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체제의 정당성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한국에서도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같은 책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레프트21〉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대안을 검토하는 연재를 싣는다.

① 자본주의는 왜 끔찍한 불평등을 낳는가
② 시장은 효율적인가
③ 금융화와 금융자본만이 주된 문제인가
④ 기후변화는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⑤ 국가가 시장의 광기를 통제할 수 있는가
⑥ 왜 전쟁은 왜 끊이지 않는가


먼저 시장의 광기에 대해 말하자면 요즘처럼 그것을 관람하기 좋을 때가 없다. 

미국은 양당의 스펙터클한 부채 한도 협상 끝에 디폴트를 가까스로 피했지만 역사상 최초로 신용등급이 강등되는 굴욕을 맛봤다. 유로존 위기가 스페인과 이탈리아 같은 대형 경제로 확대되며 프랑스마저 다음 타자로 지목됐다.

두 대륙의 연속 충격이 전 세계 금융시장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 뉴욕대 루비니 교수는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칼 마르크스가 옳았다. 어느 순간에 자본주의는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이처럼 자기 파괴적인 시장을 어떻게든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오늘날 이 논의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케인스주의적 국가 개입이다.

케인스주의자들은 국가 개입으로 대중에게 개혁을 제공할 뿐 아니라 경제 위기 자체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각광받는 케인스주의자인 폴 크루그먼은 높은 실업률과 낮은 가계소득을 문제 삼으며 국가가 나서 고용과 소득수준을 확대하라고 주장한다.

장하준 교수도 고삐 풀린 금융자본에 강력한 통제를 도입하자고 주장한다. 체제의 비정한 논리에 고통받아 온 대중에게 시장의 무능함을 꼬집어 주는 그의 주장은 울림이 크다. 

그리고 개혁적·급진적 케인스주의자들이 국가에 요구하는 고용 창출과 임금삭감 반대, 복지 확충은 오늘날 노동자 운동이 내걸 만한 요구이기도 하다. 

그런데 장하준 교수는 스웨덴식 복지국가 모델을 제시하며, 이를 위해 재벌 양보를 통한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삼성이 백혈병 걸린 노동자나 노조를 대하는 태도를 봐서는 타협이나 양보를 기대하는 것이 무망해 보인다.

선출되지 않는 기업주들이 경제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는 근본에서 이들을

전투성

사실 스웨덴 모델의 동력은 ‘대타협’이 아니라 당시 유럽 최고 수준이었던 스웨덴 노동계급의 전투성에서 나왔다. 1938년 스웨덴 살츠요바덴 협정은 재벌이 스스로 양보한 것이 아니라 위협적인 노동자 투쟁을 달래기 위한 국가와 자본의 후퇴였다.

그리고 그 기초를 제공한 것은 당시 스웨덴 경제의 수출 호황이었다. 오늘 같은 장기 불황의 시대에는 오직 더 급진적 방식의 운동을 통해서만 개혁을 성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임금인상, 복지 확대, 재정 지출 정책을 포함하는 개혁적 조처들이 자본주의 불황을 해결할 수 있는가?

케인스주의는 이런 조치가 대중의 구매력(유효수요)을 증대시켜 새로운 투자를 불러오고 이에 따라 경제가 호황으로 접어드는 선순환이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

물론 신자유주의적 재정 삭감 정책이 수요를 줄이고 불안정을 가중시켜 경기 후퇴를 더욱 촉진하는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국가 개입을 통한 복지와 일자리 늘리기가 수요 부족을 해소해 경기 회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자본주의 모순과 위기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왜냐하면 불황은 근본적으로 단지 수요 결핍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윤율 위기에서 오기 때문이다. 

케인스주의자들은 1930년대 대공황 극복이 뉴딜정책 덕택이라 본다. 그러나 뉴딜의 시작과 끝을 비교한 지표들은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정부 지출은 1929년 1백2억 달러에서 1939년 1백75억 달러로 증가했지만 같은 기간 GDP는 1천44억 달러에서 9백11억 달러로 감소했으며 실업률은 3.2퍼센트에서 17.2퍼센트로 증가했다”.

대공황은 뉴딜이 아니라 제2차세계대전의 엄청난 파괴와 살육 속에 ‘해결’됐다. 

1970년대 중반에 장기호황이 시들해질 무렵 이에 대한 처방으로 시행된 케인스주의 정책도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브레너는 결과적으로 케인스주의가 신자유주의를 낳았다고 갈파한다.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로의 전환은 케인스주의적 유효수요 관리 정책이 이윤율을 회복하고 자본축적을 재개할 수 없음이 판명된 후에야 진행됐다. 자본의 입장에서 볼 때, 통화주의와 신자유주의는 케인스주의적 적자지출이라는 첫 번째 정책 선택이 실패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모순적 결과

사실 최근의 더블딥 위기는 단지 시장의 광기만이 아니라 국가 개입의 실패도 보여 주고 있다.

지난 2008년 미국 금융기관들이 파산 위기에 처했을 때 미국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유화 조처 ─ 은행뿐 아니라 GM과 크라이슬러도 ─ 를 단행했다. 또 위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상당한 규모의 차입과 재정적자를 감수하면서 자국 금융기관들의 몸집을 불려댔다. 

덕분에 일시적으로 숨통을 텄다. 그럼에도 위기를 근본에서 해결하지는 못했다. 국가는 엄청난 돈을 풀었지만 투자도 생산도 고용도 늘지 않았다. 위기의 양상은 금융 파산에서 국가 파산으로 발전했다. 

이처럼 케인스주의가 현실에서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국가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유지하는 까닭은 국가를 계급중립적인 도구로 보는 데서도 기인한다. “장하준의 … 이론에는 국가가 사회구성원 전체의 복리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계급 중립적 제도라는 관점이 암묵적으로 전제돼 있다.”(이정구 경상대 연구교수)

과연 국가는 중립적인가? 사람들은 투표를 통해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선출한다. 그래서 국가는 일견 계급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선출직이 국가의 전부는 아니다. 이들은 다 만들어 놓은 떡국 위에 얹어 먹는 고명과 같다. 선출되지 않는 군대와 경찰의 고위 간부, 검찰과 법원 그리고 각 부처의 핵심 관료들은 어떤 정부가 선출되든 영속적인 이해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국가를 자본가 계급의 ‘공동 집행위원회’로 이해했다. 자유민주주의가 확립된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이런 성격은 종종 드러난다. 자유민주주의의 본고장이라 일컬어지는 영국의 소요사태는 국가가 경제 위기에 대한 인종차별적 속죄양 삼기를 진행하는 가운데 죄 없는 빈민을 살해하며 시작됐다. 한국에서도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를 보면,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 동안 삼성이 거의 모든 국가 기관들에 대해 뇌물과 혈연, 학연, 지연을 통해 결속력을 다져가는 과정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시장의 논리를 대중의 필요에 따른 논리로 대체하려는 요구는 국가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 용산 참사를 떠올려 보든 쌍용차와 한진중공업의 해고에 맞선 투쟁을 떠올리든 간에 국가는 중립이 아니다. 

그렇다면 시장의 광기를 통제할 주체는 없는가?

케인스 본인은 슬쩍 ‘투자의 사회화’를 주장했는데 이것은 우선순위에 따라 생산을 조직하는 것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뛰어넘는 조처가 될 수 있다. 이것은 그 논리상 생산의 결정권을 기업으로부터 빼앗아 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국가가 아니라 노동 대중 자신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 또한 이 과정은 토론과 논쟁을 바탕으로 한 민주적 방식의 계획이 더해져야 한다. 진정한 개혁을 쟁취하려는 투쟁의 과정에서 집단적으로 각성된 노동계급의 권력 기관이 창출된다면 이런 계획을 실행에 옮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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