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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 후세인을 창조한 워싱턴 사람들

이라크 - 후세인을 창조한 워싱턴 사람들

미국의 이라크 식민 총독 폴 브레머는 “우리가 그[후세인]를 잡았다”고 외쳤다. 하지만 “우리가 그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영국 좌파 신문 기자 케븐 오븐든은 말한다.

언론은 사담 후세인을 재판에 회부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진정 피고석에 앉아야 할 사람들은 후세인을 권좌에 올려 주고 오랜 세월 동안 그 정권에 돈과 무기를 대 준 자들이다.

그들을 심판하려면 미국 정부의 절반을 심판해야 할 것이다.

후세인의 바트당을 1963년에 처음으로 권좌에 올려 준 것은 다름 아닌 CIA였다.

그 뒤 30년 동안 역대 미국 대통령들, 서방 지도자들, CIA 국장들, 육군 참모총장들은 중요한 고비마다 그의 정권을 지켜 줬다.

1963년에 CIA는 급진파 이라크군 장교 압둘 카림 카셈의 정권을 쿠데타로 전복했다. 그보다 5년 전, 영국이 수립한 이라크 군주정을 카셈이 타도했을 때는 1백만 명의 환영 인파가 바그다드 도심을 메웠다.

서방 지도자들은 중동 전역의 정권들이 차례로 반서방 성향의 지도자들에게로 넘어갈까 봐 두려워했다.

그런 상황에서 특히 미국이 앞장서서 쿠데타를 모의했고 1963년 2월 8일에 그것을 실행했다.

쿠웨이트에 소재한 CIA 라디오 방송국은 카셈을 전복한 바트당과 군 장교들에게 사담 후세인 등이 수집한 공산당 활동가들의 명단을 발표했다.

미국은 단 몇 시간 만에 새 정부를 승인했다. 그 직후, 바트당과 그 동맹 세력들은 수천 명의 공산당원들과 카셈 지지자들을 도살하면서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다음으로 미국은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바트당이 사용할 무기를 이라크로 공수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CIA는 카셈 전복을 자신들이 기획한 “가장 만족스러운 쿠데타”라고 표현했다.

당시 CIA 중동지역 책임자였던 제임스 크리치필드는 훗날 “우리는 그것을 위대한 승리로 여겼다”고 실토했다.

바트당의 총서기는 “우리는 CIA 호를 타고 권력을 장악했다”고 말했다.

바트당 정권은 보통의 이라크 국민에게 전혀 인기가 없었으며, 1963년 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 가 붕괴했다.

그래서 CIA는 5년 후인 1968년에 다시 한 번 바트당의 집권을 도왔다. 곧이어 사담이 서열 2위로 부상했다.

그는 자신이 통제하는 바트당의 준군사조직을 동원해 반대파를 전부 제거했다.

그는 미국 대통령 닉슨과 그의 대외정책 참모인 헨리 키신저의 동의를 얻어 공산당 지도자들을 교수형에 처했다.

미국이 사담을 ‘안정 유지자’라고 불렀을 때

1970년대 초에는 미국과 소련 둘 다 이라크 정부에 구애 공세를 폈다.

그러나 당시 걸프 지역에서 미국의 주요 동맹 세력은 이라크의 이웃 국가이자 경쟁자인 이란이었다.

이란의 파흘라비(팔레비) 국왕과 이스라엘은 1973년에 쿠르드족 게릴라를 무장·훈련시켜 이라크 군대와 싸우도록 사주했다.

그런데 1975년에 이라크와 이란이 협정을 맺게 된다. 갑작스럽게 미국과 이란은 쿠르드족에 대한 원조를 중단해 버렸고, 쿠르드족은 이라크 군대의 자비에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게 됐다.

같은 해에 미국 정부는 파울더라는 회사가 이라크에 화학무기 공장의 청사진을 제공하도록 허락했다.

사담은 1979년에 이라크의 공식 지도자가 됐다. 그 즉시 사담은 바트당 지도부 가운데 3분의 1을 처형해 버렸다.

또한 바로 그 해에 이란 혁명으로 미국의 핵심 동맹인 팔레비 왕이 타도됐다. 아야툴라 호메이니가 집권한 이란은 중동 전역에 반서방의 물결을 퍼뜨렸다.

카터와 로널드 레이건 정부 시절을 거치면서 미국은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사담 후세인을 지원하는 정책으로 확고하게 옮겨 갔다. 후세인은 1980년 9월에 대이란 전쟁을 개시했다.

이라크를 상대로 한 서방의 무기 판매량이 치솟았다. 미국의 직접적인 군사 지원도 마찬가지였다.

이라크가 이란 병사들에게 겨자 가스를 사용했다는 증거가 1984년에 드러났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이라크 비난 성명서 내기를 거부했다.

당시 미국 국방부 장관이었던 도널드 럼스펠드는 바그다드로 날아가 사담 후세인과 악수를 했다. 미국은 1984년에 이라크 주재 미국 대사관을 다시 열었다.

《뉴욕 타임스》가 지난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이란-이라크 전쟁의 결정적 전투 국면에서 이라크 지휘관들이 화학 무기를 사용하려 한다는 것을 미국 정보기관이 알면서도 이라크의 작전 계획 수립에 필수적인 도움을 제공했다”고 한다.

그런 지원에 고무된 사담 후세인은 1988년에 쿠르드족 민간인을 상대로 다시 한번 독가스를 사용했다.

아버지 부시 정부는 쿠르드족 학살이 자행된 후 1년 동안 이라크에 대한 원조를 두 배로 늘렸다. 당시 미국 정부 안팎의 주요 인사들과 고문들 가운데는 딕 체니, 폴 월포위츠, 도널드 럼스펠드가 있었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대이란 전쟁 동안 이라크 지원을 확대했다. 미국은 1988년에 이란의 민간항공기를 격추해 2백90명의 승객 전원을 죽였다.

1989년 이란이 약화되자 미국의 국무부 부장관 존 켈리가 사담 후세인을 방문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이 지역의 안정을 유지하는 힘입니다. 미국은 이라크와 관계를 증진시키고 싶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의 사이가 틀어졌다

1990년 8월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침략했다. 미국은 중동 지역에서 자신의 패권이 흔들릴 수 있다고 판단하고 사담에 대한 반대로 돌아섰다.

그러나 이라크 군대가 쿠웨이트로 진입하기 직전에 이라크 주재 미국 대사 에이프릴 글래스피는 사담 후세인에게 미국이 “귀국과 쿠웨이트 간의 국경 분쟁에” 아무 의견도 없다고 말하며 사담을 안심시켰다.

5일 후 존 켈리는 한 하원 위원회에 출석해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략하더라도 미국이 무력을 동원할 의무는 없다고 증언했다.

1991년 3월에 미국이 주도한 대이라크 전쟁이 끝나면서 서방은 자신들이 해방시켰다는 민족[쿠르드족]을 또 한 차례 냉소적으로 배신했다.

아버지 부시는 전쟁 전에는 이슬람 시아파와 쿠르드족에게 봉기를 촉구했었다. 이라크 군이 후퇴하자 그들은 정말로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자 미국과 동맹국들은 오히려 반란을 물거품으로 만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나섰다.

그들은 시아파 봉기가 성공하면 이란이 강화되고 이라크 북부에서 쿠르드족 국가가 성립되면 터키의 쿠르드족 독립 투쟁이 힘을 얻을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이라크의 헬리콥터가 “비행 금지 구역”을 지나 봉기를 진압하는 것을 허락했다.

후세인 체포로 저항 세력을 약화시킬 수 없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 바그다드 주둔 미군들은 산타 클로스 사진이 부착된 크리스마스 카드를 이라크 사람들에게 나눠 줬다. 산타 사진은 생포 당시 초췌한 후세인의 모습에 산타 모자를 씌운 것이었다. 카드에는 “미 제1기갑사단은 여러분의 행복한 성탄을 기원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미군들은 바그다드 근처에 긴 전기 철망을 설치했다. 이 철망에는 다음과 같은 표시가 부착돼 있다. “이 철망은 당신의 안전을 위해 설치됐지만, 철망에 접근하거나 넘으려고 할 때는 즉각 사살될 것이다.”

12월 12일 사담 후세인이 체포된 뒤 미국 정부와 대부분 언론매체들은 저항 세력이 커다란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전쟁중

지난 5월 1일 조지 부시가 에이브러엄 링컨 호에서 “적대 행위의 종식”을 선언한 후 이라크에서는 미 점령군을 노린 게릴라 공격이 계속돼 왔다. 이러한 공격들로 미군이 입은 피해와 사상자 규모는 이미 “적대 행위중” 입은 피해를 훨씬 넘어섰다.

최근에 미군이 내놓은 주장에 따르면, 후세인 체포 이후 저항 세력의 평균 공격 회수가 하루 평균 60회에서 15회로 줄었다. 이 숫자는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로버트 피스크가 폭로했듯이 미군 차량에 대한 수많은 공격들이 “차량 사고”로 처리되고 있다. 실제 공격 횟수는 미군 발표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설사 공격 회수가 실제로 줄었다 치더라도 이것은 후세인의 체포와는 관련이 없다. 저항 세력은 대부분 후세인을 지지하지 않는다. 영국의 〈인디펜던트〉 지는 이라크 내에서 서로 느슨하게 연결돼 있는 열두 개의 게릴라 그룹을 확인했다. 그 중 단 하나만이 후세인 지지자들이었다. 한 전문가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이라크 저항 세력은 “자가발전식”이다.

따라서 저항 세력의 공격 회수가 줄었다면 최근 미군이 대규모 게릴라 소탕 작전을 벌이면서 저항 세력들이 신중해졌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 미군의 소탕 작전은 저항 세력이 공격 방법을 더욱 정교하게 하고 공격 대상을 확대하도록 만들고 있다.

최근에 남부 카발라에서 일어난 자살 폭탄 공격은 이 두 가지 변화를 모두 보여 준다. 이 공격은 카발라에 주둔하는 불가리아 군과 이라크 경찰이 대상이었다. 공격은 2∼3분의 간격을 두고 4곳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공격자들은 이라크 경찰과 불가리아 병사들의 교대 시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가장 취약한 지점을 공격했다. 그 결과로 11명의 이라크 경찰과 5명의 불가리아 병사, 2명의 태국 병사, 1명의 이라크 민간인이 사망했다. 이것은 지금까지 일어난 자살 공격 중 가장 희생자를 많이 낸 사례 중 하나다.

저항 세력은 모든 국적의 점령군과 부역자들에게까지 공격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카발라라는 지역도 의미가 있다. 이 곳은 남부에 있는 시아파 성지다. 이로써 바스라를 제외한 이라크 내 모든 주요 도시들이 한 번 이상 대규모 자살 폭탄 공격을 받았다. 이들이 서로 행동을 조율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보고가 미군 정보당국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군사적 공격만이 아니라 점령 당국에 대한 정치적 도전도 일어나고 있다. 최근에 히발라에서는 점령 당국이 임명한 시장을 대중이 몰아냈다. 후세인이라는 걸림돌이 사라진 이상, 대중이 종교적·정치적 차이를 넘어서서 이러한 통일된 행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더 확대될 것이다.

폴 브레머가 지적했듯이 저항 세력의 공격은 2004년 7월 정권 이양 전에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이 성공하기 직전이어서” 또는 “저항 세력이 민주주의를 두려워해서”도 아니다. 새로 들어설 정권이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기 때문이다.

꼭두각시 정권은 이라크 사람들 간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키려 할 것이다. 이라크의 국부인 석유를 미국에 넘기고 각종 국유 기업들을 헐값에 매각할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꼭두각시 정권은 미군의 장기 점령을 승인할 것이다. 이라크 사람들이 겪는 삶의 고통은 지속할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총을 잡는 데 이 정도의 이유면 충분하다.

김용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