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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방지법:
‘테러’가 아니라 민주적 권리를 가로막는 악법

12월 2일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지도부가 주요 쟁점 법안들을 합의 처리하기로 야합했다. 합의 처리하려는 쟁점 법안들에는 ‘노동개혁’ 관련 법 외에도 테러방지법도 포함돼 있다.

‘파리 참사’를 빌미로 새누리당은 테러방지법 제정을 기필코 밀어붙일 참이다. 박근혜도 테러방지법 통과를 거듭 촉구하며 국회를 압박하고 있다.

새정치연합은 테러방지법 제정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새정치연합 원내대표 이종걸은 “집권을 준비하는 정당”으로서 “대테러 문제를 더 적극적으로,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새정치연합이 과거에 지금의 테러방지법안과 대동소이한 법안을 직접 발의한 적이 있으므로, 이종걸의 발언은 새삼스럽지 않다.

국정원

실제로 국회 정보위 법안심사소위에서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은 테러방지법을 논의하고 있다(여기에 사이버테러방지법도 함께 논의 중이다). 그 과정에서 독소 조항의 일부가 완화되거나 삭제됐다. 그러나 일부 조항을 고치거나 없애더라도, 테러방지법의 반민주적 본질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우선, ‘테러’ 규정 자체가 모호하다. 새누리당이 발의한 테러방지법안은 테러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자의적 해석이 가능하게 규정한다.

파리 참사 이후 많은 이주민들이 테러방지법 제정을 우려한다. 11월 25일 테러방지법 제정 반대 이주인권단체 공동기자회견 ⓒ이미진

구체적 테러 행위들을 열거해 ‘테러’ 규정의 모호함을 완화시키려 한 듯하지만, 그에 따르더라도 올해 초 주한 미국 대사 피습 사건 같은 한 개인의 돌출적 행동도 ‘테러’로 볼 수 있다. 게다가 11월 14일 민중총궐기 같은 노동계급과 민중의 저항 행동도 ‘테러’로 규정할 수 있다.

이렇게 폭넓게 규정된 “테러를 선전, 선동한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하면, 국정원 등이 언제든 ‘테러 위험 인물’을 지목해 조사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테러 위험 인물’로 지목돼 금융 정보 등 중요한 개인 정보가 정보기관에 넘어가고 통신 감청도 받을 수 있다.

국정원의 권한이 더한층 강화되는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국정원이 대테러 활동의 ‘컨트롤 타워’ 구실을 하지 않기로 여야가 합의했다지만, 국정원은 자체적으로 대테러기구를 설치해 이를 통해 각 정부기관 내 테러대응기구에 개입할 수 있다. 국무총리가 위원장을 맡게 될 국가테러대책회의도 사실상 국정원이 ‘컨트롤’ 할 공산이 크다.

테러방지법은 이주민과 난민도 겨냥한다. ‘테러 위험’이 있다는 의심만으로도 출입국을 규제하고, 사찰도 할 수 있다. 테러방지법이 통과되면, 시리아 등지에서 온 난민이 ‘테러 혐의’가 있다고 입국을 거부당하거나 국내에서 정부의 상시적 감시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질 것이다.

2010년 G20 정상회담을 앞두고 국회는 한시법으로 ‘G20경호특별법’을 통과시킨 적이 있다. 이 법은 지금의 테러방지법안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경찰은 이 법을 근거로 이슬람권 나라에서 입국한 사람 5만여 명의 국내 체류 상황을 조사했다. 그리고 그중 99명에 대해 수시로 거주지와 직장을 확인하는 등 집중 감시했다. 이때 정부가 입국을 금지시킨 ‘테러 혐의 외국인’이 무려 5천여 명에 이르렀고, 그중엔 해외 시민단체나 노동조합 활동가들도 있었다(참여연대, ‘테러와의 전쟁 10년, 한반도 평화와 민주주의’). 테러방지법이 통과되면, 이런 일이 더 빈번하게 벌어질 것이다.

G20

요컨대, 새누리당 안보다 다소 완화된 여야 합의안이 나온다 해도, 테러방지법은 이주민과 좌파의 활동을 겨냥할 것이고 민주적 권리를 제약할 것이다. 국가보안법과 마찬가지로, 무고한 개인들이 억울하게 조사·처벌받는 일도 벌어질 것이다.

따라서 테러방지법안은 도저히 고쳐 쓸 수가 없고, 당장 폐기돼야 할 악법이다.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은 국정원에 대한 국회의 감시·감독을 강화하는 문제 등에서 일부 이견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테러방지법의 합의 처리가 예정보다 지연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정치연합이 테러방지법 제정을 기본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에, 머지않아 여야 합의안이 나올 위험이 있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새정치연합에 의존하지 말고 ‘노동개혁’ 법안과 함께 테러방지법안도 적극 반대해야 한다.

서방의 테러방지법도 마찬가지였다

2000년대 들어 주요 선진국들은 테러방지법을 제정해 왔다. 특히, 2001년 ‘9·11 공격’과 ‘테러와의 전쟁’은 각국 정부가 테러방지법을 제정하는 명분이 됐다.

그러나 2005년 7월 런던 폭탄 투척 사건과 최근 ‘파리 참사’에서 보듯이, 테러방지법은 전혀 ‘테러’를 막지 못했다. 각국 정부는 테러방지법으로 경찰력을 강화하고 국내 무슬림·이주민과 좌파 단체들을 공격했다. 그 결과 국내에서 정치적·시민적 권리가 공격받고, 무슬림·이주민에 대한 차별도 심해졌다.

애국법

9·11 직후 미국 의회는 ‘애국법’을 통과시켰다. 그 덕분에 미국 정부는 테러리스트로 ‘의심’되는 내·외국인을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었다. 이 중에는 재판도 없이 미국 관타나모 수용소에 13년간 수감돼 있다 누명이 밝혀져 풀려난 사람도 있었다.

당사자가 모르게 FBI나 경찰이 가택을 수색할 수 있는 비밀수색영장도 남발됐다. 그런데 비밀수색영장이 발급된 사건 중에 ‘테러’ 혐의를 받은 것은 단지 1퍼센트에 불과했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은 개인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수집했다. 오죽하면 NSA의 자국민 감시 능력이 “옛 동독의 보안경찰 슈타지조차 상상하지 못할 수준”이라는 평가마저 나왔다.

다른 서방 선진국들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2002년에 시행된 독일의 테러방지법은 신분증에 개인의 생물학적 정보를 담도록 규정했다. 난민담당부서 및 외국인 관청이 헌법보호청에 정보를 제공하도록 의무화하는 등 외국인에 대한 감시와 통제도 대폭 강화했다. 이런 조처가 인종차별을 부추긴 것은 당연하다.

독일의 테러방지법은 에너지·병원·철도·우체국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 대한 신원조회도 강화했고, 사측이 보안을 이유로 노동자를 해고하거나 고용을 거부하는 것을 용이하게 해줬다(롤프 괴스너, 《민주법학》 제21호).

영국은 북아일랜드의 저항을 억누르려고 1970년대부터 대테러 관련 법들을 제정해 왔다. 그 결과 북아일랜드에 적용된 테러방지법은 북아일랜드 주민 전체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 기능했다. 테러방지법은 억울한 희생자들을 낳았다. 1974~88년 북아일랜드에서 ‘테러 혐의’를 받은 사람들 중에 테러방지법으로 정식 기소되고 판결받은 사람은 1퍼센트에 불과했다(이계수, 《민주법학》 제21호). 즉, 테러와 무관하거나 가벼운 범법 행위를 저지른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테러방지법으로 체포되고 수사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북아일랜드에서 테러 혐의로 체포된 사람들 중에는 노동조합원, 시민 평등권 옹호 활동가 등도 상당수 있었다.

게다가 테러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까지 받은 사례 중에는, 영국 정부가 한 가족을 폭탄 테러리스트로 날조해 중형을 선고받게 한 ‘길포드 4인’ 같은 사건도 있었다(‘아버지의 이름으로’(1993)가 이 날조 사건을 다룬 영화다). 그럼에도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영국 의회는 테러방지법의 적용 범위를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보기관의 권한을 강화하는 대테러 관련 법들을 수차례 통과시켰다.

파리 참사 후 프랑스에서도 프랑스판 ‘애국법’ 제정이 논의되는 등 각국에서 대테러 조처들이 강화되고 있다. 박근혜가 밀어붙이는 테러방지법도 같은 맥락이다.

국회가 국정원을 통제할 수 있을까

새정치연합은 일부 ‘독소’ 조항을 없애거나 고치고 국회가 국정원에 대한 감시·감독을 강화할 수 있으면, 테러방지법을 통과시켜 줄 수 있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새정치연합은 국회 정보위에 국정원을 ‘상시 감독’할 ‘국회 정보감독지원관실’을 설치하는 것을 테러방지법 합의 처리의 조건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아무리 그럴싸한 법과 기구를 만들어도, 국회는 국정원을 제대로 감독할 수 없을 것이다. 국정원 같은 정보기관들은 ‘국가 안보’를 내세워 자신들의 활동을 얼마든지 국회 통제 바깥에 둘 수 있다.

미국 등 선진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의회가 정보기관을 제대로 통제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

미국 의회는 NSA나 중앙정보국CIA 등에 대해 ‘막강한’ 권한을 행사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미국 의회도 NSA가 무차별적인 도·감청을 하는 것이나 CIA가 ‘테러’ 혐의자를 고문하고 해외 곳곳에 비밀 감옥을 운영하는 것을 알지 못했고, 알아도 막지 않았다.

그나마 지금 논의되는 국회 정보감독지원관실은 국회 정보위의 기존 활동을 지원하는 기구에 불과하다. 이런 게 테러방지법의 오·남용을 견제해 주리라고 기대하는 건 수소에게 젖을 달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게다가 새정치연합 의원들은 국정원이 테러방지법으로 강화되는 권한을 자신들을 향해 휘두르는 것만 우려할 뿐, 정부가 이주민과 좌파들을 옥죄고 탄압하는 것을 진지하게 ‘감시’하는 데는 관심도 없을 것이다. 그 정당의 주된 기반이 결국 자본가 계급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