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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시즘2016 주디스 오어 연설①:
마르크스주의는 차별을 설명할 수 있는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중앙위원이자, 신간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책갈피)의 저자인 주디스 오어(사진)가 7월 21~24일 노동자연대가 주최한 ‘맑시즘2016’에서 연설했다. 이 글은 7월 22일에 주디스 오어가 한 같은 제목의 강연을 녹취한 것이다. 쉽고 명쾌한 그녀의 연설은 차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의 설명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안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편집자가 덧붙인 것이다.

우리는 매우 분열된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회 최상부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과 사회 대다수 사람들의 삶은 너무나 괴리돼 있어서 마치 서로 다른 우주에서 사는 것 같습니다. 사회는 부와 가난으로 분열돼 있기도 하고 또 착취하는 쪽과 착취당하는 쪽으로 분열돼 있기도 합니다. 또한 온갖 종류의 차별과 억압으로 또 갈라져 있습니다. 억압이라고 함은 젠더나 인종, 섹슈얼리티 등을 이유로 체계적인 차별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과 뭔가 달라 보인다’는 인식만으로도 차별이나 억압을 당할 수 있습니다.

맑시즘2016에서 연설하는 주디스 오어 ⓒ조승진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은 미국에서 흑인들이 단지 피부 색깔 때문에 경찰들에게 살해당할 위험이 더 높다는 것을 보여 줬습니다. 영국의 경우에는 흑인이나 중동계, 인도·파키스탄계 사람들은 경찰에게 불심검문을 당할 확률이 백인 남성보다 7배 이상 높습니다. 또 영국에서는 여성 노동자들이 남성보다 임금을 평균 18퍼센트 적게 받습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이렇듯 억압이라는 것은 단순히 머릿속에 있는 관념이 아닙니다. 억압당하는 사람들은 물질적인 불이익을 받고 편견에 시달리고 심지어 폭력과 죽음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오늘 아침에 TV를 보니까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딸이 자기 아버지를 소개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 딸이 자기 아버지는 여성의 권익에 신경 쓴다고 얘기했습니다. 또 트럼프가 젠더나 피부색을 전혀 구별하지 않는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피부색이나 젠더에 무감각하다는 것은 사실상 억압에 무감각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억압의 근원

억압은 개개인들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데 그것이 때로는 단지 개인의 문제, 개인의 정신상태나 심리상태의 문제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억압이 너무나 내면화된 나머지 그것이 마치 전체 사회구조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거죠.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가 이런 억압을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든 현상을 다 계급으로 환원한다’며 마르크스주의가 단지 경제에만 골몰한다고 얘기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억압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심대한 영향을 거의 무시하다시피 하고 기계론적 설명만 한다고도 합니다.

물론 피상적으로만 보면 억압이 계급 분단과 무관해 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억압이라는 것이 단지 가난한 사람들이나 노동계급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언론에서 영국의 신임 여성 총리 테리사 메이가 입고 나온 옷이나 신발이 어떻네 이러쿵저러쿵 하는데, 남성 정치인이라면 절대 그런 굴욕을 당하지 않죠. 또 런던에서 흑인이 BMW를 운전했다면, 경찰한테 불심검문을 당할 수 있습니다. 백인이라면 안 그랬을 텐데 말이죠. 이런 표면적 인상 때문에 억압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는 많은 이론들, 즉 억압을 계급이나 착취와는 별개의 체계로 설명하는 이론들이 개발됐습니다. 착취나 계급과는 별개인 억압에 맞서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내놓은 해답이 이를테면 정체성 정치라든가 특권이론, 흑인 민족주의, 페미니즘 등입니다.

그러나 계급을 논하지 않고서는 억압을 설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억압의 해악을 제대로 가늠하기조차 어렵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억압이라는 것은 분명 착취와는 다른 것입니다. 착취는 수량화가 가능한 범주입니다. 그러니까 노동자들에게 얼마를 지급하고 공장에 얼마를 투자해서 거기서 나오는 수익이 얼마냐를 보면서 잉여가치가 얼마나 추출됐는지,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서 얼마나 착취해 갔는지를 정량화할 수 있는데, 억압은 이런 식으로 측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모호한 범주도 아닙니다. 억압에는 분명한 물질적 기반이 있습니다. 억압과 관계되는 온갖 편견과 사상들이 바로 이런 물질적 기초에서 나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를 하나의 총체로서 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모든 형태의 억압과 차별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다 설명하진 않겠습니다. 그러나 특정한 사회 구조가 생겨나면서 각종 억압적 사상을 양산하고 그런 억압적 사상이 다시금 사회 구조를 정당화하고 또 강화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 흑인 노예제가 생겨나자 흑인들의 끔찍한 상태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종차별 이데올로기가 발명됐습니다. 여성의 경우, 계급사회가 등장하면서 사사화된 가족이 생겨나고 그 안에서 여성의 구실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여성이 집안에서 애를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이데올로기도 생겨나게 된 것이죠.

노동자연대가 주최한 맑시즘2016에서 연설하는 주디스 오어. ⓒ조승진
오늘날 차별과 억압이 지속되는 문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설명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조승진

이런 마르크스주의의 설명과 달리, 여타의 이론들은 개인들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이렇게 개인의 경험에 초점을 맞추면, 개인마다 주관적으로 다를 수 있는 경험들이 객관적인 설명을 대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개인적 관계의 양상이나 개인적 정체성은 억압의 산물이지 원인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지식인 마사 지메네스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개인적 경험 그 자체는 신빙성이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변증법적으로 봤을 때 대립물들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어떤 점에서 대립물들의 총합이냐면, 개인적 경험이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독특하고 통찰력을 보여 주고 숨겨진 것을 드러내 보이는 힘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철저하게 사회적인 것이면서도 사회의 파편만을 보여 주며 사회 전체를 가리는 효과가 있다”고 했습니다. 즉 개인적 경험은 그 자체로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과정의 산물이지만 그 과정에 대해서 그것을 경험하는 개인은 잘 알지 못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의 경험 그 자체만으로는 억압이 일어나는 원인은 물론 억압을 어떻게 종식시킬지에 대해서 딱히 답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특권이론

개인간의 관계에 주목하는 이론 중 하나가 특권이론입니다. 이 이론대로라면, 만약 누군가가 백인이거나 남성이고, 또 어떤 이유로든 다른 사람보다 차별을 덜 받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 사람은 그 자체로 특권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남성이거나 백인인 사람들은 지배적인 집단의 일원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도 이득을 본다는 것이 그 이론의 기본적 사상입니다. 이런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떤 특정한 젠더, 즉 남성이라는 집단이 계급에 상관 없이 다 동일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실제로는 그런 공통의 이해관계가 없는데도 말이죠. 그러다 보면 특권이 존재하는 책임을 개인들에게 떠넘기게 되고 억압과 차별이 체제의 논리 자체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특권 이론가들이 예컨대 “당신의 특권을 억누르시오” 하고 말할 때, 거기에 깔려 있는 전제는 인종차별적인 사회에서 백인 일반이 다 이득을 본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반대해야 합니다. 즉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보면 흑인이 차별당할 때 백인 노동자들도 불이익을 봅니다. 억압이라는 것은 그 형태가 무엇이든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우리의 힘을 약화시킵니다.

특권이론은 억압을 인류 불변의 현상이라고 보기 때문에 빠져나올 수 없는 것으로 만듭니다. 특권 이론의 논리를 결론으로까지 밀고 나가면 결국에는 모든 남성은, 그리고 모든 백인은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은 남성과 별개로 조직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또 여성들 사이에서도 흑인 여성과 백인 여성은 다르기 때문에 흑인여성들만 또 따로 조직화해야 한다는 식으로 나가게 되는데, 이런 식으로 무수한 분열을 낳게 됩니다.

물론 억압을 받는 집단은 그들이 어떻게 조직화할지 스스로 방식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또 사람들마다 억압받은 경험은 천차만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흑인 여성이 여성으로서, 흑인으로서 당하는 각각의 억압은 단순히 산술적으로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억압이 상호작용하는 것이고, 단순히 백인 여성이 겪는 억압과도 다르고 또 흑인이 겪는 억압과도 다릅니다. 예컨대 서구에서는 흑인 여성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매우 억압적이고 인종차별적인 관념이 있는데요. 여자 세계 테니스 챔피언 세레나 윌리엄스를 아실 겁니다. 흑인 여성인 세레나 윌리엄스에 대해서 ‘너무 섹시하다’는 말과 동시에 ‘너무 남성적이다’라는 비난이 동시에 쏟아집니다. 이런 식으로 상이한 억압들이 서로 갈마들 수 있는 것이죠.

상호교차성 이론

어떤 사람들은 억압이 이렇게 갈마든다는 것을 상호교차성 이론으로 설명하는데요. 이 상호교차성 이론에 따르면 서로 다른 방향에서 오는 억압들이 교차하면서 사람들은 모두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억압을 경험하는 게 됩니다.

저는 이 이론이 억압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억압이 가해지는 출처가 사실은 한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계급사회, 자본주의입니다. 억압을 설명할 때 정체성 정치라든가 개인이나 개인의 정체성에 집중하는 것, 이런 것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인도하고 그래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남성이 여성억압으로 이득을 본다거나 백인이 흑인 억압으로 이득을 본다는 류의 생각도 거부해야 합니다.

오늘날 어떤 논자들은 ‘여성이 임금을 적게 받는다’고 얘기하기보다는 ‘남자들이 임금을 더 많이 받는다’는 식으로 얘기합니다. 그런데 여성이 임금을 적게 받는 데서 이득을 보는 것은 남성 노동자들이 아니라 그 여성들을 고용한 남녀 기업주들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 제도가 유지되는 데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가족 제도도 남성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제도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유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가족에서 여성에게 특정 구실이 강요되는 것을 타파할 해결책은 개인적인 관계를 바꾸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사회구조를 바꾸는 데 있습니다.

일부 이론가들은 가족이 단지 남성권력, 가부장제 권력의 표현이라고 얘기합니다. 물론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여성 억압의 구체적인 행위들, 예컨대 포르노를 구매한다거나 가정 폭력을 자행하는 것은 추상적인 체제가 아니라 구체적 남성들이고 또 억압이라는 것은 단지 불쾌한 분위기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데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는다는 주장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 억압의 복잡한 특징을 설명하는 데 턱없이 부족합니다. 가족은 남성이 여성한테서 이익을 취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자본주의 지배계급이 다음 세대 노동자들을 저렴한 가격에 재생산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정부든 그 정부가 예컨대 보육 예산을 삭감하려 한다거나 기타 복지 서비스를 삭감하려고 할 때 그것을 관철시킬 수 있는 정도는 그 사회 남성들의 개인적인 의식 같은 것에 달려 있다기보다는 계급 간의 세력 관계에 결정적으로 달려 있다는 점입니다.

노동계급의 장기적 이익이 노동계급의 단결에 달린 만큼, 그 사회의 억압적인 구조들, 그것이 성 차별적이든, 동성애 차별적이든 온갖 차별적 구조들을 유지하는 데 노동계급은 전혀 이해관계가 없습니다. 남성이든 누구든 간에 노동계급의 어떤 부문도 계급의 장기적인 이해관계, 즉 노동계급 단결이라는 이해관계에 반해서 어떤 단기적 이해관계를 갖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개별 백인 노동자나 남성 노동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와 관계없이, 그들이 주관적으로 ‘나에게 이것이 이익이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적 이해관계가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노동계급의 단결이라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우리는 각자의 정체성에 따라서 엇갈리는 이해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렇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 억압의 구실이지만, 외피를 걷어 내고 실제 우리의 이해관계가 어디 있는지를 보려면 계급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재반박을 하자면 “우리는 억압을 계급으로 환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억압을 설명할 때 계급을 무시한다면 그건 억압에 대한 이해 자체를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합니다.

억압과 착취

억압과 착취는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억압이 착취를 더 강화시키는 효과를 내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서 영국에 흑인 의원이 있는데, 그 흑인 의원이 만약 비싼 차를 몰고 다니다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찰관에게 걸리면 불심검문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과, 제가 사는 동네인 이스트런던의 가난한 흑인 청소년의 삶은 그러나 결코 비슷하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억압과 착취는 서로 함께 가고 서로 강화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사회는 우리를 서로 분열시키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결집시키기도 합니다. 오늘날 영국의 노동계급은 절반이 여성이고, 소수 인종들도 많고, LGBT 사람들도 많고 한 마디로 굉장히 다양합니다. 노동계급은 딱 봐도 지배계급하고는 다릅니다. 지배계급은 그 구성에서 백인이 훨씬 더 많고 남성이 많습니다. 이것은 억압과 착취가 별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게 서로 별개였다면 노동계급이나 지배계급이나 인종 구성이나 성별 구성이 비슷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노동계급에게 단결해야 한다고 말할 때, 하나 주의할 것은 억압의 경험 그 자체가 단결을 추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성 차별과 인종 차별을 경험한다고 해서 반드시 성 소수자에게 연대감을 느끼거나 이민자들에게 연대감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억압은 그에 맞서는 저항 운동을 촉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운동의 참가 자격을 억압을 직접 당하는 당사자들만으로 한정한다면 결국에는 기존 사회의 벽에 마주치게 됩니다.

노동계급이 억압에 맞설 수 있는 잠재력

각 개인의 정체성이 아니라 계급으로 눈을 돌린다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을 단지 피해자가 아니라 체제를 변혁할 수 있는 주체로 본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실제 역사를 봤을 때 차별과 억압에 맞서는 가장 진보적인 운동을 일으킨 것은 노동계급의 투쟁이었습니다. 영국에서 임신중절권(낙태권)을 위한 역사상 가장 큰 시위가 일어났던 것은 바로 영국의 노동조합총연맹(TUC)이 조직한 집회였습니다.

저 자신도 여성들만 참가하는 임신중절권 지지 집회에 많이 나가 봤지만 오직 노동계급이, 조직된 노동자 운동이 움직였을 때만 실제로 임신중절권 합법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노동계급이 임신중절권의 문제가 바로 노동계급의 이익과 직결되는 문제라는 것을 인식했고 그것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투쟁에 나섰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죠.

그리고 이처럼 노동계급이 고유의 힘을 발휘해서 억압에 도전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사례는 영국에서 스티븐 로렌스라는 흑인 청년이 인종차별적 갱단에게 살해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도 역시 인종차별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유가족들은 몇 년이 지나도록 살인범들에게 죗값을 물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살인범들이 몇 년 동안 자유롭게 활보하고 다닐 수 있었죠. 그래서 스티븐 로렌스의 아버지는 노동운동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노동조합총연맹 집회에 가서 내 아들을 위한 정의를 실현해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결국 살인범들은 처벌됐다.] 어제 맑시즘 개막식에서 세월호 유가족 운동 지도자와 노동조합 지도자가 같이 연단에 섰던 것이 그런 점에서 인상적이었습니다.

물론 노동조합 운동이 억압에서 완벽하게 자유롭냐 하면 그건 아니죠. 영국에서도 ‘노조 지도자들은 흔히 얼굴이 희멀건 백인 남성들이다’ 하고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급투쟁이 답”이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만약 우리가 억압이 계급사회에서 기인한다는 것과 그걸 끝낼 수 있는 세력이 노동계급이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인종차별, 성 차별 등 일체의 억압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싸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지금 노동계급이 억압을 끝장낼 투쟁을 지도할 잠재력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 현재 노동계급의 상태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재 상태의 노동자들은 많은 수가 인종차별적이고 성 차별적이고 동성애 혐오적인 사상들을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영국에서 오늘날 제일 많이 팔리는 신문은 〈더 선〉인데 구역질 나는 쓰레기 신문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노동계급에게 억압을 끝장낼 잠재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노동계급에게만 존재하는 뭔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노동계급한테는 분열을 극복하고자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노동계급의 객관적 이해관계와도 연결이 됩니다. 예컨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피켓라인을 형성할 때, 스크럼을 짜야 할 때, 승리하려면 옆에 있는 사람이 여성이건 성소수자건 폴란드 출신이건 흑인이건 상관 없이 다 같이 어깨를 걸고 스크럼을 짜야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노동자 한 명 한 명을 모두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설득해야만 그런 행동이 벌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 자체가 노동자들을 단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물론 평상시에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기도 하지만 또한 노동자들이 함께 싸우도록 만들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단결하게 됩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여기서 해야 할 구실은 이 모든 투쟁에 함께하면서 왜 우리가 함께일 때 차별을 극복할 수 있고, 그런 차별적인 사상들을 버리고 단결할 때 더 강해질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그 방향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만이 이렇게 투쟁을 통해서 단결하도록 내몰리는 동역학 속에 위치해 있고 다른 모든 사회 집단은 그런 동역학 밖에 있습니다. 노동계급에 주목하지 않는 모든 정치 이론이나 학술적 이론들은 결국에는 다 서로 찢어지고 분열하는 방향을 가리킵니다.

제가 볼 때 이런 학술적 논의나 정치 사상들이 분열을 가리키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이런 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이 보통 노동자들에 대해서 어딘지 좀 경멸하는 태도가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즉, 보통의 노동계급은 너무나 의식이 후진적이어서 결코 노동계급의 대의를 위해서 싸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주디스 오어의 연설에 집중하고 있는 맑시즘2016 참가자들. ⓒ조승진

투쟁과 의식 변화

우리는 노동계급에게 세계를 변화시킬 잠재력이 있다고 보고, 또 세계를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그들 자신도 변할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자본주의가 평상시에는 사람들을 원자화시키고 스스로 초라하다고 느끼도록 억누르지만, 사람들은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 속에서 의식이 성장합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직접 경험을 통해서, 또는 주변 사람이 투쟁에 참여하는 것을 보면서 비슷한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체제가 사람들을 서로 소외시키고 또 사람을 자기 노동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온갖 가림막들은 투쟁을 통해 밝히 드러나고, 그래서 투쟁에는 파편화돼 있던 진실을 볼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최근에 인턴과 레지던트들이 파업을 벌이는 일이 있었는데요, 이것은 굉장히 흔치 않은 일이었습니다. 처음에 파업을 벌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맞다, 인턴 등의 처우가 좀 나아져야 하지’ 하면서 그걸 지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언론과 정치인들은 “의사들이 파업하는 바람에 환자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이 의사들이 살인마들이다” 하고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인턴과 레지던트들은 점차 정치적으로 각성했습니다. 더는 자신을 특권층이라 여기지 않고 평범한 노동자로 보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 의사들은 다른 간호사들의 파업에도 동참하게 되고 등록금 인상에 맞서는 투쟁에도 연대하게 됐습니다. 즉 다른 모든 부문들과 자기가 하나라는 것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체제가 노동자들에게 하는 일이죠. 그러니까, 사람들을 프롤레타리아화시켜서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렇게 생각하든 안 하든 간에 노동자로서 조직하고, 노동자로서 투쟁하도록 떠미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련의사들도 자신들이 ‘나는 특권층 의사야’ 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이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여 주는 바는 계급투쟁은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된 현상이라는 것이고, 그걸 통해서 사람들이 단결로 내몰린다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계급투쟁은 체제가 부과하는 온갖 억압에 도전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동계급은 단지 이 체제를 바꿀 잠재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 과정에서 자신도 변혁시킬 잠재력이 있습니다. 즉 우리 자신이 새로운 세상을 운영하기에 더 적합한 존재로 거듭나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것이죠.

우리는 사회가 늘 오늘날 이 상태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국경이 존재하고 사람들이 핵가족 단위를 이뤄서 살아야 하고 피부색을 이유로 사람들이 차별받는 이런 세상이 태곳적부터 이어져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인간 본성의 일부분이라는 얘기들도 많지만, 인류 역사 대부분 동안 우리는 위계 서열이 없고 성 차별이나 그 밖의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았습니다. 핵가족 틀 내에서 살지도 않았고 또 젠더나 섹슈얼리티도 오늘날처럼 ‘남 아니면 여’, 이렇게 이분법적인 구도가 아니었고 훨씬 더 다양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인간 해방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의 아주 근본적인 통찰은 결국 우리가 먹고사는 문제, 의식주를 해결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굉장히 뿌리 깊이 고착화돼 있는 듯 보이는 온갖 억압들이 사실은 계급사회가 등장하고, 그것이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넘어오는 과정 속에서 생겨난, 역사적 발전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매일 겪는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런 억압들을 만들어 내는 체제 자체를 어떻게 끝장낼지를 항상 고민해야 합니다. 단지 개인들 간의 평등만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나아가 인간 해방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는 피억압자들에게 연대하는 것이 단지 어떤 도덕적 의무라거나 동정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피업악자에 연대할 때 우리 모두가 더 강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억압에 맞선 투쟁에 연대할 때, 지금 당장은 억압적인 사상들을 일부 받아들이는 대다수의 사람들도 언젠가는 인종·피부색·종교 등을 넘어 단결할 잠재력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지 노동계급의 특정 부문이 다른 부문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문이 함께 단결해서 더 큰 힘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억압의 피해를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개개인일지라도 그것을 끝장내는 데, 그에 맞서 싸우는 데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서입니다.

단지 먼 과거만이 아니라 근래에도 노동자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이 단지 피해자가 아니라 사회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은 혁명기에 가장 극적으로 일어납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진정으로 살아 숨쉬는 대중 혁명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면 다른 사례를 봐도 되는데, 바로 [2011년의] 이집트 혁명입니다. 저는, 무바라크를 쫓아낸 이집트 혁명이 벌어진 초기 18일 동안 타흐리르 광장에 있었습니다. [당시 주디스 오어는 이집트 특파원이었다.]

그 18일 동안 거기에 혁명에 참가한 여성들은 광장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었고 거기서 노숙을 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면서 전혀 성폭력이나 추행의 위협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집트 사회에서 꽤 규모 있는 소수 종파인 콥트교 기독교인들은 광장에 동그랗게 모여서 기도를 드렸는데, 그들을 경찰로부터 보호하려고 인간띠처럼 빙 둘러선 사람들은 바로 무슬림들이었습니다. 이집트 혁명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심지어 가장 가난한 집단에 속하는 어린아이들도 자기 목소리를 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 해방을 위해서, 사회주의를 위해 혁명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혁명은 바로 억압 받는 사람들의 축제이기 때문이죠.

감사합니다.

정리 발언

매우 활발하고 흥미로운 토론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특권 이론에 대해서 몇 분이 말씀해 주셨는데 저도 한마디 하겠습니다. 저는 우리가 조야한 분석을 피해야 한다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성폭력 피해자의 편에 서서 그 고통에 공감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남성이 다 잠재적인 가해자이고 또 여성은 피해자일 수밖에 없다는 관점에는 반대해야 합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분명 엄연한 현실이지만, 예컨대 영국에서는 거리에서 폭력을 당하는 비율이 남성들,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훨씬 높습니다. 즉, 우리는 결코 억압의 경험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지 않지만 그 억압을 종식시키는 방법론에서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동자연대 운영위원] 최일붕 동지가 발언한 내용[‘남성 사회주의자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얘기할 때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하고, 페미니즘과의 공통점을 먼저 밝혀야지, 너무 치우치거나 싸가지 없이 얘기하면 설득하는 데서 되레 반발을 부른다’는 요지]에 동의합니다. 여성 차별에 분노하고 그 현실을 바꿔 보려고 하는 수많은 젊은 사람들이 처음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수용하게 되는 사상이 페미니즘인 경우가 많습니다.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결코 단일한 사상 조류가 아니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저마다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한테는 단지 ‘나는 성 차별이 싫다’, ‘나는 그것에 저항할 것이다’라는 태도 자체가 페미니즘이기도 합니다.

일단 공동의 적에 맞서서 우리가 같은 편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우리가 같은 편이라는 것을 표시한 뒤에 ‘그렇다면 우리 적에 맞서서 어떻게 싸울까’를 토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특권이론 같은 것들은 우리 투쟁을 전진시키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이론인 것이죠. 예를 들어서 ‘남자들이 급여를 너무 많이 받는다’ 하는 생각은 지배계급도 좋아할 만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동계급 남성의 임금을 깎아내려서 더 하향평준화시키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우리가 남성의 임금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여성 임금을 상승시키기 위해서 함께 싸울 때, 그것은 노동계급 전체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 됩니다.

이 워크숍에서는 많은 참가자들이 청중발언에 나서 주장과 질문을 던졌다. ⓒ노동자연대

미국 남부의 흑백 임금 격차에 대해 한 발언자가 사례를 든 것[흑인 차별이 더 심한 미국 남부에서 백인 노동자 임금이 오히려 북부보다 더 낮다는 사례]은 아주 적절합니다. 저는 제 고향인 북아일랜드의 사례를 더 추가하겠습니다. 북아일랜드는 가톨릭과 개신교로 깊이 분단돼 있는 사회입니다. 북아일랜드에서 개신교 분파는 아일랜드가 영국에 종속되는 것을 지지하면 영국 제국으로부터 떡고물을 더 많이 받을 거라는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1950~60년대만 해도 개신교 사람들이 북아일랜드에서 상대적으로 더 나은 일자리와 주거 지역과 교육 혜택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혜택을 입는 것도 사실은 허상이었던 게, 따지고 보면 북아일랜드 개신교도들이 결국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웨일스 등 영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훨씬 더 낮은 생활 수준을 누렸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북아일랜드의 개신교와 가톨릭 간에 존재했던 그런 종파 간 갈등이 다른 지역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북아일랜드의 종파 간 분열은 모든 노동자들의 수준을 더 끌어내렸던 셈이었습니다.

러시아에 대해 얘기하자면, 러시아에서 혁명이 패배한 뒤 스탈린주의가 등장하고 옛 소련 체제가 등장한 것이 억압에 관한 논의들에 아주 심대한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억압을 설명할 때 마르크스주의 대신 다른 설명에 눈을 돌린 이유가 바로, 말로는 사회주의를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여성들이 억압받는 소련과 같은 체제의 사회들을 보면서 실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사회를 보면서 ‘아, 사회주의가 저런 거라면 사회주의가 저절로 여성 해방을 보장하지는 못하겠구나’ 하고 생각했던 거죠.

그러나 스탈린주의 하에서 여성 차별이 존속했을 뿐 아니라 더 악화했다는 것은 오히려 러시아 혁명이 패배한 증거로 봐야 합니다. 트로츠키는 가족 제도에 관한 글을 쓰면서 러시아에서 여성을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변화와 그것이 혁명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아주 강력하고도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습니다. 적군 총사령관이자 소비에트 지도부의 일원이었던 트로츠키는 러시아에서 여성들이 더는 혁명 직후처럼 마을 공영 세탁실을 이용하지 않고 세탁물을 자기 집에 가져가서 다시 빨게 됐던 것이 혁명 자체가 퇴보하고 패배하는 징후라고 썼습니다.

트로츠키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여성 해방은 사회주의의 본성 중 하나이고 만약에 혁명이 일어났는데도 여성 해방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회주의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는 증거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분이 ‘왜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적 억압 분석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그런 사람들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으로 설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하고 질문하셨는데요. 제가 말씀드렸듯이, 억압의 문제는 얼핏 개인적인 문제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것을 삼가는 게 여성들이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라든가, 아니면 인종차별이 개인이 갖고 있는 인종차별적 사상 때문이라든가 하는 분석이 그럴듯해 보이죠. 억압의 배후에 있는 구조적 기제는 사실 잘 안 보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대체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되게 개인간의 관계를 바꾸는 식으로 억압에 맞서 싸우려고 하는 사상들은 계급투쟁이 잠잠할 때 더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 시기에는 노동계급 투쟁이라는 대안이 사람들에게 피부로 잘 와 닿지 않는 것이죠. 그러므로 개인간의 관계부터 바꾸자는 이런 생각은 사회 변화에 대한 모종의 비관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일단은 신문이나 간행물, 책을 통해서 또는 일 대 일 토론을 통해서 바꿀 수도 있죠. 이런 맑시즘 행사도 결국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또 지역 단위에서 벌어지는 투쟁 속에서 사람들을 설득하려 할 수 있고요. 얼핏 보면 이런 수공업적인 작업도 굉장히 중요한데, 왜냐하면 나중에 투쟁이 폭발했을 때 그걸 이끌 수 있는 준비된 사람들이 일정량 이상은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걸 축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개인들을 설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설득하는 것만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 한 사람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될 수는 있어도 여전히 거리에는 성 차별적인 포스터들이 나붙고 경찰들의 인종차별적 행태는 일상적으로 자행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중적인 노동계급 투쟁의 중요성 문제로 다시금 되돌아와야 합니다. 투쟁을 통해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동시에 억압을 양산하는 구조 자체를 변혁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하건대, ‘노동계급의 혁명이 답이다’ 하고 말한다 해서 혁명이 일어나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일상 속에서 억압적인 온갖 행태와 발언, 법 제도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억압받는 민중의 호민관’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혁명이 모든 걸 해결해 주기만을 마냥 기다리고 있다면, 그래서 일상 속에서 이런 억압들에 맞서 싸우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기계적이고 환원론적인 것일 겁니다.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기계적이고 환원론적이라고 비판하지만,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이 억압을 이해하는 데 뼈와 살을 더하고 깊이를 제공하는 만큼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일상에서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항상 ‘이 억압의 뿌리가 무엇인가’를 묻고, 억압이 대체 어디에서 비롯한 것인지를 가리켜야 합니다. 제가 말씀 드렸듯이, 투쟁은 거기에 참가하는 사람들도 변화시킵니다. 투쟁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더는 단순히 피해자가 아니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주체라고 느끼기 시작합니다.

저는 파업에 참가한 여성 노동자가 사람들이 많이 모인 데서 연설할 때,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해 보는 건 처음입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발언하면 안 될까요’, ‘다른 사람이 더 발언 잘할 것 같은데’라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듣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투쟁에 참가하면서 자신감을 얻게 되면서 생전 처음 해 보는 것들도 자신 있게 할 수 있게 됩니다. 투쟁을 거치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성 차별과 성소수자 차별, 인종차별 이런 것들에 반대한다고 선언만 해서는 안 되고 매일매일 일상에서 그런 억압에 맞선 투쟁에 개입해야 합니다.

저는 아일랜드의 위대한 마르크스주의 혁명가였던 제임스 코널리를 인용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코널리는 영국 제국으로부터 아일랜드 독립과 사회주의를 위해 싸운 혁명가로 올해로 정확히 1백 년 전에 영국 제국에 의해 총살당한 인물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고의 예언자들은 바로 자신이 예언하는 미래를 이룩하기 위해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오늘 수행하는 투쟁은 마치 사소해 보일 수도 있고 아무런 파급력도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내일의 투쟁을 준비시키는 구실을 합니다. 그리고 그 작은 투쟁 속에서 훨씬 더 큰 투쟁의 씨앗들이 자라납니다. 작은 투쟁 속에서도 우리는 억압이 역사의 유물로 남겨지게 될 미래의 모습들을 힐끗힐끗 볼 수 있습니다.

통역 천경록

녹취 전문기·박충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