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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시즘2016 주디스 오어 연설②:
여성 차별과 해방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중앙위원이자, 신간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책갈피)의 저자인 주디스 오어(사진)가 7월 21~24일 노동자연대가 주최한 ‘맑시즘2016’에서 연설했다. 이 글은 7월 23일에 주디스 오어가 한 같은 제목의 강연을 녹취한 것이다. 쉽고 명쾌한 그녀의 연설은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안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편집자가 덧붙인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동지들. 이 자리에 있게 돼서 정말 기쁘고 또 제 책이 한국어로 번역돼 나온 것을 굉장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성 차별은 이 사회에서 가장 오래됐고 뿌리 깊은 차별입니다.

제가 이 책을 쓴 이유 중 하나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여성 차별에 맞서 오랫동안 분석해 왔고 저항에 함께 해 왔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신성가족》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쓴 바가 있습니다. “한 사회 전체의 해방 수준을 보여 주는 가장 자연스러운 척도는 그 사회의 여성이 얼마나 해방돼 있느냐다.”

맑시즘2016에서 연설하는 주디스 오어. ⓒ노동자연대

저도 이 말에 동의합니다. 이런 잣대에 따라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여성이 얼마나 천대받는지를 보면 이 체제가 얼마나 해방과 거리가 먼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지난 몇 세대 동안 여성의 삶에 수많은 변화가 있었고 또 이룩한 성과도 많았습니다. 많은 나라에서 법적인 평등을 쟁취하기도 했고 또 남성의 영역이던 여러 일자리와 교육 기회가 여성에게 열리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제 어머니는 은행에서 일 하다가 결혼하는 바로 다음날 회사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 어머니 세대와 비교하기만 해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개인 삶의 영역에서 사람들이 지닌 태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서구에서는 ‘이제 여성들이 다 얻지 않았냐’ 하는 말을 자주 듣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영국을 비롯한 서구에서도 전혀 사실이 아닐 뿐더러 세계적 수준에서는 더 사실이 아닙니다. 여성은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데 전 세계 부의 1퍼센트밖에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사회 상층부로 갈수록 여성들이 차지하는 지위나 재산 등의 비율이 훨씬 더 낮아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사회 계층에서나 당연히 여성들이 절반씩을 가져야 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사회주의자로서 저는 지배계급의 절반이 여성이고 노동계급의 절반이 여성인 것 이상을 원합니다. 저는 사회주의자로서 이 사회의 가장 뿌리 깊은 불평등을 제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계급 불평등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여성들이 어느 수준 이상의 높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을 막는 ‘유리 천장’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끈적거리는 바닥’에도 주목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 ‘끈적거리는 바닥’이 의미하는 바는, 대다수 여성들은 유리 천장에 올라가기도 전에 이 바닥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는 것이죠. 접착력 강한 바닥에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대다수 여성들에게 자본주의 하의 삶은 바로 이런 바닥입니다.

여성들이 직면하는 또 한 가지 현실은 미디어에서 여성을 대상화하는 온갖 성차별적인 광고들과 이미지들이 거의 미친듯이 범람한다는 것입니다.

주디스 오어는 노골적인 성 성품화 같은 여성 차별이 왜 사라지지 않는지를 이해하기 쉽게 마르크스주의로 설명했다. ⓒ노동자연대
여성 차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설명과 해방 전략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인 청중들. 청중 토론 중인 모습. ⓒ노동자연대

한국의 경우에도 여성의 몸을 대상화하고 상품화하는 이미지가 넘쳐나지 않습니까? 〈맥심〉 잡지 한국판은 납치·살해된 여성을 연상시키는, 트렁크 밖으로 결박 당한 다리가 보이는 사진을 버젓이 표지에 내걸기도 했습니다. 또 버스를 타면 성형수술 광고도 넘쳐나는데, 광고에는 하나같이 만화 캐릭터처럼 눈이 크고 몸매는 앙상한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유니레버라는 다국적 기업이 있는데 이 기업은 [바디 스프레이] 엑스나 [비누] 도브 같은 브랜드도 소유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몇 주 전 유니레버는 앞으로 성차별적인 광고를 일절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유니레버가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계기는 이렇습니다. 유니레버 광고의 오직 2퍼센트에만 지성적 여성이 등장한다는 연구 결과가 화제가 된 것입니다. 사실 2퍼센트나 된다는 게 더 놀랍지만 말입니다.

상품 판매라는 것이 자본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과정인 만큼, 체제 하에서 벌어지는 성차별의 가장 추악한 면모를 응축해서 보여 주기도 합니다.

여성들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어린애 취급을 많이 받습니다. 우리 여성은 팍팍한 삶을 견디려면 아이스크림 등 달달한 걸 먹으면서 위로를 받아야 한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달콤한 것을 먹으며 위안을 얻는 것은 대가가 따릅니다. 여성들은 뼈다귀 밖에 없는 슈퍼모델 몸매의 이미지에 부합해야 한다는 압력도 동시에 받기 때문이죠. 그런 몸에 부합하기 위한 다이어트 잡지들도 범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상으로 여겨야 하는 그런 슈퍼모델 몸매, 살이 거의 없어 삐쩍 말랐는데도 가슴은 큰 그런 몸매는 자연에서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려고 성형수술을 하고, 따라서 성형수술하는 사람들의 90퍼센트가 여성인 것도 놀라울 일이 아닌 것이죠.

영국에서는 가슴 확대 수술이 전체 성형 수술 중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부문입니다. 그리고 10대 여성들도 그 수술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체제는 여성들의 자기 몸에 대한 인식, 자신감, 이런 것들이 단지 개인 심리의 문제이지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이 광고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여성의 몸이 그야말로 전쟁터가 되고 있는 현실 세계 말입니다.

한편에서는 ‘여성들이 옷을 너무 야하게 입는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듯 그렇게 입으면 성폭력을 당해도 싸다’는 식의 얘기도 나오고요.

다른 한편에서는 너무 많이 입는 것도 비난의 근거가 됩니다. 무슬림 여성들이 히잡을 두르면 그것도 비난의 대상이 되죠.

어느 정도의 노출이 적절한 것인지 고민될 수밖에 없습니다. 손목을 이 정도만 내리면 되나? 머리는 어느 정도까지 보여야 되나? 그러나 이런 걸 고민하다 보면 답이 안 나옵니다. 그런 식으로는 이길 수가 없는 싸움입니다.

여성의 현실이 제가 10대였을 때보다도 더 퇴보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은, 오늘날에는 이런 성차별이 여성해방이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에게 강요된다는 것입니다. 여성들은 성차별적 이미지나 얘기를 접해도 그냥 ‘쿨’하게 받아들이라고 강요받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성차별적 현실에 대한 분노, 그것을 바꿔 보려는 의지, 이런 것들이 오늘날 ‘여성 억압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하는 논의에서 페미니즘이 부흥하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아주 반겨야 할 일입니다. 저는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이, 여성을 어린애 취급하고 여성의 몸을 대상화 하는 것에 맞서서 단호하게 투쟁하길 원합니다.

왜냐하면 여성의 몸을 이용해서 게임을 광고하거나 또는 다른 제품들을 홍보하는 것이 전혀 재치있고 쿨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포르노는 어마어마하게 큰 다국적 산업으로 발전했습니다. 오늘날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는 이른바 성 산업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둘러싸고 논쟁이 많은데요. 이 성 산업의 범주에는 랩댄싱 클럽, 성매매, 포르노 등 아주 많은 것을 포함합니다.

영국에서도 이게 큰 논란거리입니다.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성 구매자 남성들만 처벌하길 원합니다. 이른바 노르딕 모델입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성매매 여성들은 다른 수많은 업종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직업을 선택한 거다. 그저 다른 일자리랑 똑같은 일자리일 뿐이다”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먼저, 저는 성 구매 남성을 처벌하는 것이 여성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단 경찰은 여성의 친구가 아닙니다. 성매매 여성들이 폭력을 당하고 피해를 당했을 때 경찰한테 가면 경찰은 전혀 그 여성들을 도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성매매 업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스스로 조직할 권리가 있고, 그들도 안전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여성들이 그런 더러운 일을 해서 쓰겠느냐’ 따위의 설교하려 드는 태도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성매매 여성들과 한편에 서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성매매가 다른 직업과 똑같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여성들이 성매매를 택하는 이유는 대체로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매매에 종사하는 사람들 압도 다수가 여성이라는 점은, 이 사회가 남성이 아닌 여성의 몸을,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대상화하고 상품화한다는 뿌리 깊은 억압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요소들, 섹슈얼리티든 노동력이든 이런 것들이 온전히 내 것이 못 되고 시장에서 팔리는 상품이 되는 그런 사회를 원치 않습니다.

또한 저는 성의 자유라는 것이, 새로운 세상이 도래해야만 쟁취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그냥 포기해야 하는 사치라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자본주의가 성을 왜곡하는 것이 실제로는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해악을 끼칩니다. 여성이든 남성이든, LGBT든 이성애자든 간에 자기의 섹슈얼리티를 자유롭게, 탄압의 두려움 없이 표현할 수 있는 정도는 체제의 작동 방식과 긴밀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 이 체제가 얼마나 숨막히는 제약을 부과하는지를 보십시오.

오늘날 여성들은 자기 짝을 찾을 때 뭔가 번듯하고 안정적인 일자리가 있고, 그래서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는 그런 짝을 찾으라는 얘기를 듣습니다.

이런 사회적 규범에 부합하지 않고, 결혼을 안 한다든가 애를 갖지 않는다든가, 혼자 사는 사람들은 가엾게 여겨지거나 경멸의 대상이 되거나 더 심한 대우를 받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회의 꽉 막힌 제약에서 자유로워질 사회는 어떤 모습일지 때로는 상상조차 어렵습니다.

유물론적 사상으로서 마르스크스주의는 이런 성차별이 남성들의 잘못된 관념 또는 여성들의 관념에서 생겨난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성차별이 사회에 워낙 견고하게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어쩌면 인간 본성이 아닐까, 생물학적 차이에서 직접 나오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일부 활동가들은 이런 본성론의 영향을 받는 주장을 펼치는데, 본성론은 사실 젠더에 관한 사회 주류의 견해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컨대 일부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는 전쟁이라는 것이 남성 본연의 결함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남성의 공격성을 자극하는 테스토스테론 같은 호르몬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고 경제 위기라는 것도 위험을 추구하는 남성의 본성에서 비롯하는 것이라는 논의가 있습니다.

저는 이런 본성론적인 설명에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며칠 전에 영국 신임 총리 테리사 메이는 인터뷰에서 “만약 해야 한다면, 당신은 핵 미사일 스위치를 눌러 15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남녀, 어린이 할 것 없이 죽이는 선택을 감수하실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그녀는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IMF의 총재인 크리스틴 라가르드는 여성인데 이런 말도 했습니다. 만약 여성들이 경제를 움직이는, 주되게 재계 요직에 있었더라면 경제 위기는 다르게 전개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리먼 ‘브라더스’가 아니라 리먼 ‘시스터스’였다면 사태가 다르지 않았을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IMF에서 실제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바로 크리스틴 라가르드이고, [EU를 쥐락펴락하는] 독일의 실권자는 [여성인] 앙겔라 메르켈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도한 긴축 정책 탓에 그리스에서는 가난 때문에 아이 엄마들이 자식을 고아원에 보내야 하는 상황으로까지 내몰렸습니다.

이처럼 성 역할(gender role)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경제 위기나 전쟁이나 결국에는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경쟁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성과 남성의 차이는 있습니다. 호르몬 상의 차이도 있죠. 제가 그런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차이 때문에 세계 절반이 2등 시민 취급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제도 언급한 바 있는데[관련 기사: ‘[맑시즘2016 주디스 오어 연설] 마르크스주의는 차별을 설명할 수 있는가?’] 때때로 마르크스주의는 환원론이라고 공격받기도 합니다. 우리가 오직 계급만 강조하고 또 경제만을 얘기하기 때문에 억압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얘기들이 있는데요.

이런 식입니다. ‘마르크스주의가 매우 유용한 도구라는 것은 인정한다. 착취와 가난과 계급 문제에 맞서 싸우는 데는 유용한 도구인데, 억압 문제에서는 뭔가 다른 도구들이 필요하지 않냐.’

이중체계론이라는 것이 이런 관점에서 발전했는데요. 한편에는 착취의 체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여성 차별 등의 억압을 만들어 내는 체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후자의 체계는 보통 가부장제 이론 등으로 설명해야 한다고들 말합니다.

저는 사람들이 가부장제 이론에 공감할 만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가부장제라는 말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도 정확히 기술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대부분의 남성들은 ‘가부장’이라고 할 만한 권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남성이 본성적으로 억압적이라는 주장을 거부하는데, 동전의 반대면으로 ‘여성들이 본성적으로 수동적이고 얌전해서 남성의 억압에 쉽게 당한다’는 논리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표면적으로 보면 계급과 억압이라는 것이 서로 따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느 계급인지 상관 없이 모든 여성들이 억압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죠.

레닌도 어느 계급에 속하는 여성이든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으면 우리는 묵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에서 우리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총리 테리사 메이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비하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고 심지어 마거릿 대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계급을 막론하고 여성이 차별받는다고 해서 계급과 차별이 서로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입니다.

올해 제 고향인 북아일랜드에서는 한 여성이 임신중절을 하려고 인터넷으로 낙태 약을 주문했다는 이유로 기소가 됐습니다.

이 여성이 처벌을 받게 된 이유가 낙태가 불법인 아일랜드에 사는 여성이라는 것이기도 했지만, 가난 때문에 처벌을 받은 셈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정도 돈이 있는 아일랜드 여성들은 낙태 시술을 받기 위해서 [같은 영국에 속하면서 낙태가 합법인] 잉글랜드로 갈 수가 있는데, 이 여성은 너무나 가난해서 그것조차 못 했던 것입니다.

지배계급 여성들도 물론 억압을 받기는 하지만 억압의 경험이 대다수 피지배계급 여성들의 경험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배계급 여성들이 자기 지위를 유지하는 것은 이 사회의 불평등이 유지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또 한 가지 현실은 지배계급 여성은 피지배계급 여성을 고용해서 자기 집의 가사나 육아를 맡긴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나라의 여성들 수백만 명이 가족과 이역만리 떨어진 서구로 가서 지배계급 여성들의 집안일을 하면서 돈을 벌기도 합니다.

즉, 서로 작동 방식도 다르고 분석도 다르게 해야 하고 그것을 철폐하기 위해 투쟁도 따로따로 해야 하는 이중의 체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체제가 있는 것이고 그에 맞서는 투쟁도 하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성 차별이 인간 본성이라는 것은 인류 역사의 대부분 시기를 보더라도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제 책에서는 초기 인류 사회에 대한 많은 연구 사례들이 소개돼 있는데요. 이 고고학적 연구들은 엥겔스가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라는 아주 선구적인 책에서 보여 준 대부분의 통찰을 오늘날의 현대적인 기법과 새로운 발견들을 통해서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현생 인류의 역사 전체를 이렇게 [팔 길이만큼] 잡는다면 그 중에서 계급사회의 역사는 [손가락 길이도 안 되는] 아주 짧은 시기만을 차지하고 그 중에서도 자본주의 사회는 정말 손톱만큼 짧은 시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대부분의 시기 동안 인류는 체계적 차별도 없었고, 계급도 없었고, 가난과 부의 불평등, 위계 서열, 이런 것들이 전혀 없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협력자이자 동료인 엥겔스는 여성에 대한 체계적인 차별이 등장하게 된 물질적 토대가 바로 계급사회의 등장이라고 정확하게 지목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여성에 대한 체계적 차별을 낳은 것은 가족 제도가 출현한 것입니다. 이 가족 제도 출현 이후 여성은 집안에 종속되고, 가족 제도는 여성에 대한 온갖 억압적인 사상들이 생겨나는 보루가 됐습니다.

여자 아이들은 분홍색에만 열광하고 공주처럼 차려 입고 싶어하고, 남자애들은 군복을 입고 탱크를 가지고 노는 등의 행동은 전혀 선천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이 세상의 사상들을 흡수하고, 또 거기에 저항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시대와 사회가 남자로서, 여자로서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것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걸 받아들이면서 사회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수많은 변화를 겪기는 했지만 가족 제도는 여전히 여성 차별과 억압을 존속시키는 핵심적인 물질적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족 제도라는 것이 좀 모순적이라는 것을 먼저 짚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가족은 이 험난한 세상에서 뭔가 위안을 찾고, 구성원들끼리 유대와 사랑 등을 이어가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이 사회에서 가족은 우리가 온전히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장소로 굉장히 미화되지만 자본주의 하에서는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많죠. 오히려 가족은 가장 끔찍한 폭력의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회는 가사를 맡고, 요리를 하고, 애들을 돌보는 일에 여성이 가장 적합하다고 여기도록 구조화됩니다. 그래서 여성들이 가정에서 이런 일에 일차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관념도 유지됩니다.

이처럼 여성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구실이 가정을 돌보는 것이라고들 여기기 때문에, 여성이 가족 돌보미 구실과 병행할 수 있도록 집 밖에서 일할 때에도 더 낮은 임금을 감수하고 더 유연한 노동으로 내몰립니다.

그런데 성 역할에 관한 고정관념은 단지 여성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도 구속합니다. 남성들은 ‘밥벌이를 제대로 하고,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눈물 흘리지 말아야 한다’ 는 등의 강요를 받습니다.

물론 현실은 이런 고정관념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단적으로 오늘날에는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여성이 집 밖에서 일을 합니다. 물론, 과거에도 가난한 여성들은 늘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핵가족이라는 이상과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현실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지배계급한테 더 필요한 것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의 수많은 여성들이 이상에 부합하지 않게 집 밖에서 일한다며 ’원래는 내가 가사를 돌봐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을 갖고, 그만큼 집안일을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기 때문이죠.

핵가족이라는 제도와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을 파편화시키고 원자화시킵니다. 체제 때문에 생기는 온갖 어려움과 고통, 예를 들면 자기가 해고 당했거나 가난해서 자식을 대학에 못 보낸다거나, 제대로 가족을 먹이지 못하는 등의 일이 닥치면 사람들이 “그게 다 내 탓이고 내 책임” 이라고 여기게 만듭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이런 현실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입니다.

저는 먼저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족에 반대한다, 가족을 철폐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외치는 것을 해선 안 됩니다.

러시아 혁명 때에도 여성 혁명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볼셰비키들이 당신들 자식을 빼앗아 가려고 오는 게 아니다”라고 사람들을 안심시켜야 했습니다.

자본주의적 핵가족이 아니라면 대안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혁명을 일으킨 세계 노동계급이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창의적 방법으로 사람들끼리 같이 사는 방법을 재구성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회를 변혁하려 할 때, 젠더의 프리즘만으로 세상을 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다 보면 함정에 빠질 수가 있거든요.

왜냐하면 우파들이 여성의 권리라는 용어를 가로채서 지배자들의 어젠다를 추구하기 위해서 엉뚱하게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방 국가들이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어떻게 정당화했습니까? 바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해방시키겠다는 명목으로 거기에 폭격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올해 초에 독일 쾰른에서 여성들에 대한 끔찍한 공격이 벌어졌을 때 독일 정치인들이 뭐라고 했습니까? “여성을 혐오하는 이주민들이 저지른 짓이므로 이주민 유입을 막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독일의 활동가들과 페미니스트들이 아주 훌륭하게 대응했는데, “우리는 무슬림이 없는 독일의 옥토버페스트 같은 맥주 축제 같은 데서도 늘 성추행을 당하는데 그때는 아무 말도 않더니 이제 와서 이주민 탓이라고 하냐”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국가에서 우파들은 또 “무슬림 여성들의 히잡이나 니캅 착용을 금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여성 억압의 표현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마치 여성에게 ‘무엇을 입어라, 입지 말라’ 하고 간섭하는 것이 여성해방이라도 되는 양 펼치는 어이없는 논리입니다.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 적이라도 되는 양 이간질하는 이런 거짓 담론에 반대해야 합니다.

인종차별주의의 등에 올라타서 여성해방을 이뤄낼 수 없습니다. 한 집단에 대한 억압을 이용해서 다른 집단의 억압을 해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미국] 올랜도에서 게이바 총격 사건이 있은 뒤에 영국에서의 대응이 아주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에서는 ‘이슬람 혐오에도 반대하고 성소수자 혐오에도 반대한다’라고 적힌 배너를 들고 수많은 사람들이 행진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장과 질문으로 청중 토론에 기여했다. ⓒ노동자연대
워크숍이 끝난 뒤에도 연사는 질문과 토론을 더 하고 싶은 청중과 대화를 나눴다. ⓒ노동자연대

우리는 이런 단결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데, 때로는 운동 내에서도 이런 분열이 일어납니다. 한 측면에서 억압을 받는다고 해서 다른 종류의 억압이나 차별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자동으로 연대감이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근 사례는 트랜스젠더 억압을 둘러싼 논쟁이었는데요. 미국과 영국에서 트랜스젠더 여성들은 일부 페미니즘 집회에 입장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정한 여성’이 아니라고 여겨지기 때문이죠.

트랜스젠더들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성의 반대쪽 성을 선택함으로써 이 사회가 부과하는 이분법적 성별 구도를 더 고착화시킨다’고 비난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트랜스젠더야말로 이분법적 성별 구도에서 벗어나려 하는 사람들이고 오히려 그런 이분법의 피해자라고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에게 강요된 것을 벗어나서 다르게 살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이런 식으로 매도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차별에 반대하면서 다른 모든 형태의 차별에도 반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차별들에 맞서 싸우는 데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사람들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데서 싸우는 거죠.

사회주의자들은 여성을 단순한 피해자가 아니라 계급 투사로서도 바라봅니다.

실제로 서구의 경우에는 여성들이 어마어마한 수로 노동계급에 속해 있습니다. 그리고 영국 같은 서구의 경우에는 여성들이 잠시 일자리를 가지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주변적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아주 항구적이고 핵심적인 일부입니다.

이는 여성들에게 집단적 힘을 부여합니다. 즉, 고립된 가정에서 벗어나서 노동계급이라는 아주 강력한 힘을 지닌 집단의 일부가 되도록 해 줍니다.

마르크스가 계급을 어떻게 정의했는지를 상기해 봐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이 사회에서 가장 고통받는 계급이라고 정의하지는 않았습니다.

노동계급에 속한다는 것은 부담, 불이익을 단지 하나 더 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여성이 가정과 일터 양쪽에서 모두 잘하기를 기대 받는 것은 이중의 부담이고 분명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하지만 긍정적 측면도 있는데 일터야말로 여성이 세상을 바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노동계급이 그토록 강력한 것은 사실 이 사회 모든 것들을 돌아가게 하는 것이 바로 노동자들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죠. 교통수단을 운용하는 것이든, 학교나 병원이나 작업장을 돌아가게 하는 것이든 노동자 없이는 이 사회가 한 순간도 돌아갈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노동계급을 이상화하지는 않습니다. 현재 상태의 노동계급이 모든 인종차별적, 성차별적 사상을 거부하는 아주 고결한 존재인 것은 아닙니다. 그런 후진적인 사상을 받아들이는 후진적 남성들이 당연히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계급만의 특징과 강점은 서로 단결하도록 내몰리고, 노동과정뿐 아니라 투쟁에서도 서로 협력하도록 하는 동역학이 자본주의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그런 동역학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즉 노동계급의 현 상태가 어떠냐가 아니라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변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어제도 말씀 드렸듯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함께 싸울 때 더 강력해질 수 있고 또 함께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배자들도 바로 이 점을 잘 알기 때문에 그토록 투쟁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공격하고, 지금 한국 정부가 하듯 노조 지도자를 가두고, 노조법 개악을 시도하는 것이죠. 사람들이 투쟁을 하면서 하나가 되는 것을 결단코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성 차별이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뿌리 깊은 차별을 없애 버리려면 단지 파업과 집회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체제 자체를 변혁해야 합니다.

우리는 2011년 아랍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혁명들이 일어나 철옹성 같은 독재 정권들이 무너지고 그 중심에 여성들이 있는 것을 봤습니다.

반혁명 세력들이 여성을 표적 삼아 공격하는 것도 여성들의 참여가 혁명을 더한층 강화시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집트의 마히누르 엘마스리라는 여성 동지가 지금 감옥에 있는 것도 그녀가 워낙 훌륭한 혁명 지도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제 책을 엘마스리 동지에게 헌정하고 또 이집트에 투옥돼 있는 수많은 동지들에게 헌정했습니다.

그런데 혁명이 내일 당장 벌어질 상황이 아니라고 해서 우리가 오늘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임신중절권을 둘러싼 것이든, 성차별적 이미지들에 맞선 싸움이든, 여성 차별에 맞선 모든 투쟁은 다 중요합니다.

저는 성별 임금 격차가 사라지길 바랍니다. 그런데 저는 단지 거기서 멈추고 싶지 않습니다. 특히 노동자들과 사장들의 임금 격차가 점점 더 커지는 상황에서 단지 남녀 동일임금에만 만족하고 싶지 않습니다.

역사를 전진시키는 힘은 언제나 투쟁이었습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어떤 노동자들의 권익도 투쟁 없이 쟁취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얻은 모든 권리는 우리가 지배계급의 손에서 억지로 빼앗아 와야 했던 것입니다. 지배자들이 “아, 여성들이 좀 불평등한 처우를 받는 것 같네. 처우를 좀 개선해 주자”,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지난해 영국에서는 1백 년 전에 여성 참정권을 요구했던 운동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가 나왔습니다. 그에 대해서 많은 비평가들과 논자들이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1백 년 전, 거리에서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정부 건물에다가 돌 던지며 유리창을 깨뜨린 영국 여성들은 얼마나 훌륭했는가!”

그들의 관점에서 1백년 전의 투쟁은 이제 과거지사가 돼서 안전한 것이 된 것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투쟁에 나서면 태도가 확 바뀝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역사상 모든 위대한 대중 투쟁, 위대한 항쟁이나 혁명 운동이 터져 나올 때마다 여성해방의 문제가 전면에 제기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성해방은 항상 노동계급과 한 배를 탄 운명이었습니다. 그런 투쟁이 벌어질 때마다 ‘세상이 바뀌면 모든 사람의 삶이 어떻게 바뀔까’ 하는 질문이 던져집니다.

그래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은 훨씬 큰 함의가 있습니다. 그런 투쟁은 모든 인류의 해방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정리 연설

청중 토론에서 많은 기여를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먼저, 여성은 언제든 어느 거리에서든 자기가 원하는 옷을 입고 걸어다닐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기본권입니다.

그런데 이 권리는 제 생각에 대부분의 남성들도 지지할 것입니다. 오로지 소수만이 때로 여성에게 끔찍한 폭력을 자행합니다.

저는 모든 남성이 잠재적 강간범, 잠재적 가해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문제를 함께 해결할 동맹이자 동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제가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의 해악을 축소하려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우리 삶을 왜곡하고, 사람들 간의 관계를 왜곡하고, 성차별을 조장하는 이 썩어빠진 사회의 한 표현입니다.

이 자본주의 체제가 얼마나 사람들끼리 서로 반목하고 분열하도록 만드는가를 생각하면,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이 정도에 그친다는 것은 오히려 인간성이 우리에게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가족 제도가 자본주의에서 하는 이데올로기적 구실을 제가 말씀 드렸는데, 또 한 분께서는 가족의 경제적 기능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분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2008년 이후 계속되는 경제 위기 때문에 가족이 자본주의에서 수행하는 경제적 기능은 지배계급에게 더욱더 중요해졌습니다.

영국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자기 집을 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면서 부모와 함께 사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지 예산이 계속 삭감되니까 나이 들거나 병들거나 장애가 있는 친척들을 예전보다 집안에서 더 많이 돌보고 있는 형편입니다.

물론 집에서 남녀가 가사를 공평하게 분담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여성 동지들도 다 그런 것을 강력하게 요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개별 가정 안에서 가사 분담을 어떻게 할 것인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재생산과 돌봄, 양육을 사회가 부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한번 살펴봅시다. 우리는 항상 자본주의의 해악을 강조하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쟁취하려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스탈린주의 체제인 옛 소련이 사회주의를 자처한 것 때문에 사회주의에 대한 사람들 인식이 아주 나빠졌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다 수용소 같은 데서 공동으로 생활하고, 다 같이 형편없는 음식을 다 같이 먹고, 똑같은 옷을 입고 살 거라는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이미지에 더 부합하는 것은 자본주의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살지, 무엇을 먹을지, 또 어떤 옷을 입을지에 대해서 선택권이 사실 별로 없습니다.

반대로 사회주의에서는 어떤 모범 답안, ‘사회주의적 삶의 방식’이라는 게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선택권을 누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생물학적 자녀를 직접 돌보고 양육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동시에 생물학적 자녀를 직접 돌보는 대신 다음 세대를 돌보는 일에 집단적으로 기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문제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각자 원하는 방식대로 살고 또 서로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회를 만드는 투쟁은 혁명적 투쟁일 것이고, 그런 투쟁 속에서 새로운 상상력이 피어나, 자본주의에 사는 우리는 꿈꿔보지 못한 수준으로까지 인식의 지평을 넓힐 것입니다.

관건은 지금의 상태에서 어떻게 그런 이상적인 상태로 나아가느냐 하는 것인데, 이에 대한 저의 답은 투쟁입니다. 투쟁을 통해서만 사람들이 바뀌고, 또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책도 그 과정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물론 제 책이 그런 과정에 도움이 되길 바라지만 말입니다.

제 책이 그런 투쟁의 안내서로 여러분에게 유용하길 바라고, 더 좋기로는 이 책을 읽으신 후 노동자연대에 가입하셔서 변혁 과정에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역사가 보여 주듯이, 또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지금까지의 모든 쓰여진 역사는 계급사회의 역사이고 또 계급투쟁의 역사였기 때문입니다.

극소수 사람들이 사회의 압도 다수를 지배하는 사회에서 투쟁은 필연적입니다. 그런데 투쟁은 필연이지만 그 투쟁이 승리를 거두는 것은 필연이 아닙니다.

과거의 노동계급 투쟁이 실패한 것은 노동자들의 용기나 끈기가 충분치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승리냐, 패배냐는 그 투쟁의 정치적 지도력이 어떤 것이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에게 권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투쟁에 함께하고 또 우리 단체에 함께하자고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연사가 쓴 책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주디스 오어 지음 | 이장원 옮김 | 2016-07-28 출간 | 440쪽 | 16,000원 | 책갈피

녹취 연은정·박충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