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점거하라’ 운동이 우리에게 큰 영감을 준 상황에서 미국 민중 저항의 역사와 교훈을 돌아본다. 지난 호에 이어서 이번 호에서는 1960년대 미국 민중 투쟁의 경험을 살펴본다.


1968년을 전후해 여러 나라에서 커다란 운동이 벌어졌고 그 운동은 프랑스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운동이 가장 먼저 출발하고 성공을 거둔 곳은 미국이었다. 

첫 출발은 흑인 민권 운동이 끊었다. 미국 남부의 제도화된 인종차별주의에 맞선 투쟁 과정에서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가 탄생했다. 

1960년 미국 남부의 ‘백인 전용’ 식당에 흑인 대학생 네 명이 들어와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물론 그들은 거부당했다. 그들은 매일 식당을 찾았고, 나중에는 지지자들을 결집해 그 식당에 눌러앉아 버렸다. 결국 식당 주인이 굴복했다.

그들 스스로 ‘연좌 농성’이라고 불렀던 이 전술은 유행이 됐다. 그들은 흑인을 차별하는 버스와 터미널과 같은 공공시설에서 연좌 농성을 벌였다. 극악 무도한 백인들의 린치가 뒤따랐고,  조직적인 경찰 폭력도 있었지만 그들은 승리를 거뒀다. 

흑인 민권 운동은 계속 성장했고 급기야 1960년대 초에는 미국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회 운동이 됐다. 

마틴 루터 킹의 ‘나에게는 꿈이 있다’는 유명한 연설로 기억된 1963년의 워싱턴 행진에는 30만 명 이상이 참가했다.

1968년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었던 톰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는 미국 국기가 올라갈 때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치켜올렸다. 그것은 ‘블랙 파워’식 경례였고, 승리하고 있던 반인종주의 운동의 자신감을 두고두고 상징하게 됐다.

급진화의 물결은 젊은 층의 문화와 대중음악에도 영향을 미쳤고, 역으로 히피 문화와 저항 락 음악의 성장도 저항 확대에 기여했다.

흑인 운동의 성장은 백인들이 주를 이루던 대학에서 촉매 구실을 했다. 

초기부터 가장 열렬히 SNCC를 지지했던 민주사회를위한학생들(SDS)이 성장했다.

매카시즘을 겪고 위축돼 있던 미국의 기성 좌파들에 견줘 SDS는 대담함과 행동에 대한 열정이 두드러졌다. 

SDS 회원이었던 제레미 브레처는 이렇게 회상한다. “SDS는 히피적이고 대담하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겁에 질린 토끼 같은 심성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버클리대학에서 중요한 전투가 벌어졌다.

정치 그룹의 선전과 가판 테이블을 불허했던 대학 당국에 맞선 투쟁에서 버클리 좌파들은 흑인 민권 운동의 선례를 본따 연좌 농성을 벌였고 작은 승리를 거뒀다. 

그 후 자유언론운동(FSM)이라고 불린 운동이 등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표현의 자유를 가로막는 권위주의와 싸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들은 학내 집회를 마친 뒤 점거에 들어갔다. 저항을 노래했던 여성 포크 싱어 송 라이터 존 바에즈가 연대 공연을 왔고, 그녀의 노래에 맞춰 학생들이 대학 본부로 행진했다. 점거운동을 책임진 운영위원회가 대량으로 식사를 준비하고 대안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학생들은 결국 난입한 경찰들에 의해 끌려나갔고 다수가 체포됐다. 대학 당국과 경찰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곧 역풍이 일어났고 더 많은 학생들이 참여해 수업 거부 운동을 이어 나갔다. 결국 대학 내 정치활동을 금지했던 버클리대학 총장은 해임됐다.

이어서 반전 운동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베트남전

민주당의 존슨 정부가 베트남 전쟁을 전면전으로 확대했다. 전투부대가 베트남에 입성했다. 수십만 명 파병으로도 모자라 미국은 징병을 확대했다. 

이제 운동은 인종주의, 언론의 자유라는 쟁점에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또 하나의 급진적 쟁점을 끌어들였다. 미국 제국주의는 끈질긴 베트남 전사뿐 아니라 각성한 대중과도 마주해야 했다.

급진화한 청년들은 베트남에 네이팜 탄을 퍼붓는 야만적 공격을 보아 넘길 수 없었다. 이제 점거 농성은 대학에서 흔히 보는 풍경이 돼 버렸다.

SDS 회원 수는 1만 명을 넘어섰고, 이제 주요 대학을 넘어서 소규모 공립·사립대로 확대됐다. 

동시에 SDS는 좀더 직접행동주의로 나아갔다. 징병의 두려움이 기름 구실을 했다. 베트남 징집 거부 운동에 50만 명이 참가했다. 

하지만 운동의 성장과 함께 약점도 드러났다. 노동계급의 참여가 너무 미약했다는 것이다. 미국 자본주의가 여전히 호황인 것도 영향을 미쳤지만, 그보다는 미국 산업별조합회의(AFL-CIO) 지도부가 취한 보수적 태도, 미국 좌파의 공백이 어려움을 가져왔다.

미국 지배계급의 대처도 갈수록 사활적으로 변해 갔다.

인종차별과 대학의 언론 통제는 미국 민주당이 인기를 얻을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미국 지배계급도 그 문제에서는 일부 양보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위는 민주당조차 사활을 걸 만한 쟁점이었다.

모호한 반전 메시지로 인기를 얻으며 선두를 달리던 케네디의 암살은 선거라는 해결책이 확실치 않다고 느낀 미국 우파의 히스테릭한 분위기의 반영이었다. 또한 이것은 위험한 반전 줄타기를 거부했던 미국 민주당 주류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이것은 미국의 저항 운동가들에게 선거적 해결책이 끝났음을 상징했다. 

SDS의 의장이었던 칼 오글즈비는 이렇게 말했다. “마틴 루터 킹이 4월에 죽었고, 바로 몇 달 뒤에 케네디가 죽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합니까?”

경찰의 폭력이 이어졌다. 민주당 소속 주지사와 시장들도 경찰을 부추겼다.

올바른 과제와 방향의 필요성

미국의 운동 지도자들은 이제 진정한 시험대에 올랐고 올바른 과제와 방향을 제시해야 했다.

사람들은 급진화 방향으로 나아갔고 SDS의 주요 지도자들은 이제 혁명적 길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흑인 운동 안에서도 급진파들의 분화가 일어나면서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흑표범당(블랙 팬더)이 창당됐다.

그러나 그 급진화는 너무 모호한 강령과 전략만을 갖추고 있었고, 투쟁 그 자체만을 강조하는 약점을 보였다.

운동의 대응 방향을 놓고 무성한 주장들이 난무하는 동안 지도부는 분명한 전략과 전술을 내놓을 수 없었다. 

원칙, 전략, 전술이라는 것이 단지 투쟁 속에서 아래로부터 자동적으로 탄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것은 원칙이 확립된, 응집력과 경험을 갖춘 활동가 조직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미국에서는 공산당이 그런 구실을 했다. 하지만 공산당은 자진 해산해 버린 뒤였다.

미국의 새로운 투쟁 조직과 리더들은 그 공백을 메우기에는 너무 빈약했다.

하지만 이 시대 미국의 운동은 현대 사회의 대규모 반 인종차별 운동, 반 권위주의 운동, 반전운동의 교과서로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금 미국의 ‘점거하라’ 운동으로 끈질기게 이어져 다시 저항의 꽃을 피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