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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사회민주주의 분석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가 “장기 불황”이라고 부른 세계경제 위기는 전 세계에서 정치적 양극화와 불안정을 낳고 있다. 그 정치 위기로 특히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수십 년에 걸쳐 형성된 제도권 정치 질서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에서는 40여 년 동안 우파 정당인 신민당과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사회당이 분점하던 양당 구도가 해체되고, 좌파적 개혁주의 정당인 시리자가 집권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당은 완전히 몰락해 버렸다.

그리스 시리자는 노동자들의 강력한 긴축 중단 염원에 힘입어 집권했지만, 지금은 혹독한 긴축을 추진하고 있다 ⓒ사진 출처 유럽연합

그리스보다 정도는 덜하지만 스페인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프랑코의 군부독재가 끝나고부터 지금까지 약 40년 동안 전통적 우파 정당인 국민당과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사회당이 득세했다. 그러나 좌파적 개혁주의 정당인 포데모스(‘우리는 할 수 있다’는 뜻)가 급성장하며 스페인에서도 양당 구도가 무너졌다. 2015년 12월 20일 실시된 총선 결과, 어느 정당도 의석을 절반 이상 획득하지 못하고 연립정부 구성도 난항을 겪으면서, 현재 스페인은 두 달 넘도록 정부도 구성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프랑스 사회당은 현재 미국 주도의 시리아 폭격에 동참하고 국가 비상사태를 거듭 연장하며 민주적 권리를 제약하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혀 좌파답지도 노동자 정당답지도 못하다.(2012년 대선에서는 정치 양극화의 수혜를 입어 승리해 17년 만에 집권할 수 있었다.)

영국에서는 ‘변방 좌파’ 제러미 코빈이 노동당 당대표로 선출됐다. 코빈이 당대표로 당선되기 불과 넉 달 전에만 해도 영국 노동당은 총선에서 참패하는 등 거의 산송장 신세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코빈의 당선을 ‘천지개벽’에 비유했다. (이런 정치 위기 속에서 유럽 전역에서 극우와 파시즘도 성장하고 있는데,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노동자 연대〉 웹사이트 상단의 ‘파시즘과 인종차별’란에 실린 기사들을 참고하시오.)

개혁주의의 성장

한국도 이런 흐름에서 비켜서 있지 않다. 여전히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말이다. 〈노동자 연대〉 166호에 실린 기사, ‘통합 정의당 성장의 역설’에서 지적했듯이, “통합 정의당 같은 정치적 개혁주의가 소생”하고 있다. 박근혜의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13년에는 노동자들이 “낙담·사기저하·우울·무력감·두려움”을 내비쳤다면, 2015년에는 약점도 있었지만 파업과 대규모 거리 시위 등 노동자 투쟁이 일어나며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덕분이다.

이처럼 개혁주의가 성장하는 것은 투쟁의 성장으로 대중 의식이 좌경화하는 상황을 반영한다. 따라서 급진 좌파는 개혁주의의 성장을 환영해야 한다. 물론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으로 환영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지난 1백50여 년의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가 보여 주듯이, 사회민주주의(좌파적 버전이든 우파적 버전이든)는 노동계급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한다. 좌파적인 유형인데도 그리스 시리자가 노동자들의 강력한 긴축 중단 염원에 힘입어 집권한 지 채 반 년도 안 돼 더 혹독한 긴축을 시행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사회민주주의 한계의 최신 사례일 뿐이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개혁주의가 단지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개혁주의는 무엇이고 마르크스주의자는 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이 문제에 있어서, 격변의 시대를 먼저 산 혁명가들의 주장과 실천은 많은 영감과 힌트를 줄 것이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에 관한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과 실천을 살펴보고자 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반(反)자본주의적 투쟁의 시초는 자본주의의 태동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봉건제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부르주아지(그리고 그 이데올로그들)는 봉건제에 맞서는 투쟁에 다른 사회집단도 끌어들여야 했다. 그래서 가장 위대한 부르주아 혁명인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구호는 추상적인 자유·평등·우애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구호가 부르주아들끼리의 자유·평등·우애를 뜻할 뿐임은 곧 드러났다. 자본주의의 부조리에 항의하는 운동은 바로 프랑스 대혁명 속에서 시작됐다. 예를 들어, 역사상 최초의 혁명적 사회주의 단체인 그라쿠스 바뵈프가 이끈 ‘평등파의 음모’의 활동이 있다. (바뵈프에 관해서는 핼 드레이퍼 지음, 최일붕 옮김, 《사회주의의 두 가지 전통》(노동자연대 2014), ‘옮긴이의 머리말’을 참고하시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정치 활동을 시작할 무렵은 근대 노동운동이 태동하던 때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그때까지만 해도 서로 별개인 사상으로 받아들여지던 사회주의와 혁명을 결합시켰고, 노동계급을 사회주의 혁명의 중심 세력으로 봤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개혁주의에 관해 체계적으로 논의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1848년에 쓴 《공산당 선언》의 5분의 2를 다른 사회주의 이론을 다루는 데 할애했음을 고려하면 의아하게 보일 수 있다. 심지어 《공산당 선언》에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와 타협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듯한 구절도 있다.

《공산당 선언》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렇게 개혁주의를 배제한 채 세 단계의 전망을 제시했다: 노동자들은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고 자신들끼리의 경쟁으로 분열돼 있는 오합지졸 같은 대중을 이룬다.” 그러다가 노동조합과 정치조직을 만든다. 마침내 계급 전쟁이 “일어나 공공연한 혁명으로 이어지고 … 혁명에서 부르주아지가 폭력적으로 타도돼 프롤레타리아 지배의 토대가 놓인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공산당 선언》에서 비판하는 다른 사회주의 경향들은 노동계급이 발전함에 따라 간단히 사라질 것이다.

매우 압축적으로 요약한 이 진술을 보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일종의 숙명론에 빠져 있었다고 단언하면 안 된다. 그들은 사회주의에 이르는 불가피하고 단선적인 길이 있다고 주장한 적이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주장은, 혁명이 궤도에 오르면 노동계급 내부에 존재하는 경쟁적 조류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만약 계급투쟁에 해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노동계급 외부에 존재하는 위험일 것이다.

개혁주의가 노동계급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공산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 전체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럴 것이다. “공산주의자는 노동계급의 정당에 대립하는 별도의 정당을 만들지 않는다. 공산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 전체의 이해와는 다른 별도의 이해관계를 갖지 않는다. … 공산주의자는 현재의 계급 투쟁에서, 그리고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역사적 운동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실제의 관계들을 일반적 용어로 표현할 뿐이다.”(《공산당 선언》)

이 진술에는 노동계급의 정당은 결국 혁명이라는 목표를 채택할 것이라는 가정이 깔려 있다. 물론 이런 요약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고타 강령 비판》 같은 글에서 개혁주의 사상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개혁주의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고, 《공산당 선언》에서 개진한 입장을 생애 말까지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1867년 영국에서 숙련 남성 노동자들에게 투표권이 보장되고 1871년 독일에서 남성들을 대상으로 보통선거권이 실시되면서 개혁주의로의 통로가 체계적으로 마련되기 시작한 뒤로도 개혁주의를 풍부하게 분석하지는 않았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개혁이냐 혁명이냐》

노동운동 내 개혁주의로 향하는 흐름을 처음 심각하게 포착해 낸 사람은 독일 사회민주당(SPD) 급진파의 리더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독일 사회민주당은 공식적으로는 혁명에 헌신한다고 했지만, 중간파 카를 카우츠키의 지도 아래 실천에서는 혁명적이지 않았다. 카우츠키는 《공산당 선언》을 완전히 기계적으로 이해해, 사회주의자는 혁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 정당은 혁명적 당이지만 혁명을 일으키는 정당은 아니다. 우리의 목표가 혁명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우리의 적대자들에게 혁명을 막을 힘이 없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혁명을 창조할 힘이 없음도 우리는 안다. 혁명을 일으키거나 혁명을 위한 길을 닦는 것은 우리의 과업이 아니다.”(《권력으로 가는 길》)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득세했던 또 다른 세력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이끈 수정주의 파였다. 베른슈타인은 혁명에 헌신한다는 말조차 과도하다고 보아 완전히 개혁주의적인 강령을 제시했다. 그는 신용의 확장 덕분에 자본의 순환이 빨라져 자본주의에서 더는 위기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보통선거권이 확장되고 노동조합이 발전하면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아도 사회주의가 도래할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룩셈부르크는 1899년에 쓴 《개혁이냐 혁명이냐》에서 베른슈타인의 전망을 낱낱이 파헤쳐 비판했다.

쟁점은 어떻게 사회 변혁을 이룰 것인가, 즉 아래로부터의 대중 행동을 일으킬 것이냐 아니면 선거나 교섭에 기댈 것이냐였다. 룩셈부르크는 두 전략이 본질적으로 양립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정치권력 장악과 사회혁명에 반대하며 그 대신에 개혁 입법을 택하는 사람은 사실 같은 목표를 이루는 더 평온하고 안정적이지만 느린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는 전혀 다른 목표를 지향한다. 그는 새로운 사회 질서를 수립한다는 입장이 아니라, 낡은 질서의 겉모습을 수정한다는 입장을 택한 것이다.”(《개혁이냐 혁명이냐》)

룩셈부르크가 개혁주의의 본질을 식별해 낸 것은 커다란 성과였지만, 그녀도 마르크스·엥겔스처럼 개혁주의를 노동계급 정치에 침투해 들어오는 외부적 존재로 여겼다. 예를 들어,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이렇게 분석했다. “베른슈타인이 공들여 세운 [독일 사회민주]당 내 기회주의적 이론은 우리 당으로 유입된 프티부르주아적 요소들의 우위를 확고히 해 주고 우리 당의 정책과 목표를 프티부르주아적으로 바꾸려는 무의식적 노력일 뿐이다.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문제, 최종 목표와 운동이라는 문제는 기본적으로 노동운동의 프티부르주아적 성격이냐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이냐는 문제를 다른 형태로 제기한 것일 뿐이다.” (《개혁이냐 혁명이냐》)

운동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이 유지되는 한, 그 운동으로부터 흘러나오고 그 운동에 조응하는 정치 강령도 혁명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적이지 않다면 어쩔 것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레닌의 ‘노동계 귀족’ 이론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개혁주의가 차르 왕정의 혹독한 탄압 속에 있는 러시아에서도 나타날 수 있음을 룩셈부르크의 선구적 연구를 바탕으로 보여 줬다. 그러나 레닌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레닌은 노동계급 일반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줬다. 레닌은 이렇게 주장했다. “진정으로 혁명적인 이론을 따르며, 진정으로 혁명적이고 자발적으로 각성하고 있는 계급에 의존하는 러시아 혁명가들이 마침내, 정말로 마침내! 그들의 막대한 힘을 모두 갖추고 온전히 성장할 수 있는 때가 왔다.”(《무엇을 할 것인가?》)

혁명가들이 노동계급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혁명가와 노동계급은 동의어가 될 수 없다.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혁명가와 노동계급은 구분되지 않는다며 레닌을 비판했다. 혁명가들이 노동계급을 ‘외부로부터 밀어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 아니냐는 그들의 비판에 레닌은 이렇게 답했다. “그런 ‘외부로부터 밀어 움직이기’가 너무 많았던 적은 별로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는 너무 없었다 … 혁명에 전념하는 우리는 ‘밀어 움직이기’ 활동을 지금까지 한 것보다 백 곱절은 더 강력하게 펼쳐야 하고 또 그럴 것이다.”

레닌은 그래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사회민주주의 의식이 존재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사회민주주의[오늘날의 용어법으로는 혁명적] 의식은 외부에서 노동자들에게 도입돼야 할 것이다. 모든 나라의 역사는 노동계급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노동조합 의식을 발전시킬 뿐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 하지만 사회주의 이론은 유산계급의 교육받은 대변자들, 즉 지식인들이 일구어 낸 철학, 역사, 경제 이론들에서 나온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만 보면 레닌은 개혁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가 모두 노동계급 외부에서 오는 것으로 본 듯하다. “노동자 대중 자신이 운동 과정 속에서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는 독립적 이데올로기는 없다. 오로지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냐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냐는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레닌이 주장하는 방식은 항상 유연했고, 그래서 나중에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개진한 주장을 많이 버렸다. 그러나 나중까지도 유지한 생각이 있었는데, 바로 역사의 발전만으로 노동계급이 저절로 개혁주의를 거부하고 혁명적 사상을 지지하게 되는 일은 없으리라는 것이다.

제1차세계대전이 터지자 레닌의 사상은 한층 더 발전했다. 당시 제2인터내셔널에 소속된 대다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껍데기로만 갖고 있던 혁명적 입장조차 내던지고 각자 자국 지배계급이 벌이는 전쟁을 지지했다.

1910년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

개혁주의의 뿌리는 깊었고, 설명이 필요했다. 레닌은 ‘노동계 귀족’이라는 소수 특권층이 존재하고, 그들이 노동계급 속에서 개혁주의를 부추긴다고 주장했다.(로자 룩셈부르크도 1906년에 쓴 《대중파업》에서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관료주의”에 젖어들고 “조직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했었다.) 레닌은, 지배계급이 제국주의 정책으로 얻는 ‘초과이윤’을 이용해 노동계급의 일부와 노동계 관료들을 매수한 결과 ‘노동계 귀족’이 생겨났다고 봤던 것이다.

레닌의 ‘노동계 귀족’ 이론은 개혁주의가 노동계급 내부에서 발전하는 것임을 함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일보전진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람시와 트로츠키의 계승

안토니오 그람시와 레온 트로츠키도 ‘노동계 귀족’ 이론을 받아들였다. 그람시는 1926년 발표한 ‘리옹 테제’에서 이탈리아에는 개혁주의의 성장을 촉진하는 요인이 두 가지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프티부르주아지와 농민이 대거 노동계급으로 바뀜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안에서 새 이데올로기 경향이 확산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단계로 발전함에 따라 … 노동계 귀족이 형성”되는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사》에서 ‘노동계 귀족’ 이론을 원용했다. 이는 주목할 만한 시도였다. 왜냐하면 차르 치하의 러시아에서는 개혁주의를 포함한 반정부 세력이 모두 혹독하게 탄압당했고, 그래서 노동계급 내에 특권층이 서서히 생겨날 기회가 없었고,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에서 교섭을 담당하는 노동계 관료가 성장할 기회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17년 2월 혁명 뒤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노동자와 병사들이 직접 선출한 대표자로 구성된 소비에트가 설립됐는데, 그 대표자들은 대부분 개혁주의자(멘셰비키당과 사회혁명당)였다. 이처럼 2월 혁명 직후 러시아에서 개혁주의가 득세한 이유를 트로츠키는 이렇게 설명했다. “한편으로는 자본의 관료들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계 관료들, 즉 새 중간계층 [때문이다.] … 혁명의 성격과 그로부터 생겨난 권력의 성격은 서로 모순되는데, 이는 혁명적 대중과 … 부르주아지 사이에 놓인 새 프티부르주아지라는 칸막이벽이 가진 모순된 성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아래로부터의 혁명적 격변이 일어난 와중에도 “노동계 관료들, 즉 새 중간계층”이 불쑥 튀어나와 사태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모순된 의식”

‘노동계 귀족’ 이론은 지배계급과 대중 사이를 중재하는 노동계 관료에 초점을 맞춘다는 강점이 있지만 한계도 있다. 첫째, 이 이론은 노동계 관료와 고임금 노동자를 똑같이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를 보면, 고임금 노동자들은 투쟁과 강력한 노동조합 조직을 통해 그런 성과를 쟁취했다. 고임금 노동자들은 대중의 급진화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기는커녕, 어떤 상황에서는 대중의 급진화를 촉진하기도 했다. 노동자 혁명 물결이 가장 크게 일었던 1917~24년, 비교적 처지가 나았던 숙련 금속노동자들은 거듭 투쟁의 선봉에 섰고, 공산당들이 창립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둘째, ‘노동계 귀족’ 이론은 왜 노동자들이 개혁주의 지도자들을 선택하고 때로는 지도자들의 배신을 꾹 참는 것인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노조 관료들이 배신하는 것이 받아들여진다는 말은 아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투쟁을 패배로 이끄는 것에 대한 평조합원들의 분노가 폭발한 사례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그런 상황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일이 많은 것은 개혁주의 사상이 ‘노동계 귀족’에 한정되지 않고 노동계급 내 곳곳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셋째, 제1차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역사를 보면, 개혁주의를 제국주의(덕분에 얻은 초과이윤)와 연결시키는 것은 틀렸다. 제3세계에서 일어난 혁명들도 이러저러한 유형의 개혁주의로 빗나갔기 때문이다. 1979년 이란, 1990~93년 남아프리카공화국, 1998년 인도네시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하면 이렇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개혁주의에 관해 여러 핵심 주장을 내놓았다. 룩셈부르크는 개혁주의의 방법과 혁명적 정치의 방법이 서로 다른 목표를 향하는 것임을 보여 줬다. ‘노동계 귀족’ 이론은 노동계 관료들이 개혁주의를 부추기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는 것을 보여 줬다. 이런 통찰들을 바탕으로 고전 마르크스주의는 개혁주의의 본질을 인식했을 뿐 아니라,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개혁주의에 대응해 채택해야 할 전술을 개발했다.(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살펴보겠다.) 그럼에도 문제는 남는다. 개혁주의의 생명력이 질긴 것을 보면 개혁주의는 단지 노동계급 외부에서 침투해 들어오는 요소가 아니다. 또한 ‘노동계 귀족’ 이론의 가정과 달리 개혁주의는 선진국은 물론 개발도상국에도 광범하게 퍼져 있다. 그러므로 주장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 다행히 마르크스주의의 무기고에는 이를 도울 도구가 있다.

지배적 사상과 실제의 현실

개혁주의를 노동계급 외부 세력이나 노동계급 내 부패한 일부 소수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면, 개혁주의는 노동계급 자체 안에서 발전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끊임없이 존재하지만 끊임없이 변하며 상호작용하는 두 가지 요인이 여기에 관여한다. 첫째, 마르크스가 “지배적 사상은 지배적인 물질적 관계를 이상화된 형태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하고 지적한 것이다. 언론과 교육 등 수많은 설득 수단을 통해 자본주의가 최선의 사회 형태이고, 노동자는 힘이 없을 수밖에 없고, 실업은 없애지 못하는 일이고, 이민자들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따위의 생각이 퍼진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다른 지적도 했다. “인간의 의식이 그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그의 의식을 결정한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착취, 소외, 차별, 생산량 증가 압박, 일자리 지키기 투쟁 등을 겪는다는 뜻이다. 집단행동을 벌이며 단결하고 크고 작은 규모로 저항해서 얻은 성과, 그런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 배운 교훈도 마찬가지로 의식에 영향을 끼친다.

이처럼 지배적 사상과 실제의 현실이 모순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노동자의 다수가 개혁주의적 관념을 지속시키는 상황이 전개된다. 그러나 둘 사이의 균형은 사람들마다 다양하다. 그 결과 노동자의 다수는 개혁주의적이지만 소수는 완전히 혁명적이고 또 다른 소수는 완전히 반동적인 상황이 생겨난다.

지배적 사상과 실제 현실의 모순된 상호작용은 초보적 개혁주의 의식이 생겨나는 배경일 뿐, 완연히 발전해 조직적 형태를 갖춘 개혁주의를 다룰 때는 추가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첫째, 개혁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을 구분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경제적 문제를 둘러싸고 직접적 계급투쟁을 벌이지만 다루는 쟁점이 협소하기 쉽다. 개혁주의 정당은 득표를 늘리는 데 주력하며 대중의 수동성을 부추기지만 전국가적이고 일반적인 정치 사상을 다룬다.

둘째, 개혁주의 조직에는 지도자들도 있고 기층 당원이나 조합원도 있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둘 사이의 균형은 안정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중요한 파업이 승리하거나 위기 때문에 대중이 자본주의 친화적 이데올로기를 의심하는 때에는 지배적 사상의 설득력이 전보다 약해질 수 있다. 그러면 노동자들이 노조 관료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투쟁할 가능성이 커질 수 있고, 그런 투쟁이 일어나면 대중의 의식이 크게 바뀔 수 있다.

개혁주의와 관계 맺기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개혁주의의 뿌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개혁주의에 대응할 실천 방법도 발전시켰다. 예를 들어 룩셈부르크는 1905년 러시아 혁명을 분석하며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보수적 타성에 맞설 힘을 발견해 냈다.

1906년 출판된 《대중 파업》에서 룩셈부르크는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통해 어떻게 스스로 변하는지를 강조했다. 대중 파업은 자본주의 친화적 사상뿐 아니라 노동계 관료들의 압박을 중화시키는 강력한 해독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대중 행동을 강조했고, 경제적 개선을 바라는 제한된 투쟁이 어떻게 정치 권력에 도전하는 투쟁으로 고양될 수 있는지를 강조했다.

룩셈부르크는 대중 행동을 크게 강조하면서도, 혁명적 정당의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것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그런 리더십을 발휘하길 바랐다. 1918년 독일 혁명으로 그런 바람이 틀렸음이 드러난다.

아래로부터의 투쟁에 밀려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개혁주의적 입장을 버릴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해도, 룩셈부르크는 그 가능성을 너무 크게 봤다. 그러나 개혁주의 정당 지도자들과 노동조합 관료는 그 사회적 역할 덕분에 착취를 겪지 않으며 지배계급과 대중 사이에서 중재자 구실을 하고, 실제 현실이 지배적 사상과 충돌하며 빚는 모순된 상호작용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다.

다른 곳보다 정치 지형이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지만, 한국에서도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조금씩 살아나며 개혁주의 정당인 정의당이 성장하고 있다. ⓒ이미진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을 혁명의 대의 쪽으로 설득하기를 바란 점은 틀렸지만, 룩셈부르크가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강조하고, 대중에게 스스로 변화되고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단절할 능력이 있음을 강조한 것은 매우 중요했다. 개혁주의 지도자들과 달리, 노동자들은 개혁주의적 방식에 기대어 얻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노동자 다수가 이 점을 깨닫는 것은 혁명가들의 설교나 소수 혁명가들의 행동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룩셈부르크는 개혁주의를 뛰어넘는 데서 노동자 대중이 스스로 행동에 나서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문제와 관련해, 레닌은 룩셈부르크와는 다른 곳에 강조점을 뒀다. 앞서 살펴봤듯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이 개진한 주장은 노동자 정당에서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와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 중 어느 하나가 득세할 수 있음을 함축했다. 노동자 정당에서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가 득세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1903년 레닌은 멘셰비키와 갈라서고 볼셰비키당을 건설했다. 당시만 해도 레닌은 이런 분열이 러시아에서만 필요한 일이라고 봤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를 거치며 레닌은 같은 접근법이 국제적 수준에서도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레닌은 공산주의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창립하며 강력한 가입 조건을 제시했다. 그중 제2항은 이렇다. “공산주의인터내셔널에 가입하기를 바라는 조직은 모두 노동계급 운동의 책임 있는 직책에서 개혁주의적이고 ‘중간주의적’인 인사를 배제하고 … 공산주의자로 대체하려는 노력을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

공산주의인터내셔널

이 조항은 당시 상황에 대한 매우 낙관적인 평가를 바탕으로 했다. 제2인터내셔널이 대표한 개혁주의는 완전히 파산했고,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이 “세계 곳곳에서 계급의식적인 노동자 압도 다수의 공감을 얻고 있으며 매일매일 더 강력해지고 있다”는 평가였다.

“계급의식적 노동자 압도 다수가” 러시아 혁명에 “공감”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노동자들이 즉시 개혁주의 조직과 결별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각국에서 신생 공산당이 성장했음에도 세계 혁명은 불발로 끝났다.

그렇다고 당시의 지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개혁주의로부터 조직적으로 분리하는 것을 재고한 것은 아니다. 1924년 트로츠키는 이렇게 지적했다. “혁명이 대성공을 거뒀음에도 [계급]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면, 그것은 당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 당 없이, 당과 거리를 두고, 당을 제쳐두고, 당이 아닌 대용품을 가지고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승리할 수 없다.”(《10월의 교훈》)

하지만 혁명적 정당을 창당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역설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혁명가들이 개혁주의로부터 분리하는 것과 혁명가들이 개혁주의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이 둘 다 중요하다. 레닌은 두 가지 실천이 절대적으로 연결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우선 이렇게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 정당은 옛 사회의 세력과 전통에 맞서려면 … 가장 엄격한 민주집중제와 규율이 필요하다. … 투쟁으로 단련된 강철처럼 단단한 당이 없으면 … 투쟁은 성공할 수 없다.” 그러고 나서 레닌은 ‘공동전선’ 전술들을 강조했다. 혁명가들이 당면 투쟁에서 개혁주의자들과 함께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주장을 종합해 레닌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혁명적 정당이 없으면, “승리를 향한 전진을 단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다. 그러나 [혁명적 정당이 있어도] 승리는 꽤나 멀리 떨어져 있다. … 승리하려면 대중이 몸소 정치적 경험을 해야만 한다. 이것이 모든 위대한 혁명의 근본 법칙이다.”(《좌익 공산주의: 유치증》)

레닌과 마찬가지로 트로츠키도 개혁주의로부터 분리하는 것, 개혁주의와 관계 맺는 것 둘 다 핵심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람시는 이렇게 주장했다: 공산당을 건설해 “노동계급의 선진적 부위를 규합”하는 것은 “근본적 과제”이다. 그러나 “그 당이 혁명적 기구임을 ‘자처’하는 것과 계급을 이끌 능력이 있느냐 여부는 직결돼 있는 것이 아니다. … 대중 속에서 활동한 결과로서만 그 당은 대중에게 ‘우리의’ 당이라는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검증

일상적 시기에 노동계급 다수는 개혁주의를 받아들이고, 혁명가는 소수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일종의 딜레마를 겪는다. 한편으로, 사회를 아래로부터 변혁하려면 대중 정당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혁명적이지 않은 사람들도 최대한 설득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과정에서 혁명적 정당의 필요성을 희생시키면 혁명 프로젝트는 재앙으로 끝나고 만다. 이런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내놓은 처방은 세 단계로 이뤄져 있다. 첫째, 개혁주의 문제를 엄격하게 인식하기. 둘째, 개혁주의와 조직적으로 분리하기. 셋째, 공동전선 전술.

여기서도 역사가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대표자 8백87명이 모여 제2인터내셔널 대회를 열었다. 독일,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덴마크, 러시아 등지에서 온 대표자들은 유럽 전역의 노동자 수백만 명을 대표했다. 대표자들은 임박한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자 결의문은 휴지조각이 돼 버렸다.

유럽이 애국주의 광풍에 빠진 전쟁 초기, 오로지 극소수 혁명가들만이 원칙을 지키며 시류를 거슬렀다. 러시아에서는 레닌이, 독일에서는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전쟁에 반대했다. 국가 이익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는 혹독했다. 국가 탄압, 대중의 조롱, 물리적 폭력이 뒤따랐다. 레닌은 망명을 갈 수밖에 없었고,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는 수감됐다. 그들의 주장은 옳았지만 어느 곳에서나 혁명가는 줄어들었다.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나기 단 몇 주 전에만 해도 레닌은 자신의 생애에는 혁명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런 상황을 두고 한 말이었다. 제국주의 전쟁을 끝냈을 뿐 아니라 전 세계를 사회주의 혁명의 문턱까지 이끌고 간 출발점은 소수의 혁명가들이 혁명적 정치를 확고히 지킨 것이었다.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이처럼 운명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길을 연 것은 러시아의 볼셰비키당이었다. 볼셰비키당은 러시아를 전쟁에서 끄집어냈고 노동자 국가를 세워 전 세계를 고무했다. 하지만 극심한 후퇴에서 승리로 나아가는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 소속 대표자는 전체 1천 명 중 60명밖에 안 됐다. 그럼에도 1917년 10월 볼셰비키당은 러시아 노동계급에게 혁명의 필요성을 설득해 냈다. 볼셰비키당이 러시아 노동계급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은 당의 규모보다는 원칙 있는 정치적 주장과 개입주의적 조직으로서 풍부한 경험을 쌓아 얻은 원숙함 덕분이었다.

원칙과 원숙함

차르 왕정을 타도한(1917년 2월) 직후 대중의 일반적 정서는 사소한 차이는 덮어 두고 단결하자는 것이었다. 볼셰비키당은 이를 거슬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룩셈부르크가 《개혁이냐 혁명이냐》에서 지적한 것, 즉 개혁주의와 혁명적 정치는 목표가 다르다는 것이 드러났다. 멘셰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전쟁을 지속하고 토지 개혁을 미루고 자본주의를 지속시키자고 했다. 레닌의 ‘4월 테제’를 채택한 뒤의 볼셰비키당은 “빵, 평화, 토지”를 기치로 내걸었다.

그러나 원칙만으로는 부족했다. 전술들이 필요했다. 1917년 7월 페트로그라드의 급진적 노동자들은 봉기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 노동자의 다수는 개혁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혁명 상황에서 노동자의 선진적 부위와 후진적 부위가 이렇게 어긋나는 것은 치명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레닌은 고군분투했다. 이 과정에서 경험이 풍부하고 비교적 일관성을 갖춘 조직인 볼셰비키당이 중요했다. 1917년 8월 말 코르닐로프 장군이 반혁명적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볼셰비키당은 공동전선 전술을 적용해 멘셰비키·사회혁명당과 함께 쿠데타에 맞서 싸웠고, 성공했다. 그 뒤 얼마 되지 않아 볼셰비키당은 소비에트에서 다수파가 됐다.

제1차세계대전의 공포가 모두에게 확실해지면서 유럽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국제주의 원칙을 올곧게 지키고 있던 혁명가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독일 제국주의를 지지한 뒤 룩셈부르크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혁명적 정당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의 헛된 바람을 접고 ‘스파르타쿠스동맹’이라는 혁명적 정당의 중핵을 건설했다. 1918년 11월 독일 혁명이 일어난 뒤 스파르타쿠스동맹은 빠르게 성장했다. 1918년 12월 독일 노동자 평의회 대회가 열렸다. 하지만 볼셰비키당과 달리 스파르타쿠스동맹은 미숙한 신생 정당이었던 나머지, 개혁주의적 다수를 자신들의 입장 쪽으로 설득할 수 있는 목소리를 갖지 못했다. 노동자 평의회 대표자 4백5명 중 스파르타쿠스동맹 소속 대표자는 10명뿐이었고, 그조차 스파르타쿠스동맹의 이름을 걸고 당선된 사람들이 아니었다.

볼셰비키당과 스파르타쿠스동맹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동맹은 이런 문제를 극복할 가능성이 있었다. 독일 혁명이 사그라진 1924년까지 몇 차례 기회가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동맹이 규모가 작은 것도 중요한 문제였지만 더 치명적인 문제는 경험 부족이었다. 러시아 볼셰비키당은 민주집중제를 바탕으로 십수 년에 걸쳐 일관된 조직을 건설하려 애썼다. 볼셰비키당은 불법, 반합법 등 여러 조건에서 활동하며 노동계급을 지도하려고 애썼다. 1905년 혁명처럼 투쟁이 대규모로 분출하는 시기도 겪었고 그 직후 찾아온 극심한 패배기도 겪었다.

독일 혁명이 일어난 뒤, 경험은 적지만 매우 열정적인 투사들이 스파르타쿠스동맹에 대거 가입했다. 그들은 독일에서 사회주의를 최대한 빨리 건설하고 싶어 했지만, 정치적 경험도 일천하고 자신들의 사상을 어떻게 실천에 적용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들은 룩셈부르크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룩셈부르크의 동료인 리프크네히트는 성마르고 경험 없는 소수 혁명가들의 압력에 휩쓸렸고,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1919년 1월에 일어난 설익은 봉기에 끌려들어갔다. 이 봉기는 쉽게 고립돼 패배했고 그 뒤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 둘 다 살해됐다.

원숙함은 단지 오래 활동했다고 갖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트로츠키가 《10월의 교훈》에서 강하게 주장했듯이, 혁명적 조직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보수성’은 상황이 급변하는 시기에는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1917년 10월 봉기를 성사시키기 위해 레닌은 볼셰비키당의 경험 많은 선임 당원들과 투쟁을 벌여야 했다. 볼셰비키당은 갖췄지만 스파르타쿠스 동맹은 갖추지 못한 것은 물리적 활동 시간이 아니었다. 혁명가들이 당으로 조직돼 개혁주의적 다수를 설득하고 투쟁을 전진시키며 쌓은 조직적 원숙함이 부족했던 것이다.

결론

20세기 혁명가들의 성공과 실패 경험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지침이 된다. 그 경험을 돌이켜볼 때, 개혁주의적 운동들에 녹아들거나 노동조합에서 자신의 사회주의적 신념을 감추는 혁명가들은 완전히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다. 반대로, 혁명만 되뇌며 개혁주의적 운동에 팔짱 끼고 있는 혁명가들도 완전히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다. 개혁주의 조직이 대중의 개혁주의적 의식을 만든 것이 아니다. 반대로, 대중의 개혁주의적 의식이 개혁주의 조직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대중의 개혁주의적 의식은 자본주의 하에서 그들이 겪는 여러 경험과 투쟁에서 비롯한다.

룩셈부르크가 보여 줬듯이, 개혁주의는 체제를 조금 손질할 뿐이지 체제를 폐지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가들이 옆에 서서 설교나 하고 혁명적 상황이 도래하기를 앉아서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대중이 개혁주의 사상을 넘어설 수 있도록 하는 기회는 계속해서 발생했다. 현재도 중요한 투쟁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 그 투쟁의 결과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 그 결과는 계급투쟁이 얼마나 발전하느냐, 혁명가들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명확하냐, 혁명적 당이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 글은 Donny Gluckstein, ‘Classical Marxism and the question of reformism’, International Socialism 143 (Summer 2014)를 참고해 작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