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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의:
재벌 사내유보금 환수 운동, 어떻게 볼 것인가?

노동시장 구조 개악을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이하 추진위)는 재벌 사내유보금 환수 운동을 벌이고 있다.

30대 재벌의 사내유보금 7백10조 원 중 1백57조 원을 환수해, “시급한 4대 민생·공공과제”인 최저임금 1만 원, 대기업 간접고용 노동자 정규직화, 청년실업 해소, 공공의료 확충에 사용하자는 것이다.

추진위는 지난 9월 10일과 9월 24일 ‘인증샷데이’와 1인 시위를 한 데 이어 10월 7일에는 ‘전국동시다발 기자회견’, 10월 24일은 4차 집중행동으로 ‘집중투쟁의 날’을 준비하고 있다.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서는 재벌사내유보금환수결의대회를 연다고 한다. 또, 사업장 안에 현수막 설치나 대자보 부착 같은 홍보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사내유보금 환수는 혁명기 또는 ‘부분적으로 혁명적인’ 시기에나 제출될 이행기적 요구다

추진위가 사내유보금 환수 운동을 벌이면서 좌파 내에서 ‘왜 사내유보금 환수인가?’ 또는 ‘사내유보금 환수 운동은 적절한 요구인가?’ 하는 논쟁도 벌어지고 있다.

사내유보금의 회계상 개념도. ⓒ노동자 연대

사내유보금은 대차대조표에 나타나는 회계상 개념으로,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에서 배당과 세금 등을 지급하고 남은 것을 말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사내유보금은 축적된 이윤인 셈이다. 따라서 사내유보금은 생산자본(공장, 설비 등), 상품자본(재고 등), 화폐자본(현금, 금융상품 등) 쪽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그 통속적 어감과 달리, 단순히 ‘쌓아둔 현금’이나 금융자산을 뜻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추진위가 내세우는 ‘사내유보금 환수’ 요구는 사실상 재벌 몰수·국유화를 뜻한다. 2015년 1분기 30대 재벌의 사내유보금이 7백10조 원인데, 2011년 30대 재벌의 총자산은 1천4백60조 5천억 원이라고 한다(경제개혁연구소 위평량 연구위원, ‘30대 재벌의 국내 경제력 집중 추이’). 지난 3년간의 재벌 자산 증가를 고려한다 해도, 재벌 총자산의 절반 가까이 되고 자기자본의 상당 부분에 해당하는 사내유보금을 환수하겠다는 것은 재벌 몰수와 다를 바 없다.

사내유보금 전체가 아니라 1백57조 원만 환수하겠다고 하더라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재벌 총수 일가의 지분 총액이 1백조 원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1백57조 원 환수는 재벌의 소유권을 박탈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재벌 전부를 몰수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절반만 혹은 1백57조 원만 몰수하겠다는 것이니, 환수 운동이 강력하다면 재벌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현재 현실의 계급세력 균형을 무시한 공상일 뿐이다. 지금 한국의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들도 박근혜 정부를 앞세워 노동시장 구조 개악을 밀어붙여 수익성을 조금이라도 올리려고 계급투쟁을 벌이고 있다. 사내유보금 환수는 고사하고 법인세 인상 시도에조차 ‘사업하지 말라는 것이냐’며 반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재벌 자산의 절반을 환수하겠다는 계획은 실질적인 대중 운동이 되기보다는 선전과 선동, 즉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끝날 것이 뻔하다.

예를 들어, 1974년 영국 노동당은 국유화를 확대하고, 사기업에 대한 정부 개입을 늘린다는 ‘대안경제전략’을 내세우며 집권했다. 이에 대해 영국 국내외 자본들은 온갖 방법으로 노동당 정부에 압박을 가했다. 영국 전경련 회장 캠벨 애덤슨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취할 만한 온갖 대응 방안들을 논의한 운영위원회 회의가 생각난다. … 그 회의에서 우리는 투자 파업 … 재계가 투자를 보류할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다. 또 각종 세금을 납부하지 않을 경우의 다양한 문제들도 논의했다. 그리고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합법적이지 않은 방안들도 논의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영국 전경련은 논의한 위협들을 실행에 옮길 필요가 없었다. 영국 노동당 우파가 장악한 정부가 대안경제전략 실행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대규모 긴축정책과 임금 삭감으로 대처 정부 전에 이미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재벌 사내유보금 환수는 총수 일가나 대주주의 소유권을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배계급의 격렬한 반발을 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내유보금 환수 같은 몰수·국유화 요구는 결국 노동계급 혁명과 정치 권력 장악으로써만 현실화될 수 있다.

ⓒ이미진

사내유보금 환수를 ‘최소(강령)’ 요구로 제한하기?

그런데 추진위는 사내유보금 환수 운동으로부터 더 높은 수준의 계급투쟁으로의 발전을 고려하기를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개혁주의로 빠졌다”는 일각의 비판에 격렬하게 반발한다. 자신은 여전히 재벌과 기간산업 국유화 등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벌 사내유보금 환수 운동은 재벌 환수 운동으로 발전할 유력한 교두보가 될 것”이라는 호기로운 선언과 달리, 정작 사내유보금 환수 운동을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는 데서 추진위는 개혁주의자들처럼 자본주의 내에서 실현 가능함을 입증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추진위의 김태연 정책교육위원장은 사내유보금 ‘환수 운동의 결과 기업이 축소되어 70~80퍼센트의 노동자들이 삼성전자를 떠나야 하기 때문에 환수운동은 말이 안 된다’는 우파의 비판이 있음을 지적하고, 이에 대해 “지금 재벌 사내유보금이 사회적으로 문제되는 것은 기업 생산과 관계없이 턱없이 과다하기 때문이다. 국가 1년 예산의 두 배나 되는 30대 재벌 사내유보금 7백10조 원 중 4대 민생·공공 문제 해결을 위한 1백57조 원 정도를 환수했을 때 기업의 생산을 축소해야 할 상황인가?” 하고 반문한다.

‘사내유보금 환수를 발판으로 재벌 몰수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에 재벌 경영 위기는 문제가 아니다’ 하고 답변한 게 아니라, 재벌의 생산 체계에 타격을 주지 않는 “과다한” 사내유보금만 문제라는 식으로 답변하는 것이다. 게다가 김태연 위원장이 “기업의 생산을 축소해야 할 상황인가?” 하고 반문하는 데서 보듯이, 추진위의 전망은 재벌의 반발 때문에 필연적으로 환수 운동이 더 발전하든지 아니면 재벌에 굴복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전혀 보지 않고 있다는 점도 드러난다.

추진위는 개혁주의 단체가 아니다. 하지만 사내유보금을 4대 민생·공공과제에 사용하겠다고 할 때 채택하려는 방식은 환수 운동을 개혁주의적 틀 안으로 욱여넣고 있음을 보여 준다. 추진위는 환수한 사내유보금 1백57조 원의 용처를 이렇게 제시한다. 최저임금 1만 원을 위한 보조금 1백20조 원, 간접고용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위한 보조금 10조 4천4백억 원, 청년 취업자 1인당 월 1백만 원 보조금 16조 원 지급 등. 사내유보금을 환수할 정도로 계급투쟁 수위가 높은 상황이라면 재벌의 경영권을 박탈하거나 박탈을 위협할 힘을 노동계급이 갖게 됐음을 뜻한다. 그런데도 그 힘으로 최저임금 1만 원, 대기업 간접고용 정규직화, 청년고용 확대 등을 하도록 자본과 국가를 아래로부터 압박하는 게 아니라 환수한 돈으로 다시 재벌을 포함한 자본가들과 협의할 계획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다른 개혁주의자들과 똑같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설사 보조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하더라도 자본가들이 실제로 청년고용을 늘리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고, 임금을 올리리란 보장이 없다는 문제 말이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혼란은 처음에 재벌에 대한 다계급적인 대중적 반감을 표현하는 포퓰리즘적 요구로서 사내유보금 환수를 선택한 데서 비롯한 듯하다. 그러나 자본 전체가 아니라 특별히 재벌만을 문제 삼는 민중주의(인민주의)적 전략이 이제 핵심 문제다. 이 전략을 통해 추진위는 사내유보금 환수로부터 재벌 몰수와 노동자 권력이라는 더 급진적인 전략으로 나아가려는 것으로도 보이고 싶고, 또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실현 가능한 듯한 사내유보금 환수·사용 계획을 제안함으로써 광범한 대중적 지지를 받을 만한 것으로도 보이고 싶어 하는 듯하다. 이처럼 두 마리 토끼를 노리는 것을 합리화하고자 할 때, 재벌을 절반만 몰수하겠다는 사내유보금 환수 요구가 안성맞춤인 것이다.

한편, 사내유보금 환수는 노동시장 구조 개악 같은 노동자들의 당면하고 중요한 투쟁을 회피하는 대의명분도 된다. 물론 추진위는 “노동 개악에 맞선 총파업 투쟁과 환수 운동의 문제의식을 적극 연결시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천과 강조점에선 사내유보금 환수를 “대안적 프레임”으로 제시하고 이를 선전하는 데 집중하고 있지, 노동시장 구조 개악 저지 투쟁에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도록 선동하고 조직하는 데서는 사실상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현 정세가 이행기 강령을 제출할 때인가?

앞서 살펴봤듯이, 사내유보금 환수가 개혁주의적 공상이 되지 않으려면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이라는 전략 속에 자리매김 돼야 한다. 그러나 추진위는 의식적으로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아 중간주의를 맴돌게 된다는 점도 살펴봤다. 중간주의는 혁명적 노선과 개혁주의 노선 사이에서 불안정하게 동요하는 노선을 말한다.

결국 사내유보금 환수 요구는 노동자들이 대중 행동을 통해 혁명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전환(“이행기”) 강령의 일부가 될 경우에만 의미가 있고, 또 그 성취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전환 강령이 제기돼야 하는가? 그리고 그 전환 강령에 사내유보금 환수가 포함되는 게 적절한가?

적절한 시기 적어도 현재 그리스 수준의 위기와 계급 세력 관계가 뒷받침돼야 한다. ⓒ사진 출처 그리스 〈노동자 연대〉

전환 강령이란 무엇인가? 해결책이 혁명밖에 없는 매우 심각한 “국가적 위기”(이는 레닌의 표현이다) 상황에서조차 종종 노동계급은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싸우는 과정에 놓인 대중이 현재의 요구와 사회주의적 혁명의 강령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너도록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돕는 것이 필수적이다.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 전환 강령이 제기되는 것이다. 전환 강령은 현재의 객관적 조건과 광범한 노동계급의 의식에서 출발하면서도, 노동계급을 권력 장악으로 이끄는 요구들이어야 한다.(바로 이런 의미에서 ‘전환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는 전환 강령을 ‘연결된 요구들의 체계’라고 말했다. 요구 A를 성취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요구 B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납득시킨다. 요구 B에 대한 유사한 경험이 노동자들에게 요구 C에 대한 필요성을 설득할 것이다. 기타 등등. 이 연관성은 결국 권력 쟁취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만일 전환 강령이 이런 논리적인 연속성의 일환이라면, 어떤 요구도 그 자체만으로는 전환적 요구일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전환적 요구는 오직 그 요구가 노동자들의 현재 의식에서부터 혁명에 대한 노동계급의 지지로 연결될 때만 전환적인 것이다.

이런 고려 속에서 1930년대에 전환 강령을 제출하면서 트로츠키는 특정 부문이나 특정 집단의 자본 몰수 요구는 전환 강령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봤다. “자본가 계급을 타도하고 그 경제적 지배를 끝장내는 몰수 역시 사회주의 강령에 포함된다. 그러나 여러 핵심 산업부문이나 자본가 계급의 가장 기생적인 집단에 대한 몰수를 요구하는 것도 또한 특수한 전환기 상황에 따라 필요할 수 있다.”

그러면서 트로츠키는 미국의 ‘60대 대자본’과 프랑스의 ‘200대 대자본’처럼 대중적 분노를 사는 “봉건 자본가 영주”들의 재산 몰수를 전환 강령의 일부로 포함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쩌면 한국에서 재벌 몰수 또는 사내유보금 환수는 전환 강령에 포함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트로츠키는 이런 몰수 요구가 흐리멍텅한 개혁주의자들의 ‘국유화’ 구호와 차이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환 강령상의 몰수 요구는 대중이 자신의 혁명 역량에만 의존할 것을 촉구하고, 몰수 문제를 노동자의 권력 장악 문제와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 시기에 전환 강령이 제기되는 것이 가능하고 필요한가? 레닌과 트로츠키는 모두 정치적 맥락이 뒷받침될 때, 즉 혁명적 또는 혁명 전야적 맥락 속에서 전환적 요구를 제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했다. 따라서 제대로 된 전환 강령이라면 현재 노동계급의 의식 수준이 가장 급진적인 수준에 가까워져 있거나, 노동계급이 일련의 투쟁 속에서 의식을 흔치 않은 속도로 빠르게 발전시킬 상황에 처해 있는 경우에 제출돼야 한다. 요컨대 전환 강령은 계급 세력관계가 뒷받침돼야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현재 한국의 계급세력 균형은 혁명적 혹은 반(半)혁명적 시기이거나, 아니면 적어도 노동자들이 일련의 투쟁 속에서 의식을 빠르게 발전시키는 상황이 아니다. 추진위도 “재벌 사내유보금 환수가 실현되는 것이 현재의 계급 역관계에서 볼 때 매우 어렵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재벌 총수 지분 환수 및 국유화는 아예 입도 떼지 말자는 것인가? … 우리는 계급 역관계가 어려운 조건에서도 반자본 사회화의 방향에서 비록 선전선동 수준을 넘지 못하지만, 재벌 총수 지분 환수 및 국유화 운동을 실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재벌 몰수·국유화를 일반적인 수준에서 선전하는 것과 이를 구체적 운동 쟁점으로 내세우는 것은 전혀 다르다. 재벌 몰수 등을 선전하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지만, 정치적 맥락에 맞지 않게 제기되는 몰수나 국유화 요구는 노동자들을 당면한 현실 투쟁으로부터 관심을 돌리는 데 일조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