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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행 교수를 추모하며

한국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자본론》의 국내 최초 완역자인 김수행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7월 31일 향년 73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7월 24일 아들을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갔고, 7월 31일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유가족들은 미국에서 장례를 마친 뒤 다음 주말쯤 고인의 시신을 한국으로 옮길 예정이라고 한다. 성공회대학교는 김수행 교수의 분향소를 8월 4일부터 7일까지 성공회대학교 새천년관 지하 1층에 설치·운영한다고 밝혔다.

맑시즘2015에서 열정적으로 연설하는 김수행 교수 〈노동자 연대〉

1942년에 태어난 김수행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취직을 위해 대구상고에 진학했지만, 서울대 상과대학에 들어가면 입학금을 면제해 준다는 것을 알고는 대학에 진학했다.

이 때문에 고인은 “어릴 적부터 가난에 관심이 많았다. 매우 똑똑한 친구들이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저 친구들이 잘되어야 우리 사회도 잘될 것인데 하고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난다” 하고 회상했다. 게다가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킨 1961년에 대학에 진학한 고인은 박정희 개발독재의 불의에도 큰 영향을 받았다.

정규 대학 교육에 만족하지 못한 고인은 ‘경우회’라는 동아리에 들어가 일본어 책을 읽고 토론하며 마르크스주의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1968년 8월에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보름 동안 중앙정보부에 갇히기도 했다. 경우회 2년 선배이자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신영복 선생에게서 레닌 저작과 북한 소설을 빌려 봤다는 죄목이었다.

결국 대학원을 그만둔 고인은 교수들의 추천으로 1969년 외환은행에 입사해 1972~75년에는 런던에서 근무했다.

런던 생활은 고인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다시 공부하는 데 자극을 줬다. 당시는 1968년 이후 급진화의 영향으로 “마르크스주의가 부활한다고 해서 야단이 났을 때”였고, 1973~74년에 터진 오일쇼크와 공황이 전 세계 경제를 강타하던 때였다. 또 당시 영국 노동자들은 거대한 투쟁으로 보수당 정부를 무너뜨리기도 했다. 결국 아들을 셋이나 둔 “만 33세의 가장이 재산도 없이 더운 가슴 하나로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정치경제학 에세이》)

런던대학교에서 마르크스주의 공황론을 주제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은 고인은 귀국해 한신대 무역학과 부교수와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등을 역임했다.

고인은 “정치경제학 전공자를 영입하라”며 수업 거부, 농성을 벌인 서울대 학생들 덕분에 기존 경제학부 교수들의 반대를 뚫고 1989년 2월 서울대 교수에 임용됐다. 그리고 서울대 교수로 임용되자마자 그 지위를 이용해 당시에 금서(禁書)였던 《자본론》 1권을 번역해 출판했고, 1990년 2월에 3권까지 완역했다.

이 덕분에 영어나 일어로 된 《자본론》을 더듬더듬 읽거나 개설서 등에서 소개한 내용에 만족해야 했던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배우고 그 정수(精髓)에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됐다.

고인 스스로도 “《자본론》의 완역을 가장 큰 연구업적으로 삼고 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해 왔다. 그래서 고인은 이미 여러 차례 개역한 《자본론》을 독자들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면 개역하는 데 최근까지도 몰두했다. 올해 2월에 노동자연대가 주최한 ‘맑시즘2015’ 강연에서도 “올 8월에 나올 《자본론》 개역판을 꼭 사 보라”며 청중들을 고무하기도 했다.

고인은 여러 개설서와 대중적 강연을 통해 《자본론》을 소개하는 데도 큰 힘을 쏟았다. 1990년대까지 김수행 교수의 《정치경제학 원론》은 진보적 학생들의 필독서였다. 가장 최근에 나온 《자본론 공부》도 고인이 강연한 내용을 묶은 것이다. 노동자연대가 매년 주최하는 ‘맑시즘’에도 거의 매번 참여해 강연했는데 그때마다 청중들의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국가자본주의

소련 몰락 이후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에서 멀어져 이러저러한 개혁주의로 전향할 때도 고인은 마르크스주의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2008년 이후 세계경제 위기를 맞아 ‘자본주의 이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고 건설해야 한다는 점을 더욱 강조했다. 이것은 고인이 ‘노동자 계급의 자력 해방’이라는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포기하지 않았고, 소련과 동유럽, 중국, 북한 등 옛 ‘사회주의 국가’들이 서방 자본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국가자본주의’ 사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은 오직 임금노동자로서 생산수단에 대해서는 아무런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고, 노멘클라투라가 생산수단을 자기들 마음대로 사용하거나 처분했기 때문에, 사실상 소련에서는 생산수단은 사회 전체의 소유이거나 인민 전체의 소유가 아니라 당·국가 관료라는 특수한 집단의 소유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가치증식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의 인격화 또는 화신을 자본가라고 본다면, 소련의 국영기업·콜호스·소프호스 등이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자본을 축적했기 때문에, 이 기업들의 대표자 ― 국가든 개인이든 ― 는 당연히 자본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

고인이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에 우호적인 것도 소련·중국 등 ‘현실 사회주의’와 달리 노동자 대중이 사회를 운영하도록 고무한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차베스 혁명에서 가장 본받아야 할 것은 60~70퍼센트의 빈민들을 정치의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입니다. 빈민들에게 희망을 주고 스스로 일을 해 나가게 하는 식으로 사람을 개발해 낸다는 겁니다.”(《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 경제를 말하다》)

물론 고인은 복지국가에도 호의적이었다. 이것은 고인이 1970년대 영국 복지국가에서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인 듯하다. 고인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수업 시간에 외국인인 자신의 아이들까지 세밀하게 보살펴 준 영국 복지 제도에 대해 설명해 주곤 했다.

그럼에도 고인은 복지국가의 이면에 노동자들의 투쟁이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았고, 복지국가를 넘어 근본적 사회 변화로 나아가는 길에 대해 고민했다.

“고삐 풀린 자본주의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세계의 서민들이 단결해야 합니다. 거대 자본가들이 얻고 있는 사적 이윤은 자기들의 노동의 열매도 아니며 자기들의 자본의 열매도 아닙니다. 거대 자본가들이 얻는 대규모의 이윤은 사실상 세계 각국의 지식 노동자와 육체 노동자가 창의와 피땀으로 창조한 부가가치일 뿐이며, 거대 자본가들이 이용하는 자본도 주식과 채권에 투자한 세계 각국의 여유 자본에 불과합니다. 세계의 서민들은 세계의 노동자들과 세계의 여유 자본이 창조한 부가가치를 자기 혼자 독차지하고 있는 세계의 거대 자본가들에 대한 투쟁을 제시해야 합니다. 이리하여 이 세계가 자본가들의 이윤 추구 욕심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세계 서민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해야 할 것입니다.”(2007년 서울대 정년퇴임사 중)

이제 고인이 남긴 《자본론》과 여러 저작들을 읽으며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할 우리들이 고인이 지향한 근본적 사회 변화를 위한 투쟁에도 더욱 매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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