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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제크를 둘러싼 장정일과 이택광의 〈한겨레〉 논쟁:
이슬람에 대해 그들 모두가 놓친 것

최근 〈한겨레〉 지상에서 소설가 장정일 씨와 이택광 교수가 이슬람교에 대한 지제크의 견해와 이슬람주의에 대한 좌파의 태도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이하 존칭, 직함 생략).

장정일은 진정한 좌파라면, 샤를리 에브도 사건에서 이슬람주의(‘정치적 이슬람’이라고도 한다)는 물론이고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날을 세울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지제크의 견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이택광은 지제크의 좌파 비판이 주류 사회민주주의를 겨냥한 것이지 급진좌파를 겨냥한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논쟁 과정에서 장정일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리더였던 고(故) 크리스 하먼의 책 《이슬람주의, 계급, 혁명》을 거론했는데(〈한겨레〉 인터넷 판에는 없고 인쇄본에만 나온다), 하먼의 책을 번역한 사람으로서 장정일의 짧은 언급이 원저의 핵심 주장이나 맥락과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 또 이택광의 반론 중에도 하먼의 비판 대상이었던 ‘이슬람주의=파시즘’론이 얼핏 보여서 몇 자 적는다.

장정일은 중동의 세속 좌파가 몰락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좌파가 세속 국가에 협력했을 때, 이슬람 세력은 그들을 ‘압제자들’, ‘이교도적’, ‘세속주의자’로 비난했다. 반대로 좌파가 이슬람주의를 지지하기 위해서는 소수민족과 소수 종교 집단, 여성에 대한 좌파적 가치를 포기해야 한다. 이 때문에 중동의 좌파는 세속 국가나 이슬람 운동, 양편으로 흡수되면서 공중분해됐다.”

좌파적 가치

하먼의 책을 보면, 중동에서 이슬람주의가 유력한 정치 세력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세속 좌파의 주류였던 아랍 민족주의가 실패한 결과였다. 즉, 제2차세계대전 후 서방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중동 각국에서 아랍 민족주의 세력(예컨대, 이집트의 나세르)이 권력을 장악했지만, (장정일의 주장과 달리) ‘사회주의’가 아니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빗나가고,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보듯이) 원래의 미사여구와 달리 서방 제국주의에 대항하지 못하고 타협하는 바람에, 이에 실망하고 환멸을 느낀 대중 속에서 이슬람주의가 점차 정치적 대안으로 부각됐다는 것이다.

이때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 둘 다의 대안적 정치 세력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던 스탈린주의나 마오쩌둥주의 좌파들은 이슬람주의를 모종의 파시즘이라고 비판하며 아랍 민족주의 ‘세속 국가’와 협력함으로써 스스로 정치적 몰락을 재촉하고 말았다.

그런데 오늘날 스탈린주의에 타협적인 지제크도 “이슬람 근본주의는 자유주의에 내재한 결함 때문에 발생한 파시즘적인 반응”(이택광)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과거의 문제점을 답습하고 있다고 하겠다(물론 지제크는 좌파가 서구 사회민주주의 세속 국가와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 듯하다. 그러나 무슬림 혐오에 맞서 무슬림을 방어하기를 꺼리면서 사실상 뒷문을 열어 준다).

요컨대, 중동의 세속 좌파가 “공중분해”된 것은 이슬람주의를 ‘비판’하지 않은 것 때문이 아니라, 국가에 협력한 것, 다시 말해 이슬람주의를 잘못 비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하먼의 주장이다.

장정일은 좌파가 이슬람주의를 지지하려면 좌파적 가치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하먼의 핵심 주장은 중동의 세속 좌파가 이슬람주의에 종파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 오히려 좌파적 가치 포기와 결부돼 있었고, 그 결과 오히려 이슬람주의가 득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반혁명 세력이 득세한 이집트에서 일부 세속 좌파가 보인 종파적 태도는 이를 그대로 보여 줬다.

이집트의 주류 세속 좌파에 속하는 나세르주의자들은 2011년 혁명 후 집권한 무슬림형제단 정부에 반대해 군부의 정치 개입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이슬람주의는 파시즘이고 반민주적인 반면 군부는 세속적 가치를 대변하는 세력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르시 정권의 이슬람주의에 반대한다면서 군부를 편든 것은 완전히 잘못된 입장이었다. 결과적으로, 군부를 지지했던 나세르주의자들은 오늘날 이집트에서 반동적 세력이 득세하도록 길을 열어 준 셈이 됐다.

반면, 하먼의 이슬람주의 분석에서 영감을 얻은 이집트 혁명적사회주의자들(RS)은 무르시 정권을 비판할 때 그들의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그들이 개혁주의 세력이라서 혁명을 일관되게 밀어붙일 수 없다는 것을 주되게 비판했다. 그래서 무슬림형제단을 비판하면서도 군부가 훨씬 더 거대한 반혁명 세력이라고 옳게 주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슬람주의에 대한 장정일의 태도는 따지고 보면, 중동의 세속 좌파가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상에 대한 비판”

그리고 내가 볼 때 장정일은 ‘계몽주의적 종교 비판’의 문제점을 중동의 좌파와 공유하고 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말이 그렇다.

“유럽·기독교 세계에는 마르크스가 있기 전에 ‘신은 인간의 창조물’이라고 말한 포이어바흐가 있었으나, 아랍·이슬람권에는 포이어바흐가 없었다. … 요점은 급진 좌파의 ‘급진’을 뿌리까지(radical) 사유하는 것이며, 그 끝에서 무신론을 만나는 것이다.”

불교가 무신론인지를 두고 논란이 있는 데서도 드러나듯이, 무신론은 종교 비판의 ‘뿌리’도 ‘결론’도 되지 못한다. 또, 포이어바흐가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는 유물론적 주장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이른바 ‘인간학적 유물론’은 역사적이지 않고 추상적이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한계를 넘어서서, 종교 비판의 진정한 핵심은 “천상에 대한 비판을 지상에 대한 비판으로” 돌리는 것, 다시 말해 사람들이 종교에 귀의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현실 자체의 변혁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종교는 천대받는 사람들의 탄식이요, … 대중의 아편”이라는 유명한 말은 현실의 고통이 힘겨울 때 사람들이 한숨 쉬며 그 고통을 덜어 줄 진통제를 찾듯이, 종교는 단지 사람들의 잘못된 관념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현실의 착취와 억압, 고통에서 비롯한 것이므로 그 현실을 바꾸는 것만이 진정한 ‘근본적’(radical) 종교 비판임을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점에서 지제크나 이택광이 “자유주의에 내재한 결함” 때문에 이슬람주의가 발생했고 그 “결함을 해소하는 방법은 자유주의 가치의 보편주의를 더 급진적인 좌파의 관점에서 전유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근본적 해법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리처드 도킨스의 책 《만들어진 신》에 대한 최일붕의 서평, “계몽주의 종교 비판의 한계를 보여 준 책”을 참조하시오).

2003년에 이라크 침략을 기획하고 실행한 미국 백악관과 펜타곤 전쟁광들의 기독교와 흑인 민권 운동을 이끌었던 마틴 루서 킹 목사의 기독교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교리만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슬람교든 기독교든 특정한 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특정한 정치적 행동에 끌리게 되는 정치·경제·사회적 현실이나 맥락에 대한 분석과 해결책 모색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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