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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바뀔까 묻는 사람들에게⑤:
계획경제는 불가능한가?

다섯 호에 걸쳐 실리는 이 연재는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흔한 물음에 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 연재다. 박설이 민주적 계획경제가 필요할 뿐 아니라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2008년 말, 세계의 심장부 미국에서 대규모 경제 불황이 시작됐다. “월가의 기적”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신화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마이클 무어도 영화 〈자본주의: 러브 스토리〉에서 자유시장의 작동방식에 통렬한 비판을 제기했다.

“왜 고통을 겪는 건 항상 가난한 자들인가? 왜 [카트리나 참사 때] 지붕에서 도움을 청하는 건 … 시티뱅크 회장, 골드만삭스 헤지펀드 매니저, AIG의 CEO 같은 사람들이 아닌가?”

마이클 무어는 이렇게도 말했다.

“자본주의는 악입니다. 악은 통제할 수 없습니다. 아예 근절하고 모두를 위해 좋은 것으로 교체해야 합니다.”

마이클 무어가 사회주의자가 된 건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세계경제 위기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듯이, 마이클 무어도 ‘시장의 조정 능력’이라는 게 거짓일 뿐이며 체제가 노동계급에게 끔찍한 고통을 가하고 있음을 목격했다.

세계경제는 지난해부터 회복한 듯 보이지만, 유로존의 위기와 어른거리는 더블딥 가능성이 여전히 앞날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이 속에서 전문가들이 내놓은 대책은 고작 기업들의 생존을 최대한 보장해 현 시기를 잘 넘겨보자는 식이다. 긴축이든 경기부양이든 위기를 근본으로 해결할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다.

〈파이낸셜 타임스〉의 수석 경제 평론가인 마틴 울프조차 “위기의 재발을 방지하는 것”은 “솔직히 불가능하다”고 시인했다.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껏해야 자본주의가 “가장 덜 나쁜 체제”라는 항변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대안은 있는가?

일찍이 마르크스주의가 제안해 온 민주적 계획경제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계획경제라니! 그것은 경제에 성장 동기를 전혀 부여하지 못하는 북한의 낡은 방식이 아니던가?’

시장의 동기부여가 일할 의욕을 만들고 인류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얘기는 이 사회의 ‘상식’으로 통한다.

그러나 사람들을 무기력한 임금 노예로 만드는 시장경제는 노동자들에게서 창의력과 일할 의욕을 빼앗아 왔다.

시장 경제의 성장 ‘동기’는 오직 이윤 경쟁이며, 이 무정부적인 이윤 경쟁은 지금의 위기를 만든 장본인이다(이 연재의 첫 번째 글을 보시오). 그리고 이 이윤 논리는 지금 수많은 노동자들의 임금·복지와 일자리를 위협하는 주범이다.

더구나 지금 시장주의자들마저 ‘시장 실패’ 상황에선 국가의 인위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2008년 세계 주요 국가들은 은행 국유화 등을 통해 위기의 확산을 막으려 발버둥쳤다.

물론, 마르크스주의가 말하는 계획은 이명박이나 오마바식의 국가 개입과 완전히 다르다. 이명박과 오바마가 부자들을 살리려고 시장경제에 개입했다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자·민중의 필요라는 정반대의 가치를 위한 개입과 계획을 말한다.

우선순위

민주적 계획경제는 꼭 필요하다.

당장에 기후변화가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자본주의는 인류의 가장 중차대한 문제 중 하나인 기후변화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시장경제의 우선순위 때문에 그렇다.

석유와 자동차 경제에 절대적 이해관계가 있는 거대 기업과 정부 들은 시장에서의 이윤 경쟁에 매달리며 인류의 생존과 미래를 내팽개치고 있다.

그러나 만약 경제가 이윤이 아니라 대중의 필요에 우선순위를 두고 작동한다면, 풍력·파력·태양력 같은 친환경 에너지를 즉시 도입하고, 친환경 대중교통, 특히 지하철과 기차와 버스 등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할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은 원칙을 주택·복지·일자리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적용할 수 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전 국가, 전 지구적 차원의 계획을 세우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국가적 또는 국제적 수준에서 투자의 우선순위와 방향을 결정한다면, 지역 수준의 협력적 기구들이 이에 바탕을 두고 생산과 분배를 조직할 수 있다.

사실 계획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생소한 것이 아니다. 개별 기업들은 매년, 매분기, 매달, 심지어 매일매일의 계획을 세우고 운영해 왔다. 그렇다면, 왜 이윤 확보를 위한 개별 기업들의 계획을 전 사회적 필요에 따른 계획으로 대체할 수 없단 말인가?

이런 집단적이고 민주적인 계획 조처들은 과거 소련이나 북한의 계획경제와는 다르다. 소수 특권을 두고 관료들이 권력을 독점해서, 인민은 굶주리는 데 미국·남한과의 경쟁을 위해 미사일·핵무기에 우선 투자하는 것은 관료적 지령경제이지 민주적 계획경제가 아니다.

따라서 문제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통제에 바탕을 두고 인류의 필요를 위해 생산·분배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적 선출권뿐만 아니라, 소환권이 실질적으로 대중에게 주어져야 함은 물론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민주적 계획경제의 가능성을 보여 준 위대한 사례다. 우리가 이런 대안을 선택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오로지 노동계급의 투쟁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