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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희생양이 된 무슬림

지난 2월 27일 인도 서부 구자라트 주에서 무슬림들이 힌두교도 열차 승객 58명을 살해한 뒤 촉발된 유혈 충돌로 지금까지 1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 그 중 대부분은 무슬림들이다. 이번 참사는 미국의 대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부른 또 하나의 비극이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습은 카슈미르를 둘러싼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쟁을 격화시켰다. 양국은 핵전쟁까지 들먹이며 충돌했다. 지난해 12월 13일에는 인도의 국회 의사당이 테러를 당했다. 인도의 집권당인 인도인민당(BJP)의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총리는 파키스탄의 이슬람주의 조직이 테러의 배후라고 주장하면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인도 인구의 12퍼센트가 넘는 무슬림들을 희생양 삼아 정치적 입지와 기반을 확장해 온 극우 쇼비니스트다.

그는 이번에 힌두교도들이 무슬림들을 살해한 것은 순전히 우발적인 사건이라고 두둔했다. 잔인무도한 무슬림의 테러에 대한 힌두교도의 분노가 폭발한 결과라는 것이다.

이번에 무슬림 학살을 선동한 세계힌두협회(VHP)는 BJP와 함께 연립 정부를 구성하고 있다. 그들은 힌두교도의 총파업을 호소했다. 사실, 2월 27일의 열차 습격 사건이 일어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한 것도 바로 VHP였다. 열차에는 아요드야에서 집회를 마치고 구자라트로 돌아가는 VHP 회원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VHP는 지난 1992년 12월에 아요드야의 바브리 이슬람 사원 파괴를 주도했다. 당시 그들은 바브리 사원 바로 앞에 힌두교 라마 사원을 건설하려 했다. 이것은 미국에서 흑인들의 교회를 허물고 그 위에 남북전쟁 당시 남부군의 기념물을 조성하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힌두교 라마 사원 건설을 저지하려는 무슬림과 힌두교도 사이에 대규모 충돌이 일어났고, 3천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대부분은 무슬림들이었다. 바브리 사원은 이 와중에 완전히 파괴됐고 소유권은 법원으로 넘어갔다.

그 뒤 한동안 잠잠해졌던 종교 분쟁은 작년에 미국의 전쟁을 계기로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충돌을 격화시켰다. 이에 따라 바브리 사원의 폐허 위에 힌두교 사원을 건설하겠다는 힌두교 쇼비니스트들은 더욱 힘을 얻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힌두교도들은 VHP의 선동과 이데올로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이번에 무슬림 학살극을 구자라트 주 외부로 확산시키려는 VHP의 시도는 실패했다. 2월 중순에 치러진 지방 선거에서 BJP는 구자라트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패배했다. 이러한 대중적 반감 때문에 BJP는 3월 15일 힌두교 사원 건설 공사를 강행하려는 VHP를 제지하지 않으면 안 됐다.

구자라트의 학살극은 무슬림을 희생양 삼아 온 BJP의 전략이 낳은 결과다. 그리고 1990년대 들어 BJP를 비롯한 힌두교 극단주의 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신자유주의 정책들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신자유주의

오늘날 인도는 세계은행의 최대 채무국이다. 2000년에 인도가 세계은행에서 빌린 돈은 18억 달러(2조 3천4백억 원)나 됐고 이자만도 6억 4천7백만 달러(8천4백11억 원)였다. 1991년 이후 집권한 인도의 정부들은 세계은행(WB)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신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했다. 정부 보조금 삭감, 사유화, 자유로운 자본 유통을 위한 장벽 제거, 수출 지향 경제 개발이 ‘신경제정책’의 이름으로 이뤄졌다. 1991년 이후 교육·보건의료·사회복지에 대한 정부 지출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빈곤은 심화됐고 빈부격차는 더욱 커졌다. 지금 인도 인구 10억 중에 약 4억 명이 공식 빈곤층이다. 문맹 인구는 1947년 독립 당시 인도 인구 전체보다 더 많다. 사유화 때문에 실업률은 전례 없이 높아졌다.

한편, 인도의 지배자들은 구조조정의 방향과 속도를 놓고 분열했다. 전후 50년 가까이 집권했던 국민회의가 쪼개졌고, 극우 세력들은 파시스트적인 주장들을 공공연히 제기했다. 경제 위기에서 비롯한 사회 혼란이 눈앞에 닥쳤는데 기성 체제의 정치적 지배력은 붕괴하고 있었다. 좌파든 우파든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린 셈이었다. BJP는 바로 이런 사회 상황과 정치 지형을 이용해 급부상했다. 반면에, 선거주의나 부르주아 정당과의 기회주의적 협잡에 매몰된 두 공산당들은 정치적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다. 빈곤과 실업에 불만을 품게 된 젊은이들은 좌파가 아니라 극우 파시스트의 선전에 넘어갔다. 무슬림이나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이 이들의 제물이 됐다. 1992년의 바브리 사원 파괴와 무슬림 학살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투쟁

경제 위기와 전쟁 때문에 힌두교 쇼비니스트들의 입지가 넓어질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희망도 있다. 그것은 바로 강력한 노동계급 투쟁의 전통이다. 1억 명이 넘는 인도의 노동계급은 세계에서 가장 전투적인 노동계급 중 하나다. 2000년 1월에 우타르프라데시 주에서는 9만 명의 발전 노동자들이 전력 사유화 계획에 반대하는 파업을 벌여 그 계획을 1년 연기시켰다. 그 해 4월에 인도를 방문한 당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은 가는 곳마다 시위대에 시달려야 했다. 12월에는 세계은행 총재 제임스 울펀슨이 같은 수모를 당했다.

5 월에는 BJP 계열의 노조를 제외한 인도의 모든 노동조합이 총파업을 호소했다. 3천만 명의 노동자가 총파업에 참가해 물가 인상, 비료보조금 삭감, 공공설비 사유화, 무슬림과 그 밖의 다른 소수자 공격, 세계은행·세계무역기구(WTO)·IMF·다국적 기업에 대한 경제 개방·수업료 도입 등에 반대했다.

9월에는 40만 명의 통신 노동자가 사유화 계획에 반대하는 파업을 벌였다. 12월에는 1백만 명의 은행 노동자들이 사유화 반대 파업을 벌였고, 60만 명의 우체국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연금 보장을 요구하는 파업을 벌였다.

2001 년 4월과 5월에는 발코 알루미늄 공장 노동자들이 사유화에 반대하는 파업을 두 달 동안 벌였다. 또,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마하라슈트라 주 전역에서 벌어진 하루 파업에 참가했다. 그들은 “세계화·사유화·자유화 공세”에 반대했고, “노동 유연성”을 위해 노동법을 개악하려는 시도에도 반대했다. 인도의 노동자들은 미국의 다국적 기업 듀폰을 굴복시킨 적도 있다. 듀폰이 고아 주에 있던 공장을 이전하려고 했을 때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나 싸웠다. 그러자 지역 사회 전체가 노동자들을 지지하면서 함께 싸웠다. 활동가 한 명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기도 했지만, 그들은 결코 굴하지 않고 싸웠고 끝내 승리했다.

이렇듯 강력하고 전투적인 인도의 노동자 운동이 생활수준 개선을 위해 투쟁하면서 대중을 조직한다면 실업자와 빈민들 사이에서 파시스트들의 기반을 잠식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아직 2년의 임기가 남은 극우 BJP 정권을 무너뜨릴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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