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 권리 운동의 친기업적 · 친제국주의적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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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혁명적 반자본주의 격월간지 《시류를 거슬러(Against the Current)》(2015년 7월)에 실린 소논문을 번역한 것이다. 저자 멜라브 자밀(Mehlab Jameel)은 파키스탄의 성소수자로, 반제국주의적 포스트식민주의론을 이용해 주류 성소수자 권리 운동에 내포된 모순을 밝히고 있다. 그는 ‘남아시아’라는 말을 심지어 중동 지역도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번역과 관련해 독자의 양해를 구할 사항이 하나 있다. 저자 자밀은 주류 성소수자 운동의 정치 자체를 ‘신자유주의적’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용어법은 부정확한 것이다. 그래서 역자는 ‘친기업’이라는 말로 의역했다. [ ] 안의 말은 역자의 첨가라는 특별한 언급이 없어도 그렇게 알고 넘어가면 된다.
미국 대법원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는 결정을 내리기 사흘 전인 2015년 6월 24일 오바마 대통령은 미등록 이민자이자 트랜스젠더인 한 여성을 백악관 주최 ‘성소수자의 달’ 행사에서 쫓아냈다. 그녀가 미국 국가의 승인 하에 일어난 성소수자 고문과 강제추방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며 오바마의 연설을 방해했다는 게 이유였다. 오바마는 “여기는 내 집이오. … 부끄러운 줄 아시오!” 하고 꾸짖었고, 그 자리에 청중으로 있던 동성애자들은 “우리는 오바마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연호했다. 이 사건 하나만 봐도 미국 성소수자 권리 운동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유색인이자 남성 동성애자로서 오늘날의 상황을 보며 이런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더 급진적으로 발전할 잠재력이 있던 운동이 어쩌다 자긍심 행진과 동성결혼이라는 동화 정책에 갇히게 된 걸까?
먼저, 오늘날 성소수자 권리 운동을 둘러싼 맥락을 살펴보자. 성소수자 권리의 역사를 연구한 존 데밀리오는 동성애자 남성과 동성애자 여성이 항상 오늘날처럼 존재했던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동성애자’로서의 자의식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19세기에 임금노동이 확산되고 생산이 전문화되면서 섹슈얼리티가 생식 상의 필요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해졌다. 자본주의적 질서 덕분에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경험을 동성 간의 성애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됐고, 그 결과로 미국에서 동성애자 자의식이, 그리고 섹슈얼리티에 기반한 정체성 정치도 등장할 수 있었다. 이런 섹슈얼리티 담론은 불가피하게 의학 · 정신의학 분야와 맞물려 형성됐다. 또한 인간의 성적 경험을 분류하고 이해해야 함에 따라, ‘이성애’와 ‘동성애’ 같은 용어의 사용이 대중화됐다. 이런 용어들과 이를 섹슈얼리티에 적용하는 일은 19세기 후반 서구 사회에 등장해 ‘동성애자’의 형상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우리의 얘기는 1969년 스톤월 항쟁이 마침내 시스젠더
엘런 드제너러스 같은 코미디언
제국주의와 차별받는 사회집단
성소수자 권리가 친기업적이 된 방식과 꼭 마찬가지로, 성소수자 운동이 세계화된 방식에도 고유의 역사가 존재한다. 2011년 12월 국제 인권의 날 기념 유엔 연설에서 당시 미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은 ‘세계적 성소수자 공동체’를 지지한다면서 동성애자 권리를 인권이라고 선언했다. 그래서 성적 지향을 이유로 어떤 사람을 구타하거나 차별하는 것을 인권 침해라고 선언했다. 또한 성소수자 권리가 ‘보편적’ 권리라고 열정적으로 옹호하면서, 동성 간 특유의 행동을 불법으로 규정하거나 성소수자 학대를 용인하는 국가들을 비판했다. 미국이 세계 정치에서 동성애자 권리 운동의 선두에 서 있는 상황을 이해하려면 이 상황을 미국 제국주의의 역사 속에 자리매김해야 한다. 제국주의와 섹슈얼리티의 관계는 단순하지 않다. 그러니 권력과 인종과 젠더, 섹슈얼리티의 이러한 연관을 분석해 해답을 찾으려 하기 전에 올바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성소수자 권리를 보편화해야 하는 걸까? 성소수자 권리의 보편화를 위한 틀의 기초가 되는 가정들은 무엇이고, 그 가정들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억압적 전통에 맞서 성소수자 권리를 제도화함으로써 현대적으로 자리 잡게 하려는 노력은 왜 생겨난 걸까? 왜 세계적 성소수자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걸까? 세계적 성소수자 공동체는
에드워드 사이드는 제국주의를 양방향적 시스템으로 규정한다. “종속적 경험 영역에서의 삶에는 지배적 영역의 허구와 어리석음이 각인된다. 그러나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참이다. 즉, 지배적 사회에서의 경험도
식민주의적 페미니즘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맥락에서 특히 유용해졌고, 그에 대한 릴라 아부 루고드,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 사바 마무드 같은 저술가들의 비판이 중요해졌다. 왜냐하면 무슬림 여성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테러와의 전쟁’ 뒤에서 그 전쟁을 추동하는 논리가 됐기 때문이다. 부르카
제국주의와 제3세계 성소수자 권리 담론
같은 논리가 성소수자 권리를 둘러싼 담론에도 적용된다. 디파 쿠마르가 말하듯이, “오바마 재임 기간에 자유주의는 제국에 훨씬 깊이 엮이게 됐다.”
유색인 여성
(동성애자와 이성애자) 과 유색인 동성애자 남성 (서유럽, 북유럽, 미국 대도시 거주자들이거나 자신의 모국에서 서유럽 · 북유럽·미국의 자금을 받는 NGO 운동가들) , 그리고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다양한 그들의 백인 동맹자들은 유색인 여성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과 유색인 ‘동성애자’ 남성 (제3세계, 그리고 서유럽과 북유럽과 미국에 있는) 을 유색인 ‘이성애자’ 남성으로부터 구하는 일을 하고 있고, 이는 대규모 산업이 됐다.
제3세계 성소수자들은 억압받는 존재로, ‘해방돼야’ 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이런 담론은 ‘공통된 불만’을 내세워 ‘세계적 성소수자 공동체’라는 담론을 자체적으로 창조했다. 그러나 사실 동일한 박해 경험을 공유하는 세계적 공동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성애자 무슬림 남성은 동성애 혐오적이고 트랜스젠더 혐오적인 자들로 악마화되고, 통제되고 제지돼야 할 ‘그자들’로 묘사된다. 보편적인 성소수자 권리라는 관점을 받아들이라고 각국을 압박하고, 미국을 우세한 지위에 앉히려고 “이슬람국가
조지프 마사드가 “게이 인터내셔널”이라고 부르는 성소수자 권리 옹호 국제 인권단체 네트워크는 무슬림 성소수자들을 그들의 억압적 전통으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가정에 따라 활동한다. 게이 인터내셔널은 국제 언론에 등장하는, 스스로 성소수자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운 좋게 구출된 사람들을 강조하는 전략이다. 2005년 이란 마샤드 시에서 소위 “동성애자” 이란 청년 두 명이 공개 교수형에 처해진 사건을 두고 영국이 본거지인 단체 ‘분노하라!’와 프랑스가 본거지인 단체 아이다호
공개 교수형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이란만이 “동성애자” 혐오 범죄를 벌이는 국가로 비난받아야 할 유일한 국가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왜 하필 이란일까? 왜 하필 그때였을까? 아부 그라이브 감옥에서 학대 사건이 일어났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도, 바그람 감옥에서 유색인이 고문과 강간을 당했을 때도 게이 인터내셔널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렇듯 어떤 몸과 어떤 섹슈얼리티가 ‘보호돼야’ 하는지, 어떤 동성애 혐오 무슬림이 문명화돼야 하는지를 지배적 강대국이 선택한다는 점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범죄를 국제적으로 비난하자”는 동원 호소에는 제국주의적 논리가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이다. 당시 이란이 국제적 비난 대상이 된 것은 조지 W. 부시 정부가 이란을 “악의 축”의 일원으로 지목하고, 동성애자들이 ‘테러와의 전쟁’을 부추긴 무슬림 혐오 논리에 포섭됐기 때문이다.
성소수자 권리에 대한 자유주의적 담론이 이 문명화 사명론의 핵심을 이룬다. 그래서 무슬림 나라들에서 ‘천대’받고 ‘박해’받는 성소수자 청년들을 구출하자고 호소한다. 조지프 마사드가 정확하게 지적하듯이, “바로 게이 인터내셔널 담론 자체가 동성애자가 없는 곳에서 동성애자를 만들어 내고 있고, 게이 인터내셔널의 성적
이런 구세주 사명은 제3세계 나라들의 현지 맥락을 제멋대로 무시하며, 그 나라 정치와는 분리된 운동으로서 ‘성소수자 권리’를 제시한다. 필자는 다른 글에서 오늘날 ‘성소수자 공동체’라고 불리는 것이 남아시아에 오랫동안 존재했음을 주장했다.
급진성을 버린 성소수자 운동 주류 정치
1백 년 전에는 동성애 행위를 범죄화함으로써 우리를 ‘문명화’하려 애쓴 서구가 현재는 애초에 자신들이 범죄로 만든 동성애 행위를 비범죄화함으로써, 그리고 우리를 ‘야만인’으로 만들고 자신들에게 우리를 교정해야 할 책무가 있다고 보면서 우리를 문명화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참으로 얄궂다. 훨씬 더 얄궂은 것도 있다. 바로 미국 국가가 동성결혼 인정을 이용해 제3세계 나라들보다 더 ‘진보적인’ 나라인 척하면서도, 인종차별, 계급차별, 노숙인, 폭력, 건강보험, 교육, 강제추방, 수감자 학대 문제 등 성소수자들에게 긴급한 문제이고 활동가들이 오랫동안 강조해 온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조금치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동성결혼을 인정해 주는 것만큼 득을 가져다 주지 않거나, 그만큼 비용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동성결혼 인정을 하찮게 여기자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동성결혼 인정은 분명 많은 사람들에게 상당히 도움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정치를 지우려 해선 안 된다. 즉, 어떻게 동성결혼이 성소수자 단체 재정의 우선 순위를 차지하게 됐고, 어떻게 동성결혼이 자본주의에 통합됐고, 어떻게 기업들이 성소수자 운동을 가로채어 득을 보는가, 또 어떻게 동성애자 권리 운동의 주류가 인종차별을 나타내며 제국주의에 영합하는가 하는 점들을 깨달아야 한다. 동성결혼의 입법 덕분에 국가는 성소수자의 신체를 제어하고, 성소수자의 섹슈얼리티와 성적 지향을 규제할 수 있게 된다. 또, 권리가 전혀 없는 부류의 성소수자들이 느끼는 분노도 가려진다. 성소수자들이 인종차별적 폭력과 빈곤 때문에 죽어 나가는데도 많은 단체들이 동성결혼 허용과 관련된 활동으로 재정을 돌리기 때문이다.
동성애 권리 운동의 주류는 애플의 최고경영인 팀 쿡 같은 인사들이 값싼 노동력을 착취하고 힐러리 클린턴 같은 정치인들이 스스로를 ‘핑크 워싱’하며 그 이미지를 선거운동에서 판매하는 것을 허용해 왔다. 하지만 그런 운동은 권리가 전혀 없는 부류의 성소수자들의 말을 차용하면서도 그들을 모욕하는 것이다. 동성애 권리 운동의 등장을 낳은 항쟁
성소수자 해방을 위해 싸우는 남아시아 활동가들은 성소수자 권리가 사회의 지배적 구조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님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성소수자 권리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통합된 것과 꼭 마찬가지로, 권리에 대한 이런 접근법은 다른 억압적 구조를 재생산한다. ‘퇴폐적’ 성소수자는 한때 ‘진정한 미국 문화’의 오점으로 여겨졌다. 성소수자들이 매우 많은 자유주의적 프로젝트들을 통해 순치되고 주류로 포섭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제 ‘동성애자’는 미국 문화의 일부로 자리잡았고, 성소수자들은 미국 ‘시민으로 인정’받게 됐다. 국가의 헤게모니에도, 국가가 뒷받침하는 인종차별, 자본주의, 제국주의 같은 억압 구조에도 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성결혼 인정은 감옥/산업 복합체, 국가 헤게모니, 자본주의, 인종차별, 제국주의 폐지 등 훨씬 급진적인 요구를 하던 성소수자들을 순치시키는 데 유용했다. 국가에 의한 동성결혼 입법을 우선순위로 삼는 것은 성소수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당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성애자들처럼 결혼하고 아이를 가져서 행복하게 되는 것밖에 없다.’ 모범적 동성애자인 성소수자, 특히 인종적으로 다양한 아이를 입양해 키우는 백인 도시 아빠들이 애국주의적 프로젝트의 홍보 모델이 된다. 자스비르 푸아르는 처음으로 이런 현상을 ‘동성애자 애국주의’
‘동성애자 애국자’들이 동성결혼에 앞서 매달린 쟁점은 미국의 동성애자 군복무 금지 정책이었다. 이 정책을 폐지해 동성애자들이 미군에 속해 제국주의 정책에 가담할 수 있도록 만들려고 수많은 활동을 벌이고 기업들이 돈을 댔다. 미군은 ‘테러리즘’에 관한 매우 인종차별적 담론을 내세워 유색인들을 강간·고문·살인한 것을 정당화한다. 그런데 동성애자들이 그런 군대의 일원이 되는 것을 통해 ‘애국 시민’이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평등’이란 다른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결혼식이 열리는 식장과 이슬람 교육시설을 폭격할 기회가 있음을 뜻한다. 이런 식의 애국적 단결을 지지하는 상징으로서 무지개 깃발과 성조기가 도처에서
동성애자 애국주의의 가장 끔찍한 형태는 아마도 이스라엘
이런 비판을 하는 것은 남아시아 성소수자들이 수십 년 동안 증오 범죄와 국가 탄압에 시달린 경험을 낮추보거나 지우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콰자-시라, 히즈라, 스스로 성소수자라고 규정하는 사람들이 겪는 괴롭힘, 비난, 경제적 불이익, 성매매 납치, 성폭력, 살해 위협은 매우 실질적이다. 그러나 남아시아 성소수자 운동가들은 현지 상황에 맞지 않는 관점에 현실을 꿰어 맞추거나 동성애자 제국주의를 미화하는 것이 오히려 현지 운동에 해를 끼칠 뿐이라는 점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에릭 포슈너는 오늘날의 인권 모델을 상세하게 비판한 논문에서,
무지개 산업이 세계화하고 성소수자 권리를 둘러싼 논쟁이 제3세계 나라들에서 더 많아지면서 주류 성소수자 활동가들, 그들과 동맹을 맺은 남아시아의 활동가들은 성소수자 권리에 대한 친기업적 접근법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 방식은 성소수자 권리 문제를 계급, 카스트, 인종, 종파, 국적 문제와 동떨어진 예외적인 운동으로 묘사한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인도의 한 여성이 일간지에 동성애자 사위를 구한다는 광고를 내면서 특정 카스트를 선호한다고 명시한 것이나,
이런 친기업화는 성소수자 해방이라는 정치적 대의를 ‘소수자 권리’ 보장 문제로 바꿔치기하고, 이는 특권층만 이롭게 할 뿐이다. 이제 성소수자 권리 담론은 성소수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계급 불평등, 성차별, 카스트, 인종차별 같은 문제들과 동떨어진 것인 양 통속화된다. 남아시아 성소수자 운동은 예컨대 동성결혼 같은 쟁점에 집중하기보다는 더 급진적인 방향으로 전환해야 하고, 각종 억압 구조들이 서로 연관된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성소수자 해방 운동과 국제 연대는 식민주의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 과정은 모든 형태의 구조적 사회 폭력에 성소수자들이 집단으로 반대하고 나서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해방은 모든 사람이 해방될 때만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