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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노조의 “내국인 고용” 요구가 일자리와 임금을 지키는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

6월 20~21일 건설노조의 토목건축 조합원 1만여 명이 서울로 모여 집회를 열었다. 토목건축 노동자들이 이렇게 대규모로 모인 것은 최초의 일이다. 지난 2~3년 동안 이 분야의 조합원 규모가 무려 5배(1만 5천 명)로 성장했다.

건설노조 토목건축분과는 이렇게 성장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전국의 건설업체들을 상대로 중앙교섭을 요구하고 있다. 핵심 요구는 조합원 우선 고용, 임금 인상, 유급 휴일 확대, 연차 수당 지급 등이다.

건설노조가 중앙교섭을 통해 지역마다 제각각인 임금과 노동조건을 균일하게 개선하려는 것이 사용자들에게는 불리한 일이므로 사용자들은 교섭에 싸늘한 반응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서울에 모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날 건설노조는 “건설현장 불법 근절, 내국인을 고용하라”는 요구를 주요하게 내걸었다. 건설사들의 불법 도급 문제가 심각한데, 사용자들이 이를 통해 “외국인력을 불법고용”함으로써 내국인 노동자를 “철저하게 배제”해 “역차별”한다고 규탄했다. ‘불법 도급 반대’가 ‘이주노동자 고용 반대’로 뒤틀려 버린 것이다.

이주노동자 배척은 내국인 노동자들에게도 해롭다 6월 20일 건설노조 토목건축 조합원 상경집회 ⓒ출처 건설노조

일자리 경쟁

사용자들이 이주노동자들을 열악한 처우로 고용하고, 이를 지렛대로 다른 노동자들 처지도 악화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건설 노동자 상당수가 “내국인 고용 보장” 주장에 공감할 수 있다. 일감의 양에 따라 고용이 극심하게 변동하고 저임금에 시달려 온 일용직 노동자들은 이 주장이 자신들의 심정을 대변한다.

그렇다고 건설노조가 “내국인 고용”을 저임금과 고용 불안을 해결하는 대안으로 요구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이 요구는 이주노동자가 아니라 내국인을 고용하라는 것이므로, 당연히 이주노동자 취업을 제한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선, 이주노동자는 불법 도급으로 고용되는 건설 노동자의 일부일 뿐이다. 국내 건설업 취업자 1백80만 명 중 상당수가 다단계 도급으로 고용된다. 건설산업연구원의 “불법 고용” 이주노동자 추정치는 24만여 명으로, 이는 내국인 취업자의 13.3퍼센트 정도다. 따라서 이주노동자들의 고용을 막는다고 불법 도급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불법 도급 반대 주장은 불법 도급으로 고용된 노동자(내국인이든 이주노동자든)를 내치자는 요구로까지 연결돼서는 안 된다. 오히려 건설노조가 “불법 고용”된 내국인과 이주노동자 모두의 처지 개선을 함께 요구하며 싸우려 애써야 한다.

둘째, 건설노조가 ‘불법’ 이주노동자를 몰아내려 해도 이주노동자 상당수를 내쫓는 것은 가능치 않다.

그래서 지난 몇 년 동안 몇몇 지역의 건설 현장에서 건설노조 지역 간부들이 주도해 “불법 고용”된 이주노동자의 현장 출입을 막아 얻어 낸 ‘성과’는 일부 건설 현장에 수십 명 수준의 조합원팀 고용을 얻어 낸 정도였다. 그나마도 이 효과는 해당 건설 현장의 공사 기간 동안에만 일시적으로 유지될 뿐이다. 새로운 건설 현장이 들어서면 또 이 일을 반복해야 한다.

건설노조 대경지부는 한때 현장에서 ‘불법’ 이주노동자를 내쫓는 사업에 힘을 쏟았지만, 결국 이것이 가능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중단했다. 그리고 이주노동자를 노조로 조직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이주노동자들은 건설노조가 ‘뜨면’ 잠시 숨거나 자리를 피했다가 다시 돌아와 일하기 때문에 노조의 힘으로 이들을 내쫓기는 가능치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건설노조는 더 나아가 ‘불법’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는 사용자들을 정부가 강력히 처벌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문재인이 후보 시절 건설노조의 “불법 고용 근절” 요구에 찬성을 표명한 것에 대한 기대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단속을 강화한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정부 단속이 강화되면 이주노동자들은 일시적으로 건설업을 떠날 수도 있지만, 결국 일자리를 찾아 한층 더 열악해진 조건을 감내하며 건설 현장으로 유입될 것이다.

게다가 정부는 건설업 사용자들의 요구 때문에 합법이든 ‘불법’이든 이주노동자를 대폭 줄이려 할 리가 없다. 2003년 노무현 정부 때 시작된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 추방 정책으로 매년 2만 명 이상이 추방되지만, 미등록 이주노동자 수는 점차 증가해 20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한국의 미등록 이주민 수와 건설노조가 추정하는 건설 분야의 미등록 이주노동자 수가 얼추 비슷한 것을 보면, 건설노조의 통계가 다소 과장된 듯하다. 건설업 이주노동자 숫자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셋째, 건설노조가 “내국인 고용”을 위해 이주노동자를 배척하고 정부에게 단속 강화, 사용자 처벌 강화를 요구하는 것은 내국인 노동자들에게도 해롭다.

그럴수록 이주노동자들은 열악한 조건을 감수하더라도 더욱 더 사용자에게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용자들은 노동자 간 격차를 이용해 노동자 간 분열을 더 부추길 것이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임금과 일자리 모두 더 열악하게 만드는 압력이 더 커질 것이다.

1980년대 미국에서 시행된 ‘불법 고용’ 사용자 처벌 강화 사례도 이를 잘 보여 준다. 사용자 처벌 강화는 이주노동자를 줄인 게 아니라 사용주들이 위험 부담을 이주노동자에게 전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더 열악해진 이주노동자들의 처지는 결국 노동자 전체의 조건을 악화시키는 압력을 키웠다.

한국에서도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이 강화된 이래 사용자들은 이주노동자들에게 불리한 처지를 강요하는 일이 늘어났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은 단속 위협 때문에 이에 맞서기 더 어려워졌다.

인종차별이 심한 미국의 주들에서는 흑인 노동자뿐 아니라 백인 노동자의 처지도 다른 주들보다 더 열악했다. 인종차별이 강할수록 백인 노동자와 흑인 노동자의 단결이 약화됐기 때문이다.

종합하면, ‘불법’ 이주노동자 일부를 내쫓아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매우 일시적이고, 결국에는 전체 건설 노동자들이 더 큰 손해를 입는다. 따라서 이주노동자 배척은 매우 근시안적인 대처다.

이주노동자는 노동계급의 일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에서는 경제 사정에 따라 고용이 늘었다 줄었다 하는 일이 계속된다.

자본가들은 언제든 변덕스러운 시장 상황에 따라 노동력을 늘리고 줄이기 위해 마르크스가 ‘산업예비군’이라고 지칭한 노동자 집단이 필요하다. 사장들은 경제 호황 동안에는 빠르게 산업예비군을 고용해 다른 노동자들과 경쟁하게 만들 수 있고, 경제가 나쁜 시기 동안에는 언제든 일자리를 대체할 사람이 있다고 협박해 임금을 낮출 수 있다.

이처럼 일자리 문제는 일자리보다 노동자가 너무 많아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다. 사용자들의 무계획적 이윤 경쟁 때문에 상당수의 노동자들이 과잉 인구로 취급받아 발생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과잉 노동인구”는 “자본주의적 토대 위에서 부의 발전의 필연적인 산물”이자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생존조건”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일자리 경쟁을 어쩔 수 없는 일로 그냥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노동자들이 하나로 뭉쳐 단결할 능력이 있는지가 결정적인 문제가 된다.

사용자들이 이주노동자 등 노동시장에 새로 유입된 노동자들에게 형편 없는 조건과 임금을 강요하는 것에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반대해 싸운다면, 사용자들이 이를 언제나 관철할 수는 없을 것이고, 이런 차별을 근거로 다른 노동자들의 조건을 압박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두 달 전, 과천의 한 현장에서 이주노동자 임금 체불에 항의해 건설노조 경기중서부지부 활동가들이 현장 노동자들을 규합해 반나절 작업 거부를 벌여 체불 임금을 받아 내고 조합원들의 요구까지 얻어 낸 것은 작지만 소중한 경험이다.

이주노동자들도 사용자들의 차별과 횡포를 항상 수용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2010년 인천 신항 컨테이너 부두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베트남 노동자 2백여 명은 극도로 열악한 처우에 분개해 4일 동안 파업을 벌여 양보를 얻어 냈다. 뿐만 아니라 20여 년 전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은 미등록 조건에서도 내국인들과 연대해 산재 적용과 체불임금 청구 등 중요한 노동 권리들을 쟁취했다.

활동가들의 구실

내국인 노동자든, 이주노동자든 투쟁을 통해 더 나은 권리를 쟁취할 수 있다. 노동자들 사이에 차이와 차별이 있고 이 탓에 분열 압력이 있어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처지 개선을 위해 단결할 잠재력이 있다. 국제 노동운동은 이를 거듭 보여 줬다.

그런데 단결이 자연스레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중요하다. 다른 나라 출신 노동자들을 배척하는 편과 연대하려는 편 사이에는 언제나 치열한 논쟁과 투쟁이 있었다. 1930년대 흑인 차별이 끔찍하던 미국 노동운동에서도, 제2차 세계 대전 말미 영국 광산에 폴란드 노동자들이 유입됐을 때도 그랬다. 이때 사회주의자들과 투쟁적 활동가들은 노동계급 내 인종 간 단결을 추구해 중요한 정치적 성과를 거뒀다.

2008년 세계적 위기 속에서 영국 건설 노동자들이 “영국인의 일자리는 영국인에게”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을 때도, 사회주의자들과 좌파들이 우호적으로 개입해 이 요구를 내리도록 설득할 수 있었고, 결국 노동자 파업은 승리를 거뒀다.

이처럼 지금도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의식적으로 단결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불과 몇 년 전에도 건설노조에서 대구와 경기 지역에서 일부 활동가들이 이주노동자와 연대를 강화하고 이주노동자를 노조로 조직하기 위해 노력한 경험이 있다.

올해 초 건설노조 대의원대회 때도 이런 시도가 있었다. 건설노조 대의원대회 전에 민주노총과 여러 노동단체들이 건설노조에게 이주노동자 배척을 중단하라고 호소했고, 대의원대회 당일 건설노조 일부 대의원들도 이주노동자를 배척해선 안 된다며 “외국인력 불법고용 근절” 요구를 삭제하자고 제기했다. 적지 않은 동조가 있어 논란 끝에 “외국인력 불법고용 근절”은 “건설현장 불법고용 근절”로 수정됐다. 그런데 지금 건설노조의 주장을 보면 “불법고용 근절”이 가리키는 대상이 이주노동자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장옥기 위원장이 ‘이주노동자 배척은 중단’돼야 한다고 분명히 밝혔던 점에 비추면, 지금 건설노조는 대의원대회 결정의 취지를 사실상 무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건설노조 활동가들은 이를 비판하며 개입해야 한다.

한편 건설노조 내 일부 좌파가 “불법고용 반대”에 동조하고 나선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런 부적절한 타협이 건설노조에서 이주노동자 배척 주장이 강화되게 만들었다는 점을 뼈아프게 돌아봐야 한다. 좌파 활동가들은 노동계급의 단결을 어디 구석에 추상적 원칙으로 버려둘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의 실천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