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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을 맞아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의 기원

4월 28일은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이다. 이날은 1993년 4월 10일 태국 케이더(Kader)의 한 공장에서 일어난 화재사건이 계기가 됐다. 이 공장은 당시 한창 인기 있던 심슨(Simpson) 인형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이 공장 안에서 일어난 불은 188명의 노동자를 재로 만들었다. 188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이 불을 피해 도망가지 못했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이유는 간단했다. 일당보다 비싼 심슨 인형을 노동자들이 훔쳐 갈까 봐 사측이 공장 문을 밖에서 걸어 잠근 것이다. 188명의 노동자는 그렇게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잿더미가 됐다. 자본가의 탐욕이 낳은 이 끔찍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1996년 4월 28일 미국에서 열린 유엔 '지속가능한 발전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던 각국 노동조합 대표자들이 촛불을 밝혔다. 전 세계 110개국 노동자들이 추모하는 '4·28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은 이렇게 시작됐다.

4월 28일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을 맞아 열린 ‘건강한 노동, 안전한 사회 민주노총 투쟁 결의대회’ ⓒ조승진

지표로 본 한국의 산재 상황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산재사망 1위 국가다. 매년 10만 명에 가까운 노동자가 산업재해를 입고 2천 명에 이르는 노동자가 사망한다. 2015년에도 9만 1백29명이 산업재해를 입었고, 1천8백10명이 사망했다. 출근하고 집에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노동자가 매일 5명씩 생긴단 얘기다. 이를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면,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비율(사고사망 만인율)만 따지더라도, 2012년 기준 미국보다 2배 이상 높고, 독일보다는 4.3배 높다. 가까운 일본보다는 3.6배 높은 수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이제는 한국에서 일반 국민이 교통사고로 사망할 확률보다, 노동자가 산재로 사망할 확률이 더 높다.(2014년부터 전체 노동자 중 산재 사망 비율이 전체 인구 중 교통사고 사망 비율을 앞질렀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고용노동부 발표 자료에 근거한 얘기다. 사망까지 이른 경우는 그나마 산재로 처리될 확률이 높다. 즉, 최소로 따졌을 때, 저 정도일 거란 얘기다. 반면, 일반 재해로 한국에서 산재처리를 받기란 쉽지 않다. 이는 공식통계로도 확인된다. 실제 업무상 사고 또는 직업성 손상률만 보면 OECD 평균의 5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즉, 전반적인 재해율은 OECD 평균보다 훨씬 낮은데, 사망 재해는 1위인 불가사의한 현상이 매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굳이 하인리히 법칙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국사회에 은폐되고 있는 산재가 얼마나 산재해 있는지를 말해준다.(이미 임준 등(2007), 신상도 등(2010)의 연구를 통해서도 입증된 바 있다)

주요 산재사고로 본 2015년

2015년 7월 29일, 청주의 화장품 공장에서는 지게차에 치인 노동자가 방치돼 사망에 이르렀다. 사고 직후 직원이 119에 신고를 했고 7분 만에 구급대가 도착했지만, 사측은 직원이 찰과상을 입은 정도라며 알아서 하겠다고 돌려보냈다. 이후 사측은 공장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지정병원에 연락을 취했다. 노동자는 사고 1시간 만에 겨우 지정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해당 병원은 정형외과 전문병원이었다. 이미 내부출혈이 심한 상태였다. 다시 종합병원으로 가야 했고, 결국 그는 제대로 된 치료 한번 못 받고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사측이 119를 돌려보내고, 가까운 종합병원을 두고도 지정병원으로 가려던 이유는 간단했다. 벌점을 피하고자 산재 사고를 은폐하려 한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 119가 왔다 간 경우는 양반일지도 모른다. 2014년 제2롯데월드 공사장에서는 건설노동자가 추락해 두개골이 깨져 피가 흘러나오는 상황에서도, 119에 신고하지 않았다. 대신 사측은 상당 거리 떨어진 지정병원에 연락을 취했다. 가까운 아산병원을 옆에 두고 22분간 방치된 이 노동자 역시 지정병원 구급차 안에서 사망했다. 삼성전자는 아예 자체 구급대를 운영한다. 2013년 불산 누출사고 당시 삼성은 한 노동자가 사망하고 나서야 25시간 만에 불산 누출 사실을 신고했다. 이 노동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도 자체 구급대인 ‘삼성3119’를 이용해 끝까지 산재를 은폐하려 했다.

2015년 한국을 강타한 메르스 역시 산재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국에 처음 메르스 유입 가능성을 알린 것은 2013년 어느 노동자의 죽음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하던 한국 노동자가 메르스가 의심되는 상황임에도 제대로 된 검사조차 못 받고 사망한 것이다. 동료 노동자들은 공포에 떨며 조치를 요구했지만 원청인 삼성엔지니어링과 하청인 동일산업은 책임을 떠넘기며 노동자들을 방치했다. 이를 한국 보건당국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해외파견 노동자들에 대한 보호나 국내 메르스 유입을 막기 위한 검역을 강화되기는커녕 엉뚱한 중동 붐을 부추겼다. 결국, 2015년 메르스는 상륙했다. 그 확산에도 산재문제는 중심에 있었다. 수많은 노동자가 불안한 고용조건으로 인해 메르스가 의심되는 상황에서도 출근해야 했다. 어느 노동자는 증상이 나타나고 감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회사에 알렸음에도 중국 출장을 가야했다. 심지어 많은 노동자들이 증상을 숨겼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거의 유일하게 상병수당 제도(질병으로 인한 소득 상실을 보전해 주는 제도)가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노동자들에게 일을 쉰다는 것은 메르스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2015년 3월, 전라도 광주에서는 전구공장의 생산설비를 철거하던 노동자들이 집단 수은중독에 빠졌다. 현장에 투입된 노동자들은 원청과 하청업체로부터 수은에 대한 어떠한 얘기도 듣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노동자는 난생처음 보는 “은색 덩어리가 예뻐 보여 맨손으로 구슬 모양을 만들” 정도였다. 몸이 재산인 건설노동자들인지라 나름 체력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일을 시작한 지 며칠 만에 몸에 문제가 생겼다. 두통, 구토, 피부발진 등 원인 모를 온갖 증상들이 튀어나오자 하나둘씩 작업장을 떠났다. 그렇게 수십 명이 수은에 중독되어 갔다. 각자 병원을 전전한 뒤에야 자신들의 눈앞에 널려있던 그 은색 덩어리들이 수은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이들은 산재신청을 했으나 원청인 남영전구는 “광주공장에 수은은 없었다”며 수은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철거작업 중 수은중독에 걸렸다 하더라도 노동자들을 고용한 하청(우리토건)에서 책임질 일이라며 단호히 선을 그었다. 이를 관리 감독하고 조사에 나서야 할 근로복지공단은 처음엔 산재신청조차 반려했다. 이후 여론이 악화하고 산재신청 노동자가 늘어나자 그제야 산재신청을 받아주었다. 현재 80여 명의 산재신청자 중 10여 명이 겨우 산재승인을 받은 상태다.

1988년 수은온도계 공장에서 한 달 남짓 일하고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문송면군 사건이 있은 지 28년이 지났다. 위의 사건은 그 긴 시간 동안 자본과 국가권력이 노동자를 대하는 방식에 있어 한 치도 나아가지 못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국가기구와 자본의 면피용 대응 매뉴얼만 발전을 거듭했을 뿐, 제2, 제3의 ‘문송면’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4대 보험조차 들어주지 않는 편법·불법파견이 독버섯처럼 자라 산재처리를 위한 기본적인 기록조차 남지 않는 상황이다. 심지어 파견노동자들이 각기 다른 파견업체를 통해 고용되고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작업장의 옆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다. 바로 옆 사람이 작업장 환경 때문에 눈이 멀어 직장에 못 나와도 사장이 입 다무는 이상 스스로 조심할 수도 없다. 실제 2016년에 발생한 메탄올 중독 사건에서 세 명은 같은 작업장 출신이었다. 이들은 이 편법·불법파견 구조 때문에 동료가 자신과 유사한 증상으로 퇴사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똑같이 눈이 멀 때까지 일했다.

고용노동부가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을 맞이하는 방식

고용노동부는 느닷없이 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을 일주일 앞두고 산업안전보건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 했다. 개정안의 골자는 산재 보고대상을 '휴업 3일 이상'에서 '휴업 4일 이상'으로 완화하고, 1개월 이내에 산재 사실을 보고하지 않을 때 즉시 처벌했던 것을 노동부가 시정 지시를 한 후 15일 이내 ‘산업재해조사표’를 제출하면 처벌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산재 보고대상을 “요양 4일”에서 “휴업 3일”로 바꾼 것도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즉, 사업주가 산재 보고를 해야 하는 대상이 회사에서 재해를 입고 병원을 4일 정도 통원치료해야 하는 노동자에서 3일 입원할 정도의 재해를 입은 노동자로 바뀐 것이 2014년이었다. 이 때문에 사측은 재해를 입은 노동자에게 입원 대신 통원치료를 강요하고, 이를 원활히 유도하기 위해 지정병원에 보내왔다. 이것을 이제 ‘4일 입원할 정도’로 바꾸어준다는 것이다. 단 하루 차이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업주에게는 엄청난 선물이다.

산재 은폐 사업주에 대한 처벌이 지금도 솜방망이인데, 이제는 산재 은폐로 고발되더라도 15일 안에 사업주가 ‘산업재해조사표’를 고용노동부에 제출하면 그 솜방망이마저도 피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아마 이런 그림이 될 것이다. 노동자가 재해를 입으면 회사는 산재 보고를 안 하려고 지정병원으로 보내 아무리 큰 재해일지라도 4일 이내로 입원하게 할 것이다. 만일 노동자가 너무 아프고 억울해서 이를 산재 은폐라고 고발하면 고용노동부는 친절하게 사업주에게 시정명령을 내릴 것이다. 그리고 사업주는 아무런 처벌 없이 시정하겠다며, 15일 내로 ‘산업재해조사표’를 작성해 고용노동부에 제출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공장을 돌릴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산재 은폐를 줄이기 위해 도입된 ‘산재 은폐 사업장 명단 공표’와 건설업 공사입찰에 반영된 ‘산재 은폐 감점제’도 무력화된다. 그나마 산재 은폐를 막고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들마저 없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박근혜는 지난 2월 “일단 모두 물에 빠트려놓고 꼭 살려내야만 할 규제만 살려두도록” 해야 한다는 발언을 착실히 실천하고 있다. 2016년에는 또 얼마나 많은 노동자가 유명을 달리해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몇몇 개의 개선요구로는 그들의 죽음을 막을 수 없을 것 같다.

뜨거운 5월을 간절히 기대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