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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내 성폭력 가해자 명단 발표, 어떻게 볼까?

지난해 말 ‘운동사회 내 성폭력 뿌리뽑기 100인위원회(이하 100인위)’가 ‘운동사회 내 성폭력’가해자로 16명의 남성의 실명을 공개한 뒤부터 성폭력 논쟁이 뜨겁게 일고 있다.

100인위는 “운동사회 내에서 그 동안 은폐돼 왔던 성폭력의 실상을 알려 성폭력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 실명 공개라는 충격 요법을 사용했다.

직장, 학교, 가정 등 사회의 곳곳에서 여성 차별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또 계속 부추겨지는 사회에서 성차별주의에 의식적으로 도전하지 않는 활동가들은 성차별 관념의 포로가 되기 쉽다. 보수적 성차별 관념의 포로가 된 남성 활동가들은 여성 억압에 맞선 투쟁에 관심이 없거나 뒷전으로 제쳐 두기도 하고 그 중 소수는 강간과 성폭력으로 개별 여성을 억압하는 최악의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비록 남녀 활동가들이 여성 차별에 맞서 단결해 싸운 경험이 없진 않았지만 성차별 문제를 놓고 함께 싸울 것을 호소하는 여성 활동가들의 제안에 흔쾌히 나서지 않는 모습 또한 꽤 있었던 게 사실이다.

100인위 지적대로 운동 진영 내부는 성폭력 무풍지대가 아니다. ‘운동권’이란 게 자본주의 체제의 온갖 쓰레기 같은 편견과 이데올로기를 단호히 떨쳐 버리고 혁명적 사상으로 뭉친 단일한 활동가 집단을 뜻하는 게 아니다. 학생회나 노동조합 등 일상 조직이나 여러 정치 조직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 가운데는 여성 차별에 맞서 여성 해방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100인위가 운동 진영 내부에 존재하는 이러한 잘못된 경향에 경종을 울리려 한 문제 의식은 충분히 공감할 만하다. 활동가가 저지르는 성폭력이라 해서 침묵해선 안 된다는 문제 제기 또한 옳은 얘기다. 조직 내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자기 조직이 입을 도덕적 타격을 두려워 해 ‘조직 내 해결’을 내세워 사건을 덮어두기에 급급했던 일부 활동가들의 태도는 분명 교정돼야 한다. 여성 억압 문제를 부차적인 과제로 인식하는 잘못된 정치를 가진 활동가들의 태도가 100인위가 탄생한 근본 원인이다.

그러나, 운동 진영 내 성폭력을 없애려는 긍정적 취지에도 불구하고 100인위의 활동 방식은 그러한 취지를 무색케 한다. 혼란스런 성폭력 개념을 사용해 남성 개개인을 비난할 뿐, 성폭력을 낳는 사회를 공격하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꽤 이름난 남성 활동가들을 골라 사건을 폭로해 많은 사람들(부르주아 언론을 포함해)의 관심을 끄는 데는 일단 성공했지만, 성폭력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지 알려 주진 못하고 있다.

사회를 계급이 아니라 성으로 나누는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남성이 권력을 갖고 있다고 본다. 특히 급진 페미니스트들에게 성폭력은 ‘모든 남성이 모든 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운동 진영 내 남성 활동가들을 여성을 억압하는 권력자의 일부가 된다. 100인위가 “운동 사회” “조직 보존 이데올로기” “운동 진영 내 여성 억압적 현실” 등의 표현을 쓰는 데서 좌파 진영을 하나의 권력 집단(그 속에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남성이 여성의 적’이라 생각하는 급진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남성이 강간범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어한다. 100인위의 이번 발표 내용들을 보면, 그러한 가정을 갖고 있다는 의심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100인위가 성폭력 사례로 발표한 16건을 찬찬히 뜯어보면, ‘도대체 이게 무슨 성폭력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 사건이 한두 개가 아니다. 100인위가 제시한 '피해자 진술'에 나온 정황 묘사가 100퍼센트 사실이라 가정하더라도, 명백히 성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례는 2건(소설가 박모 사건[1]과 병원노련 성폭력 사건)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피해자 진술’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렵거나 전혀 성폭력 같지도 않은 사례들로 채워져 있다.

《말》(2000년 12월호)에도 보도된 바 있는 ‘전 오늘의 책 총무 사건’은 분명 공분을 살 만한 일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타 사건이지 성폭력은 아니다.

싫다는 여성에게 계속 전화하고 따라다니며 집요하게 구애한 사건, 여러 여성과 성관계를 맺거나 애무를 해 상대 여성에 대한 감정이 진실한 것인지 의심받게 된 한 총학생회 간부의 행동 역시 성폭력이라 보기 힘들다. 농활에서 한 여학생을 성추행한 마을 아저씨에게 실명 사과 대자보를 붙이도록 강제하는 일을 거부한 총학생회 간부의 행동(‘2차 가해자’로 지목된)은 격분할 일이긴 하지만 성폭력이라 볼 순 없다. 콘돔으로 장난을 친 행동을 성폭력이라고 하는 데서는 어처구니가 없다.

자의적

100인위가 이처럼 성폭력이라 보기 힘든 사건들을 죄다 성폭력이라 규정한 데는, 성폭력을 강제적 성적 행위(강간, 강제적 신체 접촉 따위)가 아니라 “(상대) 여성의 불쾌함” 여부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성폭력 개념을 이처럼 느슨하게 사용하는 경향은 비단 100인위뿐 아니라 오늘날 대다수 페미니스트들에게 나타나고 있는 특징이다. 여성의 느낌이 판단 기준이라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성폭력을 판가름하는 원칙이 되고 있다.

이처럼 느슨한 성폭력 개념은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성폭력을 매우 자의적인 것으로 바꿔 버린다. 왜냐하면 여성들이 불쾌함을 느끼는 데서 공통된 기준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기준대로라면 똑같은 행동이라도 성폭력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모든 여성들이 콘돔으로 장난하는 일을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행동이라 느끼진 않는다. 성도덕에서 어떤 행동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이냐는 사회마다 다르고 심지어 개인들마다 차이가 있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이라는 존재는 단일한 생각을 갖고 있는 집단이라고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것과는 달리, 현실의 여성들이 갖고 있는 생각은 남성들만큼이나 다양하다. 보수적 성 관념을 갖고 있는 여성과 개방적 성 관념을 갖고 있는 여성이 한 사건을 두고 동일한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물론, 여성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공통된 '불쾌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외모에 대한 평가나 욕설,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 따위에 기분 나쁘지 않을 여성이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때조차 ‘불쾌함’을 성폭력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명백한 문제가 있다. 분명 ‘불쾌함’에도 여러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자의적 성폭력 개념이 위험한 경우도 이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 광범한 유형의 언행(성적인 게 전혀 아닌 것도)을 모조리 포함할 수 있기 때문에, 성폭력이 갖는 뚜렷한 특징을 없애 버린다.

이것은 실천에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빚게 된다. 첫째, 강제적이지 않은 모든 성적 언행들을 도매금으로 비난받게 한다. 확실히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성적 언행을 성폭력이라고 비난하는 경향(‘성적 농담’, ‘속옷이나 성관계 기구 등 부적절한 선물하기’, ‘상대방이나 자신의 성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등)이 있다.

이럴 경우, 성에 대해 거리낌없이 공공연하게 얘기하고 행동하는 것을 비난하는 성적 보수주의로 이끌릴 수 있다. 성에 대한 보수적 관념을 수용하면, 우익의 성차별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 싸우기란 힘들어진다. 포르노가 성폭력을 낳는다고 생각한다면, 최근 정부의 인터넷 성인 방송 운영자 구속 등 성표현물에 대한 탄압에 침묵하거나 심지어 지지할 수 있다(실제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성표현물 규제를 지지한다).

둘째, 사안의 경중을 구별하지 않게 된다. 100인위는 ‘피해 여성의 경험을 존중해야 한다’(피해자 중심주의)며 사안의 경중을 따지는 시도를 비난한다. 그러나, 강간과 성적 농담을 똑같이 성폭력이라 매도하는 것은 누가 봐도 부당한 처사다.

얼마 전 파견철폐공대위의 한 집행위원이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해서 한 달간 근신 처분을 받은 사건이 대표적이다. “오트론 노조의 투쟁에 연대 투쟁이 활발한 이유는 여성이 많은 사업장이기 때문이다” “여성들한테 남성 동지들이 마음이 간다” “연애 감정이 있으니까 연대가 활성화된다”(《말》, 2000년 12월호). 연대를 다소 희화화했을 뿐인 이 발언이 성폭력으로 둔갑했다.

같은 기사에서 《말》은 자의적 성폭력 개념에 따라 다음 사례를 진보 진영 내 ‘일상적 성폭력’(‘언어 폭력’[2])이라며 소개했다. “노동 형제” “노동자 형님” “소파 협정 개정하여 우리 처녀 지켜내자!” 앞의 두 개가 “여성 역시 운동의 주체이고 연대의 대상”임을 망각했고 뒤의 구호가 “여성을 언제나 남성들이 지켜줘야 할 대상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란다.

이런 식이라면 성폭력범이 아닌 남성들이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자의적 성폭력 개념을 거부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피해자 중심주의’ ― 성폭력 사건의 경우에만 성립하는 이 말을 성폭력 기준으로 삼는 것은 혼란 그 자체다 ― 라는 자의적·정서적 개념을 수용하면, 모든 남성을 여성의 잠재적 적으로 규정하게 된다. 살아가면서 한두 번쯤 상대 여성을 불쾌하게 하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따지면 여성들도 성폭력범이 될 수 있다. 성차별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어디 남자뿐이겠는가.

그러나, 사회 전체에서든 운동 진영에서든 성폭력을 일삼는 사람은 비교적 소수의 남성들이다. 압도 다수의 남성들은 강간을 포함한 성폭력을 일삼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남성들은 성폭력에 분노하고 그에 맞선 투쟁에 함께 할 용의가 있다. 롯데 호텔과 대원 노조의 성희롱 반대 투쟁이 대표적이다. 두 노조에서 남성 노동자들은 성희롱에 맞서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싸웠다.

성폭력은 남성의 본성이 아니라 여성을 억압하는 계급 사회의 산물이다. 안정적인 자본 축적을 위해 가사와 양육을 개별 가정에 떠넘기는 자본주의 체제야말로 성폭력을 비롯한 여성 억압을 낳는 주범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성폭력을 끝장내려면 남성 개개인을 비난하는 데 머무는 게 아니라, 여성 억압을 낳는 물질적 조건을 공격해야 한다. 불평등한 임금(남성의 58%), 입사와 승진에서의 차별 등 성차별 정책이 공공연히 행해지는 한 성폭력과 성차별 관념은 사라질 수 없다. 모든 남성이 아니라 남녀 지배계급에 맞서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법정 소송 중인 이 사건은 여성의 진술이 맞다면 100인위가 발표한 사건 가운데 유일한 강간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된 소설가 박모씨는 한때 운동을 했는지는 몰라도 사건 당시에는 전혀 운동권이 아니었다. 상대 여성에게 자신이 “한나라당 자문 위원”이니 “내 형이 검사”라 했다는 자를 100인위가 운동 진영 내 대표적 성폭력 사례로 뽑은 의도가 무엇인지 의문스러울 뿐이다. [본문으로]

[2] ‘언어 폭력’은 폭력과 비폭력의 구분을 없애는 잘못된 용어법이다. 최근 들어 많이 쓰는 ‘사이버 성폭력’도 혼란을 자아내는 용어다. 이처럼 개념을 자의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급진 페미니스트들의 특징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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