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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수십 년의 변화를 겪은 한 해

2003년, 수십 년의 변화를 겪은 한 해

노무현에 대한 환멸과 분노

지난해는 노무현에 대한 기대가 환멸과 좌절과 분노로 바뀐 해였다. 몇 년을 압축해 놓은 듯한 일들이 일어났다. 그만큼 정치 시계가 빨리 돌아갔다.

노무현 정부는 중요한 문제들에서 지지자들을 배신해 비교적 빨리 자신의 본질을 드러냈다.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전쟁은 막 출범한 노무현 정부를 첫 시험대에 올려 놓았다.

사람들은 노무현이 미국의 영향력과 전쟁을 거부하기를 내심 바랐다. 그러나 노무현은 전쟁광 부시의 충실한 부관 노릇을 자임했다. 이 때문에 노무현은 지지자들과 날카로운 충돌을 빚었다.

해방 이후 처음 등장한 대중적 반전 운동은 노무현에게 불운이었다. 미국의 전쟁을 지지한 세계 각국 정부들이 모두 거대한 반대에 직면해 위기에 빠졌듯이, 노무현 정부도 그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시장 정책

지난해 12월에 노무현은 수렁에 빠진 미국의 이라크 점령을 구원하기 위해 이라크 추가 파병을 결정했다. 이것은 노무현에게 결코 깨어날 수 없는 지독한 악몽이 될 것이다.

노무현을 위기에 빠뜨린 것은 전쟁만이 아니었다.

도시 10가구 중 1가구가 절대 빈곤층이다. 신용 불량자는 경제 활동 인구 7명 중 1명꼴인 359만 명으로 불어났다. 청년 실업률은 8퍼센트를 넘어섰다. 가난과 절망 때문에 하루 평균 36명이 자살했다.

그런데도 노무현은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시장 정책을 추진했다.

그리고 대기업 노조가 “특혜”를 받고 있다고 비난했다. 대기업은 민주노총을, “특혜”는 저항 능력을 뜻했다.

실제로 노동자들은 새 정부하에서 저항했다. 노무현에 대한 기대감과 반전 운동이 노동자 투쟁을 고무했다.

5월에 화물연대 노동자들이 통쾌한 특급 승리를 거뒀다. 화물연대 노동자들은 강하고 빠르게 치고 나가 새 정부의 허를 찔렀다.

6월 말에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하자 노무현 정부는 경찰력을 투입했다. 철도 파업은 노조 지도부의 배신적 투항 때문에 패배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노무현 정부가 이전 정부와 하등 다를 바 없는 반노동자 정부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각인시켰다.

그리하여 네이스를 놓고 정부와 충돌했던 전교조는 7월에 “참여정부 지지 철회”를 선언했다.

하반기에는 노무현 정부의 배신에 대한 좌절과 항의가 잇따랐다. 10월에 노동자들의 연이은 자살은 노무현의 배신에 대한 좌절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분노도 존재했다. 민주노총은 11월에 두 번에 걸쳐 하루 파업을 벌였다. 새 정부와 노동자의 ‘밀월’은 채 형성되기 전에 깨졌다.

민주노총의 노동 탄압 항의 투쟁은 새로운 부문의 투쟁을 자극했다. 이주 노동자들이 거리에 나섰다. 노무현 정부의 이주 노동자 공격은 역대 어느 정부보다 전면적이었다. 노무현은 12만 명이 넘는 이주 노동자들을 강제 추방하려 했다.

자극

이주 노동자 투쟁은 또한 반전 운동으로부터 고무받은 것이기도 했다. 2·15와 9·27 국제 반전 시위에 적극 참가했던 이주 노동자들이 강제 추방 항의 운동을 주도했다.

한국에서는 아직 유럽 같은 규모의 반자본주의 운동은 없다. 그러나, 부안 핵 폐기장 반대 운동은 반자본주의 운동과 매우 유사한 특징을 갖고 있다. 이 투쟁은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의 산물인 핵 발전소의 위험에 대한 대중적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농민들의 한-칠레 자유무역협정과 세계무역기구(WTO) 반대 투쟁도 넓게 보면 반자본주의 운동의 일부였다.

무엇보다, 반자본주의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존재한다. 노엄 촘스키 등 자본주의의 폐해를 고발하는 반자본주의 선전가들의 책이 많이 팔리고 있다. 이것은 학생과 노동자의 정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반자본주의 운동의 거대한 결집인 1월 인도 세계사회포럼에 역대 한국 참가단 규모 중 최대 규모인 3백 명이 넘게 참가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2004년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 아무리 우파적일지라도 그의 지지 기반이 우리 운동의 일부라는 사실 때문에 커다란 모순이 생겨나고 있다. 개량주의 정부와 노동계급 지지자들 사이의 격렬한 모순은 현대 정치 무대에서 핵심 요소다.

노무현 정권의 실패는 노무현의 왼쪽 기반을 급진 좌파에게 열어 놓을 가능성이 크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가 빚어낸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노동자와 전투적 청년 들이 대안을 위해 저항하고 투쟁하도록 힘과 자신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 새로운 투쟁과 운동을 성장시켜야 한다.

1995년 12월 프랑스 공공부문 파업은 프랑스에서 ‘좌파의 좌파’가 성장할 수 있는 디딤돌이었다. 시애틀, 제노바, 아르헨티나는 국제 전선 수준에서 이런 구실을 했다.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 반전 운동은 이것을 한 단계 위로 끌어올렸다.

2004년을 반전 운동과 반자본주의 운동 속에서 노무현 정부에 대한 좌파적 대안을 건설하는 해로 만들자.

김인식

미 제국주의를 뒤흔든 저항

2003년에는 전쟁과 그것에 맞선 저항이 전 세계 정치를 결정했다.

작년에 우리는 미국과 “의지의 동맹”의 잔혹함을 봤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이들에 반대하는 또 다른 슈퍼 파워인 반전운동의 탄생을 봤다.

석유와 미군의 권력을 위한 전쟁에서 수천 명의 이라크 사람들이 도살됐다. 이라크 전쟁은 세계 인구 대다수의 소망을 거스른 전쟁이었고 거짓말에 근거해 시작됐다.

피에 굶주리고, 거짓말쟁이며 위선자인 우리 지배자들의 진정한 모습이 이처럼 노골적으로 드러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지배자들에 반대하는 그처럼 거대한 운동이 일어나서 지배자들을 위협한 적도 없었다.

부시와 블레어는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작심한 채 2003년을 시작했다.

전쟁 직전에 미 국무장관인 콜린 파월은 블레어가 내놓은 문서를 근거로 이라크가 우라늄을 얻기 위해 시도했다고 “증명”했다. 아무도 미 중앙정보국이 이 주장이 잘못됐다고 여겼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블레어는 “서투른 문서”로 알려진 문서를 서둘러서 내놓았다. 사실 이 문서는 한 학생의 오래된 박사 학위 논문을 짜깁기한 것이었다.

부시와 블레어는 이러한 거짓 증거에 기초해서 3월 20일에 대학살을 시작했다.

이어진 미군 점령의 현실과 이라크 사람들의 저항 증가는 반전 운동의 주장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미군 병사 사상자의 증가는 베트남 전쟁을 환기시켰다. 12월 초에 이르러 5백6명의 미국과 영국의 병사들이 사망했다.

부시와 블레어가 북한과 이란을 반복해서 위협했지만 반전운동은 이들이 다른 곳에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막았다. 반전운동은 계속 성장했다. 반전운동은 노동조합과 반자본주의운동 대열에 영향을 미쳤다.

2003년 말에 부시와 블레어의 권력은 1년 전에 비했을 때 현저하게 약해졌다. 이것은 반전 저항 때문이었다. 블레어는 총리자리를 지켰다. 그는 커다란 타격을 입었지만 여전히 공공 서비스, 임금과 노동조건, 난민과 시민권을 노린 잔혹한 정책을 지속했다.

미국에서는 힐러리 클린턴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민주당 의원들이 부시의 전쟁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라크 전쟁이 점점 인기가 없어지자,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맘을 바꿔 먹었다. 그러나 그들 중 상당수는 사담 후세인의 체포 이후 부시 진영으로 황급히 돌아갔다.

〈워싱턴 포스트〉 는 9월에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부시가 거둔 가장 커다란 업적들은 모두, 그를 몰아내기를 원하는 의원을 포함해서 많은 민주당 의원들의 지지를 얻었다.”

2003년에는 모든 지구상의 대륙에 걸쳐 저항이 일어났다. 우리는 거대한 반전 시위대의 정열적인 에너지를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라크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과 눈물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반자본주의

반자본주의 운동은 여전히 확산하고 있다.

반자본주의 운동은 일부가 예상했듯이 이라크 전쟁 때문에 혼란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대다수의 반자본주의 활동가들은 반전운동 대열의 일부가 됐다.

거꾸로 반전운동은 다시 반자본주의 운동을 강화시켰다.

1월에는 8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인도의 하이더라바드에서 열린 아시아 사회포럼에 참가했고, 수만 명이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 모여들었다. 이러한 행사들은 자본주의적 지구화에 대한 반대가 단지 부자 나라 출신의 소수 젊은 활동가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6월에는 10만 명의 사람들이 에비앙에서 열린 G8 회담에 반대하기 위해 집결했다. 그리고 8월에는 20만 명이 프랑스의 라르작에서 열린 반자본주의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모였다.

오늘날의 반자본주의 운동은 1999년 WTO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시애틀에 모여들면서 세계 무대에 등장했다.

2003년에 시위대들은 멕시코 칸쿤에서 다시 한번 WTO에 본때를 보여 줬다. 회의장 바깥의 시위대들은 초호화판 회의장 내부의 분열을 겪화시켰고, 그 덕분에 세계 무역 회담이 결렬됐다. 사유화, 탈규제를 포함한 친다국적 기업 정책들의 적용이 좌절됐고, 이것은 전 세계 모든 가난한 사람들의 승리였다.

11월에 파리에서 열린 5만 명 이상이 참여한 유럽사회포럼은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고,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이고 투쟁적이었다.

거대한 항의

볼리비아에서는 천연가스 자원을 미국에 판매하려는 시도에 맞선 대중 운동이 일어나 대통령이 마이애미로 달아나야 했다. 거대한 혁명적 봉기가 그를 물러나게 만든 것이다.

브라질에서는 연초에 룰라가 집권했다. 브라질과 전 세계의 수백만 민중은 그가 급진적 변화를 선물할 것으로 희망했다. 그가 약간의 개혁 조치를 취하기는 했다. 그러나 집권한 지 6개월도 채 안 돼 룰라는 가난한 사람들을 공격하는 정책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부자들에게는 세금을 감면해 주었고, 연금 개악에 반대표를 던진 좌익 국회의원들을 축출하려 했다.

룰라의 정책은 거대한 항의의 물결을 불러일으켰다. 7월과 8월에 파업과 시위가 벌어졌다.

베네수엘라에서는 노동자와 빈민이 가두로 몰려나왔고, 2월에는 작업장 활동을 조직해 사장들의 직장 폐쇄를 분쇄했다. 사장들의 직장 폐쇄는 차베스 대통령의 축출을 노린 것이었다. 아래로부터 조직된 행동이 우익을 격퇴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또한 그런 행동 덕분에 차베스의 정책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요구들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