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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와의 대화

〈다함께〉가 박노자와 얘기를 나눴다. 그는 인터뷰어를 “동지”라고 부르며 반갑게 맞이하면서 언제나 그렇듯이 명료하고 해박하게 자기 견해를 밝혔다. 지면 제약상 우리는 그가 러시아, 한국 민중사학, 불교에 대해 얘기한 것을 다음번 적당한 기회에 실으려 한다. ( ) 속의 말은 박노자 자신의 첨언이고 [ ] 속의 말은 편집자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인 말이다. 인터뷰 정리를 함께 한 한규한 기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 최근 황우석 사태에서 한국 사회의 민족주의 열풍이 대단했는데, 이런 현상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황우석 사건은 한국 사회를 공부할 수 있는 일종의 압축 교과서 같아요. 한 가지 측면은 과학, 그것도 서울대학교 엘리트 과학의 산업화·기업화·자본화입니다. 과학이 일종의 투자처가 됐고 그것도 과학자 본인이 나서서 특허를 많이 내고 나중에는 자기 병원을 차리고, 난치병 치료를 하나의 수출산업으로 키우려는 발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국가와 그 밖의 여러 곳에서 투자를 끌어들였는데 투자자에게 성과를 보여 줘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장 성과가 나지 않자 기업계에서 엔론이 사용한 방법으로 가상의 성과를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신자유주의적인 사기극의 대표적인 사례로 엔론을 드는데 황우석 사태와 비슷한 배경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과학이 투자처가 돼 이윤창출의 원천이 되면 그런 과학에 윤리 같은 것이 있을 수 없잖아요.

황우석이 자기 연구원에게 난자 제공을 강제하다시피 했다든가 하는 비윤리성도 그 과학이 자본주의적 본질과 연결돼 있다는 것을 보여 주죠. 그러니까, 투자자들 앞에서는 빨리빨리 이윤을 낼 거라는 걸 보여 줘야 하니까 난자 제공을 누가 어떻게 하는가는 문제 되지 않고, 결국에는 연구원에 대한 착취라든가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라는 성격을 가진 난자 매매 같은 것을 저질렀잖아요?

그런데 사회에선 놀랍게도 이에 대한 반감이 없었던 건데, 정계와의 유착이라든가 기업적인 행각이 알려져도 사회가 무감각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민족주의 열풍이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자본 쪽의 언론들에 의해서 민족 영웅이 돼 거의 불가침의 위치에 올라가 있었던 것입니다. 민족주의가 하나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사회에서는 민족 영웅에 대한 이성적인 비판이 거의 불가능해요.

예컨대 김구 선생 같은 경우에는 독립운동 속에서 좌파와의 관계가 매우 복잡했습니다. 실제로 좌파를 대상으로 테러를 저질렀다는 주장도 있고 해방공간에서 한 행동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해가 있을 수 있는데, 김구는 거의 학술적인 접근이 불가능할 만큼 이미 영웅화돼 있지 않습니까?

황우석이 사실 이순신, 김구와 같은 대열에 올라가 있었고 이성적인 접근이 불가능한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황우석의 이윤추구적인 행각, 과학을 자본화한 행각, 그리고 바이오산업을 우리를 먹여살리는 산업으로 키우겠다는, 이건희와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재벌과 정계와 함께 바이오산업 육성론을 부르짖은 행각 ― 바이오산업 육성론이라는 게 사실 의료자본화·의료기업화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민중한테는 대단한 해악을 가져다줄 거에요 ― 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게 민족주의의 연막이 있었던 덕분인 것 같아요.

- 선생께서는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북한의 민족주의 형성에 대해 설명하셨는데, 그것에 대해 얘기해 주시죠.

김일성 일파는 아주 오랜 내부 투쟁 과정을 통해 핵심 세력으로 부상했는데, 그가 좌파적인 반제국주의 민족투쟁을 한 후예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집권 과정, 그러니까 그들이 지배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던 데에는 소련, 즉 새로운 형태의 국가자본주의인 제국주의 세력의 도움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이 북한이라는 국민국가, 국가자본주의적인 국민국가를 만드는 데서 ‘주체’에 대한 모든 데마고기와 무관하게 소련과 중국의 지원이 거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 등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결국에는 [북한] 내부의 좌파적 민족주의 세력들과 외부의 소련·중국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김일성과 그 일파의 이데올로기 형성 과정을 추적하기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만주에서의 해방투쟁에 대한 문서도 실제 많이 남아 있지 않고,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어디까지나 차후에 쓴 것이고 사후에 소급해서 해석한 부분이 많습니다.

그 회고록이나 남아있는 문서들 ― 중국측 문서라든가 중국 공산당의 문서 ― 을 보더라도 김일성이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적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었고 어릴 때는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한 구한말의 국민주의적인, 일종의 구국주의적인 부국강병론적 민족주의를 체득한 사람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자란 분위기 자체는 이북의 기독교적 민족주의자들의 분위기라고 볼 수 있는 것 같고요. 만주로 이주한 뒤에도 그 주위에는 민족주의자들이 포진해 있었고 그 자신도 민족주의자들, 전투적인 부국강병론자들, 무장 독립운동가들이 만든 중학교에 다니기도 한 것이지요. 그 회고록을 보면, 예컨대 안창호의 강연에 가서 감명을 받았다는 이야기라든가 하는 것을 볼 수 있구요.

사실 이미 그 때 김일성에게는 공산주의에 대해 일종의 ‘동도서기론적’ 입장이 생긴 것 같습니다. 동도서기론은 아시다시피 동도, 즉 유교를 지배 이념으로 하되 서양의 기술을 이용하자는, 그러니까 서양 세력에 대한 조선이나 중국 지배계급 일부의 태도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지배 구조를 그대로 두되 서구 기술을 이용하자는 말이죠. 김일성은 공산주의에 대해 바로 그렇게 도구주의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라는 운동 방법을 이용해서 우리 나라를 왜놈으로부터 해방해 우리 국권을 회복하자든가 민족(국민)국가를 만들자는 주장이죠. 말하자면 공산주의는 하나의 도구가 됐고 그 목적은 바로 국민국가 건설인 것이 민족주의자 김일성의 출발점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가 중국에서 연대한 수많은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의 세계관과 다르지 않고 상당히 흡사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이 실제로 무장 독립운동을 하던 1930년대에 소련 같은 사회는 이미 국가자본주의 사회로 재편됐는데, 김일성도 결국에는 그것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일성이 소련으로 넘어가 거기 군대에서 약 5년 동안 복무하는데, 그 동안 철저하게 스탈린주의 사회의 군사규율을 몸에 익힌 거죠. 바로 그런 병영사회, 그런 병영밖에는 그 자신이 소련에서 본 것이 별로 없어요. 그런 병영사회야말로 일본과 독일이라는 무적의 외세를 꺾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무적 황군이 우리 나라를 짓밟고 있는데 바로 소련이라는 더 강력한 군대, 군사세력이 일본을 물리칠 수 있다는 그 믿음이 결국에는 맞는 것으로 판결난 것 아닙니까. 소련이 일본을 이길 때요. 그래서 김일성이 그런 규율주의적인 병영생활을 이상화하게 됐죠.

조선으로 다시 와서 소련이라는 외세를 등에 업고 처음에 조만식 세력을 퇴출시키고, 그 다음에 여러 정파들과의 경쟁 과정에서 그들을 퇴출시켜 나가면서 김일성은 결국 초강성 중앙집권적 민족(국민)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그런데 민족(국민)국가 건설이 초기의 목표였음에도 자원이 없고 기술력이 없고 자본이 없는 북한 같은 경우에는 외부세력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이죠. 그러니까, 결국에는 그가 외부세력으로부터 상대적인 독립은 얻었지만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일종의 묘한 외교, 그러니까 아주 높은 수준의 외교정책을 펼치면서 양쪽과 어느 정도는 종속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자주성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군사기술이나 경제 면에서 종속 관계가 심했는데 결국에는 소련이 망한 후에 북한 경제가 하락일로의 길로 접어든 것이 바로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소련의 에너지 지원이라든가 비료 지원, 기계부품 지원 없이는 북한 경제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게 북한이 주장하는 자주성이 본질적으로 신화임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남한 좌파는 북한 탈북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탈북자들의 계급적인 성분을 보면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는데, 극소수는 황장엽이 대표하는 고관현작[고위 관료]들입니다. 그들은 북한의 국가자본주의가 결국에는 망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재빨리 남한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된 사람들이죠. 자신의 지위를 보존하기 위해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는 체제를 버리고 더 가능성이 많아 보이는 자본주의적 국가로 갔다는 것이죠. 그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남한 사회에 편입이 잘 되죠. 황장엽처럼 북한에서 교수를 했다든가 노동당 관료를 했다든가 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와서도 거의 남한 사회의 중간계급에 속할 수 있는 통로가 어느 정도 열려 있죠.

대다수 탈북자는 북한의 피지배층이었다가 여기[남한] 로 흘러 들어오는 사람들인데, 북한에서 피지배층이었던 이들은 여기에서는 단지 피지배층·피압박층 정도가 아니라 가장 소외된, 가장 주변적인 계층으로 편입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런 피지배층 중심의 탈북자 같은 경우 남한 사람들하고는 친교를 맺거나 결혼하거나 하는 일은 보기 어려워요. 대개 탈북자들끼리 결혼하는 통혼권을 이루더라고요.

남한 사회와 통할 수 있는 통로는 교회 조직이 제일 강한 통로인데, 교회 조직에서 그들에게 물질적인 시혜를 베풀고 그들을 종속시키는, 그러니까 여러 가지로 그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교회와 우익에 종속시키는 것 같습니다. 교회말고는 남한이라는 계급사회에서 그들이 의존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죠.

그들이 남한에서는 하층, 그 중에서도 가장 주변적인 계층으로 몰리게 되는 것인데, 피지배층의 이익을 표방하고 그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려는 좌파 세력이라면 탈북자들과 연대하는 방법을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농민·노동자 중심의 탈북자들이 하는 이야기가 안기부가 시킨 이야기, 자기 몸값을 높이려는 이야기라는 요소가 없지 않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담론을 모두 무조건 그걸로만 치부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계급적 배경과 그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연결시켜서 북한 정권에 대한 피지배민들의 태도나 체제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이해하는 게 더 나은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 ‘진보적’ 연구자들 사이에서 탈북자 이야기 자체를 자료로 삼지 않으려는 태도나 정치 좌파의 태도는 결국에는 같은 피지배민, 같은 하층민들에 대한 엘리트주의적인 차별로 보일 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남한의 민족주의적 좌파의 경우에는 우리가 많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지배계급으로 편입될 수 있는 통로도 열려 있고, 변절하고 나서 국회의원이 됐다든가 아니면 다른 주류세력으로 편입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들이 탈북자들에 대해서 보이는 태도는 잘못하면 거의 피지배민을 괄시하는 엘리트주의로 보일 여지가 있죠.

좌파적 민족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몰계급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계급의 담론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이라는 담론으로 세상을 재단하니 결국에는 그런 몰계급적인 의식이 탈북자에 대한 괄시로 이어지는 부분도 있어 보입니다.

- 한국의 아류제국주의와 인종차별의 관계에 대해 말씀을 하신 바 있는데, 이에 대해 좀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한국에 대해 생각할 때 아직 습관적으로 한국을 피압박 민족, 분단체제 속에서 제국주의에 희생된 나라로 보는 의견이 강한데, 특히 민족주의자들한테는 그게 거의 훈습이 돼 있는 거죠.

그런데, 오늘 발표된 바에 의하면, 중국사회과학원이 한국의 국력을 세계 9위로 본 것 아닙니까? 물론 중국 자국을 6위로 보고, 일본을 8위로 본 것 같은데요. 중국 과학자들의 주관적인 견해이고 어디까지나 중국의 정치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중국이라는 일종의 제국주의, 지역 패권세력들이 더는 한국을 단순히 무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한테는 이미 한국 자본이 단순히 종속된 국가, 조공 국가의 자그마한 지배세력이 아닌 거의 동등한 파트너, 경쟁자로 보이는 거죠. 중국이 6위가 되고 한국이 9위가 되는 것은 원래 중국 과학자들이 자기들을 중심에 두지만 한국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한국 자본이 나름으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오늘 다른 소식이 있었는데, 노무현 정권이 해외투자 금액 한도를 풀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일부분 풀었고 나중에는 한도를 아예 없애겠다고 하는데, 예컨대 해외에서 주거지를 구매한다든가 또는 해외 개인투자를 한다든가 하면 한도가 약 1천만 달러까지 늘려지는 거구요.

이건 두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죠. 하나는 세계 주변부에 대한 한국 자본가 그리고 한국 상류층의 금융적인 착취 행위를 노무현 정권에서 장려한다고 볼 수 있는 거죠. 왜냐하면 만약 개인투자를 인도나 중국, 브라질 같은 데서 한다면 그게 저쪽의 저임금 노동력을 투자를 통해 착취하겠다는 얘기가 되는 거구요.

또 한 가지 의미가 뭐냐 하면, 한국에서 예컨대 계급투쟁이 첨예해지거나 이윤 마진이 낮아질 때 한국 자본이 그만큼 중심부 쪽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얘기가 되죠. 그러니까 한국 자본의 국제 이동성을 지금 신자유주의 정권이 높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 이야기로 보면, 이미 한국이 단순히 분단체제에 묶인 주변부 세력이라고 보기가 힘든 거죠. 이미 한국은 세계적으로 자본수출국이 된 것이고, 물론 중심부 세력의 자본한테서 계속 침탈당하고 상당 부분의 시장을 빼앗기고 있지만, 주변부로 나아가서는 착취 행각을 마음껏 벌일 수 있는 것도 한국 자본이에요. 한국 자본에 고용된 외국 노동자들이 중국·베트남·인도네시아 현지에 가면 무수히 많아요.

그런 걸로 봐서 한국 자본의 위치는 세계체제에서 중간급으로 볼 수 있는 것인데, 우리가 반자본 투쟁을 할 때 더는 민족 자본과 민족적 연대를 하자고 얘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자본에 희생되는 주변부 노동자들이 무엇이 되는 겁니까?

- 《우승열패의 신화》에서 선생께서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말씀하셨는데,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해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사회주의를 말할 때 소련이나 중국 등 국가자본주의가 자꾸 연상됩니다.

그 국가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라면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 즉 직접생산자들의 통제, 생산수단에 대한 민주적 운영이 전혀 되지 않은 것이죠. 직접생산자들이 결국 국가에 직접 고용돼 월급을 받고, 생산과정에 대한 결정권이 완전히 박탈당하고 있고, 결국에는 국가라는 거대 기업의 임금노동자, 그것도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임금노동자로 살았습니다. 이것이 그런 사회의 가장 큰 맹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는 마르크스가 얘기한 자유로운 직접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 즉 직접생산자들이 생산수단을 환경과 사회를 의식해서 직접 운영할 수 있고 이윤을 배제할 수 있는 그런 사회입니다.

예컨대 주식시장의 기능을 단계적으로 축소해 결국은 폐지해 버리고, 그리고 생산수단의 발전을 사회가 민주적으로 결정해서 계획적으로 이끌어가고, 작업장마다 작업 과정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직접생산자들의 회의, 협회, 그리고 민주적인 조율 과정을 통해 의견이 수렴돼 결정되는 사회는 인간이 살 만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해서 민주적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입니다.

- 민주노동당 내에서는 민주노동당이 사회주의적 성격을 탈색해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 수준의 당으로 변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또, 당이 노동계급 중심성에서 벗어나 광범한 계급·계층을 모두 끌어들이는 ‘국민정당’화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또, 곧 있을 당직선거와 관련해서도 한 말씀해 주세요.

사회주의 강령을 진보적 민주주의 강령으로 바꾸자거나 당을 노동계급 정당에서 국민 정당으로 바꾸자는 것은 한때 전투적인 민주주의자였던 노무현이 신자유주의자가 됐듯이 한때 사회주의자였던 민주노동당 일부 세력이 지금 노무현 대통령 같은 수준으로 전락하려는 것이죠.

한국과 같은 극단적인 양극화와 극단적인 억압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아무리 진보적인 민주주의를 들먹여봐야 그런 문제가 전혀 해소되지 않습니다. 지금 대기업은 이미 정규직을 안 쓰기로 하고 있고, 지금 있는 사람을 자르지는 않는다고 해도 새로 뽑지는 않아요. 지금의 정규직이 상당 부분 비정규직이 되리라고 봐요. 노동계급 자체를 해체시키려고 노력하는 나라에서는 민주주의만 들고 나와서는, 그러니까 부르주아 민주주주의를 철저하게 관철시킨다는 얘기는 별로 의미가 없어요.

그리고 당의 계급적 성격 문제는 아주 결정적인 부분인데요. 국민 정당, 시민 정당 이야기가 있는데, 그러면 노동자가 아닌 중소기업자, 자영업자 그런 사람을 끌어들이자는 이야기인데, 여기엔 큰 문제가 하나 있어요.

한국의 영세업자들을 보면 대자본에게는 수탈을 당하는 입장이지만, 예컨대 자그마한 구멍가게에서 자기 가족들을 초과착취한다든가, 아르바이트생들 등 최하층의 노동자를 부린다든가 하는 것을 보면 이들은 중간적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들은 대자본 침탈과 수탈의 대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가혹한 착취자이기도 합니다. 사실, 외국인 노동자들의 불평 사항을 보면 자그마한 가내공업 사장에게 임금을 뜯겼다든가 가혹행위를 당했다든가 하는 얘기가 많은데, 가내공장 사장들은 대자본에 비해서는 수탈 희생자들인 데 반해 외국인 노동자들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가혹한 수탈 행위자죠. 그런 사람들까지 민주노동당이 끌어들일 생각입니까?

이건 큰 문제입니다. 지금 한국은 임금노동자가 전체 인구 중에서 65~70퍼센트 됩니다. 이 각계각층의 임금노동자를 중심으로 해서 당을 꾸려 간다 해도 이미 시민 대다수의 이해관계를 표방한다고 볼 수 있는데 굳이 그 성격을 훼손시킨다는 것은 극히 올바르지 못한 판단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저는 당연히 김인식 씨가 꼭 성공적으로 당선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분이 [당직선거에서] 당선돼야 당의 전투적인 성격, 노동계급적 성격이 강화되고 결국 노동계급의 가장 억압받는 부분들, 비정규직 등등의 사람들과 연대가 강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분이 당직을 가져야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올바른 입장을 당이 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같은 경우 당이 아직 비정규직들의 투쟁을 제대로 지원해 오지 못했고 오히려 훼방해 왔다는 것이 슬픈 이야기죠. 그런 분이 당직으로 들어가야 민주노동당이 비정규직노조와 연대해서 기반도 넓히고 전투적 성격도 강화시킬 수가 있는 것인데, 아직 그런 분들의 세력이 많지 않다는 것이 아쉬운 사실입니다.

- 한국 사회의 변화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스웨덴이나 네덜란드 같은 나라의 복지 모델을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생께서는 북유럽 사회의 복지 신화에 대해서도 자주 언급을 하셨는데 이들 사회가 복지 체제를 이룰 수 있던 배경과 최근 변화하고 있는 점들이 있는지요?

스웨덴·노르웨이 같은 데서 복지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 1930년대인데, 그쪽 자본으로서는 대공황을 극복하는 하나의 길이기도 했어요. 대공황기에는 노동계급 혁명의 위협을 거의 현실적으로 실감할 수 있었어요. 노르웨이에도 폭동이 일어나고 그랬거든요. 자본가 계급은 국가자본주의적인 요소를 도입해서 노동자 계급의 전투성을 꺾을 필요도 있었고, 노동계급을 포섭할 필요도 있었죠. 대공황기에 유럽 전역에서 혁명적 분위기가 있었거든요. 혁명을 만회하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죠.

여기서 우리가 배울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자본가 계급의 양보로 복지 체제를 받아내려면 그들이 혁명의 위협을 피부로 느껴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돼야 저쪽이 대대적인 양보를 해서 어느 정도 계급 타협이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다.

1930년대 초반에는 노르웨이 사민당만 해도 아주 전투적이었습니다. 사민당의 당시 목표는 주요 생산수단 국유화였고, 사민당의 상당수 당원들은 그 당시 아직 대체복무제가 확립되지 않았는데 병역거부를 했습니다. ‘착취적 군대에 가지 않겠다, 우리가 계급적인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서 무술을 익힐 수 있지만 압제자들 밑으로는 들어가지 않겠다.’ 그런 전투적인 명분을 내세웠죠. 그 당시 노르웨이 사민당은 혁명세력에 가까운 입장이었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자본세력을 압박할 수 있었어요.

물론 그 압박에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결과가 뒤따랐는데, 일부 부르주아 세력이 극우화하기도 했어요. ‘사민당이 집권하면 나라가 망한다. 공산주의가 된다.’ 이런 위기의식 때문에 극우주의가 상당 부분의 부르주아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습니다. 독일군이 1940년에 노르웨이를 점령했을 때 그 극우세력들이 친독파가 돼서 친독 괴뢰정권을 세웠습니다. 그것이 악명이 자자한 퀴슬링 괴뢰 정권이었습니다. 그 친파쇼 정권은 대기업의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그만큼 노르웨이 부르주아들이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소름끼치는 반대를 하는 경우가 많았죠.

여하튼 복지 체제가 생긴 데엔 그런 배경이 있었고, 또 전후 복구 과정에서는 그 당시 국가자본주의가 세계적으로 유망했고 거기에 편승해서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더 심층화시킨 게 스칸디나비아식 복지 체제죠.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표방한다는 사민주의 정당들이 전국적인 노총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가 있었고, 그만큼의 계급세력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르주아와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체제를 만약 한국에서 만들려면 노동자 조직이 매우 전투적이어야 합니다. 지금 임금 노동자의 69퍼센트가 비정규직인 상황에서는 비정규직이 노조에 대대적으로 가입해야 되고 바로 그런 전투적인 노조가 민주노동당의 기반이 돼야 우리가 자본을 그만큼 압박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죠.

실제 노르웨이나 스웨덴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상당 부분을 막아버렸어요. 노조들이 결사적인 투쟁으로 막아버렸죠. 저희 학교만 해도 정권이 학교를 독립법인화시키려고 했는데, 학생과 교수들이 결사 반대해서 무력화시켰습니다. 적어도 복지 체제라는 성과물을 사수하는 거죠.

물론 자본의 운동을 우리가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국내적으로 자본이 발이 많이 묶여 있다 해도 자본 수출을 얼마든지 할 수 있죠. 사실, 노르웨이·스웨덴 자본은 수출을 많이 합니다. 요즘은 동구라파를 유럽연합에 예속시켰는데, 폴란드, 발트해 연안 공화국들, 체코 등에서 노르웨이·스웨덴 자본이 주된 투자자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에서는 농민들이 전체 인구의 4퍼센트밖에 안 되는데, 대개 부농들이에요. 부자들이죠. 노르웨이는 빈농이 거의 없습니다. 농민이 기업농으로 재편됐는데, 농장마다 발트해 연안 공화국들 출신의 계절노동자가 없는 데가 없어요, 그런데 임금이 굉장히 낮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저임금 노동력 착취를 전문으로 하죠. 그러니까, 이 체제는 대다수의 본국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고 할 수는 있지만, 신자유주의적인 세계 착취 체제에서는 복지의 섬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체제[북유럽 복지국가]의 한계를 얘기하자면 결국 자본이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이 그대로 유지됐고 노조들이 자본가들과의 협상 과정에서 전투성을 점차 잃어버리는 부분이 많았죠. 전투성을 잃었다는 것은 예컨대 신자유주의에 무기력하게 대응한다는 얘기거든요. 점차 자본운동에 밀려서 일부분 약간 약간씩 복지 체제가 후퇴하는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사수한다 하더라도 부분적인 양보들이 이루어져 왔죠.

- 구한말 〈독립신문〉 등 개화파가 사회진화론을 수용하게 되면서 보이는 모순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독립신문〉은 한국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효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산업자본이나 자율성을 가지고 있는 자본가가 아니었고 새로운 유산계급, 특히 일본에 쌀을 수출하는 지주계급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이었는데, 핵심적으로는 외세에 절대적으로 예속돼 있는 지식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세계관은 거의 외세의 사상적인 영향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또 외세와는 아주 가까운 유착 관계에 있었죠. 대다수는 개신교 개종자들이었고, 서재필은 아예 미국 시민이었죠.

그들은 결국 조선도 기독교 열강과 똑같은 열강이 돼서 예컨대 만주에서 중국의 세력을 밀어내서 조선의 이권을 확립하는 등 아류제국주의 세력이라도 됐으면 좋겠다는 그런 상상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민족국가는 바로 일본이나 서구의 제국주의적인 국민국가였고, 다만 현실적으로 조선이 당장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이 그들이 절실히 느끼는 한계였습니다.

그런데 결국에 조선이 합방이라는 식민화가 됐을 때, 제국주의적인 사고방식대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먹는 것이 법칙이라고 믿고 있는 이런 사람들 중 상당수는 민족배패주의에 빠졌습니다. 조선이 어차피 운명적인 약자라고 생각하는 그들은 결국에는 일본인이 돼서 일본 제국의 신민 입장에서 중국 등을 약탈하는 것이 조선 유산세력에게 더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려서 ‘친일파’가 된 거죠.

이광수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그런데 일부 무장 독립운동 세력 같은 경우에는 사회진화론에서 상당 부분 벗어나서 또 다른 대안적 이데올로기를 찾아나섰는데, 그 중 일부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채택하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이동휘 같은 사람이죠. 이동휘는 개화기의 대표적인 사회진화론적 민족주의자였는데, 그 사람은 결국 1917년~18년부터 볼셰비즘을 조선 해방 운동의 방법으로 채택하기에 이른 거죠.

왜냐하면 사회진화론으로 독립운동을 할 만한 부분이 더는 남아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약자의 입장에서는 사회진화론이 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죠. 그러니까 별 다른 쓸모가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