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박근혜 정부 실정(失政)의 4년, 저항의 4년

4년의 분노가 횃불이 타오르게 한 불쏘시개였다.

세계경제의 심각한 위기 속에서 한국 지배계급이 활로를 찾으려고 박근혜라는 강성 우파 정치인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박근혜 정권이 출범했다.

1997년 경제 공황과 뒤이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실패로 박정희 신화가 되살아난 것이 먼 배경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신화가 애초에 기만이었듯이, 박근혜가 한 일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기대한 것과 달랐다. 단지 과대 포장만이 아니라 상품 자체가 결함투성이로 사실상 사기였던 것이다.

박근혜가 가장 큰 역점을 두고 한 일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대기업 살리기’였다. 부패가 곁들여진 억압과 노동계급 쥐어짜기 등 말이다.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운다)를 내세운 2007년 대선 예비 경선 때와 달리 2012년 대선에선 ‘내 아버지의 꿈이 복지국가’라는 흰소리를 하며 당선했지만, 그 실체가 바뀔 리는 없었다.(그런데 2007년에 줄푸세 공약을 만든 자가 바로 안종범이었다.)

4년여 전 대선에서 민주당은 박근혜 복지 공약이 퍼주기라고 공격했다. 예산도 없는데 복지를 늘리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박근혜 정권의 실체를 잘 알았기에 오히려 노동자 계급은 박근혜 당선에 일시적으로 사기 저하를 겪었다. 이명박 정부 아래서 완전히 학을 뗀 사람들에게 더 악랄한 자의 5년은 좀 버겁게 느껴졌을 것이다. 박근혜 당선 직후 천문학적 손해배상에 짓눌려 온 한진중공업의 투사 최강서 열사가 한 맺힌 생을 스스로 마감했다. 그 뒤로 노동자와 활동가 넷이 세상을 등졌다. 많은 사람들이 때마침 개봉한 1830년대 프랑스의 민중 봉기를 소재로 한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면서 위로를 받았다.

그러나 취임 이래 지난 4년 동안 박근혜는 아버지에게서 배운 대로 할 수 없었다. 40년 전과 달리 노동자 조직들이 성장해 형식적 민주주의가 진전됐고, 청와대가 더는 강압으로 좌지우지할 수 없었다.

따라서 박근혜의 적폐 4년은 불평등과 고통이 심화된 4년이기도 했지만, 또한 저항과 반격의 4년이기도 했다. 특히, 박근혜 식 경제 살리기의 주된 표적이었던 조직 노동운동이 처음부터 선두에 서 왔고, 퇴진 운동을 추동한 핵심 동력이 됐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은 결코 진공 속에서 등장한 것이 아니다.

4년도 지겨웠다

첫해부터 우익 본색을 드러내다

박근혜는 2012년 대선에서 모든 노인들에게 기초연금을 기존의 두 배로 올리겠다고 공약해서 재미를 봤다. 그러나 이 공약을 뒤집는 데는 당선 후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박근혜가 내놓은 첫 인사 명단들은 악취가 펄펄 풍겼다. 오죽하면, 임명 전 낙마가 속출해 박근혜는 취임 후 한 달이 지나도록 전임 이명박 정부의 장관들을 데리고 국무회의를 해야 했다.

박근혜에게 잘 보이려고 경남지사 홍준표가 2013년 3월 공공의료기관인 진주의료원을 기습적으로 폐쇄했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 아래서 진주의료원 문제로 첫 노동자 투쟁이 시작됐다.

박근혜 정권은 임기 첫해에, 지금 문제되고 있는 적폐들 중 대부분을 다 보여 줬다. 복지 후퇴와 고통 전가, 부패 인사 등용, 민영화와 공공복지 후퇴, 국가기관을 동원한 공작 정치, 노동조합 공격과 민주적 권리 제약, 그리고 이런 것들을 포장해 대국민 사기를 치기 위한 언론 통제 등.

공공의료기관 공격은 곳곳으로 이어졌고, 이와 짝을 이뤄 의료·철도 등 민영화, 각종 규제 완화가 추진됐다. 공공 서비스와 기관들의 민영화 드라이브는 당연히 공공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악화를 동반하는 ‘1+1 개악’임도 확인됐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정권의 지지율 추락 위기를 처음 끌어낸 것이 2013년 말 철도노조의 민영화 반대 파업이었다.

게다가 대선에 국가기관들이 총동원돼 박근혜를 지원한 일도 폭로됐다. 이명박의 (심복인 원세훈이 원장으로 있던) 국가정보원은 민간인·사회운동 사찰뿐 아니라 대선 개입에서도 컨트롤 타워 구실을 했다. 박근혜 못지않게 해 먹은 것이 틀림없을 이명박은 박근혜를 당선시켜 퇴임 후 안전을 보장받으려 한 것이다.

박근혜는 이런 부패한 결탁이 폭로돼 정통성이 흔들릴까 봐 법무장관 ‘황교안’을 통해 국정원 대선 개입에 대한 검찰 수사를 가로막았다. 여기에 유신 체제에서 잘 나갔었고 공안검사의 중시조인 김기춘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재등장했다. 그는 정권 초기의 어수선함을 노동자 조직 공격으로 정리하려 했다.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진보당 해산 청구 등이 대표 사례다.

그럼에도 국가기관의 총체적 대선 개입에 항의하는 대중 시위가 몇 주간 이어졌다. 전교조는 법외노조가 되는 것을 무릅쓰며 정부의 규약시정명령을 거부하며 저항해 법원의 법외노조 통보 방침 중지 가처분을 이끌어 냈다.

기업주의 이익을 위해 노동계급을 공격하기

임기 둘째 해, 박근혜는 양질의 일자리를 바라는 청년과 기혼 여성 노동자들에게 시간제 일자리 정책을 내놓고 생색을 냈다. 박근혜는 이 저임금 일자리 창출을 핑계로 모든 노동자들에게 임금 삭감을 강요했다.

임금피크제 등 임금 체계 개악이 강요됐다. 이듬해인 2015년 임금피크제가 공공부문에 보편화됐고, 공무원연금도 결국 삭감됐다. 2016년에는 성과연봉제를 도입하려고 공기업·사기업 가리지 않고 근로기준법도 어겨 가며 행패를 부렸다.

기업주들에게 총 1조 원이 넘는 법인세 절감 효과를 준 박근혜 정부는 노동자들에게는 임금 삭감과 담뱃세 인상 등으로 재정적자 벌충의 책임을 강요한 것이다.

기업주들은 수십억 원 넘게 쓰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반대급부를 기대했을 것이다. 노동개악 추진은 인력 감축, 임금 삭감, 노조 약화 등 이윤 보호를 위한 무기를 기업주들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전방위적인 고통전가 공세는 결국 조직 노동운동이 선두에 서서 싸우게 만들어서 정권 퇴진 운동의 토양을 쌓게 하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박근혜의 ‘창조경제’는 문화, 스포츠계에 대한 사찰과 부패·비리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친제국주의로 동북아 긴장 고조에 일조하다

친제국주의적이고 군사주의적인 외교 정책도 문제였다. 이념적으로 친미 냉전 반공주의를 계승한 박근혜 일당은 안보 위기를 국내 억압을 강화하는 명분으로도 써먹으려 했다.

그러나 한국 자본주의가 경제적으로 중국 시장에의 의존을 키워 왔고, 2008년 이후 세계경제 침체의 직격탄을 맞지 않은 것도 부분적으로 중국 시장 덕분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에 미국과 중국 간의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친미 정책 추진은 국내 정치에서도 날카로운 긴장을 빚어냈다. 여기에 대북 호전 정책, 군비 경쟁 참가 등의 정책은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 북한 핵무장 능력 강화 등 오히려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만 부추겨 왔다.

안보 위기 속에서 박근혜는 한·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하는 것에 매진해 왔다. 박근혜의 안보 브레인들은 미국이 일본과 군사적으로 가까워지고 일본의 본격 재무장화를 미국이 지지하는 것을 보며, 미국에게 한국이 일본보다 열등한 파트너로 취급될까 봐 위기감을 느낀 듯하다.

그러므로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것은 미국의 전략상 한미’일‘ 공조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임기 3년차 말부터 나온 것이 한일 ‘위안부’ 합의, 한일 군사정보협정 체결, 또 사드 배치 결정이었다. 이런 결정들은 민심 이반의 중요한 계기가 됐다.

2013년 철도 파업은 지금의 퇴진 운동으로 가는 철길을 놓은 대표적 노동자 저항이었다.

세월호 참사, 박근혜의 아킬레스 건이 되다

박근혜 정권의 죄악 중에 가장 충격을 준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세월호 참사일 것이다. 구조 실패로 3백4명의 생명이 눈앞에서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박근혜는 지금까지도 세월호 참사는 자기 탓이 아니고, 단지 사고인 것까지 대통령 탓을 하면 안 된다고 억지를 부린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는 규제 완화, 민영화, 국가 공공서비스의 해체 등 박근혜 정부가 추진해 온 친기업 정책들을 배경으로 해서 일어난 참사다.

박근혜는 규제와의 전쟁을 선포해 첫해에만 6백 개 넘는 규제를 없앴다. 과적과 화물 결박 점검을 완화하고, 재난 관리 예산을 줄여 해경의 구조 능력을 약화시킨 것도 박근혜다.

또한 친미 우익 정부답게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전략을 위해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서두른 것도 직접적인 침몰 원인의 하나가 됐다. 아마 진상을 한사코 감추는 데에도 이런 사정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박근혜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정권 위협 세력 취급해 그들을 감시했고 진상 규명도 방해했다. 황교안과 우병우도 검찰의 세월호 수사를 축소하도록 압력을 넣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진상규명특별법에 끝까지 반대했고, 그나마 반쪽짜리 조사위도 끝내 해체시켜 버렸다. 생때같은 자식들이 죽게 된 이유라도 알자는 소박한 호소에 경찰봉과 물대포로 답했다.

박근혜 정권의 비정함과 냉혹함, 무책임성에 수많은 사람들이 치를 떨었다. 특히 10~20대 청년세대가 그랬다. 지금 박근혜의 정치적 곤경은 이런 악행에 대한 민중의 복수인 것이다.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운동은 처음부터 범국민적인 지지를 받았고, 조직 노동운동과도 연대해 더 강해질 수 있었다.

민주적 권리를 공격했지만, 아버지처럼 할 수는 없었다

일련의 사악한 짓들에 성공하려면 저항을 억누르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고통전가와 민주적 권리 억압은 1+1 패키지다.

임기 첫해부터 전교조 법외노조화(와 공무원노조 불승인) 등 노조 탄압에 열을 올렸고, 기업들의 노조 파괴 공작을 묵인하거나 도왔다. 진보당 일부 간부들과 일부 당원들의 토론회 내용을 과장해 진보당을 해산시켜 정치적 자유도 위축시키려 했다. 블랙리스트 정책이 범정부적으로 시행됐다.

또한 차벽 설치와 시위 참가자 처벌 강화, 물대포 살인 진압 등 탄압 강화를 서슴지 않았다. 그런 짓들의 비극적 상징이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 집회에서 백남기 농민이 참혹한 죽음을 당한 일이었다. 바로 그 민중총궐기를 주도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도 구속돼 3년형(1심에서는 5년형)을 선고받았다. 박근혜는 민중총궐기를 핑계로 2016년 초 국정원장에게 더욱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고 집회·시위의 자유를 억압하는 테러방지법을 제정했다.

이런 탄압에도 2015년 민중총궐기는 박근혜 퇴진 요구를 거리에서 강력하게 표출했다. 2016년 11월 민중총궐기는 정권 퇴진 운동이 1백만 명 넘게 참가하는 강력한 운동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수십만 명이 참가한 민중총궐기 집회들은 압도적으로 민주노총 노동자들이 주도한 시위였다.

억압과 착취를 강화하고 정당화하려면, 바로 그렇게 성장해 온 한국 자본주의의 과거도 고쳐 써야 했다. 그것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시도다. 이 조처는 전교조를 법외노조화해서 침묵시키려 한 것과도 일부 관계 있다. 이 교과서는 너무 많은 거짓말과 침묵으로 광범한 반발을 사고 있고, 그 결과 5천5백66개 중고교 중 단 1곳만 채택했고 그 학교마저 학교 구성원들의 반대 시위에 직면해 있다.


조직 노동자들이 저항의 선도자 구실을 하다

권력욕이 많고 통치 기술에 능한 박근혜는 자기 계급의 이익 보장에 충실하도록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것임을 잘 알았다. 그래서 이재용 등 기업주들이 박근혜의 뇌물 요구에 순순히 협력한 것이다.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냉혹하고 잔인한 박정희처럼 박근혜도 그러려고 했다. 가령 친기업·친제국주의 정책 추진에 방해될까 봐 세월호 참사 문제를 그렇게도 덮으려 애쓴 것이다.

이처럼 지배계급의 가장 ‘구체제’스런 자들에 정치적 기반을 뒀지만 박근혜 정권의 실체는 단지 구체제의 패러디는 아니다. 친기업 고통전가 정책과 친제국주의, 비열한 블랙리스트 통치 등은 한국 자본주의의 현재적 위기를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박근혜가 살 '큰집'.

그래서 퇴진 운동의 저변에 깔린 불만과 분노는 겉으로 표출된 이데올로기보다는 훨씬 더 뿌리 깊은 문제들과 연결돼 있다. 계급 불평등과 부정의한 사회 구조 말이다. 조직 노동운동이 박근혜 정부와 맞서는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대표한 것이 우연은 아니다.

박근혜 집권 후 진보진영 일각에서는 박근혜 당선은 대중의 우경화 때문이라며 자신들의 후퇴와 비관주의를 정당화했다. 박근혜 정권 아래서 노동자 투쟁이 앞장서면 오히려 운동이 고립된다거나, 조직 노동자들은 배불러서 안 싸울 것이라거나, 종북몰이 때문에 진보는 힘을 못 쓸거라는 식의 주장이 유독 많았던 이유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전체 그림은 결코 그런 게 아니었다. 민주노총 노동자들은 직선으로 좌파적 집행팀을 새로 선출하면서 오히려 전투적 투쟁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지난해 11월 말~12월 초 철도 파업에서는 조합원들이 사실상 지도부의 멱살을 잡고 투쟁을 끌고 갔다.

이런 상황들 때문에 운동 상층 지도자들의 온건성과 맞서며 현장 조합원 대중에게 투쟁의 정치적 무기를 제공할 조직된 좌파들의 존재와 구실이 중요했던 것이다.

박근혜가 대중의 염원대로 탄핵된다면, 자신들의 힘으로 그 오랜 적폐를 상징하는 정권을 패퇴시킨 대중은 일터와 학교 등에서도 적폐들이 일소돼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곳곳에서 전진해야 한다. 노동자 투사들이 이 운동들에 더 폭넓게 참여해 모범을 보여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지난 4년 동안 그랬듯이, 혁명적 좌파가 적절한 분석과 전망과 함께 그 한가운데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