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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진로 논쟁:
어떤 정체성과 방향이 필요한가

박근혜 정부는 스스로 내포한 모순 때문에 위기로 나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자동으로 진보진영에게 기회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도 촛불항쟁으로 취임 첫해부터 약해졌지만, 결국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세력이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분열하면서 기회를 못 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보정치를 재건할 진로 논쟁, 즉 노선(정체성)과 세력의 재편에 관한 토론이 중요하다. 최근 이런 토론들이 재개되고 있다.

진보신당에선 1월 당대표 선거에서 진보정치의 연대와 노동중심성 문제가 논쟁됐다. 반갑게도 상대적으로 진보세력의 연대와 노동중심성을 강조한 이용길 후보가 대표로 당선했다.

진보정의당에서는 최근 주요 간부 설문조사에서 절반 넘는 사람이 가장 시급한 현안으로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 수립’을 꼽았다.

이 조사에서 ‘현존하는 나라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 나라 모델’로 91.6퍼센트가 스웨덴을 꼽았다. 사회민주주의 모델을 지향점으로 꼽은 것이다.

사실 민주노동당도 민주노총 상층 지도부에 기반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었다. 한국 노동운동의 정치적 발전 수준에서 부르주아 정당과 구분되는 좌파 사민주의 정당의 존재는 여전히 의미있다.

그러나 진보정의당 일부 지도자들은 이런 좌파 사민주의보다 더 오른쪽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류 제도정치에 더 적응하며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과 거리를 두려는 것이다.

진보정의당 이정미 대변인이 “광화문이나 대한문 앞에서 집회나 농성을 하는데, 국민들 입장에서 … 이해가 잘 안 될 것 같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는 “자족적인 투쟁 구호를 외치고 노래(투쟁가요)를 부르는 것”이라는 식으로 이 투쟁들을 폄하했다.

개혁을 성취하는데 진보정치가 도움이 되려면, 아래로부터 제기되는 노동자투쟁의 일부이자 정치적 표현체가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미진

진보정의당 노회찬 공동대표는 “똑같은 임금을 준다면 비정규직, 파트타임(노동자)을 써도 되지 않겠나”라고 했다.

여기서 두드러지는 것은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이란 관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니 “박근혜 정부와 전략적 동맹을 맺을 준비가 돼 있다”며 중재기구를 제안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민주노동당은 초기에 ‘거대한 소수 전략’(“대중운동이 중심이고, 의원은 그 스피커 구실을 해야 한다”)을 내세웠다. 비록 실천에서 이 방향이 일관되게 구현되진 못했지만 말이다.

진보정의당 일부 지도자들은 ‘사민주의에 대한 낡은 금기’를 벗어나야 한다며 이런 방향을 제시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창당 강령에 “사회민주주의 한계 극복”이 들어간 맥락을 봐야 한다. 그것은 20세기 후반 유럽 주류 사민주의 정당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에 투항하면서 실패한 전철을 밟지 말자는 생각에서 나왔던 것이다.

20세기 후반의 복지국가는 2차대전 후 상대적으로 장기간 지속한 서구 자본주의의 호황을 배경으로 한다. 여력이 생긴 자본가들은 노동 대중의 개혁 열망과 투쟁이 더 급진화하는 것을 막으려면 양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낡은 금기?

그래서 1951년 영국에서 보수당이 정권을 잡았지만, 이전 노동당 정부 6년 동안 기틀이 잡힌 보편적 복지제도와 일부 기간 산업 국유화 노선이 후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세계적 경기 후퇴 속에서 자본가들이 태도를 바꾸자, 주류 사민주의 정당들은 연이어 신자유주의에 굴복했다. 자본주의의 성공에 기대서 개혁을 제공하는 전략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다.

이런 실패 때문에 근래에는 주류 사민주의를 비판하며 급진좌파 정치세력들이 성장했다. 그리스 시리자, 독일 좌파당, 프랑스 좌파전선 등이 최근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한국의 진보정당이 주목해야 할 것은 주류 사민주의(사회 자유주의)가 간 실패한 길이 아니라 이러한 급진좌파 세력의 성장이다.

진보정당들이 민주통합당 같은 부르주아 정당들과 구별되는 것은 그 기반 때문이다. 조직 노동운동 기반이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쌍용차와 한진중공업 투쟁들을 보자. 새누리당이 이를 골칫거리로 보고 민주당이 여야 협상의 거래가능한 쟁점으로 이를 다루는 것과 달리, 진보정당은 그 투쟁의 일부여야 한다. 진보신당 대표 선거에서도 조직 노동운동과 연대를 강조한 쪽이 다수의 지지를 얻었다.

사실 지금 진보정당의 존재감 약화와 주변화에는 조직 노동운동의 자신감과 투쟁 수준이 아직 충분히 회복되지 못한 상황이라는 배경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운동의 약화에 노동계 진보정당의 잘못된 방향 추구와 분열이 한몫했다. 따라서 ‘조직 노동과 거리두기’를 하면서 주변화를 극복하겠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이는 진보정치 지도자들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진보정의당 일각의 ‘현대화된 생활정당’으로의 우클릭 시도는 옳은 방향이 아니다.

민주당은 물론이고 박근혜마저 대선에서 표를 얻으려고 좌클릭해야 했다. 이럴 때 진보정당이 제도정치권에서 받아들일 만한 온건한 정책과 노선을 추수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민주당과 구분되는 진보정당의 존재감을 더 약화시킬 뿐이다.

진보정의당 지도자들의 이런 시도는 우리가 2011년부터 지적한 바, 유시민계와 연합해서는 진정한 진보의 원칙과 단결을 유지할 수 없다는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드러낸다.

그 점에서 진보정의당 이정미 대변인이 〈레디앙〉 대담에서 유시민계와 민주노동당계·진보신당계는 “혈연관계”가 됐다고 말한 것은 시사적이다.

같은 대담에서 진보신당 김종철 전 부대표가 “민주당과 정책으로 구분되고, 장기적으로 독자적 대중 진보정당을 추구하는 세력이 되려면 자본주의 극복의 원칙과 비전이 있어야 [한다]”고 한 말이 옳다.

물론 진보신당이 이에 바탕해 연대와 단결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면 좋을 것이다.

앞으로 갈수록 박근혜의 모순과 정치 위기는 커져 갈 것이다. 진보진영은 원칙을 유지하며 투쟁태세를 갖추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서 박근혜의 위기를 이용해 단결된 반격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