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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를 순전히 여성 '개인'의 고통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가?

민족주의적 시각이 위안부 문제에 있어 여성 ‘개인’의 고통을 도외시 했다며 민족주의를 기각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종종 나온다. 사실 이 말에도 합리적 핵심은 있다. 위안부로 동원된 여성들 개인의 고통이 ‘민족의 수난’이라는 집단적 기억으로 재구성 되면서 배제된 부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양공주’라고 불리우며 천대받던 기지촌 여성들의 기억이 대표적이다. 기지촌 여성들의 기억이 진지하게 다뤄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기지촌 여성들은 ‘민족(혹은 국민)’의 범주 바깥에 있는 외부자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영화 〈은마는 오지 않는다〉는 파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민족주의는 결속을 목적으로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부르주아 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한계가 많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에서 순수한 ‘개인’의 기억만으로 모든 것을 재구성하는 게 가능한가? 그것은 불가능할뿐더러 한계도 명확하다.

애초에 순전한 개인은 없다. 모든 개인은 구조의 영향 하에, 그러면서도 구조에 대응하면서, 구조 속에서 살아간다. 위안부 문제를 논의하는데 있어 제국주의 구조는 절대 기각될 수 없는 문제이다. 또 제국주의 구조 하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입지(즉 식민지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전간기의 세계대공황은 개별 국가의 경제적 경쟁을 강화시켰고 이는 국가와 자본 사이의 관계를 밀착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경쟁은 이내 지정학적 경쟁으로 전화하기 시작했다. 후발 국가였던 독일, 일본, 이탈리아는 세계를 재분할 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의 와중에 병사들이 겪게 되는 죽음의 공포를 성적 지배욕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들(즉 그러니까 전쟁 성폭력)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위안부 동원은 그 중 가장 체계적인 시도였다. 조선인 위안부의 동원체계(그것이 강제연행이었든 소위 말하는 ‘업자’에 의한 것이었든)를 용이하게 만들었던 건 일본 국가가 그 정점에 서있는 식민지 권력이었다. 때문에 일본 본토가 아니라 한국과 중국, 동남아시아 제국(諸國)과 같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었던 지역들에서 위안부 문제가 심각한 쟁점으로 부각되는 이유가 단지 맹목적 민족주의 탓이라고 하는 건 지나친 단견이다. 애초에 민족주의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을 형성시켜 준 것도 제국주의였고 말이다. 이러한 ‘개인’지상주의는 박유하 류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박유하 등은 민족주의를 극복하겠다면서 업자들 중 식민지 조선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일본 국가뿐만 아니라 위안부 문제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며 기억을 조작해 온 한국인들 자신의 반성도 필요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에서 사라지는 건 일본 국가이고 남는 건 업자 ‘개인’과 위안부 여성 ‘개인’이다.

개혁주의

사실 무라야마 전 총리를 위시한 개혁주의적인 일본 지식인들이 《제국의 위안부》를 환영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개혁주의자들은 기존 국가의 인수를 통한 사회 변화를 추구한다. 과거사 청산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청산의 주체는 ‘피해대중’ 자신이 아닌 개혁주의자들이 집권한 국가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국가에 대한 도전을 기피한다. 하지만 일본에서 과거사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국가에 대한 도전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 일본 국가 자체가 샌프란시스코 협약이 만들어 낸 괴물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증대하는 소련의 위협에 맞서 일본을 지역 세력균형추로 세우려 했다. 이는 일본의 보통국가화 추진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과거사와 관련된 여러 영역들(식민통치 관련 배상문제, 영토 문제)을 애매한 상태로 두는데 도움을 줬다. 그래서 일본의 개혁주의자들은 모순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국가를 통해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데 정작 그 국가가 과거사 문제의 주범인 것이다. 그러한 일본 개혁주의자들의 모순을 반영하는 게 다름 아닌 ‘아시아여성기금’이다. 국가를 우회하는 과거사 청산을 시도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해결책은 최근 한일외무장관 회담에서 드러났듯 일본 지배자들이 생각하는 양보의 최대치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순전히 ‘개인’의 문제라 여기는 이들은 일본 국가의 책임을 이야기하면서도 기금이나 재단을 세워 국가 책임을 우회하려고 하는 일본의 태도에는 일관된 비판을 가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위안부 문제가 순전한 개인의 문제라면, 이 문제를 ‘사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지 못할 이유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의를 ‘순전한’ 개인의 경험만으로 재조직하는 것은 불가능하면서도 위험한 시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민족주의의 한계에 머물러서도 안된다. 민족주의는 ‘민족’이라 지칭되는 집단 구성원 사이에 명백히 존재하는 갈등(특히 계급적 갈등)을 눙치고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자유주의 여성운동의 대모라 칭송되며 당시 스탈린주의자들에게 계급연대의 대상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던 김활란을 떠올려 보라. ‘민족주의 여성운동가’ 김활란은 이화여전 학생들에게 일본의 전시동원체제에 호응하라 앞장서 호소했다. 같은 한국 민족 여성이라도 김활란 같은 한국 여성과 실제로 위안부로 동원돼야 했던 빈곤한 한국 여성들은 결코 같은 이해관계에 놓일 수 없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시 위안부 동원이라는 비극을 불러왔던 제국주의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제국주의는 단순한 식민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경쟁이 필연적으로 초래하게 되는, 자본주의의 한 과정이다. ‘자본’이라는 것이 하나의 ‘관계’(착취-피착취)라는 점을 주목한다면, 제국주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은 계급적인 것이어야 한다. 때문에 제국주의는 물론이고 그것이 초래한 식민지 상태에 대한 분석도 계급적으로 재조직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이것이 식민지에서의 여성문제에 대한 계급환원론으로 나아가서는 안된다. 그러나 계급문제와의 긴밀한 연관성을 부정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