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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신자유주의로 노동자 계급은 어떻게 변모했는가

신자유주의로 말미암아 노동자 계급의 지위가 변했고, 그래서 노동자 계급은 더는 사회 변화의 핵심 세력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 흔하다. 이와 관련해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계간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에서 벌어진 논쟁을 소개한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노동자 연대〉 편집팀은 제인 하디와 조셉 추나라의 견해에 동의함을 미리 밝혀 둔다.

조셉 추나라는 내년 2월 6(금)~8(일)일 서울에서 열리는 맑시즘2015 연설을 위해 방한한다.

순서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새 국면이고, 노동자 계급과 자본 모두 심대한 변화를 겪었다

닐 데이비슨

자본주의 역사의 한 국면인 신자유주의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의 필자들은 신자유주의를 이데올로기(또는 특정 정책들) 이상으로 보는 데 회의적이었다. 특히 크리스 하먼이 그랬다. 1973년 이후의 시기를 규정하는 개념으로 신자유주의를 사용하기를 꺼리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타당하고 다른 하나는 타당하지 않다.

금융화와 부채 증가 같은 신자유주의의 일부 양상들을 현재 경제 위기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담론을 경계해야 한다는 이유는 타당하다. 국제사회주의 경향은 위기를 금융화가 아니라 이윤율 저하 경향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연속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1973년부터 새로운 단계(또는 시기)가 시작됐음을 보지 못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토니 클리프는 1970년대 말 영국 노동자 계급 운동의 상태를 “침체기”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는 사회의 성격 변화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계급 간 세력관계의 변화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은 자본주의 발전의 새 시기의 시작이었고, 계급 간 세력관계뿐 아니라 사회 자체가 변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에는 이를 알아채야 했다.

물론 노동과 자본 둘 다 심대한 내부 재편을 겪는 새 시기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너무나 큰 일이어서 눈앞의 과제들을 수행하는 데서 신경을 분산시키는 걸림돌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인식이 없으면 눈앞의 과제들을 성취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수 있다.

신자유주의의 등장 배경

1950~60년대의 장기 호황기에 세계경제에 세 가지 변화가 나타났다. 첫째, 국제 무역이 확대됐다. 둘째, 생산의 국제화 수준이 증대됐다. 물론 이 변화의 효과를 과장해서는 안 되지만, 다국적기업들의 입지가 개별 국가들보다 강해진 것이 사실이다. 셋째, 주로 금융과 관계된 변화다. 여기에는 다시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해외직접투자 FDI가 크게 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은행과 화폐자본의 이동이 국경의 제약을 받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본의 이익을 거스르는 듯한 정부 정책이 공격에 취약해졌다.

이후(1970년대 후반) 신자유주의가 등장했는데, 그 직접적 전제조건은 두 가지다. 첫째, 자본주의 기업들의 규모가 커졌다는 것이다. 둘째, 1973~74년 다시 경제 위기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애슐리 라벨이 지적하듯이, 세계화가 신자유주의 등장의 “근접” 원인이라면, 전후 호황의 종식은 “궁극” 원인이다. “경제 여건의 변화는 결국 이데올로기와 정치의 지형을 바꿔 각국 정부는 국제 투자와 무역의 흐름에 자국 경제를 개방해야 하다는 압박을 받았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는 알 캠벨이 썼듯이,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해결할 방책이었고, 그런 위기 속에서 기존의 “정책, 실천, 기구들”은 더는 자본 축적을 위해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신자유주의가 이윤율과 자본 축적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자본주의는 케인스주의적 타협을 내버렸다.”

지배계급의 의식적 전략으로서 신자유주의의 등장은 전후 호황의 종식과 전후 호황이 낳은 조건 변화에 대한 대응이었다.

신자유주의의 득실

데이비드 하비는 신자유주의가 경제 엘리트의 권력을 복원하고 자본 축적을 위한 조건을 다시 세우는 데서 “크게 효과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 근저에는 신자유주의가 이윤율의 지속적 증가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데이비드 맥낼리가 지적했듯이, 장기 호황기의 이윤율 수준을 기준점으로 보는 것은 두 가지 이유로 문제가 있다. 첫째, 자본주의처럼 역동적인 체제가 40년 동안이나 위기를 겪는다고 보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둘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과 달리 자본가들과 경영진은 자신들의 현재 처지를 40년 전의 조건과 비교해 생각하지 않는다. 게다가 뒤메닐과 레비가 썼듯이, “경영진의 목표는 사회 질서에 따라 달라진다. … 신자유주의 시기에는 주식시장과 자본소득이 주요 목표가 됐다.”

1982년 신자유주의적 호황이 시작됐는데, 네 가지 요인이 중요했다. 첫째이자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노동자 착취가 증대했다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생산성을 향상시키고(더 적은 노동자들에게 더 열심히, 더 오래 일 시키기),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의 몫을 줄여서(실질임금을 삭감하기) 가능했다.

둘째 요인은 가계 부채가 막대하게 증가했다는 것이다. 맥낼리가 지적하듯이, 신용 거래는 1982년 회복의 동력이 고갈된 직후 위기가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부채 증가는 신자유주의 호황의 성격과 큰 관련이 있다. 체제의 심장부에서 일어난 성장은 제조업 등 생산적 부문이 아니라 서비스업에 대한 투자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새로 생겨난 일자리는 불안정을 특징으로 하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에 필수 서비스를 상품화한 민영화의 효과까지 더해져 노동자 계급의 필요경비가 증가하고 가계 부채가 어마어마하게 불어났다.

셋째 요인은 하비가 말한 “탈취를 통한 축적”이다. 이 개념에는 중대한 문제가 몇 가지 있지만, 영국의 맥락에는 꽤나 잘 들어맞는다.

넷째 요인은 이윤율이 자본가들의 기대 수준만큼 지속적으로 오르지 못한 결과, 생산에 투여되는 잉여가치의 비중이 감소하고 축장되는 잉여가치의 비중이 증가한 것이다. 생산적 부문에 투자하는 것이 그리 매력적이지 못할 때, 잉여 자본이 수익성 있는 사용처를 찾아 산업자본에서 금융 투기로 향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자본주의 체제는 어느 순간 위기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신자유주의가 이윤율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것은 별 의미 없는 주장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자본가 계급을 위해 한 가지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것은 부와 자원을 지배계급에게로 돌린 것이다. 이런 부와 자원의 이전은 일반적 현상이다.

이와 관련해, 뒤메닐과 레비는 지배계급의 자산에 두 가지 움직임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먼저, 1970년대 초반 지배계급의 자산이 “비교적 하락”한 것이다. 그다음, 1970년대 후반 이후 “신자유주의의 기치 하에서 복원되고 더 많아진 것이다.”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은 자본가 개인들의 부를 증가시키고 빈민과 노동자 계급의 생활수준을 떨어뜨려 자본가 계급에 득이 됐다.

국가의 구실과 관련해서는 이론과 현실이 충돌한다. 민영화가 시행됐지만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국가의 도움을 끊을 수 없었다. 사실, 어떤 면에서 국가는 이전 시기보다 신자유주의 시기에 더 강해졌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시기에 생겨난 변화는 무엇인가?

국가 지출의 규모나 국가 개입의 영역보다는 재정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느냐가 달라졌다. 그 과정은 “삭감이라기보다는 방향 전환”이었다. 국가는 자신에게 위임된 권한을 하부 조직에 나눠 줬다. 그 결과 국가와 민간 자본의 관계가 바뀌었다. 복지 부문에서 그 변화가 가장 잘 보인다. 예를 들어, 아동·노인·장애인 등에 대한 돌봄의 책임이 점점 더 국가에서 개별 가정(대체로는 그 가족의 여성)으로 이전했다.

이상의 분석이 영국 혁명가들의 실천에 함의하는 바는 이렇다. 첫째, 더 높은 수준의 분권화가 필요하다. 둘째, 노동당 왼쪽에 선거 대안을 건설해야 한다. 셋째, (공공부문과 구별되는) 민간부문 조직화에 역량을 투입해야 한다.


신자유주의로 노동자 계급은 변모를 겪었지만 여전히 큰 잠재력이 있다

제인 하디와 조셉 추나라

신자유주의는 실제로 어땠는가?

닐 데이비슨이 지적했듯이, 장기 호황기부터 자본의 국제적 통합이 증가하고, 다국적 생산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국제적 금융 이동이 확대됐다. 우리 국제사회주의 경향이 이런 변화를 보지 않으려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예를 들어, 크리스 하먼은 《좀비 자본주의》에서 그런 경향을 설명했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정형화된 유형들로 분류하려는 [유형학적] 관점과는 거리를 둬야 한다. 그런 관점의 예로는 조절학파가 있다. 조절학파는 1970년대 위기 이전 시기를 “포드주의” 시기로, 그 이후 시기를 “포스트 포드주의” 시기로 구분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을 “자본주의의 한 유형”으로 보면서 자본주의의 피상적 특징을 포착하려는 방식도 거부해야 한다.

닐 데이비슨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성격 규정을 내놓지 않았다. 이는 아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를 자명하고 일관된 사상 체계로 보고 그 내용에 관해 좌파들 사이에 합의가 이뤄졌다고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적 프로젝트로서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이 등장한 때는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때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를 필두로 한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학자들이 국가의 제한된 구실, 사유재산과 경쟁의 결정적 중요성을 옹호하는 주장을 내놨다.

그러나 현실에서 신자유주의는 언제 어디서나 실용주의적이었다. 즉, 그 청사진은 순수한 자유시장이라는 이상향을 분명히 가리켰지만, 그것은 현실에 적용되지 못했다. 닐 데이비슨도 인정하듯이,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완전한 후퇴를 뜻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본 축적과 이윤 회복을 위해 국가를 장악하고 재편하는 과정을 뜻했다.

어떤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의 일부로 고용의 불안정성 증가를 강조한다.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는 《제국》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자본은 그것의 현장을 국제 네트워크의 다른 부분으로 옮김으로써 원래 지역 주민과의 교섭에서 철수할 수 있다.” 데이비드 하비도 자본이 이동하는 능력이 커서 노동자들에게 불안정한 형태의 노동을 점점 더 강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들은 위험하다. 입지조건의 제약을 받지 않는 자본에 직면해서 노동자들이 힘도 없고 수동적으로 당한다는 관점을 부추길 수 있기 때문이다.(불안정성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의하겠다.)

신자유주의가 지배계급의 한결같은 전략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오히려 신자유주의는 주먹구구식이고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하는 정도, 자본 축적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효능 등을 두고 지배계급 내에 분열과 긴장이 있다. 또, 나라마다 이런 점들에 차이가 있다.

신자유주의를 한결같고 일률적이고 보편적인 것으로 보면, 지배계급의 자신감이나 자본주의의 안정성을 과대평가하게 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의 한계, 약점, 모순, 역사적 특정성을 알아야 자본주의의 취약성과 지배계급이 처한 딜레마를 알 수 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닐 데이비슨의 이해 방식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더 있다. 첫째, 그가 영국을 초점으로 서술해서 그런지 영국 자본주의의 특징에서 비롯한 결과와 세계 체제 전체의 일반적 경향을 혼동한다는 것이다. 둘째, 자본주의에서 장기적 경향으로 나타나는 효과와 최근 시기의 구체적 특징을 혼동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들은 노동자 계급의 내부 구조 변화에 대한 그의 분석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조업 쇠퇴는 신자유주의의 결과가 아니다

모든 선진 자본주의 경제에는 장기적으로 제조업에서 서비스 부문으로의 변화가 나타났다. 이런 경향은 실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본의 축적과 “유기적 구성”(마르크스의 용어로)의 증가로 말미암은 장기적 노동생산성 증가에서 비롯한 것이다. 달리 말해, 더 적은 노동자로도 전과 같은 양의 생산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런 경향은 제조업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기계화와 기술 혁신이 쉽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으로 말미암은 결과는 두 가지다. 첫째, 제조업에서 노동인구가 빠져나간다. 그러나 결국 경제의 다른 분야로 유입된다. 둘째, 생산성이 증가하면 특정 생산물에 담기는 가치가 감소해 생산물의 가격이 떨어진다. 노동자들의 잠재적 구매력이 증가할 수 있고, 그래서 레저와 소매업 같은 서비스 부문이 확장될 토대가 마련된다.

게다가 자본은 성장할수록 더 많은 서비스 인프라가 필요해진다. 자본 간 경쟁이 심해지면서 “시간에 의한 공간의 폐지”(마르크스, 《그룬트리세》)를 위한 물류와 유통이 중요해진다. 생산이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회계와 마케팅 같은 기능도 중요해진다. 그래서 그런 업무를 전담하는 기업들이 생겨난다. 여기에 더해, 교육과 의료 등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일자리가 엄청나게 증가해 왔다. 예를 들어, 2009년 OECD 나라들의 전체 고용에서 의료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10퍼센트였다.

노동과 노동자 계급은 어떤 변화를 겪었는가?

닐 데이비슨은 노동자 계급의 실질적 변화를 분석하며 “성장은 제조업 등 생산적 부문이 아니라 서비스업에 대한 투자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 새로 생겨난 일자리는 불안정을 특징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중요한 주장이 함축돼 있다. 첫째, 최근 생겨난 새 일자리는 대부분 제조업이 아닌 부문에서 생겨났고, 자본가들에게 비생산적이라는 주장이다. 둘째, 새 일자리들은 더 불안정하다는 주장이다.

노동은 자본가를 위해 잉여가치를 창출해야 마르크스의 개념으로 생산적이다. 그러므로 서비스 부문의 많은 일자리들은 생산적이다. 그런데 앞에서 우리는 직접적으로는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일자리가 많아지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잉여가치는 생산적 자본가들과 비생산적 자본가들 사이에서 분배된다. 일반으로 말해, 생산적이지 않은 기업을 운영하는 자본가들도 체제의 다른 부분에서 창출된 잉여가치의 일부를 가져가려면 노동자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은행 자본가들은 노동자가 있어야 생산적 노동에서 결국 비롯한 이윤을 가져갈 수 있다. 은행 노동자들은 노동을 멈춰 은행 자본가들이 이윤을 얻는 것을 막을 잠재력이 있다.

의료나 교육 같은 공공부문의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이윤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 동안 공공부문 고용이 꽤나 꾸준히 증가해 왔고 어느 정도 안정성이 있어서 노조 조직률이 50퍼센트일 정도로 높다. 그렇다고 해서 이 노동자들이 특권층인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보아 슬라보예 지젝은 2012년 초 공공부문 노동자들을 “봉급받는 부르주아지”라고 잘못 일컬었다. 공공부문에 고용된 사람들은 “프롤레타리아화”해 왔다. 다른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과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점에서 그랬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노동자 계급의 일원으로 보고 있고, 다른 노동자들과 비슷한 형태의 천대를 받고 있고, 다른 노동자들과 비슷한 형태의 투쟁과 저항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노동자 계급의 (내부) 구조가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만, 도대체 무엇이 바뀌었고 무엇이 바뀌지 않았는지를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상당한 집단적 힘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대규모 직장에 고용돼 있기도 하다. 대규모 조직이 등장할 잠재력이 있는 것이다.

제조업 노동자들의 힘도 약해지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고용된 노동자의 수가 줄었다는 사실은 비교적 적은 노동자가 낼 힘이 커졌음을 뜻한다.

불안정 노동이 증가한다는 주장과 현실

닐 데이비슨은 최근에 생겨난 일자리들이 불안정한 경향이 있다고 했지만, 이와 상충하는 근거가 많다. 미국과 캐나다(1983~2002년), 유럽연합 회원국들(1992~2002년)에서 10년 이상 장기 근속자 비중은 증가해 왔다. 영국에서도 고용은 꽤나 안정적이다. 이런 상황은 노동자 투쟁 덕분이기도 하고, 숙련 노동력을 보유해야 하는 사용자들의 필요 때문이기도 하다.

케빈 두건은 《새로운 자본주의?: 노동의 변화》에서 시장은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를 전달하는 완벽한 전도체라기보다는 강력한 절연체라고 지적했다. 즉, 시장은 변화의 효과와 속도를 떨어뜨린다. 그래서 2008년 공황 이후 경제 침체가 고용에 미친 영향은 산출에 미친 영향보다 꽤 적었다. 사용자들은 기존에 투자해 놓은 “인적 자본” 자체를 줄이기보다는 비용을 줄이려 했다. 착취 수준을 올리고, 초과근무 수당을 줄이고, 임금을 억제함으로써 말이다.

케빈 두건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새로운 고용 패턴에서 임시성과 우연성만을 보려는 좌파들의 사고방식을 따르게 되면, 자본에게 노동이 필요하다는 기본 명제에 눈 감게 된다. 국제 경쟁이 심하다는 둥 공장을 이전하고 아웃소싱하겠다는 둥 얘기가 많지만, 사용자들은 대체로 노동자 고용과 보유를 중요하게 본다. 만일 그렇지가 않다면, 일자리가 안정적이고 장기 근속이 늘어나는 국제적 증거를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불안정성에 관한 세간의 인식을 흔들 수 있는 것은 핵심적으로는 노동자들의 승리일 것이다. 노동자들이 투쟁에서 승리하면, 노동자들은 자신에게 여전히 힘이 있고 조직할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는 역동적이고 끊임없이 재편된다. 어떤 상품과 서비스를 어디서 어떻게 만들 것인지가 계속 바뀌고 또 바뀐다. 그럼으로써 노동자 계급의 구조도 바뀐다.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정치경제학 전통이 이런 변화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사회주의자들 앞에 놓인 문제와 기회가 무엇인지를 둘러싼 논의는 더 많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 문제들을 극복할 마법 같은 해결책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계급투쟁의 수준이 오랫동안 낮은 상황에서는, 특히 불안정성과 무기력에 관한 언사들(좌파와 우파 모두에서 흔한)을 앵무새처럼 따라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노동자 계급의 자신감과 전투성을 끌어올리는 데서 방해만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