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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시즘2015 하이라이트:
계급이란 무엇인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 조셉 추나라가 2월 6~8일 노동자연대가 주최한 ‘맑시즘2015’ 참가를 위해 방한했다. 이 글은 추나라가 2월 8일 강연한 ‘계급이란 무엇인가’를 녹취한 것이다. [ ] 안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노동자 연대〉 편집자가 첨가한 말이다.

흔히 ‘계급’이라고 하면 사람들을 구분하는 여러 가지 기준을 떠올립니다. 그런 기준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을 외모, 키, 머리 색깔 같은 것으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청바지나 샴푸 같은 것을 팔 때는 그런 기준이 상당히 유용할 것입니다.

‘맑시즘2015’에서 연설하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중앙위원 조셉 추나라 ⓒ이미진

그런데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이런 것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우리가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사회의 핵심 분단선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어떤 집단의 힘과 그 집단의 사회적 지위가 어떤 관계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뿐 아니라, 사람들을 집단 행동에 나서게 하는 공통점이 무엇인지도 봐야 합니다.

베버의 계급론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의 계급론은 학계의 주요 이론인 막스 베버의 계급론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막스 베버는 계급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충족할 때 ‘계급’을 말할 수 있다. ① 많은 사람들이 생활 기회라는 특정한 인과적 요소를 공유할 때, 다만, ② 그 요소가 오로지 상품과 소득 기회를 갖느냐 하는 경제적 이해관계로만 표현될 때, ③ 그 요소가 상품 노동 또는 노동시장이라는 조건 하에 있을 때.”

베버가 상당히 어렵게 꼬아서 말했는데, 제가 보기에 베버 주장의 핵심은 사람들이 소유한 재화, 시장에서의 지위, 직업의 종류에 따라 계급이 규정된다는 것입니다. 계급을 이런 식으로 규정하면, 직업에 따라 계급이 천차만별로 나뉘게 됩니다. 마르크스식 계급 개념에서는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하고 말할 수 있는데, 베버식 계급 개념에서는 ‘만국의 건축가여, 단결하라’거나 ‘만국의 치과의사여, 단결하라’는 식으로 말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베버는 파편화에 기초해 계급 개념을 규정하고 그 파편화를 극복할 여러 방법을 제시하는 반면, 마르크스의 개념에서는 사람들을 하나의 계급으로 결속시키는 요인이 무엇인지가 핵심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접하는 계급 개념은 베버의 개념보다도 훨씬 조야합니다. 영국에서 가장 흔한 계급 구분법은 사람들을 A, B, C, D, E의 다섯 그룹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예컨대 A 그룹에는 전문직, 경영직, 관리직이 속합니다. 최하위인 E 그룹에는 불안정 노동자, 하위직 육체 노동자가 속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분류법 안에는 자본가가 없습니다. 자본가가 없으면 당연히 착취도 없겠죠. 또 이런 구분법의 초기 버전에서는 자본가를 미치광이(lunatic)과 함께 ‘기타’로 분류하기도 했습니다. [웃음]

마르크스의 계급 개념 ─ 계급은 사회적 관계다

마르크스의 계급 개념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개념이 왜 더 유용한지 설명하겠습니다.

마르크스는 어느 사회에서든 사람들이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특정한 사회 관계를 맺게 되는데, 그 관계가 사회에서 부를 생산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마르크스는 이 사회 관계를 생산관계라고 불렀는데, 생산관계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착취 관계입니다. 우선 착취를 차별이나 천대의 일종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계급 사회에서 사회 구성원 대다수는 노동을 해야 하고, 그들의 노동 덕분에 소수는 노동의 부담에서 해방됩니다. 그 소수가 다수에게서 부를 뽑아 내는 방법, 그것이 착취입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 소유주들은 채찍을 휘둘러 노예들에게 강제로 일을 시켰습니다.

자본주의 착취 관계는 모습이 다릅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임금노동자는 생계를 위해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고, 임금으로 가져가는 것보다 더 많은 부를 생산합니다. 이렇게 노동자들이 자기 임금 몫 이상으로 창출하는 가치를 마르크스는 ‘잉여가치’라고 불렀습니다. 이 잉여가치가 자본가 이윤의 원천입니다. 착취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착취 관계의 양쪽에 있는 집단들 사이에 갈등이 내재돼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 계급 개념은 사람들이 집단 행동에 나서는 공통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전국노동자대회에 참가한 이주노동자들 ⓒ이미진

생산수단

둘째, 생산수단의 소유 관계입니다. 이는 부를 생산하는 수단을 사회의 어느 집단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느냐는 문제입니다. 봉건제 하에서 농노들은 토지, 농기구, 가축 같은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의 착취 관계는 경제적 강제력보다는 영주들의 무력으로 뒷받침됐습니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노동자들은 자본가가 지배하는 생산수단에 가서 일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하에서 착취 관계는 주로 경제적 방식으로 강제됩니다. 마르크스는 임금노동자가 이중적 의미에서 자유롭다고 했습니다. 노동자는 한편으로는 누구를 위해 일할지 자본가를 고를 자유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하지 않고 굶어죽을 자유가 있습니다.

요컨대 두 가지 질문을 던져 한 사회의 계급 구조 전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 누가 누구를 착취하는가? 둘째, 누가 생산수단을 지배하는가? 이런 접근법의 가장 큰 강점은 계급을 관계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주류 사회학은 계급을 독립적 범주들로 봅니다. 마치 슈퍼마켓 진열대에 놓인 통조림 캔인 것처럼 말이죠. 반면 마르크스의 관점으로 보면, 계급 간 적대와 계급투쟁의 발생 가능성을 볼 수 있습니다. 착취 관계를 둘러싸고 언제나 투쟁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은 경제 환원론인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가장 흔한 비판 하나는 마르크스주의가 ‘경제 환원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경제가 전부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경제가 한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만 주장했습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잘 표현했습니다. ‘경제는 전부가 아니다. 궁극적 결정 요인일 뿐이다.’ 사상·정치·법률 등도 사회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경제가 가장 근원적입니다.

마르크스의 계급 이론이 사회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특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를 들어, 토마 피케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심각해지는 불평등을 잘 묘사해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피케티는 오로지 자산과 소득을 기준으로 계급을 구분하는데, 피케티가 제시한 데이터를 자세히 보면 소득 불평등이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의 계급 구조를 대략 반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꼭대기에는 전체 인구의 1~2퍼센트밖에 안 되는 극소수 부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중요한 자본을 대부분 소유합니다. 다음으로 전체 인구의 5~10퍼센트 정도 되는 놀고 먹는 부자들과 고위 경영자 층이 있습니다. 선진국에서 나머지 대다수 인구는 이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가난합니다.

이런 묘사는 자본주의 계급을 반영하기도 하지만, 소득과 자산 수준에만 집중하므로 진정한 계급 구조를 모호하게 하는 면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노동자들은 소득이 많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노동계급의 일부이고 전투적으로 싸울 수 있습니다.

1960년대에 어떤 사람들은 유럽의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을 ‘노동귀족’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노동귀족’들은 집도 있고 세탁기도 있고 TV도 있으니 더는 투쟁을 이끌 수 없다고들 했습니다. 앙드레 고르즈라는 프랑스 사상가는 1968년 초 《노동계급이여, 안녕》이라는 유명한 책을 냈습니다.1 그러나 바로 몇 개월 뒤 프랑스에서 바로 그 ‘노동귀족’들이 세계 역사상 최대의 총파업을 벌였습니다.

한편 가장 열악한 조건에 있는 불안정 노동자들이 운동을 주도한 때도 있었습니다. 1890년대 영국 런던 이스트엔드 지역의 노동자들은 너무 빈곤하고 사기가 낮아서 더는 투쟁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노동빈곤층이 신노조운동을 일으켜 영국 노동운동의 양상을 바꿔 버렸습니다.

투쟁이 고조될수록, 처지가 비교적 좋든 비교적 열악하든 노동계급이 공통의 이해관계를 위해 함께 싸우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은 차별을 무시하는가?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마르크스주의가 계급 외의 중요한 사회적 경계선을 간과한다는 것입니다. 그중에는 문화적 취향 같은 사소한 것도 있지만, 인종, 성, 성적 지향 같은 훨씬 더 중요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이 중요하지 않다고 보지 않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이 인종과 성에 따라 분열되는 것이 자본가 계급의 지배가 유지되는 데 이롭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노동계급은 이런 형태의 차별을 철폐하는 데에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다는 것이죠.

노동계급 투쟁이 고조될수록 노동자들은 인종, 성, 성적 지향에 따른 차이를 뛰어넘어 서로 단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사회주의 체제로 변혁하게 되면 이런 차별의 물질적 토대가 사라질 것이라고 봅니다.

의식에 따라 계급이 나뉘는가?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에 대한 셋째 비판은 노동계급이 자동으로 체제에 맞서 싸우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에게 계급이란 주관적인 자기 규정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회적 조건입니다. 물론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려면 노동자들의 의식이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초창기 저작인 《신성가족》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들의 목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가 아니라, 그들이 객관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그들이 투쟁에 나서게 하는 객관적 요인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노동자들이 생산을 담당하기 때문에 생산을 멈추고 사회를 운영할 잠재력이 있다. ⓒ이윤선

사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의 의식은 거의 언제나 모순돼 있습니다. 한편으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사회적 조건 때문에 소외되고, 파편화되고, 원자화돼 있다고 느낍니다. 경제적 압박 때문에 매주 월요일 일터로 내몰리다 보면 스스로가 아주 약하고 초라한 기분이 들기 마련입니다. 이런 조건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기 계급의 이익과 충돌하는 관념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연대감, 투쟁의 기억, 다른 노동자들에 대한 공감 같은 것들도 느낍니다.

둘 사이의 모순 때문에 노동계급 내에서 보수성이 조장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투쟁이 일어나면 노동자들은 동료 노동자들과 자신을 결속시키는 공통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노동자들은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집단적 힘을 자각하게 됩니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이, 이것은 바로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계급이 처한 객관적 조건 때문입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이제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에 대해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자본주의 사회에는 두 개의 주요 계급이 있습니다. 하나는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자본가 계급이고, 다른 하나는 임금노동계급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양대 계급 중 어느 하나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먼저, 노동계급의 범위를 조금 확장해야 합니다. 예컨대 노동자들의 자녀처럼 그들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지만 노동자들의 임금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노동계급과 같은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노동계급이 착취당하는 정도에 따라 삶이 좌우됩니다.

병원과 학교 등에서 일하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처럼 이윤을 창출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자본주의 운영과 [간접적으로] 이윤 창출에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그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은 대체로 민간부문 노동자들의 처지와 연동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도 노동계급 다수와 이해관계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노동계급과 자본가 계급 외에도 두 부류의 작은 집단이 양대 계급 사이에 끼어 있습니다. 첫째, 중소기업인, 소상점 주인, 벤처 사업가 등 마르크스가 프티부르주아지라고 부른 독립적 소(小) 소유자 집단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탄생하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성숙하면서 이 집단도 변했습니다.

오늘날 가족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작은 사업을 운영하는 사람은,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자본가 구실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게 임금을 받는 노동자 구실을 하는 이중적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모순 때문에 프티부르주아지는 양대 계급 사이에서 오락가락합니다. 스스로 자산을 소유하므로 자본가들에게 동질성을 느낄 수도 있지만 스스로 일하므로 노동계급에게 동질성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세계의 많은 농민들이 바로 이런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이 사실을 꼭 알아야 합니다. 오랫동안 농민은 세계에서 가장 큰 사회집단이었습니다. 이제는 임금노동자가 농민보다 많지만 말이죠. 그럼에도 농민은 이집트 같은 나라에서는 여전히 매우 중요한 사회집단입니다. 이런 나라에서 노동계급이 혁명에 성공하려면, 농민이 처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아야 합니다. 노동자 혁명으로 농민도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서 농민의 지지를 얻어야 합니다.

신중간계급

양대 계급 사이에 끼어 있는 둘째 집단은 흔히 ‘신중간계급’이라 불립니다. 그들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등장했습니다.

자본주의 초기에는 자본가들이 직접 작업장을 운영하고 노동자들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기업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자본가들은 자기 대신 작업장을 운영할 특수한 임금노동자들을 고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문에 작업장 내에 경영직·관리직 등 관료 계층이 형성됐습니다.

이 관료층의 최상층은 자본가 계급과 섞여들게 됩니다. 반면 관료층의 최하층은 겉보기에는 노동계급과 거의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 계층에는 매우 모순된 처지에 있는 온갖 스펙트럼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를 창출하고 체제를 운영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산적 구실을 하기도 하고, 노동자들을 더 심하게 쥐어짜고 단속하는 구실을 하기도 합니다.

계급투쟁이 일어나면 이 집단은 양대 계급 중 어느 한쪽으로 이끌립니다. 노동자 투쟁이 강력할수록 이 계층의 하층 일부가 노동자 편으로 이끌릴 가능성이 커집니다.

노동계급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

마지막으로, 마르크스가 왜 노동계급을 특별한 존재로 봤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하에서 사회 혁명을 이끌 수 있는 규모와 힘을 가진 유일한 세력입니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자본가들은 프롤레타리아를 세계적 규모로 창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자신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을 창출한다는 마르크스의 말이 뜻하는 바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은 20억 명 정도 됩니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데 필수적인 존재이므로 힘이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노동자들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같은 체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흡혈귀는 희생자의 피를 빨지 못하면 죽습니다.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일 때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제조업이나 기타 전통적 산업부문의 노동자들에게만 그런 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본이 이윤을 많이 얻는 소매업·서비스업 부문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도 같은 힘이 있습니다.

마르크스가 노동계급을 주목한 둘째 이유는 노동계급의 집단적 성격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도시에 엄청난 규모로 몰려 있습니다. 세계 역사상 최초로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모여 삽니다. 노동자들은 사업장 단위로도 대규모로 모여 있습니다. 이 때문에 사업장이 노동자 조직의 무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노동계급은 한 곳에 모여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가들은 대체 가능한 동질적 노동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서로 비슷한 조건에 처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서로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끼리도 쉽게 동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사흘 동안 ‘맑시즘2015’에서 들은 한국 노동자들의 처지는 영국 노동자들의 처지와 비슷한 것입니다.

전투적

마르크스가 노동계급을 중시한 셋째 이유는, 자본주의가 노동자들로 하여금 투쟁에 나서도록 한다는 점입니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끊임없이 창출해야 하므로 노동자들을 계속 압박해야 하고, 그런 압박 때문에 노동계급은 세계 역사상 가장 전투적인 계급이 됐습니다. 노예나 농민 반란은 몇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하에서는 몇 년에 한 번씩 대규모 파업이 일어나고, 몇십 년에 한 번 꼴로 혁명이 일어납니다.

노동계급은 탄생 초기부터 스스로 투쟁을 조직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노동계급은 처음에는 폭동이나 기계 파괴 운동 같은 방식으로 투쟁했습니다. 역사가 EP 톰슨은 이를 ‘임금 협상 폭동’이라고 불렀습니다. 오래지 않아 노동자들은 더 안정적인 조직을 고안했습니다. 노동조합이 그것입니다.

마르크스가 노동계급을 중시한 넷째 이유는, 노동계급에게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꿀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할 만큼 많은 부를 생산합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부를 창출할수록 자신들의 처지가 더 나빠진다는 모순을 겪습니다. 자본주의는 부를 집단적으로 생산하는 체제여서 이 모순을 개인적 방식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노동자들은 반란을 일으켜 공장을 접수하면 그 공장을 집단적으로 운영해야 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노동운동 역사에서 그토록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때 민주주의는 의회민주주의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등장하는 훨씬 더 풍성한 민주주의를 뜻합니다.

노동자들은 혁명적 분출 때마다 새 노동자 권력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1871년 프랑스 노동자들이 파리 코뮌을 건설했던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20세기에는 노동자 평의회 같은 기관들이 등장했습니다. 이 기관들은 모두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려 하고 사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려 하는 노동계급의 본능을 표현했습니다.

21세기에는 지난 세기보다 더 많은 노동자 민주주의가 등장할 것입니다. 바로 그래서 계급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정리

어떤 분이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농민을 프티부르주아라고 볼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소유 여부가 기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소상점 주인들도 부동산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한 사람이 자본가 구실과 노동자 구실을 둘 다 한다는 것입니다. 토지를 소유한 농민이라면 1인 3역을 하는 셈입니다. 자본가 구실과 노동자 구실을 하면서 지주 구실까지 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프티부르주아의 지위가 고정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영국에서 농민들이 땅에서 쫓겨난 후 프롤레타리아와 농업 자본가로 분화하는 과정을 묘사한 바 있습니다. 레닌은 러시아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점차 편입되면서 러시아 농민층 내부에서 분화가 일어나는 과정을 묘사했습니다.

농민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통합되면서 소상공인과 점점 비슷해집니다. 그들의 일부는 가족의 생계를 그럭저럭 유지하면서 현재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성공해서 농업 자본가가 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임금노동자를 고용하고 투자를 늘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반면, 토지를 잃고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레닌이 지적했듯이, 농민 내에도 계급 분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삼성테크원 노조 등 삼성에 맞서 연대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 처지가 다양한 노동자들도 단결해 투쟁할 수 있다. ⓒ이윤선

노동계급과 차별받는 사람들

다음으로는 노동계급 해방이 다른 집단도 해방시킬 것인가 하는 물음에 답하겠습니다. 저는 인종차별이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한 동지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인종차별은 자본주의 초창기에 대서양 노예무역으로 아프리카인들이 노예로 팔리면서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노예들을 죽도록 일 시켜 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등장했습니다.

미국 독립선언문에는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사람들의 일부는 노예 소유주였습니다. 인종차별은 흑인 노예들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했습니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 후에도 미국을 비롯한 세계 지배자들은 인종차별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쓸모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는 노동계급을 분열시킬 뿐 아니라, 노동계급의 일부를 지배계급에게 순종하게 만드는 데도 유용했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레닌은 사회주의자가 천대받는 사람들의 호민관이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성 차별은 조금 다릅니다. 여성 차별은 자본주의 전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성 차별도 계급 사회의 산물이었습니다. 인류는 정착해 농경을 하기 전에는 매우 평등주의적인 소규모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성별 분업이 있었지만, 여성의 노동이 무시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인류가 정착 생활을 시작하고 농업이 발달하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먼저, 농업이 발달하면서 잉여 생산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의 극소수 구성원만이 잉여 생산물을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농업이 발달하면서 육아와 병행할 수 없는 형태의 노동이 훨씬 더 중요해졌습니다. 즉, 계급이 등장하면서 여성 차별도 등장했던 것입니다. 주요 생산 활동에서는 여성이 하는 구실이 점점 줄어든 반면, 노동력 재생산 과정에서는 여성의 책임이 더 많아졌습니다. 가족은 부를 물려주는 중요한 수단이 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배계급 여성들도 차별당하게 됐습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과거의 가족 제도를 물려받아 변형시켰습니다. 자본주의 하에서 가족은 전과 달리 생산의 단위가 아니라 소비의 단위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하에서는 한 가지 모순이 발생합니다. 자본주의는 한편으로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다음 세대 노동력을 키우는 곳으로서 가족이 필요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들을 착취 체제에 끌어들이면 이윤을 더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모순 때문에 자본주의 하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바뀌어 왔습니다. 여성들은 점점 작업장으로 편입돼 남성들과 함께 착취당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여성들이 노동계급으로서 힘을 갖게 되고 남성 노동자들과 연대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됐습니다. 최근 영국에서 벌어진 여러 번의 공공부문 파업에서 파업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습니다.

자본주의에서 가족의 구실을 이해하면 청소년들이 받는 천대가 어떻게 변할지도 알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하에서 가족은 자본주의 체제의 온갖 압력과 긴장을 고스란히 재현합니다. 반면, 사회주의 하에서는 사회 전체가 함께 다음 세대를 양육할 것입니다. 자본주의 하에서 교육은 다음 세대 노동자들을 훈련시키는 과정일 뿐입니다. 그래서 규율과 평가가 그토록 강조되는 것입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교육은 다음 세대 노동력을 훈련시키는 면보다는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면에 더 초점을 맞출 것입니다.

프레카리아트

마지막으로, 프레카리아트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프레카리아트론은 그저 노동계급의 일부의 처지가 비교적 열악하게 됐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동계급과 이해관계가 전혀 다른 새 계급이 탄생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비교적 처지가 나은 노동자의 임금과 비교적 처지가 열악한 노동자의 임금은 함께 올라가고 함께 내려가는 경향이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사회적 지위와 이해관계가 같은 것입니다.

프레카리아트론, 특히 가이 스탠딩의 프레카리아트론은 여러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 스탠딩은 프레카리아트를 규정하면서 다양한 집단을 뭉뚱그려 버립니다. 스탠딩은 우선 임시직 노동자를 프레카리아트에 포함시킵니다. 영국에서 임시직 노동자는 전체 노동인구의 5퍼센트 정도밖에 안 됩니다. 다음으로, 스탠딩은 임시직보다 수가 훨씬 더 많은 시간제 노동자를 프레카리아트에 포함시킵니다. 그러나 많은 시간제 노동자들은 한 곳에서 오랫동안 일합니다.

이에 더해, 스탠딩은 ‘자신의 업무를 통제할 수 없는’ 사람들도 모두 프레카리아트에 포함시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평범한 직장인은 누구나 그런 처지일 것입니다. 스탠딩은 중국 노동자 전체도 프레카리아트에 포함시킵니다.

이처럼, 엄청나게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놓고 프레카리아트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집단은 어떤 면에서도 노동계급과 이해관계가 다른 별도의 계급이 아닙니다.

둘째, 프레카리아트론은 역사를 무시합니다. 프레카리아트론은 1950~60년대 서유럽 노동자들이 누렸던 조건을 ‘정상 상태’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초기의 노동계급은 오늘날의 어떤 노동자보다 훨씬 더 불안정했습니다. 1890년대 런던의 항만 노동자들은 어떤 종류의 근로계약서도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아침 항만에 줄 서서 누군가 일을 시켜 주기를 기다리곤 했죠. 그런데 처지가 불안정하다고 해서 이 노동자들이 싸울 수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 런던 항만 노동자들이 고용 안정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투쟁에 나서자 당시 많은 좌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셋째, 프레카리아트론은 노동계급의 약점을 지나치게 과장합니다. 자본은 노동자를 착취할 뿐 아니라 노동자에게 의존하기도 한다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형편없는 임금을 받고 일하는 고객 서비스 노동자들의 기술도 자본가들에게는 필요합니다. 예컨대 스타벅스 경영진이 고객 서비스를 훌륭하게 수행하는 노동자를 발견한다면, 그 노동자를 해고하지 않고 붙잡아두려 할 것입니다. 같은 일을 할 노동자를 새로 훈련시키는 것보다 훨씬 쉽고 돈도 덜 들기 때문이죠.

경제 위기 때 영국 기업들은 인력 보유에 매달리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임금은 사정없이 쥐어짰지만, 경기가 회복될 때를 대비해 숙련 노동자를 해고하지는 않고 붙잡아두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난 10~15년 간 미국과 영국 모두에서 노동자들의 근속연수가 전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를 실제보다 더 나쁘게 인식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영국 노동자들은 직장에서 상사들의 마구잡이 닦달에 시달리기 때문에 자신감이 낮습니다. 그러나 상사가 노동자들을 마구잡이로 닦달한다고 해서, 노동자들을 제멋대로 쫓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언제든 쫓겨날 수도 있다고 느끼다 보니, 투쟁에 나설 자신감도 낮아지게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아무리 작은 투쟁에서라도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을 자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프레카리아트론에 대해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점은, 프레카리아트에 속한다는 노동자들이 안정적인 노동자들과 같은 사업장과 생산 네트워크에서 함께 일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비교적 안정적인 노동자들도 비교적 처지가 열악한 노동자들의 조건을 개선하는 데에 이해관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런던의 어느 대학교 청소 노동자들이 외주화되면서, 영국 법무부가 대부분이 이주노동자들인 이 노동자들을 강제 출국시키겠다고 협박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맞서, 그 대학교에서 처지가 가장 안정적인 노동자들부터 가장 불안정한 노동자들까지 함께 파업을 벌였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불안정 노동을 철폐해야 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파업을 주도한 사람들은 혁명적 사회주의자였습니다. 즉, 계급에 대해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 실천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 계급론을 명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1. 실제로 앙드레 고르즈의 《노동계급이여, 안녕》은 1980년대 출간됐다. 그러나 1968년 초 고르즈는 노동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부정하며 “유럽 자본주의가 극적으로 위기에 빠져 노동자 대중이 혁명적 총파업에 나서게 만드는 일은 가까운 미래에는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에서 역사상 최대 규모 총파업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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