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스페인 포데모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포스트마르크스주의의 민중주의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스페인에서는 지난해 12월과 올해 6월 선거를 치렀지만 정부 구성에 거듭 실패했다. 이런 진통이 계속되는 가장 큰 이유는 1977년 프랑코 독재 종식 이후 수십 년간 유지된 국민당(PP)과 사회당(PSOE)의 양당 체제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런 양당 체제를 무너뜨린 주역은 바로 새로운 좌파 정당 포데모스다. 포데모스는 ‘78년 체제’(독재 종식 이후 1978년에 새 헌법이 발표됐다)를 ‘전복’할 새 정치가 필요하다며 2014년 창당했다. 총선 첫 무대인 지난해 12월 사회당과 근소한 차이로 제3당(21퍼센트 득표)이 되면서 양당 체제를 무너뜨렸고, 올해 6월 다시 치른 총선에서도 이런 추세는 유지됐다.

우파와 중도계 정당들만이 활개치는 한국에서 봤을 때, 좌파 정당인 포데모스가 빠르게 파고들면서 공식 정치의 판세를 바꾸고 있는 것은 실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 성장의 배경

포데모스가 이렇게 성장하는 데서 중요한 발판이 된 것은 2011년 터져나온 인디그나도스(‘분노한 사람들’이라는 뜻) 운동이다. 경제 위기 이후의 긴축 정책과 부패한 기성 정치권에 대한 반감을 표현한 이 광장 점거 운동은 독재 종식 이래 최대 규모의 항의 운동이었다. 거대한 운동의 부상은 대중의 급진화를 낳았다.

그러나 항의 운동과 함께 많은 총파업이 벌어진 그리스와 달리 스페인은 조직 노동자 운동이 인디그나도스 운동으로 대표된 거리 항의 운동만큼 강력하지 못했다. 더욱이 노조 지도자들이 사회당과의 협조 관계에 연연하며 저지른 배신적 타협 때문에 조직 노동자 운동에 대한 실망감도 자랐다.

포데모스의 지도자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출처 GUE/NGL(플리커)

기성 좌파도 무능했다. 스페인에는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연합(IU)이 있었지만, 이들은 차악론을 내세우며 여러 차례 사회당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했고, 긴축을 자행하는 지방정부에 참여했고, 심지어 부패에도 연루돼 있었다. 이 때문에, 새로 급진화한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포데모스는 인디그나도스 운동의 중요한 약점에 대한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며 등장했다. 인디그나도스 운동은 ‘반(反)정치’를 표방하며 기성 정당뿐 아니라 좌파 정치단체가 참여하는 것까지 거부했다. 그러나 국가의 탄압 위협 앞에 운동이 점차 작아지자, 수많은 사람들은 운동의 놀라운 위세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성취한 것은 적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포데모스는 인디그나도스 운동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그런 분노를 이제 운동이 아니라 정당의 형태로 벼려야 한다며 사람들을 결집시켰다. 그런데 이때 포데모스가 제공한 정치는 바로 민중주의(좌파적 포퓰리즘)였다.


2. 포데모스 민중주의의 구체적 형태

포데모스 지도부는 오늘날 스페인 정치가 사실상 과두제가 됐기 때문에, 소수의 ‘카스트’(기득권층을 전근대 신분제 사회의 상층 계급에 비유한 것)에 맞서 전 민중이 계급을 초월해서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단순한 구호 이상의 것으로, 나름의 정치철학과 분석에 기초한 것이다.

당 대표인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와 주요 이론가이자 핵심 측근인 이니고 에레혼 등 포데모스 지도자들은 포스트마르크스주의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프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초판 1985년, 재판 2014년)에서 제시한 좌파적 민중주의를 포데모스의 정치철학이라고 아주 빈번하게 강조한다.

라클라우와 무프는 사회 변화의 주체로 노동계급을 강조하는 것을 “경제주의”라고 매도한다. 현대 노동계급에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사람들이 속해 있기 때문에 계급적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한 단결은 무망하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런 현실을 부정하고 계속해서 노동계급에 천착하는 것은 자본주의 발전에 따라 노동계급이 저절로 단결할 것이라는 착각(“경제 결정론”)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라클라우와 무프가 제시하는 대안은 언어와 이데올로기를 이용해서, 계급을 초월해서 최대한 많은 대중을 결집해야 한다는 것이다. (계급의 기초인) 물질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투쟁을 강조하는 것은 해롭고, 담론을 둘러싼 투쟁이 핵심이 된다는 것이다.

이들이 담론 전략으로도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주된 변화를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무프는 “우리[가] … 끝까지 싸울 수 있도록 허용할 민주적 제도들에 대해 신뢰해야 할 것”(《진보평론》 68호)이라고 강조한다.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이 전통적인 사회주의적 전략을 “급진적 민주주의” 전략으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바로 이런 개혁주의로 후퇴 때문이다.

민중주의

대학교수들인 포데모스 지도자들의 행보는 이런 이론에 따라 나름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이다. 단적인 사례로, 많은 좌파가 보기에 불편할 정도로 포데모스 지도부는 선거 승리를 노골적으로 강조하는데, 이는 몇몇 개인의 야심 때문이 아니라 “선거에서 이기는 정당”을 “기습공격 전략”으로 삼기 때문이라고 한다. TV 토크쇼와 같은 미디어와 카리스마를 갖춘 스타 지도자의 구실도 이런 전력(戰力)의 핵심 담론 수단으로 중시된다.

이글레시아스는 “노동계급을 강조하는 담론은 대중이 알아듣지 못하고, 그래서 투쟁을 패배로 이끌고, 결국 지배자들만 이롭게 한다”고 냉소한다.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포데모스를 좌파 정당이라고 부르지만 정작 포데모스 지도부는 좌파라는 성격규정과 거리를 두며 “우리는 좌도 우도 아니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좌·우를 넘어”는 앤서니 기든스 류의 제3의 길 이론가들이 좋아한 말이었다.)


3. 포데모스의 약점들

2014년 창당 이후 포데모스가 선거 때마다 보여 준 결과는 분명 놀랍고 고무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최근 총선 결과는 애초의 기대(사회당을 제친 제2당으로 등극)에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를 놓고서 당 내에서 많은 문제의식이 있다. 이글레시아스와 에레혼 사이에 노선을 둘러싼 갈등설까지 터져나오고 있다. 만일 연말에 한 번 더 총선을 실시하게 된다면 그런 논쟁은 더욱 뜨거워질 것이다.

그럴수록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강점과 함께 약점을 잘 분석하고 개입하는 것이 중요하다. 현재 포데모스가 보이는 약점은 주로 선거를 의식하는 지도부의 민중주의 정치에서 비롯한다.

첫째 약점은 메시지가 다의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중의성(모호함)은 계급적 이해관계와 그 투쟁이 아니라 순전히 담론을 통해서 사람들을 결집시키려다 보니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라클라우나 에레혼은 되레 이런 모호함이 포데모스의 강점이라고 주장한다. 집권하려면 단지 좌파적 대중만이 아니라 “중원으로 외연을 확장”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종의 ‘전략적 모호함’인 것이다.

그래서 포데모스는 창당한 지 2년이 넘었지만 초창기의 불명료한 메시지가 점차 명료해지기보다는 오히려 갈수록 불명료해져 왔다. 그것도 지지율이 오를수록 창당 때의 급진적 강령을 눙치는 방향으로 말이다. 이 때문에 많은 지지자들이 실망하고 있다.

계급과 투쟁을 강조하기보다는 모호성에 기초한 담론 전략을 선택한 결과, 오히려 지지자들을 선거 정치 내의 풍향계에 내맡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실제로, 포데모스와 말만 비슷하고 계급적 성격은 더 우경적인 시민당(시우다다노스)이 부상하자 한동안 포데모스의 지지율이 떨어지기도 했다. 지배적 상식에 타협하는 ‘담론’ 전략만으로는 사람들에게 자신감과 영감을 불어넣기가 어려운 것이다.

둘째 약점은 평당원들이 스타 지도자들의 행보를 수동적으로 지지하는 것 이상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투쟁 전략과 달리 담론 전략은 그것의 생산자가 압도적으로 지식인이라는 점에서 위로부터의 전략이고, 전문적이어서 대중을 상당히 수동화시키기 십상이다.

지도부는 모호함 덕분에 카멜레온처럼 색깔을 바꿀 수 있다. 예컨대, 창당 당시 나토 탈퇴까지 거론했지만 나토군 장성을 총선 후보로 세운 것, 사회당과 연정은 결코 하지 않는다고 한 지 한 달도 못 돼 연정의 조건(이글레시아스 부총리 임명)을 제시한 것 등이 그렇다. 이 과정에서 당내 민주적 의견 수렴은 생략됐다.

창당 당시에는 ‘서클’이라고 불리는 기층 모임 수백 개가 주목을 받았지만 지도부는 ‘선거 승리를 위해 필요하다’며 서클을 주변으로 밀어냈고, 이 과정에서 당내 좌파 활동가들과의 충돌도 불사했다.

셋째 약점이자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국가 문제를 회피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진정한 권력은 선출된 공직에 있지 않고 선출되지 않은 대기업, 언론, 군대 등에 있다. 그리스 부채 문제에 대한 시리자 정부의 무기력은 국가를 통한 개혁을 중심에 두는 개혁주의 전략의 근본적 취약성을 보여 준다.

집권 후에는 물론이고 집권에 가까워지기만 해도 포데모스는 그리스 시리자가 부딪혔던 것보다 결코 작지 않은 압력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포데모스 지도부의 대답은 ‘스페인은 그리스보다 경제가 훨씬 더 크기 때문에 유럽연합이 그렇게까지 일방적일 수는 없을 것’이라거나 ‘시리자는 전통적 좌파에 가까운 반면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바로 그렇게 때문에 시리자 정부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는 점은 언급되지 않는다.)


긴축 정책과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분노를 모아 탄생한 포데모스 2014년 3월 긴축 반대 시위. ⓒ출처 Contrafoto21

4. 지도부의 약점을 극복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당이 지금처럼 “중원 장악”을 위해 갈지자 행보를 할 것이 아니라 좌파적 지향을 분명히 하고 운동을 건설하는 것에 매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포데모스의 급부상은 2011년에 대중 운동이 크게 분출한 것에 빚지고 있다. 반면, 2015년의 지지율 하락은 같은 기간 거리 시위와 노동자 파업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 그럼에도 지도부는 ‘중요한 건 운동이 아니라 선거’라고 사실상 말해 왔다.

그러나 분명한 주장과 실천을 통한 검증, 당원들의 능동적 기여가 뒷받침될 때 지지층을 더 단단하게 하면서도 진정으로 외연을 확장할 수 있다. 그러려면 당내 민주주의를 회복해야 한다. 운동을 건설하려면 진지한 토론과 이를 바탕으로 한 일치된 노력이 필요한데, 지금처럼 며칠 만에 당의 입장이 뒤집히고 당원들이 언론을 통해 이를 확인하는 상황은 그런 노력을 약화시킬 것이다.

동시에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당원과 지지자들에게 지도부의 민중주의적 전략의 한계를 명확하게 지적하며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대안적 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자본주의 국가가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므로 이데올로기 투쟁은 어느 순간에는 ‘물질적’ 투쟁으로 전환해야 한다. 단적으로 말해, 갖은 설득에도 불구하고 대자본이 (긴축 정책을 강요하는) 유럽연합을 계속 편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민중주의자들은 흔히 (낭만적으로) ‘위대한 민중은 어떤 어려움에 직면하든 창의적으로 극복할 것’이라며 이 문제를 회피한다. 그러나 ‘때가 되면 저절로 그에 상응하는 전략이 생겨날 것’이라는 생각은 사실상 요행에 명운을 걸겠다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사상도 투쟁하는 수많은 대중에게 채택되면 물질적 힘이 된다”고 했다. 그러려면, 그 무수한 대중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이해관계에 기반해야 한다. 자본주의를 타도할 수 있는 물질적 이해관계와 힘을 가진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을 목표로 하는 전략이 더욱 중요한 이유다.

민중을 이루는 상이한 계급들이 저마다 다른 이해관계를 좇아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운동은 마비되기 십상이고 가장 강력한 무기(대중 파업)를 휘두를 수도 없다. 그래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이 양보가 아니라 자신의 힘을 보임으로써 빈민과 중간계급 등을 지도하며 투쟁을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포데모스 지도자들이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의 정수가 이것이다.)

라클라우와 무프의 주장과 달리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을 중시하는 것은 경제 결정론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칼 마르크스 이래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들은 자본주의가 저절로 노동계급의 단결을 가져다 주지 않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정치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단결은 사회주의적 정치로 쟁취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이 점을 강조해 이론과 전략, 전술로 발전시킨 것은 레닌이었다. 노동계급의 선진 부분이 혁명적 조직으로 따로 결집해 오랜 기간에 걸쳐 대중과 사회주의적 정치로 융합하는 법을 배우며 단련되고 지도력을 인정받아야 한다.

포데모스는 체제에 대한 불만이 대중 운동으로 폭발하고 그 결과 대중이 급진화하면서 정치적 표현체를 찾는 과정에서 부상했다. 다른 나라의 좌파들이 포데모스의 높은 지지율만으로 그들을 무비판적으로 따라 하려고 하거나, 반대로 그 지도부의 개혁주의 정치만으로 평가절하하고 등을 돌리는 것은 실수가 될 것이다. 포데모스가 더 전진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을 제안하면서 그 지지자들을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와 조직으로 끌어들이려고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