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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개혁 ‘선물’을 기다리지 말자

5월 23일 아침 박근혜가 수갑을 차고 서울중앙지법에 도착하는 장면을 보고 진정한 개혁과 진보를 염원하는 많은 이들이 통쾌해 했을 것이다.

마침내 수갑 차고 재판에 나온 박근혜. ⓒ사진 노동자연대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의 결과물이다. 그러므로 현 정부는 민중이 현직 대통령을 끌어내려 구속시킨 결과로 등장한 정부인 것이다. 이는 문재인에게는 양날의 칼이다. 민중의 자신감과 열망은 그에게 부담스런 압력이기도 하고, 잘만 수렴하면 공식 정치 내 경쟁자들을 제압할 동력일 수도 있다. 이 둘 사이에서 문재인은 줄타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재인은 일단 취임 2주 만에 세월호 참사 재조사, 국정교과서 폐지, 4대강 사업 정책감사 등을 지시했다. 또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검 수사를 맡았던 윤석열을 서울지검장으로 기용하고, 광주민중항쟁의 진실을 추가로 밝히고 왜곡을 차단하겠다고 하고, 아예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는 개헌을 하겠다고 했다. 새누리당 정권 9년의 적폐를 청산한다는 기치로 대중의 열기를 정권의 동력으로 수렴하려는 것이다.

이런 조처들 덕분에 문재인의 초기 국정수행 지지율은 80퍼센트가 넘어 역대 정권 중 상위권에 속한다.(1987년 이후 취임 초 지지율이 가장 낮은 건 당연히 박근혜였다.)

그런데 높은 기대치는 정권 초기에 민중이 다양한 개혁 요구들을 저마다 내놓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특히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 참가자의 다수가 미조직 노동자들이었고, 운동을 이끈 주요한 축이 노동운동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개혁은 경제·안보 위기에 처한 한국 자본주의를 더 효율적으로 재편하고, 박근혜가 대내외적으로 떨어뜨린 국가적 위신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가령 윤석열의 서울지검장 기용은 박근혜 게이트 수사와 재판 때문인데, 이 문제는 지배자들의 위신과 관련 있을 뿐 아니라, 정권의 입지와 더 관계 있다.

계급 문제

노동계급에게 박근혜 적폐 청산은 그 이상을 뜻한다. 그런데 전교조 법외노조화를 철회한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자마자, 문재인 청와대는 그럴 계획을 “한 번도 논의하거나 구체적으로 협의한 바 없다”고 즉각 부인했다. 국무총리 내정자인 이낙연은 대법원 판결을 기다린다고 했다. 그러나 법학자이기도 한 김승환 전북교육감은 노동부의 행정처분만 취소하면 될 일이므로 대법원 판결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했다. 대통령 지시사항으로 해결 가능하다는 것이다.

노조 인정은 대단한 개혁도 아니고 소위 ‘시민권 회복’에 관한 것이다. 전교조는 가장 먼저 박근혜 퇴진 요구를 하고서 해직 등 징계 위협에 맞서 싸워 왔다.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박근혜 촛불의 알맹이인데, 새 정부 아래서 단순한 기본권 회복이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선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 재협상”을 언급했던 문재인이 일본에 특사로 보낸 문희상은 위안부 합의 해결의 “제3의 길”을 언급했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한 민주당의 10대 공약에서는 ‘재협상’이라고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홍석현 등을 통해 한미동맹을 기본 기조로 천명한 이상, 일본과의 선린 관계에 위협이 되는 행동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미동맹의 연장선이 동북아의 한미일 동맹이기 때문이다.

불법적 노조 탄압을 자행한 사측의 대리인을 한 박형철을 반(反)부패 비서관으로 임명한 것도 마찬가지다. 현 정부와 노동자들이 생각하는 ‘적폐 청산’(부패 척결 또는 사회 정의)의 정치·사회적 의미가 다른 것이다.

최근 문재인 지지자들이 노동운동과 그와 연계된 좌파들에게 신경질적 공격을 퍼붓는 것은 이런 문재인 개혁의 (본질적) 성격 문제가 배경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대중의 합격점에 도달하도록 노력하기보다는 합격선을 낮춰 버리겠다는 것이다. 문재인 개혁을 대하는 태도는 개혁의 양적 차이나 시간에 대한 인내심 문제가 아니라, 목표와 지향의 차이 문제다. 그리고 계급 문제인 것이다.

노동자들은 개혁을 기다리지 말고 자신의 요구를 내세우고 힘을 발휘해 행동해야 한다. ⓒ사진 조승진

한국 자본주의의 효율적 개혁

5월 21일 발표된 경제·외교 인사도 문재인 개혁의 성격을 보여 주는 듯하다. 문재인 지지자들의 〈한겨레〉 비판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인사의 약점을 거론하는 주류 언론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기획재정부 장관이자 경제 부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김동연이 아무리 ‘흙수저’ 출신이라 해도 그가 한 행적들을 노동계급 운동이 마냥 환영할 수는 없다.

그가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정책실장 변양균의 지휘 아래 참여한 ‘비전 2030’ 문서는 개방형 선진통상국가를 지향하며 선제적 FTA 체결을 핵심 과제의 하나로 설정했다. 그 결과는 약화될 대로 약화된 노무현 정부의 남은 지지층마저 등돌리게 만든 한미FTA 추진이었다. ‘비전 2030’은 한미FTA 추진에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셈이다.

대화와 토론을 중시했다는 노무현 정부는 한미FTA를 전격적으로 추진했고, 그에 대한 저항에는 물대포로 답했다. 나중에 문재인은 자서전에서 그때 등용한 김현종을 참여정부가 발탁한 고급 인재라고 칭찬했다.

이 ‘비전2030’ 문서의 50대 핵심 과제에는 노무현 정부의 국민연금 개악, 박근혜 정부가 실행한 공무원연금 개악 계획도 담겨 있다. 이는 이 문서를 주도한 ‘변양균 라인’의 관료들이 전통적으로 국가 예산을 다뤄 온 이른바 ‘경제기획원’ 출신인 점과 관계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라인의 주요 관료들이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와 경제 부처 요직에 배치된 것이다(경제부총리 김동연, 국무조정실장 홍남기, 대통령 비서실 총무비서관 이정도).

청와대 정책실장으로 임명된 장하성의 소액주주 운동도 결국 기업 경영이 주주들의 이익에 맞춰지고 감시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근 20년 동안 주주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인력 감축 구조조정을 당해 온 노동자들에게는 뭐가 개혁인지 모를 인사로 썩 반기기 힘든 것이다. 그는 고려대 경영대 학장 시절에 성적이 낮은 학생들의 등록금을 두 배 올려야 한다는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결국 학생들의 항의로 말을 거둬들였다.)


비겁한 거짓말, ‘친노 왕따론’

그동안 민주당과 유시민, 문재인 등 친노 정치인들은 우파의 압력뿐 아니라 진보·좌파와 노동운동의 투쟁도 노무현 정부의 실패 원인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의 실패는 스스로 자초했다. 노무현 정부에 좌우의 압력이 동시에 작용했던 그 때에, 노무현 정부는 의식적으로 우파와 기업주들과 한편이 되기로 선택했다.

가령 2004년 노무현이 민주당과 한나라당에 의해 국회에서 탄핵됐을 때, 탄핵 반대 여론은 노무현의 지지율보다 훨씬 높았다. 〈노동자 연대〉 같은 급진 좌파도 탄핵을 우파의 반동 공세로 보아 탄핵에 단호히 반대했다.

그런데도 노무현 정부는 2004년 이른바 4대 개혁 입법이 실패하자, 더 분명히 우경화했다. 그해 노무현 정부는 이라크 추가 파병을 강행하고, 공공부문 노사관계 개악안을 마련했으며, 비정규직 관련 법 개악, 평택 미군기지 합의 등을 준비하거나 실행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노무현은 2005년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에게 대연정을 제안했고, 2006년 한미FTA 추진, 국민연금 개악, 비정규직 개악 입법 등을 끝내 추진했다. 바로 이런 노무현 자신의 선택 때문에 대선자금 차떼기 수사와 탄핵 역풍으로 찌그러졌던 우파가 사기와 지지를 회복한 것이다.

즉, 좌파가 우파와 함께 노무현 정부를 왕따시킨 것이 아니라 노무현 정부가 기업주·우파와 손잡고 노동계급 대중을 공격한 것이다. 이에 배신감을 느낀 지지층이 정권에 등을 돌리고 그 중 일부가 저항에 나선 것이다. 또한 같은 이유로 다수가 2007년 대선에서 투표를 포기해 버린 것이다.(환멸로 2007년 대선은 1987년 이후 대선 투표율이 가장 낮은 해였다.)

2007년 노무현 정부의 비정규직법 개악으로 대량 해고 위협에 처해 저항에 나선 이랜드 노동자들 ⓒ사진 노동자 연대

노무현 정부의 의식적 선택으로 자신감이 오른 우파와 기업주들은 정부에 더 많은 우경화를 재촉했다. 노무현 정부가 이에 타협할수록 지지자의 이반과 왼쪽에서의 반감은 더 강경해졌다. 오죽하면, 이명박 집권 초기 ‘노명박’이라는 평가까지 나왔겠는가.(이런 강경함은 이명박의 우익적 정책에 맞서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세력, 자유주의 야당이 연합해야 한다는 포퓰리즘 전략(전략적 “야권연대”)이 유행하면서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문재인 정부가 이런 과거를 반복할까 봐 하는 걱정을 잘 보여 주는 것이 최근 〈시사인〉 천관율 기자의 기사다.(“‘새 시대의 첫차’가 출발했다”, 505호, 5월 18일)

그는 이 기사에서 우파의 “적폐 청산이냐, 국민 통합이냐” 하는 “가짜 질문”에 넘어가면 안 된다면서 “합의 기반이 넓은 이슈를 다루는 전장에서는, 과감한 공세가 통합을 오히려 촉진한다”고 정부에 조언한다. 그러면서 “반대로 사회경제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이슈도 있다. 예를 들어 최저임금 인상 문제 … 조세 개혁, 복지 자원 배분, 연금 개혁 등도 속성이 비슷하다”며 이런 쟁점에서 “적폐 청산하듯 밀어붙이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이 쟁점들의 개혁은 뒤로 미룰 것을 조언한다. 이 쟁점들을 섣불리 건들면, 우파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다다르는 논리적인 결론은, 문재인 정부가 성공하려면 좌파와 노동운동도 이런 문제를 초기에 제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재인 지지 세력이 정권 초부터 〈한겨레〉,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같은 전통적인 친민주당 언론까지 겨냥해 비판하는 것은 이 친민주당 포퓰리스트 언론들이 좌파와 노동운동에게도 가끔 우호적으로 지면을 할애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진보진영 일부가 반새누리 연합정치의 향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반면, 영악한 친노 정치인들과 그 지지자들은 재빠르게 정권 방어 태세로 전환한 셈이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가 난처함을 겪을 수 있는 쟁점들에서 선제적으로 비판을 차단하는 공세를 벌이는 것이다.

누구보다 박근혜 퇴진을 바랐을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경북 성주 주민들이 홍준표 지지율이 지역에서 50퍼센트 넘게 나왔다는 이유로 대선 직후 비난을 받은 것이나, 민주노총과 정의당, 노동계급 중심성을 표방한 좌파들이 비난의 초점이 된 것은 시사적이다.

그러나 대체로 인기가 높은 정권 초기에 개혁을 성공시키지 못한다면, 그나마 진정한 개혁은 갈수록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대중은 경험으로 안다. 그러므로 문재인 정부의 “기다리라”는 말은 개혁의 지체가 아니라 대중의 기대와 다른 종류의 개혁 추진임이 곧 드러나기 시작할 것이다.


노동자들 스스로 개혁을 쟁취해야 한다

“촛불 혁명”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정부가 추진하는 진정한 방향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하는데도 진보정치 지도자들 일부가 마치 ‘정신적 여당’이나 된 듯이 덕담 행렬에 동참하는 것은 안타깝다. 정의당의 노회찬 원내대표나 추혜선 의원이 문재인 정부의 행태와 인사에 칭송 일변도로 계속 논평하는 것은 특히 우려스럽다.

물론 노동자들이 지금 당장 행동할 태세는 아닌 듯하다. 끔찍한 9년이 이제 막 끝났고, 부수적이지만 퇴진 운동의 결과물로 탄생한 정권이니 지금 당장은 기다려 보자는 생각이 더 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현실을 인식하는 것과, 문재인 정부가 잘 하고 있으니 기다려 보자며 요구를 삭감하고 행동을 자제시키는 것은 다르다. 후자의 주장들은 노동계급 스스로 자기 요구를 위해 행동하며 계급의식을 발전시키는 일을 지체시키는 효과를 낸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스스로 싸우지 않으면 진정한 개혁을 얻을 수 없다. 최근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자회사 고용 방안이 ‘정규직화’라고 불리는 것은 명백한 후퇴다. 이런 유순한 태도는, 기껏해야 노동운동의 목표 달성 실패로 끝난 김대중·노무현 정부 하의 사회적 대타협주의의 재현으로 발전할 공산이 크다.

좌파는 영국 노동당 개혁주의의 1백 년 역사를 돌아보고 내린 영국 사회주의자 고(故) 토니 클리프의 다음 경고를 되새겨야 한다.

“아래로부터 쟁취한 개혁은 계급 조직을 강화하고, 그리하여 미래의 진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위에서 선사한 개혁은 수동성을 부추기고, 노동자들을 체제 내로 포섭시키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억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