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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연봉제와 임금체계 개편을 막고자 하는 노동자들이 알아야 할 것들

지금, 임금 투쟁이 중요하다

지금 왜 임금 문제가 중요한가? 경제 위기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정부와 기업주들이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몫을 줄여 이윤 몫을 늘리려고 안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금을 줄이는 게 그들에게 그토록 중요한가? 그렇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노동뿐이므로 노동자가 창출한 가치가 “노동자와 자본가가 각각 자기 부분 또는 몫[임금과 이윤]을 끌어내야 할 유일한 밑천”이라고 강조했다(《임금, 가격, 이윤》). 그래서 이 둘은 “한 쪽이 더 많이 받으면 그만큼 다른 쪽은 적게 받게 되는” 반비례 관계에 있다.

마르크스의 임금론을 받아들인다는 사람들도 흔히, ‘임금은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라는 점을 원칙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적당한 생계비를 계산하는 데 골몰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노동자가 노동한 대가로 임금을 주는 게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노동자가 노동해서 창조한 가치는 임금으로 받는 것보다 훨씬 크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창조한 가치 가운데 임금을 뺀 나머지를 가져간다. 이것이 이윤의 원천이 되는 잉여가치다. 이윤의 원천은 자본의 노동 착취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고자 노동 착취를 증대하려 하고, 노동자들은 되도록 덜 빼앗겨야 참을 만한 수준으로 살 수 있다. 지금 정부와 기업주들이 하려는 일은 노동자가 창출한 가치 가운데 더 많은 부분을 빼앗아 가려는 것, 즉 착취를 증대시키는 것이다. 그러려면 임금을 억제해야 한다. 신자유주의 정책 아래서 미국 정부는 이런 식으로(그리고 국제적 지위를 이용해) 이윤율을 일시 만회할 수 있었다. 사실, 한국의 지배자들도 1990년대 중반 이후 이런 시도를 끊임없이 했지만, 충분하지 못했다고 불만이다. 노동운동이 1987년 이후 꽤 높은 수준의 실질임금 개선을 이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을 보면 얘기가 좀 다르다. 고용노동부 통계를 봐도 실질임금은 2007년 2백90만 원대로 진입하고는 7년 이상 변화가 없다. 1970년대 50만 원가량에서 1980년대 1백만 원대를 돌파한 뒤 1990년대 후반 2백만 원대로 증가했는데, 얼마 전부터 실질임금 상승이 멈춰선 것이다(〈그림1〉).

정부와 기업주들은 여기서 만족하지 못한다. 임금을 아예 삭감하려 한다. 그래서 연공급제를 없애고 성과급제를 도입하려는 것이다. 정부와 기업주들이 시도하는 다른 공격도 결국은 임금 문제인 경우가 많다. 정부가 말하는 “노동시간 단축”이 그것이다. 이것은 기만적인 용어다. 정확하게는 “노동시간 유연화”나 “변형근무제”라고 해야 한다. 일이 없을 땐 노동시간을 줄이고 일이 많을 땐 노동시간을 늘리자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연장근로를 시켜도 수당을 지급하지 말자는 것이다. 조선업 구조조정에서 보듯이, 고용 불안을 무기로 임금을 깎자고 나오기도 한다.

정부의 공격 논리와 노동운동 온건파의 약점

위에서 봤듯이, 지속되는 경제 위기에 직면한 자본가들과 정부는 노동자 임금을 핵심적으로 공격하려 한다. 그러므로 지금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생활수준을 지키려면 임금을 지키는 게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만만찮은 난제들이 있다. 하나는 정부와 고용주들이 거짓말과 이에 기초한 이간질 전술들을 펴고 있다는 것이다. 역겹게도 그들은 마치 조건이 나쁜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려주고 싶은데 정규직 노동자들 때문에 어렵다는 식이다.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차별해 온 당사자들이 어처구니없게도 “평등”과 관련된 용어들을 사용하며 노동자들을 겨누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시장 이중구조”라는 문제를 들먹이면서, 비정규직을 위해 “정규직 과보호”를 깨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은 박근혜 정부의 독창적 논리가 전혀 아니다. 세계 곳곳의 지배자들이 임금 억제 정책을 펼 때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 격차를 이용해 상대적으로 괜찮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을 비난하고 공격했다.

다른 하나는 진보·좌파 진영 안에, 정부와는 달리 선의에서이겠지만,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문제이고 이를 해결하려면 정규직 노동자들이 임금 투쟁을 자제해야 한다는 생각이 비교적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이다. 조직 노동자들이 ‘임금에 연연하는 투쟁’을 하면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만 벌어질 뿐이고, 연공급 임금체계를 지키려고 하면 노동운동이 사회적으로 고립될 것이라고도 한다. 연공급제는 나이와 경력에 따라 임금이 오르는 것인데, 정규직에나 해당된다는 것이다.

가령 박태주 서울시 노사정 서울모델협의회 위원장은 《현대자동차에는 한국 노사관계가 있다》(매일노동뉴스, 2014)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현대차·기아차 노조는) 임금투쟁에서 승리하는 순간 패배하는 것[이다].” 고용도 못 지키고 사회적으로 고립된다는 것이다. 〈한겨레〉 같은 민중주의 신문은 이런 주장을 반기며 “성공의 역설”이라는 표현을 유행시켰다.

그러나 정부가 공공부문에서 임금피크제와 성과연봉제를 밀어붙이며 연공급 임금체계를 깨려 하고, 민간부문에서 현대차가 앞장서 바통을 이어받아 임금피크제를 추진하려 하고 있는 지금, 이런 주장은 운동에 큰 혼란과 사기저하를 일으킬 수 있다. 그동안 노동운동은 상향평준화를 위해 싸웠는데, 이제 더 많이 받는 집단이 문제시되고 있으니 말이다.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정부와 기업주들의 공세에 잘 맞서려면, 그들의 이간질과 노동운동 온건파의 약점에 잘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임금 격차의 진실 ⑴ 점점 벌어지는 경영자 봉급(연봉)과 노동자 봉급(임금)

정부와 고용주들은 저임금층 문제와 청년 실업 문제를 해결하려면 상위 10퍼센트가 임금 인상을 자제하고 임금피크제와 성과연봉제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한국 사회의 부의 불평등은 과연 노동자들 사이에 더 벌어졌을까, 아니면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더 벌어졌을까?

부의 불평등이 소득 불평등보다 훨씬 크고 극적으로 증대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소득 불평등만 살펴보도록 하자. 임금 불평등만 놓고 보더라도, 최근 추세의 특징은 상위층 전체의 임금이 상승한 것이 아니라 최상위층의 임금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상위 10퍼센트가 임금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10여 년 동안 크게 증가했는데, 사실은 상위 1~5퍼센트가 그것을 주도했다. 최상위 1퍼센트의 소득점유율도 이 기간에 급격히 증가했다.

최상위층의 임금 소득이 급증하는 동안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7년가량 제자리를 면치 못했다. 조직 노동자들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데 정부는 상위 10퍼센트에 수십억 원대 연봉을 받는 최고경영자들을 포함시켜 평균치를 올린 다음, 마치 이것이 대공장·공공부문·정규직 노동자들의 평균적인 임금인 것인 양 거짓말한다.

이런 통계 조작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는 대기업 임원 연봉과 직원 임금 사이의 격차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재벌닷컴의 30대 그룹 상장사 연봉 자료를 보면, 2014년 삼성전자의 등기임원 평균 연봉은 83억 3천만 원으로, 직원 평균 연봉(1억 2백만 원)의 무려 81.7배에 달했다. 현대제철의 등기임원 평균 연봉은 48억 6천7백만 원으로, 직원 평균 연봉(8천7백만 원)의 55.9배였다(〈그림2〉). 30대 그룹 상장사 전체를 보면 임원들이 일반 직원보다 10배 이상의 연봉을 받는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이조차 과소평가된 수치다. 직원 평균 연봉에 임원 연봉이 포함돼 계산되므로, 직원 중 최고 직급인 부장조차 실제로는 직원 평균 연봉만큼 받지 못한다. 부장 같은 중간관리자급보다 임금이 훨씬 적은 평직원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경영자들의 배당 소득까지 치면 그들이 기업으로부터 챙겨가는 돈은 어마어마하다. 가령 대기업 최고경영자들은 2011~15년 배당으로 수천억 원을 벌었다. 이건희(삼성그룹)가 6천8백10억 원, 정몽구(현대차그룹)가 3천63억 원, 최태원(SK그룹)이 1천6백4억 원, 구본무(LG 그룹)가 1천22억 원, 정몽준(현대중공업)이 6백56억 원을 배당금으로 받았다.

최고경영자들의 소득이 능력이나 성과에서 나온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SK그룹 회장 최태원은 2013년 연봉을 3백1억 원이나 받았는데, 2013년 내내 그는 횡령죄로 구속 수감돼 있었다. 삼성그룹 회장 이건희가 2015년 받은 배당금은 무려 1천7백72억 원이었는데, 그가 의식불명 상태로 병상에 누워서 받은 것이다(〈그림3〉).

정부와 기업주 언론들은 우리의 시야를 노동자 계급 내 차이에만 머물게 하려 한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심각한 경제 위기를 두 차례 겪으면서 소득 불평등은 더욱 증대했고, 노동자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노동자와 자본가들 사이에 더 극심하게 벌어져 왔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층의 임금 인상과 임금 격차 해소를 위한 재원을 포함해 전체 노동자들의 조건 개선 재원을 자본가들이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들 내에서의 소득 재분배가 아니라 말이다.

임금 격차의 진실 ⑵ 격차 증대는 노조 효과가 아니라 무노조 효과

임금 격차 문제에서 우리가 대결해야 할 또 하나의 쟁점은 과연 노동조합이 임금 격차를 벌리는 구실을 하는가 하는 점이다.

노동조합이 있는 곳은 임금이 더 높고 노동조건도 더 좋다는 게 참말이다. 전 세계 어느 지역을 봐도 그렇다. 그러니까 노동조합을 만드는 것 아닌가. 우리 나라에서는 노동조합 프리미엄이 4~8퍼센트 이상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동시에, 노동조합이 강력한 곳일수록 더 평등하다. 노동조합이 있는 곳은 사업장 내 격차와 사업장 간 격차가 모두 노동조합이 없는 곳보다 훨씬 적다. 성별이나 학력에 따른 임금 격차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노동조합이 더 열악한 노동자들의 조건을 좀 더 끌어올리는 하후상박의 연대 원리를 적용하기 때문이다. 이건 세계적 조사에서 다 인정되는 바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많은 사람들이 더는 이런 효과가 적용되지 않는다며, 조직 노동자들이 오히려 격차 증대에 기여한다는 부정적 견해를 내놓았다. 그러나 한 견실한 연구 결과를 보면(강승복·박철성, ‘임금분포에 대한 노동조합의 효과’), 이런 효과는 1990년대 후반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 즉, 노동조합이 있는 곳이 없는 곳보다 사업장 내에서나 사업장 간에서나 임금 격차가 더 적었다. 1998년 이후 임금 격차가 증대한 것은 노동조합 때문이 아니라, 노동조합이 조직되지 않은 부분에서 임금 격차가 증대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노동조합이 강할수록, 조직노동 부문이 잘 싸울수록 격차가 증대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노동조합이 없거나 약하고 무기력할수록 격차가 증대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정규직 노동자들이 양보하면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들의 조건을 개선해 줄 것처럼 말하며 노동개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올해 최저임금 인상률이 낮았던 것만 봐도 이것이 거짓임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 ‘노조 효과’라는 것에는 이런 수치로는 도저히 다 설명할 수 없는 투쟁의 동역학이 있다. 그것은 한 부문이 투쟁을 통해 조직을 건설하고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도 투쟁에 나서도록 고무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식으로 노동자들은 서로 고무하고 연대하며 조건을 개선해 온 것이다.

한 부문이 싸워 조건을 개선하면 나머지 부문과 격차가 벌어진다는 것은 정태적 관점일 뿐이다. 동태적인 관점을 가져야 한다. 스냅 사진이 아니라 동영상처럼 말이다.

격차 문제와 대안 논쟁

물론 상이한 노동자 부문간 임금 격차는 중요한 문제다. 특히, 자본가들은 상이한 노동자 부문들을 이간질해 각개격파하려 한다. 여성은 남성의 63퍼센트 정도에 불과한 임금을 받는다.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는 14년 연속 OECD 1위다. 이주 노동자들의 소득은 내국인 노동자의 6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 격차 역시 OECD 1위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격차도 여전히 매우 크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50퍼센트 정도밖에 안 된다.

좀 더 나은 처지의 노동자들은 당연히 저임금 노동자들의 조건 개선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민주노총은 해마다 하후상박의 원리를 적용한 임금요구안을 발표해 왔다. 하후상박은 전체 노동자들의 조건을 개선하되 더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 조건을 더 빠르게 개선하기 위한 바람직하고 필요한 원칙이다.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보면 투쟁이 고양될 때 흔히 노동자들은 처지가 더 나쁜 부문의 임금을 더 많이 올리곤 했다. 문제는 민주노총의 요구안을 관철할 힘인데, 민주노총 스스로 평가하듯이 요구안을 제출하는 이상의 구실을 하지는 못했다. 중요한 것은 기층의 노조들(특히 현장 활동가들)이 함께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조건 개선을 위해 그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직접고용이든 간접고용이든 같은 사업장 또는 기업체에서 일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런 곳에서 연대가 실질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채 제시되는 대안들은 공문구이기가 쉽다.

그런데 연대 투쟁을 하는 데 장애를 초래할 수 있는 잘못된 견해가 노동운동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기서는 세 가지 주장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⑴ 노동시장 분절 때문에 노동자들은 연대할 수 없는가?

더 나은 처지의 노동자 부문과 열악한 부문은 서로 이해관계가 달라 연대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이른바 내부노동시장에 있는 대기업·정규직 노동자 부문과 외부노동시장의 중소기업·비정규직 노동자 부문 사이에는 서로 넘나들지 못하는 골이나 덫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참말이 아니다. 현재 벌어지는 조선업 구조조정은 대기업·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조차 치열한 국제 경쟁 속에서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통계를 봐도 남성 노동자의 경우 내부노동시장에서 직업 경력을 시작했더라도 이것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20~30대에 가진 직업을 45세까지 유지하는 사람은 40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리고 원청 노동자들이 하청 노동자들의 열악한 조건에서 득을 보는 것은 아니다. 원청 노동자들은 원청 기업과 한편이 돼 하청 노동자들을 착취한 결과를 누리는 게 아니라, 하청 노동자와 마찬가지로 착취당하는 처지다. 대기업의 생산성은 하청 기업보다 훨씬 높다. 대기업 생산성이 100이면 하청 기업은 34.5이다(2013년). 이는 대기업 노동자들의 착취율이 매우 높다는 뜻이다. 임금을 더 많이 받는다 해도 뺏기는 것도 더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나라 대기업의 노동소득 분배율은 전체 수준보다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그림4〉).

저임금 노동자층의 열악한 조건이 다른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압박한다는 점을 봐도, 비정규직의 조건 개선이 정규직에도 좋은 것이다. 설사 정규직 노동자 가운데 일부가 비정규직을 사용자측 공격의 완충지대로 여기더라도 그것은 허위의식이나 착각이지, 객관적 진실이 아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형이나 동생, 아내이거나 아들 딸이라는 점을 봐도 두 집단이 서로 이해관계가 다르다고 보는 게 비현실적임을 알 수 있다. 가족의 일원을 완충장치로 삼아 가구소득이 줄어드는 것을 누가 원하겠는가?

위와 같은 사실들은 대기업·정규직과 중소기업·비정규직 사이의 이해관계가 결코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무엇보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고용한 자본가들로부터 착취당하는 처지이고, 여기서 비롯한 적대 관계 때문에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과는 동질감 또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 처지와 조건이 서로 다른 노동자들이 부문을 넘어 연대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⑵ 조직 노동자들은 임금 요구를 내려놓아야 하는가?

노동자들이 연대하려면 조직 노동자들이 자기 요구로 투쟁하기를 자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노동운동 안에 상당히 퍼져 있다. 조직 노동자들이 자기 요구를 쟁취하면 노동자들 간의 격차만 벌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최저임금이나 근로기준법 5인 미만 적용 같은 요구로 투쟁해야지, 대기업 정규직이나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임금 문제로 싸우는 건 부적절하다고 한다.

물론 최저임금이나 근로기준법 5인 미만 사업장 적용 같은 요구를 지지해야 한다는 것은 지당하다. 그러나 조직 노동자들의 요구와 결합시켜야지, 서로 대립시켜서는 안 된다.

조직 노동자의 요구를 내세우지 말라는 것은 정부가 임금 공격을 하는 지금, 불필요하게 수세적이고 사실상 무기력한 입장이다. 조직 노동자들이 자기 요구로 싸우기를 자제해 정부가 관철시키려는 임금피크제와 성과연봉제 등이 도입된다면,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 세력균형은 자본 쪽으로 더욱 기울어 전체 노동자들의 처지가 악화될 게 뻔하다. 국제노동기구 ILO가 밝혔듯이, 정규직 보호 조항을 약화시킨 나라들에서 비정규직의 처지는 하나같이 더 나빠졌다.

경제 위기가 오래 지속되는 조건 하에서는 노동자들은 어떤 고귀한 이념을 위해서보다는 자기 조건을 지키는 투쟁에 훨씬 자주 내몰리게 된다는 점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의식이 변하고 연대의 중요성도 깨닫게 된다. 투쟁을 경험한 노동자들은 종종 부문을 넘어 연대한다. 자기 요구를 가지고 싸움에 나서지 않는 노동자들이 먼저 다른 노동자들의 요구를 위해 투쟁에 나서기는 경기침체 하에서 대체로 가능하지 않다. 학자나 노조 지도자들이 ‘적절한’ 요구를 선정해 준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부문의 투쟁이 노동자 간 격차만 늘린다는 생각이 유행하다 보니, 이제는 비정규직 투쟁에 대해서도 이런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가령 현대차 사내하청의 정규직화나 조건 개선 투쟁은 나머지 부품사 노동자들과 격차만 늘렸다는 식이다. 그러나 잘 조직된 부문의 투쟁과 성과가 나머지를 고무해 투쟁을 확대하도록 해야지, 그 역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대기업의 지불 능력을 전체 노동자들을 위해 써야지 그 기업 노동자들을 위해서 쓰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생각에서 대기업 노동자들의 투쟁을 시큰둥하게 보기도 한다. 그러나 투쟁의 동역학을 생각해야 한다. 대기업 노동자들이 자기 고용주의 이윤을 압박해 그들을 궁지에 몰지 않고는, 재벌 기업이 자기 회사 노동자 임금을 위해서든 ‘사회적 임금’을 위해서든 재원을 내놓도록 그들을 강제할 수 없다. 대기업 노동자들의 투쟁력에 의지하지 않고 대기업 고용주들을 상층 협상 테이블로 불러 내어 설득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⑶ 노동자들 내의 나누기가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노동자 내부의 임금 평등 문제를 중시한 나머지, 전체 노동자 계급의 몫을 늘리는 것보다 노동자 내의 나누기를 대안으로 보는 주장도 많다.

일부 노동자 임금을 낮추고 일부 노동자 임금을 올리는 식의 ‘연대임금’이나 ‘직무급’ 대안도 이에 해당한다. 최근에 새삼 주목을 받은 ‘연대기금’도 대표적 사례다. 지난해 SK하이닉스 노사는 임금 인상액의 10퍼센트를 노동자들이 내고 그에 상응하는 재원을 회사가 내, 이 돈(66억 원)을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임금과 복지에 쓰겠다고 했다. 금속노조 기아차지부 집행부도 지난해 연말 ‘나눔과 연대 기금’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런 연대기금은 실질적인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하기에는 푼돈 수준이다. 기업은 푼돈 수준을 내놓고 생색내기를 할 수 있다. 진정한 차별 폐지는 거부하면서 말이다. 한편, 비정규직 처우를 개선할 실질적인 액수가 되려면 그것의 절반을 부담해야 하는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큰 문제가 될 것이다. 또, 이런 방식은 비정규직 조건 악화에 정규직이 책임 있다는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문제점도 있다. 노사정위가 SK 하이닉스 사례를 대대적으로 띄웠던 이유다.

물론 불평등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보는 선의의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차별 해소에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연대기금을 지지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이 정말로 효과적인 방법인지 따져 봐야 한다. 대기업 정규직 노조들은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과의 연대 투쟁을 통해 지불 능력이 있는 자기 기업주를 압박해 적잖은 양보를 얻어낼 힘이 있다. 쌓여 있는 사내유보금만 얼마인가? 그러나 이런 힘 있는 노조가 제 힘을 다 사용하지 않고 비정규직 연대를 중도 포기한 다음 연대기금을 추진하는 것은 결코 비정규직 연대와 조건 개선을 위한 진정으로 효과적인 방안이 될 수 없다.

노동조합 투사들의 구실이 중요하다

마르크스는 임금 투쟁을 매우 중시했다. 그는 임금이 최저생계비 수준에서 고정돼 있다고 보지 않았고, 임금 수준은 결국 주로 자본과 노동의 힘 관계에 의해 정해진다고 봤다. 마르크스는 임금 투쟁이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지키기 위해서 중요하다고 봤지만, 다른 점에도 주목했다. 그런 투쟁으로 훈련된 노동자들만이 더 광범한 운동과 근본적 사회변혁을 위한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동자들 자신의 투쟁이 중요한 이유다. 비록 어느 한 시점에서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가 증대하는 듯하고 모순된 결과가 빚어지는 듯할지라도, 노동자들의 부문 투쟁을 무시하고 그것이 해롭고 무질서하다고 봐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엘리트주의적 관점일 뿐이다. 어떤 똑똑한 학자들의 정책 대안도, 자애로운 정치인의 개혁 입법도, 노조 지도자들의 협상 수완도 노동자들 자신의 투쟁을 대신할 수는 없다. 노동자들은 투쟁 속에서만 연대를 발전시킬 수 있다.

물론 투쟁하면 저절로 연대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노동조합 속 투사들과 사회주의자들의 구실이 중요하다. 투사들과 사회주의 노동자들은 잘 조직된 부문의 임금과 조건 방어에 사용되는 힘이 전체 투쟁을 위해서도 사용되도록 노동조합 속에서 늘 분투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대기업·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을 이기주의로 여기며 외면한다면, 온건한 노조 지도자들의 투쟁 회피를 뜻하지 않게 돕는 꼴이 될 수 있다. 도덕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가 행동지침이어야 한다.

첫째, 잘 조직된 부문의 임금과 조건 방어 투쟁을 지지하고 연대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들의 투쟁을 이기주의로 보며 그걸 위축시키는 주장으로부터 그 투쟁을 옹호하고 자신감을 불어넣는 게 중요하다. 임금피크제나 성과연봉제 저지 투쟁이 전진하는 것이 전체 노동자들의 조건 방어에도 중요하다. 이 투쟁이 잘 되면, 다른 노동자 부문에 자신감을 주고 투쟁을 고무할 수 있다.

둘째, 잘 조직된 부문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힘을 비정규직,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임금 차별을 개선하는 데도 사용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이것은 비정규직,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스스로 투쟁에 나설 수 있도록 돕고 연대를 확대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셋째, 잘 조직된 부문의 노동자들이 개별 기업 차원의 임단협뿐 아니라 정치적 투쟁에도 나서도록 설득해야 한다. 악취가 진동하는 부패, 사드 배치, 노동자·민중운동 탄압 등은 경제 위기의 대가를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려는 정책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노동자 운동은 이런 문제들에 맞서 싸움으로써 “민중의 호민관”이 돼야 한다.

흔히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이 같은 지향성에 부담을 느끼고 개별 기업이나 부문의 경제적 투쟁으로 투쟁을 제한하려 할 수 있다. 또는, 지금 제기되는 문제들은 부문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며 ‘정치적’ 해결을 추구할 수 있다. 이때 말하는 ‘정치’는 온건하기 이를 데 없는 개혁정당들에 기대거나 선거를 기다리는 것을 뜻한다.

이 두 가지 다 진정한 대안이 못 된다. 이럴 때 노동조합 투사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그것이 왜 대안이 아닌지 논쟁을 벌이며 노동자들을 설득하면, 작업장 내의 세력균형을 바꿔 투쟁을 전진시키는 구실을 할 수 있다.

물론, 그러려면 투사들과 사회주의 노동자들은 미리 잘 조직돼 있어야 한다.

※ 이 글은 필자가 몇 달 전에 쓴 기사와 부분적으로 내용이 겹친다. 그러나 단지 적은 부분만이 겹치므로 두 글은 서로 다른 글이다. 독자들이 혼동하지 않기를 바란다.


추천 책

임금, 임금격차, 연대

임금, 임금격차, 연대

김하영 지음

136쪽 | 4,000원|노동자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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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최근 임금소득 격차 증대의 본질과 그 정치적 함의, 노동조합과 임금격차 사이의 관계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비단 정부의 거짓을 들춰 내기 위해서뿐 아니라 노동운동이 투쟁 방향을 제대로 잡는 데에도 중요하다. ‘조직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임금소득 상위 10%에 드는 게 사실 아닌가’, ‘조직 노동자들이 잘 싸울수록 임금격차만 벌릴 뿐 아닌가’ 등의 냉소가 노동운동 안에도 상당히 퍼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 노동운동 안을 들여다보면, 임금 방어가 중요해진 상황에 직면해 무기력한 대응을 낳을 약점들이 꽤 있다. 이 소책자는 이런 문제들(이론적 · 정치적 쟁점들)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