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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테러가 한국에 주는 교훈

노르웨이에서 끔찍한 테러를 저지른 브레이비크는 한국이 “살기에 안전한 단일문화 국가”이며 “유럽이 한국과 일본처럼 문화적 보수주의와 민족주의를 가진 국가로 변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가부장제 회복”이 대안이며 한국을 “본 받아야 할 모델”이라고 주장했다.

아마도 그는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한 한국 극우들의 한탄은 못 들은 모양이다.

한국은 최근 10년 사이 이주민이 급격히 증가해 이미 다문화, 다인종 사회로 접어들었고 이것은 되돌릴 수 없는 추세다.

7월 25일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15만 명이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를 행진했다.

한국을 가부장제가 강고한 사회로 묘사하는 것도 맞지 않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 과정은 억눌려 왔던 여성들이 투쟁의 주역으로 나서 온 과정이기도 했다. 1979년 YH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등 여성들은 중요한 동력이기도 했다. 이것이 2000년대 기륭전자,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까지 이어져 왔다.

브레이비크가 한국을 반동적이고 후진적 사회로 묘사하는 것은 인종차별적 편견이다. 그런데 이런 정신나간 우익들이 이 나라에서도 존재한다.

여러 언론들이 소개한 ‘다문화정책반대’라는 온라인카페에서 이런 우익들은 다문화주의가 “수많은 외국인 범죄 다 덮어 버리고 사기 불법 편법 국제결혼”을 만들어 냈다며 “외국인 노동자를 싸그리 잡아다가” 쫓아내자는 따위의 글을 올리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사실도 아니거니와 역겹기 짝이 없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자라날 토양을 제공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그 이유는 외국인의 급격한 증가나 한국 사회의 유난스러운 ‘배타주의’가 아니다. 이들 집단이 확대된 진정한 배후는 지난 10년간 툭하면 이주민을 ‘테러리스트’, ‘잠재적 범죄자’로 또 ‘노동 시장 교란’의 주범으로 몰아 온 정부와 주류 언론들이다.

지난해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도 몇몇 언론들은 ‘탈레반 조직화 시도 적발’, ‘지하드 선동’ 운운하며 무슬림 이주자들에 대한 마녀 사냥에 동조했다. 최근 경찰이,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의해 집단 행동을 벌였던 베트남 노동자들을 ‘범죄 조직’으로 꾸며 수십 명을 수사하고 10명을 구속한 ‘기획 수사’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노무현 정부 하에서 시작된 야만적인 단속 추방 정책은 이명박 정부 들어 더 폭력적·야만적 양상으로 변했다. 2008년 마석에서 경찰과 출입국 단속반을 투입해 1백 명이 넘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체포한 ‘소탕 작전’이 대표적이다.

이런 탄압의 진정한 목표는 통제 가능한 노동력을 수급해 기업 이윤을 보장하고, 이주자를 속죄양 삼아 사회적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은 스스로의 투쟁과 한국인들의 연대로 자신들의 처지를 바꿔 왔다. 2003년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 중단을 요구하며 1년 넘게 지속된 이주노동자들의 명동성당 농성 때는 진보 운동 진영뿐 아니라 평범한 시민과 학생 들에게 광범한 지지를 받았다.

이런 상황은 정부가 이주자 탄압만으로 일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한국 자본주의의 필요 때문에 이전보다 훨씬 대규모의 이주노동자가 필요해진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결혼을 해 한국에 머물러 사는 새로운 이주자들이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다문화주의’를 주요 이주 정책 중 하나로 표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싸그리

그런데 정부의 다문화 정책 대상은 ‘결혼의 진정성’ 테스트를 통과한 결혼 이주자와 그들의 자녀들로 한정한다. 이주노동자들은 이 다문화 정책의 대상에 포함조차 되지 않는다. 정부에게 이들은 필요할 때 쓰다 버리면 그만인 일회용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5년 정부가 공식적으로 다문화주의 정책을 표방한 바로 그해 미등록 이주노동자 단속추방 건수는 4만 5천여 명이라는 최고치를 기록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정부 정책의 틈새에서 ‘반다문화·이주노동자 추방’을 외치는 집단들이 성장하고 있다. 특히 지속되는 경제 위기 속에서 속죄양이 필요한 지배자들이 이것을 부추기고 있다. 〈조선일보〉처럼 이주민 수를 적절하게 관리해야 사회적 갈등을 줄일 수 있다며 사실상 더 강력한 출입국 규제를 주문하는 주장은 꽤나 광범하다.

그러나 이주민의 존재 자체가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이주민 때문에 일자리와 복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를 지배하는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의 이익과 몫이 희생되는 것이 진정한 문제다. 그래서 이주민을 이 문제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것은 진정으로 도전해야 할 표적을 가리고 함께 단결해 싸울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불법 파업’ 혐의로 억울하게 구속된 베트남 건설 이주노동자들의 석방을 위해 베트남 노동자들과 건설노조, 그리고 한국의 진보 운동 단체들이 단결해 투쟁한 경험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그들이 한국에 와서 경험한 혹독한 착취와 가혹한 탄압은 치가 떨릴 정도로 끔찍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와 건설 자본들에 맞서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을 옹호하며 이들과 같은 편에 선 한국인들이 존재했다. 이것은 민족과 출신 국가로 분열되지 않는 노동자 연대와 국제주의를 보여 줬다.

다문화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다른 언어, 문화, 역사를 가진 집단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이질성이 있어 다문화주의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계 자본주의 질서 하에서 대다수는 놀랍게도 흡사한 착취·억압을 강요받고 또 이에 맞서 저항하곤 한다. 우리가 공유하고 서로 나눠야 할 문화의 요소 중 빠져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이런 저항의 경험이다.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분열에 맞서 노동자들이 단결하면 투쟁은 더욱 광범하게 벌어질 수 있고 승리의 가능성은 배가된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사기와 자신감, 의식을 진작시키며 그럴수록 노동자들은 인종주의와 같은 후진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가 수월해 진다. 그래서 베트남 이주노동자 투쟁 승리와 같은 경험을 더 확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인종차별주의자들에 맞서는 우리의 확실한 대안이다.

우리는 다문화주의를 공격하고 이주민에 반대하는 주장에 맞서야 한다. 그리고 기만적이고 불철저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지금의 다문화 정책을 이주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전면 개선할 것을 요구하며 정부에 맞서야 한다. 이것이 이번 노르웨이 테러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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