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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과 박근혜 정부의 매카시즘

국정원의 영문명은 NIS, 즉 National Intelligence Service다. 하지만 실제로는 National Intimidation Service 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이다. 그 기관의 주된 임무 중 하나가 intimidation, 즉 겁주기, 쫄게 만들기이기 때문이다.

두루 알다시피 이 기관의 옛 이름은 중앙정보부 KCIA였다. 유신 시대에 이 기관은 박정희나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학생 조직이나 지식인, 야당 정치인 들을 납치해 고문하고 감옥에 처넣는 일을 예삿일로 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최종길 교수는 사생활보호법 제정에 관심 있는 자유주의 학자였는데도 시위 주동자인 제자를 감쌌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살해 당했다. 그의 동생이 중앙정보부원이었는데도 그랬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김대중은 도쿄에서 납치돼 일본 앞바다에서 물고기 밥이 될 뻔하다 기적적으로 구출됐다.

1970년대는 대학 안에 중앙정보부원과 형사가 상주하면서, 정보부원이 형사에게 지시해 학생을 연행하도록 지시하던 때였다. 중앙정보부는 1971년에 서울대생 네 명과 사법연수원생 한 명을 내란음모를 꾸몄다며 연행해 구속했고, 1973년에는 박정희 비판 설교가 포함된 부활절 예배를 내란음모로 몰아 민주화 운동 목사들을 구속시켰다. 1980년 광주의 정당방위적 저항을 내란으로 몰아 김대중과 반독재 지식인·학생을 고문하고 구속시켰다.

이처럼 중앙정보부(→안기부→국정원)는 한국판 매카시즘의 전위였다. 미국에서 FBI가 매카시즘 시대(1950년대 초반과 중반 시기)와 1960년대 흑인 평등권 요구 운동 시대에 했던 중추적인 구실을 한국에서는 국정원이 해 온 것이다.

특히, FBI가 1950년대 중엽부터 채택해 온 COINTELPRO, 즉 역정보활동은 국정원이 대선 개입을 위해 했던 야당 후보 중상·비방 활동, 좌파 단체들 안에 첩자 심기와 분열 조장하기, 이들에 대한 유언비어 퍼뜨리기와 악성 댓글 달기 등 활동의 본보기가 되는 프로그램이었다.

FBI의 COINTELPRO에는 마틴 루서 킹 목사를 성적 문란이라고 음해하는 언론 기사 작성 등도 포함됐다. 또, 천재 물리학자이자 사회주의자 앨버트 아인슈타인에 대한 사찰과 좌파 단체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US)을 거짓말로 끊임없이 음해하고 조직의 내분을 조장했다.

일벌백계

국정원 요원들에게 연행되는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사진 제공 민중의 소리

박근혜는 대선 때부터 국정원의 도움을 받았고, 이제 겨우 취임 초기인데도 국정원과 국정원장 출신자들이 정치의 전면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이들은 노무현의 남북정상회담 발언록이라는 걸 공개하며 민주당의 대정부 공세에 맞불을 놓는가 하면, 이석기 의원 등 통합진보당(이하 진보당) 경기지역 당원들의 모임을 내란음모로 몰아 진보당 마녀사냥을 자행하고 있다.

도대체 장난감 총을 개조한 무기 같지 않은 무기로 엉성하게 무장한 1백30명짜리 부대가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쿠데타가 무슨 내란이며 국가 변란이라는 말인가!

이게 말도 안 되는 억지라는 광범한 비판에 부딪히자 국정원은 이석기 의원 등이 북한이라는 ‘적’과 합세해서 그러려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북한이 남한 지배자들의 단지 적일 뿐인가? 혹시 내부의 노동계급을 착취·억압하는 데서 친구이기도 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문제보다 더 밀접하게 관련 있는 질문은 과연 북한이 연루된 전쟁이 핵전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질문이다. 그런 전쟁에서는 핵무기에 의한 공멸이냐 아니면 노동자 혁명이냐 하는 선택만이 의미 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이석기 의원 등이 소위 모의했다는 극소수 좌익 정예들의 쿠데타는 아무 효과도 없는 단지 고결한 순교일 뿐이다.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는 프랑스의 1832년 6월 봉기 같은 행동이 아니라 오직 영화 ‘레미제라블’의 마지막 장면에서 묘사된 아래로부터의 수백만 대중의 행동만이 핵전쟁을 막거나 끝내는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소위 ‘내란음모’였다는 이석기 모임이 실제로는 무엇이었는지도 살펴보자. 이석기 의원 등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공세에 저항하는 방법에 관해 토론했던 것이지만, 유추를 통해 깨닫고자 형법 343조를 살펴보자. 강도 음모를 7년 이하 징역형에 처한다는 조항이다.

그 조항에 따르면, 어떤 도둑들이 모여 그저 막연하게 크게 한탕 하는 것에 관해 설왕설래 말을 주고 받기만 하고, 정작 구체적인 모의 대상을 선정해 구체적이고 세밀한 계획은 짜지 않은 것으로 모임을 끝냈다 해도 그 모임은 강도 음모로 형사 처벌된다.

이것은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본보기로 한 사람에게 엄한 처벌을 하는 일벌백계주의이다.

이석기 모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구체성이 없고 그나마 실현 가능성도 없어 계획이라고 볼 수도 없는 일을 음모나 선동이라고 몰아간다면 그것은 국민 겁주기, 쫄게 만들기 위한 것으로, 토론의 자유를 억압하는 권위주의적이고 반민주적 조처일 뿐이다.

이석기 의원 등이 한 일은, 전쟁이 임박하지 않았는데도 상황에 대한 오판을 바탕으로 비현실적인 방법에 관해, 그것도 막연하게 토론했던 것밖에 없다.

국정원식의 겁주기가 통하려면 대중 속에서 도덕적 공황과 빨갱이 공포증이 먹혀야 한다. 실제로 도덕적 공황이 있었다. 만약 전쟁이 난다면, 이석기 모임이 토론했던 것과 같은 행동이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가 폭넓게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모든 미디어들의 언론 재판도 도덕적 공황에 일조했을 것이다. 흔히 그러듯이 언론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시끄러웠고, 감정에 호소했고, 쓸데없이 논쟁적이었고, 고의로 둔감했고, 자기중심적이었고, 일부 사실들과 정보를 의도적으로 제외시켰다.

그래서 이석기 의원 등에 대한 적개심을 품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무릇 도덕적 공황이란 휘발성이 강한 법이다. 공황은 일어난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대중의 관심사나 언론의 뉴스거리에서 사라지는 경향이 있다.

도덕적 공황은 한국에서는 걸핏하면 빨갱이 공포증을 동반한다. 은행 전산망이 일시 고장 나도 아무 증거도 없이 북한이나 ‘종북주의자들’ 소행으로 아예 단정하고 나선다.(서구에서는 요즘 흔히 무슬림 공포증을 동반한다)

냉전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된 로젠버그 부부

미국의 매카시 선풍은 가장 잘 알려진 빨갱이 공포증이다. 매카시 선풍은 제2차 빨갱이 공포증이라고도 불린다(제1차 빨갱이 공포증은 1919~21년에 조성됐었다). 매카시 선풍은 1947~57년 공산당원 또는 그 출신자나 동조자에 대한 일련의 대대적인 숙청 바람이었다.

매카시라는 한 상원의원의 이름과 그가 이끈 의회 비미국인적 활동 조사위원회라는 기구로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그 사건은 실제로는 미국 정부, 특히 FBI가 주도한 사건이었다. 특히, FBI의 설립자로 거의 50년 동안 FBI를 운영한 존 에드거 후버라는 인물이 가장 정력적으로 마녀사냥을 주도했다.

빨갱이 공포증

매카시즘이라는 10년간의 빨갱이 마녀사냥으로 수백 명이 징역살이를 했고, 약 1만~1만 2천 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모두 폭력을 사용하지 않은 평화적인 정치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었는데도 말이다.

징역살이를 한 사람 가운데엔 감옥에서 폭력배에게 폭행을 당해 죽거나 장애를 입은 사람도 더러 있었다.

노동조합 관료들은 공산당원들을 노조에서 쫓아내거나 적어도 노조의 주요 임무에서 배제했다. 그 덕분에 미국의 노동조합은 더욱 보수적이고 더욱 친사용자적이 됐다. 매카시즘으로 노동운동은 급속히 약화됐고, 단지 공산당이 주도하는 노동운동 부분뿐 아니라 비공산당계 좌파가 주도하는 노동운동 부분도 약화됐다.

노동운동가뿐 아니라 지식인들도 마녀사냥을 당했다.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잘 알려진 레너드 번스타인, 시인이자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 코미디언인 찰리 채플린, 물리학자 앨버트 아인슈타인과 로버트 오펜하이머, 소설가 토마스 만, 극작가 아서 밀러, 배우이자 영화감독 오손 웰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폴 스위지 등이 큰 곤욕을 치렀다.

이런 마녀사냥 바람 속에서 자유주의자들은 좌익에게 등을 돌렸다. 가령 미국의 대표적 인권단체인 인권옹호협회(ACLU)는 단체 창립자인 엘리자베스 걸리 플린을 단체에서 제명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ACLU는 매카시즘 시대 동안 FBI에 단체의 회원 명단을 제공했다.

자유주의자들의 배신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왜냐하면 자유주의자라면 그 말의 말뜻 그대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권을 당연히 옹호해야 하기 때문이거니와, 지금 우리 나라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는 국정원의 진보당 마녀사냥을 반대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한겨레〉〈경향신문〉, 민주당과 NGOs가 국정원의 진보당 마녀사냥에 대해 보이는 반동적이거나 비굴한 태도를 보라.

요즘 오바마가 미국 정부의 사찰 프로그램을 폭로했다 해서 체포를 명령한 에드워드 스노든, 위키리크스 관련 폭로자인 미군 병사 브래들리 매닝 등을 미국 민주당과 자유주의자들이 방어하지 않는 것을 보면 자유주의의 도덕적 파산도 선고할 수 있다.

사실, 일찍이 마르크스는 1843년 〈라인 신문〉에 대한 프러시아 당국의 검열에 대해 친구인 자유주의자 아르놀트 루게가 보인 비굴한 굴종에 환멸을 느껴 항의의 뜻으로 편집자를 사임했다.

매카시즘 시대의 미국과 요즘 한국에서 자유주의자들과 심지어 정의당 같은 개혁주의자들이 애국심에 굴종하는 현상은 자유주의의 본질적 한계가 드러난 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자유주의의 본질적 약점이 특정 상황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난다는 점도 봐야 한다.

그 특정 상황이란 무슨 상황인가? 매카시즘하의 미국이든 요즘의 한국이든 결정적인 공통점이 하나 있다. 대외 지정학적 요인이 국민에게 잠재적 위협 요인으로 비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경우: 1946년 말경 소련이 자국의 경제 구조대로 동유럽 점령국들을 급속히 변모시키기 시작했다, 1949년 소련이 핵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1949년 중국에서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혁명이 성공해 마오쩌둥이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 미국은 중국 및 소련과 한반도에서 대결을 벌여야 했다.

요즘 한국의 경우: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에 영향력을 둘러싸고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다, 한국과는 역사적 악연이 있는 일본이 미국과 동맹하고 있다, 만일 미래에 동아시아의 섬들이 아니라 한반도가 충돌의 현장이 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북한은 도쿄에 핵폭탄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고 위협하고 있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핵무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이것은 남한 지배자들에게 북핵보다 훨씬 더 큰 우려 사항이다.

그런데 요즘 한국의 경우에는 대외 지정학적 환경뿐 아니라 대외 경제적 환경도 잠재적 위협 요인이다. 이 점은 매카시즘 시대의 미국과 크게 다른 점이다. 특히 중국 경제가 경착륙을 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한국 지배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한국의 수출 1위국인 중국 경제가 경착륙하는 사태가 일어난다면 한국은 1997~98년 소위 외환 위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정한 경제 대공황 사태를 맞이할 것이다.

여기에 중국 노동계급 운동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는 것도 우려 사항이다. 만일 중국에서 제2의 텐안먼 사태가 벌어진다면 이번에는 노동계급 파업 사태를 동반하며 급속히 봉기적 상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리 되면 북한에서 소위 ‘유사 사태’(제도 붕괴)가 일어날 수 있고, 그리 되면 일본군이 ‘집단적 자위권’을 명분으로 한반도에 진주하려 할 것이고, 그리 되면 해묵은 민족 감정이 폭발해 반일·반미·반정부 투쟁이 폭발할 것이다.

이런 대외 지정학적·경제적 잠재 위험 요소 때문에 자유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이 국가 대對 시민적·정치적 자유의 충돌에서 국가 편을 들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언론에 의한 재판이 한창이던 때 자유주의·개혁주의 세력은 우익의 손에 놀아난 셈이 됐다.

이런 실정 때문에 박근혜 지지율이 60퍼센트로까지 다시 올라갔다. 물론 추석연휴 직후 기초연금, 무상보육, 4대 중증질환 전액 지원 등등 공약들을 파기하면서 아마 곧 다시 40퍼센트대로 내려 앉겠지만 말이다.

이제 우리는 박근혜 집권 반년 남짓을 경험하면서 박근혜하의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봉착할 난관이 무엇일지 예상할 수 있다. 첫째, 대외 지정학적 여건 때문에 대북정책을 포함한 외교정책을 놓고 지배계급 내의 강경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사이에 온갖 긴장이 빚어지고, 이로 말미암아 때때로 정권이 불안정에 빠진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과 그로 말미암아 빚어진 여야 갈등과 촛불집회는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둘째, 강경 보수파와 갈등하면서도 자유주의자들은 친북 좌파를 둘러싼 도덕적 공황과 빨갱이 공포증이 일어날 때마다 언제든 강경 보수파의 품 안으로 뛰어들려 한다. 이석기 모임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서 봤듯이 말이다.

셋째, 이 두 가지 조건으로 말미암아 지배계급은 내분해 있고 일관성이 없다. 여당과 야당의 충돌이 일상사처럼 벌어지고 있고, ‘공안통’들이 ‘특수통’이자 비(非)박근혜 라인인 채동욱 검찰총장을 찍어내려 하는 데서 보듯이 말이다.

넷째, 지배계급의 이런 내분과 비일관성 때문에 아래로부터의 도전이 증대한다. 가령 지난해와 올해 노동자들의 투쟁이 고양되고 있고, 무엇보다 새로운 조직 노동자층이 형성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심지어 가장 민주적인 형태의 자본주의 국가조차 심각한 지정학적·경제적 위기 때는 혹심한 노동 탄압의 마각을 종종 드러낸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가령 1986년 오스트레일리아 봅 호크 노동당 정부는 건설노조연맹 BLF를 불법화했다. 호주판 노사정 합의인 “물가-소득 협정”의 한계를 넘는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투쟁한다는 이유로 말이다. 몇천 명의 경찰력을 투입해 노조원들의 피켓라인을 분쇄했다. BLF 지도자들은 구속돼, 날조된 혐의로 기소됐고, 노조 기금을 압류당했고, 노조를 탈퇴하지 않은 노조원들은 해고당했다.

또한 1990년 뉴질랜드에 들어선 국민당 정부는 때때로 노조 가입 사실만으로 노동자를 해고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는 보통선거권을 도입한 최초의 두 나라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가 이석기 모임 참석자를 소환하고, 해고자 노조 가입을 이유로 전교조에 노조를 법외노조화하겠다는 최후통첩장을 보내는 따위의 일을 굳이 유신 회귀로 볼 필요는 없다. 박근혜와 군출신·공안검찰 출신자들을 비롯한 핵심 지배층의 통치 스타일(방식)과 통치 체제를 구별해야 한다.

통치 체제, 즉 국가 형태는 여전히 자유민주주의, 즉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인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유신 때처럼 국가의 통제를 받는 노동조합만 허용하는 일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지배계급의 처지에서 봐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북한 국가가 아니라 남한 국가에 충성하는 한 노동조합 상근간부층을 기반으로 한 개혁주의 정당도 계속 허용될 것이다.

지배자들은 그람시가 말한 ‘동의에 의한 지배’의 장점과 ‘민주주의’라는 가면을 통해 얻는 지배의 정통성이 갖는 장점을 쉽게 버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공공연한 독재나 파시즘 통치 체제를 구축하려 한다면 막대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통치 체제는 여전히 부르주아 민주주의인 채로 남아 있는 동안 핵심 지배층의 통치 방식은 권위주의적이어서 걸핏하면 마녀사냥과 색깔논쟁이 벌어지는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앞서 내가 지적한 서로 연관된 두 가지 요인, 즉 동아시아의 불안정이라는 지정학적 요인과 세계 경제 위기라는 요인 때문에 지배계급 내에, 그리고 지배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에 긴장이 날카롭게 조성돼 정권이 자주 불안정해지기 때문이다.

통치 스타일에서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보다 처음부터 한 걸음 더 오른쪽으로 나아간 모습을 보여 준다. 첫째, 보안경찰인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한 것. 둘째, 당 소속 국회의원이 6명이나 되는 제도권 정당인 진보당을 불법화시키고 싶어한다는 점(잘 될지는 두고 봐야 한다). 셋째, 전교조를 다시 불법화하려 한다는 것,

ⓒ이미진

결론을 맺자면 우리는 민주주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민주주의 권리들을 구별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말뜻 그대로 인민의 지배를 뜻하므로, 계급으로 나뉜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시민사회’론자들과 자유주의 학자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실제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즉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뜻하는 것일 뿐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자유주의적·개인주의적·형식주의적인 협소한 해석으로, 단지 절차 문제로 환원된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는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즉 노동계급 민주주의라는 원칙에 근거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한 형태인 진보적 민주주의를 수립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보적 민주주의’는 스탈린주의의 단계혁명론에 근거한 전략으로, 그 전략에 따르면 노동계 정당이 민주당 같은 노골적인 자본주의 정당과 단지 선거 제휴를 하는 것을 넘어 전략적 연대를 구축해야 한다. 이것은 노동운동의 비전과 지향을 지극히 협소화하고 운동의 잠재력과 에너지를 약화시킨다.

물론 우리는 민주주의 권리들을 옹호해야 한다. 사상·언론·출판·결사·집회·시위의 자유, 노동기본권 등이 박근혜 정부에 의해 심각하게 침해받을 텐데, 이에 저항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국가 탄압을 피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노동계급 운동이 강력해지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 속에서 그와 유기적 연관을 유지하고, 동시에 민주적으로 집중된 자신의 고유한 정치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