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노동자 투쟁] 우리의 예측이 어긋난 게 아니라 바램에 조금 못 미쳤을 뿐 올해도 투쟁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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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윤 씨는(이하 존칭 생략) 노동자연대를 비판하는 글을 써, 노동자연대가 지난해 노동자 투쟁이 자신들의 예측대로 되지 않자 “[누가 또는 무엇이] 투쟁을 망쳤다”는 식으로 “핑계거리와 희생양”을 찾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지윤에게는 (그의 대전제를 무너뜨리는)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는 지난해 노동자 투쟁이 결코 망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해 노동자들은 박근혜에 맞서 꽤 저항을 했다. 연초부터 민주노총이 노동개악에 맞선 투쟁에 시동을 걸면서 몇 차례 하루 파업을 했고, 연말에 대규모 노동자대회 겸 민중총궐기를 했다.

전지윤은 마치 우리가 민중총궐기를 (그것이 총파업이 아니라는 이유로) 깎아내린 듯이 왜곡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최일붕은 ‘민중주의란 무엇인가?’에서 “지난 몇 달 새 벌어진 민중총궐기는 박근혜 하에서 노동계급과 민중이 자신감 수준을 회복하기 시작했다는 좋은 징조”라고 했다. 이와 함께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소심함 때문에 파업 투쟁의 대용품으로 가두 항의가 활용됐다는 한계도 지닌다”고 했다. 모순을 지적한 것이다.

이것은 민중총궐기의 성공만을 거의 일면적으로 강조하면서 민주노총 총파업은 “처음부터 승산이 높지 않았다”고 한 전지윤의 접근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거의’라고 말한 이유는 “시민사회, 종교계의 동참[이] 외연 확대이면서 동시에 우리 편을 통제하는 양날의 칼이었다”는 등의 “아쉬움과 부족함”을 말하기 때문인데, 노동계급 고유의 투쟁 방법으로 자본가들의 이윤에 타격을 주지 못한 것은 전혀 아쉬워하지 않는다.) 전지윤은 노동자연대의 입장이 마치 자신의 일면적 평가의 거울 이미지인 것처럼 오해하면서, 심지어 “이것[총궐기]이 총파업을 회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면 박근혜 정부는 그런 후퇴를 반겼어야 한다”는 억지 주장을 폈다. 그러나 “노동계급과 민중이 자신감 수준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을 반길 자본주의 정부가 어디 있겠는가. 전지윤이 모순의 한 측면에 의도적으로 눈 감고 있음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뒤에서 보겠지만, 전지윤은 일면적 사고 때문에 번번이 노동자연대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총파업에 대한 공정한 평가

실제 지난해 노동자 투쟁이 전개된 양상을 봐도 민주노총 총파업이 마치 아무것도 아니었던 양 일축해 버리는 것은 터무니없다. 전지윤은 “민주노총 지도부는 세 차례가 넘는 총파업을 선언했지만 실질적인 파업은 잘 실행되지도 확대되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지도부가 파업을 호소했는데도 노동자들이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그는 “민주노총의 줄어든 [투쟁]동력, 사회적 고립, 정파적 사분오열, 산업과 기업에 따른 부문주의” 등을 이유로 꼽는다.

그러나 우선 지적할 것은, 4·24와 9·23 같은 파업이 결코 의미 없었던 게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4·24 총파업에는 20만 조합원이 참가했고 파업 집회에는 전국적으로 6만 4천 명가량(민주노총 통계)이 참석했다. 당시 파업 집회 참가 인원은 11월 민중총궐기에 참가한 조합원 수(7만 명, 민주노총 통계)와 큰 차이가 없었다. 또, 9·23 총파업은 규모는 작았지만 노사정 야합에 맞서 즉각적인 항의를 표명했다는 정치적 의미가 있다. 이런 총파업 투쟁들이 없었다면 11월 민중총궐기가 대규모로 치러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민중총궐기 참가자의 압도 다수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이었다. 전지윤은 “민주노총의 줄어든 [투쟁] 동력”을 문제로 꼽았지만, 민중총궐기는 주로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투쟁 동력에 의존했던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우려했을 민중총궐기의 파장과 잠재력도 상당 부분 이로부터 나올 수 있었다.

지난해 4·24 파업 4·24와 9·23 같은 총파업 투쟁들이 없었다면 11월 민중총궐기가 대규모로 치러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사진 이미진

2월 27일 4차 민중총궐기 참가자의 압도 다수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이었다. ⓒ사진 이미진

물론 사회주의자들이 민주노총 총파업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민주노총 한상균 집행부도 ‘규모가 총파업이란 명명에 부합하는지’, ‘파업 이외의 단체행동 비중이 높았던 점’ 등을 돌아본 바 있다(2016년 정기대의원대회). 그러나 지도부는 “몇 차례나 총파업 지침을 내”리며 “불을 붙”였지만 “노동자들의 자신감과 파업 태세가 충분치 않”아 “불이 타오르지 않”았다는 전지윤의 평가는 매우 일면적이고, 동역학과 변화에 주목하지 않으며, 별 근거도 없다.

‘결과를 놓고 볼 때 어쨌든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서지 않은 거 아니냐’는 식의 평가는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는지에 관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정서는 2014년 말 ‘박근혜의 노동개악에 맞선 총파업’을 공약으로 내건 좌파이자 소수파인 한상균 후보조를 신임 임원진으로 선택한 것, 2015년 초 신임 위원장이 된 한상균이 호소한 총파업 찬반 투표에 높은 찬성률(84.4퍼센트)로 응답한 것을 통해 어느 정도 드러났다. 즉, 박근혜 정부 3년차를 맞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투쟁하는 지도부를 원했고, 지도부가 파업 지침을 내리면 응할 의사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어느 정도 좌절된 과정에서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구실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전지윤은 “한상균 지도부가 지난해 몇 차례나 총파업 지침을 내린 것이 과연 총파업을 억누른 것인지, 그런 파업 호소에도 왜 실질적인 파업이 벌어지지 않은 것인지” 설명하라고 했다.

이에 관해 언급하기 전에 용어를 좀 명확하게 해 두고자 한다. 우리는 (전지윤과 달리) ‘민주노총 지도부’와 ‘한상균 집행부’가 지칭하는 바를 대개 구분해서 사용해 왔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중집 성원들(특히 주요 산별연맹 대표)이 포함된 것으로, ‘한상균 집행부’는 한상균 신임 임원진(위·수·사)과 사무총국을 가리키는 것으로 말이다.(사무총국 실장급 가운데도 위·수·사와 임기를 같이 하는 정무직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민주노총 지도부’가 총파업에 관해 단일한 입장이었다고 할 수 없다. 민주노총 지도부 안에는 총파업을 둘러싸고 입장 차이가 상존했다. 한상균 신임 임원진이 총파업 건설에 가장 열의가 있었고 나머지 지도자들 사이에는 온도 차가 있었다. 이것은 단지 ‘정파’ 문제도 아니었다. ‘좌파’로 분류되는 전규석 금속노조 위원장과 조상수 공공운수노조 위원장도 총파업에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거나 난색을 표명하는 입장이었다. 상당수 산별연맹 위원장들은 적어도 상반기에는 공공연히 총파업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보이코트했다. 민주노총 중집에서 총파업이 결정돼도 자신의 산별연맹으로 돌아가 그것을 축소 또는 좌절시켰다. 여느 산별연맹보다 규모가 크고 힘이 센 대규모 단위노조 위원장들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민주노총이 몇 차례 총파업 지침을 내렸다 해서 민주노총 지도부 구성원들이 모두 총파업을 지지했고 그 지침에 따라 행동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얘기다.

이경훈 전 현대차 지부장은 매우 두드러진 사례로, 그는 파업 찬반투표에서 찬성을 밝힌 자신의 조합원들의 의사를 거슬러 4·24 총파업 불참을 선언했다. 그것이 “억지 파업”이라면서 말이다. 이것은 총파업에 초를 치는 행위였다. 이충재 전 공무원노조 위원장은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가 주요 요구 중 하나였던 4·24 총파업이 끝난 직후, 공무원연금 개악에 합의해 버림으로써 뒤통수를 쳤다.

전지윤은 노동자연대가 “지난해 투쟁을 돌아보며 이[이경훈, 이충재, 정의당 지도부 등]에 대한 비판을 강조했다면 이해할 만한 일이었을” 텐데 “의아스럽게도 비판의 화살은 주로 민주노총 지도부와 ‘자주파’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는 난데없는 주장을 했다. 그러나 지난해 투쟁을 돌아보는 노동자연대의 글들을 읽어 보거나 우리의 실천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십중팔구 이렇게 이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주된 것과 부차적인 것을 구분할 줄 알기에, 투쟁에 찬물을 끼얹고 배신한 노조 지도자들과 그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노조 지도자들의 문제를 다루는 데서 경중을 매길 줄 안다.

우리가 안타깝게 여기며 비판했던 것은, 한상균 신임 임원진이 이경훈의 “억지 파업” 주장을 즉각 공개 반박하고 현대차 조합원들에게 민주노총의 지침을 따르라고 호소하기보다 그를 ‘보듬고’ 가려 했다는 점이다. 파업 지침 불이행을 단호히 비판하고 집단폭행 사태에 대한 강력한 징계를 추진함으로써 전열과 조합원 사기를 유지했어야 했는데 말이다. 한상균 집행부는 이충재의 배신에 대해서도 공적연금 강화 논리에 혼란을 겪으며 우왕좌왕했다.

전국회의로 말하자면, 중앙은 적어도 상반기에는 총파업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그렇다고 전국회의 소속인 주요 단위노조 위원장들이 꼭 총파업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또, 이경훈 징계 문제에서 중요한 키를 쥐고 있었던 울산지역의 전국회의 경향은 이경훈 징계를 반대했다. 이충재가 배신했을 때 공무원노조 내 전국회의 경향인 중집 성원들은 이충재를 사퇴시키고 새로운 투쟁 지도부 세우기를 꺼렸다. 7월 즈음 전국회의 중앙은 ‘준비되지 않은 총파업’에 대한 ‘피로 확산’ 같은 얘기를 꺼내고 있었고, 안타깝게도 한상균 신임 임원진도 하반기를 준비하며 총파업에 대한 자신감을 상당히 잃고 있었다. 주로 공무원연금 삭감에 대한 저항이 좌절된 것의 후유증이었다.

좌파 노조 지도부와의 제휴 전술에 대한 이해 부족

이런 주장에 대해 전지윤은 노동자연대가 “기층 노동자들은 자신감이 높[은데]” 지도부가 문제였다고 본다며 다시금 자신의 일면적 시각 속에 우리의 주장을 욱여넣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2014~15년 노동자연대의 노동조합 전술은 기층 노동자들이 불만은 많지만 스스로 파업에 나설 만큼 자신감이 높지는 않다는 데 기초하고 있었다. 대신 노동자들은 지도부가 투쟁을 잘 해주기를 바라며 의탁하려 했다. 이런 인식 속에서 우리는 민주노총 임원 선거에 참여해 좌파 지도부 세우기에 일조했다. 파업 지침을 내리도록 좌파 지도부에 촉구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이것은 전지윤이 오해하듯이 우리가 좌파 지도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장 조합원들의 자신감이다. 우리는 민주노총 좌파 활동가들이 좌파 지도부가 총파업 지침을 내리도록 지지·압박하고 그 지침을 이용해 기층에서 투쟁을 실질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현장 조합원들의 자신감을 높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현장 조합원들이 스스로 파업에 나설 만큼 자신감이 높지 않을 때 지도부의 파업 지침은 노동자들이 행동에 나설 유리한 조건을 제공할 수 있다. 일종의 우산인 셈이다. 그리고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은 의식 변화를 경험하고 자신감을 높일 수 있다.

이에 전지윤은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면 논리적으로 총연맹만이 아니라 산별, 연맹, 지부까지 모두 진정한 좌파 지도부로 교체되고, 그래서 파업 지침이 어디서도 막히지 않고 내려갈 때만 총파업이 가능해진다는 말이 된다.” 그의 일면적이고 기계적인 이해가 어디까지 계속될지 모르겠지만, 노동자연대의 전술은 관료체제가 단일해지는 상황은커녕 그 균열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었다. 좌파 지도자의 등장은 관료체제에 균열을 가져오고 사회주의자들은 그에 따른 관료체제의 통제력 약화를 이용할 수 있다. 그래서 온건한 지도자들도 어쩔 수 없이 총파업을 지지하는 시늉을 하게 하거나 적어도 우파적 영향력을 관철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 ⓒ사진 이미진

지난해 민주노총 내 일부에서 일시적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민주노총 신임 임원진은 노동조합 관료 전체의 규범에 순응하는 쪽으로 기울었고, 다른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한 배를 탔다는 생각 때문에 관료 기구 내에 풍파 일으키기를 꺼렸다. 그래서 다른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총파업을 은근히 보이코트하거나 심지어 노골적으로 찬물을 끼얹었을 때도 그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않았고, 현장 조합원들이 그들을 거슬러 행동하도록 독려하는 방법을 취하지도 않았다. 분명 한상균 위원장은 총파업 조직에 열의가 있었고 재수감을 마다 않을 크나큰 용기가 있었다. 하지만 총파업을 현실화시키려면 다른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둘러싸인 소수파 지도자라는 한계를 극복할 대안이 있어야 했다.

이런 난점은 민주노총 신임 임원진만의 것은 아니었다. 가장 안타깝게도 좌파들의 문제도 있었다. 노동자연대는 지난해 초에 “현재 기층의 활력이 충분하지 않고, 현장 활동가층이 두텁지 못한 데다 사기도 좋지 않아 어려움이 적잖다”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다음과 같은 과제를 제시한 바 있다. “좌파 지도부의 등장은 투쟁에 좋은 출발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열쇠는 현장 조합원들에게 있다. 좌파 지도자는 매우 훌륭한 투사일지라도 노동조합 관료 전체의 규범에 순응하라는 엄청난 압력을 받는다는 점을 좌파 활동가들은 알아야 한다. 좌파 활동가들의 독립적인 네트워크가 있어야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고, 필요하다면 독자적인 투쟁도 해 나갈 수 있다. 좌파 활동가들은 근시안적이거나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현장 노동자들의 활동과 조직을 발전시키는 것에 주안점을 두면서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그러나 좌파단체들이 협력해 ‘좌파 활동가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일부 좌파들은 좌파 지도부가 세워졌는데 왜 좌파 활동가들이 이로부터 독립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하냐며 이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현장 강화’는 좌파들이 집행부를 잡지 못하는 시기에나 강조될 일이고, 좌파가 집행부를 잡았으니 그것을 떠받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인식이 강한 듯했다. 사실, 좌파 활동가들이 (상대적) 우파 지도부 하에서 ‘현장 조직’을 구축하다가 그에 기반해 집행부를 잡고 나면 모두 ‘위’로 올라가는 바람에 현장에 공백이 빚어지는 현상을 그동안 대규모 단위노조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단결은 어떻게 가능한가?

위와 같은 평가를 하는 것은 누구를 희생양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고 상황을 바꿀 수 있을까 이해하기 위해서다. 반면 전지윤은 민중총궐기를 통해 노동운동의 난점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었)다고 보는 듯하다. 민주노총 총파업은 “처음부터 승산이 높지 않았”는데, “1, 2차 총궐기 등을 거치면서 상황[이] 약간 달라[졌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민중총궐기를 통해 “정파적 차이를 넘어서 단결”했다며 큰 의의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것은 ‘통진당 세력을 배제하지 않는 진보통합’에 대한 그의 고유의 관심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 내에서 총파업을 둘러싸고 입장 차이가 상존했던 것은 앞에서 살펴봤듯이 “정파적 사분오열”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사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민중총궐기에 관해서는 일치된 견해를 가졌다면, 그것은 ‘총파업은 못 한다’는 것을 둘러싼 ‘단결’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민중총궐기 이후 “민주노총 3차 파업”의 “규모와 위력이 커지는 변화를 보였다”는 전지윤의 주장은 현실을 잘 모르는 사람의 과장이다. 오히려 민주노총 지도자들이 ‘민중총궐기에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총파업을 하겠다’던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고 보는 게 현실에 더 부합할 것이다. 민중총궐기 직후 민주노총과 산하 노조들에 대한 압수수색, 한상균 위원장 체포 위협 속에서도 민주노총 지도부는 총파업을 결정하지 않았다. 12월 16일 총파업은 완성차 3사가 참가하긴 했지만 주야2시간의 형식적 파업에 그쳤다. 1월 25일 정오를 기해 들어가기로 한 “무기한 총파업” 결정은 사실상 이행되지 않았다.

민중총궐기라는 형식이 일반으로 총파업에 비해 단결 강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이 이윤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자기 고유의 힘을 발휘했을 때 노동계급 내부의 분열을 극복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중간계급과 청년·학생 그리고 미조직 노동자들로부터 지지도 받을 수 있다.

반면 전지윤은 “자기 조합원들의 조건과 경제적 요구에 따라서 칸막이화되고 각개 약진·격파 당하[는]” 것이 “[노동운동의] 현재의 문제”인데, 노동자연대가 “자기[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조건”과 “경제적 요구”를 너무 강조하는 것은 문제라고 비판한다. 이래 가지고는 현재 노동운동의 약점을 극복할 수 없다면서 말이다. 우선, 노동자연대는 민주노총 총파업이 세월호 참사 같은 전 사회적 쟁점을 다뤄야 한다고 항상 주장해 왔음을 환기하고자 한다. 공무원연금이나 노동법 같은 문제는 그 자체로 정권의 생사여탈을 좌우할 만한 정치적 이슈이기도 하다. 우리는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더 불이익을 줄 쟁점들에 맞서서도 자신들의 조직된 힘을 사용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자신의 조건이나 경제적 요구를 위해 싸우는 것이 곧 칸막이 위험을 가져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싸워서 자신의 조건을 지키지 못한 노동자들은 다른 노동자들의 문제에 연대하고 나설 자신감이 생길 수 없다. 자신의 투쟁을 전투적으로 벌이면서 다른 노동자 부문의 투쟁을 고무하고 연대해야 노동계급의 단결이 강화될 수 있다. 전지윤은 조직 노동자들 자신의 요구들을 양보하거나, 요구들 가운데 민중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만 내세워야 “사회적 고립”을 극복할 수 있다는 노동운동 내 널리 퍼진 경향에 타협하고 있다. 그는 (다른 글에서) 특정 부문의 요구가 아니라 “더 넓은 사회적 지지와 연대를 불러 올 요구들이 앞세워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지윤은 모른 체하지만, 비정규직 2법 저지, 최저임금 대폭 인상, 공적연금 강화 등은 노동계가 더민주당이나 시민단체들도 지지해 줄 것이라고 믿는 요구들이다. 지난호 내 글에서 밝혔듯이, 물론 우리도 “이 요구들을 지지했다.” 문제는 이 요구들을 지지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 대신 잘 조직된 부위의 노동조건을 겨냥해 퍼붓는 정부의 공격들을 외면하는 것이다.

이처럼 조직 노동자들의 부문적 요구를 당당하게 밝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면, 박근혜의 이간질을 통한 각개격파 전술에 결코 단결로 맞설 수 없다. 계급동맹을 추구하는 개혁주의자들은 조직 노동자들이 ‘계급 이기주의적’ 요구나 투쟁을 자제해야 중간계급과 청년·학생 그리고 미조직·비정규직과의 “단결”을 강화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혁명적 사회주의자라면 마땅히 다른 모델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은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 노동자 계급이 농민과 맺은 관계에서 찾을 수 있는데, 당시 노동자 계급은 그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면서도 오직 노동자 권력(소비에트)만이 농민에게 평화와 빵을 보장해 줄 수 있음을 입증함으로써 농민을 자기 편으로 이끌 수 있었다.

전지윤은 노동운동을 진단하면서 민주노총의 동력 축소, 조직 노동자들의 사회적 고립, 정파 분열과 부문주의 비판 같은 이런저런 유행을 수용하고 있다. 이런 진단들은 흔히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계급론이나 가치론에 대한 이견과 닿아 있고, 사회 변혁 주체로서 노동계급에 대한 회의로 연결된다. 전지윤의 핵심 문제의식 하나도 계급투쟁과 그 주체에 대한 인식을 “생산과정을 넘어서” 생활과 소비 영역으로, “노동자를 넘어서” 자본주의에서 갈취당하는 모든 사람들로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노동자들이 생산 지점에서 벌이는 투쟁의 결정적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 편협한 인식이라도 되는 양 비판한다. 그러나 그에게 이런 질문들을 던져 보고 싶다.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누가 이윤의 원천인 잉여가치를 만드는가, 그것을 되찾을 힘은 누구에게 있는가?

마르크스가 왜 체제 변혁적 노동운동을 위해 《자본론》을 썼는지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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