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가들을 위한 마르크스주의 입문 23 국제 공산주의 운동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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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 칼럼에서 말했듯이,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의 초기(1919∼23년)는 노동계급 정치 조직의 역사에서 정점이었다. 그러나 유럽 혁명의 패배와 러시아 혁명의 고립, 그에 따른 스탈린주의의 발흥은 코민테른의 기본적 구실과 정책에 파괴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과 러시아 지도자들이 ‘일국사회주의’ 정책을 채택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레닌 · 트로츠키를 비롯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모두 마르크스 ·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혁명을 근본적으로 국제적 과정으로 보았고 러시아 혁명을 국제 혁명의 첫 걸음으로 여겼다. 국제 혁명이 없다면 혁명 러시아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도, 생존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독일 혁명이 패배한 뒤 1924년에 이 국제주의 전통을 포기하고, 서 자본주의에 의해 군사적으로 전복되지만 않는다면 러시아 일국에서도 사회주의 건설을 완수할 수 있다는 견해를 채택했다.

이것은 코민테른과 코민테른 소속 정당들의 정책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원래 이 정당들의 첫번째 과제는 자국에서 혁명을 추구함으로써, 자국 노동계급과 러시아 혁명의 이익에 이바지하는 것이었다.

일국사회주의

이제 그들의 주된 과제는 옛 소련에 대한 군사 공격을 예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각국 공산당은 다양한 개량주의 · 민족주의 세력들과 동맹했다. 그들은 노동자 혁명의 관점에서는 결코 믿지 못할 세력이지만, 적어도 대(對) 러시아 전쟁에는 반대하도록 설득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우경화의 맨 처음 성과는 1926년 영국 총파업에서 나타났다. 1925년에 스탈린의 명령을 받은 러시아 노동조합 연합은 영국 노동조합의 “좌파” 지도자들과 동맹을 맺고 ‘영-러 노동조합위원회’(Anglo-Russian Trade Union Committee)를 결성해서 영국의 러시아 개입에 반대했다.

이 동맹은 영국공산당이 개량주의 노조 지도자들을 대하는 태도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그들을 비판하지 않았고, 공산당 소속 노동조합원들의 독자적 행동 능력은 크게 위축됐다. 바로 그 때 광부들이 이끄는 영국 노동계급과 노동조합이 정부 · 지배계급과 대대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했고, 그 충돌은 1926년 5월 전국적 총파업에서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공산당과 동맹한 바로 그 좌파 노조 지도자들의 비열한 배신으로 이 총파업은 겨우 9일 만에 철회됐다. 더욱이 그 동맹을 중개한 코민테른의 방해 때문에 영국공산당은 노동계급에게 개량주의 지도자들을 믿지 말라고 경고하거나 그들이 배신할 경우 공산당원 투사들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도록 준비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영국 노동계급은 패배했고 한 세대쯤 퇴보했다. 코민테른은 이 과정의 공모자였다.

근본적으로 이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재앙적인 사건이 1927년 중국에서 일어났다. 1925∼27년에 중국 노동계급, 특히 상하이와 광저우의 노동자들은 제국주의와 봉건 군벌의 중국 지배에 맞서 대규모 반란 물결을 일으켰고, 신생 공산당도 급성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지배한 코민테른의 노선은 중국공산당이 장제스가 이끄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과 동맹해야 할 뿐 아니라 국민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제스를 잠재적 러시아 옹호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7년 장제스는 자신의 동맹 세력인 공산당을 공격해서 말 그대로 대학살을 자행했다. 이 재앙의 즉각적 결과로 마오쩌둥은 농촌과 농민에 의존하는 정책으로 전환했고, 그 뒤 중국의 노동계급 사회주의는 아직까지 실제로 복원되지 않았다.

재앙적 정책들을 추진하는 동안 코민테른의 성격에 다른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스탈린은 대 중국 전술을 정당화하기 위해 낡은 멘셰비키 ·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 되돌아가, 식민지 나라들에서는 사회주의를 위한 조건이 무르익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진보적’ 민족 부르주아지를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와 동시에, 각국 공산당 안에서는 일체의 비판과 민주적 논쟁이 사라졌고, 당 지도부는 훨씬 더 고분고분한 러시아 하수인들이 됐다.

민중전선

1928∼29년 스탈린이 강제 공업화와 농업 집산화 ― 러시아 노동자 · 농민을 쥐어짜는 국가자본주의 노선 ― 를 시작했을 때, 그는 자신의 행적을 좌파적 미사여구와 구호로 은폐해야 했다. 이 가짜 좌파 구호들을 국제 문제에 적용한 자연스런 결과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사회(주의) 파시스트”라고 비난하고 심지어 나찌에 맞선 일체의 동맹, 심지어 다른 노동계급 정당들과의 동맹조차 거부하는 종파주의 정책이 나타났다.

이 가짜 좌파 노선은 1929∼33년의 결정적 시기에 독일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 혼란에 빠뜨려서 히틀러의 집권을 크게 도와주었다는 점에서 그 전의 우경화 전략보다 훨씬 더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파시즘 문제는 다음 칼럼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다.)

나찌 독일의 노골적인 군사적 위협에 직면하자 스탈린의 코민테른은 또 한 번 방향을 전환했다. 노동자들의 공동전선조차 반대하던 정책에서 이제는 ‘민주적’ 부르주아지와 동맹하는 이른바 민중[인민]전선으로 전환한 것이다.

스페인 내전(1936∼39년)이라는 시험대에서 이 민중전선 정책은 공산당이 프랑코에 맞서 부르주아지의 일부와 단결한다는 명목으로, 자발적으로 발전하던 스페인 혁명을 억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이것은 혁명을 저지했을 뿐 아니라 스페인 노동계급의 사기를 떨어뜨려 프랑코의 승리를 도와주었다.

한편, 국제 공산주의에서 또 다른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일국사회주의가 소련에서 가능하다면 다른 많은 나라에서도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 나라마다 다르다는 생각이 점차 각국 공산당을 사로잡았다. 이런 생각은 소련에 대한 충성에 오랫동안 눌려 있었지만, 1950∼60년대에 소련의 힘이 약해지자 스탈린주의 정당들에서 민족 개량주의 경향이 전면에 등장했고 결국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거의 구분할 수 없게 돼버렸다.

따라서 스탈린주의는 국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역사적 영향을 미쳤다.

첫째, 일련의 재앙적 패배를 초래해서 자본주의가 살아남고 파시즘이 승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둘째,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위한 운동을 국제적 반혁명과 부르주아 개량주의를 위한 운동으로 변질시켰다. 다행히도 오늘날 스탈린주의가 노동자들의 투쟁을 억누르고 진정한 사회주의를 가로막을 수 있는 능력은 엄청나게 약화했다.

맑시즘2017: 17년 전통의 국내 최대 마르크스주의 포럼 / 7월 20일(목) ~ 23일(일) / 장소: 서울 / 주최: 노동자연대 맑시즘2017: 17년 전통의 국내 최대 마르크스주의 포럼 / 7월 20일(목) ~ 23일(일) / 장소: 서울 / 주최: 노동자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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