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조성민 동지의 한양대학교 후배이자 방송작가인 조규민 씨가 보내 온 추도사다.


‘실감이 안 난다.’

어제부터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도는 말인 것 같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성민이형을 만났습니다.

비록 국화에 둘러싸인 사진 속 모습이었지만

그 시절 성민이형이 제게 주었던 그 단단했던 마음을 다시 한 번 전해 주고 있었습니다.

성민이 형을 처음 만난 건 2001년, 제가 한양대에 입학을 하고

진보적 활동에 막 눈을 뜨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선배는 하늘이라는 식이었던 학생회 활동가들에 비해

학내 토론회에서 열 살이 넘게 어린 새파란 후배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며

특유의 미소를 날리던 그 첫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성민이형은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다함께 한양대 모임에서 ‘성민이형은 다 알아’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으니까요.

한총련 활동가들과 접촉이 잦았던 저는 그들과의 논쟁이 수세에 몰리면

슬쩍 화장실을 가는 척하고 성민이형에게 전화를 걸곤 했습니다.

그럼 성민이형은 어느 주제건 명쾌하게 반박할 수 있는 논거들을 줄줄 읊어주곤 했습니다.

성민이형과 밤새 토론을 하고나면 그 지치지 않고 터져 나오는 혁명적 지식의 양에

난 평생을 공부해도 형만큼 커다란 사람이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을 하곤 했고,

그런 말에 성민이형은

‘아니야 규민아, 너도 될 수 있어. 대신 죽도록 해야지’ 라는 우쭐한 농담도 했습니다.

성민이형은 넉넉지 않은 사정 탓에 학교 내 다함께 사무실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여름엔 모기떼에 시달리고 겨울엔 난방도 잘 되지 않았지만

공대 화장실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기 시작했다며 배시시 웃던 형의 모습이

지금에 와서야 눈물이 납니다.

그런 생활 속에서도 형이 힘들어했던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

오히려 더 슬프게 기억됩니다.

그 사무실은 형의 집이기도 했고 밤이면 토론회장이 되었고 때로는 술집도 되었다가 노래방도 되곤 했습니다.

소주잔 기울이며 열띤 토론을 하다가 술이 얼큰히 오르면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민중가요를 많이 불렀지만 그래도 완벽히 안무까지 소화하며 부르던 엄정화의 포이즌이

조성민 레파토리의 백미였습니다.

그렇게 성민이형과 함께 하는 동안 어느 새 우리 후배들은 그와 같은 세상을 꿈꾸는

사회주의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제 실로 오랜만에 그 때의 우리들이 모였습니다.

‘사는 게 바빠서’ 라는 핑계가 너무나도 한스럽던 시간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성민이형처럼 살아왔다면,

그래서 항상 투쟁의 현장에서 만날 수 있었고 형과 끊임없이 토론도 하고 술 한 잔 기울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더 단단하게 성장해서 튼튼한 한양대 모임을 만들었다면 이렇게까지 미안하지 않았을 것 같았습니다.

어제 계속해서 저의 마음을 괴롭힌 것은 성민이형이 그토록 고마운 사람이었다는 걸 그동안 잊고 살았고, 이제는 그 고마움을 너무나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형이 너무 보고 싶습니다.

형의 목소리가 듣고 싶습니다.

‘모기가 많아 목이 아파, 파리가 많아 팔이 아파’ 하던 그 농담도 너무 그립습니다.

앞으로.

슬퍼만 하고, 후회만 하고 있지는 않겠습니다.

성민이형이 살아온 것처럼 살진 못하더라도 성민이형의 흉내 정도는 내고 살아야겠습니다.

성민이형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살아야겠습니다.

형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얘기를 해 준 것 같습니다.

이제껏 성민이형으로부터의 가르침 중 가장 큰 가르침을 받은 날인 듯합니다.

그 가르침에 노동계급의 진정한 해방으로 답하고 싶습니다.