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의 신화에 대한 도전
〈노동자 연대〉 구독
모든 나라의 지배계급은 노동자들을 자신들의 지배에 묶어 두고 어떻게 사회를 조직할 수 있는지에 관한 대안적 사상의 확산을 막기 위해, 비록 선택하는 방법은 유연할지라도 단호하게 행동하고 있다. 냉전에서 승리한 서방 지배자들은 자유에 관한 말은 줄이고
“세계화 담론” 대부분은 자본주의의 변모하고 있는 외관 뒤에 있는 착취와 축적이라는 본질의 연속성을 신비화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20년 동안 세계 경제는 실제로 좌파가 무시해 온 새로운 일들을 겪었다. 세계의 즉각적인 현상의 형태는 그 본질만큼이나 실제적이고 객관적이라는 레닌의 주장은 여전히 타당하지만, 그럼에도 더욱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현상과 본질 간의 관계에 대한 변증법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좌파는, 변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변한 것을 인식하고 그에 대처해야 한다.
1998년 여름에 열린 월드컵 결승전은 노동자와 대기업과 국가 간의 관계가 변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 주었다. 많은 봉급을 받지만 유연 노동자인 호나우두는 경련을 일으켰지만 네 시간 뒤에 나이키의 압력으로 의심되는 모종의 압력을 받고 경기에 출전했다. 브라질의 다국적 기업 스폰서인 나이키는 1억 2천5백만 달러의 후원금을 낸 덕분에 브라질 팀이 어디서 경기를 하고 누가 출전할지 결정한다. 1970년 월드컵 결승전에 출전했던 토스타우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활약하던 시절에는 브라질을 통치하던 군 장성들이 팀을 선발하려 했다. … 지금은 스폰서, 기업인, 언론계 거물이 그 일을 한다.”2 이것은 변화지만, 우리는 피상적이고 일면적인 결론을 끌어 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여전히 숙련 노동에 의존하고 있고 결정적으로는 국제 경쟁 체제에 편입돼 있는 국민
킴 무디는 《신자유주의와 세계의 노동자》에서 국제 경제에 내재한 연속성과 변화의 변증법을 미묘한 뉘앙스로 설명했다. 그의 목적은 학자적인 말장난을 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며, 자본주의 구조조정의 제물이 된 사람들의 처지를 탄식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그의 목적은 노동자의 저항을 강조하는 데에, 세력 저울이 노동자 계급에게 유리하게 변할 가능성을 강조하는 데에 있다.3 그는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와 실업자, 도시 주민과 농촌 주민, 여성과 남성, 흑인과 백인, 북반구인과 남반구인을 막론하고 계급 전체의 선두에 서는 전투적인 노동조합운동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그가 “사회운동 노조주의”라고 부르는 것의 임무는 즉자적 계급이 국제적 차원에서 대자적 계급으로 자각하도록 하는 데 있다. 그가 계급 본능에 충실하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나는 국제적 생디칼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무디의 입장이 결국은 그가 원하는 종류의 변화를 위해 필요한 실현 가능한 계획을 제공할 수 없다는 점을 논증하고자 한다.
‘세계화’
《신자유주의와 세계의 노동자》 전반부는 ‘자본의 공격’
다양한 모순의 산물인 자본주의적 국가는 그러한 모순을 완화하기 위해 영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흔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모순들이 주로 국민 국가 내부에서 작용한다고 봐 왔다. 따라서, 재산법 체계 제공, 교육과 훈련, 사회 기반 시설, 은행 감독, 사회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들, 자본간 내분 중재 등등은 “현대 자본주의 국가의 감축 불가능한 핵심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기능들이 현대 자본주의 체제가 사라질 수 없는 이유를 구성하고 있다.”
4장과 5장에서 무디는 린 생산
나는 ‘세계화’에 관한 무디의 분석이 지닌 요점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카데믹 초세계화 이론가들은 어디든 갈 수 있는 자본의 속성이라는 문제에서 명백히 틀렸으며, 무디는 옳게도 ‘세계화’보다는 국제화나 심지어 ‘삼극화
국제 경제 속의 노동조합
이 책의 후반부에서 무디는 국제화와 구조조정에 대한 “노동의 대응”을 모색하고 있다. 무디는 포스트모던주의자들과 이와 구색이 맞는 ‘계급의 종말’ 이론가들에 맞서 계급 정치에 대한 비타협적인 충성을 보이고 있다. “노동 계급이 작업장의 급변에 따라 다양해지고 변화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학계나 다양한 미래학자들은 노동 계급을 끝난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침입하는 위기를 떠넘겨 받았을 뿐, 그러한 사치를 누려 본 적이 없다.”
그는 자본이 사물이 아니라 죽은 노동과 산 노동 사이의 사회 관계이기 때문에 자본의 지배는 완전할 수 없다는 마르크스주의적 견해에서 출발한다. 분명히 자본과 자본주의적 국가는 노동 계급에게 패배를 안길 수 있으며, 자본주의의 구조조정은 노동자들의 삶을 황폐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그러나 산 노동은 자본의 필요와 충돌하는 의식, 전통, 기억, 감정, 열망을 가지고 있고, 노동 계급은 이를 통해 조직을 발전시킴으로써 기꺼이 싸울 수 있다. 헨리 포드가 자신은 손 두 개만 필요할 뿐인데 한 사람 전체를 고용해야 한다며 탄식했던 것도 당연하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구축돼 온 국제적 생산 연쇄
무디의 설명에는 다른 장점도 있다. 그는 전통적 노조 관료들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노동 운동의 보수적 상층을 구성하며, 사회 변혁이 아닌 협상이 그들의 존재 이유다. 그들은 구조조정이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피하기 위해 실리적 조합주의, 양보 교섭, 유연 생산과 적시 생산 방식에 대한 순응의 길을 따라 왔으며, ‘자기’ 국민 국가에 소재한 자본과 ‘사회적 협력’을 추구해 왔다. 1973년 이후 위기라는 맥락에서 이 전략은 재앙적이었다. 비용 삭감을 위해 노조를 무시하려고 한 선진국 지배 계급들에게 코포라티즘
그러나 ‘세계화’와 세계 노동 계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