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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게재 카카오 김범수, 배달의민족 김봉진 ‘기부’ 공언:
기업의 자선 ─ 노동자들을 기만하고 혼동케 하려는 위장술

최근 카카오의 김범수, 배달의민족의 김봉진 두 창업자가 재산의 절반(각각 5조 원과 5500억 원)을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주류 언론들은 “한번도 경험 못한 ‘신체제 자본가’들이 출현”(〈조선일보〉), “‘대물림 집착’ 재벌과 비교”(〈한겨레〉) 등의 기사를 실으며, 이들을 찬양하고 나섰다. 대통령 문재인도 “벤처기업가들이 새로운 기부문화를 창출하고 있어 매우 뜻 깊다”며 거들었다.

그러나 대기업주들이 ‘자선 재단’을 만들어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피하고, 감세 혜택 등을 누려 온 것은 자본주의에서 매우 오래된 역사이다. 또한 이런 대기업주들은 흔히 임금 인상과 생활수준 향상 요구는 반대하면서, 사회를 친기업적 방향으로 이끄는 데에 ‘자선 재단’들을 이용해 왔다. 이런 문제는 김범수, 김봉진 사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글은 노동자들을 혼동케 만들려 하는 기업들의 기부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이 글의 필자인 수전 로젠털은 캐나다에 거주하는 의사이자 활동하는 사회주의자로, 《권력과 무권력》(2006년), 《전문가라는 독: 전문가들은 어떻게 사회운동을 방해하고, 왜 노동자들이 우리의 투쟁을 이끌어야 하는가》(2009년)의 저자다. [ ] 안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노동자 연대〉 편집팀이 덧붙인 말이다.

빌 게이츠는 순자산이 5백50억 파운드(한화 96조 5천2백50억 원)인 세계 최고 부자다. 1998년 그의 기업 마이크로소프트는 불법 행위 혐의로 기소당했고, 게이츠 자신은 무자비한 독점 자본가라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4년 뒤, 자선 재단을 창립한 게이츠는 자비로운 자선가라고 칭송받았다.

사람들이 모두 그의 느닷없는 둔갑에 현혹된 것은 아니었다. 누구도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는 말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많은 노동자들이 헛갈렸을 것이다. “빌 게이츠는 우리 계급의 적일까, 착한 사람일까?” 이런 혼동은 노동자들이 계급의 적에 맞서 단호히 행동하는 데 방해가 된다.

19세기 이후 자본가라는 도둑들은 자선사업을 이용해 성인군자인 척하고, 그들의 모습대로 사회를 만들고,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혼동을 조장했다.

19세기의 자본주의는 너무 적나라해서, 노예제, 원주민 학살, 혹사, 대량 기아, 전쟁 같은 자본주의의 범죄가 만천하에 밝히 드러났다. 천대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은 자본주의라는 이 괴물에 진절머리를 느끼며 반란을 일으켰다. 소수가 다수를 폭력만으로 지배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그 소수는 설득도 사용해 희생자들이 굴복하거나 혼란을 느껴 마비되도록 해야 한다. 이 위업을 달성하려면 자본가 계급은 인류의 골칫거리가 아니라 인류의 후원자, 심지어는 인류의 구원자로 비쳐야 한다. 자선사업은 이런 변신을 할 수 있는 비결이다.

기부를 이용해 사회적 저항을 약화시키기

《부의 복음》(1889)에서 미국의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는 부자들이 적절한 곳에 기부를 하면 사회적 저항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카네기는 임금 인상과 생활수준 향상 요구는 반대했다. 이윤을 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처지를 스스로 개선할 수 있는 기회”를 창출하는 것이 낫다고 봤다. 물론 그 기회들은 수익성이 있거나 이윤 창출을 촉진해야 한다.

“자선기업”으로 포장된 포스코의 실체 포스코 사내하청지회 이지테크 전 분회장 고(故) 양우권 열사. 기업들은 기부 이미지를 이용해 자신들의 본 모습을 가리고 싶어 한다. ⓒ이미진

카네기는 정부에 돈을 대기보다는 자선 재단을 설립하라고 부자들에게 조언했다. 사회를 친기업적 방향으로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 석유왕 존 D 록펠러도 이 계략을 기꺼이 수용하며 힘주어 말했다. “사회악은 근본적으로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육체적‍·‍정신적인 것이다. 공중위생과 사회도덕을 개선하면 사회악이 치료될 것이다.”

록펠러는 이 목적을 이루려고 1901년에는 록펠러의학연구소를, 1913년에는 록펠러재단을 설립했다. 이 투자는 성공을 거뒀다. 1914년 파업 광원들이 대거 살해된 ‘러들로 학살’이 일어났고, 그 책임자가 록펠러라는 사실에 대중은 격노했다. 그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있을 때 뉴욕의 신문들은 록펠러의 자선사업에 갈채를 보내며 그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했다.

제국주의적 수탈을 은폐하는 ‘국제 원조’

자본가 계급은 전쟁을 자선사업으로 포장했다. ‘인도적 개입’으로 알려진 제국주의적 전쟁들이 그것이다. 공격받는 피해자들에 대한 걱정을 표명하며 사람들에게 그 걱정거리를 해결하는 데 결집하자고 촉구함으로써, 전쟁에 대한 반감을 전쟁과 전쟁 수혜자를 지지하는 활동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다.

“국제 원조”는 제국주의적 착취를 은폐하는 데 이용된다 미국의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에는 “인도적 개입”이라는 명분이 붙었다. ⓒJames Selesnick

‘국제 원조’ 형태의 자선사업은 제국주의적 착취를 은폐한다. 가난한 나라들은 대체로 초착취를 당하는 나라라기보다는 개발이 지연된 나라로 묘사된다. OECD 회원국들이 제공하는 개발 원조액은 해마다 8백90억 파운드(한화 1백56조 1천9백50억 원)인데, 이 돈은 보통 원조를 제공한 국가를 위한 시장 개방과 확대에 투자된다.

게다가 이 액수는 선진국들로 흘러 들어가는 부의 6.5퍼센트밖에 안 된다. 기업들은 해마다 6천1백60억 파운드(한화 1천81조 8백억 원) 이상을 가난한 나라들한테서 뜯어간다. 여기에 가난한 나라들의 부채 상환액 4천1백10억 파운드(한화 7백21조 3천50억 원)를 더하면, 해마다 1조 3천7백억 파운드(한화 2천4백4조 3천5백억 원)가 가난한 나라에서 부유한 나라로 흘러 들어간다.

록펠러재단의 인종차별 전력

《록펠러 주술사들: 미국의 의료와 자본주의》(1979)의 저자 E 리처드 브라운은 이 책에서 리랜드 스탠포드, 존스 홉킨스, 앤드루 카네기, 존 D 록펠러 같은 미국 자본가들이 어떻게 자선사업을 활용해 교육‍·‍과학‍·‍의료 기관들이 자본주의를 지지하게 만들었는지를 보여 준다.

록펠러의 자선단체들은 의료가 ‘과학적’이어야 하고, 질병의 근원을 밝히는 것은 결국 생물학이라고 주장했다. ‘과학적’이라는 말의 뜻을 ‘생물학적’인 것으로 한정하면, 사회적 요인들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지 ‘과학적’인 것이 아니게 돼, 묵살할 수 있게 된다. 스트레스를 받는 부모는 천대를 받아서가 아니라 불안 장애라는 진단을 받는다. 고혈압을 앓는 노동자는 안전한 작업 환경을 보장받는 것이 아니라 약을 처방받는다. 의료는 증상만을 다룰 뿐, 그 증상을 일으키는 사회적 조건을 다루지는 않는다.

사회 문제를 생물학적 결함으로 환원하는 관점에서 시행되는 의학 연구, 교육, 치료에는 인종차별 사상이 끼어들기 쉽다. 미국에서 수집되는 의료 통계 자료들은 보통 ‘인종’을 기반으로 한다. 유아사망률, 발병률, 예상수명을 인종에 따라 측정하는 방식은 인류가 인종으로 나뉘고 인종이 유효한 생물학적 범주라는 신빙성 없는 관념을 뒷받침한다. 미국에서는 [백인보다] 흑인의 건강 문제가 더 심각한데, 흑인이 생물학적으로 뭔가 달라서가 아니라, 인종차별적 사회가 인종 별로 상이한 효과를 안겨 주기 때문이다.

우생학

1900년대 초 자본가들의 자선재단들은 명문대 교수들을 도와 ‘인종학’과 궁극적으로 우생학을 발전시켰고, 이를 통해 ‘사회적 부적격자’들을 제거하려 했다. 1910년 록펠러, 카네기, 해리먼의 자선재단들이 하버드대학교 생물학 교수 찰스 대븐포트에게 연구 자금을 댔다. 대븐포트는 빈곤과 불평등에 유전적 근거가 있음을 입증하려 했다. 대븐포트의 우생학기록연구소는 미국에서 시행된 우생학적 정책의 양대 축을 형성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것은 바로 강제적 불임과 인종차별적 이민 통제였다.

1935년까지 미국에서 2만 명 이상이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부류’에 속한다는 이유로 강제 불임 시술을 당했다.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부류’에는 비행 청소년, 알코올 중독자, 약물 중독자, 환자, 장애인, 빈민, 고아, 실업자가 포함됐다. 심지어 IQ 테스트 점수가 낮은 사람들도 포함됐다.

록펠러재단은 독일의 우생학 프로젝트에도 자금을 댔다. 1933년 독일 나치는 대븐포트의 1922년 ‘원형단종법’을 보고 자신의 ‘유전병 피해 자녀 예방법’을 다듬었다. [이 법에 따라 약 40만 명가량이 강제불임 시술을 당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저항 운동이 건강 약화의 원인으로 사회적 조건을 지목하자, 록펠러재단은 1975년에 학회를 열어 대응했다. 그 학회는 의료 정책의 ‘새로운 방향’ 정립을 표방했다. 그 학회는 ‘책임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자고 선동하는 ‘무책임한 개인들’을 언급하며 그런 사람들이 ‘질병 유발 습성’에 빠졌다고 비난했다.

록펠러재단이 발행한 정책 문건들은 미국 정부의 보고서, 《건강한 사람들: 건강 증진과 질병 예방에 관한 공중보건국장 보고》(1979)의 기초가 됐다. 이 보고서는 ‘개인들의 무절제한 행위’를 ‘의료 비용 급등’의 원인으로 지목했고, 대중이 건강한 식생활을 하고, 몸을 많이 움직이고, 담배를 끊고, 술을 절제하고, 마약을 하지 않고, 성행위를 자제하고, 안전수칙을 지키며 일하도록 교육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선은 자본가의 조건 없는 시혜가 아니다

자선재단과 원조 제공국들은 기업의 이익이 곧 우리 모두의 이익이라고 우리를 현혹하려 애쓴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백70년 전에 설명했듯이, 자본가들은 뭔가를 내주는 것이 아니다. 빼앗아가는 것이다.

“영국 자본가 계급은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만 자선을 베푼다. 그들이 조건 없이 뭔가를 내놓는 경우는 없다. 그들은 기부를 사업의 일환으로 보고 가난한 사람들과 거래를 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자선사업에 돈을 쓰는 만큼 더는 애먹지 않을 권리를 산다. 그럼으로써 당신네들은 어두운 구덩이 속에 계속 있어야 하고 당신들의 고통을 드러내며 내 예민한 신경을 건드리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당신들은 전처럼 절망할 테지만 그 절망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 이것이 내가 진료소에 기부금 20파운드를 내고 산 권리다!”

“자비로운 자본가의 자선이라는 것은 얼마나 악랄한가! 자본가는 노동자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척하면서 노동자들의 피를 빨아먹고는 세상 앞에 자신을 인류의 전능한 후원자로 내세운다. 하지만 탈탈 털린 희생자들에게 그들이 내놓는 것은 자기 소유의 백분의 일밖에 안 된다!”

2003년 세계 최고 부자 빌 게이츠는 보츠와나에 가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성매매 여성들을 만나 안전한 성관계를 하라고 장려했다. 언론은 빌 게이츠의 측은지심에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누구도 왜 그의 재산이 보츠와나 국내총생산의 4배나 되는지는 묻지 않았다. 게이츠재단이 해마다 쓰는 돈 13억 7천만 파운드(한화 2조 4천43억 5천만 원)는 게이츠 소유 재산의 2.5퍼센트밖에 안 된다. 게다가 그는 이 돈에 대한 엄청난 세금 공제를 받는다.

자선재단들은 수입에 대해 세금을 거의 또는 아예 내지 않고, 그 기부금은 대부분 세금 공제를 받는다. 심지어 자선재단들은 정부의 보조금을 받지만, 그 돈을 어떻게 썼는지 공개하지는 않는다. 사립 자선단체들은 자기 단체 이사회에만 보고할 의무가 있는데, 그 이사회들은 대부분 기업인들로 구성돼 있다. 그 결과, 자선재단들의 프로젝트는 [자본주의] 계급 관계에 이의를 제기하는 법이 없고 이윤의 흐름을 방해하지도 않는다.

자본가들은 절대 돈을 거저 주지 않고 꼭 조건을 단다. ‘근로 연계 복지’[노동자들이 일해야 복지를 준다는 것]는 대중 빈곤의 원인이 자본가 계급의 잉여 축적 때문이 아니라 기회와 사회적 지원의 부족 때문이라는 착각을 조장한다. 카네기는 사람들에게 돈을 거저 주면 “나태하고, 술에 취하고, 하찮은 자들의 기가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자본가들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은 거저 받아간다.

노동자가 부를 만든다

노동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자선가들이다. 노동계급은 자본가 계급에 세 가지 방식으로 자선을 베푼다. 첫째,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사용되지 않고 기업주의 금고로 들어가는 잉여를 생산하기, 둘째,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사용되지 않고 부자들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는 세금 납부하기, 셋째, 자선 단체에 기부하기.

그 덕에 부자와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유발한 고통의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된다. 노동자들이 기부하는 돈이 기업들보다 더 많지만, 우리의 기부는 삶을 개선하지 못한다. 우리가 더 많이 기부할수록 정부는 사회복지 비용을 더 삭감해 그 돈을 기업들로 이전한다.

현재 세계의 최고 부자 3백 명이 소유한 부가 최빈곤 30억 명(인도, 중국, 브라질, 미국의 전체 인구를 모두 합한 것과 같은 수)이 가진 부와 맞먹는다. 2016년이 되면, 세계 인구의 단 1퍼센트가 가진 부가 그 외 모든 사람들의 부를 합친 것보다 더 커질 것이다. 부자들이 더 부유해질수록 우리의 삶은 더 피폐해지고 어려워지고 절박해진다. 우리는 자본가의 자선사업이 실제로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들춰내야 한다. 자선은 노동자들을 기만하고 혼동에 빠뜨리기 위한 술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