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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해방 ④:
성차와 여성 차별

타고난 여성성과 남성성이 있는가? 성차가 여성 차별의 원인인가?

성차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여성운동의 오랜 쟁점이다.

여성이 남성과 다른 신체 기능과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성차는 있다. 그런데 이런 차이 이상의 성차가 존재한다는 관념이 널리 퍼져 있다.

남녀의 차이를 과장해 여성의 신체가 더 열등하다거나, 여성과 남성이 심리적으로 다른 본성을 지니고 있다거나,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구실이 달라야 한다는 것 등이 ‘상식’처럼 돼 있다.

19세기에는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열등하다는 점을 증명하려는 과학 연구들이 유행했다. 여성은 남성보다 지능이 낮다, 여성은 호르몬 변화 때문에 중요한 일을 수행할 수 없다, 여성은 수동적이다 등등. 프로이트는 심리학적으로 여성을 남성 성기가 없는 불완전한 존재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런 연구 자체가 여성의 열등성을 ‘입증’하려고 주관적으로 설계됐고, 정반대의 사실을 입증해 주는 연구 결과들도 많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고정된 성차가 존재한다는 관념에 도전했고, 여성은 남성과 다르게 길러질 뿐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여성들은 남성만큼 사회활동에 적극 참가하고, 일이나 학업에서 남성을 뛰어넘는 성취도를 보여 주는 여성들도 늘고 있다. 여성에게 금기시됐던 영역에 진입하는 일도 늘어나고 있다.

여자라면?

그럼에도 여성과 남성의 본성이 다르다는 생각은 여전히 꽤 영향을 미치고 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같이 여성과 남성이 마치 다른 행성에서 온 것처럼 다른 본성을 가진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대중매체에서는 모성애가 여성의 본능이라고 강조하며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이제 여성은 자기 일을 잘하고 똑똑해야 하지만, 동시에 섬세하고 배려심 강하고 감성적이고 보살핌에 능해야 한다.

아이를 사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여성만의 특징도 아니고 모든 여성이 출산과 양육을 최우선하는 것도 아니지만, 여성들 대다수가 자신의 아이에게 강한 애정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위선적이게도 지배자들은 모성을 그토록 강조하면서 정작 출산과 양육에 대한 투자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좀더 세련된 방식으로 ‘여자라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의 여성성이나 모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여성 개인에게 육아의 짐을 전가하고 여성차별을 유지하려면 성차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페미니즘 내에도 성차를 적극 인정하자는 주장이 있다. 다만 이들은 여성성이 더 우월하므로 여성성을 더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여성들이 돌봄과 평화를 중요시하고, 감수성, 배려, 의사소통이 뛰어난 반면, 남성들은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전쟁과 자본주의는 남성성의 산물이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여성성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해 여성이 열등하다는 보수적 관념에 도전하는 데 사용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 성차를 둘러싼 고정관념을 강화할 수 있다.

UN의 이라크 제재로 이라크 어린이 50만 명이 죽은 것을 두고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 전(前) 미 국무부 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나 파병을 촉구하며 호전적 발언을 일삼는 여성 국회의원 송영선은 여성성이 고정된 실체가 아님을 보여 준다.

반대로, 전쟁과 환경파괴 등 자본주의가 낳은 괴물에 맞서 여성과 함께 투쟁해 온 수많은 남성들이 있다. 이처럼 문제의 본질은 성별에 있지 않다.

그런데 남성성이 문제를 낳는다고 여기는 태도는 남성들과의 연대를 소홀히 여길 수 있다. 이런 태도는 무엇보다 이윤에 타격을 줘 자본주의의 핵심적 문제들에 가장 효과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인 노동계급 남성과 여성을 단결시키려는 노력에 무관심할 수 있다.

여성들이 단일한 집단이라는 주장을 비판하며 여성들 내의 차이에 더 주목하는 페미니즘도 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는 ‘여성범주 자체를 해체’하고 여성이 하나의 집단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스테디셀러인 《페미니즘의 도전》의 저자 정희진도 이런 관점을 받아들이는 듯하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따르면, 같은 여성 내에서도 성·인종·계급·장애·성지향·민족·직업 등 다양한 정체성이 공존하기 때문에 이 문제들 중 어느 것을 핵심으로 꼽을 수 없다.

여성이 모두 균일한 집단이라는 주장도 틀렸지만, 여성이 모두 다 다르다는 포스트모더니즘도 억압에 맞서 싸우기에 효과적인 사상이 되지 못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제기하는 ‘차이의 정치’에서는 모든 억압이 개인마다 다르고 상대적이다. 따라서 억압에 맞선 효과적인 투쟁 전략(단결)을 세울 수 없다.

다른 한편, 성에 따라 심리적 본성이나 사회적 구실이 다르다는 주장에는 반대해야 하지만, 동시에 신체적 차이를 무시하고 여성을 차별받는 상태로 두는 것에도 반대해야 한다.

여성이 출산할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사회적 차별 사유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여성의 생리·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충분히 보장해야 하고, 휴가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 또, 여성에게 육아 부담을 떠넘기지 말고 양육을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여성이 육아와 집안일에서 해방되고 남성들과 동등하게 사회활동에 참가하는 것이 여성해방의 출발점이라고 본다. 자본주의는 이미 양육과 가사노동을 사회화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다만 이것이 여성들을 위해 사용되지 않을 뿐이다.

여성이 신체적 차이 때문에 차별받지 않고, 여성에게 고정된 성 역할을 강요하지 않는 사회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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