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민 동지의 친구인 박정훈 전 연구위원이 페이스북에 쓴 글을 옮겨 싣는다.


벗 하나가 비명횡사했다. 송구영신 FTA 반대 집회 갔다가 귀가길에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황망한 마음으로 장례식장을 찾았다.

저명한 ‘민주주의자’ 고(故) 김근태 씨가 문상객들을 맞고 있는 식장 아래 편에 그리 유명하지 않은 ‘사회주의자’ 고(故) 조성민이 누워 있었다.

그와 나는 반독재 민주화를 위해 싸우던 학생 운동의 마지막 세대에 속했다. 1991년 5월 이른바 ‘죽음의 정국’을 통과했고, 1996년 노동법 개악 저지 투쟁을 거친 세대였다. 그 시대는 한국의 성장 체제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다.

한편 모두가 놀라겠지만, 노동운동의 급성장으로 한국전쟁 이후 빈부간의 격차가 가장 좁혀지던 시대이기도 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1980년대의 낙관주의 시대의 산물이었고, 1987년 민주화 이후 성장 체제의 분배에서 자기 몫을 지속적으로 늘려오던 부모 세대의 ‘향토 장학금’에 의존해 대학 시절을 보낸 세대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는 이율 배반의 세대였다. 성장 혹은 분배 양 측면에서 1990년대 초중반의 시대는 가장 좋았던 시절이지만, 그 시대에 대학을 보냈던 세대는 가장 격렬한 방식으로 체제와 시대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상적 원칙’의 시대에 가장 충실했던 동료였고, 가짜 민주화(보수 야당을 위한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진짜 민주화(민중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세상이 변해 1997년 이후 비관주의가 지배하기 시작하고 참으로 많은 이들이 과격한 우선회로 자기를 정당화하던 때, 그는 20세기 사상 가운데서 여전히 혁명을 꿈꾸되 그 시대의 풍파 속에서도 살아 남았다고 믿은 ‘트로츠키’의 사상 속에 안착했다.

정치적 현실주의가 무원칙한 실용주의와 혼동되고, 정치적 유연성이 정당화할 수 없는 타협과 구분이 되지 않는 시절, 정치적 일관성이 세상의 변화에 둔감한 시대 착오로 조롱받는 시대에, 그는 일관되게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에 장애가 되는 모든 사고 방식과 전투를 벌여 왔다.

40평생 나와 그는 단 한 번도 같은 단체나 노선 혹은 가치관을 신봉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그가 꿋꿋하게 한 길을 걸어온 것에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이태 전엔가 라틴아메리카에서 귀국한 지 1년 가량 되었을 때, 그는 나를 자기 단체가 운영하는 포럼에 초청한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중남미 좌파의 방향 전환을 역설했고, 그는 그 방향 전환이 결국 변화의 크기를 제약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나는 컵에 물이 반이나 찼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반밖에 차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지금쯤 발인식은 끝났고 내 벗은 벽제장에서 한줌의 재가 되었을 것이다. 어젯밤 장례식장의 방명록에 나는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성민아, 그곳에서 편히 쉬거라. 그곳은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세상은 아닐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