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다함께 회원 오정숙 씨가 보내 온 고(故) 조성민 동지의 추모사다.


하얀 국화꽃에 둘러싸인 사진 속 그의 얼굴이, 근조라는 글자 뒤에 박힌 그의 이름 석자가 나는 낯설다. 십 수 년을 알고 지내 온 이름과 얼굴이 이다지도 낯설 수 있을까.

성민이 형을 처음 본 건, 내가 대학교 1학년이던 1995년 12월 31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12월 31일은 당시 대학생들이 ‘보신각 투쟁’이라고 이름 지은, 타종 행사 때 시민들에게 ‘P[리플릿]를 뿌리며’ 시위하던 날이었다.

그리고 나는 성민이 형이 2011년에도 변함없이,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신각 앞 시위로 마무리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리고 … 생을 마감했다는 말도 듣고 말았다.

학창 시절에 성민이 형은 후배 활동가들에게 자상한 선배였다. 그래서 내가 다니던 학교 활동가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았다.

1996년 여름, 학생 정치조직인 전국학생정치연합(전학련)은 일주일간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국가보안법 철폐 투쟁을 한 적이 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학교 운동장이나 강의실, 이동하는 차 속에서 대충 눈 붙이고, 낮에는 뙤약볕 아래에서 글자 그대로 뛰어다니며 시위를 벌이는 강행군이었다. 게다가 나는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부족한 상태에서 문예단장이라는 버거운 일을 맡게 됐는데, 성민이 형은 어린 활동가가 지치지 않도록 바쁜 와중에도 늘 따뜻하게 격려하고 기운을 북돋워 줬다.

그러나 성민이 형은 원칙에 있어서는 단호했다. 1996년 국가 탄압으로 전학련 핵심 활동가들이 구속되자, 전학련은 비대위를 꾸리고 중앙 활동가들은 가명을 사용했다. 나는 비대위 활동을 하던 학교 선배를 만날 일이 있어 사무실에 갔다가 부주의하게도 학교 선배를 두 번이나 본명으로 불렀다. 처음에 조심하라고 주의를 받았는데 두 번째 똑같은 실수를 하자 성민이 형이 따끔하게 혼냈던 기억이 난다. 사실 뭐라고 말을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고, 말을 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지만, 단호했던 표정은 기억난다. 자상한 얼굴의 소유자가 그렇게 ‘무서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1997년에 성민이 형이 구속됐을 때 법정에서 그가 “나는 사회주의자다”라고 한 말이 전학련 활동가들 사이에서 논쟁이 됐다(물론 이 말만 한 것은 아니고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고 이 체제에 맞선 투쟁을 계속할 것이란 최후 변론을 했다).

한쪽에선 ‘후까시’를 잡는 것도 아니고 굳이 불필요한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고 투덜거렸다. 형량을 더 높일 수도 있다는 논리였다. 다른 한쪽은 자신의 신념을 당당하게 말한 성민이 형의 태도가 옳다는 입장이었다. 형이 출소한 후 나는 이 얘기를 전해 주며 이유를 물었던 것 같다. 성민이 형은 당장에 실용주의적 태도로 감옥에서 일찍 나올 수도 있겠지만(아니 그다지 형량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도 같다), 어쨌든 그것은 곧 자신의 신념을 감추거나 부인하는 꼴이 되는 셈이고 부메랑이 돼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법정에서 실용주의적 태도가 이후 자신의 활동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얘기였다.

아마 한참 후였겠지만, 서준식 대표와 신영복 교수의 준법서약제 지상 논쟁에 대해 성민이 형이 열변을 토했던 기억도 난다. “악법 철폐를 주장하면서 악법을 꼬박꼬박 지키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설령 그것이 단순히 백지에다 돼지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석방을 위한 조건으로서 요구되는 한 그것은 어차피 ‘항복 문서’인 것이다”. 성민이 형은 서준식 대표의 이 같은 말과 행동을 철저하게 옹호했고, 국가탄압 문제에서 단호했다.

성민이 형과 내가 사상적으로, 정치적으로 가까워진 계기는 성민이 형이 감옥에서 출소한 직후다.

1997년은 김영삼 정부가 학생운동 탄압에 열을 열리던 때였다. 한총련에 대한 마녀사냥은 극에 달했고, 한총련 말고도 당시 성민이 형이 몸담고 있던 전학련도 2년 연속 국가 탄압으로 고통받고 있던 해였다.

전학련 중앙기구에서 정책국장을 맡고 있던 성민이 형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됐고, 당시 나는 한총련 대의원이었다.

나는 부끄럽게도 한총련 탄압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했고, 한총련을 탈퇴했다. 그리고 감옥에 갇힌 성민이 형을 면회했다.

형은 “너는 괜찮니?”라고 에둘러 물었고, 나는 괜찮다고 대답했다.

며칠이 지나고 내게 장문의 편지가 도착했다. 형이 한총련 문제에 대해 글을 써 보낸 것이다. 그 이후로도 나는 아주 가끔씩 그 편지를 꺼내 보곤 하는데 성민이 형은 이렇게 적고 있다.

“한총련 이상으로 지배 계급은 위기를 맞고 있다. 신한국당의 위기는 단지 지배계급 내 한 분파의 위기가 아니라 남한 자본주의의 위기를 짊어진 것이다. 이는 97년[이] 끝나고 DJ로 정권이 교체된다 하더라도 DJ 및 국민회의가 떠맡아야 할 위기이다.

“그런데 이런 때에 점점 자신감을 잃고 위축되어가는 한총련 중견 간부들이 한총련의 위기를 더 부추기고 있다.

“도덕이나 여론은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것이다. 지배계급이 심각한 위기를 자초할 때 (올해 노동법 파동처럼) 학생운동은 또다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도덕이나 여론은 그때는 학생운동에게 우호적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과거에도 전경이나 프락치 치사 사건은 있었다. 85년 서울대 프락치 사건, 89년 동의대에서 전경이 불에 타 죽은 사건, 93년 김춘도 순경 사망 사건 등 …. 특히 93년 김춘도 순경 사건은 내가 겪었던 것으로 YS의 개혁드라이브가 정신 없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당시에도 여론과 선배들은 모두 “학생운동은 이제 끝났다”고 이구동성으로 떠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러한 난관 속에서도 학생운동을 살려낸 것은 94년 수입개방 저지 투쟁·전지협 투쟁, 95년 5·18 투쟁이었다. 소위 “합리적(=개량적)” 학생운동이 주류를 차지했더라면 지금의 학생운동은 이미 소멸했을 것이다. 여론에 신경 쓰는 운동이 학생운동을 살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맹세할 수 있다. 여론은 강자 편이다.”

이 편지를 읽고 나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가 한총련을 탈퇴한 건 잘못이 아닌가 하는 심각한 고민에 빠진 것이다.

형은 출소하자마자 내게 정기적으로 만나 토론하자고 제안했고, 나는 첫 토론을 한총련 문제로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토론하면서 나는 한총련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과 과제를 도출할 수 있었다. 즉, 위기에 빠진 김영삼 정부가 한총련 마녀사냥을 통해 사회분위기를 냉각시키고, 무엇보다도 노동부문에 대한 공격의 사전 공격으로써 한총련을 탄압한다는 사실, 따라서 사상과 정견을 떠나 한총련을 방어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성민이 형과의 토론이 재미있고, 정치적으로 이론적으로 많은 걸 얻었던 나는 미친듯이 책을 읽은 것 같다. 형이 추천해 주는 책들을 읽으면서 많이도 물어봤다. 모르는 건 책에다 형이 설명한 내용들을 메모했는데, 지금도 그때 그 책들을 펴 보면, 내게 정말 많은 걸 알려줬구나 싶다. 어떤 개념이나 주장에 대해 물으면 그것을 설명한 후, 그것을 반박하는 이론들을 소개하고, 그 반박 이론들이 어떤 점에서 왜 잘못됐는지를 알려주는 식으로 풍부하게 설명해 줬다. 하나를 물으면 열을 가르쳐 준 것이다. 어떤 기초적 질문이라도 쑥스러워하지 않고 질문할 수 있도록 나를 많이 고무했다.

출소하자마자 회사를 다니느라 시간이 별로 없었을 텐데 퇴근 후 내가 아르바이트 하는 곳까지 찾아와 토론할 정도로 형은 매우 열정적이었다.

그러나 회사 생활로 활동에 시간을 많이 투자할 수 없었던 성민이 형은 고뇌를 겪은 것 같다. 언젠가 내게 보낸 편지에서 “요즘 회사 일이 바빠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지만 빨리 내가 만날 사람들 만날 생각이다. 그래서 자주 만나고 토론해서 우리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할 생각이야. 그것은 마지막으로는 조직화로 연결되겠지. 만날 사람들이 수첩에 가득한데 도대체 연락할 여유가 없구나” 하고 썼다. 그러나 빡빡한 회사 생활은 결국 여유를 주지 않아 “조금 더 자유롭고(압박에서) 그런 직장을 구하고 싶긴 하다 … 학원 선생님은 어떨까? … 어쨌든 월요일에 출근하면 과장과 면담 좀 해야겠다” 하고 성민이 형은 결심했다.

형은 결심을 곧 실행에 옮겼다. 비교적 넉넉한 월급이 나오는 안정적 직장과 결별하고서 때로는 생활고로 힘든 시기를 겪기도 했지만, 활동에 투신한 것을 결코 후회하지는 않았다.

지난 몇 년간 개인적인 교류는 뜸했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한 가지가 있다.

성민이 형과의 인연이 나는 참으로 고맙다는 생각.

이론을 경시하는 운동주의에 물들어 있던 내게 과학적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진정한 사회주의 운동의 전통과 조직으로 끌어들인 성민이 형이 나는 참으로 고맙다.

〈레프트21〉에 연속으로 기고한 성민이 형의 기사를 읽으면서, 그리고 사람들이 들려준 성민이 형의 활약상을 들으면서, 사기저하로 힘든 내가 어떤 다짐을 했다는 걸, 그래서 마지막까지 한 없이 고맙다는 걸 형은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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