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
유혈 낭자한 내전의 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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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의 중동 특파원이자 중동 문제 전문가인 로버트 피스크가 예멘 내전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들춰 낸다. 예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남쪽에 있는 아랍 국가로, 동유럽 스탈린주의 국가들의 붕괴 직후인 1990년 스탈린주의 국가 남예멘과 친서방 국가 북예멘이 연방제 통일을 이뤄, 같은 분단 국가인 남한 진보진영의 관심을 모았었다. 그러나 4년 만에 다시금 유혈 내전에 돌입한 끝에 북예멘 주도로 무력 재통일 됐다. 2011년 아랍 혁명의 여파로 예멘에서도 혁명이 일어났으나 실패했다. 이후 내전이 이어져 왔다. 미주는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역자가 삽입한 것이다.
새로운 예멘 내전이 아무리 복잡해 보여도
5년 넘게 사우디아라비아 군대와 후티 반군 사이에 무장 충돌이 계속됐다. 후티라는 이름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비난하며 살레 정부와 충돌하다가 2004년 살해당한 자이드파 지도자 후세인 바드레딘 알후티에서 유래했다. 후티 반군은 한때 사우디아라비아 국경 내의 낮은 산악 지대를 점령하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과 레바논 헤즈볼라를 후티 반군의 배후 후원자로 지목하며 비난했다. 후티 반군은 예멘 수니파와 그 후원자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을 비난했다.
예멘의 위기는 왕당파
이맘 야히아의 신앙과 예배 의식은 시아파와 공통점이 많은 것만큼 수니파 이슬람과도 꽤 비슷했다.2 하지만 아시르와 나지란을3 사우디아라비아가 점령하자 야히아는 그가 “역사적 예멘”이라고 부른 이 지역을 되찾기 위해 수니파 왕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 맞서 싸웠다.
옥스퍼드대학교 교수 유진 로건의 설명에 따르면, 야히아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아들 아흐메드는 정적들을 투옥하고 처형하는 등 무자비했다. 그는 소련이나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지만, 중동에서 ‘봉건제’를 타도하라는 나세르의 호소에 난처해졌다. 아흐메드는 아랍 사회주의를 비난하는 것으로 반격했다.
이후 분단과 최종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제 예멘 북부의 시아파 반군이 이란의 지원을 받을까 봐, 그래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자체가 불안정해질까 봐 두려워했다. 사우디아라비아 국내에도 상당한 소수의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과 레바논 헤즈볼라가 후티 반군을 지원한다고 주장했다. 이란과 헤즈볼라는 이를 부인했다.
정작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 불가피해진 것은 알카에다 예멘 지부의 성장 때문이었다.
서방 언론에는 거의 보도되지 않는 미국의 무인항공기 공격은 알카에다를 겨냥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는 예멘 정부를 대신해서 알카에다를 공격한 것이라고들 생각했다. 그러나 2009년 12월 후티 반군의 대변인들은 미군이 자신들을 공격한 일련의 사건들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미군이 예멘 북부의 여러 도시에서 29차례 공습으로 1백20명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후티 반군이 수도로 진군하자 정부군의 힘은 분산됐다. 이제는 미군을 대신해 알카에다와 싸워야 했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대신해 후티 반군과도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시아파를 이단으로 여길 뿐 아니라 누가 먼저 예멘 수도를 장악하느냐를 놓고 후티와 경쟁 관계에 있는 ‘알카에다 아라비아반도 지부’는 후티 반군과 싸우기 위해 북부로 이동하면서, 전에 그랬듯이 수니파의 지지를 얻고 있다.
예멘은 시리아가 아니다. 그러나 중동에 대한 미국의 편견 때문에 이제 놀랄 만큼 비슷한 시나리오가 만들어지고 있다. 미국은 시리아에서 알라위파 시아파인 아사드 정권이나 그들의 적인 수니파 아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