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은 아랍 혁명 1주년이 되는 달이다. 1년 전, 튀니지에서 독재자 벤 알리가 쫓겨나고, 이집트에서 혁명이 시작됐다. 아랍 혁명은 세계경제 위기를 배경으로 아랍 민중이 제국주의와 부패한 독재자들의 아랍 지배 체제를 타격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아랍 혁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혁명 1주년을 맞아 혁명의 전개 과정과 의의를 돌아 보며 교훈을 찾는다.


2010년 12월 18일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혁명을 알리는 봉화가 피어올랐다. 혁명의 봉화는 곧 이웃 나라들로 이어졌다. 2011년 1월에는 알제리, 레바논, 요르단, 오만,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에서, 2월에는 예멘, 바레인, 리비아, 쿠웨이트, 모로코에서, 3월에는 시리아에서 대중 시위와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의 초기 속도는 그야말로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튀니지에서는 20여 일 만에, 이집트에서는 18일 만에 독재자를 끌어내렸다.  

행진하는 튀니지 노동자들  아랍 혁명에서 노동계급의 등장은 혁명 1막의 승리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아랍 혁명은 단박에 전 세계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특히 사회 변혁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아랍 혁명은 책에서나 보던 혁명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여 줬다. 사람들은 하루하루 달라지는 상황을 지켜보느라 밤잠을 설쳤고, 낮에는 혁명을 지지하고 연대를 보내는 행동을 조직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아랍 혁명의 불씨를 댕긴 것은 무함마드 부아지지라는 한 청년의 죽음이었다. 부아지지는 노점을 하지 못하게 괴롭힌 경찰에 분노해 분신했다. 그의 죽음은 비슷한 처지에 있던 튀니지 민중이 켜켜이 쌓인 울분을 터뜨리게 한 계기가 됐다.

시위는 시디 부지드에서 시작됐다. 독재자 벤 알리는 부아지지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며 유가족을 지원하겠다고 양보 제스처를 보였지만, 시위에는 폭력으로 대응했다. 튀니지 혁명 과정에서 2백 명이 넘게 사망했다.  

그러나 양보 제스처도, 탄압도 통하지 않았다. 시위 물결은 전국으로 확산됐고, 1월 12일 수도 튀니스에 당도했다. 시위대는 “민중은 정권의 몰락을 원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전통적으로 벤 알리를 지지하던 튀니지 노동연맹(UGTT)도 혁명의 편으로 돌아섰다. 1월 14일 벤 알리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도망쳤다. 23년 독재자가 쫓겨나는 것을 보며 아랍 민중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어떤 힘이 있는지를 깨달았다.

광장 점거

그 다음은 이집트였다. 이집트 혁명은 지금까지 일어난 아랍 혁명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혁명이다. 아랍 세계 “모든 계급의 종주국”이라고 불리는 이집트는 언제나 아랍 세계의 경제적·정치적 중심지였고 이 지역에서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이다.

1월 25일 카이로의 이곳저곳에서 출발한 시위대는 경찰의 봉쇄를 뚫고 타흐리르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이후 전 세계적으로 하나의 시위 모델이 된 타흐리르 광장 점거의 시작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3년 3월 20일 이집트 민중 4만 명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해 타흐리르 광장을 하루 동안 점거했다. 이 경험은 2011년 혁명의 예행 연습이었다.

1월 25일 이후 18일 동안 광장을 탈환하려는 편과 광장을 사수하려는 편 사이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무바라크 정권은 경찰과 깡패들을 동원해 시위대를 해산하려 했다. 

이집트 민중은 맨몸으로 중무장한 경찰과 깡패들에게 맞섰다. 이집트 민중은 “승리 아니면 죽음”을 각오했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워하던 시위대는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점점 더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지난 10여 년간 팔레스타인 인티파다 지지 운동, 반전 운동, 민주화 운동, 노동자 운동을 조직하며 경험을 쌓아 온 활동가들의 구실이 컸다. 

2011년 5월 행진하고 있는 이집트 마할라 노동자들

타흐리르 광장에 군대가 배치됐지만 군 수뇌부는 진압을 명령하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군대가 분열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집트 군의 사병과 하급 장교들은 징집병인데, 이들은 혁명 세력과 큰 동질감을 느꼈다. TV 인터뷰 등에 나와 공개적으로 혁명을 지지하는 군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승리 아니면 죽음을”

드디어 이집트 노동계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2월 8일 수에즈 운하 노동자 1천 명이 파업에 돌입했고 섬유·철강 노동자들이 가세했다. 2월 10일에는 북부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남부의 아스완까지 노동자 파업이 확산됐다.

마침내 이집트 군부와 지배계급은 무바라크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체제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었다. 2월 11일 30년 독재자 무바라크는 권좌에서 밀려났고, 최고군사위원회가 그 자리를 대체했다.

2월 15일에는 튀니지와 이집트 사이에 있는 리비아에서 혁명이 시작됐다.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는 튀니지와 이집트의 독재자들보다 더 완강했다. 카다피는 군대의 일부도 아들들을 통해 직접 통제하고 야당 세력을 일절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정권에 맞선 혁명은 훨씬 더 원초적인 모습을 보였다.

혁명이 시작된 지 닷새 만에 저항 세력은 2대 도시 벵가지를 장악했다. 군대가 분열해 이 과정을 도왔다. 반란의 물결은 수도 트리폴리까지 닿았다. 전국 곳곳에서 혁명위원회들이 건설돼 치안과 식량 배급과 복지 등을 책임졌다. 혁명위원회들은 전국적 네트워크인 전국위원회를 결성했다.

카다피는 운동을 탄압하는 데 전투기, 군함, 탱크까지 동원했다. 정권의 막강한 화력에 2월 27일 트리폴리 항쟁이 결국 진압되고 카다피의 강력한 탄압에 대응하면서 항쟁은 무장봉기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리비아 혁명은 튀니지·이집트와 다른 길을 가게 됐다.

튀니지·이집트 혁명에 뒤통수를 맞은 서방은 혁명의 편인 척하며 리비아 혁명에 개입했다. 3월 19일 미국을 필두로 한 나토는 폭격을 시작했다. 이는 “학살”을 방지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서방 제국주의는 이 지역에서 패권을 재확인하고자 할 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과도국가위원회(NTC) 내부에서 친서방적인 카다피 정권 이탈파의 입지가 강화됐다.

그 뒤 여섯 달 동안 전투가 이어졌다. 이윽고 8월 말 카다피가 장악하던 지역에서 반란이 다시 일어났고 저항세력이 트리폴리로 진격했다. 두 달을 도망 다니던 42년 독재자 카다피는 10월 20일 저항 세력에게 잡혀 목숨을 잃었고, 10월 23일 공식 해방이 선언됐다.

독재자들이 쫓겨난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외에도 많은 나라에서 대중 시위가 일어났고 정권을 뒤흔들었다. 

예를 들어, 홍해와 아덴만 입구에 있고 인도양과 수에즈 운하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에 있는 친서방 국가 예멘의 대통령 살레는 대중의 압력에 밀려 몇 달 동안 사우디아리비아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살레는 다시 예멘으로 돌아와 운동을 강하게 탄압했지만, 결국 11월에 권력이양안에 서명했다.

대략 3월 이후 주류 언론에서 아랍 혁명 소식은 뜸해졌다. 그러나 아랍 혁명은 멈추지 않았다. 

모로코에서는 7월까지 시위가 격렬했고 쿠웨이트에서는 11월 28일 내각이 총사퇴했다. 요르단, 예멘, 바레인, 시리아에서는 지금도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집트에서 혁명이 심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집트 민중은 수십 년 동안 고문과 불법 감금·살인을 저지른 국가안보국을 해체시켰다. 이집트 노동자들은 독립노조를 결성하고 경제적·정치적 요구를 내걸고 파업을 벌였다. 

무바라크 몰락 이후 파업 건수와 파업 참가 노동자 수가 2006~2009년 파업 때보다 훨씬 더 많다. 최근에는 반혁명적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 군부에 맞선 저항이 본격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