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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이 보여 준 여성해방의 가능성

지금부터 정확히 90년 전인 1917년 3월 8일, 러시아 페트로그라드 여성 노동자들은 전쟁과 굶주림에 분노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줄 빵을 달라”, “전쟁에서 죽어 가는 남편을 돌려보내라”고 외치며 행진했다. 이후 며칠 동안 식량 폭동, 정치 파업, 시위가 도시를 휩쓸었다. 힘과 열정이 응집됐다. 1917년 러시아에서 ‘국제 여성의 날’은 짜르 체제를 붕괴시킨 2월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혁명 전에 여성 노동자들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그들은 남성 노동자들의 절반도 안 되는 임금을 받으며 날마다 13~14시간씩 일했고, 돼지우리 같은 숙소에서 잤다. 러시아는 여성을 끔찍하게 천대하는 사회였다. 아내 구타가 어찌나 만연했는지 부부가 함께 쓰는 침대 위에는 어김없이 채찍이 걸려 있을 정도였다.

러시아 혁명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완전한 양성 평등을 역사적 의제로 제기했다. 레닌은 “여성이 혁명에 얼마나 참여하는가가 혁명의 성패를 좌우한다” 하고 말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끔찍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투쟁의 맨 앞에 섰다. 마침내 1917년 10월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자 러시아 여성의 권리는 당시 어느 서방 자본주의 나라보다 더 신장됐다.

혁명 첫 해에 여성 선거권 완전 보장, 동일노동 동일임금, 전면적인 유급 출산 휴가제 도입을 공포했다. 낙태 합법화로 무료시술이 제공됐다. 부부 중 한 쪽만 원해도 이혼이 가능해졌고 동성애와 간통을 범죄로 다루지 않게 됐다.

러시아에서 배우자 일방의 요구에 의한 즉시 이혼이 가능한 것이 사실이냐는 미국 기자의 질문에 트로츠키는 “아직도 즉시 이혼이 가능하지 않은 나라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하고 반문했다.

그런 정책들은 지금 기준으로도 급진적인 법과 제도들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여성들이 계속 가정에 붙들려 있는 한은 진정한 여성해방은 불가능했다. 여성 억압을 유지하는 전통적 가족 제도의 경제적 토대를 허물어야 했다. 가족 상속권이 폐지됐고 가사노동을 대신하기 위한 분만원, 교육시설, 공동식당, 공동 세탁소 등이 세워졌다.

1919~20년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전체 인구의 90퍼센트가 공공급식을 이용했다. 공동세탁소와 보육시설이 마련된 질 좋은 공공주택은 여성의 생활을 획기적으로 바꿨다.

볼셰비키는 1920년 당시 7퍼센트에 불과한 여성 당원 비율을 늘리고 여성들이 새로운 사회 건설에 더 적극적인 정치적 구실을 하도록 여성부(제노텔)를 신설했다. 이네싸 아르망의 뒤를 이어 제노텔을 이끈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러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여성들이 교육과 사회·정치 생활의 모든 분야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볼셰비키는 여성해방을 비롯한 원대한 포부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4개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 내전과 경제 붕괴로 인한 역경 때문에 원대한 포부와 현실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생겼다.

1928년 스탈린의 반혁명은 자본축적 요구에 노동자들을 종속시키며 민주주의·노동자 통제를 파괴했을 뿐 아니라 여성들이 지난 10년 동안 누린 혁명의 성과를 모두 없애버렸다. 낙태가 불법화되고 이혼이 다시 제재를 받았다. 다시 전통적 가족과 여성상이 찬양됐다.

그러나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혁명은 여성해방의 가능성을 보여 줬다. 또, 진정한 사회변혁과 여성해방이 서로 떨어질 수 없음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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