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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대선:
페론주의의 위기와 양극화 속에서 노동운동과 혁명적 좌파가 성장하다

11월 22일, 아르헨티나에서는 보통선거가 시행된 1912년 이후 사상 최초로 대선 결선 투표가 벌어진다.

지난 10월 25일 치른 총선과 대선1에서 전임 대통령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의 후계자이자 페론주의2 여당인 정의당(PJ) 후보 다니엘 시올리가 36.9퍼센트를 득표했고, 신자유주의적 우파 후보 마우리시오 마크리가 34.3퍼센트를 득표했다. 같은 날 치른 총선에서도 정의당이 포함된 선거연합 ‘승리를 위한 전선’(FpV)은 하원에서 26석을 상실해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수도 인근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州) 주지사 선거에서도 직선제 실시 이래 최초로 여당이 패배하고 우파가 당선했다.

이 선거로 정의당은 큰 타격을 입었다. 결선 투표를 열흘 앞둔 현재 아르헨티나 내 주요 여론조사 결과들은 야권이 근소한 우세를 점했다고 나타난다.

한편 좌파도 성과를 얻었다. 극좌파 선거연합 ‘좌파와 노동자 전선’(FIT)은 총선과 대선 모두에서 80여만 표(약 3.3퍼센트)를 얻어 4위를 기록했다. FIT는 대선과 겹쳐 사표 심리가 작용하는 가운데서도 지지 기반을 대체로 지켰다.

이런 선거 결과는 21세기 첫 10년 동안 아르헨티나 정계를 지배해 온 페론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신자유주의적 우파들이 득표를 늘려가는데, 극좌파도 상당한 지지를 얻는 아르헨티나의 정치 상황을 잘 이해하려면 지난 번 위기와 저항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001년 경제 위기와 자발적 대중 반란

2001년 아르헨티나는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했다. 디폴트는 끔찍한 경제 공황으로 이어져, 세계 최대 규모의 낙농업과 곡물 수출을 자랑하는 나라에서 국민의 80퍼센트가 다음날 끼니를 걱정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직접적 원인은 미국의 IT 거품이 꺼진 여파였다. 아르헨티나 경제는 1990년대 내내 외채가 계속 늘어 1천3백억 달러에 이르렀고 신자유주의적 규제 완화 정책으로 취약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금융 시장의 거품 붕괴가 가한 충격을 견디지 못했다.

2014년 8월 28일 총파업에 참가한 아르헨티나노동자연맹(CTA) 소속 노동자들. ⓒ출처 아르헨티나노동자연맹(CTA)

정부는 IMF의 권고를 받아들여 긴축을 추진하고 민영화를 추진하려 했다. 이에 분노한 민중이 저항에 나섰다. 2001년 12월 19일 실업자·노동자·중간계급 등 다양한 집단들이 대규모로 참가한 시위는 강경 진압으로 유혈낭자하게 끝났다. 이것은 사람들의 분노를 촉발했다. 대중 반란이 벌어졌다. 운동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해 한 달 동안 대통령을 세 번이나 갈아치웠다.

이 반란에서는 세 종류의 사회 운동이 두드러졌다. 가장 주목받은 것은 전투적 실업자 운동 ‘피케테로스’였다. ‘피케테로스’는 1990년대 초 국영 석유 기업의 민영화에 맞선 노동자 투쟁이 패배한 후 시작됐다. 그리고 2001년 경제 위기 이후 실업률이 급등하면서 순식간에 대규모로 성장했다. 이들은 전국 주요 도로를 봉쇄하고 싸우면서 투쟁의 초점을 제공했고, 운동이 성장하면서 국가가 제공하는 실업 급여를 자체적으로 분배했다.

다음으로는 지역 운동에 기반한 ‘주민위원회’가 있었다. 이 위원회는 지역사회에서 재화를 물물교환해 당장의 삶을 꾸릴 방편으로 만들어졌는데,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만 1백 개가 넘게 생겨났을 정도로 확산됐다. 운동이 성장하면서 주민위원회는 여러 부문의 투쟁이 만나는 자리 구실을 하게 됐다. 2002년 초 주민위원회 대회(‘위원회들의 위원회’)의 TV 실황 중계가 시청률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주민위원회는 대중적 관심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꼽을 만한 것은 공장 점거 운동이었다. 2001년 디폴트 전후로 많은 공장이 도산했다. 일부 노동자들이 몇몇 도산 기업의 공장을 접수해 운영했다. 이 운동은 규모는 작았지만(아르헨티나 경제 규모의 0.7퍼센트), 자본가들의 관리 없이도 생산을 민주적으로 조직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는 점에서 중요한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2001년 대중 반란은 신자유주의에 맞서 벌어진 전국적 대중 반란이었고, 무능한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의 맹아를 힐끗 보여 줬다. 아르헨티나 자본가 계급이 운동에 밀려 분열하자, 주류 언론들조차 “혁명 직전 상황”이라는 진단을 내놓았을 정도다.

그러나 이 운동은 다음 단계로 나아갈 고리들이 부족했고, 그 때문에 운동이 보여 준 놀라운 잠재력을 다 살리지 못했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자발적 대중 반란을 결집시킬 조직 노동자 투쟁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당시 아르헨티나 조직 노동자들은 경제 위기로 일자리가 줄어드는 데에 분노했지만, 파업 등 조직된 힘을 아래로부터 스스로 발휘할 만큼 자신감이 높지는 않았다.

그런데 파업을 조직해 이끌었어야 했던 노동조합 지도부는 노동계급과 ‘산업자본’ 간 계급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금융 위기의 대안이라고 주장하면서 노동자들의 운동 참여를 개별적 차원으로 제한했다.

조직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졌다면, 피케테로스 운동에 대한 지배자들의 공격을 무력화하고 공장점거 운동을 경제의 주요 부문들로 확대하는 것도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노총(CGT) 지도부는 페론주의 정치인들로 구성된 임시정부를 지지했다. 이 때문에 페론주의 임시정부는 실업 급여 지급을 유예하는 식으로 피케테로스를 공격할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 좌파들이 노동조합 지도부의 잘못된 방향에 도전하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한 약점이었다. 좌파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높아졌지만, 극좌파들은 조직 간의 – 때로 물리력을 동반한 - 종파적 투쟁에 신경쓰느라 운동에 필요한 전망과 전술을 제시해야 할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 피케테로스 내에서 급격히 세력을 키운 자율주의 정치 경향도 모든 정당을 거부하고 노동운동에 적대적이라는 정치적 약점 때문에 큰 한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CGT의 보수적 지도부는 거의 도전받지 않았다. CGT보다 상대적으로 좌파적이었던 아르헨티나노동자연맹(CTA)의 지도부도 18개월의 대중 운동 끝에 등장한 페론주의자 네스토르 키르치네르를 우파에 맞선 유일한 대안이라고 보고 지지하게 됐다.

그럼에도 2003년 4월 22퍼센트라는 유례없이 낮은 득표로 집권한 키르치네르 정부가 상황을 일거에 반란 이전으로 ‘정상화’시킬 수는 없었다. 키르치네르는 IMF와 부채 상환 재협상을 벌일 수밖에 없었고, 민영화 과정도 몇 년 유보했다.

다시 찾아온 경제 위기, 노동자 투쟁이 성장하며 주목받는 좌파

네스토르 키르치네르와 그의 후임인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둘은 부부다)가 집권하던 기간에 아르헨티나 경제는 한때 연 8퍼센트 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회복세로 돌아서는 듯했다. 이는 주로 2000년대 초반 중국 경제의 호황으로 원료 수출이 크게 늘어난 덕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은 이에 맞춰 나아지지 않았다. 2007년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디폴트를 겪었던 2001년의 70퍼센트 수준으로 떨어졌다. 반면 기업 이윤의 연평균 증가율은 2005년 77퍼센트를 기록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2008년 미국발 경제 위기가 터지면서, 겉으로는 번지르르했던 아르헨티나 경제가 휘청거리게 됐다. 노동자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해마다 30~40퍼센트나 오르는 물가 인상률에 견줘 임금 인상률은 턱없이 못 미쳤다. 구조조정 때문에 실업률은 계속 올라갔다.

키르치네르 정부는 노동자들을 공격해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공공시설에 대한 정부 투자를 삭감하고, 총액인건비제를 도입하고, 임금 인상률을 물가 인상률보다 낮은 수준으로 제한해 실질임금을 대폭 삭감했다. 이에 불만과 분노가 점차 고조돼, 키르치네르를 굳건히 지지하던 CGT 지도부조차 정부의 긴축 정책에 반대하게 됐다.

페론주의 여당에 대한 지지가 흔들리자, 2010년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는 선거법을 개정했다. 예비선거에서 2퍼센트 이상 득표하지 못한 정당은 국회의원 후보를 내지 못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이 개정은 여러 정당으로 쪼개져 있던 우파 정당들이 여당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이 개정으로 우파들뿐 아니라 주요 트로츠키주의 단체인 노동자당(PO), 사회주의를 향한 노동자당(PTS), 사회주의 좌파(IS)도 선거에서 존재감을 잃을 처지가 됐다. 그래서 이들은 선거연합 FIT를 꾸려 선거에 도전했고, 2013년 총선에서 1백만 표 이상을 얻으며 사상 최초로 국회의원까지 배출했다. [관련 기사: 본지 120호 ‘아르헨티나 혁명적 좌파들에게 찾아온 기회’]

FIT 자체는 선거제도 개혁의 부산물이었지만, 좌파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열어 주기도 했다. FIT가 결성되자, 2013년 총선 때 사람들은 기성 정치에 대한 불만을 FIT 지지표로 표현했다. 일부 주에서는 FIT 지지율이 최대 14퍼센트까지 올라갔다. FIT 소속 트로츠키주의 단체들이 전투적으로 거리 행진을 벌이고 노동조합, 지역사회, 학생운동에서 활동을 늘린 것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극좌파들이 이렇게 주목받을 수 있었던 핵심적 동력은 20여 년 만에 조직 노동운동이 성장한 것이었다.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은 2012년 이래로 긴축에 맞서 하루 총파업을 세 차례 벌였다. 페론주의 정부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아르헨티나 노총(CGT)도 상대적 좌파 노총인 아르헨티나노동자연맹(CTA) 등과 함께 파업 소명에 나섰다.

노동자들은 여러 부문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2013년 멕시코 교사들이 벌인 전투적 파업의 영감을 받은 아르헨티나 교사 노동조합은 2014년에 총력 파업을 벌여, 정부의 임금 인상률 제한을 뛰어넘는 31퍼센트 인상을 쟁취했다. 뒤이어 금속 노동자들도 정부의 제한을 초과하는 27.5퍼센트 임금 인상을 따냈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지하철 노동자들은 올해에만 두 차례 하루 파업을 벌이며 주1회 휴일을 따냈다(그 전까지는 주7일 근무제였다).

노동자 투쟁이 성장하면서 다른 부문 운동에도 활력이 돌고 있다. 그중 올해 6월 3일 벌어진 대규모 자발적 거리 시위 “단 한 명도 안 돼!”(스페인어 약칭으로 NUM)3가 주목할 만한 사례였다.

NUM은 여성에 대한 구타를 종식시키고자 하는 염원을 담아 기획됐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수십만 명이 이 날 시위에 참가했고 이웃 나라인 우루과이와 칠레에서도 연대 시위가 벌어졌다. NUM은 2001년 반란이 끝난 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벌어진 시위 중 규모가 가장 컸다. (그리고 이 운동은 스페인 등 다른 스페인어권 나라들로 확산되고 있다.)

2015년 6월 3일 “단 한 명도 안 돼!”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위 참가자. ⓒ출처 Leandro Martinez (플리커)

운동이 더 전진하려면 좌파의 구실이 중요하다

한편, 우파들도 선거연합 ‘변화를 위한 연합’으로 결집했다. 2014년 아르헨티나 정부가 외채 위기로 “기술적·부분적 디폴트”를 선언한 이후, 우파들은 위기의 책임을 정부 여당에 돌리면서 긴축을 더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파들이 결집하자 정의당도 동요하고 있다.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에 대한 지지가 임기 초의 4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자, 정의당에서 오른쪽으로 분화해 대선에 출마한 혁신전선(FR) 후보 세르히오 마사도 결선 투표에서 야당을 지지하고 있다. 여당 후보 시올리는 이런 기세에 눌려 우파들의 연금 삭감 정책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상황 때문에 결선 투표에서 우파가 득을 볼 듯하다. 그러나 이는 페론주의가 위기에 빠졌음을 보여 줄 뿐이지, 사회 전반이 우경화했다는 뜻은 아니다.

아르헨티나의 좌파들과 노동자 운동이 우파의 긴축 정책과 노동자 공격에 맞서려면 중요한 과제를 이뤄야 한다. FIT는 이름이 ‘좌파와 노동자 전선’이지만 투쟁하는 공동전선이라기보다는 세 트로츠키주의 단체 사이의 선거연합에 더 가깝다. FIT의 결성과 약진을 기회로 좌파들이 아르헨티나 정치 공간의 변두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도모할 만하지만, 아직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과거의 종파적 관성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은 듯하다.

아르헨티나 운동은 2001년 저항에 참여했던 활동가들에 기반을 둔 대중 운동을 건설하기에 충분한 잠재력이 있다. 노동계급 투쟁이 성장해 활력을 되찾고 있는 지금, 좌파들이 능동적·개방적으로 활동해 긴축에 맞선 대중 저항을 건설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과정에서 페론주의에 효과적으로 도전할 급진적 대안을 건설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용어 설명

1 아르헨티나의 선거 제도 총선과 대선에서 본 선거 전에 후보를 내고자 하는 정당·선거연합의 지지를 묻는 예비선거(PASO)를 실시한다. 이 선거에서 1.5퍼센트를 득표하지 못한 정당·선거연합은 본 선거에 후보를 낼 수 없다.
대선의 경우 본 선거에서 최다 득표한 후보의 득표율이 45퍼센트 이상이거나 40퍼센트 이상이더라도 2위와의 차이가 10퍼센트포인트 이상일 경우에만 1위 후보의 당선이 확정된다. 그렇지 않으면 1위와 2위 사이에 결선 투표를 치러 과반 득표자가 당선한다.
입법부는 양원제다. 하원은 2백57명을 선출한다. 하원 임기는 4년이며 2년마다 총선을 치러 2분의 1씩 새로 뽑는다. 상원은 총 72명을 선출한다. 상원 임기는 6년이며 2년마다 총선을 치러 3분의 1씩 새로 뽑는다. [본문으로]

2 페론주의 아르헨티나 전 대통령 후안 페론에서 유래한 정치 경향. 1943년 민족주의 장교들의 쿠데타로 등장한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이었던 페론은, 노동계급에 사회·경제적 양보를 제공하는 대신 노동조합을 국가에 종속시켰다. 1946년 대선에 출마한 페론은 “사회 정의”를 표어로 내걸며 강한 민중주의(포퓰리즘) 정서를 표방했고, 파시스트를 포함한 극우에서 무장 게릴라 조직을 포함한 극좌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정치 세력들의 지지를 얻으며 집권했다. 이후 여러 우여곡절 속에서 페론주의는 분화했는데, 오늘날 페론주의는 노동자 운동의 발전 대신 계급 협조를 통해 임금 등 경제적 이득을 보장받는다는 민중주의적 개혁주의의 모양새를 띠고 있다. [본문으로]

3 “단 한 명도 안 돼!”(Ni una menos) 운동 여성 대통령인 크리스티나 키르치네르 집권 7년 동안 여성 1천8백 명 이상이 (대략 30시간마다 한 명 꼴) 가정 폭력, 파트너에 의한 폭력, 증오범죄 등으로 살해당했다. 그러나 국가는 예산 부족과 법안 미비를 핑계로 미온적인 대응만 보였다.
이에 여성단체, 노동조합, 정당, 가톨릭 교회 등이 주도해 ‘피해 여성이 한 명이라도 그 수가 적은 것이 아니다’는 뜻에서 트위터 해시태그 ‘#NiUnaMenos’로 시위를 호소했다. 2015년 6월 3일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만 20만 명이 시위를 벌였고, 같은 날 전국 도시 80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