른바 ‘역코스 전략’). 미국은 일본을 “극동의 공장”으로 재건하려고 힘을 쏟고, 신속히 무장시키기 시작했다.

“점령군이 추진해 온 재벌해체·경제집중 배제·배상징수와 노동기본법의 용인 등의 비군사화, 민주화 정책은 중지되고 경제부흥·배상중지·경찰력의 강화·국가 및 지방 공무원의 단체교섭권·쟁의권의 부인 등 반공의 방파제로써 일본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전환된 것이다.”(우에하라 카즈요시 외, 《동아시아 근현대사》)

한국전쟁 중에도 일본은 미국의 후방 병참기지 구실을 했다. 이것은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요충지로서 중요하다는 인식을 한층 부각시켰다.

미국은 일본에 (장차 자위대로 발전할) 경찰예비대 창설을 요구하며 무장을 촉구했다. 전쟁 책임자들은 대거 사면됐다. 아베 신조의 외조부인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도 이때 수혜를 받았다. 구일본군 장교들이 경찰예비대에 다시 들어가게 됐다.

미일 안보 동맹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대일강화조약)이 일본에게 비교적 관대한 내용으로 채워진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일본 지배자들은 이런 미국의 움직임에 한껏 편승했다.

이렇듯, 헌법 9조는 처음부터 모순을 품고 있었고, 미국의 ‘역코스 전략’에 따라 그 모순은 더 커졌다.

무엇보다 핵심적인 모순은 주일미군의 존재였다. 1951년 미국은 미일안보조약을 통해 일본에 계속 주둔할 수 있게 됐다. 일본 지배자들은 ‘주일미군은 헌법이 금지한 무장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궤변으로 주일미군의 존재를 정당화했다.

특히 미국은 1972년까지 오키나와를 직접 지배하면서 이곳을 주일미군의 집결지로 바꿔 놨다. 이 과정에서 오키나와 주민들이 겪은 엄청난 고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일본 지배자들은 일찌감치 헌법 9조를 없애 헌법과 현실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또다시 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일본의 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이런 시도에 거세게 반발했다. “정복자[미군]의 명령이라는 그리 유망하지 않은 기원에서 출발했을망정 지금까지 그것을 개정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그래서 20세기까지 실제로 이를 밀어붙인 총리는 없었다. 이들은 그것을 정치적 자살행위라고 여겼다. 일본 지배자들은 대개 자국의 안보를 미국에 맡기고 경제 성장에 주력하는 편을 택했다.

그래서 성공회대 권혁태 교수는 일본의 “평화주의가 특수한 조건하에서 작동된 것”이라고 지적한다. 주일미군이라는 거대한 군사력이 일본을 지켜 줬기 때문에 헌법 9조가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냉전기 동안 경제 성장을 거듭하며 일본 지배자들은 점점 더 경제력에 걸맞는 군사력과 위상을 원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모순과 위험을 더 격화시키기 시작했는데, 이 점을 다음에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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