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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 사회주의 따위는 없다

연평도 포격 사태의 배경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점은 지났지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되는 이전 기사들을 선정해서 재게재한다. 이 기사들이 북한 체제의 성격, 제국주의와 한반도 긴장의 원인 등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에 답하리라 기대한다.

북한은 사회주의를 자처한다. 1972년에 “사회주의 헌법”을 제정했고, 이번 당대표자회에서 개정된 조선로동당 규약에도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을 당면 목표로 명시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으로 정의했다. 노동계급은 코뮌이나 소비에트 같은 자신의 민주적 기관에 기반을 두고 혁명으로 자본주의 국가를 분쇄하고 그런 기관에 기반을 둔 자신의 새로운 국가 권력을 건설해야 비로소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 국가의 모든 업무(입법과 행정 등)는 노동자들이 직접 선출한 노동자 대표들이 이끌어간다. 이들은 평균적인 노동자 임금만 받고, 자유로운 선거로 평가받고,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다.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누구나 국가 운영에 참여하며 생산을 통제한다.

이처럼, 전체주의니 독재니 하는 우익의 매도와 달리 진정한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비할 바 없이 민주적인 체제다. 이런 사회에서는 세습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북한은 그들 자신이 무엇을 표방하든 간에 어느 모로 보나 사회주의와 거리가 멀다. 북한의 노동자들은 국가를 통해 통치하는 게 아니라 통치받는다. 북한 관료들이 권력을 쥐고 온갖 특권을 누린다. 그들은 국가를 통해 집합적·간접적으로 노동계급을 착취한다.

북한의 주요 정책이 결정되는 당대회는 1980년 이후 30년 동안 한 번도 열리지 않았고, 당 대표자회는 1958년과 1966년에 이어 올해 44년 만에 처음 열렸다. 평범한 노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당 대표자들조차 44년 만에야 국가 운영 근처에라도 갈 수 있다는 얘기다. 이는 노동자들의 삶을 좌우하는 주요 정책이 극소수 권력자들에 의해 비공개로 결정되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선거가 실질적인 의미를 가질 리 없다. 최고지도기관 선거는 지난 30년 동안 실시되지 않았고, 그 결과 당시 선출된 당 중앙위원 가운데 절반은 새로운 선거를 치르거나 소환되기 전에 죽거나 해임됐다.

30년 만에 치른 이번 선거는 김정일과 핵심 측근들이 내정한 후계자를 사후 승인하는 요식절차에 불과했고, 김정은의 ‘인민군 대장’ 칭호는 선거가 아니라 김정일의 명령으로 수여됐다.

세계 자본주의로부터의 경쟁 압력

북한이 그들 자신이 표방하는 것과는 달리 사회주의가 아니라면 어떤 사회인가?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비정상 국가” 또는 봉건 왕조라고 하는데, 이런 규정은 북한이 남한보다 질적으로 열등한 사회라는 강한 함축을 갖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세습 독재와 끔찍한 억압은 모종의 비자본주의적 또는 탈자본주의적 통치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착취와 관계가 있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이후 중공업 중심의 급속한 공업화를 추진했다. 대중의 소비와 생활수준은 철저히 희생됐다. 1953년에 시작된 3개년계획 기간에 중공업과 경공업 투자 비율은 81.8 : 18.2 였고, 이 격차는 그 뒤에도 그다지 좁혀지지 않았다.

이것은 사회주의적인 조처가 아니라 당시 여느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이 추진하던 강력한 국가 주도 경제 발전 노선이었다. 특히, 미국의 후원을 받는 남한과의 군사적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북한은 중공업 성장에 몰두했다.

북한 관료는 더 오래, 더 강도 높게 일하도록 노동자들을 몰아쳤다. 높은 착취율을 유지하려면 강도 높은 억압이 필요했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노동조합 권리도 허용되지 않았다. 정책을 둘러싼 관료 내 이견도 용납되지 않았다. 숙청, 노동수용소, 보안경찰이 정권을 떠받쳤다.

그럼에도 중공업 중심 노선에 대한 반발을 포함한 당내 투쟁(1956년 “8월 종파 사건”)을 겪은 이후 10년 만에 경제 발전의 속도와 균형 문제를 놓고 다시 당내 분란(1967년 “갑산파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1960년대 말 경제에 비상등이 켜진 상황에서 김일성이 확실히 믿을 수 있는 후계 체계(세습) 구축의 필요성을 느낀 계기였던 듯하다. 당시 북한 경제는 협소한 국경 안의 제한된 자원과 기술 수준에 의존하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진정한 사회주의적 대안이 필요하다

1980년대 북한 경제는 정체에 빠져들기 시작했고, 소련 몰락 이후에는 긴 말이 필요 없는 끔찍한 경제 파탄을 겪었다. 1990년대 초 이후 미국의 대북 압박은 북한의 어려움을 증폭시켰다. 북중 관계 덕분에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다 해도 아직 북한 경제가 1990년대 이전 수준으로 회복된 것은 아니다.

3대 권력세습은 이런 상황이 낳은 해괴한 결과물일 것이다. 이를 두고 “북측 체제가 더욱 안정화되어 가고 있다”고 평가(민주노동당 새세상연구소)하는 것은 너무 피상적이다.

북한 정권은 오랫동안 노동자들을 혹사하고도 윤택한 삶을 제공하지 못했다. 1963년에 조선로동당 기관지는 그 해 목표가 이룩되면 북한의 모든 근로인민은 ‘기와집에서 쌀밥과 고깃국 먹고 비단옷을 입으며 부유한 생활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반세기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도 북한은 이 목표를 성취하지 못했다. 지난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수령님은 인민들이 흰 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기와집에서 살게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이 유훈을 관철하지 못하고 있다”고 실토했다.

게다가 2000년대 취해진 각종 조처들로 빈부격차와 부패가 늘었고, 2002년 7·1조치로 재정 긴축을 실시하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더 악화됐다. 한편, 중국 경제에 더 많이 의존하면 할수록 중국을 매개로 위기의 세계 경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또 다른 문제에 부딪힐 것이다.

북한 체제의 붕괴를 예측하는 우익에 맞서 “북측 체제의 안정화”, 생존 또는 버티기가 필요한 게 아니다. 그런 버티기는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의 악순환을 낳을 뿐이다. 북한의 평범한 사람들이 윤택한 삶을 누리려면 북한과는 전혀 다른, 진정한 사회주의적 대안이 필요하다.

그것은 시장 자본주의 하에서처럼 북한에서도 노동계급이 지배 관료를 타도하고 자기 자신의 민주적 국가 기구들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