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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들의 노동조합 개입·비판은 지당한 국제적 전통

사회 변혁을 바라는 사람들이 노동조합 투쟁을 지지하고, 또 그 투쟁에 관여해야 한다고 맨 처음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마르크스와 엥겔스였다. 그들은, ‘노동조합은 경제적 이득만을 노릴 뿐 정치 혁명과는 무관하다’는 당대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 반대해 노동조합 운동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 이래로 국제 노동계급 운동에서는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개입과 비판을 주고 받는 전통이 이어졌다.

그러나 오늘날 일각에서는 사회주의 단체의 노동조합 운동 관여를 ‘외부 세력 개입’이라며 탐탁지 않게 보는 견해가 있다. 이 글에서는 주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입을 빌어 사회주의자들의 개입이 왜 필요하고 어떻게 그것이 노동운동의 전통이 됐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노동조합 — 노동자들의 자주적 조직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이해관계가 완전히 상반되는 서로 적대하는 계급을 이룬다.

자본가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통제하며 노동자를 착취한다. 본질이 자본가들을 위한 기구인 국가는 자본가들에게 유리한 법률을 만들고, 경찰과 군대 등 무장력을 동원해 노동자 투쟁을 탄압한다. 각종 교육기관과 언론은 노동자들을 천대하는 이데올로기를 양산한다.

반면에 노동자들이 의지할 사회적 힘은 자신들이 생산적 노동을 수행한다는 것과 수적으로 더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일자리 등을 놓고 서로 경쟁하며 분열돼 있다. 게다가 자본주의에서는 임금이 양쪽(노동자와 자본가) 모두 동의한 계약에 따라 지급되는 듯이 보인다.

그 결과, 대체로 노동자들은 착취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더 유리한(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조건으로 계약을 맺기를 바란다. 노동조합은 이런 목적을 위해 노동자들이 분열을 조금이나마 극복하려고 자발적으로 만드는 조직이다. 마르크스는 이 점을 높이 사 “현재의 생산 체제[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노동조합을 버릴 수 없다”고 썼다. (‘노동조합 — 그 과거, 현재 미래’, 1866년)

노동조합은 각종 문제를 놓고 그야말로 매일매일 사용자와 충돌을 벌인다. 이런 가장 기초적인 노동조합 투쟁조차 자본가와의 긴장을 자아내고, 평등한 듯이 보였던 계약이 사실은 불평등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중립적인 척했던 국가가 사실은 자본가 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일상적 투쟁을 통해 자신의 진정한 계급적 이해관계를 점차 깨닫는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조합의 [투쟁 성과보다] 더 중요한 점은 [투쟁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임금노동과 자본의 지배를 극복할 주체로 조직된다는 점”이라고 했다.

부문주의라는 병

레닌은 노동자 운동이 부문주의에 갇히지 않으려면 혁명가들이 전국적 정치 신문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현대사 박물관에 전시된 신문 <이스크라>. <이스크라>는 1900년에 레닌이 창간한 신문으로 ‘불꽃’이라는 뜻이다 ⓒ이연진

노동조합은 자본에 맞서 노동자들을 단결시키는 수단이 될 수도 있지만, 자본주의가 분리시킨 분열을 그대로 반영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기업들은 생산 조직 방식이 저마다 다르고 게다가 끊임없이 생산 과정을 혁신한다. 그래서 자본주의 생산 과정은 불균등하고, 선진 부문과 후진 부문의 위치도 수시로 바뀐다. 이런 불균등성은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에도 반영된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전체 계급투쟁을 고려하기보다는 자기 사업장이나 부문에 국한된 이익을 추구할 수도 있다. 이를 부문주의라고 한다. 레닌의 표현을 빌리면, 부문주의는 “노동운동이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순수한 경제적 대립이라는 좁은 영역에만 국한되고 정치적 성격을 배제한다.”(‘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항의’, 1899년)

그러나 노동조합 투쟁, 특히 효과적 파업에서는 경제와 정치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십상이다. 예컨대, 노동개혁을 추진하는 정부에 맞선 투쟁은 노동조건을 두고 벌어진다는 점에서 경제 투쟁인 동시에 그 대상이 정부이고 전(全) 계급적 사안이라는 점에서 정치 투쟁이기도 하다. 2013년 철도 민영화에 반대한 파업도 마찬가지였다.

부문적 요구를 위한 투쟁도 종종 정치 투쟁의 요소를 내포한다. 종종 자본가가 노동자들의 정당성과 투지를 꺾으려고 온갖 이데올로기를 동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임금 인상이 물가 인상을 초래하므로 결국 노동자들에게 손해라는 당대 주장을 반박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정규직 노동자들 때문에 청년 일자리가 없다’는 주장을 근본적으로 반박하려면 혁명적 이론에 근거한 사회 분석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레닌은 노동조합의 부문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면 계급투쟁 전체가 어려워질 수 있고 “노동운동과 혁명운동(이 둘은 우리[혁명가들]에게 같은 것이다)은 크게 후퇴하고 타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노동조합과 정치조직의 관계

‘하지만 노동조합은 자체적인 의사 결정 구조를 갖고 있지 않은가?’ ‘조합원이 아닌 사람이 의견을 개진하면 노조의 민주주의를 침해하고 조합원의 단결을 해치는 것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응당 제기될 수 있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의 성격과 목적이 혁명적 정치조직(정당)과 완전히 다름을 이해한다.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조합은 정치색이 다른 노동자, 무당파 노동자, 무신론자, 종교 신자를 모두 아우르지만, 당은 분명한 강령을 바탕으로 정견이 같은 사람들을 결속한다.”(‘코민테른에 제출한 트로츠키의 공동전선 테제’, 1922년)

같은 이유로 1908년 제2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조합원들에게 ‘노조원의 사회주의 정당 자동 가입’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애초에 마르크스가 노동조합을 중시한 이유는 그것이 노동자들의 자주적 조직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당은 외부에서 노동조합을 종속시킬 수단과 방법이 전혀 없고 또 그럴 수도 없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혁명적 조직과 (성격과 목적이) 다르다는 바로 그 이유로 혁명 조직은 개입을 해야만 한다. 항상 노동조합 안에는 전투적이며 사회주의적 의식에 가까운 노동자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보수적이고 우파적 사상을 수용하는 노동자도 있다. 대다수는 중간에서 동요한다.

이런 불균등성을 극복하고 투쟁을 더 전진시키려면 전투적이거나 좌파적인 노동자들이 조직돼 있어야 한다. 특히, 지난 투쟁의 교훈을 잘 이끌어 내고 일반화하려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회주의 조직의 노동조합 운동 참여와 개입은 투쟁에 순기능을 할 수 있다.

관건은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효과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정리했다. “당은 노동조합 안에서 당원[과 그 지지자들]이 활동하고 당의 견해를 실행에 옮기는 형태로만 영향력을 획득할 뿐이다. … 당은 위에서 말한 방침에 따라 노동조합 조직 안에서 결정적 영향력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노동조합 안에서 공산주의자의 활동이 당의 원칙에 완전히 일치하고 언제나 당의 통제 아래 실행될 때만 당은 이런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강조는 원문)

레닌도 노동조합원들에게 정당 가입을 일괄 의무화하는 것에는 반대했지만 그것을 ‘노동조합은 사회주의 정당과 가까워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혼동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노동조합 중립성에 관해’, 1908년):

“우리는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누군가 조장한 견해 차이를 놓고 씨름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필요하다면 짜르를 지지하는 노동자와도 함께 파업을 방어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과 자본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노동조합원뿐 아니라 그 밖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우리의 이견을 표명할 것이다.”

지배자들은 일상적으로 언론 등을 통해 분열을 조장할 뿐 아니라 “노동조합이 현 사회질서 안에서 협소한 활동에 머무르고 사회주의 운동과 어떤 접촉도 갖지 않기를 바란다.” (레닌, ‘노동조합 중립성에 관해’)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노동계급 전체의 단결과 이익을 위해 공공연히 이견을 표명해야 한다. 부문적 시야에 갇혀 ‘외부’ 단체 개입을 반대한다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지배자들의 힘만 키우는 구실을 한다. 즉, “부르주아지의 바람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레닌, ‘노동조합 중립성에 관해’)

노조 관료와 민주주의

노동조합이 발전하고 안착될수록 사용자와의 협상을 전담하는 노조 관료층이 형성·발전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노조 관료층은 특수한 사회집단으로서 투쟁의 확산과 전진보다는 기구 자체의 존속을 더 중시하며 보수적 성향을 보이기 쉽다.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중재자라는 자신의 존재 근거가 바로 노동조합 기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투적 활동가가 노조 집행권을 갖게 됐을 때 우경적인 노조 지도자들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래서 ‘현장파도 지도부로 가면 국민파 된다’는 자조적 불만이 많다. 한국노총 지도부가 노사정 야합에 합의해 준 것은 조합원들의 의사를 거스른 가장 최근의 사례일 뿐이다. 노조 관료가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제약하는 것이다. 민주노총 소속 전국공무원노조 이충재 전 집행부의 공무원연금 삭감 방조도 마찬가지였다.

노조 지도자들의 관료주의를 극복하려면 현장조합원들의 투지와 자신감이 커야 한다. 사회주의 조직은 여기서도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

현장 조합원들의 자신감이 충분히 높은 경우, 그들은 보수적 지도자들의 훼방이나 배신을 넘어 투쟁을 전진시키기 위한 수단을 강구한다. 노조 관료들에게서 독립적인 현장 조합원 운동이 그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제1차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이다. 그들은 모든 주요 공장에 현장 노동자 대표를 두었고 노조 지도자들의 반대를 거슬러 대규모 파업을 이끌었다. 클라이드 노동자 위원회는 자신들의 임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우리는 지도부가 노동자들을 올바르게 대표하는 한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즉시 독립적으로 행동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장 조합원 운동은 계급투쟁 수위가 충분히 높지 않으면 일어나거나 유지될 수 없다. 오늘날 한국 노동운동은 침체기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현장 조합원 운동이 일어날 만큼 고양기인 것도 아니다.

이런 조건에서는 노조 지도자들에게 환상을 갖지 않으면서도 지도자들이 투쟁과 파업 지침을 내리도록 아래로부터 압박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근 노동자연대가 노동조합 운동에 개입하는 대체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소수 노동자들일지라도 지도자의 소심함을 거슬러 투쟁할 태세가 돼 있는 듯하면 과감하게 그러자고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노조 내 전투적 활동가들과 함께 노조 관료에게 압력을 가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다. 이런 활동은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신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