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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1백 주년 연재 25:
7월 사태 - 위기에 처한 러시아 혁명과 시험대에 오른 볼셰비키

1917년 2월에 러시아 노동자와 병사들은 전쟁을 끝내고, 완전히 다른 사회를 쟁취하고자 혁명에 나섰다.

그러나 2월 혁명 이후 몇 개월이 지나도록 변한 것이 없었다. 이 때문에 차르를 대신해 들어선 임시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져 갔다.

병사들은 여전히 전선에서 죽어가고 있었고 노동자들은 굶주림과 실업에 시달렸다. 토지도 여전히 농민들에게 재분배되지 않았다.

1917년 7월 4일(신력으로는 7월 17일), 페트로그라드에서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병사들이 시위대에 발포한 직후의 상황

볼셰비키는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할 것을, 농민들에게는 토지를 장악할 것을 호소했다. 볼셰비키는 전쟁의 종식과 소비에트(혁명 직후 세워진 노동자평의회)로의 권력 이양을 요구했다.

임시정부에 대한 분노가 커져가면서 볼셰비키의 이런 주장이 힘을 얻었다. 특히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가장 급속히 호응을 얻었다.

역사가 수하노프는 페트로그라드의 분위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대중의 분노가 커져가면서 결정적 행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나날이 늘고 있었다. … 페트로그라드는 무언가 폭발하기 일보직전 같았다.”

6월 18일에 임시정부는 사람들의 불만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관제 시위를 소집했다.

그러나 수많은 노동자와 병사들은 볼셰비키의 배너를 손에 들고 나타났다. “자본가 장관 10명은 물러나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7월 3일(제정 러시아의 달력 기준, 오늘날 달력으로는 7월 16일)에 제1기관총연대가 임시정부에 항의하는 무장시위를 호소했다.

5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7월 3일과 4일에 페트로그라드에서 벌어진 시위에 참가했다. 이 시위는 7월 사태라고 불린다.

[소비에트 기관지] 〈이즈베스티야〉는 시위대들이 “완전 무장한 채 소비에트로 권력을 이양하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수하노프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곳에서 생산 활동이 멈췄다.

“막사에서 짧은 집회를 연 다음 무장한 분견대가 대대적으로 도시 중심부로 향했다.

“도시는 정말로 빠르게 2월 혁명 당시 결전의 날들과 같은 모습을 띠었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봉기가 실패할 거라고 봤기 때문에 국가 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에 반대했다. 트로츠키가 나중에 서술한 바대로 “권력을 잡는다는 것이 아직은 가능하지 않았다. 지방은 수도 페트로그라드에 비해 아직 상당히 많이 뒤쳐져 있었다.”

7월 사태는 이런 진단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역사가 다이안 켄커에 따르면, 모스크바에서는 시위가 “비무장 볼셰비키들의 소규모 행진으로 벌어졌으며, 많은 지역민들의 비웃음을 샀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거리로 나선 노동자, 병사들과 함께해야만 했다. 그랬기 때문에 볼셰비키 지도부는 시위대에게 평화적으로 행동할 것을 호소했다.

볼셰비키 정당에는 젊고 상대적으로 경험 없는 신입 당원들이 가득했다. 많은 사람들이 봉기를 원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에서의 영향력을 이용해 노력 끝에 노동자·병사들이 [성급한] 시위를 끝내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7월 시위는 임시정부의 분열을 부채질했지만 주되게는 우파들의 포악한 공세를 낳았다.

전쟁장관이었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는 볼셰비키 지도부를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볼셰비키 기관지 〈프라우다〉 편집실은 습격 당했고 신문은 폐간됐다. 볼셰비키들은 독일 첩자로 몰려 지하로 숨을 수밖에 없었다.

7월의 불가피했던 퇴각의 결과로 우파들이 일시적으로 힘을 얻었다. 그러나 만약 퇴각하지 않았더라면 즉, 때 이른 봉기를 밀어붙였더라면 혁명은 피의 강물에 빠져 죽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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