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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제국주의의 사악한 역사

19세기 말 한줌의 유럽 열강은 자기들끼리 세계를 분할했다. 미국이 그 과정에 뒤늦게 참가했기 때문에 미국의 지배자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벌충하기 위해 신속하게 행동했다. 미국이 첫 번째 목표로 삼았던 것은 중남미였다. 미국의 주요 평론가들은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유럽의 식민지가 됐듯이 남아메리카는 북아메리카의 것이 돼야 한다.’ 즉 그들의 결론은 그 곳이 자신들의 제3세계라는 것이었다.1)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인 1889년 미국 지배자들은 가장 힘이 ‘약한’ 유럽 식민 열강이었던 스페인과 전쟁을 벌였다.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에서는 스페인 지배에 저항하는 민중 반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던 터였다. 당시 미국 대통령 매킨리는 자신들의 개입이 스페인에 맞서는 쿠바의 민중 반란을 지지하기 위한 것인 양 말했다.

그러나 미국이 스페인에 승리한 이후에도 쿠바에 자유는 오지 않았다. 미국은 1959년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쿠바에 계속해서 독재정권들을 세웠다. 미국은 거듭 해병대를 파병해 자국 설탕 회사들의 이윤이 위협당하는 일을 막았다.

쿠바 점령 이후 미국은 제국주의를 향한 길을 밟아 왔다. 마침내 미국은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 최고의 초강대국으로 떠올랐다. 최근만 해도 미국은 나토의 세르비아 폭격을 주도했고, 이라크를 공습했으며, 수단에 미사일을 퍼부었다. 한반도 역시 미국에 의해 1990년대에만 두 차례의 전쟁 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미국은 언제나 이런 공격을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는 말로 치장한다. 그러나 미국은 자신의 이윤과 패권을 위해 전쟁을 일으켜왔을 뿐이다. 20세기 초반 미국의 군사 개입을 주도했던 미군 장교 스메들리 버틀러는 그가 실제로 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한 바 있다.

‘나는 현역 해병대원으로서 34년을 보냈다. 그 시기 동안 나는 대기업과 월 스트리트와 은행가들을 위한 고급 깡패로 내 인생 대부분을 보냈다.’

‘한마디로 나는 자본주의의 해결사였다.’

‘나는 1914년에 미국의 석유 기업을 위해 멕시코가 안전한 곳이 되도록 만드는 데 일조했다. 나는 아이티와 쿠바를 씨티 은행이 수익을 긁어모으기 괜찮은 곳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나는 1909∼1912년에 브라운 브라더스 국제은행을 위해 니카라과에 평화를 확립하는 데 일조했다.’

‘나는 1916년에 미국 설탕 기업을 위해 도미니카 공화국을 흔들었다. 나는 1903년에 미국 과일 회사들을 위해 온두라스를 ‘정상화’하는 데 일조했다.’

미국이 다른 나라에 개입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미국 자본의 이윤을 위해서이다. 한 국가에서라도 자신들의 이윤이 침해당할 처지에 놓이면 미국은 서슴지 않고 무력을 사용해 왔다.

둘째, 미국 자본이 거의 진출해있지 않은 후진 국가라 하더라도 그 국가에서 좌파 정부가 집권하게 된다면 도미노 현상처럼 인근 국가로 파급될 위험이 있다. 바로 그럴 때 미국은 그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그라나다와 같이 인구가 10만 정도밖에 안되는, 지도상에서도 찾기 힘들 정도로 조그만 나라에까지 미국은 침공했다.

셋째, 다른 제국주의 국가가 미국을 배제하고 독자적인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가려 할 때 미국은 특정 나라를 희생양 삼아 군사 행동을 저질러 왔다. 지난해 세르비아에 대한 공습은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힘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북한에 대한 전쟁 위협도 일본과 중국과 러시아를 겨냥한 것이었다.

나는 이 글에서 미 제국주의에 대해서만 언급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 홀로 제국주의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프랑스·독일·소련·중국·일본 등 여러 제국주의 국가들이 있고 그들 역시 모두 악행을 저질러 왔다. 다만 미 제국주의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잔인한 행동을 일삼아 왔다는 점에서 나는 미국을 제국주의자들의 사악한 범죄를 폭로하는 대표 사례로 들추어 내고자 한다.

니카라과

중남미는 미국과 같은 대륙에 속해 있기 때문에 미국의 침략을 가장 많이 당했던 지역이다. 중남미 대부분의 나라들이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 때문에 희생됐다.

니카라과에서 미군은 세 차례에 걸쳐 반미 정부를 전복했고 장기간의 가차없는 탄압 통치를 자행했다. 미국이 두 번째로 반미 정부를 정복한 이후 세워진 소모사 정권은 잔혹한 독재로 유명했다. 그는 야당 인사들을 암살하고 자유주의 언론조차 파괴했으며 게릴라 투쟁을 벌이던 산디니스타 전사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1979년 소모사가 타도되기 직전 그는 산디니스타와 전쟁을 하면서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구아의 민간 거주지역을 폭격해 수만 명을 참살하는 대규모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2) 그의 일가족은 니카라과 산업 대부분의 실질적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 충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았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로즈벨트는 소모사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개새끼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개새끼(Our son of bitch)이다.’

산디니스타가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자 미국은 우익 군사집단인 콘트라 반군을 후원했다. ‘미국이 콘트라에게 지원한 만큼, 아니 그 반의 반만큼이라도 비슷한 자원을 가졌던 게릴라 부대는 없었다. 그 정도의 자원이라면 미국에서라도 산악 지역에서 게릴라 반란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3)

1990년 2월 니카라과에서 자유 선거가 실시되자 우익인 비올레타 차모로는 ‘산디니스타가 계속 집권하면 전쟁은 계속될 것이다.’라는 협박인지 선거 운동인지 모를 말을 해대고 다녔다. 그녀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고립된 니카라과에서 미국은 산디니스타 정부를 제거하고 친미 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다.

과테말라

미국의 군사 개입과 대기업 이윤 사이의 관련은 중미 국가인 과테말라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1944년 과테말라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민족주의적인 정부가 수립됐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미국의 다국적기업인 유나이티드 프루트 사는 200만 제곱 킬로미터가 넘는 과테말라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 회사가 토지의 85퍼센트를 놀리는 동안 인구의 절반 이상이 아주 적은 경작지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아예 경작지를 갖지 못했다.

과테말라 정부는 토지 국유화 강령을 내세웠다. 그것은 유나이티드 프루트 사의 이윤에 커다란 위협이 됐다. 1952년도 CIA의 비망록은 ‘외국의 경제 이해, 특히 유나이티드 프루투 사에 대한 박해’를 포함한 민주 자본주의 정부의 ‘과격한 민족주의적 정책’이 ‘거의 모든 과테말라 국민들로부터 지지나 묵인을 받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4)

CIA는 정부를 전복시키기로 마음먹었다.

1954년 과테말라에서는 미국의 원조를 받은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그 이후 테러가 저질러졌고 과테말라는 지옥과도 같은 상황이 됐다. 쿠데타 이후 2달만에 8천여 명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살해당했다. 학살은 이후에도 끊이지 않았다. 미국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과테말라 정부는 1980년대 초반에도 수만 명의 과테말라 민중들을 도살했다. 그 밖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과 강간을 당했다. 1992년 상반기에만 3백99명이 보안군에 의해 암살당했다. 1990년 9월 어린이 시체 3구가 발견됐는데 모두 귀가 잘리거나 눈알이 빠져있는 상태였다.5)

친미 독재정권의 쿠데타 이후 미국 자본은 과테말라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이윤을 긁어모았다. 미국 의류회사인 필립스-반 호이센 사는 과테말라 노동자들을 선풍기도 없는 폐쇄된 창고에서 하루 16시간씩 일을 시키면서도 고작 2달러밖에 안 되는 임금을 지급했다.

파나마

1981년 파나마의 포퓰리즘 지배자였던 토리호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미국은 파나마에 손을 뻗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그 이후 1983년에 친미 독재 정권인 노리에가가 권력을 잡았다.

미국은 노리에가가 마약 밀매 범죄 조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1972년부터 알고 있었다. 1983년 미국 상원의 한 위원회는 파나마가 마약 자금의 출처이자 마약 밀매의 본산지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노리에가는 미국에게 충실한 독재자였다.

노리에가가 미국에 충성하는 한 그는 아직 이용가치가 있었다. 1986년 미국의 한 마약 단속 책임자는 노리에가가 ‘강력한 반(反)마약 밀매 정책’을 펴고 있다면서 그를 칭찬하기까지 했다. 법무 장관 에드윈 미스는 노리에가의 범죄 행위에 대한 법무성의 조사를 중지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노리에가가 파나마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점하기 위해 미국의 지위를 침범할 듯한 모습을 보이자 미국의 태도는 돌변했다. 노리에가가 독자적이 된다는 것은 미국이 파나마 운하를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 축소된다는 것을 뜻했다. 미국은 갑자기 노리에가를 깡패이며 마약 장사꾼이라고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미국이 폭로한 사실들은 그 동안 미국 자신이 쉬쉬 하면서 감추어오던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제 파나마에 대한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노리에가에 대한 비난 선전을 퍼붓기 시작했다.

처음에 미국이 시도한 군사 쿠데타는 실패했다. 그러자 1989년에는 미군 자신이 직접 파나마로 침공했다. 2만 6천 명의 미군에 의해 약 1만여 명의 파나마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1990년 운하 관리권 이양 시기에 맞춰 다시 부유한 백인 특권층에게로 권력을 이양해놓고 미군은 되돌아갔다.

칠레

미국은 칠레에서 아옌데의 좌파 정부를 전복시켰던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지원했다.

칠레 기업 중 미국 기업이 참여하고 있는 기업은 전체의 61%에 달했다. 칠레의 주요 수출품은 구리이다. 1970년에 총수출액 중 구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75.8%나 됐다. 미국의 양대 구리회사인 아나콘다와 케네코트가 칠레 구리 생산에서 주된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아옌데가 구리 광산을 국유화시킨 것은 미국의 분노를 샀다.

또한 1960년대 말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반미주의가 급속히 인기를 얻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옌데의 당선은 미국에게 큰 위협이 됐다. 미국은 아옌데의 당선으로 잇따라 다른 국가에서도 좌파 정치 세력들이 지지를 얻을까봐 심각하게 걱정했다. 헨리 키신저는 이렇게 말했다. ‘칠레에서 아옌데의 집권은 우리들과 라틴 아메리카의 동맹국들에게 심각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다.’ 선거 직후 미 국무부는 코리 미 대사에게 ‘아옌데가 집권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모든 가능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권위’를 부여했다.

미국은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갖가지 수단을 동원했다. 미국은 세계은행에 압력을 넣어 칠레에 대한 모든 차관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경제 원조와는 달리 미국은 칠레에 대한 군사 원조는 더 늘렸다. 이것은 정부를 취약하게 만들고 우파들이 더 참을 수 없도록 만들어 군사 쿠데타를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CIA 국장이었던 콜비에 따르면 1969년부터 1973년 사이에 CIA는 칠레 좌파를 무너뜨리려는 비밀 활동에 무려 8백만 달러나 사용했다.

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일어나는 동안 미·칠레간에 우니타스 합동 기동 훈련이 실시됐으며, 미 해군함 4척이 칠레 앞바다에 있었다. 만약 군부가 분열돼 내전이 발생하면 바로 개입하는 것이 그 전함들에 부여된 임무였다. 미국은 피노체트의 쿠데타가 성공하도록 도왔을 뿐 아니라 수만 명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한 이 끔찍한 학살자를 계속해서 후원했다.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저질러온 범죄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사실상 라틴 아메리카 국가중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미 제국주의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중남미는 미국의 뒷마당이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일들은 다른 모든 대륙에서도 일어났다.

아프리카 - 앙골라

1974년 포르투갈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파시스트 독재가 타도됐다. 포르투갈 지배자들이 약화된 틈을 타 앙골라에서는 1975년 대중 봉기가 일어났다. 포르투갈 식민 통치자들이 쫓겨났고 민족주의 좌파 정부가 들어섰다. 앙골라의 우익, 특히 요나스 사빔비의 앙골라완전독립민족동맹(UNITA)은 앙골라인민해방군(MPLA) 정부의 전복을 기도했다.

미국은 앙골라에서 좌파가 집권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단호하게 행동할 태세가 돼 있었다. 앙골라 내전 초기부터 CIA는 UNITA에 무기를 제공했다. 1981년에 레이건이 집권하면서 미국 정부는 UNITA 같은 조직들에게 공개적으로 무기를 보내는 것을 금지한 의회 결의안을 폐기했다. 그 결과 앙골라는 20년 동안 유혈 참사에 빠져들었다.

앙골라 내전으로 이미 7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학살당한 사람들의 3분의 2가 어린이였다. UNITA는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주된 수단으로 삼았고 마을의 땅에 지뢰를 묻었다. 그 결과 6만 5천 명의 사람들이 다리가 잘렸다.

아시아 - 인도네시아와 이라크

미국이 자행했던 공작의 가장 끔찍한 사례는 인도네시아였다.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이후 민족주의 성향의 지도자 수카르노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수카르노는 좌파라고 볼 수 없었고 오히려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의 토지개혁을 제압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민족주의 성향은 미국에게 근심거리가 됐다. 당시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50만의 당원을 거느리고 있는 인도네시아 유일의 대중 정당이었고, 소련과 동유럽 등 스탈린주의 국가를 제외하면 세계 최대 규모의 비(非) 집권 공산당이었다. PKI는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카르노는 미국이 보기에 너무 유약하고 좌파들을 탄압하는 데 소심한 인물이었다.

미국은 수카르노를 제거하기 위해 1950년대 말에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미국은 군에 대한 지원, 인도네시아에 대한 경제 원조 삭감을 통해 군부의 불만과 자신감을 부추겼다.

1965년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수하르토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수하르토는 정권을 잡자마자 학살을 자행해 적어도 50만 명의 PKI 당원 및 민간인들을 죽였다. 미 CIA는 수하르토에게 자신들이 파악한 5천여 명의 PKI 당원 명부를 제공했다. 그들이 살해당하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서도…

수하르토는 1975년 미국의 지원 하에 동티모르를 점령해 인도네시아의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수하르토에 대한 서방의 지원이 바로 동티모르의 잔혹한 학살을 낳았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은, 다른 서방 국가들이 안전하게 석유를 공급받으려면 미국의 힘에 의존해야 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부시와 클린턴은 사담 후세인을 독재자라고 비난했지만 오랬동안 미국은 바로 그 독재자를 후원해 왔다. 이전에는, 미국은 이라크의 민족주의자인 카심을 제거하기 위해 사담 후세인을 지원했다.

1979년에 이란의 팔레비 왕정이 타도되고 이슬람 근본주의자인 호메이니가 집권하자 미국은 힘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이란에 대한 장기간의 유혈 낭자한 전쟁을 벌이도록 사담 후세인을 부추겼다. 미국은 사담이 이란 군대와 쿠르드족 민간인들에게 독가스를 사용하는 것을 못 본 척 보아넘겼다.

그러나, 후세인은 미국의 지지에 지나치게 자신만만해지고 거만해져 쿠웨이트를 침공하는 잘못을 범했다. 이것은 국제 원유 가격에 심각한 동요를 일으켰고 이는 서방 지배자들에게는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부시는 이라크에 대한 공습을 명령했다. 미국은 과거와는 태도를 바꿔 후세인을 ‘제2의 히틀러’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미국의 공습으로 1991년 방공호에 몸을 숨기고 있던 바그다드의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크루즈 미사일로 숯덩어리가 됐다. 징집된 십대 이라크 병사들이 사막에서 수천 명씩 학살당했다. 쿠웨이트로부터 바스라 도로를 따라 피난하던 수천 명의 이라크 시민들이 폭격으로 사지가 산산조각났다.

1991년 1차 걸프전과 미국의 경제 제제 결과로 적어도 50만 명의 이라크 어린이가 죽었고 1백만 명이 영양실조에 걸려 있다고 추산된다. 그런데도 UN은 아무런 손도 못 쓰고 있다.

패배도 한다 - 베트남

미국은 1880년대부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서 민족해방 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 군에 재정적 지원을 했다. 그러나 1954년에 결국 프랑스가 패배하고 물러나자 미국은 이번에는 베트남을 자신의 관할권 아래 두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를 물리친 베트남 인민들은 사기 충만해 있었고 투철한 반제국주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평화적으로 선거가 치러진다면 미국의 베트남 지배는 수포로 돌아갈 것이 확실했다.

1965년에 국무부 장관 딘 러스크는 하원 외교위원회에 출석해 동남아시아가 ‘엄청난 전략적 중요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풍부한 천연 자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이 진정으로 두려웠던 것은 베트남에서 좌파 민족주의자가 집권함으로 인해 그 운동이 전염병처럼 인도차이나 반도 전역으로 확산되는 것이었다.

남베트남 정권이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상태에서 미국은 억지로 남베트남 정부를 살려놓은 후 전쟁을 벌였다. 베트남 전쟁은 소위 ‘비둘기파’라고 인식되고 있는 민주당의 로버트 케네디에 의해 이루어졌다.

베트남 민중들은 소련이나 중국의 도움 없이 미국에 맞서는 인민 전쟁을 벌였다. ― 당시 소련은 스탈린이 죽고난 후 권력 이양 문제를 놓고 국내적 문제에 골몰해 있었고, 중국은 원래 국경문제로 베트남과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에 베트남 민중들을 지원하지 않았다.

미국은 압도적인 화력의 우세를 이용해 베트남 인민들을 학살했다. 미국은 네이팜 탄을 민가나 도로에 퍼부어댔고 고엽제를 뿌려댔으며 점령한 마을의 주민들을 몰살시켰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동안 모든 나라가 사용했던 폭탄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폭탄을 베트남에 퍼부었다. 그러나 결국 미국은 전쟁에서 지고 말았다.

베트남 전에서 미국이 패배한 결정적인 이유는, 베트남 민중들이 결연한 자세로 반제 투쟁을 벌였던데 반해 미군 병사들은 자신감이 없었고 부대의 사기와 기강이 무너진 데 있었다. 미국 내 징집 기피자가 수십만 명에 달했다.

미국의 역사가 마릴린 영은 베트남 장군과의 대화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만약 미국이 용병술을 다르게 구사했다면 결과는 달라졌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도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역사는 이미 당신들 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조국을 위해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무엇을 위해 싸운 것이었습니까?’

많은 이들이 미국의 행동들을 보면서 미국은 무적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노엄 촘스키의 책을 읽다보면 이렇게 사악하고 강력한 제국의 행동을 도대체 저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아쉽게도 촘스키는 미국의 실책과 패배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베트남 인민들의 영웅적인 항쟁은 미국을 물리쳤다.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는 전 세계 좌파 활동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미국은 베트남전의 패배로 인해 국제적인 분쟁에 개입하는 데 주춤했으며 사기저하됐다.

미국은 1980년대 말에서야 비로소 베트남 증후군에서 회복해 파나마 침공이나 걸프전같은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저지를 수 있었다.

한국

미 제국주의 문제는 한국의 대중들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미국은 한반도를 분할하고 남한에 이승만 정권을 세웠다. 1950년에는 소련과의 제국주의 전쟁을 위해 한반도를 전쟁터로 삼았다. 미국 폭격기들은 한반도 대부분을 파괴했다.

미국의 장군 오도넬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한반도 거의 전체가 끔찍히도 엉망진창이 돼 버렸다고 말하겠다. 모든 것이 파괴됐다. 서 있다고 할 만한 건물이 없었다.’

미군은 한국전쟁에서 핵폭탄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신무기인 네이팜 탄(소이탄)을 실험했다.

한국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미국은 한국의 모든 독재자들을 후원했으며 전두환의 공수부대가 광주의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을 묵인했다.

주한미군은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사용료도 안 내는 기지를 남한 곳곳에 두고 있다. 되레 주한미군은 전국에 1백여 개의 기지를 두고 한국정부로부터 매년 30억 달러에 이르는 방위분담금을 받는다.

최근 노근리 양민학살, 매향리 사격장 폭탄 투하, 용산 미군기지에서 독극물을 방류한 것, 불평등한 SOFA 문제 등으로 대중들 사이에서 반미 감정이 고조돼 왔다. 그 때문에 현재 미군은 궁지에 몰려 있고 독극물 방류에 대해 형식적인 사과나마 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일본 오키나와에서의 대중적 반미 시위, 푸에르토리코 비에케스 섬의 강력한 사격장 폐쇄 시위 등 국제적 항의 운동에 부딪혀 있다. 강력한 대중 시위만이 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다.

이제 결론을 이야기해 보자

첫째, 민주노동당 학생 당원들은 반미, 반제국주의 투쟁에 관심과 열의를 갖고 참여해야 한다. 다른 PD 학생들처럼 그 문제를 ‘NL 쟁점’으로 치부해 기권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그 동안 미국이 전 세계에서 저질러 온 무력 행동, 한반도 전쟁 위기의 주범, 독재 정권의 후원자, 불평등한 권리 침해 등에 반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최근의 반미 투쟁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다. 만약 그 쟁점을 ‘NL 쟁점’이라고 기피하게 된다면 우리는 중요한 정치 쟁점을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하게 놔두고 대중을 내맡겨두는 꼴이 될 것이다.

둘째, 제국주의 국가가 지역의 독재 정권과 싸울 때에 취해야 할 태도의 문제이다. 미국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가 약소국에 개입할 때 ‘인도주의적 개입’을 운운한다면 우리는 제국주의 자신이 전 세계에서 반인권적 독재자들을 후원해왔으며 그들의 개입은 더욱 참혹한 사태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매우 명료하고 굳건하게 주장해야 한다.

셋째, 우리와 많은 차이점이 있는 정치세력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반제 투쟁을 벌인다면 우리는 그들과 함께 싸울 태세가 돼 있어야 한다. 물론 우리는 함께 싸우면서도 노동자 계급이 주도하는 민중적 투쟁이 제국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진정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주장해야 한다.

1) 노엄 촘스키, 《507년, 정복은 계속된다》, 이후.

2) 노엄 촘스키,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한울.

3) 노엄 촘스키, 앞의 책.

4) 노엄 촘스키, 위의 책.

5)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노엄 촘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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